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8-17 07:42:13
자식을 사랑한다면, 물속에 던져버려라
〈마스트에로〉 리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권위 있는 음악상을 받은 드니 뒤마르. 차근히 경력을 쌓은 그는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할 차세대 기수로 손꼽힌다. 그런데 드니는 수상 소감을 말할 때 굳이 객석에 자리하지 않은 아버지를 언급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프랑수아가 같은 지휘자, 그것도 업계 최고로 꼽히는 지휘자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드니는 미래가 창창한 지휘자이지만, ‘프랑수아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지휘자이기도 하다.
시상식 다음 날. 드니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뒤마르가 자신이 지휘자로 일하는 악단으로 출근한다. 한 명, 두 명, 세 명… 프랑수아가 마주하는 모두가 웃는 얼굴로 드니의 수상을 축하한다. 프랑수아의 신경이 점차 날카로워진다. 그 자신 역시 명망 있는 지휘자인데,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프랑수아에게 이제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밀려날 때가 되었다는 불안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던 중 프랑수아에게 전화 한 통이 온다. 모두가 꿈의 극장이라 부르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온 전화로, 그를 차기 지휘자로 모시겠다는 연락이다. 콧대 높은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다. 피할 수 없는 경쟁 관계에 놓인 부자는 그제야 서로의 성과에 박수 치며 웃는다. 그러나 그 전화는 잘못 걸려 온 전화였다. 라 스칼라의 제안은 프랑수아 '뒤마르'가 아닌 드니 '뒤마르'에게 갔어야 했던 실수였다. 관계자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드니는 고민에 빠진다. 의도치 않은 실수 탓이기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아들이 아버지가 평생 꿈꿔온 자리를 빼앗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부자 관계에 늘 흐르던 경쟁심이 깃든 긴장 관계 역시 진실을 밝히기를 어렵게 한다.
차일피일 진실을 밝히기를 미루는 드니와 날이 갈수록 라 스칼라를 향한 꿈에 부풀어 오르는 프랑수아. 영화는 둘의 갈등이 봉합되고 이들이 화합하는 과정을 담는다. 다소 지루하고 작위적인 전개와 결말이다. 부자 간 화해라는 보편의 메시지를 빌미 삼아 영화 전반에 흥미롭게 흩뿌려진 갈등을 너무도 손쉽게 봉합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니 고개를 돌려보자. 진실을 알게 된 프랑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즉 그의 양육법 말이다. 프랑수아는 드니에게 어릴 적 휴양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물을 두려워했던 프랑수아는 자신을 닮은 아들을 이해했고, 그런 아들에게 계속 물에 들어가 놀라고 말하는 아내에게서 드니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드니의 어머니는 그런 드니를 물속에 던져버렸다. 드니는 두려움에 질려 허우적거렸고, 프랑수아는 아내의 ‘폭력적’ 양육법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마 후. 물속에 던져진 드니는 자신의 공포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고는 이내 즐거운 표정으로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한다. 프랑수아는 충격을 받는다. 드니의 두려움에 대한 공감이 오히려 지금껏 드니의 성장을 막아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랑수아는 중년에 접어든 아들 드니가 마주한 문제가 수십 년 전 휴양지에서 있었던 일과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드니가 자신에게 진실을 알리기를 주저한 진짜 이유를 간파한 것이다. 드니는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자신이 라 스칼라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의심하기 때문에 진실을 빠르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한다는 선의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수아는 수십 년 전의 깨달음을 발판 삼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아들을 물속에 던져버린다. 드니는 수십 년 전에 물속에서 그러했듯, 이번에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증명해 보인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 프랑수아와 함께다.
때문에 〈마에스트로〉는 부자 관계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양육법에 관한 영화다. 시대를 거스르는 절대적인 양육법은 없다. 지난 시대였다면, 두려워하는 아이를 물속에 던져버리는 양육법은 자녀에게 공감하지 않는 부모의 폭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이에게 공감하는 양육과 과보호가 구분되지 않는 시대, 그리하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아이를 물속에 던져버리는 양육법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중년이 되어서도 자기 역량을 의심하며 회의하는 아들에게 후자의 양육법이 더 적합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를 물속에 던져버려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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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하고 발칙한 모든 순간의 상상
‘해피 아워’,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까지 특별한 주제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만나는 캐릭터 간의 긴 대화만으로 서사를 이끄는 역량과 그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재미를 주는 자신만의 색깔로 하나의 장르화를 이루며 세계 유수의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영화 우연과 상상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작년 제7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해외 평단의 호평을 받은데 이어 지난 BIFF에서도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봉준호 감독을 포함해 좋은 평이 이어졌기에 여느 때보다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죠. 에릭 모레르 감독의 1994년 옴니버스 ‘파리의 랑데부’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번 작품은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우연이라는 리얼리티적 요소에 상상력을 가미해 만든 세 편의 단편 모음집으로 제목처럼 불쑥 찾아온 그 순간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소재가 가져올 수 있는 희극성으로 남다른 재미를 줍니다. 역시나 그만의 스타일이나 특징은 확연히 드러나기에 이번에도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의 장르적 신드롬은 이어질 거로 추측되네요.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우연과 상상 정보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믿어볼 생각 있어?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메이코는 패션 화보 촬영으로 만난 절친 츠구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그녀의 새로운 남자에 관해 첫 만남부터 하룻밤 동안 함께하며 나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다음 만남에 대한 기대에 부푼 츠구미를 내려주고 메이코는 어느 한 건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2년 전에 헤어졌던 자신의 전 남친이자 절친의 썸남 카즈아키를 마주합니다. 두 번째 ‘문은 열어둔 채로’는 교수 세가와가 취업 때문에 학점을 원복 해달라는 사사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며 시작됩니다. 시간은 흘러 사사키와 잠자리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며 늦깎이 대학생활 중인 유부녀 나오가 뉴스를 보던 중 최근 일본의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한 세가와 교수의 인터뷰가 나온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사사키는 그녀에게 교수를 유혹하고 녹음해서 과거 자신의 복수를 하자고 이야기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작가인 교수를 만나자는 마음에 수긍하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 ‘다시 한번’에서는 희귀한 바이러스로 인해 통신 두절이 된 세상에서 고등학교 동창회를 찾은 나츠코,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는 역 앞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동창 아야을 마주하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偶然と想像, Wheel of Fortune and Fantasy│감독·각본 : 하마구치 류스케│출연진 : 후루카와 코토네, 현리, 나카지마 아유무, 모리 카츠키, 시부카와 키요히코, 카이 쇼우마, 우라베 후사코, 카와이 아오바 외 多│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 121분│국가 : 일본│등급 : 15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8.4, 왓챠피디아 예상 5.0, 로톤 토마토 신선도 99%, IMDB 7.6, 메타 스코어 86점│수상 내역 :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시청 가능 서비스 : 개봉일 2022년 5월 4일
“우연은 드라마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일상에 흔한 것이기도 하죠.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이고, 반대로 말하면 이 세계를 그리는 것은 우연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우연이 넘쳐요. 이야기 측면에서 그걸 살리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보람 있는 일도 없을지 모릅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인터뷰를 통해 그가 밝힌 주제에 대한 생각들이 이미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간에 직접적인 접점은 없지만 각 에피소드의 인물들 모두가 기막힌 우연을 마주하면서 삶이 변화하는 순간을 담아내기 때문이죠. 흔히 일종의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연결을 이끌어내는 스토리들은 이미 식상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일상에서 우리는 무수한 찰나의 순간과 마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들이 때로는 우리 삶에 큰 파장을 일으켜 방향을 전환하기도 하기에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에 매력에 빠져드는 부분이 있죠. 그렇게 영화는 갑자기 다가온 선택의 순간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대신 상상을 펼쳐주고 이를 이끄는 도구로 인물 간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사건을 만들고, 에피소드를 구축하며 벽돌을 하나씩 쌓아 집을 짓듯 관객에게 40분 동안의 부담 없는 동행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요.
