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신고

댓글 신고

rewr2023-03-13 07:56:19

일상의 편리함을 빚진 우리가 공범이 되지 않으려면

〈다음 소희〉 리뷰

7★/10★

 

 

 

지하철을 고치다가, 자동차를 만들다가, 뷔페 음식점에서 수프를 끓이다가,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다가, 생수를 포장‧운반하다가, 햄을 만들다가, 승강기를 수리하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이용하는 모든 일상 영역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2017년 1월. LGU+의 전주 소재 하청 콜센터에서 현장 실습을 하던 마이스터고 학생 홍수연 양이 저수지에 투신했다. 홍수연 양이 담당한 일은 서비스 해지를 요구하는 고객의 전화를 ‘방어’하는 일이었다. 서비스를 중단하라는 고객과 연장하라는 상담사 사이에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갔을 리 없다. 고객은 왜 빨리 해지하지 않느냐고 항의하고, 상담사는 그 요구를 어떻게든 되돌리려 안간힘을 썼다. 고객은 친절할 필요가 없지만 상담사는 늘 따뜻하고 밝은 목소리여야만 한다. 회사의 실적 압박도 문제다. 회사는 왜 콜 수가 떨어지느냐, 왜 고객의 해지 요구를 막아내지 못하느냐며 센터 노동자들을 닦달했다. 홍수연 양은 임금뿐 아니라 성과 인센티브도 제때 받지 못했다. 실습생이 격무를 견디다 못해 도망가면 ‘손해’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마저 제때 지급하지 않으며 고등학생 노동자를 볼모로 잡은 것이다.     

 

 

 

 

 

 

  영화 〈다음 소희〉는 홍수연 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즉 이 영화는 안전하게 노동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가장 위험한 곳에 던져진 학생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마땅한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자들이 모두가 피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터로 내몰린다. 취업률이 이유다. 영화에는 소희가 자살한 후 그녀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좇는 형사 유진이 회사 담당자와 만나는 장면이 있다. 유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법적 절차들을 따져 묻자 회사 담당자가 말한다.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억지로 붙잡아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들었으면 왜 먼저 그만두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다. 회사에는 책임이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소희는 여러 번 ‘말했다’. 그나마 자신을 보듬어주던 팀장이 먼저 자살했을 때, 팀장의 자살에 침묵하라는 회사의 각서에 서명했을 때, 네가 그만두면 회사와 학교 관계가 틀어져 후배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선생님에게, 자녀가 대기업에 다닌다며 마냥 좋아했던 부모님에게 말이다. 다만 그 말이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소희가 다니던 학교에는 ‘빨간 명찰/빨간 조끼’가 있었다. 이는 취직했다가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온 학생을 낙인찍기 위한 시각적 표지 역할을 했다. 요컨대 소희 주변에는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야’라며 다그치는 어른, 버티지 못하면 낙인찍는 폭력적인 시스템만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노동인데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노동 환경을 문제 삼는 어른 대신 말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던 유진은 회사, 학교, 교육청 등을 연달아 방문하여 ‘담당자’를 추궁한다. 하지만 적확한 담당자는 없다. 회사는 소희 탓, 학교와 교육청은 취업률과 연계된 지원금 탓을 한다. 유진은 여전히 화가 난 상태지만 더는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 교육부에 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대통령을 만난다면 잘잘못을 가릴 수 있을까?     

 

 

 

 

 

 

 

  직업계 고등학교의 현장 실습 제도는 1963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다. 처음에는 ‘교육’이 목표였으나 점차 ‘학생 인력’을 활용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실습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잇따르자 참여정부에서 업체 파견형 실습을 폐지했으나 MB가 대통령이던 2008년 4월에 부활했다.* 그 이후 우리는 꾸준히 산업 현장에서 고등학생들이 죽는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러나 늘 슬픔과 안타까움은 일시적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대체로 일회성 기삿거리로 언급되고는 곧잘 잊혔다. ‘인문계 고등학생이 아니라서’, ‘특성화고가 가난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주로 가는 곳이라서’ 따위의 편견이 기억의 휘발을 부추겼을 것이다.     

 

 

 

  초췌하고 힘없는 소희의 얼굴과 그런 소희를 제대로 추모하기 위해 분노하는 유진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딱하다’며 혀를 끌끌 차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얼굴들이 있다. 그들은 종종 구체성을 상실해 추상화된 ‘노동자’라는 기표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표정을 잃은, 생떼 부리는 집단 정도로 막연히 추정되고 마는, 필수 노동을 하는데도 필요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는 얼굴들의 구체성을 복원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소희와 유진의 얼굴 역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소희’의 비극은 또다시 반복될 확률이 높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 일상의 편리함을 빚진 우리들은 소희의 죽음에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80273.html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256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

Relative contents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