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2-03 18:32:13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영화 <물비늘> 리뷰

SYNOPSIS.
‘예분’은 손녀 ‘수정’을 사고로 잃은 뒤 삶이 1년 전 그날에 멈춰버렸다.
손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매일 같이 강가에 나가는 ‘예분’ 앞에 손녀의 절친 ‘지윤’이 나타난다.
두 사람에겐 들어야 할 진실이 있고, 삼켜야 할 비밀이 있는데…
진실과 비밀 사이 깊은 슬픔이 일렁인다.

#각자의 물결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스쳐간 자리는 그 이전과 영영 같을 수 없다. 설령 떠나간 이가 나에게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구멍이 난 유리창이어도, 깨진 곳 없는 유리창과는 같을 수 없다. 그 작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숭숭 불어와, 누군가의 빈 자리를 절감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아주 작은 순간일지언정.
하물며 이 이야기 속 예분과 지윤에게는. 손녀를 잃은 할머니 예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은 중학생 지윤. 이들은 다른 부위에 난 같은 상처를 안고, 매일 다른 물로 뛰어든다. 예분은 손녀를 삼킨 강에 금속 탐지기를 들고 나가 손녀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것을 매일 찾고, 지윤은 친구와 함께 있던 수영장에 매일 들어간다. 하나의 상실이 남긴 각자의 상처, 각자의 물결 속에서 이들은 매일 허우적거리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들이 매일 뛰어드는 물 속의 축축함이 관객석까지 넘실넘실 전해진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중간중간 교차하는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서, 예분과 지윤의 시간을 순서대로 톺아볼수록 더욱 축축해진다.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현재, 그 사이 이들에게 있었을 무수한 감정들이 겹겹이 전해져서다.
#중첩되는 소리 속에서
이렇게 감정을 겹겹이 전달하는 데에는 소리가 큰 몫을 한다. 수정이 사고를 겪은 당일부터,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과 중첩되고 혼재되기 시작한다. 거센 빗소리, 경찰차 사이렌 소리, 수정을 잃은 엄마의 울음 소리...들이 어지러이 섞여들면서. 아주 거대한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쉽게 삼켜 슬픔으로 중첩시키고,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예분의 금속 탐지기 소리처럼, 때로는 진실을 찾으려 날카롭게 세운 소리가 반대로 귀를 막기도 한다.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할 만큼 했다는 말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헤매는 예분처럼.

사실 예분에게, 지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진실을 드러내고 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깊고 진득한 자책을 덜어낼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이를 잃어버린 빈 자리를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인간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그토록 숱하게 죽은 몸을 어루만지고, 누군가의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살았던 예분이지만 정작 손녀의 죽음과 거기 어린 자기 감정들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토록 함께 뛰어들던 물 속, 그 익숙한 감각 안에서 친구를 잃은, 이어지는 상실 속에서 도저히 여유가 없는 지윤 또한 마찬가지다.

#물결도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이러한 두 사람이 부딪쳐 파장이 이는 자리마다 삶과 죽음이 물비늘처럼 몸을 뒤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마주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찾고자 혹은 감추고자 한 것이 정말 진실이었을까? 진짜 필요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을까? 가까워지고 다가서는 두 사람의 장면들을 통해, 두 사람의 거리 사이에서, 영화는 그 답을 조심스럽게 피워낸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뭐부터 버려야 돼요?" 묻는 지윤에게 "남길 것부터 정리해야지." 말하는 예분의 차분한 어투다. 그렇게 죽음의 대처법을 가르치고서는 정작 지윤을 데려가는 곳이 병원과 식당으로, 죽음에 앞서 삶부터 가르친다는 점 또한.
죽음과 삶은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맞붙어 있다. 삶은 애초에 그렇게, 무수한 이들의 삶과 죽음이 조각조각 물비늘처럼 맞붙어 강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하나의 물비늘, 그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지도. 그러나 설령 이 하나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순간이라 해도, 강은 그런 식의 물비늘이 모여 반짝반짝 흘러 간다.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뒤채는 만남과 헤어짐, 이해와 오해, 그 틈바구니 삶이라는 곳에 우리 그저 소리 없이 나란히 눕는다면. 다른 베개, 다른 이불, 다른 부위의 같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그대로, 그저 같은 요 위에 나란히 눕는다면. 그때 비로소 이 마음에서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사실, 모든 축축한 것을 마르게 만드는 햇볕이니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12월 6일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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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에서 보내는 응원
"나이 드니까 눈물만 많아져. 어쩐지 눈물이 나네." 같은 말에서는 괜스레 낙엽 냄새가 난다고, 그러니 내 입에서 나오기엔 좀 방정맞은 것 같다고, 아마도 십대쯤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들이 왜 저런 문장을 골랐는지 알 것 같은 순간들이, 가끔 그 비슷한 말이 슬쩍 떠오르는 날들이 있다. 이전에는 무심하게 넘어가던 일들이 실은 여상하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탓이다.
