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10-23 15:13:21
인생 영화 트루먼쇼 결말 줄거리 추천 넷플릭스 | 짐 캐리 주연
넷플릭스 추천 영화
본인만의 인생 영화가 있으신가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손꼽는 영화 트루먼쇼가 있습니다.
믿고 보는 짐 캐리의 명연기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24시간 전세계에 생중계가 된다면 이라는 이야기로
흥미를 한가득 모은 인생 영화 트루먼쇼 그럼, 영화 트루먼쇼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코미디, SF
감독 : 피터 위어
각본 : 앤드류 니콜
출연진 : 짐 캐리
개봉일 : 1998년 10월 24일
평점 : 9.48
스트리밍 : NETFLIX, Wavve
기획 의도
"좋은 아침입니다!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좋은 오후, 좋은 저녁, 좋은 밤 보내세요!"
여담
영화 트루먼쇼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에서도 재 개봉을 진행했다.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각본상, 감독상 등 다양한 수상 기록이 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트루먼쇼 결말
트루먼(짐 캐리)는 비현실적인 사건들이 계속적으로 벌어지면서 의심이 증폭이 된다.
트루먼은 물 공포증이 있음에도 배를 타고 떠나며 인공 폭풍과 돌풍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하지만,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세트장에서 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트루먼은 머쩍은듯 익상스러운 웃음과 함께 "good morning!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and good night" 외치며 세트장을 벗어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 트루먼은 평점 9점대로 정말 높은 점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고 너무 재미있었다는 증거 이지 않나 싶다.
진짜 다시 봐도 너무 재미있는 영화 트루먼쇼 아직 안 봤다면 강력 추천드립니다.
한줄평 :
good mornig! good afternoon! good night!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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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 리뷰
※ 스포일러 주의
하늘길이 막혀 국가 간 여행이 막혔다.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바꾸어 일상을 잊는 게 그 어느때보다 어렵다. 그렇다면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 찬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올해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5번째 장편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였다. 좋았으면 좋다고 하면 될 텐데 수식어가 괜히 길어진 까닭은, 이 영화에 대해 만듦새가 훌륭하다고 평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서사의 개연성이든, 연출면에서든. 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 역시 적지 않고, 이번 리뷰에선 내가 주목한 점에 대해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출처: 다음영화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웬우: 망가진 영웅
아마 신화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웅 서사 구조의 원형을 분석한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이란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캠벨의 서사구조를 전형적으로 따랐다고 보긴 어려운데(보글러 모델을 따랐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꺼내온 것은 '빌런'으로 소개된 웬우(양조위)의 일대기가 캠벨의 서사 구조와 유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웬우는 텐 링즈라는 초자연적 아이템을 획득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로, 평범한 인간이라기보단 신격화된 인물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정복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꾸린 후 잉리(진법랍)라는 신비스러운 여인과 결혼에 성공한다. 이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한 장면이다. 과업의 달성과 신비스러운 여인과의 혼인 말이다. 물론 이런 의문이 생길 순 있다. 그가 이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깊게 파고들기 어려운 까닭은, 스크린 묘사된 웬우라는 인물의 천 년 지배는 너무도 짧은 대사로만 지나갔기에 그의 모든 결정이 악하기만 했는지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자가 곧 영웅으로 떠받들여졌다는 것을, 정복의 과정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들 치세가 안정적이었다면 역사서는 그를 위대한 전사로 서술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단서만으로 이 웬우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사악한 악인으로 점찍는 것은 점차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결과론적으로 세상을 망가뜨리려 한 행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내의 부활이자 가정의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주인공인 샹치(시무 리우)가 결국 아버지의 공과 과를 모두 물려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웬우를 완전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웬우를 주인공인 샹치가 넘어서야만 하는 시련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저 웬우가 완전한 빌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다만, 구시대에서 필요로 했던 타입의 영웅이었지 현대의 우리에게 어울리는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웬우의 추락은 어찌 보면 운명적인 측면이 있다. 그는 천 년간 다양한 이름을 사용하며 분열된 정체성으로 시대를 부유하였음에도 늘 자신의 본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늘 자기 자신으로 회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잉리가 나타난다. 그는 웬우를 웬우로 호명하며, 흩어진 그의 다면적인 모습을 본연의 자아로 고정시켰다. 홀로 자신을 잊지 않는 것과,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주며 세상에 고정시키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웬우라는 이름이 천 년의 고독 속에선 결코 획득할 수 없었던 정체성은 그러나 몇 년의 시간 후 사라진다. 결과는? 자아의 망각이다. 그는 잉리가 존재하기 전 자신이 규정했던 웬우로도, 잉리가 존재했던 시절의 웬우로도 완벽히 돌아갈 수 없다.
