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9-01 09:34:55
건달, 작가, 밀수꾼, 첩보요원 조인성 그는 대체!
[극장]에서는 밀수꾼, [디즈니+] 에서는 첩보요원! 조인성 배우는 캐릭터의 폭이 다양하고 넓은 배우 인데요. 첩보원, 밀수꾼, 작가, 영화와 드라마 로맨스, 액션까지 못하는게 없는 보기만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조인성의 대표 필모그래피 같이 함께 살펴봐요!
클래식
같은 대학에 다니는 지혜와 수경은 연극반 선배 상민을 좋아한다. 하지만 호들갑스런 수경이 상민에게 보낼 편지의 대필을 부탁하고, 지혜는 수경의 이름으로 상민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지혜의 편지로 맺어진 수경과 상민이 가까워지면서 지혜는 괜한 죄의식에 상민을 멀리 하려 하지만, 우연하게도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
비열한 거리
삼류조폭조직의 2인자 병두. 조직의 보스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틈에서 기회한번 잡지 못하는 그는, 별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있다. 병든 어머니와 두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에게 남은 것은 쓰러져가는 철거촌 집 한 채 뿐. 삶의 무게는 스물아홉 병두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무빙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폼 나게 살고 싶었던 태수는 우여곡절 끝에 권력의 설계자 한강식을 만나 핵심 라인을 타고 승승장구 하게 된다 정권이 교체되는 중요한 시기, 새로운 판을 짜며 기회를 노리던 이들 앞에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치는데…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유년시절 부모로부터 버려지고 첫사랑에 실패한 후 의미 없는 삶을 사는 남자와 부모의 이혼과 오빠와의 결별, 갑자기 찾아온 시각 장애로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사는 여자가 만나 차갑고 외로웠던 그들의 삶에서 희망과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
괜찮아 사랑이야
작은 외상에는 병적으로 집착하며 호들갑을 떨지만 마음의 병은 짊어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보는 이야기
모가디슈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모가디슈를 탈출하려 하는데
밀수
평화롭던 바닷가 마을 군천에 화학 공장이 들어서면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해녀들. 그러던 어느 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며 거대한 밀수판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무빙
초능력을 숨긴 채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과거의 아픈 비밀을 숨긴 채 살아온 부모들이 시대와 세대를 넘어 닥치는 거대한 위험에 함께 맞서는 초능력 액션 히어로물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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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 스나이퍼 VS 스나이퍼 밀리터리 이야기 [밀덕리뷰/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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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워크 먹여살리기??? https://toon.at/donate/637245550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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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디아나 존스 : 운명의 다이얼> 30초 예고편
레전드가 선사하는 역대급 액션 클라이맥스?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한계란 없다! 6월 28일, 레전드 액션 어드벤처의 귀환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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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썬더 포스>
[2021년 4월 9일 넷플릭스 공개]
슈퍼빌런이 넘쳐난다. 싹 쓸어버리자! 어린 시절, 악당들을 혼내주자던 두 친구.
그 중 한 명이 초능력자가 되는 방법을 개발하고,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은 얼떨결에 한 팀이 된다. 도시를 지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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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호> 도전적인 밑그림을 덮은 무미건조한 채색
2092년, 지구의 환경오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우주 위성궤도에 만든 새로운 보금자리 UTS로 향한다. 그러나 UTS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적인 관계로 돈이 부족한 많은 이들은 지구에 그대로 남거나 우주를 떠돌며 힘겹게 살아간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인 ‘태호’(송중기), ‘장선장’(김태리),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도 가족과 동료들을 잃은 파란만장했던 과거는 뒤로 한 채 돈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살아간다. 어느 날, ‘승리호’는 사고 우주정에서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박예린)’를 발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음모를 깨달은 뒤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승리호>는 보는 재미가 확실하다. 우주선 내부나 우주 도시의 거리, 클럽, 도박장, 우주선 수리장처럼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낸 세트 미술은 미래의 세계관에 자연히 빠져들게 만든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비교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우주선들의 추격전과 액션은 <신과 함께> 이후 한국의 CG 기술력이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방증처럼 보인다. 전작인 탐정 홍길동처럼 본래 만화와 현실을 오가는 과장된 영상미를 보여주던 조성희 감독이기에 UTS의 마을이나 설리반의 사무실처럼 CG가 살짝 어색한 장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주얼 측면의 성과는 영화가 극장에 걸리지 못한 현실이 야속할 정도다.
하지만 시각 효과를 잠시 제쳐둔 채 "<승리호>가 최초의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성공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승리호>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 재해석을 보여줄 때 할리우드의 기존 문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문제를 노출한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영화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사실 영화 장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국내에서 인기가 없다.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32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고, 그 이후 시리즈는 100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MCU에 속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도 270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으며 <스타트렉> 시리즈도 100만을 간신히 넘는다. 이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적인 영화의 대명사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실제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1941년 SF 작가이자 평론가인 윌슨 티거가 최초로 사용했는데, 이는 서부극을 뜻하는 호스 오페라(horse opera)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서부극을 구성하는 이른바 '미국적' 토대는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개척주의 혹은 팽창주의다. 우선 서부극의 주인공은 대게 독선적이고 개인적인 반-영웅이다. 기존의 규범과 규율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해 사람들을 구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이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 루크 스카이워커, 아나킨 스카이워커, 한 솔로, 레이 등은 하나 같이 선대의 가르침, 제다이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이나 판단을 쫓는 경우가 많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팀원들도 스타로드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타노스를 때린 것처럼 개인적인 돌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스타트렉>의 커크 선장도 마찬가지다.
또한 서부를 개척하고, 혼돈과 질서가 없다고 여겨진 땅을 문명화하는 이야기를 보여줬던 서부극은 흔히 미국인의 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서부로의 개척주의, 팽창주의가 영화에 투영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페이스 오페라는 말이 우주선으로, 미국 서부의 평야나 사막이 우주와 행성들로, 미국의 원주민을 외계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1960년대에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런티어(new fronier)'를 외치며 미국 서부를 전 세계, 심지어 달로 확장시킨 것처럼 동시대에 제작된 <스타트렉>에서도 미국(U.S.)을 상징하는 U.S.S. 엔터프라이즈 호는 우주 각지를 탐험한다. 이러한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의 전통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에서 백인, 흑인, 황인 가리지 않고, 또한 지구인과 외계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의 피지배자로 근현대 시기를 보냈던 한국인에게 본질적으로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단순히 화면에 태극기를 보여주거나 '승리호'라는 우주선 이름을 한글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미국적 기반에 토대를 두지 않는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승리호>는 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우선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에서 탈피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통역기를 사용하며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나이지리아 피진어 등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그 외에도 미국의 개척, 팽창주의에 대한 반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인공들이 우주 쓰레기 처리선을 타고 다니는 장면, 거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유층만 사는 우주도시와 황폐화된 지구를 오가는 초반부 장면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에 다다른 풍경에 대한 상상화를 그려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의 폐해를 비판한다.
이는 생태주의적 접근과도 궤를 같이 한다. 서부 개척을 화성 개척과 등치시키며, 자연을 개발하고 소비한 뒤 새로운 개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63 빌딩이 미세먼지로 뒤덮인 가운데 더 높은 빌딩들이 서 있는 서울을 보여주는 오프닝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주된 갈등이 도로시를 죽이려는 설리반과 지키려는 승리호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가운데, 이 갈등이 지구를 파괴하고 화성으로 이주하는 설리반과 지구들 되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주인공들의 대조를 이루는 선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다. 또한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도로시 캐릭터 자체가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을 담은 존재이기 때문에 태호가 과거에 딸을 잃은 기억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전개는 나름의 설득력을 갖추기도 한다.
한편 <승리호>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개인주의적인 영웅 서사를 거부한다. 실제로 빌런과 승리호 일행이 대면하는 구도는 언제나 일 대 다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설리반이 승리호 내부로 들어와 그들을 직접 제압하는 장면이나, 카밀라가 우주 공장 내부에서 승리호 일행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초반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던 서로 다른 국적의 우주 쓰레기선 승무원들, 서로 믿지 못하던 검은 여우단과 승리호 선원들이 힘을 모아 설리반의 음모를 막는 데서도 영화가 중점을 둔 대목을 눈치챌 수 있다. 이때 상술한 통역기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따라서 <승리호>의 세계관, 큰 그림, 밑그림은 분명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승리호>가 기존의 할리우드 문법을 사용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승리호>의 장면들을 디테일하게 뜯어보면 기시감을 피할 수는 없다. 액션의 경우, 업동이가 우주선을 오가며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토르: 라그나로크>,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무기 안에 잠입하는 전개는 <스타워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주 쓰레기 혹은 운석 지대와 같은 장애물 지대로 들어가는 것 역시 수십 년간 애용된 클리셰다. 미래의 우주를 그려낸 디테일한 설정도 마찬가지다. UTS의 설정이나 모양새는 <엘리시움>의 설정이나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등장한 스카리프 행성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매끈하고 날렵한 할리우드 영화의 우주선"과 다르다는 일각의 평가 역시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전투기의 만듦새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도 마찬가지다. 능글맞은 파일럿, 강력한 여전사, 신체적 능력과 별개로 순박한 인물, 유머와 위기 탈출을 책임지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조합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다. 이는 전작에서 보인 배우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제각각 다른 과거를 지닌 이들이 승리호라는 우주선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묶이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보듬아 준다는 전개 또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와 일치한다. 주인공 일행을 매번 위기에 빠뜨리는 여성 서브 악역의 존재, 인간성을 말살한 소년병을 양성해 UTS 기동대로 활용했다는 설정은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 속 스톰트루퍼를 연상시킨다. 결국 미장센이나 디테일한 연출의 측면에서 사실적인 영상을 구현한 기술력과 별개로 뭔가 독창적이나 새로운 것을 보여줬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작법을 빌린 것과 별개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악의 축으로 그려지는 설리반의 서사가 부족한 결과 순이를 지키는 이와 대 죽이려는 이의 가시적인 대립 이면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의 혈관이 갑자기 부풀고 감정이 폭주하는 것, 로봇처럼 검사를 받는 모습 등 스치듯 지나가는 묘사만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지구를 파괴하려고 하는 그의 동기가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장선장이나 태호가 설리반과 함께 일했다는 과거사를 보여줄 경우 그들의 철학적 대립이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비판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악역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것은 아쉬움이 짙다. 그 외에도 도로시가 극 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되는 것과 같은 편의적인 전개가 종종 눈에 띈다.
