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3-06-20 17:53:44
천재 거장이 만든 영화 음악들이란 역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영화 시사회 후기
이 영화는 영화 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어렸을 때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음악 학원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트럼펫 연주자이며 엔니오 모리꼬네도 음악 학원에서 트럼펫을 배웠는데 자신은 평범한 소년이었으며 지금처럼 음악계의 거장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또한 음악 학원에서 페트리시라는 유능한 선생님을 만나고 제자가 되는데 이때부터 엔니오 모리꼬네의 작곡가 인생이 시작된다.
돈을 벌기 위해 극장에서도 일하고 군에 입대하여 군악대로 생활하기도 했던 엔니오 모리꼬네가 어느 날 좋은 기회를 얻게 되는데 그건 바로 서부극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다. 서부극에서 나오는 인물들과 풍경을 떠올리며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 넣는 그의 모습에 한스 짐머가 그를 왜 극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미국의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 못하는 한이 있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서부 영화 음악을 주름잡았던 엔니오 모리꼬네의 안타까운 흑역사이지만 훗날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는 쾌거도 이룬다.
쿠엔틴 티란티노 감독도 수상식에서 언급하길 엔니오 모리꼬네가 베토벤과 바흐와 모차르트와 견줄 만큼 위대한 작곡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에도 엔니오 모리꼬네는 200년 후에나 생각해 볼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작곡한 영화 음악들이 미국의 팝,락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줬으며 리메이크해서 나온 곡도 꽤 있다고 들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천재적인 창작 센스는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고전적인 클래식과는 다르게 현대음악을 했으며 그래서 영향력이 크다고 유명한 음악가들이 말한다. 걸작을 만드는 엔니오 모리꼬네는 정말 마에스트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음악인들의 존경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영화 음악의 한 획을 그은 천재적인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꼬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영화 음악은 달랐을 것이라고 한다. 필자도 창작이란 게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엔니오 모리꼬네의 열정을 보며 나도 참신한 창작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선지에 그려놓은 음표가
천재 거장을 만들다!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영화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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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비워내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문경>은 번아웃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이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영화다. 이를 위해 인물들은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걷고, 문경의 푸른 산과 맑은 계곡 등 자연을 바라보며 힐링을 얻는다.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며,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넌지시 묻는다. 함께 비움을 실천하겠냐고.
직장인들이 매일 힘듦을 겪듯 문경(류아벨)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 전시 기획 담당 팀장인 그는 팀 내 일도 잘하고 성실한 계약직 초월(채서안)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회사는 묵묵부답. 결국 초월은 계약직 만료가 되어 홀연히 사라진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문경은 회사 복귀 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초월의 고향이자 자신의 이름과 같은 문경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곳에서 우연히 첫 만행을 나선 비구니 가은(조재경), 길 잃은 강아지 길순을 만난 그는 유랑 할매(최수민) 집에서 신세를 진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은 저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아픈 과거를 꺼낸다.
<문경>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진 이들이 만나 펼치는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도시에 사는 직장인 문경과 산 속 사찰에서 지내던 비구니 가은은 문경이라는 특별한 곳에서 조우하고 길순이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점점 필연이 되어가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서로 접점 하나 없는 이들이 가까워지는 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상실과 부채감이 드러나면서다.
길순이가 맺어준 거나 다름없는 이들은 유랑 할매 집에서 비로소 공통점을 찾는다. 바로 자신과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고, 그에 따른 상길과 부채감이 마음 깊숙이 자리해 있다는 점이다. 문경은 가수를 꿈꿨던 동생을, 가은은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특히 가은은 과거 일어났던 사회적 참사를 연상케 하는 장소의 유일한 생존자로 그 죄책감에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한 것. 이들이 각각 초월과 길순이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이유는 이 전사 때문이다.
유랑 할매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후 마음의 문을 닫은 손녀 유랑(김주아)을 보살피는 그는 미리 그 아픔을 알지 못하고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가득하다. 손녀만 생각하면 마음이 디비진다(뒤집히다의 경북 방언)는 그의 말에는 어른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책망이 담겨있다.
