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3-11-12 22:35:42
세 명의 '더 마블스'를 보고 싶어 억지로 기획한 듯
<더 마블스> 스포일러 없는 짧은 리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캡틴 마블(캐럴 댄버스), 모니카 램보, 미즈마블(카밀라 칸)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미즈 마블>의 쿠키영상이다. 느닷없이 잡혀온 캡틴 마블. 난생처음 보는 집으로 끌려왔다. 하지만 캐럴이 위치한 이 방의 주인은 캡틴 마블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곳곳에 캡틴 마블의 사진이 걸려있고, 팬이 그린 그림도 붙어있다. 방 문을 나서는 캡틴 마블. 카밀라의 가족들이 모여있다. 머쓱하게 인사하는 캐럴. 하지만 이내 강한 힘에 이끌려 원래 있던 우주로 돌아간다. 캐럴에게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 닉 퓨리. 캐럴은 퓨리에게 내 위치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보고한다. 위치를 공유하는 것은 미즈 마블과 캡틴마블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캐럴에게 받은 큰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모니카도 이 둘과 위치를 공유하고 있었다. 덕후와 최애, 애증의 관계가 뒤섞인 3명의 ‘캡틴 마블’이 함께 힘을 합쳐 지구를 지켜야 한다.
<로키 2>의 마지막 회차가 공개되는 날 하루 전에 개봉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밀도는 <로키 2>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영화 안에 아이디어만 있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전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이 영화가 연출로 보여주고자 했던 바는 분명해 보인다예를 들어 기존 마블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가 몇 있다. 영화 초반부에 들어가는 두 장면의 액션신은 <캡틴 아메리카 : 윈터솔저>와 <아이언맨 3>을 연상시킨다. 이 오마주는 미즈 마블이 캡틴 마블의 굉장한 팬이라는 콘셉트와 조응한다. 하지만 이 오마주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하늘을 나는 슈퍼히어로들의 모습이 어색하다. 이런 이물감은 세 슈퍼히어로가 힘을 합쳐 빌런의 힘을 막는 과정에도 마찬가지다. 동양계 슈퍼루키/백인 미녀/흑인 여배우가 힘을 합쳐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문장은 근사하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치는 액션신이 특별히 멋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대표적으로 영화 중반부즈음에 셋이 줄넘기와 저글링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장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에서 세명의 스파이더맨이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던 모습과는 다른 1차원적인 접근이다. 인물의 감정선이 깔끔하지도 못했다. 캐럴 댄버스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만 이해한 채로 영화의 문제해결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본 분들 중 적지 않은 관객들이 박서준 배우의 캐스팅에 대해 코멘트할 것 같다. 실제로 3분도 안 되는 분량이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으로는 쿠키영상이 있다. 마블의 팬이라면 익숙한 얼굴이 몇 등장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본 영화에서 흐물흐물한 이야기를 보여준 탓에 마블의 야심이 와닿지 않는다. 아쉬운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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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2차대전 독일군에 의해 고립된 연합군 병사들의 최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한 전쟁영화 덩케르크(201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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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댓글부대> 런칭 예고편
"그게 다 저희들이 만든 방법이라고요" #손석구 X #김성철 X #김동휘 X #홍경 웰메이드 범죄 드라마 [댓글부대] ⌨3월 27일 극장 개봉 확정⌨ 런칭 예고편 전격 공개! #댓글부대 #3월27일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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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마술사는 낭비를 모르지
외진 사막에서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는 나일스(앤디 샘버그)와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 결혼식에서 만난 둘은 꽤나 빠른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애틋하게 무르익을 무렵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일스의 어깨에 박힌다. 혼란에 빠진 세라에 반해 의외로 덤덤한 나일스는 붉은빛으로 가득한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나일스가 걱정된 세라 또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는 이미 지났을 11월 9일 결혼식 아침에 눈을 뜨게 된다. 과연 세라에겐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친숙의 탈을 쓴 세련된 이야기꾼”. <팜 스프링스>는 우리에겐 이미 친숙해져 버린 시간여행과 로맨틱이라는 두 장르를 결합시킨다. 친숙한 소재는 관객에게 접근하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오용하면 진부함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맥스 바르바코우 감독에게 친숙함이란 위험보단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무기인 듯하다. 분명 다른 작품에서 봤음직한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재구성하는 모습은 이번 작품이 첫 장편 영화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한다. 특히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이끌어내는 모습은 ‘시간의 마술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 획기적인 개입<팜 스프링스>의 친숙함은 <사랑은 블랙홀>과 <해피 데스데이> 사이를 오간다. 바르바코우 감독은 두 작품에 대한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그치지 않고 색다른 시도를 꾀한다. 바로 ‘중간자의 개입’이다. 반복되는 시간을 살아가던 주인공은 루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중간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간 속 기억의 축적은 주인공에게만 적용되기에 그들은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 미래를 예견하는듯한 모습으로 설득하지만 주인공들과 같은 시간을 적용받는 관객들에겐 지루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바르바코우 감독은 중간자의 개입을 통해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방법으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을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 동일한 시간 축 위에 다양한 인물의 등장
나일스, 세라, 로이는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상영시간이 한 시간 반에 지나지 않는 작품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루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결국 <팜 스프링스>는 인물들의 과거를 최대한 절제하고 11월 9일이란 하루에 집중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그들의 행동에 따라 하루는 변한다. 매번 다른 시간 속에서 함께 쌓인 경험이 인물들의 과거가 되고 이는 곧 그들의 개성으로 자리 잡는다. <브루클린 나인>, <파고>, <위플래시> 등으로 대중에게 인증받은 배우들은 훌륭한 연기를 통해 각자 맡은 캐릭터의 개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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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과거를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바꾸는 메시아의 등장
메시아의 등장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폴 아트레이더스(티모시 샬라메)다. 아버지(오스카 아이작)가 죽었다. 그리고 살던 왕국이 공격당했다. 멸문당한 아트레이더스 가문. 힘겹게 어머니(레베카 퍼거슨)와 함께 빠져나와 아라키스로 향했다. 모자에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 사람은 지금 죽기 5분 전이다. 위기일발의 모자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건 아라키스 사람들이다. 모자에게 손을 내미는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스틸가는 폴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리산 알 가입'으로서 선택받은 자라고 주장한다. 반신반의하는 아라키스 사람들. 그중 한 명은 영화의 다른 주인공 챠니(젠데이아)다. 의심이 늘어난다. 그 의심은 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 모든 미래가 폴을 위대한 메시아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주인공은 그게 싫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물들과 충돌한다. 살아남고, 복수까지 이뤄야 한다. 과연 아들 폴과 어머니 제시카는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주특기를 보여주다
이 영화 <듄 : 파트 2>의 이야기는 감독 드니 빌뇌브의 인장이 크게 박혀있다고 볼 수 있다. 빌뇌브는 그동안 서서히 쌓아 올리다가 후반부에 터트리는 플롯을 쓰곤 했다. ‘듄’ 시리즈 이전 가장 최근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컨택트>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였다. 이런 감정적인 밀도를 쌓아 올리는 이야기 흐름은 이 <듄 : 파트 2>에도 유효한데, 영화에서 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방점이 찍힌 장면이 많다. 가령 폴이 영화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을 위해 영화는 이야기의 배경을 그전부터 깐다. 폴 이전에 영화 안에서 어떤 인물이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한다던가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폴의 어수선한 내면을 그린다는 것이 그렇다. 이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인물의 내면을 바탕으로 이야기 중반부터 모든 영화는 천둥같이 울린다. 영화를 보면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라는 느낌이 드는데, 티모시 샬라메의 호연을 받쳐주는 연출의 힘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느껴지는 것. 후반부의 폴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연출 때문에 ‘빌뇌브치곤 약한 이야기 아닌가’ 싶은 감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이 영화가 후반부까지 이끌며 전달하는 카타르시스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 위해 <듄 : 파트 2>가 고른 다른 선택지는 바로 레이디 제시카서사다. 이야기의 저변을 다양하게 넓힌다는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인물은 <듄 : 파트 2>의 기획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인물은 점점 폴의 행보를 따라가거나 앞서가는 감이 좀 있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딜레마 중 하나와 직결되는 문제라 무조건 들어가야 했던 이야기의 핵심 구조이기도 하고, 또 단선적인 백인 주인공 서사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넓이를 넓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리고 후술 하겠지만 영화가 고전 책들 그러니까 소설이나 역사책들을 오마주한 느낌이 좀 있는데, 이 '레이디 제시카'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무언가를 모티브 삼은 듯하다. 이게 빌뇌브의 연출 특징과도 어울리기도 하지만 이 제시카가 혼자서 당당히 선다는 점에서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효했다. 이 인물은 후속작 파트 3에서 이야기의 주제를 더 강조할 인물로 보이는데 안 본 관객들이라면 제시카의 능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청각을 장악하다
전작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었던 시각효과는 본작 <듄 : 파트 2>에서도 장점이다. 글쓴이가 1편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칼라단 묘사다. 이 당시 우주선을 묘사했을 때 왠지 이거 전부 CG를 입힌 것이 아니라 일부는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찾아보면 어떤 우주선들은 빌뇌브를 비롯한 시각디자인 팀이 진짜 우주선을 만들고 어떤 건 입힌 것으로 보인다(실제로도 이 <듄> 1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옐로 스크린’에 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 연출 방식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CG를 사용하되 배우들의 몰입을 위해 어떤 건 실제로 만들고 어떤 건 아닌’ 장면연출은 본작 2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오스틴 버틀러가 맡은 페이드 로타 역은 이야기의 중심 추가 된다는 점에서 핵심인데, 이를 실존인물과 정교한 CG로 이야기를 이끈다는 점에서 좋은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시각화의 관점에서 이야기의 큰 동력이 되는 부분은 모래벌레다. 이 모래벌레에 관한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이 모래벌레를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이나 이 것을 활용한 캐릭터들이나 SF의 생동감을 높이는 좋은 선택이 돋보인다.