물론 한국 영화 시장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익숙한 전개, 캐릭터, 볼거리를 선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240억 원의 제작비와 580만 명가량의 손익분기점은 메이저 배급사가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의 입장에서 실패를 무릅쓰기 어려운 부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부적인 장면 구도, 연출 등에서 흥행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지레짐작해서 제한한 듯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장르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된 재해석을 선보였고, 수준 높은 볼거리도 제공했으며, 주제의식과 메시지도 사회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승리호>가 거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는 그 기쁨과 즐거움 못지않게 큰 아쉬움과 미련을 남긴다.
A(Acceptable, 무난함)
최초의 시도가 주는 뿌듯함과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안타까움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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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착오적인 스타워즈의 현주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다이들이 몰살당하고 은하 제국이 설립되자 타투인 행성의 외딴 동굴에 잠적한 제다이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이완 맥그리거)'. 제자였던 '아나킨 스카이워커(헤이든 크리스텐슨)'가 악의 세력인 시스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는 새로운 희망이 될 '루크 스카이워커(그랜트 필리)'를 남몰래 보호하며 숨죽여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비완은 생존한 제다이들을 사냥하는 빌런 '세 번째 자매(모제스 잉그램)'를 대면하고, 그녀가 루크의 쌍둥이 남매인 '레아 오르가나(비비안 리라 블레어)'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레아를 구출하러 간 오비완의 앞에는 다스 베이더가 되어버린 옛 제자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등장하고, 오비완은 오래전 펼쳤던 다스 베이더와의 운명적인 대결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디즈니+에서 공개된 <스타워즈> 시리즈의 실사 드라마인 <오비완 케노비>는 2005년에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로부터 10년 후 시점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악의 세력인 시스를 막지 못한 채 은둔한 제다이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가 1977년도 작품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에서 알렉 기네스 경이 연기한 현자 오비완 케노비로 거듭나는 계기를 보여준다.
<오비완 케노비>를 향한 기대는 상당했다. 오비완 케노비라는 캐릭터도 인기가 적지 않은 데다가 애증의 제자인 아나킨 스카이워커도 20여 년만에 같이 실사 시리즈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실사영화였던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가 혹평과 흥행 실패를 맛본 이후, 근래 <스타워즈> 시리즈가 부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기대감을 증폭했다. 디즈니+ 드라마 <더 만달로리안>이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고, 이후 <더 북 오브 보바 펫>도 소기의 성과를 이룬 만큼 <오비완 케노비>가 그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부작으로 구성된 <오비완 케노비>는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고, 작금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친다.
물론 프리퀄이자 스핀오프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기에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다. 우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진주인공인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그의 스승인 오비완 케노비의 애증이 뒤섞인 관계가 위치한다. 특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시스의 복수>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로 자신을 배신, 포기한 오비완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아나킨은 두 손으로 직접 오비완을 제거하고자 하며, 타락한 제자를 직접 베어야 했던 오비완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이러한 아나킨의 집착과 오비완의 회한을 과거 스승과 제자로서 광선검 대련을 하던 오비완과 아나킨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러한 연출은 두 인물의 감정선을 절정으로 고조시킴과 동시에 한 편의 에피소드 내에서는 짜릿한 반전까지 이끌어낸다.
또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오비완과 아나킨이 쌓아 올린 서사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운명적인 재대결이 등장하고, 이는 <스타워즈> 1, 2, 3편인 프리퀄 시리즈와 4, 5, 6편인 오리지널 시리즈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 중심에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정체성이 소멸되고, 그 유명한 다스 베이더로 완전히 각성하는 장면이 있다. 제다이였지만 악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여 다스 베이더가 된 아나킨. 드라마는 결투 도중 다스 베이더의 헬멧 안에 여전히 아나킨의 얼굴과 음성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며 다스 베이더라는 악인의 내면에 제다이인 아나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또 정확히 어느 시점을 계기로 아나킨의 정체성이 사라졌는지를 짚어주면서 프리퀄에서 묘사된 아나킨과 오리지널 삼부작에 등장한 다스 베이더 사이의 괴리감을 줄이고 그의 서사를 보충한다. 여기에 아나킨에게 용서를 구하던 오비완이 다스 베이더가 된 그를 완전히 포기하는 장면까지 더해지면 기존 시리즈에 비해 이들의 비극적인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이처럼 과거의 전설들을 재소환하고, 그들의 서사에 추가적인 내용을 덧붙이는 선택의 효과는 수많은 오마주들 덕분에 극대화된다. 자신이 아나킨을 죽였다는 다스 베이더에게 오비완은 "그럼 내 친구는 정말 죽어버렸군"이라고 일갈하는데, 이는 시리즈 6편인 <제다이의 귀환>에서 "그렇다면 제 아버지는 정말 죽었군요"라고 말하는 루크의 대사와 판박이다. 또한 제다이 마스터로 다시금 거듭난 후 수련을 떠나는 오비완이 어린 루크에게 "안녕(hello there)?"이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이 대사는 <새로운 희망>에서 오비완이 루크에게 건넨 첫 대사 이기도 하다. 오비완에게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알려주려는 그의 스승 '콰이곤 진(리암 니슨)'과 시스 군주인 팰퍼틴 황제의 재등장 역시 <스타워즈> 팬들이라면 쉬이 흘려보낼 수 없는 순간들이다.
문제는 애매모호한 드라마의 방향성 때문에 위의 장점이 퇴색된다는 점이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오비완 케노비의 드라마여야 했다. 젊고 이상주의적이었던 제다이 오비완 케노비 대신 아끼던 제자의 배신, 동료들의 죽음과 수호하던 국가의 파멸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오비완을 묘사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미처 끝나지 않은 아나킨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오리지널 삼부작에 등장했던 현자 오비완 케노비로의 변화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공개된 드라마의 초점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오비완에 대적하는 새로운 빌런인 세 번째 자매의 서사가 겉돌기 때문이다. 사실 세 번째 자매는 드라마의 진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다스 베이더에게 복수심과 혐오감을 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조금씩 다스 베이더를 닮아간다. 오비완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행을 거듭하는 다스 베이더처럼 그녀도 복수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며 타락한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의 악행을 반성하고 갱생하는 전개는 완전히 악에 물드는 다스 베이더와 제다이의 정체성을 되찾는 오비완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작중 그녀와 오비완의 접점이 거의 묘사되지 않다 보니, 두 주인공은 각자의 성장과 변화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세 번째 자매는 좀처럼 오비완과 다스 베이더 사이에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캐릭터의 분량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에 더해 전반적인 구성이나 연출이 세밀하지 않다 보니 방향성을 잃은 드라마의 표류도 끝나지 않는다. 6부작으로 구성된 분량 내에서 다루기에는 전체 내용이 과한 것인지 몰라도, 등장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불완전한 액션씬 역시 아쉬움을 키운다. 세 명의 성인이 어린 레아를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은 억지스럽고, 스톰트루퍼들은 이번에도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주기 위한 밋밋한 뒷배경으로 소비된다. <스타워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광선검 대결도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완전하지 않은 CG로 인해 어색한 문제를 노출한다. 이는 시리즈의 중추적 인물인 오비완과 아나킨이 복귀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큰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 드라마가 새로운 이야기와 앞으로의 비전을 보여주기보다는 인기 있는 캐릭터들의 이름값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 때문에 본 작의 장점마저도 퇴색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화라고도 불리는 <스타워즈>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운명적인 대결을 그려낸 거대한 서사시였고, 신화 속 영웅들의 초인적인 활약을 즐기는 시리즈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등장한 <스타워즈> 속 이야기는 현시점에서 사실 더 이상 소구력이 없다. 선악의 구분이 확실했던 냉전 시기와 달리 현대 사회의 많은 주체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손쉽게 나뉘지 않으며, 현대인들은 거대한 악보다도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예상할 수 없는 테러와 같은 악을 더 위협적으로 여긴다. 그래서 악을 처단하는 선한 영웅보다는, 쉽사리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정글과도 같은 현실에서 영웅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공감을 자아내기에 더 용이하다.
이는 21세기의 <스타워즈>라 불리는 MCU의 '인피니티 사가'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나 <엔드게임>도 비극적 서사시로 보이는 측면이 있으며, 선악의 장엄한 대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스 베이더에 비하면 타노스는 현대적 테러리스트에 더 가까운 빌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전략적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 후 손 쓸 틈 없이 달아난다. 기습을 당한 어벤져스도 제다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시스를 완전히 제거하여 우주의 균형을 되찾고 평화를 수복하는 제다이와 달리,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면 결코 완전하다고 볼 수 없는 복수를 하는 데 그친다. 이는 9.11 테러 이후 복수를 꿈꾼 미국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수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과 오버랩된다.