이번에도 하마구치의 드라마는 한번 시작한 장면의 편집을 최소화하며 각 에피소드별로 20여 분간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서 모든 순간의 행동들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많이 언급되는 바와 같이 소설 작가와 같은 흐름을 이어가는 형태는 세 편의 연극을 차례대로 보는 기분을 들게 하고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들이 모여주는 우연의 가능성과 이어지는 전개, 그리고 마지막 결과에 대한 섬세한 표현은 관객을 끝까지 집중하게 만들죠. 이것은 작품의 주제인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이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더 자주 마주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사실성은 탄탄하게 짜 맞춰진 개연성보다 좀 더 느긋한 리듬을 타고 있는 그의 연출에 더 빠져들게 만듭니다. 첫 번째에서 메이코 혼자만의 망상, 두 번째 나오와 세가와의 서로 간의 상상, 세 번째 두 사람의 공통된 착각까지 무언가 연결점이 없는 듯해도 우리가 상상하는 형태의 변화만 있을 뿐 그 우연이 가져다주는 개개인의 머리 속을 그대로 들춰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주고 그때마다 나오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깔리며 묘한 웃음을 전달해 줍니다.
이러한 감독의 뚜렷한 색깔은 참으로 독특하고 매력적인 영화를 만드는 걸 넘어서 현재 하나의 장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나왔던 그의 실제 리딩 방식은 책을 읽는 듯 감정을 빼고 단어 하나하나에 포인트를 주며 실제 촬영에서 배우들이 이루어내는 일상의 감정들을 일정한 리듬과 높낮이로 더욱 풍성함을 전달해 주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굉장히 긴 시간을 끝없이 이어가는 배우들의 대화는 그저 친구들과 나누는 소소한 교류처럼 받아들여지고 그들이 마주하는 우연에 왠지 나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합니다. 이제는 하나의 시그니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말이라는 소통 행태에 대한 감독의 남다른 접근은 옴니버스로 분리된 단편들을 연결시켜주는 것 같고, 단 1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것도 화질, 색감에 있어서 올드함이 묻어나지만 그 투박함마저도 전체적인 색감에서 잔잔함과 따스함을 드러내줘서 일상의 분위기를 더욱 살려준 것 같습니다.
짧게 줄이자면 마음을 열고 다시 한번 마법보다 불확실한 것을 느끼며 우리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일상의 놀라운 순간들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세 개의 단출한 이야기는 뜻밖의 웃음도 주고 마지막엔 왠지 모를 애틋함도 남기며 우리가 놓쳤던 그 우연한 순간들이 있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가 선사하는 남다른 대화의 결을 따라 그린 스케치 위에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무언가 하나의 일상이 꾸려지는 느낌, 어쩌면 전작처럼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시금 나의 삶에 대한 공상을 해보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건 일종의 트렌드처럼 맞춰가는 하마구치의 스타일은 굉장히 참신하기도 하고 인상 깊다고 확언할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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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호함의 미학,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오늘 학생과 얘기하다가, 사람들은 미묘한 관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 엔드>를 본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헷갈린다). 만에 하나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 지금처럼 계속 생각해 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키스는 미묘함을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다. 퀴어 영화에서 스킨십은 영화의 독해가 불가능한 이성애중심주의적 관객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퀴어 영화는 퀴어 비평으로 읽어 볼 만한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 드물다.
어쨌든 나 또한 이분법의 논리에 빠져 있었고, 영화 시놉시스를 쓰는 수업시간에도 인물들의 감정선은 명확해야 한다고 늘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는 모호함의 미학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모호함의 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생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성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달콤한 인생>도 모호함에 관한 영화였다. 조폭인 이병헌이 자기 보스랑 맞짱을 뜨는 이유는 ‘왜 흔들렸는지’ 말을 못해서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병헌의 질문만이 강조되어 들렸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런데 어제 다시 보니 대답을 안 한 건 이병헌이 먼저였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관객은 영화를 추동하는 그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랬기에 이 영화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은 <달콤한 인생>으로 한국의 느와르 장르를 해 보고 싶었는데, 그 안에는 사실 한 남자의 어떤 섬세한 심리가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모호함에 관한 것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같았다고.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두 영화 모두 모순적인 제목을 갖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해피 엔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달콤한 인생>도 달콤한 인생을 그리지 않는다. 영제는 <A Bittersweet Life>로 더욱 직접적이다. 우리는 어쩌면 명확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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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균열에 선 이방인들
빅토르 고라야 & 이디스 라이언스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2019, HBO & BBC)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잇츠 어 씬(It’s a Sin)>(2021, 영국 채널4)의 핵심 전개 포함.
2021년 공개된 리미티드 시리즈 <잇츠 어 씬>은, 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퀴어 커뮤니티와 에이즈 위기를 다룬다. 마지막 에피소드,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리치 토저의 건강이 악화되자, 엄마 밸러리 토저는 아들을 외부와 단절시킨다. 리치의 베스트프렌드 질 백스터가 밸러리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지만, 밸러리는 퀴어혐오적이고 회피적인 반응을 보이며 질의 호소와 리치의 고백을 무시한다. 리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도,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질은 밸러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심어놓은 수치심shame이, 리치와 그 모든 이들을 죽인 거’라고.
