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주2025-05-14 12:36:51
모호함의 미학,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해피 엔드> / <달콤한 인생>
오늘 학생과 얘기하다가, 사람들은 미묘한 관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피 엔드>를 본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헷갈린다). 만에 하나 둘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서 지금처럼 계속 생각해 보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키스는 미묘함을 끝내는 확실한 방법이다. 퀴어 영화에서 스킨십은 영화의 독해가 불가능한 이성애중심주의적 관객들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퀴어 영화는 퀴어 비평으로 읽어 볼 만한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 드물다.
어쨌든 나 또한 이분법의 논리에 빠져 있었고, 영화 시놉시스를 쓰는 수업시간에도 인물들의 감정선은 명확해야 한다고 늘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는 모호함의 미학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다. 모호함의 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삶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생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성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본 <달콤한 인생>도 모호함에 관한 영화였다. 조폭인 이병헌이 자기 보스랑 맞짱을 뜨는 이유는 ‘왜 흔들렸는지’ 말을 못해서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이병헌의 질문만이 강조되어 들렸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런데 어제 다시 보니 대답을 안 한 건 이병헌이 먼저였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관객은 영화를 추동하는 그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랬기에 이 영화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은 <달콤한 인생>으로 한국의 느와르 장르를 해 보고 싶었는데, 그 안에는 사실 한 남자의 어떤 섬세한 심리가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모호함에 관한 것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같았다고. <해피 엔드>와 <달콤한 인생> 두 영화 모두 모순적인 제목을 갖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해피 엔드>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달콤한 인생>도 달콤한 인생을 그리지 않는다. 영제는 <A Bittersweet Life>로 더욱 직접적이다. 우리는 어쩌면 명확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것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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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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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 알고리즘] 빛나고 행복했던 우리의 꿈, 나의 로봇 친구
[무비 알고리즘 Movie Algorithm]:
[무비 알고리즘]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을 하나로 묶어본다. 너무나 달라보이는 영화들. 하지만 영화 하나하나를 조금씩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에게서 어떠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이번 무비 알고리즘의 연결고리는 ‘로봇 친구’이다. 지금부터 로봇 친구라는 연결고리로 묶인 네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살펴보자.이른 아침, 나를 깨우는 기계 소리. 윙윙거리고, 철컥거리는 그 소리에 잠깐 놀라지만 이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것의 목소리. “친구야, 일어나!” 녹슬지 않을까, 꺼져버리지 않을까, 늘 곁에서 보살피고 신경 써야 하는 나의 친구. 하지만 그 친구의 따뜻함과 사랑은 그 귀찮음과 수고를 이겨내게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나에게 가장 행복한 날들을 선물한, 평생의 친구. 나의 ‘로봇 친구’들을 소개한다.
<아이언 자이언트 The Iron Giant>
-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 (1999)
- 감독: 브래드 버드
- 출연진: 제니퍼 애니스톤, 해리 코닉 주니어, 빈 디젤 外
‘회색 빛 친구’
냉전시대가 한창이던 1957년, 미국의 한 시골 마을. 근처 바다 한가운데로 대형 고철 덩어리 ‘아이언 자이언트 (빈 디젤 分)’가 불시착한다. 마을에 사는 아홉 살 소년 ‘호가드 휴즈 (일라인 멜리언솔 分)’는 우연한 계기로 그 고철 덩어리를 만나 그를 구해주게 되고, 그에게 자이언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이렇게 그 둘은 친구가 되어,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 요원 ‘켄트 맨슬리 (크릭스토퍼 맥도날드 分)’가 마을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이언 자이언트의 존재를 장군에게 알리면서, 두 친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최강 우주병기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착하기만 했던 아이언 자이언트. 그리고 말썽꾸러기이지만, 아이언 자이언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호가드. 과연 그들의 우정은 변함없이, 영원할 수 있을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영화는 작가 ‘테드 휴스’가 쓴 SF 동화 ‘The Iron Man’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거대 로봇과 소년의 우정이라는 원작의 설정만을 사용했을 뿐, 영화는 상당 부분 수정을 거쳐 탄생했다. 따라서 동화 같이 마냥 따뜻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원작보다 칙칙하고 현실적이어서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소년과 거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많이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거인이 아닌 거대 로봇이다. 이로 인해, 생명체의 따뜻함과 기계의 차가움이 느끼게 해주는 온도차와, 점점 더 가까워지게 하는 온기는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겉으로 보았을 때 차갑고 무서워 보였던 자이언트. 하지만, 기계인 자이언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열기인 것처럼, 그의 말과 행동은 뜨거운 온기를 내뿜는다.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해준 호가드와 초월적인 우정을 나누는 자이언트는 영화 내내 호가드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언트의 대사 ‘슈퍼맨’은 수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상징적이고 기억에 남는 대사였다.