이런 이들의 아픔이 치유되는 곳은 유랑 할매의 집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법한 자연처럼, 이 집은 상처받은 이들을 보듬어 주는 공간으로 표현된다. 특히 툇마루에 앉아 문경은 동생, 가은은 친구, 유랑 할매는 손녀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그동안 감춰뒀던 아픔을 끄집어내고 서로 교감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의 공감과 이해는 비로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집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마음을 여는 환경을 조성한다. 마치 자연이란 따뜻한 품 안에서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치유하는 격이랄까. 물질적인 것이 아닌 마음을 나누고 배려하는 행동만으로 누군가에게는 큰 힘이 된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기존 힐링 영화처럼 <문경>은 자극적인 소재나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들이 별로 없다. 선유동계곡, 윤필암, 고모산성, 주암정, 진남교반, 잉카마야박물관 등 문경의 아름다운 풍광이 시선을 사로잡지만, 자칫 문경시의 홍보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사찰 음식을 먹는 듯한 심심함이 영화 전반에 깔리는데, 그 맛이 나쁘지 않다. 건강하다. 장르 영화와 비교했을 때야 단점으로 각인되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두 시간 동안의 힐링 여정은 그 의미를 더한다.
이 영화가 힐링을 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 건 신동일 감독의 변화된 연출력에 있다. <방문자>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 등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인 이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조망했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문경과 가은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을 이어 나간다. 단,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 서로의 다름을 첨예한 대립으로 이끌고 갔던 작품들과 달리, <문경>에서는 그 다름을 이해하는 쪽으로 가져간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 인간과 개(동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해 공감을 통한 연대의 가능성도 펼친다. 이는 길순의 시선으로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샷만 봐도 알 수 있다.
<문경>은 소박한 이야기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담는다. 욕심 보단 비움, 인과응보 보단 인연과보(因緣果報,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원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의 철학으로 인간 세상의 모습을 담는다. 이런 이유에서 <문경>은 지금 우리 삶에 필요한 영화라고 보인다. 기자간담회에서 문경 역을 맡은 류아벨 배우는 “그냥 우리가 사는 이야기 같은 점이 좋았다”고 작품의 매력을 소개했다. 특별함은 없지만, 봐도 봐도 마냥 좋은 자연의 모습처럼, 이 영화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여름의 마지막 끝자락, 문경으로 힐링 여행을 떠나길 바란다.
사진 제공: 트윈플러스파트너스
평점: 3.0 / 5.0
한줄평: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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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소다 마모루의 칸 영화제 첫 공식 섹션 진출작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을 감독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Belle> (竜とそばかすの姫, 용과 주근깨 공주(가제))이 올 7월 2년 만에 열리는 칸 영화제에 합류하였습니다.
지난 4일, 칸 영화제는 <Belle>이 7월 15일 목요일 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될 예정이며, 12월 29일 프랑스에서 정식 개봉될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Belle>은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유일한 애니메이션으로 뽑힌 <미래의 미라이>(2018) 이후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자, 호소다 마모루 감독 개인으로서는 칸 공식 부문에 처음 초청된 작품입니다. 또한, 올해 열릴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아리 폴만의 <Where Is Anne Frank>, 파트릭 암베르의 <The Summit of the Gods>와 함께 단 세 편뿐인 애니메이션 작품 중 한 편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칸 영화제는 이를 발표하며, 마모루 감독을 젊은 뉴-웨이브 애니메이션 감독의 선두주자이자, 장르를 넘나드는 시적이고도 아방가르드한 세계관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감독이라 설명했습니다.
마모루 감독은 이에 대해 <Belle>은 자신이 늘 꿈꿔온 영화로,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영화라 말했습니다. 덧붙여, 영화는 로맨스, 액션, 서스펜스뿐 아니라 삶과 죽음과 같은 더 깊은 주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라 밝혔습니다. 이로써, 마모루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썸머 워즈>에서 다뤘던 가상 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다루게 되었습니다.<Belle>은 작은 산골 마을에서 아빠와 함께 살아가는 17살 고등학생 ‘Suzu’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오랜 기간, 자신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온 소녀는 어느 날, 가상 세계 'U'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50억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세계적인 가수 Belle이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로운 존재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모험과 도전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한 여정을 떠나게 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 나갑니다.
