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4-08-11 00:00:58
매우 뻔한데.. 재미있네?
영화 '크로스' 리뷰
뻔한 그림으로 재밌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영화 '크로스'는 어려운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웃음, 그리고 클리셰를 살짝 비튼 것이 적절하게 '크로스'했다.
지난 9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크로스'는 아내에게 과거를 숨긴 채 베테랑 주부로 살아가는 전직 요원 강무(황정민)와 남편의 비밀을 오해한 강력범죄수사대 에이스 미선(염정아)이 거대한 사건에 함께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누구나 예측 가능하다. 정체를 숨긴 채 살고 있던 전직요원이 거대 사건을 마주하고, 가장 가까운 이들(가족, 친구, 동료 등)과 협력해 잘 해결해 나간다는 기시감 강력한 이야기다.
뻔하디 뻔한데도 '크로스'를 보면 빠져들게 되는데, 첫 번째는 클리셰를 살짝 비틀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강무와 미선 두 캐릭터의 설정을 구성할 때, 성별을 반전시켰다는 점이다. 집안일하면서 내조하는 강무, 누구보다도 거칠게 범죄자를 때려잡는 미선의 역할 스위칭은 제법 신선하게 다가온다.
성별 반전으로 인해 생긴 빈틈도 틈틈이 채워주긴 한다. 예를 들면, 미선의 성별이나 나이에 따른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무기를 쥐어준다거나 후반부 총격 액션신에 개연성을 불어넣기 위해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으로 빌드업하는 등 제법 신경 쓴 티가 난다. 그래서인지 두 부부가 크로스하여 펼치는 총격액션신이 제법 그럴싸한 그림으로 완성된다.
빌런인 '박장군'의 반전 정체도 중반으로 넘어가다 보면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본체를 내세우면서 상상치도 못한 등장신을 부여하며 색다른 맛을 가미한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의 내공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다만,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뻔한 클리셰를 완벽하게 뒤집기엔 무리가 있다.
'크로스'의 장점이라고 하면, 매 작품마다 연기차력쇼를 펼쳐온 황정민과 염정아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한 앵글에 담긴다는 점이다. 매우 편안하고 소탈한 황정민과 여장부로 분한 염정아의 케미가 꽤나 신선하다. '크로스' 이외 다른 작품에서도 합을 맞추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다.
★★★
Relative contents
-
- 두 도시가 비극을 기억하는 방법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가깝게 세월호 사건은 벌써 7주기가 되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때 세월호의 모습은 잊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여전히 진상규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망자를 완전히 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만 그 일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그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원인을 파악하고 희생자들을 기억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것이 다음 한 발자국을 떼어 걸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조금 먼 과거를 보면 광주 민주화 항쟁을 떠올릴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일 년에 한 번씩 맞이하는 추모일에만 그 일을 한 번씩 생각한다. 하지만 유족들은 1년 365일 여전히 그 일을 생각하고 잃은 가족을 마음속에서 꺼내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희생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어딘가에서 희생자들을 폭도라고 이야기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과거는 과거로 묻고 아픈 것을 그만 들추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이제는 과거를 묻어두고 앞으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말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원인도 같이 묻어두자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원인에 대한 명확한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이렇게 중요한 과거의 기억인 광주에서의 아픔을 찾고 기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군부 독재의 비극적 역사를 똑같이 경험한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 <좋은 빛, 좋은 공기>는 한국의 광주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비슷한 사건 이후 남은 유족과 과거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파헤치는 것보다는 그때 희생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이 느끼는 감정적인 부분과 그들이 지금 해나가고 있는 일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두 도시는 모두 독재 군부에 의해 자행된 학살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벌어진 행태도 비슷하다. 갑자기 길거리나 학교에서 사람들을 잡아가 폭도 세력으로 몬다. 그리고 죽이거나 특정 장소에 가두고 고민했다. 잡은 민간인들을 고문하는 일도 많았다. 마치 거울처럼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이 슬픈 역사는 굉장히 비슷해 보인다.
영화는 두 도시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실종자들의 유골을 찾는 일이다. 그 당시 두 도시에서는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실종자도 굉장히 많았고 그렇게 갑자기 연락이 끊긴 사람들은 유골조차 찾지 못한 경우가 많다. 몇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전히 실종된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있고, 특정 기관 주도로 땅속 어딘가 묻혀있는 유골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 작업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 자체가 남은 가족들에게는 작은 희망을 선사한다.
가족을 잃는 슬픔은 어떤 것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가족을 잃은 이후, 남은 가족들은 망자를 편안히, 그리고 곱게 보내려 애쓴다. 장례절차를 통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면서 가족의 모습을 마음에 꾹꾹 넣어둔다. 그 마지막 인사는 작별을 의미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그 슬픔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신을 찾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유족들은 그나마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만 그런 작별의 기회 조차 가질 수 없는 가족들은 삶을 이어가면서 잃어버린 가족과의 마지막 인사를 꿈꾼다.
