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두codu2023-12-11 09:24:04
사랑의 시간과 장소, 영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사랑은 낙엽을 타고> (2023)
씨네랩의 초대를 받아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
서늘하고 건조한 헬싱키의 풍경이 유머와 사랑으로 따뜻하게 물든다.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낯선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두말할 나위 없는 로맨스 영화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진폭은 절제되어 있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여자는 남자의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린다. 카우리스마키 감독 특유의 아주 덤덤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로. 설사 감독의 웃음 코드와 맞지 않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가 사랑스럽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다소 피곤한 표정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에 스티커를 붙이고 분류한다. 경비원의 눈길은 시종일관 안사를 향한다. 그 눈빛은 애정과 호감이 아닌 감시의 눈이다. 경비원은 직원들이 스티커를 붙이고 제품을 폐기하는 모습을 경직된 모습으로 응시한다. 결국 안사는 폐기 제품을 챙기고 노숙자에게도 음식을 나눠줬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사회에 만연한 비정규직의 서러움은 동료들과 함께 매니저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 안사는 곧바로 다른 일을 찾아 나선다. 삶의 어려움은 근무 환경의 팍팍함만이 아니다. 안사는 전기세 고지서를 보다가 콘센트를 뽑고 이내 차단기까지 내려버린다.
홀라파(주시 바타넨)는 우울과 과음의 순환에 빠진 건설 현장 노동자다. 노후된 장비로 작업을 하다 사고를 당한 홀라파는 높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빌미로 해고당한다. 고독을 좋아하지만 사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홀라파는 술을 통해 우울한 현실을 잊는다. 동료 한네스는 이런 그를 이끌고 가라오케로 향한다. 그곳은 노래를 부르고 들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 뒤로 하는 곳이다. 가라오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안사와 홀라파는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흘러나오는 동안 사랑에 빠진다. 세레나데와 함께 안사와 홀라파의 얼굴 클로즈업이 짧게 교차되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드러낸다.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여지없이 사랑은 시작된다.
안사와 홀리파의 사랑은 무미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겨우 전달한 번호를 적은 쪽지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서로의 이름도 모른다. 연락할 방도가 없기에 무작정 영화관 앞에서 상대를 기다린다. 빠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현실이 무색하게 이 영화의 사랑은 느리다. 안사는 타인을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고주망태로 버스 정류장에 잠든 홀리파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에워싸인 것을 보고 다가가고, 그의 얼굴을 고쳐주고 쓰다듬어준다. 그의 사랑은 안락사를 당할 뻔한 강아지에게도 이어진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의 삶이 곤궁해지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쏟고 보살피려는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시대적 배경은 안사의 새로운 직장인 ’캘리포니아 펍‘에 걸린 달력에서 알 수 있듯이 2024년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80년대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인물들이 TV는커녕 라디오로 뉴스와 음악을 듣고 유선 전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시종일관 흘러나오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의 속보는 퇴보한 현대를 충분히 설득한다. 감독은 전쟁의 여파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마저 뛰어넘으려 한다. 분명 배경은 헬싱키지만 각 가게에는 특정 나라의 도시 이름이 쓰인다. 초점 없는 눈으로 연거푸 맥주만 들이켜는 사람들이 모인 ‘캘리포니아 펍’의 사장은 마약 거래를 하다 적발된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카페’의 음료는 과연 알록달록하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인 낡은 극장은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시대의 영화가 모여있는 곳이다. 두 사람은 짐 자무시의 좀비영화 <데드 돈 다이>를 함께 보고 나온다. 극장에는 로베르 브레송과 장 뤽 고다르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은 브레송과 고다르를 언급하며 소감을 전한다.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영화인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음악은 사랑의 시간이요, 영화는 사랑의 장소임을 일깨운다. 나라와 나라를 넘나들며,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영화와 음악임을 유쾌하게 고백한다. ‘채플린’이라는 강아지와 함께 두 사람이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모던 타임즈>가 연상되는 마지막이다.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하나의 사랑을 찾는 망명자를 대변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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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울> 가장 픽사다운 위로를 어른들에게 건네다
뉴욕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제이미 폭스)’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재즈 클럽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는다. 인생의 목표를 이룰 수 있어 잔뜩 흥분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영혼이 되어 ‘태어나기 전 세상’에 떨어진다. 인간으로 태어날 자격을 획득한 영혼들에게 지구 통행증을 발급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그는 지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시니컬한 영혼 ‘22(티나 페이)’의 멘토가 된다. 수많은 위인들도 가르침을 주는 데 실패한 영혼 22와 함께 조는 지구로 돌아가 프로 뮤지션이 되고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여러 공통점을 갖는다. 픽사는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야만 하는 시기나 사건을 특정 소재 안에 담아 풀어낸다. 예를 들어 <온워드>는 마법, <코코>는 망자의 날, <토이스토리>는 장난감, <인사이드 아웃>은 감정을 통해 제각기 성인식, 사별, 유년기, 사춘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픽사는 늘 선택된 소재와 관련된 환상의 공간을 선보이며, 그곳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토이스토리 3>에서 청년이 된 앤디가 장난감들과 아름답게 이별한 것처럼 현실에서의 위로, 성장, 그리고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픽사 애니메이션은 유달리 어른들에게 감동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작품이 다루는 시기나 사건을 경험한 이들에게 픽사 애니메이션이 선사하는 환상 속 현실의 울림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피트 닥터 감독의 신작 <소울>은 픽사의 DNA가 가장 뚜렷하게 발현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소울>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기는 삶의 이전과 이후다. 영화의 주된 배경 역시 태어나기 전과 죽음 후에 영혼이 마주해야 하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소울>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은 수단일 뿐, 무엇보다도 현재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본질에 가깝다. 이는 셸리 케이건 예일대학교 교수가 본인의 저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영혼이 실재하든 안 하든)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라고 내린 결론과 일맥상통한다. 갑작스럽게 죽기 직전에 처한 조와 지구로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영혼 22가 함께 뉴욕에서 모험을 펼치며 지난 삶의 과오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발견하며, 당장 그들이 마주한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지만 언제나 재즈 밴드로 활동하는 프로 뮤지션을 꿈꾸던 조는 동경하는 아티스트와 클럽에서 멋진 즉흥 연주를 펼치며 실력을 인정받지만, 매일 공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공허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지구로 내려가는 것을 거부하던 영혼 22 역시 조의 몸을 통해 처음으로 삶이 무엇인지를 체감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부정당한 뒤 삶의 의욕을 잃고 괴물로 변해버린다. 그러던 와중에 둘은 단풍나무 씨앗으로 대표되는 순간의 아름다움,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마주한 후에야 진정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인생은 무언가 거창한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즐길 때 의미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영화의 구성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영화 음악의 활용 방식이 대표적인 예시다. 사실 <소울>에서 재즈 음악의 비중은 개봉 전에 이루어진 프로모션과 그로 인한 기대에 비해 그리 크지 않다. 초반부 재즈 클럽에서의 연주 장면, 뉴욕에서 펼쳐지는 조와 22의 여정, 일상의 소중함을 조가 깨닫는 장면을 제외하면 재즈 음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소셜 네트워크>의 ost로도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스페이스 음악을 주로 들려주며, 이는 제2의 <라라 랜드>를 기대한 이들에게는 약간의 실망으로도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를 생각하면 기대와 다른, 재즈 음악 영화를 표방하면서도 분량 면에서 재즈를 많이 들려주지 않는 <소울>의 행보는 필연적이다. 햇살을 맛보고, 단풍나무 씨앗을 손에 쥐고, 재즈가 아닌 일상의 이야기를 미용사와 나누고, 또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상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조에게 재즈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에 오히려 더 소중하며, 그렇기에 그는 클럽에서의 연주 후에도 남은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이러한 조의 서사처럼 영화 역시 전체적으로 재즈를 배치하지 않으면서 역으로 재즈 음악의 의미도, 예상과는 달랐던 ost도, 영화 1분 1초까지도 모두 즐기고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재즈 음악을 들려줄 때에는 즉흥 연주와 다른 연주자와의 하모니에 중점을 두며 지금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자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이외의 장르를 통해서는 영혼들의 세계와 조의 절실함, 22의 좌절감까지도 생생하게 제시한다. 이렇게 <소울>은 스브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피트 닥터 감독이 말한 대로 영화 음악의 장르 선택과 배치를 통해 가장 직관적으로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한다.
