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2023-12-12 12:21:23
'나의 올드 오크' - 배타와 연대
대립과 화해 그 너머 희망
시리아 난민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 감독이 90세 때 촬영한 작품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지만,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터치한다. 난민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과 비록 선진국이지만 대도시에서는 그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
최근 모 영화배우가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들처럼 난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들을 돕는 건 당연한 일이라 말했지만, 현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수용할지는 아직 물음표이다.
1951년 난민협약과 1967년 난민의정서는 근대 난민보호의 초석으로, 이에 포함된 난민관련 법률적 원칙들은 난민의 처우를 규정하는 수 많은 다른 국제법과 지역법, 국내법과 관행의 뿌리가 되고 있다. 1951년 난민협약에 포함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난민이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추방 혹은 송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강제소환 금지원칙'이라 부른다. 난민협약은 국가가 난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도 명시하며, 누가 난민이고, 난민이 아닌지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비호국에서 난민의 권리를 명시하였다. 신분증명서를 받을 권리, 이동의 자유, 재산 이전의 자유 등이 명시되었다. - 출처 :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유엔난민기구의 국제법적 기초
영화는 희망이 없는 영국의 폐광촌으로 들어 온 시리아 난민들과 자신의 우울을 자기보다 약한 존재에게 투영시켜 괴롭힐 만큼 삶에 의욕이 없는 자들을 비춘다.
네 편과 내 편을 나누며 어느 한 쪽의 편을 들 것을 종용하는 주민과 난민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폐광촌이 되기 전에는 의욕을 갖고 서로 연대하며 음식을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낯선 땅에서 슬픔을 맞이한 이들과 다시 연대하며 일어설 힘을 얻는다.
이들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이루고자하는 애씀은 늘 중도에 그만두는 허무함으로 끝나지만, 다시 한 번 희망의 끈을 잡으며 시작이란 단어를 꺼내든다.
영화는 난민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그들을 연민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늘어가며 우리와 별반 다를 바없는 존재로 대우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는 슬픔 가운데 있는 이를 위로하며 따듯한 환대를 보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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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끝은 있는거야! 영화 <트루먼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딜레마가 하나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아이는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면, 웰컴 투 공리주의. 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만 해도 어느 면접에서 '공리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피하다면 최선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먼쇼>, 영화 한 편으로 정말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로 그 딜레마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면? <트루먼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 버뱅크, 태아 때부터 30대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하루 24시간 그의 모든 것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 나의 모든 것이 나도 모르는 이들에게 공유된다니. 이건 비밀인데, 하던 말, 나만 알고 싶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까지 모두. 소름끼친다. 방송국에 입양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나.
영화에서 트루먼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방관한 모든 인물이 악당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꼽자면 프로듀서를 대표적으로 꼽겠다. 트루먼쇼는 트루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모욕의 집합체다.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은 게 아니라 돈 되는 투자처였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에 대한 동의없는 일방적인 사기이자 감금,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자 착취다. 죄목을 몇 개나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프로듀서는 그의 신인 양,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스크린에서 그를 쓰다듬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프로듀서는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즉흥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섬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그에게 트라우마나 시련을 주었다. 물을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도록. 그를 위해 섬을 전부 꾸몄고, 인간관계는 배우들로 채워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롱런하는 드라마를 보듯 흥미롭게 시청할 뿐이다. 그들에겐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가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트루먼쇼는 대세다.
하려면 빈틈없이 제대로나 하지, 곳곳에서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수가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들렸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졌다.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모두가 당황한다. 아이를 갖자는 아내 메릴은 사실 별로 그를 안 좋아한다. 겁쟁이인 줄 알았던 그가 수많은 눈과 카메라를 속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던 물로 나아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프로듀서가 만든 폭풍우에 휩쓸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내지 않았다. 모두에게 위트있게 인사를 한다.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세상, 거짓된 진실, 빈 껍데기의 평온한 일상에서. 다들 그를 시청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마저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멍청한 듯 했지만 똑똑했다. 시청자가 느낀 감동과 재미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세상 꿀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듀서를, 시청자들을 못됐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1998년에 만들어진 트루먼쇼는 놀랍게도 최근의 예능 트렌드와 흡사하다. 프로듀서는 10년, 20년을 앞서 본 선구자인 것이다. 트루먼쇼는 그냥 쇼가 아니었다.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열일하는 연출로 더 많은 광고와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작은 국가의 GDP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 트루먼이 함께 하는 이상 이 수익은 고정적이다. 누가 아나. 늘 단역 자리는 필요하니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의 생활 속 제품 홍보로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수익으로 파이를 분배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감은 어떤가. 트루먼이 성장하는 것을 다같이 흐뭇하게 보며 울고 웃는다.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만나본 적도 없는 연예인과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받고 힐링받는다.
