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2 20:06:37
[JIFF 데일리] 마음 가는 방향으로
<비밀 문자> 리뷰

OVERVIEW
비밀 문자 누슈에 대한 매료로 연결된 두 명의 중국인 밀레니얼 여성을 과거와 현재에 걸쳐 따라간다. 수백 년 된 이 언어는 여성 공동체의 연대, 희망, 생존을 위한 은밀한 지원 체계로 작동하면서 중국 여성들을 세대를 넘어 하나로 묶어왔다.
REVIEW
예외는 있었겠지만, 수천 년의 중국 역사에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했고 읽거나 쓰는 것을 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 문자인 ‘누슈’를 통해 때로는 신세 한탄을, 때로는 이루지 못할 꿈을 적어 내려가면서 여자들끼리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연대할 수 있었다. 이제 교육 기회가 균등해졌고, 여성의 권리도 전보다 나아지고 있기에 ‘누슈’는 더 이상 계승되기 어려운 ‘잊혀져 가는 문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여성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문자 ’누슈‘를 각자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는 두 여성을 통해 ’누슈‘의 역사와 중국 역사 속에서 여성의 의미, 그리고 그들이 ’누슈‘로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조명한다. 물론 ’누슈‘의 원래 의미와는 정반대로, 그저 예쁜 캘리그라피로만 인식하고 상업화하려는 관료들의 모습은 어처구니없기도 하지만, 불평등 속에서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기록하려고 노력해 온 중국 여성들의 ’놀라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전진수)
세상 다른 수많은 사회처럼, 중국 봉건사회 또한 여성을 기존 제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교육과 사회생활은 요원했고, 자연스레 여성이 스스로 남긴 기록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 전족으로 발 뼈를 부수고 살을 뭉쳐 손쉬운 이동의 자유마저 금했다. 거기서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는 여자들은 자기들만 아는 문자를 만든다.
함께 괴로워했던 여자들만의 문자. 그 문자로 시를 짓고 노래를 하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살아가자는 응원을 전했다. 아주 오래 비밀로 내려오던 문자는 세상에 알려진 후로 누슈(女书)라고 불린다. 문자 그대로 여자가 썼다는 담백한 명칭이지만 거기 얽힌 이야기들은 주렁주렁 많다.
영화는 누슈의 어제와 오늘을 고루 비춘다. 누슈의 전승자인 후신이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몇 년 전부터 누슈를 배우기 시작한 쓰무라는 인물을 더하고, 누슈를 실제로 집에서 배운 누슈의 마지막 명장이자 후신을 가르친 허 선생님까지 이어, 누슈를 계속하는 이들을 담는다.
이들은 누슈를 사랑하고, 누슈의 의미를 지키고자 하지만, 가뜩이나 생은 쉽지 않은 것. 의미까지 더해 업고 가기가 쉽지 않다. 세상은 이들의 누슈를 향한 애정과 같은 시선으로 누슈를 바라보지 않는다. 후신의 글자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위한 자리에서 선물로 주어진다. 은밀한 여자들의 글씨였는데, 술잔을 든 남자들을 위한 선물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글씨와 시로 시작한 누슈는 이제 춤과 공연의 대상이다. 누슈 글씨를 쓰고 있는 여자들에게 몰려온 남자들이 "마을 미녀"들이 글을 쓰고 있다며 동물원에 온 것처럼 굴고는 "친구 하자"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린다.
후신은 누슈로 상당한 성취를 이룬 인물이지만 이혼의 기억을 “여자로서의” 실패로 여기는 마음이 자꾸 올라온다. 다재다능하고 누슈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는 쓰무는 약혼자가 쉼 없이 던지는 말을 들으며 고민에 빠진다. 하루 만에 누슈를 해석해 왔던 듬직한 남자라 생각했응 텐데, 아직 결혼도 하기 전부터 쓰무를 들들 볶으면서도 자기는 부담 주고 있지 않다 말한다. 이들이 사는 오늘의 누슈를, 누슈의 기억을 가진 허 선생님도 바라본다. 그는 오늘날의 누슈가 원래의 누슈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누슈 작품은 대다수가 자매애에 대한 것이다. 원부가를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누슈는 고통이 해소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에 마치 남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여성 간의 연대와 지지를 택했다.
여전히 마을에는 새 신부가 나오고, 새로운 결혼 생활이 시작된다. 그중에는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이야기도 있겠지만, 사랑 아닌 것들도 사랑을 가장한다. 그 허위의 이면에는 몰이해와 몰상식이 있다. 누슈를 인정하고 누슈를 위한 행사에 서 있지만 정작 누슈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들처럼. 사랑과 결혼을 말하며 결국에는 상대가 취해야 할 도리를 가르치려 드는, 결혼도 하기 전부터 임신에 좋다는 쓴 약을 먹이고,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입에 귤이나 넣어주고, 여자가 알아들은 말을 굳이 되풀이해 설명하는 남자처럼.
봉건제도 속의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남자들의 몰상식이 횡행할 때, 누슈의 노래 가사는 생생하게 살아 여기까지 전해진다. 왜 여자들은 마음껏 놀 수 없는지, 왜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지 묻는 노래 가사는 본질을 비춘다. 이런 질문은 새롭고 급진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것뿐인 것을. 대약진운동의 흐름 아래 남녀가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일을 했던 시절을 피부로 기억하는 이들은,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피부로 안다.

