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12-13 23:16:58
두려움이 나를 살게 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리뷰
코로나 이전 한동안 스쿠버다이빙에 미쳐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말 진심으로 미쳐 있었다. 태국에서 시작한 다이빙은 필리핀, 스리랑카, 몰디브를 거쳐 멕시코와 에콰도르의 머나먼 섬 갈라파고스까지 이어졌다. 우주를 향해 멀리 쏘아 올려 떠나지 않아도, 발을 디뎌 빠져 들면 심해라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먼 바다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새로운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영은 하지 못하는데, 바닷속 깊이 들어가는 다이빙은 좋아 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 수영을 하는 것과 다이빙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파도 위에서 물에 빠지지 않게 허우적거리는 것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고통에 가까웠으나, 파도를 넘어 짙은 푸름 속에 깊숙하게 들어가 내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함을 느끼며 천천히 해류에 몸을 맡기는 것은 편안하였다. 두려울 때, 두려움 속으로 뛰어들면 다른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 그 점이 나를 바다에 계속해서 뛰어 들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두려움을 이기는 감정을 동시에 느낄때면 <라이프 오브 파이>를 떠올렸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이의 가족은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하고, 동물들과 함께 배를 타고 캐나다로 긴 여정을 떠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폭풍우를 만나게 되고 배는 침몰하여 파이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홀로 살아남게 된 그의 구명보트에 다친 얼룩말, 굶주린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표류하게 되는데, 모두를 놀라게 만든 것은 바로 보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 배고픔에 허덕이던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 남게 된다. 호랑이와 단둘이 배에 남게 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되고 만다. 두려움으로 가득 찰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에도 파이는 살아갈 방법을 생각한다.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내 정신은 또렸해졌다. 호랑이를 굶주리지 않도록 돌보는게 나의 목표가 되었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을 겪고,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를 건너 마침내 육지에 다다른 파이에게 사람들은 믿지 못할 이야기 대신 믿을 만한 이야기를 원하고, 파이는 다른 버전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냐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스펙터클한 사건에 이어진 호랑이와의 동행 내내 긴장하고 흥미진진했다가, 아름다운 영상에 눈호강을 하며 감탄했다가, 마음을 쿡 찌르는 두번째 이야기에 ‘그래서 진실은 무엇일까’ 당황한 채 영화가 끝나버려 멍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나를 살리게 했다는 파이의 말이 자주 떠올랐다.
나이가 들고 지킬 것이 많아지니, 그만큼 두려운 일도 자주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다 무슨 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위태로운 상황이 닥칠 때 마다 망망대해에 호랑이 한 마리와 작은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파이가 된 것 같았다.
맞설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속으로 풍덩 빠져 이겨내게 되는 마법같은 일이 생기고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디게 되었다. 결국 가장 큰 두려움은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나 짐작에서 오게 되는 것이니까.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 바다도, 호랑이도 지금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결국은 나를 살리게 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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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가족 | 차분하나 팽팽하고 부조리한 가족드라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돈만 벌면 된다는 태도로 반성 없는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 형 ‘재완’(설경구)과 공정함과 원리원칙을 중요시 여기는 자상한 소아과 의사 동생 ‘재규’(장동건). 전처와 사별한 재완은 필라테스, 요가 등 여러 자격증을 따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지수'(수현)와 재혼하고, 재규는 성공한 프리랜서 번역가로 자녀 교육, 시부모의 간병까지 빈틈없이 해내는 ‘연경’(김희애)과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누린다.
어느 날, 평온하던 이들의 가정과 일상이 돌연 깨진다. 재완의 딸 '혜윤'(홍예지)과 재규의 아들 '시호'(김정철)가 학원을 째고 놀다가 길거리에서 노숙자를 폭행해 중상해를 입힌 현장 CCTV 영상이 뉴스로 보도된 것. 재완과 연경은 즉시 혜윤과 시호를 지키려 하고, 재규는 시호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면서 가족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하지만 재완이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하면서 네 가족의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영화관에서 봐야 되는 가족 드라마
팬데믹 시대를 거치며 관객들 사이에서 익숙해진 표현이 있다. '영화관에서 봐야 되는 영화.' 비싸진 영화 티켓을 구매해서라도 스크린으로 봐야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이맥스나 돌비시네마로 보면 더 좋고, 특별관이 아니더라도 영화관이라는 환경에서 봐야만 그 감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 <탑건: 매버릭>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이 표현이 붙는 작품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아이맥스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품 또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기대할 만한 블록버스터 영화인 경우가 많다. 전자는 <오펜하이머>, 후자는 <듄: 파트 2>인 셈이다. 대부분의 한국 영화 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작품들은 '영화관에서 봐야 진가가 나온다'와 같은 평을 받지 못했다.
