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3-11-06 20:16:56
상담이 필요한 금쪽이가 빙의를 경험하면 벌어지는 일
<톡 투 미> 스포일러 없는 리뷰
<톡 투 미>의 주인공은 호주의 어느 동네에 사는 미아다. 미아는 얼마 전 어머니를 잃었다. 외로운 미아.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다는 것이 우울했다. 이런 미아는 친구들끼리 모여 재미있게 놀던 도중 한 아이가 꺼낸 ‘90초 빙의 챌린지’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친구 중 한 명이 가져온 손 모형에 누구든 다가와서 악수를 하면, 90초 동안 귀신과 빙의되는 것이 이 '90초 빙의 챌린지'였다. 자기도 직접 챌린지를 해보고, 친구들이 빙의하는 모습도 구경하는 미아. 하지만 일행 중 한 명이 미아의 어머니에 빙의한 모습을 보자 이성을 잃는다. 금기를 깨는 미아. 이후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톡 투 미>가 젊은 영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여러 매체에서 유행하는 흐름을 잘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 전면에서 우리가 잘 아는 소셜미디어들이 등장한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이 그 예시다. 두 소셜미디어가 등장한 후 릴스나 클립류의 짧은 영상이 유행했다. 이 바뀐 시대상을 반영하듯 이야기의 템포는 빠르다. 이 빠른 템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 분명한 강점이다. 짧게 이어 붙인 장면이 속도감 있는 플롯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빠르게 전달한다고 해서 캐릭터들을 대강 묘사하지도 않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결핍이 하나쯤은 있으며, 각자가 가진 단점에 따라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결함이 인물의 동기가 되는 셈이다. 이 인물들의 동기는 ‘90초 빙의 챌린지’에 대한 태도와도 직결되어 사실상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어떤 인물이 선을 넘고 또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설정이 호주 사회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했기 때문에 따라오는 단점도 있다. 이 영화의 사운드 믹싱이 관객들이 듣기 편한 상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톡 투 미>가 '점프 스케어'가 아닌 시,청각적 요소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로 보인다. 감독의 욕심이 과욕이 된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 미야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플롯은 작위적으로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어디선가 봤던 시시한 오컬트 호러와는 종자가 다른 영화라는 점에서 추천하는 작품이다. 11월 1일에 개봉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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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리> - ‘잘못된 믿음에 묶인 소녀의 비명’
캐리 (Carrie)
개봉일 : 1978.09.17 (한국 기준)
감독 : 브라이언 드 팔마
출연 : 씨씨 스페이식, 에이미 어빙, 윌리엄 캇, 낸시 알렌, 존 트라볼타, 베티 버클리
‘잘못된 믿음에 묶인 소녀의 비명’
“소름 끼치는 캐리다!” 영화 속 아이들은 캐리를 이렇게 부른다. 아이들의 시선이 꽂힐 때마다 두려움에 파르르 떨리는 소녀의 속눈썹이 무척 안타깝다. 어리고 나약한 소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캐리>는 종교에 관한 그릇된 믿음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캐리의 엄마 마가렛은 “최초의 죄악은 성교다.”라고 외치며 딸의 모든 것을 제어하려고 한다.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조각상 밑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잘못된 믿음에 바친다.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지 못한 캐리는 당연하게도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이상한 믿음을 가진 집안의 아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다. 또래 아이들에겐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상들이 캐리에겐 공포와 고통이 되어 다가온다.
만일 상처 입은 약한 소녀에게 주체할 수 없는, 신과 같은 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 영화는 가장 나약하고 상처가 많은 인물인 캐리에게 모든 걸 다스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염력을 쥐여준다. 마음 약한 소녀는 당연하게도 그 힘으로 무언가를 지배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녀의 마음을 다시 붙일 수 없을 만큼 난도질을 해놓는다면? 그렇다면 소녀의 힘은 어느 방향을 향해 발휘될 것인가. 그 순간, 소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흐릿하게 보이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예측해보며 눈 밑이 따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캐리 시놉시스
여고생 캐리는 병적일 정도로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의 순결 강요로 항상 내성적이고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받고 박대받고 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염력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이 있다. 친구들로부터 심한 놀림을 받은 그녀에게 동정을 느낀 어느 한 친구가 그녀를 파티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순결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강한 반대를 무릎쓰고 멋진 남자와 함께 즐거운 파티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음모가 숨어있었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뿌연 연기 속에서 홀로 남아 샤워를 하고 있는 소녀, 캐리가 보인다. 갑작스러운 초경을 맞이한 소녀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에 공포감을 느낀다. 여태껏 생리가 무엇인지,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같은 당연한 성교육조차 받지 못한 캐리는 동급생들의 어깨를 붙잡고 늘어진다. 어떤 것이 두려운지, 어떤 것이 무서운지 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도와달라고만 소리치고 있는 캐리의 모습이 너무도 나약하게 느껴진다.
“최초의 죄악은 성교다”
남편 없이 홀로 캐리를 키워온 엄마 화이트는 되바라진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모든 인류의 시작이라 불리는 아담과 이브조차 죄악을 저지른 것이라 칭하는 화이트는 자신의 딸이 죄악을 저지를 수 없도록 모든 걸 관리하려 한다. 그녀가 성교를 죄악이라 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종교에 대한 믿음과 캐리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편의 영향인 걸로 보인다. 화이트는 화살을 잔뜩 맞은 예수상을 집안에 걸어둔다. 어딘가 음산하고 소름 끼치는 분위기가 감도는 집안. 캐리가 깬 거울에 예수상이 비친다.