누슈를 둘러싼 남자들의 모습은 촌극에 가깝다. 어떻게 저러나 싶을 만큼 우당탕쿵탕 엉망진창이다. 방향성과 타깃조차 설정하지 않고서 상용화를 하겠다고 설치고, 누슈 관련 행사 무대에 '구색을 맞추기' 위한 여성조차 세워놓지 않은 주제에, 제막식 하나도 제대로 못 해서 현판을 떨어뜨리고 난리가 난다. 그들을 보며 역설적으로 누슈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21세기에 저러고 있다니 봉건사회에선 어땠을까. 욕하고 때리지 않으면 다행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도망칠 수도 없는 발을 부여잡고 집안 모든 남자들의 발을 씻겨야 했던 여자들의 삶에 누슈가 어떤 의미였을지.
언어의 본질은 소통이다. 허 선생님과 후신 사이의, 편지를 읽고 틀린 문장을 바로잡아 주는 장면이 뭉클하니 아름다웠던 이유는 바로 그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담길 때 비로소 글자는 의미를 갖는다. (마케팅도 거기서 시작했어야 했다. 누슈 상용화로 뭐라도 해보려고 한 멍청한 중국 남자들이여.)
세상의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양한 말을 듣고, 세파에 흔들리고, 그러면서도 후신과 쓰무를 비롯한 동시대의 수많은 여자들은 자기 삶을 살아간다. 어떤 여자는 유리 천장을 깨는 것이 너무 힘드니 그냥 이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누슈를 받아들인 이들은 앞길을 몰라도 마음 편한 길로 걸어가 보겠다 한다. 내가 떠받들어 살려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강해질 때 새롭게 피어날 세상임을 인지한 것이다.
이들은 누슈를 통해 과거와 대화하면서 오늘을 넘기고 내일로 향한다. 누슈 가사 속의 든든한 큰언니들이, 괴로운 한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의 흔적이, 모르고 가는 길이라도 씩씩하게 나아갈 힘이 되어줄 것이다.
2023. 04. 29. 17:00 CGV전주고사 8관 (247)
2023. 04. 30. 19:30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358)
2023. 05. 01. 16:30 CGV전주고사 5관 (441)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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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진실은 사실과 맥락의 만남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유럽을 탈환하려는 영국군은 시칠리아 상륙을 앞두고 마치 그리스가 작전 목표인 것처럼 히틀러를 기만할 작전을 궁리한다. 이미 독일군의 방어선이 시칠리아 배치된 가운데, 그들을 꾀어내려는 영국군의 수많은 작전들은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던 중 해군 정보장교 ‘이웬 몬태규(콜린 퍼스)’와 ‘찰스 첨리(매튜 맥퍼딘)’는 부관인 '이언 플레밍(자니 플린)'의 아이디어에 착안해 이른바 ‘민스미트 작전’을 계획한다. 익사한 해군 장교로 위장한 시체에 가짜 작전 계획을 흘려서 독일군이 자연스럽게 영국군의 기만책에 속도로 만들자는 것. '고드프리(제이슨 아이삭스)' 제독의 부정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처칠(사이먼 러셀 빌)'은 민스미트 작전의 시행을 지시한다. 이에 몬태규와 첨리는 '진(켈리 맥도널드)'과 '헤스터(페넬로페 윌턴)'의 도움을 받아 런던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를 영국의 해군 장교 ‘윌리엄 마틴’ 소령으로 위장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었던 듯한 인생을 만들기 위해 개인적인 사진과 공연 티켓도 준비하며 빈틈없는 첩보 작전을 준비한다.
'민스미트 작전'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지중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시칠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작전이다. 흔히 민스 파이로도 알려진 영국의 전통 음식인 '민스미트(Mincemeat)'라는 이름에서 이 작전은 그 목적이 드러난다. 고기(meat)라는 이름과 달리 말린 과일과 스파이스, 으깬 사과, 시트러스, 견과, 그리고 (때때로) 약간의 브랜디로 속을 채운 음식처럼, 연합군의 공격을 예측해 시칠리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독일군을 유인하기는 미끼를 던지는 작전인 것이다.