물론 그간 <스타워즈>도 시대상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왔다. 당장 프리퀄 삼부작은 은하 의회의 의장이었던 팰퍼틴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수단을 활용해 은하 제국의 황제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 테러와 같은 위협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던 21세기 초반의 세태를 꼬집었다. 근래 스타워즈 시리즈 중 성공을 맛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만달로리안>의 주인공인 현상금 사냥꾼 딘 자린은 전형적인 영웅이 아니다. 항상 기습과 배신을 경계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나름의 사랑과 믿음이 있는 그는 보다 현대적인 영웅상에 가깝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역시 제다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전쟁을 그려내어 호평받았다. 하지만 <오비완 케노비>는 수십 년 전의 인물들을 재소환하여 오래전에 끝맺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회귀한다. 그 결과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오비완 케노비가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알렉 기네스 경이 연기한 현자 오비완이 되어갈수록 그는 더 평면적인 캐릭터로 변하고, 그와 아나킨의 대립은 흥미가 덜해진다.
<오비완 케노비>를 포함해 현재 디즈니+가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작품을 유독 한국에서만 늦게 공개하는 일련의 상황도 결코 작지 않은 문제로 보인다. 이는 한국에서 스타워즈 시리즈의 인기가 적다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른 결정이겠지만, 동시에 디즈니가 스타워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자신만의 낭만이 있었기에 지난 수십 년간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가 악의 세력인 시스와 제국의 편으로 넘어갔고, 몇몇 되지 않는 소수이자 약자인 제다이와 저항군만이 악에 대항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이들이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대세를 거스르는 용기와 낭만이 숨 쉬는 이야기. 이것이 스타워즈의 매력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흐름인 자본주의적 분석을 차별적 대우의 이유로 대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재 디즈니+는 끊임없이 스타워즈 드라마들을 준비 중이다. 이미 계획 중인 것만 해도 <만달로리안> 시즌 3, <아소카>, <안도르>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이 전부 과거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다. <만달로리안>과 <아소카>는 프리퀄과 오리지널 시리즈 사이의 시간대를 다루는 작품이고, <안도르>는 2017년에 개봉한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외전 겸 프리퀄이다. 즉, 이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이미 정해진 결말로 귀결되는 작품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또 <오비완 케노비>의 완성도를 보면 <스타워즈> 시리즈의 완전한 부활은 아직까지 요원해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프랜차이즈의 마지막 남은 이름값까지 고갈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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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브스 아웃 2> 추리물로 위장한 블랙 코미디의 정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팬데믹 속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탐정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 어느 날,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은 블랑은 마일스의 친구들과 함께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글래스 어니언'이 위치한 그리스의 한 섬으로 향한다. 마일스의 전 동업자인 '앤디 브랜드(자넬 모네)',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디벨라(캐서린 한)', 과학자 '라이오넬 투생(레슬리 오덤 주니어)', 패션 스타 '버디 제이(케이트 허드슨)'과 유명 스트리머 '듀크 코디(데이브 바티스타)'까지. 블랑은 낯선 이들과 함께 마일스가 준비한 괴상한 살인 미스터리 추리극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글래스 어니언이 숨기고 있는 진짜 미스터리를 감지하고, 은폐된 살인극의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개봉 당시 클래식한 추리물의 쾌감을 선사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의 호평을 끌어냈다. 이는 <나이브스 아웃>이 애거사 크리스티가 정립한 추리물의 정석을 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일 강의 죽음> 같은 그녀의 추리물은 캐릭터의 개인사와 내면을 묘사하며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반응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사건 발생 이유와 경과를 추적하는 데에 중점을 둔 <셜록 홈즈>와는 결이 다르다. 누가 사건을 벌였는지 그 사연에 주목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인물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탐정은 내레이터, 더 나아가 스토리텔러의 역할까지도 맡는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도 전편처럼 정도를 착실히 걷는다.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가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블랑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점, 영화의 반 이상이 지난 후에야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 정도가 전편과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초반부는 사건에 관련된 캐릭터를 한 명씩 소개한다. 사업의 방향성을 두고 마일스와 관계가 틀어진 앤디, 마일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받는 현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마일스의 사업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 라이오넬, 마일스에게 투자받은 모델 출신 패션 디자이너 버디와 마일스에게 투자를 요구 중인 인플루언서 듀크까지. 그들이 마일스가 보낸 괴상한 퍼즐을 해결하고, 한자리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어떤 캐릭터이고 마일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가 곧 살인 미스터리의 복선이자 해결의 실마리로 기능할 예정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가 다른 맥락에서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딕 로맨스와 슬래셔 장르를 더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스파이물과 연쇄 살인마 스릴러를 조합해 <ABC 살인사건>을 써 내려간 바 있다. <나이브스 아웃>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존슨은 추리물과 다른 장르를 결합해 자신만의 추리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추리물의 탈을 쓴 채 사건을 둘러싼 캐릭터들에 주목한 블랙 코미디였다. 카메라는 미국 사회의 구성원을 상징하는 영화 속 각 캐릭터를 적나라하게 비췄다. 이민자 출신인 마르타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트롬비 가문 사람들이 정작 마르타의 출신 국가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르타의 출신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그저 중남미 국가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인 마르타의 국적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므로.
마르타를 도와주는 척 배신했던 '랜섬(크리스 에반스)'도 선조들의 집과 물려받은 권리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블랑은 애초에 랜섬의 할아버지가 파키스탄인 재벌로부터 구입한 집이 트롬비 가문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의 주장을 비웃는다. 이는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에서 불거진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에 비수를 꽂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이민자 가문 출신인 마르타가 트롬비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고, 정작 트롬비 가족은 저택에서 쫓겨나는 결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 사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한 편의 풍자극이었던 셈이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역시 전편의 블랙 코미디를 계승한다. 단지 비판하는 대상을 바꾼다. 미국 사회의 폐쇄성 대신 자본에 중독된 사회상을 비판한다. 부제이기도 한 '글래스 어니언'이 대표적이다. 작중 글래스 어니언은 까야할 껍질이 매우 많은 양파이기만, 동시에 유리로 만들어져서 텅 비어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 자체로 돈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많은 사람은 돈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명성으로 여기며, 현실과 세상을 조종할 수단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냉정하게 돈을 관찰하며 그 돈은 그저 교환수단이고, 삶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즉, 영화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될 것인지, 아니면 투명하게 보이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볼 것인지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행동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특히 자본이 흑막에 숨은 채 조종하는 사회 시스템을 직시하고, 그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며, 체제 자체를 파괴할 용기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화는 마일스와 그 친구들을 비웃는다. 스스로를 '붕괴자들'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기존의 시스템에 천착되어 있다. 마일스는 자기 돈을 무기 삼아 원하는 대로 과학자, 정치인, 셀레브리티, 유튜버를 조종한다. 그들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일스의 자본에 매달린다. 블랑의 말대로, 그들은 진정한 붕괴의 의미를 모른다.
반면에 블랑과 함께 움직이는 또 다른 주인공 '헬렌 브랜드(자넬 모네)'의 존재는 이질적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마일스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마일스의 허영심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글래스 어니언을 파괴해 버린다. 특히 헬렌이 명석한 두뇌, 화려한 외모, 뛰어난 재능은 없는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천재도, 정치인도, 재벌도 아닌 한 개인의 힘으로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붕괴의 의미를 모르던 마일스의 친구들이 헬렌이 글래서 어니언을 파괴하자 마침내 종속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의 주제 의식이 새롭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가 정립된 이래로 항상 제기됐던 비판이다. 그러나 영화가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상 이 메시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로 세계의 양극화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은 작년 5월 ‘고통으로 얻는 이익’(Profiting from Pain) 보고서에서 지난 2년간 노동자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에너지, 식품, 제약 기업 등은 막대한 이익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중 마일스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한 게 다름 아닌 소수 활용 에너지 자원이라는 점, 또 그가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 노동자를 착취해 부를 쌓은 게 그저 허구는 아닌 셈이다.
특히 영화의 전반적인 톤 덕분에 이 메시지는 더욱 눈에 들어온다. 냉혹한 현실을 코미디로 풀어낸 아이러니한 결과다. 사실 영화 속에 한데 모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들다. 억만장자 IT 거물, 패션 스타, 록스타 과학자, 인플루언서와 주지사까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소 날카롭고 직설적일 수 있는 영화의 주제나 의도가 더 부드럽게 느껴지고, 재고할 여지가 존재하는 측면도 있다. 어몽어스를 플레이하는 블랑이나 마스크를 쓸지 말지 다투는 친구들의 모습처럼 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반영한 유머도 윤활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를 일상과 맞닿아 있는 감정적 측면과 결합해 미스터리라는 소재 속에 녹여내는 데 제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팬데믹을 겪은 시청자, 또 앤데믹을 헤쳐 나가야 할 관객에게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라이언 존슨의 재담이 더해지면서 이번 속편은 형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아우로 거듭난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분위기를 한 차례 풀었다가 조이면서 긴장감을 고조하고 살인 사건을 암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마일스가 준비한 추리 게임을 블랑이 손쉽게 끝낼 때 분위기는 한 차례 가라앉는다.
