KinoDAY2023-02-13 08:57:35
추하지만 아름다운 꿈, 영화를 사랑한 이유
<바빌론>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저택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벌어진다. 파티는 난잡하다. 그러나 매혹적이다. 영화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찍고 싶거나,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멕시코에서 막 LA에 입성한 '매니(디에고 칼바)'와 스타가 될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넬리(마고 로비)'도 다르지 않다. 우연히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촬영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그렇게 꿈을 이루고 스타가 되는 것도 잠시. 유성 영화가 등장하면서 세 주인공은 각자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꿈을 버리고 살아가거나, 꿈을 이룬 채 퇴장하거나.
<바빌론>으로 돌아온 꿈과 현실의 마술사,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둔 데이미언 셔젤 감독. 사실 그의 특징을 콕 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매번 장르도, 분위기도, 소재도, 연출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 영화 전문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우주를 배경으로 한 전기 영화를 찍었다. 빠른 편집과 몰아치는 연출이 장점인 줄 알았더니 담담하고 느릿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도 증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특징을 하나 찾을 수 있다. 데이미언 셔젤은 언제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주인공은 가족, 사랑, 일상, 주변인의 관계를 포기한 채 꿈을 좇거나, 반대로 꿈을 포기해야 한다. 둘 모두를 갖는 해피엔딩은 없다. 인상적인 엔딩 장면들 이면에 늘 냉혹함이 깃들어 있는 이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꿈과 현실의 매개체는 늘 매혹적이다. 현실을 잊게 하고, 찰나의 순간이라도 꿈을 이루어주기에. 꿈을 잊고 현실을 살더라도 단 한 순간 동안은 아름다웠던 꿈속으로 되돌아갈 문을 열어 주기에. 그래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했던 그 열정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 재즈와 뮤지컬, 그리고 달이 아름다운 것처럼.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고 유성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바빌론>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꿈'을 쟁취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이 역동적인 이야기는 셔젤 감독의 이전 작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주제를 담은 매개체가 영화이고, 무대가 할리우드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영화'라는 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빌론>은 더욱 특별하다.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가득하기에 셔젤의 작품 중 가장 야심 차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할리우드, 추하고 난잡한 꿈의 공장
<바빌론>의 오프닝만 봐도 셔젤의 야심이 느껴진다. 잭 콘래드의 파티는 마치 배즈 루어먼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파티를 보는 듯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재즈 연주만큼 화려하고 정신없고 난잡하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켜고, 마약을 빤다. 소파 위, 테이블 위, 계단 아래에서 정신없이 섹스한다. 누군가는 어이없이 죽고, 또 누군가는 다음 영화에 캐스팅되기 위해 영화 제작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언제 터져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넘쳐 나는 자극 속에서 사람들은 마비되어 간다.
30여 분간 이어진 오프닝 다음에 등장한 영화 촬영 현장도 파티 못지않은 아수라장이다. 파티에서 갑작스럽게 캐스팅된 넬리의 촬영장은 무슨 영화를 찍는지 알기 어렵다. 서부 시대 선술집 옆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시대와 공간을 재현한 세트장이 즐비하다. 아무 준비 없이 촬영에 투입된 넬리가 기대 이상의 눈물 연기를 선보이자 영화감독은 즉석에서 시나리오와 콘티를 수정해 가며 촬영하기 바쁘다. 바로 뒤 촬영장에서 불이 나 모두가 대피하는 와중에도.
한편, 에픽 영화를 촬영하는 잭의 촬영장은 유혈이 낭자하다. 대규모 전투 시퀀스에 참여한 엑스트라는 창에 찔리고, 마차나 말굽에 짓밟힌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는 해당 장면에 맞는 곡을 연주하고 감독은 필요한 카메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대기실에서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잭은 지루함에 지쳐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한다. 마침내 잭의 순서가 찾아왔을 때, 술에 취한 주연 배우는 촬영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한다. 한편 영화감독의 수중에는 카메라가 없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매니가 카메라를 대여해 오자 간신히 그날 촬영을 끝마친다. 밤이 찾아오면 그들은 촬영장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또다시 술과 마약과 섹스에 빠져든다. 또 아침 해가 뜨면 또다시 새벽부터 촬영하러 나선다. 얼핏 보기에 1920년대의 할리우드는 추잡하고 흉하다.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의 아름다움
하지만 정신을 쏙 빼놓는 <바빌론>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마냥 저속하지 않다. 파티와 촬영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꿈'이다. 매니는 영화계에서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넬리는 기회만 준다면 스타가 될 수 있다며 파티장을 자기 무대로 만든다. 잭 역시 할리우드의 톱스타로서 지금처럼 화려한 삶을 계속해서 누리고자 한다. 파티 음악을 담당하는 색소폰 연주자 '시드니(조반 아데포)' 역시 위대한 아티스트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다. 이처럼 꿈들이 모여 열망을 분출하기에 더럽고 추잡하고 혼란스러운 이 파티는 사랑스럽다.
촬영장도 다르지 않다. 촬영 장비는 항상 망가지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사건 사고가 쏟아지는데도 사람들은 매일매일 영화를 찍기 위해 모인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코끼리 똥을 맞으면서도 기어코 코끼리를 잭의 파티장에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매니처럼, 그들은 영화 촬영장을 떠나지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여배우의 춤과 눈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만취한 할리우드의 스타가 하루의 마지막 태양 빛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서사시를 완성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 혼돈의 끝에서 마주한 한순간의 절정을 찍을 때 찾아오는 황홀경을 붙잡기 위해서. 그렇기에 모든 영화 촬영장도 파티만큼이나 아름답다.
실제로 꿈이 없는 파티와 촬영장은 추하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번의 파티 장면만 봐도 오프닝 파티와는 묘하게 다르다. 여전히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이 피티에는 꿈이 없다. 무성 영화의 스타로 등극한 넬리와 잭, 그리고 잭의 매니저로 영화계에 입성한 매니에게는 꿈이 없다. 유성 영화가 등장하자 그들은 촬영장 안팎에서 불안에 떤다. 과연 자기가 여전히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또 영화계에서 종사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녹음 스튜디오가 갖춰진 새로운 촬영장의 모습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르지 않으나, 배우와 스태프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촬영할 만한 매력이나 보람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파티는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한 공간이자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꿈을 잃은 이들은 코앞의 자극에만 심취한다. 이제 그들의 놀이는 아름답지 않다.
추잡함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사랑, 영화
이처럼 <바빌론>은 1920년대 영화 산업의 명암을 가리지 않은 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치부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한다. 달리 말해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을 고백한다. 사막에서 시작한 할리우드를 건물 가득한 도시로 키워낸 열정은 물론, 그 열정이 선을 넘어버린 광기도 함께 사랑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빌론>은 신선하다. 할리우드는 가끔 자기 역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지름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닌 애증의 편지라서 특별하다.