캐리는 초경을 시작하면서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다. 마음이 지닌 힘이자 기적이라 불리는 ‘염력’. 그것은 마치 캐리를 불쌍히 여긴 신이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말라’며 하사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동급생들은 모두 캐리를 괴롭힌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이 캐리를 무시한다. 그나마 캐리의 담임인 콜린스 선생님이 캐리를 위로해 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 콜린스 또한 캐리를 바라보며 위로를 전하는 게 아닌, 거울 속 자신을 향한 칭찬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이 영화에서 진심으로 캐리를 위하는 인물은 ‘수’뿐이다. 수 또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캐리를 괴롭히거나, 그것을 묵인하던 인물이었지만 점점 더 심해지는 괴롭힘을 보며 캐리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수는 졸업파티를 포기하고 자신의 남자친구 토미를 통해 캐리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수 덕분에 토미와 함께 졸업파티에 가게 된 캐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첫사랑의 설렘을 느껴본다. 화이트는 여전히 자신의 딸을 마녀라 칭하며 말리려 들지만 캐리의 능력 앞에 굴복하고 만다.
“드디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캐리는 별 장식이 반짝이는 졸업 파티장에서 꿈같은 밤을 보낸다. 괴롭힘을 당하고 소름 끼치는 존재로 취급받던 소녀가 가장 빛나는 여왕의 자리에 앉은 순간, 소녀는 처음으로 맑은 웃음을 지어본다. 하지만 누군가의 행복을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욕망이 가득한 입을 가진 아이들은 캐리의 몸에 빨간 피를 붓는다. 진한 빨간색을 띠고 있는 피는 캐리의 잠들어있던 능력과 감정들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캐리는 졸업 파티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집으로 돌아와 피를 씻어낸다. 화이트는 다시 여린 소녀로 돌아온 자신의 딸을 칼로 찌르고, 캐리는 그녀에게 반격한다. 화이트는 옷장 안에 걸려있던 예수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캐리의 집은 무너진다. 단단히 뭉쳐진 잘못된 믿음과 죄악이 한데 뒤섞여 무너지고 있다.
졸업파티가 있던 날 밤, 캐리를 포함해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된다. 동급생중 살아남은 사람은 ‘수’뿐이었다. 진심으로 사죄하고, 하루만이라도 캐리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유일한 사람. 어느덧 저주로 바뀌어버린 캐리의 능력이 휩쓸고 간 피바람 속에서 그나마 청렴했던 소녀 한 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반성하고 사과했다 하더라도 그전에 지었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수는 캐리가 피 묻은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붙잡던 순간이 반복되는 꿈을 꾼다. 그 꿈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나약한 소녀에게 쥐어진 초능력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리고 이 능력이 축복이 될지 아님 저주가 될지, 방향성을 제시한 것은 누구였을까. 나약한 소녀가 홀로 해냈다기엔 너무도 큰, 피의 파장을 만들어낸 건 바로 그녀를 바라보던 따가운 시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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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꽃다발의 의미
-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 이어폰과 함께 듣는 음악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We Made a Flower Bouquet, 2021)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개봉일 : 2021.07.14.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도이 노부히로
출연 :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키요하라 카야, 호소다 카나타, 오다기리 죠, 토다 케이코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각자 다른 꽃을 꺾어 이리저리 배치하고 꾸미면 예쁜 꽃다발이 하나 완성된다. 색, 질감, 가지의 길이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발 안 꽃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것들이 원래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이런 꽃다발처럼 보이는 사랑을 한 청춘 남녀의 이야기다.
무기와 키누는 막차가 임박한 지하철역 앞에서 처음 만난다. 서로 부딪히며 삐끗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막차를 놓치고, 어쩌다 보니 개찰구 앞에 있던 직장인 두 남녀와 함께 바에서 첫차를 기다리게 된다. 무기는 딱히 공감할 수 없는 직장인 남녀의 대화를 불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키누는 무기의 말과 표정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각자의 길로 찢어지려던 찰나. 공통점 하나로 말문을 트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운명임을 직감한다.
무기와 키누가 생각하기에 둘은 서로 공통점이 너무도 많았다. 처음 만난 날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었고,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으며 같은 날의 공연 표를 사놓고 가지 못한 것까지 똑같았다. 두 사람은 첫차가 올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다음을 약속한다. 그리고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 설렘과 특별함을 느끼며 연인이 되고 나의 일부를 꺾어내 ‘똑닮은 우리’라는 하나의 꽃다발을 만들어간다.
무기와 키누는 이 꽃다발이 조화롭고 완벽하다고, 이대로 평생 가슴에 품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며 자라나는 화분 속 꽃과는 다르게 흙도 뿌리도 없는 꽃다발 속에 자리 잡은 꽃들은 각자의 속도로 시들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시들어가는 우리를 느끼며 이별을 생각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다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을 이렇게 오목조목 곱상하게 펼쳐내는 영화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상행동, 문제를 만드는 제3자,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잉 감정 등 호불호 포인트가 될만한 것들을 싹 배제한 채 최대한 담백하게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그린다.
시간의 흐름에 올라탄 연인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아르바이트와 학교 성적 유지 정도의 비교적 무겁지 않은 책임만 주어지는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라는 불안정한 흐름에 함께 올라탄다. 이들은 키누가 학교를 졸업할 때쯤, 부모님의 압박과 취업 문제, 작은 경제적인 문제를 맞이하지만 그것 또한 나름의 로맨스로 승화한다.
취업을 못해 집안에서 눈엣가시가 된다면 집을 나와 함께 살면 되고, 집이 역에서 멀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행복한 데이트 코스로 만들면 된다는 식으로.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점점 깊어지고 무기와 키누는 연인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잠시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몰두하게 된다.
취업만 성공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더 멀리 벌어진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장면들이 점점 줄어들고 키누는 거실 창문 너머에, 무기는 방 창문 너머에 담기는 장면들이 많아진다. 말하지 않아도 늘 함께 신었던 흰색 스니커즈는 문 안을 바라보다 문 바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끝내 사라져버린다. 흰색 스니커즈가 있었던 자리엔 다른 모양새의 구두 두 켤레가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무기는 ‘돈이 없으면 키누에게 밤일을 시켜보라’는 선배의 말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지만 막상 취업을 하고 나선 키누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키누에게 상처를 줬던 딱딱한 면접관을 욕하던 그는 어느덧 그 면접관처럼 이마무라 나츠코의 ‘소풍’을 읽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키누에게 상처를 준다. 일에 휩쓸리던 무기는 학생 때처럼 영화, 책, 게임을 사랑하는 키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갈등이 생긴다. 이때 각자의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한때 즐거운 마음으로 공유했던 거대한 책장이 버티고 있다.