비단 VFX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시각적인 요소들은 굉장하다. 우선 공간적 배경인 사막은 어디서 이런 장소를 구해왔는지 이야기의 분위기를 살리는 좋은 로케이션 선택이었다. 또 영화는 색을 굉장히 잘 쓴 편에 속한다. 흰색, 초록색, 파란색, 회색, 흑백화면 등 색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전달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컨택트>에서 외계 비행선을 둘러싼 풍광이나 주인공이 딸과 노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우울감 같은 것도 영화가 구현을 잘 한 편이다. 가령 차니를 둘러싼 인물들의 정서를 카메라가 어떻게 보여주는지, 또 이 인물을 대하는 폴의 내면은 또 어떨 것 같은지 유추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힘이 좋았다. 촬영 구도도 영화 안에서 정교하게 다 짜여있다. 이는 다수와 소수의 시각적인 대비다. 이 대비를 통해 영화가 폴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는지를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이런 시각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청각적 요소의 강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듄 : 파트 2> 전작 <듄> 1편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이유 중 하나는 특별관의 보급 때문이다. 특히 메가박스의 ‘돌비관’이 엄청난 인기였다(제주에는 이게 없다. 글쓴이는 복통이 느껴지지만). 이는 <듄> 1편이 연출한 청각적인 요소 때문인데, 역시 2편 마찬가지로 아이맥스보다 돌비관을 추천하는 바다. 왜? 이 영화에서 청각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 흐름에서 알람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사운드가 가져다주는 생동감이 엄청나다. 글쓴이는 아직도 그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스타일을 장악한 빌뇌브의 연출력이 느껴진다.
장르 이력서
이 영화가 10000년대의 이야기를 핵심으로 삼고 있어 SF판타지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은 과거라는 테마는 굉장히 중요하다. 우선 글쓴이가 이 영화에서 ‘과거’를 느낀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는 ‘레이디 맥베스’ 서사를 캐릭터로 갖고 온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 두 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아라비아 로렌스>가 그렇다. 또 영화 일부 장면에서 <지옥의 묵시록>이나 <매드맥스>와 <블레이드 러너>가 느껴지는 부분이 얼마 있다(이 외에도 오마주한 영화는 많은데 어떤 장면에서 이를 적으면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세 번째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어떤 것이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모습과 겹쳐 보이는 모습이 있다. 이는 우리의 세태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측면에서도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의 모습은 분명히 고전 북미 영화들을 오마주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는 드니 빌뇌브가 본인의 덕후스러움을 뽐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과거를 다룬 이유는 충분하다. 이야기의 흐름과 영화의 연출 의도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경험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조명 밑의 그림자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관객들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해서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기 전 기준으로 ‘듄’ 세계관 이해 못 하는 분들이 보면 지루해할 확률이 높다. 왜? 솔직히 이 영화가 그렇게 친절하진 않다. 알아야 할 정보가 많다.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의 동력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세계사를 가져오긴 했으나 그건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 입장에서나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교양과목이 아닌데 이 세계관을 다 이해하고 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빌뇌브 특유의 느릿느릿한 템포 때문에 쉽게 이야기가 꽂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데 왜 이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이는 빌뇌브의 느린 템포가 이야기에서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동감이 넘친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젠데이아가 맡은 차니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쉬울지는 의문이다. 이 캐릭터가 이렇게 연출된 것은 핵심을 전달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편을 정말 잘 기억하는 팬이 아니라면 이 인물의 행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스틸가의 덕을 좀 봤다. 또 주인공의 반대 지역에 속해있는 인물들은 감정선이 붕 떴다. 이 역시 영화가 의도적으로 고른 선택지인데, 이 때문에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이해하기 쉽다.
이런 단점들은 영화의 가장 큰 결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음’을 <듄 : 파트 2> 자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편에 비해서 분명히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건 관객 입장에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자연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지루해질 만하면 갑자기 재밌는 장면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분량을 더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물들의 내면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설정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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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도시'로는 성공, '콘크리트 유토피아'로는 실패
사랑하는 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망가진 세상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지완(이준영)이다. 활을 메고 있는 지완. 눈앞에 악어괴물이 보인다. 활시위를 당긴다. 악어에게 적중한다. 죽은 것 같다. 악어에게 다가가는 지완. 하지만 악어가 갑자기 살아나서 지완에게 달려온다. 질겁하는 지완. 근처에 있는 차에 잽싸게 숨는다. 위기에 처한 지완을 도와주는 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남산(마동석)이다. 악어의 목을 자른 남산. 악어 사체를 가지고 가서 마을 사람들과 식량을 나눈다. 남산 덕에 위기를 넘긴 지완. 지완과 남산은 가족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친한 사이다. 지완이 턱없이 어린 탓에 둘이 친구야?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남산은 정이 많다. 한편 지완이에겐 짝사랑하는 여자 애가 있다. 바로 수나(노정의)다.남산은 어릴 때 수나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지완의 연애 이야기는 남산과 대화하기에 적합하다. 남산에게 수나 이야기만 하는 지완. 이 두 사람에 일상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수나가 양기수(이희준)에게 납치된 것이다. 무너진 세상. 남산과 지완, 그리고 또 다른 손님이 기수 일당의 본거지로 직진한다.
형은 좀비를 찢어
<황야>는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한 영화에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을 200% 활용한다. 우리가 마동석 배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가 액션스타라는 점이다. <황야>는 마동석 배우가 구현 가능한 액션을 전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각종 ‘~파이팅’이 다 있다. 총기액션, 나이프파이팅, 맨손 격투 등 온갖 방식으로 나쁜 놈들을 두들겨 팬다. 영화 줄거리도 이 액션 역량을 다 보여줄 수 있게끔 짜여 있다. 가령 빌런 무리들에겐 특별한 점이 있다. 이 부분을 주인공 일행이 금방 간파한다. 그러나 이 약점을 공략하기 전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마동석 배우의 액션연기로 채웠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라는 설정은 주인공 남산이 총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음과 동시에 나쁜 놈들이 활개 치기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나름 근거를 제시하며 살려 액션 보는 맛이 좋다. 이 액션이 와일드하기만 하면 뭔가 맥이 빠질 것이다. 이에 당위성이 생긴 폭력 묘사가 극의 재미를 돋군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름 ‘마동석 액션영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인다. 바로 이은호 역을 맡은 안지혜 배우의 등장이 이것의 근거다. 후술하겠지만 이 영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설정 자체를 잘 살린 편은 아닌 것 같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이야기의 느슨함을 안지혜 배우의 액션연기로 끌고 간다. 처음부터 영화가 연출로 이 인물이 ‘중요해!’라고 강조한 것이다. 가령 이 이은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 장면을 보면 강렬하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에서 이은호 캐릭터가 이렇게 등장할 이유가 크게 있는 건 아니다. 장영남 배우가 맡은 캐릭터 처럼 초반부에 등장해도 큰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관객이 신선함을 느껴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연출을 보여줬다. 이후에도 <황야>의 이은호는 이 신선한 동력을 충분히 이행한다. 글쓴이는 첫 번째 공간을 바꾸고 나서 이 인물 중심으로 테이크를 길게 짠 장면을 최고로 뽑는다. 확실히 허명행 감독이 무술감독 출신이라 어떻게 해야 생동감이 사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이 배우의 이 장면은 여태까지 본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 액션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용감한 시민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를 좋아한다. 왜? 이 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한다. <D.P>와 <마스크걸>에서 양아치 연기를 생각해 보면 뭔가 스테레오 타입의 나쁜 놈 같으면서도 자기만의 색이 굵었다. 그러나 글쓴이는 두 드라마보다 <용감한 시민>에서의 연기를 더 좋아한다. 이 <용감한 시민>에서 한수강이라는 인물 역시 액션이 중요했는데 시원시원하게 잘 소화한다. 본작 <황야>에서도 똑같이 액션연기를 보여주는데, 남산과 안지혜와는 다른 결의 액션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과의 차이점을 눈 크게 뜨고 보면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가 디테일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황궁아파트
사실 액션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디스토피아 묘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답게 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대지진이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구. 당연히 온 세상은 폐허가 됐다. 시각적인 묘사에 있어 이 난장판을 잘 묘사했냐? 고 묻는다면 글쓴이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노란색으로 색감을 뺀 부분이나 무너진 건물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까지 나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글쓴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부산행>과 겹쳐 보이는 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폐허가 된 세상을 묘사하는 데에는 좋았지만 고유의 색이 흘러넘친다고 보긴 어렵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 묘사가 개성이 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관객들에겐 비판 요소로 읽힐 수도 있다.
