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2-08 16:57:51
2023 크리스마스 영화 편성표 미리보기
다들 준비됬는가~? 영화 하루종일 볼 준비 말일세.....
사실 에디터가 크리스마스날 하루종일 영화보고싶어서 준비한 편성표...같이보면 좋고 혼자보면 더 좋은 크리스마스 특집 TV 편성표 가지고왔어요~! 미리 저장해 놓고 다가올때 열어보아요!
Relative contents
-
-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킹덤 : 아신전
줄거리
조선을 뒤흔든 좀비 사태, 그 시작에는 아신이 있었다!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
숨은 의미 찾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해석이니 원치 않는 분들은 영화 감상 후 읽어주세요*
조선의 북녘 끝자락, 압록강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번호부락.
애매한 위치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도 애매하다. 그들은 100년 넘게 조선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여진족이라 불리고, 여진족에게는 동족을 배신한 무리라고 손가락질당한다. 추성훈이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 불리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 불린다던.
아신전은 킹덤에서 내내 언급되던 '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끄집어낸다.
타합은 성저야인이 모여 사는 번호부락의 대표자이자 백정이다. 도축을 하는 백정은 천민 계급 중에서도 멸시당하던 계급이었다. 고기를 사러 온 조선인은 타합이 자신들의 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대는 물론이고, 아이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이 짧은 장면에서 번호부락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흙이 묻은 고기를 집어 드는 타합의 손에 피가 흐른다.
그것은 조선인의 것도, 여진족의 것도 아니다.그들은 영원히 조선에 섞일 수 없다. 그리고 섞이지 못함은 죄가 된다. 어떻게든 곁다리를 걸쳐보려 해도, 공물을 바치고 온갖 충성을 다해도 타합에게는 관직 하나 내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조선인과 여진족 사이에 고립되어 존재를 부정당한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타합은 결국 파저위에게 ‘피를 배신한 밀정’이라고 낙인찍혀 죽임 당하고 번호부락은 몰락한다. 어떻게든 조선 땅에 머물고 조선인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던 시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홀로 남은 아신은 ‘독한 년’ 소리를 들어가며 그저 묵묵히 살아남는다.
아신은 아버지와 달리 ‘파저위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설정한다.
조선에 속하고 인정받는 일 따위는 그녀에게 관심 밖의 일이다. 그저 복수 외에 그녀는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노예를 자처해 아무 대가 없이 궂은 일을 해도, 사람들에게 험한 꼴을 당해도 저항 한 번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에게 ‘사람 대우’ 받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타합이 첫 장면에서 돼지를 썰던 것, 아신이 돼지우리를 거처 삼아 자던 점을 생각하면 고통이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호 부락은 끝끝내, 죽어서까지도 애도조차 받지 못하는 ‘오랑캐 마을’ 일뿐이다. 추파진에게 타합과 아신의 희생은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사실 아신은 계속 괴물이었다.
가족과 마을을 잃은 날, 아신의 마음에는 분노의 싹이 텄다. 저 대신 복수를 해달라고 민치록을 찾아갔으나, 민치록 역시 자신이 복수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신은 꾹꾹 눌러 담아 참아오던 분노를 터트린다. 복수를 시작한다.
“조선땅과 여진 땅에 살아있는 모든 걸 죽여버리면, 나도 당신들 곁으로 갈 거야.”
괴물로 변한 번호부락 사람들은 아신의 내면을 그대로 표출한다.
추파진 군사들이 아신이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모조리 묻고 왔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실은 아신이 생사초를 먹였다가 모두 괴물로 변한 상태였다. 그 사실이 마지막에야 드러나는 이유도 아신의 심경변화에 있다. 그녀는 산짐승을 잡아다 주며 그들을 보살펴왔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사람의 피와 살이었다.
마찬가지로 아신은 조선이 파저위에게 복수를 해줄 것이란 헛된 희망과 믿음으로 자기 내면의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그저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나름대로는 분노가 튀어나오지 않게 참는 것뿐이었다.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것은 번호부락을 몰락에 빠트린 모두의 피와 살이었던 것.
음식을 나눠먹고 웃음이 가득하던 번호부락은 더 이상 없다. 아신 역시 안다. 행복했던 그 시절은 그저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뜨거운 분노와 차가운 복수심뿐이다.