영화는 이 맹목적인 사랑을 매니의 눈빛에 담아낸다. 카메라는 그가 영화와 눈이 맞는 순간을 포착한다. 첫 번째 순간은 잭의 파티 장면이다. 막 LA에 온 매니는 온갖 잡일을 한다. 파티에 서프라이즈로 등장시킬 코끼리를 데려오고, 술과 마약을 배달하며, 대리운전을 한다. 그러던 중 매니는 넬리를 본다. 입장을 거부당하던 그녀를 몰래 파티장에 넣어주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둘 다 열렬히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넬리가 파티의 무대를 휘어잡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곧장 캐스팅 제의를 받는 걸 본다. 그렇게 그는 넬리와 사랑에 빠진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화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두 번째 순간은 멕시코로 탈출하기 전 우연히 들린 파티 장면이다. 영화 제작자가 된 매니는 여러 문제로 꼬여 버린 넬리의 커리어를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도박에 빠진 넬리는 이미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가 이끄는 LA 지역 갱들과 문제를 겪고 있다. 넬리를 도와주던 매니 역시 자연히 그들과 갈등을 겪고, 끝내 그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갱을 피해 도망치던 매니와 넬리는 이동 중 작은 마을에서 열린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고, 파티를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함께 춤을 춘다. 바로 이때 그는 다시 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영화의 추잡함을 온몸으로 체감했고 넬리와 영화가 인생에서 피해야 할 골칫거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이번에도 영화에게 함락당한다. 이 두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온몸을 던져 사랑해서 진정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셔젤 감독의 작품답게 <바빌론> 속 사랑도 현실 앞에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무성 영화의 사람들인 세 주인공 앞에 유성 영화가 등장하고,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새로운 시대에 발굴된 신흥 스타를 비춘다면, <바빌론>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는 이들을 그려낸 셈이다. 톱스타였던 잭은 미숙한 목소리 연기 때문에 이제 관객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와 몇십 년간 같이 일해온 에이전시는 그에게 더 이상 흥행 작품의 배역을 맡기지 않는다. 라이징 스타였던 넬리의 커리어도 순식간에 꺾인다. 허스키하고 거친 게 매력인 그녀의 목소리가 유성 영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체계가 잡혀간 것도 그녀에게는 독이다. 거칠고 야생적인 넬리의 성격은 사교 파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음악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알린 매니도 끝내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그는 넬리의 커리어를 살리려다가 본인 경력도 끝날 위기에 처한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자기 꿈을 지킨 채 찬란히 부서지든가, 현실을 인정하고 꿈을 내려놓든가. 세 주인공은 제각기 달리 선택한다. 잭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판단한다. 더 추해지기 전에 스스로 자기 시간을 끝낸다. 넬리는 잭과 비슷한, 한편으로는 그녀다운 선택을 한다. 함께 도망치자는 매니의 제안을 거부한다. 처음 등장할 때처럼 춤을 추면서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매니는 도망치기 직전 갱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그러더니 영화라는 꿈을 포기한다. 할리우드를 떠나 평범히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또 위로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라는 꿈을 꾼 이들의 마지막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잭에게 그의 시대가 끝난다고 알려준 기자 '엘리노어(진 스마트)'의 대사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 그녀는 잭이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만든 넬리와 매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영상과 이름으로 살아남은 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관객과 친구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다시 한번 매니의 눈에 주목한다. 시간이 흘러 LA로 돌아온 매니는 극장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작중 등장인물인 리나 라몬트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유성 영화 시대에 전성기가 끝나버린 여배우를 보며 넬리와 무성 영화의 전성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내 경탄에 가득 찬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사랑했던 대상이 넬리라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넬리를 담아낸, 꿈과도 같았던 영화의 한 장면에 매료됐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동시에 자기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자기처럼 한순간의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고생했고, 고생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영화를 보며 배운다.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이크란을 타고 제이크 설리가 하늘을 나는 순간까지. 자기가 몸담았던 할리우드는 달라졌어도, 할리우드는 계속된다는 걸 직감한다. 멸망한 후에도 시대에 따라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와 도시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어 살아남았던 바빌론처럼.
영화를 사랑하게 만들다
이 모든 사랑 고백은 데이미안 셔젤이 직접 실천했기에 더 인상적이다. 사실 <바빌론>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 심지어 <퍼스트맨>에 비해서도 대중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단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지나치게 길다. 파티 장면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단축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몇몇 캐릭터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셔젤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 비전을 전부 스크린으로 옮겼다. 애초에 이 영화를 제작하자고 배급사를 설득할 만한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전작들을 만들었다고 했던 만큼,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영화와 영화계 종사자들을 향한 찬가를 온전히 들려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바빌론>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영화를 향한 애정, 심지어 할리우드의 부끄러운 과거까지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감독의 장점과 배우들의 조화는 화룡점정이다.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은 여전하다. 넬리와 매니의 주제곡이나 잭의 주제곡은 미세하게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그때마다 필요한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자아낸다. <라라랜드>에서 'City of stars'가 반복되지만, 들을 때마다 인상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말할 게 없다. 특히 마고 로비가 눈에 띈다. 마치 할리우드의 얼굴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그랬지만, 그 시대의 할리우드를 또 한 번 생생하게 표현한다. 관객과 함께 광란의 20년대를 헤쳐 나가는 디에고 칼바의 신선한 페이스도, 작품 전반적으로 중후함과 위트를 불어넣는 브래드 피트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달리 말해 <바빌론>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영화다. 설령 팬데믹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와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인생과 꿈 사이에서 영화는 계속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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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조커'와 '아서'의 내면세계
<조커 : 폴리 아 되>와 <조커>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굉장하다. CGV의 에그지수는 진작 박살 난 지 오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예상외로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 안에서 아서가 취한 태도가 빌런 '조커'와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조커;를 인질 잡아 토드 필립스가 객기 부린 것에 불과하다는 유튜브 속 평론가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조커' 보러 왔으면 악랄하고 강력한 빌런을 보고 싶어 하지 이런 내용을 원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건 자신의 악함을 깨달은 조커가 사회를 뒤집어 1편과 유사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충격적인 플롯을 띄고 있다. 그 충격의 방향이 <조커> 1편의 형태가 아니다. 그 <조커> 1편의 위에서 아서의 뇌를 들여다보는 듯한 플롯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줄거리를 띄는 것이 이 <조커 : 폴리 아 되>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 대해 '1편의 후속작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조커가 된 아서 플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근거. 두 영화의 플롯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선 <조커>의 플롯부터. 아서 플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자다. 인생에 재미라곤 없다. 우울한 아서 플랙. 번듯한 직업이나 모아놓은 돈 같은 거 없다. 대신 있는 건 정신질환이다. 느닷없이 하하하하 웃는 아서 플랙. 뜬금없이, 그것도 기괴하게 웃는 터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아서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인기 스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동경하는 아서. 사실 아서는 머레이가 자기의 두 번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아버지는 누구냐고? 바로 고담 시의 실력자 토머스 웨인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서는 웨인 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꿈속에 사는 아서. 아니 꿈속에서 나오기 싫은 아서. 비참한 현실에 혹시?라는 희망이 점점 아서의 망상장애로 발전한다. 내가 대단한 코미디언이라는 망상. 도시의 실력자가 내 아버지라는 망상. 그리고 사랑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아서를 지배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의 망상에 대해 다룬 영화다. 망상이 끌고 가는 대로 도착하다 보면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엔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에 배치한 것은 아서의 자의식이다. 존재감이 없던 아서. 유리 자동문을 지나갈 때도 문에 부딪힐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서가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는 과정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자의식 과잉'과 '인정욕구'의 표출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 아서의 굽은 등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위축된 내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뒤의 라디오 방송에선 '청소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한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시각적으로 아서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면서 청각적으로는 이 사회가 노동권에 있어 약자를 존중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연이어 조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상담치료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사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사다. 앞 장면과 연이어 아서 플랙은 개인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구제받지 못한다. 그럼 희망을 품어야 한다. 뭐 같은 현실에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 아서가 생각한 해결책은 코미디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걸 목표로 삼은 아서. 혼자 일기장에 끄적이며 농담거리를 만든다. 공연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쌓다 보면 언젠가 성공해서 멘토인 머레이의 쇼에 나올 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가 웨인의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세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이 내면에 있던 분노를 세상 밖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굉장히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체화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다. 따지고 보면 아서 플랙이 코미디언 '조커'로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살인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 웃기다고 온갖 조롱을 다 듣고 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해고당한 공연에 비하면 홀가분한 마음에 춤까지 춘다. 