어디서 봤는데
사실 이 영화에 대해 글쓴이가 가장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문제 해결 방식이다. 이 영화의 플롯을 대략적으로 써보겠다. 주인공이 있다. 이 주인공을 둘러싼 세상은 온갖 나쁜 놈들 천지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 푸근하지만 주먹 하나는 살벌한 주인공이 이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다. 우리는 비슷한 플롯을 알고 있다. 바로 ‘범죄도시’ 시리즈다. 마동석 배우가 속해있는 빅펀치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시그니처를 못 보고 지나가도 ‘이거 그거 아닌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황야>가 개성이 뚜렷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마동석 배우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그러라고 캐스팅한 것 아닌가? 하지만 글쓴이는 ‘범죄도시’ 시리즈와의 기시감을 문제 해결 방식에서만 근거를 찾고 싶지 않다. 바로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가 있다. 이 캐릭터는 수많은 빌런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데, 마동석 배우의 전작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심지어 유행어가 돼서 인기도 끌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황야>를 보고 생각한 점 중 하나는 이야기가 텅 비어 보인다는 점이다. 왜? 이 영화는 무언가를 시도하려다가 말았다. 이 시도하다 만 것은 장르적인 특성이다. 우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리즈의 전작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써볼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사회를 탐구한다. 이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을 양분해서 ‘한국 사람들은 이곳(아파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분명 의도가 있다. 바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윤리의식을 한 집단 하의 두 사람(명화/영탁)을 중심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것을 왜 아파트라는 배경을 통해 질문할까? 바로 우리 한국사회는 사는 곳으로 서로에게 편견과 혐오를 표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출을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영화 중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각각의 철학적인 물음을 건네는 영화다.
하지만 이 <황야>에는 그런 장르적인 특성이 안 보인다. 물론 몇 번 시도는 한 것 같다. 양기수(이희준) 배우의 캐릭터의 대사 몇 줄이나 영화에서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분명 어느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 대사 몇 줄 빼고는 문제를 심화시킨다거나 하는 장치가 많이 부족하다. 단지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 더 밀어놓는 것 말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 <황야>의 내적 논리는 플롯 안에서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물들이 하는 몇 마디로 끝낸다. 이렇게 나사 빠진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사건의 끝마무리가 깔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느껴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무리가 된 것이다.
반쪽짜리 성공
이러다 보니 이 영화가 굳이 디스토피아라는 배경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만약 이게 범죄도시 7쯤 돼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뒤집어 패버리는 마석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솔직히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구멍이 생기는 결함이 된 것이다.
반대로 영화의 액션은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범죄도시 2>의 액션이 극찬받았던 이유는 사운드 덕분이다. <황야>는 <범죄도시 2>처럼 사운드를 살리고, 또 촬영에서도 카메라를 흔들지만 나름 동선도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허명행 감독이 액션 하나는 정말 잘 살렸기 때문에 글쓴이는 <범죄도시 4>가 기대된다. 뭐 어차피 이 영화 각본 쓴 사람이 <범죄도시 4> 각본 쓴 것 아니잖아? 드라마가 어떻게든 보완이 됐을 테니 K-채드 스타헬스키(<존 윅 4>의 감독)가 허명행 감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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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싫어서 | 철 지난 신조어를 생생하게 되살리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20대 후반 '계나'(고아성). 필사적으로 일해서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남자친구 '지명'(김우겸)과의 미래도 계획 중이던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한국이 싫다는 것.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한국을 탈출하기로.
뉴질랜드로 건너 가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계나.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믿음직한 친구 '재인'(주종혁)도 만나고, 자유롭게 연애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을 떠나 마침내 낙원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에 그녀는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근래 몇 년간 해외 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사다. 주요 정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한 스트레이트 형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인 21세기에 정보 전달만으로는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기사의 핵심은 '보여주기'다. 사건을 장기간 관찰한 후 생동감 있는 글로써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당사자, 전문가 인터뷰만 따는 게 아니라 취재원의 일상을 같이 따라다니며 그 일상을 소설처럼 긴 흐름에 담는다. 독자 스스로 사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글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분량이 상당하다. 뉴욕타임스의 스토리텔링 기사는 A4 3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스토리텔링 기사 한 편을 스크린에 띄운 것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새롭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잘 안 쓰일뿐더러, 2030 청년의 고통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으니까. 그런데도 <한국이 싫어서>는 흡입력이 강하다. 뻔하지만, 107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생생함'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저한 보여주기
사실 <한국이 싫어서>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 싫고, 한국에서는 못 살겠어서 한국을 떠난다는 계나의 첫 내레이션만 들어도 직설적이고, 상투적이기 때문.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까지만 보면 한국의 흔한 사회 고발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이 서열, 계급 사회라고 비판하는 대목처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게 튀어 나가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충실히 '보여주면서' 단점을 상쇄한다. 계나가 한국에서 버터내야 했던 일상의 여러 단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혜나와 엄마는 멸치 똥을 따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나눈다. 참고 견디면 보상이 올 테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엄마. 미래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없는 계나. 중간중간 멸치를 집어 먹는 현실적인 대화를 보다 보면 이 모녀의 충돌을 그저 남 일 취급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2030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계나와 그녀가 융통성이 없다며 혼내는 직장 상사. 부유한 남자친구 가족과의 식사 후 서러움과 분노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는 계나. <한국이 싫어서>는 그녀의 삶을 다각도로 비추며 관객과의 교집합을 가능한 많이 만든다. 근래 한국 영화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장강명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은 싫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균형 감각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한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헬조선과 탈한국을 긍정하며 사회 담론을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넓은 시점에서 헬조선이라는 현상을 조망한다. 어휘 너머에 있는 현실을 포착하려 애쓴다. 일례로 영화는 계나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례를 거듭 보여준다.
계나의 정착을 도운 일가족은 정작 본인들이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낙원 같아 보이던 오클랜드에는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도 계나를 덮친다. 이처럼 카메라는 한국만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달콤하지는 않은 탈한국의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즉, 한국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 치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서울 시퀀스가 무채색톤인 반면, 뉴질랜드 시퀀스는 더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저 버티기 바쁜 서울과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놓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소속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주 담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영상 통화를 할 때도 인물의 표정과 인상을 보여주려 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막걸리를 같이 마실 관계가 있는 반면, 타지에서는 아무리 행복해도 무언가를 놓친 그 얼굴을 대조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고아성은 유달리 빛난다. 그녀가 2030 세대 중 누군가의 삶을 자기 얼굴에 모두 녹여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진짜 탈한국과 행복
그 과정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한국을 떠났지만, 뉴질랜드에 끝내 정박하지 못한 계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대학원 학위를 딴 뒤 취업해서 영주권을 얻을 계획인 계나. 영화는 그 선택조차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명만 하더라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원을 포기한다. 대신 아르바이트 중 흥미를 붙인 요리를 배워 셰프가 되기로 결정한다.
계나도 마찬가지다. 회계학 학위를 딴 그녀는 뉴질랜드를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계획한 삶조차도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떠나서도 방황을 거듭하는 두 청년을 보다 보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진의가 얼핏 보이기도 한다. '한국이 싫다'는 말은 길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길을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한국이 싫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박승현)이 오리지널 캐릭터로 추가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20대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 특히 계나가 공무원 시험 N수생인 경윤과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에 꽂힌다. 학원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계나와 경윤. 그는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인다.