키누는 새로 나온 만화책이나 함께 보기로 했던 연극 등 예전에 무기가 좋아했던 것들을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노력하지만 무기는 키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일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키누는 이런 무기 앞에 앉아 빨래를 개고 옷장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빨래와 함께 섭섭한 마음도 함께 접어 넣는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
하나의 이어폰을 나눠 쓰던 두 사람
오프닝신에 나온 무기와 키누는 “이어폰 하나를 나눠 끼고 듣는 건 둘이 다른 음악을 듣는 일”이라며 분개한다. 음악은 최소 스테레오 채널(2채널)로 구성되어 있는 콘텐츠라 왼쪽, 오른쪽에서 나오는 각자 다른 소리를 같이 들을 때만 그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모노 채널이 아니다. 연인이라 하여 사랑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할 순 없다. 다른 채널에 있는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노력한 것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랑은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처음 고백하던 날,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을 끼고 레스토랑 점원 포린의 음악을 듣는다. 어렸던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고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똑같은 꿈을 꾸며 노력한다.
무기는 키누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회사에 취업한다. 키누도 무기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취업을 하고 무기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취미 생활을 공유하려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있는지, 그가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진 헤아리지 못한다.
무기와 키누는 첫 만남부터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했기에 자연히 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보단 무기는 키누가, 키누는 무기가 취업, 지인의 죽음, 시간이라는 변화 앞에서 자신과 같은 태도를 취하길, 같은 결말을 바라길 기대한다.
하지만 무기와 키누는 많은 부분이 닮은 타인일 뿐,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무기는 키누가 열광했던 미라전을 무서워했다. 미라전을 보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눌 때, 키누는 전시회 도록을 펼치며 흥분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무기는 애매한 표정으로 키누의 말을 듣다가 점원이 오자마자 재빠르게 미라로 가득한 도록을 덮어버린다. 키누는 무기의 가스탱크 영상을 보다가 깜빡 잠들어버린다. 무기는 키누가 가장 재밌는 장면에서 1시간 동안 잠들었다며 아쉬워한다. 두 사람은 이러한 사소한 다름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와 다른 연인에 오래도록 실망하고 슬퍼한다.
무기와 키누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이별을 결정한다. 그리고 ‘똑닮은 우리’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라전과 가스탱크에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지금껏 듣지 못했던 다른 채널에 담긴 소리를 들으며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꿈의 마지막 소절을 완성한다.
시간이 지나며 무기와 키누의 꽃다발은 싱그러움을 잃어갔지만 그 과정은 전혀 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고 시들어갔다기보단 완성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두 사람은 아름답게 말라붙은 우리라는 꽃다발과 함께 펼쳤던 베란다 커튼을 뜯어 정리하고 각자의 길로 향한다.
이별 후 두 사람은 각자의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다른 이와 각자의 연애를 이어간다. 현재의 연인은 음악을 듣는 방법부터 나와는 다른, 옛 연인처럼 나와 똑 닮았다고 말할 순 없는 사람이지만 무기와 키누는 그들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찾는다.
사랑한다고 꼭 하나의 이어폰을 갈라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연인과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목표점을 가진 사랑을 하더라도 나의 것을 그에게 들려주고 그의 것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 그것 또한 사랑임을. 무기와 키노는 어린 사랑의 끝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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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자를 제자로 둔 스승의 감정
가끔 인생에서 ‘보석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인연이 길든 짧든, 이 만남이 서로의 삶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어느새 그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때론 이 관계가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질 수도 있고, 그 경쟁의 자리가 때로는 스승과 제자의 구도로 나타날 수도 있다. 서로를 밀고 끌어주며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어느덧 ‘없으면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영화 <승부>는 실제 바둑계 전설 조훈현(이병헌)과 그의 제자 이창호(유아인)의 이야기를 담는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이지만, 정작 둘 사이에 어떤 갈등과 감정의 교류가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영화는 이들이 단순한 ‘스승과 제자’를 넘어 ‘라이벌’이 되고, 결국 서로에게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가는 과정을 촘촘하게 펼쳐 보인다.
<승부>는 조훈현이 바둑 신동 이창호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신동이라 불릴 만큼 번득이는 실력을 지닌 이창호는 어린 시절부터 도전정신이 가득했고, 프로 기사들과 맞서는 일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국내 바둑 1인자를 굳건히 지키던 조훈현에게 계속 도전장을 내밀어, 끝내 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창호가 조훈현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기초부터 배우는 과정은 따뜻하고 다정하지만, 점차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와 승부욕이 드러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승과 제자가 공식 대결에서 만나는 충격적 장면이 펼쳐지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흘러간다.
한편 영화는 단순히 ‘바둑 경기’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둑판 위에서의 사활만큼이나 치열하게 움직이는 스승과 제자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다. 둘 사이에 형성된 끈끈한 인연이 경쟁 구도가 되면서 어떤 파문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감정을 어떻게 주고받는지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첫번째 감정] 제자 이창호의 미안함
어린 이창호는 무척 대담한 인물로 묘사된다. 바둑판 앞에서만큼은 자신감이 넘쳤고, 누구와 겨뤄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강한 집착이 있었다. 바둑계 최강자였던 조훈현에게 거듭 도전한 끝에, 결국 제자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발랄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은 아이 같으면서도, 어딘가 기이한 집중력을 보여줘 관객에게 신동이라는 설정을 쉽게 납득시킨다.