허진호 감독의 9번째 장편 영화이자 제48회 토론토 국제 영화제 공식 초청작인 <보통의 가족>은 다르다. 겉보기에는 평범하다. 일단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할 법한 작품은 아니다. 등장인물은 줄이고 활동반경을 넓힌 <완벽한 타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보통의 가족>은 영화관에서 봐야 진가가 드러난다. 스크린 가득한 배우의 표정과 제스처, 그리고 음향을 느껴야 비로소 맛이 사는 가족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차분하나 팽팽하게
<보통의 가족>은 제목에 충실하다.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되는 한국 가족의 전형이 집약되어 있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누가 어머니를 어디에 모실 지를 두고 갈등을 빚는 형제. 며느리 간의 갈등. 입시 때문에 학원 뺑뺑이에 시달리는 아들. 부모 몰래 탈선하는 딸까지. 많은 주인공 중 어느 누군가에게는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밖에 없는 판이다.
이는 양날의 검이다. 자칫 주말이나 아침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막장극으로 흐를 여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보통의 가족>은 절묘하게 균형점을 잡는다. 가족의 특성을 활용했다. 누구든 부모이기에, 또 자식이라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이 있다. 영화는 그 감정을 최대한 끄집어내면서 상황이 급작스럽게 반전되더라도, 입장이 달라져도 수긍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극장에서 보는 <보통의 가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난다. 수시로 바뀌는 주인공들의 심경을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배우들의 연기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자기가 폭행한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죄책감이 없는 혜윤이를 보면서 재완은 충격에 빠지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같은 소식을 들은 재규가 병원 구내식당에서 밥과 반찬을 입에 쑤셔 넣는 장면도 그의 심경을 꾸밈없이 전달한다.
사운드도 인상적이다. 갈등이 극에 달해 분노가 터지는 순간 적막만이 가득한 식으로 음향을 역이용한다. 재완이 혜윤과 사무실에서 상담하는 장면에서는 대화 내용이 들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혹은 내렸는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재규와 연경이 차에서 말싸움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선택적으로 주면서 온전히 각 인물의 감정선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허진호 감독다운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한다.
흥미롭고 야심 찬
더 나아가 전개도 흥미롭다. 두 형제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는 과정이 극의 핵심이다. 타락한 변호사 같던 재완과 정의만을 추구하던 소아과 의사 재규. 그들의 자녀 혜윤과 시호가 노숙자를 폭행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고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둘의 입장은 뒤바뀐다. 재완은 어른의 부모의 도리를 하자고 동생을 설득한다. 반면에 재규는 오직 자기 아들과 가족만 살리는 게 중요하다며 폭주한다.
특히 두 형제의 직업이 꽤 의미심장하다. 변호사와 의사. 한국에서 오랫동안 문과와 이과를 각기 상징하는 전문직. 어찌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엘리트 직업이다. 이는 <보통의 가족>이 자칫 작위적이라고 느낄 만큼 다양한 사연을 한 가족에게 쑤셔 넣은 이유와도 이어진다. 그저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보여주는 메타포로써 활용하려는 야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통의 가족>은 마치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한국의 부모 세대, 더 넓은 범주에서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가족을 대하며 다음 세대를 길러내고자 하는지를 묻는 셈이다. 즉, 자라나는 미래 세대를 봤을 때 과연 한국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미래 세대가 겪는 아픔과 문제를 눈 감고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고쳐야 하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거시적 관점에서는 대답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보통의 가족>은 미시적 차원에서 거시적 문제를 다루기에 긴장감이 극대화된다. 의사 동생을 활용해 딸의 봉사 실적을 꾸미는 식으로 아이들을 닦달한 결과가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채찍질에 지친 아이들에게 잘못의 책임을 온전히 돌릴 수 있는지. 그들이 자기 자녀일 때 공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 한국 사회의 난맥상이 한 가족의 모습에 한가득 담겨 있다.
솔직하나 겸허하게
그래서일까? <보통의 가족>은 허무한 듯 놀랄 만큼 솔직한 결말로 놀라움을 안긴다. 재완과 재규는 마지막까지 평행선을 달린다. 공정한 정의를 추구했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듯 보이는 아들 때문에 생각을 바꾼 동생. 가족만 바라보다가 죄책감도,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는 딸을 보며 정의를 쫓기로 결심한 형. 결국 동생은 형을 문자 그대로 들이박는다. 미래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현상을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재완과 재규의 선택마저도 한국 사회를 닮았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없어서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지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하는 사회가 두 형제에게서 보인다. 흥미롭게도 <보통의 가족>은 이 상황에서 단언하여 답을 주거나 대단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오프닝과 결말이 이어지는 묘한 수미상관으로써 두 형제 모두에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꼬인 실타래의 책임이 있다고 암시할 뿐이다.