트루먼쇼의 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다. 트루먼쇼는 좋은 의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 위로를 주는 프로그램.' 다만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빠졌을 뿐. 전 세계 TV는 리얼리티 쇼가 가득 채웠다. 모델, 가수, 아이돌 등을 뽑는 부분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2016-17년 예능을 쥐어잡은 <나 혼자 산다>, <미운 오리 새끼>, <슈퍼맨이 돌아왔다> 까지. 일상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다르지 않다. 앞의 두 프로그램은 연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사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집집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상에 자리잡았다. 집을 공개하고, 생활하는 날 것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출연자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믿도록. 물론 무엇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진실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정도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질 것이다. 더 강한 자극은 진실된 존재의 진실된 감정에서 온다. 몰래카메라가 재밌는 이유와 같다. 예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짜고 치는 대본이 암암리에 있는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다. 진심이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트루먼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훌륭한 프로듀서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할 때의 자세
냉정하게 생각하자. 프로듀서의 역량은 훌륭하다. 눈치를 채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트루먼에 대처하기 위해 그 역시 열심히 대처하느라 바빴다. 갑자기 돌아가신 설정의 아버지를 우연찮게 만나자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개와 대사를 마련한다. 트루먼의 고뇌에 대한 위로, 트루먼과 아버지의 재회. 기쁨의 눈물. 바로 클로즈업을 해선 안 된다. 서서히 멀리서부터 마지막 그의 얼굴로 다가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가 만든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프로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트루먼이 폭풍우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만들었고 폭풍이 지나간 쨍쨍한 햇살에 비친 만족감을 대조하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이 곳에서 계속 함께하자며 그의 내면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물론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오래 함께 하자. 그러나 한 구석으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레전드는 만들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프로듀서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트루먼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얽힌 이해관계자의 기대에 찬 눈빛. 그는 트루먼의 인생동안의 시간만큼 그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두자면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트루먼의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은 묵인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이 상황은 딜레마가 아니다. 이제와서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이 트루먼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스타가 된 이상 바깥 세상에서도 그가 원하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여기선 고작 갑갑할 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 그는 욕을 먹고 상처를 받을테니까. 게다가 적어도 트루먼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니까. 심지어 이혼한 후에 재혼할 두번째 아내까지. 귀차니즘이나 결정장애에 빠져있다면 이 만한 직업도 없다.
프로듀서는 트루먼쇼를 딜레마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이득을 보는, 일방이 희생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스타와 지켜보는 수많은 지지자들, 윈윈이나 협조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의 화살만 퍼부을 텐가. 그는 자신의 일을 그저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쇼는 끝이 없다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하나뿐인 스타인 트루먼은 쇼도 끝이 있는 거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는 말문을 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트루먼을 보내줄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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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도시, 똑같은 패턴은 이제 그만
많은 사람들이 권선징악을 원한다. 권선징악은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는, 꽤나 단순 명쾌한 의미다. 하지만 의미의 단순 명쾌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권선징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법의 테두리를 교묘하게 벗어난 범죄자들이나 가벼운 심판을 받고 출소한 범죄자들이 다시 보복을 일삼는 일들은 그 사례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두 건의 사건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사회의 심판이 생각보다 통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런 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 생각보다 시원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해외에서도 이런 심리가 있을 것이다. <이퀄라이저> 시리즈나, <존윅> 시리즈 같은 영화들이 계속 사랑받는 건, 조금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복수나 처벌들이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의 처벌 방식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라는 틀을 빌려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마석도 형사의 재등장
영화 <범죄도시4>는 2017년에 개봉한 1편 이후 계속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리즈가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마석도 형사(마동석)는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인물이다. 사실 마석도 형사에게 온전히 감정이입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조금은 무식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범죄자 체포나 처단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당하는 일반 사람들이나, 마석도 형사의 팀에 있는 조금 평범해 보이는 동료들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마석도 형사에게 반가움을 느낀다. 어쨌든 관객들에게 악의 처단이라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 이 시리즈가 이어지게 하는 주요 동력이다.
