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3-09-21 08:32:29
눈과 귀를 열어야 '붉은 하늘'도 아름답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어파이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함께 뜨겁고 건조한 여름 발트해 해변을 방문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 그러나 숲 속 별장에서 예상치 못한 손님 '나디아'(파울라 베어)와 '데비트'(엔노 트렙스)를 조우한 이후 그들의 여름 계획은 점차 꼬이기 시작한다. 레온은 사사건건 펠릭스와 충돌하고, 새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한 채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반면에 펠릭스는 나디아, 데비트와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이에 더해 휴가뿐만 아니라 일도 레온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막 완성한 소설 출판을 앞두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진 레온. 산불 소식이 들려오고 소방 헬기가 오가는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서도 불길이 꿈뜰거린다. 나디아를 향한 욕망, 데비트를 향한 질투, 펠릭스를 향한 분노가 점점 치솟기 시작하고, 그렇게 네 청춘의 여름은 조금씩 파국을 향해간다.
<어파이어>, 페촐트다운 신작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이른바 ‘베를린 학파’(Berliner Schule)라 불리는 감독들 중 1세대로 불린다. 이들은 외국 도시나 휴양지 등을 무대 삼아 현재 독일인의 일상적인 삶을 관찰하는 작품을 주로 만들기로 유명하다. 페촐트는 비슷하다. <피닉스>, <운디네>와 같은 작품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다룬다. 다만 차이도 있다. 페촐트의 영화는 독일 근현대사를 배경 삼아 독일인의 혼란과 상실감에 주목한다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어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작만큼 무겁지는 않다는 인상은 분명하다. 여름휴가라는 시간적 배경, 바닷가 휴양지라는 공간적 배경이 큰 역할을 한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삼각, 혹은 사각 관계의 청춘 로맨스라는 소재 역시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산불이라는 위협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마지막에 몰린 구성도 한 가지 이유다.
하지만 주인공 레온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파이어>는 평범한 청춘 로맨스가 아니다. 독일어 제목인 <Roter Himmel 붉은 하늘>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레온과 다른 인물의 관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현대인의 소통에 대한 고찰과 경계, 그리고 일말의 희망까지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은 주인공
단언컨대, <어파이어>의 주인공 레온은 끔찍한 인물이다. 첫 등장부터 그렇다. 별장을 가는 차 안. 운전 중인 펠릭스는 차가 이상하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은 레온은 친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차는 고장 나고, 펠릭스와 레온은 짐을 지고 별장까지 걸어가야 한다. 이 짧은 장면만 봐도 레온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고, 폐쇄적인지 손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첫인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준다. 숲이 우거진 지름길을 이용해 별장으로 가려는 레온과 펠릭스. 펠릭스가 길을 하기 위해 잠시 떠난 뒤 레온은 숲에 홀로 남는다. 그곳에서 레온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헬기 소리를 듣지만 하늘에서 헬기를 보지 못한다. 멧돼지 소리도 듣지만 멧돼지 꼬리도 보지 못한다. 차가 이상하다는 펠릭스의 말을 듣지 못한(혹은 않은) 것처럼, 레온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그의 한심한 성정은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벽이나 문 뒤에 숨은 채 타인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데 특출 나다. 예술학교 입시를 준비 중인 펠릭스의 포트폴리오를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지적하며 기분을 상하게 한다.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한 뒤에는 데비트에게 괜히 시비를 건다. 정확히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나디아와 데비트가 연인 관계라고 지레짐작한다. 호텔에서는 호텔 직원의 실수를 대놓고 조롱한다.
자기 손으로 파괴하는 청춘 로맨스
사실 주인공이 짜증 나면 좀처럼 영화에 몰입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파이어>는 예외다. 페촐트는 주인공의 비 호감도를 역이용해서 평범하지 않은 청춘물을 만들어냈다. 자기만의 좁은 세상과 아집에 갇힌 한 청년이 인생을 망치는 비극을 신랄하게 보여주며 예상에서 살짝 벗어난 쌉쌀함을 안겨준다.
우선 레온은 자기 손으로 로맨스를 파괴한다. 생체발광으로 빛나는 밤바다를 보러 가자며 나디아가 호감을 보여주는데도 소통을 거부하며 스스로 가능성을 없앤다. 자기가 집필한 소설 '클럽 샌드위치'를 나디아가 엉망이라고 평가하자, 고작 아이스크림 판매원의 비평이라고 깎아내린다. 그녀가 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 중이라는 사실을 안 뒤에는 자괴감 때문인지 그녀에게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즐거워야 할 휴가도 망친다. 펠릭스와의 대화는 철저히 일방향이다. 펠릭스는 계속해서 제안한다. 해변에 가자고, 같이 해수욕하자고, 저녁 식사를 하자고, 지붕을 같이 수리하자고. 하지만 레온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전부 거절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거절한다. 나디아, 펠릭스, 데비트가 잘 어울리는 가운데, 레온은 해수욕장 인명구조원인 데비트의 직업을 평가절하하며 선민의식을 드러낸다.
보고 듣지 못한 자의 비극
커리어도 엉망으로 만든다. 소설 피드백을 위해 별장을 방문한 출판사 사장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는 갑자기 몸이 아파 입원한다. 검사 후 신장에 문제가 생겨 일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헬무트. 이에 그는 레온에게 진심으로 충고한다. 능력 좋은 편집자를 붙여줄 테니 <클럽 샌드위치>를 포기하고 잠재력을 떨칠 수 있는 새 작품을 집필하라고.
하지만 레온은 복을 걷어찬다. 헬무트가 자기와 자기 소설을 무시했다고 분개한다. 나디아가 일갈하기 전까지는 헬무트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의 진심을 전혀 보지 못한다. 붉게 물든 하늘만 보고 산불을 알지 못하듯이, 그는 자기 앞에 있는 대상을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했다.
대가는 처참하다. 산불에 초토화된 숲처럼 비참한 현실이 레온을 덮친다. 안전하다고 믿은 해변까지 밀고 들어온 열기와 새하얀 잿가루를 목격한 순간에는 이미 늦었다. 레온이 걷어차 버린 가능성과 잠재력은 불 속에서 서로 끌어안은 채 타 죽은 펠릭스와 데비트의 모습으로 그의 눈앞에 등장한다. <어파이어>가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이름값이 어색하지 않은, 쌉쌀한 청춘 영화인 이유다.
아닌 척하며 독일 사회를 꼬집다
다른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파이어>는 독특한 매력을 뽐낸다. 실제로 <어파이어>는 곱씹을수록 묵직한 영화다. 아무리 감독의 전작보다 가볍다고 하지만, 페촐트의 통찰력마저 없어지지는 않았다. 어두운 현실을 직접 그려내지는 않지만, 가벼운 스케치와 터치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온이 데비트 이름을 듣고는 그가 동독 출신이냐고 되묻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순간 데비트를 향한 그의 멸시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범주가 아니다. 동독 주민의 2등 국민(Deutscher zweiter Klasse) 정서가 스쳐 지나간다. 레온이 데비트의 직업을 무시하는 대목도 서독에 비해 동독 지역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높고, 소득 수준이 낮다는 현실을 환기시킨다.