또한 <소울>은 두 주인공 안에 현대인들의 처지를 녹여내며 관객들이 영화의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체감하도록 유도한다. 조와 22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처럼 보인다. 한 명은 확실한 인생의 목표를 지닌 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열정으로 가득하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지구에서 태어나지 못할 정도로, 또 본인도 지구에 갈 생각이 없을 정도로 열정이 부족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결국 둘은 확신을 갖지 못해 우울하다는 같은 문제 상황에 처한 이들이다. <피로사회>의 표현을 빌리면 조는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지구에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이라서 우울하며, 22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강제된 자유로부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낙오한 인물이다. 열정이 있는 이와 아닌 이,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인물과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인물이라는 차이 이면에는 "(삶을)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해 사색적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과를 내야 하고, 그 성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 긍정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비록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목적에 치여 함몰되어 가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스스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관객들은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조와 22라는 캐릭터가 현실을 반영하듯이, 주 배경으로 묘사되는 공간도 현실의 비유로서 감정이입과 공감에 큰 도움을 준다. 지나치게 열정에 집착하여 괴물이 된 영혼들이 떠돌아다니는 공간인 어둠의 구역을 보자. 지나친 열정 때문에 주식 거래에 미쳐버린 한 남자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 결과 두 주인공과 같은 문제를 겪는 인물이다. 이때 이 남자와 22처럼 자신의 삶을 잃고 괴물이 되어 버린 이들이 '문윈드'와 같은 개인의 도움에 의해서만 구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어둠의 구역은 개인이 스스로를 하나의 부품이자 도구로 여기게 하며 실패할 경우 재도전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사회상의 반영이다.
또 다른 배경인 '태어나기 전 세상'도 현실의 그림자를 반영한다. 이 곳은 언뜻 영혼들의 성장과 배움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갖추어야 한다는 조건들을 정해놓고 그 조건을 맞춘 영혼만 지구에 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은 개인의 개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엇비슷한 인간상을 만드는 공장이나 다름없고, 그 공장에서 낙오한 22와 같은 영혼이 괴물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대목에서는 특정 스펙과 조건으로 삶의 성공과 실패가 재단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러한 공간들의 특성과 인물들이 처한 어려움을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현재의 사회구조를 만드는 데 공헌한 과거의 위인들로부터 22가 아무런 가르침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소울>이 픽사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업>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지 못하며, <토이 스토리>처럼 십수 년 후에도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뭉클함을 선사하지도 못한다. 또한 육신과 영혼의 관계, 죽음과 삶의 관계, 죽음이 갖는 의미 등 다소 현학적인 소재로부터 매 순간 마주하는 현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도출하는 데 있어서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영리하고 효과적이지만 주제나 소재가 갖는 깊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울>은 픽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작품이다. 사실 영화의 다양한 목적과 기능 중 하나가 현실에서의 도피인 만큼, 현실의 아픔과 불편함까지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온 <소울>의 선택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할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 부를 만큼 영화는 현실과 다른 세상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제공하는 위안과 위로가 단지 현실 회피와 환상의 충족을 담당할 뿐이라면 영화는 마약과 다를 것이 없으며,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힘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언제나 끝이 나기 때문에 영화는 관객들을 그들의 현실로 되돌려 보내야만 하고, 그렇기에 결코 현실에서 완전히 도망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영화는 도피처가 아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충전소 혹은 주유소다. 그렇기에 앞서 살펴봤듯이 환상 속의 세계를 펼쳐 보이지만 언제나 현실로 되돌아오는 것을 잊지 않는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큰 기대와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삶에 지쳐 자기 자신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이들을 향해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냉철한 성찰과 비판의 메시지도 남기는 <소울>이 유독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가장 픽사다운 영화일 수 있는 이유다.
<소울>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후 테리가 "영화는 끝났어. 이제 집에 가"라고 말하는 쿠키 영상으로 끝난다. 이는 마치 <데드풀>에서 데드풀이 왜 아직도 앉아 있냐면서 혹시 다음 편 떡밥을 기대한 건 아니냐며 약 올리는 것만큼이나 유머스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장면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매 순간을 귀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의 마무리이기 때문일까? 실컷 환상의 세계를 맛보고 그 감흥에 취해 있을 관객에게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 대사마저도 다시금 현실을 살아갈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이렇게 <소울>은 현학적이고 깊이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 가슴에 와 닿는, 가장 픽사스러운 격려와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로 남는다.
O(Outstanding, 특출함)
마블이 <아이언 맨>을 넘어서야 한다면, 이제 픽사는 <소울>을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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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숨바꼭질해, 그리고 다신 잡히지 마
<행복한 라짜로>(2018)와 <키메라>(2024) 이후에야 우리에게 도달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초기작 <더 원더스>(2014)는 어쩌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키메라>까지 무르익어 간 로르바케르의 재능이란 주로 노골적이면서도 섬세한 대비를 활용하는 재주에 있었다. 이쪽과 저쪽, 차안과 피안, 도시와 시골, 빈자와 부자, 순수와 교활을 빈번히 오가며 비추는 데에 누구보다 능숙했던 로르바케르이기에, <더 원더스>의 모호하고 꿈과 같은 상징들은 더욱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의도된 침묵, 도망친 벌들과 낙타, 빛을 마시는 동작과 동굴에서의 춤 등은 메인 플롯인 고립된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불쑥불쑥 난입하며 알쏭달쏭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속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었다거나 일부러 에둘러간다는 느낌 없이 순진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실증에서 출발해 환상을 얹은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임을 생각해보면 대개 직관적이고 거칠은 쪽에서 부드러운 은유 쪽으로 나아가는 게 많은 창작자들이 밟는 전철일진대,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이 가장 은유적이었고 지금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을 발전시키면서 일종의 역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더 놀랍다.
<더 원더스>는 군견을 데리고 밤길 수색을 나온 군인들이 등장하는 이색적인 오프닝부터 ‘이야기’에 대한 집중력을 단번에 끌어올린다. 이 군인들은 나머지 서사의 진행과 전혀 무관하며 주연 인물들과 엮이지도 않는다. 이야기 바깥에 위치한 그들은 외딴 곳의 민가를 발견하고 “저런 곳에도 집이 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순간만 등장할 뿐이다. 눈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불을 비춰 시작을 알리는 이들은 곧 우리에게 전해져 올 ‘이야기’를 낭독할 전기수의 바람잡이, 연극의 첫 막이 시작할 때 열리는 무대의 장막,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이끌어낼 동생 두냐자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군인의 외침 덕에 우리는 “저런 곳”의 거주민인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즉시 그들의 ‘이야기’가 해석될 수 없는 동화처럼 미완으로 남으리란 사실을 직감한다.