과거를 보존하고 실종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는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희생자들의 가족 인터뷰를 담았다. 남은 가족들의 소원은 이미 나이 든 자신이 죽기 전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땅에 편안히 묻어주는 것이다. 그들은 군부 학살 당시 겪었던 일들을 마치 어제처럼 묘사한다. 가족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그들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다가 어떤 사람은 죽은 자식의 시체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단서가 끊겨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한 경우가 모두 나온다. 그들이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묘사할 때 그들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인다. 그 눈물을 아는 사람들은 남은 유골을 찾으려 무던히 애쓰고 하나하나의 유골을 찾고 분석해 나간다. 이것이 두 도시가 과거를 기억하고 정리해나가는 하나의 방법이다.
두 번째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이 역시 양쪽의 의견이 있다. 그 당시의 건물이나 물건을 옛날 그대로 보존하여 그때의 비극의 역사를 그대로 현재의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의견과 아픈 과거를 새롭고 더 밝은 모습으로 덮어쓰자는 의견이다. 이 영화는 그 아픈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당시의 역사가 있는 그대로 기록된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군의관이었던 한 의사가 그 당시 군 병원 건물을 걸어가면서 내뱉는 말들이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40년이나 더 지난 일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가 느끼는 감정과 주변 인물들이 느끼던 감정이 전달됨과 동시에 그 당시의 처참함이 그의 말에서 느껴진다. 그 당시의 병원이나 옛 전남도청 건물을 있는 그대로 복원함으로써 과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이 역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지는 그 당시 실종자들이 갇혀있던 건물에 대한 묘사도 굉장히 비슷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결국 잘 보존된 역사적 현장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하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런 과거에 대한 복원과 보존 노력 역시 남은 유가족들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그 당시 희생자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신들의 권리인 자유와 민주주의가 이들의 희생으로 조금이나마 지켜지길 바라는 것, 그리고 국가 권력이 가면 안 되는 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는 두 도시에 남은 유가족의 그 당시 기억에 대한 발언을 함께 보여주며 이러한 노력이 중단되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기록과 복원에 대한 노력에서 조금 벗어나 과거 어머니들의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 그 당시 자녀들을 잃었던 어머니들이 비슷한 처지의 다른 어머니들과 하나둘 모여 투쟁을 하게 된다. 광주뿐만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자녀를 잃은 어머니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을 시작했다. 대부분 여자인 그들을 무시했지만 그들은 조금씩 세력을 키워 큰 투쟁의 불씨로 키웠다. 또한 그들은 나이가 든 현재 시점까지도 진상규명과 실종자 유골에 대한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현재까지 두 도시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실상과 아픔이 전달될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연약하게만 보였던 어머니들이 끝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그들은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미래에 다시는 그런 아픈 일이 일어나면 안 되고 그것에 자신들이 할 일을 끝까지 하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투쟁
영화 속에는 현재 두 도시의 10대 학생들이 그 당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영상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 간간히 나온다. 아주 먼 거리지만 영상으로 인사하고 그들이 느끼는 과거의 슬픔을 작품으로 담아내려는 그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임흥순 감독은 과거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에서 은사자상을 타기도 한 미술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의 영상 속에 담긴 과거의 여러 모습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좋은 빛이란 뜻을 가진 도시 광주와 좋은 공기라는 뜻을 가진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군부 학살은 굉장히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이때 나온 희생자, 그리고 유가족들의 모습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 흑백으로 구성된 화면은 광주와 브에노스아이레스스를 교차로 비추는데, 언뜻 보다 보면 이곳이 광주인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만큼 두 도시가 겪은 상황이 비슷하고 남은 과거의 건물이나 잔재들도 같은 모습이다. 결국은 두 도시가 하고자 하는 앞으로의 방향성도 같아서 두 도시가 과거를 담고 그리는 모습이 마치 하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상이나 매체를 통한 연대로 이 두 도시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영화에 담겼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얀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는 군부에 의한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과 항쟁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에 대한 지지도 더하고 있다.
-
- 리얼리티 가족 다큐멘터리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당사자성 발언.
나는 여자다. 그리고 김씨다. 조부는 종가집 장손이었다. 무려 4대 독자! 그리고 대망의, 내 본적은 경상북도다. 나는 순혈이다. 지독한 가부장제의 순수혈통. 종친회에서 고칠 데를 손 봤다는 올칼라 족보를 만들었고, 여전히 나는 남동생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가족 소개 같은 숙제를 하면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무슨 김씨 무슨 파 무슨 왕의 몇대손이며 우리 할아버지는 몇대 독자고 어쩌고 저쩌고. 어릴 때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더랬다. 그리고 좀 커서는 족보를 샀겠거니 생각했다.