꽃 한 송이 피는 순간이나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아문 자리는 어쩜 그리 경이로운지. 남들 다 하고 사는 일 중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들이 많은지.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느낌을 즐기며 천문학 책을 읽어보는데 중력이나 관성 같은 개념은 어쩜 그렇게 신비로운지. 모두 다 이전에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두 번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 깨달음이 켜켜이 쌓인 자리에 무언가 와 닿았을 때, 그래서 물방울이 터지듯 눈물이 훅 고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어쩐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기실 이게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걸까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할 시간이 우리에겐 많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나이 드니까', '어쩐지'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시간을 그렇게 허덕허덕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에 수록된 단편을 읽다가 그렇게 "어쩐지" 울컥한 장면이 있다. 어떤 자매의 이야기였는데, 동생에게 생긴 큰 변화를 엄마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언니가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이었다. 버는 돈 대부분을 책과 영화에 쏟아내며 사는 자신의 존재는 엄마에게 어떨까 생각하는, 뭐 대략 그런 문장이었다. 전철 한가운데서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터졌다. 어쩐지 울컥하네. 그리고 마침 전철 한가운데였으므로, 종점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으므로 그 "어쩐지"의 정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건 내가 가진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정적인 것들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엄마도 아빠도 눈치를 주지 않건만 괜스레 눈치 보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십대 때처럼 대단한 입신양명을 꿈꾸는 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는 세간의 말에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세간'과 반대로 가는 삶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그 걸음조차 흔들리는 그대로 괜찮다고 끌어안아준다. 좋은 영화, 마음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찬실은 마치 어려운 날 함께 앉아있어 주는 친구처럼 따스하고 다정하다.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 정말 굉장히 운이 좋은 찬실이란 사람이 나오나 봐 ” 라고 생각한 한국인이 있을까? ( 내 친구는 자꾸 “ 찬실이는 복도 없지 ” 로 기억했다. ) 시놉시스를 볼 것도 없이 찬실이의 날들이 꽤나 박복하게 굴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제목이기도 하다.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프로듀서다. 즉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영화라는 형태에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할 때, 그걸 현실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기획과 제작부터 홍보와 개봉까지 전 과정에 손이 닿는 사람, 본인 말을 빌자면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다. 찬실은 예술 영화로서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감독과 오래 같이 일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영화 찍으며 평생 살 줄 알았다. 감독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갑작스럽게 실업자가 될 때까지는.
찬실이의 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OST 가사처럼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부대껴오는 것이다. 시간과 애정을 다 바쳐 사랑한 영화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고 때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기도 하면서 찬실은 씩씩하게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추려 언덕길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 문간방으로, 사각형도 오각형도 아니고 반지하도 1층도 아닌 방으로 이사한다. 생계를 위해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급브레이크 걸린 길에서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나.
찬실에게는 별로 여유가 없다. "한국 영화계의 보배"라며 찬실을 추켜세우던 영화사 대표는 ‘감독의 예술이었으니 프로듀서가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며 직업인으로서의 찬실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때마침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친다는 단편영화 감독 영을 보면서는 또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하다. 좋아하고 어쩌고 할 만큼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리고 정작 알아보면 그렇게까지 잘 맞지도 않지만 ("노올란?!"), 이 정도면 대충 업계도 맞겠다 사람도 다정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적당히 연애라도 해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조각배 같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던 찬실의 일상에 한 남자가 더 나타난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맘보 춤을 출 것만 같은 속옷 차림새에, 추위에 파르라니 떨면서도 콘셉트에 충실하게 머리카락까지 고슬고슬 만지작거리는 그는,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한다. 유령일까 환상일까 아니면 영화의 현신 같은 존재일까. 아무튼 그는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고, 찬실은 "이제 내가 미칬는갑다... 완전히 돌았는갑다..." 하고 서러워한다.
이 모든 주변인 틈바구니에서 찬실은 어떤 카테고리로 규정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뚜렷하게 계약서 찍힌 직업도 없고, 함께 서로를 보듬자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도 없고, 하다 못해 여태까지 해왔던 일조차도 없어졌지만 찬실은 늘 최선을 다한다. 장국영에게 고민 상담을 하거나, 영과 잘해보겠다고 도시락 싸들고 따라가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소피에게도 너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고, 더듬더듬 한글을 배우는 집주인 할머니 숙제를 도와드리거나 함께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그리고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도시 곳곳에 세금으로 조성한 공간을 저렇게 귀엽게 활용할 수도 있구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무시하고 오즈 야스지로(를 비롯해 '시네필'들이 좋아하는 감독)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렇게 유쾌할 수도 있구나. 빛날 찬 열매 실, "내하고 닮았나" 고민했던 모과처럼 단단하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모과 바로 뒤에 붙어나온 배, 사과, 곶감 등 영화 대박 기원 고사상의 과일들은 끝내 그녀의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찬실에게는 알찬 열매라면 으레 그렇듯 은은한 윤기가 돈다.
그러는 동안 장국영은 찬실에게 계속 묻는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영화를 "해나갈 수 있을까" 묻는 찬실에게, 찬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묻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영과 "잘될 수 있을까"를 묻는 찬실에게, 외로운 건 외로운 것일 뿐이니 상대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일련의 일들 끝에 찬실은 모든 걸 게워낸 사람이 물병을 더듬더듬 붙들듯 다시 영화를 잡는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찬실은 "하고 싶은 일"의 첫걸음을 떼어나간다.
영화 끝에서 찬실은 장국영이 메어주는 아코디언을 한 품 가득 끌어안고 희망가를 연주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시작과 끝에 어쩐지 쓸쓸한 바람 소리를 품고 있는 악기여서일까. 제목은 희망이라지만 어쩐지 절망적인 시대에 불리던 아득한 노랫말이어서일까. 그 장면은 어쩐지 눈물겹다.
이 영화에서 내게 "어쩐지" 눈물이 난 부분은 이 장면이었다. 차분한 연주 끝, 그동안 자기 일처럼 열을 내며 해준 장국영의 조언이 더 이상 찬실에게 필요치 않다는 걸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
"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그 차분한 인사는 마치 영화와 주고받는 말 같았다. 우리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영화에 있어 늘 외부자라고만 느꼈던 내게도 영화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었다. 우주 어딘가에서도 누군가가 담은 마음을, 때로는 택배 받듯 때로는 유리병 편지 받듯 건네어 받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오래오래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이따금 끄집어내어 살펴보는 것. 그게 영화와 나의 관계였다. 찬실처럼 프로듀서가 되고 감독이 될 일도, 영처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업을 두루 섭렵할 일도, 하다 못해 이미 폐간된 <키노> 지를 쌓아놓고 정성일 평론가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일도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영화는 선물처럼 가까이 와준다. 마치 이 영화, 찬실이 그랬듯.