상업영화로서는 이 선택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숱한 갈등을 열린 결말에 가깝게, 싱겁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 메시지를 함께 고려하면 오히려 인상적이다.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보여주는 용기가 억지스럽지는 않으니까. 다 같이 웃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가족과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 에필로그가 신선하지는 않아도 여운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리하나 안이한
그러나 <보통의 가족>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가족 구성원 중 일부의 시점이 부재하다는 것. 바로 아이들의 시점이 찾아볼 수 없다. 철저히 부모의 시선으로, 기성세대의 시점에서 젊은 세대와 아이들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예를 들어 과도한 입시 스트레스는 클리셰처럼 쓰이고, 시호의 학교 폭력 문제는 발단부터 해결까지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물론 이 소재들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도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다른 어른들을 보여주는 세밀한 묘사에 비해서는 아이들이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사용된다. 그 결과 혜윤과 시호는 알 수 없는, 그저 악의만 지닌 평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시호는 눈앞의 상황만 벗어나기 위해 부모도 손쉽게 속일 수 있는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이고, 혜윤은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결국 메시지도 무뎌진다. 가족 드라마에 빗대어 한국 사회 문제를 보여주려는 게 <보통의 가족>의 의도다. 그런데 그 의도가 정작 부모 세대가 자녀 세대를 바라보는 고정관념 섞인 시선을 드러낸다. 젊은 세대를 잘못 자란, 이해할 수 없는, 악마화된 존재로 그리면서 한국 사회가 겪는 갈등을 입체적으로 풀어낼 기회를 놓치고 만다. 예리한 야심과는 달리 <보통의 가족>의 끝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차분하나 팽팽하고, 솔직하나 겸허하고, 예리하나 안이하게 담아낸 한국이라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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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면과 혐오, 분노가 만든 폭력의 세계
지금 우리 학교는 (ALL OF US ARE DEAD, 2022)
“외면과 혐오, 분노가 만든 폭력의 세계”
개봉일 : 2022.01.28. (넷플릭스 공개)
감독 : 이재규, 김남수
출연 : 박지후, 윤찬영, 조이현, 로몬, 유인수, 이유미, 임재혁
개인적인 평점 : 3/5
지금 우리 학교는 줄거리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한 고등학교에 고립된 이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자들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겪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동명의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을 원작으로 한 새로운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 2022년 1월 28일 날짜로 공개됐다. 2021년을 뜨겁게 달궜던 <오징어 게임> 이후,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히 높아진 만큼 ‘한국 드라마 콘텐츠’라는 타이틀을 달면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만만치 않은 시기가 아닐까 싶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공개된 <지옥>은 ‘한국 드라마 콘텐츠’로 큰 관심을 받으며 스트리밍 1위를 달성했고, <고요의 바다>는 1위를 찍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한국형 SF’의 새로운 장을 열며 마무리되었다.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공개된 시리즈들 모두 어떤 방향으로든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꽤 괜찮은 성공이 거듭되면서 기대감이 더욱 쌓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어딘가 모자랐던 걸까. 나에게 <지금 우리 학교는> 시리즈는 장단점이 뚜렷한, 완전한 성공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작품으로 남아버렸다.
긴 러닝타임, 길게 늘려진 답답한 이야기
<지금 우리 학교는>은 <킹덤>에 이어 넷플릭스에서 2번째로 제작된 한국형 좀비 드라마다. <킹덤>은 시즌당 4-60분 내외의 러닝타임을 가진 6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것에 비해 <지금 우리 학교는>의 러닝타임은 거의 두 배에 달한다. 그렇다고 <킹덤>이 특히 짧았던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처럼 디스토피아를 소재로 사용한 <스위트홈>과 최근 공개된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 <D.P>, <마이네임>, <고요의 바다>, <지옥> 등이 모두 10편 내외로 구성되었던걸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눈에 띄게 긴 러닝타임을 갖고 있는 시리즈다.
한 회차당 60분 정도, 총 러닝타임은 709분에 달하는데, 처음엔 “원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워낙 많으니까.. 12화인 이유가 있겠지?”싶었는데, 시리즈를 다 보고 나니 “왜 12화까지 만들었지?”싶었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부분과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많았다는 부분은 어느정도 느낄수 있었으나, 깊게 표현됐다기보단 한번 쓰고 내팽개치고, 또 잠깐 보여주고. 하는 식으로 짧게 반복되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8-10화 내외로 과감하게 쳐냈다면 지금보다 만족도가 훨씬 올라갔을지도.
