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2024-08-19 21:21:04
우리 숨바꼭질해, 그리고 다신 잡히지 마
알리체 로르바케르, <더 원더스> 리뷰
<행복한 라짜로>(2018)와 <키메라>(2024) 이후에야 우리에게 도달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초기작 <더 원더스>(2014)는 어쩌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키메라>까지 무르익어 간 로르바케르의 재능이란 주로 노골적이면서도 섬세한 대비를 활용하는 재주에 있었다. 이쪽과 저쪽, 차안과 피안, 도시와 시골, 빈자와 부자, 순수와 교활을 빈번히 오가며 비추는 데에 누구보다 능숙했던 로르바케르이기에, <더 원더스>의 모호하고 꿈과 같은 상징들은 더욱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의도된 침묵, 도망친 벌들과 낙타, 빛을 마시는 동작과 동굴에서의 춤 등은 메인 플롯인 고립된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불쑥불쑥 난입하며 알쏭달쏭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속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었다거나 일부러 에둘러간다는 느낌 없이 순진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실증에서 출발해 환상을 얹은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임을 생각해보면 대개 직관적이고 거칠은 쪽에서 부드러운 은유 쪽으로 나아가는 게 많은 창작자들이 밟는 전철일진대,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이 가장 은유적이었고 지금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을 발전시키면서 일종의 역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더 놀랍다.
<더 원더스>는 군견을 데리고 밤길 수색을 나온 군인들이 등장하는 이색적인 오프닝부터 ‘이야기’에 대한 집중력을 단번에 끌어올린다. 이 군인들은 나머지 서사의 진행과 전혀 무관하며 주연 인물들과 엮이지도 않는다. 이야기 바깥에 위치한 그들은 외딴 곳의 민가를 발견하고 “저런 곳에도 집이 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순간만 등장할 뿐이다. 눈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불을 비춰 시작을 알리는 이들은 곧 우리에게 전해져 올 ‘이야기’를 낭독할 전기수의 바람잡이, 연극의 첫 막이 시작할 때 열리는 무대의 장막,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이끌어낼 동생 두냐자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군인의 외침 덕에 우리는 “저런 곳”의 거주민인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즉시 그들의 ‘이야기’가 해석될 수 없는 동화처럼 미완으로 남으리란 사실을 직감한다.
그 이야기란 이렇게 시작된다. 한밤중 군인들의 수색으로 집 밖이 훤해지자 여자아이들이 하나씩 깨어난다. 큰딸인 젤소미나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떼쓰는 동생 마리넬라를 단도리하고 더 어린 쌍둥이 동생들은 덩달아 깬 금발의 젊은 어머니에게 매달린다. 젤소미나는 동생들을 달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의 하나뿐인 TV를 점령하고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를 익숙한 듯 일으켜 침실로 올려보낸다.
양봉업자인 아버지 볼프강은 문명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강제하는 가부장이다. 장녀답게 눈치 빠른 젤소미나는 벌을 돌보고 채밀기 밑의 꿀 양동이를 한밤중에라도 갈아줘야 하는 큰 책임을 자연스레 지게 된다. 딸이라기보단 특급 일꾼을 대하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젤소미나는 부녀 간의 유대를 찾아내고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 안젤리카(알바 로르바케르)는 대체로 다정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느라 젤소미나에게 면밀히 신경써줄 겨를이 없고, 남편의 기행, 일방적인 통보, 대책 없는 금전 감각에 질리고 포기한 듯 대체로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양봉과 가사에 밀려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을지 혹은 다녀본 적은 있을지 걱정스럽고, 직접적인 폭력이나 악의는 없더라도 정황상 아동학대와 노동 착취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에 불과 열두 살의 젤소미나는 덜렁 놓여있다. 종종 창고에서 젤소미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동생 마리넬라와는 살짝 터울이 지고, 또래 친구 조이아와는 많이 다른 가정환경 탓인지 살짝 어색한 거리감이 있기에, 그애는 너무나도 철저히 혼자다. 언제나 고독했 라짜로와 아르투처럼.
토스카나의 새파란 바다와 드넓은 평야는 무척 아름답지만 그것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시점에 이미 불가했다는 걸 현대의 관객은 알고 있다. 그러나 볼프강은 아직 다가올 운명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전통적 농법과 양봉을 고집하느라 늘 돈도 모자라고, 이웃들과도 척 지고, 아침마다 집 밖 침대에서 깨어나 사냥꾼의 총성에 미친듯이 화내며 모두를 쫓아내려 한다. 볼프강은 외부에서 밀려들어온 자본에 ‘농민끼리 단결해 맞서야 한다’고 펄펄 날뛰면서 거대한 흐름에 홀로 맞서고자 한다. 굳건한 반골의 의지만큼은 존경스러우나, 아직 미성년인 자식들마저 투쟁에 억지로 동원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외골수 아버지와 힘이 부친 어머니 사이, 과중한 노동과 외로움에 조용히 짓눌려가는 젤소미나에게 어느날 갑작스레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두 번이나 가해진다. 하나는 그 시골의 계곡까지 커머셜 쇼 프로그램 광고를 찍으러 온 인기 배우 ‘밀리’,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데려온 독일 소년 ‘마틴’이다.
아름다운 백금발에 여신 같은 차림의 밀리(모니카 벨루치). 그는 네 자매의 이름을 물어봐주고 가장 수줍어하는 젤소미나를 다정히 쳐다보며 예쁜 머리핀을 선물한다. 밀리와의 만남으로 인해 젤소미나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를 더욱 갈망하고 밀리가 홍보하던 ‘전원의 기적’ 쇼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남몰래 품게 된다. 그 와중 소년원에 다녀온 아이들의 재사회화를 위한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틴이 이 가족에 배정되는데, 기관 담당자가 “어긋난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방화나 절도 전력이 있다고 태연하게 부연하자 엄마 안젤리카가 딸들이 걱정되지도 않냐며 볼프강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네 딸들은 커가는데 진정한 일꾼이 되어줄 ‘후계자’ 아들은 태어나지 않자 부족한 노동력에 초조해진 볼프강이 제멋대로 위탁(이라고 말하고 합법적 아동착취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을 신청해놓곤 당일이 되어서야 말하는 걸 잊었다며 실토한 것이다.
