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8-30 21:29:1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영화 <쇼잉 업>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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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영화는 엔딩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아들이 본다면 어쩔 수 없지. 아빠는 넷플릭스를 껐다. 난 지금 <오징어 게임>을 보고 있다. 난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데도 이건 보고 있다. 난 범죄물이나 스릴러물을 좋아한다. 예고에서 내 취향의 느낌이 나서 넷플릭스를 켜 재생을 시작했다. 나는 어쩔 때 취향이 넓은 사람인 척 하지만 사실 등장인물끼리 피 튀기는 걸 좋아한다. 단적으로 피 튀기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기 좋은 작품들을 좋아한다. 내가 평소에 산만한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도 영상편집하다 느닷없이 FM을 켜서 게임을 하다가 <오징어 게임>을 동시에 보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산만함. 이건 누가 와도 못 고칠 습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습관. 습관은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우리 엄마도 내 습관 전부를 고치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나 스스로도 내 습관을 고치지는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밤에 뭘 먹는 습관은 무슨 짓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 소화기약을 먹고 자면 잠에 일찍 들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잘 보일 사람이 있다면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글 쓰다 말고 밤새 딴짓을 하는 뭐 같은 습관도, 언제부턴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으면 잠이 안 오는 습관도 다 고쳐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랬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독히 산만한 인간이라 습관과 싸우는 게 유독 힘들다. 이런 나에게도 나를 바꾼 에피소드가 있다. 난 잘 보일 사람이 있었다. 무의식에 욕지거리를 한 두 마디 하던 나는 비속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 고마웠다. 이 말 빼고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렇게 고맙다는 말 많이 했었는데도 말이다. 이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도 아닌데, 사실 걸핏 보기엔 우연에 불과한데도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얻은 셈이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운명과 우연을 빗댄 영화다. 올해 <랑종>이 핫할 때 같이 상영관이 걸렸었던 작품이다. 일본 내에서는 <귀멸의 칼날>을 누르고 얼마 동안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사실 이건 그렇게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일본산 로맨스 영화를 신뢰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나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같은 영화 나는 좀 별로였다. 몰입이 안 되는 느낌? 그런데 <아사코>는 좋았다. 그런데 난 솔직히 아사코는 로맨스 영화긴 한데 그것보다 철학적인 색이 짙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일본의 로맨스 영화에 대해서는 취향이 확실했던 셈이다. 이건 필연이었다. 내가 그만큼 일본 영화에 실패를 해 봤으니 이런 판단이 들어간 것이겠지?
내 확실했던 취향만큼이나 영화는 분명한 설정을 보여준다. 아직도 이 영화를 처음 볼 때가 생각난다. 이 영화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우연처럼 취향이 비슷한 동갑내기 둘이 만나게 된다. 막차가 끊겨 처음 만나게 된 주인공. 카페에서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다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서로 같이 전시회와 노래방을 가며 서로 잘 맞는다는 걸 확인한다. 단기간에 깊게 친해진 둘은 언제 고백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결국 사랑에 성공한다. 스물하나라는 나이에 가슴 뛰는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극 중 안에는 평범남, 녀로 나오는 듯 하지만) 스다 미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훈훈한 비주얼이 이 고백하는 장면에서의 두근거림을 더 키운다. 달달한 로맨스를 살릴 수 있는 배우들의 캐스팅이 빛난 셈이다. 영화로 돌아가서, 취향이 맞는 걸 확인한 두 주인공은 매일매일이 행복하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 고양이도 키우고 동거도 하며 일상을 즐겁게 보냈다.
