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3-06-05 16:22:41
열여덟 살 그 여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여름> 영화 시사회 후기
시놉시스
갈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여고생인 이경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고교 축구선수 여고생인 수이를 만난다. 둘은 서로 친해지다가 사랑을 하는 관계까지 가게 되고 스무 살이 되어 서울에 상경한다. 이경은 서울에 있는 대학의 경제학과에 진학하고 수이는 자동차 수리공이 되기 위해 고시원에서 살면서 알바를 여러 개 한다. 이 둘의 만남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친구 간에 느낄 수 있는 우정이 사랑으로 번지는 건 사회적인 시선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경은 여자를 좋아하는 동성애를 가진 사람이었고 수이에게 이끌린다. 수이는 이경을 사랑하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시선이 좋지 못하기에 둘은 사이가 멀어지려 한다. 그러다가 이경은 수이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 동기와 사귀다가 또 헤어진다. 결국 이경은 수이에게 받았던 물품들을 수이에게 돌려주며 진정한 이별을 하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다. 이경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수이와 함께 했던 흔적을 찾으러 가며 끝이 난다.
사실 필자는 동성애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레즈비언이라는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시선과 억압 속에서 이경과 수이가 남 몰래 사랑을 해야만 했던 걸 보면서 친구 간의 관계에 금기를 넘어서는 걸 보았고 사회가 정한 기준을 이미 넘어섰지만 이경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이는 사회적인 시선에 초점을 두고 이경과 조금 경계를 두려고 한다.
애니메이션 <그 여름>에서 이경이 동성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추억은 의문으로 남겨지게 되고 수이도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열여덟 살에 만난 친구가 우연히 사랑까지 번졌다는 것을 흔적이나 추억으로 남겼다는 것만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영화 <클로즈>와 살짝 비슷한 면이 있는데 그 영화에서는 친구 관계였던 래오와 레미가 동성애로 오해받고 놀림당해 레미가 자살하여 비극으로 끝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친구 간의 사랑을 더 당당히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남들과는 다른 이경과 수이의 사랑 이야기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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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 욕심 있었던 봉준호 출연작 모음
얼마 전, 뉴욕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름을 올렸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인데요…! 👏그 소식을 듣고 문득 떠올랐습니다.
감독이 아닌 ‘배우 봉준호’의 얼굴.
작품 속 인물로 깜짝 등장하던 그의 카메오 모먼트들…사실 알고 보면 연기에 대한 은근한 욕심(?)도 있었던 봉 감독. 그의 짧지만 인상 깊은 출연 순간들을 한데 모아봤습니다.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연기는 배우 고유의 영역이라,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고 말하며,직접적인 지시보단 질문을 통해 배우 스스로 감정을 찾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는데요.
어쩌면, 그가 직접 연기에 나섰던 순간들은
연기를 ‘통제’하기보단 ‘이해’하려는 노력,
영화를 더 잘 만들기 위한 공부의 일환이었나 봅니다.심지어 잠깐이지만 연기도 자연스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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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몇년 전, 이 영화를 보고 꽤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리뷰를 쓰지 않고 지나갔다. 엊그제 '다스뵈이다'에서 김어준 총수가 이 영화를 다시 언급했고,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분명 낮게 평가된 영화라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의 진가를 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복남...'은 김기영 영화 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이 영화를 만든 장철수 감독이 김기영 사단에서 조연출로 오래 일했고, '김복남..'으로 장편 데뷔를 했으니, 장철수 감독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영화이면서, 그가 배운 김기영 영화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김복남...'은 여성주의 영화, 여성영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근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스팔타쿠스'와 같다. 폭력과 억압, 차별에 저항하는 노예의 반란처럼,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자의 분노가 마침내 권력자 - 이 영화에서는 남성들, 시고모, 동네 할머니들 - 의 피를 부르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영화의 함의는 다양하다. 주인공 복남은 섬에서 태어나 평생을 섬에서 살아 온 여성이다. 반면 해원은 어려서 고향 섬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세련된 도시 여성으로 성장한다. 두 여성은 어려서 가장 가까운 동무로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30년 넘게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이기도 하다. 물론 해원은 복남의 편지를 무시하고, 고향에 관한 기억도 그리 애틋하지 않지만,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면서 복남의 호소에 응답한다.
