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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3-04-24 07:57:16

모자 관계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다

〈라이스보이 슬립스〉 리뷰

9★/10★

 

 

 

  캐나다로 이주한 한인 모자의 이야기를 담은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여러 모로 〈미나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백인이 주류인 서구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아픔과 고난을 밀도 높게 담아내면서도 아시아인/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거와 단절하지 않은 채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주제의 측면에서만 접근해 〈미나리〉 계열의 영화로 뭉뚱그려서는 곤란하다. 처음 몇 장면으로 단숨에 영화의 주제와 방향성을 강렬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소수자 이슈를 다루는 영화의 전형성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체성, 혼란, 삶, 미래의 문제를 풀어낸다.     

 

 

 

  모든 이야기는 1960년에 시작된다. 한 사찰에 누군가 아이를 몰래 버리고 간다. 그 아이에게는 ‘소영’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어느덧 어른이 된 소영은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남자는 정신 질환으로 자살해버린다. 이미 ‘고아’로서 한국 사회에서 낙인찍힌 존재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알고 있는 소영은 ‘미혼모’로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대신 캐나다로의 이주를 선택한다. 여기까지가 짤막한 내레이션으로 제시되는 소영과 그의 아들 동현의 출발점이다. 

 

 

 

 

 

 

  ‘노란’ 피부, ‘냄새나는’ 음식, ‘찢어진(혹은 언젠가 찢어질 거라 예상되는)’ 눈,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엄마 손에 이끌려 억지로 학교에 들어간 동현이 백인 학생들과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아시아 여성을 수동적 성적 대상으로 보는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소영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소영은 위축되거나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서툰 영어로나마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분노하며 이를 시정하려 든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라이스보이’라고 놀림받은 동현은 참지 않고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백인 아이들의 ‘정서적’ 폭력과 동현의 물리적 ‘폭력’은 동등하게 여겨지지 않고 책임은 동현에게만 지워진다. 이것이 소영과 동현이 사는 세계의 모습이다.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인식할 줄 아는 소영과 동현은 조금씩 지금 그들이 자리한 자리에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소영은 아버지 이야기만큼은 동현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비극적 삶이 취약한 동현의 자존감‧정체감에 또 다른 타격으로 다가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체성과 뿌리가 모든 고민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동현은 소영의 침묵이 불만이다. 소영이 사이먼이란 남자와 연애를 하고 곧 결혼을 앞두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과거를 흐릿하게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계보’로 들어가는 데 동현이 느끼는 막연한 거부감은 당연하다.     

 

 

 

 

 

 

 

  그러나 뜻밖의 계기가 찾아온다. 동현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꺼리는 소영과 아버지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동현의 욕망은 결코 그들이 바라지 않았을 방법으로 해소되어 두 사람의 뿌리를 향한 여정으로 인도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소영과 동현의 이야기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의 질감은 영화의 전반부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영화의 주제 역시 이에 맞추어 심화‧전환된다. 영화의 전반부가 캐나다에서 동양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어려움과 그 어려움이 만들어내는 두 사람의 관계성에 집중했다면, 후반부는 두 사람의 뿌리와 정체성 그리고 이를 향한 여정에서 새롭게 다져지는 관계성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상호적 돌봄이라는 모자 관계의 양상이 구체화된다. ‘고려장’이라는 잔혹하지만 가슴 찡해지기도 하는 모자 관계의 설화를 새롭게 변주해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두 사람이 펼쳐내는 모자 관계의 깊이와 다채로움이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동현은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밀고, 늘 끼던 파란 렌즈 대신 안경을 쓴다. 소영은 감춰온 비밀을 공유한 후 오랫동안 혼자 감당해왔던 슬픔을 동현 앞에서 완전히 토해낸다. 동현은 모호한 과거를 명확히 인식하고, 소영은 공유하지 못한 과거를 온전히 나누는 것이다. 이들이 그다음 단계에서 펼쳐낼 새로운 모자 관계의 양상이 궁금해진다. 어려움 속에서 의지하는 존재였다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며 돌보는 존재로 나아간 두 사람이 펼쳐낼 또 다른 모자 관계의 구체적 내용 말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속성이 담겨 있을 테다. ‘엄마’와 ‘아들’이라는 관습적 명명과 함의가 이들의 관계 역동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모자 관계에서 피어나는 무한한 가능성에 관한 상상을 촉발하는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성취에 기꺼이 동참해보기를 권한다.          

 

 

 

 

 

 

*캐나다에서 자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보고 자란 아시아 여성은 늘 당당하고 부당한 요소에 화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인데, 왜 미디어에서는 아시아 여성을 수동적으로만 재현하는지 의문이었다며 소영을 적극성/당당함을 갖춘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분노한 흑인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분노한 흑인 여성 이미지는 보통 주류 미디어가 이들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다뤄지지만 여기에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사회에서 자신과 자녀를 지키기 위한 적극적 행위자성이 담겨 있다. 소영이 자신과 아들 동현을 위해 싸우듯 말이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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