조커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상승한 사건이다. 심지어 고담 시의 언론사에 보도도 되고 사회가 이 살인마를 칭송하기까지 한다. 조커의 퍼포먼스가 처음으로 먹힌 것이다. 이 춤은 후반부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아무 관객이 없는 야외무대다. 아니 모든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야외무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춘다. 이 춤의 리액션 중 하나는 경찰이다. (이후의 사건이지만) 어머니 페니 플랙을 살해해도 쫓아오지 않았던 경찰이 양아치 세 명 죽였다고 아서를 따라온다. 일부 시민들은 조커 가면을 쓰고 아서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제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들리는 소식. 머레이는 아서의 과거 스탠딩 코미디 이력을 보고 조롱한 바 있는데, 이 아-무도 웃지 않았던 영상을 보고 토크쇼에 초대한 것이다. 서서히 팽창하는 자의식. 바람만 맞췄던 첫 번째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는 다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토크쇼에 초대된다. 이후 토크쇼에서 광대 분장으로 나타나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라고 부탁한다. 이 질문에 읽히는 가장 강력한 의도는 '조커'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고, 나는 그런 굉장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이후 토크쇼가 진행된다. 아서는 머레이에게 "당신은 무례하군요"라며 머리에 총알을 겨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슈퍼스타 머레이의 바닥을 방송에 노출시키고 살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조커의 자의식이 폭발한다. 조커가 벌인 퍼포먼스에 세상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조커>는 재능 없는 예술가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줘 병든 사회를 담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이 1편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다. 2편의 초반부.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아서. 낮은 자존감이 사람 살인한다고 채워질 리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환경 문제도 크다. 아캄 수용소의 모든 교도관들이 아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도 그냥 주면 되는데 "오늘은 농담 없냐?"면서 강아지 손 내밀라고 하듯 사람을 아래로 깔본다. 감옥에는 화장실도 없다. 양동이 같은 곳에 볼일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비워야 한다.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연히 위축된다. 글쓴이는 이 설정,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화의 배경이 1편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예 겹쳐지는 장면(마르고 굽은 등을 보여주는)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무기력한 아서는 어떤 계기를 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그 계기는 할리 퀸젤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서. 여기서부터 자존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담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서에게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글쓴이는 이 할리퀸(레이디 가가)이 안겨주는 희망이 1편의 코미디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아서에게 코미디는 미래다. 코미디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래에 코미디로 먹고사는 걸 꿈꾸고 있다. 이 코미디에 대한 사랑이 할리퀸에게 옮겨온 것이 2편이다. 이 공통점은 아서가 코미디와 사랑에 서투르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을 띤다. 또 결정적으로 아서가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커지는가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그건 바로 망상이다. <조커> 초반 머레이가 관객석에 앉아있는 아서를 불러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식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선 아서가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데 소피만 혼자 흐뭇하게 웃는 장면이나 갑자기 하하 호호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조커> 1편이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망상은 중요하다. 아서가 후반부까지 코미디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이유(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에 관한 망상은 후반부에 해체되면서 아서의 무리수로 이어진다. 코미디를 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던 소피라는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서는 코미디에 재능이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서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머레이를 살해한다. 이 부정적인 현실 - 망상과 사랑 - 부푼 자아를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구조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도 아서의 희망인 리와의 관계가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폴리 아 되'라 아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이다. 그 망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 이번엔 뮤지컬이다. 현실에서 뮤지컬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다. 뮤지컬 신은 전체적으로 영화 같은 상황이다. 감옥에 갇혀 한정적인 동선 때문에 나눌 수 없는 사랑을 음악과 춤으로 망상을 공유한다. 이미 전에 꿈꿔왔던 망상이 시간이 지나 더 영화적이고 깊어진다. 후반부 아서가 조커를 포기하자 그의 망상이 해체된다. 망상 속 공연에서 리는 아서를 쐈고 현실 속 할리퀸은 조커를 차버렸다. 조커로서의 이름도 잃고 자아까지 포기한 아서. 하지만 이 1편에서 이 과정을 겪고 아서 플랙의 조커가 탄생했던 것처럼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다. '넌 죽어도 싼 놈이야'라는 말과 함께 악의 축을 살해하는 남자가 영화 후반부를 마무리짓는다. <조커 : 폴리 아 되>의 후반부를 적어도 <조커>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가 진짜 <조커>의 후속작이 맞냐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플롯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니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뮤지컬이라는 비현실적인 시퀀스를 넣어서 망상의 깊이를 더 진득하게 뽑아냈다. 1편에서 작동했던 핵심 모티브 사랑과 망상 그리고 빌런의 탄생을 2편에서 그대로 이어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플롯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특성 역시 전작 1편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특성 중 첫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퀸이 등장한다. 첫 번째 할리퀸은 할리 퀸젤이다. 할리퀸은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며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리는 아서로 접근하지 않고 조커로 접근한다. "나 당신이 주제인 영화 20번은 봤어요"라는 말,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렸으면 했다"는 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리는 아서를 처음 만날 때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리는 아서를 만날 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나 당신 만나서 기뻐"라는 식의 감상만 드러내는 말만 한다. 심지어 몇 마디는 거짓말이다. 조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랑에 서툰 아서. 리의 존재 때문에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조커를 고른다. 후술 할 리와 메리언 사이의 대립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의 충돌이 서툰 사랑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는데, 이 요인에 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정체성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편의 할리 퀸이 등장한다. 바로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다. 메리앤이 직업인으로서 펼친 주장은 간단했다. 아서는 인격이 분리됐고, 조커로서의 자아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종의 심신 미약 논리다. 메리앤은 변호사로서만 아서를 돌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그를 위하기도 했다. 교도관들이 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 것을 보고 "우산 안 씌워주면 누가 죽냐"라고 핀잔 섞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다. 또 아서와 조커가 분리됐다는 논리에 근거를 덧붙이는 작업도 했었다. 인터뷰를 잡는다거나 의사와의 상담이 그랬다. 법정에서도 하비 덴트의 논리를 공박할 때 '당신이 아서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리가 아서를 버린 것과 반대로 매리앤은 진정성 있게 아서를 대한 것이다. 단지 아서는 리가 부풀린 조커로서의 자아 때문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가 현실적인 걸 고르지 않았나? 아니다. 매리언은 할리퀸이 극에 끼친 영향처럼 아서가 후반부에 선택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할리퀸이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고 말하듯 아서에게 '당신은 아서예요'라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던 셈이다. 이 두 할리퀸이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딜레마는 <조커> 전작이 가졌던 딜레마기도 하다. 아서 플렉, 그러니까 조커는 어떤 존재일까? "당신은 죽어도 싸!"라는 논리 하에 유명하면서도 무례한 사람만 골라 처단하는 인물일까? 아니다. 조커는 그냥 자의적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야 세상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커는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단지 후반부에 아서가 조커를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아버지를 경유한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조커>와의 유사성을 띤다. 두 명의 아버지가 조커와 아서 사이의 정체성을 널뛰기하다 1편의 아서로 귀결 짓듯 두 명의 할리퀸이 2편의 아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중 둘째.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뮤지컬 파트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아서 플랙의 망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전작 조커에서 아서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며 아서 본인이 망상이 심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자신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실(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망상을 현실같이 표현할 필요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망상을 망상답고 더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폴리 아 되'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서가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아서가 여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다는 점을 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망상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아서가 허황된 꿈에 취해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관객도 처음부터 그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뮤지컬 장면이 아서의 캐릭터성을 설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는 이런 장치가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조커>에서 망상과 현실사이를 널뛰기하는 플롯으로 '뭐가 진짜지?'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 속 망상 장면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아서의 망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그 구분이 없는 아서의 내면을 관객이 더 직관적으로 체험하게끔 뮤지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이런 방식의 연출은 아서의 심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오히려 아서가 망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1편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아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가지중 둘째. 이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우선 영화 <조커>가 다룬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 있다. 