하지만 캐릭터 간의 오래된 갈등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영화는 파국으로 달려 나간다. 이때 모나리자 보관함이 여닫히는 소리,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듯 요란한 휴대폰 알람, 파티에 어울리는 유쾌한 음악과 점점 짧아지는 컷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리듬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 하나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함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숨기거나 강조하고 싶은 장치를 화면에 배치한다. 모든 진상을 알고서 이 일련의 상황을 다시 보면 그제야 철저한 계산과 반전으로 가득한 시퀀스가 눈에 들어올 정도다. 단 한순간에 라이언 존슨이 얼마나 추리물에 최적화된 이야기꾼인지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고전적인 작법과 현재를 읽는 통찰력의 시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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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굿모닝 에브리원 Morning Glory, 2010미국 | 코미디 외 | 2011.03.17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07분
감독: 로저 미첼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는 '사악', '어둠'과 같은 부정적인 언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든 볼 수 있고, 영화 끝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품이 들지 않는 마법 같은 영화랄까. 말 그대로 참 보기 쉽다. 특히 정신적, 감성적으로 목화솜의 촉감처럼, 안정감과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수다쟁이 베키 풀러(레이첼 맥아담스)의 쉼 없는 말과 행동에 잠깐 집중력과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그들만의 세상'이란 관점을 관객에게 심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도태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맹점이 너무 드러나있는 점이 살짝 아쉬움을 남기지만, 무료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화로워 메인 주인공 베키의 변화하는 감정선이 잘 보인다. 스토리의 모든 요소에 깃든 유머가 꽤 매력적이고, 아침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채운다. 마이크(해리슨 포드)의 무표정과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또 사실상 베키의 수다가 아니었다면, <굿모닝 에브리원>은 시작하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것이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이 흥미로운 점은 관객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것을 초점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표면적 측면일 뿐이다. 베키의 바쁜 삶을 시작으로 그녀가 악명 높은 방송국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동시에 사랑을 어떻게 쟁취하고 지켜가는지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와 똑같다. 하지만 <굿모닝 에브리원>가 온전히 베키만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녀는 앤드리아와 달리 홀로 해낼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주인공이다. 방송 PD란 직업은 본래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시청률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사라질 위기에 놓은 아침방송 프로그램 '데이 브레이크'를 되살린 건 베키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굿모닝 에브리원>이 내세운 첫 번째 관점은 '나'가 아닌 '우리'다.
베키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열정을 다 쏟으며, 자신의 존재가치와 위치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고집불통인 마이크까지 변화시키는 사건은 베키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서사적 장치였기에 실패는 더더욱 예견되지 않았다. 망해가는 '데이 브레이크'를 살린 건 포기하지 않는 베키의 열의와 그녀의 역량을 진작에 알아차린 마이크와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데이 브레이크의 소속 스텝들의 합심이었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그녀가 일 중독자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꿈을 가진 건 좋아.
여덟 살 때는 귀여웠지.
열여덟 때는 당차 보였어.
스물여덟 먹고도 그 모양이니 창피해 죽겠다.
상처 받기 전에 현실에 눈뜨란 말이야.베키의 엄마는 베키가 지방방송 PD에서 해고당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딸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심을 자식이 대신 성취해야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부모의 입장으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일을 꿈꿨던 소녀가 꿈을 이룬 후, 더 이상 꿈이 주는 희열감과 행복감에서 빠져 살 수 없었던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란 얘기다. 따라서 베키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닌 일자리임을 엄마의 현실에서 또다시 깨닫게 된다.
다 좋다. 바쁘게 사는 것도, 쉼 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도 전부다. 하지만 베키는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는 프로그램 폐지를 하겠다고 통보까지 하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 그리고 때마침, 마이크가 등장한다. 그는 베키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라 조언한다. 일에 미쳐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외로움과 사투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또한 평생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뉴스를 진행하며, 영향력 있는 앵커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될 거라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단편적인 인간이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 중 세 번째란 타이틀을 가진 것도 올라가는 것만 인생의 값진 보물이라 생각한 마이크 본인 탓임을 시인한 것이다.
이후, 베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고민이다. 베키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을 해야만 한다. 그게 보통 이야기들의 흐름이니까. 가령, '정말 나에게 일이 전부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일에 미쳐있는 걸까?'란 생각에 묻혀, 일과 개인생활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번 순기능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말이다.여기서 <굿모닝 에브리원>의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사랑스러운 베키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개인적 시선은 그저 시선으로만 기능했다는 점.
희한하게도 베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보다 직접 행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이크의 조언과 애인의 배려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는 게 아니라 '조정'한다. 균형을 찾는 것은 베키 개인의 몫이니까. 그녀가 일에 더 미친다고 해서 베키의 삶이 불행할 거란 예측은 아주 불필요한 선입견이란 얘기다. 일과 사랑을 모두 충분히 만족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확인시킬 이유가 베키에겐 전혀 없다. 베키는 정말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도, 매번 사랑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이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면서 완벽한 '나'로 변화한다.베키 스스로는 변화했다고 느끼지만, 타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키포인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카메라 앞에서 앞치마를 결코 두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 마이크를 카메라 앞에 세운 장본인은 '마이크나 애인에게 영향을 받아 180도로 바뀐 베키'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결같았던 베키'인 셈이다. <굿모닝 에브리원>은 베키의 성장담을 그린 것이 아니다. 베키의 진면목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면서,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친절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던 계획이 본 작품의 힘이란 자신감까지 덧붙인다.
마냥 재미있기만 한 영화가 아니다. 분명 당신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내 '데이 브레이크'를 떠나지 않는 의리의 베키가 <굿모닝 에브리원>의 뻔한 결말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 영화를 본 이들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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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야기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하필 3000년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원작 소설이 있기에 조지 밀러가 아니라 소설의 작가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3000년 전 시바 여왕으로부터 시작했는가.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았는가. 추측건대 시바 여왕의 시대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 없던 그 시기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혹은 누군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지어낸 이야기거나,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복잡해 보이지만 아주 단순하다. 두 장소에서 일어난다. 터키와 런던. 전반부는 터키, 후반부는 알리테아가 런던으로 돌아와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겹쳐진다. 누군가 만약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 혹은 어른들의 알라딘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야기다.
다만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신기한 것은 영화가 시작될 때의 내레이션이다. 이 내레이션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보다 먼 미래에서 서술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뒤에 전달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지 밀러 감독은 이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확장시킨다. 이야기는 남는다는 것일까.
알리테아는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 공통된 점을 찾으려고 하는 서사 학자다. 그녀는 강연을 위해 터키로 향한다.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녀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욕망을 부정한다. 지니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였을 때 자신은 갈망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거나 혹은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전부 교훈적인 이야기이며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녀가 공항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 이 남자는 강연에까지 찾아와서 그녀의 주장에 반박한다. 그녀의 주장은 이제 모든 이야기는 은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갈망이다. 즉, 그녀는 이야기가 은유로 환원되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가 온전히 이야기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남자의 반박을 듣자마자 쓰러진다. 그러고 난 다음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골동품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서 마치 “이야기”를 찾는 것처럼 호리병 하나를 구매한다. 그리고 호리병에서 지니가 빠져나온다. 여기서 지니는 그녀의 환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재도 아니다. 지니는 이야기 자체다. 이 이야기인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소원을 빌지 않자 자신이 호리병에 갇힌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첫 번째는 시바 여왕의 이야기. 두 번째는 오스만 제국, 세 번째는 르네상스 시기이다. 그리고 지니는 세 번 호리병에 갇혔다고 이야기하지만 정확히는 네 번 갇힌다. 이 숫자는 중요하다. 이 숫자가 중요한 까닭은 런던에서 페이드아웃 기법이 네 번 사용되기 때문이다.
시바 여왕의 이야기에서 지니가 호리병에 갇힌 까닭은 시바 여왕을 욕망한 벌이다. 솔로몬의 여자를 욕망한 벌. 두 번째는 노예 소녀가 죽기 직전 소원을 빌지 않아 갇힌 이야기, 세 번째는 오스만 제국의 왕가를 쫓다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었지만 다시 갇힌 이야기, 네 번째는 자신이 시바 여왕보다도 더 사랑했던 소녀의 히스테리로 인해 갇힌 이야기다. 이 네 번의 갇힌 이야기에서 지니가 세 번이라고 이야기한 까닭은 뚱뚱한 여인에게 발각되어 갇힌 이야기는 셈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 같다. 여하간 이 갇힌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소원을 빈다. “나를 사랑해 줘”
그녀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을까. 그녀의 갈망이 깨어난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아마도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지니가 채워준 이야기를 하면서 갈망이 서서히 깨어났을 것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연주를 들을 때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조지 밀러는 정확하게 그걸 찍었다. 그리고 네 번째 갇힌 이야기를 할 때, 특히 소녀의 지식을 향한 갈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의 순간에서 알리테아는 침을 꼴깍 삼킨다. 그리고 솔로몬이 시바 여왕에게 여자들이 갈망하는 공통된 것을 들려주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알리테아는 성공한 지식인 여성이다. 르네상스 시기 여자들에게 수없이 많은 억압이 있었던 그 시기의 소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갈망하던 첫 번째 것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주체성. 잠시 샛길로 빠져서 이야기하자면 최근 현대 여성 영화는 계속해서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도 그랬고, <코르사주>도 그랬다.
그다음은 역시 “사랑”이었을 것이다. 지니와 사랑을 나눈 후 조지 밀러 감독은 이상하게 촬영했다. 알리테아의 호텔방에 마치 지니가 사라진 것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여하간 여기서부터 이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지니는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옆집 할머니들과의 언쟁을 하는 알리테아와의 장면에서 지니는 잠시 사라진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알리테아의 욕망이 불러낸 환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타난 지니는 세상의 시끄러운 모든 소음을 흡수한다. 알리테아는 그가 그 짜증스러운 소리들을 흡수하는 순간 흐느낀다. 이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 않았던가.