여러 인물들이 만나게 되면 당연히 갈등이 생기게 되고, 어느 정도 고구마를 먹은듯한 답답한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이 그 고구마를 견디는 이유는 갈등이 해소될 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즉 사이다를 꿀꺽꿀꺽 마시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인데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사이다가 부족하다. 숨 막히게 반복되는 답답한 상황과 고립. 갈등 요소가 해소되나? 싶은 순간, 갈등을 야기한 인물이 얼렁뚱땅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래... 상황상 어쩔 수 없지...”, “그래... 얘네 고등학생이잖아...”를 반복하며 마음을 달랬다.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구성과 납작한 인물들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꽤 많은 캐릭터들이 나온다. 초반부엔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기 힘들 만큼 말이다. 교내에는 청산과 온조가 주축이 된 무리와 하리와 미진이 주축이 된 무리, 은지와 철수로 구성된 폭력의 피해자 무리, 교내 최고 빌런 귀남까지 총 4개의 시점이 있다. 그리고 학교 밖엔 온조의 아빠 소주 무리와 도시로 들어온 스트리머와 형사 무리, 효산시 봉쇄 작전을 실행하는 사령관까지.
사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건 단점이라고 할 수 없으나, 문제는 한 무리 안에서도 인물들이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는 점과 각 무리가 갖고 있는 톤 자체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곧 멸망해버릴듯한 세상이 주는 절망과 무거움을 작은 코믹 요소들로 중화시키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특정 인물들의 이야기만 너무 큰 변주를 준 느낌이라 아쉬웠다. 톤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다양함보다는 산만함이 크게 느껴졌다.
정말 가감 없이 이야기하자면, 산만한 이야기를 꽉 잡고 갈 중심인물이 많이 없었다는 점도 이 시리즈의 단점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우리 학교는> 원작을 접한지 오래 지나서, 원작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 시리즈를 보며 이런 생각을 정말 자주 한 것 같다. “얘 웹툰에서도 이랬었나?”
모든 인물들이 매력적이고 입체적일 순 없다. 그래도 이 산만함을 꽉 쥐고 끌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았다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4-5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캐릭터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 크게 아쉬웠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시청 중에 지쳐버린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단점을 어느 정도 상쇄하는 영리한 좀비 액션
그럼에도 <지금 우리 학교는> 시리즈를 끝까지 완주한 이유.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좀비들과 펼치는 영리한 액션신들 덕분이었다. 학교라는 고립된 공간 속, 길쭉하고 좁은 복도의 특성을 활용한 아슬아슬한 액션, 교내 물품들과 건축 자재들을 이용해 구성한 영리한 액션들과 그 안을 유연하게 비집는 카메라의 시점. 그 모든 액션들을 받아쳐주는 좀비들의 그로테스크한 움직임. 그리고 역하게 느껴질 만큼 잘 만들어진 비주얼까지. 아쉬운 점은 다 미뤄두고, 이 액션신과 배경을 만들기 위해 담당자분들과 배우분들 모두 정말 고생하셨다는 칭찬은 아끼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론 고지대를 선점한 상태로 이어진 액션신들이 인상 깊게 남았다. (특히 도서관 장면)
신선한 얼굴들
<지금 우리 학교는>에는 신선한 얼굴들이 대거 출연한다. <벌새>로 소중한 날갯짓을 보여준 박지후 배우,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유미 배우, 여러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탄탄한 연기력을 뽐낸 이상희 배우처럼 은근 낯이 익은 배우들도 있고, 언젠가 한 번쯤 봤었던 <슬의생>의 장윤복 역을 연기했던 조이현 배우, 영화 <생일>에서 설경구 배우의 아들 수호를 연기했던 윤찬영 배우, 조금은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로몬, 유인수 배우까지. 이 신선한 얼굴들엔 기시감 같은 뻔한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보여준 연기와 배우들 간의 합이 빈틈없이 완벽했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차기작이 궁금해지게 만든 시리즈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순간에 지옥이 된 세상에서 꼬집고자 하는 것. 호불호가 갈리는 표현 방법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 바이러스의 진원지인 효산 고등학교에서 살아남은 학생들과 학교 밖, 효산시에서 살아남은 어른들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이다. 바이러스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며 한순간에 지옥이 된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뿌리치고, 달려오는 좀비들에 맞서며 구조의 순간을 기다린다. 아이들이 갇힌 세상은 온통 공포와 괴성, 불신으로 가득하다. 학교 밖에서 이 사태를 알게 된 어른들은 아이들을 구하러 지옥으로 몸을 내던지기도 하고, 다수의 생존과 소수의 희생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드라마 안에 그려지는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며 공감과 울분, 분노 등 수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꼬집고자 하는 방향은 확실하다. 평화로워 보이는 학교가 누군가에겐 지옥일 수 있다는 것.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방관자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 폭력의 구렁텅이가 깊어질수록 그 안에선 더욱 지독한 폭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 폭력이 지배한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가면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혐오 등등.. 방향성은 충분히 알겠으나 표현 방식에 대한 호불호가 꽤나 갈리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건 이 문제들을 꼬집기 위해 사용된 국회의원 캐릭터와 가해자와 피해자 캐릭터들이 다소 일회성으로 소비되었다는 점과 논란이 될만한 폭력 표현 방식 등이 있겠다.