‘내가 되고 싶은 것’
영화는 실사 영화보다 공감이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며, 인물에게 몰입할 시간조차 부족한 짧은 러닝타임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 ‘브래드 버드’의 눈부신 재능은 작품에 관객들을 빠져들게 한 것을 넘어서, 무생명체인 로봇에게서 인간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다. <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 등 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감독이지만 그는 해당 작품을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아마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영화에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자신의 누나가 남편에게 총기로 살해당하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건을 겪고 “총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총은 자신이 총이 되고 싶지 않다면?”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감독의 아픔과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이언트에게 녹아 들었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사실 지구 침공을 위한 정찰기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작중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는데, 정작 자이언트 본인은 자신이 사람들을 해치는 총이 아니라고 말한다. "네가 무엇이 될지는 너 자신이 선택하는 거야”라는 ‘딘 맥코핀 (해리 코닉 주니어 分)’의 말.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자이언트는 결국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불태워 모두의 친구 슈퍼맨이 되었다.
<빅 히어로 Big Hero 6>
- 영화: 빅 히어로 (2014)
- 감독: 돈 홀, 크리스 윌리엄스
- 출연진: 라이언 포터, 스콧 애짓, 다니엘 헤니 外
‘너의 선물, 나의 선물’
샌프란소쿄에 살고 있는 14살의 천재 소년 ‘히로 (라이언 포터 分)’. 형과 유달리 가까웠던 히로는 형인 ‘테디 (다니엘 헤니 分)’의 죽음 이후,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테디가 만든 헬스케어 로봇 베이맥스와 우정을 나누며, 다시 이겨내게 된다. 결국 그들은 형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히로는 테디의 대학 친구들과 팀을 이뤄 ‘빅 히어로 6’를 결성하고, 테디의 원수인 ‘스푸키맨’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한다. 과연 그들은 테디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얗고 푹신푹신한’
해당 영화 역시 원작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마블 코믹스의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그 원작이다. 그러나, 작품 속 베이맥스는 평소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마블의 슈퍼히어로들과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얗고 푹신푹신한 힐링 로봇인 베이맥스는 정말 보기만 해도 귀여워 곡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저절로 갖게 만든다. 또한 필자는 베이맥스가 동그랗고 하얘서 히어로가 아닌 사랑스러운 곰인형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5살만 어렸다면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랐을 것 같은 정도였다.
작품에는 베이맥스뿐만 아니라, 테디의 친구들로 구성된 언럭키 어벤져스 느낌의 ‘빅 히어로 6’팀도 등장해 화려한 액션신 을펼친다, 이로 인해 슈퍼 히어로 영화의 느낌도 살짝 느껴진다. 또한 ‘샌프란소쿄’라는 이름의 샌프란시스코와 도쿄를 합쳐놓은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동서양의 문화가 만든 독특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특히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이 ‘히로’인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연출과 오마주를 찾는 재미도 있다.
‘너만을 위한 나’
이렇게 시각적 재미를 뒤로 하고 스토리를 놓고 보더라도, 영화는 히로와 베이맥스의 우정을 전형적이지만, 단단하게 표현했다. ‘상실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 우정’ 이 말이 베이맥스와 히로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인듯 하다 사고로 형을 잃어 완전히 고립된 히로 앞에 나타난 베이맥스는 히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어딘가 뚝딱거리고 서투르지만 진심으로 히로를 걱정하는 베이맥스의 마음과, 베이맥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활력을 되찾는 히로를 보며 우리를 미소 짓게 된다.
사실 포스팅을 위해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에는, 내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단순히 베이맥스의 귀여운 외모에 홀려 영화 전체를 미화하여 기억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중에서 슬퍼하는 히로를 위로해주기 위해, 베이맥스가 틀어주는 녹화된 형 테디의 영상 기록을 틀어주는 장면을 비롯해 섬세하게 쌓여가는 둘의 ‘친구되기’ 과정들을 보고 역시 <빅 히어로>는 따뜻하고 좋은 영화가 맞다는 확신을 했다.