두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옆집 할머니들에게 지니의 음식을 가져다주는 장면이다. 세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미움과 사랑에 대해 말하는 알리테아와 그에 대해 인간들은 모순 덩어리라고 말하는 지니의 장면이다. 네 번째 페이드아웃 장면은 사라져가는 지니에게 알리테아가 사랑은 선물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인간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돌아가라고 말한다. 이 네 개의 페이드아웃 장면과 지니가 호리병에 갇히는 네 번의 이야기는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묘하게 대구를 이룬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지니, 즉 이야기가 우리에게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니의 3000년의 역사와 런던에서의 짧은 기간의 이야기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갈망과 사랑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지니)는 서사 학자 알리테아의 환상이 아니다.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옆집 할머니가 지니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차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야기는 은유나 환유가 아니며 그 자체로 실재한다.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실재하면 만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에 달릴 것이다.
2023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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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찬란한 지휘자의 무거운 발걸음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감독] 테드 브라운
출연] 구스타보 두다멜
시놉시스]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는 테드 브라운이 시기적절하게 내놓은 희망적인 다큐멘터리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손바닥을 새기고, 수백명의 어린이에게 사인 요청을 받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그는 베네수엘라의 유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세계적 성공을 거둔 지휘자다. LA 필하모닉,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그는 클래식 스타의 영향력을 건설적으로 발휘할 방법을 늘 고민한다. 여전히 불안정한 고국에서 그는 음악으로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스포일러 주의#
음악이 주는 치유의 메시지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베네수엘라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 프로그램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음악을 가르쳐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 시스템이다. 과연 음악 하나로 인성적 사회적 교육이 가능할까?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에게는 직접적인 경제적 지원이 가장 큰 도움이 될텐데 아무리 무상이라지만 문화적 교육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제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옳았다. 또래 아이들과 악기를 통해 합주를 하면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과의 협동심을 기를 수 있었고, 한 단체에 소속되어 동료로서, 그리고 선후배로서 악기를 서로 가르쳐주면서 사회성 역시 발달되었다. 또한, 불우한 자신의 가정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의 강점과 장점을 찾으며 자신의 환경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만들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클래식을 연주하면서 그 음악 자체로도 심적 안정감과 힐링을 받으니 이보다 더 안성맞춤인 교육 시스템이 어디있을까. 한 조사에 따르면 어두운 골목길에서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도 강도, 살인과 같은 중범죄부터 소매치기와 같은 경범죄까지 그 비율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마 엘 시스테마를 처음으로 만든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음악이 가지는 힘이 지금 당장의 경제적 뒷받침을 되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가치 체계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엘 시스테마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베네수엘라의 아이들을 교육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과연 늦었는가
구스타보 두다멜은 지휘자로서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두었다. 17살의 나이에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데뷔를 하고, 2004년 독일의 밤베르크 교향악단 주최로 열리는 지휘자 경연대회인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면서 지휘자로서 성공가도를 쭉쭉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중견 지휘자들 빰치는 분주한 활동을 계속하면서 지휘자의 커리어를 알차게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고향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와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그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고뇌하고, 더불어 정치적으로 너무나도 불안정한 베네수엘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매일같이 고민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차베스 정권 당시에는 친정권적인 태도를 보이고, 마두로 정권에 들어오면서 부터 현 정권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에 대해 너무 뒤늦게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아닌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이 부분도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에서 꼬집는다. 하지만 과연 구스타보 두다멜의 입장에서 차베스 정권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하다.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엘 시스테마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면서 지원 중단을 검토했으나 빈곤 퇴치와 범죄 예방 그리고 사회 부흥 및 국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고 판단해 지원을 지속하며 해외 공연을 늘리면서 엘 시스테마를 해외에 알리는데 집중했다.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서 아이들의 정서발달과 사회적 교육의 일환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왔던 두다멜에게는 엘 시스테마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밝혀버리면 한 집단 전체가 매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마두로의 집권 이후 유혈사태와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유혈사태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성명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입장이 뒤늦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음악이 정치성으로 이용되길 원치 않았던 그에 있어서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성명 발표로 인해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하나둘 다른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나라로의 이민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점차 단원들의 빈자리를 보여주면서 왜 그가 정치적 입장을 이제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무게감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자신이 지휘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것을 넘어서 단원들의 생계 역시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동안의 비판에서도 침묵을 지켰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엘 시스테마부터 구스타보 두다멜의 이야기까지 베네수엘라의 현재 상황과 그의 행보에 대해서 다룬 영화 비바 마에스트로. 찬란해보였던 행보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에도 엄청난 무게감이 있음을 잘 보여준, 그리고 미래의 그의 행보 역시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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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가 선사하는 역대급 액션 클라이맥스?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에 한계란 없다! 6월 28일, 레전드 액션 어드벤처의 귀환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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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9일 넷플릭스 공개]
슈퍼빌런이 넘쳐난다. 싹 쓸어버리자! 어린 시절, 악당들을 혼내주자던 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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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호> 도전적인 밑그림을 덮은 무미건조한 채색
2092년, 지구의 환경오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우주 위성궤도에 만든 새로운 보금자리 UTS로 향한다. 그러나 UTS에 정착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한정적인 관계로 돈이 부족한 많은 이들은 지구에 그대로 남거나 우주를 떠돌며 힘겹게 살아간다. 우주 쓰레기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인 ‘태호’(송중기), ‘장선장’(김태리),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도 가족과 동료들을 잃은 파란만장했던 과거는 뒤로 한 채 돈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며 살아간다. 어느 날, ‘승리호’는 사고 우주정에서 대량살상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박예린)’를 발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음모를 깨달은 뒤 새로운 모험에 나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승리호>는 보는 재미가 확실하다. 우주선 내부나 우주 도시의 거리, 클럽, 도박장, 우주선 수리장처럼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낸 세트 미술은 미래의 세계관에 자연히 빠져들게 만든다. <스타워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비교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우주선들의 추격전과 액션은 <신과 함께> 이후 한국의 CG 기술력이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방증처럼 보인다. 전작인 탐정 홍길동처럼 본래 만화와 현실을 오가는 과장된 영상미를 보여주던 조성희 감독이기에 UTS의 마을이나 설리반의 사무실처럼 CG가 살짝 어색한 장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비주얼 측면의 성과는 영화가 극장에 걸리지 못한 현실이 야속할 정도다.
하지만 시각 효과를 잠시 제쳐둔 채 "<승리호>가 최초의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성공적인가?"라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승리호>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 재해석을 보여줄 때 할리우드의 기존 문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문제를 노출한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영화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모험과 전쟁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사실 영화 장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국내에서 인기가 없다.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320만 관객을 간신히 넘겼고, 그 이후 시리즈는 100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MCU에 속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도 270만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으며 <스타트렉> 시리즈도 100만을 간신히 넘는다. 이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적인 영화의 대명사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실제로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용어는 1941년 SF 작가이자 평론가인 윌슨 티거가 최초로 사용했는데, 이는 서부극을 뜻하는 호스 오페라(horse opera)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서부극을 구성하는 이른바 '미국적' 토대는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개척주의 혹은 팽창주의다. 우선 서부극의 주인공은 대게 독선적이고 개인적인 반-영웅이다. 기존의 규범과 규율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해 사람들을 구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이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다. 루크 스카이워커, 아나킨 스카이워커, 한 솔로, 레이 등은 하나 같이 선대의 가르침, 제다이의 규율을 무시하고 자신의 직감이나 판단을 쫓는 경우가 많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팀원들도 스타로드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타노스를 때린 것처럼 개인적인 돌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스타트렉>의 커크 선장도 마찬가지다.
또한 서부를 개척하고, 혼돈과 질서가 없다고 여겨진 땅을 문명화하는 이야기를 보여줬던 서부극은 흔히 미국인의 정신이라고 표현되는 서부로의 개척주의, 팽창주의가 영화에 투영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페이스 오페라는 말이 우주선으로, 미국 서부의 평야나 사막이 우주와 행성들로, 미국의 원주민을 외계인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1960년대에 케네디 대통령이 '뉴 프런티어(new fronier)'를 외치며 미국 서부를 전 세계, 심지어 달로 확장시킨 것처럼 동시대에 제작된 <스타트렉>에서도 미국(U.S.)을 상징하는 U.S.S. 엔터프라이즈 호는 우주 각지를 탐험한다. 이러한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의 전통은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에서 백인, 흑인, 황인 가리지 않고, 또한 지구인과 외계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식민지의 피지배자로 근현대 시기를 보냈던 한국인에게 본질적으로 미국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단순히 화면에 태극기를 보여주거나 '승리호'라는 우주선 이름을 한글로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미국적 기반에 토대를 두지 않는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승리호>는 이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우선 미국 중심의 개척주의, 팽창주의에서 탈피한 세계관을 선보인다.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통역기를 사용하며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나이지리아 피진어 등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가 등장하는 것이 단적인 예시다. 그 외에도 미국의 개척, 팽창주의에 대한 반기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인공들이 우주 쓰레기 처리선을 타고 다니는 장면, 거대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유층만 사는 우주도시와 황폐화된 지구를 오가는 초반부 장면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단에 다다른 풍경에 대한 상상화를 그려내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의 폐해를 비판한다.
이는 생태주의적 접근과도 궤를 같이 한다. 서부 개척을 화성 개척과 등치시키며, 자연을 개발하고 소비한 뒤 새로운 개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63 빌딩이 미세먼지로 뒤덮인 가운데 더 높은 빌딩들이 서 있는 서울을 보여주는 오프닝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영화의 주된 갈등이 도로시를 죽이려는 설리반과 지키려는 승리호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가운데, 이 갈등이 지구를 파괴하고 화성으로 이주하는 설리반과 지구들 되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주인공들의 대조를 이루는 선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다. 또한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도로시 캐릭터 자체가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을 담은 존재이기 때문에 태호가 과거에 딸을 잃은 기억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전개는 나름의 설득력을 갖추기도 한다.