아신은 생사초를 먹지 않았으나, 결국 피와 살을 취하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번호부락의 ‘번호’는 ‘울타리 번’, ‘오랑캐 호’ 자를 쓴다. 이를 의역하면 ‘북방 경계에 울타리를 이루고 사는 오랑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번호부락이라는 단어조차 그들을 오랑캐로 낙인찍고, 그들을 울타리에 가둬 북방에 고립시키며, 조선인과의 선을 긋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아신을 괴물로 만든 것은 과연 누구냐고.
진짜 울타리에 갇혀있던 것은 누구였느냐고.
피의 역사, 그 시작
감상평
이창과 서비를 만난 아신을 기대했는데,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킹덤 프리퀄이라니 재미없을 수가 없다. 이쯤 되니 작가 양반 진짜… 이 모든 걸 설계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빨리 킹덤 3도 내놔요.
아, 올 때 시그널 2도 같이…어쨌든 킹덤은 ‘피’라는 단어가 늘 관통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이창과 아신의 만남이 기대되는 이유도 그렇다. 쉽게 비유하자면 해원 조 씨가 슬리데린 같이 적법한 혈통, 순수 혈통을 중요시하는 편이라면 이창은 그리핀도르 타입이랄까.
마땅히 권력을 잡아야 할 핏줄이 없다고 믿는 이창이니만큼, 마땅히 죽어야 하는 핏줄 또한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창이 아신과 대립하더라도, 분명히 아신을 괴물로 여기지만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선다.
아신전은 피의 역사, 그 시작을 향해 간 여정이었다.
-
- 대통령에게 관람을 권함
- 7★/10★
지푸라기가 깔린 사무실에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앉아 있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르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남자를 부르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사무실 안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창틀 위로 올라간다. 몸을 던진다. 즉사한다.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비밀경찰로 일하는 볼코노고프 대위는 ‘쿵’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자신과 함께 반역자를 고문하던 소령이 죽은 채 늘어져 있다(소령 사무실의 지푸라기는 고문자의 피가 바닥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깔린 것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다른 대원들은 소령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소령의 시신을 수습한다. 볼코노고프가 건물 위를 올려다보자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괜한 소란을 내지 말라는 의미로 입에 검지를 갖다 댄다. 볼코노고프는 직감한다. 상황 파악을 마친 그는 빠르게 결단한다. 문서 하나를 들고 건물과 조직을 탈출한다. 경찰은 바로 대위를 쫓기 시작한다. 대위의 주변 인물과 동료들은 볼코노고프가 반역자를 대하던 방식으로 심문받는다. 당과 조직의 충성스러운 하수인이었던 볼코노고프는 하루 아침에 자신이 좇던 반역자가 된 것이다.
과거 언젠가, 볼코노고프는 반역자들이 왜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고 결백을 주장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는 상관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천진한 얼굴로 자기 나름의 생각을 말하는 그에게 상관이 웃으며 말한다. 그들이 진짜 결백하기 때문이라고. 그럼 왜 결백한 사람들을 부러 반역자로 몰아 처벌하는 걸까? 그들이 ‘믿을 수 없는 분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비 간첩’에 대한 예방 조치로서 의심 분자들을 척결하는 게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이 반역자라 지목하면 그 사람은 반역자가 된다. 자살한 소령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볼코노고프의 차례다.
때문에 볼코노고프는 애초에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탈출할 때 챙긴 서류를 들고 자신이 고문해서 받아낸 ‘자백’으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유족을 찾는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지금껏 자행되어온 반역자 처벌이 아무런 근거 없는, 공포를 낳기 위한 기계적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반역자로 몰림으로써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모습과 그를 좇는 비밀경찰 조직원을 교차로 담아내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서사의 핵심은 볼코노고프가 과연 진정한 용서를 구하고 그를 밑절미 삼아 구원받을 수 있느냐다. 당연히 쉽지 않다. 파시스트도 버텨낸 아빠가 당신네들은 견디지 못했다는 한 피해자 가족의 말이 알려주듯, 용서를 구하는 일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야기하는 죄책감이 주는 통렬한 고통을 마주하는 일, 즉 자기 자신의 영혼을 찾아나서는 일이기도 하다. 체제의 당위성을 방패 삼아 마비된 채 잠자고만 있던 그의 영혼이 깨어나자 오랜 기간의 침묵이 고통스러운 윤리적 비용을 청구한다. 하지만 볼코노고프는 도망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는 가해자고,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온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용서에는 둘 이상이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자와 용서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용서를 갈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여정이 쉽지 않은 건 그의 윤리적 각성이 야기하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용서해주겠다는 사람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에는 경찰에 쫓기며 만신창이가 된 볼코노고프가 한 아파트에서 경찰에 의한 고문으로 반역자로 몰려 피해를 당한 주민이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들은 볼코노고프를 철저히 외면한다. 괜히 그와 엮였다가 불상사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들을 잃은 한 남자는 볼코노고프를 보듬는 척하며 그를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대중독재’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자의 폭력적 의지 관철은 독재의 한 축일 뿐이다. 독재는 그런 권력자에게 소극적‧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대중이 있어야만 완성된다.