영웅과 비영웅의 차이는 삶을 통해 목도하는 운명적인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웬우는 자신의 세계가 일그러졌을 때, 즉 잉리를 잃고 평화를 상실한 시련의 순간에 단독자로서 복수를 하겠다는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다. 새롭게 부여받은 아버지라는 정체성을 키워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가 추락한 주요 원인이다. 영웅이 된다는 건 자신의 손에 누구도 넘보기 힘든 힘과 권위가 달려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땅한 도덕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지닐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없더라도 가슴이 메일만큼 처참한 순간, 주변을 돌보며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요소조차 영웅의 조건일 수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대한 신분과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계는 벌써 백 년도 전에 무너졌다. 소박하지만 지겹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자, 영웅이 답해야 하는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것들일 것이다. '살아가야만 하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포토탈로: 완전하지 않은 별세계
웬우는 천 년을 산 인물이기에,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의 조상이자 고향인 하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잉리의 고향 탈로는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개인,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각각의 타인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공동체가 거주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하지만 웬우가 숲과 동굴을 통해 탈로에 수평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듯, 웬우와 탈로는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수직적인 세계가 아닌 평등한 세계관이다. 정복자라는 속성을 띈 웬우와 평화로운 별세계처럼 보이는 탈로는 색상을 비롯한 여러 테마에 있어서 지독히도 달라 보이나, 사실 비슷한 점 역시 무수히 많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를 봉인한 장소이자, 웬우라는 외부자를 철저히 배격하는(그의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진실로 평화롭기만 한 무릉도원이었다면 탈로에선 남녀가 평등하게 무술 훈련을 받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잉리가 성인이 된 자신의 자녀를 위해 갑주를 예비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언뜻 선인의 세계처럼 보일지언정, 탈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품고 있는 아슬아슬한 세계다.
나는 위에서 웬우를 악인이라기보단 ‘비영웅’정도로 묘사했는데, 영화 내에서 파멸적인 악惡을 꼽아야 한다면 어둠의 드웰러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크리처 무리는 다른 생명의 영혼을 흡수하며 텐 링즈를 통해 아이템의 소유주를 홀릴 만큼의 지능과 마력을 지녔다. 언어 능력조차 없어 소통이 불가한 그들은 순수한 공포 그 자체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 내에서 가장 신화적인 장소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원하고, 사악한 크리처가 등장하였음에도 영화 내 인물들은 어둠의 드웰러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대로는 인식할지라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을 비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샹치와 샤링(장멍일), 케이티(아콰피나)는 외부인이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탈로 주민들 역시 그들의 시간과 장소를 모두 묶은 역사가 존재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종의 ‘현상유지’다. 탈로가 간신히 모면한 평화 위에 세워진 세계일지언정 불안한 진동을 감내한다.
이때 도달하는 것이 바로 웬우라는 외부인, 혹은 외부 세계다. 그는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봉인된 문을 깨부숴야 하는 인물이다. 설령 그것이 날 눈멀게 한 거짓이라 하여도.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탈로와 웬우의 충돌은 탈로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탈로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역시나 그들이 무작정 옳거나 신령한 용과 함께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탈로가 공동의 시간과 지혜로 다듬어진 협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탈로는 어둠의 드웰러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이어온 '봉인된 문의 수호'라는 목적성을 상실하였고, 이는 세계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릴 위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탈로라는 세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웬우처럼 단독자가 아니며, 거주민 개개인은 서로에게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샹치가 잉난(양자경)을 통해 쥐고 있던 손을 피게 되었듯, 탈로 세계의 인물들은 샹치 세계의 인물을 통해 문을 봉인과 위협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다, 끔찍한 사건이라 해도 오로지 나쁜 결과만 몰고 오진 않는다.
출처: 다음 영화 포토실패한 아버지조차 계승하는 영웅
유럽의 신화나 미국의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친부 살해 모티프나 주인공의 가족 관계가 단절된 설정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에서 제작된 히어로 영화임에도 빌런으로 묘사된 아버지 웬우와 차기 세대의 영웅인 샹치가 화해할 뻔한 장면이 있다. 샹치는 (영화 내에서 그가 다짐하기도 했지만) 기존의 다른 영웅들처럼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의 힘만을 취한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외친다.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며, 영화 말미엔 직접적으로 그를 추모하기까지 한다(그러나 완전한 용서인지는 알기 어렵다). 나에겐 영화의 이 지점이 가장 눈에 띄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영웅이 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계승하는 젊은 영웅의 미래는 기대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 영화는 트릴로지의 첫 번째인 만큼, 샹치가 어떻게 텐 링즈를 물려받게 되었는지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프롤로그 부분에 해당할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즉, 샹치를 흔들어 놓을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순간은 아닐 것이라고.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모험을 통해 샹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케이티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웡과 노래방에 간다. 더 이상 호텔 직원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저 그뿐이다. 특히 그가 지녔던 증오나 두려움은 일부 해소된 듯 보이나, 타의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완전한 극복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더욱. 물론 샹치는 아버지의 텐 링즈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용의 힘을 배웠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정체성은 단순히 ‘힘’을 획득하여 악하게 쓰지 않거나, 최악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대항하는 순간에 얻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발적인 책임 혹은 신념을 자각하는 각성의 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펼쳐질 샹치 트릴로지에서 주인공은 션이 아닌 샹치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회귀한 만큼 자신이 정녕 누구인지를 의식적으로 깨닫는 모습이 필요할 텐데, 이러한 서사를 기존 서구 영화 속 히어로와는 다른 결로 풀어나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는 열다섯에 달려 나오며 숨기고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며, 숨겨서도 안될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를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샹치는 잉리는 물론, 웬우까지 포함하여 다채로운 모습을 모두 포용하되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다면적인 선과 악 사이에서,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넓은 스펙트럼의 세상에서.