전작 <조커>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흑화 하게 된 이유는 (행위의 악함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 페니의 학대로 인한 망상장애, 노동환경의 열악함, 사회구조적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처지, 그리고 조커를 조커로 만든 사람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아서가 '웨인 엔터프라이즈' 직원 세 명을 살해한 사건만 보도하고, 페니의 죽음 같은 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가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하는 사건인 '머레이 쇼'의 방송분 역시 미디어를 이용한 폭력이다. 셋째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안 치워서 쥐가 들끓는다"는 대사는 미디어가 노동 현장에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디어는 성실하지 못한 존재다. 페니의 죽음에 대해 취재하지도 못했고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의 악영향이 아서의 개인적인 불행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조커라는 캐릭터가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조커: 폴리 아 되에서도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아서, 조커 둘 다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매리언이 아서에게 '당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예요. 아서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이 과정을 카메라로 녹화한다. 아서를 진짜 위했던 매리언조차도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미디어를 통해 재판 승소를 노린 것이다. 법정 장면에서도 아서는 판사가 아닌 카메라를 의식한다. 굳이 따지자면 판사에게 '나는 조커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판결 내리는 건 판사니까. 그런데 아서는 카메라에 대고 굳이 말한다. 조커라는 존재가 인정받았던 계기가 미디어였다는 걸 아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다. 아서가 "난 할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할리 퀸이 TV를 보며 유리창을 깨고 TV를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서에게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TV를 가져가는 것이 할리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아서를 아끼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미디어의 존재에 따라 갈리는 인물들의 리액션은 극후반부의 폭탄 테러와 아서가 군중들에 의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아수라장이 됐다. 조커는 정신을 잃은 채로 길을 배회한다. 지나가던 조커 추종자가 차에 탑승해서 아서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아서는 조커로서 선택받게 된다. 하지만 아서가 내린 판단은 전적으로 아서의 것이다. 군중들이 원하는 조커라면 법정을 탈출해서 사람들을 조종해야 하는데 냅다 도망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것과 관객이 알고 있는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명확하게 그린다. 가짜 조커들이 아서에게 기대한 모습이 '폴리 아 되(망상)'이었더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리가 발생한 이유? 아서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세계관의 군중들은 아서를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인물들의 행보를 가른 걸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셋째. 전작을 승계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미지들이 <조커>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불어넣는다. 전작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조커의 추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면서, 그의 홀가분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되>에서의 계단(장소도 같은) 신은 다르다. 이번엔 계단 장면에서 더 이상 무겁거나 상징적인 춤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된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할리 퀸이 계단에 서 있고 아서는 할리퀸을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다. 이 영화처럼 조커 내면의 아서 플랙을 그리고 싶었다 하더라도 계단 신에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걸 거부한다. 전작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성공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전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조커의 추락과 흑화의 이유를 면밀하게 보여주는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했는데, 이번에는 상승에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아서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가 행복한 이유에는 그리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작의 이미지를 비튼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아서가 두들겨 맞았던 길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조커로서의 자아를 할리 퀸 앞에서 표출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서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에서 조커의 자아가 붕괴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 생방송 중에 조커 분장을 하고 "아캄의 돼지 같은 교도관들"이라고 외친 후 굳이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부정하는 요소다. 전작 <조커> 1편에서도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머레이를 공격했다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묘사했다. 이렇게 영화는 전작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굉장한 창의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커의 캐릭터성을 영화 안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조커가 미디어에 나온 경우를 생각해 본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지. 조커가 전하는 가족 이야기는 매번 달랐고, 목표가 돈인 것도 아니라 악행을 펼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욕망이었다. 캐릭터를 규명하지 않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 조커의 본질이었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잭 니콜슨)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조된 인간이었다. 그저 자기가 재밌으니까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다. 죽을 때도 까르르 웃고 죽을 정도로 이상한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조커 역시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없다. 배트맨과의 대화 장면만 짧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핵심이 바로 규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조커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 '조커' 시리즈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서 플랙에게 명백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가 악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의 조커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치된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제목과 캐릭터에서 배트맨 세계관을 빌려온 근거가 성립된다.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글쓴이는 1편과 2편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기존 '조커'와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전통적인 조커의 특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의 조커가 그려왔던 2편의 망상이 원인을 뭉개버린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거부하는 '조커'의 전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야기 내적으로 망상에 빠져있는 아서 플랙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도 생동감을 부여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1편이 있어 2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상황이 망상이 되어 2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연속성을 처음부터 망상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이 기획의도라면 사실 굳이 조커의 캐릭터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기획의도에 충실할 것이라면 아서에 집중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할리퀸이 언급하는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심화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 굳이 필요 없다. 조커가 나온 뉴스 40번 읽었다고 해도 이야기상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였어야 했던 이유. 영화가 상상에서 그린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편에서 조커 추종자들이 그린 악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조커>라는 영화에서 그린 조커의 이미지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통렬하게 조롱한다는 단면이 여기서 읽힌다. 이 망상으로 1편과 2편을 이으면서 충돌시킨 선택은 영화가 악을 보여주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1편에서 꿈꿔온 2편, 1편에서 기억하는 대중들의 조커에 관한 이미지, 할리퀸에 대한 아서의 생각, '이렇게 하면 먹힐 거야'라는 법정에서의 안일함 등 1편에 근거한 2편의 판단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런 점에서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악이 조커라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가 죽는 건 명확한 결말 아닌가?"라고. 하지만 난 이 영화에서 조커가 의인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명할 수 없음 / 조커의 정체성 둘 다 동시에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아서를 살해하는 남자는 초반부부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아서와 공통점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면서 아서를 살해한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아서와 남자를 겹치게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이 남자가 아서 플랙의 후임, 즉 또 다른 조커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커 추종자가 아닌 아서 플랙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와의 토크쇼에서 자살을 시사하다가 결국 머레이를 살해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두 사람을 통해 "공유된 광기"를 조커라는 캐릭터로 보여줬다고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악을 의인화하기보다는, 조커라는 이름 아래 공유되는 광기와 혼란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방식은 전례를 따르지 않았고, 조커처럼 규명할 수 없는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것이다.
불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누군가는 진짜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전작의 장력을 스스로 거부했다면서 영화에게 야유를 보낸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현대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감정적인 폭이 넓고 조커의 캐릭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뮤지컬 시퀀스들이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보인다는 점과 난해한 플롯, 느린 템포가 대중영화로서 합격점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충분히 좋은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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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스마트폰 속에 있지 않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실렸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음악교과서에 빅뱅이 나온다는데...
다시 청춘. 청춘이라는 말은 때때로 면죄부가 된다. 조금 서툴러도 그러려니 해 주는 시기가 청춘이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기는 참으로 냉혹하다. 그러려니 해주면서도 봐주는 법이 없다. '네가 애냐'에서부터 '어린 놈의 자식이'까지. 그렇게 주변인인 채로 시간이 흐른다.
청춘시련. 청춘에 겪는 흔하고 공감되는 시련에 관해 말할 것만 같다. 누구나 지난한 청춘을 보내왔고, 저마다 자랑할 만한 어려운 시기들을 넘겼으리. 시기는 다를지언정 청춘은 개인의 것을 넘어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 이 청춘은 다르다. 청춘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고 붙여서도 안 되며, 청춘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청춘보다는 '시련'에 집중해야 하는데, 고난과 몹시 어려운 수행 같은 시련이 아니라 弒戀, 죽일 시에 그리워할 련이다. 연인할 때 연. 그리하여 영제는 Terrorizers.
유팡의 집에 같이 사는 밍량. 어느 날 남자친구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그 복면 쓴 강도는 참으로 허술한데, 대낮에 장검을 휘두르고도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을까?