언젠가 한 역사학자에게 한국은 유독 가해자의 반성과 성찰이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근현대사 내내 반복되었던 경찰과 군대의 폭력이 지금까지도 횡행한 시대인데도 ‘부역자인 내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볼코노고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기꺼이 품어줄 대중의 용기도 필요하다. 용서를 구하는 볼코노고프의 용기를 외면하거나 악용한 사람들과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공산주의자’, ‘빨갱이’, ‘체제 위협’ 등의 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과거로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시대가 우리가 뽑은 최고 권력자의 호명을 통해 다시금 소환된 것이다.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영화 속 비밀경찰이 그러했듯, 의심 가는 사람들을 모조리 범죄자 집단으로 몰아간다. 볼코노고프의 비극을 막으려면, 이런 유의 구분선 긋기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한번 전선이 만들어지고, 그에 기반한 폭력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이를 되돌리기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
- 이 소년에게 돌 던질 자 누구인가.
이 글은 2023.05.03일 개봉 예정인 영화 [클로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오(에덴 담브린)와 레미(구스타브 드와엘)의 인생은 서로의 모습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성벽과도 같았다.
둘만이 할 수 있는 가상의 전쟁놀이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해 달아나고 숨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꽃이 가득한 들판을 숨이 헐떡일 때까지 달음박질치기도 했다.
견고한 성벽 안의 두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은 내달리고 온 날의 밤이면 잠 못 이룬 채 속살거리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셔야만 했다.
그런 레미를 위해 레오는 노래를 불렀다.
무리에서 떨어진 오리와 도마뱀의 노래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두 생명체이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듯한 레오의 노래를 들으며. 레미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치 두 소년의 모습도 영원히 그러하기를 바라는 꿈을 꾸면서.
하지만 누가 와서 두들겨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둘 만의 성은. 또래 친구들의 눈길 몇 번에 주저 없이 금 가기 시작했다. 성벽 밖에 선 채로 레오와 레미의 보호막을 와르르 무너지게 한 친구들의 얼굴이 무너진 성 안에서 보이던 순간. 레미는 늘 곁에 있던 레오에게 손을 뻗었지만. 레오는 성큼성큼 걸어가 친구들의 손을 잡고 멀리 떠나고 있었다.
레미는 깨달았다.
오리와 도마뱀은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도마뱀;살기 위해 꼬리를 잘라야 하는.
레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마뱀의 그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이 없어, 시시각각 변하는 한 아이의 감정을 얼굴 표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그것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레오를 향한 다각화된 마음이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들은 모조리 진심이었고, 레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감정 앞에 솔직한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레오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손을 놓고 자꾸 저 멀리 떠나가려는 듯했다. 레오는 더 이상 가상의 적군들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보려는 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레오가 성벽 밖으로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긴 그 무렵부터, 레미는 함께 달리는 레오의 옆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축구, 다음엔 아이스하키. 그리고 영원히.
레오는 효과적으로 레미를 멀리했고. 그렇게 레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엔 배가 아픈 것만 같았다. 레오와 멀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도 배가 아프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레미는 배가 아닌 가슴이 아픈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의 근원지는 몸과 가까우면서도 멀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존재했으며. 실존하지 않길 바랐지만 생생하게 존재하는 생전 처음 느낀 이 고통에 레미가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마뱀은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고 했다.