그 이야기란 이렇게 시작된다. 한밤중 군인들의 수색으로 집 밖이 훤해지자 여자아이들이 하나씩 깨어난다. 큰딸인 젤소미나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떼쓰는 동생 마리넬라를 단도리하고 더 어린 쌍둥이 동생들은 덩달아 깬 금발의 젊은 어머니에게 매달린다. 젤소미나는 동생들을 달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의 하나뿐인 TV를 점령하고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를 익숙한 듯 일으켜 침실로 올려보낸다.
양봉업자인 아버지 볼프강은 문명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강제하는 가부장이다. 장녀답게 눈치 빠른 젤소미나는 벌을 돌보고 채밀기 밑의 꿀 양동이를 한밤중에라도 갈아줘야 하는 큰 책임을 자연스레 지게 된다. 딸이라기보단 특급 일꾼을 대하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젤소미나는 부녀 간의 유대를 찾아내고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 안젤리카(알바 로르바케르)는 대체로 다정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느라 젤소미나에게 면밀히 신경써줄 겨를이 없고, 남편의 기행, 일방적인 통보, 대책 없는 금전 감각에 질리고 포기한 듯 대체로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양봉과 가사에 밀려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을지 혹은 다녀본 적은 있을지 걱정스럽고, 직접적인 폭력이나 악의는 없더라도 정황상 아동학대와 노동 착취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에 불과 열두 살의 젤소미나는 덜렁 놓여있다. 종종 창고에서 젤소미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동생 마리넬라와는 살짝 터울이 지고, 또래 친구 조이아와는 많이 다른 가정환경 탓인지 살짝 어색한 거리감이 있기에, 그애는 너무나도 철저히 혼자다. 언제나 고독했 라짜로와 아르투처럼.
토스카나의 새파란 바다와 드넓은 평야는 무척 아름답지만 그것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시점에 이미 불가했다는 걸 현대의 관객은 알고 있다. 그러나 볼프강은 아직 다가올 운명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전통적 농법과 양봉을 고집하느라 늘 돈도 모자라고, 이웃들과도 척 지고, 아침마다 집 밖 침대에서 깨어나 사냥꾼의 총성에 미친듯이 화내며 모두를 쫓아내려 한다. 볼프강은 외부에서 밀려들어온 자본에 ‘농민끼리 단결해 맞서야 한다’고 펄펄 날뛰면서 거대한 흐름에 홀로 맞서고자 한다. 굳건한 반골의 의지만큼은 존경스러우나, 아직 미성년인 자식들마저 투쟁에 억지로 동원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외골수 아버지와 힘이 부친 어머니 사이, 과중한 노동과 외로움에 조용히 짓눌려가는 젤소미나에게 어느날 갑작스레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두 번이나 가해진다. 하나는 그 시골의 계곡까지 커머셜 쇼 프로그램 광고를 찍으러 온 인기 배우 ‘밀리’,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데려온 독일 소년 ‘마틴’이다.
아름다운 백금발에 여신 같은 차림의 밀리(모니카 벨루치). 그는 네 자매의 이름을 물어봐주고 가장 수줍어하는 젤소미나를 다정히 쳐다보며 예쁜 머리핀을 선물한다. 밀리와의 만남으로 인해 젤소미나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를 더욱 갈망하고 밀리가 홍보하던 ‘전원의 기적’ 쇼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남몰래 품게 된다. 그 와중 소년원에 다녀온 아이들의 재사회화를 위한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틴이 이 가족에 배정되는데, 기관 담당자가 “어긋난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방화나 절도 전력이 있다고 태연하게 부연하자 엄마 안젤리카가 딸들이 걱정되지도 않냐며 볼프강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네 딸들은 커가는데 진정한 일꾼이 되어줄 ‘후계자’ 아들은 태어나지 않자 부족한 노동력에 초조해진 볼프강이 제멋대로 위탁(이라고 말하고 합법적 아동착취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을 신청해놓곤 당일이 되어서야 말하는 걸 잊었다며 실토한 것이다.
휘파람으로 노래할 줄 알지만,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불청객인 마틴. 마리넬라가 “잘생겼다”며 소근거릴 정도로 진한 외모로 소녀들에게 이상한 긴장을 불러일으킨 마틴. 로르바케르 영화 속 꾸준히 수수께끼의 존재로 그려지는 ‘이방의 남자’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직계 가족이 아닌 성인 여성 코코 외에 한 사람의 군식구가 더 늘자 젤소미나 가족의 역학은 빠르게 변화한다. 키는 작지만 힘센 마틴을 보며 아버지가 흡족해하는 표정, 자기들을 보며 “계집애들이란!”하고 내뱉는 표정을 비교하며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단박에 아버지의 신뢰를 뺏어간 마틴을 향한 젤소미나의 질투, 아버지를 향해 피어나는 반항심, 그런 딸을 두고 “쟤가 없으면 난…” 안될 거라며 친구에게 조용히 드러낸 볼프강의 진심, 마틴과 젤소미나처럼 외로운 이들끼리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서로를 향한 호감 어린 호기심, 잠깐씩 어그러지는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우애까지. 어지러이 뒤섞이는 감정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강경하게 젤소미나가 나가고 싶어하는 ‘전원의 기적’ 쇼에 신청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아이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격정에 몰래 신청서를 써낼 각오도 불사한 채다. 꿀을 팔러 나갔던 어느 날 시내에서 마주친 폭풍우는 잦아들지 않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몸으로 벌통을 꽉 누른 트럭 안에서 젤소미나는 돌연 “우리 거기 참가해요”라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건 더이상 삶의 고독과 혼란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진 아이의 몸을 뚫고 나온 절규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전원의 기적’ 쇼에 양봉업 대표로 출연하게 되긴 한다. 젤소미나가 몰래 신청하고 심사위원이 다녀갔단 걸 뒤늦게 알게 된 볼프강이 말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상처받긴 했지만. 여기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특유의 아주 섬세한 터치가 정념을 제대로 건드린다. 아이들이 꿀을 엎고 마리넬라가 다치고 심사위원을 맞이하고 난장판을 수습하는 한나절 동안 볼프강이 시내에 나가 큰딸에게 선물할 낙타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감정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이때, 마틴의 등장 이후 소원해진 큰딸과의 사이를 풀고자 아버지가 기껏 드물게 다정을 발휘했는데 이 ‘선물’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안젤리카는 힘겹게 모은 돈을 고작 낙타 따위에 다 써버린 남편에 분노하며 이번에야말로 헤어지겠다고 선포하고, 젤소미나는 아버지가 가장 싫어할 만한 유형의 외부인 - 지적 권위를 갖고 자본의 호위를 받는 남성 심사위원 -을 들였다며 고백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낙타를 갖고 싶어했던 큰딸은 이제 그게 ‘불법’이란 걸 알게 됐고, 아버지가 뭔가 이상한 사람이란 걸 의식하며 바깥 세계로의 탈주를 염원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무엇이 됐든 분명 자신이 질 싸움이란 걸 차차 직감하고 있는 중이다. 