근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두 가지의 사건이 분기점이 돼서 둘은 소원해진다. 처음은 남자 주인공 무기의 일러스트레이터 일이었다. 벌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자 회사에 취업하게 된 무기. 야근에 야근이 겁쳐 XBOX로 게임도 못하고 미라 전시회도 못 가며 그림 그릴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해 둘의 사이는 소원해진다. 다른 사건은 키누의 '하고 싶은 일'에 관한 것이었다.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벤트 기획업체에 취업하게 된 키누. 안정적인 원 직장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곳에서 돈을 벌기 시작한 키누를 무기는 못마땅해한다.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첫사랑이 이어지고 4년이 지나자 둘은 이별을 결심한다. 우연처럼 시작했던 두 사람이지만 필연을 피하지 못하고 현실에 부딪혔다. 헤어진 둘은 서로를 저주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축복한다. 우연과 운명으로 시작했던 사랑이 결국 이를 부정하며 끝났다. 원래 영원한 건 없다.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는 것이다. 무슨 달콤한 말을 해도 영화의 엔딩은 정해져 있었다. 난 이 둘이 실존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시원섭섭함이었다. 가령 영화의 한 장소에서 둘이 껴안는 엔딩신이 있다. 이 영화에 300% 몰입하며 본 나는 무기의 관점에서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느꼈다. 난 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질 않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그런데 끝났다. 무기는 키누와 마주치지 않는 손인사를 건네고 그렇게 각자의 새로운 연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러닝타임도 끝났다. 마지막 막이 내려가는 순간에도 사실 상영관 밖을 못 나왔던 것 같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당연한 사랑이야기에 참 깊게도 몰입했다. 영화는 러닝타임이란 게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간관계도 그렇다. 취향이 같다고 해서 영원한 사랑이 될리는 없으며 결국 둘 중 한 명은 서로를 떠나야 한다. 내가 이 영화 상영관에서 버틴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 것처럼.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딱 붙잡고 일어섰다. 그래. 영화건 소설이건 드라마건 좋다고 생각한 것에 여운이 오래 남을 수도 있지. 문을 열어서 밖을 나섰다. 길거리에 마스크 낀 수많은 커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턱을 괴고 땅바닥에 앉아 가만히 바라봤다. 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봤던 CGV 옆에는 꽃집이 없다. 이발소와 옷가게가 있다. 어차피 나는 저기서 평소에 머리 안 자른다. 그리고 저기 옷가게들은 여자 옷을 판다. 맞은편에는 피부과가 있다. 바라보기 좋은 공간이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세상을 바라봤다. 어차피 내 인생에서 시작과 끝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인생은 꽃다발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확 아름답게 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쳐온 개화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알았다. 갑자기 드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집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느낀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것? 나에게 꽃다발이 되어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난 정말 많이 변했다. 피고 지는 걸 반복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N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정신상태가 비슷하길 원한단 말인가. 이건 다들 똑같을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나는 항상 끝이 분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꽃같이 아름다운 사람에게 많은걸 받으면서 살았다. 이 과정이 아름다웠냐. 아니다. 나는 추해지고 멍청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세게 찰 만큼 창피한 뭐 그런 기억 말이다. 심지어 무엇이든 끝이 있으니 우리 인생은 참으로 심심한 셈이다. 그래도 정말 중요한 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매일이 즐겁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무기와 키누가 정말 매일매일 행복했을까. 아닐 것이다. 언제는 싸우기도 했겠지. 당연한 사실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남는 건 꽃다발같이 아름다웠던 시간이다. 질 때도 필 때도 있는 게 사람이다. 무엇이든 받아들인다면 편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느낌이다. 꽃을 이쁘게 전시하려고 화분을 직접 만들어 낸 느낌인 셈이다. 시들면 어때. 난 여기서 풍기는 향기 때문에 언제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는걸. 잘 보이고 싶어 비속어를 섞지 않게 됐는걸.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걸 위해서 사람은 물도 주고 햇빛도 줘야 한다. 끝이 있지만 나와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건 이렇게 꽃이 피고 지는것처럼 아름다운 시간이다. 어차피 이거 이 글을 읽는 몇 안 되는 독자들이라면 다 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구하고 유념해야 하는 건, 분명한 끝이 있다면 이들에게 웃는 모습으로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라는, 뭐 그런 거다. 웃으며 기억하자. 그리고 보내주며 스스로에게 되뇌자.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아름답게 활짝 피어날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난 과거의 내 사진을 보며 기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변했다. 이런 나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하며 산 셈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 되어준 이들이 이 글을 볼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의 해피엔딩이 되어줘 참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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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비할수록 채워지는 이상한 마법을 손끝으로 느껴본다면
※영화 〈시티 라이트〉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낡고 펑퍼짐한 양복과 맞지 않는 모자, 지팡이뿐인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길모퉁이에서 꽃을 팔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에게 부토니에를 사려했을 때 남자는 알게 되었다. 소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잠깐의 만남 이후 그는 길 위의 삶을 그만두기로 한다. 대신 자신을 위해 웃어주는 한 사람을 위해 살기로 마음먹는다.
