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고달픈가. 토리(파블로 실스)는 도로를 위험하게 건넜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주의를 듣는다. 여기까지는 어린이를 염려하는 경찰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경찰관은 토리와 로키타(졸리 음분두)에게 신분증을 요구한다. 아이들은 위축된 상태로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카드와 종이를 내보인다. 아프리카에서 함께 배를 타고 건너와 벨기에에 정착하려 하는 11살 토리와 16살 로키타에게 이것은 익숙한 일상이다. 자신이 이 땅에 머물러도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체류증은 중대한 문제다. 토리는 아동학대 피해자라는 것이 인정되어 체류증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로키타는 토리와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어려워 체류증 발급 인터뷰에 번번이 실패한다. 두 사람은 가족 그 이상의 관계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자격이 인정된다.
로키타는 가짜 체류증이라도 얻기 위해 마약을 재배하는 폐쇄된 창고에서 일하게 된다. 이 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로키타는 체류증을 얻기 위해서 마약을 키우고 팔며 성추행과 성폭행과 같은 온갖 무례함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의 자격조건은 ‘얼마나 처리하기 쉬운가’에 달려있고, 사라져도 누구도 찾지 않을 로키타는 이 일에 적합한 인재였다. 로키타의 쓸모는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만 빛을 발한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체류증을 받지 못해 절망하는 로키타에게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라고 토리는 말한다. 아이들은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토리의 살아남는 방법은 ‘숨기’다. 눈에 띄지 않는 것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길이다. 김현경 작가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배웠다는 노래의 가사처럼 토리와 로키타는 고양이에게 먹히는 생쥐의 신세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먹히는 먹이사슬의 가사처럼 끊어낼 수 없는 불행의 고리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로키타가 궂은일을 견디며 얻은 돈은 밀입국 브로커와 엄마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로키타를 착취하는 것은 유럽 땅의 사람뿐만이 아니다. 교회에서 나왔다는 흑인 밀입국 브로커도 아프리카 땅에 있는 엄마도 로키타를 착취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땅 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로키타의 잔인한 현실 속 유일한 안식처는 토리다. 석 달 동안 토리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대마초 키우기를 로키타는 독한 마음으로 견뎌낸다. 체류증을 얻어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토리와 함께 살고 싶다는 꿈 때문이다. 때때로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로키타에게 텔레비전보다 토리의 사진이 심신안정에 도움이 된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가족보다 서로를 아낀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고 친절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에게 다정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살아갈 희망 그 자체가 된다.
작은 친절과 환대
누구나 무조건적인 환대를 받으며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환대가 그가 있을 공간을 인정해 주는 것이라면 햇빛 한점 없는 마약 재배 창고와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는 뒷골목은 환대의 저편에 자리한 공간이다. 영화는 이들에게 공간을 허락하라고 외치지 않는다. 인물들의 행동을 한 박자 뒤늦게 따라가는 카메라는 현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들의 삶을 관조하며 다르덴 형제는 환대의 공간을 만들었다. 로키타의 얼굴을 중심에 가득 채운 화면 구성은 감독이 마련한 환대의 공간이며 적어도 영화 안에서 토리와 로키타는 그 세상의 중심이 된다.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태도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는 분명하다. 토리는 밖에 나올 수 없는 로키타를 대신해 은행에 송금을 하려 한다. 미성년자라 송금을 할 수 없는 토리는 은행에 있는 어른들에게 대신 송금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한 남자는 “대가로 무엇을 해줄 것이냐”라고 묻는다. 토리는 지체 없이 다른 어른을 찾는다. 이번 어른은 그저 호의로 토리를 도와준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대가를 바라고 이용할 것인지,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 것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토리와 로키타를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영화 밖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누군가의 절망을 기회로 삼지 않고 대가 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로키타를 궁지로 몰고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힘은 한 사람의 악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작은 외면과 무례 그리고 욕심이 모여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 없이 죽어간 수많은 로키타들을 위해,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토리들을 위해 작은 친절과 환대의 노래가 필요하다.
웃는 마트료시카는 끊임없이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로 시청자를 끝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한 반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
#반전의 연속, 그리고 그 의미
처음에는 충격적인 반전들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듯 보이지만, 점점 반전이 반복될수록 '이번에도 반전이겠지..'하는 체념의 태도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많은 반전을 이야기 전개의 장치로 활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청자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본질적인 구조 체제가 반전 속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겉을 벗겨도 또 다른 반전이 존재하며, 이는 권력과 시스템의 본질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이케 이치로 : 자아가 없는 자의 강함
세이케는 처음에는 자아가 없지만 능력이 많아, 그저 똑똑하고 영악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시스템을 장악하며 조정하려고 한 존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부터 자아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환경 속에서 생겨난 것일까?
작품을 통해 보이는 세이케의 특성은 철저한 적응력과 감정의 배제이다. 그는 권력을 쥐려는 욕망이 크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오히려 강한 권력욕과 소유욕을 가졌던 인물들은 체제에 의해 제거되거나 무너진다.
#미치우에 카나에 : 끝까지 저항하고 진실을 택한 인물
미치우에는 세이케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주체적으로 자신이 직접 본 것을 토대로만 판단하며 부조리한 시스템에 저항하려 했다. 결말을 통해 미치우에가 결국 패배를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그녀가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은 자신만의 도덕적 신념을 지닌 사람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녀의 선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치우에는 "저는 세이케를 다시 보려고 해요. 그리고 제가 알게 된 것도 사람들에게 알려 줄 거예요. 모두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믿어도 되는지요."라고 말한다.
미치우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았지만, 나는 생각하는 개인 혹은 세상 속 누군가는 미치우에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미치우에는 단순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이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적대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닌 진실을 알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단순히 패배로 끝났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당신의 본질을 이해할 순 없어요. 하지만 알게 된 게 있어요. '저를 잘 지켜봐 주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도움을 요청한다고 생각했어요.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당신도 무섭잖아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니까요. 세이케씨, 저는 당신을 계속 알아갈 겁니다. 그래야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의 본질을 타인이 정의할 수 있는가?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었다. 세이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를 도구로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무서운 존재로 판단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이케 스스로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끝까지 모른 채 살아간다. 미치우에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을 세이키의 진짜 모습을 알기도 전에 그를 선택해 버렸다. 이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얼마나 쉽게 한 사람을 정의하고,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그 사람의 본질을 판단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사람을 선택했다."
이는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회 속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도 보여준다. 이처럼 웃는 마트료시카는 반전을 통해 우리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을 담고 있지 않기에 용두사미라는 평도 많지만, 이 결말을 통해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무관심한 사회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뉴스와 사건이 쏟아지고, 사람들은 몇 줄의 기사나 자극적인 제목만 보고 한 사람의 인생과 성격 등을 쉽게 판단한다. 그것이 정말 진실일까?
작품 속 미치우에는 세이케를 단순한 악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직접 보고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결말은 현실과 다르지 않아 더 씁쓸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발달한 SNS를 통해 빠르게 판단하고 깊이 고민하지 않으며 편한 결론을 선택한다. 한 사람의 삶이나 사건의 본질을 알기도 전에 단 몇 개의 정보만으로 선악을 나누고, 정의를 내린다. 이러한 사회적 태도는 결국 또 다른 세이케를 만들어내거나, 또 다른 용기 있는 미치우에를 외롭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