영화 속에서 베이맥스는 히로에게 "나는 당신의 건강 관리를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베이맥스는 단순히 건강을 돌보는 로봇이 아니라, 히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성장을 돕는 존재이다. 이처럼 "빅 히어로"는 우정이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성장하게 만들어 결국 모두를 ‘히어로’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와일드 로봇 The Wild Robot>
- 영화: 와일드 로봇 (2024)
- 감독: 크리스 샌더스
- 출연진: 루피타 뇽오, 페드로 파스칼, 캐러린 오하라, 빌 나이, 킷 코너, 마크 해밀 外
‘처음 널 만난 순간부터’
운송 중 사고로 인해 유니버설 다이나믹스社(사)의 한 로봇이 야생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로봇의 이름은 ‘로줌 유닛 7134 (루피타 뇽오 分)’. 인간을 돕기 위해 설계된 최첨단 로봇이었다. 그렇게 야생에 떨어진 로줌은 야생의 생활을 익히던 중, 한 기러기의 알을 구하게 되고 그 알에서 기러기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로줌를 따라다니는 기러기. 그렇게 로줌은 그 기러기의 엄마가 된다. 결국 로줌은 새에게 ‘브라이트빌 (킷 코너 分)’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돌보고 교육시키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입력시킨다
브라이트빌이 겨울 이주를 위해 비행법을 배우는 동안, 로줌은 여우 ‘핑크 (페드로 파스칼 分)’와 함께 동물들과 협력하며 섬 생태계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브라이트빌이 자신이 남들과 다른 것과 로줌이 자신의 부모를 실수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로줌을 찾으러 유니버설 다이나믹스社(사)의 로봇들이 섬에 도착하는데, 과연 로줌과 브라이트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로봇 생존기’
대부분의 로봇이 나오는 영화가 그러하듯이 로봇 캐릭터는 낯선 곳에 도착해 경계 받는 미지의 존재처럼 등장한다. 해당 영화에서 로줌은 정말 특별한 환경에서 새롭게 살아간다. 로줌이 도착한 곳은 인간의 손길 하나 닿지 않은 자연이었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자연. 그곳에서 로줌은 모든 동물들의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최첨단 기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연에 적응하는게 아니라 숲 속의 동물들은 그를 더욱 경계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로줌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지혜를 흡수하기시작했다. 먹이를 구하고, 집을 짓고,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면서, 로줌은 점차 야생에 적응해 간다. 동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로줌의 모습은 따뜻한 감동을 준다. 인간 혼자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도 이질감이 들 텐데 철로 이루어져, 반짝반짝 광이 나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로봇이 ‘자연에서 살아남기’를 찍듯 살아가는 모습은 어딘가 더 특별하게 보여졌다.
‘내가 되는 것’
작품은 ‘로줌, 핑크, 브라이트빌이라는 세 존재의 우정과 가족애’를 다룬다고 생각해도 좋지만, 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던 누군가가 자신만의 의지와 마음을 갖는 영화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입력된 값으로만 행동하고, 타인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던 로줌은 브라이트빌을 키우면서 점점 의지와 사랑, 모성애를 갖게 된다. 브라이트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로줌이 행복해지는 것은 결국 로줌이 다시 타자에 의해 행복이 결정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브라이트빌은 로줌에게 어느 순간 타자가 아닌, 가족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로줌을 졸졸 쫓아다니다가 사춘기가 되자 로줌과 다투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후회하며 다시 사과하려는 브라이트빌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종을 초월한 두 존재의 교감은 우정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로줌과 브라이트빌은 모두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다. 로줌은 자신이 아닌 사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야 했으며, 브라이트빌은 자신의 아픈 몸에 좌절하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입력된 한계를 이겨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가 곁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로줌에게 사랑으로 길들여진 여우 핑크, 로줌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선물한 브라이트빌. 어린왕자는 섬을 떠났지만, 장미는 섬에서 평생 어린왕자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 어린왕자가 다시 장미 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장미에게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그들은 서로의 소중한 관계를 다시 정의한다.
