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케2023-05-15 23:14:17
더럽게 재밌고 끝나면 프레첼이 먹고 싶어지는 영화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
이 영화는 젠더부터 시작해서 자본주의와 계급, 사상과 정치까지 3부로 나누어 다루고 있으며 147분 내내 블랙코미디 그 자체였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의 뜻은 얼굴에서 미간과 콧대를 이은 역삼각형이라고 해요.
이 모양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뒤집어진 계급사회를 의미하는 것 같네요.
1부는 젠더 고정관념을, 2부는 각양각색 부자들의 위선과 자본주의 민낯을 보여줍니다.
3부는 계급도 뒤바뀌어 청소부가 캡틴이 되는 이야기로 상황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뒤바뀌고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전복되었을 때 이 영화의 재미는 배가 됩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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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 WEB에서 선정한 여성감독 최고의 공포 영화
미국의 영화 웹 사이트 MOVIE WEB에서 선정한 여성감독 연출 최고의 공포영화들.
로튼 토마토 선정 2014 올해의 영화 2위 영화 평론가들 사이에서 최근 몇 년간 최고의 공포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바바둑>도 2위에 올라와있는데요. 틀에박힌 뻔한 공포가 아닌 다양한 컨셉의 영화들 같이 만나 보아요
(2012) #아메리칸메리
(2021) #캔디맨
(2021) #티탄
(2021) #피어스트리트트릴로지
(2022) #피기
(2019) #세인트모드
(2022) #부화
(2023) #토탈리킬러
(2014) #밤을걷뱀파이어소녀
(2016) #로우
(2014) 바바둑
(2000) 아메리칸 사이코아메리칸 메리
핸드폰 요금도 내지 못할 정도의 어려운 형편의 의대생 인턴 메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고 있는 똑똑한 의대생이다. 어느날 밀린 공과금 납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물색하던 중, 급여가 괜찮은 아르바이트를 찾아내고, 그곳으로 향하는 메리. 알고보니 그곳은 스트립클럽. 그런데 그곳에서 예고치 못한 수술을 집행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문받던 한 남자가 죽지 않도록 긴급수술을 하는 것. 이에 죄책감과 두려움에 고통스러워 하던 그녀는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며 인생의 (광적인)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캔디맨
들어봤니? 미지의 존재 캔디맨 비주얼 아티스트 ‘안소니’는 새 작품 구상을 위해 어릴 적 살던 도시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오래 전부터 떠돈 괴담을 듣고 매혹되면서 ‘캔디맨’에 대한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는데... 불러봤니? 죽음을 부르는 남자 캔디맨 세상을 뒤흔든 미지의 존재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한 번만 더 부르면 그가 나타나게 되는데… 용기가 있다면 그의 이름을 불러봐
티탄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여성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슬픈 아버지와 조우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
피어 스트리트 트릴로지
셰이디사이드의 과거는 과거로 머물지 않는다. 1978년 여름 캠프. 두 마을 아이들 사이에 긴장과 묘한 끌림이 들끓던 곳. 하지만 끔찍한 사건이 터지며 무시무시한 생존 싸움이 시작된다.
피기
내 이름은 사라. 나를 돼지라 부르며 괴롭히던 친구들이 납치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작은 마을에서 살인 사건도 벌어졌다.끔찍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신고한다 VS 안 한다
세인트 모드
젊은 간호사 모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은 후 세상을 등진 채 극단적으로 기독교에 몰두해 살아간다. 모드는 심각한 암에 걸린 은퇴한 무용수 아만다의 호스피스를 맡게 된다. 모드의 독실한 믿음은 아만다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지고, 모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만다를 구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부화
행복한 가족들과의 일상을 블로그에 공유하는 엄마. 티니아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매사에 필사적이다. 어느 날 티니아는 숲에서 다친 새를 발견하고, 기이하게 생긴 새알을 집으로 가져온다. 엄마의 꿈을 위해 매일같이 체조 연습에 매달리는 그녀는, 가져온 알을 침대에 소중히 모셔놓고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위안을 얻는다. 어머니의 욕심이 커져갈수록 티니아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존재는 알뿐이다. 좀처럼 맘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 속상함을 털어놓던 밤, 알이 부화하고 티니아 가족 근처에서 연신 사고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토탈리 킬러
1987년 10월 평화로운 노스 버넌 마을에서 티파니, 마리사, 페더가 잔인하게 학살당한다. 세 명의 여고생을 죽인 일명 ‘달콤한 16세 살인마’는 수사망을 피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나는 당신의 눈에서 슬픔을 봤어요” 죽음과 고독의 냄새가 풍겨나는 곳 ‘Bad City’. 한 뱀파이어 소녀가 밤마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고요한 길거리를 누비지만 도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소녀는 우연히 만난 소년에게서 슬픔을 느끼는데… 외로운 뱀파이어 소녀와 고독한 인간 소년의 핏빛로맨스가 시작된다.