부러 암울한 톤으로 소개했지만, <잇츠 어 씬>은 리치와 친구들의 하루하루에 넘쳐나던 슬픔과 기쁨, 사랑과 우정, 눈물나는 연대를 담은, 시끄럽고, 신나고, 풍부하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이다. 부족한 소개 대신 죽어가던 리치의 대사를 인용한다, “거짓말하기 싫어요, 왠지 아세요? 난 진짜 재밌었었거든요, 그 모든 남자들이랑.” 말하려던 건: 작가 러셀 T. 데이비스가 사회적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에서 메인 캐릭터의 목숨을 앗아가는 까닭은, 그저 다른 메인 캐릭터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시청자의 감정적 몰입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도록”(프랜 백스터) 돕는 스토리텔러다.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 전후의 맥락,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의 액션/리액션을 촘촘히 관찰하며 현실의 시청자가 사회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2019년,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는 대니얼 라이언스가 죽음을 맞이했다. 영국 공무원인 그는 수용 가능 인원을 훨씬 초과한 알루미늄 갑판 쪽배를 타고 남자친구와 바다를 건너다 익사했다. 이 글은 대니얼보다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해 난민 신분으로 유럽을 떠돌던, 불법적인 일상이라도 얻고자 약혼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다 ‘어쩌자고 홀로 살아남은’, 인간보단 ‘사건’으로 그려졌을 수도 있었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 곁에 섰던 대니얼의 시스터 이디스에 대해, 기이해져만 가는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들의 필연적인 유대감에 대해, 사심과 디테일을 얹어 적었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2019년 기준 근미래 영국을 배경으로, 이후 10+a년 동안 대가족이 맞닥뜨리는 변화들을 다룬다. 말하자면 SF이나, ‘매년 다시 봐야 한다’, ‘거의 다큐멘터리다’, ‘예측이 무서울 정도다’ 등의 코멘트가 붙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상당히 서늘한데, 또 그렇지만은 않다. 인류의 앞날을 비관하다가도 결국 인간을 믿는다. 그 중심에는 거의 판타지적으로 아름다운 두 인물이 있었다. ‘중심’이라고 적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그들은 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시리즈의 오프닝, 로지 라이언스의 둘째 링컨의 탄생과 더불어 메인 캐릭터-라이언스 패밀리-와 시대적 배경이 자연스럽게 소개될 때, 이디스는 일상적으로 부재하고 빅토르는 등장 자체를 않은 상태다. 이들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드는’, 어떤 ‘노말’/‘스탠다드’가 아니거나 아니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이디스 라이언스는 세상의 변두리를 찾아다녔고, 빅토르 고라야는 ‘사회’에서 튕겨져 나가거나 울타리 안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고라야와 대니얼 라이언스
- “You are a beautiful person.”
링컨이 태어나고 몇 년 후, 작품 상 우크라이나에서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장악한다(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공개된 시리즈다). ‘숙청’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며, 성적 소수자도 그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난민 임시 거주지에서 근무하던 대니얼은, 게이라서 ‘불법인간’이 된 빅토르를 만난다. 흔적이 남지 않는 전기 고문을 당한 그는, ‘영국에 망명 신청을 했지만, 정부가 고문당했다는 증명을 요구해 진행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잠깐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던 동생 로지의 전화를 받기 직전, 대니얼은 연인 랄프와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정치인 비비언 룩은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말한다, “I don’t give a f***.” “내 집 앞 쓰레기만 제때 수거 되면 족하다”는 비비언 룩이 “놀랍도록 멋지다”며 즐거워하는 랄프와, “저 사람은 괴물”이라고 걱정하는 대니얼. 이 커플은 시리즈가 시작하고 5분 만에 갈라설 조짐을 보이지만, 어쨌든 대니얼은 새해를 맞아 랄프에게 청혼한다. 수 해가 지나고, 이 부부는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농담을 주고받지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는 못하는 관계’가 된다. 랄프는 빅토르와 같은 이들이 ‘안 보이’는 자고, 대니얼은 ‘안 볼 수 없’는 자다.
빅토르 고라야의 첫인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자연스럽고 당당한 태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유머감각. 대놓고 던지는 플러팅에 대니얼은 당황하면서 사로잡히고,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거기엔 한 점의 위화감도 없다. 대니얼을 먼저 유혹함과 동시에 빅토르는 ‘착한 외국인’의 자격을 잃는데, 이야말로 바라던 바다. 빅토르는 자신의 처지, 대니얼의 “남자친구”(이건… 대니얼이 잘못했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그저 ‘나와 너의 끌림’만을 똑바로 응시한다. 누군가는 비꼬는 투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비도덕적인 시작이었다고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목격했다면, 그 사이 흐르는 공기가 숨막히게 특별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빅토르는 첫인상 그대로인 인물이다.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희망과 유머를 잃지 않고, 타인을 이용하려 들지 않으면서 호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곧은 잣대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며 날카롭고 유연하게 판단한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면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현자.”[Indiepost에 게시된 필자의 글에서 인용] 전개상 자세히 서술되진 않으나 단편적인 언급들로 미루어 보면, 빅토르는 어딜 가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연결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이인 듯하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뮤리얼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사람 beautiful person”이라고 할까. 이러한 설정은 그의 프레젠스와 엮여 버린 불행을 사적인 것으로 ‘느낄’ 여지를 완전히 걷어내려는 제스처로 보이는데, 작품은 그가 마냥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타들어가는 속을 식히며 현재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빅토르가 화면에 잡히면 빛의 아우라와 어둠의 예감이 공존한다. 전자는 인간성과 로맨스, 후자는 그 외의 것들이다.
대니얼이 빅토르와 랄프를 두고 내적 갈등을 키울 무렵, 국제 정치적 갈등도 심각해진다. 중국은 인공 섬 홍샤다오를 짓고, 미국은 그 섬이 핵 군사기지라고 주장한다. 뮤리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인 자리, 트럼프가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영국에서도 사이렌이 울린다. 세계가 끝날지도 모르는 날, 누구와 있을 것인가- 대니얼은 망설임 없이 빅토르에게 달려간다. 뮤리얼의 집도 빅토르의 거주지도 카오스인데, 두 남자의 사랑만 분명하다. 이후 빅토르는 일단, ‘대니얼의 외국인 남자친구’ 위치에 있게 되는데, 작품은 그를 거기 묶어두지 않는다.
이디스 라이언스와 세계의 균열
- “Tear the world down.”
미국이 홍샤다오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기 직전- 시청자는 이디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랜 부재로 존재감을 먼저 드러낸 그는, 나쁜 소식을 들고 화상 통화 화면으로 등장한다. 그의 첫인상은 강렬한 감정들로 뒤덮여, 캐릭터를 파악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가족들이 반가움을 쏟아내는 와중,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그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이디스는 ‘섬이 보이는 베트남에 시위하러 왔지만 이미 늦었다’고 설명하고, 곧 방사능에 피폭된다. 이디스의 두 번째 출연 역시 화면 속 화면이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미국의 핵미사일 발사와 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고, 가족들은 그것을 보며 이디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에게 묻는다, “이디스는 어떤 사람이야?” 대니얼은 “조금 진지하다”고 답한다. 스티븐은 “어려서 갔던 여행에서, 이디스는 몰래 나가 담배를 사고 해변에서 자고 싶어했다”고 기억한다.