커서 보니 쓸 만한 유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나와 내 동생과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등과 비슷한 모습일진대 무슨 놈의 대를 그렇게 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이 족보주의에서, 순수 혈통을 이어가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 유전자를 굳이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가.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뭐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어서 아무도 병원에 안 오고, 내 이름이 뒤에 아들 낳는 이름으로 지어질 뻔하고, 족보에도 올려주지 않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슨 왕정 제도를 미시체계에서 이룩한다는 게 좀 우스우니까. 장남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훗날 왕위를 물려주는 것마냥 일개 가정에서 신수왕권설 같은 걸 주장하는 게 이상하니까.
자,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까닭은 영화 <장손>이 픽션이기 때문이다. 픽션인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 픽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장손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도 핍진하여 두 시간 동안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차남의 장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그 이야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건
족보와 장손밖에 없다. 장손을 제외한 나머지는 흩어져야 산다. 영화는 가정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층위의 갈등을 두 시간 동안 보여주는데, 그 갈등이 비단 가정 내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프랙탈은 일부를 확대해 보면 전체와 동일한 모양이 반복되는 구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산 김씨'네 가정은 대한민국의 프랙탈이다. 영화는 가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나 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서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선산 김씨'네가 유난스럽지도, 특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몇 개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켜켜이 쌓인다. 그 갈등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제법 클리셰적인 갈등이다.
자기네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김씨 아닌 사람들만 모여 앉아 전을 부치고, 김씨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화투 치고 맥주를 마신다거나, 장손이 올 때까지는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거나.
6.25 전쟁 때 빨갱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하는 노인과 노인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은 손자, 사업으로 부자가 된 자식과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자식. 애초에 돈 되는 공장은 아들 주고, 낡은 집은 딸을 준 유산 분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세대갈등과 남녀갈등이 총체적으로 한 가정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두부 공장'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두부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음식 아닌가.
두부를 잘 뭉치려면 쌩노가다를 해야 한다. 원래는 가정 내에서 만들었다(아는 척하는 이유는 내 외조모가 두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산 김씨네 두부공장 역시 처음에는 가정 내에서 조모인 오말녀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말녀는 며느리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두부가 못마땅하다.
두부 공장 씬에서 장남인 태근이 일하는 모습은 스케치로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일하는 사람은 손녀사위다. 그런데 사장은 당연히 태근이다.
간단히 설명된다. 이 가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이다. 다시 프랙탈. 유사 이래로 놀고 먹은 여자는 소수다. 장손이라 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한 것만 같지만, 사실상 장손 혼자서 가정을 부양하고, 조상들을 제사지내주지 않는다.
조모는 장손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조부는 규범과 같은 상징체계에만 관심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사람은 조모다. 장손이 올 때만 에어컨을 켜 주고, 장손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신화처럼 반복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감시하는 여자. 장손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여자. 장손이라는 고귀한 존재를 만들어 희생을 합리화하는 여자. 어쩌면 장손은 고된 여자들이 만든 신화다.
그러니 사실 여자들이 뭉치지 않고 흩어지는 순간, 장손? 그게 뭔데.
가족의 미래
영화의 초반부에 제사 준비를 하면서 오말녀는 딸에게 '상조보험'에 가입하라고 재촉한다. 보살이 집안에 초상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 하나 죽긴 죽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누가 죽을까. 가족의 미래를 점쳐보자.
1. 김승필(장손의 조부)의 사망: 매우 자연스럽다. 나이도 많고, 대장암 수술을 해서 건강도 좋지 못하다. 제사를 꼭 자정에 맞추어 지내야 한다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다. 입만 열면 빨갱이 타령. 김승필이 사망한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주도권이 김태근에게 넘어갈 것.
2. 김태근(장손의 부)의 사망: 장손의 모가 농담으로 하는 말. 하도 미워서 잘 때 한 대 때렸다. 죽지도 않고 왜 깼냐. 뭐, 슬프지만 장손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두부 공장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할 것. 공장은 서울에서 연기하는 장손에게 갈 것이냐, 공장에서 일하는 손녀사위에게 갈 것이냐.
3. 김성진(장손)의 사망: 큰일난다. 이 가족 망한다.
4. 오말녀(장손의 조모)의 사망: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실질적 가장. 오말녀는 현재 매우 건강하고 꼬장꼬장한 노인이다. 한글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오말녀가 죽는다면 장손 판타지로 이어온 가정은 붕괴된다. 오말녀만큼 장손을 우쭈쭈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5. 그 외 여자들의 사망: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큰 사건이라 함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장례식은 별 탈 없이 잔잔하게 살던 가족에게 던져진 돌멩이가 아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는 겉잡을 수 없는 와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장례식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
<장손>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과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이나 출연진, 줄거리,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갔다. 두 시간 동안 경북에 본적을 둔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 솜씨에 무슨 상을 받아도 받았겠거니 예상만 했다.