통상적인 첩보영화와는 다른 <민스미트 작전>
그래서인지 <미스 슬로운>으로 이름 알린 존 매든 감독과 <1917>, <이미테이션 게임>의 제작진이 만난 <민스미트 작전>은 전쟁에는 보이는 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이 있다는 독백을 통해 첫 장면부터 서로 속고 속이는 첩보작전의 내막, 그 회색 지대의 전쟁을 펼쳐 보일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앞으로 두 시간 동안 '민스미트'를 만드는 과정에 주목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민스미트는 바로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윌리엄 소령의 스토리다. 문제는 스토리라는 민스미트가 누군가에게는 예상과 달리 달고 맛난 반면에, 또 다른 이들에게는 실망만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민스미트는 단지 독일군만 속일 뿐만 아니라, 작중 주인공들도 낚고, 심지어는 관객들까지도 낚아채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스미트 작전>에서는 흔히 첩보영화가 흔히 가지고 있는 공식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거대한 전투씬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스파이 간의 치열한 정보전이나 속고 속이는 간계나 음모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작전을 세우고, 상대가 속아 넘어오도록 기다림을 가지고 미끼를 흔드는 과정보다는 윌리엄 소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드는 과정에 더 주목한다.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군인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그의 가짜 신분을 만들고, 닮은 사람을 골라 가짜 신분증을 만들고, 그의 성향과 성격도 가정하고, 있을법한 연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만드는 세세한 과정이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민스미트 작전>에는 소설이나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드는 고충으로 가득하며, 이는 통상적인 첩보영화에 가득한 팽팽한 긴장감과는 다른 결의 긴장감이 러닝타임 내내 감도는 이유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사실과 맥락
흥미로운 것은 몬태규와 첨리가 독일군을 속일 진실을 만드는 방식이 미국의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이 지적한 그대로라는 사실이다. 리프먼은 그의 저서 <여론>에서 "진실의 기능은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 그 사실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은 개별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것과 그것들의 조합을 찾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즉, 사실이 눈에 보이는 텍스트(text)라면 그 텍스트들이 모인(con) 연관성, 곧 맥락((context)을 파악해야만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민스미트 작전' 역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나 사안은 윌리엄 소령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사건들이 위치한 맥락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데 집중한다. 물에 빠져 익사한 시체와 작전 계획, 연애편지가 텍스트라면, 그것들의 조합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생긴다. 이 작전의 본질은 각각의 사실이 갖는 취약성과 위험성을 간파해 역이용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사실과 맥락의 관계성을 그저 독일군을 상대할 작전의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는 대신, 독일군을 낚을 미끼를 만드는 주인공들의 삶으로 확장시킨다. 그렇기에 영화의 진면목은 그저 독일군을 속일 진실을 만들어 내는 과정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이 자신의 삶에서 마주한 사실을 어떠한 맥락 안에서 풀어낼 것인지 고뇌하는 대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인물들의 고충은 두 가지 형태로 묘사된다. 우선 하나는 첩보영화에 걸맞은 몬태규와 첨리의 갈등이다. 직속상관인 고드프리 제독으로부터 몬태규의 동생이 소련의 첩자로 의심된다는 사실을 듣고 몬태규를 감시하게 된 첨리. 이제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실과 사건은 몬태규도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의해 지배된다. 반대로 동생이 그저 한량이라고 생각하는 몬태규는 첨리가 증거로 내세운 동생의 각종 활동 사항이 그저 유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첨리에게 날을 세운다.
다른 하나는 로맨스다. 윌리엄 소령을 창조해야 하는 몬태규는 직원인 진의 사진과 실제 사연을 빌리고, 그녀가 직접 쓴 연애편지를 이용해 윌리엄의 가짜 연인을 만든다. 이 로맨스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몬태규는 그의 약혼반지를 구매한 후 약혼녀의 모델인 진의 손가락에 끼워보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클럽에 드나들면서 생생한 연애 감정을 만든다. 문제는 몬태규와 진의 업무라는 단편적 사실이 서로 다른 맥락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와 삼각관계를 자아낸다는 점이다. 진을 짝사랑하는 첨리는 상관과 부하 직원의 관계 이상으로 보이는 둘을 보면서 질투에 사로잡힌다. 첨리에게 몬태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에 빠진 진은 그간 봐온 몬태규의 모습과 그로부터 로맨틱한 감정도 가짜라고 단정 짓는다. 자신이 그저 일을 한다고 생각했던 몬태규는 뒤늦게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영화는 독일군이 볼 사실과 맥락의 관계를 왜곡시켜야 할 이들이 정작 눈앞에 놓인 퍼즐 조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서로 다른 맥락 안에서 사실이 자아내는 긴장감과 감동
<민스미트 작전>은 사실과 맥락의 관계 앞에서 눈물 흘려야 했던 이들의 개인적 고뇌와 실패를 다시금 군사 작전을 둘러싼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윌리엄 소령의 시체를 스페인 해안가에 보냄으로써 입안한 작전을 모두 실행에 옮긴 몬태규와 첨리. 이제 본인들도 독일군이 보여주는 파편적인 사실만을 통해 나치의 계획을 간파해야 하는 만큼, 그들은 제한된 사실만 볼 수 있는 독일군이 의도한 대로 잘못된 맥락을 추론하기만을 기도한다. 이때 그들이 독일군의 반응과 시칠리아 상륙 작전의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을 맛 본 이상 그들이 완전히 잘못된 판단에 빠질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의 스파이를 모두 파악하여 감시하고 있다고 자신하던 차에 난데없이 등장한 새로운 스파이의 존재가 몬태규와 첨리의 갈등과 삼각 로맨스, 그리고 그들의 작전 계획에 종지부를 찍는 이유다.
한편, 역사가 스포일러인 영화의 끝은 사실과 맥락의 관계를 비틀어 뭉클한 감동을 안기기도 한다. 성공적인 기만 작전 덕분에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는 데 성공한 연합군. 경미한 희생이 있었을 뿐이라는 처칠의 전보는 이를 두고 기뻐하는 이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러나 전보의 글자 사이사이에는 검은 연기로 가득한 가운데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송하는 시칠리아 해변의 풍경이 숨어있다. 몬태규와 첨리도 긴 시간 매달린 작전이 성공했는데도 소소하게 자축한다. 이렇게 영화는 동일한 사실도 다른 맥락 사이에 놓인다면 기쁨과 슬픔, 또 허망함이라는 상이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짜 윌리엄 소령의 무덤을 비추는 엔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국가적 시점에서는 영웅이지만, 가족에게는 그저 실종된 남매이자 아들이다. 사회 공동체 입장에서는 희생정신의 상징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전쟁의 희생자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묘비를 비추는 장면에는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정반대로 갈릴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민스미트 작전>은 적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싸운다는 절박함 만큼이나 마치 한 편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듯 보이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해군 정보국장 부관이자 <007> 시리즈의 작가인 ‘이안 플레밍’이 있다. 영화는 ‘민스미트 작전’의 초안이 된 ‘송어 메모’를 작성한 바 있는 그가 마치 007 시리즈의 일부 구절을 집필하는 듯 독백하는 장면으로 수미상관 구조를 이룬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어떠한 맥락 안에 사실의 조각들을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예술가의 고뇌와 번민을 전쟁영화의 틀을 빌려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작가라고 외치는 첨리의 대사나, 'M'과 MI6의 존재를 비롯해 해군 장교 출신인 제임스 본드의 유래를 암시하는 대목들도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준다.
