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2-03 18:32:13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영화 <물비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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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예분’은 손녀 ‘수정’을 사고로 잃은 뒤 삶이 1년 전 그날에 멈춰버렸다.
손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매일 같이 강가에 나가는 ‘예분’ 앞에 손녀의 절친 ‘지윤’이 나타난다.
두 사람에겐 들어야 할 진실이 있고, 삼켜야 할 비밀이 있는데…
진실과 비밀 사이 깊은 슬픔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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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물결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스쳐간 자리는 그 이전과 영영 같을 수 없다. 설령 떠나간 이가 나에게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구멍이 난 유리창이어도, 깨진 곳 없는 유리창과는 같을 수 없다. 그 작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숭숭 불어와, 누군가의 빈 자리를 절감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아주 작은 순간일지언정.
하물며 이 이야기 속 예분과 지윤에게는. 손녀를 잃은 할머니 예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은 중학생 지윤. 이들은 다른 부위에 난 같은 상처를 안고, 매일 다른 물로 뛰어든다. 예분은 손녀를 삼킨 강에 금속 탐지기를 들고 나가 손녀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것을 매일 찾고, 지윤은 친구와 함께 있던 수영장에 매일 들어간다. 하나의 상실이 남긴 각자의 상처, 각자의 물결 속에서 이들은 매일 허우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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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들이 매일 뛰어드는 물 속의 축축함이 관객석까지 넘실넘실 전해진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중간중간 교차하는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서, 예분과 지윤의 시간을 순서대로 톺아볼수록 더욱 축축해진다.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현재, 그 사이 이들에게 있었을 무수한 감정들이 겹겹이 전해져서다.
#중첩되는 소리 속에서
이렇게 감정을 겹겹이 전달하는 데에는 소리가 큰 몫을 한다. 수정이 사고를 겪은 당일부터,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과 중첩되고 혼재되기 시작한다. 거센 빗소리, 경찰차 사이렌 소리, 수정을 잃은 엄마의 울음 소리...들이 어지러이 섞여들면서. 아주 거대한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쉽게 삼켜 슬픔으로 중첩시키고,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예분의 금속 탐지기 소리처럼, 때로는 진실을 찾으려 날카롭게 세운 소리가 반대로 귀를 막기도 한다.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할 만큼 했다는 말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헤매는 예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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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분에게, 지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진실을 드러내고 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깊고 진득한 자책을 덜어낼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이를 잃어버린 빈 자리를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인간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그토록 숱하게 죽은 몸을 어루만지고, 누군가의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살았던 예분이지만 정작 손녀의 죽음과 거기 어린 자기 감정들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토록 함께 뛰어들던 물 속, 그 익숙한 감각 안에서 친구를 잃은, 이어지는 상실 속에서 도저히 여유가 없는 지윤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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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도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이러한 두 사람이 부딪쳐 파장이 이는 자리마다 삶과 죽음이 물비늘처럼 몸을 뒤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마주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찾고자 혹은 감추고자 한 것이 정말 진실이었을까? 진짜 필요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을까? 가까워지고 다가서는 두 사람의 장면들을 통해, 두 사람의 거리 사이에서, 영화는 그 답을 조심스럽게 피워낸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뭐부터 버려야 돼요?" 묻는 지윤에게 "남길 것부터 정리해야지." 말하는 예분의 차분한 어투다. 그렇게 죽음의 대처법을 가르치고서는 정작 지윤을 데려가는 곳이 병원과 식당으로, 죽음에 앞서 삶부터 가르친다는 점 또한.
죽음과 삶은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맞붙어 있다. 삶은 애초에 그렇게, 무수한 이들의 삶과 죽음이 조각조각 물비늘처럼 맞붙어 강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하나의 물비늘, 그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지도. 그러나 설령 이 하나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순간이라 해도, 강은 그런 식의 물비늘이 모여 반짝반짝 흘러 간다.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뒤채는 만남과 헤어짐, 이해와 오해, 그 틈바구니 삶이라는 곳에 우리 그저 소리 없이 나란히 눕는다면. 다른 베개, 다른 이불, 다른 부위의 같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그대로, 그저 같은 요 위에 나란히 눕는다면. 그때 비로소 이 마음에서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사실, 모든 축축한 것을 마르게 만드는 햇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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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12월 6일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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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어질 결심(2021)> 리뷰
이름은 언제나 존재 다음에 온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있어 마음이란 최초에 발생하는 무엇이고, 행위는 눈 먼 채 마음을 따라가며, 이성은 한참 후 자신의 행동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명명한다(설령 그것이 그릇된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 영화, 제목이 이상하다. ‘헤어질 결심’이라니. 어떠한 감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저 갈라서면 될 일인데, 물리적으로 멀어진 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이 영화는 헤어지는 행위에조차 ‘결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행동이 진행되는 순서를 역행하겠다는 선언 이면에 가득한 건 망설임이다. 그러하니 영화 속 주인공의 이별이 쉬울 리가 없다.
<헤어질 결심>을 바라보는 데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쟝센에 집중할 수도 있을 테고, 그의 전작에서부터 이번 작품에서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모호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터다.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만이 담아낼 수 있는 현상을 파고들 수도 있을 것이며 히치콕의 영화를 끌어오는 방법도, 탕웨이와 박해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집중해 보는 방법 또한 있겠다. 하지만 난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의 관계에 집중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영화로 찾아온 박찬욱 감독이 꺼내든 ‘멜로’라는 장르를 아끼고 싶진 않으니까.