20세기 문화예술을 말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되는 최고의 예술가이자 감독, 제작자 찰리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는 사랑에 빠진 눈먼 소녀를 지키기 위해 가난한 남자가 벌이는 고군분투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다. 로맨스 장르에는 언제나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는 중세 기사도 문학인 ‘로망스’부터 시작되었다. 기사와 귀부인이라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플라토닉 사랑을 자아낸다. 닿지 못하는 사랑의 결실은 곧 귀족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수호하는 매뉴얼이 된다. 명예와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금욕적인 기사도의 원형은 당대의 사회 질서를 지배했다. 이후 로망스가 로맨스 소설로 변화하면서 ‘낭만적 사랑’의 서사가 등장하고, 현대에 와서는 사라진 신분과 계급 대신 다양한 심리적, 물질적 장애물로 세분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가로막은 집안과 신분을 지난 현대의 작가는 사장과 평직원, 북한의 장교와 남한의 유명 배우, 심지어는 도깨비와 인간 사이의 장애물까지 만들어낸다. 독자, 시청자, 또는 관객은 이 미끄러지는 위치와 관계에서 발생하는 정보의 격차로 발생하는 오해와 편견, 이별과 재회에 이목을 집중한다. 하지만 로맨스 장르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사랑과 이별에 갈등하고 위기를 맞는 이들은 결국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라는 우연 혹은 필연으로 재회하고, 행복한 결말을 이룬다. 롤러코스터처럼 종잡을 수 없는 갈등의 연속에도 이미 독자는 이 바람 잘 날 없는 사랑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품는다. 독자는 로맨스 안에서 현실과 다른 환상적 사랑의 결실을 바라기 때문이다.
과거의 로맨스는 주로 우월적 지위의 완벽한 남성이, 그보다 낮은 지위의 선량하지만 수동적인 여자 주인공을 구원하고 해방하는 드라마였다. 이는 현대의 로맨스 장르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법칙이다. 다만 그 안에서 여러 설정과 관계성의 변주를 준다. 앞서 언급했던 도깨비와 인간의 사랑처럼 믿을 수 없는 능력의 탈인간을 남자 주인공으로 설정하거나,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근대의 조선 양반집 여성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로맨스 장르에서 특징 중 하나는 한쪽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의 결핍이 서로 마주하며 성장해 동등한 지위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여성 캐릭터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이제 로맨스의 여성은 과거의 인습에 따라 ‘도덕적 미덕’을 구현하는 존재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고 주체적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 무조건 선량하거나 씩씩한 캐릭터도 아니다. 좌절과 절망, 탐욕과 부정을 숨기지 않기도 하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거침없이 행동한다. 과거 남성과 여성의 구도가 전복되기도 하며 미스터리, 공포, 판타지 등 다양한 장르와 결합해 확장된 장르의 변용과 해체도 이루어진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현실적 인식과 다양성의 확장이 맞물린 로맨스의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연대와 성장의 길로 함께 들어서는 관계가 된다.
〈시티 라이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마법에 빠진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이 무조건적 선의와 환대의 가치는 유성 영화의 시대에 들어선 1930년대를 마주 선 찰리 채플린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결된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하는 남자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단벌 신사다. 평소처럼 길을 걷다 첫눈에 반한 소녀는 소리만 듣고 우연히도 고급 자동차에서 나오는 부유한 남자와 그를 착각한다. 남자는 당황하지만 소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사정은 본인도 마찬가지기에 여느 때처럼 방황하며 고민을 하던 중 강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한 남성을 구한다. 그는 이 도시의 백만장자였고, 목숨을 살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찰리 채플린을 금세 친구로 사귀고 집으로 초대한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술을 즐기는 이 백만장자는 찰리의 여러 사정을 묻지 않고 통 크게 그를 환대한다. 소녀를 돕기 위해 돈을 건네주기도 하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 등 선의를 베풀어 준다. 불의의 사고로 그와의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성영화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 1930년대 음향 기술의 도입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사회의 부조리에도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부의 불평등과 인간의 가치 하락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써 영화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도시의 불빛에 휘청거리는 소시민을 연기한다. 소녀의 집세와 개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얻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안타까움 속에 담긴 익살스러운 슬랩스틱에 담겨 웃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을 자아낸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 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 신세가 되어서야 소녀에게 돈을 쥐여줄 수 있던 그의 마음은 오로지 한 곳으로 향한다. 자신도 변변치 않은 현실에도 소녀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일대기는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의 무성영화가 주는 그 울림과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내려는 감독 찰리 채플린의 심정과 닮았다.