문제는 이처럼 사실과 사실을 엮는 맥락, 그리고 사실을 통해 진실을 유추하는 이야기가 일관된 주제를 전달하는 것과는 별개로, <민스미트 작전>이라는 제목을 보고 관객들이 기대할 장르적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집필해 독자들이 납득하는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듯한 주인공들의 행보에 주목한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의 고뇌를 다루는 영화의 감동은 첩보 영화 특유의 긴장감과는 무관하다. 실제로 첩보 장르 치고는 쫄깃한 장면이 그리 많지 않고,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과정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부분도 많다. 즉, <민스미트 작전>은 예고편과 포스터, 공개 전 정보라는 사실을 통해 관객들이 만들어낸 첩보 영화 내지는 전쟁영화라는 콘텍스트와는 다른 진실을 선보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독일군을 속이려는 영국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연적을 속이는 주인공, 그리고 전쟁영화와 첩보영화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로맨스와 예술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민스미트는 상반된 반응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간파한 이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탄탄하고 깊은 메시지로 가득한 파이를, 기대와 다른 내용에 속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는 실망 가득한 파이를 선물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꽤나 시원시원한 전개와 템포가 상당히 빠른 편집 덕분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전자의 재미만으로도 러닝타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사실, 맥락, 진실의 관계로 속을 가득 채운 민스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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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의 칼춤 속 보이는 작금의 현실
혼란의 시대! 말 그대로 <전, 란>은 혼란스럽다.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이 아닌 그 이후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야기에는 전쟁보다 더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 그려진다. 그래서일까. 왜란이 벌어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놓인 조선의 현실을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다. 지금과도 별반 차이 없는 암울한 사회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조선에서 벌어진 혼란의 칼춤으로 소환된 작금의 현실은 무엇일까?
양민이었지만 빛 때문에 노비가 된 천영(강동원)은 콧대 높은 무신 집안의 종으로 들어간다. 그가 하는 일은 그 집 귀하디 귀한 아들 종려(박정민)가 검을 잘못 다를 때마다 대신 맞는 것. 너무 많이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천영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밤마다 종려를 불러 검술을 연습한다. 이후, 천영은 회초리의 위협에서 벗어나 종려의 검술 스파링 상대가 된다. 시간은 흘러, 매번 무과 시험에 낙방하는 종려를 대신해 천영은 무과 시험에 합격하면 면천(免賤, 천민의 신분은 면하고 평민이 됨)을 해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당당히 장원급제를 한다. 하지만 종려 아비는 면천 대신 천영을 죽이려 한다. 오해의 또아리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이들은 임진왜란을 맞는다.
<전, 란>은 시작부터 “조선시대 양민과 천민은 친구가 될 수 있는가?”란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의 무게감을 더하듯 영화는 신분과 계급을 떠나 누구든 평등하다는 의미의 ‘대동(大同) 사회’를 꿈꿨던 정여립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대동의 의미는 곧 왕권을 향한 반란으로 해석한 선조(차승원)는 정여립의 목을 광화문 시장에 전시하고, 공포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곳에 추노에게 붙잡힌 천영이 등장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철저한 계급사회가 존재했던 조선 시대에서 양반과 천민의 우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못 박는 듯하다. 천영과 종려는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유대감을 통해 한 때 동무를 꿈꿨던 이들이긴 하지만 왜란을 겪고, 오해와 불신을 거듭한 이들에게 남은 건 분노와 후회가 점철된 칼부림뿐. 계급과 처한 위치에 따른 둘의 대립은 조정과 의병들의 싸움으로 번진다. 이는 생각과 이념이 다른 이들의 싸움처럼 보이고, 결은 다르지만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도 흡사해보인다. 청과 적의 싸움 등 입는 옷 색깔, 손에 쥔 환도의 모양만 봐도 영화의 제목처럼 이들이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인지 잘 알 수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전, 란>의 주요 이야기는 왜란 이후의 이야기다. 선조를 위시한 기존 세력은 무너진 왕권과 사회를 정립해 나가려하고, 천영을 대표로 한 새로운 세력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한다. 마치 보수와 진보의 싸움과도 같아 보인다.
극 중 왜장 겐신(정성일)이 등장하지만, 영화 속 주적은 배가 고파 시체를 먹는 민중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의병 활동으로 왜놈들을 물리친 이들에게 공을 인정하기지도 않은 채 무너진 경복궁(왕권) 재건에만 힘쓰는 선조다. 이 왕은 최악의 지도자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건 물론, 피난길에 부실한 음식 투정을 하고, 살기 위해 나룻배에 매달린 백성을 처참히 죽이라 명하는 등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희화화 하는 선조의 모습은 백성을 일개 종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는 누가 지도자를 맡느냐에 따라 변모하는 왕권사회의 헛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 여기에 한 술 더 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어떻게든 지속하기 위해 친일파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의 등장과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들의 행동은 울분과 침통함을 곱절 느끼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화는 천영의 성장 서사를 굳건히 다진다. 이는 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의 이름에 뜻이 없었던 천영은 종려를 통해 ‘따를 천’, ‘그림자 영’을 받는다. 이후 의병장 자령(진선규)은 ‘하늘 천’, ‘빛날 영’이란 이름을 받는다. 아무 의미 없었던 평민이 세상과의 대립과 싸움을 거쳐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얻는 과정은 양민도, 노비도, 창의검신도 아닌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후 함께 의병 활동을 했던 범동(김신록)의 이름을 따서 그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까지 이른다.