서래와 해준
<헤어질 결심>은 담당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남녀에게서 출발한다. 특별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는두 사람이 품은 믿음으로 인해 레이어가 여럿 추가되며 현실만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 누가 뭐라 해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지닌 사람의 품위. 서래와 해준에겐 환경이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서래는 어느 여름 해골 같은 몰골로 불법 입국한 중국인으로, 한국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삶에 풍파가 더해지는 데에 크게 일조한 사람은 서래의 한국인 남편 기도수다. 이 남자는 서래를 학대하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의 몸에 이니셜(KDS)을 새겨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기 그지없어 그를 떠날 수 없는 신세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래는 간병 업체에서 ‘에이스’로 통하고, 자신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동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며, 무엇보다도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서래가 보여주는 특유의 기품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독립군 참전자인 송서래의 외조부가 일러주었다는 가문의 땅, 호미산으로부터.
해준 역시 서래와 비슷하다. 고지식할만큼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는 그는 어떤 피의자를 만날 때에도 무죄추정원칙을 고수한다. 미결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사건에 관련된 사소한 숫자마저 머릿속에 오래오래 보관하는 이 남자는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정중한 형사로, 서래의 말마따나 ‘현대인’ 치고 품위가 넘친다. 이러한 평가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효한데, 후배 수완(고경표)은 다른 형사들과 다르게 끝까지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해준을 존경해 부산으로 전근을 왔을 정도이다. 그가 불의 앞에서 늘 달려나갈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원칙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다.
사랑과 미련과 그 밖의 모든 것들
멜로 영화이니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먼저 해 보자. 두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졌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 대해, 감독과 배우와 관객의 해석이 모두 다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해준의 말마따나 서로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서서히 물들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단서조차 놓치지 않는 형사 해준이 ‘중국인이라 한국어가 서툰’ 서래의 의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더욱 애써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꾸만 시선을 주어야만 했던 정황 속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한 걸음 뒤의 시선과 녹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몇 박자씩 늦게 도착하곤 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없다. 늘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없으니.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사랑에 빠진 자신만 남는다는 그 단일한 결과만 제외한다면.
그런데 신기한 건, 둘 사이에서 주도권이 서래에게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계층의 최약자인 서래 말이다. 서래는 당장의 생존이 절실한 사람이었고, 덕택에 그는 사랑을 온전히 감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이는 서래보다 해준이 먼저 사랑을 자각한 계기가 됐다. 사랑 앞에서는 형사와 피의자라는 권력 관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기실, 형사인 해준은 본질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후 뒤쫓아 가는 쪽이지,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겐 대단히 비겁한 측면도 있다. 아내 정안(이정현)에게 기도수 사건을 다르게 바꿔 전달하는 것처럼. 사실은 일찌감치 끝난 관계에 무의미한 인공호흡기만 달 뿐 해준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해파리처럼 모든 일을 밀어낼 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떠맡는다. 공평하게 모든 것을 신경쓰고자 한다는 건, 사실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모른다는 듯.
해준이 이런 남자라는 사실은 서래에게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서래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에게 묻는다. 자신은 왜 당신 같이 품위있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지에 대해. 답은 자명하다. 그에겐 양지바른 한국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미산은 그의 핏줄이 가진 땅이라는데 서래는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다. 정당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서래는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외국인이자, 저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면 무기징역수가 되는 젊은 여성이다. 전문직에 해당하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하루하루 독거노인을 돌보는 불안정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제 뜻을 명확히 전달할 길이 없다. 서래는 상황을 깨뜨리고자, 운명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나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남편에겐 가축취급을 당하는 트로피 와이프로, 거듭하여.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 앞에서 변화한다.
회피하던 해준은 행동한다. 서래가 부탁하지 않아도 요리하고, 중국어를 몰래 공부하고, 우산을 씌워주며, 무엇보다도 서래를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감옥생활을 각오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홍산오 사건처럼, 해준은 서래 앞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원칙을 깨뜨린다. 해준 자신이 죽음보다도 더 치욕적으로 여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전했느냐고 따지는 해준의 말은 공허하다. 사건 수사를 위한 결정적 증거를 깊은 바다에 버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명백한 고백이었으니까.
반면 해준을 만나기 위해 이포에 간 서래는 그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다. 부산에서처럼 사건의 주동자가 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해준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에게 닿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스마트 워치에 자신의 말을 녹음한다. 그런데 서래는 먼 발치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원칙을 잃어 더 이상 올곧게 달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서래는 해준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녹음할 수 없는 환경에서 중국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한다. 모든 사건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깊은 물 아래에 묻음으로써 사건을 무마한다. 서래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입증할 수 없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서래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은 서래에게 외조부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중국에서의 서래를 기억하지 못했고, 기도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 않았나. 그렇기에 그는 거침없이 해변에 스스로를 가두는, 무자비한 선택을 한다.
서래의 선택으로 인해 해준이라는 인간에겐 그저 긴긴 미련만이 남는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 남자는 앞으로 영원히 서래를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서래와 헤어진 후 셈했던 402일. 그가 없어 편히 잠들지 못했던 402일은 이제 수도없이 많아질 것이다.