이번 네 번째 영화에서는 온라인 불법 도박 관련 사건을 다룬다. 이번 편의 사건 역시 실제 경찰 수사가 이루 졌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재구성했다. 영화의 빌런은 백창기(김무열)와 IT천재 장동철(이동휘)이다. 백창기는 엄청난 살기로 사람들을 마구 죽이면서 필리핀 현지에서 도박장을 관리한다. 반면 장동철은 사업가적인 기질과 프로그래머 능력을 활용해 기업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의 돈을 빨아들인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빌런은 백창기다. 그는 그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고 상대에게 일단 칼을 쑤셔 넣는다.
지난 시리즈들과 구도나 전개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악한 빌런을 초반에 등장시키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마석도 형사를 비롯한 그의 팀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수사하다 빌런의 존재감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누군가가 억울하게 다치거나 죽음으로써, 마석도 형사가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수사 중간중간 유머코드도 빼놓지 않는다. 이번 편에서는 조선족 장이수(박지환)를 다시 등장시켜 지루해질 타이밍에 유머를 끼워 넣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좁은 공간에서 최종 빌런과 마형사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넣는다.
빌런의 악랄함은 높이고 있지만, 아쉬움도 높아지고 있는 시리즈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서 똑같은 구성과 전개를 보이지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 바로 빌런이다. 이번 영화의 빌런도 꽤나 강력해 보이지만, 점점 그 강도가 약해지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범죄도시> 시리즈 최고의 빌런은 1편의 장첸(윤계상) 일 것이다. 가장 큰 무게감과 공포를 전달했던 그 빌런 이후, 다양한 배우가 연기한 악랄한 빌런이 등장했지만, 기억에 남는 빌런은 2편의 강해상(손석구) 정도다. 3편의 빌런은 이름조차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3편의 빌런은 부패경찰 주성철(이준혁)과 일본 조폭 리키(아오키 무네타카)도 강력했지만, 이름까지 기억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4편의 빌런 백창기 역시 강력함을 전달한다. 하지만 캐릭터를 연기한 김무열 배우의 조금은 선한 얼굴이 악랄한 느낌을 다소 희석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동안 김무열 배우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양한 빌런을 연기한 경험이 있다. 그가 연기했던 다른 악한 캐릭터들과 겹쳐 보이는 것도 강렬함을 방해하는 요소다. 그래서인지 이번 4편은 이전 시리즈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카드를 하나 추가했다. 바로 음악감독을 바꾸는 것이다.
이번 <범죄도시4>의 음악감독은 작곡가 윤일상이 맡았다. 윤일상 음악감독은 김무열 배우에게 보이는 선함을 가리기 위해 그가 등장할 때 나오는 테마음악을 좀 더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빌런 백창기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다양한 악행을 벌일 때, 관객은 음악과 상황의 복합적인 영향으로 좀 더 무섭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음악 감독이 바뀐 영향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필리핀 카지노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카지노의 분위기에 맞는 배경음악이 나오고, 액션이 벌어질 땐 좀 더 경쾌한 음악이 등장한다. 특히나 마지막 비행기 격투 장면에선 이 영화의 시그니처 음악이 흐르며, 통쾌함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관객들이 기대하는 건 유머일 것이다. 유머도 적절하게 영화 곳곳에 뿌려져 있는데, 이번 편에서는 장이수가 등장해 유머 파트를 담당한다. 많은 관객들에게 이미 사랑받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좀 더 편안하게 그의 엉뚱한 행동을 기다리며 웃을 준비를 하게 된다. 마석도 형사의 유머도 간간히 등장하지만, 그의 말장난 유머는 생각보다 타율이 높지 않다.