해원은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처지지만 고용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해원이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되는 상황은 한국노동자의 열악한 고용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여성노동자로서의 해원이 곧바로 사회적 약자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해원이 해고당하는 원인이 되는 사건을 보면, 해원은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냉정하고 모질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해원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겸손함, 이해가 부족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은 해원과 복남의 어린 시절 모습이 교차 편집되면서 보여주는 장면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어려서의 해원은 복남과 사이좋은 친구이고, 서로에게 따뜻한 동무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살고 있는 성인 해원은 쌀쌀하고 냉정한 인물이다. 그는 전세금을 대출받으러 온 할머니 - 폐지 수레를 끌고 온 것으로 보아 혼자 가난하게 사는 할머니다 - 에게 3천만원이 아닌, 2천만원까지만 대출이 된다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해원의 옆자리에 있던 후배가 할머니가 바라는대로 3천만원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해원은 자존심이 상한다. 여기에 화장실에서 누군가 문을 잠그고 나가서 해원은 몹시 고생하며 화장실을 탈출하는데, 해원은 후배의 뺨을 때리지만, 정작 범인은 청소부 아주머니였다. 해원이 같은 여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건, 그녀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만, 해원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도시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 없이 홀로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원은 여성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운전하다 보게 되는데, 사건의 목격자로 경찰서에서 용의자를 지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피해 여성이 남성 폭력배들에게 잔인하게 폭행당해 결국 살해당한 사진을 보면서도 끔찍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목격자로 지목된 것을 귀찮아 하고, 이런 사건에 엮이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경찰의 잘못으로 해원은 범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협박을 받게 되면서 불안은 더욱 커진다. 그런 점에서 해원도 피해자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해원은 복남이 바라는대로 고향을 방문한다. 회사에서 사고를 친(?) 것 때문에 강제로 휴직을 하게 되고, 폭력배들이 찾아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기에, 한동안 서울을 떠나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해원의 고향인 '무도'는 작은 섬이다. 하루에 배가 한 번만 들어오는 곳이고, 섬에 사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섬 사람들은 대개 노인들이며 복남의 딸 연희가 유일한 어린이다.
무도로 들어가는 유일한 배를 모는 선장도 알고 보니 해원의 어릴 때 친구였다. 해원과 복남의 고향이 '섬'이라는 건 그 자체로 상징이다. '섬'은 육지에서 떨어져 있고, 고립되어 있는 지리적 조건이며,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해원은 어려서 섬을 떠난 뒤, 처음 섬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으로 보면 약 20년 이상이 흐른 뒤로 보인다. 그럼에도 마을에 사는 노인 할머니들은 해원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섬에는 여섯 명 정도의 할머니와 복남, 복남의 딸 연희, 복남의 남편 만종, 시동생 철종, 노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섬이고, 섬 사람들의 일상이지만, 이 섬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복남에게 지옥이다. 모든 사람들이 복남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긴다. 복남의 남편은 만종이지만, 만종이 외출하면 시동생 철종이 복남을 성폭행하고, 육지에서 성매매 여성을 데려온 만종은 복남 앞에서 성관계를 하는 막장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드러나는 복남의 과거는 더욱 잔혹하다. 복남은 10년 전에 섬의 남자들 몇 명에게 윤간을 당하고, 연희를 낳았다. 따라서 연희가 어떤 남자의 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복남의 남편 만종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복남이 매우 필요한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척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만종은 복남을 아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노예이자 인간이 아닌 소유물로 생각한다. 만종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남을 폭행하고, 욕설과 무시를 드러내놓고 한다. 게다가 딸 연희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만종은 딸까지도 성추행을 하고, 복남은 이걸 알고는 연희와 함께 섬을 탈출할 결심을 굳힌다.
서울에서 온 해원도 남성들의 성적 대상이 된다. 복남의 시동생 철종은 끊임없이 해원을 강간하려 한다. 섬의 남자들은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성을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 보거나, 동등한 인간이 아닌, 2등 인간, 하인, 노예, 불가촉천민으로 대하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이자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으로만 상대한다.
복남은 딸 연희를 데리고 섬을 탈출하려 하지만, 배의 주인도 섬의 남자들과 한편이며, 과거 복남을 윤간한 남자 가운데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복남에게서 돈을 받고도 시간을 끌어 결국 복남이 만종에게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드려 맞고, 딸 연희는 만종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살해한다. 연희의 죽음을 두고도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찰도 섬사람들과 친한 사람이고, 만종이 연희가 죽였다고 모함하면서 뇌물을 주고 사건을 수습한다.
복남은 사랑하는 딸 연희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걸 지켜봤고, 남편을 비롯해 섬의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며 복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경찰은 그런 섬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하는 걸 지켜보면서, 거짓과 위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의 행위에 절망하고 치를 떤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서, 복남이 변하는 순간이 있다. 이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매우 훌륭하고 대단한 내용이 펼쳐진다. 뜨거운 한여름, 감자를 캐는 시기니까 '하지감자'라고 하면 6월 말에 해당한다. 햇볕이 뜨겁고, 온도도 높아서 그늘 없는 밭에서 일하다보면 탈진해서 쓰러질 지경인데, 마을 할머니들은 그늘에 앉아 쉬는데, 복남이는 혼자 감자를 부지런히 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조선낫을 집어들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다가간다. 복남은 '해를 바라봤는데, 해가 말을 한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리고 낫으로 할머니들을 찍어 살해한다. 복남이는 미친 것일까. 복남은 시고모를 벼랑으로 몰아 스스로 떨어져 죽게 만들고, 시동생 철종의 목을 잘라 나무에 얹어놓고, 육지에서 돌아온 만종과 배의 주인 득수를 차례로 살해한다. 해원은 겨우 육지로 탈출해 경찰을 찾아가는데, 복남이 배를 불러 육지로 해원을 따라온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복남은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이 멀쩡하다. 복남이 해원을 끝까지 쫓아가 죽이려는 것은, 그렇게 믿었던 해원이 복남을 배신하고, 무시했으며, 섬사람들과 같은 입장에서 바라봤기 때문이다. 즉, 해원은 도시에서는 피해자였지만, 섬에서는 가해자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도 한때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 복남조차도 이기적인 태도로 외면한 것이다.