휘파람으로 노래할 줄 알지만,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불청객인 마틴. 마리넬라가 “잘생겼다”며 소근거릴 정도로 진한 외모로 소녀들에게 이상한 긴장을 불러일으킨 마틴. 로르바케르 영화 속 꾸준히 수수께끼의 존재로 그려지는 ‘이방의 남자’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직계 가족이 아닌 성인 여성 코코 외에 한 사람의 군식구가 더 늘자 젤소미나 가족의 역학은 빠르게 변화한다. 키는 작지만 힘센 마틴을 보며 아버지가 흡족해하는 표정, 자기들을 보며 “계집애들이란!”하고 내뱉는 표정을 비교하며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단박에 아버지의 신뢰를 뺏어간 마틴을 향한 젤소미나의 질투, 아버지를 향해 피어나는 반항심, 그런 딸을 두고 “쟤가 없으면 난…” 안될 거라며 친구에게 조용히 드러낸 볼프강의 진심, 마틴과 젤소미나처럼 외로운 이들끼리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서로를 향한 호감 어린 호기심, 잠깐씩 어그러지는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우애까지. 어지러이 뒤섞이는 감정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강경하게 젤소미나가 나가고 싶어하는 ‘전원의 기적’ 쇼에 신청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아이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격정에 몰래 신청서를 써낼 각오도 불사한 채다. 꿀을 팔러 나갔던 어느 날 시내에서 마주친 폭풍우는 잦아들지 않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몸으로 벌통을 꽉 누른 트럭 안에서 젤소미나는 돌연 “우리 거기 참가해요”라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건 더이상 삶의 고독과 혼란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진 아이의 몸을 뚫고 나온 절규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전원의 기적’ 쇼에 양봉업 대표로 출연하게 되긴 한다. 젤소미나가 몰래 신청하고 심사위원이 다녀갔단 걸 뒤늦게 알게 된 볼프강이 말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상처받긴 했지만. 여기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특유의 아주 섬세한 터치가 정념을 제대로 건드린다. 아이들이 꿀을 엎고 마리넬라가 다치고 심사위원을 맞이하고 난장판을 수습하는 한나절 동안 볼프강이 시내에 나가 큰딸에게 선물할 낙타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감정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이때, 마틴의 등장 이후 소원해진 큰딸과의 사이를 풀고자 아버지가 기껏 드물게 다정을 발휘했는데 이 ‘선물’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안젤리카는 힘겹게 모은 돈을 고작 낙타 따위에 다 써버린 남편에 분노하며 이번에야말로 헤어지겠다고 선포하고, 젤소미나는 아버지가 가장 싫어할 만한 유형의 외부인 - 지적 권위를 갖고 자본의 호위를 받는 남성 심사위원 -을 들였다며 고백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낙타를 갖고 싶어했던 큰딸은 이제 그게 ‘불법’이란 걸 알게 됐고, 아버지가 뭔가 이상한 사람이란 걸 의식하며 바깥 세계로의 탈주를 염원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무엇이 됐든 분명 자신이 질 싸움이란 걸 차차 직감하고 있는 중이다. 코코가 볼프강에게 맞서며 젤소미나가 불쌍하다고 했을 때, 친구 에이드리언이 젤소미나를 밀라노로 데려가겠다고 농을 던지고 젤소미나가 수줍게 좋다고 할 때, 볼프강의 고집 센 얼굴 위로 스쳐가는 회한이나 자기의심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반항에 볼프강은 망연자실 밖으로 나가 낙타를 끌어내려다 포기하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혼자 노동을 계속한다.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젤소미나의 표정 역시 말이 아니다. “아빠 제가 뭘 할까요? 저 뭘 하면 되나요?” 그렇게 받고 싶던 아버지의 사랑이 주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걸 단박에 기뻐하며 받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눈물 흘리며 외치지만 아버지는 “하지 마”라며 불퉁하게 거절할 뿐이다.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만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여기는 아이를 보며 서럽기도 하지만, 이 어른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되는 우리가 과연 볼프강의 속좁음을 탓할 수 있으랴. 그도 안젤리카도 ‘바깥’의 세상에서 된통 두들겨맞고 자신들만의 낙원을 구축해보려다 실패한 어른들임을 영화는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더 원더스>는 아이의 혼란과 상처뿐 아니라 어른들의 상처도 조밀히 들여다보는데, 네 딸들의 부모만큼이나 코코라는 어른의 존재도 흥미롭게 다뤄진다. 처음에는 코코가 안젤리카의 사촌 혹은 먼 모계 친척인가 싶었지만, 에트루리아인의 흑발 흑안과 로마인의 도드라진 ‘금발’을 늘 코드화하는 로르바케르의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친척은 아닐 듯 싶다. 그렇다면 볼프강과 안젤리카, 코코와 에이드리언은 모두 원래 밀라노 출신의 소꿉친구였다가 각자의 방황 끝에 긴 사연을 안은 어른이 되어 토스카나 시골로 찾아들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얹혀살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며 볼프강에게 싫은 소리를 듣던 군식구 코코는 분명 제대로 된 어른은 아니다. 젤소미나 편을 들며 “아이들을 그만 부려먹으라”며 이제는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볼프강에게 화를 내긴 하지만 정작 코코는 부모의 부재시 보호자 노릇을 젤소미나만큼도 해내지 못한다. 이상한 요가 동작에 심취하느라 마리넬라가 채밀기에 손을 베일 때에도 아이들 옆에 없었고, 병원이나 방송사 관계자 같은 ‘진짜 어른’들 앞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도 못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기들과 함께 집에 남은 엄마 안젤리카를 대신해 섬에서 촬영하는 ‘전원의 기적’ 프로에 함께 참가한 코코는 바로 그곳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가난하고 힘 없는 목축업자, 양봉업자, 낙농업자 등등 가지각색의 가구를 불러다놓고 우스꽝스럽게 치장시킨 쇼 프로. 그 옛날 고래의 무덤으로 불렸다는 자연 동굴 안에서 인공적인 불빛과 스탭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치 가장 무도회처럼 동물 탈이며 월계수 화관을 쓴 농민들은 얼빠진 채 긴장한 채 서있다. 사회자인 밀리는 시골 소녀들을 불러내곤 과장된 말투로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라 호명하더니, 정작 그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름다운 전통 민요를 부를 때는 살며시 옆으로 빠져 피곤한 얼굴로 귀를 막아버린다.
또 가족들 사이에선 그토록 폭군 같던 볼프강은 십수 대의 카메라와 양복 입은 도시인들 앞에서 굳은 채로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더듬거리며 허망한 믿음을 역설한다. 몸으로 익힌 신념이, 무언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가장 천박한 자본이 가장 고귀한 노동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후 굳어진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의 단단한 육체 안에서 부글거리고 있지만 비극적이게도 볼프강에겐 그것을 ‘제대로’ 설파할 만큼의 학식이 없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어 “보여줄 공연이 있다”며 젤소미나가 황급히 밀리를 불러세운다. 밀리를 다시 보길 몇 달 내내 바라온 젤소미나가 입안에서 벌을 꺼내 얼굴에서 춤추게 하는 자신의 특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애의 진지한 예술은 아버지가 방금 전 기인 철학자처럼 더듬거린 신념과 함께 무참히 무시당한다. 부녀는 ‘수습’의 대상으로 격하될 뿐이다.