1,2,3편의 종합판
<범죄도시4>는 어쩌면 1편, 2편, 3편의 종합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시리즈에서 사랑받았던 요소들을 총망라하여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극악한 범죄자들이 마석도 형사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 모습 자체는 무척 통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이야기가 그렇게 촘촘하지 않다 보니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준다는 것이 큰 문제다. 비슷한 전개 방식에 빌런만 바꿔 끼워 넣은 방식이기 때문에 더 이상 신선함을 주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앞으로 8편까지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생각보다 적은 제작비를 이용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마석도 형사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네 편의 영화가 보여준 방식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더라도 관객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만들지 않을까. 마석도 형사는 사실 시리즈 내내 폭력적인 방식으로 깡패나 범죄자들을 단죄해 왔다. 그가 벌인 난장의 뒤처리는 늘 동료 형사의 몫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도 담겨야 하지 않을까.
<범죄도시4>는 여전히 적정한 재미를 준다. 기존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관객이라면 비슷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관객들은 너무 똑같이 전개되는 이 영화의 느슨한 이야기에 실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영화에 실망할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는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과 이야기 전개를 조금 더 촘촘히 해서 좀 더 관객들이 몰입하여 따라갈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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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우연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과정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영화 <우연과 상상>. 얼마나 명작일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포스터 속의 싱그러운 배경 앞에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있는 장면이 굉장히 힐리을 줄 것만 같은 생각에 기대감을 품고 봤던 작품이었다.
영화 <우연과 상상> 시놉시스“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걸 믿어볼 생각 있어?”
메이코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친구에게 새로운 연애 상대 이야기를 듣는다. 여대생 나오는 교수 앞에서 그가 쓴 소설의 일부를 낭독한다.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는 그토록 만나고 싶던 동창생과 재회한다. 우연이 만들어내는, 조용히 아주 크게 움직이는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 이 영화는 그에 대한 상상의 결과물이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우연과 상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연을 통한 회상
영화 <우연과 상상>은 3개의 단편 영화를 이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3개의 작품 모두 우연이라는 소재를 활용한 내용이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친구가 지금 썸을 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전남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내용과 비밀이 담긴 녹음 파일을 잘못된 메일로 우연히 보내 인생의 굴곡을 맞이하고, 우연히 만난 동창생이 알고보니 동창생이 아니었던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본 우연에 대해 다룬 작품이었다.
영화 <우연과 상상>은 이러한 우연한 만남과 사건을 통해서 각각의 캐릭터들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 전남친을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과거의 인생에서 존중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잊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내며 행복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한번쯤 그 시기와 현재의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자신이 어떤지 모든 에피소드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편견없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
2번째 에피소드인 ‘문을 열어둔 채로’는 문학상을 수상한 세가와 교수와 그의 팬이자 대학에 조금 늦게 들어온 학생 나오의 이야기다. 가정이 있는 나오는 남편이 아닌 사사키와 열애를 하고 있었고, 사사키는 세가와에게 찍혀 학부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사사키는 나오에게 세가와를 음모에 빠트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의 파트너 사사키를 돕기 위해 나오는 세가와 교수를 방문하고, 그가 쓴 소설 속 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낭독하면서 세가와를 유욕하고 자극한다. 하지만 순수 결정체였던 세가와 교수는 나오의 행동이 자신을 유혹하는지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목소리가 너무 좋다며 혹시 그 파일을 전해줄 수 있냐고까지 나오에게 물어보나. 이 장면에서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가 떠올랐다. 마돈나가 유일하게 유혹하지 못한 사람이 마이클 잭슨이었는데, 한 일화에 따르면 어느날 마이클 잭슨을 유혹하기 위해 마돈나가 홀딱 벗고 다가갔는데 되려 담요를 덮어주며 추운 날씨에 벗고 있으면 안된다며 걱정을 해주던 순수결정체 마이클 잭슨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오의 상황과 약점을 들으면서도 그 편견에 휩싸이지 않고 나오의 감정과 장점을 알아봐주며 끝까지 존중하는 그의 태도를 통해서 심지어 자신을 속이고 음해하려고 한 사람에게도 순수하게 대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저런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다
길가에서 우연이 만난 동창생의 이야기를 그린 ‘다시 한 번’. 그런데 알고보니 둘은 동창생이 아니었다. 그저 오랜시간 흘러 서로가 아는 사람으로 착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해, 현재의 자신에 대해, 그리고 과거 자신이 꿈꿔왔던 것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정말 상대방에게 대해 단 한가지도 알고 있지 않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순식간에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그려낸 작품이었다.