하지만 레미에게 레오는 꼬리 정도가 아니었고. 새로운 꼬리도 레미에게는 필요 없었다. 레오는 레미에게 모든 것이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널뛰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오리의 곁을 떠나기로 한 도마뱀은 주저 없이, 레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길을 선택했다. 영원히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생각했을 때. 레미는 다시 한번 배가 아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에게 둘러댈 때는 배와 가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지만.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오리;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발짓을 해야만 하는.
성 외곽이 무너지고,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친구들과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이미, 그것도 꽤나 멀어 보였지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순간. 레오는 레미의 손을 뿌리쳤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레미의 슬프고 상처받은 모습 정도는 기꺼이 나중에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집단 속에서 효과적으로 섞이고 난 뒤에는.
레오의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히 무리에 섞여 있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의 갈퀴 달린 발은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물을 움켜쥐며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레미와 처음 다툰 그날도. 점점 더 자신의 마음속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기를. 아니 숨기기 편해지는 레미를 향한 마음을 보면서. 레오는 괜히 레미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레오는 나중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무리에 속하고 나면. 그때는 레미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필사적인 발짓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애써 외면한 채. 그마저도 나중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레오는 얼굴에서 모든 감정을 지워버리고는 열심히 갈퀴질을 했다.
그러나 레오에게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못했다.
변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속죄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히 레오의 인생에서 레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문득 자신이 레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왜 하필 두 도마뱀도, 두 오리도 아닌, 도마뱀과 오리였을까.
왜 같은 종에 속하는 두 마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레오는 이미 레미와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레미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알게 되자. 그제야 레오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미는 배가 아프다고 했었다.
레오도 지금 만큼은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 싶었겠지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아픈 곳은 배가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시선;그리고 동일화
영화 속의 소년들은 시종일관 달린다.
때론 그 수단이 자전거이기도 하고, 자동차일 때도 있으며 달리기일 때도 있다. 레오와 레미는 그 어떤 배경을 두고서도 앞으로만 달릴 뿐. 절대 시선을 뒤로 주지 않는다. 허투루 낭비되어 공허함을 좇는 시선이 없다.
특히 레오의 시선은 레미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로 정면보다는 측면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아무런 표정, 감정도 없는 레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길 때마다 과연 레오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문득 레오를 바라보는 이 카메라의 앵글이 레미의 시선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미가 평생을 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생 후반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레오의 옆얼굴. 레미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잊히지 않고 존재감이 가득한 이유도 아마 이런 앵글 처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는 도마뱀과 오리는 처음엔 너무도 당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오가 눈물을 터뜨리는 말미에 가면 그 경계마저도 희미해진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했던 레미의 모습이 오리 같기도 하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꼬리정도는 뭐.라는 생각으로 레미를 밀어내는 레오의 모습은 도마뱀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달랐으며. 이로 말미암아 절대 넘을 수 없던 차이가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로의 처지가 완벽히 달랐음을 레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레미와 웃으며 상상 속의 적군들에게서 도망쳤던 꽃이 만개한 들판에서. 시종일관 앞만 보던 레오가 단 한 번 뒤돌아 보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라는 꼬리를 잘라내기 싫어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선택을 한 레미가 문득 생각난 듯. 레오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이 기꺼이 잘라낸 꼬리의 흔적을 슬며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었던. 혹은 계속 회피해 왔던 자신의 아픔과 레미의 아픔을 함께 이해한다는 듯이.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뒤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카메라의 앵글로 대변되는 레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며 결국 레미에게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면이자 뼈아픈 성장의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음을 알리는 순간을 이보다 고급스럽게 표현한 영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화장실 문을 보여준 채 머무는 단 몇 초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도 정확한 정보와 복잡한 감정을 한 아름 던져주었다.
느린 전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런 섬세함을 단 한숨도 놓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마다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그에 상응하는 숫자만큼의 상처를 영화 내내 마음속에 남겼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경험 속에서도 화면에서 눈을 감히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영화는 아름답고도 슬펐다.
과연 레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도 마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씨네랩으로 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의 TMI]
1. 독일어 공부는 잘하고 있습니다.
2. 공부하느라+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와서 다 내려놓고 잘 쉬었습니다.