현재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인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썸머 워즈>(2009), <늑대아이>(2012)를 연달아 성공시킨 화제의 감독입니다. 그는 2015년, <괴물의 아이> 개봉 기념 내한 당시 인터뷰를 통해, 봉준호, 나홍진 감독 등의 작품에 자극을 많이 받고 있다 말한 바 있는데요. 이후, <기생충> 개봉 당시에도 "굉장한 영화"라며 극찬을 보냈습니다. 현재 프랑스 개봉일이 공개된 <Belle>의 국내 개봉일은 미정인 상태이지만, 올겨울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새로운 '아이' 의 탄생을 기대해보며,
<Belle>의 개봉까지 영화로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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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솔한 에세이, 자기 구원의 문을 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더 웨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불편한 영화다. 엄청난 거구의 찰리가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초반부 장면부터 그렇다. 자기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칼로리를 자랑하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에 밀어넣는 걸 보다보면 팝콘과 콜라를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베일을 하나 하나 벗기듯 찰리가 막무가내로 사는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면 그를 지켜보기가 더 어렵다.
그에게는 삶의 의지가 없다. 그는 1주일 안에 죽을 수 있는 걸 알고도 초콜릿과 피자, 치즈를 추가한 미트볼 샌드위치와 탄산 음료를 계속해서 먹는다. 그에게 폭식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식증에 걸렸던 연인을 돕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또 이는 동성애자였던 연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상에 분노하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깊은 자기 혐오에 빠진 채 자기 방에 틀어박힌 그의 모습은 거북하고, 보기 불편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웨일> 또 한 번 대런 아로노프스키다운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우울하다. 염세적인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적 가치나 상징을 부정적으로 활용하기로도 유명하다. 평범한 구원이나 행복 대신 인간의 모순과 광기를 보여주는 게 그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등장 인물을 인간을 환멸하는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영화 <노아>처럼. 얼핏 보기에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더 웨일>은 찰리와 토마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기혐오에 빠진 채 죽어가는 한 남성은 구원 받으려면 신을 믿으라는 전도사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다.
지옥, 현실을 부정한 대가
하지만 <더 웨일>은 예상했던 전개와 결말을 절묘하게 빗겨 나간다. 영화는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더 웨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구원의 길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단지 그 길이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찰리와 그의 주변 사람은 본인들이 만들어 낸 지옥에 빠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지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다 각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우선 찰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자기가 허락한 몇몇 사람(~~와 토마스)을 제외하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간다. 집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바깥 사람에게 자기 존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당장 본인은 대학 강사지만, 노트북 카메라를 가린 채 줌으로 강의한다. 매일 저녁 피자를 배달시키지만, 자기 안부를 물으며 걱정해주는 피자 배달부에게 단 한번도 자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새생명 선교회 소속 전도사 토마스는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다. 그는 새생명 선교회 소속이 아니다. 한때는 소속 전도사였으나,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선교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해서 찰리에게 전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교 방식이 전정으로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찰리를 간호하는 리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찰리가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찰리가 폭식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알면서도 부정한다. 음식을 한 번만 잘못 삼켜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찰리에게 리즈는 고칼로리 음식을 꾸준히 가져다 준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부정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한다. 찰리는 그의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에세이를 쓰라고 가르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 그럴듯한 명언도 빼고 오직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서 글을 쓰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속했던 교회에서 도망쳐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읽고, 신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찰리를 설득한다. 리즈의 태도도 모순이다. 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그의 자기 파괴적 행동을 돕다가도, 그가 치료 받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으려 한다며 크게 화낸다. 오랜만에 찰리를 만난 전처 메리도 찰리와 화해하는 듯 하다가 결국 다투고 만다. 자기가 엘리를 잘못 키운 것 같다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다며 찰리의 도움을 무시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다 상처로 가득하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구원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진솔한 에세이의 힘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지옥 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이 '진솔함'이다. 본인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진솔하게 쓰라고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찰리도 내심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엘리의 에세이를 애지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증거다. 그는 아프거나 힘겨울 때마다 소설 <모비 딕>을 비판하는 엘리의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에세이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사실 <모비 딕>은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고래에 대한 설명이 매우 길게 나올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많다. 또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는 주제를 다루기에 난해하다. 하지만 <모비 딕>이 형편없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점은 의식하지 않는 매우 솔직한 글이다. 바로 엘리의 에세이가 그렇다.
엘리는 <모비 딕>이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 자기 경험을 살려 소설을 읽어나간다. 그녀는 소설 속 고래를 찰리에 비유하고, 고래를 죽이고 싶어하는 애이햅의 입장에서 에세이를 써 내려간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기를 떠난 찰리에 대한 미움을 고래에 투영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엘리의 첫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찰리에게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시를 읽고 감상을 써보라는 이야기에, 엘리는 말도 안 되는 욕을 써놓는다. 찰리가 아빠로서 호소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그가 모은 전재산 14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찰리의 집에 와서 학교 숙제인 에세이를 쓸 때도 찰리가 추천한 시가 엉망이라고 욕한다. 또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심지어 SNS에 올려 그를 조롱한다.