코코가 볼프강에게 맞서며 젤소미나가 불쌍하다고 했을 때, 친구 에이드리언이 젤소미나를 밀라노로 데려가겠다고 농을 던지고 젤소미나가 수줍게 좋다고 할 때, 볼프강의 고집 센 얼굴 위로 스쳐가는 회한이나 자기의심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반항에 볼프강은 망연자실 밖으로 나가 낙타를 끌어내려다 포기하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혼자 노동을 계속한다.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젤소미나의 표정 역시 말이 아니다. “아빠 제가 뭘 할까요? 저 뭘 하면 되나요?” 그렇게 받고 싶던 아버지의 사랑이 주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걸 단박에 기뻐하며 받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눈물 흘리며 외치지만 아버지는 “하지 마”라며 불퉁하게 거절할 뿐이다.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만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여기는 아이를 보며 서럽기도 하지만, 이 어른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되는 우리가 과연 볼프강의 속좁음을 탓할 수 있으랴. 그도 안젤리카도 ‘바깥’의 세상에서 된통 두들겨맞고 자신들만의 낙원을 구축해보려다 실패한 어른들임을 영화는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더 원더스>는 아이의 혼란과 상처뿐 아니라 어른들의 상처도 조밀히 들여다보는데, 네 딸들의 부모만큼이나 코코라는 어른의 존재도 흥미롭게 다뤄진다. 처음에는 코코가 안젤리카의 사촌 혹은 먼 모계 친척인가 싶었지만, 에트루리아인의 흑발 흑안과 로마인의 도드라진 ‘금발’을 늘 코드화하는 로르바케르의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친척은 아닐 듯 싶다. 그렇다면 볼프강과 안젤리카, 코코와 에이드리언은 모두 원래 밀라노 출신의 소꿉친구였다가 각자의 방황 끝에 긴 사연을 안은 어른이 되어 토스카나 시골로 찾아들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얹혀살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며 볼프강에게 싫은 소리를 듣던 군식구 코코는 분명 제대로 된 어른은 아니다. 젤소미나 편을 들며 “아이들을 그만 부려먹으라”며 이제는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볼프강에게 화를 내긴 하지만 정작 코코는 부모의 부재시 보호자 노릇을 젤소미나만큼도 해내지 못한다. 이상한 요가 동작에 심취하느라 마리넬라가 채밀기에 손을 베일 때에도 아이들 옆에 없었고, 병원이나 방송사 관계자 같은 ‘진짜 어른’들 앞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도 못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기들과 함께 집에 남은 엄마 안젤리카를 대신해 섬에서 촬영하는 ‘전원의 기적’ 프로에 함께 참가한 코코는 바로 그곳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가난하고 힘 없는 목축업자, 양봉업자, 낙농업자 등등 가지각색의 가구를 불러다놓고 우스꽝스럽게 치장시킨 쇼 프로. 그 옛날 고래의 무덤으로 불렸다는 자연 동굴 안에서 인공적인 불빛과 스탭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치 가장 무도회처럼 동물 탈이며 월계수 화관을 쓴 농민들은 얼빠진 채 긴장한 채 서있다. 사회자인 밀리는 시골 소녀들을 불러내곤 과장된 말투로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라 호명하더니, 정작 그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름다운 전통 민요를 부를 때는 살며시 옆으로 빠져 피곤한 얼굴로 귀를 막아버린다.
또 가족들 사이에선 그토록 폭군 같던 볼프강은 십수 대의 카메라와 양복 입은 도시인들 앞에서 굳은 채로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더듬거리며 허망한 믿음을 역설한다. 몸으로 익힌 신념이, 무언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가장 천박한 자본이 가장 고귀한 노동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후 굳어진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의 단단한 육체 안에서 부글거리고 있지만 비극적이게도 볼프강에겐 그것을 ‘제대로’ 설파할 만큼의 학식이 없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어 “보여줄 공연이 있다”며 젤소미나가 황급히 밀리를 불러세운다. 밀리를 다시 보길 몇 달 내내 바라온 젤소미나가 입안에서 벌을 꺼내 얼굴에서 춤추게 하는 자신의 특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애의 진지한 예술은 아버지가 방금 전 기인 철학자처럼 더듬거린 신념과 함께 무참히 무시당한다. 부녀는 ‘수습’의 대상으로 격하될 뿐이다.
그 모든 기이한 난장판을 지켜본 코코는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다. ‘진짜 이탈리아인의 전원생활’을 조망하고 격려한다는 TV 쇼의 명분은 다 허울 뿐이고, 이제는 농민 개개인의 삶까지 (볼프강이 보던 TV 속 조잡한 재연 프로그램처럼) 서사화되어 도시인들의 한낱 유흥으로 무참히 착취되고 무시당할 거란 진실을. 그래서 코코는 돌연 울기 시작한다. 방금 전 밀리와 도시인들에게 민망하리만큼 외면당한 젤소미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코코는 “넌 정말 예뻐,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어”를 몇 번이고 말해준다. 그 순간 코코는 진실을 먼저 깨닫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외마디를 외치는 선지자다. 그 외침은 젤소미나에 투사한 자기 젊은 시절에 보내는 위무이기도 하다. 곧이어 “나도 아름다워. 난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라고 발작적으로 반복하는 그를 보며, 관객은 코코 또한 정말이지 고단하고 외롭고 아픈 여자였단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코코는 젤소미나의 (가장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물로서 존재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동생 마리넬라, 루나, 카타리나처럼 엄마의 아름다운 금발을 물려받지 못한 큰딸이 계속 제 의지에 반해 유폐된다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을, 불쌍한 흑발의 미친 여자 코코가 대신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에트루리아인 이웃들에 찰싹 붙어 엮여있으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고 말하던 볼프강. 우리 ‘밀라노인’들은 누가 신경 써준 적 있냐는 볼프강의 서러운 고함에 에이드리언은 ‘밀라노인!’이라 곱씹으며 한 번도 그렇게 분류된 적 없다는 듯 낄낄 웃는다. 익숙지 않은 호명은 곧 그들이 표준화된 복지 체계 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지방/민족/인종 출신이란 의미다. 도시 생활과 자본의 침범에 상처 받고 그 어떤 ‘문명’의 덕도 보지 못한 어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때론 애완견을 부르는 듯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란 모멸적 호칭을 빌려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 한다.
섬에서 코코에게 기습적으로 키스 당한 마틴이 온 힘을 다해 도망친 다음 실종되자, 기관 담당자가 방문해 볼프강과 언쟁을 벌이다 “상식적인 규율이란 게 있는데 알기를 거부하시네요.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요”라며 잔인한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그는 바로 직전 자기 관리상의 허점을 숨기기 위해 “아이에 대한 기록은 싹 덮어서 지워버렸다”고 부끄럼없이 자료 조작과 공모 행위를 털어놓은 직후다. 위선자 같은 그가 잘 안다던 ‘세상 물정’이란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법칙일까.