그런데 계나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때 그는 거듭된 불합격 때문에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다. 그는 한 번 선택한 경로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돌리지 못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대신 떠나기로 선택한 것도 꿈속에서나마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칫 한없이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현실 인식을 영화적으로나마 치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화감이 없다는 씁쓸함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끝맛이 씁쓸한 영화다. 만듦새가 마냥 매끈하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일장일단이 있다. 계나의 일상을 극적으로 변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다가 점차 건너뛰는 대목이 많아지기 때문. 벌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의 끝맛이 씁쓸한 진정한 이유는 완성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화의 원작이 1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씁쓸하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상당히 모호하다. 그나마 계나와 뉴질랜드에서 만나 친구가 트럼프와 김정은에 관해 대화한다는 점에서 2018년이나 19년 언저리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2024년이 배경이라 해도 영화 내용은 위화감이 없다. 굳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문제점과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2024년인데도 10년 전 신조어와 이야기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만으로도 씁쓸함이 혀끝까지 가득 맴돈다.
Acceptable 무난함
1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비극을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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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더 에이트 쇼>는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가 있다. 특정 공간으로 삶의 패배자들을 몰아넣고 벌어지는 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더 에이트 쇼>에서의 죽음은 곧 쇼가 끝나는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더 이상 그 쇼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다. 1층부터 8층까지를 등장인물들이 무작위로 부여받으며 시작되는 이 쇼는 우리 사회에 관해 꽤나 많은 메시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평등한 사회라는 환상
우린 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만들고, 최대한 공평하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로, 어떤 사람들은 사업가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번다. 평등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그 시스템이 한참 돌아가고 나서 보면, 어느새 각자가 가진 돈은 모두 달라진다. 그리고 시간당 버는 돈의 양도 달라지고, 그 돈의 양에 따라 개개인이 가진 삶의 태도와 지위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평등했던 사회는 점점 불평등한 사회가 되어간다.
<더 에이트 쇼>는 패배자 8명을 모아 특정 공간으로 넣는 순간부터 기존 사회에서의 직업, 계급, 자본 등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다. 만약 기존에 부자였거나 힘이 있거나,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어도 그 쇼의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 여기에 한 가지 무작위로 자신이 지낼 공간을 선택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은 1층부터 8층까지 각 층마다 자리한다. 각 방은 1분이 지나면 특정 금액만큼 쌓인다. 그리고 쇼가 끝나면 그 금액을 현실로 받아갈 수 있다. 그 쇼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선 평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돈이 없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별다른 힘이 없는 이들이다. 쇼의 주최자들은 이들의 옷을 똑같이 입히고, 똑같은 밥을 준다. 그리고 똑같은 노동을 하게 만들었다. 단 각 층의 방에 차별점을 두었다. 1분이 지나면 1층은 1만 원, 2층은 2만 원, 3층은 3만 원, 4층은 5만 원씩 올라가고 8층은 34만 원이 1분당 더해진다. 파보나치의 수열이라는 규칙을 통해 각 층마다 올라가는 금액을 한정했고, 방의 크기도 8층으로 갈수록 더 커지게 만들어두었다. 그러니까 그 쇼의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무작위로 정해져 있는 불평등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실 이 설정은 우리가 사회에 태어나 얻게 된 자신의 가족이 가진 지위나 자본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나서 가지게 된 배경환경은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걸 다시 바꿀 수는 없다. 그냥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규칙에 적응해서 그냥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더 에이트 쇼>가 보여주는 쇼는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점점 커지는 불평등
다른 모든 것이 평등하지만, 그 공간에 처음 부여받은 부의 조건이 다르다. 모두가 신사 같은 젠틀함으로 관계를 시작하고 서로를 돌봐주지만, 맨꼭대기 층인 8층이 가진 힘이 그 평등함에 균열을 가한다. 8층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버는 방이다.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제공되는 물과 도시락 10개가 그 방에 최초로 배달된다. 방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아래층으로 내려줘야 모두가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마치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의 설정처럼 위에서 먹고 남은 음식이 밑에 내려가는 구조다. 그래서 층이 높을수록 더 많은 걸 가지게 된다.
꼭대기 층의 주인인 8층(천우희)은 예측불가능한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량을 내려보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층의 사람들은 생사를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해결하던 대변과 소변 봉투도 아래로 내려온다. 결국 최하층인 1층(배성우)이 그걸 도맡아 처리하지만, 위층에서 내려오는 부담을 아래층이 계속 나눠서 떠안아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방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지불해야 할 가격은 실제 금액의 100배 수준이다. 이건 결국 기존에 자본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더 많은 편리함을 누릴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8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춘다.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에서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8층은 여왕이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래층 사람들은 기본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과 음식을 제공받는다. 이 쇼의 기본 룰에 누군가 죽음을 당하면 쇼가 끝난다. 그러니까 8층을 죽인다는 것은 모두가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마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기업이나 사회의 우두머리를 끝장내면 모두가 돈을 벌 수 없는 혼란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 쇼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춤으로서 이미 만들어진 계층 사회가 계속 지속되게 만든다.
착취로 이어지는 쇼
이 쇼에서 시간은 꽤 중요하다. 공용공간에 남은 시간을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다. 전광판의 시간이 0이 되면 쇼는 끝나고 각자 방에 있는 전광판에 적힌 금액만 가져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참여자들은 그 시간을 늘리려고 최대한 애쓴다. 맨 처음 하는 것은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8층은 다른 사람들에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몇 번하자 시간이 늘어난다. 이후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시간을 늘리는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 과정도 재밌다. 매일 모두가 하기 힘드니 4명씩 번갈아 가며 하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1층을 도와 대신 노동을 하기도 한다. 그런 힘든 과정 이후 분란이 생기고 팀이 갈라진다. 계단 노동 이후엔 시간을 늘리는 행위가 무언가 재미있는 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장기자랑부터 다양한 게임을 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전환점이다. 노동이 재미로 대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인데, 애초에 노동은 모두가 같이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누군가를 위해 1층에서 4층까지의 인원이 대신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착취가 시작된 것이다.
노동 행위가 게임이라는 행위로 대체되면서 재미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점점 더 잔혹하거나 선정성을 높여간다. 그리고 결국에는 폭력과 착취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각 층의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고 배신을 한다. 7층(박정민)이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상황판단이 좋은 엘리트로 보였던 그가 8층과 6층(박해준)의 지배행위에 협력하면서 1층, 2층(이주영), 3층(류준열)이 속한 집단은 계속 가학적인 게임에 참여해 폭력을 당한다. 7층은 이 시리즈에서 강남 좌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7층은 가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하층인 1-4층의 편을 많이 들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시리즈에서 7층이 누구 편에 서는지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돈과 판단력을 가진 7층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따라 시리즈 내내 이야기의 온도를 차갑게 하기도 하고 뜨겁게 하기도 한다.
독재에 이어지는 혁명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3층이다. 가장 평범하고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이면서, 겁도 많고 가진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생각을 독백으로 관객에게 던진다. 즉, 관객이 3층의 입장과 거의 비슷하게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 이야기 안에서 3층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당하고 또 당할 뿐이다. 하지만 최상위 계층인 8층을 시작으로 7층, 6층에 의한 독재가 시작되면서 그는 계속 방법을 생각하고 생각한다. 3층이 끝까지 중심 화자인 건, 그가 절망 속에서도 계속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안다. 작은 욕심을 부릴 때도 다른 사람을 걱정한다. 마치 밟아도 일어나는 민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리즈의 이야기가 후반부로 달려가면 점점 독재의 경향성이 짙어진다. 8층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모두에게 고문까지 하는 지경까지 간다. 이 잔혹무도한 독재는 결국 혁명을 부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3층과 같은 힘없는 민초, 그리고 그를 돕는 여러 사람들. 그들이 부른 혁명이 후반부를 장식한다.
그 혁명은 화려하지 않다.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잔혹한 쇼를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낸다. 더 잔혹한 행위들이 나오고 같은 편을 배신하는 반전들은 쇼의 시간을 늘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결국 쇼는 끝이 난다. 단지,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인원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가야 하고 어쩌면 그 불평등함을 그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에이트 쇼>를 다 보고 나서 시원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불평등해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미 높은 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이고,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럽고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평등을 내세우고 있는 정치인들과 상위계층들은 표를 얻기 위해 좋은 말들로 나쁜 행위들을 포장한다. 보이지 않는 착취와 고문은 계속 이어진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쇼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은 평범한 민초들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관상>, <더킹>, <비상선언> 연출 이후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잘 짜인 미장센과 독특한 카메라 워크 그리고 화면의 비율을 늘리고 줄이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쇼의 축소판을 만들어냈다.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시청률에 매몰되어 점점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대중매체의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시리즈다. 또한 설정뿐 아니라 각 캐릭터에 대한 해석도 각기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8층 역할을 맡은 천우희는 예측 불가능한 캐릭터가 얼마나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박정민, 류준열, 박해준, 이주영, 이열음, 배성우, 문정희 배우들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연기를 보여준다.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달려갈 수 있는 시리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고, 담긴 메시지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징어 게임>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최근 한국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사회적이고, 다층적이고, 흥미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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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어질 결심(2021)> 리뷰
이름은 언제나 존재 다음에 온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있어 마음이란 최초에 발생하는 무엇이고, 행위는 눈 먼 채 마음을 따라가며, 이성은 한참 후 자신의 행동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명명한다(설령 그것이 그릇된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 영화, 제목이 이상하다. ‘헤어질 결심’이라니. 어떠한 감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저 갈라서면 될 일인데, 물리적으로 멀어진 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이 영화는 헤어지는 행위에조차 ‘결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행동이 진행되는 순서를 역행하겠다는 선언 이면에 가득한 건 망설임이다. 그러하니 영화 속 주인공의 이별이 쉬울 리가 없다.