이 영화를 말할 때 헬렌 켈러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찰리 채플린과 그의 짧은 만남은 영화의 스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찰리 채플린과 헬렌 켈러는 국가의 억압과 독선에 당당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대중과 미디어에 비치는 헬렌 켈러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딛고 삶을 이어 온 투혼의 인물’ 정도였다. 모두가 행복한 동화 속 헬렌 켈러의 삶은 그의 스승 설리번 선생님과의 유대관계와 우정, 박애와 사랑의 성녀, 그 정도뿐이다. 정말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철저히 가려지고 윤색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 켈러는 서른 살까지의 인생까지다. 알려지지 않은 그는 공산주의 사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고,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당에 입당해 여성과 노동자, 유색인종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웠다. 여러 신문의 칼럼과 저서로 부정의한 사회로부터 투쟁해 온 헬렌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장애인과 사회복지 운동 외의 다른 운동에 투신하는 것을 싫어했다. 대중이 정해놓은 성스러운 이미지로 ‘숭배’ 해야 하는 ‘천사’가 정치 세력에 옮아 ‘불순한’ 사회운동을 하다니. 견디지 못한 언론은 그를 향해 십자포화를 날렸다. 장애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과거에는 ‘삼중 장애의 역경을 딛고 세상에 나온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비난의 대상이 된 이후 ‘세상 물정 모르는 장애 여성의 치기’로 격하한 언론의 이중성은 극에 달했다. 장애를 단지 극복해야 할 비정상적 양태로 바라본 편협한 시각은 등을 돌렸을 때 더욱 모진 차별과 비난의 무기로 활용되었다.
찰리 채플린도 같은 곤경에 처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과 빈곤의 굴레를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한 그의 영화는 냉전 시대의 광풍 앞에 ‘공산주의적 선동’으로 몰린다. 소아성애자라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는 결국 미국을 떠나 이민을 간다.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사회의 진보를 위해 투신했던 헬렌의 삶에 감명을 받은 찰리는 〈시티 라이트〉에서 도시의 불빛을 볼 수 없던, 아니 도시의 따가운 시선에 가려진 한 소녀가 선한 의지와 노력으로 결국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사적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영화 줄곧 원경에서 시민들의 군상, 그 안의 찰리 채플린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았던 카메라는 눈을 뜬 소녀가 그의 얼굴이 아닌 손끝으로 남자를 알아보는 장면에서 또렷이 서로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관객은 무조건적 희생과 사랑의 연대라는,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어 보이던 가치를 묵묵히 이어나간 끝에 마침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두 사람의 표정을 만난다. 고난 끝에 찾아온 행복이 현실이 되기 바라는 감독의 간절함은 참고 참다 마지막에 드디어 시선을 가까이 두는 탁월한 완급조절로 드러난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도 없는 ‘평화와 번영’ 동상 위에서 대범하게 잠을 청하는 유쾌하고 날카로운 찰리 채플린의 시선은 이렇듯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마음을 울리는 직접적인 메시지로 표출한다.
우리는 사랑과 연대가 가진 힘을 알고 있다. 저 큰 도시 한 구석에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동상 하나 세운다고 그 가치는 실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몸부림이겠지만, 자신의 곤궁함을 받아들이면서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몸이 오히려 가장 시대의 변화를 추동하는 상징으로 내세울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상이 아닌 행동이다. 우리의 진가는 사회에 겉돌고 외면받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지난달부터 우리는 서아시아의 한 나라가 무너지는 장면을 바라봤다. 한순간에 억압의 과거로 퇴보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타인을 포용할 만큼 충분히 밝은 도시의 불빛에 비해 비좁은 시민들의 인식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세상의 불의와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만다. 사회에 내 집 하나 없이 무시당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해학을 담아 웃음과 눈물을 만든 찰리 채플린은 영화 내내 웃지도 않고 전 세계의 관객을 웃겼다. 어쩌면 우리는 난민과 이주민을 카메라 뒤편에서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닫힌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꺼이 카메라를 들고 가까이 줌을 당겨 그들을 만나고 손을 잡는 것이다. 다정함은 세상을 구한다. 그래야 절망 앞에 웃을 수 있고, 선의지를 담은 표정으로 타인을 반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마침내 행복을 찾은 남자의 이름은 리틀 트램프, 작은 방랑자이다.