또한 이 담당자는 앞서 마틴을 데려왔던 날, 허술한 농가를 한 차례 둘러보곤 제대로 된 교화를 위해 ‘체계성’ 있는 기록과 교육을 제공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즉 다시 요약하자면 <더 원더스>는 결국 재래성과 체계성의 대립에 관한 영화다. <키메라>를 제작하며 에트루리아의 유적과 무덤가에서 자매와 뛰놀던 유년기 기억을 참고했다고 밝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초기부터 ‘발전’된 문명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두운 구석의 시간에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질문은 누가 어떻게 정상성을 정했는가부터 시작된다. 어떤 질서가 문제와 문제 아닌 것,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 발전한 것과 낙후된 것, 문화재로 보존될 것과 쓰레기로 퇴거당할 것을 구분하고 있는지, 우리가 뭔가를 스스로 판단한다고 착각할 때 그 권위에 실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더 원더스>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기 직전, <행복한 라짜로>는 밀려나는 중, <키메라>는 밀려난 직후를 다루는 연작이라 해도 좋겠다. <키메라>의 톰바롤리들이 “일만 하다 돌아버린 노인”이라고 조롱하던 피로의 삼촌에게서 우리는 늙은 볼프강의 최후를 본다. ‘효과 좋은’ 최신 농약도 볼프강에겐 땅과 벌을 다 죽일 끔찍한 화학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평온히 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하고 싶지만 세상은 아이들에게 자꾸만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을 보여주고 아이들은 부모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볼프강과 안젤리카의 강경한 자세에서 이상하게도 품위를 느낀다. 도시의 방송사 카메라로는 잡아낼 수 없었던 그것을.
바로 그래서 마틴이 젤소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그 동굴에 남는 것이다. 여전히 포착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이탈리아 시골의 생동처럼, 도시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품위처럼, 끝까지 문명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밀라노인’ 가족처럼 마틴 역시 영원히 붙잡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거의 언어나 노래 혹은 유적을 찾아내면/기록하면 필연적으로 도굴꾼의 돈벌이가 되고 부자들의 눈요깃감으로 소비되며(키메라) 믿는 자들의 맹목을 부른다는 것(라짜로)을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부터 알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마틴을, 아이들을, 가족들을 잡히지 않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화내고 싸우고 경계하는 어른들의 말이 흘러넘칠 때 아이들은 오히려 한 마디 말도 없이 소통한다. 아이들의 대화는 아직 무음의 신체 언어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젤소미나가 마틴에게 벌의 춤을 보여줄 때도, 두 아이가 동굴 안에서 고대인의 그림자잡기처럼 춤을 출 때도, 마리넬라가 젤소미나의 무반주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도, 젤소미나의 ‘빛을 마셔보라’는 아름다운 주문을 마리넬라가 순순히 따를 때도(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키메라>의 무덤 속 아르투가 맞이한 베니아미나의 빛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젤소미나는 어떻게 그 험한 바다를 서핑보드에 의존해 맨몸으로 다녀왔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들판에 놓인 가족의 침대로 파고든다. 모든 게 젤소미나의 꿈 같았던 시간. 엄마도 아무 질문 없이 그애가 잘 다녀올 줄로 믿었다며 따뜻이 안아주고, 처음으로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젤소미나는 마틴처럼 속을 알 수 없이 그윽한 눈빛의 알파카를 바라보며 마틴의 휘파람을 따라한다.
이윽고 그들은 뼈대만 있는 침대를 남기고 증발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남루하지만 어딘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도 벽 몇 개만 남기고 낡아버린다. 언젠가 그 집은 흰수염고래의 무덤처럼 먼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는 스펙타클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대인’을 얌전히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탐욕스러운 카메라에 붙잡히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고스트 스토리> 또는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준 탁월한 애도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한 이들의 유골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집의 잔해나 이를 지켜보는 지박령 같은 존재를 통해 억겁 같은 시간을 애처로이 붙잡아두고 재소환하려던 영화들. <더 원더스>는 조금 다른 쪽으로 애도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건 이탈리아에 마지막 남았던 순수를 영원히 해방시켜 영영 잡히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게 하는 선택을 감행한 영화다. 아마도 그것이 언제나 피안으로, 신성의 영역으로 인물을 숨게 했던 로르바케르 식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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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인 부부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와 헤트비히 헤스(산드라 휠러)다. 세계 2차 대전 중이다. 일에 충실하는 루돌프 회스. 아예 집 옆에 일터가 있을 정도로 일에 진심이다. 조용한 일상.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사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사는 집 옆에 있는 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고, 루돌프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가까스로 다 읽은 한나 아렌트의 책 두 권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 ‘악의 평범성’에 대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누구나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바로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 중요한데, 생각하거나 관심 갖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 보면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한 남자를 조명한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은 재판 중에서 당당하게 “나는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남자의 궤변에 격분한다. 하지만 서서히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아이히만이 우리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이 아이히만의 모습을 포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무사유(Thougtlessness) 하나만으로도 평범한 직장인이 역사에 남는 전쟁범죄자가 된 것이다.
이 ‘악의 평범성’을 제시한 것은 후대에 엄청난 파급력을 낳는다. 당연하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잖아? 이긴 자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상대방,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이 집단이 이래서 문제야!”로 퉁칠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고 규정하면 쉽다. 잔다르크가 마녀로 지목당해 화형 당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종교라는 잣대가 명확하다. 또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맹자가 인간에겐 원죄/악한 본성이 있다고 해석한 것도 악이라는 개념이 특정한 상황 하에 만들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리고 그게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류 역사상 히틀러 같은 존재는 흔하지 않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면 악은 특정한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이를 전적으로 거부한다. 특정한 무언가가 있기에 대단하다던가 굉장히 특이한 게 아니다. 그냥 전적으로 평범한 사람일 뿐, 생각 없이 산 것의 총합체라고 정의한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 이전의 역사가들이 악에 대해 이렇게 규명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그 악의 형태가 구현되고 있다. 가령 영화에서 온갖 비명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회스 부부의 모습은 분명한 악이다. 아니면 유대인의 코트를 빼앗아 입는 헤트비히의 모습 역시 분명한 악이다. 하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무사유’의 과정을 두 측면에서 보여준다. 어떻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이 보여주듯, 조직에 흘러가는 남자(루돌프)와 타인에게 무관심한 여자(헤르비히)를 통해서. 또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역설하듯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을 강조한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다.