사실 엄청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있고, 그 사람에게 나는 이런 사람인데 괜히 이런말을 꺼냈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어쩌나 하고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처음보는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는게 더 쉬운 사람의 사람을, 그리고 그 비밀을 통해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풀어내고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됐던 에피소드였다.
영화 <우연과 상상>은 평범한 우연을 그려냈지만 그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특별함을 잘 녹여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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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유와 울림이 있는 영화 <땅에 쓰는 시>
<땅에 쓰는 시>는 83세의 나이로 현역 조경가 정영선 님의 삶과 일상을 담은 다큐 영화다. 할아버지 과수원에서 사과 꽃 흩날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녀는 학창 시절 남다른 글 솜씨로 모두가 시인이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꽃과 자연에 대한 타고난 감수성으로 펜으로 시(詩)를 쓰는 대신 흙과 나무, 풀과 꽃들로 땅에 시를 쓰는 삶을 살아왔다.
정영선 님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고도 감탄하며 그들과 대화를 즐긴다. ‘잘 잤니?’라고 묻고, 집을 나설 때는 ‘잘 다녀올게.’하고 인사한다. 그녀가 정원을 조성할 때 마음에 두는 말이 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백제의 건축을 두고 이야기한 검이불루(檢而不陋)와 조선의 창업을 도운 정도전이 경복궁을 가리켜 말한 화이불치(華而不侈)다.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이조 백자로 연상되는 한국의 미적 감각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을 거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원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벅참을 가져다준다.
선유도 공원
영화는 어린아이가 뛰어노는 선유도공원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겸재 정선은 선유도에서 아름다운 한강의 풍경을 그렸다고 한다. 정영선 님은 폐정수장이 방치된 선유도를 생태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폐허의 흔적 위에 녹색의 생명력을 더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공간이 되었다.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정영선 님은 여의도 샛강을 메워 대형 주차장과 축구장 시설을 만들겠다는 한강관리사업소의 계획을 듣고 기겁을 했다. 김수영의 시, ‘풀’을 읊으며 멋진 생태공원을 만들고자 관계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화초와 물고기, 철새가 사는 야생의 자연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생태공원이 탄생했다.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병원은 기본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에게도 삭막한 분위기다. 병원은 마음이 힘든 사람이 오는 곳인데 이런 환경에서 어찌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환자가 나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고, 병실에 누운 환자들이 창 너머로 계절의 변화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간호하는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거나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병원에 그럴만한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정영선 조경가는 과감히 병원 지하주차장 위에 거대한 인공 숲을 조성하여 힘든 사람들을 품으며 위로하는 정원을 만들었다.
러닝타임 2시간 남짓의 영화를 본 후 정영선 조경가의 손길이 닿은 곳의 탐방리스트를 적어본다. 선유도 공원, 여의도샛강 생태공원, 서울아산병원 신관 정원, 폐철도선을 활용한 경의선숲길,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남양주시 다산생태공원, 설화수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크리스천 디올 성수 스토어, 제주 오설록 이니스프리...... 시집을 읽는 마음으로 한국의 미를 담은 정원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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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찌질한 남성 서사마저 '예술'로 만드는 거장의 저력
표면만 보자면, 레오 카락스 감독의 신작 〈아네트〉는 다소 뻔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남성 예술가(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가 여성 예술가(오페라 가수 안 델그레코)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런데 아내는 승승장구하는 데 반해 자신은 정체되고 퇴보한다는 생각에 열등감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아내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자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다. 아내뿐 아니라 딸도 자기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파국 이후에 또 다른 파국이 닥친다. 점점 꼬여만 가는 그의 삶은 철저한 외로움, 고독으로 귀결된다.
즉, 〈아네트〉는 다소 뻔한 방식으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재현한다. 〈아네트〉에 레오 카락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부분적으로나마 담겼다는 점도 감독이 ‘고독한 남성 예술가’라는 구닥다리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케 한다.