영상으로 보다 보면 닮아 보인다. 진짜다.
영화의 현신 장국영. 그를 우리가 길이길이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영화의 아우라가 있으니까. 이 영화에도 나온 <아비정전>의 옷차림이 그의 외적 시그니처라면, <패왕별희>는 그의 내적 시그니처였다. <패왕별희>에서 그가 맡은 데이는 철저하게 이야기 속으로 침잠한 인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가장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데이인데, 그럼에도 그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건 영화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의 극단에 서 있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쥬샨이다. 거친 현실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던 쥬샨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던 데이. 샬로는 그 사이에서 남편이었다 패왕이었다 하며 갈지자로 걸었다. 이야기 안에만 있고자 한 이에게 현실은 너무 거셌고, 현실을 바지런히 걷고자 한 이에게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었다. 끝내 현실은 이야기를 밀어내지 못했고, 이야기는 현실을 지우지 못했다. 공리와 장국영은 대척점에 있었지만 실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찍힌 대척점이었다. 현실과 픽션은, 삶과 영화는 그렇게 먼 것 같지만 멀지만은 않다.
이따금 <패왕별희>의 어떤 장면이 생각나는 이유. 장국영의 눈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 삶에 에너지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내가 찬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들여다보는 이유. 우리가 늘 이야기를 찾는 이유는, "사는 게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라는 찬실의 말에, 다른 이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서 비춰주는 찬실의 플래시에 녹아 있는지 모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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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장르, 뻔한 소재라고 함부로 쓰지 마세요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친구: 별로인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해?
나: 음... 솔직하게 쓰려고 해.
친구: 솔직하게?
나: 거짓말할 순 없으니까. 요즘은 영화 값이 15,000원인걸!
영화관람료 15,000원 시대를 맞아 이상한 책임감이 솟구치는 요즘입니다. 사실은 걱정에 조금 더 가까운 감정입니다. "나의 리뷰를 읽고 영화를 봤다가 ‘돈 날렸다’고 느끼면 어쩌지?" 물론 제가 그렇게 영향력 있는 영화 리뷰어는 아니지만, 지인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제 리뷰를 읽은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더라도 최대한 솔직하게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모든 영화에는 좋은 점이 있다는 신념 아래에서 말이죠.
그래서였는지 얼마 전 영화관에서 <나는 여기에 있다>를 보는 와중에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딱 하나만 찾자. 좋은 점 딱 하나만!’ 영화 제목처럼 이 영화의 좋은 점이 “나 여기에 있어!” 하고 소리쳐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단 하나의 좋은 점도 찾지 못했습니다. 고작 몇 문장 만에 신념을 저버리고 말았네요. 그래도 영화 리뷰어로서의 책임감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영화관람료 15,000원을 지켜드리기 위한 리뷰를 시작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4월 7일(금)에 진행된 <나는 여기에 있다>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는 2023년 4월 12일 국내 개봉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
I AM HERE
<나는 여기에 있다>는 살인자의 폐를 이식받은 형사 '선두'가 살인자의 심장을 이식받은 연쇄 살인범 '규종'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장르물이죠. 그것도 추적 스릴러입니다. '추적 스릴러' 하면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며, 심장이 쫄깃해지는 영화가 절로 떠오릅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에는 추적 스릴러의 장르적 특징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형사와 범인이 치열한 수 싸움을 하며 긴장감을 끌어올려도 모자랄 판에, <나는 여기에 있다>의 캐릭터들은 정말 하나같이 멍청하기만 합니다. 덕분에 이 영화의 장르가 추격 스릴러라고 선포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처참히 실패해버렸죠. 영화는 연쇄 살인범 '규종'의 살인 장면이 찍힌 술집의 CCTV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CCTV 화면에는 '규종'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있죠. 형사들은 그 CCTV 화면을 '규종'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들이 돌아오면 꼭 신고하라는 말을 던지고 떠나죠. 그런데, 그 집안에는 '규종'이 있었습니다. 천장이나 비밀공간에 숨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방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방문만 열어 봤다면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상황이죠. 살인범의 집을 찾아왔으면 수색부터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혹시 CCTV에 살인범의 얼굴이 정확하게 찍혔는데 영장도 없이 방문한 건 아니겠죠? 멍청한 형사들의 활약으로 '규종'은 도망치고, 이렇게 긴장감 하나 없이 영화는 막을 올립니다.
이후 '규종'은 마스크나 모자도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여자친구도 활짝 공개된 장소에서 두 번이나 만납니다.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인 여자친구는 건장한 남자 형사 두 명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죠. '규종'은 형사들이 도청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공중전화로 아버지와 통화도 합니다. 공중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건 그 공중전화의 위치를 안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규종'과 아버지가 1분이 훌쩍 넘도록 눈물겨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형사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중간에 덮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요? 게다가 형사들은 '규종'의 다음 타깃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규종'이 다음 타깃을 무조건 죽이러 오리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죠. 그리고 예상대로 '규종'은 그 타깃을 죽이러 옵니다. 타깃을 지키던 형사 2명과 '선두', 그리고 '선두'의 파트너까지, 총 4명의 형사가 달려들었지만 또 놓칩니다. 이쯤 되면 러닝타임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범인을 놓치도록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선두'의 파트너 '영조'는 폐를 이식한 '선두'에게 현장에서 물러나길 거듭 권합니다. 그러나 '선두'가 현장을 떠나야 하는 이유로는 건강보다도 형사로서의 자질 부족이 더 커 보입니다. 허술한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추적 스릴러의 장르적 특징에 관해서는 지금부터도 한참을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제 다음 문제점을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 ⊙ ⊙
스토리텔링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구멍 가득한 이 영화의 설정입니다. <나는 여기에 있다>의 소재는 '살인자의 폐와 심장을 나눠 가진 형사와 범인', 그리고 '사이코패스 장기 기증자의 성격과 특징이 전이되어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린 수혜자'입니다. 장기 기증자의 성격이 전이되는 일은 흔치 않지만, 장기 기증 수혜자가 기증자의 가족을 만나게 되면 세포에 축적된 기억이 되살아나서 성격이 전이될 수도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설명입니다. 장기 기증 코디네이터가 논문도, 학계 보고도 아닌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낸 이 정보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설정이죠.