3. 매우 많이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로즈 #씨네랩 #루카스돈트 #에덴담브린 #구스타브드와엘 #에빌리드켄 #레아드루케 #영화리뷰어 #munalogi #최신영화 #영화시사회 #브런치작가
-
- 프랑스의 위선을 고발하는 영화 <프랑스> 리뷰, 레아 세이두 주연
<프랑스>에서 브루노 뒤몽 감독은 <잔 다르크> <까미유 끌로델>에서 주로 과거의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뤄왔던 전력과 달리 이번 영화
<프랑스>에서 본인의 국가와 이름이 똑같은 기자 ‘프랑스(레아 세이두)’의 삶으로 들어간다.
프랑스 드 뫼르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명한 뉴스의 간판 앵커이자 동시에 위험천만한 사건 현장에 발을 담그는 취재기자이기도 하다.
앵커일 때 그녀는 진한 메이크업과 화려한 복장을 입고 토론을 중재한다면, 기자일 때 그녀는 맨얼굴과 ‘프레스’가 적힌 조끼를 입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이토록 아름다움과 용감함을 두루 갖춘 그녀를 프랑스의 전 국민이 동경하고 사랑한다.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그녀를 발견할 때면 모두가 셀카를 찍어달라고 조를 지경. 하지만 이 유명인사 프랑스에게도 남 모를 속사정이 있다.
프랑스는 대저택과도 같은 집에서 살지만, 남편 프레드(벤자민 비올레이)와는 큰 애정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어린 아들 로로도 마음만큼 자신을 따라주지 않아 걱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는 로로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운전을 하고 가던 길에서 갑작스럽게 한 오토바이를 들이받는다.
오토바이를 주행하던 청년 밥티스트가 다리를 다치고, 하필 주변의 시민들은 프랑스가 사고를 냈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 상황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지만, 프랑스는 최대한 진심을 다해 밥티스트의 식구들에게 사과를 하고 물질적인 도움까지 지원한다. 밥티스트의 식구들은 프랑스의 존재만으로도 감사해할 정도로 선량한 이들이다.
영화는 프랑스의 일상을 따라가면서 유명인사, 즉 셀러브리티로서 겪는 삶을 밀착 취재하는 것만 같다.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그녀의 얼굴을 찍으려고 안달이 나 있으며 프랑스는 거기에 순순히 웃어주기도 하고 어느 때는 거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점은 프랑스가 앵커이자 기자라는 점에서 더더욱 독특하다. 모두에게 가감없이 노출되어야 하는 직업이자,
전쟁이나 공습 등 모두가 보려 하지 않는 곳들까지 직접 들어가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프랑스는 제1세계의 부유한 백인으로서의 한계 또한 여실히 갖고 있는 위선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브루노 뒤몽 감독의 <프랑스>는 이러한 프랑스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진실은 무엇이며 거짓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은 프랑스의 세계를 파고들면서 그녀가 대표하는 바대로 국가 ‘프랑스’를 함께 들여다본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기만을 함께 갖춘 프랑스라는 나라를 비롯해 유럽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프랑스>는 배우가 가장 눈에 띄는 영화다. 주인공 프랑스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로 국내의 많은 영화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등을 통해 대중적인 글로벌 스타로도 발돋움 했다.
<프랑스>에서 레아 세이두는 드디어 그녀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정한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호연을 펼친다.
클로즈업이 굉장히 많으며,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레아 세이두가 등장하는데, 거기에다 눈물을 흘리거나 표정을 우악스럽게 일그러뜨리는 등 쉽지 않은 연기가 굉장히 많음에도 레아 세이두는 이 모든 과정을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낸다.