<헤어질 결심>을 바라보는 데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쟝센에 집중할 수도 있을 테고, 그의 전작에서부터 이번 작품에서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모호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터다.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만이 담아낼 수 있는 현상을 파고들 수도 있을 것이며 히치콕의 영화를 끌어오는 방법도, 탕웨이와 박해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집중해 보는 방법 또한 있겠다. 하지만 난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의 관계에 집중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영화로 찾아온 박찬욱 감독이 꺼내든 ‘멜로’라는 장르를 아끼고 싶진 않으니까.
서래와 해준
<헤어질 결심>은 담당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남녀에게서 출발한다. 특별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는두 사람이 품은 믿음으로 인해 레이어가 여럿 추가되며 현실만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 누가 뭐라 해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지닌 사람의 품위. 서래와 해준에겐 환경이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서래는 어느 여름 해골 같은 몰골로 불법 입국한 중국인으로, 한국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삶에 풍파가 더해지는 데에 크게 일조한 사람은 서래의 한국인 남편 기도수다. 이 남자는 서래를 학대하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의 몸에 이니셜(KDS)을 새겨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기 그지없어 그를 떠날 수 없는 신세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래는 간병 업체에서 ‘에이스’로 통하고, 자신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동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며, 무엇보다도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서래가 보여주는 특유의 기품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독립군 참전자인 송서래의 외조부가 일러주었다는 가문의 땅, 호미산으로부터.
해준 역시 서래와 비슷하다. 고지식할만큼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는 그는 어떤 피의자를 만날 때에도 무죄추정원칙을 고수한다. 미결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사건에 관련된 사소한 숫자마저 머릿속에 오래오래 보관하는 이 남자는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정중한 형사로, 서래의 말마따나 ‘현대인’ 치고 품위가 넘친다. 이러한 평가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효한데, 후배 수완(고경표)은 다른 형사들과 다르게 끝까지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해준을 존경해 부산으로 전근을 왔을 정도이다. 그가 불의 앞에서 늘 달려나갈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원칙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다.
사랑과 미련과 그 밖의 모든 것들
멜로 영화이니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먼저 해 보자. 두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졌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 대해, 감독과 배우와 관객의 해석이 모두 다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해준의 말마따나 서로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서서히 물들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단서조차 놓치지 않는 형사 해준이 ‘중국인이라 한국어가 서툰’ 서래의 의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더욱 애써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꾸만 시선을 주어야만 했던 정황 속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한 걸음 뒤의 시선과 녹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몇 박자씩 늦게 도착하곤 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없다. 늘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없으니.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사랑에 빠진 자신만 남는다는 그 단일한 결과만 제외한다면.
그런데 신기한 건, 둘 사이에서 주도권이 서래에게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계층의 최약자인 서래 말이다. 서래는 당장의 생존이 절실한 사람이었고, 덕택에 그는 사랑을 온전히 감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이는 서래보다 해준이 먼저 사랑을 자각한 계기가 됐다. 사랑 앞에서는 형사와 피의자라는 권력 관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기실, 형사인 해준은 본질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후 뒤쫓아 가는 쪽이지,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겐 대단히 비겁한 측면도 있다. 아내 정안(이정현)에게 기도수 사건을 다르게 바꿔 전달하는 것처럼. 사실은 일찌감치 끝난 관계에 무의미한 인공호흡기만 달 뿐 해준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해파리처럼 모든 일을 밀어낼 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떠맡는다. 공평하게 모든 것을 신경쓰고자 한다는 건, 사실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모른다는 듯.
해준이 이런 남자라는 사실은 서래에게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서래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에게 묻는다. 자신은 왜 당신 같이 품위있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지에 대해. 답은 자명하다. 그에겐 양지바른 한국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미산은 그의 핏줄이 가진 땅이라는데 서래는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다. 정당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서래는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외국인이자, 저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면 무기징역수가 되는 젊은 여성이다. 전문직에 해당하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하루하루 독거노인을 돌보는 불안정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제 뜻을 명확히 전달할 길이 없다. 서래는 상황을 깨뜨리고자, 운명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나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남편에겐 가축취급을 당하는 트로피 와이프로, 거듭하여.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 앞에서 변화한다.
회피하던 해준은 행동한다. 서래가 부탁하지 않아도 요리하고, 중국어를 몰래 공부하고, 우산을 씌워주며, 무엇보다도 서래를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감옥생활을 각오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홍산오 사건처럼, 해준은 서래 앞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원칙을 깨뜨린다. 해준 자신이 죽음보다도 더 치욕적으로 여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전했느냐고 따지는 해준의 말은 공허하다. 사건 수사를 위한 결정적 증거를 깊은 바다에 버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명백한 고백이었으니까.
반면 해준을 만나기 위해 이포에 간 서래는 그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다. 부산에서처럼 사건의 주동자가 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해준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에게 닿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스마트 워치에 자신의 말을 녹음한다. 그런데 서래는 먼 발치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원칙을 잃어 더 이상 올곧게 달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서래는 해준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녹음할 수 없는 환경에서 중국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한다. 모든 사건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깊은 물 아래에 묻음으로써 사건을 무마한다. 서래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입증할 수 없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서래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은 서래에게 외조부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중국에서의 서래를 기억하지 못했고, 기도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 않았나. 그렇기에 그는 거침없이 해변에 스스로를 가두는, 무자비한 선택을 한다.
서래의 선택으로 인해 해준이라는 인간에겐 그저 긴긴 미련만이 남는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 남자는 앞으로 영원히 서래를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서래와 헤어진 후 셈했던 402일. 그가 없어 편히 잠들지 못했던 402일은 이제 수도없이 많아질 것이다.
어지러이 얽힌 산과 바다
자, 이젠 시놉시스에서 눈을 돌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상징을 이야기 해 보자. 영화에선 자연물인 산과 바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을지로에서 태어났으면서 바다가 좋다고 하는 해준, 산을 가슴에 품고 바다를 건너온, 저가 돌보는 노인들에게 산해경을 읽어주는 서래. 두 사람에게 부여된 속성은 정안의 원전과 맞지 않는 힘이다.
서래와 해준 두 사람은 모두 산보다 바다를 선택하고, 공자의 말(智者樂水 仁者樂山)을 인용하며 스스로를 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논어는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나는 해준이 산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다에 이끌리는 산이었고, 붕괴될지언정 침몰하지 않는 남자다.