하지만 영화 심층의 주제의식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표면의 주제의식을 전복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던 레오 카락스의 전작 〈홀리 모터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리 모터스〉 스틸컷
주인공은 매일 다른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스카다. 그는 구걸하는 노파, 3D 모션 연기자, 흉측한 광인, 괴팍한 아빠, 악기 연주자, 살인자, 부자 노인, 원숭이 등으로 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 오스카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무대 뒤에 ‘진짜 오스카’와 무대 위의 ‘배우 오스카’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오스카는 그가 연기하는 배역 그 자체다. 배역이 바뀔 때마다 변주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인간의 주체성이 본질적인 자아에 근거한다는 전통적 철학 명제에 반기를 든 수행성 이론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우리는 무대 뒤에 ‘진짜 나’가 따로 있고, 사회생활(무대 위) 중에는 필요로 하는 자아를 상황에 맞춰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행성 이론은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본질적 주체·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리가 본질적 자아라 일컫는 것이 상황에 따른 수행적 이미지의 연속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수행성 이론을 〈홀리 모터스〉에 대입해 보자면, ‘진짜 오스카’가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오스카가 연기하는 다른 배역의 연속이 오스카 그 자체다.
수행성 이론은 인간을 상황적·맥락적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본질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일례로,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여기는 ‘남자’와 ‘여자’라는 범주가 ‘남자답게’, ‘여자답게’ 반복적으로 행동한 결과 만들어진 상상적 구성물일 뿐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젠더 역할의 수행적 반복이 성별 범주를 '본질'로 착각되게끔 만든다. ‘남자’와 ‘여자’라는 본질이 있어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는 게 아니라,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강제하는 사회가 남녀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아네트〉 스틸컷
〈홀리 모터스〉가 수행성 이론을 다소 불친절하게 영화화한 작품이었다면, 〈아네트〉는 이를 더욱 극적으로(동시에 암시적으로) 드러낸 영화다. 인기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주인공 헨리 맥헨리는 자신의 쇼에서 “코미디는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유일한 방법”이라 익살스레 말한다. 그가 아직 안 델그레코를 만나 열등감에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자신은 '무대 위'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헨리의 자기재현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헨리는 범죄가 탄로 나 재판을 받으며 진실을 말할 것을 추궁받자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날 죽일 테니까”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열지 않는다. 이 대사는 이제 헨리가 더 이상 무대 위에 있지 않음을, 즉 그가 무대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무대 위의 헨리는 진실을 말해도 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대 위에서 추방당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무대 밖의 헨리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행성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수행성 이론에서 ‘무대 밖’은 없다. 우리는 모두 ‘무대 위’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헨리의 두 번째 말은 그가 삶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음을 의미한다.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공간, 즉 무대 밖에 있음을 인정하는 건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적 선언에 다름 아니다.
〈아네트〉 스틸컷
영화는 헨리의 딸 아네트의 대사를 통해 무대 밖으로 내쳐진 헨리의 ‘죽음’을 확언한다.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 아네트는 내내 인형으로만 등장한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가지지 못한 채 헨리의 비뚤어진 예술욕에 수동적으로 이용되었음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형으로만 나오던 아네트가 사람으로 바뀌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그가 헨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때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갖고 처음 말하는 순간 그녀는 인형에서 사람이 되었고(생명을 얻었고), 사람이 된 후의 첫 대화를 통해 아버지를 무대(삶) 밖으로 완전히 추방했다. 거만하게 군림하다 아내와 딸, 아내의 또 다른 연인에게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가했던 헨리에게 이제 남은 삶(무대)은 없다. 이처럼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에 이어, 다시 한번 무대 밖 삶은 없음을, 모든 것은 무대 위의 수행적 구성물임을 보인다. 무대 밖은 삶으로부터 추방된 곳, 즉 '죽음'의 영역이다.
〈아네트〉는 찌질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철학적 메시지로 내파함으로써 ‘예술’이 되었다. 여기에 강렬한 음악과 실험적 연출,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성격 등이 잘 어우러져 영화의 격을 높인다. 무엇보다 헨리 역의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돋보인다. 그는 카리스마적 예술가와 딸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극을 체화한 연기로 몰입감을 높인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사이먼 헬버그의 연기도 영화를 탄탄히 받쳐준다. 여러모로 매혹적인 영화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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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려는 한 가족의 이야기
먼 이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해외 이민의 길을 떠난다. 고국에서의 미래가 보이지 않거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이민의 길은 사실 쉽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면서 조건이 좋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야 새로움의 삶을 천천히 익숙한 삶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일을 해나가면서 조금씩 나은 일을 찾고 가족들과 삶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시작을 선택한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 힘든 이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점점 그곳의 일부분이 되어간다. 어떤 나라에서든 이민자들의 삶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여전히 그런 과정을 거친다.