언제나 인물을 가장 중요하게 다뤄왔던 브루노 뒤몽 감독이 또 하나의 인물에 관한 새로운 영화를 창조해냈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
-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 리뷰>
- 작가주의라는 말은 어떤 예술 작품에 적용되든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만, 웨스 앤더슨과 팀 버튼처럼, 대중적으로 성공한 감독 덕분에 그 허들이 많이 낮춰졌다는 종종 든다. 특히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은 감독의 취향이 짙게 묻어나는 영화임에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어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한국에만 초점을 맞추더라도 말이다. 아트버스터 마케팅은 너무나 훌륭했으며, 개봉 후 거의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아이템은 여전히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들으며 시장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어쨌든, 유명하고 익숙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에도 그는 <개들의 섬(2018)>,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와 같이 다양한 영화를 찍었는데, 오늘 내가 찾은 그의 작품은 단편 영화인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이다.<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이하 헨리 슈거 이야기)>는 로알드 달의 동명 작품을 기반으로 한다. 웨스 앤더슨이 <판타스틱 Mr. 폭스(2009)> 에서 이미 같은 작가의 작품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영화화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엔 어떤 시도를 하였을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원작 도서는 일곱 개의 단편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도서이므로 감독이 얼마큼 대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갔을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선택한 까닭이 무엇일지 여러모로 흥미가 생겨, 넷플릭스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트를 눌렀다.※ 스포일러 주의결론부터 이야기하자. <헨리 슈거 이야기>는 앤더슨 감독의 스타일의 총집합과 다름없었고, 원작의 일곱 이야기를 한 편으로 집약하겠다는 욕심을 버려 깔끔하기까지 했다. 스타일리시하되 담백하여 유쾌하면서도, 감독 특유의 미학에 곰곰이 미장센을 곱씹게 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터다. 또한 재미있는 건, 원작이 청소년을 위한 동화였기에 시놉시스와 교훈은 퍽 직설적이지만, 원작 자체가 액자형 구조를 취하고 있어 잠시라도 화면에서 시선을 돌렸다간 이해를 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자면, 원작의 플롯만 간단히 훑어도 앤더슨 감독이 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이유를 단 번에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인 헨리 슈거(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상속받은 유산만으로 평생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영국의 귀족으로, 일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취미로 도박을 하는 남자다. 그런데 그런 그가 우연히 한 권의 노트를 마주한다. 그곳엔 눈 없이도 볼 수 있는 자, '임다드 칸'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신비로운 이야기에 매혹당한 헨리는 같은 능력을 갖고 싶단 욕심에 책에 쓰인 방법과 동일한 수련을 3여 년 간 계속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초능력에 가까운 투시 능력을 획득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 후, 헨리는 이전처럼 도박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생겼다. 어떤 도박에서든 자신의 승리가 확실시되니 흥미가 사라지다 못해 오히려 슬픔을 느끼게 된 것.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을 통해 헨리의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 또한 있으리라고. 이렇듯 허망함을 느낀 헨리는 우연한 기회로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되고, 선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헨리의 부친과 헨리의 회계사였던, 그리고 헨리 슈거 사후 윈스터 슈거 LLC의 대표가 된 존 윈스턴(데브 파텔)은 한 명의 작가, 즉 로알드 달(레이프 파인즈)에게 헨리 슈거의 전기를 부탁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로알드 달의 원작이자 이 영화이다.자, 시놉시스만 보아도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어째서 이 감독이 해당 이야기를 영화화시켰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는 액자 구조를 근사하게 활용하는 아티스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만 보더라도, 그가 과거 속에서 과거를 찾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지 않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감독은 다양한 시대를 화면비를 바꾸어감으로써 제시했었다.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가장 먼저 헨리 슈거의 전기를 적게 된 작가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헨리 슈거의 이야기를 꺼내고, 헨리 슈거는 자신이 발견한 노트를 펼치며 임다드 칸(벤 킹슬리)과 의사 차터지(데브 파텔)와 의사 마셜(리처드 아이오아디)을 제시한다. 독특한 점은 한 액자마다 내레이션을 하는 인물이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초반엔 작가(랄프 파인즈)가 자신을 소개하며 상황을 해설하고, 그다음 프레임으로 넘어간 후엔 헨리 슈거 본인이, 그리고 그 이후엔 의사 차터지가 그 역할을 자처한다. 