물론, 장기 이식 수혜자가 기증자의 성격, 습관 등을 닮을 수 있다는 이론이 실제로 존재하긴 합니다. 또 이러한 소재를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기도 했죠. 그러나 의학적, 과학적 근거가 없고, 상식적으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비상식적인 설정을 가져다 쓰려면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말이 되게끔 만들어놔야 하죠. 이런 걸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꼭 거창한 마블 영화에서만 세계관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 안에서만 허용되는 이야기가 있다면, 반드시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세계관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있다>는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몰입감도, 흥미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아마도 감독은 스릴러의 틀 안에서 '장기 이식'과 '성격 전이'라는 소재를 통해 기증자 가족과 장기 이식 수혜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대를 그려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기 기증자도 살인범, 장기 이식 수혜자도 살인범인지라 그들의 유대가 공감으로 이어지긴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살인자의 장기를 이식한 형사('선두')와 나쁜 사람의 장기를 이식한 착한 사람('규종')의 내적 고뇌와 혼란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더라면, 전체적인 만듦새가 조금 허술했더라도 볼만한 작품이라 평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심리 묘사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나쁜 놈의 장기는 이식해선 안 된다. 그럼 나쁜 놈 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죠.
⊙ ⊙ ⊙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단 한 순간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기 교실에서 한꺼번에 섭외한 듯한 배우들, 현장음 하나 없이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처럼 지나치게 깨끗하고 조용한 음향,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화면, 하나하나 꼽기 어려울 만큼 많았던 세심하지 못한 연출 등 그 밖에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찌 됐든 영화 감상은 취향의 영역이기에 지금까지는 아무리 영화가 별로여도 웬만하면 영화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그러나 앞으로는 예외를 두어야겠습니다. 기준은 정성입니다. 지금은 영화관람료 15,000원 시대니까요.
Summary
과거, 살인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폐를 찔린 후 장기 이식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사 ‘선두’(조한선). 수사 일선에 복귀한 그는 연쇄 살인범 ‘규종’(정진운)을 쫓던 중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아승’(노수산나)을 통해 ‘규종’이 자신과 같은 공여자의 장기를 이식받은 것은 물론 공여자가 과거 자신이 검거했던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신근호
출연: 조한선, 정진운, 정태우, 노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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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애니메이션들 사이에 묻히면 속상할 이 한국 영화
첫인상
“미소야, 인사 제대로 해야지!” 담임 선생님이 미소를 다그친다. “안미소.” 짧은 답변만 툭 내던진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미소. 미소는 제주의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왔다. 낯을 엄청 가리는 미소. 사실 그 이전에 뭐만 하면 전학 가던 탓에 학교에 가는 일이 좀 귀찮게 느껴졌다. 어쩔 줄 몰라하는 미소. 수업 첫날에 엄마를 뒤로하고 갑자기 도망쳐 버린다. 그 짧은 순간에 눈이 마주쳤던 건 원래 짝꿍이 될 예정이었던 하은이었다.
오늘 하은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쟤는 뭘까? 처음 내뱉었던 미소의 인사는 하은이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집에 가는 길.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집에 도착했다. 하은이 가족은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타지에서 온 어머니와 찐 제주도민인 아버지를 두고 있는 하은. 식탁에서 나오는 대화도 그렇게 무겁지가 않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대화 소재가 하은이의 인간관계였다. “얘 친구 없어서 어떵(떡)하지?” 성격도 착한 하은이지만 외로운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런 하은이에게 갑자기 한 손님이 찾아온다. “안녕! 나는 미소야. 오늘 네 짝꿍이 될 뻔했던.”
어디서 본 것보다 나았어
이 영화는 대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당시 주연배우였던 주동우의 ‘연기 차력쇼’를 바탕으로 살짝 다크 했던 분위기를 잘 끌고 갔던 원작. 영화를 볼 때 기억에 남았던 것은 글쓴이가 전부터 잘 알던 대만 청춘영화의 연출 방식이 살짝 보인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부터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까지 이 대만이라는 나라에 있던 영화들은 어느 장르를 품고 있는 듯하다. 본 작은 이 특성을 잘 소화한다. 나라가 바뀌었는데 대만 청춘영화 특유의 청량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어떻게?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은 제주와 서울이다. 영화의 특성상 전자 제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당위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듯이 영화에서 위치는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장면에서는 공간 안에 갇혀서 바다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는 데 밍밍하게 바다만 있으면 뭔가 맛이 없다. 그럼 예뻐야 한다. 이런 특성을 살리는데 제주 서귀포시의 어느 공간은 뭐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뿐일까? 미소와 하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휘리릭 달려가는 것도, 스쿠터를 타고 달려가는 일도 색감과 인물들의 분위기를 설정하기 위해서 제주는 필수적이었다. 또 영화 초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후관계도 걸어 다녀야 하는 제주의 특성을 살리기도 했고, 토속적인 장소를 구현한 좋은 수가 됐다.