조훈현의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 뒤, 이창호는 바둑의 이론과 전통을 배우면서도 특유의 반항적인 기질을 감추지 못한다. 스승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바둑을 선호하지만, 이창호는 한 발 물러서서 전체 흐름을 관찰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바둑판 위에서는 정답이 없는 만큼, 두 사람의 대립은 ‘누가 옳다’라기보다 ‘누구의 방식이 더 강한가’로 귀결된다. 한 편으로 이창호는 이렇게 스승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게 옳은 걸까라는 내적 갈등을 겪는다.
처음 맞붙은 공식 대결에서 이창호는 스승에게 승리를 거두고, 이후 대회에서도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둔다. 이 순간부터 이창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에 사로잡힌다. 스승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프로 세계에서 이기고 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스승이라는 존재에게 패배를 안긴다는 점이 이창호에겐 심리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승리할수록 커져가는 미안함, 그러나 동시에 승부에 대한 집착은 더욱 강해지는 묘한 내면 충돌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두번째 감정] 스승 조훈현의 실망
조훈현은 처음에 이창호를 데려왔을 때, 분명 특출난 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적수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훈현은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영민한 제자였기에, 누군가가 성장하는 속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창호만큼 빠르게 스승의 자리를 위협할 줄은 몰랐다. 정작 자신의 삶과 바둑 철학을 전수해 주었는데, 제자는 아예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내며 경쟁자로 거듭나는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창호의 바둑을 지켜보면서, 조훈현은 여러 차례 '그게 아니다, 이렇게 둬야 한다'며 짜증을 표출한다. 공격적이고 직선적인 스승의 성향은, 유연하고 변칙적인 제자의 기보와 부딪힌다. 그런데도 막상 성적이 좋으니, 단순히 틀렸다고 하기 어려운 현실에 부딪힌다. 결국 조훈현은 속으론 인정하면서도, 쉽사리 '내가 틀렸다'고 내뱉지 못한다. 제자를 100% 수용하기에는, 아직 자신이 현역으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다.
스승으로서 제자를 응원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경쟁자로서는 매번 패배를 맛보는 일이 고통스럽다. 제자가 강해지는 만큼 자신이 약해져 가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잇따른 패배 후에야 조훈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무너진다. 한때 최강이라 불렸던 자존심이 무너질 때 느끼는 허망함, 그리고 '내가 잘못된 길을 제자에게 가르쳤나?' 하는 후회가 그를 짓누른다. 이 영화는 그 실망의 순간들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며, 한때 최고의 선수였던 이의 내면에 깃드는 그림자를 애틋하게 보여준다.
[세번째 감정] 스승과 제자의 존중감
승부의 세계에선 언젠가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되기도 한다. 바둑판 위에서 조훈현과 이창호의 관계 역시 시시각각 달라진다. 그렇지만 치열한 승부 뒤에 누가 이겼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실력을 존중한다는 본질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조훈현은 처음엔 불만과 실망을 표출하지만, 결국 이창호가 걸어온 독창적 길을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이창호 역시 스승의 옛 기록들을 되짚어 보며, 자신이 너무 빠르게 승리를 좇은 건 아닌지 반성하는 순간이 온다.
바둑판 위에서 마주 앉아 손가락 하나로 돌을 놓을 때, 그들이 느끼는 긴장과 흥분은 서로가 아니면 충족하기 어렵다. 결국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유일한 동료가 된다. 경쟁자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기도 한 셈이다. 영화는 스승과 제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지점이 어느 순간 찾아옴을 보여주는데, 그 순간의 성취감과 뭉클함은 대단히 크다.
끝내 조훈현과 이창호는 서로에게 '네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영화 <승부>는 승패보다 더 중요한 동반자로서의 자각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며, 관객에게도 진정한 경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실화를 훌륭하게 각색해낸 영화
<승부>는 실제 있었던 조훈현-이창호의 바둑 역사를 바탕으로, 스승과 제자가 경쟁자로 변해가는 흥미로운 과정을 그려낸다. 바둑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주는 긴장과 성장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왜 둘은 한 판의 바둑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지, 어떻게 제자가 스승의 자리를 위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가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실제 조훈현과 이창호는 지금까지도 좋은 경쟁자로 서로를 인정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서로가 없었다면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며, 덕분에 한국 바둑계가 세계적으로 위상을 떨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영화는 그런 실제 감정을 최대한 살려내, 경쟁의 긴장과 인생의 아이러니를 동시에 보여준다.
연출은 차분하면서도 흡인력 있게 이어진다. 김형주 감독은 바둑판 위에 펼쳐지는 치열함을 디테일하게 포착하면서도,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을 놓치지 않는다.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 팽팽하게 얽힌 표정 등 작은 요소들도 극적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이병헌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노련한 기사 조훈현 역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유아인은 이창호 특유의 무표정 속에 내재된 열정과 부담감을 표현해낸다. 최근 상황으로 인해 유아인의 연기를 당분간 보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이번 작품에서 보여주는 제자 역할은 참 매력적이다. 조연들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내,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바둑이라는 소재 덕분에,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 층에게는 생소하지만 흥미로운 경쟁 세계를 보여준다. 바둑이든 어떤 게임이든, 인생을 관통하는 ‘승부’의 본질에 호기심이 있다면 이 영화를 꼭 보길 권한다. 마치 한 수 한 수 내딛는 모든 순간에, 인물들의 감정이 묻어나고, 결국엔 스승과 제자라는 틀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승부>는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경쟁을 통해 함께 성장하고, 끝내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인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담아낸 휴먼 드라마다. 바둑을 사랑하는 장년층 관객과 함께 관람하면 더욱 즐거울 것이며, “스승-제자” 관계가 빚어내는 미묘한 심리전과 진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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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평범한 보통 청춘의 끝자락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을 지나 피부에 와닿는 쌀쌀한 바람이 계절이 변한 초입임을 알려주는 지금, 짠하지만 않은 아주 평범한 보통의 청춘들이 만나 서로가 잊었거나 잃어버렸던 마음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2022년 한국 독립 영화 창밖은 겨울 리뷰입니다. 과거의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내려온 석우와 같은 회사 여직원 영애가 우연한 기회로 동행하면서 쌓아가는 일종의 로맨틱 드라마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서 얻는 웃음과 상처, 미련이라는 단어로 얼룩진 청춘의 흔적을 바라보게 되는 기분 좋은 설렘이 유지되는 한 편입니다. 화려함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수수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편안한 힐링을 느끼시리라 생각되네요. :)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창밖은 겨울 정보
뭐 사실은 버리고 싶은데 잃어버린 척 하려는 게 아닐까요?