복남은 섬에 찾아왔던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에 있던 해원까지 죽이려 한다. 이 과정에서 복남은 정신을 차린 경찰이 쏜 총을 맞고, 해원과 몸싸움을 하다 부러진 리코더에 목이 찔려 죽는다. 리코더는 해원과 복남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물로, 어렸을 때 해원과 복남은 리코더를 불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해원이 리코더를 더 잘 불었다. 리코더가 부러진 것, 부러진 리코더가 무기가 되어 결국 복남이 죽는 것은, 해원과 복남의 우정과 운명이 엇갈리는 것을 상징한다.
해원도 마음 속에 늘 잊지 않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복남이 여러 남자에게 윤간을 당하게 된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 죄의식이 있었다. 해원과 복남이 섬에서 생활할 때,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몰려다니며 해원을 성추행하고, 복남이 해원을 지키려고 남자아이들과 싸우는 틈에 해원은 혼자 도망한다. 그리고 다시 복남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보게 되는 장면은, 남자아이들이 복남이를 건드리는 장면이었고, 이 사건 이후 해원은 서울로 떠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복남은 결국 그 남자아이들에게 윤간을 당하게 된 것이다.
복남은 단 한번도 해원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으며, 오직 자신이 섬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내도 외면하고 무시했던 해원이었지만, 섬을 찾아온 해원을 반갑게 맞이한 복남은, 해원을 여전히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해원은 복남이와의 추억은 있지만, 복남처럼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릴적 친구가 죽이고 싶은 대상으로 바뀌고, 처절한 몸싸움 끝에 한 친구가 죽는 결말을 보면, 이 영화는 '여성영화'나 '페미니즘영화'로 보기는 어렵다.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서사를 보여주며, 주인공이 여성인 것은, 여성이 사회적 약자이면서 남성에 비해 육체적으로도 약하기에 극에서 처절한 설정을 이끌어가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이 학대당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단지 '영화'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 정치적 범위로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며 그런 면에서 '여성영화'로 봐도 좋다.
영화는 극단으로 치닫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남'은 어디에나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많은 복남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가부장, 남성우월주의, 남성들의 폭력과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성적 대상화로 상처받다가 어느 날, 태양을 바라보고, 태양이 말을 하는 걸 듣게 되는 순간, 가해자 남성들은 시퍼런 낫에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가까이 있는 '복남'이 고통당하고 있는지, 무엇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눈여겨 찾아보고,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가 '복남'을 만들고, 결국 남성들 자신의 목을 따게 만드는 역겨운 제도라는 걸 눈치채고 바꿔야 한다. 이 영화는 젠더의 문제이자 권력의 문제를 다룬 영화로,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내재한 영화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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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뻔한데.. 재미있네?
뻔한 그림으로 재밌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영화 '크로스'는 어려운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웃음, 그리고 클리셰를 살짝 비튼 것이 적절하게 '크로스'했다.
지난 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크로스'는 아내에게 과거를 숨긴 채 베테랑 주부로 살아가는 전직 요원 강무(황정민)와 남편의 비밀을 오해한 강력범죄수사대 에이스 미선(염정아)이 거대한 사건에 함께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누구나 예측 가능하다. 정체를 숨긴 채 살고 있던 전직요원이 거대 사건을 마주하고, 가장 가까운 이들(가족, 친구, 동료 등)과 협력해 잘 해결해 나간다는 기시감 강력한 이야기다.
뻔하디 뻔한데도 '크로스'를 보면 빠져들게 되는데, 첫 번째는 클리셰를 살짝 비틀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강무와 미선 두 캐릭터의 설정을 구성할 때, 성별을 반전시켰다는 점이다. 집안일하면서 내조하는 강무, 누구보다도 거칠게 범죄자를 때려잡는 미선의 역할 스위칭은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성별 반전으로 인해 생긴 빈틈도 틈틈이 채워주긴 한다. 예를 들면, 미선의 성별이나 나이에 따른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무기를 쥐어준다거나 후반부 총격 액션신에 개연성을 불어넣기 위해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으로 빌드업하는 등 제법 신경 쓴 티가 난다. 그래서인지 두 부부가 크로스하여 펼치는 총격액션신이 제법 그럴싸한 그림으로 완성된다.