어지러이 얽힌 산과 바다
자, 이젠 시놉시스에서 눈을 돌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상징을 이야기 해 보자. 영화에선 자연물인 산과 바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을지로에서 태어났으면서 바다가 좋다고 하는 해준, 산을 가슴에 품고 바다를 건너온, 저가 돌보는 노인들에게 산해경을 읽어주는 서래. 두 사람에게 부여된 속성은 정안의 원전과 맞지 않는 힘이다.
서래와 해준 두 사람은 모두 산보다 바다를 선택하고, 공자의 말(智者樂水 仁者樂山)을 인용하며 스스로를 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논어는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나는 해준이 산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다에 이끌리는 산이었고, 붕괴될지언정 침몰하지 않는 남자다.
다만 이러한 두 사람의 속성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래가 읽는 산해경 신화 속 이정표가 무의미하듯, 산과 바다의 경계는 영화 속에서 자주 흐려진다. 마치 산과 바다의 뿌리가 같기라도 한 것 마냥. 뚜렷한 상징으로 환원되는 장면은 차라리 해준의 집에서 서래가 샛노란 옷을 입고 있었던 씬과, 호미산에서 서래가 산에서 광원 자체가 된다는 점이지 않을까. 서래에게 해준의 존재가 잠시나마 구원이었듯, 해준의 삶에 있어 서래는 단 한 순간일지라도 분명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서래가 바다에 잠긴다. 모래산이 무너지고, 바다의 깊은 구멍을 메운다. 서래의 소망은 충족되었다. 그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된다. 해준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 없는 바다, 안개만이 자욱한 해변을 영원히 걸어야 한다. 헤매는 자는 목소리를 높여 운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붕괴 이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서래가 바랐던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살아줘요, 당신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 언제나 나이길 바라요.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후기를 적었지만, <헤어질 결심>엔 현대 한국인이기에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이 영화가 오로지 2022년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성'이라는 시간적 속성이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영화를 개봉한 해에, 이 나라에서 감상할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이토록 끊임없이 지각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사랑을 매끄럽게 스크린에 담아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획득하기 전 상실되는 사랑이란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푸른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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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올드 오크 | 노장이 마지막으로 건네는 당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영국 북동쪽 폐광촌에 집단 이주를 한다. 마을 주민들은 난민을 전혀 환영하지 않는다. 탄광이 문을 닫은 후 경제 침체가 이어지고, 빈 집이 늘어나고, 부동산이 헐값에 팔려 나가며 분위기가 어둡기 때문. 자연히 난민과 주민 사이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데이브 터너)는 사진작가를 꿈꾸는 '야라'(에블라 마리)를 만난다. TJ는 야라의 고장 난 카메라를 고쳐주고, 야라는 TJ의 슬픔을 위로하면서 우정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올드 오크’ 앞 길거리에는 어느덧 훈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켄 로치 그 자체인 은퇴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그가 거장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성과부터 압도적이다. 칸 영화제에만 14회 초청받았고, 황금종려상 2번과 심사위원상 3번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철학은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 미학적으로 독특하고 새로운 연출을 선보이기보다는 정치적 이슈에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지적도 때때로 받기 때문.
1997년 '키노' 기사만 봐도 그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싸우는 작가주의에 대하여' 인터뷰에서 그는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 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과거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덧붙이기도 했다.
은퇴작 <나의 올드 오크>에서도 켄 로치는 자기 신념을 또 한 번 스크린 위에 그려냈다. 잉글랜드 북부 폐광촌 주민의 아픔과 이민 및 난민 문제를 함께 다룬다. 실패한 과거를 반추해 새 미래를 만들자고 손을 내민다. 켄 로치의 이 제안은 거부하기 어렵다. 영화의 휴머니즘이 다소 나이브하고, 감상적으로 보이는데도 불구하거. 러닝타임 113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마법을 켄 로치가 부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라의 사진이 달라진 이유
<나의 올드 오크>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에서 잉글랜드까지 건너온 소녀 '야라'. 사진작가를 꿈꾸는 야라는 잉글랜드의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오프닝 시퀀스는 그녀의 사진을 하나씩 보여주고, 배우들의 대사와 주변 소음을 사진에 더했다. 카메라에 담긴 거리와 사람은 적대적이고, 배타적이다. 왜 허락 없이 사진을 찍냐고 항의하며 그녀의 카메라를 빼앗아 렌즈를 부술 정도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사진은 정반대다. 동네 주민들은 한 데 모여 그간 야라가 찍은 사진을 같이 감상한다. 사진 속 사람들의 모습도 판이하다. 야라를 경계하던 눈길은 없다. 체육대회에서도, 미용실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고, 미소 짓는다. 그녀의 사진을 대하는 태도도 따뜻하고 친절하다. 멋진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말할 정도다. 야라는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나 다름없다.
이런 변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리는 없는 법. 영화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상이한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일은 TJ의 몫이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왜 어두웠는지, 왜 길거리에서 적대적이었는지, 또 그들의 마음이 바뀐 계기는 뭔지... TJ는 목격자, 증인, 당사자로서 그들의 입장을 담담히 대변한다. 그 중심에는 영국 북부의 가슴 아픈 현대사가 위치한다.