다만 이러한 두 사람의 속성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래가 읽는 산해경 신화 속 이정표가 무의미하듯, 산과 바다의 경계는 영화 속에서 자주 흐려진다. 마치 산과 바다의 뿌리가 같기라도 한 것 마냥. 뚜렷한 상징으로 환원되는 장면은 차라리 해준의 집에서 서래가 샛노란 옷을 입고 있었던 씬과, 호미산에서 서래가 산에서 광원 자체가 된다는 점이지 않을까. 서래에게 해준의 존재가 잠시나마 구원이었듯, 해준의 삶에 있어 서래는 단 한 순간일지라도 분명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서래가 바다에 잠긴다. 모래산이 무너지고, 바다의 깊은 구멍을 메운다. 서래의 소망은 충족되었다. 그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된다. 해준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 없는 바다, 안개만이 자욱한 해변을 영원히 걸어야 한다. 헤매는 자는 목소리를 높여 운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붕괴 이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서래가 바랐던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살아줘요, 당신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 언제나 나이길 바라요.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후기를 적었지만, <헤어질 결심>엔 현대 한국인이기에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이 영화가 오로지 2022년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성'이라는 시간적 속성이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영화를 개봉한 해에, 이 나라에서 감상할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이토록 끊임없이 지각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사랑을 매끄럽게 스크린에 담아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획득하기 전 상실되는 사랑이란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푸른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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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2차대전 독일군에 의해 고립된 연합군 병사들의 최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한 전쟁영화 덩케르크(2017)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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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댓글부대> 런칭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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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마술사는 낭비를 모르지
외진 사막에서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는 나일스(앤디 샘버그)와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 결혼식에서 만난 둘은 꽤나 빠른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애틋하게 무르익을 무렵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일스의 어깨에 박힌다. 혼란에 빠진 세라에 반해 의외로 덤덤한 나일스는 붉은빛으로 가득한 동굴 속으로 사라진다. 나일스가 걱정된 세라 또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녀는 이미 지났을 11월 9일 결혼식 아침에 눈을 뜨게 된다. 과연 세라에겐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친숙의 탈을 쓴 세련된 이야기꾼”. <팜 스프링스>는 우리에겐 이미 친숙해져 버린 시간여행과 로맨틱이라는 두 장르를 결합시킨다. 친숙한 소재는 관객에게 접근하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오용하면 진부함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하지만 맥스 바르바코우 감독에게 친숙함이란 위험보단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무기인 듯하다. 분명 다른 작품에서 봤음직한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재구성하는 모습은 이번 작품이 첫 장편 영화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한다. 특히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이끌어내는 모습은 ‘시간의 마술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 획기적인 개입<팜 스프링스>의 친숙함은 <사랑은 블랙홀>과 <해피 데스데이> 사이를 오간다. 바르바코우 감독은 두 작품에 대한 단순한 모방과 변형에 그치지 않고 색다른 시도를 꾀한다. 바로 ‘중간자의 개입’이다. 반복되는 시간을 살아가던 주인공은 루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중간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시간 속 기억의 축적은 주인공에게만 적용되기에 그들은 빠르게 정보를 전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 미래를 예견하는듯한 모습으로 설득하지만 주인공들과 같은 시간을 적용받는 관객들에겐 지루한 순간일 수밖에 없다. 바르바코우 감독은 중간자의 개입을 통해 단순하지만 획기적인 방법으로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시간을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 동일한 시간 축 위에 다양한 인물의 등장
나일스, 세라, 로이는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상영시간이 한 시간 반에 지나지 않는 작품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다루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결국 <팜 스프링스>는 인물들의 과거를 최대한 절제하고 11월 9일이란 하루에 집중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그들의 행동에 따라 하루는 변한다. 매번 다른 시간 속에서 함께 쌓인 경험이 인물들의 과거가 되고 이는 곧 그들의 개성으로 자리 잡는다. <브루클린 나인>, <파고>, <위플래시> 등으로 대중에게 인증받은 배우들은 훌륭한 연기를 통해 각자 맡은 캐릭터의 개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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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과거를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 바꾸는 메시아의 등장
메시아의 등장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폴 아트레이더스(티모시 샬라메)다. 아버지(오스카 아이작)가 죽었다. 그리고 살던 왕국이 공격당했다. 멸문당한 아트레이더스 가문. 힘겹게 어머니(레베카 퍼거슨)와 함께 빠져나와 아라키스로 향했다. 모자에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 이전에 두 사람은 지금 죽기 5분 전이다. 위기일발의 모자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건 아라키스 사람들이다. 모자에게 손을 내미는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스틸가는 폴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가 '리산 알 가입'으로서 선택받은 자라고 주장한다. 반신반의하는 아라키스 사람들. 그중 한 명은 영화의 다른 주인공 챠니(젠데이아)다. 의심이 늘어난다. 그 의심은 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 모든 미래가 폴을 위대한 메시아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주인공은 그게 싫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물들과 충돌한다. 살아남고, 복수까지 이뤄야 한다. 과연 아들 폴과 어머니 제시카는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주특기를 보여주다
이 영화 <듄 : 파트 2>의 이야기는 감독 드니 빌뇌브의 인장이 크게 박혀있다고 볼 수 있다. 빌뇌브는 그동안 서서히 쌓아 올리다가 후반부에 터트리는 플롯을 쓰곤 했다. ‘듄’ 시리즈 이전 가장 최근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컨택트>에서도 이런 경향이 보였다. 이런 감정적인 밀도를 쌓아 올리는 이야기 흐름은 이 <듄 : 파트 2>에도 유효한데, 영화에서 폴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방점이 찍힌 장면이 많다. 가령 폴이 영화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 이 선택을 위해 영화는 이야기의 배경을 그전부터 깐다. 폴 이전에 영화 안에서 어떤 인물이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한다던가 특정 인물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폴의 어수선한 내면을 그린다는 것이 그렇다. 이렇게 서서히 쌓아 올린 인물의 내면을 바탕으로 이야기 중반부터 모든 영화는 천둥같이 울린다. 영화를 보면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라는 느낌이 드는데, 티모시 샬라메의 호연을 받쳐주는 연출의 힘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느껴지는 것. 후반부의 폴을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연출 때문에 ‘빌뇌브치곤 약한 이야기 아닌가’ 싶은 감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이 영화가 후반부까지 이끌며 전달하는 카타르시스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를 보여주기 위해 <듄 : 파트 2>가 고른 다른 선택지는 바로 레이디 제시카서사다. 이야기의 저변을 다양하게 넓힌다는 측면이 아니더라도 이 인물은 <듄 : 파트 2>의 기획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인물은 점점 폴의 행보를 따라가거나 앞서가는 감이 좀 있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딜레마 중 하나와 직결되는 문제라 무조건 들어가야 했던 이야기의 핵심 구조이기도 하고, 또 단선적인 백인 주인공 서사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넓이를 넓힌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리고 후술 하겠지만 영화가 고전 책들 그러니까 소설이나 역사책들을 오마주한 느낌이 좀 있는데, 이 '레이디 제시카'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무언가를 모티브 삼은 듯하다. 이게 빌뇌브의 연출 특징과도 어울리기도 하지만 이 제시카가 혼자서 당당히 선다는 점에서도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유효했다. 이 인물은 후속작 파트 3에서 이야기의 주제를 더 강조할 인물로 보이는데 안 본 관객들이라면 제시카의 능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청각을 장악하다
전작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었던 시각효과는 본작 <듄 : 파트 2>에서도 장점이다. 글쓴이가 1편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칼라단 묘사다. 이 당시 우주선을 묘사했을 때 왠지 이거 전부 CG를 입힌 것이 아니라 일부는 만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찾아보면 어떤 우주선들은 빌뇌브를 비롯한 시각디자인 팀이 진짜 우주선을 만들고 어떤 건 입힌 것으로 보인다(실제로도 이 <듄> 1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옐로 스크린’에 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 연출 방식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CG를 사용하되 배우들의 몰입을 위해 어떤 건 실제로 만들고 어떤 건 아닌’ 장면연출은 본작 2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오스틴 버틀러가 맡은 페이드 로타 역은 이야기의 중심 추가 된다는 점에서 핵심인데, 이를 실존인물과 정교한 CG로 이야기를 이끈다는 점에서 좋은 연출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시각화의 관점에서 이야기의 큰 동력이 되는 부분은 모래벌레다. 이 모래벌레에 관한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이 모래벌레를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이나 이 것을 활용한 캐릭터들이나 SF의 생동감을 높이는 좋은 선택이 돋보인다.
비단 VFX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시각적인 요소들은 굉장하다. 우선 공간적 배경인 사막은 어디서 이런 장소를 구해왔는지 이야기의 분위기를 살리는 좋은 로케이션 선택이었다. 또 영화는 색을 굉장히 잘 쓴 편에 속한다. 흰색, 초록색, 파란색, 회색, 흑백화면 등 색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전달이 확실하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난다. 또 <컨택트>에서 외계 비행선을 둘러싼 풍광이나 주인공이 딸과 노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우울감 같은 것도 영화가 구현을 잘 한 편이다. 가령 차니를 둘러싼 인물들의 정서를 카메라가 어떻게 보여주는지, 또 이 인물을 대하는 폴의 내면은 또 어떨 것 같은지 유추하게 만드는 카메라의 힘이 좋았다. 촬영 구도도 영화 안에서 정교하게 다 짜여있다. 이는 다수와 소수의 시각적인 대비다. 이 대비를 통해 영화가 폴의 어떤 측면을 부각하는지를 염두하고 본다면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이런 시각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청각적 요소의 강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듄 : 파트 2> 전작 <듄> 1편이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이유 중 하나는 특별관의 보급 때문이다. 특히 메가박스의 ‘돌비관’이 엄청난 인기였다(제주에는 이게 없다. 글쓴이는 복통이 느껴지지만). 이는 <듄> 1편이 연출한 청각적인 요소 때문인데, 역시 2편 마찬가지로 아이맥스보다 돌비관을 추천하는 바다. 왜? 이 영화에서 청각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 흐름에서 알람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사운드가 가져다주는 생동감이 엄청나다. 글쓴이는 아직도 그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스타일을 장악한 빌뇌브의 연출력이 느껴진다.