마침내 화면이 아닌 실물로 가족들을 만난 이디스, 그는 ‘훙샤다오 영상을 거액에 팔았다고 오해하는 무리’와, ‘정말로 거액에 팔자고 하는 무리’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빅토르는 그에게 “북극이 거의 녹았던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디스는 시니컬한 유머를 섞어 “우리는 계속 호소해 왔고, 지금은 너무 늦었다”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모두 농담을 던지는 가운데, 화제를 꺼낸 빅토르만큼은 그 의미를 알아들은 듯하다. 스티븐이 “우리 태어나고 30년 정도는 살기 좋았잖아.”라며 동의를 구하자, 이디스는 “전쟁이 몇 번 있었지.”라며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는다. 다시, 이디스는 어떤 사람인가?
비비언 룩에게 환호하는 로지 옆에서, 이디스는 삐딱하게 서서 눈을 부릅뜨고는 천천히 박수를 치며 말했다, “세상을 무너뜨려 버려. Tear the world down.” 비비언 룩의 ‘사성당’이 출마한 총선 투표, 그는 투표지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긋는다. 이디스는 때로 세상을 냉소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다른 이들이 지나치는 장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에 가깝다. 이디스는 비비언 룩처럼 인간사가 굴러가는 방식을 꿰뚫어보고, 비비언 룩과 정 반대에 선다. 세계가 이미 ‘찢어지고’ 있음을 아는, 그 갈라진 틈에 빠진 것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려는 자. 지구 곳곳의 균열을 찾아 몸을 던져 싸워 온 그는, 국가의 틀을 넘어 사유하고, 법이 아니라 정의를 따른다.
이디스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만큼 상대방의 심리나 됨됨이도 빠르게 파악한다. 주변 사람을 아끼지만 덮어두고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래 전 엄마와 형제들을 배신하고 새 가정을 꾸렸던 아버지의 장례식 뒤풀이에서, 용해된(작품에 등장한 새로운 장례법이다.) 아버지를 리쿼 샷인 양 마셔버린다. 그는 후에 빅토르를 강제 이송시킨 스티븐에게 실망하고, “스티븐은 내 우선순위가 아니”라며 칼 같이 잘라내기도 한다.
이디스는 직설적이고 시니컬하고 유쾌하다. 과감하면서도 무신경하지는 않으며, 그 섬세한 대범함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곤 한다. 링컨에게 처음 치마를 입히고 양갈래 머리를 해 준 이도 이디스고, “치마인지 티셔츠인지 모를” 옷을 입고 링컨이 신나게 뛰어다닐 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한 이도 이디스다. 다 아는 듯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모르겠다I don’t know”, “아마도maybe”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만하지 않음에서 오는 자신감와 여유, 올바른 감수성을 동반한 정치적 유머로 정곡을 찌르는 이디스. 그의 농담이 낡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하는 그의 삶에 닿아 있어서다. 마지막 화, 뮤리얼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1파운드 티셔츠에 가려진 것들을 외면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연설한다. 이디스 혼자만이 변명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그 ‘잘못한 우리’에 미포함되는 자가 있다면 그일 터임에도.
미국 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금지하고 ‘로 앤 웨이드’ 판례를 뒤집자(후자는 작품 공개 이후 실제로 일어났고…) 이디스는 미국으로 날아가 시위대 맨 앞에 서고, 그 결과로 미국 출입금지를 당한다. 그가 “정부는 아무것도 안 한다”고 가족들에게 토로하자, 대니얼은 공감한다. 빅토르가 스페인에서 (또)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는데, 스페인의 “극좌” 정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어도 영국 정부는 묵묵부답이기 때문이다. 대니얼이 사랑에 빠진 후 넘나들게 된 ‘갈라진 틈’, 이디스는 오래 전부터 거기 발을 딛고 있었다.
대니얼의 죽음과 ‘탓blame’
이 시점에서 빅토르의 존재는 우크라이나에서 비공식적으로 불법이고, 곧 공식적으로 불법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는 법적으로 보호 받을 수 있었는가? ‘망명 신청자’라는 그의 신분은 해당 국가가 정해 놓은 바운더리에서 조금만 벗어나거나, 그 법적 범위가 좁아지면 순식간에 박탈당하는 종류의 것이다. 몇 년이 흐르는 가운데, 빅토르의 거처는 내내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고문당한 후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하고, 영국에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에 있다가 체포당할 뻔 하고, 국경을 넘고 또 넘어 스페인에서 다시 망명 신청을 한다. 마침내 재회한 대니얼과 그곳에 정착하기로 약속하지만, 곧 쿠데타가 발생하고 정책이 바뀐다. 프랑스의 우익 정권도, 스페인의 “극좌” 정권도, 빅토르와 같은 이들을 내친다.
대니얼은 빅토르를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이디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원히 범죄자로 살게 되더라도, 살 수는 있지 않겠냐며. 이디스와 프랜은 그를 돕고, 대니얼은 빅토르를 데리러 간다. 홀로 오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인과 함께 돌아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하나, 빅토르의 말대로 대니얼은 “여권을 도둑맞았다고 세관에 말하면” “Ok, this way sir.”이라는 안내를 받고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둘, 두 번째 ‘실패’는 브로커의 게이혐오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원했던 “지루한 삶”, 작품은 그 바람을 시스템의 실패와 의도적 부재가 죽이는 과정을 담는다.
대니얼과 랄프는 법이 보호하는 결혼을 했었다. 대니얼과 빅토르의 로맨스는 법적으로 (어쩌면 사회적으로도) 영원히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시간은 늘 충분치 않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적인 싸움과 은둔, 체포와 탈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줄곧 방법을 찾고 다음 걸음을 고민한다. 이처럼 애를 태우는 관계성은 픽션 상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매력’은 외국인/비백인/이방인이 ‘상대방’, ‘객체’의 자리에 위치하며 그와 관계 맺는 ‘주인공’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가 ‘구출’ 된다면 주인공은 (죽더라도) 영웅이 되고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야 한다. 이방인의 죽음이 주인공의 ‘동기’로 작용하는 방향도 있다. <이어즈 앤 이어즈>의 경우는 둘 다 아니다. ‘영국인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에게 구해지는 외국인’, ‘인간이 아닌 사건’: 빅토르는 그것들이 아니다. 작품은 처음부터 그리고 갈수록 명확하게, 그의 대상화를 거부한다.