이 영화에 다양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탁월한 이미지를 꼽고 싶다. 오래된 한옥에 사는 노인들의 출입을 쉽게 하려고 문간에 걸어둔 동앗줄 같은 디테일.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줄조차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인데, 장손 성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고, 성진을 배웅한 노인은 눈 쌓인 비탈길을 아주 오래 걷는다. 롱테이크로 잡아낸 그 장면은 마치 서편제 같다. 뭐 대단한 걸 하고 돌아서는 장면 같다는 뜻이다.
택시를 탄 성진의 얼굴에 아침해가 날카롭게 비친다. 성진은 눈을 찡그린다. 빛을 보는 대신 눈을 가려 버린다. 그런 디테일에서, 이 가부장제라는 망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장손 성진의 손에서는 결코 낡은 시대가 종언되고 새로운 체제가 구축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
누군가에게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픽션,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고통, 또 누군가에게는 피해망상,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관습'.
<장손>은 픽션이 아니다. 리얼 다큐멘터리다. 추석 직전에 개봉하는 만큼, 가족과 함께 보면... 과연 괜찮을까?
장손(House of the Seasons, 2024)
감독: 오정민
출연: 강승호, 손숙, 우상전 외
러닝타임: 121분
개봉: 2024. 09. 11.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
-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 <야구소녀> 리뷰
*스포일러 포함
살다 보면 세상일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많다. 노력이 전부 결과를 이어지는 건 아니며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막막한 괴로움에 포기를 해야 하는 건지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건지 매 순간 갈팡질팡 하게 된다. 하지만 그저 모든 생각을 다 지우고 앞으로 묵묵히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때가 온다는 전제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그저 한 걸음 내디뎌 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때도 있다.
<야구소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가 그것을 극복하는 서사도 아니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불타는 열정으로 모두를 감동시키는 스토리도 아니다. 주수인은 구속 150킬로가 넘는 '남자를 뛰어넘는' 천재도 아니다. 여자 선수를 부원으로 받아 학교의 이름을 알리려 한 고교 야구단이나 그녀를 프런트에 영입해 야구단 이미지 마케팅을 하려 했던 구단들은 그녀의 재능이나 열정에 크게 감동한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은 여자 선수로서 던질 수 있는 만큼의 구속으로 공을 던졌고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라서 할 수 있는' 것에 치중했다. 그리고 학교와 프로 야구단은 그녀를 과대평가 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고 딱 실제로 지닌 실력만큼 평가하고, 여자 선수라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이용하는 대가로 적절한 연봉을 제시한다. 이 영화의 기승전결은 주수인도, 그녀의 부모님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모두가 만족하는 레벨에서 딱 끝난다.
그러니까 사실, 복권에 당첨되고 싶거나 불로소득을 벌고 싶다는 한탄들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적정 수준의 합리성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고, 기대한 만큼 결과를 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합리성이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며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길들도 내 길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성장이라 부르는 그것은 복권 당첨보다도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다. 세상은 최소한의 합리성도 우리에게 보장해 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아직 오늘의 몫으로 이뤄내야 할 성장이 숙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수인이 '여자 중에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 구단으로 가기 싫었던 이유는 뭘까?
여성으로 태어난(그게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냥 가장 보편적으로)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해할 것이다. '여자 치고 털털하다' '여자 치고 잘한다' 같은 말은 몇 백번을 들을수록 기분만 나쁘다. 여자라는 집단을 통째로 비하하면서 그 집단에 속한 너는 집단의 부정적 속성에 물들지 않은, 긍정적으로 구분되는 개체라는 말인데 이게 어떻게 칭찬인가?
하지만 영화 속에서 수인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항변도 설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을 던진다. 왜냐면 그러고 싶으니까. 자신이 남자라면 듣지 않았을 말들에 속이 상하고 '현실'과 '경제적' 문제를 보라고 윽박지르는 세상이 짜증 나지만, 어쨌든 거기에 순응해서 살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계속 공을 던진다. 그리고 그것이 수인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라고 생각하던 영화의 관객은 트라이아웃에서 정제이미를 만나는 순간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수인과, 나와, 다르겠지만 비슷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같은 안도감이다. 꼭 서로 팔짱을 끼고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그 안도감에 너도 이 자리 오기까지 참 뭣 같은 일 많이 겪었겠구나, 라는 약간의 공감과 연민이 섞인 감정도 연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구속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인정하게 된 시점에서 수인은 진태의 도움을 받아 너클볼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더 이상의 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엄마는 수인을 응원하고 지원해 주기로 했고, 수인이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여자 선수들의 지원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흔히들 문이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한다. 글쎄, 실제의 삶은 그것보다는, 문이 다 닫히면 닫힌 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에 가깝다. 나의 존재가 아직 존재하는 한 정말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뭘 어떡해, 그래도 해야지.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없다고 해도 지금 내가 알 수 없는 부분 때문에 모든 걸 미리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세상일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그래도 어떡해? 그냥 해야지.