그 모든 기이한 난장판을 지켜본 코코는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다. ‘진짜 이탈리아인의 전원생활’을 조망하고 격려한다는 TV 쇼의 명분은 다 허울 뿐이고, 이제는 농민 개개인의 삶까지 (볼프강이 보던 TV 속 조잡한 재연 프로그램처럼) 서사화되어 도시인들의 한낱 유흥으로 무참히 착취되고 무시당할 거란 진실을. 그래서 코코는 돌연 울기 시작한다. 방금 전 밀리와 도시인들에게 민망하리만큼 외면당한 젤소미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코코는 “넌 정말 예뻐,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어”를 몇 번이고 말해준다. 그 순간 코코는 진실을 먼저 깨닫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외마디를 외치는 선지자다. 그 외침은 젤소미나에 투사한 자기 젊은 시절에 보내는 위무이기도 하다. 곧이어 “나도 아름다워. 난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라고 발작적으로 반복하는 그를 보며, 관객은 코코 또한 정말이지 고단하고 외롭고 아픈 여자였단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코코는 젤소미나의 (가장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물로서 존재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동생 마리넬라, 루나, 카타리나처럼 엄마의 아름다운 금발을 물려받지 못한 큰딸이 계속 제 의지에 반해 유폐된다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을, 불쌍한 흑발의 미친 여자 코코가 대신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에트루리아인 이웃들에 찰싹 붙어 엮여있으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고 말하던 볼프강. 우리 ‘밀라노인’들은 누가 신경 써준 적 있냐는 볼프강의 서러운 고함에 에이드리언은 ‘밀라노인!’이라 곱씹으며 한 번도 그렇게 분류된 적 없다는 듯 낄낄 웃는다. 익숙지 않은 호명은 곧 그들이 표준화된 복지 체계 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지방/민족/인종 출신이란 의미다. 도시 생활과 자본의 침범에 상처 받고 그 어떤 ‘문명’의 덕도 보지 못한 어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때론 애완견을 부르는 듯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란 모멸적 호칭을 빌려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 한다.
섬에서 코코에게 기습적으로 키스 당한 마틴이 온 힘을 다해 도망친 다음 실종되자, 기관 담당자가 방문해 볼프강과 언쟁을 벌이다 “상식적인 규율이란 게 있는데 알기를 거부하시네요.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요”라며 잔인한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그는 바로 직전 자기 관리상의 허점을 숨기기 위해 “아이에 대한 기록은 싹 덮어서 지워버렸다”고 부끄럼없이 자료 조작과 공모 행위를 털어놓은 직후다. 위선자 같은 그가 잘 안다던 ‘세상 물정’이란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법칙일까.
또한 이 담당자는 앞서 마틴을 데려왔던 날, 허술한 농가를 한 차례 둘러보곤 제대로 된 교화를 위해 ‘체계성’ 있는 기록과 교육을 제공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즉 다시 요약하자면 <더 원더스>는 결국 재래성과 체계성의 대립에 관한 영화다. <키메라>를 제작하며 에트루리아의 유적과 무덤가에서 자매와 뛰놀던 유년기 기억을 참고했다고 밝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초기부터 ‘발전’된 문명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두운 구석의 시간에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질문은 누가 어떻게 정상성을 정했는가부터 시작된다. 어떤 질서가 문제와 문제 아닌 것,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 발전한 것과 낙후된 것, 문화재로 보존될 것과 쓰레기로 퇴거당할 것을 구분하고 있는지, 우리가 뭔가를 스스로 판단한다고 착각할 때 그 권위에 실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더 원더스>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기 직전, <행복한 라짜로>는 밀려나는 중, <키메라>는 밀려난 직후를 다루는 연작이라 해도 좋겠다. <키메라>의 톰바롤리들이 “일만 하다 돌아버린 노인”이라고 조롱하던 피로의 삼촌에게서 우리는 늙은 볼프강의 최후를 본다. ‘효과 좋은’ 최신 농약도 볼프강에겐 땅과 벌을 다 죽일 끔찍한 화학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평온히 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하고 싶지만 세상은 아이들에게 자꾸만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을 보여주고 아이들은 부모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볼프강과 안젤리카의 강경한 자세에서 이상하게도 품위를 느낀다. 도시의 방송사 카메라로는 잡아낼 수 없었던 그것을.
바로 그래서 마틴이 젤소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그 동굴에 남는 것이다. 여전히 포착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이탈리아 시골의 생동처럼, 도시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품위처럼, 끝까지 문명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밀라노인’ 가족처럼 마틴 역시 영원히 붙잡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거의 언어나 노래 혹은 유적을 찾아내면/기록하면 필연적으로 도굴꾼의 돈벌이가 되고 부자들의 눈요깃감으로 소비되며(키메라) 믿는 자들의 맹목을 부른다는 것(라짜로)을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부터 알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마틴을, 아이들을, 가족들을 잡히지 않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화내고 싸우고 경계하는 어른들의 말이 흘러넘칠 때 아이들은 오히려 한 마디 말도 없이 소통한다. 아이들의 대화는 아직 무음의 신체 언어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젤소미나가 마틴에게 벌의 춤을 보여줄 때도, 두 아이가 동굴 안에서 고대인의 그림자잡기처럼 춤을 출 때도, 마리넬라가 젤소미나의 무반주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도, 젤소미나의 ‘빛을 마셔보라’는 아름다운 주문을 마리넬라가 순순히 따를 때도(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키메라>의 무덤 속 아르투가 맞이한 베니아미나의 빛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젤소미나는 어떻게 그 험한 바다를 서핑보드에 의존해 맨몸으로 다녀왔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들판에 놓인 가족의 침대로 파고든다. 모든 게 젤소미나의 꿈 같았던 시간. 엄마도 아무 질문 없이 그애가 잘 다녀올 줄로 믿었다며 따뜻이 안아주고, 처음으로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젤소미나는 마틴처럼 속을 알 수 없이 그윽한 눈빛의 알파카를 바라보며 마틴의 휘파람을 따라한다.