※ 이 글은 파랑달의 브런치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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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내가 죄 짓고 살지 말랬지”
황정민과 정해인의 진하고 강렬한 리얼 액션으로 가득한 <베테랑 2>의 메인 예고편이 공개되었습니다.
코미디 요소가 강했던 1편과 달리, 이번 영화는 더 어두운 하드보일드 성향이 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베테랑2>는 추석을 앞둔 9월 13일 개봉 예정입니다.
줄거리
가족들도 못 챙기고 밤낮없이 범죄들과 싸우는 베테랑 형사 '서도철'과 강력범죄수사대 형사들. 어느 날, 한 교수의 죽음이 이전에 발생했던 살인 사건들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며 전국은 연쇄살인범으로 인해 떠들썩해진다. 강력범죄수사대는 서도철의 눈에 든 정의감 넘치는 막내 형사 '박선우' 를 투입한다. 그리고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베테랑2> 에 새로 캐스팅된 정해인은 극중 온라인상 UFC 경찰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할 만큼 순간적인 판단 능력과 고도의 무술 실력을 갖춘 박선우 역을 맡았다고 밝혀지면서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8월 4째 주 씨네뉴스 함께해요!
AI로 고인 되살린 <에이리언: 로물루스> 논란
지난 8월 14일 개봉한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2년 전 별세한 배우를 인공지능(AI) 기술로 되살린 것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에서 ‘빌보’ 역으로 알려진 배우 이안 홈은 1979년 개봉한 <에이리언>에서 인조인간 ‘애쉬’로 출연한 바 있습니다. 이번 신작에서 4년전 고인이 된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AI로 재탄생 시켜 일부 관객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파일럿> 400만 관객 돌파
조정석 주연의 <파일럿>이 4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가 파격 변신 이후 재취업에서 성공하며 벌어지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조정석은 감사 손편지를 통해 “<파일럿> 400만 관객 여러분 ! 너무 너무X100 감사합니다”라며 진심 어린 무한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최민식 “티켓값 내려야 ” 발언에 다시 불붙은 영화 티켓값 논란
영화 티켓 가격을 둘러싼 논란이 배우 최민식의 발언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최민식은 지난 17일 MBC 대담 프로그램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해 “극장 티켓 값이 많이 올랐는데, 좀 내렸으면 좋겠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갑자기 확 올리면 나라도 안 간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에 대해 일부는 찬성하는 반면, “배우 출연료도 내려야 한다”며 다른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어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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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장악한 공포, 의외의 타격감.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의 나열 속 어떤 공간이 보이고 알 수 없는 것들에서 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나아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하고 있는 것들을 지나다 보면 출구 없는 곳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의 반복과 점점 새어 나오는 기억들이 “Us’를 불러들인다. 그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두려움에 싸여있는 애들레이드는 그 장소가 마냥 두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서 그 장소로 나서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안함에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인 그들이 개인적인 공간인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다. 그림자로 불리는 이들이 빛을 받으며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행동하는 것은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당연한 것에서 오는 폭력은 그들이 인지하지 못한 존재에 의해 원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지면서 더욱 몸집을 불린다. 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들의 존재가 발견되면서 이곳을 나서고 잘라내려는 이들과 벗어나려 하는 이들로 갈라진다. 그림자 같은 존재들의 움직임과 마주 잡은 손만으로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공존할 수 없는 그들의 세상을 드러 낸다.