지옥 같은 학교에서 손을 잡는 아이들
폭력이 만들어낸 작은 멸망과 그 상황에서도 파이 게임을 하는 어른들. 아이들은 어른들을 기다리며 지쳐가고, 끝내 버려졌음을 알게 된 순간 더욱 견고하게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그들의 작은 세계 속에선 믿음, 사랑, 우정, 희생이 교차하고, 이 모든 감정은 단 하나의 목표. 생존을 위해 사용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생존이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천국, 누군가에겐 지옥이던 학교가 이젠 모두에게 공평한 지옥이 되어버린 상황. 희망 같은 건 가질 수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잠시나마 희망의 스파크를 튀겨본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면 아이들끼리 손을 잡고 서로에게 몸을 기대며 휴식이나 수면을 취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순간들이 정말 좋았다.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에게 기대는, 본능이자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들이 좋았다. 좀비가 창궐한 와중에도 수능과 고3이 될 내년을 걱정하는 팍팍한 분위기를 잠깐이나마 풀어주는 것 같아서.
좀비물이라기보단 하이틴 로맨스로 본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을 설명하는 가장 큰 카테고리는 ‘한국형 좀비 드라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분야를 즐겨보는 팬들에게 <지금 우리 학교는>은 부족함이 많은 시리즈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클리셰로 가득한 진행에 생존을 앞에 뒀다기엔 예상보다 더욱 답답하게 행동하는 인물들까지. 특히 좀비물의 스탠더드로 불리는 <워킹데드>나 앞선 한국형 좀비 <킹덤> 정도를 기대했다면..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이틴 로맨스 초점으로 바라본다면.. 어쩌면? 좀비에 집중했을 때보다 조금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잠깐의 탈출과 고립, 희생과 이별이 반복되며 자연스레 쌓여간 감정들이 언젠가 한 번쯤은 훅- 다가오는 순간이 있을 테니까. 슬픔으로든 아주 큰 분노로든, 그 어떤 형태로든.
감정을 제대로 마무리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남은 건 맞잡은 손뿐인 아쉬움이 가득한 시리즈였지만... 이를 계기로 ‘K-좀비’의 장이 더 넓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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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 EO'의 삶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어렵다. 쉽지 않은 영화다.
동물의 삶을 이해 한다는 게 쉬울 리가 없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당나귀 EO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극은 불친절 하기 그지 없다. 큰 설명없이 함축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일이 빈번하다. 게다가 EO가 계속해서 만나는 상황들 또한 마음 편하게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영화다. 몇몇 장면은 몸서리 치도록 슬펐고, EO의 여정들은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나는 생각이 많아 졌다.