빌런인 '박장군'의 반전 정체도 중반으로 넘어가다 보면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본체를 내세우면서 상상치도 못한 등장신을 부여하며 색다른 맛을 가미한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내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다만,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뻔한 클리셰를 완벽하게 뒤집기엔 무리가 있다.
'크로스'의 장점이라고 하면, 매 작품마다 연기차력쇼를 펼쳐온 황정민과 염정아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한 앵글에 담긴다는 점이다. 매우 편안하고 소탈한 황정민과 여장부로 분한 염정아의 케미가 꽤나 신선하다. '크로스' 이외 다른 작품에서도 합을 맞추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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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호러영화야 서부영화야
각자의 머릿속에 믿고 보는 배우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김윤석 배우가 그에 속한다. <추격자>부터 <암수살인>까지 그 중후한 목소리가 너무 멋있다. 그리고 연기를 조금만 잘하나? 북한 사람부터 연변, 또 도박꾼에 액션 영화까지 가지각색으로 잘하니 그야말로 만능 배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김윤석 배우는 잘생겼지만, 할리우드에 마찬가지의 맥락을 가진 배우가 있으니 그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액션부터 멜로, 탐정까지 연기를 고루 잘하니 과연 할리우드의 김윤석이 어색하지 않다.
이런 그가 <모리타니안>에 이어 신작을 발표했다. 내가 좋아하는 커스틴 더스트와 제시 플레몬스와 합작해 서부극 영화에 출연했다. 올해만 해도 <더 스파이>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까지 개봉 예정이거나 이미 했었어서 그야말로 소처럼 일한 셈이다. 내년에 <닥터 스트레인지 인 멀티버스 온 매드니스>까지 나온다고 한다. 아마 그의 팬이라면 아마 눈호강 대잔치가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 특히 이 작품에 대해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4편의 개봉 예정 및 이미 상영한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이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아카데미나 칸의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윤석 배우의 필모그래피로 치면 <추격자>와도 같은, 그야말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작품이 된 것이다. 12월 1일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하니 모바일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분들의 시청을 권한다.
1) 진짜 호러영화인가요?
제목에 호러라고 적긴 했지만 사실 서부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감독 제인 캠피온이 그동안 여성 서사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와 이 작품도 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근데 이 작품엔 그런 것 없다. 완전 상마초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 영화라는 문화예술 매개체의 근본은 서부극 아닌가? '서부극'과 '마초'의 이미지로 연상되는 플롯이 어느 정도는 딱 알맞게 전개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전복된다.
2)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난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생각한다. 전반부에 필의 동생 조지와 로즈가 결혼한다. 로즈에게는 어쩐지 병약한 아들이 있다. 피터다. 피터는 병약한 존재다. 필은 미망인이었던 로즈뿐만 아니라 피터까지 별로 안 좋아한다. 잘 씻지도, 꾸미지도 않는 필. 1)에서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르시스트인 필에게 여성이 끼어들 틈이란 없다. 근데 이런 성격이 나머지 세 인물과 잘 맞냐? 아니다. 이 인물의 부정교합에서 오는 성격 안 맞음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좌지우지한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시네마에 익숙한 사람들이 봤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보자면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졸릴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극장보다 태블릿 PC로 보는 쪽을 더 추천한다. 또 여러 떡밥을 점점 쫓아가며 하나하나 해소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놓치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재생 바를 옮겼다 내렸다 할 수 있으니 극장보다 집에서 보는 게 이해가 더 될 거라고 생각한다.
3)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가요?
훌륭하다. 일단 제시 플레먼스와 커스틴 던스트가 부부 역할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이 둘은 연인이라고 한다. 여기서 오는 리얼리티(?) 때문인지 형과 부인 사이에서 영리하게 줄 타는 동생 조지의 모습을 잘 살렸다. 또 커스틴 던스트도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극에서 필이 대놓고 로즈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근데 점점 로즈의 정신과 신체가 피폐해져 가는데 이를 보여주는 호연을 펼친다. 완전히 상상력에 의존한 고통 내면 연기인데,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값을 한다. 또 아들 피터 역을 맡은 배우도 후반부에서 내용이 뒤집히는데 주요한 키포인트가 되는 역할을 한다. 이 네 명의 기본적인 특색 외에 네 가지 인물이 각자 던지는 떡밥에서 온 부조화가 극의 서스펜스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를 구현할 만큼 치열한 기싸움을 연출한다.