-
- 소년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
소년은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다. 왜 이 소년은 부모를 고소한 걸까. 기적이 일어났지만 몰락한 곳, 가버나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열악한 좁은 공간에 아이 6명이 방치된 이곳은 자인의 집이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자인은 생계를 위해 어린 동생들과 함께 나가 매일 매일 일한다. 이렇게 고단한 삶 속에서도 주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어려서 한없이 작은 자인의 힘은 역부족이다. 동생만큼은 꼭 지키고 싶던 자인은 부모에 의해 팔려 가는 동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하르가 감자야? 토마토야? 꽃을 피우게?”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곳에서 나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외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마법처럼 그 공간에 가만히 앉아있던 자인은 아이들의 공간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이동한다. 일할 곳을 찾지만, 어린아이를 채용하는 곳은 없었고 그곳에서 라힐을 만난다. 불법 체류자이지만 아르바이트하며 아들 요나스와 함께 살고 있었다. 라힐은 자인을 데려가 씻기고 요나스를 봐달라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삶을 지속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집에서 자신의 서류를 챙기러 왔건만, 그토록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했던 동생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나고 자란 것과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달렸다. 어른보다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자인은 쭉 자라온 환경과 비슷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보아준 사람의 아이를 돌보아 주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아이들을 방치/학대하고 11살인 딸을 돈으로 팔아 출생신고가 안되어 있어 수술도 못받고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또 아이를 가진 부모의 모습을 보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부모로서의 책임감과 인간다움을 저버리고 이런 삶에서의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분열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집이라는 공간과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신분증이 누구든 가질 수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팔아넘긴 부모와 자식을 위해 불행을 끌어안은 부모를 옆에서 본 자인은 나고 자란 것이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등록되지 못한 삶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기본적인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에 의해 유령이었던 자인이 범법자가 되고 부모에게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인이 된다.
자인은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던 자인은 이제야 웃는다.
자인의 웃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해진다.
자인, 행복해야해.
-
-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 The Suicide Squad, 2021
-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실패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의 평가에 대한 것이고, 상업적으로는 이상하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영화가 거둬들인 총 수익 $746,846,894는 "DCEU"로는 4번째로 가는 수익이며, 특히 연말 할로윈은 모두 "할리 퀸"으로 가득 채우게 만들었죠. (여기에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하며 "슈퍼히어로"장르로는 '첫 아카데미 수상'도 챙겼습니다)
곧바로 속편을 만드는 것이 맞지만, 해당 영화의 각본 작업이 6주만에 끝냈을 만큼 "워너의 개입"에 이미지가 개판이라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게 되었습니다.갑작스러운 "제임스 건"의 선임에 많은 팬들은 놀랬습니다.
그가 경쟁사 "MCU"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인물이자 차후 "조스 웨던"을 이어받아 <어벤져스 3·4편>의 감독으로 거론될 만큼 능력은 크게 인정받았지만, 이런 그는 "디즈니"로부터 막 해고를 당했거든요.
그 이유에는 과거 그가 불미스러운 트윗(아동 관련) 때문이기에 "워너"의 선택은 마치, "독이 든 성배"로 보였거든요. (이후 "디즈니"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의 감독으로 재선임했지만...)
그렇기에 많은 팬들은 욕을 하면서도, 그가 맡을 "DCEU"의 영화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영화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로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협업 무비"인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인데요.
'과연, 기대에 충족시켰는지?' -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영화는 알다시피, 악당들만 재소 되어있는 감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곳의 국장 "아만다 윌러"는 수감자 가운데 "로버트 뒤보아", 일명 "블러드 스포트"를 필두로 또 다른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조직합니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의 형량을 거래하고 임무를 받게 되지만 적들의 거센 반항에 하나둘씩 쓰러지는데...기대만큼 보여줄까?
1. 딱하지만 어떡하겠니...
먼저,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관객들에게 책정한 132분의 분량은 아무리 보아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개, 영화들이 120분 만에 '기승전결'을 완성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힘을 빼고 본다는 건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이죠.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에게 많은 분량은 마음 한 편으로 안정감을 주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영화의 제목 "스쿼드(squad)"가 "팀"이라는 의미로 통하니 이에 소속된 개인들의 소개만으로도 꽉 찰 테니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영화에서는 "정리"를 잘해야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습니다.말도 못 하게 보내주마!
