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인적으로 내가 작년부터 국내개봉만 기다려왔던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의 수상 후보에 오르고,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레나테 라인스베는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
하지만 사실 수상여부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왠지 내가 깊이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작품이다'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지 않나.
이 영화가 내겐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이런 내 느낌은 적중했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매 순간순간을 그저 즐기면서 관람했다.
영화는 의학을 공부하던 주인공 '율리에(레나테 라인스베)'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조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 율리에는 끊임없이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의학을 전공하다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도 하고, 사진을 배우다가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서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이후에 우연히 에이빈드를 만나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기도 하고.
그녀는 정해지지 않은 길을 끊임없이 달려가고, 또 나아간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챕터들을 통해 율리에의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각본을 소설 작품처럼 12개의 챕터로 만든 이유에 대해 감독 요아킴 트리에는
'인생의 챕터들 사이의 공간이 실제로 보이는 공간만큼 소중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
이 작품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영화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라고 답했다.
율리에와 '악셀(안데르스 다니엘슨 리)'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지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확연히 달랐다.
나이차가 어느 정도 있는 둘은 삶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다.
성공한 만화가로서 비교적 뚜렷한 목표와 앞날이 있는 악셀과 달리, 율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또 방황하곤 한다.
율리에는 자신에게 안전망은 없지만 머무를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복잡한 자기 자신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 이전에 우연히 만나서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던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에게로 향한다.
우연히 한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둘은 서로에게 애인이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에 차마 바람을 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선을 정해두고 그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우연히 율리에가 일하는 서점에서 재회한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에이빈드는 이런 자신을 '최악의 인간이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율리에는 자기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하나 끝까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이런 자신을 참아줘서 고맙다'라고 말하곤 했다.
율리에에게 에이빈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율리에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옛연인인 악셀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율리에는 병실에 있는 악셀을 찾아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점에서 악셀과 율리에가 나누는 여러 대화들의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악셀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자꾸 지난 날을 곱씹고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이건 '예술'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율리에가 악셀에게 '아이를 가지고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냐'고 묻자 악셀은 자기자신도 불안했지만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확신을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악셀은 항상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악셀은 율리에에게 '내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는 네가 얼마나 멋진지를 깨닫게 해주지 못한거다'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율리에를 평생 동안 제일 사랑했다고. 자신은 죽어서 추억으로, 목소리로만 남는 게 싫다고. 자신의 집에서 율리에와 같이 살고 싶다고.
악셀과 율리에는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났고, 서로 다른 걸 원했다.
악셀은 비교적 안정적인 삶 속에서 보편화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원했고,
율리에는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단계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시로 꿈과 목표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서로 다른 삶의 단계 속에서 각자가 생각한 최선의 선택을 했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던 사랑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챕터인 12장은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이다.
악셀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율리에도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에이빈드와 헤어진 율리에는 사진작가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우연히, 에이빈드가 새로운 여자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율리에의 눈빛은 더 깊고, 복잡하고, 또 평화롭다.
영화의 긴 호흡을 따라가면서 그저 율리에의 삶을 지켜보며, 율리에가 하는 고민과 선택들을 복잡한 생각 없이 단순히 마주하며 끝까지 관람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괜히 눈물이 나고 공허한 기분이 드는 나 자신을 마주했다.
아마도 인생은 그래도 살아진다, 살만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인생은 너무 덧없다는 생각이 공존하기 때문이겠지.
사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부끄럽지만 '조금은 내 얘기 같고, 어쩌면 앞으로 이어질 내 얘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 운명이길 바라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그 무언가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무언가'는 오지 않기도 하고.
이게 적합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그런 선택을 한 내가 너무 최악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하나 끝까지 이루어내는 일이 없어서 나 자신이 엉망이 된 것 같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선택들이 후회가 되어 한꺼번에 밀려오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나 자신이 너무 괴짜같고.
나는 나 자신이 최악으로 느껴질 때가 너무 많다.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위로삼아 자주 건네는 말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잖아.
이 영화는 이런 말을 건네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나 스스로에게 위로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로를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영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담'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했기에 최악이라고 느껴질법한 선택을 했고, 또 그 선택들에 후회했고, 이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
이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랑과 이별, 좌절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했으며, 무수히 많은 그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또 이 과정 속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지켜냈다.
감히 타인의 선택에 대해 '최악'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다보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악'이라는 지점에 도달한 후, 그 다음에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도약하는지'인 것 같다.
그러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게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무한하지 않은 생애 속, 끊임없이 도전하고 갈망하는 율리에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25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반드시, 꼭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