이윽고 그들은 뼈대만 있는 침대를 남기고 증발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남루하지만 어딘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도 벽 몇 개만 남기고 낡아버린다. 언젠가 그 집은 흰수염고래의 무덤처럼 먼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는 스펙타클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대인’을 얌전히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탐욕스러운 카메라에 붙잡히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고스트 스토리> 또는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준 탁월한 애도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한 이들의 유골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집의 잔해나 이를 지켜보는 지박령 같은 존재를 통해 억겁 같은 시간을 애처로이 붙잡아두고 재소환하려던 영화들. <더 원더스>는 조금 다른 쪽으로 애도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건 이탈리아에 마지막 남았던 순수를 영원히 해방시켜 영영 잡히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게 하는 선택을 감행한 영화다. 아마도 그것이 언제나 피안으로, 신성의 영역으로 인물을 숨게 했던 로르바케르 식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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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kg의 짐을 지고 걸어도, 좋다
-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가사만 읽어도 음이 저절로 떠오르는 이 노래는 2001년에 발매된 지오디(GOD)의 '길'입니다. 20년 전 노래지만, 요즘도 인생에 확신이 없을 때면 이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갑자기 웬 노래 이야기냐고요? 다름이 아니라 오늘 소개해드릴 ‘이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지오디의 ‘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하염없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여서였을까요? 오늘은 다큐멘터리 영화 <행복의 속도>가 왜 지오디의 ‘길’을 연상케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11월 11일(목)에 진행된 <행복의 속도> 특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행복의 속도>는 2021년 11월 18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행복의 속도Speed of Happiness<행복의 속도>는 일본의 '봇카'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봇카는 등에 진 물건을 도보로 운반하는 일본의 옛 직업 중 하나입니다. 운송 수단이 발달하면서 사라진 직업인데요. 일본에는 여전히 봇카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군마, 후쿠시마, 니가타, 도치기에 이르는 4개의 현에 걸쳐있는 오제 국립공원입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넓은 고지대 습원으로, 자연경관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생태계가 엄격히 보존되는 특별보호구역인 만큼, 오제에는 차량이 드나드는 길이 없습니다. 나무판자로 이어진 좁고 기다란 길 하나가 외부와 국립공원 안의 산장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산장에 물건을 운송하는 방법 역시 이 길을 통하는 방법 뿐이죠. 그것이 이곳에 봇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관광객들이 오제의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산장을 방문하는 4월부터 11월까지 봇카는 이곳에서 짐을 나릅니다. 산장 운영에 필요한 제철 식자재부터 맥주통, 가스통 등 안 나르는 물건이 없죠. 지게에 켜켜이 물건을 쌓아 올린 다음, 푹신한 것을 잔뜩 덧댄 어깨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오직 두 다리의 힘으로 100kg 상당의 짐을 번쩍 들어 올립니다. 신장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짐을 들쳐 멘 봇카는 오제 깊은 곳의 산장으로 물건을 나릅니다. 짧게는 3km 남짓, 길게는 왕복 20km에 이르는 여정이죠. 오제에는 이렇게 산장에 짐을 나르는 베테랑 봇카 6명이 활동 중입니다.나무판자로 된 길 위를 우직하게 걸으며 짐을 나르는 봇카들. <행복의 속도>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봇카는 빠르게 걷지 않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일정한 속도로 걸어갑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에 여차하면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덕분에 그들은 매일 달라지는 오제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습니다.영화는 클로즈업 촬영과 슬로우 모션을 통해 흘리는 땀, 내뱉는 숨, 내리누르는 고통에 비례하여 정직하게 돈을 버는 봇카의 1년을 진솔하게 담아냅니다. 카메라를 통해 어깨가 다 닳아버린 옷과 가방끈 모양대로 짙은 멍이 든 몸, 굳은살로 채워진 발가락을 한참 동안 응시하죠. <행복의 속도>는 이렇게 '봇카'라는 낯선 직업을 따뜻하게 조명합니다.⊙ ⊙ ⊙<행복의 속도>에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두 명의 봇카가 등장합니다. 20년째 오제에서 짐을 나르며 살아가는 '이가라시'와 봇카를 널리 알리려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 ‘이시타카'가 그들이죠. 같은 봇카인데도 두 사람은 짐을 이는 방식부터 걸음걸이, 가방끈의 모양까지 모두 다릅니다. 봇카라는 직업을 대하는 마음가짐마저요.‘이가라시’는 자기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아낍니다. 일주일에 6일을 100kg가 넘는 짐을 이고 걷는데도, 그는 매일 같이 달라지는 오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의 부인과 어머니는 베테랑 봇카의 삶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그의 아들은 아빠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오제를 걷곤 합니다. 가끔은 헬기가 순식간에 냉동 식자재를 산장에 배달하는 모습을 보곤 하지만, 그럴 때도 소박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면 된다고 믿습니다. ‘이가라시’는 그저 오늘도 봇카로서의 자긍심으로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반면, '이시타카'는 사양화되는 봇카라는 직업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봇카 일을 하면서도 영업 활동에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등산할 때 짐을 대신 들어주는 봇카 이벤트와 같은 활동도 마다하지 않죠. 이처럼 ‘이시타카’는 봇카로 미래를 꿈꾸는 청년입니다.한 명은 봇카로서의 오늘을 살고, 한 명은 봇카로서의 내일을 준비합니다.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4월이 되면 오제에서 만나 언제나처럼 짐을 이고 걷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것,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으며 행복을 찾는다는 점입니다. 남들처럼 빠르게 걷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을 느낍니다.언제부턴가 ‘최연소’ 타이틀을 단 영재들이 세상에 많이 보입니다. 남들보다 빨리 무언가를 해낸 사람들이죠. 우리는 그들을 향해 대단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성취의 속도와 행복의 속도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목적지엔 일찍 도착할 수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느낄 순 없는 것처럼 말이죠.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풍부한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죠. 여기, 오제의 봇카들처럼요. 남들보다 앞서지 않아도 됩니다. 빠르게 달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위에 오제와 같은 천혜의 자연경관은 없더라도 천천히 걷다 보면 분명 그만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지오디의 노래처럼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이 정해진 길을 걷는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천천히 속도에 맞춰 걷다 보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행복의 속도>입니다.⊙ ⊙ ⊙겨우내 봇카의 발소리는 잠잠해집니다. 12월부터 3월까지 오제의 봄을 기다리며 봇카의 시즌도 잠시 끝이 나거든요. 지난 2020년 초부터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19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과연 6명의 베테랑 봇카들은 지금도 계속 봇카의 일을 이어가고 있을까요? 부디 오제를 누비는 봇카들의 ‘행복의 속도’가 지금도 여전하기를 바라봅니다.Summary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출처: 씨네21)Cast감독: 박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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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새로운 이야기가 주는 힘은 정말 강하다. 순수하게 즐길 수도 있지만, 힘이 아주 센 이야기는 자신의 세계 속으로 듣는 사람을 끌여들였다가도 성찰을 가능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주변에 있었지만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인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영화의 호흡과 주인공의 조그마한 목소리와는 달리 힘이 센 영화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내내 서울을 누비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는 첫 대사가 중국어여서도, 평소에는 가까이 볼 기회가 많이 없는 관광통역사라는 직업이 전면에 등장해서도 아니다. 주인공 한영은 중국을 거쳐 탈북한 후 서울에 자리를 잡으려 여행사 취직에 도전한다. 그가 경력을 쌓기 시작하면서 중국에서 함께 지낸 소녀 ‘샤오’와 동생과 함께 살자던 약속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동생이 이따금씩 달라는 목돈과 브로커를 통해 고향의 어머니께 보내는 생활비가 지출의 대부분이다. 한영은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고, 서툴지만 일터에서도 부지런히 성장한다. 영화에는 엄청난 불행이나 드라마틱한 사건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탈북자라는 성격에 방점을 찍어 약간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쉬운 길조차 택하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영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친절하고도 세심한 연출을 동력 삼아 성장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영화에 감도는 공허나 근심의 분위기는 묘연해진 동생의 행방이나 불법체류로 시작해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샤오가 서울 투어 도중에 사라지는 사건, 갑작스러운 실직과 같은 사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고민은 현실의 고단함보다 해결하기 어려운, 정체성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한국인이지만 여전히 ‘탈북자’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한영과 그의 주변인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 즉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과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들 사이에서 헤맨다. 한영의 이야기는 불투명한 미래라는 보편적인 요소와 동시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전달한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관객에게 다가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있었지만 한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객의 성찰을 가능케 한다. ‘모습만 같지, 한국 사람들한테 외국인들보다 못하다’라는 극중의 대사처럼, 같은 땅을 밟고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살아가는 한국인 관객으로서, 더 나아가서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는 관객들로서는 일상 속에서 가 닿을 수 없었던 고민을 곽은미 감독의 이 세심한 영화는 찬찬히 들려준다.