밍량은 VR로 혼자 검술을 연습했다. 검술이라고 하면 너무 고상하고, 평소 죽어라 하던 게임에서 캐릭터들을 칼로 찌르던 것에 과몰입했다고 보면 되겠다.
'찐따'라는 단어가 썩 좋진 않은데 그 단어를 대체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밍량은 찐따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하는 건 핸드폰 게임과 av영상 보면서 자위하기 뿐이다.
그가 보는 av영상의 주인공은 모니카. 모니카는 돈 때문에 성인물을 찍게 된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모니카에게 준 것들을 다 뺏었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유팡의 연극 극단 동료라, 집에서 하루를 머문다. 밍량은 문틈 사이로 그들을 훔쳐본다.
밍량은 식당도 같은 곳만 간다. 그곳에는 선원요리사였지만 이제 땅에 터를 내리고 싶은 둥링이 있고, 식당 딸 키키는 코스프레에 완전히 과몰입한 오타쿠다.
키키는 게임 외에는 무신경한 밍량을 방으로 초대한다. 애니메이션 코스튬을 입고 밍량의 앞에서 코스프레를 하는데, 밍량은 키키를 덮치려든다.
'이런 옷을 입었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밍량은 술취한 마사지사를 가게에 데려다준 인연으로 마사지사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마사지사는 밍량의 말을 다 들어주고 믿어주는, 사실상 유일한 현실 인물이다. 마사지사에게 밍량은 "썸녀"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밍량은 한 남자를 습격한다. 하지만 실력이 썩 좋지는 못하여 밍량도 팔에 부상을 입는다. 어쩌다 다쳤냐는 마사지사의 말에 밍량은 대답한다. 썸녀의 전남친에게 복수를 해줬다고.
밍량은 썸녀가 살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간다. 썸녀의 아파트에는 썸녀와 유팡이 함께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제 헤어져야 한다. 밍량은 그들을 '불법촬영'한다.
그리고 출국하는 모니카의 뒤를 쫓다가, 갑자기 다가가 사랑한다느니, 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느니, 지켜주겠다느니. 모니카가 싫다고 하니 이제 한국에서 뻔한 레퍼토리가 나온다. "왜 안 만나주냐"는 거.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감히 네가 말 왜 안 만나주냐는.
경찰들에게 저지당한 밍량은 모니카의 아파트로 또 찾아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은 키키와 그의 친구가 촬영을 왔고, 촬영이라는 근사한 말 대신 우리나라의 경우 음란게시물 같은, 트위터의 노출 계정 비슷한 그런 일을 한다. 촬영자 역시 키키의 연기를 보고 키키를 덮치려 한다.
밍량이 하필 거기에 있으니 키키를 구해주긴 하는데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팡과 둥링의 쓰임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정치인의 딸, 이혼가정에서 버려진 자녀, 그래서 늘 애정을 갈구하는 역할. 그 애정의 방향이 둥링과 모니카에게 향하는데, 이야기는 모니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둥링의 존재감도 미미하다. 이 영화는 밍량만을 생각하는 것도 머리가 아프다. 청춘이라는 주제에 관한 고민보다는 오타쿠 문화나 동성애 같은 나름대로 핫한 소재에만 집중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왜 안 만나줘'를 이유로 폭력을 행하는 뉴스 기사들을 너무 많이 봐서 넌더리가 나는데, 대만에서는 이런 일이 청춘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란 말인가. 찐따 오타쿠남이 음침함과 망상으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 왜 안 만나주냐는 이유로 그 집에 사는 세 모녀를 살인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이다.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젊어서 할 수 있는 열정과 뜨거운 사랑과 방황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로, 매너있게 하자. 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은 가져야 하지만 우리는 리얼리스트여야 하지 않겠나.
청춘시련(Terrorizers)
감독 : 호위딩
출연 : 임백굉, 이목, 진정니, 요애녕
상영시간 : 127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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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잔은 떠나버린 너에게, 한 잔은 곪아버린 나에게
그렇게 화제였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드디어 보았다. 그렇다. 뒷북도 한참 뒷북을 친 것이다. 영화는 인생에서의 커리어도, 사랑도 모두 잡은 것처럼 보이는 카후쿠의 삶을 조명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는 연극배우로서의 삶, 사랑하는 아내와의 화목한 삶, 두 가지를 모두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외도를 눈으로 확인하지만 그는 그녀의 부정을 외면한다. 그녀를 질책하는 순간, 그의 화목한 삶은 날라갈 것 같아서. 하지만 그녀의 아내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고, 그는 그녀에게 이유를 묻지 못한 채, 슬픔과 궁금증을 묻어두고 살아간다. 마치 로봇처럼.
1. 다양하게 표현되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대사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나는 믿어요, 아저씨,
나는 뜨겁게, 간절히 믿어요
[출처] 필사 ::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 명대사|작성자 헤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대사는 수화로 표현된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다.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은 카후쿠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와 언어가 다 다른 배우들을 연극 바냐 아저씨의 캐릭터로 캐스팅한다. 이런 연출법은 생소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오히려 더 부각시킨다. 언어가 달라도 감정이 통한다면, 진심은 결국 통하게 되어 있다는 점, 다만, 그 소통이 진실어린 소통일 때 말이다. 겉보기엔 각기 다른 언어들이 상충된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 속 인물들의 이런 생소한 소통 방식은 관객들에게 극 속의 내용을 더 진실되게 전달하는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카후쿠는 그 점을 노린 것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수화로 진행되는 연극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특이한 전달법을 선택했지만 관객들에게 제공한 감정의 폭은 다른 어떤 연극보다도 넓었을 것이다. 언어의 기능적 불통이 의미론적 불통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의미론적 감정의 증폭만이 남은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배우들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로봇처럼 대사를 읽게 시키기도 한다. 그런 그의 독특한 지도는 배우들로 하여금 대사에 배우들의 개성을 입히기에 앞서, 대사가 주는 메시지에 먼저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었다고 본다. 극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역시 극이 주는 메시지일 테니까. 그 메시지를 직구 던지듯 전달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대본 숙지와 메시지에 대한 텍스트적 이해가 우선이어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2. 진실을 알고도 묵인한 그의 최후
하지만 그런 인상적인 극을 연출하는 그는 위선자였다.
그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 있었다. 부정을 저지를 당사자도 그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정작 중요한 구멍을 메꾸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가 카후쿠에게 무감정을 선사한다. 좋은 사람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그는 솔직할 수 없다. 남을 질책할 수도 없고,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는 겉모습을 유지한다. 하지만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죄책감에 매여 살아간다. 자신의 문제를 질책하지 않고, 이해하는 그의 표면적 자비는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다 못해 그의 행동을 위선으로 몰아가고 싶은 못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카후쿠 입장에서는 자신의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겠지만 이미 그가 그녀의 잘못을 묻어둔 순간부터 그의 평온한 삶은 끝나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직업을 가진 카후쿠에게 이런 지나친 감정적 절제는 아이러니로 보이기도 한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배우 자신이 실제로 처한 상황과 다른 상황을 연기해야 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상황과 완벽히 일치하는 캐릭터를 만나기도 한다. 카후쿠에게 바냐 아저씨는 그런 캐릭터였던 것 같다. 바냐 아저씨의 대사 한 줄 한 줄을 마주할 때, 그는 자신의 상황과 바냐 아저씨의 상황을 비교해 깊은 몰입을 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 몰입이 주는 감정적 소용돌이를 감당해 내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는 아내와 연결점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바냐 역할을 맡긴 것 같다. 그의 아내와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던 후배 배우에게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서. 보다보니, 그 배우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3. 상처는 상처로 치유하는 법
그의 상처는 그의 운전사, 미사키와의 담담한 대화들로 치유되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다른 결의 슬픔, 죄책감이지만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마주하고, 담담히 견디어내고 있는, 어쩌면 그보다 더 성숙한 태도를 가진 미사키의 모습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고야 만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 죄책감에 대해 마주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자신도 그래야 함을, 그래야 자신이 제 2막을 시작해나갈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의 연극을 보면서 미사키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받는다. 그는 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카후쿠의 딜레마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그가 연기하는 바냐 아저씨의 진정성을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를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카후쿠의 모습에서, 그리고 카후쿠가 연기하는 고뇌하는 바냐 아저씨의 모습에서 자신이 지고 있던 죄책감을 조금은 덜었던 것 같다. 영화 마지막의 미사키의 표정이 나에게 그렇게 해석되었으니 말이다.