아픈 과거가 낳은 현재의 갈등
야라가 도착한 마을은 음울하다. 탄광이 폐쇄된 이후로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는 마을. 마을 집값은 나날이 떨어지고, 외국계 기업이 부동산을 싹쓸이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커진다. 시리아 난민에게는 정착을 도와줄 기부금과 물품이 전달되지만, 가난한 마을 어린이들에게는 아무런 지원도 없다. 주민들은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킨 TJ의 술집 '올드 오크'에서 회포를 풀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러나 난민이 점점 늘어나자 올드 오크도 선택의 기로에 선다. TJ의 친구 찰리는 술집 안쪽 빈 공간을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과거 광부들의 파업을 기록한 사진만 걸린 채 안 쓰이고 있으니, 주민들이 난민들을 성토하고 대책을 세우는 공론장으로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한편 TJ와 새로 친구가 도니 야라도 같은 공간을 쓸 수 있냐고 물어온다. 주민과 난민 가리지 않고 함께 밥을 먹으며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TJ는 누구의 편도 쉽게 들지 못한다. 야라와 난민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시 찰리와 주민들의 아픈 과거를 마음속 깊이 공유하기 때문. 한 때 삶의 의욕을 잃었던 TJ는 우연히 자기 목숨을 구해준 강아지에게 '마라(Marra)'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Marra'는 광부들이 사용하던,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뜻하는 단어다. 이처럼 강아지 이름만 봐도 TJ가 광부였던 아버지와 마을의 과거를 못 떠나보냈음을 알 수 있다.
증오를 빌려 희망을 전하다
하지만 마라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TJ는 달라진다. 마라는 시리아 난민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에게 공격당해 죽었다. 마라를 잃어 슬픔에 빠진 그의 옆에는 야라와 그녀의 어머니가 있다. 그들은 J를 진심으로 위로한다. 야라는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공유한다. TJ가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주며 그녀의 꿈을 응원했듯이, 야라도 TJ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에 힘입어 TJ는 술집 안쪽 공간을 주민과 난민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곳에서 과거 광부들이 파업할 때처럼 무료로 음식을 만들어 나누고, 추억을 쌓는다. 그렇게 시리아 난민들은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준 TJ의 선의와 올드 오크의 공간을 개방하자던 야라의 제안이 바꾼 풍경이다. 이처럼 <나의 올드 오크>는 사회적 이슈를 환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솟아나는 인간애에 주목한다.
<나의 올드 오크>가 난민 증오의 양상을 생생히 표현하기에 TJ의 변화와 선택은 더 감동적이다. 영화는 잉글랜드 북부 사람들의 설움이 증오로 이어지는 과정을 비춘다. 찰리가 대표적이다. 찰리는 TJ의 절친이다. 그의 약혼식에서 TJ가 축하 연설을 했을 정도다. 그랬던 그가 올드 오크를 테러한다. 자신과 지역 주민이 아닌 난민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에 더해 온라인상에서도 TJ에 대한 비난이 이어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TJ의 일침은 유달리 귀에 잘 꽂힌다. 그는 찰리에게 말한다.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 약자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이 대사에서는 아픔을 증오로 배설하는 대신, 포용과 배려로 승화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켄 로치는 마지막까지 시민 공동체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뜻하거나 감상적이거나
다만 비판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 소재의 심각성에 비해 영화의 태도가 다소 편의적인 인상이 남기 때문. <나의 올드 오크>는 일견 중립적이다. 지역 주민들의 소외감을 먼저 보여준 뒤, 그 반대편에서 난민에 대한 경계심과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을 대조한다.
그런데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은 다소 감상적이다. 극 중 주민들의 반발은 광산이 닫힌 이후 마을과 주민을 도외시한 영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한 데 뭉쳐서 튀어나오는 분노에 가깝다. 그런데 영화는 그들의 절규를 전혀 다른 윤리적, 도덕적 차원으로 끌어들이며 논점을 흐리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영화는 야라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녀를 위로하는 사람들과 찰리와 뜻을 같이하는 주민을 대조한다. 이에 더해 영국과 유럽 내에서 발생하는 난민 범죄는 일절 보여주지 않는 반면, 찰리와 친구들의 범죄는 자세히 묘사한다. 자연히 전자는 선, 후자는 악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주민들의 분노 역시 막연한 증오와 혐오로 치환돼 인식되기 쉽다.
즉, <나의 올드 오크>는 사회적 갈등의 본질을 더 치열하게 추적하는 대신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한다. 또 감정적으로 원만하게, 봉합하는 데서 그친다. 그렇기에 인본주의적이고 따뜻한 결말도 시각에 따라서는 교묘하게 논의의 장을 뒤트는 시도처럼 보일 수 있다.
지극히 품격 있는 퇴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의 비범한 필모그래피의 끝을 장식하기에는 이보다 적절한 마무리를 떠올리기 어렵기도 하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고, 명성에 비해 아쉬운 지점도 존재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 때문.
특히 "당신이 민중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현재를 재조정할 수 있고 현재를 조정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신념을 끝까지 견지하는 노장의 용기와 미덕을 마지막으로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이기에 <나의 올드 오크>는 분명 특별하다.
Acceptable 무난함
거장의 따뜻한 희망과 노장의 마지막 바람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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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판 포켓몬스터: 정글의 아이, 코코 / 劇場版ポケットモンスター ココ, 2020
원래, 극장에서 챙겨보던 시리즈는 아니었습니다.