하필이며 펠릭스와 데비트가 산불의 피해자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피부색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펠릭스는 일반적인 게르만족이 아닌 이주민이다. 펠릭스와 데비트는 성소수자이기도 하다. 사회적 소수자, 약자를 대변하는 인물들만 목숨을 잃은 셈이다. 그들의 운명은 바다로부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산불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레온의 말과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따라서 <어파이어>를 독일 사회의 현실과 떼놓고 볼 수는 없다. 이민자, 난민, 동독 주민 등의 불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독일 축구 대표팀은 러시아 월드컵 전후로 메주트 외질 같은 터키 출신 선수와 관련해 논란을 겪은 바 있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은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자치단체장을 배출하며 약진 중이다. 즉, <어파이어>는 레온과 같은 무관심, 멸시와 외면이 독일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하는 영화다. 가장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거대하면서도 중요한 담론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도 붉은 하늘은 아름답다
<어파이어>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레온의 실패와 좌절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레온은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변화한다. 그는 나디야가 함께 보자고 했던 빛나는 밤바다를 목격한다. 소리만 들었던 헬기와 멧돼지도, 붉게 물든 하늘로만 접한 산불의 모습도 두 눈에 똑똑히 담는 데 성공한다.
결말에서 레온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그는 자기 세계에 갇힌 채로 쓴 '클럽 샌드위치'를 포기했다. 직접 겪은 비극적인 여름휴가를 가감 없이 글로 풀어내며 새 소설을 썼다. 암 투병 중인 헬무트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웃는다. 늘 그랬듯이 뒤에 숨는 대신, 앞으로 나서서 나디아를 마주한다. 그렇게 레온은 성장한다.
레온의 성장은 단순히 한 개인, 청년의 성장이 아니다. 한 사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변화 가능성과 저력을 믿는 희망 찬가일지도 모른다. 이는 산불로 물든 붉은 하늘이 단순한 재난의 전조나 위협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산불이라는 위협을 알리는 붉은 하늘을 정확히 보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새 희망이기 때문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주인공이 짜증 나는 만큼 붉은 하늘은 아름답다
Relative contents
-
-
- 「모가디슈」 1차 예고편 분석 그리고 예매권 이벤트
?'모가디슈(2021 여름)' 1차 예고편 확장판 분석
그리고 예매권 이벤트
*자세한 내용은 고정댓글 참조- 모가디슈 영화정보
장르: 드라마, 액션
감독: 류승완
각본: 류승완
제작: 강혜정
출연: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김소진, 정만식, 구교환, 김재화, 박경혜 외
촬영: 최영환
조명: 이재혁
편집
미술
음악
의상
주제곡
촬영 기간: 2019년 11월 ~ 2020년 2월
제작사: 대한민국 외유내강, 덱스터 스튜디오, 필름케이
배급사: 대한민국 국기 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대한민국 국기 2021년 7월
화면비
상영 시간: 121분
제작비: 240억 원#모가디슈 #모가디슈리뷰 #모가디슈예고편
-
- 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
-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메인 예고편
18세 ‘세진’, 덜컥 임산부가 되어버렸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지쳐 거리를 떠돌던 ‘세진’은
가출 경력 4년 차, 동갑내기 ‘주영’을 만난다.
처음 만났지만 절친이 된 ‘세진’과 ‘주영’,
위기의 순간 나타난 파랑머리 ‘재필’과 ‘신지’까지
왠지 닮은 듯한 네 명이 모여 ‘세진’의 유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어른들은 모르는 가장 솔직한 10대들의 이야기
-
- 누구를 위한 피날레인가
길고 길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시즌까지 정주행 완료하면 '스위트홈'이 달라 보일 것이라고 이응복 감독이 큰소리쳤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혹평 세례를 면치 못했던 시즌 1이 제일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스위트홈'은 시즌 3까지 이어오면서 굵직한 이야기를 담아왔다. 시즌 1이 욕망의 씨앗에서 탄생하는 괴물을 선보이며 'K-크리처물'의 시작을 알렸다면, 시즌 2는 장기화된 괴물화 사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며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이 바통을 이어받은 시즌 3은 신인류의 탄생까지 다루며 최종장을 향해 달려 나간다.
동시에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전 시즌에서 무리하게 확장시킨 세계관과 빌드업이 망가진 캐릭터들, 회수 없이 떡밥 뿌리기에만 치중에 둔 스토리 전개 등으로 혹평받았던 부분을 만회해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시즌 3은 시즌 2에 심어뒀던 복선 회수를 하는 데에 집중했으나, 회수 방식이 마구잡이였다. 회수에만 포커싱 했는지 개연성 또한 없고, 막상 복선이 공개됐을 때에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놀라운 반전 등은 없었다.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복선들을 잔뜩 깔아 뒀는지 제작진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확장시킨 세계관 매듭짓기 또한 허술했다. 괴물화와 다른 MH(몬스터휴먼)라고 부르는 특수감염인에 모자라서 신인류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등장했으나, 막상 '스위트홈 3'에서 비중이 크진 않았다. 신인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은혁(이도현)의 컴백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고, MH는 편상욱(이진욱)과 서이수(김시아) 부녀 간 관계성에 묻혀버렸다.
이와 함께 등장인물들을 무분별하게 죽여나가며 급하게 마무리하는 느낌도 지을 수 없었다. 개연성 없이 캐릭터들이 퇴장하는 과정을 봐야 하는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 따윈 없었다.
시즌 3까지 다 보고 나면 '과연 이 작품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왜 스위트홈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등 물음표도 붙는다. 새 시즌이 등장하면서 드라마의 결이 너무나도 달라져 같은 작품인지도 혼란스럽고, 시즌 1에서 조명했던 주요 메시지 '욕망과 인간성에 대한 고민' 또한 희석되어 간다.
아, 장점도 있다. 시즌 2에서 차현수(송강)의 적은 분량이 불만이었던 시청자들에겐 이번 시즌에선 100% 만족할 것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원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갈망했던 이은혁, 이은유(고민시) 남매의 재회도 이번 시즌에서 그려진다. 다만, 깊이감은 없으니 이 점 참고해 주시길.
★★
-
- 옷 잘 입는 영화감독 모음 ZIP
옷 잘 입는 영화감독들은 영화 때깔도 다르더라구요. 올드머니룩의 원조 소피아 코폴라 감독부터 이미 너무도 유명한 웨스앤더슨 감독까지 남다른 센스로 영화는 물론 패션까지 섭렵한 영화감독들의 작품 같이 알아보아
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매혹당한 사람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토르: 러브 앤 썬더
졸라
스파이
라스트 크리스마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애스터 로이드 시티
패스트 라이브즈
남자 사용설명서
킬링 로맨스
-
- [BIFAN 데일리] 로맨스 없이도 로맨틱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배유람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2023년 개봉작 중 입소문으로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역시나 <킬링 로맨스> 아닐까. “재미있겠네. 다음에 봐야지…” 정도로 가볍게 바라보고 있던 이 영화는 극단의 호불호 후기와, 해탈한 듯한 배우들의 인터뷰, 무대 인사 후기까지 죄다 재미있었다. 이제 영화만 재미있으면 되는데. 나는 <킬링 로맨스>를 보기 전에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부터 보았다. 이십대 초반 아직 풋풋하던 내가 극장에서 보기엔 너무… 포스터가 이상해 보였던 작품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고 생각보다 웃겼으며 생각보다 뇌리에 남았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무반주 음악에 흠… 하핫… 핫초ㅑ… 하며 뻘쭘한 춤을 추던 배우 오정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버렸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웃기겠군! 좋겠군! 기대하며 <킬링 로맨스>를 보았다. 재미있었고 웃겼고 좋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영화의 어느 한 구석이 나의 오타쿠 감성을 자극하고 말았으니… 나는 감동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팬과 스타, 로맨스 없이 로맨틱한 그 관계에 대하여.