4)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나는 혐오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필은 과부인 로즈와 그의 아들 피터를 혐오하는 인물이다. 대놓고 싫어하는 것도 맞는데 한 가지로 일반화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혐오도 적용된다. 마초적인 입장을 고수하며 여성 혐오와 피터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는 필. 이렇게 혐오를 내포하는 마음의 기제에 어떤 것이 깔려있는지를 영화는 보여준다. 후반부에 영화가 전복된다고 썼던 부분이 이 이유인데, 필이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마초스러움'을 강요하는 시대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왔다는 걸 이해한다면 필의 심리상태와 왜 네 인물이 끊임없이 어그러짐에도 한 가지 키워드로 밧줄처럼 엮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랙 위도우>같이 약자에 위치에 있는 인물이 누군가를 구원해주는 줄거리도 아니고, <그린 북>같이 연대를 통해서 극복하는 스토리도 아니다. 그런데 제인 캠피온은 이 작품을 혐오의 비틀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은근하게 비꼬고 있다.
5) 플롯 외의 부분은 어떠한가요?
일단 영상미가 뛰어나다.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광을 잘 어울리게 찍었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시너지가 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극의 설정상 야생동물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야 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음향은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너던 그린우드가 연출했는데 첼로를 통해서 극의 서스펜스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1줄 요약 : 예술영화 축에 속하기 때문에 스릴러 장르영화 팬은 살짝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맛만 보고 싶다면 좋은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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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X뮤지컬 <스위니토드> 악마를 보았나?
* 영화 및 뮤지컬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대학 가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가 조승우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을 보는 것이었다. 물론 돈이 있어도 쉽사리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쯤 되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좀 달랐다. 별 기대 없이 <스위니 토드> 좌석을 살펴보다가 덩그러니 나 여기 있소, 하는 자리를 발견했다. 취소표인 모양이다. 세상 살고 볼 일 아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한 순간이 온다니. 어느새 공연장에 그 티켓을 쥐고 앉아있었다. 감회가 새로운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다. 누군가가 오지 않기로 한 그 자리가 내가 올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자꾸 얘기하면 주책이 될 수도 있으니 1절만 하자. 소리를 듣자마자 귀가 즐겁고 저절로 지어진 웃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름 세 글자로 기대하고 믿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즐겁게 하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기다리면서 살펴보니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유독 많았다. 왜 아니겠나. 막장 드라마랑 비교해도 보통을 넘는다. 벤자민 바커의 아내이자 조안나의 어머니인 소중한 루시를 강간하고, 그 조안나를 입양해서 심지어 아내로 들이려는 터핀 판사의 비뚤어진 욕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와 복수가 잘 풀리지 않자 불특정 다수의 목을 긋는 적나라한 살인 방식을 선보이는 이발사(스위니 토드/벤자민 바커), 심지어 그 시체에서 나온 고기로 파이 수익 창출을 이끌어내는 가게 주인 러빗 부인. 그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앤소니와 조안나의 사랑인지 도피인지 모를 곁다리 이야기. 아, 러빗 부인이 말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도. 듣도 보도 못할 만큼 살벌하다. 터핀 판사와 비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 법조계의 독주를 막으려는 미용업계와 요식업계의 콜라보. 듣기 좋기보다는 불편하고 독특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음악에, 중반부터 결말까지 유혈이 낭자하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란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 어느새 붉게 물든 피가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오죽하면 왜 이렇게 자극적이고 보기 힘든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뤘을지 의문도 들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든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거나, 혹은 이중적인 사람의 모습을 다루는 게 극적이어서? 상상해보자. 복수를 꿈꾸는 연쇄 살인 이발사와 인육 파이를 파는 공범 파이 가게 주인. 공연으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마구 살인을 하기로 다짐하는 노래에 박수를 치고 N차 관람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었으면 우리는 세상이 미쳐 날뛴다면서 욕을 한 바가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스위니 토드 원작 이야기가 실화 바탕이라는 설이 있어서 그렇다. 당시 런던에 돌던 소문이긴 했다고 하고. 실화일 때와 아닐 때 와 닿는 느낌이 좀 다르다. 날카로운 이발사의 칼날이 내 목이라고 피해 갔을까 싶은 정도의 서늘함?