다만, 흥미롭게 진행되는 역사적 이야기에 비해 극 중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주요 인물은 천영과 종려는 역사라는 무게감에 짓눌렸는지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머리로는 울분과 비통함을 알겠으나, 마음까지는 설득되지 못한다. 차승원, 김신록의 연기는 돋보였지만, 이 또한 마음을 이끌어내는 데는 다소 약하다. 대신 알고 있었지만 영상화된 좌절의 역사를 보는 것 자체는 그 의미가 깊다. 극화된 부분임에도 고난의 연속이었던 민중의 삶을 두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계기는 영화의 큰 의의다. 수위가 높음에도 학생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싶은데 특히 마지막 선조가 열라하는 궤짝 장면은 시청각교재로 꼭 쓰고 싶다.
아쉬움을 달래듯, 영화의 가진 주제의 무게감을 덜어내듯 화려한 검술 액션 눈길을 사로잡는다. <군도: 민란의 시대>만 봐도 강동원이 검을 들면 엑션이 산다는 건 당연지사. 이번에도 그의 검술 액션은 멋진 감상 포인트다. 박정민과 정성일의 검술 액션도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마지막 해무가 가득한 해변에서 이들이 검술 대결은 그 자체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전, 란>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본디 영화제의 개막작이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반영하는 주제를 갖고 있거나 영화제가 지향하는 주제가 담겨 있기 마련.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OTT 오리지널 영화로서 첫 개막작 선정이라는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 보면 안다. 왜 영화제가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했는지를 말이다. 멋진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를 통한 정치, 사회적 이슈를 활용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는 보는 이들에게 갈리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는 건 모두다 마찬가지일 터.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혼란의 칼춤 속 보이는 작금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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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th BIFF 데일리] 세대와 경험을 넘어 흐르는 우정
세대를 넘어선 특별한 우정을 담은 영화 <흐르는 여정>이 관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신다.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소한 만남 속에서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흐르는 시간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주인공 춘희는 세상을 떠난 남편과 함께한 집을 정리하고 새 아파트로 이사한다. 남편이 아끼던 피아노와 자동차, 식물들을 새집으로 들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결국 이웃 주민 민준과 함께 이를 정리하며, 세 사람은 서로의 삶을 채우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간다.
아파트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사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유머와 따뜻함이 묻어난다. 영화는 세대 차이나 편견에서 오는 갈등을 억지로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관계만으로 마음을 잇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삶과 죽음의 흐름을 섬세하게 담아낸 점도 주목할 만하다. 피아노 선율과 함께 흘러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작은 친절과 마음의 교류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채우며 함께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따뜻한 여운과 오래 기억될 감정을 선사한다. <흐르는 여정>은 피아노와 우정이 함께 흐르는 소소하지만 깊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상영스케줄
09-20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09-22 19:30 CGV 센텀시티 6관
09-23 16:00 CGV 센텀시티 5관
09-24 14: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10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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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우성 감독의 새로운 시도, 관객에겐 이질적인 시도
다시 또 혼자
뚜벅뚜벅 걷는 길. 수혁에게 혼자는 낯선 것이 아니다. 정확히 딱 10년 만에 나왔다. 만기출소일. 누군가가 두부를 들고 교도소 입구 기다렸으면 했지만 수혁에게 혼자는 익숙하다. 가족? 딱히 없다. 조직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헌신했지만 돌아오는 건 쓸쓸한 수혁 그 자체였다. 혼자 차를 탄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질렸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사랑했던 사람을 찾아가는 수혁.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수혁에게 민서는 냉담하다.