<로봇 드림 Robot Dreams>
- 영화: 로봇 드림 (2023)
-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 무성 영화
‘손을 맞잡고’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조용한 밤, 오늘도 혼자 냉동식품과 TV 앞에 앉은 ‘도그’는 문득 옆집 창문을 보게 된다. 자신과 다르게 행복한 그들. 처량한 자신의 신세에 도그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때 TV에서 방송되는 한 광고. 도그는 광고를 보더니 홀린 듯이, 주문 버튼을 누르게 된다. 다음날 도착한 상자. 상자를 열고 헐레벌떡 그것들을 조립하니, 멀끔한 ‘로봇’ 하나가 눈을 떴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친구를 얻는 도그. 도그는 로봇과 함께 뉴욕 곳곳을 누비며 잊지못할 행복한 여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해변에 놀러가 물놀이도 하며, 여유를 즐기게 되는데 집에 갈 때가 되자 로봇이 물에 녹슬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혼자 로봇을 옮길 수 없었던 도그는 눈물을 참고, 로봇을 둔 채 집으로 향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수리 도구를 들고 돌아온 도그. 그러나 해변은 내년 6월까지 폐쇄되었다. 그렇게 이별하게 된 도그와 로봇. 과연 그들은 다시 만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함께 추는 춤’
<로봇 드림>은 앞선 로봇 친구들이 나오는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영화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로봇과 도그(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수평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었다. 로봇과 인물/생명체가 능력이든, 역할이든 차이점이 명확하였던 앞선 영화들과는 달리 로봇 드림 속 도그와 로봇의 관계는 정말 ‘친구’였다. 물론, 로봇을 처음에 조립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도그라고 할 수 있지만 작품 속에서 도그는 창조자나 사용자로 그려지지 않았다.
로봇이 사용자를 위해서 수직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본인 모두가 행복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된 것은 작품의 큰 매력이다. 이러한 수평적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로봇과 도그 모두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 다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였고 영화 역시도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한 인물이 일방적으로 표현하고 말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주인공 모두에게 우리는 최대한 공평하게 이입할 수 있었다.
‘녹슨 꿈에 빠져’
로봇 드림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필자는 로봇을 통해 도그가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는 꿈을 이루게 되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꿈을 꾸는 대상은 도그가 아니라 로봇이었다. 추운 겨울, 홀로 해변에 남아 도그를 그리워하던 로봇. 다리를 하나 잃으면서도 계속해서 도그의 집으로 향해 도그를 만나는 로봇의 꿈들은 항상 슬픈 결말로 끝이 났다. 우정에 관한 영화이지만, 그들이 함께 있었던 시간은 9월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없이 1년을 보냈고, 다시 9월이 되었을 때 그들 곁에 있던 것은 서로가 아니었다.
영화는 두 주인공을 분리시키고, 꿈과 상상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렇게 물리적 거리를 고정하고, 둘의 마음과 생각에 온전히 빠져들게 하니, 오히려 둘 사이의 사랑은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현실과 꿈을 계속해서 반복시킨다. 오즈의 마법사 속 양철 나무꾼이 되어, 도그가 있는 뉴욕으로 향하는 꿈을 꾸는 로봇. 그가 그 꿈에서 걷던 걸음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로봇의 주위에는 수많은 꽃들이 함께 있고, 로봇의 목적지에는 빛나는 무지개가 떠있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꿈이 얼른 끝나 로봇이 그만 상처받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노래했던 <September- (Earth, Wind & Fire)>. 영화 초반 그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공원에서 함께 추던 춤은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서로가 없었다. 스쳐가는 인연을 다시 붙잡을 수 있지만 놓아준 그들. 로봇판 환승연애의 느낌으로 서로를 과거에 묻어두기로 한 그 결정은 모순적이게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행복했던 9월의 순간은 분명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들은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모든 걸 바쳤다. 그랬기에 언젠가 <September>이 거리에서 흘러나와 다시 그 순간을 생각했을 때 변함없이 미소 지을 것이다.