출처: 다음 영화 포토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해 지금 왈가왈부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아직 트릴로지가 종료된 시점은 아니니까. 그리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시작한 영화의 트릴로지가 혼자 올곧게 서고자 하여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넓은 세계에서 샹치는 여러 캐릭터들과 뒤엉키게 될 운명인지라, 이 캐릭터의 일관성이 과연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인간적이었으나 정의로운 이는 아니었던 아버지의 공과를 물려받은 이가, 어떻게 자신을 영웅으로 정의하고 성장할 지에 대해선 정말이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2021 여름이 저물었다는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무더위가 계속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시선을 바꾸어본다. 올 가을엔 여름의 발자국이 그 어느 때보다 짙게 남아있으리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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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도 할수 없어서
나는 군대 이야기를 싫어한다.
이야기에는 상상력이 들어간다. 그 상상력은 과거의 일과 사건을 현재로 가져다준다. 단순히 듣는 소리로의 청각뿐만 아니라 과거에 경험했던 시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그때로 돌아간다. 군대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멈춘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때로 나를 이끌어 간다. 축축한 침낭 속에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던 그때. 커대 한 코골이 소리와 이가는 소리. 미련하게 꾸역꾸역 들어오던 한기. 조금 몸을 움직이다 걸린 총기 거치대. 숨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어느새 터득한 얕은 호흡으로 얼마 있다 보면 기상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과 생각에 틈도 없이 몸은 일어나 불을 켠다. 겨우 하루. 하루다. 하루가 지났다. 도대체 하루가 왜 이토록 길고 무서운지.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도 바뀌었다는데. 어쩜 이 제도는 꿈틀거리지도 않을까?
지금껏 살아가며 가장 떠오르고 싶지 않은 순간. 바로 이등병 시절이다. 그토록 길었던 2년 넘는 시간. 남북통일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여름방학을 기다렸던 것보다, 핑클 3집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욱 간절하게 기다렸던 전역. 그리고 위병소를 통과해서 세상에 나오던 발걸음의 무게와 함께 허무함. 아무렇지 않음과 함께 씁쓸함. 유쾌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전역 후에도 몇 년 동안 군대의 악몽을 시달리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꾸지 않았던 그 악몽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를 시청한 뒤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D.P>중에서
인스타와 페이스 북에 계속되는 광고 속에 호기심이 있었지만, 정해인, 김성균, 손석구. 색이 있는 연기자들이 펼쳐나갈 이야기도 기대가 되어 손이 갔지만, 눈이 가지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는데 예상 못한 D.P의 반응과 호평 속에 결국 보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6화까지 모두 섭렵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보는 내내 계속되는 한숨과 나도 모르게 움켜쥐어진 주먹, 그리고 떠올리기 싫었던 그 시절의 냄새가 느껴졌다. 몰입도 있는 스토리 라인은 긴장과 완화를 반복해서 일으켜 주었다. 각각의 사정과 상황으로 인해서 탈영이라는 극단적 시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그리고 탈영병을 잡는 과정 속에서 어느덧 상황과 감정을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되는 주인공들, 섬세한 이야기꾼의 스토리 전개로 인해 한눈팔기 어렵도록 만들어버렸다.
특히 당시 상황의 연출의 디테일은 실제 부대와 거의 같은 수준이며, 그것으로 보는 내내 괴로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더 잡아주는 OST도 칭찬할만하다. 개인적으로 프라이머리 음악을 좋아하는데 몽환적이며, 놀랍도록 스며드는 음악은 이 시리즈의 별미다. 또한 군 시절 휴가 나가서 헌병대 앞에서는 늘 긴장하라고 했던 선임들의 목소리가 생각날정도로, 기대했던 연기자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배우들의 선전에 긴장감이 조여올 정도였으니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한 설정과 거기서 뭉그러지는 배우들의 과한 에너지에 부대끼기도 하고, 계속되는 긴장의 노출이 피로감을 더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인공 안준호와 한호 열의 티키타카와 함께 군부대 내의 박범구 중사와 임지섭 대위와의 기싸움이 피로감을 덜어준다. 마지막 탈영병 조석봉 일병의 이야기는 극 중 가장 몰입되면서도 안타까움이 컸다. 드라마의 완성도와 극적 장치를 위해 진행되었던 내용이었겠지만, 과몰입해서 시청하던 내게는 오히려 과한 설정이 집중에 방해가 되었다. "뭐라도 바뀌려면 뭐라도 해야지" 이 드라마가 마쳤음에도 귓가에 떠나지 않았던 대사. 그러나 뭐라도 할 수 없기에 여전히 군에서는 수많은 탈영병과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아카데미와 빌보드 차트에 취해 어깨가 으쓱해졌던 대한민국의 실제 민낯에 당황하고 있을 사람들이 꼭 "뭐라도 할 수 없어서" 오늘도 그 자리에서 당하고 있는 그들을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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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끝은 있는거야! 영화 <트루먼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딜레마가 하나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아이는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면, 웰컴 투 공리주의. 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만 해도 어느 면접에서 '공리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피하다면 최선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먼쇼>, 영화 한 편으로 정말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로 그 딜레마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면? <트루먼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 버뱅크, 태아 때부터 30대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하루 24시간 그의 모든 것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 나의 모든 것이 나도 모르는 이들에게 공유된다니. 이건 비밀인데, 하던 말, 나만 알고 싶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까지 모두. 소름끼친다. 방송국에 입양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나.