하지만 찰리는 엘리를 다르게 본다. 이미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만의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엘리를 본다. 또 자기 행동 때문에 딸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도 안다. 그래서 그는 딸의 독한 말들을 듣고서 화를 내기는 커녕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한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진을 찍는 엘리의 행동을 두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사고뭉치 딸 엘리에게서, 찰리는 자신이 강조하던 '솔직함'의 미덕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엘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찰리는 앨런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솔직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솔직한 것, 자기만의 시선과 관점을 유지하는 게 삶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부성애가 아니다.
구원을 향해 내딛는 고통스러운 발걸음
하지만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에게 위안을 줄지언정 그를 구하지는 못했다. 찰리가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떳떳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실천에 옮기자니 찰리는 용기가 없다. 또 무섭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런다 한들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약함은 피자 배달부를 만났을 때 온전히 드러난다. 매일 같이 피자를 가져다 주던 배달부는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찰리가 궁금한 나머지 호기심에 가는 척하다가 피자를 받으러 나온 찰리를 목격한다. 그는 거구의 찰리를 마주한 후 혐오스러워하며 자리를 뜬다. 이에 찰리는 미친듯이 폭식한다. 배달부의 호기심이, 찰리에겐 크나큰 불행이었고, 그의 자기 혐오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적인 순간을 거치면서 찰리는 역으로 용기를 얻는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외부에 공개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솔직해질 수 있는 계기가 원치 않게 생긴 셈이다. 그래서 찰리는 노트북을 켜서 수강생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글을 쓰라며 욕설 섞인 메시지를 보낸다. 마지막 에세이 수업에서는 자신의 메시지대로 진정성 있는 글을 쓴 학생들을 칭찬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트북 카메라를 키고, 자기 모습을 공개한다.
마침내, 고래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찰리가 자기 모습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엘리다. 어느 날, 찰리가 잠자는 사이 토마스와 솔직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긴 엘리. 그녀는 자기가 교회 소속 전도사도 아니고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집에서 가출했다고 털어놓은 토마스의 이야기를 몰래 녹음한다. 또 SNS를 뒤진 끝에 그의 가족을 찾아내 연락한다. 그 결과 토마스는 마침내 가족에게 돌아간다.
혹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엘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속사정을 어렵게 털어놓은 친구를 신고한 셈이니까. 찰리는 다르다. 엘리의 에세이를 읽어 본 찰리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다. 자기에게 미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듯이, 엘리가 토마스에게도 동정심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이해한다. 또 솔직함이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상과 달리 가족과 빠르게 화해하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어서 행복해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더욱 확신한다. 그래서 찰리는 자기혐오의 끝을 찍은 뒤에 엘리에게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에세이를 읽을 때, 찰리는 마침내 깨달음과 확신을 실천에 옮긴다. 깊은 검은 화면에 스스로를 가뒀던 고래가 드디어 밝은 세상을 마주하고 일어나 걷는다. 그렇게 고래는 자기 혐오를 버리고 구원 받는다.
더 나아가 진솔함이라는 깨달음은 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준다. 자기에게 진솔해진다는 것은 곧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이는 타인에게 간섭하고, 구속하고, 원하는 바를 강제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리즈는 과거 찰리가 자기 오빠인 앨런을 도와주었듯이, 자기도 찰리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오빠 대신 애정을 쏟을 사람으로 찰리를 고른 셈이다. 동시에 자기 욕심을 직시하면서 찰리와 화해한다. 그녀는 찰리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가 병원비를 낼 수 있는 돈을 엘리에게 주겠다고 결정하자 크게 화를 낸 것이 모두 본인의 욕심과 바람 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이처럼 <더 웨일>은 찰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모든 이들이 문을 열고, 스스로 채운 족쇄를 마침내 풀어버리는 구원의 이야기다.
찰리의 집이 인상적인 이유
물론 <더 웨일>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자아 성찰의 이야기. 이는 누구에게나 익숙할만한 메시지다. 그러나 <더 웨일>의 진가는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은 찰리의 집 안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집이 매우 좁다보니 찰리의 거구와 대비를 이루면서 유달리 답답하고 음울하다. 덕분에 이 공간에 담긴 여러 의미가 잘 드러난다. 찰리를 감싸고 있는 죽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나 상처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해소 같기도 하다. 자기 밑바닥을 마주하면서 진실을 깨닫는 공간도 되기 때문이다.