‘가장 따뜻한 너’
내가 다가가서 전원을 켜줘야 비로소 움직이는 로봇처럼, 우정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는 것도 필요하다. 친구 사이에서 싸우고 또 멀어질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 친구와 항상 잡았던 그 손이 그립다면 용기를 내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낸 작은 용기는 차갑게 식었던 나의 손과 너의 손을 금새 따뜻하게 만들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소홀해진 이후에 지나간 순간들을 뒤돌아 보지 말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늘 내 곁에 있던 너의 눈을 마주하고 말하자. “고마워. 서로의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 너와 나, 그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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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이 현실이 되는 한 해가 되길
한해의 마지막에 이찬혁의 인스타그램에 이런 피드가 올라 왔다. ‘새해 처음으로 듣는 노래가 그 해를 비유한다는 말이 있어요. 1월1일 0시 1조와 같은 행운이 24년에 당신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월 1일에 ‘1조’ 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에 기분이 참 좋아졌다. 새해 처음으로 보는 영화도 한 해의 기운을 넣어주는 것으로 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제목만 들어도 모든 소원과 희망을 이루어 줄 것만 같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라이프’ 잡지사에서 사진 현상을 담당하며 16년째 근무중인 월터 미티는 성실한 일상을보내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월터는 회사의 구조조정 때문에 폐간을 앞둔 ‘라이프’지의 마지막 호 표지 사진, 25번째 필름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25번째 사진을 꼭 표지로 써줬으면 하네, 거기에 내 사진작가 인생의 정수를 담았어.” 평소 어디론가 멀리 떠나본 적이 없는 월터는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을 찾기 위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히말라야를 넘나들며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어린시절 개성있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스케이트 보드에 우승할 정도로 활동적인 소년이었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장이 되고, 하루를 성실히 꾸려가는 직장인이 되었다. 평소 월터는 상상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곤 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션을 완성하기 위해, 상상을 벗어나 세상밖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숀 오코넬이 사진고료를 수령해간 곳이 그린란드의 어느 술집임을 동료 셰릴에게 듣고, 그린란드로 가게 되는데…공항에 내려 렌터카 업체를 찾은 월터앞에 빨간차와 파란차 두대가 있고, 빨간 차를 선택한 월터는 술집에서 숀을 태워준 적이 있다는 헬기 조종사를 만나 헬기를 타고 물 그림자 사진에 찍힌 배까지 가기로 하는데, 이 때 두려움을 느끼는 월터의 앞에 상상 속에서 셰릴이 나타나 기타를 치며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를 들려주고 월터는 용기를 얻고 헬기로 뛰어 들게 된다. 고생끝에 배에 승선 했지만, 숀은 이미 아이슬란드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이슬란드로 다시 떠나지만, 숀은 닿을 듯 닿지 않고 월터는 계속해서 숀의 사진을 찾아 모험을 하게 된다.소심하고 조용한 듯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끝없는 상상력으로 하고 싶은 일을 시원시원하게 해내고,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가 되기도 한다. 상상을 하느라 현실에서 중요한 순간을 놓치지도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그 상상 덕분에 용기를 내기도 한다. 승진과 성공 더 큰 성과를 위한 도전이 아닌, 이제 문을 닫는 회사의 폐간호 표지사진을 찾기 위해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곳으로 떠나는 여정. 자신이 오랫동안 해 온 일의 좋은 끝을 위해 낸 용기.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지,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개인적으로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에 머물고 싶지. 그래 바로 저기 그리고 여기.
숀오코넬이 히말라에게서 찍으려고 기다렸던 눈표범을 보게 되지만 사진을 찍지 않고 바라보면서 하는 대사이다. 세계를 구하는 엄청난 활약보다, 평범한 하루 조용한 일상속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일상 속에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다고. 현재의 행복과 평안을 만끽 하는 것 보다 과거에 머물고, 미래를 떠도는 우리 마음을 되돌아 본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처음 시작엔 월터의 현실과 상상의 구분이 명확하다. 하지만 숀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험은 어느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상상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아마도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되어 가는 가정일 것이다.
영화의 첫 시작에 숀이 지갑에 새겨 월터에게 선물한 라이프지의 모토를 떠올려 본다.
"세상을 보고, 장애물을 넘어 너의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성공하거나, 최고가 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기 위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속에서 빠져 나와, 다른 무엇이 아닌 나 다운 삶을 꾸려 가는 한 해가 되길.
Stop Dreaming, Start liv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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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곳이 거미의 땅이라 불리는 이유
곧 철거를 앞둔 공간. 잡초가 무성한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이곳엔 잊힐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세 여성이 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박묘연, 폐지를 줍는 박인순, 그리고 흑인 혼혈인 안성자. 이들은 여전히 기지촌에 남아 있다.
영화의 시작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천천히 탐색하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열리며, 배경에 흐르는 영어 음성은 이 공간이 미군 기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폐허처럼 보이는 이곳은 곧 미국과 한국의 역사가 얽힌 공간임을 드러낸다. 화면에 잡힌 잡초와 비석은 이 공간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여성들의 삶과 그 속에 깃든 고통을 상징한다.