로우
쥐스틴의 가족은 대대로 채식주의자이자 수의사 집안이다. 쥐스틴은 가업을 잇기 위해 수의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 수의학교는 똥군기를 부리며 채식주의자인 쥐스틴에게 토끼 생간을 먹게 한다. 생간을 먹은 쥐스틴은 생살과 인육에 대한 욕망에 시달리고, 자신의 욕망이 가족의 비밀과 연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바바둑
출산 차 병원으로 가던 중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당시 태어난 아들 ‘사무엘’과 힘겹게 살아가는 워킹맘 ‘아멜리아’. 과행행동장애가 있는 아들은 퇴근하고 돌아온 그녀에게 아빠의 창고에서 발견한 그림책 ‘바바둑’을 읽어달라 조른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동화책이 아닌 악령의 저주가 담긴 금서임이 드러나고, 바바둑은 두 모자의 외롭고 고단한 일상 속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결국 아멜리아는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바바둑과 죽음을 넘나드는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
아메리칸 사이코
트릭 베이트만은 뉴욕 월스트리트 중심가의 금융사 P&P의 CEO이다. 상류계급인 약혼녀 에블린이 있으며, 자신의 친구 약혼녀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아버지의 회사인 탓에 단지 자리만 채우면 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소일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예약에 실패한 최상류층 레스토랑의 단골 고객인 친구 폴에게 적대감을 느낀다. 더군다나 자기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된 명함을 가진 폴을 자신의 아파트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의 팝송을 들으며 그를 도끼로 난자한다. 시체는 패트릭의 옷장에 걸려진다. 패트릭이 수집한 아르마니 셔츠들과 함께. 행방불명된 폴의 행방을 찾기 위해 형사(윌렘 데포 분)가 찾아온다. 그러나 패트릭은 형사의 수사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또 다른 희생자가 나타난다. 거리에서 만난 매춘부, 콜 걸, 파티장에서 만난 모델, 심지어 옛 애인까지. 그는 격렬한 정사 후 전기톱으로 난자를 하거나, 갖가지 도구를 이용해 살인을 한다. 물론 지나가던 행인을 아무 이유없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의 심리는 점점 더 분열되고, 그의 살인은 점점 더 무차별적, 비현실적으로 잔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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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한 믿음 - 영화 <더 웨일>
이 영화는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브렌든 프레이저
희망 혹은 사랑의 밝은 느낌은 결코 찾기 어려운 포스터와 트레일러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다면, 우리는 분명
주인공 찰리 역을 연기한 브랜든 프레이저의 말처럼
이 영화가 사랑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포주의
※ 해당 시사회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주인공 찰리는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보조기 없이는 쉽게 일어날 수 없고, 혼자 힘으로는 떨어트린 핸드폰과 열쇠도 줍지 못하며 천장에 달린 손잡이 없이는 침대에 눕기조차 쉽지 않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망가져 버린 몸과 마음은, 그를 세상과 단절시킨 채 작은 아파트먼트의 소파 위에 가두어버렸다.
마치 망망대해처럼 깊고 어두운 그 속에 말이다.
영화 속 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진짜 사람답게 '사는' 것과 겨우 '살아가지는' 것의 차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마음 속 내적인 고통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또한 말이다. 찰리는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역겹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사실상 이는 스스로에 대한 짙은 자기 혐오가 깔려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삶이 전부 타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찰리 본인의 선택이 있었고, 그 속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혼란, 갈등은 그를 더욱 괴롭게 하는 부분이다. 사랑을 찾아 가족을 두고 떠났던 본인의 이기적인 선택에 대한 죄책감과 결국 자기 삶의 전부였던 파트너를 잃은 고통 속에서 그는 오랜 시간 헤엄치게 되었다.
온라인 강의를 업으로 삼는 찰리는, 학생들에게 작문에 대한 강의를 한다. 그는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성' 이라며 끊임없이 이를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카메라가 망가졌다는 거짓말과 꺼진 검은 화면 아래 본인의 모습을 숨길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본인이 강조하는 진실성과 정직함으로부터 비롯된 당당함이 아닌 세상과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분노와 슬픔만이 가득찼을 뿐이다. 그렇게 분노에 찬 마음으로 노트북을 내던지는 순간, 그는 바깥 세상과 자신을 잇던 유일한 끈을 잘라 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분노에는 마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도 같았던 피자 배달부의 존재가 큰 트리거가 되었다. 배달부는 매일 비슷한 시각, 같은 피자를 시키지만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 찰리에 대해 은근한 걱정과 관심을 주었다. 문 앞에 피자를 놓으며 찰리의 안부를 묻고, 짧은 대화와 더불어 심지어는 통성명까지 한다. 하지만 찰리의 모습을 마주한 그가 내뱉은 탄식 한 마디는 벼랑 끝에 있던 찰리를 마침내 무너뜨린 순간이 되버린다. 결국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는 세상의 모습을, 찰리는 그 배달부를 통해 확신한 것이다.
영화는 찰리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며 그들 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서로 간의 구원과 사랑,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
찰리는 발작으로 인해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죽음의 문턱에 닿을 때마다 소설 <모비딕>을 주제로 삼은 한 에세이를 읊고, 또 듣기를 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 거대한 고래를 잡기 위해 삶을 다하는 것처럼, 어쩌면 찰리는 자기 삶의 고래를 찾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 잘 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음을 확인해야겠다고 절규하는 그의 대사는, 공허한 삶속에서 단 하나의 희망으로 삼아왔던 딸 엘리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을 보면, 찰리가 정말 자기 삶의 고래를 찾았는지, 마침내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는 어쩌면 확실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건, 결국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를 다시 두 발로 일어서게 했다는 것이다. 온전히 그의 힘으로.
그의 재기를 알리는 작품이 등장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배우로서 암흑기를 겪던 브렌던 프레이저가
이제는, 다시 두 발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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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소설 <피터 팬>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은 탄생 1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풋사과 같은 동심의 표상으로 사랑받고 있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 그곳을 인도하는 악동 피터 팬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각색되고 변주되어 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뮤지컬, 온갖 노래 가사에까지 녹아들었음은 물론이고, 기존의 해석을 뒤집는 시도도 이어졌다. 피터 팬의 대칭적 인물인 후크 선장을 통해 피터 팬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6월 3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웬디>는 웬디의 입장에서 네버랜드와 피터 팬의 세계를 펼쳐낸다.
이야기의 중심에 웬디를 두는 순간 우리는 피터 팬과 네버랜드의 매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110년의 세월 동안 인류가 이뤄온 진보의 시선까지 감안하면, 피터 팬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과연 매력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인지 벤 제틀린 감독은 이야기의 뼈대만 남겨놓고 완전히 해체해,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태고적인 그림들로 피터 팬의 세계를 재조립했다.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국내 개봉일은 6월 30일입니다. (문화가 있는 날!)