촬영 방식 덕분에 공간적 특성은 더 잘 살아난다.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한 게 대표적이다. 가로로 좁은 화면비에서 좁은 공간과 거구의 몸은 전체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한다. 그 결과 공간의 분위기와 다층적인 의미는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협소한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때 클로즈업 컷은 대화의 흐름에 따른 각 인물의 감정선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인물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공간 미술, 촬영, 각본에 이르는 모든 영화적 선택을 최선의 결과로 엮어낸다. 찰리는 사실상 영화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혼자 힘으로 감정 굴곡이 심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러한 캐릭터가 버겁지 않고, 그의 심경 변화가 충분히 이해되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동성 성추행 피해, 과도한 스턴트 연기로 인한 혹사, 이혼과 같은 배우 본인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더 짙은 호소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는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 모습을 직시할 때, 비로소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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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여운 것들 | 섹스라는 잉크로 새로 쓴 프랑켄슈타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사고방식이 다소 비뚤어진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 그는 자기가 실험을 통해 새로이 되살려낸 피조물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를 키우고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다. 갓윈의 보살핌 속에서 말과 에티켓을 배우고, 갓윈의 조수 '맥스'(라미 유세프)와 약혼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벨라. 그러나 그녀 마음 한 편에서는 집 밖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벨라는 약혼을 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을 만난다. 벨라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함께 리스본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고, 그와의 섹스가 마음에 든 벨라는 갓윈과 맥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나선다. 자기가 아는 것과는 많이 다른 세상과 사람을 마주한 벨라. 그렇게 그녀는 모험을 통해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새 시대의 새로운 '프랑켄슈타인', <가여운 것들>
'프랑켄슈타인'. 이 이름을 들으면 흔히 유니버설의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떠올린다. 그런데 평평한 머리와 목에 볼트를 박은 거인은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기가 만든 창조물에게 복수당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알려진 괴물에게는 이름이 따로 없다. 그저 '피조물'이라고 불린다.
괴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일까?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는 사실 또한 종종 간과된다. 그는 혐오스러운 외모 때문에 창조주로부터 버려졌고, 사회적으로도 배척받았다. 그는 자기가 타인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했으며, 비뚤어진 정체성은 그의 복수로 이어졌다.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악행이 약간의 안타까움마저 자아내는 이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도 같은 궁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피조물의 외모가 흉하지 않았거나, 창조자가 피조물을 외면하지 않았거나, 세상이 피조물을 다르게 받아들였다면?' 알라스데어 그레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상화한 <가여운 것들>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란티모스 감독은 여성과 섹스라는 잉크로 자기만의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써내려 갔다.
두 피조물의 분기점
자연히 <가여운 것들>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벨라 백스터 간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먼저 두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띈다. 프랑켄슈타인은 혐오스러운 외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가 만든 피조물을 버렸다. 아내를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살겠다는 피조물의 요구도 끝내 거절했다.
벨라의 창조주는 다르다. 갓윈은 그녀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다. 그는 그녀에게 언어와 에티켓을 알려줬고, 전담 가정부 '프림 부인'(비키 페퍼바인)도 붙여줬다. 벨라에게 유일한 취미도 알려줬다. 일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벨라는 갓윈과 함께 시체를 해부하곤 했다. 집을 떠난 후에도 벨라가 시체 해부 참관을 즐길 정도로. 또 갓윈은 직접 남편감을 찾아 벨라의 약혼도 주선했다.
또 다른 차이는 그들의 외모다. 외모는 그들이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한 결정적인 원인이다. 인간보다 시체에 가까웠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그 때문에 그는 자기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대적인 세계를 경험해야 했다. 반면에 아름다운 여성인 벨라에게는 세상이 호의적이다. 그녀가 괴상한 실험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겪지 않은 존재라는 걸 눈치챈 사람도 스르륵 사랑에 빠질 정도다.
모든 아이는 부모를 떠난다
<가여운 것들>은 두 차이점을 도화지 삼아 괴물로 변하는 대신 인간으로 변해가는 새로운 피조물, 벨라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그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자식의 성장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를 되찾는 여성의 이야기다.