카후쿠는 자신의 나약한 대처로, 아내를 잃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표출해내지 못해 묵혀버린 감정들을 뒤늦게 폭발시킨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냐 아저씨로 분한다. 여전히 바냐 아저씨로 분해 연기하는 것은 그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나이가 들어가는 어른들에게 특정한 정도의 성숙함을 요구한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프레임을 걸고서 말이다.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라고 있는 것임을 영화는 역설하고 있다. 표출되지 못하고, 곪아버린 감정은 그 인간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고, 점점 로봇으로 살도록 만들기만 할 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성 못지 않게 감정도 중요한 요소이기에 힘든 부분이 있으면 표출하고, 싫어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싫어도 하고, 화도 내고 해야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한 인간이라고 평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4. 총평
수화로 연기하는 한국 여배우가 확실히 돋보였었다. 배우가 가지고 있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카후쿠의 후배 배우 역할은 참 오묘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카후쿠를 깨우치기 위해서 배치된 인물인지 의심이 될만큼 그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이 영화의 모든 대사, 인물 캐릭터는 감정적인 호소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카후쿠가 마지막에 표출하는 감정이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전반적인 건조한 분위기에 한 몫하듯, 오토의 바람 상대였던 것으로 보이는 후배 배우의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되려 당당한 태도는 오히려 그에게 건방지게 충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그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태도는 카후쿠의 감정 표출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그 배우의 기능적 역할은 결국 카후쿠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던 걸까 계속 곱씹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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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 -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원더 (Wonder)
개봉일 : 2017.12.27
감독 : 스티븐 크보스키
출연 : 제이콥 트렘블레이, 줄리아 로버츠, 오웬 윌슨, 이자벨라 비도빅, 노아 주프, 브라이스 게이사르
‘아주 평범한 기적이 깃든 우주’
“나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다.” 이제 5학년이 되는 작은 덩치의 남자아이 ‘어기’가 말한다. 어기에 대해 말해주자면 이런저런 할 말이 많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나 첫 숨을 내뱉고, 건강히 자라기 위해 27번의 수술을 거친 아이. 다른 이의 시선이 불편해 집안에서 쉽게 나가지 못하는 아이. 커다란 우주 헬멧을 쓰고 우주비행사가 되는 걸 꿈꾸는 아이. 누구보다 총명하지만 자만하지 않는 아이. 하지만 아직 많은 이가 알아주지 못한, 숨어서 빛나고 있는 아이. <원더>를 보면서 내내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랑스러운 우리 어기. 사랑스러운 아이들. 너무 예쁘다.” 어기를 포함해 등장하는 여러 아이들의 모습 또한 정말 사랑스러워서 중간중간 절로 웃음이 났다.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상처들은 어기의 얼굴에 흔적을 남겼고, 어기는 그 흔적들을 가리고 싶어 한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라기보단, 남들의 시선이 부끄러워서. 가족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리는 어기를 위해 많은 걸 배려한다. 엄마 이자벨은 석사학위를 잠시 내려놓고 어기를 위해 홈스쿨링을 했으며 누나인 비아는 어릴 적부터 어기를 챙기며 엄마 아빠를 걱정시키지 않는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어기의 가족들은 태양처럼 빛나는 어기를 중심으로 도는 하나의 우주다.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나의 단점으로 비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을 가려야 한다는 부담감, 남들의 시선 앞에서 선뜻 용기를 낼 수 없었던 상황을 마주하고, 그것에 좌절해본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평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우울한 마음이 들 때 <원더>를 추천한다. 당신이 굉장한 우주를 갖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도 충분히 박수받을 자격이 있다.
각자의 고민과 아픔 앞에서 좌절하고 무릎 꿇는것이 아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끝없이 날갯짓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예뻤다. 그리고 아이들의 힘의 원천인 가족애와 우정이 눈부시게 빛나는 영화였다.
원더 시놉시스
누구보다 위트 있고 호기심 많은 매력 부자 ‘어기'. 하지만 남들과 다른 외모로 태어난 ‘어기'는 모두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대신 얼굴을 감출 수 있는 할로윈을 더 좋아한다. 10살이 된 아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엄마 ‘이사벨’과 아빠 ‘네이트’는 ‘어기'를 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왔지만 누구보다 그를 사랑하는 누나 ‘비아'도 ‘어기'의 첫걸음을 응원해준다.
그렇게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기'는 처음으로 헬멧을 벗고 낯선 세상에 용감하게 첫발을 내딛지만 첫날부터 ‘남다른 외모'로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어기'는 27번의 성형(?)수술을 견뎌낸 긍정적인 성격으로 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변하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이륙 준비 완료”
5학년이 될 때까지 또래 친구를 사귀거나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어기를 위해 엄마 이자벨과 아빠 네이트는 큰마음을 먹고 어기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집안에서 아빠와 광선검으로 칼싸움을 하고, 엄마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자신만의 우주인 작은 방 안에서 뛰놀기만 했던 어기에게 또래 친구들이 가득한 학교에 간다는 건 또 다른 행성에 착륙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외모가 눈에 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어기에게 다양한 눈빛으로 쳐다볼 불특정 다수 사이로 들어간다는 건 두렵고, 겁나는 일이었다.
어기는 얼굴에 난 상처들을 가리고 싶을 때, 혼자 있거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 헬멧을 쓴다. 또래보다 조금 왜소한 어기의 어깨를 꽉 채운 채 얹혀있는 헬멧은 어기를 잠시나마 우주로 보내준다. 어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우주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이젠 얼굴을 가리고 있던 헬멧을 내려놓고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이미 서로 아는 아이들, 끼리끼리 모여 자연스레 어울리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쭈뼛쭈뼛 등장한 어기에게 아이들은 여러 의미를 담은 시선을 보낸다. 어기는 자신을 지구에 내려온 츄바카 같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신발을 물려신는 집안의 아들 잭, 잘 사는 집안의 아들 줄리안, 이상한 애 샬롯. 어기는 처음 본 친구들의 눈빛과 신발을 보며 그들에 대해 추측해본다. 어기가 여느 아이들에 비해 눈치와 상황 판단이 빠른 건 어기가 총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랐다는 반증 같아서 마음 한편이 아렸다. 첫 등교 날 줄리안과 몇몇 친구들에 의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어기는 소중히 길러온 머리를 자르고 헬멧을 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답지 않게 말없이 헬멧을 벗지 않는 어기를 걱정하던 이자벨은 어기의 옆에 앉아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누구나 얼굴에 흔적이 있어. 얼굴은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자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야.”
어기의 얼굴에 생긴 흔적들은 흉한 흉터가 아닌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견뎌낸 어기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가족들의 사랑이 담긴 지도다. 이 지도는 어기가 기적과도 같은 아이임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앞으로 어기가 걸어갈 수많은 길을 안내한다. 어기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통해 우주가 아닌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무사히 찾게 된다.
“한 번만 그 눈으로 날 봐주길 바랄 뿐이다.”