* * *
소설 <피터 팬>을 읽다 보면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 진다. 정확히는 웬디에게 피터 팬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진다. 피터 팬은 웬디를 엄마 역할로 데려왔고, 웬디는 엄마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처럼 묶인다. 그러나 동시에 피터 팬과 웬디 사이에는 서로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애정도 엿보인다. 그래서 <피터 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측면이 엿보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웬디뿐 아니라 팅커 벨, 타이거 릴리까지, 피터 팬을 사랑하고 서로를 질투하며 맴도는 위치에만 놓여 있다. 상대가 원하는 마음을 주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않고, 유아처럼 그저 애정을 배부르게 받아먹고만 싶어 한다.
네버랜드에서는 누구도 자라지 않는다는 말만큼은 명확히 지켜지고 있어서, 후크 선장조차도 어린아이 같다. '엄마'가 있는 소년들을 부러워하고, 가장 암울한 순간에 스스로를 3인칭으로 칭하는 것 또한 피터 팬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악행을 행하는 방식은 기묘하게 모범생 아이 같은데, 사립학교 시절 배운 올바른 품행을 기준 삼아 그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망하는 순간까지 피터 팬의 품행을 지켜보고 있는 후크는 대칭을 이루는 또 하나의 피터 팬이자, 피터 팬에게 집착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다.
다시 말해 모든 캐릭터가 피터 팬만을 맹목적으로 향하고 있다. 물론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사가 굴러가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피터 팬>에서는 유독 모든 인물들이 피터 팬의 부수적인 존재로만 기능하는 느낌이다. 특히 웬디는 받아주고 챙겨주며 양육하는 모성의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요구받는다. 피터 팬과 소년들만의 요구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후크 선장과 해적 일당조차 피터 팬 무리를 무찌르고 웬디를 데려와 엄마로 삼고 싶어 한다.
영화 <웬디>는 웬디라는 캐릭터에서 우선 엄마의 이미지를 걷어내어, 웬디가 제 발로 설 수 있게 한다. 그 결과 이야기는 웬디가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한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달걀도 같이 깨고 손님맞이도 하면서 자라는 아주 작은 아이. 디즈니 삽화에서 보던, 허리 선을 강조한 드레스나 머리 리본 같은 건 없다. 이 영화 속 웬디는 맑은 색 귀걸이 정도를 제외하면 장식이라곤 하나 걸치지 않은, 잠옷에 가까운 티셔츠 차림이다. 원작에서보다 훨씬 공상적이고, 자기 세상이 뚜렷한 아이가 되어 있다.
웬디에게서 끊어진 단어, 피터 팬과 소년들이 집착하던 ‘엄마’, ‘모성’은 이제 대자연으로 갈음된다. 대자연도 한없이 부드럽고 품어 주기만 하는 공간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화산을 터뜨리고 물에 뛰어들며 자연의 품에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지만, 화산 폭발이나 거친 파도를 피해 뛰기도 한다. 게다가 네버랜드의 대자연에도 쓰레기는 쌓여 있다.
팅커 벨과 타이거 릴리는 아예 극에서 사라졌다. 피터 팬을 사랑하고 허영심을 부리면서 웬디를 질투해 이야기에 곤경을 더하곤 했던 팅커 벨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메리칸 원주민 전사 캐릭터인 타이거 릴리는 훌륭한 전사라고 묘사되면서도 부여된 역할은 고작 피터 팬 손에 목숨을 구하는 것, 그 후로 피터 팬의 대사 속에서 ‘엄마가 아닌, 의미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한다고 언급되어 팅커 벨과 웬디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것이 전부였다. 피터 팬을 돋보이기 위한 장식적인 기능만 수행하던 캐릭터들은 과감히 잘라냈다.
뿐만 아니라 네버랜드 한켠에 사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인어들 모두 사라졌다. 후크 선장과 해적들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원작 소설에서는 110년 전이라는 시대의 한계 때문에 원주민과 해적을 설명할 때나 소년들이 영국 이야기를 할 때 기묘하게 제국주의적 냄새가 풍기는데, 이를 걷어낸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피터 팬을 비롯한 몇몇 소년들을 유색인종 캐릭터로 만들었다.
다 뜯어진 신발에 낡은 재킷을 걸친 채로 기차 위에 앉아, 어둠 속에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웃는 피터 팬의 존재는 단연 새롭다. 풀잎 같은 초록색 옷을 입고 소꿉놀이 같은 생활을 하던 피터 팬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다소 충격적인 비주얼이다. 공통점을 찾자면 진주 같은 젖니가 빛나고 있다는 정도.
이렇게 걷어낼 것을 모두 걷어내고 완전히 새롭게 지어 올린 <웬디> 속 네버랜드와 웬디, 피터 팬은 원작에 비해 다소 야생적인 색깔을 띤다. 네버랜드뿐만이 아니다. 켄싱턴 공원과 반듯하게 정리된 침실 대신 지나가는 기차에 덜컹거릴 만큼 위험해 보이는 웬디의 집, 빛나는 요정 가루 대신 금방이라도 쇳내가 날 것 같은 화물 열차와 바닥에 구멍이 난 조각배로 이동하는 피터 팬은 분명 우리가 알던 피터 팬의 세계에 비해 거칠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성장이라는 주제만 놓고 본다면 원작보다 조준점이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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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장은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어린 날 공상으로 지어 올린 세계가 처참히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때론 그조차 잊어가면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피터 팬> 원작은 이를 격렬히 거부한다. 사실 성장을 거부한다기보다 책임과 의무를 거절하고 싶어하는 마음에 가깝다. 소년들이 웬디의 집에 하나씩 안착해 학교에 다니고, 나는 법을 잊고, 직업을 갖는 동안 피터는 줄곧 아이로 남아 있다. 그리고 웬디의 딸을, 또 그 딸을, 계속해서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원작의 웬디는 가볍게 날아가는 딸과 피터 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었다는 당연한 사실에조차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팅커 벨이 죽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해 웬디를 경악하게 했던 피터 팬은, 결국 아무 감정에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엄마’를 이용한다. 봄맞이 대청소 때마다 웬디가 네버랜드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승계된다. 결말까지 철저하게 피터 팬만을 위한 방향성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 <웬디>는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영화 속 웬디는 피터 팬뿐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의 성장을 주도해 낸다. 대자연 ‘엄마’의 힘을 이끌어 내고, 추억을 뒤져 기쁨을 끄집어내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성장이라는 모험을 긍정하면서. 웬디와 피터 팬은 원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맞는다.