우선 영화는 갓윈의 보살핌에 담긴 이중적인 면모를 번갈아 보여주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고찰한다. 갓윈이 자기 피조물을 아끼고, 애정을 가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애정은 마냥 순수하지 않았다. 자기 피조물인 벨라의 성장과정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겠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 따라서 그의 보살핌은 통제에 가까웠다.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창문을 잠가서 벨라가 못 나가게 하고, 외출을 하더라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막았다. 맥스와의 약혼을 주선해 벨라를 평생 관찰하려 했으며, 벨라가 던컨과 함께 리스본 여행을 떠나려 하자 극렬히 반대한다. 벨라가 끝내 집을 나가자 그녀보다 순종적인 새 피조물을 만들어 그녀를 대체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갓윈의 노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그가 딸을 통제하려 발버둥 칠수록, 딸은 그의 손아귀를 빨리 벗어난다. 자기에게 호의를 표하는 바깥세상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연다. 바로 이 지점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격언을 상기시킨다. 즉, <가여운 것들>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을 풀어내려 한다.
누가 '가여운 것들'인가
이는 벨라가 목격하고, 파악한 세상이 갓윈의 세계와는 정반대인 이유다. 리스본, 알렉산드리아, 파리를 거치는 기이한 세계 여행 끝에 벨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 누구도 그저 악하거나 선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점에 따라 여러 맥락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
집으로 돌아온 벨라가 갓윈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다. 죽기 직전인 갓윈과 재회한 벨라. 그녀는 자기 몸과 뱃속의 아이를 마음대로 이용한 갓윈의 실험에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한 과거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한다. 이는 자기 세상과 렌즈 안에 사람을 가두려고 하던 갓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 지점에서 제목이 복수형인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실험체로 살아야 하는 벨라가 가엽다. 하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갓윈도 가엽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실험체로 사용했다는 언급을 고려하면, 그는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인물이다. 달리 말해 그는 죽을 때까지 벨라처럼 살아볼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가여운 것들>은 누구라도 일생 중 한 순간에는 '가여운 것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유와 섹스의 상관관계
이에 더해 벨라의 성장 서사에서는 여성주의 메시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바깥세상에서 얽히는 대부분의 인물이 남성이고, 그들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세기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던컨과 '알피'(크리스토퍼 애봇)가 대표적이다. 둘은 전혀 다른 성격, 직업, 사회적 지위를 지녔다. 그러나 공통점은 확실하다. 그들은 벨라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녀의 일부만을 소유하고 이용하려 든다.
던컨은 벨라와의 섹스만을 탐닉했다. 그녀의 정신적 성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벨라가 읽는 책을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그녀가 몸을 팔아 돈을 마련하겠다고 하니 불같이 화를 낸다. 알피 역시 벨라의 외모와 사회적 지위만을 탐했을 뿐, 그녀를 한 인격체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의 비인간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는 벨라가 만들어진 시작점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영화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로써 제시한다. 억압 앞에서 낙담하는 대신, 타인과 연대로 극복하는 동화를 쓴 셈이다. 일례로 그녀만을 기다린 약혼자 맥스는 다른 남자와는 달리 벨라의 주체성을 존중한다. 그녀가 던컨과 외도를 떠나고, 매음굴에서 일해도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는다. 크루즈와 매음굴에서 만난 친구 '스위니'(캐스린 헌터)와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도 벨라의 버팀목이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가여운 것들>에는 독특한 일면이 있다. 터부시되기 쉬운 대상인 섹스를 스토리텔링 도구로 적극 활용한다. 특히 섹스의 본질에 주목했다. 성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 유일하게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즉, 원할 때마다 이뤄지는 벨라의 섹스는 그 자체로 억압적인 남성과의 관계 안에서 여성의 자유와 주체성을 점진적으로 되찾는 행위나 다름없다. 이는 성적인 엄숙주의가 강조되던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기에 더 의미심장하다. 높은 노출 수위에도 불구하고 외설적이라는 인상이 강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기괴함 속에 숨은 역사
란티모스 감독다운 삐딱하고 자극적인 스타일 덕분에 벨라의 서사는 더 눈길을 끈다. 흑백과 컬러의 전환이 대표적이다. 란티모스는 초반부를 흑백으로만 보여주다가, 벨라가 여행을 떠나고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스크린을 색칠한다. 그렇게 벨라의 변화는 시각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뒷받침된다.