자신의 꿈에 대한 미련과 상처를 얻고 고향 진해로 내려와 버스기사로 일하는 석우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터미널 의자에서 우연히 고장난 MP3를 줍습니다. 유실물 보관소에 이를 맡기려 하면서 누군가 잃어버린 분실물이라고 믿고 싶은 자신과 달리 내다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담당 직원 영애와 만납니다. 그리고 보관소가 직원 휴게실로 바뀐다는 소식에 그 MP3를 몰래 받아 함께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두 사람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하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When Winter Comes│감독·각본: 이상진
출연진: 곽민규, 한선화, 이정비, 목규리 외 多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4분
국가: 한국│등급: 12세 관람가
제작: 끼리끼리필름│배급: 영화사 진진
개봉일: 2022년 11월 24일
# 창밖은 겨울 후기
청춘들을 통해 보는 따스한 일상
서울에서 20대를 보내며 영화 일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의 자신을 투영한 이야기에서 출발했다는 이상진 감독의 말처럼 로케이션 장소부터 고향 진해를 배경으로 청춘의 끝자락에 꿈과 현실에 대한 고민, 미련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외적으로 멜로/로맨스 장르의 외피를 두르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미약하게 이어지고 실제로는 두 주연이 서로의 사연을 꺼내어 천천히 돌이켜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MP3라는 분실물은 지금은 포기했지만 한때 꿈꾸었던 청사진을 보여주는 듯 분실물과 쓰레기 사이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그저 놓고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묘하게 이어지는 두 주인공의 인연과 함께하는 일상은 과거의 상처, 미련을 보다듬어 추운 계절을 지나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는 봄처럼 그들이 성장하며 나아갈 발판이 되어 왠지 모를 포근함과 따스함으로 잔잔한 웃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행복과 성장을 통해 자아를 되찾는 모양새가 아마도 많은 분들이 ‘패터슨’을 떠올리는 이유인 듯합니다.
곽민규 X 한선화, 따뜻한 케미
과거의 기억이 준 상처에서 도망치듯 귀향한 버스기사 공석우 역의 곽민규는 여느 청춘과 별반 차이 없이 평범하지만 무언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 쳇바퀴를 도는 듯한 햄스터 같은 느낌을 전합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꿈의 조각을 스스로 분리수거하며 다시금 인생이란 퍼즐의 조각을 맞춰보려 힘겹게 살아가는 안타까움마저 녹여내죠. 물론, 소심하고 생각도 많아 답답함에 분통 터지는 인물이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지나쳐버린 누군가의 청춘, 자극적이지 않은 따스한 그의 연기에 마치 공 기사처럼 돌고, 돌아, 또 도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돌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MBC 주말 드라마 ‘장미빛 연인들’로 떼내며 ‘술꾼도시여자들’로 연기자 전향 이후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 한선화는 부산 출신답게 자연스러운 사투리와 맛깔나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브라운관에 비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던 그가 2020년 ‘영화의 거리’를 시작으로 최근 ‘교토에서 온 편지’까지 배우로서 드라마와 180도 다른 색깔을 보여줍니다. 털털하고 숨김없는 직설적인 영애를 맡아 눈치 없는 석우를 말없이 지켜보며 따뜻한 케미를 발산해 주죠. 소소한 웃음, 흐뭇함마저 전해지는 두 배우의 청정한 연기는 극의 분위기를 살리기에 더없이 좋아서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돌고 돌아 다시 오기까지
잃어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믿고 싶은 존재, 이미 알고 있고 잊고 있던 선택을 떠올리게 하고 지나간 계절에 대한 미련처럼 남아있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재정비해 현재를 마주하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진해를 선택한 것은 감독의 고향이라는 점도 있지만, 모두가 서울로 떠나버린 한적함이 묻어나는 배경에서 우리가 잊고 지낸 여러 가지의 모습을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지나가고 있는 계절은 잡지 못한 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미련이 남는 것처럼 아쉬움과 상처가 있던 과거의 기억을 잡고 싶었던 평범한 청춘들의 모습은 잠시나마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평범한 삶 속에 놓고 놓쳤던 선택의 순간, 꽤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될 듯하네요. :)
한 줄 평 : 미련과 후회를 돌고 돌아 현재를 마주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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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명 하에 박탈당한 모든 것을 위해
어릴 적에 상상해본 적이 있다. 만약 백 년이나 이백 년쯤 일찍 태어났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봐도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운이 좋아봤자 규방 규수. 혹 팔자가 사납다면 어디까지 떨어질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결국 그 망상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싱겁게 끝났다. 오랜만에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면서였다.
*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2020년 첫 만점을 준 작품으로도 많이 알려졌지만, <씨네21> 평론가 별점 또한 반짝반짝해서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서서 (2월 10일 기준) 13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 영화는, 내용만 보면 자못 단순하다. 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라는 귀족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그가 사는 섬으로 향한다. 의뢰를 맡긴 이는 엘로이즈의 어머니로, 딸의 결혼 전에 남편 될 사람에게 미리 초상화를 보내 두려는 심산이었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목숨을 잃었는데 하녀 소피부터 동생 엘로이즈까지 모두가 내심 자살로 추측한다. 결혼을 피해 수도원에 들어가 있던 엘로이즈는 언니가 남긴 미안하다는 편지를 받고, 원치 않는 결혼으로 떠밀려 나온다. 그런 엘로이즈는 결혼 초상화에 모델로 설 마음이 전혀 없으니, 산책 친구인 척 몰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조건이 마리안느에게 붙었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엘로이즈도 그런 마리안느를 마주 보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새로운 감정의 기류가 피어난다.