<당나귀 EO>는 단 한 순간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회색 당나귀 EO 의 인간 세상 여행기다. 세상의 전부였던 서커스단으로부터 구조된 뒤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가로지르는 긴 여정에서 평화로운 농장, 훌리건으로 가득한 축구장 공포의 소시지 공장, 쇠락 직전의 저택. 다양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 번째 장편영화 <당나귀 EO>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인 로베르 브레송의 걸작 <당나귀 발타자르>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거장다운 면모가 돋보이는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비주얼과 사운드, 그리고 환경과 동물권 문제에 대한 날카롭고 진중한 메시지로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제 70 회 멜버른국제영화제, 제 46 회 홍콩국제영화제, 제 47 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 66 회 BFI 런던영화제, 제 60 회 뉴욕영화제 등 내로라하는 영화제에서 무려 21 관왕 및 55 회 노미네이션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뉴욕타임스, 카이에 뒤 시네마, BBC, 타임, 사이트 앤 사운드, 인디와이어 등 저명한 매체로부터 연달아 올해의 영화로 선정되어 “잊을 수 없을 기이한 대서사시”(NPR), “미래에 고전으로 기록될 작품”(Cinemacy), “84 세 거장 감독의 최고작”(Ty Burr's Watch List) 등 극찬을 받으며 단숨에 놓쳐서는 안 될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는 동물권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영화. 동물보호단체의 시위로 서커스단의 동물은 자유를 찾는 것 같지만, 곧 다른 인간의 보호 혹은 쓸모로 옮겨질 뿐이다. 가학적인 ‘서커스단’에서 유일하게 EO에게 애정어린 손길을 건넸던 ‘카산드라’와의 헤어짐 이 후, 모델로 활동하며 아름답게 꾸미고 보살핌을 받는 말들 사이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해야하는 당나귀는 차별 받는 대상이 된다. EO는 곧 우당당탕 사고를 치고 또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며 호감을 가졌던 말과 또 다시 헤어지게 된다. 이 후 옮겨가게 된 농장에서는 EO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사육장안에서 밖만 보고 서 있다. 감정을 주고 받는 누군가와의 헤어짐으로 상실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EO의 생일 날 밤, 작은 당근머핀에 초를 붙여 “네 모든 꿈이 이러지길 바라. 행복해야 해.” 하고 말하며 찾아온 카산드라가 떠나가는 순간. EO는 서글픈 울음을 길게 내 뱉고, 마침내 농장문을 박차고 스스로 나아간다. 인간의 세상에 홀로 걸어 나와 EO가 만나는 세상은 잔혹하다.
숲에서 늑대가 총에 맞아 죽고, 물고기들은 어항에 갇혀 있다. 여우는 모피를 위해 작은 케이지에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한다. EO를 살라미용이라며 차에 실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축구팀의 마스코트가 되어 원치 않은 추앙을 받기도 하고, 반대편에 의해 울분을 토해 낼 도구로 쓰여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저렇게 힘든데 안락사를 하는게 낫지 않냐는 사람과 치료하는 곳이니 치료를 할 뿐이라는 수의사도 있다.
스스로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나온 EO는 동물이기에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일과, 동물이니까 저질러 버릴 수 있는 행동의 작은 간극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며 나아간다. EO의 행동과 그리하여 마침내 결정하는 선택의 과정은 처연하고 슬프다. EO가 내내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 마음을 기댈 곳이 없는 EO는 살아갈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몰랐던 것은 아닐까.
내가 옳다고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큰 시련을 줄 수 있고, 사랑을 준다고 하는 행동이 사랑을 받는 상대에겐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EO의 삶을 보며 생각한다. 타인에 의해 주어진 삶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나아가는 삶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착취 당한다고 말하는 그 삶엔 안온함과 사랑이 있고, 자유로워진 삶에는 불특정다수에 의한 폭력과 불안과 외로움만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이 맞다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을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물과 자신의 삶은 관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보았으면 좋겠다. 당나귀 EO의 삶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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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릴러 영화 추천 <O2>, 답답함과 막막함 사이
<O2>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출처: IMDB)
<O2(Oxygen)>