빅토리아 시대를 재현하되, 당시의 분위기는 거부하는 세트 프로덕션도 인상적이다. 극 중 런던 타운하우스, 파리 광장, 유람선, 리스본 거리는 모두 세트다. 바다, 태양, 노을도 세트와 인공조명으로 만들어냈다. 그 결과 일반적인 시대극에서 느껴지는 고전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비틀린 건물 사이로 비행선이 돌아다니는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피어난다. 그 덕분에 당대의 엄숙주의는 자연히 모습을 감춘다.
의상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벨라는 프림 부인이 골라주는 헐렁하고 편한 옷만 입는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는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기 시작한다. 이때 의상의 의미는 직관을 따르지 않는다. 불편해 보이는 드레스일수록 오히려 벨라 본인이 섹스에 눈을 뜨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골라 입는 옷이기 때문. 편한 옷과 불편한 옷의 속뜻을 맞바꾸면서 눈도 즐겁게 만든 영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여운 것들>은 호불호가 필연적인 영화다. 란티모스 감독의 스타일은 본래도 강한 매력과 불쾌함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 누군가에게는 장점인 대목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부 단점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섹스를 바라보고 묘사하는 영화의 관점에 대해 반응이 엇갈릴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다만 모두가 동의할 만한 대목도 있다. 벨라로 분한 엠마 스톤의 연기 덕분에 2시간 21분은 결코 아깝지 않다. 그녀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뇌 이식 수술 직후 엠마 스톤과 영화 말미에 책을 읽는 엠마 스톤의 표정 차이가 압권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이 시대의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에게 필요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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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 하>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프란시스와 레이디 버드
처음으로 <프란시스 하>를 본 건 입시 준비를 하던 여름이었다. 계속 이곳저곳을 방황하는 프란시스를 보는 게 정말 힘들었다. 같은 해, <레이디 버드>를 본 후에는 영화 말미에 대학에 들어가는 레이디 버드가 참 부러웠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것도, 방과 후에 연극을 하고, 줄리와 대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전부 대단해 보였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당시에 느꼈던 무력감과 긴장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새로운 고민이 생긴 후 두 작품을 다시 봤을 때 비로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듯, 프란시스가 방황하던 시간을 지나 ‘자기만의 방’을 찾듯 그레타 거윅이 그린 성장은 단순히 귀감이 되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나온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We were in one parking lot and we went to another parking lot.”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인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직접 붙인 이름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면 반드시 고쳐 부르게 하고, 명단에 쓰인 이름은 새로 쓴 후 밑줄까지 그어 둔다. 반듯하게 인쇄된 글자 아래 적힌 손글씨는 어디서든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레이디 버드를 소개하는 듯하다. <레이디 버드>는 수십 벌의 예쁜 의상과 함께 밝은 미래를 노래하는 ‘하이틴’ 영화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를 보고 자란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고민,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 결코 설명하지 못할 결정들, <레이디 버드>가 주인공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모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레타 거윅이 공동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는 꼭 <레이디 버드>의 다음 이야기처럼 보인다. 프란시스는 여러 모로 불안정하다. 현대무용가가 되고 싶어하고, 뉴욕에 살며, 함께 살던 친구가 떠나며 갈 곳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진다. 영화는 색조차 빼앗아 가며 복잡한 감정과 걱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레이디 버드처럼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원동력을 절실히 원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줄여 쓰지 않고 반 접어 우편함에 끼워 넣은 것처럼, <프란시스 하>는 때때로 한 발자국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것이 결코 최악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화려한 스토리와 미장센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란시스 하>는 불완전한 삶과 끝나지 않은 성장으로 위로를 준다.
레이디 버드는 “우리 주차장에서 출발했는데 또 다른 주차장에 왔네.”라고 말한다. 주차장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스치듯 읊조린 대사지만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의 정서를 모두 설명하는 것만 같다. 두 작품은 떠난 후에야 사랑하게 되는 것들, 다시 말해 과거의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성장을 담았기에 특별하다.
그레타 거윅이 그린 여성의 성장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가 유독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두 이야기를 충분히 내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와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고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태어난 연도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 위로를 받거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를 위한 영화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레타 거윅의 캐릭터들이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정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는 섹슈얼한 관계를 쟁취하지 않는다. 단지 자연스러운 욕망과 꼬이고 풀어지는 관계들, 보편적이고 사소한 고민을 보여준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녀 관계와 친구 관계 또한 위와 같은 감상에 큰 영향을 준다.