영화 <웬디> 속 피터 팬과 네버랜드는 안전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지만, 기묘한 위계가 역할을 부여하는 원작과 다르다. 모험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끝내 잘 될 거라는 막연한 안정감이 있던 디즈니 버전과도 다르다. 불안정하지만 변화에 열려 있고, 그래서 현실적이고 현대적이다.
이러한 세계에서라면 우리는 영화 속 웬디와 아이들처럼 자기 세계를 공고히 하고, 그 위에 찾아오는 도전을 받아들이며,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을 성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한때 아이였던 우리도 여전히 한 뼘씩 마음의 키를 키우며 이 세상을 건너고 있다. 영화는 그런 우리를 직면하고 긍정한다. 그렇게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아이도 빠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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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본드 게섯거라 시에라 식스가 나가신다
당당당당~ 다니엘 크레이그가 저벅저벅 걸어서 갑자기 총 쏘는 자세를 취한다. 카메라는 남자 주인공에게 집중된다. 작년 <007 : 노 타임 투 다이>가 기억난다. 그 전 주까지 <007 : 스카이폴>까지의 정주행을 완료하고 극장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영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감이 있다. 인트로와 엔딩 빼고는 기억에 하나도 안 남는다. 엔딩도 초반 보자마자 '아 이렇게 될 듯' 싶은 게 적중해서 기억에 남는 것이다. 아. 하나 더 있다. 후반부쯤에 본드가 무릎을 꿇는데 이게 굳이 필요한가? 싶었다. 나중에 후기를 찾아보니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었다;
007 시리즈의 팬 까지는 아니었어도 나름 정주행을 마친 나. 이 시리즈물에 대한 기억은 작년 12월 15일로 옮겨간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지금 생각하면 엔딩이 참 좋았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을 '두 인물의 등장'을 그렇게 마무리 지은 것 자체는 좋았다. 그 둘이 뭐 또 멀티버스를 연 채로 MCU 세계관에 자리 잡아 숙식하면 좀 깼을 것 같다. 그리고 MCU 피터 파커의 새로운 시작이 색다른 인연으로 인해 벌어진다는 설정은 소년의 성장 서사로서 깔끔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팬이었던 나.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원섭섭해서 VOD로 2,3회 차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버키와 샘을 상대하던 장면이 시원시원해 기억에 남았다. 물론 <노 웨이 홈>이 끝나고 생긴 뭉클한 감동도 좋았지만 그런 소소한 액션 신도 시리즈물을 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별로고 할 게 있을까? 영화 왜 보나? 친구들이랑 이야기해서 감상 나누려고 보는 거지. 그리고 그 정말 재밌는 순간들을 만들려면 세계관 연동이라는 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어떤 남자가 훈련을 받고 있다. 이 사람은 살인 면허 소지자도 아니고, 강화 인간도 아니며, 외계 종족도 아니다. 이름은 식스. 007은 누가 써서 식스라고 지었댄다. 치앙마이로 날아가 이 남자와 함께 모험을 떠나보자.
예상치 못했던 손님
시에라 식스. 본명은 코트 젠트리. 그는 일을 하고 있다. 일의 정체는 암살이다. 상관 데니 카마이클의 명령에 따라 한 인물을 저격해야 하는 식스. 사람 북적이는 나이트클럽 아래층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다. 카메라가 연결되어 있어서 위층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CIA의 안보를 위해 일하는 식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가는 인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대기한 덕에 저격을 할 타이밍이 왔다. 근데 그때 하필이면 민간인 어린이가 목표 앞에서 얼쩡거린다. 고민하는 주인공. 동료였던 미란다와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단독행동을 한다. 은근슬쩍 목표를 암살하랬더니 그냥 대놓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버린다. 대놓고 아수라장을 만드는 식스. 총기 없이 맨몸으로 들어가 목표와 대면한다. 암살 대상을 맨몸으로 제압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암살 대상 캘런 멀베이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고백한다. 자기 역시 시에라 프로젝트의 구성원 중 하나였다고 말하는 멀베이. 금세 코트의 상관 도널드에 대한 정보를 말한다. 또 시에라 프로젝트에 영입되기 전에 어떤 처지에 있던 인물이며 비밀임무 수행을 위한 훈련장소가 어디였는지까지 말해준다. 내부자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정보에 흔들리는 식스. 캘런 멀베이는 식스에게 암살당하며 여러 메시지와 물건 하나를 전한다. 데니 카메이클은 쓰레기이며, 네가 모르는 CIA의 정보가 있다는 말을 귀띔하며 최후를 맞는다. USB를 확인하는 주인공. 그렇게 CIA에게 비밀을 서서히 알아가고자 할 때, 식스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 비밀의 공개 여부를 두고 전직 CIA 요원 로이드 핸슨의 추격을 받게 된다. 사람 죽이는 것으로는 특화되어있는 로이드. 로이드는 식스와 함께 유럽 전역에서 대결을 펼친다.
무려 제작비 2억 달러
일단 이 영화는 장소를 많이 바꾼다. 치앙마이, 방콕, 프라하, 비엔나 등등 세계 각국을 로케이션 삼아 영화를 제작했다. 단순히 이사만 잘 다닌 게 아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여러 장소를 부순다. 일단 초반부 식스가 캘런 멀베이를 암살하는 신에서는 그 큰 파티장을 묵사발을 내버린다. 다른 지역에 가면 더 창의적으로 무언가를 부수기 시작한다. 아예 연립으로 주어진 주택(들)을 폭탄으로 콰콰쾅 부숴버린다. 비싸 보이는 차를 부수는 건 일도 아니다. 식스가 하는 직업의 성격상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하다. 그래서 뭐 유리창이 깨지고 차가 파손되고 이런 건 기본이다. 액션이 쉴 새 없이 계속 이어지는 탓에 일단 지루할 일은 없다.