영화에서 트루먼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방관한 모든 인물이 악당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꼽자면 프로듀서를 대표적으로 꼽겠다. 트루먼쇼는 트루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모욕의 집합체다.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은 게 아니라 돈 되는 투자처였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에 대한 동의없는 일방적인 사기이자 감금,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자 착취다. 죄목을 몇 개나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프로듀서는 그의 신인 양,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스크린에서 그를 쓰다듬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프로듀서는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즉흥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섬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그에게 트라우마나 시련을 주었다. 물을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도록. 그를 위해 섬을 전부 꾸몄고, 인간관계는 배우들로 채워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롱런하는 드라마를 보듯 흥미롭게 시청할 뿐이다. 그들에겐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가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트루먼쇼는 대세다.
하려면 빈틈없이 제대로나 하지, 곳곳에서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수가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들렸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졌다.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모두가 당황한다. 아이를 갖자는 아내 메릴은 사실 별로 그를 안 좋아한다. 겁쟁이인 줄 알았던 그가 수많은 눈과 카메라를 속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던 물로 나아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프로듀서가 만든 폭풍우에 휩쓸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내지 않았다. 모두에게 위트있게 인사를 한다.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세상, 거짓된 진실, 빈 껍데기의 평온한 일상에서. 다들 그를 시청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마저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멍청한 듯 했지만 똑똑했다. 시청자가 느낀 감동과 재미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세상 꿀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듀서를, 시청자들을 못됐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1998년에 만들어진 트루먼쇼는 놀랍게도 최근의 예능 트렌드와 흡사하다. 프로듀서는 10년, 20년을 앞서 본 선구자인 것이다. 트루먼쇼는 그냥 쇼가 아니었다.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열일하는 연출로 더 많은 광고와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작은 국가의 GDP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 트루먼이 함께 하는 이상 이 수익은 고정적이다. 누가 아나. 늘 단역 자리는 필요하니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의 생활 속 제품 홍보로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수익으로 파이를 분배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감은 어떤가. 트루먼이 성장하는 것을 다같이 흐뭇하게 보며 울고 웃는다.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만나본 적도 없는 연예인과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받고 힐링받는다.
트루먼쇼의 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다. 트루먼쇼는 좋은 의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 위로를 주는 프로그램.' 다만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빠졌을 뿐. 전 세계 TV는 리얼리티 쇼가 가득 채웠다. 모델, 가수, 아이돌 등을 뽑는 부분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2016-17년 예능을 쥐어잡은 <나 혼자 산다>, <미운 오리 새끼>, <슈퍼맨이 돌아왔다> 까지. 일상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다르지 않다. 앞의 두 프로그램은 연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사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집집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상에 자리잡았다. 집을 공개하고, 생활하는 날 것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출연자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믿도록. 물론 무엇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진실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정도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질 것이다. 더 강한 자극은 진실된 존재의 진실된 감정에서 온다. 몰래카메라가 재밌는 이유와 같다. 예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짜고 치는 대본이 암암리에 있는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다. 진심이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트루먼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훌륭한 프로듀서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할 때의 자세
냉정하게 생각하자. 프로듀서의 역량은 훌륭하다. 눈치를 채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트루먼에 대처하기 위해 그 역시 열심히 대처하느라 바빴다. 갑자기 돌아가신 설정의 아버지를 우연찮게 만나자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개와 대사를 마련한다. 트루먼의 고뇌에 대한 위로, 트루먼과 아버지의 재회. 기쁨의 눈물. 바로 클로즈업을 해선 안 된다. 서서히 멀리서부터 마지막 그의 얼굴로 다가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가 만든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프로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트루먼이 폭풍우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만들었고 폭풍이 지나간 쨍쨍한 햇살에 비친 만족감을 대조하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이 곳에서 계속 함께하자며 그의 내면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물론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오래 함께 하자. 그러나 한 구석으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레전드는 만들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프로듀서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트루먼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얽힌 이해관계자의 기대에 찬 눈빛. 그는 트루먼의 인생동안의 시간만큼 그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두자면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트루먼의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은 묵인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이 상황은 딜레마가 아니다. 이제와서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이 트루먼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스타가 된 이상 바깥 세상에서도 그가 원하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여기선 고작 갑갑할 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 그는 욕을 먹고 상처를 받을테니까. 게다가 적어도 트루먼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니까. 심지어 이혼한 후에 재혼할 두번째 아내까지. 귀차니즘이나 결정장애에 빠져있다면 이 만한 직업도 없다.