으레, 시리즈라는 것도 1편 다음으로 2편, 3편 그리고 숫자 몇이 붙을지 모를 만큼 장기화가 된다면 떠나기 마련이죠.
그렇게, 떠났다가 '1세대 무인편'을 다시 극장판으로 만든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물론, <너로 정했다!>는 기대만큼의 완성도는 아니었지만 큰 스크린으로 보는 '오프닝 테마'는 최고였고 이는 509,555명이라는 국내 최다 관객수로 보여주었죠.
이후 <모두의 이야기>는 아쉬웠던 완성도를 크게 보완했으며, <뮤츠의 역습>을 3D로 "리메이크" 하는 등 저를 비롯한 올드팬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번 <정글의 아이, 코코>는 첫 시험대에 올라선 영화로 '과연,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을지?' -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포켓몬들이 살아가고 있는 숲에서 "자루도"들은 무리를 지으며 소위, 군림하고 있는데요.
그런 가운데, 무리에서 떨어진 한 "자루도"는 강가에 버려진 인간 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무리는 "자루도"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법도 때문에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됩니다.
그렇게, 아이의 이름은 "코코"가 되었지만 커가면서 "자루도"와는 다르다는 혼란함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지우"와 "피카츄"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떼는데...내가 알던 포켓몬이 맞나?
1. 분명히, 낯선데 익숙하단 말이야.
앞서 이번 <정글의 아이, 코코>를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오리지널 작품으로 소개했습니다.
이런 이유에는 포스터에도 있듯이 "자루도"라는 새로운 포켓몬을 내세웠고 "코코"라는 오리지널 캐릭터의 등장까지 이전 극장판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니까요.
그럼에도, <정글의 아이, 코코>는 엄연하게 이전 작품들과 동일하게 "리부트"에 속해있는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레비"의 존재는 저와 같은 올드팬들에게는 게임에서 접했던 "너도밤나무 숲"을 떠오르게 만드니 이만해도 충분했으니까요.오리지널 작품이야? 아니, 그럼 리부트야?
그럼에도, "세레비"가 전면으로 나서는 극장판이 아니기에 올드팬들에게는 쉬이 만족감을 일으키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부제에도 쓰여있는 <정글의 아이, 코코>, 이 캐릭터의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익숙한 작품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앞에서 살펴본 줄거리만 보더라도, 쉬이 예상하실 그 작품 바로 <타잔>입니다.
극에서 "자루도"에게서 길러진 "코코"가 숲에서 포켓몬들과 살아가는 장면은 "타잔"이 고릴라 무리에게서 길러지고 정글에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이후 숲을 파괴하는 인간 무리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니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2. 디테일과 클리셰
그렇기에 <정글의 아이, 코코>는 이를 알고 있는 '저와 같은 올드팬들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큰 고민을 했을 겁니다.
아이들이야, <타잔>을 모르겠지만 저희는 <타잔>을 "디즈니"로 그것도 비디오와 컴퓨터 게임으로 지겹도록 접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정글의 아이, 코코>의 디테일은 흥미롭습니다.
극 중 "코코"가 "자루도"에게서 길러진 설정이라 두 캐릭터들의 대화를 사람들의 언어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를 "지우"와 "피카츄"의 시점에서는 해당 "포켓몬 언어"로 보여줘 보다 이들의 대화, 그리고 이야기에 집중케합니다.로켓단의 나옹은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극에서 이들을 유사 부모의 관계로 시작합니다.
물론, <타잔>에서는 아이를 잃은 에피소드로 "타잔"을 거두었던 것과 다르게 그 동기는 우연성 짙게 시작하나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극 중 "코코"의 팔뚝은 "자루도"처럼 덩굴을 메고서 나무에 걸어 이동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자루도"처럼 될 수 없다는 것에 혼란을 겪고 "코코"는 절망을 느끼는데요.
이에 "자루도"는 '너는 자루도!'임을 끊임없이 말하나 이제는 이를 숨길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낍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비슷한 "지우"의 등장은 포켓몬의 말이 아닌 사람의 언어까지 사용하게 되는 "코코"의 변화는 이 관계의 위기를 보여줘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니 시작은 미약했을지라도 끝은 창대해지고 있는 것이죠.3. 설명이 된 상태라면, 플래시백은 촉매가 된다.
그리고 예고했듯이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무리들의 등장하며, 영화는 어느덧 후반부를 맞이합니다.
이에 보여주는 포켓몬 특유의 액션신도 좋지만, 역시 빛나는 건 "코코"와 "자루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이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어 이들의 감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어 진부하게 느껴질법한 눈물 후 부활을 멋지게 보여주는데요.
보통 "플래시백"을 설명보다는 감정에 읍소한다고 말했지만, 이미 앞에서 이들의 관계를 쭉 보았기에 "플래시백"의 활용은 오히려, 촉매가 되어 빠르게 나타날 수 있던 것이죠.후반부는 플래시백의 연속?
영화 <정글의 아이, 코코>는 앞에서 보여준 것과 다르게 후반부에는 "플래시백"을 연속적으로 비춰줍니다.
앞서 말했듯이 "코코"와 "자루도"의 이야기처럼 설명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다면, 상관없으나 다른 캐릭터에 이를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는데요.