무엇보다 자유로움을 표방한 영화이니 "정리"와 같은 통제는 어불성설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의 전작 <가디언즈 오브 갤력시>시리즈도 이런 과정으로 아직도 기억되는 협업 영화인만큼 이는 이번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게도 필요한데요.
이에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단어에 걸맞은 화끈한 처리 방식을 보여줍니다.
바로, 죽이는 것이죠. - 새로운 캐릭터들의 퇴장은 분량으로 그렇다 쳐도 "할리"를 포함해 "캡틴 부메랑"과 "릭 플래그"와 같이 전작에서 이어진 캐릭터들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런 편리함을 생각하면, 살려서 이번 이야기에 쓰면 되겠지만 영화는 "전관예우"는 모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긴장을 놓칠 수가 없더군요.2. 시리즈가 아님라고 부정하지만...
이에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할리 퀸"이 잘 나간다고 해서 분량을 더 주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등하게 배분해 각자의 매력을 이끌어내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선택만 된다면 관객들에게 이름을 남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선택된 캐릭터들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자신의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오브"를 두고서 서로의 동상이몽을 보여주다가 "동료"를 넘어서 "가족"이 되어갔던 것처럼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형량 감소'의 차이만을 보여줄 뿐 신나는 사운드트랙까지 모든 것이 똑같아 이를 지우기는 어렵습니다.똑같이만 만들었어도 좋았을지도?
그렇다면,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관객들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라는 기성품의 맛을 기대해봐도 좋겠지만 이는 또 완벽하게 빗나갑니다.
이런 이유에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부족한 설명으로 쌓아올린 반전의 불균형으로 보입니다.
전작과 차이를 두려 하지만, 결국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16년에 나왔던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극 중 "할리"와 "캡틴 부메랑", 그리고 "릭 플래그"가 서로를 알듯이 전작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습니다.3. 이 익숙한 내음은?
결국, "시리즈"라는 말은 해당 작품을 보는데 이전 작품들을 봐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기는 것인데요.
이런 점에서 극 중 "릭 플래그"가 추후 "피스메이커"와의 대립에서 '비밀을 숨기느냐에 공개하느냐?'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서 "플래그"의 대사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이젠 지긋지긋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전작에서 "플래그"가 자신의 여자친구(인챈트리스)때문에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들어갔던 일이 오늘날의 대사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는 것이죠.결국, 그 영화를 보고 오라는 거군요...
그렇게, "플래그"는 전작으로 설명을 미뤘다고 해도 "피스메이커"는 이번 영화에서 딱히 설명이 없습니다.
분명히 선택되었다고 한들 그의 신념은 설명한 적이 없으니 "반전"은 도리어, 독으로 적용돼 후반부 전개를 무너진듯한 인상을 부여합니다.
이외에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똑같으려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빠져서는 안되는데요.
본 영화는 "블러드 스포트"와 "랫캐처2"를 이에 내세우나 이들을 서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바라보기에 부족했고, 무엇보다 이들이 마지막에 "스타로"와의 대결에 있어 동기도 존재하지 않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기대하기에는 어려울 겁니다.4. 자극적인 맛에 취했던 영화와 관객들...
이런 이유에는 얇디얇은 캐릭터의 두께도 있겠지만, "청소년 관람불가"라고 쓰여있는 해당 영화의 관람등급으로 보입니다.
극 중 "스타로"의 기생이라든지 "킹샤크"의 액션을 비롯한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액션은 피가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화끈하게 보입니다.
근데, 화끈하게 보이던 영화의 초반부 액션이 후반부로 갈수록 무덤덤해져 자극이 덜하는 것도 문제이나 정작 이는 "액션"에만 제한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면...
분명히, 132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부족하지 않지만 캐릭터들의 소개만으로 부족하다고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리"를 잘해야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다고 이어서 말을 했죠.
그런 점에서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빼먹은 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받아들인 건 당초 기대치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수위의 완급조절"입니다.
초반부터 화끈하게 몰아붙이는 액션은 이야기보다 부각되니 관객들에게 이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지 못한 이야기를 후반부에 풀어야 하는데, 이에 아는 바도 없고 액션의 자극도 덜하니 당연히 주목을 이끌지 못한 건 당연하겠죠.※ 이렇게, 말했지만 이번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전작보다는 확실히 낫습니다.
※ 쿠키 영상은 영화가 끝나고 바로 나타나는 것과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서 나오는 것으로 총 2개입니다.