근데 이런 쉴 틈 없이 파괴되는 건물이 아니더라도 맨몸액션 역시 뛰어나다. 일단 크리스 에반스 액션 잘하는 건 다들 알 것 같다. 기계로 된 수트를 입고 빌런들을 상대하던 아이언맨과는 달리 캡틴 아메리카는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이 덕에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맨몸 액션이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루소 형제와 함께하던 합이 있던 탓인지 하이라이트 신에서 몸을 쓰는 연기는 이 기라성 같은 배우들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라이언 고슬링은 대사 칠 때보다 액션 연기가 더 멋있었다. 이게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고슬링 어깨가 좀 좁아 보였다. 그래서 격투 전에는 뭔가 멋이 안 났다. 그러나 액션 연기에 들어가면 역시 명품 배우다 싶다. 극 중에서 기억나는 이 인물의 설정은 정이 많다는 것이다. 은혜를 갚으려고 하고, 민간인은 피해 가지 않으려고 하는 둥 여러모로 '나쁜 놈만 벌하는' 강박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이를 위해 처리해야 하는 인물(들)에 대한 감정연기가 필수적이다. 어쩔 땐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야 액션 연기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이 역할이 되게 쉬워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어렵지 않은 줄거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이 배우의 호연이 필수적이었다. 총기, 맨몸, 카체이싱, 폭발물 등 다 잘하는 이 배우의 연기는 넷플릭스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 괜히 비싼 돈 들여서 액션 잘하는 배우 섭외하나 싶다. 이러니까 돈 주고 쓰는 거지.
그리고 이 영화의 호화 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지점이 있다. 바로 미란다 역의 아나 데 아르마스다. 일단 처음 등장할 때 꽃무늬로 된 수트를 입고 나온다. 솔직히 쉽지 않다. 이 배우는 좋은 비율과 아름다운 미모로 이를 소화한다. 등장부터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근데 미란다는 곧이어 액션 영화를 보는 많은 분들의 로망을 실현한다. 슈트 입고 맨몸액션을 벌이는데 우리가 홍콩영화를 보며 주윤발이 쌍권총을 날리는 것만큼이나 고대해왔던 장면이다. 되게 잠깐 짧게 샤샥 지나가는데 그 장면 되게 잘 찍었다. <007 :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잠깐 총기 액션을 보여준 신스틸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나도 영화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 분량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좋은 액션 연기를 보여줬다. 또한 카메라 구도, 아나의 몸 쓰는 각도, 심지어 괴랄한 의상까지 시너지가 있어 액션 연출에는 도가 튼 루소 형제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납작한 이야기에 부여한 개성
이 영화는 액션이 중요하다. 루소 형제가 감독이고 크리스 에반스와 라이언 고슬링이 나오는 액션 영화면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까지 개성이 있는 편은 아니다. 솔직히 영화 보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생각났다. 또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랑도 살짝 비슷하다. 뭔가 <아저씨> 느낌도 있다. 또 있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느낌도 있다. 얼핏 보면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선택하며 전개하는 이 영화. '이건 몰랐지 이 녀석들아'같이 신선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뚝심이 정말 중요했다. 그냥 무난하게 싸우는 영화 볼 거면 리암 니슨 아저씨 나오는 액션 영화가 더 박진감이 넘칠 것 같다. 단순히 액션 영화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뇌를 비우고 박진감만 있으면 된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영화 왜 보나? 재밌는 거 보려고 보는 거지. 그러려면 뭔가 기억에 남는 게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는 갖는 강점이 있다면!
바로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다. 일단 로이드가 처음 등장할 때 캡틴 아메리카가 생각 안 났다면 거짓말이다. 난 크리스 에반스를 MCU와 <판타스틱 포> 시리즈에서 알고 있었다. 정의로운 슈퍼 히어로서 열일했던 크리스 에반스. 한 편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되면 얼굴을 기억하는 일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씌여있는 이미지를 일단 코디에서 확 바꾼다. 슈퍼마리오 같은 헤어스타일에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났다. 금발에 덩치 좀 있던 근육질의 캡틴 아메리카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다. 또 감정적으로도 변화된 인물을 연기하기도 한다. 캡틴 아메리카는 진중하다. 어벤저스의 리더로서 영웅들을 이끌어 타노스와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다. 반대로 <나이브스 아웃>의 랜섬은 진중한 나쁜 놈이다. 익살스럽거나 가벼운 느낌이 없지는 않은데 랜섬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행동과 대사 하나하나가 그 인물을 보여준다. 그래서 후반부에 비교적 힘이 많이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이 로이드는 다르다. 이 배역은 말이 많다. 이상한 유머도 날린다. 식스를 보고 '예쁜이'라고 한다던가 하는 농담을 자주 던진다. 사람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맥락에서 소시오패스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면도 묘사가 된다. 그러나 이 인물 특성 중 중요한 건 감정을 쉽게 휙휙 드러낸다는 점이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흑막이 밝혀지고 랜섬의 입장 변화는 영화에서는 잘 볼 수 없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화나면 화내고 조롱하고 싶음 조롱한다. 그래서 인물의 순수하게 못돼 쳐 먹은 본성이 잘 드러난다. 이 크리스 에반스의 인물 해석은 이 영화 전반적인 톤을 형성한다. 얼핏 보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유사하다. 조커의 광기를 받아치는 브루스 웨인의 리액션이 영화의 줄거리가 된 것처럼, 하나 딱 잡고 그거만 집요하게 파는 인물의 내면을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가벼울 땐 인물의 성격을 바탕으로 가볍고, 무거울 때는 크리스 에반스의 맨몸액션 덕에 진중하다. 순수한 악이라고 해서 클리셰를 빗겨나간 것은 아니다. 인물들이 고르는 선택지의 결과는 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전개하는 방식이 뭔가 다르다고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 나는 이것이 크리스 에반스가 캐릭터 해석을 잘해서 갖는 이점이라 생각한다. <범죄도시>의 '장첸'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광기의 아이콘이 됐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에서의 로이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광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낸다.