프로듀서는 트루먼쇼를 딜레마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이득을 보는, 일방이 희생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스타와 지켜보는 수많은 지지자들, 윈윈이나 협조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의 화살만 퍼부을 텐가. 그는 자신의 일을 그저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쇼는 끝이 없다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하나뿐인 스타인 트루먼은 쇼도 끝이 있는 거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는 말문을 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트루먼을 보내줄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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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너를 사랑한다는 것
해길랍 (海吉拉, Hijra in Between, 2018)
개봉일 : 2021.03.31 (한국 기준)
감독 : 채밀결
출연 : 허광한, 요애녕, 임의잠
그저 너를 사랑한다는 것
해길랍(海吉拉, 히즈라). 여성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 생리적인 남성 계층을 뜻하는 말. 남자이면서 여자의 정체성을 가진,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한 사람.
처음엔 <해길랍>이라는 영화 제목의 뜻을 모르고 허광한 배우만을 바라보며 이 영화를 골랐더랬다. 예고편으로 공개된 영상들의 분위기도 그렇고, 시놉시스 상으로도 그렇고 당연하게도 달달한 첫사랑 이야기쯤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당연함의 범위가 아닌 색다름의 범위로 빗겨나간다.
새로운 소재와 영화의 초반부의 결은 상당히 좋다. <해길랍>은 허광한이라는 배우를 보며 가장 먼저 기대하게 되는 이미지를 온전히 만족시켜주며 한순간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 새로운 소재와 다소 가파르게 마무리되는 결말은 끝내 진한 호불호라는 결과를 낳게 되어 그 부분이 조금 아쉽다. 짧은 러닝타임의 탓도 있겠지만 초반부 로맨스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아버린 느낌이랄까. 끝이 애매모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냥 허광한을 보시라.. 말하고 싶다.
해길랍 시놉시스
등굣길 버스 안, 반짝이는 서로에게 반한 ‘탕셩’과 ‘완팅’은 가슴 뛰는 첫사랑을 시작한다. 서로의 세상이 되어가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고로 ‘완팅’은 한 통의 편지와 ‘탕셩’만 남겨둔 채 곁을 떠난다. 몇 년 후, ‘탕셩’ 앞에 새로운 친구 ‘류팅’이 등장한다. 낯선 익숙함에 잊지 못했던 감정이 자라나는데…
* 아래 내용부터는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원탕셩과 완팅은 등굣길에 매일 같은 버스를 탄다. 서로에 눈에 띈 두 사람은 무방비로 첫사랑에 빠지고 벅찬 두근거림을 느끼며 서로를 알아간다. 하지만 완팅의 사고와 동시에 이들의 첫사랑은 깨져버리고, 끝나지 않는 그리움만이 남은 시점에 새로운 모습을 한 인연이 다가온다.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며 "이런 모습으론 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완팅과 "어떤 모습이든 사랑할게."라고 말하는 원탕셩. 상대방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사랑할 수 없다고, 사랑하기에 그마저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사람. 결론은 다르지만 결국엔 '사랑'이라는 한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이 온전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사랑을 향해 달려가던 중 커다란 갈림길을 만난 청춘의 흔들림이 미세한 진동을 타고 전해진다. 저주 같은 현실 앞에서도 너라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는다는건 어떤 기분일까. 잘 상상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랑의 모습을 보다.
모두가 지겨울 만큼 외쳐대는 사랑이란 건 무엇일까. <해길랍>은 청춘 남녀 3명을 통해 대부분의 사랑이 아닌 특별한 사랑을 그려낸다. 소심하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착한 소녀 완팅,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완팅의 오래된 친구 시전, 용기 있게 첫사랑을 시작하고, 첫사랑을 잊지 못해 기다리고 있는 소년 탕셩. 세 사람은 아주 잠시지만 사랑의 라이벌이 되기도 하고, 빛나는 청춘을 함께 한 둘도 없는 절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하는 혼란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정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사랑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었던 그를 향한 감정이 먼 거리감으로 변하기도 하고, 다시 용기를 내 한걸음 다가서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탕셩, 완팅, 시전은 우정과 사랑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사랑과 우정이 완팅의 변화와 함께 깨져버리고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각자의 정체성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흔들림 끝에 만난 새로운 갈림길에서 세 사람은 용기를 짜내 마음이 이끄는 길로 향한다.