-
- 혹성탈출 4 | 아직은 오지 않은 '새로운 시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 성년식을 기다리던 '노아'(오웬 티그)와 독수리 부족은 갑작스레 '프록시무스 시저'(케빈 듀랜드) 군대의 습격을 받는다. 노아는 혈투 끝에 간신히 살아남지만, 아버지는 죽고 모든 부족은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으로 끌려간다. 이에 노아는 부족을 구출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여행길에서 고생하던 노아는 우연히 두 친구를 만난다.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는 노아에게 전설적인 유인원 지도자 '시저'의 가르침을 알려준다. 또 자신처럼 프록시무스 시저에게 쫓기던 인간 소녀 '메이'(프레이아 앨런)는 노아에게 유인원과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준다. 이러한 도움을 토대로 노아는 시저의 가르침을 기만하는 프록시무스를 무찌르고 유인원과 인간 모두를 구할 전투에 나선다.
4편의 저주에 걸리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2024년 봄 극장가는 4편으로 가득하다. <쿵푸팬더 4>가 긴 공백을 깨고 돌아왔고, <범죄도시4>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다만 성과는 기대 이하다. <쿵푸팬더 4>는 지난 시리즈의 매력과 캐릭터에만 기댈 뿐이었다. <범죄도시4> 역시 여전한 흥행 파워를 과시했지만, 장기 시리즈의 피로감은 가중됐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혹성탈출4>)는 올봄의 세 번째 '4편'이다. 2011년에 리부트 된 시리즈의 4편이고,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이후 7년 만의 속편이다. 그런데 제목이 퍽 흥미롭다. 지난 삼부작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속편인데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4'라는 넘버링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로부터는 시리즈의 새 출발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 주인공인 '시저'(앤디 서키스)를 등장시키지 않듯이.
하지만 <혹성탈출4>도 '4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시리즈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적절히 계승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비주얼을 제외한 대부분이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 그 결과 4편까지 이어진 시리즈에 신선한 피를 수혈할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선뜻 끄덕이기는 어렵다.
시리즈의 정수를 계승하다
<혹성탈출>의 핵심은 유인원과 인류의 대립이다. 하지만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만 화두가 되지는 않았다. 시저에게는 인간 친구가 여럿 있었다. 자기를 키워준 윌. 아내를 치료해 준 말콤. 인간을 향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꺾어 준 소녀 노바. 의견이 다른 유인원 및 인간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시저가 인류와의 공존을 추구한 이유였다. 이처럼 사적 감정을 공적 책무로 승화하는 시저의 여정은 <혹성탈출>의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전편으로부터 300여 년 후를 다루는 <혹성탈출4>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종족 간의 전쟁 사이에서 싹을 틔우는 두 유인원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인류를 무시하는 유인원 노아와 유인원에게 사냥당하던 인간 메이는 우연히 같이 여행을 떠난다. 노아는 프록시무스 시저에게 붙잡혀 간 자기 부족을 구출하기 위해. 메이는 인류의 미래를 건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물론 둘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 종족의 존속이라는 목표가 언제나 최우선이기 때문. 하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둘은 우정 비슷한 관계까지 나아간다. 친구는 아니지만, 차마 서로를 죽이지는 못하는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미래의 화근을 잘라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혹성탈출4>는 재개될 유인원과 인류의 전쟁을 미묘한 애증의 감정선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다.
아이디어는 좋았다
앞선 시리즈의 계승만큼 프랜차이즈를 일신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유인원 대 인간의 대립 구도뿐만 아니라 유인원 간의 갈등에도 초점을 맞춘다.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는 인간과 공존할지, 아니면 인간을 제거하고 지구를 차지할지를 두고 다툰다. 이는 2편 <반격의 서막> 속 시저와 코바의 대립을 극대화한 듯 보인다.
이름만 봐도 두 주인공의 대립은 필연적이다. 성경에서 노아는 신의 뜻에 충실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속 노아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시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유인원이다. 그래서 그는 나름의 방주를 만들어 시저의 뜻대로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리더로 거듭난다.
반면에 프록시무스 시저는 시저를 사칭한다. 인간과 유인원을 모두 지배하는 왕국을 만들고, 인간의 기술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라는 가르침을 악용한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유인원은 신경 쓰지 않는다. 라틴어로 '가장 가까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록시마(Proxima)'를 이름으로 쓰지만, 정작 시저가 가장 지양할 선택만 지향한다.
이에 더해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립은 종교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여러 세대가 지난 뒤 시저는 숭배의 대상이 됐고,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는 시저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툰다. 마치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여러 교파가 싸웠듯이. 또 무함마드의 후계자 자격을 두고 수니와 시아가 전쟁을 벌였듯이. 이렇게 보면 <혹성탈출4>는 <혹성탈출> 버전 <듄>이 될 수도 있었다.