어기가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잔뜩 받으며 침대에서 잠들 때, 어기의 누나 비아는 다정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홀로 방으로 들어간다. 동생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빈 끝에 얻은 소중한 동생 어기는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파 매일같이 엄마 아빠를 걱정시켰다. 비아는 엄마 아빠만큼 동생을 사랑하기에 엄마 아빠가 아픈 동생을 더 신경쓰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다. 이 집의 주인공이 동생이어도 괜찮았고, 엄마 아빠의 문제를 하나 더 늘리지 않도록 노력해 야했다. 아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비아는 첫재로서, 아픈 동생의 누나로서 책임감을 갖고 부정적인 말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어기를 챙긴다.
어기가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비아도 새로운 학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새 학기 첫날이 이렇게 엉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 아빠에게 하지 못했던 말들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절친 미란다가 자신을 모르는척하기 시작했고, 드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든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비아에게 친절한 말씨를 뽐내는 저스틴이 다가오고, 비아는 새로운 친구 앞에서 공통점을 어필하기 위해 얼떨결에 외동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항상 어른스럽게, 괜찮은 척 지내왔지만 어기의 누나이기 전에 비아도 이자벨과 네이트의 어린 딸이다. 비아도 어리광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엄마 아빠의 우주에 중심에 있고 싶었을것이다. 비아는 아픈 동생을 위해 어기의 누나 역할을 집어 들고, 어린 딸의 역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기라는 우주를 따라 돌거나 그 뒤로 숨는 위성이 되어 살아간다.
저스틴은 비아의 말에 진심으로 집중해 주는 친구다. 저스틴은 자기 얘기하기에 바쁜 연극부 아이들과는 달리 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대 앞이 아닌 무대 뒤가 좋다고 말하는 비아를 신기해하며 만일 비아가 무대에 오른다면 혼자라도 박수를 쳐주겠다고 약속한다. 비아는 저스틴의 말에 용기를 내 무대 위에 오르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미란다의 양보 덕분에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게 된다. 엄마, 아빠,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무대를 마친 비아는 벅찬 표정으로 가족의 품에 안긴다.
“넌 너무 신비로워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거야.”
비아가 연기했던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대견한 자신에게, 그리고 비아의 연극과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아가 전하는 마음처럼 느껴진 대사였다. 만일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장 그 생각을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리길 바란다. 당신이 너무 빛나고, 신비롭기에 남들이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니까 절대 실망하지 말라고, 낙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기는 5학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에 간다. 그전까지는 또래 친구들을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었기에 어기에게 친구는 비아와 강아지 데이지가 전부였다. 잭을 만나며 드디어 나에게도 친구가 생기나-싶었지만, 줄리안과 함께 뒷얘기를 하고 있는 잭을 보고 어기는 크게 실망한다. 우주복을 입고 달 위를 뛰어다니는듯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어기는 다시 헬멧 속에 숨어버린다.
잭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계속해서 어기를 놀리는 줄리안과 한판 싸움을 한다. 잭도 처음엔 그저 선생님, 엄마의 부탁으로 인해 어기와 함께 어울렸지만, 어기의 친절함과 재치 넘치는 모습에 반해 진심으로 어기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잭은 선생님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근신 처분을 받지만, 다시 용기를 내 어기에게 다가간다.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 많은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다.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은 가족보다는 친구들과의 소속감을 중요시하게 된다.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틀린 것이고, 친구가 맞다고 하면 쉽게 휩쓸리기도 하는 것이 그때의 아이들이다. 소위 잘 사는 집안의 아들이자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줄리안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아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 교실의 실세랄까. 아이들은 낯선 모습의 어기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고, 어기를 괴롭히는 줄리안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한다. 교실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줄리안처럼 어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옳은 일’축에 끼는 분위기였으니까.
브라운 선생님은 매주 아이들에게 새로운 격언을 가르친다. 가장 먼저 가르친 격언은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땐 친절함을 선택해라.”였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격언을 따라 행동한다. 잭과 썸머는 다수의 시선이 만든 ‘옳은 배척’이 아닌 친절함을 베풀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용기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칭찬하고 싶다.
“이겼니?”
수학여행에서 싸움을 했다는 어기의 말에 걱정하던 네이트가 뒤이어 묻는다. 그 싸움에서 이겼느냐고. 네이트는 어기의 첫 등교 날, 아는 것이 있어도 한 번만 손을 들고 과학시간엔 모두 밟아버리라고 말하며 어기에게 힘을 실어준다. 어기는 아빠의 말대로 과학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수업을 들으며 즐거움을 찾는다.
어기가 처음 학교를 구경하던 날, 줄리안은 어기를 한껏 내려다보며 과학은 선택과목이라 어려울 것이라고 무시했지만 어기는 과학경진 대회에서는 줄리안의 팀을 가볍게 재끼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한다.
“넌 기적 같은 아이야.”
어기는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특별함으로 빛나고 있으니 우리는 평범하기보단 각자 다른 형태의 특별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내 우주의 중심이다. 난 하나의 태양을 두고 돌고 있는 가려진 위성이 아닌 다른 우주의 옆에 머물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우주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고 다른 이의 우주도 나의 우주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자.
상대의 외적인 형태가 아닌 그의 눈과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바라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지? 그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는지 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지. 그의 우주엔 어떤 것들이 가득 차있는지.. 그리고 나의 우주엔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남들에게 말해주고 싶은지에 대해 천천히 살펴본 게 언제였는지.. 부끄럽지만 너무 멀어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내가 부끄러웠고, 평범함이라는 단어조차 뚫고 내려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더>는 이런 나의 부끄러운 우주에 대해,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 대해, 우리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선물한 영화였다.
나는 여전히 어기처럼 커다란 헬멧을 쓰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꺼내 쓰고 있다. 생각 한번, 다짐 한 번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긍정적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보니 여전히 용기 내는 것이 어렵지만, 언젠가는 이 헬멧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만일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의 어기와 나처럼 무거운 헬멧을 쓰고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이 영화를 보고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특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마음껏 사랑하고 믿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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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를 매료시킨 K-Pop?!
K-Pop 걸그룹 영화 소니에서 제작
할리우드 리포트 Variety지는 지난 8일 (현지 시간) CGI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회사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 사가 K-Pop에 대한 영화를 기획 중이라고 단독 공개했다.
출처 : Variety
<케이팝: 악마 사냥꾼> (원제 - K-Pop: Demon Hunters)은 K-Pop 걸그룹 스타들이 공연 중에 악령을 죽이는 영화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로 오스카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상을 거머쥔 제작사 '소니'에서, 매기 강 감독과 크리스 애펠한스 감독에 의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레고 닌자고 무비>에 크레딧을 올린 매기 강 감독은 영화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그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K-Pop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혔다. 영화는 액션 어드벤처 장르로, 세계적인 걸그룹이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의 삶과 악령을 퇴치하는 비밀 요원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 과정을 따라간다. 특히 이 영화는 패션, 음식, 스타일 그리고 음악 등 다채로운 미쟝센을 자랑할 예정이다.
매기 강 감독은 "K-Pop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90년대부터 이 장르의 팬으로서, 이번 영화는 K-Pop에 대한, 그리고 그녀의 뿌리에 대한 러브레터이다. 영화는 K-Pop 전반에 대한 모든 걸 망라하며, 평생을 팬으로 살아온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담았기에, 전 세계 수백만의 K-Pop 팬들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아이돌 BTS가 빌보드 차트를 수성하고, 그래미 시상식 후보에도 오르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는 K-Pop의 높아진 위상을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18년, 세계적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가상의 K-Pop 걸그룹을 선보이며, 한국 아이돌 그룹 '(여자)아이들'의 멤버 소연과 미연이 직접 참여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과연 이번 영화는 어떤 한국 걸그룹을 모델로 하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영화 <미나리>의 한예리 X 작곡가 에밀의 "Rain Song"
개봉일부터 현재까지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영화 <미나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 "Rain Song"은 오프닝 장면에서는 악기로만 연주되고, 마지막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가사와 함께 등장한다.