어떤 놀라움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고 신선한 충격을 준다. 영화 ‘어스’는 정확한 문제의식의 공포와 소재 자체의 공포를 맞물리게 하여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겟 아웃'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의심할 새도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를 들여다보면 영화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압도적인 몰입감과 공포스러움에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연출력이 정말 인상적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진실의 힘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미국 사회에서 펼쳐지는 어떤 두려움의 존재가 사실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진짜와 가짜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왔지만 정작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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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의 카메라는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멈추지 않는다
- 8★/10★
〈노 베어스〉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첫 번째는 이란의 영화감독 자파르 파나히의 이야기다.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출국금지 상태(이는 영화 속 영화 속 설정일 뿐 아니라 영화 밖 감독의 현실이기도 하다)인 그는 국경을 맞댄 튀르키예에서 촬영 중인 영화를 찍는 중이다. 출국금지 조치로 원격으로 디렉팅할 수밖에 없는 그는 인터넷이라도 끊기면 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 그나마 촬영장에서 가까운 국경 마을에 머물며 어찌어찌 촬영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감독이 촬영 현장에 없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하고 불편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와 연루되었다가 괜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고, 그의 말과 행동이 마을의 전통과 어긋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파나히가 연출하는 영화의 주인공 박티아르와 자라다. 이들은 영화 안에서도, 현실에서도 유럽으로의 밀항을 꿈꾼다.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이야기 역시 현실에 걸쳐 있다(영화 ‘밖’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라를 연기한 배우 미나 카바니는 노출 연기를 했다는 이유로 포르노 배우로 비난받아 10년째 망명 중이다). 영화 속에서, 박티아르는 자라를 위한 위조 여권을 구하지만 자신의 여권을 구하지는 못하고, 자라는 박티아르를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다고 선언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밀항을 시도하려는 두 사람이 자신의 계획을 파나히에게 밝히자 감독은 이 과정을 촬영하게 해달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자라의 위조 여권만 구해지자 그녀는 박티아르를 두고 갈 순 없다며 자신이 극 중에서 내린 선택을 반복한다. 그러고는 희망 없는 현실에 좌절해 자살한다.
마지막은 파나히가 머무는 마을의 남녀 솔두즈와 고잘 이야기다. 고잘은 마을의 전통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남자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다 반정부 시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솔두즈와 사랑에 빠진다. 마을 사람들은 둘의 수상한 기류를 눈치챈다. 그러고는 파나히에게 사진을 요구한다. 틈틈이 마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어온 그의 카메라에 솔두즈와 자라가 연인이라는 증거가 담겼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파나히는 자기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모습이 찍히지 않았다고 거듭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심지어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세 이야기의 중심에는 카메라가 있다. 파나히에게 카메라는 코란만큼 신성하다. 마을 사람들의 맹세 요구에 코란 대신 카메라로 자기의 증언을 촬영하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카메라는 진실을 보증하는 가장 권위 있는 도구다. 정부의 핍박에도 영화 촬영을 이어가는 것 역시 그가 카메라에 부여하는 의미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파나히 카메라의 권위는 자꾸 흔들린다. 박티아르와 함께 밀항하는 것이 좌절되자 자라는 파나히의 카메라를 비난한다. 박티아르의 여권이 가짜인 것을 속이고 자신만 출국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억지 희망 강요일 뿐이라는 일갈이다. 이는 파나히의 카메라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닌 감독이 원하는 진실을 담아내는 수단이라는 고발이기도 하다.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은 감독의 지향이 어떻게 현실을 배반하는지를 톺는 자기 성찰적 장면이다. 파나히가 카메라에 담은 진실은 누군가를 위험하게 만들기도 한다. 파나히의 카메라에 솔두즈와 고잘의 사진이 담겼을지도 모른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심은 극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마을 사람들에게 파나히의 카메라는 ‘진실을 숨기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카메라로 부당한 현실을 드러내고 변화를 촉구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의 복잡한 지층 속에서 그의 카메라는 작위적 미래를 그려내는 수단일 때도 있고, 폭력을 유발하는 촉매일 수도 있다. 파나히 역시 이를 알고 있다. 극 영화와 자전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혼재된 이 영화에 그가 자기 작업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소환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진실과 자유의 위대한 수호자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권력자의 허황된 위협을 상징하는 곰은 존재하지 않음(‘no bears’)을 고발하는 고고한 저널리스트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는 현실의 질곡 속에서 의도치 않은 효과가 나더라도, 그저 카메라로 무언가를 해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을 뿐이다.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솔두즈와 고잘의 시신을 지나쳐 마을을 떠나던 중 그가 브레이크를 밟는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 건, 앞으로도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대더라도 자신이 추구하는 윤리를 카메라로 말하길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곰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위안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더라도 곰 없는 길을 카메라에 담아내길 멈추지 않겠다는 파나히의 의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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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과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절망 속 이야기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초청받아 시사회 참석해 관람한 작품입니다.