한 사람의 절망
이 영화는 탄탄하다. 뒤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미로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매 장면이 명화 같아서 다음이 궁금할 틈도 없었다. 음악이 없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종이에 슥슥 그림 그리는 소리, 따닥따닥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소리에 맞춰 나도 같이 숨을 죽인 탓이다. 그러다 한 번씩 그 촘촘한 연결이 의도적으로 삐그덕거리며 튿어질 때, 어린 시절 바이킹 처음 탔을 때처럼 심장이 철렁한다. 모닥불 앞에서 마비된 듯 서로를 바라보다 급작스럽게 움직임이 시작될 때라든가, 마을 여인들이 모여 주문처럼 들리는 노래를 시작할 때, 두 사람의 작별 장면에서도.
그중에서도 삐끗하는 정도가 심하다고 느꼈던 건 마리안느가 저택 안에서 환상을 보는 장면이다. 하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유령처럼 떠오르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중간중간 본다. 솔직히 말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전설의 고향이야 뭐야..."였다. 나중의 장면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작위적인 장면 아닌가, 싶다가... 어쩌면 엘로이즈가 아니라 엘로이즈의 언니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절벽으로 뛰어내린, 그렇게 결혼이라는 견고한 미래로부터 도망친, 절망했던 한 사람.
어쩌면 마리안느가 태워버린, 얼굴이 지워진 초상화도 엘로이즈의 언니 것이었는지 모른다. 엘로이즈에 비해 다소 현란한 손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엘로이즈의 그림은 몰래 그려야 했으니, 누가 봐도 요구받은 포즈 같은 그런 손 모양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유령이든 초상화든 어디까지나 한 관객의 해석이고 추측일 뿐,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한 갈래 가능성일 뿐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엘로이즈 언니의 그림자가 계속 기웃거린다고 느낀 이유는 엘로이즈가 결혼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이유와 아마 같을 것이다. 꼭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정서겠지.
두 사람의 사랑
결혼이 싫어 수도원으로까지 도망쳤음에도 끝내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자 엘로이즈는 더 도망치지 못한다. 초상화 모델이 되길 거절하는 이상의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타난,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자신을 온전히 던지면서 엘로이즈의 삶에 사랑이라는 불이 켜진다.
두 사람은 예술가였고, 각자의 미학이 공명하는 사랑을 했다. 마리안느가 꿈을 꾸고, 손을 움직이는 예술가라면 엘로이즈는 생각하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꿈꾸게 만드는 예술가랄까. (마음을 확인한 후 마리안느가 "내 꿈을 꿨어?" 물으면 엘로이즈는 "네 생각을 했어." 대답한다.) 처음 완성된 초상화를 볼 때도 두 사람은 화가와 미술 비평가처럼 대화하며 단박에 서로의 말 아래 깔려있는 마음까지 알아차린다.
엘로이즈는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묻는다. 같은 장면에서 서로가 관찰한 서로의 면면을 ("모두 알고 있군요")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면, 화가와 모델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르로 예술을 펼쳐가는 두 사람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 세상엔 그렇지도 않겠지만, 시대극 속에서라면 으레 모델은 화가에 비해 부수적인 인물로 인식된다. 존재와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는 그인데도.
게다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우리는 동등한 지위라고, 정확히 같은 지위라고 단호하게 강조한다. 높으신 분이라고 놀리듯 던진 마리안느의 말을 다잡으며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였지만, 어쩐지 뮤즈라는 이름으로 예술가의 자리를 박탈당해온 이들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의 자리에서 내쳐진 이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까미유 끌로델, 그는 예술가로서도 연인으로서도 깎여나간 이름이니까.
이 영화는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떠오르게 만들고는 고스란히 감싸 안는다. 목적어 자리에 갇혀 있던 이들을 구해내어 그들이 빼앗긴 주어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뮤즈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박탈당했던 예술가와 연인들의 자리를 오롯이 되찾아 준다.
세 사람의 연대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귀족 아가씨는 요리를 하고 하녀는 자수를 놓는데, 화가가 가운데서 술을 똑같이 따라 한 잔씩 나누어준다. 자연스럽게 술을 받아 홀짝이고 각자의 일을 계속하는, 문자 그대로 정확히 같은 지위의 세 사람. 엘로이즈가 수도원 생활을 표현할 때 썼던 "평등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첫 초상화가 신랄한 비판을 받으며 두 예술가에게 버려지고,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말미를 조금 더 주며 자리를 비운 단 며칠. 짧은 시간 세 사람은 친구가 되어 시간을 함께 보낸다. 마을 여자들이 모닥불 근처에 모일 때도 함께 가고, 카드놀이를 하거나 책을 함께 읽고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하녀 소피가 민간요법에 의지해 낙태를 꾀할 때 같이 바다로 들로 다니며 돕고, 중절 수술을 하러 갈 때에도 동행했다.
그리고 이들의 아름다운 연대는 이내 예술로 승화한다. 수술을 마치고 돌아와 침통한 분위기가 감도는 밤, 엘로이즈는 그 순간을 단박에 예술로 바꾸어 버린다. 요청에 의해, 누군가가 눈대중해볼 대상이 되기 위해 예술의 객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주체가 되어 순간을 뒤틀고 비집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뒤집어, 가련한 객체였던 에우리디케를 선택의 주체로 만들었듯이 또 그렇게.
세 사람 모두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 여성 화가에게는 주제 하나도 쉬이 내어주지 않던 시대에 게릴라전을 치르듯 그림을 그리던 마리안느에게도, 상대는 자신의 초상화까지 그려가는데 자신은 상대가 사는 도시밖에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억지로 결혼을 해야만 하는 엘로이즈에게도, 원치 않았던 임신을 혼자서 떨치고서는 시든 꽃을 활짝 핀 자수로 담아내는 소피에게도 그 힘은 보인다. 그리고 그 힘은 그들끼리만 보낸 그 며칠 가장 활활 타오른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함께 있는 힘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홀로 있음도 결국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식하며 스스로와 함께 있는 것일 테니. 이 영화에서 그림은 함께 있거나, 함께 있던 시간을 되새길 때 그리는 것들이다.