바로, 악당에 위치한 "제드 박사"가 그러한데 이미 영화에서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무리들의 리더 격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이만해도 충분하나,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쳐내 "코코"와의 대결 동기를 짧은 시간으로 연결시키는데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풀어내자니 따라가기가 힘들더군요.
그래도, <정글의 아이, 코코>는 이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작품의 평가 '코코를 꼭꼭 보세요.'를 다시 꺼내게 만들 만큼 재밌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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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하고 화끈함,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하다!
2021년에는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영화들까지 대부분 개봉하고, 신작들까지 겹쳐져 정말 볼 영화들이 많았던 해라 생각한다. 필자가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한국의 핵심 영화제에 참석해 여러 영화를 보았음에도 아직 못 본 영화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2021년 최고의 영화는 바로 라드 주드 감독의 "배드 럭 뱅잉"이라 단언코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시놉시스만 보고서는 포르노와 관련된 주제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루마니아의 근대사, 인종, 계급 등 여러 사회의 문제들을 신랄하게 다뤄낸다. 1부는 주인공이 작중 상황에 어떻게 처하게 되었는지 담담하게, 마치 페이크 다큐 처럼 담아내고, 2부는 통칭 기분나쁜 그림 사전으로, 정말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풍자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엘리트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는 어디서 무시한 여자가 나같은 지식인에게 대들냐며 소리지르는 직원을 보여주고, 두개골을 설명할때는 흑인 차별로 이용된 골상학의 역사에 대해 보여준다. 3부는 학부모들과의 토론을 보여주고, 어떻게 끝날지 3가지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 세가지 엔딩은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통쾌함을 선사하는 엔딩도 있다. 이러한 발칙하고 화끈하고 적나라한 연출들은 정말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정말 만족스러웠지만 한국에서는 개봉 가능성은 없는게 현실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한 수입사에서 영화를 수입해왔다는 사실이 들려 곧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다만 선정성에 후하다는 일본도 일명 자가검열판으로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개봉할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본 영화의 자가검열판은 감독 본인이 직접 일반 극장에도 틀 수 있게 검열한거라 하는데, 과연 검열을 거치고도 신랄한 풍자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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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Spider-Man: No Way Home, 2021)
개봉일 : 2021.12.15.(한국 기준)
감독 : 존 왓츠
출연 : 톰 홀랜드, 젠데이아 콜먼,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파브로, 제이콥 배덜런, 마리사 토메이, 알프리드 몰리나
쿠키 영상 : 2개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처음 등장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개봉 2년이 지난 2021년 12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과연 올해 안에 볼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오래 기다린 만큼 팬들의 기대감도 컸기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참 많았다. 그 소문들을 믿거나 너무 기대하진 않으려고 했다.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할 이유들이 많아지니까.
처음 마블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는 소식을 들릴 때쯤,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푹 담가져 있었다. 큰 눈을 가진 앤드류 가필드의 인간미 넘치는 스파이더맨이 좋았고, 비록 악역이었지만 치명적이었던 데인 드한의 연기가 좋았다. 거기에 삼부작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픈 손가락처럼 더 애착이 갔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앤드류를 뒤로하고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이라니. 기대도 됐지만 살짝 못 미덥기도 했다. “과연 어떤 스파이더맨이 나오는지 보자-”싶었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톰 홀랜드는 자신이 가진 힘을 힘껏 뿜어내며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만들어갔고, 관객들은 자연히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3대 스파이더맨이 된 톰은 ‘아기 거미’와 ‘톰스파’라는 애칭까지 꿰차며 당당히 어벤져스에 합류했다. 특히 인피니티 워에서는 스파이더맨 때문에 눈물 줄줄 흘리던 관객들도 꽤 많았으니.. 스파이더맨으로서 그의 존재감이 꽤나 톡톡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성장
토니 스타크가 떠나기 전까지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의 이미지는 완전한 히어로라기보단 막내와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토니에게 수트를 달라고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토니와의 만남에 신나 셀프 카메라를 찍는다거나, 짝사랑하는 MJ 앞에서 어버버 말을 흐린다거나.. 등등. 히어로 캐릭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어렸던 스파이더맨은 항상 조금씩 어설펐다. 나쁜 뜻은 아니라 딱 그 나이대의 감성이 풍부한, 서툰 소년 같았다는 말이다. (역대 스파이더맨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대인 것도 한몫했다.)
<엔드게임>이후 개봉한 <파 프롬 홈>에서는 멘토였던 토니를 잃은 피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토니의 뜻을 이을 수 있는 ‘히어로’로서의 길을 선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 개봉한 <노웨이 홈>에서는 스파이더맨의 눈앞에 닥친 위협 속에서,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라는 두 개의 인생을 두고 갈등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모두를 돕는 일이다.” 사실 이 두 마디 말이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살짝 잊어가던 참이었다. 역대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비해 어벤져스 시리즈의 스케일이 범우주적으로 넓어지기도 했고, 상대하는 악당들과 스파이더맨의 슈트 능력치 또한 크게 상승했기에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내가 처음 접했던 스파이더맨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또한 매력적이었고, 가끔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느낌보다는 ‘우주를 구한 히어로’ 스파이더맨의 느낌이 강했다.