한편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언가를 믿는’사람이라는 두가지 뉘앙스로 읽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탈북민으로 살며 자신의 담당 경찰관이 ‘감시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조금은 의심받는 존재라고 생각해오던 한영을 그리던 영화가 종국에는 멋진 성장영화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영의 친구 정미는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선택한 한국 국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민을 준비한다. 그리고 같은 고민을 가진 존재로서 ‘너를 위해서 살아라’라는, 단순한 것처럼 들리지만 쉽지 않은 조언을 던진다. 한국에 오기 전에 꿈꿨던 것들, 다시 말해 돈을 많이 벌어 가족과 모여 살리라는 한영의 목표는 ‘최종적인 것’이었지만 이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되기 시작한다. 방언에서 표준어로 조금씩 변화하는 억양, 상심과 고민에 찬 얼굴을 거뜬히 소화해내는 배우들, 그리고 존중과 따스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쓰고 촬영해낸 곽은미 감독의 솜씨에 이러한 도약까지 더해지면서 관객은 영화 말미에 관객이 바라보는, 긴장되고도 결의에 찬 한영의 걸음을 벅찬 마음으로 따라간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조용한 용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용기를 관객석까지 가져다 준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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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가 희미해진 무대
그가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30년간 연출한 장편 영화는 단 다섯 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 다섯 편의 영화는 각자 뚜렷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이런 독특한 영화들을 탄생시킨 레오스 카락스는 늘 이야깃거리를 몰고 다니는 영화계의 기인이다. 카락스가 <홀리 모터스>(2012) 이후 9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여섯 번째 장편 <아네트>(2021)에서도 역시 과감한 시도를 선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74회 칸 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아네트>는 카락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노감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카락스는 올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의 일정을 시작으로 서울의 관객들까지 찾은 뒤 국내일정을 마무리하고 출국했기 때문에, 국내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신작 <아네트>를 맞이할 채비를 마쳤다. <아네트>는 27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에서 카락스가 허심탄회하게 늘어놓았던 이야기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카락스는 <아네트>에서 <홀리 모터스>와 마찬가지로 고민 끝에 선언과 질문을 반복하며 관객을 난처하게 만든다. <아네트>가 살짝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우선 카락스가 고수해왔던 이미지들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몇몇 요소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작지만 다부진 육체를 가진 드니 라방이 뿜어냈던 운동성과 물성은 할리우드에서 인기 있는 배우 아담 드라이버의 종횡무진 퍼포먼스로 대체됐다. 그리고 카락스는 커리어 최초로 미국의 밴드 스파크스(Sparks)와의 협업을 통해 뮤지컬 색채가 묻어나는 장르극을 기획했다. 그리고 영화의 극장 상영과는 별개로 카락스는 미국의 아마존과도 손을 잡았는데 이로 인해 OTT 포맷이 개입되는 등 <아네트>는 기존 카락스 영화를 둘러싼 요소들과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를 의식하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아네트>를 둘러싼 요소들은 곧 영화 산업과 관련한 질문들과도 연결된다.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했고 극장가는 위기에 직면했으며, OTT 산업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주요 영화제들의 수뇌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들을 수상 후보에 포함시키고, 상영작으로 선정하는 등 변화의 흐름을 마지못해 수용하는 모양새다. 일찍이 <홀리 모터스>에서 카락스는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 극장의 내부를 담아내면서 자신이 영화라는 매체이자 예술에 관해 느꼈던 감정들을 표현한 바 있다. <아네트>의 도입부 역시 이런 그의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진 않는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카락스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밴드 스파크스의 멤버들과 세션들이 녹음 부스에서 노래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와 비슷한 층위를 공유하면서도 살짝 결이 다른 느낌이다. 주연 배우 드라이버와 마리옹 코티야르가 행진의 대열에 합류하고 배우들은 의상팀에게 옷을 건네받은 뒤 갈아입는다. 우리는 <아네트>의 이 오프닝 장면을 촬영 현장 그 자체로 보아야 할지 혹은 이 장면들 또한 영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에서 <홀리 모터스>는 적어도 분명하게 그 경계가 감지됐다면, <아네트>의 인물들은 그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은근슬쩍 넘나들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움직임을 크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경계 자체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모종의 의지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어쩌면 <아네트>는 무대에 관한 무대,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읽힐 수도 있겠으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아네트>는 입구와 출구의 경계마저 사라져 버린 무대 혹은 영화 그 자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점이 <홀리 모터스>에서 이어지는 카락스의 내면과 연동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크레딧에서는 배우들이 단체로 관객에게 인사하고 영화가 어땠는지 말을 건넨다. <아네트>는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조차도 관객들이 명확하게 분리된 경계를 감각할 수 없도록 했다. 그렇다면 출구는 있는가? 아니 애초에 입구를 설정하려 들지 않았으니 출구의 존재 가능성을 따질 수 있는 걸까? <아네트>는 입구와 출구를 지워버린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무대 그 자체가 되는 셈이다. <홀리 모터스>는 출구로 향하는 가능성을 남겨둔 듯 보이나 <아네트>는 회전문에 갇힌 채로 돌고 있는 상태가 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무대에는 누가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우선은 예술가들, 그리고 관객들이다. 그리고 연출을 맡은 카락스 본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와닿는 요소들이 있다면, <아네트>가 영화를 있게 만든 예술가들의 삶을 무대에만 남겨두면서도 한편으로는 삶 자체를 무대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극 중 지휘자나 헨리가 현실 관객에게 말은 건네는 장면들을 지나칠 수가 없다. <아네트>의 경계가 분명하게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배우들이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것과 가상의 배역에 동화된 채 세계 내부의 인물로 남는 것이 서로 완벽하게 구분될 수 없으므로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장면들은 일정 부분 무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영화 속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영역을 오가는 듯한 모습을 선사한다. 단순히 제4의 벽을 깨는 시도와 살짝 다른 인상을 풍기는 셈이다. 말하자면 <아네트>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는 영화 자체에 관한 논의를 유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를 둘러싼 요소들을 고찰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기이한 분위기가 반복되는 <아네트>는 예술과 예술가들의 삶과 무대 그리고 영화에 관한 카락스의 인상적인 복귀 무대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
본 콘텐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아네트>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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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줄 단 하나의 아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로봇, 인공지능을 소재로 다루지만 이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지점은 어디인지,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과 구분 짓는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에이 아이 (A.I)
기후 변화로 인해 만년설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해 많은 도시가 물에 잠겼다. 선진국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엄격한 임신 허가제를 도입했다. 로봇은 인간을 대신해 많은 일을 도맡게 된다. 사회 경제를 유지하는데 로봇은 필수품이 되었다.