장르 이력서
이 영화가 10000년대의 이야기를 핵심으로 삼고 있어 SF판타지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작품은 과거라는 테마는 굉장히 중요하다. 우선 글쓴이가 이 영화에서 ‘과거’를 느낀 지점은 세 가지다. 첫째는 ‘레이디 맥베스’ 서사를 캐릭터로 갖고 온 것이다. 두 번째는 영화 두 편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나 <아라비아 로렌스>가 그렇다. 또 영화 일부 장면에서 <지옥의 묵시록>이나 <매드맥스>와 <블레이드 러너>가 느껴지는 부분이 얼마 있다(이 외에도 오마주한 영화는 많은데 어떤 장면에서 이를 적으면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세 번째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인 어떤 것이 우리 현대를 살아가는 모습과 겹쳐 보이는 모습이 있다. 이는 우리의 세태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측면에서도 관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의 모습은 분명히 고전 북미 영화들을 오마주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는 드니 빌뇌브가 본인의 덕후스러움을 뽐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영화의 핵심과도 이어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과거를 다룬 이유는 충분하다. 이야기의 흐름과 영화의 연출 의도가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빌뇌브의 경험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조명 밑의 그림자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관객들의 만족도를 높인다고 해서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보기 전 기준으로 ‘듄’ 세계관 이해 못 하는 분들이 보면 지루해할 확률이 높다. 왜? 솔직히 이 영화가 그렇게 친절하진 않다. 알아야 할 정보가 많다.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의 동력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세계사를 가져오긴 했으나 그건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 입장에서나 이해할 수 있다. 영화가 교양과목이 아닌데 이 세계관을 다 이해하고 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빌뇌브 특유의 느릿느릿한 템포 때문에 쉽게 이야기가 꽂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령 영화 초반부에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데 왜 이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행동해야 하는지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이는 빌뇌브의 느린 템포가 이야기에서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생동감이 넘친다고 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젠데이아가 맡은 차니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쉬울지는 의문이다. 이 캐릭터가 이렇게 연출된 것은 핵심을 전달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편을 정말 잘 기억하는 팬이 아니라면 이 인물의 행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다. 스틸가의 덕을 좀 봤다. 또 주인공의 반대 지역에 속해있는 인물들은 감정선이 붕 떴다. 이 역시 영화가 의도적으로 고른 선택지인데, 이 때문에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빌런의 존재감이 약하다고 이해하기 쉽다.
이런 단점들은 영화의 가장 큰 결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음’을 <듄 : 파트 2> 자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전편에 비해서 분명히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있다는 건 관객 입장에서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자연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 지루해질 만하면 갑자기 재밌는 장면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분량을 더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인물들의 내면을 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설정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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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도시'로는 성공, '콘크리트 유토피아'로는 실패
사랑하는 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망가진 세상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지완(이준영)이다. 활을 메고 있는 지완. 눈앞에 악어괴물이 보인다. 활시위를 당긴다. 악어에게 적중한다. 죽은 것 같다. 악어에게 다가가는 지완. 하지만 악어가 갑자기 살아나서 지완에게 달려온다. 질겁하는 지완. 근처에 있는 차에 잽싸게 숨는다. 위기에 처한 지완을 도와주는 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남산(마동석)이다. 악어의 목을 자른 남산. 악어 사체를 가지고 가서 마을 사람들과 식량을 나눈다. 남산 덕에 위기를 넘긴 지완. 지완과 남산은 가족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친한 사이다. 지완이 턱없이 어린 탓에 둘이 친구야?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남산은 정이 많다. 한편 지완이에겐 짝사랑하는 여자 애가 있다. 바로 수나(노정의)다.남산은 어릴 때 수나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다. 좋은게 좋은거라고, 지완의 연애 이야기는 남산과 대화하기에 적합하다. 남산에게 수나 이야기만 하는 지완. 이 두 사람에 일상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수나가 양기수(이희준)에게 납치된 것이다. 무너진 세상. 남산과 지완, 그리고 또 다른 손님이 기수 일당의 본거지로 직진한다.
형은 좀비를 찢어
<황야>는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한 영화에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을 200% 활용한다. 우리가 마동석 배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가 액션스타라는 점이다. <황야>는 마동석 배우가 구현 가능한 액션을 전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각종 ‘~파이팅’이 다 있다. 총기액션, 나이프파이팅, 맨손 격투 등 온갖 방식으로 나쁜 놈들을 두들겨 팬다. 영화 줄거리도 이 액션 역량을 다 보여줄 수 있게끔 짜여 있다. 가령 빌런 무리들에겐 특별한 점이 있다. 이 부분을 주인공 일행이 금방 간파한다. 그러나 이 약점을 공략하기 전엔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마동석 배우의 액션연기로 채웠다. 그리고 디스토피아라는 설정은 주인공 남산이 총기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음과 동시에 나쁜 놈들이 활개 치기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자잘한 요소들을 나름 근거를 제시하며 살려 액션 보는 맛이 좋다. 이 액션이 와일드하기만 하면 뭔가 맥이 빠질 것이다. 이에 당위성이 생긴 폭력 묘사가 극의 재미를 돋군다.
그리고 이 영화가 나름 ‘마동석 액션영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인다. 바로 이은호 역을 맡은 안지혜 배우의 등장이 이것의 근거다. 후술하겠지만 이 영화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설정 자체를 잘 살린 편은 아닌 것 같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이야기의 느슨함을 안지혜 배우의 액션연기로 끌고 간다. 처음부터 영화가 연출로 이 인물이 ‘중요해!’라고 강조한 것이다. 가령 이 이은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 장면을 보면 강렬하다. 사실 영화의 줄거리에서 이은호 캐릭터가 이렇게 등장할 이유가 크게 있는 건 아니다. 장영남 배우가 맡은 캐릭터 처럼 초반부에 등장해도 큰 무리는 없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관객이 신선함을 느껴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연출을 보여줬다. 이후에도 <황야>의 이은호는 이 신선한 동력을 충분히 이행한다. 글쓴이는 첫 번째 공간을 바꾸고 나서 이 인물 중심으로 테이크를 길게 짠 장면을 최고로 뽑는다. 확실히 허명행 감독이 무술감독 출신이라 어떻게 해야 생동감이 사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이 배우의 이 장면은 여태까지 본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 액션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용감한 시민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를 좋아한다. 왜? 이 분 잘생겼는데 연기도 잘한다. <D.P>와 <마스크걸>에서 양아치 연기를 생각해 보면 뭔가 스테레오 타입의 나쁜 놈 같으면서도 자기만의 색이 굵었다. 그러나 글쓴이는 두 드라마보다 <용감한 시민>에서의 연기를 더 좋아한다. 이 <용감한 시민>에서 한수강이라는 인물 역시 액션이 중요했는데 시원시원하게 잘 소화한다. 본작 <황야>에서도 똑같이 액션연기를 보여주는데, 남산과 안지혜와는 다른 결의 액션을 보여준다. 이 두 인물과의 차이점을 눈 크게 뜨고 보면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는데 글쓴이는 이준영 배우가 디테일을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황궁아파트
사실 액션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디스토피아 묘사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답게 이 영화에서 핵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대지진이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구. 당연히 온 세상은 폐허가 됐다. 시각적인 묘사에 있어 이 난장판을 잘 묘사했냐? 고 묻는다면 글쓴이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노란색으로 색감을 뺀 부분이나 무너진 건물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까지 나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글쓴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부산행>과 겹쳐 보이는 점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폐허가 된 세상을 묘사하는 데에는 좋았지만 고유의 색이 흘러넘친다고 보긴 어렵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디스토피아 묘사가 개성이 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관객들에겐 비판 요소로 읽힐 수도 있다.
어디서 봤는데
사실 이 영화에 대해 글쓴이가 가장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문제 해결 방식이다. 이 영화의 플롯을 대략적으로 써보겠다. 주인공이 있다. 이 주인공을 둘러싼 세상은 온갖 나쁜 놈들 천지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 푸근하지만 주먹 하나는 살벌한 주인공이 이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다. 우리는 비슷한 플롯을 알고 있다. 바로 ‘범죄도시’ 시리즈다. 마동석 배우가 속해있는 빅펀치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시그니처를 못 보고 지나가도 ‘이거 그거 아닌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황야>가 개성이 뚜렷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마동석 배우가 가진 매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그러라고 캐스팅한 것 아닌가? 하지만 글쓴이는 ‘범죄도시’ 시리즈와의 기시감을 문제 해결 방식에서만 근거를 찾고 싶지 않다. 바로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가 있다. 이 캐릭터는 수많은 빌런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이는데, 마동석 배우의 전작에서 이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심지어 유행어가 돼서 인기도 끌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 <황야>를 보고 생각한 점 중 하나는 이야기가 텅 비어 보인다는 점이다. 왜? 이 영화는 무언가를 시도하려다가 말았다. 이 시도하다 만 것은 장르적인 특성이다. 우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리즈의 전작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대해 써볼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라는 공간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사회를 탐구한다. 이 아파트를 둘러싼 사람들을 양분해서 ‘한국 사람들은 이곳(아파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 시도는 분명 의도가 있다. 바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윤리의식을 한 집단 하의 두 사람(명화/영탁)을 중심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이것을 왜 아파트라는 배경을 통해 질문할까? 바로 우리 한국사회는 사는 곳으로 서로에게 편견과 혐오를 표현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출을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영화 중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각각의 철학적인 물음을 건네는 영화다.