또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단 세 장면뿐인데,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가장 좋아하는 곡"을 들려주는 장면, (개인적으로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처음 입 맞추고 싶었던 순간이 이때일 거라고 믿고 있다. 같이 본 친구는 다른 장면을 꼽았지만.) 물리적으로 옆에 서서 눈을 마주치면서 음을 쌓아가는 여자들의 노래는 물론이고, 몸으로는 떨어져 있는 마지막 장면조차 엘로이즈의 시선 끝에는 누가 봐도 확실히 마리안느가 아른거리고 있다.
예술이란 단어는 너무 크고 깊어, 나로서는 장님 코끼리 더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 예술이란 사랑하는 눈에서 시작될 때 그 본질의 의미를 갖는 것일 거라고 믿는다. 또 역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스카 와일드 같은 유미주의자들에게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아름답지 못하게 담는 것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고, 폭력의 양상을 보이는 순간 예술은 이미 본질을 상실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과 사랑은 어쩐지 닮아있어, 이 영화의 두 예술가 사이에서 부드럽게 얽히고 파도처럼 고동친다. 시선 속에서, 대화 속에서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던 그것에, 두 예술가가 캔버스 앞에 마주하는 순간부터 불이 붙는다.
이 영화는 당대 여성의 지위를 고민하는 여성의 메시지를 배제하고 볼 수 없고, 아주 대놓고 두 여성의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고, 그들이 펼치는 예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셋은 마치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 같아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생존의 결을 같이 한다고 느낀다. 주인공들끼리 보낸 5일이 아름다웠던 건, 그 셋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랑은, 여성은 이런 존재라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나는 예술도 여성성도 사랑도 모두 무언가를 강인하게 감싸는 힘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어그러진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라고, 그렇게 믿는다.
한 사람의 절망, 두 사람의 사랑, 세 사람의 연대 안에서. 그렇게 이 영화는 보여준 이들과 보여주지 않은 이들까지 감싸 안으며 우아하게 타오른다. 한 번 붙은 불은 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슈베르트의 <여름>처럼 강렬한 사랑의 기억 하나가 박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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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이 2023년의 관객에게 묻는 전쟁의 의미
마지막 전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순신(김윤석)이다. 어느덧 전쟁 7년 차. 조선과 왜 나라(일본) 이젠 지쳤다. 희생자가 많은 조선. 이는 조선과 연합을 맡은 명나라도 마찬가지다.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선조와 궁궐 안. 문신들은 전쟁을 금방 끝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조선 내부에서 전쟁에 대한 온갖 논의가 오간다. 하지만 대부분 ‘전쟁 후 조선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뿐이다. 답답한 이순신. 이 왜 나라 무리들을 그대로 놔두다간 화가 돌아올 것 같다. 이순신의 동상이몽이 조선 궁궐 내부의 신하들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내부에서도 전쟁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고니시(이무생)와 시마즈(백윤식)는 다이묘의 입장에서 대립하는 관계다. 이 둘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있는 군대를 철수시켜라’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하는 시마즈와 고니시. 둘은 이순신만은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조선과 연합을 맺은 명나라의 장수들도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 의리라면 죽고 못 사는 등자룡(허준호). 등자룡은 조선에게 우호적이었지만 진린(정재영)은 뭔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전쟁을 지속하는 게 맞을까? 진린의 머릿속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전운이 감도는 조선. 세 나라의 마지막 전투가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다!
신선한 시도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느꼈던 가장 큰 장점은 신선함이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전작과는 다른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이 영화의 첫 번째 목표는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르다. 짜릿한 액션 쾌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처럼 멋진 이순신 장군이 나쁜 놈들 때려잡는 액션물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 영화의 목표는 뭘까? 바로 반전(Anti-war) 영화다. 이 목표 아래에서 본작은 전작 <한산 : 용의 출현>과는 다른 노선을 취하고 있다. 가령 전작에서 1부는 2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후반부 액션과 거북선의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본작은 다르다. 본작은 사실상 1,2부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사들의 생사여부가 장군들 몇의 판단에 따라 달렸다는 아이러니를 묘사해야 하고, 이 ‘이순신 3부작’의 핵심 키워드인 ‘의’라는 가치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작이 단순히 서사의 인과관계때문에 사용된 것과는 정반대다. 그리고 이 1부가 전개되는 도중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의 선택이 흥미롭다. 이 캐릭터들은 전쟁을 형상화하고 있다. 입체적인 특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전쟁 이기면 승리에 기쁠 것 같지만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복잡미묘함을 묘사한 것이다.
전쟁의 비참함
이 영화가 반전영화로 기획된 근거를 다방면으로 읽을 수 있다. 그 하나의 예는 카메라 시점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처음부터 이순신 장군의 전략가적인 면모에 강세를 두지 않는다. 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를 처음 기획할 때에 제작하는 입장에서 염두한 부분일 것이다. 일단 전작 2편과는 다르게 이 노량해전에 대한 기록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난중일기>에서 전장의 상황을 직접 묘사하던 이순신 장군이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휘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할 것이 적다는 한계가 영화의 흐름과도 이어진다. 이야기 안에 판타지스러운 장면이 많이 들어가는데, 빈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흐름을 상상력을 통해 영화의 에너지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묘사하는데도 안성맞춤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타국 병사들을 해치우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들어간다면 영화의 접근이 1차원적이게 된다. ‘임진왜란은 나쁜 놈을 때려잡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감동만 느껴지는 것이다. 이걸 그대로 따라간 것이 전작 <명량>과 <한산 : 죽음의 바다>다. 영화가 굳이 같은 방식을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라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최후까지 무게감 있게 연출하는 것이 나을까? 영화는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 생명의 무게감을 후반부까지 잇는 것이다.