로봇 제작 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부부를 위해 부모로 지정된 존재를 순수하고 영원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는 로봇 아이를 만든다. 잠재의식과 꿈, 즉 내면의 세계가 있는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탄생한다.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는 데이빗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리라고 확신한다.
모니카(프랜시스 오코너)와 헨리(샘 로바즈) 부부의 아들 마틴(제이크 톼스)은 극저온 상태에서 간신히 생명만 유지한 채 5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트로닉스는 회사의 직원인 헨리를 통해 로봇 데이빗을 테스트하고자 한다. 로봇 아이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한 번 등록하면 되돌릴 수 없다. 등록 절차는 구매자를 부모로 만들고 로봇은 그 부모를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만약 부모가 로봇 아이를 거부하면 해당 로봇은 폐기된다. 모니카는 등록 절차를 거쳐 데이빗의 '엄마'가 된다. 데이빗은 모니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쓴다. 데이빗이 조금씩 적응해 갈 때쯤 마틴이 깨어나 집으로 오게 된다. 데이빗은 진짜 자식처럼 엄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 인간의 외로움
"로봇이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해 준다면 사랑받는 사람은 그 메카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죠?"
작품 속 슈퍼 토이 곰돌이 인형 '테디'와 자식 대행 로봇 '데이빗' 그리고 애인 대행 로봇 '조'(주드 로)는 모두 인간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변하지 않고 인간을 따르며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데이빗은 인간에게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을 제공한다.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존재를 생산해 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사이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객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다. 두 번째로 간 곳에서는 남자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어 곤란에 빠진다. 사랑을 말하며 폭력과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에서 인간 사이의 사랑이 어떻게 순수할 수 있을까? 조를 부르는 이들은 주로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다. 영혼이 기댈 곳을 찾아 신과 성당을 찾듯 로봇에게 육체를 기대고자 하는 것이다. 조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데이빗을 돌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모니카의 집에서 데이빗이 바라보던 가슴에 하트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모빌은 외롭고 공허한 인간이다. 자신의 사랑에 보답해 주지 못하는 그 공허한 모빌을 데이빗은 계속해서 바라본다.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아니다. 데이빗의 순도 높은 사랑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자고 그러다 사라져 버리는 존재다.
▶ 인간의 특별함
영화의 초반에 데이빗은 로봇으로서 대상화된다. 사이버트로닉스의 조형물이 창문에 비친 형상과 데이빗의 첫 등장에서의 형상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데이빗은 사이버트로닉스에서 제작된 로봇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각인시키며 '아이'이기 전에 로봇이라는 정체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기에 모니카의 거부 반응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아닌 로봇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로봇의 뛰어난 기능이나 능력 혹은 멋진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주목할 점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모니카의 아들 마틴은 데이빗과 달리 자신은 진짜 사람이고 엄마의 아들이므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피노키오 동화책을 모니카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들을 보여달라고 한다. 모니카가 고장 난 데이빗을 걱정스러워하며 손을 잡아 주자 마틴은 데이빗에게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잘라오라고 부탁한다. 마틴은 데이빗에게 끊임없이 경쟁심을 느끼고 우위에 서고자 한다.
로봇을 잔인하고 화려하게 파괴하며 즐기는 로봇 축제는 인간 종이 로봇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는 의식이다. 인간은 로봇을 만들었지만 로봇의 성능이 좋아지고,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을 부수며 안도감을 느낀다. 인간의 특별함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로봇 축제를 감독하는 존슨은 데이빗을 두고 '목적 없는 특별함은 골칫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특별함에 목적을 찾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목적인 인간에게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빗 역시 인간처럼 자신은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하비 박사의 방에서 상자에 들어 있는 수많은 데이빗을 발견했을 때 공포를 느낀다. 자신의 특별함과 유일성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데이빗은 무너진다. 데이빗이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기에 특별했듯이 인간의 특별함 역시 믿음에서 온다.
▶ 동화+ 객관적 사실
데이빗은 피노키오를 소년으로 만들어준 '파란 요정'을 찾기 위해 유식 박사를 찾아간다. '동화'와 '객관적 사실'의 카테고리를 결합해 어떻게 해야 로봇이 인간 소년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파란 요정은 결국 '진짜 소년'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2000년이 지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 생명체에 의해 단 하루 복원된 엄마를 만날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모든 동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듯 데이빗의 하루는 평생 그가 바라왔던 대로 행복하다. 엄마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사랑해준다. 2000년을 기다려 데이빗에게 주어진 그 하루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사랑받음'을 이뤄준다. 동화적이지만 마법적이지는 않은 이 슬픈 해피 엔딩은 '동화'와 '객관적 사실'이 결합된 결말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에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데이빗이 인간과 구별되는 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욕심을 내고,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받은 상처만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cod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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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을 만드는 수많은 지진 속에서도 각자의 중심을 잡고 나아가려는 청춘
#50회서울독립영화제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져있는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 클럽에서의 EDM 공연을 규제하는 정부. 음악은 주인공이 사회에 던지는 반항의 상징이자, 재능 있는 개인을 그저 억압하는 정부의 부조리함을 증명하는 요소이다. 유타와 코우가 공무원들에게 로비하는 교장 선생님의 노란 차를 거꾸로 꽂아버리는 대담한 행보로 시작한다.