스토리텔링의 한계
그러나 기존 삼부작과 차별화될 가능성은 미처 꽃 피우지 못했다. 제작진의 스토리텔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 영화는 두 주인공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줄 다양한 맥락과 복합적인 함의를 외면한다. 일례로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을 묘사할 때는 정복 전쟁, 노예제, '시저'라는 호칭처럼 고대 로마를 연상케 하는 요소를 활용한 반면,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립은 단순히 부족의 생존과 탈출 차원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러 장치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독수리 부족의 통과 의례가 대표적이다. 노아의 부족에게는 독수리 알을 훔쳐 키우는 성년식이 있다. 이때 둥지마다 최소한 알 하나는 남겨둬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는 독수리 부족이 본질적으로 타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노아와 독수리의 관계를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한다. 노아에게 독수리는 부족의 리더로 거듭나고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하는 도구일 뿐이다. 결국 미묘한 함의는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
스토리텔링 문제는 메이의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노아 혹은 유인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메이는 철저히 인간중심적이고, 노아의 행보를 방해하는 빌런처럼 보인다. 인류와 유인원의 대립은 극대화되지만, 둘 사이에 작게나마 피어난 우정의 싹은 더욱 작아진다. 그 결과 서사는 다소 평면적이고, 지난 삼부작에 비해 인간 캐릭터의 매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뒷심 부족한 볼거리
볼거리 역시 아쉬움이 적지 않다. 물론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새로 메가폰을 잡은 만큼 전체적인 스타일의 변화는 인상적이다. 이전 감독인 맷 리브스가 전반적으로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연출력을 과시한 반면, 이번에는 유인원과 인간의 추격전처럼 역동적인 카메라워크가 눈길을 끈다.
이에 더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제작 경험을 살려 수풀로 뒤덮인 도시와 철골구조, 녹슨 배와 무너진 부두로 만든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 등의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유려하게 펼쳐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라이온 킹> 실사 영화가 사자를 비롯한 동물의 표정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유인원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고 포착한 CG 기술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펙터클은 약해진다. 이전 시리즈에 비해 스케일이 소소하다 보니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를 보는 것 같은 실망감이 밀려들 수 있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구성이 아쉽다.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결은 공격도 반격도 일방적이라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 노아와 결속된 독수리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암시가 너무 많아서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공은 속편에게
결과적으로 <혹성탈출4>의 결말은 아쉬움이 크다. 독립된 작품이면 모르겠지만, 네 번째 시리즈에서도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을 다시 한번 암시하는 결말은 신선함이 부족하다. 돌고 돌아 시저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 여러 프랜차이즈가 같은 실수를 범했기에 특히 우려스럽다. 시리즈 리부트 후에도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의 갈등 구도를 마지막까지 되풀이 한 <엑스맨>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결국 공은 속편에게 넘어간 듯하다. 속편의 전개에 따라 <혹성탈출4>가 새로운 시대를 위한 한 걸음일지가 결정될 테니. 달리 말해 어떤 의미로든 속편을 기다리는 재미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진짜 무대는 다음으로 미루는 예고편
-
- 영화'남산의 부장들'과 관련된 3가지 이야기/예고편리뷰
-
1.김재규는 누구인가
2.코리아 게이트에 대하여
3.그는 왜 방아쇠를 당겼나
-
- 「서복」 제목의 뜻 그리고 영화 속 숨겨진 이야기ㅣ서복 예고편ㅣ서복 영화리뷰ㅣ박보검ㅣ공유ㅣ서북
?'서복' 영화 예고편 리뷰
서복 제목 의미 그리고 스토리 정리 및 예측CJ 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스튜디오 101, CJ 엔터테인먼트 제작
TPS 컴퍼니 공동제작감독 : 이용주
출연 : 공유, 박보검, 조우진, 장영남, 박병은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
그와의 특별한 동행이 시작된다!과거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직 요원 ‘기헌’은 정보국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마지막 제안을 받는다.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 ‘서복’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일을 맡게 된 것.하지만 임무 수행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헌’과 ‘서복‘은
둘만의 특별한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실험실 밖 세상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서복‘과 생애 마지막 임무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기헌’은
가는 곳마다 사사건건 부딪친다.한편, 인류의 구원이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서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 여러 집단의 추적은
점점 거세지고 이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소개된 서복 역사는 학계의 주장 중 하나일 뿐,
지나친 맹신은 금물입니다
#서복 #서복_리뷰 #서복예고편
-
- 넷플릭스 <19/20> 공식 예고편
어른이 되기까지 D-7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순간, 모든 규율이 사라지고 설렘 지수 급상승? ?새로운 청춘을 열어보시겠습니까?? 설렘중독 청춘 리얼리티 《열아홉, 스물》 두근거림이 곧 찾아옵니다?
-
- 영화 <미니언즈2> 티저 예고편
"오또카지? 귀여워서 오토입니다" 전 세계가 기다려온 미니언즈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