민서의 냉담한 반응은 당연하다. 갑자기 민서의 곁을 떠났던 수혁.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수혁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다. 수혁을 어떤 사람에게 데려가는 민서. 민서와 수혁에겐 딸이 있었다. 발레를 배우고 있는 인비. 수혁에게 많은 것이 떠나갔지만 이것만은 지키고 싶었다. “인비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 됐다 싶으면 돌아와” 지금 당장 수혁이가 딸 인비에게 가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조금씩 시작하면 되겠지. 평범한 삶을 다시 꿈꾸는 수혁.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전에 일했던 조직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과연 수혁은 응국과 성준을 피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난 응원했어
지금의 충무로를 생각할 때 ‘정우성’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 과소평가 된 감이 있다. <비트>라는 영화로 일약 청춘스타로 등극한 정우성. 지난 몇 년 동안 정우성이라는 이름은 해사하게 빛나던 청춘이었다. 정우성이 갖고 있는 청춘스타로서의 카리스마는 많은 작품에서 시너지를 냈다. 이 청춘스타로서의 이미지가 데뷔 이후부터 꾸준했던 탓에 이 배우를 두고 연기력 논란이 일부 있었다. 실제로 정우성 배우의 퍼포먼스가 아쉬웠던 작품이 몇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성수 감독의 <무사> 같은 영화를 보면 이 사람이 갖고 있는 톤이 변화가 없다. 캐릭터의 입체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던 아쉬운 퍼포먼스였다. 비교적 최신작인 <아수라>에서는 욕하는 대사가 많았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 배우가 나쁘지 않은 감정연기를 보여주는 것과는 별개로 욕설 대사가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후에 <증인>이나 <헌트>로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긴 했다. 그동안 정우성이라는 배우는 액션 연기만 뛰어나지 예술가로서, 연기자로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좋은 연기를 보여준 작품 많았다. 일례로 <증인>에서의 변호사 연기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으로 수상한 바가 있다. <아수라>에서도 이야기의 템포를 황정민, 곽도원 두 배우가 끌고 간다. 광기 어린 에너지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아수라>. 두 베테랑에 밀리지 않게 한도경이라는 역할을 잘 수행한다. 욕설이 어색하다는 지적도 오히려 그 영화의 톤 앤 매너에 어울렸다. ‘강철비’ 시리즈에서의 연기는 두 캐릭터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어디에 방점을 둬야 할지를 분명히 조준한 퍼포먼스였다. 정우성 배우는 최민식, 송강호 배우처럼 화려하게 테크니컬 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연기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객관적인 능력치가 있어서 그걸 매 작품마다 일정치만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정우성 배우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를 가장 뛰어난 액션연기로, 또 마스크로 소화한다. 이런 점에서 정우성 배우는 좋은 배우다. 최근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헌트>에서 연기자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이 정우성 배우가 이번 작에서는 연출을 맡았다. 정우성 배우에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분이 오래전부터 연출에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감독 정우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정재’의 <헌트>다. 이정재 감독이 처음 메가폰을 잡아 칸에 초청됐다는 기사가 나올 때도 (글쓴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말고 감조차 잡기 어려웠다. 뚜껑을 열어본 <헌트>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르적으로 피 말리는 액션/스릴러물이다. <헌트>가 손익분기를 넘김에 따라 다음 해에 <보호자>가 개봉한다는 사실에 시선이 집중됐다. 정우성 감독이 그 나름대로 만들 액션스타로서의 장르물이 기대됐기 때문이다. 유수의 국제문화제에 초청받았던 것과는 별개로 이 작품이 정우성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캐릭터들의 퍼포먼스도 훌륭했다. 그에 상응하는 단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이 영화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영화다. 일반적으로 빌런 vs 주인공의 대결구도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다. 한 명의 주인공이 나머지 악당 무리를 상대한다. 이 대결구도는 지난 5월에 개봉했던 <범죄도시 3>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마석도와 주성철, 리키가 각자 대립하며 극에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도 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만 다른 빌런들도 그에 상응하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그린 고블린’이 영화의 메인 빌런이면서 ‘닥터 옥토퍼스’가 입체적인 캐릭터를 맡은 것이 극의 이야기를 이끄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범죄도시 3>이 취했던 연출 방식과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주인공 수혁과 대립하는 빌런은 네 명이다. 우진/응국/진아/성준이다. 이 네 명의 캐릭터들은 영화에서 나름의 입체성을 부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치고받고 갈등도 일으키며 이야기의 중심으로 기능한다.
이 빌런 캐릭터들을 다수 등장시켜 캐릭터에 개성이 분명하다는 점은 영화의 분명한 장점이다. 하지만 이 인물들이 어디서 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단점처럼 느껴진다. 캐릭터를 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응국은 ‘끝판왕’, 성준은 자격지심, 진아는 외유내강, 우진은 광기다. 각자 다 다른 톤으로 연기한다. 이 각기 다른 개성들은 정우성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봤던 것들이다. 응국과 성준은 <아수라>에서, 진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나 <감시자들>에서, 우진은 <태양은 없다>에서다. 이 위에 나왔던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의 내면 묘사가 본작에 이어진다. <헌트>가 견지한 처절함이 이야기의 개성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기원과 결말이 어디에 향할지 예상이 된다는 점은 신선하지 않은 영화 대사들 덕에 더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 것 같아’라고 예상하게 되는데, 타율이 낮지 않다. 이렇게 인물이 핵심이 되어 자기들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이야기를 이끌어야 할 캐릭터들이 식상해진다는 점에서 이야기에 누수가 생기는 이유가 된다.
액션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로서 장르에 충실한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이자 누아르영화다. 후자 ‘누아르영화’적인 측면은 박성웅 배우가 제 몫을 해 장르 구색을 맞춘다. 누아르영화 특유의 끈적하지만 처절한 분위기가 작품 내면에 잘 깔려있다. 더 큰 문제는 무려 정우성이라는 액션스타가 주인공이자 메가폰을 잡았음에도 장르적인 쾌감이 덜하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 자체의 액션 시퀀스들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장면 자체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다. 하지만 이 장소의 특성과 이 도구를 활용했다는 점이나 이후 인물 대 인물의 액션신은 충분히 영화 내적으로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이 액션이 영화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사에서 이 액션 신들을 장르로서 보여줘야 하니까, 숙제로 풀어야 하니까 넣었다. 똑같이 정우성 배우가 출연한 <헌트>에서 5 공화국 시절 자유에 대한 갈망을 처절하게 드러냈다는 것이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박력이 극의 서스펜스가 된다는 점이 대비되니 더 단점으로 느껴진다. 액션은 좋다. 그런데 ‘액션 만’ 좋다. 이 예술은 서사라는 영화라는 종합예술이다.