#1. 브리트니 스피어스 <Lucky>
태초에 “She was everywhere”였던 누군가가 있었다.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 그를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고 그만큼 오해와 편견에 빛을 잃기도 쉬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노래 가사처럼, 그토록 사랑을 받는 스타는 밤에 혼자 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센세이션이 저물고, 세상은 “사랑”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여래(이하늬 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브리트니의 노래 가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수한 말, 쏟아지던 조롱과 비슷한.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HOT의 <행복> 말이다.
기묘한 마이페이스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기세에 눌리기 쉽다. 마치 괴한을 쫓던 그의 “powerful punch”처럼. 그러나 비대한 자의식에 자리를 내어주느라 상대의 자아에는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의 언어와 행복의 노래를 가장한다 해도. 이미 세간은 이 가장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담아낸 지 오래다.
#2. HOT의 <행복>과 레드벨벳의 <행복>
조나단의 입버릇은 ‘완성’이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프레임 속 여래의 미소는 랄라텐 광고 속의 미소 반만큼도 살아있지 않다. 옆집 사수생 범우에게 받아 든 랄라텐을 예의 실력으로 순식간에 마셔버린 다음 미소를 짓는 여래는, 랄라텐 마시는 속도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연예인인데 말이다. 그는 조나단의, 조나단을 위한, 조나단에 의한 조나단 월드에 갇혀 있다.
조나단이 귤을 쥐는 순간, 이 영화에 귤이 처음 등장한 순간, 아직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소름이 돋았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폭력의 수단이 무엇이든 폭력은 폭력이다. 뭐든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 폭력성이다. 새콤달콤한 귤에 죄가 없다고 귤을 이용한 폭력이 죄 아닐 리 없을 것이다.
수단에 감정 이입하는 건 모두 틀렸다. 폭력의 수단뿐 아니라 행복의 수단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노래는 새로 부르면 된다. 레드벨벳의 <행복>을 불러도 되는 거고, HOT 노래를 NCT가 리메이크할 수도 있는 거고요. (참고로 그 곡은 행복이 아니라 <캔디>이며, 공명의 동생 도영은 거기 없었지만… 이선균 씨 참고 바랍니다.) 게다가 잘 들어 보면 여래의 필모그래피에는 이미 <행복>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다. 수단은 바꿔치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칸트처럼 말해 보자.
#3. 에픽하이 <fan> 대신 자우림의 <fan>
가스라이팅 앞에 기꺼이 “bad girl”이 되겠다 일갈하고, <제발>을 부르며 일어선 여래의 분연한 얼굴은 분명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그 덕분에 방범등은 꺼지는 순간 축포가 되고, 바로 그 순간 달은 가득 차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계속 주목하게 된 건 여래와 범우 사이의 마음이었다. 7년째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로 자기 삶을 응원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가. 비록 범우는 여래의 소원을 척척 이루어 주지도, 여래와 같은 마음으로 손발을 척척 맞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래가 돌아갈 과거가 다시 여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런 범우가 영화 속에서 불가능을 넘어 소통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라는 점 또한 괜스레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런 목소리라면 닿을 것이다. 여래에게 닿았듯이. 진심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했으나 끝내 대중과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어떤 이들에게도.
세상에는 범우의 다락방 같은 방이 얼마나 많을까. 부디 거기서 울려 퍼지는 팬의 노래가 에픽하이의 곡보다는 자우림의 곡에 더 가까웠으면 한다. 가질 수가 없는 미친 사랑을 괴로워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더 행복하니까.
#4. 그리고 어느 팬에게 남은 말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오래오래, 시간을 따라 함께 기쁘게 뛰어보자고. 땀 나고 타조 깃털 휘날리는 길이더라도, 같이 뛰어가고 싶다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노래를 부르고(“누나 왜 노래를…”), 거기서 함께 힘을 얻으면서 가보자고. 무지하게 겁나도 끝까지. 그렇게.
나는 당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세월 따라 더해지는 표정, 그런 것들을 오래 보고 싶다고. 그런 모습이 좋다고. 그냥 이 작업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즐거운 것이었으면 한다고.
로맨스가 아니어도 충분히 로맨틱한, 어떤 행복이라고.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7 한국만화박물관 (상영코드 337)
7월 5일 19:30-21:17 CGV소풍 4관 (상영코드 733)
-
-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고양이들의 아파트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재건축이든 상수도를 포함한 일대를 완전히 밀고 새롭게 만드는 재개발이든 집을 지키려는 사람과 지으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익숙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훨씬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 생겼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일 거다. 길거리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엔 재개발 진짜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를 마주 본 상대방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십 년 전부터 나왔던 얘기라고. 절대 못한다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린 내게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이라 엄마에게 물었던 것 같다. 재개발이 뭐냐고.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이 동네가 없어지는 거야.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난다. 놀라움과 걱정이었다. 아무리 내가 은색 대문 안 반지하 집을 싫어했어도 집은 집이었다. 쉬고, 먹고, 자고, 숨어있는 곳. 안전한 공간을 잃게 된다는 말에 불안해하자 엄마가 다독였던 것 같다. 그런 일은 안 생길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나왔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여럿이랬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자들이 강경했는지, 그 외 어떤 이해관계가 얽혔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지금의 엄마에겐 흐릿하고 머나먼 옛이야기이니까. 뭐가 됐든 재개발 일정이 정해지자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동해야만 했다.
누가 그랬던가. 집은 터전이라고.
재건축과 재개발은 아주 달랐다. 동네를 허무는 건 집이라는 공간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동네 언니들과 밤마다 놀던 작은 공원이, 그들에게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가로등 아래 골목이, 심심할 때마다 놀러 갔던 옆집 동생 네를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건 어느 때고 준비가 될 리 없다. 그렇기에 멋모르는 상황에서도 쫓겨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이 공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큰 골목에서 작은 골목으로, 그리고 모퉁이를 돌면 나오던 은색 대문을 가늠할 수 있을까. 2,000세대가 넘는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위해 헐어낸 무수한 가구들. 모든 것이 흙으로 뭉개진 광경을 펜스 너머로 보며 깨달았다. 모든 게 다 사라졌다고.
그런데 사람과 달리 붕괴와 파괴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그곳의 거주한다면, 그 생명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그곳을 집으로 여기는 존재들을 누가 끄집어낼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다.
드론의 시선이 첫 장면이었다. 딱 보기에도 높은 직사각형의 건물들, 그 사이를 연결한 길목, 초록의 향연.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아파트 단지.