사실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이 꼭 이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살면서 전혀 새로운 곳에 이사 가게 되어 살게 되거나 다른 환경으로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런 경험들을 한 번쯤은 겪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찾아 다시 삶을 만들어 나가는 장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할 때, 그 쉽지 않은 현실을 앞에 두고 가족들은 때론 서로 의견 대립을 하고 싸운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새로운 곳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해 의지할 곳은 바로바로 옆에 있는 가족뿐이다.
영화 <미나리>는 새로운 환경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제이콥(스티븐 연), 모니카(한예리), 딸 앤(노엘 케이트 조), 아들 데이빗(앨런 김) 가족이 알칸소의 새 집에 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미국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가족이 다시 새로운 지역 알칸소로 이주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제이콥은 바퀴가 달린 집과 그 주변의 땅에 농장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가려고 한다.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하는 일을 하며 같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미국 대도시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한 이들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 좀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거주 환경과 주변을 본 모니카가 실망감을 토로하지만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남편 제이콥의 말에 일단 그곳에서의 삶을 준비한다.
제이콥이 준비하는 농장은 그의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제이콥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 주변의 땅에서 물을 찾는 일이다. 물길을 찾는 외부인을 불러와 살펴보거나 자신이 직접 땅을 파서 땅속의 물을 찾아 농사에 활용한다. 제이콥이 늘 물에 신경 쓰는 것처럼, 영화 속에서 물은 꽤 중요하다. 물만 잘 공급된다면 농사를 짓기 수월하고 이들 가족이 큰 불편함 없이 뿌리내려 사는데 도움이 된다. 물이 원활하게 공급되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물이 끊겼을 때 가족을 압박하는 것은 생활의 불편함 뿐 아니라 경제적인 압박도 포함된다. 그들이 목이 타는 것과 같이 마음속도 타들어가고 부부는 의견 대립으로 충돌한다.
제이콥은 자신의 농장에서 작물을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믿고 부단히 매달린다. 반면 모니카는 실패할 수도 있는 농장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병아리 감별을 지속적으로 하길 원한다. 그리고 조금은 더 큰 도시로 이주하여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가족과 함께하며 문제를 해결해나가기를 원한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위하지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르다. 제이콥은 농장의 성공이 가족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부단히 매달린다. 당장은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리는 안정적인 상황이 그의 눈앞에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농장을 포기할 수 없다. 그 농장의 성공이 바로 가족의 안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모니카는 적은 돈을 벌더라도 바로 지금 안정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당장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농장일에 매달리는 제이콥과 의견 대립을 하게 된다.
그런 작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모니카와 제이콥은 서로의 그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모니카는 제이콥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은연중에 만들어준다. 비록 제이콥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의 엄마인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불러와 자신과 남편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한다. 순자는 이 가족이 좀 더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윤활유이자 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미국으로 올 때 가져온 고춧가루, 멸치 등은 밥상에 올라올 음식이 되어 가족들에게 고국의 맛을 선사하고, 그가 가져온 화투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놀이가 가진 재미를 알려준다. 비록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외할머니와 데면데면해 하지만 아이들은 곧 그것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조금씩 외할머니는 이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
그 익숙해진다는 것이 곧 친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 완전히 마음을 열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이 영화 속 데이빗과 앤 도 마찬가지다. 대화조차 잘 통하지 않는 외할머니에게 그들이 친숙함을 금방 느끼기는 어렵다. 처음 외할머니를 만난 데이빗은 연신 할머니 같지 않다며 혼자 중얼거리는데, 한국의 할머니를 처음 만났고 기대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일하러 간 시간,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데이빗과 앤은 외할머니와 함께 집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에 산책을 나간다. 특히 데이빗은 그 산책의 시간을 보내며 순자와 교감하고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질병도 서서히 회복해나간다. 그렇게 모든 가족의 마음속에 익숙함이 자리해나갈 때 비로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는 기운이 만들어진다.