글쓴이는 제주도 사람이다. 많은 영화들이 제주를 공간으로 사용했단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계춘할망> 같은 경우는 공간을 제주로 설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주인공이 해녀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도연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인어공주>가 있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제주로 가서 전원생활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다. 이런 인물의 서사와 함께 제주도 사투리가 들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소울메이트>에서 제주 사투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억지로 막 욱여넣지 않았다는 것이 글쓴이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서울과 제주의 거리 차이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면으로 깔고 표면적으로는 이 공간을 묘사한 감독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반복과 차이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반복과 차이에 있다.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보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는 ‘영혼을 공유하는 친구’라는 뜻이다. 영화는 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우선 미소의 서사다. 미소의 가족 특성은 초반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후반부에 정확히 반복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 내지는 구성요소를 생각해 보면 감독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 영화에서 대놓고 핵심처럼 보이는 미술이라는 소재 역시 감독이 설정한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뭐 이렇게 핵심으로 작동되는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영화 대사에서 두 사람의 처지를 관통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렇게 두 사람의 처지를 엇갈려서 제시한 이유는 사랑이라는 주제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영화가 퀴어 로맨스를 다룬 영화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영화가 그 소재를 다룬다고 보지 않는다. 영화는 두 사람의 처지를 병치시켜서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있다. ‘너는 내가 살아온 걸 이해 못 해’라는 것이다. 영화는 사실 어떤 인물이 고른 선택지를, 다른 사람이 사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지사지의 영화인 셈이다. 이 세상의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면 모든 갈등과 헤어짐이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줄 알았는데 상대는 이랬고. 나는 그때 몰랐지만 내 생각보다 상대방이 날 더 좋아했고.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인간은 지루한 인간관계를 반복한다. <소울메이트>는 이를 잘 이해하듯 이 사랑이 왜 우리들에게 공감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현실성을 인물 간의 관점을 혼합시켜서 부여한 것이다.
K-레이첼 맥아담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김다미 배우가 정말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전부터 연기했던 몇몇 클립들을 봤었다. 드라마를 즐 안보는 글쓴이지만 <이태원 클라스>나 <그 해 우리는>의 활약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김다미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그동안의 필모를 집대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다미 배우가 지금 1995년 생으로 27세다. 글쓴이랑 두 살 차이 난다. 글쓴이가 지금 교복 입고 고등학생 연기하면 민원 들어올 것 같은데 이 배우는 어떤 헤어스타일로든 찰떡같이 소화한다. 비주얼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은 나이대에 맞는 인물의 행동을 잘 연기한다. 10대 때는 10대답게, 20대 초 불안한 일상을 보내는 청춘으로서의 일상, 악착스럽지 않으면 낙오되는 삶, 30대가 되고 나서 겪는 다른 인생까지 한 사람이 한 인간의 일생을 바탕으로 매번 다른 처지에 적응하는 모습을 잘 연기했다. 이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매 번 다른 입장에 놓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소울메이트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호소력, 눈물연기의 빈도는 뭐 말해 뭐 해? 수준이다.
하은 역을 맡은 전소니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 하은 캐릭터는 감정적으로 입체적인 측면이 미소보다 넓어야 한다. 하은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미소의 서사에서 핵심이고, 또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이런 사랑이 있나요?’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심지어 영화의 촬영 자체도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많이 짜여 있다). 전소니 배우를 이를 잘 이해하듯 중요한 부분마다 표정연기를 성공적으로 소화한다. 대표적으로 후반부에서 인물이 재회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각본이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듦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없으면 영화의 엔딩이 성립되지 않을 수준이다. 이 장면에서 세월 동안 쌓아놓은 애정과 증오를 눈빛으로 보여준다. 전소니 배우의 이름은 몇 번 들어봤어도 실제로 연기하는 건 처음 봤다. 이 배우의 얼굴을 효과적으로 연기를 이끌어낸 좋은 연출이 돋보였다.
작위적이긴 해
영화 장점 정말 많다. 글에서 크게 언급하지 않는 부분은 역시 촬영이다. 제주라는 공간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유지하는 색감과 구도가 작품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괜히 대만 청춘영화의 업그레이드라고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까지 전소니, 김다미 배우의 표정연기로 이야기의 작위적인 느낌을 끌고 갔다는 점은 아쉽다.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서로 아끼는 친구 관계가 균열이 일어나는 기점이 있다. 이를 시작으로 후반부와 엔딩을 위해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몰입할만한 요소가 살짝 적다는 느낌이 든다. 충분히 이 전에 이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뭐 영화를 보시는데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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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 더럽게 안 좋은 한 킬러의 운수 좋은 날
운이 없더라. 만약 사회복무요원 복무지에 노트북을 놓고 오는 건 운이 안 좋은 편에 속할까? 그런 것도 운이 안 좋은 것에 해당하면 난 정말 옴 붙었다. 좀 재미있는 일 없을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행운에 걱정 없이 살 순 없을까? 금세 길거리에서 시비 붙었던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착하게 생겨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날 건든다. 진짜 좀 짜증 난다. 나 좀 안 건들 수 없나?
하지만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웃픈 일들은 보통 한꺼번에 몰려온다. 받아들이는 사람 속사정 같은 건 고려해주지 않는 부자비한 놈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불평등. 이 우연 같은 불평등을 만나 사람 인생이 종종 바뀌곤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게 인간 아니겠어? 이런 모티브는 수많은 영화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혀있다. 이번에는 브래드 피트가 운 없는 킬러로 돌아왔다. 또 <불릿 트레인>을 시사회에서 본 입장에서 이 정도의 글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수 참 좋은 날
인생사의 많은 것들은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유달리 운이 없는 이 남자는 방금 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것 같다. 운이 없는 킬러 코드명 레이디버그. 갑자기 느닷없이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임무를 하기로 했던 킬러가 아파서 불참한다는 건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기로 한다. 아니 뭐 고등학생이야? 아파서 조퇴하게? 툴툴대는 레이디버그. 그런 레이디버그를 마리아가 격려한다. 임무를 전달하는 마리아. 오늘 레이디버그가 해야 할 일은 일본을 경유하는 기차에 찌그러져 져 이 가방 하나를 무사히 가져오는 것. 그게 임무야? 일본의 한 지하철에서 가방만 찾으면 되는 게? 왠지 이번 임무는 확실히 쉬운 것 같다.