초록이 우거진 이곳은 곧 흙으로 뒤덮인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잡았던 이들은 이미 떠났다. 오랜 세월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도, 마지막 식사를 챙겨주듯이 고양이 밥그릇에 음식과 물을 담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들은 약국 앞에서 햇빛을 쬐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에 비비적대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세상 구경에 한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약국 문이 굳게 닫혔다. 철문이 내려진 채로. 특정 날짜까지 영업을 한다는 종이를 보고서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만, 고양이는 한결같이 오던 자리를 찾아온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거라고 확신할 순 없으나 적어도 그들의 터전이 사라지는 중임을 절대 인지하지 못하는 건 맞겠다.
겁도 많고, 경계심도 많고, 무엇보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들을 어떻게 무너질 건물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떠난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듯 제 발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동물권 단체인 '카라'였다. 거주민들과 구분하여 표기를 쉽게 하기 위해 단체 이름을 언급했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중해야 할 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다.
몇 천 세대가 살던 단지를 돌아다니며 곳곳에 숨어있는 고양이들을 찾고,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위함이다. 고양이가 얼마나 있는지, 각각을 무어라 부를지 알아보고 고민하기 위한. 배식도 잊지 않는다. 캔과 물을 빈 그릇 곳곳에 채워 넣어 굶주리지 않도록 한다. 어쩌면 고양이들에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말을 걸고 있으니.
고양이 입장에서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길에 떠도는 고양이들은 야생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어 사람 손을 탄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사무실에 데려갔던 치즈가 딱 그러했다. 조금만 다가서도 하악질을 해대고, 사람이 손을 내밀면 할퀴거나 물고,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이 고양이를 대하던 사람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왜 인상적이었냐 하면, 지긋지긋해 보여서다. 신념과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똘똘 뭉쳤을 얼굴을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해 보니 그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지친 어느 직장인이었다. 뭐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고양이는 고양이고, 사람은 모두 사람인데. 그때서야 이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집중이 되었다.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아서.
고양이들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는 과정은 무척 많은 일을 요했다. 앞서 말한 고양이 기록과 배식은 손톱만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무엇보다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포획이다. 다친 걸 치료하든 검사를 하든 중성화를 시키든 케어를 하려면 고양이를 데려가야 하는데, 마구잡이로 쫓아다닐 수 없으니.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고양이가 알 리 없지만 사람 또한 고양이의 마음을 모르니까 서로 비등비등한 셈 칠 수 있겠다.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꼭 고양이 같았다. 사냥감을 노리려고 조심히 다가서고, 들키는 순간 허탕 치고, 다시 때를 기다리고. 조심조심 살금살금, 그러나 재빠르게.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도와주려는 동물들을 그들이 닮아가고 있다는 걸.
한 사람이 나비야, 나비야, 애달프게 고양이를 찾아다니다가 다른 고양이를 발견한 장면이 생각난다. 음식 먹기에 집중한 고양이에게 나비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름을 붙여서일까. 고양이, 그러니까 사람과 다른 동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존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답답함을 듣는 것 같았다.
2시간 가까이 그들의 고양이 터전 이동 작전을 보다 보니 작게나마 나의 시선도 달라진 기분이었다. 왜 고양이를 도우려는 건지, 무엇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어떻게 이 지난한 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지 등 궁금증이 사라졌다. 그저 받아들였다. 습관처럼 체화된 일의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정확할까. 그때의 순간적인 감정과 지금의 행동은 결이 다를 수도 있는데. 처음은 처음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카페에서 한데 모인 사람들이 이 작전에 대해서 논쟁을 펼쳤다. 겉보기엔 똑같이 고양이 구조 활동을 하지만, 그 의도와 의미가 완전히 다른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느 한 분이 강경하게 말했다. 이건 고양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대단한 희생도 뛰어난 모성도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고양이에게 자신들은 캔따개일 뿐이라는 그 말에 왠지 모를 웃음이 지어졌다.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자신의 생각을 특별히 꾸며내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단호하게, 어찌 보면 날카롭게 찌르는 말투는 웬만큼 생각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특히 동물을 위하는 건 사람들의 모순된 반응(대단해/굳이?)이 양쪽에서 들릴 일이니 말이다.
나는 두 방향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 또한 그 사람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채.
재건축 현장 주변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그래서 고양이들을 해할까 봐, 모자와 외투로 존재를 가리며 아직 터전을 옮기지 못한 고양이들에게 또 한 끼를 건네는 사람들. 고양이가 사람처럼, 사람이 고양이처럼 되는 순간들. 끝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마음들. 기꺼이 책임지려는 이들의 노력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
- 시대를 노래했던 카나리아
이 글은 영화 [엘비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이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설적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던 특유의 몸짓과, 노래실력으로 단숨에 제왕의 자리에 올라간 그였지만. 모든 아이콘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그만의 어려움들이 있었고.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영화 [엘비스]는 그 전설의 시작에서부터 쓸쓸한 마지막 모습까지를 세 시간에 걸친 이야기로 풀어낸다. 음악 영화라는 틀에 갖혀 노래에 치중된 영화이기보다는, 가수가 아닌 엘비스의 모습과 그의 인생에 존재했던 고뇌들에 대해서도 함께 하고 있어. 드라마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신예 오스틴 버틀러의 싱크로율 높은 연기와 톰 행크스의 안정적인 연기가 합해져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으며, 다양한 화면 전환 또한 늘어질 법한 분위기를 반등시키는데 한 몫 한다.
핑크 캐딜락과 지팡이;꿈과 현실을 색으로 표현하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엘비스의 어머니가 늘 꿈에 그리던 것은 핑크 캐딜락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품은 아니기에 소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인생에 자괴감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아니지만. 가끔 꺼내 보면 온 마음에 들어찬 퀴퀴한 현실을 한 번씩 쓸어내릴 수 있을 만큼 강한 바람 정도는 되어주는 것.
파커 대령(톰 행크스)을 만나기 전까지. 엘비스의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인생을 견뎌내며 걸어나가는데 꼭 필요한 지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을 향해 아주 더디지만 확실한 걸음을 내딛는 데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들.
대령은 이미 작은 캐딜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엘비스를 처음 본 순간 이제는 새로운 버전의 차를 몰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착각이었다. 엘비스는 그에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되는 지팡이었다. 그것도 절대 부러져서도. 그렇다고 늘어나는 대령의 탐욕이 무거워 버티기 힘들다고 투덜대는 일이 없어야만 하는 고분고분한 지팡이여야만 했다.