가장 먼저 탐구해야 할 인물은 루돌프 회스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루돌프 회스가 조직 내에 꽉 박혀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화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이 연출은 꼭 필요했다. 왜? 루돌프 회스가 실존인물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인 상황과 결부시켜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야 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악의 속성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영화는 이를 위해 건조하게 그의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령 외부 협력업체가 와서 회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 속 두 남자는 그냥 대표자들끼리의 대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그가 직장인으로 얼마나 자기 하는 일에 투신하는지를 묘사한다. 좀 필요 없어 보이는 전화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 특별한 설정이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우슈비츠 옆에 사무실이 있고 거기서 산다는 특징은 가정적이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 회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루돌프라는 인물에게 가장 첫 번째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업무나 가정의 안녕이 아니다. 나치라는 조직이다. 나치의 일원으로서 소속됐다는 한 가지 사실이 이 사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 왜? 초반부터 영화가 이 인물의 내면을 이미지로 강조하고 있다. 루돌프 회스가 누군가에게 축하받는다. 그런데 그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이 나치 조직원들이다. 얼핏 보면 회색 옷 입은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된다(심지어 배경도 회색 저택이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떨어트려서 누가 루돌프 회스인지 알 수 없게끔 묘사하는 것이다. 축하받는 사람과 하는 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명백하게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해진 행동을 흐려놓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보다 조직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이 인물이 직장인으로서의 활동반경과 쉴 수 있는 집의 바운더리가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산다는 것도 이상한데 거기서 일을 한다는 건 더 기괴하다.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조직에 잡아먹힌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설정이 되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루돌프가 전출을 가니 마니 하는 설정이 들어간 것도 흥미롭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굳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안 간 거라서 굳이 알 필요도 없고, 갈등이 격정적이지도 않다. 영화의 기-승-전-결이 이 전출 여부를 두고 쌓아 올린, 소위 ‘빌드업’ 한 것도 아니라 맥 빠지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일이 이 가족에게 끼친 영향이 중요하다. 조직이 루돌프 회스의 가족공동체를 해체시킬 정도로 주인공(회스)에게 절대적이었다는 의미다. 나치와 히틀러의 말이라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엔딩신에서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내면의 무언가를 갖고 있지만 결국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역시 인물의 이런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무의식이 영화의 플롯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루돌프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출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초반 루돌프가 축하받는 장면과 후반부 나치 조직원들끼리 회의하는 장면은 수미상관처럼 반복된 것 같다. 왜? 회의를 주체하는 장면을 가장 첫 신에선 보여주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부감 숏으로 화자를 숨긴 것이다. 이다음 장면을 보면 영화 안의 회의 주제에는 회스가 제시한 근거가 중요하게 설정되어 있다. 다음 장면은 회스가 자기 의견을 역설하는 장면을 넣으면서 회의의 끝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돌프 회스가 회의에서 중요하다는 것만 묘사하고 그 안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루돌프 회스가 이 당시 나치라는 조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에도 근거를 찾을 수 있으나, 영화 초반부를 생각해 보면 수미상관처럼 조직 안의 루돌프 회스를 강조하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운드의 힘만 믿은 게 아닌 비주얼의 힘이 조직에 휩쓸리는 루돌프의 모습을 보여줬다. 악의 평범성을 드러내는 연출인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은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 회스다. 이 인물이 이 영화에 차지하는 물리적 비중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그 비중치고 영화 안에서 유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 인물은 플롯 전면이 아닌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이야기를 담당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근거는 간단하다. “내가 이 집을 가지려고 17년 동안 고민해 왔다!”라는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 이 인물의 동선이다. 이 인물은 집 밖에 멀리 나가지 않는다. 루돌프가 타 지역으로 나가거나 헤트비히 어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도착한 것과는 대비된다. 전업 가정주부인 것으로 보이는 헤트비히. 남편 루돌프에게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는다. 후반부 루돌프와의 갈등에서도 이 사람은 집 밖에 나가기 싫다. 남편을 속여서라도, 유대인들 고용해서라도 만든 집이니 만큼 애착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집에 박혀있는 헤트비히.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면 자기 집 안에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능통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인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물은 집안사정에 그렇게 밝은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근거. 이 사람이 집 안에 일어나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증거는 대놓고 드러난다. 이 영화의 사운드 지분 중 크다고 볼 수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도 그 예시 중 하나다. 그냥 ‘왜 이렇게 울까?’ 한 마디면 엄마로서의 역할이 끝나나? 후반부에 남자 형제들끼리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다투다 형이 동생을 장난으로 가두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서 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지만 어머니 헤트비히는 알아채지 못한다. 중후반부 폴란드 소녀가 사과를 수용소 근처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도 이 헤트비히는 인기척을 느끼지만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강가에 재가 떠다니는 것도 헤트비히가 아이들을 씻는 장면은 있지만 원인을 예방한 다 던가 하는 진단이 없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취해있기만 하지 실질적으로 ‘일 잘한다’라는 말을 듣기엔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영화 후반부에 묘사되는 루돌프 회스의 불륜은 이 인물(헤트비히)의 무능력함을 암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어디 다른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루돌프의 집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불륜이 이어진다. 루돌프의 아이가 “아빠 땀 냄새나!”라고 말할 정도로 이 남자의 불륜은 이 가정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남편이 속였기 때문에 불륜을 저지른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실제로도 가정적이지 않은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트비히 의 대사 “오래전에 (전출이) 결정 난 것으로 보이는데 왜 말하지 않았냐”라는 말은 과연 그녀가 남편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집안이 화기애애하다는 시각적인 만족감에 도취되어 가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분명한 패착이다. 마치 나치 독일과 히틀러가 집권하고 난 다음의 모습이 1차 대전 전후의 독일을 재건하고 있다고 믿었을 독일인들처럼 말이다. 글쓴이가 헤트비히가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을 비유하고 있다는 건 여기에서 온다. 나의 행동이 독일의 재건을 위해서라는 자기기만, 가정에 착실한 어머니라는 자기기만이 나치당의 지지자들과 헤트비히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미를 부여하니 영화 안의 두 대사가 더 와닿는다. 유대인 학살이 기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너희들(유대인)은 나 덕에 편하게 사는 거야”라며 남편이 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 폭언을 하는 것. 그녀가 가진 모순을 이 영화가 폭넓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 후반부에 루돌프가 헤르비히에게 “우리의 성과”라는 식으로 “우리”를 강조하는 것이 흥미롭다. 당연하다. 자국민들을 속인 나치의 군인들도 당연히 문제가 있지만, 심정적 동조자로서 학살에 ‘무관심’과 ‘자기기만’으로 참여한 당시 독일인들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단지 일상만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시무시한 좋은 각본의 힘이다.