왠지 어색해진 사이 속에서 완팅의 변화는 사랑이란 감정을 더욱 명확히 정의해 줄 행운이었을지, 저주였을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에서 단 하나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세 사람 모두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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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정말 모든걸 내려놓고자 해
이 영화의 엔딩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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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어느 한 한인민박이었다. 내 앞에는 홍대에서 명예교수를 했던 분이 앉아있었다. 와인이라는 걸 살면서 세번째로 먹어본 날이었다. 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물셋이요. 군대는? 먼저 해야 할게 있어서요. 왜 한인민박에 왔어? 가격이 싸서요. 돈 아껴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죠. 프라하 어때? 일단 사람이 많네요. 넌 무슨 사연이 있는 사람 같아보여. 있다면 있죠. 없는 사람이 있나요. 멋쩍게 웃었다. 왜 유럽에 왔어? 왜 유럽에 왔냐는 말을 들었다. 음.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말을 두번 들었다. 달라진다는게 뭐지? 별거 없어요.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후회하는 일이 많아서요. 아. 후회. 뭐를 후회하는데? 그냥. 좀 더 잘 살지 못한 것?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14시간에 환승까지 하며 비행기를 탄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전직 교수는 나에게 계속 물었다. 영어는 좀 하나? 좀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된거 아냐? 혼자 돈 모아서. 살면서 해본 적 없는걸 도전하겠다는건데. 유럽에 와서 의사소통에 무리 없으면 괜찮은거지 뭘. 하하. 아직 토익 시험 본 적 없는걸요.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현재를 사는데 무리가 없는데 왜 과거를 마음에 품고 있냐 이 말이야. 아이 뭐. 그럴수도 있는거죠. 그럴수도 있는거죠? 음. 너 내 동생같아서 말해주는건데. 후회는 네 삶을 갉아먹을거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와인 반 잔을 들이켰다. 내 삶을 갉아먹는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어떤 건 마음에 품고 사는게 더 나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 다 좋아. 20대 청춘 다 괜찮은데. 이별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멋진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부분이지. 네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알아. 이미 잘 하고 있으니까. 여기 온 것만으로도 네가 원하는건 다 얻었다는 뜻이니 걱정하지 마라. 너 20대의 나같아서 말해주는거야.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 건 생각이 많은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때도 있지만 역효과도 있다는 거 알아둬라. 네가 해준 이야기가 너의 삶의 좋은 방향이 될거라고 생각해. 그냥 단순히 유럽 여러나라를 다니는게 여행의 목적은 아닐테지. 생각해봐. 이별해야 할 때가 언제고 또 무엇과 작별해야 할지. 다시 받아들여야 할 건 무엇인지.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이별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먼이 감독을 맡았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기엔 사실 영화는 매우 불친절하다. 그래서 내가 쓴 감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쓰고 싶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다 나왔다. 제시 플레몬스, 제시 버클리, 토니 콜렛, 데이빗 듈리스가 주인공을 맡았다. 우선 찐따연기라면 헐리웃에서 둘째가면 서러운 제시 플레몬스가 이번에도 어딘가 기가 죽은 남자 역할을 300% 어울리게 소화해냈다. 하지만 더 눈에 띄는 연기를 한 배우가 있다. 토니 콜렛이다. 이 영화의 역할과 <유전>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어머니 연기는 결이 다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배우는 이걸 성공해낸다. 주변에 있을 또 다른 어머니상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한 이유는 극에서 제이크의 부모가 가져야 할 역할 때문이다. 이 영화가 주는 메세지 상 어머니와 아버지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조금 있어야 한다. 이 여배우는 그런 역할 구분을 무의미하게 극을 장악하며 '이 영화가 대체 뭐지?'라는 혼란을 가중시키는게 크게 기여한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제이크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를 소개하는 신이다. 케이크에 대해 말하다가 이명이 있다는걸 스스로 여자친구에게 털어놓는데, 이 부분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하는 대화에는 두서가 단 1도 없다. 예를 들어보면 케이크가 손가락을 닮았다고 말하고, 귀에 이명이 있다고 답한다. 그러고 이명이 재미없다고 답한 다음, 거지같은 일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다음 이명 증상에 대해 말한다. 이후에 왜 귀가 불편한지 일관성있게 말할까? 아니다. 이것에 대한 이유에 우주의 비밀과 주식 시장 정보가 관련있다고 답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 뭔 소리지 싶을 대화를 감정연기와 표정으로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버린다. 이 영화가 당연히 가져야 할 연출 지점 중 하나는 개연성의 붕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서 오는 부작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로 유지된다. 물론 다른 배우들도 연기가 좋았지만 난 이 부분에 있어 토니 콜렛이 엄청났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토니 콜렛의 연기에 대해 말하며 애초부터 이 영화는 말이 안되야 한다고 썼다. 배우들이 이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감독도 각본을 이 개연성의 붕괴를 위해 각본을 만든 것 같다. 즉 난 플롯이 왜 불친절한지와 이 영화의 메세지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우선 전자를 생각해봤다. 이 영화가 왜 불친절한지에 대한 이야기다. 제이크가 누구인지에 대해 먼저 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제이크가 누구냐? 학교에 근무하는 노인 경비원이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물리학도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지나가다 본 예쁜 여학생에게 반해 연애도 해보고 싶었고 건강한 부모님과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살고 싶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만 완벽하게 모든 걸 다 이뤄주진 않는다. 사실 이 인물은 영화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이 영화가 주는 서늘한 공감이 오래 갔던 이유가 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때문이다. 엔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이 영화 전부가 제이크의 망상이다. 제이크는 꽤나 오랫동안 이 꿈(망상)을 꾸며 살았다. 그냥 단순히 '좋은 부인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가 아니라, 여자친구의 외모부터 시작해서 이름, 전공학도, 여자친구의 성격과 우리 부모님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상상을 꽤나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난 이게 제이크의 일생이 꽤나 비극적이었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망상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상상이 깊어지니까 점점 자세해지는 것이다. 