한편 <승리호>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개인주의적인 영웅 서사를 거부한다. 실제로 빌런과 승리호 일행이 대면하는 구도는 언제나 일 대 다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설리반이 승리호 내부로 들어와 그들을 직접 제압하는 장면이나, 카밀라가 우주 공장 내부에서 승리호 일행과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초반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비난을 퍼붓던 서로 다른 국적의 우주 쓰레기선 승무원들, 서로 믿지 못하던 검은 여우단과 승리호 선원들이 힘을 모아 설리반의 음모를 막는 데서도 영화가 중점을 둔 대목을 눈치챌 수 있다. 이때 상술한 통역기는 연대와 협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따라서 <승리호>의 세계관, 큰 그림, 밑그림은 분명 기존에 볼 수 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한국형 스페이스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제는 <승리호>가 기존의 할리우드 문법을 사용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승리호>의 장면들을 디테일하게 뜯어보면 기시감을 피할 수는 없다. 액션의 경우, 업동이가 우주선을 오가며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토르: 라그나로크>, 행성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무기 안에 잠입하는 전개는 <스타워즈>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우주 쓰레기 혹은 운석 지대와 같은 장애물 지대로 들어가는 것 역시 수십 년간 애용된 클리셰다. 미래의 우주를 그려낸 디테일한 설정도 마찬가지다. UTS의 설정이나 모양새는 <엘리시움>의 설정이나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등장한 스카리프 행성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매끈하고 날렵한 할리우드 영화의 우주선"과 다르다는 일각의 평가 역시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전투기의 만듦새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도 마찬가지다. 능글맞은 파일럿, 강력한 여전사, 신체적 능력과 별개로 순박한 인물, 유머와 위기 탈출을 책임지는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조합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한다. 이는 전작에서 보인 배우들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제각각 다른 과거를 지닌 이들이 승리호라는 우주선에서 하나의 가족으로 묶이고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보듬아 준다는 전개 또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와 일치한다. 주인공 일행을 매번 위기에 빠뜨리는 여성 서브 악역의 존재, 인간성을 말살한 소년병을 양성해 UTS 기동대로 활용했다는 설정은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 속 스톰트루퍼를 연상시킨다. 결국 미장센이나 디테일한 연출의 측면에서 사실적인 영상을 구현한 기술력과 별개로 뭔가 독창적이나 새로운 것을 보여줬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작법을 빌린 것과 별개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들도 있다. 무엇보다도 악의 축으로 그려지는 설리반의 서사가 부족한 결과 순이를 지키는 이와 대 죽이려는 이의 가시적인 대립 이면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그의 혈관이 갑자기 부풀고 감정이 폭주하는 것, 로봇처럼 검사를 받는 모습 등 스치듯 지나가는 묘사만으로 인간을 혐오하고 지구를 파괴하려고 하는 그의 동기가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장선장이나 태호가 설리반과 함께 일했다는 과거사를 보여줄 경우 그들의 철학적 대립이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비판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악역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것은 아쉬움이 짙다. 그 외에도 도로시가 극 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되는 것과 같은 편의적인 전개가 종종 눈에 띈다.
물론 한국 영화 시장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대부분 흥행에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익숙한 전개, 캐릭터, 볼거리를 선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다. 240억 원의 제작비와 580만 명가량의 손익분기점은 메이저 배급사가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의 입장에서 실패를 무릅쓰기 어려운 부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부적인 장면 구도, 연출 등에서 흥행을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지레짐작해서 제한한 듯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장르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된 재해석을 선보였고, 수준 높은 볼거리도 제공했으며, 주제의식과 메시지도 사회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승리호>가 거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는 그 기쁨과 즐거움 못지않게 큰 아쉬움과 미련을 남긴다.
A(Acceptable, 무난함)
최초의 시도가 주는 뿌듯함과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안타까움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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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착오적인 스타워즈의 현주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다이들이 몰살당하고 은하 제국이 설립되자 타투인 행성의 외딴 동굴에 잠적한 제다이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이완 맥그리거)'. 제자였던 '아나킨 스카이워커(헤이든 크리스텐슨)'가 악의 세력인 시스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는 새로운 희망이 될 '루크 스카이워커(그랜트 필리)'를 남몰래 보호하며 숨죽여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비완은 생존한 제다이들을 사냥하는 빌런 '세 번째 자매(모제스 잉그램)'를 대면하고, 그녀가 루크의 쌍둥이 남매인 '레아 오르가나(비비안 리라 블레어)'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레아를 구출하러 간 오비완의 앞에는 다스 베이더가 되어버린 옛 제자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등장하고, 오비완은 오래전 펼쳤던 다스 베이더와의 운명적인 대결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디즈니+에서 공개된 <스타워즈> 시리즈의 실사 드라마인 <오비완 케노비>는 2005년에 개봉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로부터 10년 후 시점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악의 세력인 시스를 막지 못한 채 은둔한 제다이 마스터 오비완 케노비가 1977년도 작품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에서 알렉 기네스 경이 연기한 현자 오비완 케노비로 거듭나는 계기를 보여준다.
<오비완 케노비>를 향한 기대는 상당했다. 오비완 케노비라는 캐릭터도 인기가 적지 않은 데다가 애증의 제자인 아나킨 스카이워커도 20여 년만에 같이 실사 시리즈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실사영화였던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가 혹평과 흥행 실패를 맛본 이후, 근래 <스타워즈> 시리즈가 부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기대감을 증폭했다. 디즈니+ 드라마 <더 만달로리안>이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고, 이후 <더 북 오브 보바 펫>도 소기의 성과를 이룬 만큼 <오비완 케노비>가 그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부작으로 구성된 <오비완 케노비>는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고, 작금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친다.
물론 프리퀄이자 스핀오프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기에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다. 우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진주인공인 아나킨 스카이워커와 그의 스승인 오비완 케노비의 애증이 뒤섞인 관계가 위치한다. 특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시스의 복수>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후로 자신을 배신, 포기한 오비완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아나킨은 두 손으로 직접 오비완을 제거하고자 하며, 타락한 제자를 직접 베어야 했던 오비완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이러한 아나킨의 집착과 오비완의 회한을 과거 스승과 제자로서 광선검 대련을 하던 오비완과 아나킨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러한 연출은 두 인물의 감정선을 절정으로 고조시킴과 동시에 한 편의 에피소드 내에서는 짜릿한 반전까지 이끌어낸다.
또 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오비완과 아나킨이 쌓아 올린 서사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운명적인 재대결이 등장하고, 이는 <스타워즈> 1, 2, 3편인 프리퀄 시리즈와 4, 5, 6편인 오리지널 시리즈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 중심에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정체성이 소멸되고, 그 유명한 다스 베이더로 완전히 각성하는 장면이 있다. 제다이였지만 악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하여 다스 베이더가 된 아나킨. 드라마는 결투 도중 다스 베이더의 헬멧 안에 여전히 아나킨의 얼굴과 음성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며 다스 베이더라는 악인의 내면에 제다이인 아나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또 정확히 어느 시점을 계기로 아나킨의 정체성이 사라졌는지를 짚어주면서 프리퀄에서 묘사된 아나킨과 오리지널 삼부작에 등장한 다스 베이더 사이의 괴리감을 줄이고 그의 서사를 보충한다. 여기에 아나킨에게 용서를 구하던 오비완이 다스 베이더가 된 그를 완전히 포기하는 장면까지 더해지면 기존 시리즈에 비해 이들의 비극적인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이처럼 과거의 전설들을 재소환하고, 그들의 서사에 추가적인 내용을 덧붙이는 선택의 효과는 수많은 오마주들 덕분에 극대화된다. 자신이 아나킨을 죽였다는 다스 베이더에게 오비완은 "그럼 내 친구는 정말 죽어버렸군"이라고 일갈하는데, 이는 시리즈 6편인 <제다이의 귀환>에서 "그렇다면 제 아버지는 정말 죽었군요"라고 말하는 루크의 대사와 판박이다. 또한 제다이 마스터로 다시금 거듭난 후 수련을 떠나는 오비완이 어린 루크에게 "안녕(hello there)?"이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이 대사는 <새로운 희망>에서 오비완이 루크에게 건넨 첫 대사 이기도 하다. 오비완에게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알려주려는 그의 스승 '콰이곤 진(리암 니슨)'과 시스 군주인 팰퍼틴 황제의 재등장 역시 <스타워즈> 팬들이라면 쉬이 흘려보낼 수 없는 순간들이다.