서서히 새로운 스파이더맨에 익숙해지고 있던 찰나, <노 웨이홈>은 피터 파커를 다시 피터 파커답게 돌려놓는다.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했던 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사람의 선함을 믿고, 이웃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소박하고 친절한 옆집 청년 같은 그 스파이더맨처럼 말이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
<노 웨이 홈>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의 마무리로서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 스파이더맨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했던 시절부터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와 오랜 시간을 쌓아왔기에 세 번째 마무리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꾸준히 이야기를 진행해온 프랜차이즈 영화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준 캐릭터가 가진 가장 큰 메리트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시간과 정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하다.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울고 웃었던 시간을 이렇게 한 번에 다시 선물 받다니. 이 영화를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적인 감정을 모두 제외하고 본다면 영화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많아 일회성으로 소모된듯한 빌런의 존재와 가장 임팩트 있어야 할 장면이 다소 심심하게 그려졌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지션이 살짝 아쉬웠다는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그게 대수인가!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실망할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글의 상단에선 참겠다. 영화를 보기 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 어떤 스포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감상하라.”정도가 있겠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시놉시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드디어 열린 멀티버스
앞선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어벤져스 시리즈>를 거치며 꾸준히 언급됐던 ‘멀티버스’. 그 멀티버스가 드디어 <노 웨이 홈>에서 열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탈을 통해서 말이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란 사실이 온 세상에 퍼지고 피터는 스파이더맨인 자신이 소중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자책한다.
MJ와 네드의 대학 입시가 좌절되고 사람들은 피터의 집에 벽돌을 던진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하던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부탁한다. 하지만 피터의 의도치 않은 방해로 인해 주문이 흩어지고 그 결과 평행 우주에서 ‘피터 파커’를 아는 온갖 인물들이 몰려오게 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그린 고블린과 닥터 옥타비우스, 샌드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일렉트로와 리자드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대 스파이더맨 두 명까지. 빌런들이 우르르 등장할 때부터 이 둘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실제로 앤드류 가필드가 등장하는 순간 “내가 이걸 보려고 이 시간들을 견뎠나 보다..”싶으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나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이걸 보려고 버텼나 보다.
삼 스파이더맨의 등장
(이하 톰 홀랜드 = 톰스파, 토비 맥과이어 = 샘스파, 앤드류 가필드 = 어스파로 표기)
메타버스를 통해 만난 스파이더맨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심장이 하늘로 솟았다 곤두박질치듯 강하게 뛰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 걸까. 벅차오른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영화에 가득한 이전작들의 오마쥬 장면들과 고민하고 있는 톰스파에게 건네는 선배 스파이더맨들의 위로까지.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같은 고민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결국엔 성장하는 스파이더맨들
‘두 개의 삶’은 역대 스파이더맨 모두가 공통으로 고민했던 문제다.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 or 평범한 피터 파커로서의 삶. 스파이더맨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고 피터 파커로 산다면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거기에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선한 히어로이기 전에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까지 끄집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는 피터와 끝까지 피터를 잡아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가장 큰 감동 포인트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한 사람만 노력해도 세상은 달라진다.” 그리고 피터는 누구보다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응원까지. 피터는 사랑하는 이들의 말을 양분 삼아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능력과 선한 본성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샘스파는 벤 삼촌과 친구 해리를 잃고 슬픔에 빠졌다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어스파는 아버지와 거미에 대해 얽힌 비밀과 두 개의 삶 중에서 고민을 반복하다 선택을 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그웬을 잃게 된다. 포탈을 타고 다시 등장한 그는 여전히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MJ와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톰스파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다소 씁쓸하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한 장면처럼 먼 바닥으로 추락하는 MJ를 구해낸 어스파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죄책감에서 한걸음 벗어난다.
톰스파는 빌런들을 고칠 수 있다며, 인간의 선함을 믿다 메이 큰엄마를 잃는다. 선함을 믿고 모두를 도와야 한다던 메이의 말을 따르며 많은 이들을 도와온 피터의 믿음이 깨지고 그는 폭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앞서 같은 아픔을 겪어본 선배 스파이더맨들은 톰스파의 분노를 막고, 마음을 되돌려놓는다.
도덕성과 선함은 약점이 아니다
피터가 여러 평행 우주에서 온 빌런들을 되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고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주문을 강행하려 하지만 피터는 달랐다. 피터는 메이 큰엄마의 말을 따라 빌런들을 고쳐놓기로 결심한다.
피터는 모두가 믿지 않고, 모두가 안될 거라 말한 일을 해낸다. 정확히 말하면 세 명의 피터 파커가. “너의 약점은 도덕성”이라고 비웃던 빌런을 고치고, 미스테리우스가 옳았다며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는 세상을 한 번 더 구한다. 스파이더맨은 남들이 약점이라 생각하는 ‘선함’을 가슴 중심에 품고 오늘도 묵묵히 누군가를 구한다.