이런 가정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비참해진다. 왜? 현실이 아니니까. 망상이 구체적일수록 초라한 현실이 대비될 뿐이다. 이에 마찬가지로 제이크의 엄마 대화같이 인물들이 대사를 하는 순서가 두서없고 일반적인 서사를 따르지도 않는 이유도 감독 찰리 카우프먼이 이 비참함이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인물이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또 논리순서에 맞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정리 할 필요도 없고 한다 해도 아무 쓸모 없다. 왜? 보여줄 일이 없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거다. 영화가 이것을 의도한 이유는 분명하다. 개인의 내면이 어디까지 붕괴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어차피 주인공은 우리와 대화 할 생각이 없었다. 할 필요가 없을만큼 이미 제이크는 무너져있었던 존재였다. 매일을 망상 덕에 하루하루를 살던 사람에게 대화가 필요할까. 아닐 것이다. 이 때문에 자아가 붕괴된 인물이 갖는 혼란스러움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영화가 어떤 인물에 대해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했던 방법이 여기에 있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이런 상상을 해봤다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무엇에 대해 후회하며 늘 가정을 만들었다. '아. 이 때 이러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텐데'식의 상상이다. 그게 두서가 있었나. 아니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처럼 원인과 결과를 분류하지도 않았고 그럴려고 해본 적도 없다. 남에게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보통 그런 미련들은 나 혼자서 마음을 키우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이 되어 이 각본이 갖는 강력한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아. 이거 내 머릿속을 영화로 옮긴거구나. 찰리 카우프먼은 좀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구나. 난해한 영화지만 주인공의 엔딩신에서의 선택은 분명한 이유도 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감독은 삶에서 생기는 후회를 이렇게 멋지고 불친절하게 표현했고, 이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너 이러는거 나도 알아. 그래서 네가 끝내고 싶은건 무엇인데? 이렇게 묻는거다. 이 질문에 대해 말하는 건 또 다른 결이 있다. 난 이게 영화가 주는 메세지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끝내고 싶은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영화의 갈등이 어디에서 왔을까와 같다고 생각한다. 여자 주인공에게 끝내고 싶은건 연인관계다. 여자친구는 이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또 얼른 마무리하고 집에 가고싶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런 고민으로 영화가 시작해서 주인공 제이크가 마무리지은 선택지로 마무리된다. 이는 처음과 끝의 대비가 '여자주인공이 끝낸 것의 결과가 제이크의 처지와도 같다'라는 암시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주인공이 반복해서 하는 독백도 감독이 갈등의 원인(연인관계에서의 결별)과 끝내고 싶은게 무엇인가(영화의 메세지)를 동격으로 놔둔 것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독백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자친구는 제이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에 관련한 혼잣말을 하면서 같은 계단을 반복하며 돈다. 이 독백의 근원지는 어디냐? 제이크와의 관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제이크의 여자친구는 실존하는 존재인가? 아니다. 제이크가 어느 날 봤던 여자 중 한명을 망상으로 발달시킨것이다. 그러니까 제이크의 연애(끝내고 싶은 것)를 주인공 스스로의 자아존중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의문점(끝내고 싶은건 무엇인가)이 분명해진다. 제이크가 끝내고 싶었던 건 후회와 미련일것이다. 그리고 이 인물은 이 감정에 지배됐으며 그걸 끝내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 즉 제이크가 겪는 갈등 그러니까 내적 혼란은 본인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난 감독이 이걸 이야기했다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럼에도 난 감독이 따뜻함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이 해결책 제시를 통해 영화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네 후회와 미련을 이 인물에 투영해서 이제 그만 끝내버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근거도 있다. 어느 부분은 망상이고 남자,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반면에 어느 지점이 끝나고 주인공의 선택을 보여줄 때 할아버지의 모습이 직접 나온다. 나는 이것이 망상/현실을 감독이 구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 문단에서 '왜 감독이 플롯을 복잡하게 설정했는가'와도 이어진다. 이게 만약 네 이야기가 맞다면, 네 후회와 미련과 닮아있다면 내가 그냥 끝내버리겠다. 난 이렇게 받아들였다. 차 타고 시작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탐방하는 여행이 차 안에서 정리된다는 것도 이에 대한 다른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를 시작했던 이유와 작품 내부에서 마무리 된 것이다. 후회와 미련이 자아안에 가득했던 사람이 행복해진다는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감독 찰리 카우프먼은 이를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관객을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시켰다. 그리고 이 인물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영화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작품을 만든 의도다. 난 놓친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타인의 기준이 내것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로 사람들을 상처주기도 했으며 이런 내 자신이 격하게 싫을 때도 많았다. 그런 생각에 빠질때마다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난 근본적으로 비열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기혐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끝이 없어진다. 이 생각을 멈추는 법은 간단하다. 이런 후회와 미련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선택지같은건 없다는걸 깨닫는거다. 또, 여기에 같혀있다가는 앞으로는 못 나아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돌린다는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내가 선택할 선택지는 무엇인가. 영화가 말하는게 맞다. 이것들은 애초부터 불필요한 망상이다. 눈 안에서 고립될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엔진을 키고 달리는게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본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아니 사실 확실하게 답해야 한다. 날 괴롭히던 것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됐다. 이제 그만 끝낼 때도 됐다.