문제는 애매모호한 드라마의 방향성 때문에 위의 장점이 퇴색된다는 점이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오비완 케노비의 드라마여야 했다. 젊고 이상주의적이었던 제다이 오비완 케노비 대신 아끼던 제자의 배신, 동료들의 죽음과 수호하던 국가의 파멸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오비완을 묘사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미처 끝나지 않은 아나킨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오리지널 삼부작에 등장했던 현자 오비완 케노비로의 변화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공개된 드라마의 초점은 계속해서 흔들린다. 오비완에 대적하는 새로운 빌런인 세 번째 자매의 서사가 겉돌기 때문이다. 사실 세 번째 자매는 드라마의 진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다스 베이더에게 복수심과 혐오감을 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조금씩 다스 베이더를 닮아간다. 오비완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행을 거듭하는 다스 베이더처럼 그녀도 복수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며 타락한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의 악행을 반성하고 갱생하는 전개는 완전히 악에 물드는 다스 베이더와 제다이의 정체성을 되찾는 오비완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작중 그녀와 오비완의 접점이 거의 묘사되지 않다 보니, 두 주인공은 각자의 성장과 변화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세 번째 자매는 좀처럼 오비완과 다스 베이더 사이에서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캐릭터의 분량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에 더해 전반적인 구성이나 연출이 세밀하지 않다 보니 방향성을 잃은 드라마의 표류도 끝나지 않는다. 6부작으로 구성된 분량 내에서 다루기에는 전체 내용이 과한 것인지 몰라도, 등장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불완전한 액션씬 역시 아쉬움을 키운다. 세 명의 성인이 어린 레아를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은 억지스럽고, 스톰트루퍼들은 이번에도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주기 위한 밋밋한 뒷배경으로 소비된다. <스타워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광선검 대결도 흔들리는 카메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완전하지 않은 CG로 인해 어색한 문제를 노출한다. 이는 시리즈의 중추적 인물인 오비완과 아나킨이 복귀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큰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 드라마가 새로운 이야기와 앞으로의 비전을 보여주기보다는 인기 있는 캐릭터들의 이름값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 때문에 본 작의 장점마저도 퇴색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화라고도 불리는 <스타워즈>는 본질적으로 선과 악의 운명적인 대결을 그려낸 거대한 서사시였고, 신화 속 영웅들의 초인적인 활약을 즐기는 시리즈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등장한 <스타워즈> 속 이야기는 현시점에서 사실 더 이상 소구력이 없다. 선악의 구분이 확실했던 냉전 시기와 달리 현대 사회의 많은 주체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손쉽게 나뉘지 않으며, 현대인들은 거대한 악보다도 모습을 감추고 있어서 예상할 수 없는 테러와 같은 악을 더 위협적으로 여긴다. 그래서 악을 처단하는 선한 영웅보다는, 쉽사리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정글과도 같은 현실에서 영웅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매 순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공감을 자아내기에 더 용이하다.
이는 21세기의 <스타워즈>라 불리는 MCU의 '인피니티 사가'가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나 <엔드게임>도 비극적 서사시로 보이는 측면이 있으며, 선악의 장엄한 대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스 베이더에 비하면 타노스는 현대적 테러리스트에 더 가까운 빌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전략적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 후 손 쓸 틈 없이 달아난다. 기습을 당한 어벤져스도 제다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시스를 완전히 제거하여 우주의 균형을 되찾고 평화를 수복하는 제다이와 달리, 시간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면 결코 완전하다고 볼 수 없는 복수를 하는 데 그친다. 이는 9.11 테러 이후 복수를 꿈꾼 미국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복수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현실과 오버랩된다.
물론 그간 <스타워즈>도 시대상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왔다. 당장 프리퀄 삼부작은 은하 의회의 의장이었던 팰퍼틴이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수단을 활용해 은하 제국의 황제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 테러와 같은 위협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던 21세기 초반의 세태를 꼬집었다. 근래 스타워즈 시리즈 중 성공을 맛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만달로리안>의 주인공인 현상금 사냥꾼 딘 자린은 전형적인 영웅이 아니다. 항상 기습과 배신을 경계하면서도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나름의 사랑과 믿음이 있는 그는 보다 현대적인 영웅상에 가깝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역시 제다이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전쟁을 그려내어 호평받았다. 하지만 <오비완 케노비>는 수십 년 전의 인물들을 재소환하여 오래전에 끝맺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회귀한다. 그 결과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오비완 케노비가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알렉 기네스 경이 연기한 현자 오비완이 되어갈수록 그는 더 평면적인 캐릭터로 변하고, 그와 아나킨의 대립은 흥미가 덜해진다.
<오비완 케노비>를 포함해 현재 디즈니+가 스타워즈 프랜차이즈의 작품을 유독 한국에서만 늦게 공개하는 일련의 상황도 결코 작지 않은 문제로 보인다. 이는 한국에서 스타워즈 시리즈의 인기가 적다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른 결정이겠지만, 동시에 디즈니가 스타워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남긴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자신만의 낭만이 있었기에 지난 수십 년간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가 악의 세력인 시스와 제국의 편으로 넘어갔고, 몇몇 되지 않는 소수이자 약자인 제다이와 저항군만이 악에 대항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이들이 기적적으로 승리하는, 대세를 거스르는 용기와 낭만이 숨 쉬는 이야기. 이것이 스타워즈의 매력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흐름인 자본주의적 분석을 차별적 대우의 이유로 대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현재 디즈니+는 끊임없이 스타워즈 드라마들을 준비 중이다. 이미 계획 중인 것만 해도 <만달로리안> 시즌 3, <아소카>, <안도르>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들이 전부 과거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다. <만달로리안>과 <아소카>는 프리퀄과 오리지널 시리즈 사이의 시간대를 다루는 작품이고, <안도르>는 2017년에 개봉한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외전 겸 프리퀄이다. 즉, 이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이미 정해진 결말로 귀결되는 작품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또 <오비완 케노비>의 완성도를 보면 <스타워즈> 시리즈의 완전한 부활은 아직까지 요원해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프랜차이즈의 마지막 남은 이름값까지 고갈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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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브스 아웃 2> 추리물로 위장한 블랙 코미디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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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속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탐정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 어느 날,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의 갑작스러운 초대를 받은 블랑은 마일스의 친구들과 함께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축물 '글래스 어니언'이 위치한 그리스의 한 섬으로 향한다. 마일스의 전 동업자인 '앤디 브랜드(자넬 모네)',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디벨라(캐서린 한)', 과학자 '라이오넬 투생(레슬리 오덤 주니어)', 패션 스타 '버디 제이(케이트 허드슨)'과 유명 스트리머 '듀크 코디(데이브 바티스타)'까지. 블랑은 낯선 이들과 함께 마일스가 준비한 괴상한 살인 미스터리 추리극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글래스 어니언이 숨기고 있는 진짜 미스터리를 감지하고, 은폐된 살인극의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이언 존슨의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개봉 당시 클래식한 추리물의 쾌감을 선사하며 평단과 관객 모두의 호평을 끌어냈다. 이는 <나이브스 아웃>이 애거사 크리스티가 정립한 추리물의 정석을 착실히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일 강의 죽음> 같은 그녀의 추리물은 캐릭터의 개인사와 내면을 묘사하며 그들의 심리적 동기와 반응을 중첩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쌓아 올린다. 그래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극은 사건 발생 이유와 경과를 추적하는 데에 중점을 둔 <셜록 홈즈>와는 결이 다르다. 누가 사건을 벌였는지 그 사연에 주목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모든 인물이 모인 자리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탐정은 내레이터, 더 나아가 스토리텔러의 역할까지도 맡는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도 전편처럼 정도를 착실히 걷는다. '마르타(아나 데 아르마스)'가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것과 달리 블랑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점, 영화의 반 이상이 지난 후에야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것 정도가 전편과 유의미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초반부는 사건에 관련된 캐릭터를 한 명씩 소개한다. 사업의 방향성을 두고 마일스와 관계가 틀어진 앤디, 마일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받는 현 코네티컷 주지사 클레어, 마일스의 사업 비전에 동의하지 않는 과학자 라이오넬, 마일스에게 투자받은 모델 출신 패션 디자이너 버디와 마일스에게 투자를 요구 중인 인플루언서 듀크까지. 그들이 마일스가 보낸 괴상한 퍼즐을 해결하고, 한자리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각각의 인물이 어떤 캐릭터이고 마일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그들의 관계가 곧 살인 미스터리의 복선이자 해결의 실마리로 기능할 예정임을 암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가 다른 맥락에서도 애거사 크리스티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딕 로맨스와 슬래셔 장르를 더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스파이물과 연쇄 살인마 스릴러를 조합해 <ABC 살인사건>을 써 내려간 바 있다. <나이브스 아웃>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존슨은 추리물과 다른 장르를 결합해 자신만의 추리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브스 아웃>은 단순히 살인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추리물의 탈을 쓴 채 사건을 둘러싼 캐릭터들에 주목한 블랙 코미디였다. 카메라는 미국 사회의 구성원을 상징하는 영화 속 각 캐릭터를 적나라하게 비췄다. 이민자 출신인 마르타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트롬비 가문 사람들이 정작 마르타의 출신 국가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대표적이다. 그들은 마르타의 출신을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그저 중남미 국가 중 하나로 꼽는다. 그들에게는 외국인 노동자인 마르타의 국적은 중요한 이슈가 아니므로.
마르타를 도와주는 척 배신했던 '랜섬(크리스 에반스)'도 선조들의 집과 물려받은 권리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블랑은 애초에 랜섬의 할아버지가 파키스탄인 재벌로부터 구입한 집이 트롬비 가문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의 주장을 비웃는다. 이는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에서 불거진 인종주의, 배타주의, 고립주의에 비수를 꽂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이민자 가문 출신인 마르타가 트롬비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고, 정작 트롬비 가족은 저택에서 쫓겨나는 결말로 쐐기를 박는다.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 사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비판하는 한 편의 풍자극이었던 셈이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역시 전편의 블랙 코미디를 계승한다. 단지 비판하는 대상을 바꾼다. 미국 사회의 폐쇄성 대신 자본에 중독된 사회상을 비판한다. 부제이기도 한 '글래스 어니언'이 대표적이다. 작중 글래스 어니언은 까야할 껍질이 매우 많은 양파이기만, 동시에 유리로 만들어져서 텅 비어있는 거대하고 화려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 자체로 돈에 대한 비유로 보인다. 많은 사람은 돈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명성으로 여기며, 현실과 세상을 조종할 수단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서 냉정하게 돈을 관찰하며 그 돈은 그저 교환수단이고, 삶을 영위하기에 필요한 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즉, 영화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될 것인지, 아니면 투명하게 보이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볼 것인지 그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행동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특히 자본이 흑막에 숨은 채 조종하는 사회 시스템을 직시하고, 그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며, 체제 자체를 파괴할 용기가 필요한 시대라고 강조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화는 마일스와 그 친구들을 비웃는다. 스스로를 '붕괴자들'이라고 일컫는 그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기존의 시스템에 천착되어 있다. 마일스는 자기 돈을 무기 삼아 원하는 대로 과학자, 정치인, 셀레브리티, 유튜버를 조종한다. 그들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일스의 자본에 매달린다. 블랑의 말대로, 그들은 진정한 붕괴의 의미를 모른다.