이 연인의 장면에서 상호 또는 대니얼 단독 시선을 주로 취하던 작품은, ‘구조 작전’이 잘 풀리지 않는 동안 빅토르의 시선에 주목한다. 그는 지폐를 세는 대니얼의 손을 바라보고, 좌절하며 욕하고 벽을 치는 대니얼을 바라보고, 값을 흥정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빅토르는 주장도 감정도 ‘차마 강하게 꺼내지 못한다’. 그에겐 돈도, 여권도, 집도, ‘존재할 자격’도 없다. 무기력, 근심, 자책, 주저- 그가 지닌 절박함의 속성은 희망에서 절망으로, 자신의 생존에서 대니얼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흐른다. 소중한 이가 ‘나 때문에’ 패닉에 빠지는 모습에 힘겨워한다. 그러나 끝내는, 사랑을 붙잡는다. 쪽배에서 내리자고 대니얼을 설득하지만- 다음 순간, 바다를 건너기를 고집하는 대니얼을 바라본다. 거기엔 상대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이어, 작품은 시청자가 ‘항해’의 카오스와 대니얼의 죽음을 빅토르의 입장에서 겪도록 연출한다. 빅토르는 대니얼의 시체를 초점 잃은 눈동자로 응시하며, 우크라이나어로 ‘모르겠다’고 반복해 중얼거린다. 그 상태 그대로 대니얼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족 그룹 통화 연결이다. ‘대니얼의 전화’를 받고 가족들이 쏟아내는 -다양하지만 유사하게 일상적인- 노이즈를 받아내는 빅토르의 정서는, 이질적이다. 겨우 틈을 찾은 빅토르는 바짝 마른 톤으로 죽음을 전하고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집에 왔는데, 여기가 집인가요?” 충격과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달려와 문을 두드린다. 빅토르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공포스럽다. 그것이 4화의 엔딩, 빅토르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는가, 아니면 또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위협받고 있는가. 서구적 표상에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는 시험/갈등에 빠진다.[참고: 러셀 토비, VULTURE]
다음 화는 이전 화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열린다. 영국 총리는 이제 비비언 룩이고, “사라진 자disappeared”들에 대한 소문이 떠돈다. 작품은 대니얼을 애도하며, 그의 죽음에 집착하는 스티븐을 조명한다. 수용소에 갇힌 빅토르를 면회하러 온 스티븐, 다소 일방적인 대화 사이에- 대니얼이 죽던 날 라이언스 가족과 빅토르의 대면이, 짧은 컷들로 나뉜 플래시백으로 끼어든다. 비난을 퍼붓는 로지와 스티븐, 엉망으로 움츠러들어 무어라 답하거나 하지 못하는 빅토르, 대사는 뮤트 처리돼 있다.(짐작 가능하고, 중요하지 않다.) 그 끝에 로지와 빅토르는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지만, 스티븐은 ‘탓’에 사로잡힌다.
우연히 “어스트와일”(‘골라낸’ 자들을 가두는 열악한 비밀 수용 시설)의 내부자가 된 스티븐은,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빅토르를 이송자 명단에 넣어 “사라지게” 한다. 몇 년 전, 빅토르는 어쩌다 영국에서 추방당했던가, 대니얼에게 빅토르의 일터 정보를 들은 랄프가 보복성 리포트를 해서다.(규칙을 어긴 빅토르의 잘못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애초에 그 규칙은 ‘고문 증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만들었다고 답하겠다.) 두 사람의 행동은 겹쳐 보인다. 랄프는 작품이 ‘돌아보는’ 인간 유형이었다. 자발적으로 무지했던 그는 ‘행복’과 자극만을 좇았고, 안전하고 좁은 특권 바깥을 볼 의사가 없었다. 리포트 사건에 앞서, 랄프가 빅토르의 억양을 놀리듯 따라하는 컷이 있었다. 가볍게 지나가는 대사였으나, 그가 빅토르(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를 대하는 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랄프는 남편에게 배신당했고, 크게 상처받았다. 그러나 ‘복수’의 구체적인 방법이 (아마 인지한 적 없었을) 특권을 이용해 누군가를 안전망 밖으로 내쳐버리는 것이라는 점이, 그 사고방식과 실행력이 무섭다. 랄프는 아마 제 행동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은 어떤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였을 때, 그는 친절한 지지자의 태도를 보였다. 대니얼의 죽음 후 스티븐은 균형을 놓친다. 그는 빅토르에게, “전부 당신의 탓이다,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다, 나는 당신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동안 너무나 질렸다”고 말한다. “awful”, “bored”: 그 단어들을 빅토르에게 덧씌운다.(빅토르와 대니얼이 “boring life”를 바랐다는 점을 떠올리며 이 워딩을 씁쓸하게 곱씹게 된다.) 동생을 잃은 스티븐이 얼마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겠냐만은- 랄프보다 훨씬 ‘똑똑한’ 그가 빅토르를 바라보았던 시선은, 어쩌면 랄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선다. (다행히 작품은 스티븐을 버리지 않고, 후에 내부고발이라는 기회를 준다.)
‘그 모든 일들이 꼭 빅토르의 탓인 것만 같은’ 이 모호한 감각. 만약 스티븐처럼 그 ‘탓’의 감각을 지우기 힘들다면, 분석을 시도해야 한다. 왜 그의 탓인가? 그의 탓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자에게 끌리는 것? 그래선 안 되는 이와 사랑에 빠진 것? 살아남으려고 애쓴 것? 살아남은 것? 하나하나 살피며 걷어내다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거기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허면 그 감각의 원천은 무엇인가. 로지가 사는 곳을 ‘범죄 구역’으로 지정한 시스템은 빅토르를 범죄자로 만든 시스템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단 감추려는 권력자들이 온갖 지표를 끌어와 ‘보호 대상’과 ‘위험 요소’를 구분하고, ‘적절’한 그룹에 성공적으로 낙인을 찍은 결과다. 또한, 너무 피곤했던, 지나치게 절망했던, 현재가 충분히 안락했던- 개인들이 그것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인 결과다.
빅토르는 그 못난 만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그저 스티븐을 ‘let go’한다. ‘당신의 탓’이라는 스티븐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대니얼의 죽음은 ‘나 때문이지만 내 탓은 아님’을 알고, 받아들인다. ‘내 존재를 골칫거리로 만든 시스템’을 인지하고, 애도에서 ‘거짓된 탓의 감각’을 분리해 낸다. “어스트와일”에서 재회한 친구가 ‘대니얼이 너를 꺼내 주지 않겠냐’고 묻자, 빅토르는 “할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라고 답하며 미소짓는다. 그에게 대니얼은 죄책감보다는 사랑의 기억이고, ‘내가 택한 가족’이고, 그를 살게 하는 동력이다.
이방인들의 연대와 사랑
낙인이 찍힌 당사자인 빅토르, 그리고 이디스는, ‘의심치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들이다. 첫 만남부터 공감대를 형성했지만 주로 ‘대니얼이 이디스에게 빅토르와 관련해 도움을 청하는’ 식으로 연결되던 두 사람은, 대니얼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한 화면에 잡힌다. 거기엔 단순히 가족-지인 간의 친밀감과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다. (대니얼-이디스의 것이 그러했듯 퀴어 피플 간의 유대도 포함돼 있을 테다.)
1화 엔딩, 까마득한 해안에 홀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디스. 흥분과 분노로 범벅된 축제가 열리는 가운데, 빽빽한 군중 사이에서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있는 빅토르가 거기 겹쳐 보였다. 하나 더: 홍샤다오에 미사일이 떨어지기 직전 화상 통화를 건 이디스와, 4화 엔딩에서 대니얼의 죽음을 전하기 위해 가족 그룹 통화를 건 빅토르가 있다. 앞서 두 장면을 각각 묘사하며 동일하게 ‘이질적’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구도가 다른 두 시퀀스에 작품이 부러 유사한 뉘앙스를 부여했다는 해석은 비약일 테지만, 역시 겹치는 데가 있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불운과 불안의 기운이, ‘나쁜 뉴스’가 된다. 빅토르와 이디스는 ‘분위기를 깨는 자’[Sara Ahmed]들이다.