또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신을 보면 이 작품의 기획의도가 궁금해진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기대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쓴다면 후반부 전개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시퀀스들의 구성이 영화 전체적인 흐름과 어긋난다. 영화 전체적으로 누아르, 액션물이라고 초반부부터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적어도 그대로 가는 게 좋지 않았을까? 전개 흐름이 이 그대로라면 이 영화가 굳이 주인공이 수혁일 이유가 없다. 반대로 우진-진아 커플이 광기에 찬 인물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응국 캐릭터는 영화에서 이렇다 할 위기를 주지 않는다. 이 영화의 구멍을 각본 스스로가 이미 만들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단순히 몇 이미지만을 피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액션물로 기획됐다면 감독님의 판단 착오라고 보인다. 진부한 이야기가 후반부액션에 힘이 들어가면 분명히 영화가 가진 장점이 됐을 것이다. 영화의 기획력에 아쉬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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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태어나도 풀 수 없었던 '나'라는 숙제와 원죄
두 번의 결혼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야자키 현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리에와 그의 손님 타니구치다. 리에의 옆은 허전하다. 남편은 리에의 곁을 떠났고 사랑하는 아들은 이제 이 이 세상에 없다. 텅 비어버린 삶. 혼자 정리하는 문방구에는 빈 공간이 많다. 지인들이 리에의 문방구에 도착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리에와 사람들. 그럼에도 리에의 일상이 바뀌기엔 시간이 좀 필요한 듯하다. 그녀의 문방구를 들락날락하던 손님 타니구치는 주인 리에의 어두운 그림자를 잘 알고 있다. 사실 타니구치는 리에를 마음에 두고 있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던 타니구치. 문방구점에서 미술도구를 사는 일로 리에에게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잔잔한 로맨스물처럼 보이던 영화는 갑자기 장르적인 긴장감을 덧붙인다. 리에와 타니구치는 오래 걸리지 않아 마음이 통하게 된다. 용기를 내는 타니구치. 리에 역시 마음을 열게 된다. 리에의 상처를 위로할 줄 알았던 타니구치. 리에는 이런 타니구치와 사랑에 빠진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미래. 둘은 결혼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두 사람. 큰 상처가 있던 리에에게 타니구치는 선물 같은 존재다. 어느 날. 남편 타니구치가 일 하러 나갔다. 벌목업을 하던 타니구치. 안전장비를 단단히 챙겼다. 나무를 베는 타니구치. 혼자서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갑자기 사고가 벌어진다. 벤 나무가 잘못 떨어져 타니구치에게 향했다. 나무에 깔려 사망한 타니구치. 타니구치가 세상에 떠났다. 장례식 당일. 타니구치의 친형이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어색한 첫인사를 나누는 리에와 타니구치의 형. 그런데 타니구치의 형은 뭔가 이상한 말을 한다. “잠깐, 이 얼굴 제 동생 아닌데요?”
들끓는 내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핵심은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인생을 톺아보며 ‘어떤 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영화 제목으로 설정한 ‘한 남자’는 작품의 이야기에 대한 은유다. 이 다방면으로 등장하는 남자들은 각기 다른 인물임과 동시에 후반부의 무언가를 암시한다. 일본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영화의 이면에 전적으로 깔려있는 것과 동시에 단지 제대로 살고 싶었던 한 남자의 비명이 각기 다른 인물들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 여러 인물의 내면을 한 사람으로 수렴하는 연출은 후반부까지 집중하지 않는다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주인공 키도의 시점에서 이어진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인물(키도)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다른 캐릭터는 과거에 큰 상처가 있으며 정반대로 규정지을만한 무언가 역시 키도와 이어진다는 점이 이야기에서 핵심으로 작동한다.
영화는 조용하다. 감정적으로 대놓고 폭발하는 장면이 없다. 하지만 진한 울림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 내적으로 품고 있는 고요함 때문이다. 이 고요함이라는 정서는 영화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속성이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속으로 평가할 때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다면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생 이면에 가려져 있는 것을 전부 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서로 교류하며 살아감과 동시에 ‘지엽적인 접근’으로 행복해진다. 영화는 냉정할 정도로 인간이 가진 이 아이러니를 묘사한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 직접적인 화법보다 더 설득력이 붙는다.
따가운 피부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이다. 영화는 이 그림을 초반부에 중요하게 등장시켰다. 사실상 이 그림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근데 거울이 비추는 것은 뒷모습이다. 당시 유행처럼 불었던 초현실주의 화풍과 프로이트의 연구결과가 이 그림에 큰 영향이 갔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꿈, 욕망, 우연성 등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키포인트라고 봤다. 르네는 인간의 뒷모습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표현하는 단초가 된다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앞(표면)이 아니라 뒷(이면)을 보겠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영화의 핵심으로도 이어진다. 그 사람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근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단지 뒷모습을 보고 키도가 어떤 인간인가 생각할 뿐이다. 영화 내적으로 일본 사회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행위가 단지 앞만 봤기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작품의 형식이 이 그림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름이라는 소재를 영화가 이야기를 함축하는 데 사용됐다는 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영화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영화가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핵심으로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과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의 내레이션을 위시로 한 직접적인 감정 묘사 없이 ‘뒷모습을 보는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인물들과 거리 두고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영화 중반부 즈음에 주인공 키도가 유리를 앞에 두고 누군가와 만나는 신에서 극대화된다. 사실상 이 두 인물은 거의 유사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인물 간의 거리 두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이 두 사람이 어떤 히스토리를 가진 인물인지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이 등 뒤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부분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달려 있다. 영화가 러닝타임이 끝날 때 자연스레 던지는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의 답을 ‘금지된 재현’이라는 그림으로 한 듯하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건 사회가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영화가 어떻게 사회적인 문제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이번주에 개봉했던 <타겟>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 중고거래라는 설정보다 ‘여성이 혼자 사는 것의 위험함’이 훨씬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과한 표현도 몇 보인다. <한 남자>는 감정적으로 들끓는 순간에 물음표를 친다. 그리고 인물이 처해있는 입장 역시 거리를 두면서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에 근거를 둔다. 그 이면에 일본 사회에 만연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알려져 있는 범죄 묘사가 그대로 영화에서 중요하게 삽입된다. 이 역시 영화에서 반복되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소모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닌 이야기를 작동하는 원리가 됐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이 영화를 격렬한 스릴러/미스터리물로 보기 어렵다. 실제로 이와 관련한 대사가 후반부에 제시되기도 한다. 영화의 편집과 음향은 철저하게 절제되어 있다. 장면은 그림을 그린 것처럼 통제되어 있다. 이런 연출이 영화를 문학적으로 읽히게 만드는 요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르적으로 쫀쫀한 긴장감을 기대하고 가는 관객들이라면 영화를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거리를 둬 관객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몰입감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안도 벚꽃을 위시로 한 배우들의 감정연기가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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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일까?