두 캐릭터 말고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중요한 것은 카메라와 사운드다. 우선 카메라. 이 영화가 카메라로 일상을 담는 방식이 특별하다. 그냥 일상적인 걸 담으면 모르겠는데 어디에서 훔쳐보는 것처럼 화면을 담았다. 실제로 검색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의 촬영 기법을 찾을 수 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많이 설치한다. 대신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건 중요하다. 억지로 드라마를 배격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대놓고 있다. 그럼 그건 대놓고 영화다. 배우들이 서로 얼굴 보면서 연기한다. 감정의 이입을 유발하고 곡진한 무언가를 탐구한다는 것. 이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 대치되는 부분이다. 관심을 떼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응집성을 위해서라도 감정이입을 유발하면 하고 싶은 걸 보여주기 어렵다. ‘얘 나쁘지?’가 되는 순간, 인물의 표정이 보이는 순간 비명의 의미가 옅어진다. 영화가 그은 선을 스스로 넘는 것이다. 촬영 구도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확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이 카메라를 활용한 연출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각적인 것으로 사방이 막힌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다. 모든 샷에서 벽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벽이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서 굳이 벽을 보여준다는 게 핵심이다. 중후반부에 어떤 남자가 벽 너머의 풀숲에 어떤 것을 뿌리는 장면이 있다. 일반적인 카메라워킹이라면 벽을 등지고 찍는 게 맞다. 그런데 굳이 이 장면에서 벽과 남자, 풀숲이 같이 등장한다. 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더 나아가 청각적인 요소는 벽과 충돌하며 영화에 균열을 낸다. 남자가 숲에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 어떤 남자가 비명인지 절규인지 질문인지 모를 소리를 지른다. 곧바로 총성이 들린다. 카메라는 여기서 총에 맞는 사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벽만 보여준다. 마치 소리가 벽에 부딪힌 것처럼. 그 대신 관객들은 상상력이라는 게 있어서 벽과 소리만 보여줘도 이 상황이 어떤 일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사운드를 강조하는 이유? 아니 그 이전에 사운드를 어떻게 강조했을까? 벽의 이미지를 강하게 보여줘서 이 영화 안에 쳐져있는 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에게 벽의 의미는 간단하다. 무관심이라는 벽이다. 계속해서 안에 있는 야채니 꽃이니 라일락이니 수영장이니 하는 것들을 보여주지만 무관심이라는 벽이 인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벽의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닿고 있다. 악의 평범성을 이 영화가 사운드와 카메라의 존재로 보여준 것이다. 이 벽의 존재 덕에 카메라는 무엇을 찍을지에 대한 고민도 끝냈다. 분명한 악에 대해서는 카메라로 찍고 희생자들은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악에 익숙한 악인이 되는 셈이다. 이 맥락에서 열 카메라로 표현한 소녀를 설명할 수 있다. 악이 아닌 무언가의 존재,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사과를 주는 따뜻한 마음이 이 영화의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선의가 된다. 사운드만 부각되는 것이 아닌 촬영에 의한 연출이 영화의 주제를 강조했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영화의 핵심을 담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 속 비명이 틈입한다. 이 비명이 가지는 임팩트는 영화를 본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을 말할 것 같다. 비명도 비명 나름이다. 어떻게 기괴한 소리만 다 골라서 삽입했는지 이런 요소들도 다 감독의 감각이 크게 주요한 것으로 보인다. 전작 <언더 더 스킨>에서 외계인(스칼렛 요한슨)이 지구인들과의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영화에서 사운드로 치환된 셈이다. 이 선택은 아주 좋았다. 학살의 진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다가가게 한다. 원초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우리 일상 속에서 비슷한 것만 보면 생각난다는 의미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감정적인 임팩트로 관객에게 큰 효과를 낸 것과는 다르게 신기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청각을 아주 잘 활용했다. 이 영화 예술의 근본에는 무성영화라는 게 있다. 이 말은 즉슨 영화라는 예술 자체가 시각적인 걸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인지심리학에서 인류는 시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는 예술이 가진 두 특징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청각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하지만 영화가 청각적인 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화룡점정은 오프닝과 엔딩에 있다. 이 영화의 청각적인 요소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 비명이다. 유대인들의 절규가 담겨있다. 오프닝을 본다. 오프닝은 검은색 화면인 채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다. 첫 장면부터 청각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힘을 꽉 주는 것이다. 이 기점으로 영화의 청각적인 것에 대해 연이어 생각해 보면 이후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대신 시각적인 부분이 청각적인 장면과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럼 비명소리가 이 이야기의 이전에 깔려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의 엔딩으로 날아간다. 루돌프가 헛구역질을 한다. 현대의 박물관 노동자가 건물을 닦는다. 닦는 소리가 부스럭거린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시점으로 돌아와 루돌프 회스가 어둠으로 걸어간다. 시점이 세계 2차 대전 한가운데로 돌아간 것이다. 그다음이 엔딩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오프닝처럼 청각적인 요소만 부각한다. 영화 후반과 초반이 비명소리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간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일상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타임라인인 것이다. 영화의 과거와 미래, 오프닝과 엔딩이 청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영화 안에서 비명소리가 청각적인 요소로 강조된다는 것. 그렇다면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는 곧 비명과도 같았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악인들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 만든 비극이 홀로코스트라고 말한 셈이다.
괴물 같은 영화다. 음향, 촬영, 각본, 연출 모든 부분에서 한 부분의 극점에 다다른 능력을 보여줬다. 심지어 산드라 휠러를 위시로 한 배우들의 연기도 굉장히 뛰어나기까지 하니 무결점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꼽자면 극의 재미를 부각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위험부담(?)에도 글쓴이가 장점으로 확신하는 것이 있다. 정말 필요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만큼 징글징글하고 강박적으로 관객에게 질문한다. 사실 이 사람들이 왜 인간 근처도 가지 못하는지는 영화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하는 부분은 곧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도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했다. 정치적인 행위부터 시작해 불멸하게 남는 여러 기록까지, 또 공/사적인 공간의 필요성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온다고 역설했다. 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아주 속 깊게 우려낸 사골국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화하는 사소한 것들, 공간들, 하녀의 움직임부터 루돌프 회스의 동선과 공간까지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조건>의 목차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영화다. <액트 오브 킬링>과 함께 과거의 비극이 단지 과거에만 국한될 것이 아닌, 날카롭고 깊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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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왕실 탈출 전 3일간의 이야기
작년에 시사회를 갈 때부터 영화 <스펜서>의 예고편과 티저 영상이 항상 광고로 나오기도 했었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 역시 기대되는 게 컸어서 언제 개봉하나 기다리고 있었던 영화 <스펜서>. 사실 예고편을 볼 때부터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스펜서는 무슨 의미일까? 왜 영화 제목이 스펜서 일까? 궁금했었는데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본래 성이 스펜서였다. 이렇게 무지할수가! 상영관에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생애를 검색해서 쭉 훑어봤다. 영화 <스펜서>를 보기 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고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스펜서> 시놉시스영화 <스펜서>는 왕비가 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찾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의 전 생애를 다룬다기 보다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3일 간 펼쳐지는 왕실 행사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감정변화를 큰 이야기 줄기로 보여주고 있다. 3일간 자신의 본가 근처에 있는 왕실 별장에서 머물면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겪은 부담과 압박 그리고 해방에 대한 열망을 담아내고 있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스펜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보는 내내 우울하다
영화 <스펜서>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딱 들었던 생각은 ‘금요일인데 우울하다’ 였다. 분명 엄청난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영화의 내용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압박감과 부담감을 다룬 내용이다보니 보는 내내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기대를 충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분위기가 너무 강력해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 같다. 이렇게 캐릭터의 우울함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던 경험이 별로 없어서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굉장히 따뜻하고 행복한 기념일인데, 영화 <스펜서> 속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압박감 그 자체인 크리스마스여서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렇게 우울함과 안타까움을 극도로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 전 세계 27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머리스타일부터 제스처, 그리고 억양까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겪은 거식과 폭식증, 연약한 내면의 모습과 이곳을 탈출하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같은 상반된 요소들을 굉장히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화려함 속에 가려진 압박감을 표현하다
인스타를 보다보면 영국 왕실의 규칙이나 관행들을 엿볼 수 있다. 남자 아이들은 어떤 옷을 입어야하고, 왕비나 여성들은 어떤 옷, 그리고 대공이나 왕들을 어떤 옷을 입어야하는지 그 드레스코드들이 항상 정해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이 반영되어 변주가 가능한 것인줄 알았는데 영화 <스펜서>를 보니 아니었다. 만찬 때 입어야 할 옷, 교회를 갈 때 입어야 할 옷, 저녁 식사 때 입어야 할 옷 등 하루에도 매번 옷을 갈아입어야 했고, 그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상부에 보고가 올라가는 타협의 여지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체제였다.