그에 반해 늘 지팡이 같은 존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엘비스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하나둘씩 자신과 멀어져 갔다. 캐딜락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는 번지르르하다못해 미끄러질 것만 같은 삶이었지만. 마음의 근간을 하나씩 잃은 엘비스의 삶은 점점 무너져내린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것 같은 핑크 캐딜락의 삶을 살지만. 오히려 단조로운 현실에 겨우 발맞출 수 있었던 예전의 삶보다 색을 잃어 흑백으로, 혹은 빛바래지는 후반부의 엘비스를 보고 있으면. 그 반짝거림으로 자신의 초라하고 비어가는 마음을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파커가 미켈란젤로가 될 수 없었던 이유;원석과 보석 사이의 딜레마
사진출처:다음 영화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원본이 개정본, 혹은 복제본 보다 가치 있다고들 말하지만. 반대가 되는 경우가 드물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원석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빵 뜬 연예인들에게 이제서야 발굴된 보석이라거나. 이런 원석이 대체 여태 어디에 숨어 있었냐는 말을 하는 것만 봐도. 원석과 보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파커 대령은 원석에 가까웠던 엘비스를 발굴해냈고. 그 원석이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되도록 세공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덕분에 신경증 정도로 치부되어도 별말 할 수 없었을 다리(혹은 하반신)를 떠는 것조차도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로 만들어 냈다. 그렇다. 파커가 Nobody를 Somebody로 만들어준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파커는 세공 방법에 대한 지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나 허락된 빛(Light)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주장했다. 마치 엘비스는 자신이 아니었으면 암흑 속에 영원히 갇혀 있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듯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엘비스의 고삐를 틀어쥔 그가. 모든 것을 무대에 쏟아낸 채 커튼 뒤에서 기진 맥진한 엘비스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서. 문득 그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상을 만들 때. 돌 속에 숨겨진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믿었던. 이미 돌 안에는 완성된 무언가가 있었고. 자신은 그저 불필요한 것을 없애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세기의 예술가 말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대령이 스스로가 그저 협잡꾼에 불과함을 깨달아서 울길 바랐다. 그렇게 유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채 무릎을 꿇은 저 엘비스를 사실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원래 완성된 상태로 그저 현실에 가려진 상태였음을 느꼈기 때문에 울었기를 바랐다.
시대의 카나리아;노래로 할 수 없는 말을 대신하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지금은 모두 센서로 대체되었지만. 예전에는 석탄을 캘 때 발생하는 가스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광부들은 카나리아를 가스 탐지기처럼 이용했다.
투명한 새장 속의 카나리아가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작업을 멈추었다. 물론 이렇게 죽어가는 카나리아의 비용과 그 죽음을 지켜만 보아야 하는 어려움을 덜기 위해 나중에는 새가 활기를 잃으면 공기를 주입해 되살리는 시스템까지 갖추어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탄광의 카나리아.라는 말은 다가오는 위험을 먼저 알려주는 존재를 뜻하는 말로 지금까지도 여겨지고 있다.
시대의 모든 변화 앞에 서 있었던 엘비스를 보며. 마치 그 시대의 카나리아 같다는 생각이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다못해 쓰러져서는 안 되는 존재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각종 약물을 투여하는 장면까지도 말이다.
어차피 모든 위험. 혹은 비난은 엘비스가 감수할 테니. 엘비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늘 극한까지 등 떠밀어댔고. 주변에 아무도 없이 모든 위험을 피부 하나로 다 느껴야 했을 엘비스는 그저 그 두려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노래로 하는 것 외에 자신이 가진 수단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실제 엘비스가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공연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이제 한계까지 왔다고 퍼덕이면서. 환호의 박수가 아닌 애처로움의 눈물이 먼저 터졌다.
이런 나의 감상도 어떻게 보면 이미 그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같잖은 위로 같기만 했다. 만약 나 역시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의 절규에 그저 잘한다며 손뼉을 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마지막 공연 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치면서
빠른 전개와 눈을 사로 잡는 화면들. 그리고 엘비스가 음악이라는 것에 빠져드는 것을 묘사하는 초반 10분 시퀀스는 그 누구의 마음도 뺏을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또한 거의 세 시간에 달하는 런닝 타임도 잘 분배하고 조절해서 그다지 지겹다거나 영화를 감상하는데 있어 물리적 시간이 주는 괴로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마치 [나이트 메어 앨리]를 보는 것 처럼 환각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게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엘비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황제의 뒤안길이 쓸쓸하게 느껴져 마음이 아프지만. 그가 우리에게 준 유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이 글의 TMI]
1.독일어..갑자기 너무 어려워졌어요...
2. 하지만 포기하는건 부끄러워서 못하겠음.ㅠㅠ
3.그래서 엉엉 울면서 매일 하고 있는데.
4.근데 이제 거기 복숭아랑 망고를 잔뜩 끼얹은 공부를 하고 있죠(?)
구독과 댓글, 좋아요는 초보 크리에이터에게 큰 힘이 됩니다.
-
- 영화 '스펜서' 리뷰
3월 11일,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다룬 영화 <스펜서>의 시사회에 참석하였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찰스 왕자와 결혼한 왕세자비이자 영국을 넘어 전세계로부터 사랑 받은 사람이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패션에 관심을 가진 후, 특히 최근 바이커 쇼츠가 유행하면서 그녀가 패션 아이콘이라는 점을 실감했다.
다이애나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영화를 감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글들을 찾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리고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녀와 그녀의 삶에 대해 이해한 채로 관람한 것은 매우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영화와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는 1997년에 마무리된 그녀의 짧은 생애 중 말기에 해당하는 1991년 크리스마스 시즌의 3일을 배경으로 한다.
러닝타임 116분, 영화 내 배경 3일에 다이애나와 그녀의 삶을 다 담으려니 굉장히 압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리 넷플릭스에서 <윈저 이야기: 영국 왕실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에피소드 5 '비극의 씨앗'을 시청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https://www.netflix.com/title/80181555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추가로 그녀의 생애가 간략히 정리된 마리 끌레르의 아티클을 공유한다.
이제 영화의 몇 장면들을 공유하면서 추가적인 정보와 감상을 남기려고 한다.
알다시피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비 역을 맡았다.
크리스틴은 다이애나에 대해 이해하고 그녀의 습관들을 캐치하고자 여러 영상들을 보고 2권의 전기를 읽었다고 한다.
그녀는 <스펜서>를 통해 오스카 후보에도 올랐는데, 다이애나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웃음 뒤에 감춰진 슬픔을 잘 표현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가장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정말 강렬했다.
관람 전 읽었던 글에서 한 해외 평론가는 스펜서의 장르를 '스릴러'라고 표현했던데,
품위 있게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가족 스릴러가 그저 이 영화의 장르인 게 아니라 왕실 가족의 숨은 이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에서 다이애나 외에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앤 불린(Anne Boleyn)이다.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부인으로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간통 등의 혐의로 참수당했다.
영화에서는 다이애나가 앤 불린의 전기를 읽으며 그녀에 공감하는데, 실제는 이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외신에 따르면, 현실에서 앤 불린과 다이애나의 비교는 기껏해야 미미한 정도였다고 한다.
(출처: Newsweek)
그도 그럴 것이 둘은 공통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둘 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고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왕족과 결혼한 백작의 딸이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충격적인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헨리 8세가 앤 불린의 언니인 메리 불린과 불륜을 저질렀던 것과 같이
찰스 왕자가 다이애나의 언니 사라 스펜서(Sarah Spencer)와 불륜을 저질렀던 적이 있다는 점이다.
감독은 둘의 비교를 통해 당시 영국 왕실에서 다이애나를 얼마나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 다이애나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으로는 '파파라치'가 있다.
그녀는 당시 가장 사진을 많이 찍힌 여성으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과 파파라치에 시달렸다.