엥 이거 아는 맛인데
앞에서 이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봤다고 서술했다. 여기에 한 영화를 뺐다. 바로 <범죄도시>다! 루소 형제가 범죄도시 시리즈를 참고해서 이 영화를 만든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러 부분이 <범죄도시>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선 싸움 잘하는 주인공(마석도-식스)은 공통점이 있다. 식스가 마석도처럼 초반부부터 강하다고 묘사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마석도와 비슷하게 기시감이 든다. 또 말장난하는 신이 있다. 어떤 인물이 식스에게 '왜 식스예요?'라고 묻자 '007은 누가 쓰고 있거든'이라고 대답한다. 또 이런 식으로 로이드나 식스가 말장난을 계속한다. 유머가 뜬금없이 만들어진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이건 마석도와 전일만이 했던 말장난 같은 느낌이다. 또 빌런 캐릭터 둘이 해당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공유한다는 점(장첸-손석구) 역시 공통점이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이 영화가 <범죄도시>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느낀 점은 따로 있다. 바로 후속작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일단 영화의 감독이 루소 형제다. 바로 전작에서 영화 시리즈의 선장이었던 두 사람을 섭외했다. 또 시에라 포도 있고 식스도 있다. 이건 007 시리즈의 역대 제임스 본드가 바뀌어왔다는 점을 연상케 한다. 또 조직 내부에 있는 의문의 인물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하이드라'를 연상케 한다. 단일한 작품이 아닌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3편을 할애해서 하이드라 분량을 나눈 만큼 이 부분은 루소 형제가 뭔가를 구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예고편에도 나오는 대사 '007은 누가 쓰고 있어서'와 '비공식 임무'라는 단어는 '우리 넷플릭스 판 <007>, <미션 임파서블> 만들 거야!'라고 동네방네 소리 지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일단 액션에는 힘주고 내러티브에 모험수를 두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긴 한다. 시리즈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시작하기 위해서, 식스(고트)의 성격, 성장배경 묘사와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게 일차적인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후속작의 전초전으로 생각한다면 사실 그만큼의 역할은 충분히 한다.
그냥 잘 만든 액션 영화
근데 이러나저러나 그건 루소 형제와 넷플릭스 사정이다. 우리는 관객이다. 이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그냥 재밌으면 최고다. 예술 영화 보고 싶으면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파워 오브 도그>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보는 게 낫다. 그게 더 걸작이고 좋은 작품이니까. 어차피 액션 영화 보려고 보는 거잖아? 그럼 멋지게 싸우고 이야기는 쉬우며 캐릭터들이 개성 넘치면 그만이다. 영화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아름다우며, 레게 장 페이지는 섹시하고, 크리스 에반스는 (사견으로) 커리어 하이의 퍼포먼스가 나왔으며 라이언 고슬링은 멋있다. 그럼 뭐 말이 필요한가? 7월 20일 넷플릭스 정식 공개 이후 여러분이 모바일 환경에서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영화가 되는 셈이다. 아. 내가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온 것처럼 일부 극장에 상영관이 잡히기도 한 것 같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시는 걸 추천한다. 사운드 연출에 나름 힘을 준 것 같다. 에어팟으로 듣기에는 좀 아쉽긴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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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 리뷰 - 후반부를 어떻게 봐야 할까?
스포일러 주의!
<서브스턴스>는 한때 할리우드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전락하며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엘리자베스는 간호사로부터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 서브스턴스와 접촉하고 만다. 그렇게 약물에 의해 '수'라는 또 다른 나 자신이 탄생한다. 7일이라는 한정된 기간 동안 수의 몸으로 지낼 수 있게 된 엘리자베스는 이곳저곳을 누비며 떠오르는 스타가 되고 자신의 전성기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큰 명성과 꿈을 이루기 위해 수로서 더 살아가고 싶었던 엘리자베스는 결국 7일의 규칙을 어기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결국 자신의 몸이 뒤틀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욕망을 놔버릴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더욱 사용하며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린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바디 호러 영화다.
미쳤다. 이제는 너무 쉽게 남용되어 흔하디흔한 단어가 됐지만 <서브스턴스>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수식어가 없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미쳤고 말 그대로 끝까지 간다. 어느 정도의 시점에 와서는 적절히 타협을 볼법한데도 <서브스턴스>는 이 이야기가 향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순간까지 망설임 없이 질주한다. 끔찍한 호러 영화라고 불리는 <랑종>, <미드소마> 같은 영화들조차 이 정도의 극단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과감한 시도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맥락으로 해당 패기가 최고 절정으로 치닫는 후반부를 집중적으로 보자. 수는 자신의 치아와 손톱, 심지어 귀까지 떨어질 만큼 신체에 한계가 와 있는 상태다. 그때 수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남은 서브스턴스를 모조리 투하하여 또 다른 자신을 만들기로. 그렇게 하면 영화의 초반처럼 등을 찢고 미인의 내가 당연히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거울을 통해서 보게 된 건 마치 사람 네 다섯 명을 찰흙처럼 뭉쳐놓은 듯한 처참한 몰골의 괴물이었다. (자막으로는 이 괴물을 가리켜 '엘리자수'라고 나온다.) 여기서 감독은 선언을 한 건다. 남은 20분은 그야말로 끝까지 갈 거라고.