난민인 빅토르와 피폭당한 이디스의 신체는 이디스의 조모 뮤리엘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있다. 빅토르는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하는 와중 오늘을 소중히 즐기고, 이디스는 죽음을 예감하며 세상의 그림자들을 조명한다. 이디스는 가족들이 모일 때마다, 잊지 말자는 듯 갇혀 있는 빅토르를 언급한다. 그는 ‘분위기를 깨기를 자처하는 자’, ‘비밀’을 끄집어내는 자, 자발적 아웃사이더다. 불평등하고 부당한 룰에 순응하길 거부하고, 불평하기도 전에 무너뜨릴 궁리를 시작하는 그는, 제 어머니의 딸인 동시에 누구의 딸도 아니다.
빅토르는 ‘그 자리에 있거나 언급되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깨는 자’다. ‘햇살처럼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이’ 임에도 그렇다. 비자발적 아웃사이더인 그는 둘 이상의 국가가 솎아내고 감춘 그림자, 비밀 그 자체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친부모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숨겨 준 우크라이나의 친구들이고, 대니얼이고, “너의 부모는 역겨운 사람들”이라고 해 준 뮤리얼이다.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내미는 이디스다. 어떤 면에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웃사이더’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채로다. “우릴 가둬 놓고, 전염병을 들여와 퍼지게 내버려 둬. 아주 영국적이야.”,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날 찾을 거야.”: “어스트와일”에 갇힌 빅토르가 한 시퀀스에 각각 던지는 대사다. 고향에서도 타국에서도 기득권층의 룰에 들어맞지 않는 자였던 빅토르는, 라이언스 가족relatives을 자신의 가족family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섞여 용해되지 않고 ‘당당히 아웃사이더로 남는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혁명적 변화는 한쪽이 한쪽을 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디스는 바깥에서, 빅토르는 수용소 안에서, ‘비비언 룩 정권 하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수소문한다. 빅토르가 전한 “어스트와일”이라는 이름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스티븐에 의해 그가 “사라진 자”가 되자, 이디스와 프랜, 빅토르의 변호사 이본, 동생이 “사라진” 아흐메드, 아빠의 행동을 온라인으로 목격한 스티븐의 딸 배서니… 많은 이들이 모여 ‘빅토르를 건져내는 김에 세상을 뒤집는 작전’에 동참한다. 여기서 빅토르는 ‘구해지는 자’인 것 뿐 아니라 함께 세상을 뒤집는 자다. ‘구해진’ “어스트와일” 수용자가 카메라를 들어야만, ‘가로막힌’ “레드존” 주민들이 펜스를 들이받아야만, 그들이 “보여져야”만 혁명은 성공한다-고 작품은 말한다.
“지루한 일상”을 갈망했던 빅토르와 “지루한 일상”을 의심하던 이디스는 닮아 있었다. 빅토르는 (아마 난민이 되기 전부터) 안전망 바깥에서 살아 왔고, 이디스는 그 안팎을 오가며 균열을 가시화해 왔다. 그들은 ‘으레 그렇다고 믿어온 것들’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감시카메라 위치를 교묘하게 피해 입모양을 숨길 줄 아는’ 두 사람은, 빅토르가 대니얼의 남자친구가 아니었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 ‘일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디스에 대한 서술이 끝내 프랜에 닿듯, 빅토르를 설명하다 보면 대니얼을 돌이키게 된다. 그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방인으로 불리며, 기꺼이 이방인인 채로.
* 사라 아메드가 쓴 <행복의 약속>(2021년 후마니타스 번역본)을 읽다 쓰기 시작한 글이다. 빅토르와 이디스의 ‘이방인성’을 종합하는 데에 특히 도움을 받았다.
모든 사진 출처: H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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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맬컴과 마리> 말다툼 그 자체가 드러낸 영화의 진정성
1. 지난 2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맬컴과 마리>는 단출하다. 등장인물은 남녀 주인공 단 2명이다. 영화의 배경은 집 안팎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흔한 회상 장면 하나 없이 하룻밤 동안 이루어지는 '맬컴(존 데이비드 워싱턴)'과 '마리(젠데이아 콜먼)'의 대화가 사건의 전부다. 그래서 영화감독인 맬컴과 배우 지망생이었던 마리 간에 말싸움과 화해, 또 다른 말싸움과 화해, 그것들이 반복될 뿐이다. 흔한 플래시백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 화면으로 장식되어서 화려한 영상을 즐기는 재미도 없다. 그러나 기교 없이 두 사람이 살아온 상이한 세계의 충돌을 진한 감정선에 담은 <맬컴과 마리>는 오히려 그렇기에 영화적인 영화다.
2. <맬컴과 마리>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영화를 세상에 선보인 맬컴은 평론가들의 호평과 관객들의 박수 세례에 매우 들뜬다. 반면에 마리는 무슨 이유에선가 기분이 좋지 않다. 축하주를 들자는 맬컴의 제안에, 평론가들의 평가와 대화를 들려주는 맬컴의 목소리에 그녀는 도통 집중하지 못한다. 맬컴은 마리의 태도에, 마리는 그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는 맬컴의 모습에 화가 나면서 둘은 길고 긴 말다툼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이러한 오프닝은 로맨스 영화에서 빠지기 어려운 클리셰다. 현실에서도 적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터라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홀리기는 하지만 흔한 로맨스, 멜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말싸움의 발단을 보여주는 방식은 이 작품이 한 커플의 갈등 그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둘은 분명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한 공간에 없다. 웬만해서는 컷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몇 분간 두 주인공은 방과 거실, 부엌과 거실, 거실과 테라스 등 서로 다른 공간에 있다. 부엌과 거실을 좌우로 오가는 카메라 사이에는 창문틀과 같이 세로로 그어진 선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다. 서로의 거리, 음악과 같은 방해물 때문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제대로 된 대화도 되지 않는다. 이후 반복되는 듯 조금씩 달라지는 둘의 대화는 왜 둘 사이가 분리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 나간다.
3. 둘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인다. 맥 앤 치즈를 먹을지 말지로 시작된 둘의 대화는 이내 맬컴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평단의 평가 내용에 대한 의견 교환으로 이어진다. 맬컴이 자신을 감사 소감에서 빼놓은 것에 대한 마리의 불만,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 과거에 만났던 이성과 그들의 과거사가 그 뒤를 따른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둘러싼 말다툼이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의견의 충돌, 이 언쟁의 내용이 작품에 부여하는 통일성이 흥미롭다. 맬컴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흑인 여성이 미국의 의료제도 내에서 감내해야 하는 젠더 폭력을 다루는 진정한 걸작이라고 평가한 비평가를 신랄하게 욕한다. 그는 영화에는 정치적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고, 단지 "마음과 찌릿함"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화낸다. 영화가 한 인물을 어떤 미스터리 안에 녹여내는지 그 아이디어와 기교가 정치적의 의도에 앞서야 한다면서.