첫 번째 인물은 박묘연이다. 그녀는 분식집을 운영하며 음식을 준비하고 판매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장사를 마친 후 홀로 주사를 놓는 모습은 그녀의 외로움과 고독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그녀의 과거는 더욱 아프다. 26번의 중절수술과 미군 남성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그녀가 견뎌야 했던 고통은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는 이후 빈 공간과 폐허를 비추며 한 남성의 나레이션을 들려준다. 그는 "낮에는 개미처럼 일하고 밤에는 거미처럼 사라져야 했던"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기지촌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처절한 삶을 은유적으로 그려내며, 박묘연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관객에게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박인순의 일상은 더욱 고단하다. 폐지를 줍고 혼자 방 안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은 외로움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녀는 미국에 두 자녀를 남겨두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성병에 걸리고 포주에게 이용당하며 빚만 늘어났다. 분노와 한을 안고 절에 다니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여전히 날카롭다. 숲속에서 외치는 그녀의 절규는 "모든 고통을 가져가라"는 외침과 함께 그 처절함을 극대화한다.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마지막 인물인 안성자는 기지촌에서 태어난 흑인 혼혈 여성이다. 그녀의 삶은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모진 수모를 견뎌야 했던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는 분식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햄버거를 먹는 장면으로 등장하며, 관객에게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상처와 슬픔을 암시한다. 안성자는 과거의 자신을 판타지적으로 재현한 연출 장면을 통해 그녀의 내면을 탐구한다. 빨간 원피스를 찾아 입고 텅 빈 댄스홀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그녀의 상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관객의 감정을 자극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처럼 연출된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거울을 보는 모습, 빨간 원피스를 입고 춤추는 장면, 수박을 먹는 모습 등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도로,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런 연출이 과연 다큐멘터리의 범주에 속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영화는 세 여성의 일상 -> 공간의 나레이션 ->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외로움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미군 기지촌 위안부로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감춰져 왔다. 철거와 함께 잊혀질 위기에 처한 이들의 아픔은 쉽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이야기다. 잡초가 무성한 폐허 속 비석처럼 이들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다큐는 여성들의 고통이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임을 관객에게 묻는다. 왜 여성들의 고통은 남성들에 의해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가?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다큐멘터리는 그 질문을 강렬하게 던지며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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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환상 사이
캐스팅과 뮤지컬이라는 장르만을 놓고 볼 때 <아네트>는 레오 카락스가 만드는 상업영화처럼 보인다. 예술영화에도 얼굴을 비추지만 이제는 상업영화 배우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와 특히 헐리웃에서 영어 연기를 할 때 상업영화 출연 빈도가 높은 마리옹 꼬띠아르는 <아네트>가 일반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잘 알려진 배우들과 노래가 함께 하는데도 <아네트>는 상업영화라고 보기에는 난해한 구석이 있는데 특히 액자구성과 무대와 현실을 오가는 영화의 형식에서 더욱 난해함이 두드러진다. 영화가 시작할 때 레오 카락스는 직접 등장해서 이제 시작하자고 속삭인다. 그리고 영화의 캐스트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제 시작할까요(May we start?)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라라랜드>를 연상시킬 정도지만 오프닝에 비해 영화가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등장인물이 소개되면 관객은 제목이기도 한 아네트가 언제 등장하는지를 기다리느라 더욱 혼란에 빠진다. 서사를 시작하는 건 아네트가 아닌 안(마리옹 꼬띠아르 분)과 헨리(아담 드라이버 분)이고 아네트는 이들 사이에 태어난 딸인데 무대 소품처럼 보이는 인형으로 등장하는 신이 훨씬 더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왜 레오 카락스 감독이 이런 난해한 구성을 취했는가다. 연극과 영화를 오가는 건 아네트 뿐만이 아니라 안이 헨리와 싸우는 장소인 배에서도 나타나는 연출이다. 흥미로운 건 안과 헨리 모두 무대가 주된 삶의 터전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오페라 가수로 등장하는 안은 무대에서 유사 죽음을 수도 없이 경험하고 관객을 구원한다. 코미디언인 헨리는 무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바로 부활하며 관객에게도 죽음을 선사한다. 이는 안과 헨리가 나누는 대화에서 두드러지는데, 오늘 무대가 어땠냐는 질문에 헨리는 '죽여줬어(I killed them)'라고 대답하는 반면 안은 '관객을 구원했어(I saved them)'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결혼해 부부가 된 이들은 정 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관객에게 죽음을 선사하던 헨리는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무대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안은 점점 더 잘나가는 오페라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헨리는 그 이유를 자신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 단정짓지만 관객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냉정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즉 무대라는 극중 장치는 영화의 형식을 서사에 그대로 반영하면서 헨리의 사고가 현실과 환상을 오가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인기없는 코미디언이 되고 공연이 취소된 헨리는 태어난 아네트를 키우며 점점 현실을 잃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를 보다가 아이 위에 앉는 장면이 대표적인데(babysitting을 이용한 언어유희)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해 보인다(실제라면 아네트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또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보여주는데 공연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헨리의 전 연인들이 헨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안은 차에서 잠들었다가 이 뉴스를 보게 되는데 뉴스가 끝나고 안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 장면 또한 관객에게도 혼란을 불러일으키는데 헨리와 안의 환상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장면들이 암시하는 것은 안과 헨리가 서로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태어난 아네트와 힘든 육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승승장구하는 안에 대한 헨리의 열등감과 질투다. 공연이 취소되기 전 헨리가 야유를 받았던 공연의 내용은 자신이 안을 죽였다는 것이다. 극중극에서 헨리의 살해 방법은 놀랍게도 간지럼 태우기인데 관객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 헨리가 안을 그 때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아내를 죽여 스스로의 부활을 꾀했던 헨리는 도리어 그 공연으로 야유를 받고 무대에서 영원히 퇴장하고, 이는 이후 서사의 복선으로 활용된다.