이 가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굉장히 쉬운 임무였다. 손님들이 가방을 넣는 칸에 간 레이디버그. 어렵지 않게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찾는 데 성공한다. 이게 이렇게 쉽다고? 근데 사실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같은 열차 안에 있는 손님 중 몇몇은 레이디 버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백의 사신’에게 의뢰인의 아들을 엄호하고 돈가방을 챙기라는 지시를 들은 킬러 레몬과 탠저린이 있었다. 또 뭔가 아들과 관련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와 어려 보이는 여자도 기차에 탑승했다. 이 사람들은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전부 킬러였다. 운도 더럽게 없는 레이디 버그. 이 사람들은 각자 목적과 계기를 가진 채로 열차에 탑승한 것이었다. 단순히 돈가방만 찾아서 빼돌리면 되는 미션인 줄 알았는데 오늘도 잘못 걸렸다. 지독한 불운을 무릅쓰고 레이디 버그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보는 재미는 있는 편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는 보는 재미다. 이 영화의 보는 재미는 촘촘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 일단 보는 재미 첫 번째. 액션이다. 액션 잘 뽑았다. 이야기의 배경과 설정 상 기차라는 속성은 극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 기차는 한번 탑승하면 다음 역까지는 못 내린다. 또 승객끼리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게 탁 트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나 역이라는 게 있어 정류장 도착시간마다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비행기, 버스와는 다른 대중교통으로서의 차이점이다.
영화는 이 특징을 십분 활용한다. 일단 좁은 공간에서 액션 잘 활용했다. 예고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의 액션이 공간이 좁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어서 극후반부엔가 열차의 운전석쯤에서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열차를 운전해야 함 + 근데 그 좁은 곳에서 총, 칼을 맞을 것 같은 긴박감이 잘 조합돼서 시너지가 난다. 이런 식으로 영화 내부에서 맨몸액션을 하는 것도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이것 때문에 막 벽에 부딪힌다거나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인물들끼리 숨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차피 직선 쭉 돌아다니면 보이는 게 승객들 얼굴인지라 어디 숨고 이런 묘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렇게 '좁다'라는 특징에서 오는 큼지막한 요소들을 잘 살린다. 또 공간이 좁고 따닥따닥 붙어 있으면 소리 전파가 잘 된다. 막 멀리 있고 이러면 소리가 잘 안 들리지 않나? 또 일반 대중들이 출퇴근하며 오고 가는 지하철의 특성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의심 사기 쉽다. 이 덕에 총소리를 줄이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거나 주요 인물 암살을 가리려고 노력하는 등 초중반부까지는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게 잘 작동하는 편이다. 이 공간 활용은 반대 맥락에서도 작용한다. 지하철이 정차한다. 역에서 내린다. 그럼 그 하차하는 시간 동안 잠깐은 역에서 인물들이 대화할 수 있다. 이 넓은 공간에서 벌이는 액션신도 영화의 완급조절을 위해 잘 사용한 것 같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넓은 곳에서 일어나는 액션이 더 기억에 남았다.
또 다른 강점으로는 코미디 타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이런 미국식 B급 유머가 살짝 식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근데 그건 영화를 많이 본 글쓴이(나) 같은 분들의 입장일 것이다. 다른 일반 대중들이 보기엔 이런 유머가 충분히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전작인 <데드풀 2>에서 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입담이 이 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을 활용한 유머 난 솔직히 좀 재미있었다. 내가 이런 실없는 농담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 대사를 하는 캐릭터들이 그렇게 순수한 이야기를 하는 건 봐도 봐도 재미있다. 또 극 중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레이디버그의 대사를 듣고 중후반부쯤에 나를 제외한 다른 관객분들이 많이 웃는 걸 들었다. 이런 거 보면 코미디가 막 아예 재미없다고 말할 부분은 아닐 듯하다. 뭐 앞에서 쓴 부분 이외에도 'F' 단어가 많이 나오는 타란티노식 유머나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충분히 재미있다. 이런 맛은 익숙한데도 웃길 땐 웃긴다.
말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일단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주인공 레이디 버그부터 시작해서 극후 반부 장면까지 말이 너~무 많아서 러닝타임 내내 늘어진다. 레이디버그도 자기 운 없다는 거 좀 적당히 좀 하지 초중반부까지 내내 말한다. 그리고 레몬, 텐저린 뭐 그리 말이 많은지 서로 쓸데없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이야기 전개가 느려진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또 모든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까지 해서 지나치게 친절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례로 레몬, 텐저린 두 형제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레몬, 텐저린이 대화하는 내용 1/2를 쳐도 사실 아무 문제없을 것 같다. 또 두 형제 중 한 명이 레이디 버그와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예고에도 나오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 때도 왜 굳이 싸우는데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점이 든다. 아니 그런 식으로 대화할 거면 청부살인 업을 왜 해?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말 많아서 짜증 나는 지점은 극후 반부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엔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레이디 버그. 주절주절 말을 하는데 좀 영양가 없는 말이라서 몰입이 깨진다. 분명 중요하고 클라이맥스일 텐데 굳이?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각본에 구멍이 있다. 이 부분을 전부 서술하기엔 살짝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대략적으로만 써보자면, 원작 소설을 읽어야 설명이 될 거라고 드는 지점이 있다. 일본에 있는 신칸센을 저렇게 관리한다고? 싶은 부분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총 쏘고 뱀 왔다 갔다 돌아다니고 주먹으로 때리고 창가 깨지고 불타는데 실질적인 열차 관리에 대한 대응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감독이 이에 대한 대응을 하긴 했다. 이와 관련해서 후반부에 어떤 인물이 대사를 하긴 하는데 그 한 줄로 이 모든 설정의 오류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뭐 그렇다고 아예 개연성이 붕괴되는 영화는 아니다. 반대 측면에서 각본에서 딱딱 맞아떨어지게 설정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왜 대타로 일을 하게 되었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린 소녀의 개인 서사나 그 소녀와 함께하는 남자의 가족사까지 허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을 타당한 전개로 잘 틀어막은 건 각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외의 설정 몇 군데를 장르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ㅋㅋ 이래도 되겠지?' 하며 소비한 부분은 좀 아쉽다. 충분히 킬러들 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묘사했다면 이야기의 긴장감이 더 잘 나타났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형 멋있어요
아무튼 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확실한 건 역시 브래드 피트는 멋있다. 이제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근데 이목구비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보면 아직도 소년 같다. 그리고 액션 신도 깔끔하게 잘 소화한다. 굉장히 젊은 옷차림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사람이 멋있으니 무리 없이 소화하는 연예인 아우라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영화가 괜찮다고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브래드 피트의 스타 성일엔 텐데, 이 지점은 감독이 십분 이해해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브래드 피트가 아니더라도 레몬/텐저린 역을 맡은 두 배우의 코미디 연기와 중반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암살자, 또 조이 킹이 연기한 어린 소녀 캐릭터도 캐릭터 설정과 생동감을 잘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많은 말에도 코미디에서 안타와 홈런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후반부에 카메오 느낌으로 두 명이 나온다. 영화판에서 굉장히 알려진 슈퍼스타들이다. 그런데 우정출연 느낌으로 등장한 배우가 있다. 다른 영화에선 몰랐는데 이렇게 험한 조폭 포스도 잘 연기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약간 더 착하게 생긴 윌렘 더 포 느낌..