반면에 블랑과 함께 움직이는 또 다른 주인공 '헬렌 브랜드(자넬 모네)'의 존재는 이질적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마일스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마일스의 허영심과 자존심을 상징하는 글래스 어니언을 파괴해 버린다. 특히 헬렌이 명석한 두뇌, 화려한 외모, 뛰어난 재능은 없는 평범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천재도, 정치인도, 재벌도 아닌 한 개인의 힘으로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붕괴의 의미를 모르던 마일스의 친구들이 헬렌이 글래서 어니언을 파괴하자 마침내 종속에서 벗어나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의 주제 의식이 새롭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가 정립된 이래로 항상 제기됐던 비판이다. 그러나 영화가 팬데믹이라는 사회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상 이 메시지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래로 세계의 양극화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은 작년 5월 ‘고통으로 얻는 이익’(Profiting from Pain) 보고서에서 지난 2년간 노동자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에너지, 식품, 제약 기업 등은 막대한 이익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작중 마일스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으로 제시한 게 다름 아닌 소수 활용 에너지 자원이라는 점, 또 그가 방글라데시와 같은 개발도상국 노동자를 착취해 부를 쌓은 게 그저 허구는 아닌 셈이다.
특히 영화의 전반적인 톤 덕분에 이 메시지는 더욱 눈에 들어온다. 냉혹한 현실을 코미디로 풀어낸 아이러니한 결과다. 사실 영화 속에 한데 모인 사람들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들다. 억만장자 IT 거물, 패션 스타, 록스타 과학자, 인플루언서와 주지사까지.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기 때문에 오히려 다소 날카롭고 직설적일 수 있는 영화의 주제나 의도가 더 부드럽게 느껴지고, 재고할 여지가 존재하는 측면도 있다. 어몽어스를 플레이하는 블랑이나 마스크를 쓸지 말지 다투는 친구들의 모습처럼 코로나로 인한 변화를 반영한 유머도 윤활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를 일상과 맞닿아 있는 감정적 측면과 결합해 미스터리라는 소재 속에 녹여내는 데 제 역할을 해낸다. 그래서 팬데믹을 겪은 시청자, 또 앤데믹을 헤쳐 나가야 할 관객에게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기에 라이언 존슨의 재담이 더해지면서 이번 속편은 형의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아우로 거듭난다.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분위기를 한 차례 풀었다가 조이면서 긴장감을 고조하고 살인 사건을 암시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마일스가 준비한 추리 게임을 블랑이 손쉽게 끝낼 때 분위기는 한 차례 가라앉는다.
하지만 캐릭터 간의 오래된 갈등에 다시 불이 붙으면서 영화는 파국으로 달려 나간다. 이때 모나리자 보관함이 여닫히는 소리,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듯 요란한 휴대폰 알람, 파티에 어울리는 유쾌한 음악과 점점 짧아지는 컷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리듬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 하나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산만함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자연스럽게 숨기거나 강조하고 싶은 장치를 화면에 배치한다. 모든 진상을 알고서 이 일련의 상황을 다시 보면 그제야 철저한 계산과 반전으로 가득한 시퀀스가 눈에 들어올 정도다. 단 한순간에 라이언 존슨이 얼마나 추리물에 최적화된 이야기꾼인지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고전적인 작법과 현재를 읽는 통찰력의 시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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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 본 리뷰는 영화의 반전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굿모닝 에브리원 Morning Glory, 2010미국 | 코미디 외 | 2011.03.17 개봉 | 15세이상관람가 | 107분
감독: 로저 미첼
달라지는 관점 덕에 즐거운, <굿모닝 에브리원>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는 '사악', '어둠'과 같은 부정적인 언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든 볼 수 있고, 영화 끝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품이 들지 않는 마법 같은 영화랄까. 말 그대로 참 보기 쉽다. 특히 정신적, 감성적으로 목화솜의 촉감처럼, 안정감과 기분 좋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수다쟁이 베키 풀러(레이첼 맥아담스)의 쉼 없는 말과 행동에 잠깐 집중력과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그들만의 세상'이란 관점을 관객에게 심어 그들에게서 완전히 도태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맹점이 너무 드러나있는 점이 살짝 아쉬움을 남기지만, 무료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 싫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봐도 좋을 영화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조화로워 메인 주인공 베키의 변화하는 감정선이 잘 보인다. 스토리의 모든 요소에 깃든 유머가 꽤 매력적이고, 아침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이 충분히 시각적인 즐거움을 채운다. 마이크(해리슨 포드)의 무표정과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는 불만 가득한 표정도 빼놓을 수 없는 포인트다. 또 사실상 베키의 수다가 아니었다면, <굿모닝 에브리원>은 시작하자마자 풀썩 주저앉았을 것이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굿모닝 에브리원>이 흥미로운 점은 관객에게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을 동시에 성장시키는 것을 초점으로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형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표면적 측면일 뿐이다. 베키의 바쁜 삶을 시작으로 그녀가 악명 높은 방송국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동시에 사랑을 어떻게 쟁취하고 지켜가는지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와 똑같다. 하지만 <굿모닝 에브리원>가 온전히 베키만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녀는 앤드리아와 달리 홀로 해낼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주인공이다. 방송 PD란 직업은 본래 다른 이들과의 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니까. 시청률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사라질 위기에 놓은 아침방송 프로그램 '데이 브레이크'를 되살린 건 베키 혼자가 아니다.
따라서 <굿모닝 에브리원>이 내세운 첫 번째 관점은 '나'가 아닌 '우리'다.
베키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열정을 다 쏟으며, 자신의 존재가치와 위치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다. 고집불통인 마이크까지 변화시키는 사건은 베키의 새로운 성장을 위한 서사적 장치였기에 실패는 더더욱 예견되지 않았다. 망해가는 '데이 브레이크'를 살린 건 포기하지 않는 베키의 열의와 그녀의 역량을 진작에 알아차린 마이크와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데이 브레이크의 소속 스텝들의 합심이었다.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그녀가 일 중독자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꿈을 가진 건 좋아.
여덟 살 때는 귀여웠지.
열여덟 때는 당차 보였어.
스물여덟 먹고도 그 모양이니 창피해 죽겠다.
상처 받기 전에 현실에 눈뜨란 말이야.베키의 엄마는 베키가 지방방송 PD에서 해고당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딸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심을 자식이 대신 성취해야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부모의 입장으로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일을 꿈꿨던 소녀가 꿈을 이룬 후, 더 이상 꿈이 주는 희열감과 행복감에서 빠져 살 수 없었던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란 얘기다. 따라서 베키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닌 일자리임을 엄마의 현실에서 또다시 깨닫게 된다.
다 좋다. 바쁘게 사는 것도, 쉼 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도 전부다. 하지만 베키는 점점 지쳐갔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렵게 들어온 회사에서는 프로그램 폐지를 하겠다고 통보까지 하니 말이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다. 그리고 때마침, 마이크가 등장한다. 그는 베키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지 말라 조언한다. 일에 미쳐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외로움과 사투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또한 평생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아 뉴스를 진행하며, 영향력 있는 앵커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될 거라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단편적인 인간이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람 중 세 번째란 타이틀을 가진 것도 올라가는 것만 인생의 값진 보물이라 생각한 마이크 본인 탓임을 시인한 것이다.
이후, 베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고민이다. 베키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을 해야만 한다. 그게 보통 이야기들의 흐름이니까. 가령, '정말 나에게 일이 전부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일에 미쳐있는 걸까?'란 생각에 묻혀, 일과 개인생활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번 순기능을 하지 못하는 '자기 검열' 말이다.여기서 <굿모닝 에브리원>의 또 다른 관점이 등장한다.
출처: 영화 <굿모닝 에브리원> 스틸컷
사랑스러운 베키를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개인적 시선은 그저 시선으로만 기능했다는 점.
희한하게도 베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보다 직접 행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마이크의 조언과 애인의 배려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는 게 아니라 '조정'한다. 균형을 찾는 것은 베키 개인의 몫이니까. 그녀가 일에 더 미친다고 해서 베키의 삶이 불행할 거란 예측은 아주 불필요한 선입견이란 얘기다. 일과 사랑을 모두 충분히 만족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타인에게 확인시킬 이유가 베키에겐 전혀 없다. 베키는 정말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도, 매번 사랑에 조급해하는 마음도 그녀의 삶을 유지하는 투명하고 깨끗한 사이클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키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균형을 섬세하게 조정하면서 완벽한 '나'로 변화한다.베키 스스로는 변화했다고 느끼지만, 타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키포인트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카메라 앞에서 앞치마를 결코 두르지 않겠다는 고집쟁이 마이크를 카메라 앞에 세운 장본인은 '마이크나 애인에게 영향을 받아 180도로 바뀐 베키'가 아니라 '처음부터 한결같았던 베키'인 셈이다. <굿모닝 에브리원>은 베키의 성장담을 그린 것이 아니다. 베키의 진면목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면서,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친절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보이지 않던 계획이 본 작품의 힘이란 자신감까지 덧붙인다.
마냥 재미있기만 한 영화가 아니다. 분명 당신의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 끝내 '데이 브레이크'를 떠나지 않는 의리의 베키가 <굿모닝 에브리원>의 뻔한 결말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 영화를 본 이들은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