아네트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대에서 퇴장하면 편안한 집에서 휴식을 취했던 이들은 아네트가 태어나고 부부관계가 불안정해지자 불안정을 상징하는 태풍이 부는 배로 무대를 옮겨간다. 이 배는 앞서 말한 연극의 공간이다. 누가 봐도 배경은 태풍이 치는 바다를 스크린으로 띄운 것이며 흔들리는 배와 쏟아지는 물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 장면 이후부터 안 없이 살아남은 헨리가 목격하는 것들은 대부분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아네트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네트는 여전히 목각인형이기에 불쾌한 골짜기와 같은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데 아네트가 노래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아네트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움직이는 입술을 목각인형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한 방식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아네트의 노래가 헨리의 환상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잠시나마 헨리의 환상인 것처럼 보이던 아네트의 노래는 안을 사랑했던 지휘자가 이를 함께 듣고 놀라는 장면과 더불어 전세계 관객들을 충격에 빠트리면서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노래하는 아네트가 헨리의 환상이라면 아네트의 노래를 듣고 놀라는 지휘자와 관객 또한 헨리의 환상이 된다. 아네트는 극이 끝날 때까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이는 헨리의 생각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헨리가 자신의 무대를 잃은 것이 안과 아네트 때문이라는 착각은 안이 죽은 이후에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헨리뿐이다. 기실 헨리의 무대는 안과 결혼하기 전에도 그닥 재미있지 않았다. 이를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처럼 헨리는 무대에서 자신이 안을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하지만 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매 무대마다 새로운 농담을 생각해내어 관객을 '웃겨 죽여야' 하는 헨리와는 달리 안은 같은 무대를 여러번 반복한다. 죽여야 하는 상대가 자신뿐이고, 무대에서 스스로 낙하함으로써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안과는 달리 헨리는 매일 죽여야 하는 상대가 바뀌는 데다 그 수도 많다. 심지어 무대에서 자신이 죽는 시늉을 하더라도 관객이 반드시 웃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헨리가 진행하는 코미디쇼의 질이 낮아진 것은 헨리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코미디쇼라는 형식에 그 원인이 있다. 하지만 무대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 자신마저 죽었던 헨리는 이제 무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영화의 형식이 연극과 현실을 오가는 것은 헨리의 이런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다. 헨리는 분명히 배에서 안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 자신조차도 정말 그랬는지 헷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극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아네트를 현실로 받아들일 때 그 현실은 파도처럼 한꺼번에 덮쳐온다. 아네트를 월드투어로 혹사시키는 것이 아동학대라는 것을 받아들인 헨리는 최후의 공연을 기획하고 그 곳에서 공연자로서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네트가 목각인형이 아닌 현실의 아이가 되어 헨리에게 노래할 때 헨리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에서 아네트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인 헨리 앞에서 환상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네트다. 헨리는 아네트에게 널 사랑해도 되겠냐고 물어보지만 아네트는 헨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네트와 헤어질 때 헨리는 마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다시 목각인형이 된 아네트를 목격하는데 이는 이 모든 것이 헨리의 환상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던 아네트는 존재했던 것인가? 아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헨리가 죽인 이들은 왜 죽었는가? 결국 <아네트>는 자신의 쇠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환상을 헤맨 코미디언의 최후인 셈이다.