곡의 작곡가이자 작사가인 'Emile Mosseri'는 이 곡이 배우 한예리를 위한 자장가가 되길 바랐다고 말했는데, 한예리는 극 중에서 이 곡을 아들 '데이빗'에게 불러준다.
"가정의 회복을 주제로 한 영화이기에 그들의 고군분투와 사랑을 더 잘 담아내고자 한국인 번역가이자 작사가 '스테파니 홍'과 함께 작업했다."고 말하며, 작곡가 Mosseri는 그가 맨 처음 작업했던 영어 가사의 노래는 정이삭 감독의 추천으로 한예리의 한국어 노래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새로운 날을 만들어가는 '비'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긴 이 곡은 한예리 특유의 유약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한예리가 한국에서 부르고, Mosseri 작곡가가 L.A.에서 작업한 "Rain Song"을 함께 들어보도록 하자.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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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의 영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속 주인공들의 근황이 궁금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2005~2010)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아시나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등 수많은 판타지 영화가 있지만 이제는 정말 추억속으로 사라진듯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가 있는데요. 오늘은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한 주연 배우들(보통 어린 배우들 이었죠)은 현재 무슨 활동을 하면서 지내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3편이 나온지 벌써 11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가장 최근 근황이 궁금궁금!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윌리암 모즐리
4남매 중 첫째, '피터 페벤시' 역
첫번째는 극중에서 맏 형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첫째 '피터 페벤시' 역을 맡은 87년생 배우 윌리암 모즐리라는 배우인데요, <나니아 연대기>이후에 유독 눈에 띄는 작품 출연이 얼마 없었으나 짧게 출연한 3편을 마지막으로 여러 작품에 간간히 눈도장을 찍은 배우인데 최근 2016년도엔 <언프렌드>라는 독일 영화, 또 가장 최근엔 잘 알려지지 않은 <더 베일>이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에서 가장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배우였는데 그 이후에 작품 활동이 얼마 없어서 아쉬운 배우이기도 하네요,,
<나니아 연대기> 이후의 작품.
안나 팝플웰
4남매 중 둘째, ‘수잔 페벤시’ 역
페이스만 본다면 여러 영화에서 많이 본듯한(?) 느낌을 주는 88년생 그녀이지만,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이후에 '헤일로: 슈퍼솔져 2012'라는 작품과 '레인 1, 2' 드라마 시리즈 밖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인데요, 특히 이 배우는 나니아 연대기 후 영화보다 드라마 쪽으로 많이 성장해 나가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지만 영화쪽으로도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배우였습니다, 최근에는 드라마, 영화 둘다 활동을 안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는 본래 4편까지 계획 했으나 배우들의 나이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죠,,
<나니아 연대기> 이후의 모습들
스캔다 케인즈
4남매 중 셋째, '에드먼드 페벤시' 역
91년생 배우로 나니아 연대기라는 작품 이후에 유일하게 작품활동이 하나도 없는 셋째, 에드먼드 페벤시 역을 맡았던 '스캔다 파인즈', 그 이유는 시리즈 이후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활동을 중단했다고 하는데요, 그 선택은 정말 성공적 이었다고 합니다. 최근 근황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다닌다고 해요. (유독 호강하는 미모로 많은 여성 팬들에게 인기를 끈 배우였던,,) 마지막으로 이 배우는 근황이 얼마 없기 때문에 최근으로 추정되는 사진들과 여심을 울렸던 <나니아 연대기> 속 모습들과 함께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워후,, 잘생기긴 했,,,
조지 헨리
4남매 중 넷째, ‘루시 페벤시’ 역
"가장 잘 자라준 배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막내 역을 맡았던 순둥순둥 배우 95년생의 '조지 헨리', 그녀도 유난히 눈에띄는 작품 활동은 얼마 되지 않지만 안나 팝플웹과 비슷하게 <퍼펙트 시스터즈>, <더 시스터후드 오브 나이트>란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인데요, 그 이후에 작품 활동은 되지 않지만 95년생 이라는 아직 어린 나이의 여배우인지라 꼭 영화 작품에 출연했으면 하는 배우이기도 하네요. 아래사진은 거의 최근 사진들!
벤 반스
'캐스피언 왕자/왕’ 역
다음은 그래도 국내 팬들의 눈에 익숙한 81년생 배우 '벤 반스' 입니다. 그는 어린 던스텐 쏜 역을 맡았던 영화 <스타더스트>라는 작품으로 눈도장을 찍은 배우이기도 한데요, 또한 그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2편의 주인공격 캐스피언 왕자로 나왔던 그는 시리즈 이후에 큰 작품들은 아니지만 영화 <더 스토리: 세상에 숨겨진 사랑>에서 조연, <빅 웨딩>이란 영화에서 주연, 그리고 상당히 많이 아쉽던 2015년에 개봉한 판타지 영화 <7번째 아들>에서 주인공 톰 역을 맡으면서 여러 작품들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입니다. 7번째 아들이 흥했었으면,,
<7번째 아들> / <재키 앤 라이언>
윌 폴터
'유스터스 스크럽’ 역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의 주연은 4남매의 사촌으로 나오는 유스터스 스크럽 역을 맡은 배우이자 나니아 연대기 이후 가장 눈에띄는 작품들에 다양하게 출연한 배우인 윌 폴터 입니다. (3편에만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죠),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영화 <메이즈러너> 1편에서 갤리 역, 디카프리오, 톰 하디 주연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선 짐 브리저 역으로 출연해 많은 분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던 배우인데 93 년생으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배우중에 한명이기도 한 배우입니다. 2014년도엔 제67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
<메이즈러너>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리암 니슨 / 틸다 스윈튼
'아슬란’ / ‘하얀 마녀’ 역
또한 그 외에 간간히 등장한 1, 2, 3편에 진정한 주연 사자 역의 에슬란/아슬란의 목소리를 녹음한 '리암 니슨'과 1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등장한 하얀 마녀 '틸다 스윈튼' 배우들은 현재 최고의 헐리우드 배우들로 자리 매김 하고있으며 더 쟁쟁한 배우들이 되었습니다.
진짜 4편 은의자가 너무 보고싶은(..)
소설도 굉장히 재밌습니다 ( ^ω^ )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배우들
7년이 지난 이젠 정말 추억속의 영화가 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배우들을 앞으로도 다양하고 좋은 작품들로
만나보았으면 합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소남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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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드세요 연상호씨,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감상해주세요!
** 영화에 대한 비난이나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영화 '염력'을 개봉하자마자 관람했습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였기에, 많은 호불호가 갈릴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염력의 장단점과 캐릭터 특징을, 2분 안에 주관적으로 압축하여 빠르게 정리해봤습니다. (이 때문에 영상 편집 퀄은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영상 속에 아기자기하게 많은 재미요소가 들어가있으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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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력 #연상호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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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스파이 후기 /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대배우인 이유 / 삭발투혼에 전라 누드까지.. / 냉전시대의 비극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더 스파이”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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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슨> 메인 예고편
가난한 이민자 출신으로 런던 교외에서 3남매를 키우며 살아가는 벨라. 어느 날 청각장애를 가진 딸의 몸에 난 멍자국이 정부 당국의 오해를 부르고 벨라의 아이들은 강제입양 당할 상황에 처한다. 자신의 가난과 남편의 실직, 그리고 딸의 장애에도 침묵하던 사회 시스템은 한 순간에 나타나 그녀와 가족의 삶을 아프게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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