넷플릭스 오리지널 같다
이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면서 느낀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같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이 영화도 사실 마음 놓고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로서 충분하게 기능한다. 아니 액션 코미디 영화에 주인공이 싸움 잘하고 웃기면 장땡이지. 이 부분에서는 나름 괜찮은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다. 극장에서 돈 주고 상영관에 맞게 그 시간에 들어가서 영화를 본다. 이때 뭐 재밌고 이런 거 다 좋은데 우리가 알고 있던 액션 영화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같이 뭔가 미국 중심주의적인 작품을 보기엔 살짝 아쉽다. OTT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다. 이제 극장 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OTT 영화들과는 다르게 더 밀도 있는 영화를 만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질 못하니 넷플릭스로 봐도 충분한 느낌? 그냥 단순히 볼만한 영화 만들기엔 넷플릭스가 너무 잘 나가니 앞으로 영화 제작의 난이도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든다. 뭐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이 영화지만 솔직히 주변 사람들이 극장에서 뭐 보면 되냐고 물었을 때 이 작품을 거론하긴 좀 힘들 것 같다. <헌트>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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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지를
영화 <올드 가드(The Old Guard)>(2020)의 인물들은 고뇌에 휩싸인다. 앤디(샤를리즈 테론)를 비롯한 불멸자들은 영속의 삶 가운데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찾아내려 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이유를 탐구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2001)의 간달프는 프로도에게 우리는 인생에서 의도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겪지만, 그저 주어진 그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을 남겼다. 간달프의 말에 힘을 보태서 생각해 보면, 사실 <올드 가드> 속 불멸자들의 고민은 해결될 수 없다. 개체의 발생적 원인과 존재적 배경을 추적하고, 삶의 궤적을 지탱하는 명분이나 당위성 따위를 되새기는 작업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리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주어진 순간에 몰두하여 현존하는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과연 <올드 가드>의 인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앤디는 어떤 사유 과정을 거쳐서 어떤 판단을 통해 어떤 선택을 보여주었는가. <올드 가드>는 다양한 인물상을 다루기 때문에 이를 통해 고찰하기 좋은 지점들이 여럿 보이는 작품이다. 앞서 이야기한 이들의 고뇌를 바탕으로, 앤디를 중심으로 한 인물 관계 속에서 무엇을 살필 수 있는가.
앤디의 고뇌
앤디는 불멸자 중에서도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로, 그의 기나긴 삶의 궤적만큼이나 쌓인 고뇌의 순간들도 분명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앤디는 영화 속 불멸자 중 가장 연장자 대접을 받는 데다가, 연령 또한 추측이 어려울 정도로 신묘한 존재로 묘사된다. 새로운 불멸자인 나일(키키 레인)을 팀에 합류시키려는 앤디는 나일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여겼던 적도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나일은 불멸의 삶이 좋은 것 하나 없을 거라 여기고 거부하려고 하지만, 앤디는 받아들이기 힘든 걸 알고 있다며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랜 세월 동안 불멸의 존재로 살아온 앤디
이렇듯 겉으로는 모든 걸 초월한 듯 보이는 앤디는 사실 힘든 여정을 끊임없이 겪어내다 못해 지칠 대로 지쳤으며 풀리지 않는 존재적 고민을 늘 안고 살아간다. 앤디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고민하고 절망을 겪으면서 번뇌에 사로잡히곤 한다. 불멸의 힘은 앤디에게 다른 방식의 삶을 강요했다. 앤디는 팀을 조직하여 일종의 용병 집단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불의로 보이는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말이 쉽지, 대가 없이 선행만을 반복하는 삶이 과연 앤디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앤디를 필두로 한 불멸자 조직은 약자를 보호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몸을 바쳐 헌신해왔다. 물론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 칭송받아 마땅하고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만, 정작 행위의 주체들에겐 이러한 행위의 연속이 무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런 동기도 없고 명분도 찾을 수 없는데 뭐 하러 세상을 구하고, 누구 좋으라고 정의를 수호하려 하는가. 심지어 앤디의 말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좋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하는 듯 보이지 않는가. 여전히 세상은 각종 문제들로 가득한 아수라장이다. 초월적인 능력을 보유한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과 실존에 관해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점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흔히 영웅물에서도 많이 다뤄지곤 하였다.