무대는 확실히 이런 이야기를 펼쳐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여러 인물을 고루고루 중요하게 잘 다뤄주었고 유혈이 낭자한데도 그리 잔인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울한 이야기 속에서도 연기나 대사가 가볍고 재치가 있어서 부담감도 적었다. 풍자와 언어유희가 가득했고, 내용을 예측하지 못하고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Worst Pie in London이나 Pirelli's Miracle Elixir, A Little Priest 등의 가사가 흥미롭다. 여자 취향이 같은 터핀 판사와 스위니 토드의 오묘한 듀엣곡 Pretty Woman도 빼놓을 수 없고. 스위니 토드가 폭발하는 Epiphany, Wait과 By the Sea 등 러빗 부인의 몽환적인 넘버가 자주 생각난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스위니 토드>는 또 다르다. 뮤지컬과 전개는 거의 같지만 분위기가 무겁다. 차이점은 몇몇 넘버가 생략되거나 대체되었다는 점. The Ballad of Sweeny Todd, 첫 노래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이발사의 탈을 쓴 악마라는 가사도, 간담이 서늘한 삑- 소리도 넘어갔다. 터핀 판사가 조안나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표현하는 넘버와, 조안나와 앤소니의 Kiss me, 터핀 판사와 비들의 Ladies in Sensitivities, 비들과 러빗 부인이 부르던 Parlour Song이 생략되었다. 거지 여인의 19금 대사도 날아갔고 가발 장수인 것으로 준비하는 과정은 줄어들고 정신병원에서 조안나를 구출할 때 정신병원 운영자를 애도하게 되었다. 조안나는 빠져나오고도 악몽에 시달릴 것 같다며 걱정했다. 통통 튀던 러빗 부인이 좀 더 차분해졌고 유머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특유의 암울함이 잘 살아난다.
영화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잊고 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 이야기가 가진 큰 장벽들. 정당화하기 어려운 지점.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선을 넘어 왜 수많은 불특정 다수까지 이유 없이 살인하기에 이르렀을까. 복수하고 싶은 터핀 판사나 비들 정도만 처리하는 게 더 깔끔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왜 모르는 사람들을 죽여 파이 재료로 쓰고 먹는단 말인가. 부가적인 의문은 복수의 방식. 꼭 스위니 토드가 직접 손으로, 친구 같은 이발용 칼로 해야 하는 것인가.
그 의문의 실마리는 영화와 뮤지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루시의 강간 장면. 루시는 추방당한 남편을 기다리다가 터핀 판사의 꼬임에 넘어가 가장무도회에서 강간을 당한다.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말리기는커녕 재미난 요깃거리라도 되듯 깔깔대며 웃어댔다. 스위니 토드(구 벤자민 바커)가 어떻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냐면서 탄식하는 부분이 실마리가 된다. 터핀 판사만큼이나 야속했던 건 무슨 상황인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도 없고 돕지도 않으며 남의 불행을 조롱하고 즐기기까지 하는데 소중한 존재일 리 없다. 인간이 인간답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니까.
이 아까운 기회를 놓쳤으니!
There's a hole in the world like a great black pit
And it's filled with people who are filled with shit
And the vermin of the world inhabit it
But not for long...
세상의 밑바닥 검은 구멍엔
똥만 먹는 버러지가 설쳐대
망할 씨발 새끼들의 썩은 내
다 집어치워
They all deserve to die
Tell you why, Mrs. Lovett, tell you why
Because in all of the whole human race
Mrs. Lovett, there are two kinds of men and only two
There's the one staying put in his proper place
And the one with his foot in the other one's face
Look at me, Mrs Lovett, look at you
죄다 죽어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여기 위대하신 인류의 역사엔
딱 두 종류의 인간뿐이네
하난 똥이나 처먹고 사는 놈
아님 남한테 똥을 사 먹이는 놈
No, we all deserve to die
Even you, Mrs. Lovett, even I
Because the lives of the wicked should be made brief
For the rest of us death will be relief
We all deserve to die!
우릴 봐 우리 꼬라지를 봐
죄다 죽어야 해
당신도 이런 나도 똑같아
추잡한 쓰레긴 꺼져줘야 좋고
우린 뒈져야 삶이 편안하고
죄다 죽어야 해
뮤지컬 Sweeney Todd - Epiphany 중
두 번째는 스위니 토드가 부르는 Epiphany 가사에서 볼 수 있다. 토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이다.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해 본 생각이다. 경제적인 계급이 있다면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자기 자리에서 할 일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억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단다. 아마 그 뒤에 가사를 하나 붙여주자면 후자가 훨씬 잘 산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토드는 순진하고 능력 있는 이발사 바커였을 때 전자에 속했지만 모든 것을 잃은 입장. 그가 한 발 더 나아간 건 죽음에 대한 생각부터였다. 어차피 사람은 죽지만 죽음이 두 부류의 인간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쁜 사람들은 일찍 죽어주는 게 이롭고, 선한 사람들은 죽음이 오히려 구원이 될지도 모를 만큼 힘들게 살고 있는 세상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니 행동으로 이루는 것 역시 본인의 몫이다.
칼 들고 살인을 논하는데 다정해보이는 요상한 투샷
TODD:For what's the sound of the world out there?
세상을 채우는 이 소리
LOVETT: What, Mr. Todd? What, Mr. Todd? What is that sound?
뭔 소리죠 뭔 소리죠 말해봐요
TODD:Those crunching noises pervading the air!
씹고 씹히는 경쾌한 소리
LOVETT:Yes, Mr. Todd! Yes, Mr. Todd! Yes, all around!
네, 맞아요! 네, 맞아요! 잘 들려요!
TODD:It's man devouring man, my dear!