<굿 윌 헌팅>, <죽은 시인의 사회>, <길버트 그레이프>, <바스켓볼 다이어리> 등은 모두 다양한 감상과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와 소통하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라면서 수도 없이 돌려 본 <금발이 너무해>, <클루리스>, <하이 스쿨 뮤지컬> 같은 작품들은 여성 제작자의 손을 거치거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것임에도 아름다우면서 유능한 캐릭터를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들을 수없이 본 경험 이후에 그레타 거윅이 참여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 여성 제작자로서 그레타 거윅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이야기와 연출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나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내면화하고,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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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고한 수많은 이름 모를 '안중근'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 움직인다
▷영화 : 하얼빈(HARBIN), 2024
▷평점 : ★★★☆
▷한줄평 : 어둠 속에 불을 밝힌 수많은 ‘안중근’의 역사는 다시 훨훨 타오르고 있다
영화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고뇌에 찬 '인간' 안중근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동료 독립군에 대해 서사한다.
왜 그는 그토록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목숨을 건 투사가 되었던 것일까?
어쩌면 안중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당시 수많은 이름 모를 또 다른 ‘안중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웅주의를 배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름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또 한 명의 ‘안중근’ 아니던가.
매서운 겨울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광활한 두만강을 홀로 건너는 안중근, 그는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만국공법에 따라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풀어 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그 일본군의 역습에 독립군은 궤멸되고 안중근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여기서 그의 깊은 고뇌는 시작된다.
영화 <하얼빈> 스틸컷
“길을 잃었습니다. 나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으니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죽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내 목숨은 죽은 동지들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습니다.” 안중근(현빈)/하얼빈
1년이 지난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독립군들은 하나둘씩 안가로 모여든다.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경계하는 독립군 동료들 앞에 안중근은 약지를 잘라 자신의 결기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이창섭(이동욱),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등의 독립군들은 ‘늙은 늑대’를 처단하기 위해 힘을 보탠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생각일 수가 없다. 굳은 신념으로 갖는 난관을 극복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는 이도 있지만,
밀정으로 배신하는 동료가 있기도 하고, 지지부진하기만 한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마적단 두목이 된 사람도 있다.
“김형, 독립이 되겠소?” 우덕순(박정민)
“일본의 역사로 남으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요.” 김상현(조우진)
그 이후 영화는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완성하기까지 7일간 벌어지는 여정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밀정을 이용해 턱밑까지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이를 방어하기 위한 독립군의 치열한 수 싸움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그 과정에서 말을 타고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는 장면, 작은 창에 드리우는 빛에 의존하여 골방에 모여 거사를 논의하는 장면, 폭약을 실은 마차를 방패 삼아 일본군과 총격 다툼을 하는 장면, 하얼빈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서의 긴장감 흐르는 추격 장면 등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비장감과 영상미를 스크린에 꽉 채워 보여준다.
영화 <하얼빈> 스틸컷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하얼빈의 거사에서 영화는 정점에 이른다. 그러나, 예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사나 장치를 동원하지 않는다.
마지막 안중근의 독백을 폭발시키기 위해 극도로 감정 노출을 자제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에 꽂혀 날아든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에 다시 도전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안중근(현빈)/하얼빈
그렇게 영화 <하얼빈>은 오늘의 '안중근'을 소환해내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1945년 우리나라의 독립은 미완이라고 말한다. 처단되지 않은 친일파가 그렇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그러하다.
그리고, 2025년 암울한 오늘의 현실이 더욱 그러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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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는 아름다왔지만, 남주는 나이들어 보였다 ㅠㅠ / 웹소설 원작 / 타임루프 영화일까? / 스포가 될만한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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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views • Feb 12, 2023 • #후쿠모토리코 #네가떨어뜨린푸른하늘 #일본영화
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네가 떨어뜨린 푸른 하늘"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의외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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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아는 남자와 대통령이 되고 싶은 남자가 만났다!
영화 킹메이커가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로 불렸던 엄창록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된 영화인데요.
영화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좋습니다.
영화 속 두 인물의 우정과 관계도 눈에 들어오는데요.
대선이 다가오는 요즘 이 영화를 본다면, 정치란 무엇이고 또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영화일 것 같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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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억의 전쟁>
그곳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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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위트홈 시즌3> 공식 예고편
괴물화의 끝이자 신인류의 시작을 비로소 맞이하게 된 세상, 괴물과 인간의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이들의 더 처절하고 절박해진 사투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 시즌3 7월 19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