<더 웨일> 포스터 [출처: 씨네랩 제공]
힘든 삶의 단편을 비추는 영화
영화 <더 웨일>은 소수의 등장인물과 주인공인 찰리의 집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영화이다.
그리고 찰리의 마지막 일주일을 하루씩 보여주는 영화의 흐름은 그만큼 주인공의 삶에 깊이 들어가도록 만든다.
주인공 찰리는 9년 전 결혼한 아내와 8살 딸을 둔 채로 동성 애인과 사랑에 빠져서 가족을 떠난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 동성 애인은 세상을 떠났고 찰리는 그 충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더 웨일>은 최근 연인을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져서 초고도비만에 다다른 찰리의 삶을 보여준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 역시 모두 찰리와 다른 방식으로 힘들게 이어지고 있는 삶들이다.
고혈압으로 목숨이 위태롭던 순간 우연히 찰리의 집에 방문한 토마스는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단 교회의 선교사이다. 그리고 찰리가 9년만에 다시 연락한 찰리의 딸 엘리는 학교에서 낙제점을 받기 직전이며 삐뚤어진 학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고도비만의 동성애자, 눈치없는 종말론자, 반항적인 SNS 중독의 비행청소년.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인물들을 가장 평범한 사람들로 등장시킨다. 사별한 주인공, 선한 마음으로 도우려는 이웃, 아빠와 갈등을 겪고 있는 딸. 이들의 삶은 다른 이유로 힘들고 영화는 힘든 삶을 살아내면서 서로 얽혀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더 웨일> 스틸 컷(찰리, 토마스, 엘리) [출처: 씨네랩 제공]
가장 좋은 해결책 솔직함
영화에서 주인공 찰리는 대학에서 에세이를 가르치는 강사이다. 원격으로 강의를 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카메라가 고장난 척 검은 화면으로 이야기한다.
이후 찰리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딸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모아둔 재산을 모두 줄테니 한번씩 들러서 에세이 쓰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데, 반항적인 딸에게 그가 제시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다. 솔직한 생각을 적을 것.
앞서 이야기 했던 인물들인 찰리, 토마스, 엘리는 모두 솔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찰리는 살이쪄서 거대해진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고, 토마스는 사실 교회에서 활동비를 훔쳐서 가출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엘리는 찰리에 대한 그리웠던 마음을 숨기고 있다.
영화는 이들이 숨기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그들을 솔직하게 만들고 그로인해 그들이 스스로 위안을 얻으며 스스로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가 현실적인 부분은 이들이 솔직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찰리는 가르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 피자를 배달해주는 배달부에게도 절대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배달부는 단골 손님인 찰리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하거나 걱정을 하는 등 꽤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다 어느날 평소처럼 우편함 안에 있는 돈으로 계산을 하고 배달부가 돌아갔을 거라 생각해 밖으로 나온 찰리는 아직 계단에서 기다리던 배달부를 마주한다.
제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거대한 몸집으로 피자들 들고 들어가는 찰리를 본 배달부의 표정은 마치 괴물을 본 것만 같다. 이전까지 호의적이던 배달부의 태도는 찰리의 겉모습을 보는 순간 혐오로 가득하다.
솔직하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이 불러온 결과를 본 찰리는 분노에 차서 집안에 있는 음식을 마구잡이로 입에 우겨넣고 급격한 폭식에 토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 분노는 스스로 드러낸 솔직함이 아닌 발가 벗겨진 것에 대한 공포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 그 분노는 홧김에 대학 학생들에게 같잖은 에세이는 때려 치우고 솔직하게 쓰라는 욕설 섞인 충고를 단체 메시지로 보내는 데에 이른다.