헨리는 자신의 코미디쇼에서 자기 자신에게 끝도 없이 묻지만 결코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되뇌인다. 왜 헨리는 코미디언이 되었는가? 서사 전체에서 보듯이 헨리는 코미디에 소질이 없다. <아네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애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이 <아네트>인 이유는 아네트야말로 헨리가 만들어낸 환상의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정말 존재했는지조차 영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불분명한 아네트는 헨리와 안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을 환상으로 만들어낸 헨리가 자신을 없애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뮤지컬의 선율을 기반으로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호연을 볼 수 있는 <아네트>는 현실에 기반한 위험한 환상을 조금은 기괴하게, 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해당 글은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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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애를 기댄 채 어긋나버린 디스토피아의 세계관
시대가 변할수록 더 극심해지는 혐오와 차별 역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토착민의 삶을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애를 통해
풀어간 SF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실제 캐나다 토착민인 크리족 혼혈 다니스 고렛 감독의 첫 장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토르 시리즈의 감독이자, 종종 배우로도 활동하는
뉴질랜드 출신의 타이카 와이티티가 제작으로 참여했습니다.
20세기 중반부터 모더니즘과 제국주의, 권위주의 등을 비판하는
여러 문화 콘텐츠 중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토착민들의 이야기는
꽤 많이 접할 수 있는 서사이지만, 감독 출신부터 알 수 있듯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어두운 미래 사회에 빗대며
딸을 빼앗긴 엄마의 처절한 사투를 그립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나이트 레이더스 줄거리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
2043년 캐나다 북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세상을 지배하려는 독재국가 에머슨은
미성년 자녀들을 강제로 입교시켜 세뇌시키고 인간 병기로 길러내려
18세 미만의 자녀를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는 법까지 만듭니다.
니스카와 딸 와시즈는 도시 외곽의 우거진 숲에서 수시로 보내는 AI 드론의 정찰을 피해 살아가죠.
하지만, 식량을 구하던 중 와시즈가 덫에 걸려 큰 부상을 입게 되면서 이들의 상황도 바뀌게 됩니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딸을 위해 도시에 함께 잠입하지만,
약을 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니스카는 결국 자신의 딸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아카데미로 끌려가게 놔두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Night Raiders│감독·각본 : 다니스 고렛│출연진 : 엘레 마이아 테일페데스, 브룩클린 르텍시에 하트, 알렉스 태런트 외 多
│장르 : SF,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상영 시간 : 101분│국가 : 캐나다, 뉴질랜드│등급 : 15세 관람가
│평점 : 로톤 토마토 신선도 84% 팝콘 47%, IMDB 5.1, 메타 스코어 63점│시청 가능 서비스 : 개봉일 2022년 3월 3일
# 나이트 레이더스 평점
모성애인가, 토착민의 비극인가
다른 나라를 침략해 땅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법과 제도를 통해 원래 살아온 민족을 핍박하며
쫓아내는 제국주의의 모습이 에머슨이라는 국가를 통해 반영됩니다.
이는 인류가 반복해 온 하나의 역사로, 감독의 고향 캐나다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호주, 남아메리카 등
모두 유사한 사건들이 이어져왔다 할 수 있고,
어쩌면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 또한 이와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죠.
가상의 국가 에머슨은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입교시켜
“하나의 국가,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라는 애국 강령을 반복해 외우게 하고,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킨 채 이와 떨어진 사람들은 드론의 배급 식량 속 바이러스를 넣어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 합니다. 이것은 토착민들은 물론, 가족 간의 연결고리마저
배제한 채 하나의 역사로 통합하려는 독재국가의 모습을 띕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주제의식을 끝까지 이어가기에는 인상적인 장르 영화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크리족 출신이지만 그들과의 연결이 거의 전무한 상태로 예언을 기반해
별다른 갈등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생성하고
주 플롯은 딸을 찾기 위한 모성애를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는 극 중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개연성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흐릿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감독이 과연 파괴된 공동체를 각기 다른 개인이 다시금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이 때문인지 마지막에 보여주는 와시즈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너무나 뜬금없게 다가왔죠.
그렇기에 제국주의나 독재에 의해 파괴되고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지는 토착민 공동체의 미래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딸을 지키려는 엄마의 사투인지
명확한 설정이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현재에도 진행되는 문제점에 대한 새로운 시선, 그리고 의미를 확장하고
공유시키는 행위는 분명 의미가 있겠지만, 이를 전달함에 있어 명확함은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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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4주 최신 개봉영화(애프터 관계의 함정, 퍼펙트 스틸, 아네트,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고장난 론)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애프터관계의함정 #퍼펙트스틸 #아네트 #당신은믿지않겠지만 #고장난론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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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다" 강력한 돌직구 매력이 온다! 티빙 오리지널 [유미의 세포들 시즌2] 6월 10일 TVING 단독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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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수리남> 공식 예고편
속이면 살고 속으면 죽는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왕국 그리고 목숨을 건 생사의 비즈니스 살아남는 자 누구인가 실제로 있었던 가장 위험한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