그러자 마리는 맬컴에게 말한다. 너에게는 그 마음에 있어야 할 진정성이 없다고. 너도 내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나의 아픈 기억과 추악함을 아름답게 바꿔 놓으면서 내가 스스로 목소리를 낼 기회를, 내 진정성을 드러낼 기회를 없앴다고. 영화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열을 내는 맬컴에게 그조차도 그 사실을 상쇄하려고 유식한 척하는 거라고 일갈한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예술 형태인 이상 그도 이미 정치적 의도와 메시지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순을 일깨운다. 배우 지망생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그가 대학을 나오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영화감독이라는 점에서 인종 문제와 별개로 사회적 기득권이라는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4. 이때 영화를 둘러싼 갈등을 창문 삼아 둘의 말다툼을 다시 들여다보면, 맬컴과 마리의 대화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체성의 대립이자, 그것들의 단면을 조각조각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다. 평론가의 비평에서 시작되어 다시 그 비평으로 되돌아오는 그들의 언쟁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격렬한 토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둘은 흑인이라는 정체성 안에 묶여 있지만 남녀, 대학 경험의 유무, 기득권과 비기득권, 영화감독과 배우 지망생 등 다양한 정체성의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결코 같은 관점에서 대화할 수 없다. 맬컴이 마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거나 그녀를 캐스팅하지 않은 일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무게감은 천지차이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진정성, 맬컴과 마리의 외양으로 드러난 진정성은 일원화할 수 없는 수많은 정체성의 차이인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정체성들의 충돌, 한 개인의 인생과 또 다른 개인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충돌하는 과정을 맬컴의 말마따나 실로 영화적으로, 멋진 아이디어와 기교로 담아낸다. 우선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인종문제에 감춰지기 쉬운 수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보다 명백하고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세상이 전부 흑백인 세계에서 배우들의 피부색보다는 배우들의 입으로 전달되는 내용 그 자체에 더 주목이 간다.
스크립트를 쓰는 맬컴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와중에도 하나하나 말로 설명하는 것에 비해 마리가 잠깐의 소극을 보여주며 맬컴에게 자신의 심정을 이해시키는 방식 역시 그 자체로 영화적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와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배우의 연기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두 주인공 사이에 오가는 대사, 표정, 제스처 안에 녹여내는 것 역시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가장 진정성 있게 풀어놓는 방식으로 보인다. 그 결과 미니멀한 연출을 만난 젠데이아 콜먼과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연기력은 더욱 빛난다.
5. 2시간에 걸친 격렬한 언쟁은 맬컴과 마리가 거듭 싸우는 와중에도 거듭 키스와 스킨십을 서로에게 퍼부은 것처럼 화해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서로를 잡아먹을 것 같던 상처 주는 말들의 형언으로 가득하던 영화의 결말은 아무런 대사 없이 조용하다. 화해하는 모습을 원경에서 뒷모습만 잡을 뿐이다. 어째서일까.
서로가 감추어 두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후련히 털어냈기 때문은 아닐까. 비로소 서로의 세계와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의 대화, 폭언, 언쟁, 고함이 없어도 진정으로 서로에게 감사함을, 존중을,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마치 영화가 온전히 맬컴과 마리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리하고 신선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동시에 가감 없이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을 모두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기에 이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두 사람의 충돌을 진정성 안에 써 내려가는 <맬컴과 마리>는 실로 영화적인 영화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사랑싸움의 이면에서 벌어진 진정성 있는 인생, 영화, 세계의 충돌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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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9월 셋째 주도 잘 보내셨나요?태풍의 영향으로 월요일은 전국적으로 흐리지만, 화요일부터는 맑아진다고 합니다.씨네픽과 함께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9월 셋째 주 개봉주 주말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순위 예측'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공조2: 인터내셔날> (-)▶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개봉한 <공조2: 인터내셔날>이 주말에 9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흥행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추세라면 500만 관객도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한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91만 6,37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73만 2,511명을 돌파하였습니다.
2. <육사오(6/45)> (-)▶ 시사회를 시작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유지되고 있는 <육사오(6/45)>는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현재 2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억지 신파를 최소화 했다는 점이 긍정적인 평을 받는데 한 몫한 것 같다.
주말 동안 (8월 26일~8월 28일) 관객 수 12만 1,99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83만 7,660명을
돌파하였습니다.
3.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 (-)▶ 추석 연휴를 겨냥했던 <극장판 엄마 까투리: 도시로 간 까투리 가족>은 추석 연휴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순위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TV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커진 스케일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38만 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3만 9,964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118회 예측 이벤트는 9월 셋째 주 주말 독립예술영화 순위 예측 이벤트입니다.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9월 3주 차 박스오피스 순위의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씨네픽 유저 예측 결과
정답자 비율(%)
▶ 한 주 동안 많은 씨네픽 유저분들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예측해 주셨는데요.
이번에는 씨네픽 유저분들의 예상과 다른 영화가 1,2,3위를 차지하면서 굉장히 낮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어짜다 공주, 닭냥이 왕자를 부탁해!>를 1위로 예상하신 유저 분들이 5%를 차지했고,
<오! 마이 고스트>를 2위로 예상한 유저 역시 5%를 차지했습니다.
<9명의 번역가>를 3위로 예상한 정답자 비율은 8%, 세 가지 중 가장 높은 정답률을 보였습니다.
참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씨네픽은 다음 주에 더 재밌고 유익한 제119회 씨네픽 이벤트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4. <헌트> (▼1)▶ 9월 둘째 주에 3위를 차지했던 <헌트>가 한 단계 떨어진 4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관객 수 역시 둘째 주와 비교했을 때 약 3.5배 하락하였는데요.
개봉한 지 거의 6주차에 접어들었고, 새로운 기대작이 개봉하며 점점 낮은 관객 수를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 9월 18일) 관객 수 2만 4,693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32만 7,677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탑건: 매버릭> (▲1)▶ 9월 둘째 주 TOP5 안에 들어서지 못했던 <탑건:매버릭>이 9월 셋째 주에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올해 영화 중 가장 오랫동안 상위권을 차지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말 동안 (9월 16일- 9월 18일) 관객 수 1만 4,650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815만 6,319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The Woman King>이 개봉과 동시에 1위를 차지하며, TOP 5 순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Top Gun: Maverick>이 순위권 밖으로 떨어졌으며, <Barbarian>도 순위가 떨어졌습니다.