불안의 시각화, 지진
다수의 국민 사이 균열은 필수불가결하다.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 지진과 같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해피 엔드>에서는 ‘지진 경보’를 시작으로 땅이 흔들리는 것만 지진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클럽, 신념이 다른 코우와 유타가 충돌할 때, 밍과 아타가 떨어뜨린 조명이 흔들린다. 이 조명은 코우와 유타의 그림자를 흔든다. 영화 초반부의 코우는 어두운 계단에 서서 유타에게 돌아갔지만, 다름을 자각한 코우는 유타를 떠난다. 영화 후반부, 교장 선생님이 자신의 차를 거꾸로 내리꽂은 범인이 자수를 하면 감시 시스템 철회에 합의하겠다고 한다. 유타는 코우를 위해, 전교생 앞에서 자수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코우네 가게, 대학 장학금에 합격한 코우지만 얼굴이 심히 어둡다. 흔들리는 조명을 바로잡아 보지만, 여전히 흔들린다. 다섯 아이에게 균열이 생길 때마다, 서로 다름을 깨달을 때마다 지진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AI 감시 카메라, 보수 정권의 인권 침해
불량한 행실이 카메라에 찍히는 학생에게 즉시 벌점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도입된다. 하지만, 감시 카메라에는 빈틈이 있다. 사각지대에서 유타가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자 한 남학생이 이를 꾸짖으며 담배꽁초를 집어 든다. 이때 카메라에 잡힌 학생이 계속해서 벌점을 부여받는다. 아이들은 감시를 통해서 변화하지 않는다. 아이들뿐 아니라 감시와 통제로 국민들을 제어할 수 없다. 반드시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네오 소라 감독은 독재와 감시, 뿌리 깊은 시스템의 문제를 꼬집는다.
거울로 비춘 듯한 권력자
수업 시간, 자위대에서 특강을 하러 온다. 하지만, 자국민이 아닌 학생들은 들을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한다. 부당함을 참지 못한 몇몇 학생들은 들고 일어서 교장실로 향한다. 교장 선생님을 가둔지 오래되었을 때, 교장을 받드는 한 선생이 일식 도시락을 전달한다. 학생들은 도시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교장 선생님에게 순응하지 않고 버린다. 이때 교장 선생님과 권력자가 겹쳐진다. 총리에게 행해진 도시락 테러, “아깝게..”라며 저항하는 시민을 멸시하는 장면이 겹친다. 학교는 독재와 억압이 판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코우는 한국을 상징하는 ‘김밥’을 들고 가서 친구들과 뜻을 함께한다.
‘자유’란
코우와 유타는 합심하여 음악 장비를 옮긴다. 그 길은 가파르고, 울퉁불퉁하고 경찰에 의해 막아진다. 외국인인 코우에게 거주 증명서를 내놓으라며 잡아간다. 이방인 혐오로 가득한 사회에서 한국계 재일교포인 코우는 경찰에 같이 잡혀도 차별을 당한다. 유타는 땀을 흘리며 홀로 장비를 끌고 클럽으로 향했지만, 내진 설계를 위한 재건설로 아이들의 아지트는 사라지고 음악 장비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지진과 사회, 개인의 다름은 아이들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때 유타는 결심한 듯하다. 같은 장난을 저질러도, 외국인인 코우와 자국민인 유타는 다르다는 것을.
돈독한 우정의 두 주인공은 사실 너무나도 다르다. 코우는 부조리한 구조 퇴치, 구조적인 자유가 진정한 자유를 불러온다고 믿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후미와 뜻을 함께 한다. 유타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원하는 것을 하며 즐기는 것이 자유라고 믿는다. 시위를 한다고 이 썩은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신념의 두 주인공은 충돌한다. 코우와 유타는 다르지만, 원하는 바는 같다. ‘자유’이다. 두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를 추구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서로 사랑한다. 유타는 철없는 어린 애로 통하지만, 사실 유타도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이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도, 앞으로는 다 같이 놀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유타는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것이다. 코우가 장학금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온전히 자신이 책임을 진다. 코우는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코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수를 선택한다.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성장한다.
갈림길에 선 미성년
다섯 아이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간다. 똑똑한 밍은 초등학교 수준의 중국어라는 언어의 벽으로 아버지와 대화하기 어려워했지만, 함께 밥을 먹으러 간다. 미국인 톰은 자국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복장 불량으로 벌점 10점을 받던 아타는 패션 디자인의 재능을 찾는다. 철이 들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청소년들. 함께 해서 행복한 순간들이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자각하며 성장한다. “또 보자.”라고 말하지만, 다시는 예전과 같이 만날 수 없단 것을 알고 있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아간다. 모두가 그렇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젠가는 멀어진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며 성장했던 추억은 영원히 남는다.
갈림길에 선 유타와 코우. 그리고 유타가 코우의 가슴을 찌르는 프리즈 프레임.
그 순간 두 아이는 함께 했고, <해피 엔드>의 프리즈 프레임처럼 영원히 정지된 이미지로써 기억될 것이다. ‘HAPPYEND’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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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는 이것 하려고 3000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분위기 정령
이제는 혼자가 아닌 것이 더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서사학자인 알리세아. 튀르키예로 출장을 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객실을 혼자 쓰고 있다. 텅 빈 객실에 혼자 있다. 튀르키예에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곳이 유명하다고 그랬다. 거기서 의문의 병을 얻은 알리세아. 이게 뭐지? 아무 생각 없이 병을 손질하는 알리세아. 반사적으로 병을 건들고 다시 수납장에 넣으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병에서 어떤 큼지막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나체의 남자. 처음엔 객실이 감당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덩치가 컸던 남자. 눈으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실화가 됐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당황하는 알리세아. 램프에서 튀어나온 거인은 자기의 이름을 '진'이라고 소개했다. 직업은 정령이랜다. 그런 자기를 입증이라도 하는 듯이 TV에 있던 아인슈타인을 느닷없이 꺼내는 진. 알리세 아는 지금 일어나는 일에 최대한 적응하려고 한다.