다시 처음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몰려오는 평행 우주의 존재들을 보며 피터는 큰 결심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멋진 슈트와 비록 익명이지만 우주를 구한 스파이더맨이라는 명성, 집과 친구들. 모든 걸 포기한 피터는 소중한 친구들이 남긴 흔적을 들고 작은 방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네드와 조립했던 레고 캐릭터와 MJ가 건넨 커피. 그리고 책상에 널브러진 천 조각들과 새로운 스파이더맨 슈트.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스파이더맨이 해야 할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보인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렇게 자연스레 스파이더맨이 어벤져스의 세계관에서 퇴장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발로 뛰고 구르며 다시 어벤져스의 스파이더맨이 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3편을 추가 계약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고, 톰 홀랜드의 말을 보다 보면 그의 피터 파커를 보내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노웨이홈>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적절한 쉼표로 기억될 것이고, 이렇게 끝나게 된다면 아름다운 마침표로 기억될 것이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는 어째 항상 짠하고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초월적 힘을 가진 히어로라기보단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이고 친절한 이웃의 느낌이 더 강해서 그런 걸까? 처음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접한 지 10년이 더 지났다. 나의 첫 번째 히어로 스파이더맨, 그와 쌓아온 시간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이 시리즈가 어떻게 될진 몰라도, 난 이 영화를 끊임없이 찾고, 또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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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이 우리에게 부른다
8번째 지브리 영화는 <모모노케 히메>다. 8번째까지 보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얼추 지브리 영화들의 특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주체적인 여성상을 통해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를 힘차게 이끄고, 바람과 풀, 하늘 등과 같이 자연주의 모습을 지브리 특유의 따뜻한 색채와 편안한 OST로 꾸며 세월이 지나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연출을 한다. 게다가 몇몇 작품은 단순히 자연을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생태주의 관점으로 자연에 대한 감사함과 인간의 욕심으로 생긴 잘못을 독창적이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생태주의 관점과 인본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넣어 현대에 일어나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창의 있게 표현한 작품은 <모모노케 히메>라고 생각한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모모노케 히메> 네이버 스틸컷
생태주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필자는 <모모노케 히메>가 인간과 자연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싸움을 독창적이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저지른 무분별한 자연 훼손으로 피해받는 숲의 수호신들이 더 이상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인간들과 싸우는 내용에서 에보시네 마을은 사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제철 작업을 하는 마을이기에 더더욱 높은 열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왕의 명령으로 숲을 수호하는 사슴 신의 목을 베기 위해 각 마을의 사냥꾼들과 병사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근대 사회에 산업 혁명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했던 인간의 만행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만행을 저항하는 자연의 모습도 흥미롭게 연출한다. 모로 일족이라는 거대한 흰 들개 무리와 대장 옥코토누시가 이끄는 멧돼지 집단이 인간과 전투를 펼치는데 마치 오늘날 자연 훼손으로 먹이가 없어진 서식지에서 마을 인가로 내려오는 야생 멧돼지나 들개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런 두 집단의 갈등 속에서도 중립자가 있으니 바로 아시타카다. 인간이 저지르는 자연 훼손에 대한 잘못을 따지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생각하는 인물로 후반에 옥코토누시 집단과 에보시 마을의 전투에서 아시타카는 양측을 모두 도와주고, 에보시가 끝내 자른 사슴 신의 잘린 목을 용서를 구하며 다시 사슴 신에게 바치는 모습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가쁜 노력들을 보여준다. 아시타카가 이런 행동을 보여주는 이유는 처음 나고신이 재앙 신으로 돼서 마을에 피해를 입을까 봐 어쩔 수 없이 수호신을 죽여야만 했던 자신의 잘못을 치르기 위한 회개일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산을 지켜야 하기 위한 행동일 수 있다.
죽음과 태도
<모모노케 히메>는 죽음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아시타카가 활과 칼로 적의 머리와 팔이 떨어져 나가는 걸 서슴없이 보여주고, 숲의 수호신인 사슴 신마저 생명을 불어넣고 앗아갈 수도 있다는 설정을 보면 생명의 순환이라는 고리에서 죽음은 당연히 다가올 수 있는 절대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란 걸 드러내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나오는 건 역시 인간의 모습이다. 특히 에보시 마을의 지도자 에보시가 그렇다. 자연의 입장에선 자연을 훼손하고, 무기와 화약으로 계속해서 공격을 해오는 일종의 테러집단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에보시 마을 주민의 입장에서는 사철을 녹여 철을 만들며 여성들까지도 일자리를 만들어준 은인이자 마을의 현자와 다름없는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 때문에 두 집단의 중립자인 아시타카는 에보시를 죽이는 거보단 에보시를 챙기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에보시가 저지른 잘못이 있기 때문에 목이 잘린 사슴 신의 폭주 속에서 목이 잘린 모로가 최후의 일격으로 그녀의 팔을 앗아가는 공격을 한다. 죄에 대한 벌을 내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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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7월 4주 신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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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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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저씨 명대사 모음
- BGM
Disappeared - With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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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킬링 로맨스> 메인 예고편
YESSSS! 스껄하고 힙한 그 영화! 예고편의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올 그 이름도 '죽여주는' [킬링 로맨스]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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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완벽한 축사를 준비하는 방법> 메인 예고편
PM 5:24 | 연애 거리두기 38일째, 소니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PM 6:56 | 소니아가 문자를 확인했다.
PM 8:07 | 소니아의 답장은 여전히 없는데 눈치 없는 누나와 예비 매형이 내게 결혼식 축사를 부탁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축사를 망치고 모두의 원망을 듣는 나의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아 두렵다.
그나저나 소니아는 왜 문자 답장이 없을까?
연애가 복잡한 나!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운 너?
관계가 서툰 우리 모두를 위한 공감 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