서로 잡아먹는 인간들
BOTH:And [LOVETT: Then] who are we to deny it in here?
새삼 놀라울 것도 없잖아
TODD:The history of the world, my love --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LOVETT:Save a lot of graves, Do a lot of relatives favors!
말해줘요, 말해줘요, 어떤 거죠
TODD:Is those below serving those up above!
누가 먹히고 또 먹느냐지
LOVETT:Ev'rybody shaves,
So there should be plenty of flavors!
중간에서 잘하면요 살아남죠
TODD:How gratifying for once to know
정말 공평하지 누구나
BOTH:That those above will serve those down below!
결국 술 한 잔의 안줏거리
TODD:Have charity towards the world, my pet!
손님은 누구나 평등해
LOVETT:Yes, yes, I know, my love!
그럼요, 평등해
TODD:We'll take the customers that we can get!
누구든 오시면 감사하게
LOVETT:High-born and low, my love!
부자도 거지도
TODD:We'll not discriminate great from small!
우린 절대로 차별 안 해
No, we'll serve anyone,
Meaning anyone,
뭐 먹어도 좋고,
먹혀도 좋아
BOTH:And to anyone
At all!
어디 아무나
와 봐
뮤지컬 Sweeney Todd - A little Priest 중
그리고 문제의 인간 고기 파이가 나오게 되는 곡 <A little Priest>도 마찬가지다. 살인은 그렇다 치고 식인이라니 엄청난 장벽이긴 하다. 너무 먹고살기가 힘들어 고기 없는 고기 파이 집을 하던 러빗 부인에게야 굴러 들어온 덩치 큰 고기를 놓치고 싶지 않고 토드야 갖다 묻어버리는 것보다 돈도 벌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고양이 고기나 사람 고기나 같은 고깃값으로 쳐지는 걸 보면 돌아가는 상황이 알만 하다.
하나 신기한 건 왠지 모르게 파이를 사는 사람들 역시 공범이 되어버리는 듯한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다는 점. 맛있다면서 매일 가게를 찾아왔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사라진 것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파이 가게는 1층이고 이발소는 2층,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들어온 손님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발소나 파이 가게나 모두 흥할 뿐이다. 미식가도 맛있다고 칭찬했다니까. 갑자기 왜 어디서 고기가 났을까란 의문은 없지만 본인에게 피해가 되는 악취 같은 것에만 민감할 뿐이다. 거지 여인도 아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애초에 보고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piphany>와 마찬가지로 <A Little Priest>에서도 후렴구에 계급에 관련된 이야기가 함께 나온다.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했을지언정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니 당사자들에게 신나는 부분이 생긴다. 사람은 위아래로 나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이 누구를 죽인다고 큰 문제라도 됐겠나. 토드와 러빗 부인의 쾌감은 자신들이 듣도 보도 못한 혁명을 시작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당연했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기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가진 자들의 목숨으로 돈을 번다니. 그래 놓고 차별 없이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 모두를 면도+파이 세트 명부에 올려놓은 건 뜨악한 부분이다. 방금 전까진 차별당했다고 얘기한 것 아니었나? 왜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팀킬을?
하지만 여기서 가진 자들만 죽인다면 토드와 러빗 부인은 영웅이 되어버린다. 러빗 부인은 그러기엔 토드를 간절히 원하고 혼자만 한적한 삶을 누리려는 소박한 욕망이 있는 소시민. 토드는 개인적인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혔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없다. 토드로 자칭 개명하면서 멘탈도 개조되었고 인간에 무관심해진 건 본인도 마찬가지. 과한 일반화 같지만 토드에게 루시를 험한 꼴 당하게 만들고 조안나를 돌봐주지 않은 그 나머지 사람들도 다 못된 사람들이다. 토드에겐 어차피 인간이란 한 부류인 셈. 아주 나쁜 가진 자들과 조금 덜 나쁜 가지지 못한 자들. 직접적으로 원한이 있는 자들과 간접적으론 없어져도 상관없는 자들.
러빗 부인 말대로 토드는 기다렸어야 한다. 터핀 판사와 비들의 목만 따도록 기다리면서 차라리 고양이 목이나 따면서 파이 가게 재료를 충당했어야 한다. 그의 정체를 알고 협박한 피렐리까지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말이다. 차라리 차별을 해서 죽였으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한쪽의 욕만 먹었을 것이다. 무차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 선착순 살인. 둘의 칼이 목을 가리지 않겠다는 가사는 무섭고 노래는 신나는 저 곡을 기준으로 결말은 파국으로 가게 된다.
러빗 부인과 토드의 서비스 마인드가 드러나는 곡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저렇게 완전히 차별 없이 손님을 대하지 않았다. 혼자 온 사람들만 죽였고 동행이 있는 사람들은 보내주었다. 아, 무엇보다 성별적인 차별이 좀 있다. 이발사다 보니 등장한 손님이 대부분 남자였던 것. 어른은 죽이면서 아이에겐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중적인 면모도 있었다.