* 이 글은 영화사 진진의 언론/배급 시사회에 참여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나는 이따금 노년의 나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머리가 희게 세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가 된 나 자신은, 글쎄, 어쩐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서른이 되어버린 나와 환갑이 되어버린 나의 부모님이 그렇듯, 내가 살아있는 생물인 이상, 별 다른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노년은 언젠가는 온다. 나도 언젠가는 할머니가 될 거라는 소리다.
우리는 흔히 멋진 노년을 그리곤 한다. 선글라스를 멋드러지게 끼고서 타탄 무늬 스커트를 빼 입은 백발의 멋쟁이 할머니. 그게 내가 막연하게 그리는 할머니인 나 자신이다. 이 상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숨어 있다. '늙고 초라하고 평범한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위 '외롭고 사회에 뒤쳐지는' 슬픈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소리다.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별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는 내가 아직 젊어서 가질 수 있는 오만이기도 하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하는 그 생각에는, '저렇게'에 해당하는 많은 노인들에 대한 멸시 혹은 측은함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는 그런 늙음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처럼.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노인과 늙음에 대한 편견과 업신이 도사리고 있다. 국경 밖을 나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물론, '멋지게 늙고 싶다'는 소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멋진 노년'의 범주를 지나치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삶이나 얼마든지 찬란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바로 이러한 노년의 '리즈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다.
1. 고독과 병듦
남편인 슈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 모모코의 삶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둘 뿐인 자식은 거의 연락을 하지 않다시피하고, 늙은 몸과 마음은 병들었다. 그녀의 벗이라고는 부산스러운 상상 친구들 뿐이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 불 꺼진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고 늘 하던 대로 텔레비전 앞에 앉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외로운 노인의 삶 그 자체이다. 이렇다 할 말동무도 없는 모모코는 우울하다. 더 이상 잠에서 깨지 않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도 하고, 언젠가 치매에 걸려 모든 것을 잊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 붙이는 것은 빙하기 이전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녀는 왜, 이제는 화석이 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원시 생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수억 년 전 지층에 묻힌 그들의 처지에 자기 자신의 신세를 대입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때 찬란했을 역사를 지녔으나 이제는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에 그저 전시될 뿐인 삶은, 세상과 모모코 자신이 바라보는 '노인 모모코'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 어제와 오늘의 찬란함
그런 그녀에게도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정략 결혼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신여성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여인은 다름 아닌 모모코였다.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그와 귀여운 자식들을 낳아 삶을 이어나갔던 것도 바로 그녀였다.
영화 곳곳에서 그녀는 그 앳된 시절을 회상하며 그것을 지금의 모습과 대비한다. 그 순진하고 열렬하던 때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모모코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인다. 인생의 동반자와 아이들을 위해 전념한 삶 끝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쓸쓸하게 종착점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모모코는 그 많고 많은 회상 끝에 그녀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겠노라 결심한다.
이미 죽은 남편이나 실망과 슬픔만을 안겨주는 자식, 혹은 그 어느 찬란한 젊은 날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나아간다. 그것은 고립되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쓸쓸한 노년'이라는 편견에서의 자주와 독립이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차마 의지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비로소 그녀에게 기꺼이 손을 내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모모코'라는 삶의 운전대를 잡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녀의 공상 안에서, 그녀는 더 이상 화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매머드이다.
겉보기에 그녀의 삶은 크게 달라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녀는 여전히 쓸쓸한 독거 노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모코는 모모코대로 혼자서 전진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충분히 '리즈 시절'이리라.
노년의 여인을 소재로 삼고 있는 만큼 영화의 전개나 구성은 매우 단조롭다.
무언가 스펙터클하거나 뚜렷한 기승전결을 바라고 감상한다면 이 영화의 재미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좀 슴슴한(싱거운) 집밥 같다. 흰 밥에 절임 반찬 몇 가지가 전부인 소박한 밥상.
처음에는 뭐 이런 걸 밥이라고 내놓았나 싶다가도, 오래 씹고 음미하다보면 단맛이 난다.
그러다가 이따금, 짭짤한 무짠지를 아삭아삭 씹는 것같은 절묘함이 스크린을 감싼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연출이 바로 이러한 무 짠지 역할을 한다.
처음 스크린 너머로 매머드와 원시인을 보았을 때는 무척 당황했지만, 보다보면 그건 그것대로 별미다.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힐링' 일본 영화가 그다지 취향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내는 메시지 자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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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0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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