이따금은 ‘그가 말했다’와 같은 짧은 해설까지 구겨 넣듯 덧붙여야 하기에 우스꽝스럽기까지도 한데, 이는 대다수의 감독이 추구하는 사실주의적 관점을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 주는 장치였다.이밖에도, 카메라 워킹에 있어선 어느 때보다 평면성이 도드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본래도 웨스 앤더슨은 카메라를 통해 각 신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현실을 모방하고자 노력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그는 수평, 수직적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동화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힘썼고 스크린 속 이야기와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한 그의 성향은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감독은 직선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무대 장치를 적극 활용한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헨리 슈거 이야기>의 초반, 앤더슨 감독은 달리 아웃을 사용하여 로알드 달과 그의 집, 내부와 외관을 표현한다. 또한 작가의 공간에서 헨리 슈거의 집으로 장면이 전환될법한 순간에도 카메라는 건물이 절단되어 그 속내를 모두 볼 수 있다는 양 당연스레 수평으로 이동하기만 한다.하지만 내러티브에 큰 공헌을 한 웨스 앤더슨 특유의 프레이밍 장치나 카메라의 움직임보다도 관객이 영화의 한 장면, 단 한 장의 스틸컷만 보아도 웨스 앤더슨의 작품임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결정적인 단서는 그의 독특한 색감과 구도일 것이다. 이번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도 그의 특징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유명하기 짝이 없는, 인공적이기까지 한 대칭구성 혹은 평면구성은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도 여전하다. 또한 감각적인 색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영화의 컬러 팔레트는 대체적으로 <문라이즈 킹덤(2012)>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으나, 헨리 슈거의 새빨간 잠옷에선 <로열 테넌바움(2001)>을 연상할 수 있었다.그런데 이러한 모든 특징을 종합하다 보면, 언제나처럼 동일한 상상에 맞닥뜨리게 된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러니까 한 편의 영화에 액자식 구성이나 평면적인 화면, 카메라 워킹, 연출과 색감, 상징 등이 담기는 순간, 영화는 한 권의 3D 동화책으로 변하는 것만 같다는 상상 말이다.그래서일까. 이번 <헨리 슈거 이야기>에서 내게 유난히 인상 깊게 남았던 대사는 이 이야기는 사실이라는 헨리 슈거의 독백이었다(이게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허구였다면 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엔딩을 만들어 내야 했을 것이다. 드라마틱하고 독특한 엔딩을. (...) 하지만 이것은 팩트다. 사실이 아닌 것은 헨리 슈거라는 이름뿐이다.). 팩트이기에 드라마틱한 엔딩이 없다는 그의 고백은 영화라는 양식과 웨스 앤더슨의 손길에 닿는 순간 무엇보다도 현실성이 없는 양식으로 묘사되고 있기에 이 모든 구성이 거대한 아이러니처럼 느껴졌다. 특별히 비극적이지도 않지만, 대단히 유머러스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위트 있는 영화라고 느껴진 까닭은 어쩌면 그곳에 있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영화는 아니었지만, <헨리 슈거 이야기>는 어떤 계절 혹은 어떤 날씨에, 문득 떠올라 다시금 찾고 싶어지는 영화가 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
-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 / 激突! ラクガキングダムと ほぼ四人の勇者, 2020
-
작년 현장실습이 끝나고, 극장에서 못 보던 영화들이 한 번에 몰아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영화들을 기대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영화는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이었습니다.
아무리, 전성기 시절만큼의 폼은 아니더라도 해왔던 것들이 있기에 차마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고요.
그렇게 보게 된 <신혼여행 허리케인~ 사라진 아빠!>은 '사라진 제 짱구를 찾습니다!'라는 단말마와 같은 평가만을 남기게 되었습니다.그렇게 속았음에도 이번에 다시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을 다시, 극장에서 보게 된 이유는 이번 극장판이 기존 극장판과는 다르게 원작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최초는 아닙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극장판들은 원작이 있던 반면에 이후 극장판들은 오리지널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었으니 일본 개봉 기준으로는 25년 만에 원작을 가지고 만든 극장판인 것이죠.
그러니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개봉하는 극장판으로 역시 기대를 품게 만들었는데, '과연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은 어땠는지?' -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아이들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낙서로 에너지를 받는 '낙서 왕국'은 사라진 아이들의 낙서로 어느새 멸망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에 왕국은 기존 국왕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공주는 자신의 부하에게 '미라클 크레용'을 건네며 '낙서 왕국'을 구해줄 용사를 찾을 것을 부탁하고 지상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낙점된 "짱구"는 먼저, '미라클 크레용'으로 자신을 도와줄 동료들을 그리는데...원작을 모르는데, 익숙하다?
1. 강도 높은 웃음을 어떻게 대체하나?
앞서 말했듯이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이를 눈치채고서 보는 관객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을 저와 같은 성인 관객들이 보는 이유는 단, 하나 "얼마나 웃겨주는지?"일겁니다.