알고 보니 루시였던 거지 여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던 조안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죽일 뻔한 건 토드가 혼자 있는 사람을 골라 죽이면서, 복수에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그렇다고 러빗 부인을 파이 가게 주인에 걸맞게 오븐에 던질 줄은 몰랐다. 면도칼로도 죽이지 않고 불에 타게 한 걸 보면 어지간히 러빗 부인이 루시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분노한 모양이다. 하긴 매일같이 같이 있어서 루시를 얼마나 찾았는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당신이 좋아서 그랬어요'라는 러빗 부인의 말이 더 소름 끼쳤을 수도 있다. 루시가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 알았다면, 조안나의 얼굴을 먼저 봤다면 토드의 분노가 다르게 펼쳐질 여지가 있었을까.
어리석은 이발사 벤자민 바커, 루시, 조안나
스위니 토드의 부제는 플릿 가에 사는 악마의 탈을 쓴 이발사(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 악마의 탈을 쓴 이발사라 하지만 정말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이고 무엇인가? 피를 묻히지 않았다 뿐이지 직권으로 가볍게 교수형을 내리고, 강간이며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용인되는 터핀 판사? 그의 옆에서 함께 즐기고 있었던 비들과 수많은 이름 모를 '윗사람들'? 악에 받쳐 어떻게 사는지 모를 "아랫사람들'? 멀리서 찾을 것 없겠다. 비들이 토드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갈 때, 터핀 판사가 토드를 찾아와서 콧노래를 부를 때 아, 원하던 대로 토드가 이들을 죽일 수 있을까 내심 응원했던 내 마음?
스위니 토드에서 본 악마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그 선에 있다. 위와 아래를 나누는 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나누는 선. 무관심과 소외, 억압과 착취, 돈과 권력의 남용으로 만들어진 부조리한 그 선. 그 선이 벤자민 바커를 스위니 토드로 만들고, 터핀이 루시와 조안나를 탐하게 했고, 루시를 거리에 나앉게 했으며, 벤자민의 오랜 친구 면도칼을 범행도구로 만들었다. 러빗 부인은 벤자민 바커의 죄를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모른 어리석음.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알면서도 입을 닫게 한 그 보이지 않는 선에 악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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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마음을 위로할 4월, 극장가를 찾은 3편의 영화들! <더 파더>, <노매드랜드>, <타인의 친절>
당신의 마음을 위로할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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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노매드랜드>, <타인의 친절>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4월,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웰메이드 영화들이 극장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나이 듦에 관한 진중한 통찰을 담은 <더 파더>, 대자연을 집으로 삼은 아름다운 미장센이 돋보이는 <노매드랜드>, 뉴욕에서 만난 여섯 남녀가 서로를 채워가는 이야기 <타인의 친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 글로브 시상식 등에 이름을 올리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예술 영화들로 4월 극장가를 각양각색의 매력으로 풍성하게 꾸며줄 예정이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4월 7일 개봉 예정인 <더 파더>는 안소니 홉킨스의 60년 연기 인생을 총망라하는 최고의 연기라 극찬 받고 있는 영화로, 완벽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믿은 노인 ‘안소니’가 기억에 혼란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동명의 연극을 원작으로 하여, 원작의 작가 플로리안 젤러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노인의 시선으로 사건을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치매 노인과 동일한 혼란을 느끼게 하면서도 끊임없이 긴장감을 조성해 심리적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딸 ‘앤’ 역의 올리비아 콜맨은 <더 파더>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4월 15일 개봉 예정인 <노매드랜드>는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으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 유력 후보로 떠오른 작품이다. 하나의 기업 도시가 경제적으로 붕괴한 후 그 곳에 살던 여성 ‘펀’이 평범한 보통의 삶을 뒤로하고 홀로 밴을 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광활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끝없이 펼쳐지는 길의 여정을 우아한 영상미로 담아내 놀라운 시네마틱 경험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4월 7일 개봉 예정인 <타인의 친절>은 낯선 뉴욕에서 저마다 길을 잃은 여섯 남녀가 오래된 러시아 식당에서 만나 각자의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아름다운 미장센과 독보적인 감성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켰던 론 쉐르픽 감독의 신작이다. <언 애듀케이션>, <원 데이>로 국내 관객들에게 촉촉히 젖어드는 우아한 감성 드라마를 선사했던 론 쉐르픽이 6년만에 국내 극장가로 귀환한 작품이라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매력적인 배우들의 환상적인 앙상블로 더욱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영화관으로 나들이 가기에 좋은 4월, 따뜻하고 포근한 날씨와 어울리는 3편의 웰메이드 영화들의 개봉으로 앞으로의 극장가가 더욱 활기를 띌 전망이다.
씨네랩 에디터 J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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