<미나리> 속 특별한 장면들은 대부분 외할머니 순자와 데이빗이 만들어낸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은 짧은 한국어와 영어를 통해 이야기하는데 냇가 옆에서 데이빗과 부르는 원더풀 미나리 송에서도 정감이 느껴지고 티격태격 장난치는 듯한 두 사람의 행동도 웃음을 짓게 한다. 또한 순자는 데이빗이 눈에 보이는 위험을 보이는 곳에 놓고 관리하게 만드는데 이것은 심장병이 있어 늘 뛰기를 두려워하는 데이빗에게 그 위험을 직면하며 관리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데이빗은 마음도 몸도 서서히 치유가 되어간다 이 영화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면 외할머니와 손주가 만들어낸 이런 앙상블 때문일 것이다.
순자는 고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를 냇가에 뿌려 미나리를 키운다. 물만 있으면 잘 자라는 미나리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니카와 데이빗 가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가족에게 물만 있으면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큰 문제없이 정착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영화 후반 군집을 이루어 아주 잘 자라는 미나리의 모습은 어쩌면 이 가족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는 이들 가족이 잘 정착하여 살게 되는지, 농장 운영은 성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마음인지는 잘 보여준다. 결국 다섯 명의 가족이 결코 떨어질 수는 없고 앞으로도 같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타오르는 농장에 뛰어든 제이콥과 모니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들은 싸운 직후였고, 이별의 결심까지 한 후였다. 하지만 남편이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이 타오르자 그것의 일부라도 구하고자 이리저리 물건을 불 밖으로 빼는 모니카의 모습에서 남편의 노력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그들이 결국 같이 그것을 해결해 나갈 것임을 보여준다.
가족의 고난사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전반적으로 영화 <미나리>는 긍정적인 영화다. 잠깐씩 모습을 비추는 알칸소의 이웃과 교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에게 호의적이다.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점 때문에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조금은 신기하게 바라보고 친해지려 다가선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폴(윌 패튼)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웃으로 등장하지만 결코 나쁜 인물이 아니다. 이해 못할 행동을 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제이콥의 농사가 잘되길 빌면서 일손을 돕는다. 악의 없이 이 가족이 그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어쩌면 영화 속 그의 주술이 실제로 가족의 마음이 안정되도록 심리적인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에 농작물 수확도 잘할 수 있었고, 집안에 나쁜 일들도 좋은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이민자들 주변에 있었던 좋은 이웃들의 모습을 폴이라는 인물이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폴이 이민자인 그들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도 폴을 하나의 이웃으로 대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각기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하며 관람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부부의 이야기, 어떤 사람은 외할머니와 손주들의 이야기 그리고 본인이 이민자라면 이민자 자체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이민자들의 경험이 담겨 있지만 아주 보편적인 가족의 정서를 담고 있어 널리 공감될 수 있는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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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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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나병의 영화정보 #7? ?영화 마케팅이 궁금하다고?!?
?씨나병의 영화정보 #7? ⠀ ?일곱 번째 주제? ⠀ ?영화 마케팅이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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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도그로 잃어버린 몸찾는 액션 스릴러!
윤계상 배우가 주연을 맡은 유체이탈자가 개봉했습니다.
12시간 마다 유체가 이탈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신기한 설정인데요.
게다가 다른 사람을 옮겨다니는 사람이 기억을 잃은 상태라 더욱 긴장감을 높이죠.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긴장감은 높습니다.
핫도그와 노숙자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가게 되는데요.
근접액션, 차량 액션, 총기 액션 등 다양한 액션이 포함되어 있어 볼거리도 많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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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walke starring actor Yoon Kye-sang has been released.
It's a strange setting that the fluid escapes every 12 hours and enters another person's body.
In addition, it raises tension even more because he who move around people have lost his memories.
The movie lead the story with limited space and limited characters, but the tension is high.
the main character track clues through hot dogs and homeless people.
There are many things to see as it includes various actions such as close action, vehicle action, and gun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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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프원> 1차 예고편
이번엔 카 레이싱이다! 두 드라이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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