<서브스턴스>가 유독 타 고어 영화보다 더 끔찍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지 고어의 정도가 지나치게 과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관객이 오랜 시간을 걸쳐 따라왔던 주인공이 최악의 선택들만 연이어 한 채 끝내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처참한 파국을 맞이했다는 것에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말까지 보고 나면 끔찍함과 동시에 안타까운 감정도 몰려온다. 특히 엘라자수를 보며 비명을 지르는 관중들과 도망가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는 엘리자수의 모습은 이러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상반된 감정이 잘 느껴졌다면 그건 이 영화의 각본이 굉장히 치밀하게 설계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브스턴스>는 주인공이 예정된 비극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으로 관객의 정신까지 함께 괴롭힌다. 뒤이어 무대 위에서 가슴을 토해내고, 관중들을 향해 피를 뿜어내는 클라이맥스는 정말이지 극단의 극단까지 간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의 각본의 완성도와 패기에 박수를 치다가도 여기에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서브스턴스>는 외모라는 외형적인 특성 하나로 개인의 모든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의 시선과 그런 시선 때문에 외형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공포를 다루는 영화다. 이것만 봐도 영화의 주제의식이 외모지상주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의식이 중반부까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하게 드러나지만, 후반부에 돌입하면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필요 이상으로 범람하는 바람에 정작 주제의식이 뒷전으로 밀려나버리는 주객전도를 일으킨다. 물론 그 자극적인 이미지들 안에서도 각각의 의미가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괴물이 된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장면이나 엘리자수가 뿜은 피를 관중들이 맞는 장면은 결국 이 모든 일의 책임이 개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도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고어의 정도를 지나치게 높였다는 혐의는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중반까지는 끔찍한 장면과 주제가 함께 잘 붙어서 따라왔다면 후반부는 주제를 느낄 새도 없이 온갖 구역질 나는 이미지들이 총출동을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제의식이 흐릿해지고 피로감만 남는다.
그렇다면 후반부가 이 영화의 오점인 걸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단점의 영역도 있지만 장점의 영역이 더 크다. 만약 이렇게나 끔찍한 후반부가 없었다면 그냥 적당히 재밌는 장르 영화 정도로 밖에 기억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파격적인 후반부 덕분에 예측 가능한 전개와 수천 번은 우려먹은 주제의식이 독창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결말의 처리가 좋았다. 박살난 엘리자수의 몸에서 튀어나온 엘리자베스의 얼굴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블록 위로 힘겹게 기어간다. 그리고 그 위에서 숨을 거두며 블록 위로 핏자국을 남긴다. 이 장면은 <서브스턴스>의 오프닝, 행인 중 한 명이 엘리자베스의 블록 위로 토스트를 떨어트려 블록이 케첩 범벅이 되는 장면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행인은 케첩을 지우기 위해 블록을 대충 밟고 떠난다. 그러나 엔딩에서 핏자국을 청소하려는 청소부는 청소만 깔끔히 하고 블록은 밟지 않는다. 이러한 결말은 감독이 캐릭터에게 하는 최소한의 존중처럼 보였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영화 <조커: 폴리 아 되>가 주인공에 대한 존중 없이 자신의 메시지를 위해 마구잡이로 학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결말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 장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극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명확한 성취를 남긴 작품이다. 140분의 긴 러닝타임을 지나고도 이 정도의 광기를 뿜어내는 영화는 흔치 않다. 물론 끔찍한 모습이 된 주인공이 길거리를 활보해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편의적인 구간이 다소 의아스럽고, 갑자기 성룡이 되는 수의 피지컬처럼 설명되지 못한 구간도 존재한다. 서로 간의 대비를 만들기 위해 엘리자베스의 축 처진 육체와 수의 탄탄한 육체를 클로즈업으로 연달아 보여주는데 이러한 촬영이 정작 영화가 비판하는 성 상품화에 가깝다는 의견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본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외면만 과하게 드러내는 SNS 시대에 아주 시의적절한 영화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렇게 의미도 있는데 정신 나간 재미와 폭주하는 클라이맥스까지 있는, 괴물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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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사랑을, <러브 달바>
* 본 리뷰에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러브 달바> 2024
프랑스 / 드라마 / 88분
감독: 엠마누엘 니코
사랑으로 사랑을, <러브 달바>
사랑을 받는 일이 먼저일까, 사랑을 주는 일이 먼저일까. 사랑이란 ‘세상’ 안에서 영원히 표류하며 사는 우리에겐 즉답하긴 어려운 질문이다. 애초에 명확한 답이나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는 물음도 아니기에 생각의 바다에 빠지기도 쉽다. 동시에 우린, 사랑에 한없이 주관적이기에 거침없이 답한다. 서둘러 사랑을 하고 이를 게을리하거나 포기하지도 않는다. 답안지를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보다, 사랑하고 싶은 열망이 더 진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만큼 강한 의지도 갖기에, 두 개의 물음표 중 한 개를 선택하는 과정은 과감히 축소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랑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뜻한다. 사랑은 삶을 계속 흐르게 하는 강력한 동기이자, 귀중한 배움 그 자체다. 출발선과 도착점이 구분 없이 이어진, 단 하나의 (사랑하는) 트랙을 끝없이 달리는 러너들, 그게 바로 우리니까.
사랑하는 방식보다 사랑‘하는’이 더 중요해진 일상에 <러브 달바>가 핀 조명과 함께 모두의 시선을 가로채며 등장한다. 거대한 트랙이 사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고, 상당수가 형태를 알 수 없게 변했거나 얼마 못 가 뚝 끊어져 있다는 진실과 함께 말이다. <러브 달바>는 사랑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도 앞선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방법이 사랑 중인 상태보다 주요하고,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까닭은 사랑을 받는 일보다 받은 사랑을 ‘주는’ 일이 늘 선행되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이 친절하면서도 강단 있는 답안지를 모두에게 널리 공유하기 위해, 열두 살 달바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다.
출처: 영화 <러브 달바> 스틸컷(다음)
달바는 집에 들이닥친 경찰관들로 인해 하루아침에 자크와 강제 분리된다. 의사는 달바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궁금한 게 있다면 다 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검사를 진행한다. 특수 교사 제이든은 달바를 집과 가까운 쉼터로 데려가며 이제 안전하다고 말한다. 검사는 수감된 자크를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라고 알려준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충격적인 진실에도 달바는 흔들리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 놓여 조금 두렵고 무서울 뿐, 아빠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다시 아빠를 만나 함께 살면 다 해결될 거라 믿는다. 영화는 달바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달바가 자크가 만든 인형의 집에서 ‘타의’로 탈출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란 점을 조금도 덜어내지 않고 담아낸다.