천지개벽에 정령이라니. 인문학자로서 온갖 나라의 설화들을 들었지만 램프에서 튀어나온 정령은 쉽게 믿기 어렵다. 그렇게 정령 진과 대화하고 있던 도중에 호텔 룸서비스가 왔다. 나가보는 알리세아. 문 밖에서 음식들을 받고 온다. 그 새 덩치가 작아진 정령. 체구가 큰 남자의 체형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대화를 하는 두 사람. 정령 진은 알리세아에게 '소원이 있나, 있다면 세 가지만 말해달라'라고 요구한다. 보통사람이라면 바로 답하겠지만 서사학자인 알리세아에게 그런 건 없다. 왜냐면 본인의 논문이력에 근거해, 모든 '소원 들어주는 정령'의 끝은 안 좋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알리세아. 그런 알리세아를 설득하기 위해, 정령 진은 자기의 예전 이야기들을 말해준다.
'매드 맥스' 향 첨가
조지 밀러라는 이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다. 70대 고령의 영화감독이 섹시한 액션영화를 잘 연출할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는 듯하며 내내 폭주하는 영화를 연출한 조지 밀러. 아직도 그 도입부에 날것의 동물을 씹어먹는 인물이 생각난다.
이 영화는 전작의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와는 정반대인 로맨스 영화다. 그리고 전작처럼 빠른 템포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영화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 진의 관점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가? 가 굉장히 화려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들 자체가 뭔가 신선한 것들이 아니다. 요약하면 '왜 진이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는가' 혹은 '상처를 입어서 병 속에 갇혔는가'에 대한 이야기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점을 갖는 부분은 이를 어떻게 이야기로 펼치는가에 대해 달려있다. 첫 번째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써보자면, 진에겐 사랑이 있었다. 이 사랑은 진을 뿌리치고 극 중 다른 인물에게 마음을 뺏긴다. 이때 마음을 뺏기는 과정을 어떻게 연출하고 있는가?를 보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음악을 연출하는 방식, 유혹에 성공하고 난 후의 모습을 보면 이것저것 효과가 많이 들어갔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는 비슷하더라도 자기만의 언어로 소화한 사랑 이야기를 풀고 있다.
또 이 첫 번째 이야기 이후의 서사도 주목해볼 만하다. 영화는 진의 관점에서 전부 사실인 이야기를 전달한다. 당연히 자기 이야기니까 나름대로의 진실을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진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는가?를 보면 자기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영화 전체적으로 인물과 좀 떨어져 있는 듯한 거리감이 있다. 이는 두 번째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진의 이상한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다룬다. 그런데 자기 유리한대로만 말하면 청자인 알리세아와 관객에게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 화면 촬영 연출부터 섬세한 부분까지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 인물들에 집중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받는지부터, 인물에게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까지 디테일함의 힘이 영화에서 발현되는 부분이 흥미롭다. 여러분 다들 '솔로몬 왕'에 대해 들어보지 않았나? 영화는 이 솔로몬의 설화도 살짝 변주해서 이야기로 만들었다. 물론 이야기의 낯섦뿐만 아니라 시, 청각적인 쾌감도 잘 챙겼다.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이미지 디자인이 아주 탁월했다. 예를 들어 진이 병 속으로 잡혀가는 연출은 어딘가 익숙해 보이지만 조지 밀러의 전작 특성을 알 수 있다. 또한 거미와 악기 연주로 대표되는 상상력의 힘을 이야기의 밀도에 추가점이 되는 요소다. 또 노래 작곡에 1년이 걸렸다던 삽입곡들도 영화의 창의성으로 표현되는 지점이다.
수미상관형 구조
이 영화의 초반부는 얼핏 보면 굉장히 안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초반부는 바로 이것이다. 외로웠던 알리세아. 알리세아는 다들 떼거지로 몰려다닐 때 조용한 10대 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런 10대에 어떤 불만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 설정은 그냥 단지 알리세아가 갖고 있는 흘리듯이 넘길 수 있는 설정인 듯 보인다. 그러나 아니다. 이 설정은 영화의 후반부에 직접적으로 반복된다. 간접적으로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모티브로서 활용된다. 이 장면이 들어가는 방식을 눈 크게 뜨고 보셔야 영화 이야기 전개에 인물의 행동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맥락상 무조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는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의 20대 초반 시절, '공감능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왜 이런 걸 생각했을까? 바로 인간관계에서 헛짓거리를 많이 해서 그런 욕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몰랐다. 그렇게 남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공감능력의 부재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들 한다. 이런 내가 된 이유는 자주 혼자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대 때 외로움도 몰랐고 고독은 아예 감조차 못 잡았다. 글쓴이가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이해가 된다. 반대로 이런 전개는 납득하지 못할 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조지 밀러 감독이 구체적으로 딱 꼬집어지는 감정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 이야기 이면에 깔려있는 인물들 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영화화 한 만큼 '새 해는 사랑을 해야 해'라고 마음을 먹은(글쓴이 같은) 관객들에게 추천한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고 가면 루즈한 이야기에 식상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소재는 보편적이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푸느냐? 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영화가 될 수 있다. 물론 로맨스적인 코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진과 알리세아가 푸는 이야기만 들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기도 하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선대
여러분의 새해 바람은 무엇인가? 적지 않은 분들이 ‘애인 생기게 해 주세요’가 있을 것 같다. 사랑 말은 쉽지만 직접 해보면 어렵다. 남의 연애는 상담하기 쉽지만 실질적으로 자기는 뭘 못하고 있는 분들 주변에 많은 것만 봐도 그렇다. 왜 연애가 어려운지 생각해보면 이유가 가지각색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고민해보면 사실 간단하다. 욕망 때문에 어렵다.
누구는 같이 영화 봤으면 좋겠고. 누구는 같이 드라마 봤으면 좋겠고. 누구는 같이 쇼핑했으면 좋겠고. 아무 생각 없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당연히 하고 싶은 게 다르니까 싸울 수밖에 없다. 안 싸우는 방법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사람은 다들 외롭고 고독해서 사랑받고 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고독하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아이러니를 펼쳐나간다. 이야기 내부의 시각적인 이미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낯섦 이 두 가지가 여러분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알리시아의 선택지로 인해 생각해볼 것이 몇 가지 생길 것이다. 그러면 문득 ‘내가 겪는 문제는 돈과 사랑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까? 아무튼 더 간절히 갈망하는 자에게 사랑이 좇아 드는 것 같다. 그럼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정령이 온 우주를 옮겨서라도 사랑을 만들어 주지는 않을까. 1월의 시작을 연애세포를 자극하는 따뜻한 로맨스로 하라고 권장하고 싶다. 극 중 이드리스 엘바의 피지컬처럼 운동하고, 틸다 스윈튼처럼 우아하고 지적으로 나이 들면 각자의 사랑이 나름대로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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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6일 넷플릭스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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