모두의 선망을 받고 부러움을 받는 자리라고 하더라도 개인의 의사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영화 <스펜서>에서는 옷과 음식들로 잘 표현하고 있었다.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면 안되고, 코스 요리에 맞춰서 음식을 먹어야 하며 정해진 식사 시간이 존재하는 이 융통성 없는 식사라니. 저런 곳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에 신기하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혼란함과 불안함을 표현하다
영화 <스펜서>를 보면서 생각났던 작품은 영화 <블랙스완>이었다. 영화 <블랙스완>은 백조 연기는 잘하지만 관능적인 흑조 연기에는 약간의 부족함이 있는 주인공이 정신분열 증세를 겪으면서결국에는 흑조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지만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스릴러 작품이다. 물론 영화 <스펜서>가 스릴러 물은 아니지만 약간의 환각 증세를 보이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애나는 영국의 왕 찰스에게 살해당한 왕비 앤의 모습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앤의 환영을 계속해서 본다. 그리고 자신을 잘 챙겨주던 메기의 환상 역시 보게 된다. 환영 속 메기와 앤은 다이애나 자신을 찾아가라며 용기와 응원을 북돋아주고 결국 다이애나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진주목걸이와 드레스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아들들을 데리고 별장을 떠난다. 자유롭게 떠난 그들은 가장 먼저 치킨을 먹으러 가면서 그 자유를 만끽하고, 다이애나는 스스로를 스펜서라고 다시 부르며 왕실의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분명 영화 자체는 자유를 향해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지막 다이애나의 씁쓸한 미소를 보면서 그녀의 마지막 생을 생각하게 되니 극 전반에 퍼져 있던 우울감과 압박감을 날려버리진 못했던 것 같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왕실 탈출 전 3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스펜서>. 그녀가 어떤 압박감을 견디다가 왕실을 떠나 본인의 이름을 다시 찾게 됐는지 다이애나의 감정 변화를 너무나도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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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봄, 참고하기 좋은 인테리어 영감을 주는 영화 9편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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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간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신청 받은 주제는 바로 '베이비 드라이버' 영화입니다.
이 게시물 혹은 씨네픽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동일 내용의 콘텐츠 게시물에
자신이 보고싶은 영화에 대해 적어주신다면 다음 콘텐츠를 올릴 때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1:1 맞춤 영화 큐레이션 시작해볼까요?٩( ᐛ )و
베이비 드라이버
ⓒ 네이버 영화
synopsis
귀신 같은 운전 실력, 완벽한 플레이리스트를 갖춘 탈출 전문 드라이버 베이비.
어린 시절 사고로 청력에 이상이 생긴 그에게 음악은 필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 같은 그녀 데보라를 만나게 되면서 베이비는 새로운 인생으로의 탈출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같은 팀인 박사, 달링, 버디, 배츠는 그를 절대 놓아주려 하지 않는데...cine pick!
스타일리쉬한 연출과 신선한 액션과 음악이 만나 색다른 카체이싱 영화를 선보인 <베이비 드라이버>. 현지 개봉 당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제치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제작비를 훌쩍 뛰어넘는 1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기록하기까지 하였다.
모가디슈
ⓒ 네이버 영화
synopsis
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리는데…cine pick!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CG 없이 실제로 배우들이 운전하며 촬영해 리얼리티를 더했다. 모로코 올로케이션으로 진행해 영화의 스케일과 웅장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포드 V 페라리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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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매출 감소에 빠진 ‘포드’는 판매 활로를 찾기 위해
스포츠카 레이스를 장악한 절대적 1위 ‘페라리’와의 인수 합병을 추진한다.
막대한 자금력에도 불구, 계약에 실패하고 엔초 페라리로부터 모욕까지 당한 헨리 포드 2세는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박살 낼 차를 만들 것을 지시한다.
세계 3대 자동차 레이싱 대회이자 ‘지옥의 레이스’로 불리는 르망 24시간 레이스.
출전 경험조차 없는 ‘포드’는 대회 6연패를 차지한 ‘페라리’에 대항하기 위해
르망 레이스 우승자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 ‘캐롤 셸비’(맷 데이먼)를 고용하고,
그는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지만 열정과 실력만큼은 최고인
레이서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를 자신의 파트너로 영입한다.
포드의 경영진은 제 멋대로인 ‘켄 마일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자신들의 입맛에 맞춘 레이스를 펼치기를 강요하지만
두 사람은 어떤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불가능을 뛰어넘기 위한 질주를 시작하는데…cine pick!
토론토 국제 영화제, 런던 국제 영화제,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으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음향편집상과 편집상을 수상하였다. 많이 알수록 더 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에 미리 관련 이야기를 본 후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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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 얼마 남지 않은 물과 기름을 차지한 독재자 임모탄 조가 살아남은 인류를 지배한다.
한편, 아내와 딸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사막을 떠돌던 맥스(톰 하디)는
임모탄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가고, 폭정에 반발한 사령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인류 생존의 열쇠를 쥔 임모탄의 여인들을 탈취해 분노의 도로로 폭주한다.
이에 임모탄의 전사들과 신인류 눅스(니콜라스 홀트)는 맥스를 이끌고 퓨리오사의 뒤를 쫓는데...cine pick!
2015년에 개봉해 3번이나 재개봉을 한 많은 이들이 꼽는 최고의 카체이싱 영화이다.
미국의 유명 영화 평가 사이트 로튼토마토와 국제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2015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섬세한 미술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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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빈 디젤)은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형제 제이콥(존 시나)이 사이퍼(샤를리즈 테론)와 연합해
전 세계를 위기로 빠트릴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패밀리들을 소환한다.
가장 가까운 자가 한순간, 가장 위험한 적이 된 상황
도미닉과 패밀리들은 이에 반격할 놀라운 컴백과 작전을 세우고
지상도, 상공도, 국경도 경계가 없는 불가능한 대결이 시작되는데…cine pick!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9번째 작품이자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다.
화려한 액션과 카체이싱 그리고 스펙타클한 스토리와 전개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울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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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열광하는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서울.
패션은 올드 스쿨! 음악은 감성 충만! 레이싱은 월드 최강!
상계동 슈프림팀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VIP 비자금 수사 작전에 투입된다.cine pick!
1980년대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올드카부터 패션 그리고 음악까지!
스피드 있는 전개와 코믹 요소가 가득한 영화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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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만든 수작인데 빛을 보지못한 숨겨진 비운의 명작
안녕하세요 빛을보지못한 숨겨진 명작을 찾아서....첫번째 2007년작 영화:스카우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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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다운 SF 신작 "미키 17" / 로버트 패틴슨 / 인류의 미래와 존재 윤리 / 대한민국 평행이론 / 분노 유발 가능성 주의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미키 17"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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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종착역> 메인 예고편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시연,연우, 소정, 송희는 '세상의 끝'을 찍어 오라는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지하철 1호선 신창역으로 향한다. 웃음이 끊기지 않던 친구들은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여정에 점점 지쳐가고, 낯선 곳에서 14살 첫 여름방학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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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죽을 때까지> 메인 예고편
호화스러운 별장, 다이아몬드 목걸이, 아름다운 장미…
완벽한 결혼기념일을 보낸 엠마와 남편.
다음 날, 사랑하는 남편이 엠마의 눈 앞에서 죽어버린다.
죽은 남편과 단 둘이 별장에 고립된 엠마.
곧이어 정체 모를 괴한까지 들이닥치고
미쳐버릴 정도로 끔찍한 상황이 연속 되는데…
미칠 틈도 혼란스러울 틈도 없다!
지금 당장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