주말 동안(9월 16일- 9월 18일) <The Woman King>의 매출액은 19,000,000 (한화 약 263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총 누적 매출액 역시 동일합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9월 16일 ~ 2022년 9월 18일)1. <더 우먼 킹> 1900만 달러 (누적 1900만 달러)2. <바바리안> 630만 달러 (누적 2,091만 달러)3. <Pearl> 312만 달러 (누적 312만 달러)4. <See How They Run> 310만 달러 (누적 310만 달러)5. <불릿 트레인> 250만 달러 (누적 9638만 달러)...씨네픽의 9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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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과 절망에 감염된 사람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전염성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나쁠 때 그리고 우울할 때 느끼는 감정들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전달된다. 내가 가진 감정을 말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표정과 몸짓에서 드러나는 그 감정은 은은하게 주변에 스며든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 감정이 전달되지만 잘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그 감정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 일상에서는 그것을 느끼기가 조금 어렵겠지만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방문하는 스포츠 경기장이나 공연장은 감정이 퍼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동질감은 굉장히 빠르게 전체 공간으로 퍼져나간다. 그렇게 희로애락은 강하게, 때론 조금 은은하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 감정 중 우울과 절망은 꽤 전파력이 있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어두운 기억이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평소에는 그것이 잘 나오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런 안 좋은 기억과 감정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무리 이성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잠시 우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온 우울한 감정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고 그것을 보는 상대방에게도 우울의 감정이 옮겨갈 수 있다. 좋게 보면 같은 감정을 주고받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모두가 우울의 구덩이에 빠져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우울과 절망은 자신이 오염시킬 누군가를 찾는다.
우울과 불안이 전염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스마일>
영화 <스마일>은 우울과 불안이 전염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포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인 로즈(소시 베이컨)는 정신과 전문의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병원에서 환자들을 다루는 모습과 간호사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무척 이성적으로 보인다. 영화 초반에 그가 등장하는 모습들에서 우울함과 불안이라는 감정을 볼 수 없다. 아마도 로즈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좀 더 이성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적절하게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앞에 환각과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여자 대학생이 나타난다. 로즈는 그 응급환자에게 똑같이 이성적으로 접근하지만 그 환자는 어느 순간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로즈의 앞에서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한다.
로즈는 그 환자의 우울과 불안을 고스란히 경험했고 그 우울과 불안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 전달된 우울과 불안은 이성적이었던 로즈의 마음을 조금씩 들쑤신다. 영화는 로즈가 조금씩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별일 없는 듯 넘어가고 주변과 교류도 하지만 이상한 환영을 보고 놀라면서 조금씩 평상심을 잃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런 일련의 과정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우울증 환자들의 초기 모습처럼 느껴진다. 본인도 그 증상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주변 사람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어느 순간 예민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가 그 증상이 심각해질지 아니면 다시 원래의 감정으로 돌아올지를 결정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의 문법을 사용하는 이야기인 만큼 사람들이 죽는 법칙을 만들어두고 있다. 우울과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전염된다. 영화에서는 그것을 일종의 저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도 누군가의 자살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우울과 불안을 야기한다. 그건 실제로 저주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목격한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오랜 시간 남고 정신적으로 꽤 힘든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화 <스마일>을 다 보고 나면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인 변화가 일종의 저주뿐만 아니라 그동안 그가 가지고 있던 내면의 우울과 불안이 폭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그가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는 과정이 무척 실감 나게 담겼다.
그렇게 점점 우울해지는 주인공 로즈의 주변에 있던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둘씩 멀어져 가고 등을 돌린다. 그리고 로즈는 시간이 갈수록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절망은 커지고 상황은 안 좋아진다. 한 사람 정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생기지만 로즈가 외치는 도움의 외침은 외부로 강력하게 분출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갑갑하고 불안해진다. 영화 속 인물의 불안한 감정이 관객들에게도 잘 전달된다는 이야기다.
정통 공포영화보다는 심리 호러에 가까운 이야기
이 영화를 연출한 파커 핀 감독은 <잠들지 못하는 로라>라는 단편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다. 2020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단편 작품에서도 감독은 불안과 공포를 무척 효과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도 계속 악몽을 꾸는 주인공이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무척 실감 나게 묘사했으며 그것이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영화 <스마일>은 파커 핀 감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불안의 잠식 과정을 그대로 장편 영화에 녹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 영화답게 영화에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나 기괴한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몇몇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그렇게 공포스러운 장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 하드 한 공포영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심리적인 공포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꽤 무섭게 느껴질 것 같다. 가장 이성적으로 보였던 주인공이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듯한 묘사는 충분히 공포스럽다.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면 저주가 옮겨간다는 측면에서 영화 <링>을 떠올리게 한다. <링>은 녹화된 영상을 보면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는데, <스마일>도 저주에 걸린 사람이 죽는 모습을 목격하면 일주일 안에 죽는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링>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주의 원인까지 파악은 못하지만 그 저주의 법칙을 알아내고 피하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종의 오마주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는 제목인 <스마일>처럼 웃는 장면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의 모습인 우울과 불안은 영화 내내 등장해 관객에게 공포를 선사한다. 기괴한 웃음도 소름 끼치지만 점점 고립되는 주인공의 모습과 내면의 불안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더 큰 공포를 전달한다. 정통적인 공포영화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사람들의 심리적인 변화 과정을 공포스럽게 담았다는 측면에서는 꽤 훌륭한 공포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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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속 좀비와 #살아있다 가 의미하는 것
영화 살아있다가 개봉했습니다.
저는 시사회를 통해 그럭저럭 봤던지라,
개봉 이후 관람객 평이 생각보다도 더 좋지 않아 조금 놀랐는데요.
이 콘텐츠는 영화 살아있다를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만들게 됐습니다.
오늘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살아있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살아있다 #유아인 #박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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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0] 각본가 맹키위츠가 바라본 그 시대의 위선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가 넷플릭스에 공개 되었습니다.
고전 영화 시민 케인의 공동 각본가 맹키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그가 시민 케인을 쓰게 된 이유나 쓰는 과정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영화사나 미국 당시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면 조금 흥미가 떨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에요.
마치 예전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착각이 드는데요. 흑백영화 특유의 화면 질감과 음향이 완벽히 재연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맹키위츠가 보고 들었던 그 당시의 할리우드 권력과 정치인들의 위선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점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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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이노 마이 프렌드> 메인 예고편
용감한 다이노 특공대, 과거로 출동~!
공룡 세계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어드벤처가 시작된다!공룡 연구를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난 뒤 사라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용감한 인턴 요원 ‘우디’가 출동한다.
최강 초식 공룡 스테고사우루스부터
무시무시한 지배자 데이노니쿠스,
공룡의 제왕 티렉스까지 모인 그곳!
신세계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뜻밖의 위기에 빠진 ‘우디’는
꼬마 공룡 ‘샤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한편, 초식동물 마을을 탐내는 포악한 공룡 ‘디에고’의 등장으로
모험을 떠난 ‘우디’와 ‘샤샤’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맞닥뜨리는데..
과연, 두 친구는 위기에 처한 공룡 마을을 지켜내고
‘우디’는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