할말이 많은 영화라 글을 길게 썼다. 난 이 영화에 그정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영화를 차갑고 서늘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던데, 나는 <이터널 선샤인>이나 <아노말리사>와 같이 이 작품이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불친절한 영화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으며 처음 완주하고 한 일주일 내내 여운이 남았던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프라하에서의 경험이 생각나는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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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쳇바퀴 돌듯 권태로운 삶일지라도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시사회를 다녀온 후 작성한 글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11월 9일이다. 사람들은 어젯밤에 열렸던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세라가 왜 결혼식 준비를 또 하느냐고 묻자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세라는 깨닫는다. 자신이 타임루프에 빠졌다는걸.
영화 〈팜 스프링스〉 스틸컷
영화 〈팜 스프링스〉는 동생의 결혼식에서 만난 나일스와 하룻밤을 보낸 세라가 타임루프에 빠져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나일스는 세라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매일 반복되는 11월 9일을 보내고 있던 '타임루프 선배'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봤던 나일스는, 이제 탈출을 포기하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어떻게 다르게 즐길지를 고민하며 느긋하게 보낸다.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던 세라도 나일스 덕에 빠르게 타임루프 세게에 적응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비밀과 오해가 생기고 위기가 찾아온다. 이제 세라는 타임루프를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나일스는 그런 세라에게 간청한다. 그냥 이곳에 자기와 함께 머물러달라고. 매일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을 서로의 특별함으로 극복해나가자고. 세라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과연 둘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함께한다면 그곳은 타임루프의 안일까, 밖일까?
위 질문은 〈팜 스프링스〉뿐만 아니라 타임루프 설정을 가미한 영화가 항상 던지는 질문들이다. 감춰진 비밀을 좇는 스릴러 장르의 타임루프도 있지만, 잔잔한 분위기로 일상을 다루는 타임루프는 거의 언제나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일상의 권태와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삶은 아름답다'라고.
영화 〈팜 스프링스〉 스틸컷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타임루프를 살아가고 있다. 많은 생활인들이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한다. 출근해서는 어제와 같은 일을 한다. 시간감각은 점차 무뎌진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심지어 내가 몇 살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비단 직장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권태는 비슷한 일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필수적인 고난이다.
영화 〈팜 스프링스〉 스틸컷
그 고민에 대한 〈팜 스프링스〉의 대답은 사랑이다. 매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깨어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제와는 다를 거라는 것이다. 한편, 2017년에 개봉한 영화 〈패터슨〉은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이 영화는 타임루프 설정을 활용하진 않지만, 영화 속 일상은 타임루프처럼 반복된다. 주인공은 어제, 오늘, 내일이 똑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팜 스프링스〉의 대답이 사랑이었다면, 〈패터슨〉의 대답은 일상의 리듬이다. 〈패터슨〉에서 삶은 지루한 무언가가 아니라 매일 조금씩 변주되는 아름다운 선율이다.
〈팜 스프링스〉식 막무가내 로맨틱 코미디든, 〈패터슨〉식 일상의 예술적 변주든 결론은 같다.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이라도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곳곳에 내재해 있다는 것. 무의미한 삶은 없다. 그 어떤 반복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기에 삶의 무의미를 극단적으로 도드라지게 하는 타임루프 속에서라도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뻔하고 엉뚱하지만 때때로 사랑스러운 영화 〈팜 스프링스〉가 전하는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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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영화 후기 / 몬스터 세계의 통합 / 새로운 몬스터버스의 탄생 / 고질라와 콩의 역대급 맞짱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고질라 VS. 콩”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있을법한데, 쿠키영상이 없더라구요~#고질라, #콩, #몬스터버스, #블록버스터, #액션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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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진 밤 리뷰 -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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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해당 영상은 배급사 '씨네소파'의 저작권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된 영상입니다 :)?
작품 "흩어진 밤"은 오는 24일 개봉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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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같이 살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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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집에 찾아드는 낯선 사람들.
엄마와 함께 공부에 집중하는 오빠.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빠.
그리고 원치 않게 떠맡게 된 힘든 선택.
어둠 속에서 흩어지는 마음들을 바라보는 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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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흩어진 밤]은 10살 수민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족의 해체와 원치 않는 선택을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낸 웰메이드 영화입니다.
관객들을 천천히 그 상황에 데려다 놓으면서 어떤 기억에 한 켠에 있던
지난 날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데요.
과연 수민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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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서울대작전> 티저 예고편
1988년, 초특급 미션이 시작된다? 더 빨리! 더 대담하게! 더 요란하게! 모두 안전벨트 메고 준비! 《서울대작전》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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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블러드 레드 스카이> 티저 예고편
[2021년 7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의문의 병을 앓는 여자.
치료를 위해 어린 아들과 대서양을 가르는 비행기에 오른다.
목적지까지 반쯤 왔을까.
비행기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점령당하고, 여인은 생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간 어렵사리 숨겨온 어둠의 힘을 뿜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