영화에서 앤디의 고뇌는 몇몇 지점을 경유하면서 다변화되는데, 특히 가게 점원과 앤디가 대화를 나누는 신이 그렇다. 앤디는 자신에게 자초지종을 캐묻지도 않고 덜컥 호의를 베푸는 점원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한다. 점원은 당신만의 사정이 있을 거라면서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치료가 끝난 후, 점원은 오늘은 내가 치료해서 널 도와줬으니 내일은 네가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보면 일으켜주라고 한다. 아무도 혼자는 못 산다며. 이렇게 가게 점원은 앤디를 조건 없이 도와준다. 앤디가 왜 도와주냐고 묻자, 점원은 도움이 필요해 보여서 도와주는 건데 꼭 이유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앤디가 아마 이때 지난 몇 천년의 삶을 돌아보며 의미를 곱씹어 보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은 왜 그 긴 세월 동안 인류를 도우며 살아왔는가. 앤디가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가? 그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종의 운명과도 같은 삶의 형태를 조건 없이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적으로 의미를 창출하는 삶을 살았다. 앤디는 조건 없이 인간들을 도와준다. 인간들이 자신을 마녀 등의 기이한 존재로 여겨 공격하기도 했지만, 앤디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류를 구원한다. 결국, 점원을 향해 의아해하며 건네는 앤디의 질문은 역으로 자기 자신한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대화하는 신은 불멸성을 잃고 인간화된 앤디가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중요한 서사적 동력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앤디가 점원의 말을 통해 많은 걸 느꼈는지, 잠시 눈을 감으며 아주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클로즈업 쇼트에서 상기한 서사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점원의 말은 들은 앤디의 얼굴이 담긴 클로즈업 쇼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일은 앤디에게 있어서는 앤디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로, 나일을 통해 앤디는 자신의 삶을 다시 되짚어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불멸을 잃을 때, 네가 나타났어. 너(나일)를 통해 내(앤디)가 처음에 어땠는지 돌아보고, 다시 기억하라는 의미인가 봐”. 이렇듯 앤디는 자신을 조건 없이 도와준 가게 점원과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나일을 보면서 지금까지 사로잡혀왔던 존재적 고민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사실 앤디가 고민하는 지점들은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운명적인 논리와 맞닿아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러한 삶의 논리를 수용할지 거부할지는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역시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의 도출을 그럴듯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다.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존재적 고뇌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간달프의 조언대로 현존하는 삶의 흐름을 잠시 붙잡아 의미를 부여하려는 각자의 주체성에 주목할 때 우리의 삶은 어쩌면 조금 더 가치 있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왜 이런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 심각하게 여길 바에는 이런 삶 속에서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에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편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진 출처
- IMDb
- Netflix(화면 캡처)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드플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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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러시아군의 침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이야기!
감독:이리나 칠리크
출연: 돈바스 지역의 한 가족
시놉시스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군이 쳐들어오자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 지구는 오렌지처럼 파랗다는 영화 맨 초반에 어느 한 가족이 나오는 장면과 함께 포격 소리가 크게 들리고 폭탄이 터지는 전장 속에서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들의 삶을 보여준다. 트라우마로 남는 전쟁의 현장 속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피난을 가거나 그 도시에 남아있기도 한다. 이 영화는 가족이 등장인물로 나오면서 전쟁에 대한 참혹한 이야기를 여러 가지 씬으로 보여준다.
러시아군이 침공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 있는 이 가족은 어린아이부터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는 여학생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대학 장학생이 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목표를 이루는 장면도 나오는데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게 어머니뿐만 아니라 주위 친척들까지 입시에 성공하면 포옹을 하거나 놀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적군인 러시아군에게 맞서 싸우는 모습도 뉴스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점점 러시아에 있는 많은 미국 기업들이 떠난다고 한다. 그러나 푸틴은 자신들에게 경제 보복하려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일본,우리나라까지 천연가스를 수출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평화를 원했던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에도 기여했으며 평화를 위해 앞섰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를 망쳤다는 이야기를 하는 극우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으로 나오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다치고 피해를 입는 사례들이 들려오고 있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면서 트라우마가 일어나거나 죽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까운 느낌이 많이 들기도 한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어서 기쁜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2022-08-27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2022-08-31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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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면 골프 영화 아닌가? / 로비 영화 맞아? / 하정우 감독,주연의 "로비" / 골프 접대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로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 비슷한게 엔드크레딧 전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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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아 페레즈] 끝장리뷰 | 뮤지컬 선택 이유 | 젠더에 대하여 | 결말해석 | 세 명의 남편 ?!
[에밀리아 페레즈](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젠더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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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에밀리아 페레즈
00:45 젠더 이슈
05:09 뮤지컬 이유
07:16 별점 및 한 줄 평
07:35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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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돌스크에서 온 남자> 예고편
니콜라이는 암스테르담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포돌스크에 살고 있으며, 음악적 성공을 꿈꾸고 있지만 현실은 지역 신문사의 말단직원일 뿐이다.
갑자기 모스크바의 경찰이 그를 체포하고,
니콜라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놀이기구에 탄 것 같다.
정말 니콜라이는 경찰서에 있는 것일까?
견장을 차고 있는 이 까다로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니콜라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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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30초 예고편
서울에서 사업으로 잘나간다는 형 토오루(오다기리 죠)의 말만 믿고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온 츠요시(이케마츠 소스케)는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형 때문에 하루아침에 낯선 서울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토오루는 기발한 사업 아이템이 있다며 좌절한 츠요시를 꼬셔 강릉으로 향하고,
기차 안에서 우연히 사연이 가득해 보이는 삼 남매
솔(최희서), 봄(김예은), 정우(김민재)를 만나 동행하게 되는데…
불운만 가득했던 인생에 벌어진 우연 같은 운명!
기적이 간절할 때, 우리는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