달바를 둘러싼 문제들은 삶에 멋대로 끼어드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달바를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한다. 무엇보다 자크(사랑)를 믿는 나를, 의심하는 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을 노려보니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울 속 달바는, 달바가 주장하는 '여자애가 아닌 여자'가 아니었다. 제이든의 단언처럼 여자가 아닌 '어린애'였고, 어린애는 달바가 이를 인정하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똑같은 패턴으로 정해진 트랙에서 어긋나지 않고 달렸던 달바는, 자크를 향한 사람들의 변하지 않는 태도가 계속될수록 자기도 모르게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어린애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도 마주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달바는 외면은 물론이고 내밀한 내면까지 또래 친구들과 달랐다. 짙은 눈화장과 붉은 작은 입술, 중년 여성이 할 법한 성숙한 머리 스타일, 가슴과 등이 깊게 파인 속옷용 원피스와 드레스. 평생 자크를 위한 여자로 살았던 달바는,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동요한다. 재미있게 노는 친구들 무리에 끼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자신을 발견한다. 친구들이 자크를 소아성애자라고 부르는 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의 옷을 선호하고,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어제와 오늘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출처: 영화 <러브 달바> 스틸컷(다음)
단번에 치유되는 아픔은 존재하지 않듯, 달바는 계속 혼란 속에서 허우적댄다.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필요치 않았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기행을 벌이며 자크와의 만남을 요구한다. 고대하던 면회 날, 달바는 교도소에서 완전히 변해버린 아빠를 마주하고 얼어붙는다. 자크는 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예쁘게 꾸민 달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벌벌 떨며 본인이 저지른 범죄를 시인한다. 달바는 자신이 진짜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믿었던 사랑에 버림받아, 더는 어떤 사랑도 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과 당황스러움. 달바는 어른들이 자크를 변하게 했다며 날카롭게 반응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달바의 절규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한다. 아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 폭력이며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범죄라고.
<러브 달바>는 달바가 품은 혼란을 직면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아이의 삶에 개입한다. 어른들을 통해, 달바에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하게 우리가 귀중하게 여기는 사랑을 주입한다. 당연히 사랑받아야 할 권리, 당연히 치유될 현재, 받은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는 희망찬 미래까지, 영화는 피해자를 절대 혼자 두지 않는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르듯 오직 달바의 새 시작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온 마음을 다해 기꺼이 돕는다. 달바에겐 강제 동행으로 느껴졌을지 몰라도, 반드시 습득해야 할 배움이자 품어야 할 희망이었으니까. 룸메이트 사미라도 달바가 허우적댈 때마다 회피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달바를 위로한다. 때론 못된 언니로, 어설픈 친구로, 똑같이 마음을 다친 동료로 달바에게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사미라 또한 주변 이들에게 달바처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출처: 영화 <러브 달바> 스틸컷(다음)
오랜 고민 끝에 달바는 제이든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묻는다. 혼자 있는 게 두렵고 모두가 날 하찮게 보는 게 싫다고도 고백한다. 아이가 진정 가졌던 공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랑을 잃는 것이었다. 달바는 집으로 도망쳐 자기 방 옷장에서 숨어든다. 쉼터 안에서도 옷장에 자신을 가뒀던 아이였다. 옷장은 무차별적으로 날아드는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어둠 속에서 파묻혀 있던 달바는 문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눈을 뜬다. 당연히 그래야 함을 깨달은 듯 옷장을, 자크의 인형집을 박차고 나와 거울 앞에 선다. 그리고 자크의 가스라이팅을 상징하는 염색된 파마머리를 거침없이 자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불어오던 따뜻한 봄바람이 마침내 달바의 마음을 온전히 감싼 것이다.
달바에게 별 하나 없는 어둠이었던 자크의 서사는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러브 달바>의 목적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달바가 피해자란 어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빛을 뿜어내는 열두 살 소녀가 되는 것. 따라서 감독은 근친상간이란 충격적인 소재를 적극적 또는 자극적으로 노출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벽 뒤에 이야기 내내 버려뒀다. 달바를 짓누르는 고통도 직접 보여주지 않고, 달바의 얼굴을 화면 가득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아이의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도록 했다. 달바가 거울을 볼 땐, 거울을 바라보는 달바가 아니라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의지가 담긴 거울 속 달바를 의도적으로 비췄다. 그 결과 달바는 거울에 비친 영락없는 열두 살 소녀를 보며 사랑을 건넨 자들의 미소를 따라 짓는 데 성공한다. 모두가 간절히 기다린, 제이든의 딱딱하지만 따뜻한 말과 기다렸던 엄마의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눈빛, 까칠하지만 다정한 사미라의 욕설이 버무려진 환한 웃음이었다.
출처: 영화 <러브 달바> 스틸컷(다음)
우리가 믿는 아름답고 눈부신 사랑은, 사랑을 받아본 자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온 세상에 퍼진 사랑이다. 축소보다 압축이 더 어울리는 사랑이랄까, 재판장에서 달바가 자크를 당당히 보며, 엄마의 손을 꽉 잡아주는 순간이랄까. 물론 이따금 자크가 남긴 상처가 달바를 또 욱신거리게 할 것이다. 하지만 달바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곁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지켜주는 이들과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원 없이 사랑할 시간만 남은 달바를 응원한다.
우리의 사랑엔 그늘은 있어도 어둠은 없다, <러브 달바>에 여전히 사랑만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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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영상은 없네요.
*아이맥스관에서 3D로 보실 분들은 3D 안경(재사용)이 깨끗이 안닦여 있는 경우가 있으니
안경을 닦을 수 있는 휴지 등을 준비해 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즐영하시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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