심지어 이는 그녀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다이애나의 차 사고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구하려고 하기보다 그녀의 사진을 찍기 바빴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는 크리스틴의 표정과 숨소리를 강조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선에 불안감을 느끼는 다이애나를 표현한다.
영화는 거울에 비친 다이애나를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이 역시도 외부의 시선에 시달리는 그녀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왕실 가족들과의 식사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주방에서 음식을 먹는 다이애나의 모습이다.
실제로 다이애나는 거식증과 폭식증 등 심각한 식이장애에 시달렸다고 한다.
당구대 양 끝단에 서있는 다이애나와 찰스 왕자,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정 공을 통해 그들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장면.
위에서 말했듯, 영화는 3일이라는 시간적 배경 내에 그녀의 생애를 담으려 했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는 다이애나의 타지마할 사진이 연상되었다.
다이애나와 찰스 왕자는 1992년 인도를 여행했는데, 찰스 왕자가 약속과 달리 혼자 출장을 떠나며 다이애나 혼자 타지마할을 방문해야 했다.
이 때 찍힌 다이애나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타지마할이 죽은 부인을 애도하며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 사진은 굉장히 유명해졌다.
영화에서 다이애나의 진실한 친구로 등장하는 매기.
그리고 매기가 남긴 메시지는 다이애나의 사망 26년 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우리가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다이애나의 또다른 모습은 어머니로서의 그녀다.
다이애나의 어머니는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했고, 다이애나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녀는 어머니가 떠나던 날의 자갈을 밟는 발걸음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아픔에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다이애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고자 노력했다.
왕실의 아이들은 태어나면 곧장 보모에게 맡겨지는데, 다이애나는 이를 반대하며 자신이 직접 돌보았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다이애나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이해하는 모습과 다정함이 돋보인다.
<스펜서>를 보면서,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영화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색감과 미장센으로 보는 내내 눈이 즐거웠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훌륭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앤 불린과의 비교는 관객의 입장에서 공감하기 어려웠으며 전반적으로 너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일부 장면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패션 비디오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왕세자비가 아니라 생애 내내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온 다이애나 스펜서로서의 그녀를 잘 보여준 영화다.
3월이 여성의 달인 만큼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한 여성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로 추천한다.
-
-
- 「모가디슈」 1차 예고편 분석 그리고 예매권 이벤트
?'모가디슈(2021 여름)' 1차 예고편 확장판 분석
그리고 예매권 이벤트
*자세한 내용은 고정댓글 참조- 모가디슈 영화정보
장르: 드라마, 액션
감독: 류승완
각본: 류승완
제작: 강혜정
출연: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김소진, 정만식, 구교환, 김재화, 박경혜 외
촬영: 최영환
조명: 이재혁
편집
미술
음악
의상
주제곡
촬영 기간: 2019년 11월 ~ 2020년 2월
제작사: 대한민국 외유내강, 덱스터 스튜디오, 필름케이
배급사: 대한민국 국기 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일: 대한민국 국기 2021년 7월
화면비
상영 시간: 121분
제작비: 240억 원#모가디슈 #모가디슈리뷰 #모가디슈예고편
-
- 영화 <행복의 나라> 2차 예고편
1979년 10월 26일, 상관의 명령에 의해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박태주’와 그의 변호를 맡으며 대한민국 최악의 정치 재판에 뛰어 든 변호사 ‘정인후’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
-
-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 메인 예고편
18세 ‘세진’, 덜컥 임산부가 되어버렸다.
무책임한 어른들에 지쳐 거리를 떠돌던 ‘세진’은
가출 경력 4년 차, 동갑내기 ‘주영’을 만난다.
처음 만났지만 절친이 된 ‘세진’과 ‘주영’,
위기의 순간 나타난 파랑머리 ‘재필’과 ‘신지’까지
왠지 닮은 듯한 네 명이 모여 ‘세진’의 유산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어른들은 모르는 가장 솔직한 10대들의 이야기
-
- 누구를 위한 피날레인가
길고 길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시즌까지 정주행 완료하면 '스위트홈'이 달라 보일 것이라고 이응복 감독이 큰소리쳤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혹평 세례를 면치 못했던 시즌 1이 제일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스위트홈'은 시즌 3까지 이어오면서 굵직한 이야기를 담아왔다. 시즌 1이 욕망의 씨앗에서 탄생하는 괴물을 선보이며 'K-크리처물'의 시작을 알렸다면, 시즌 2는 장기화된 괴물화 사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며 세계관을 확장시켰다. 이 바통을 이어받은 시즌 3은 신인류의 탄생까지 다루며 최종장을 향해 달려 나간다.
동시에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전 시즌에서 무리하게 확장시킨 세계관과 빌드업이 망가진 캐릭터들, 회수 없이 떡밥 뿌리기에만 치중에 둔 스토리 전개 등으로 혹평받았던 부분을 만회해야 하는 미션이 있었다.
시즌 3은 시즌 2에 심어뒀던 복선 회수를 하는 데에 집중했으나, 회수 방식이 마구잡이였다. 회수에만 포커싱 했는지 개연성 또한 없고, 막상 복선이 공개됐을 때에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놀라운 반전 등은 없었다.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복선들을 잔뜩 깔아 뒀는지 제작진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확장시킨 세계관 매듭짓기 또한 허술했다. 괴물화와 다른 MH(몬스터휴먼)라고 부르는 특수감염인에 모자라서 신인류라는 새로운 개념까지 등장했으나, 막상 '스위트홈 3'에서 비중이 크진 않았다. 신인류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은혁(이도현)의 컴백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고, MH는 편상욱(이진욱)과 서이수(김시아) 부녀 간 관계성에 묻혀버렸다.
이와 함께 등장인물들을 무분별하게 죽여나가며 급하게 마무리하는 느낌도 지을 수 없었다. 개연성 없이 캐릭터들이 퇴장하는 과정을 봐야 하는 시청자들에 대한 배려 따윈 없었다.
시즌 3까지 다 보고 나면 '과연 이 작품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왜 스위트홈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등 물음표도 붙는다. 새 시즌이 등장하면서 드라마의 결이 너무나도 달라져 같은 작품인지도 혼란스럽고, 시즌 1에서 조명했던 주요 메시지 '욕망과 인간성에 대한 고민' 또한 희석되어 간다.
아, 장점도 있다. 시즌 2에서 차현수(송강)의 적은 분량이 불만이었던 시청자들에겐 이번 시즌에선 100% 만족할 것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원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갈망했던 이은혁, 이은유(고민시) 남매의 재회도 이번 시즌에서 그려진다. 다만, 깊이감은 없으니 이 점 참고해 주시길.