비단 카메라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개 상으로도 반전영화를 가리키는 소재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전작 두 편의 진주인공이었던 어떤 것이 등장/퇴장하는 방식, 병사 개개인에게 동기부여가 들어간 것, (아마 불호 평이 압도적으로 많을) 북과 꿈, 영화의 가장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캐릭터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 등 이 영화는 전쟁의 비참함을 내내 머금고 있다. 이는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이라는 위인으로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읽힌다. 글쓴이는 이 시도가 신선했다고 생각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나 <1917>에서 봤던 서양 전쟁 영화의 씁쓸함이 이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하는 존재감
이 영화의 시마즈와 진린의 존재감은 주인공 이순신만큼 강력하다. 시마즈는 고니시과 함께 이 영화를 이끄는 빌런이다. 영화는 이 시마즈를 악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악마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특별하다. 우리가 아는 악마는 어떤 존재일까? 일단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다다를 수 없다. 하지만 악은 우리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마즈라는 인물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이 특성을 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는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시마즈가 조-명 연합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 입 밖에 내는 대사와 이 인물의 마지막 장면은 완벽하게 대비되는데, 이를 염두하고 영화를 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정재영 배우가 맡은 진린 캐릭터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순신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인데 진린이 주인공을 묘사한다?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문장이지만 글쓴이는 다른 측면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취한 전략가적 면모를 적군이 아닌 동맹의 연합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진린의 과제다. 그리고 정재영 배우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영향받은 모습을 강한 감정표현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글쓴이는 이 캐릭터 사용법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전작 <한산 : 용의 출현>에서 변요한 배우가 맡은 ‘와키자카’와 비슷하다. 다만 등장인물이 처한 처지가 적군과 동맹군이라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또 연기하는 방식도 차이점이 있다. 변요한 배우의 와키자카가 순수한 전쟁광을 맡았다면 진린은 기회주의적이지만 그 근거가 어느 정도 있는 인물이라는 점도 차이점이다. 글쓴이가 두 캐릭터 중 더 정이 들었던 건 진린이다. 와키자카가 좀 답답한 구석이 있었던 반면 진린은 조선 입장에선 박쥐 같은 느낌이지만 명의 입장에선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물 연출에 있어서 김한민 감독이 더 좋은 방식을 고른 지점이다.
다만 글쓴이는 등자룡의 캐릭터가 진린과 시마즈에 비해 설명이 부족해 보였다. 이 인물의 작중 행보는 실제 인물을 그대로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인물을 이렇게 묘사했던 것도 나름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이야기상에서 이 인물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면 이 캐릭터가 주는 정서의 힘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냥 이순신과 친해서? 그래 보이진 않다. 뭔가 가치관과 어그러지는 것이 있어서? 그런 묘사도 없어서 글쓴이가 상영관에 있을 때는 갑자기 전개가 빨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안에서 이 캐릭터가 겪는 사건은 거대한데 마음은 그곳으로 향하지 않으니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의’가 ‘왜?’가 되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가진 단점 중 하나가 사족이라는 말을 듣기 딱 좋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에서 김한민 감독이 진짜 전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 사족에 있다고 본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며 이런 요소들이 이순신 장군이 가진 숭고함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겠다는 김한민 감독의 의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령 이순신이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누군가에게 서찰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한다. 이 서찰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인물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이순신 장군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또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소리, 러닝타임 다 끝나고 올라가는 쿠키영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반복되는 소리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듯 이순신 장군의 직업윤리가 후세대에도 빛을 발했다는 것을 청각적인 요소로 보여준 것이다. 또 쿠키 영상 역시 마찬가지다. 글쓴이는 이 쿠키 영상도 역사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쿠키 영상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지를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를 보는 폭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김윤석의 이순신
김윤석 배우의 이순신은 3부작 중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민식 배우와 박해일 배우의 이순신은 장군으로서의 위엄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들이다. 가령 <명량>에서는 이순신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군대를 격려하는 장면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산 : 용의 출현>에서는 정적인 구도가 기억에 남는다. 이 정적인 구도는 영화에서 장점이자 단점이다. 멋진 박해일 배우와 진부한 플롯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작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는 정적이고 감정전달의 폭이 넓고 깊은 이순신 둘 다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에서 ‘신파극이다!’라는 말을 듣기 딱 좋은 부분이 있다. 이 부분 연기도 김윤석 배우가 보여준 역량이 아니었다면 정말 신파극처럼 보이기 쉬웠다. 그리고 김윤석 배우는 목소리 톤을 내는 방식으로도 이순신을 표현한다. 진린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런데, 일정한 톤으로 이순신의 결기를 표현하는 좋은 연기였다. 이는 아수라장인 전쟁터에서 감정표현이 드물다는 인물의 특성을 통일성 있게 끌고 가는 좋은 선택이었다.
이걸 기대하고 간다면
이 영화에 대해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액션이다. 사실 이 영화 자체가 반전이라는 테마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출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김한민 감독과 (나와 같은) 일부 영화팬들의 입장이다. 당연히 이순신, 그것도 김윤석의 이순신이 멋진 액션으로 왜 나라를 해치우는 액션물을 기대하고 갔다면 실망한다. 롱테이크? 조명? 촬영? 다 처절한 병사들의 모습만 보여줄 뿐 엄청난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글쓴이는 이 <노량 : 죽음의 바다>가 대중적으로 큰 흥행을 할 영화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 전작 <명량> <한산 : 용의 출현>에서 구사했던 간단한 플롯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김한민 감독이 두는 선택이 좀 오그라들 수도 있다. 1부는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지루하게 느끼기 쉽다. 그러나 후반부는 또 다르다. 쿠키와 엔딩이 그런데, 약간 과해보이기도 하다. 글쓴이도 이 부분은 감독이 놓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명량>에서 국수주의적 대사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김한민 감독이, 과연 이 선택 말고 다른 건 없었을까? 싶다면 글쓴이 입장에서도 ‘아니요’다. 차라리 그냥 존재만 언급하고 끝난다면 더 이야기가 입체적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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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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