바로 며칠 전에 공개된 따끈따끈한 넷플릭스 신작 영화 <O2>를 봤습니다. <O2>는 <엑스텐션>, <미러>, <피라냐>, <크롤> 등 시종일관 관객을 괴롭히는 한결같은 취향의 작품을 고집해온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나우 유 씨미: 마술 사기단>, <6 언더그라운드> 등에 출연하며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프랑스 출신의 팔방미인 배우 멜라니 로랑이 주연을 맡은 작품인데요. 공개 2달 전부터 블로그에 티저 예고편, 공식 예고편까지 올릴 정도로 개인적으로 많이 기대했던 영화입니다.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로튼토마토 신선도를 기록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반응들이 괜찮은 편이라 기대감 100%인 상태로 영화를 봤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90%가 넘는 신선도를 기록할만한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O2>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냉동 수면 장치 안에서 눈을 뜬 주인공 '엘리자베스 앙센'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갇힌 곳이 어딘지도, 어쩌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데요. 거기다 온몸이 묶인 상태로 깨어난 탓에 눈을 뜨자마자 불안함은 최고조인 상태입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도와주세요~"를 외쳐보지만 들려오는 건 의료용 인터페이스 AI인 '밀로'의 음성뿐인데요. 엘리자베스는 밀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극저온 캡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몸이 아프기 때문에 캡슐에 들어온 것이고, 문뜩문뜩 오버랩되는 기억의 파편을 토대로 자신이 병원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요.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밀로에게 자신의 신원을 물어보는데요. 밀로는 이름 대신에 '오미크론 267'이라는 뚱딴지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곧이어 엘리자베스는 캡슐 안에 산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 캡슐 안에 가만히 누워 누군가가 자신을 구조해 줄 때까지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O2>는 제한된 장소에서 제한된 단서로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흔히 밀실 공포 스릴러라고 하죠. 그런 상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르적 파워가 대단하기 때문에 그동안 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로 많은 영화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큐브>, <폰 부스>, <베리드> 등이 있었고, <O2>는 그 작품들에다가 SF 장르까지 결합하며 나름대로 차별화된 밀실 스릴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일랜드>, <그래비티>, <패신저스> 등과 같은 다른 SF 영화들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는데요. 지금까지 적은 영화만 무려 6편이죠. 그만큼 <O2>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장면과 이야기를 한데 모은 것 같은 느낌의 영화였습니다. 좋은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고 레퍼런스를 따오는 건 좋습니다. 사실 100%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는 만들기가 쉽지 않죠. 어떤 작품에서 영감을 받든, 더 좋은 영화만 만들어내면 대놓고 표절하고 따라 하지 않는 이상 뭐라 할 사람은 많지 않죠. 하지만 아쉽게도 <O2>는 그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폰부스>, <베리드>, <그래비티> 중에서 (이미지 출처: INDB)
나름대로 영화판에서 잔뼈 굵은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는 몰입도 있었습니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반전도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괜찮았고요. 특히 멜라니 로랑의 연기가 정말 좋았는데요. 이런 밀실 스릴러, 특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한 명 밖에 등장하지 않는 1인극의 경우에는 무엇보다 홀로 극을 이끄는 배우의 역량이 중요할 수밖에는 없죠. 사실 <O2>는 목소리 출연도 몇 명 있었고, 회상 장면을 통해 다른 인물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멜라니 로랑이 홀로 극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무방한 영화입니다. 멜라니 로랑은 말 그대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온갖 감정을 느끼는 주인공의 상황을 침착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로 잘 표현해냈습니다.
그 외에 영화가 주는 스릴의 쾌감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스릴보다는 답답하고 꽉 막힌 기분이 들었는데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이런 영화를 볼 때 꼭 한 번쯤은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O2>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무섭고 섬뜩하겠지만 그보다는 막막하고 답답한 게 더 컸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냥 모든 걸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ㅎㅎ;; 엄청난 스릴은 기대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킬링타임 정도는 해주는 영화 <O2>였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리쓰남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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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 리차드> 능력주의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부성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거리를 다닐 때도 목숨을 위협받는 빈민촌에서 살아간 '리차드 윌리엄스(윌 스미스)'. 어느 날 TV에서 테니스 대회 우승자가 막대한 상금을 받는 장면을 본 그는 자신의 두 딸 '비너스(사니야 시드니)'와 '세리나(데미 싱글턴)'를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테니스 코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그는 균형 잡힌 시각과 면밀한 통찰력을 지닌 아내 '오레이슨(안저뉴 엘리스)'의 도움을 받아 두 자매의 육성에 몰두한다. 캘리포니아 컴튼의 형편없는 테니스 코트에서 시작된 여정은 주변인의 부정적 예측과 불리함을 모두 극복해 나가고, 성공을 눈앞에 둔 두 딸에게 리차드는 마지막 교훈을 가르친다.