근데, 이 웃음의 기준이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전 극장판 <신혼여행 허리케인~ 사라진 아빠!>의 리뷰를 살펴보면, '"성기"가 노출되는 표면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헨더랜드의 대모험>에서 인형이 된 부모님을 향해 "아빠! 맘모스가 없어요.. 엄마! 가슴이 커졌어요!"는 대사가, <암흑 타마타마 대추적>은 구슬을 삼킨 짱아에게 짱구가 '하나만 더 삼키면, 남자가 된다'라는 대사, 그리고 <불고기 로드>에서는 유부남 상사를 좋아하는 여성의 상황'까지 이처럼 성인이 봐도 헉! 할 만큼이죠.이제는 'PG 등급'이니까!
그렇기에 한껏 순해진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의 '웃음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냐?'에 해당 작품의 만족도를 달라질 겁니다.
물론, 해당 작품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은 그때만큼 높은 수위를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거지만...)
그럼에도, 해당 작품의 유머에 큰 불만이 없는 이유는 "낙서"라는 소재를 통해서, 어른과 아이을 대치하는 것도 있으나 이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의 매력이 다분한 작품입니다.2. 이걸 애들 보는 만화에서 보여줘도 되나요?
이번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국내에서 "국방장관"으로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악당"으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저와 같은 성인들이 보기에는 그저 "악당"으로 바라볼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낙서로 에너지를 받는 '낙서 왕국'의 특성상 낙서를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어른들이 곱게 보이지 않음과 동시에 손을 놓고 바라보는 국왕의 모습을 보자니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동기는 확실하게 설득되었거든요.
이후 이야기에서 아이들을 어른들로부터 격리시켜, 재우지도 않고 낙서를 시키는 모습은 삐뚤어진 애국주의자의 모습과도 꽤 겹쳐 보였습니다.이렇게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마지막에는 "제발, 낙서를 해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애결하는 모습까지 악당을 떠나서 완벽한 캐릭터의 기승전결을 지는 유일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도 "가짜 이슬이 누나"라든지 "부리부리 자에몽"과 같은 캐릭터들도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들의 경우. 극에서 눈물을 담당하는 역할들로 특히, "부리부리 자에몽"는 "오마주"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돼지발굽>을 연상시키는 장면은 저와 같은 관객들에게는 때아닌 향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3. 나의 가장 보편적인 악당들
앞서 말했듯이 이번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은 원작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아는 사람들은 있을지'가 걱정일 정도로 그 어느 극장판처럼 낯설겠지만 <격돌! 낙서왕국과 얼추 네 명의 용사들>은 그 어떤 극장판보다 가장 익숙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는 앞에서 언급한 "부리부리 자에몽"의 마지막 모습에 <돼지발굽>을 연상시켰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외에도 낙서를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원숭이"들과 대결했던 <정글>을, 초반 왕국의 추격전 구도와 "판타지"적인 요소는 <헨더랜드>의 장면들이 떠오르니 여러분들도 그 어떤 극장판보다 가장 익숙한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나요?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인 작품?
익숙한 것도 있지만, 이번 극장판에서 악당으로 출연하는 "국방장관"의 동기에 납득한 것처럼 이번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극 중 후반부에 "낙서 왕국"이 떨어져 마을에 위험이 닥치자 사람들이 "미라클 크레용이 어딨냐고!"면서, 다그치는 장면은 불안과 이기심을 엿볼 수 있었거든요.
분명히, "낙서 왕국"을 다시 끌어올릴 방법을 인지했음에도 도망치는 모습과 애결하는 악당은 모습은 이번 극장판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악이라는 것을 그것도 아동만화에서 보여주었으니까요.4.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줄까?
그렇기에 마지막 엔딩에서 "아동 만화"스러운 급하게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모습과 극 중 쿠데타를 일으킨 "국방장관"외의 다른 캐릭터들의 설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활용되지 않는 것도 아쉬움으로 적용됩니다.
그토록 흔했던 "오카마", 여장 남자들도 사라지고 성인들이 헉! 할 만큼의 유머도 사라진 이 마당에 올드팬들에게 오늘날의 극장판들은 분명히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로 큰 만족감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성인 관객들에게는 다음을 혹은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을 이어나갈 새로운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요?
-
-
-
- 넷플릭스 <섹스/라이프>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25일, 넷플릭스 공개]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욕망.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을까.
-
- 넷플릭스 <돌풍> 공식 예고편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 6월 28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