★★
-
- 옷 잘 입는 영화감독 모음 ZIP
옷 잘 입는 영화감독들은 영화 때깔도 다르더라구요. 올드머니룩의 원조 소피아 코폴라 감독부터 이미 너무도 유명한 웨스앤더슨 감독까지 남다른 센스로 영화는 물론 패션까지 섭렵한 영화감독들의 작품 같이 알아보아
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매혹당한 사람들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
토르: 러브 앤 썬더
졸라
스파이
라스트 크리스마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애스터 로이드 시티
패스트 라이브즈
남자 사용설명서
킬링 로맨스
-
- [BIFAN 데일리] 로맨스 없이도 로맨틱
감독] 이원석
출연] 이하늬 이선균 공명 배유람
시놉시스] 대재앙 같은 발연기로 국민 조롱거리로 전락한 톱스타 ‘여래’(이하늬).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남태평양 ‘콸라’섬에서 운명처럼 자신을 구해준 재벌 ‘조나단’(이선균)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한편, 서울대가 당연한 집안에서 홀로 고독한 입시 싸움 중인 4수생 ‘범우’(공명)는 한때 자신의 최애였던 여래가 옆집에 이사온 것을 알게 되고 날마다 옥상에서 단독 팬미팅(?)을 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나단의 사업 확장을 위한 인형 역할에 지친 여래는 완벽한 스크린 컴백을 위해 범우에게 SOS를 보내게 되고 이들은 여래의 인생을 되찾기 위한 죽여주는 계획을 함께 모의하는데…
2023년 개봉작 중 입소문으로 가장 화제가 된 작품은 역시나 <킬링 로맨스> 아닐까. “재미있겠네. 다음에 봐야지…” 정도로 가볍게 바라보고 있던 이 영화는 극단의 호불호 후기와, 해탈한 듯한 배우들의 인터뷰, 무대 인사 후기까지 죄다 재미있었다. 이제 영화만 재미있으면 되는데. 나는 <킬링 로맨스>를 보기 전에 감독의 전작 <남자사용설명서>부터 보았다. 이십대 초반 아직 풋풋하던 내가 극장에서 보기엔 너무… 포스터가 이상해 보였던 작품이었는데, 생각보다 좋았고 생각보다 웃겼으며 생각보다 뇌리에 남았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무반주 음악에 흠… 하핫… 핫초ㅑ… 하며 뻘쭘한 춤을 추던 배우 오정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버렸다.)
이것도 재미있겠군! 웃기겠군! 좋겠군! 기대하며 <킬링 로맨스>를 보았다. 재미있었고 웃겼고 좋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영화의 어느 한 구석이 나의 오타쿠 감성을 자극하고 말았으니… 나는 감동까지 받아버리고 말았다. 팬과 스타, 로맨스 없이 로맨틱한 그 관계에 대하여.
#1. 브리트니 스피어스 <Lucky>
태초에 “She was everywhere”였던 누군가가 있었다. 존재 자체로 센세이션. 그를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일방적이고 그만큼 오해와 편견에 빛을 잃기도 쉬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Lucky> 노래 가사처럼, 그토록 사랑을 받는 스타는 밤에 혼자 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센세이션이 저물고, 세상은 “사랑”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의 여래(이하늬 분)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브리트니의 노래 가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수한 말, 쏟아지던 조롱과 비슷한.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노래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HOT의 <행복> 말이다.
기묘한 마이페이스로 밀어붙이면 상대는 기세에 눌리기 쉽다. 마치 괴한을 쫓던 그의 “powerful punch”처럼. 그러나 비대한 자의식에 자리를 내어주느라 상대의 자아에는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의 언어와 행복의 노래를 가장한다 해도. 이미 세간은 이 가장을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로 담아낸 지 오래다.
#2. HOT의 <행복>과 레드벨벳의 <행복>
조나단의 입버릇은 ‘완성’이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프레임 속 여래의 미소는 랄라텐 광고 속의 미소 반만큼도 살아있지 않다. 옆집 사수생 범우에게 받아 든 랄라텐을 예의 실력으로 순식간에 마셔버린 다음 미소를 짓는 여래는, 랄라텐 마시는 속도 하나만으로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연예인인데 말이다. 그는 조나단의, 조나단을 위한, 조나단에 의한 조나단 월드에 갇혀 있다.
조나단이 귤을 쥐는 순간, 이 영화에 귤이 처음 등장한 순간, 아직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왜 소름이 돋았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폭력의 수단이 무엇이든 폭력은 폭력이다. 뭐든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 폭력성이다. 새콤달콤한 귤에 죄가 없다고 귤을 이용한 폭력이 죄 아닐 리 없을 것이다.
수단에 감정 이입하는 건 모두 틀렸다. 폭력의 수단뿐 아니라 행복의 수단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노래는 새로 부르면 된다. 레드벨벳의 <행복>을 불러도 되는 거고, HOT 노래를 NCT가 리메이크할 수도 있는 거고요. (참고로 그 곡은 행복이 아니라 <캔디>이며, 공명의 동생 도영은 거기 없었지만… 이선균 씨 참고 바랍니다.) 게다가 잘 들어 보면 여래의 필모그래피에는 이미 <행복>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있다. 수단은 바꿔치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칸트처럼 말해 보자.
#3. 에픽하이 <fan> 대신 자우림의 <fan>
가스라이팅 앞에 기꺼이 “bad girl”이 되겠다 일갈하고, <제발>을 부르며 일어선 여래의 분연한 얼굴은 분명 이 영화를 끌고 가는 힘이다. 그 덕분에 방범등은 꺼지는 순간 축포가 되고, 바로 그 순간 달은 가득 차올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계속 주목하게 된 건 여래와 범우 사이의 마음이었다. 7년째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노래로 자기 삶을 응원한다는 건 어떤 마음인가. 비록 범우는 여래의 소원을 척척 이루어 주지도, 여래와 같은 마음으로 손발을 척척 맞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여래가 돌아갈 과거가 다시 여래의 미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그런 범우가 영화 속에서 불가능을 넘어 소통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라는 점 또한 괜스레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런 목소리라면 닿을 것이다. 여래에게 닿았듯이. 진심으로 표현하고 소통하고자 했으나 끝내 대중과 화해하지 못하고 떠난 어떤 이들에게도.
세상에는 범우의 다락방 같은 방이 얼마나 많을까. 부디 거기서 울려 퍼지는 팬의 노래가 에픽하이의 곡보다는 자우림의 곡에 더 가까웠으면 한다. 가질 수가 없는 미친 사랑을 괴로워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더 행복하니까.
#4. 그리고 어느 팬에게 남은 말
한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오래오래, 시간을 따라 함께 기쁘게 뛰어보자고. 땀 나고 타조 깃털 휘날리는 길이더라도, 같이 뛰어가고 싶다고. 뜬금없는 타이밍에 노래를 부르고(“누나 왜 노래를…”), 거기서 함께 힘을 얻으면서 가보자고. 무지하게 겁나도 끝까지. 그렇게.
나는 당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세월 따라 더해지는 표정, 그런 것들을 오래 보고 싶다고. 그런 모습이 좋다고. 그냥 이 작업이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즐거운 것이었으면 한다고.