하지만 이 <황야>에는 그런 장르적인 특성이 안 보인다. 물론 몇 번 시도는 한 것 같다. 양기수(이희준) 배우의 캐릭터의 대사 몇 줄이나 영화에서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을 보면 분명 어느 부분에 대해 지적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 대사 몇 줄 빼고는 문제를 심화시킨다거나 하는 장치가 많이 부족하다. 단지 주인공 일행을 위기에 더 밀어놓는 것 말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 <황야>의 내적 논리는 플롯 안에서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물들이 하는 몇 마디로 끝낸다. 이렇게 나사 빠진 토대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사건의 끝마무리가 깔끔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느껴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무리가 된 것이다.
반쪽짜리 성공
이러다 보니 이 영화가 굳이 디스토피아라는 배경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만약 이게 범죄도시 7쯤 돼서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뒤집어 패버리는 마석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솔직히 그렇게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영화의 기획의도에 구멍이 생기는 결함이 된 것이다.
반대로 영화의 액션은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범죄도시 2>의 액션이 극찬받았던 이유는 사운드 덕분이다. <황야>는 <범죄도시 2>처럼 사운드를 살리고, 또 촬영에서도 카메라를 흔들지만 나름 동선도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허명행 감독이 액션 하나는 정말 잘 살렸기 때문에 글쓴이는 <범죄도시 4>가 기대된다. 뭐 어차피 이 영화 각본 쓴 사람이 <범죄도시 4> 각본 쓴 것 아니잖아? 드라마가 어떻게든 보완이 됐을 테니 K-채드 스타헬스키(<존 윅 4>의 감독)가 허명행 감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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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싫어서 | 철 지난 신조어를 생생하게 되살리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20대 후반 '계나'(고아성). 필사적으로 일해서 학자금 대출도 다 갚고, 남자친구 '지명'(김우겸)과의 미래도 계획 중이던 그녀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한국이 싫다는 것. 회사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는 그녀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한국을 탈출하기로.
뉴질랜드로 건너 가 대학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계나.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믿음직한 친구 '재인'(주종혁)도 만나고, 자유롭게 연애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한국을 떠나 마침내 낙원에 도착한 듯 보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 편은 여전히 헛헛하다. 이에 그녀는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다.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스토리텔링 저널리즘. 근래 몇 년간 해외 언론에서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사다. 주요 정보를 중요도 순서로 나열한 스트레이트 형식에서 벗어나 독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인 21세기에 정보 전달만으로는 언론사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 기사의 핵심은 '보여주기'다. 사건을 장기간 관찰한 후 생동감 있는 글로써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당사자, 전문가 인터뷰만 따는 게 아니라 취재원의 일상을 같이 따라다니며 그 일상을 소설처럼 긴 흐름에 담는다. 독자 스스로 사건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글로 만드는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분량이 상당하다. 뉴욕타임스의 스토리텔링 기사는 A4 30페이지를 훌쩍 넘는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한국이 싫어서>는 스토리텔링 기사 한 편을 스크린에 띄운 것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새롭지 않다. '헬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잘 안 쓰일뿐더러, 2030 청년의 고통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으니까. 그런데도 <한국이 싫어서>는 흡입력이 강하다. 뻔하지만, 107분이 지루하지는 않다. 그 이유는 '생생함'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저한 보여주기
사실 <한국이 싫어서>의 첫인상은 좋지 않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이 싫고, 한국에서는 못 살겠어서 한국을 떠난다는 계나의 첫 내레이션만 들어도 직설적이고, 상투적이기 때문. 인천에서 강남까지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까지만 보면 한국의 흔한 사회 고발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이 서열, 계급 사회라고 비판하는 대목처럼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게 튀어 나가는 순간도 종종 있다.
하지만 장건재 감독은 충실히 '보여주면서' 단점을 상쇄한다. 계나가 한국에서 버터내야 했던 일상의 여러 단면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다. 혜나와 엄마는 멸치 똥을 따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를 나눈다. 참고 견디면 보상이 올 테 결혼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리라는 엄마. 미래에 보상이 있을 거라는 희망 자체가 없는 계나. 중간중간 멸치를 집어 먹는 현실적인 대화를 보다 보면 이 모녀의 충돌을 그저 남 일 취급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2030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에피소드가 쏟아진다. 매뉴얼대로 일하는 계나와 그녀가 융통성이 없다며 혼내는 직장 상사. 부유한 남자친구 가족과의 식사 후 서러움과 분노 때문에 눈물을 터뜨리는 계나. <한국이 싫어서>는 그녀의 삶을 다각도로 비추며 관객과의 교집합을 가능한 많이 만든다. 근래 한국 영화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장강명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한국은 싫지만, 여전히 한국인이다
균형 감각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한국 사회를 비판하거나 헬조선과 탈한국을 긍정하며 사회 담론을 일차원적이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넓은 시점에서 헬조선이라는 현상을 조망한다. 어휘 너머에 있는 현실을 포착하려 애쓴다. 일례로 영화는 계나의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에서 행복을 찾지 못한 사례를 거듭 보여준다.
계나의 정착을 도운 일가족은 정작 본인들이 뉴질랜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낙원 같아 보이던 오클랜드에는 갑자기 지진이 발생한다. 인종차별을 비롯해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도 계나를 덮친다. 이처럼 카메라는 한국만 떠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마냥 달콤하지는 않은 탈한국의 현실을 놓치지 않는다. 즉, 한국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발버둥 치는 일상을 카메라에 담는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서울 시퀀스가 무채색톤인 반면, 뉴질랜드 시퀀스는 더 포근하고, 따뜻하다. 그저 버티기 바쁜 서울과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지만, 한국인이라는 소속감을 놓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소속감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주 담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영상 통화를 할 때도 인물의 표정과 인상을 보여주려 한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막걸리를 같이 마실 관계가 있는 반면, 타지에서는 아무리 행복해도 무언가를 놓친 그 얼굴을 대조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고아성은 유달리 빛난다. 그녀가 2030 세대 중 누군가의 삶을 자기 얼굴에 모두 녹여낸 것처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진짜 탈한국과 행복
그 과정에서 <한국이 싫어서>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한국을 떠났지만, 뉴질랜드에 끝내 정박하지 못한 계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묻는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대학원 학위를 딴 뒤 취업해서 영주권을 얻을 계획인 계나. 영화는 그 선택조차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명만 하더라도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대학원을 포기한다. 대신 아르바이트 중 흥미를 붙인 요리를 배워 셰프가 되기로 결정한다.
계나도 마찬가지다. 회계학 학위를 딴 그녀는 뉴질랜드를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계획한 삶조차도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을 떠나서도 방황을 거듭하는 두 청년을 보다 보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진의가 얼핏 보이기도 한다. '한국이 싫다'는 말은 길이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선택한 길 위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직감했을 때, 길을 자유롭게 바꾸지 못하는 '한국이 싫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박승현)이 오리지널 캐릭터로 추가된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그는 가장 한국적인 20대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 특히 계나가 공무원 시험 N수생인 경윤과 꿈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가슴에 꽂힌다. 학원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계나와 경윤. 그는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곳에서 벗어나 전망이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시험이 마지막 기회라고도 덧붙인다.
그런데 계나가 꿈속에서 그를 만날 때 그는 거듭된 불합격 때문에 이미 목숨을 끊은 상태다. 그는 한 번 선택한 경로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돌리지 못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하는 대신 떠나기로 선택한 것도 꿈속에서나마 그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칫 한없이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는 현실 인식을 영화적으로나마 치유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화감이 없다는 씁쓸함
사실 <한국이 싫어서>는 끝맛이 씁쓸한 영화다. 만듦새가 마냥 매끈하지는 않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은 일장일단이 있다. 계나의 일상을 극적으로 변모시키지만,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정확한 시간대를 알려주다가 점차 건너뛰는 대목이 많아지기 때문. 벌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의 끝맛이 씁쓸한 진정한 이유는 완성도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영화의 원작이 10년 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씁쓸하다. 이 작품은 시간대가 상당히 모호하다. 그나마 계나와 뉴질랜드에서 만나 친구가 트럼프와 김정은에 관해 대화한다는 점에서 2018년이나 19년 언저리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2024년이 배경이라 해도 영화 내용은 위화감이 없다. 굳이 '헬조선'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청년들이 체감하는 문제점과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2024년인데도 10년 전 신조어와 이야기에 공감하는 아이러니만으로도 씁쓸함이 혀끝까지 가득 맴돈다.
Acceptable 무난함
1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는 비극을 마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