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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wr2021-10-25 08:39:23

찌질한 남성 서사마저 '예술'로 만드는 거장의 저력

영화 〈아네트〉 리뷰

 

  표면만 보자면, 레오 카락스 감독의 신작 〈아네트〉는 다소 뻔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남성 예술가(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가 여성 예술가(오페라 가수 안 델그레코)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런데 아내는 승승장구하는 데 반해 자신은 정체되고 퇴보한다는 생각에 열등감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는 점차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아내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열등감이 해소되지 않자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다. 아내뿐 아니라 딸도 자기 욕망에 따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한다. 파국 이후에 또 다른 파국이 닥친다. 점점 꼬여만 가는 그의 삶은 철저한 외로움, 고독으로 귀결된다.

 

  즉, 〈아네트〉는 다소 뻔한 방식으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재현한다. 〈아네트〉에 레오 카락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부분적으로나마 담겼다는 점도 감독이 ‘고독한 남성 예술가’라는 구닥다리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케 한다.

 

  하지만 영화 심층의 주제의식을 파고들어 가다 보면 표면의 주제의식을 전복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았던 레오 카락스의 전작 〈홀리 모터스〉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리 모터스〉 스틸컷

 

  주인공은 매일 다른 역을 연기하는 배우 오스카다. 그는 구걸하는 노파, 3D 모션 연기자, 흉측한 광인, 괴팍한 아빠, 악기 연주자, 살인자, 부자 노인, 원숭이 등으로 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진짜’ 오스카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무대 뒤에 ‘진짜 오스카’와 무대 위의 ‘배우 오스카’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오스카는 그가 연기하는 배역 그 자체다. 배역이 바뀔 때마다 변주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인간의 주체성이 본질적인 자아에 근거한다는 전통적 철학 명제에 반기를 든 수행성 이론을 강력하게 환기한다. 우리는 무대 뒤에 ‘진짜 나’가 따로 있고, 사회생활(무대 위) 중에는 필요로 하는 자아를 상황에 맞춰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행성 이론은 이런 구분을 거부하며 본질적 주체·자아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흔히 우리가 본질적 자아라 일컫는 것이 상황에 따른 수행적 이미지의 연속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수행성 이론을 〈홀리 모터스〉에 대입해 보자면, ‘진짜 오스카’가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오스카가 연기하는 다른 배역의 연속이 오스카 그 자체다.

 

  수행성 이론은 인간을 상황적·맥락적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본질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일례로,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여기는 ‘남자’와 ‘여자’라는 범주가 ‘남자답게’, ‘여자답게’ 반복적으로 행동한 결과 만들어진 상상적 구성물일 뿐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젠더 역할의 수행적 반복이 성별 범주를 '본질'로 착각되게끔 만든다. ‘남자’와 ‘여자’라는 본질이 있어서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는 게 아니라,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강제하는 사회가 남녀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아네트〉 스틸컷

 

  〈홀리 모터스〉가 수행성 이론을 다소 불친절하게 영화화한 작품이었다면, 〈아네트〉는 이를 더욱 극적으로(동시에 암시적으로) 드러낸 영화다. 인기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주인공 헨리 맥헨리는 자신의 쇼에서 “코미디는 살해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유일한 방법”이라 익살스레 말한다. 그가 아직 안 델그레코를 만나 열등감에 무너지기 전의 일이다. 자신은 '무대 위'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헨리의 자기재현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헨리는 범죄가 탄로 나 재판을 받으며 진실을 말할 것을 추궁받자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 날 죽일 테니까”라고 중얼거리며 입을 열지 않는다. 이 대사는 이제 헨리가 더 이상 무대 위에 있지 않음을, 즉 그가 무대에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무대 위의 헨리는 진실을 말해도 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대 위에서 추방당한 그는 이제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무대 밖의 헨리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수행성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수행성 이론에서 ‘무대 밖’은 없다. 우리는 모두 ‘무대 위’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헨리의 두 번째 말은 그가 삶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음을 의미한다. 그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공간, 즉 무대 밖에 있음을 인정하는 건 자신의 삶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패배적 선언에 다름 아니다.

 

〈아네트〉 스틸컷

 

  영화는 헨리의 딸 아네트의 대사를 통해 무대 밖으로 내쳐진 헨리의 ‘죽음’을 확언한다.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 아네트는 내내 인형으로만 등장한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가지지 못한 채 헨리의 비뚤어진 예술욕에 수동적으로 이용되었음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형으로만 나오던 아네트가 사람으로 바뀌는 장면이 있다. 바로 그가 헨리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때다. 아네트가 자기 의지를 갖고 처음 말하는 순간 그녀는 인형에서 사람이 되었고(생명을 얻었고), 사람이 된 후의 첫 대화를 통해 아버지를 무대(삶) 밖으로 완전히 추방했다. 거만하게 군림하다 아내와 딸, 아내의 또 다른 연인에게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가했던 헨리에게 이제 남은 삶(무대)은 없다. 이처럼 〈아네트〉는 〈홀리 모터스〉에 이어, 다시 한번 무대 밖 삶은 없음을, 모든 것은 무대 위의 수행적 구성물임을 보인다. 무대 밖은 삶으로부터 추방된 곳, 즉 '죽음'의 영역이다.

 

  〈아네트〉는 찌질한 남성 예술가 서사를 철학적 메시지로 내파함으로써 ‘예술’이 되었다. 여기에 강렬한 음악과 실험적 연출, 뮤지컬 영화의 장르적 성격 등이 잘 어우러져 영화의 격을 높인다. 무엇보다 헨리 역의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돋보인다. 그는 카리스마적 예술가와 딸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극을 체화한 연기로 몰입감을 높인다. 마리옹 꼬띠아르와 사이먼 헬버그의 연기도 영화를 탄탄히 받쳐준다. 여러모로 매혹적인 영화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 rewr

출처 . https://brunch.co.kr/@cyomsc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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