로맨스가 아니어도 충분히 로맨틱한, 어떤 행복이라고.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중 상영일정
7월 1일 19:30-21:17 한국만화박물관 (상영코드 337)
7월 5일 19:30-21:17 CGV소풍 4관 (상영코드 733)
-
-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고양이들의 아파트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재건축이든 상수도를 포함한 일대를 완전히 밀고 새롭게 만드는 재개발이든 집을 지키려는 사람과 지으려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상대적으로 익숙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보았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훨씬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 생겼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일 거다. 길거리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번엔 재개발 진짜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그를 마주 본 상대방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십 년 전부터 나왔던 얘기라고. 절대 못한다며 단정적으로 말했다. 어린 내게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이라 엄마에게 물었던 것 같다. 재개발이 뭐냐고.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이 동네가 없어지는 거야.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기억난다. 놀라움과 걱정이었다. 아무리 내가 은색 대문 안 반지하 집을 싫어했어도 집은 집이었다. 쉬고, 먹고, 자고, 숨어있는 곳. 안전한 공간을 잃게 된다는 말에 불안해하자 엄마가 다독였던 것 같다. 그런 일은 안 생길 거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나왔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여럿이랬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자들이 강경했는지, 그 외 어떤 이해관계가 얽혔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지금의 엄마에겐 흐릿하고 머나먼 옛이야기이니까. 뭐가 됐든 재개발 일정이 정해지자 그곳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이동해야만 했다.
누가 그랬던가. 집은 터전이라고.
재건축과 재개발은 아주 달랐다. 동네를 허무는 건 집이라는 공간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동네 언니들과 밤마다 놀던 작은 공원이, 그들에게서 자전거를 처음 배웠던 가로등 아래 골목이, 심심할 때마다 놀러 갔던 옆집 동생 네를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건 어느 때고 준비가 될 리 없다. 그렇기에 멋모르는 상황에서도 쫓겨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이 공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큰 골목에서 작은 골목으로, 그리고 모퉁이를 돌면 나오던 은색 대문을 가늠할 수 있을까. 2,000세대가 넘는 규모의 아파트 단지를 위해 헐어낸 무수한 가구들. 모든 것이 흙으로 뭉개진 광경을 펜스 너머로 보며 깨달았다. 모든 게 다 사라졌다고.
그런데 사람과 달리 붕괴와 파괴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들이 여전히 그곳의 거주한다면, 그 생명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사람들이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할 때에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그곳을 집으로 여기는 존재들을 누가 끄집어낼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의 출발점은 여기서부터다.
드론의 시선이 첫 장면이었다. 딱 보기에도 높은 직사각형의 건물들, 그 사이를 연결한 길목, 초록의 향연.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아파트 단지.
초록이 우거진 이곳은 곧 흙으로 뒤덮인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잡았던 이들은 이미 떠났다. 오랜 세월 약국을 운영하던 약사도, 마지막 식사를 챙겨주듯이 고양이 밥그릇에 음식과 물을 담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들은 약국 앞에서 햇빛을 쬐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길에 비비적대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세상 구경에 한창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약국 문이 굳게 닫혔다. 철문이 내려진 채로. 특정 날짜까지 영업을 한다는 종이를 보고서 우리는 그 의미를 파악하지만, 고양이는 한결같이 오던 자리를 찾아온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거라고 확신할 순 없으나 적어도 그들의 터전이 사라지는 중임을 절대 인지하지 못하는 건 맞겠다.
겁도 많고, 경계심도 많고, 무엇보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들을 어떻게 무너질 건물 밖으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떠난 사람들의 자리를 메우듯 제 발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동물권 단체인 '카라'였다. 거주민들과 구분하여 표기를 쉽게 하기 위해 단체 이름을 언급했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중해야 할 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다.
몇 천 세대가 살던 단지를 돌아다니며 곳곳에 숨어있는 고양이들을 찾고, 사진을 찍는다. 기록을 위함이다. 고양이가 얼마나 있는지, 각각을 무어라 부를지 알아보고 고민하기 위한. 배식도 잊지 않는다. 캔과 물을 빈 그릇 곳곳에 채워 넣어 굶주리지 않도록 한다. 어쩌면 고양이들에겐 큰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말을 걸고 있으니.
고양이 입장에서는 평화가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길에 떠도는 고양이들은 야생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어 사람 손을 탄 고양이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예민하다. 사무실에 데려갔던 치즈가 딱 그러했다. 조금만 다가서도 하악질을 해대고, 사람이 손을 내밀면 할퀴거나 물고,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며 공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이 고양이를 대하던 사람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왜 인상적이었냐 하면, 지긋지긋해 보여서다. 신념과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똘똘 뭉쳤을 얼굴을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해 보니 그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지친 어느 직장인이었다. 뭐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걸까. 결국 고양이는 고양이고, 사람은 모두 사람인데. 그때서야 이 다큐멘터리의 흐름에 집중이 되었다. 아주 먼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아서.
고양이들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하는 과정은 무척 많은 일을 요했다. 앞서 말한 고양이 기록과 배식은 손톱만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무엇보다 가장 어려워 보였던 건 포획이다. 다친 걸 치료하든 검사를 하든 중성화를 시키든 케어를 하려면 고양이를 데려가야 하는데, 마구잡이로 쫓아다닐 수 없으니.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고양이가 알 리 없지만 사람 또한 고양이의 마음을 모르니까 서로 비등비등한 셈 칠 수 있겠다.
이때 사람들의 모습은 꼭 고양이 같았다. 사냥감을 노리려고 조심히 다가서고, 들키는 순간 허탕 치고, 다시 때를 기다리고. 조심조심 살금살금, 그러나 재빠르게. 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도와주려는 동물들을 그들이 닮아가고 있다는 걸.
한 사람이 나비야, 나비야, 애달프게 고양이를 찾아다니다가 다른 고양이를 발견한 장면이 생각난다. 음식 먹기에 집중한 고양이에게 나비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름을 붙여서일까. 고양이, 그러니까 사람과 다른 동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존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답답함을 듣는 것 같았다.
2시간 가까이 그들의 고양이 터전 이동 작전을 보다 보니 작게나마 나의 시선도 달라진 기분이었다. 왜 고양이를 도우려는 건지, 무엇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어떻게 이 지난한 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지 등 궁금증이 사라졌다. 그저 받아들였다. 습관처럼 체화된 일의 계기를 콕 집어 말할 수 있을까. 말한다고 한들 그게 얼마나 정확할까. 그때의 순간적인 감정과 지금의 행동은 결이 다를 수도 있는데. 처음은 처음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카페에서 한데 모인 사람들이 이 작전에 대해서 논쟁을 펼쳤다. 겉보기엔 똑같이 고양이 구조 활동을 하지만, 그 의도와 의미가 완전히 다른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었다. 어느 한 분이 강경하게 말했다. 이건 고양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대단한 희생도 뛰어난 모성도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고양이에게 자신들은 캔따개일 뿐이라는 그 말에 왠지 모를 웃음이 지어졌다.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자신의 생각을 특별히 꾸며내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단호하게, 어찌 보면 날카롭게 찌르는 말투는 웬만큼 생각 정리가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특히 동물을 위하는 건 사람들의 모순된 반응(대단해/굳이?)이 양쪽에서 들릴 일이니 말이다.
나는 두 방향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고, 나 또한 그 사람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한 채.
재건축 현장 주변에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그래서 고양이들을 해할까 봐, 모자와 외투로 존재를 가리며 아직 터전을 옮기지 못한 고양이들에게 또 한 끼를 건네는 사람들. 고양이가 사람처럼, 사람이 고양이처럼 되는 순간들. 끝이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마음들. 기꺼이 책임지려는 이들의 노력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