다음날 찰리의 솔직한 욕설 메시지에 정말 솔직한 답장을 보낸 몇몇 학생들의 모습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찰리는 감춰왔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후련하게 에세이 강사를 그만두게 된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해당 장면 이후에는 찰리가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장면은 더 이상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토마스의 경우도 완전한 타의에 의해서 가장 숨기고 싶던 것이 밝혀지고 의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정직함을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영화는 혐오스런 인물들을 통해서 사실 이들 역시 이렇게 된 힘든 과정이 있었고 이들이 자의든 타의든 솔직한 자신을 드러냈을 때 우리가 희망과 사랑으로 받아준다면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여러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더 웨일> 스틸 컷 [출처: 씨네랩 제공]
희망과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절망 속 이야기
영화에서 찰리는 엘리에게 사랑을 전하려 한다. 찰리가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한 가지는 딸 엘리에게 스스로가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다.
찰리는 이전에도 종교가 삶의 전부였던 애인 앨런이 삶에 대한 의지를 잃었을 때 아낌없는 사랑으로 그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만큼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떠나면서 챙겨주지 못했던 딸 엘리에게 남아있는 긍정과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가장 절망적이여야 하는 인물이 건네는 사랑을 우리는 영화 내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는 조금 걸어다는 것 조차도 보조기구가 있어야 하지만 빠짐없이 창문 밖에 지나가는 새를 위해 과일을 놓아두는 사람이고, 자신의 애인을 파멸로 이끌었던 종교에서 선교사가 찾아와도 좋은 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병원비를 아껴서 딸에게 미래에 바로 설 수 있는 희망을 건네고, 자신을 욕하는 딸의 SNS 문장에서 촌철살인의 글쓰기 실력을 칭찬한다. 이것이 삶을 놓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인 것일까?
찰리의 고단했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끝이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지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선택 역시도 큰 슬픔이 그를 덮친 것일 뿐 오로지 그의 탓이라 하기는 힘들다.
찰리는 이런 결정을 유일하게 도와주는 인물이 있는데, 하지만 이를 아는 보호자이자 전담 간호사이며 떠난 애인의 동생이던 리즈이다.
리즈는 다른 인물들과 좀 다른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떠나간 찰리의 애인이 리즈의 오빠이고 찰리와 함게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그 때문인지 리즈는 찰리를 가족처럼 돌봐주면서도 그가 폭식을 일삼는 것을 말리지 못한다. 아마 찰리가 긍정적임에도 삶을 떠나기로 한 것처럼 리즈 역시 살아가는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찰리의 죽음을 암시하며 끝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떠오른 인물은 리즈였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찰리가 영화 내내 잠겨있던 절망은 끝나지 않았다. 같은 절망을 겪은 리즈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찰리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영화가 끝나서 이후 그녀의 삶은 알 수 없지만 내심 그녀가 잘 견뎌주길 바라게 되는 결말이었다.
<더 웨일> 스틸 컷(리즈) [출처: 씨네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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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5주 최신 개봉영화(고스트 버스터즈 라이즈, 라스트 나잇 인 소호, 베네데타, 킬링 카인드, 태일이)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1월 4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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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버스터즈라이즈 #라스트나잇인소호 #베네데타 #킬링카인드 #태일이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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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분노의 추격자> 메인 예고편
아내가 사라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귀갓길, ‘윌’(제라드 버틀러)이 주유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 ‘리사’(제이미 알렉산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소한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고 증발한 ‘리사’ ‘윌’이 그녀를 찾기 위해 분투할수록 드러나는 증거들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최악의 상황! 그녀를 찾을 때까지, 추격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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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귀멸의 칼날 : 주합회의,나비저택 편> 메인 예고편
‘탄지로’와 ‘네즈코’는 귀살대 중에서도 최고의 계급인 지주들 앞으로 끌려간다.
탄지로의 죄명은 ‘대율 위반’- 특히, 혈귀인 네즈코를 죽이지 않고
동행한 혐의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귀살대의 당주 ‘우부야시키 카가야’에 의해 위기를 넘긴 ‘탄지로’는
‘젠이츠’, ‘이노스케’와 함께 지난 ‘나타구모 산’에서의 전투 이후 입게 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비저택에 머물며 기능회복 훈련에 돌입한다.
한편, ‘나타구모 산’의 일로 분노한 ‘키부츠지 무잔’은 하현들을 소집하는데…
우리의 사명은 하나! 혈귀 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