현대 축구를 논하는 데 있어 메시와 호날두를 빼놓을 수 없고, 농구를 논하는 데 조던을 빼놓을 수 없듯이, 테니스를 논하는 데 있어서 윌리엄스 자매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5번의 윔블던 오픈을 포함해 수 차례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차지한 비너스와 슈테프 그라프를 제외하면 4대 메이저 대회 우승과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모두 차지한 유일한 커리어 골든 슬램 달성자인 세리나는 문자 그대로 테니스계의 전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자매의 성공 신화가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또 성공 신화를 알고 있는 한,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윌리엄스 자매의 신화를 묘사하는 <킹 리처드>의 접근 방식은 예상을 벗어난다. 수많은 스포츠 전기 영화와는 결이 다소 다른, 신선한 접근법을 선택했다. 그 중심에는 자매의 아버지인 리차드 윌리엄스가 있다. 영화는 성공을 일구어 낸 당사자들이 아니라 조력자의 시선으로 신화를 들여다본다. 신선한 뉘앙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킹 리차드>는 스포츠 전기 영화의 흔한 공식을 넘어선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결과 <킹 리차드> 보다 보편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입장에서 자칫 신화에 가려질 수도 있었던 현실을 끄집어낸다. 특히 영화는 '능력주의'라는 이름의 현실이 지닌 여러 모습을 흑인으로서의 리차드, 코치로서의 리차드, 아버지로서의 리차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흑인으로서의 리차드
매일 같이, 또 비가 오는 날에는 젖은 코트에 대한 적응력을 높인다고 딸들을 훈련시키는 리차드를 두고 주변 이웃들은 그가 딸들을 학대한다고 비난하며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한다. 또 부유층도 쉽사리 뒷바라지해주기 힘든 테니스를 굳이 할 필요가 있냐며 다른 종목을 추천하는 이들의 권유에도 리차드의 결심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단순히 딸들의 재능을 봐서가 아니다. 그에게 테니스는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자란 자신과는 다른 삶을 딸들이 살고, 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은 날 무시했지만 너흰 달라, 존중받게 할 거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리차드와 비너스, 세레나의 이야기는 흑인으로서의 꿈을 이루어낸다. 비너스가 처음으로 참가한 프로 무대에서 그녀의 플레이를 보는 흑인, 여성 관중들의 표정과 반응은 호기심에서 열광과 팬심으로 변해간다. 세 부녀가 ‘백인 스포츠’인 테니스에 낸 균열은 그들을 보고 테니스 선수를 꿈꾸기 시작한 흑인들로 인해 점점 더 커진다. 그 덕분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과잉진압 당하거나 총에 맞지 않고 마약에 빠지지 않는 삶의 가능성도 덩달아 커진다. 흑인에게도 다른 미래가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리차드의 결심은 특히 그가 흑인 사회에 만연한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장면에서 강조된다. 공용 테니스 코트에서 딸들을 훈련시키는 리차드는 코트가 있는 지역의 갱들에게 숱한 모욕과 폭행을 당한다. 전설적인 NBA 선수였던 찰스 버클리도 지적한 바 있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좋은 성적을 받아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는 흑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잘못된 관념과 리차드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맞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이는 리차드가 흑인으로서 지니고 있던 트라우마를 아내에게 위로받는 장면, 또 비너스에게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대목이 더욱 뭉클한 이유이기도 하다.
코치로서의 리차드
이때 그가 같은 흑인들 사이에서도 팽배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뚫고, 빈민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철저한 능력주의다. 미리 짜 놓은 계획대로 딸들에게 능력을 증명하기를 요구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스티브 잡스를 보는 듯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프로젝트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협박으로 성공시킨 잡스처럼 현실을 왜곡한 게 아닌가 싶은 능력을 끌어내는 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될 거라는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굳은 믿음을 딸들과 공유하면서 그저 열정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바꾸는 자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낸다.
그러면서도 리차드는 결코 막연한 기대나 예측, 그리고 호의와 혜택의 힘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 능력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또 보여준 능력으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부유하지 않은 흑인으로서 비너스와 세리나를 지도해 이루어낸 성과와 업적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에이전트들의 말에 크게 분노하고, 그들의 계약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마찬가지로 비너스의 프로 데뷔 직전에 거대한 계약금을 제시한 나이키와의 협상에서도 아직 능력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과 증명이라는 잣대에 충실했기 때문에 작중 비너스는 리차드가 누누이 말했던 대로 테니스계의 스타이자 롤모델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다.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자리를 차지하거나 외부의 평가에 의해 매겨진 가치에 안주하는 대신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을 둘러싼 차별과 편견을 진정으로 하나하나 깨부순다. 이처럼 작고 좁은 문틈을 뚫어서 스스로를 증명했기에 그녀의 성공은 유사한 처지에 있고 동질감을 느끼는 모든 사회적 약자에게 힘과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다. 리차드는 단순히 테니스뿐만 아니라 인생을 가르친 코치인 셈이다.
아버지로서의 리차드
흥미로운 것은 코치로서의 리처드가 철저히 능력주의에 입각한 사고로 딸들을 성공까지 이끄는 와중에도, 아버지로서의 리처드는 능력주의가 낳을 수 있는 병폐를 경계하고 예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두 가지 문제를 겪게 된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오만함이다. 성공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고, 노력에 따른 대가로만 여기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피폐함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삶의 가치를 숙고하는 대신 계속해서 능력을 증명하고 성공해야 하기에 완벽주의에 빠져들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쇠약해진다.
이러한 문제점은 작중 아버지 리차드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주니어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는 비너스와 세리나, 그리고 다른 딸들이 패배한 경쟁자들을 조롱하는 모습에 크게 분노한다. 또 어려서부터 수많은 대회에 참가해 큰 성공을 거둔 스타 유망주가 마약에 빠지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코치와 싸우는 한이 있어도 겸손과 평범함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신데렐라>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서 신데렐라의 성공이 아닌 그녀의 내면을 가득 채운 바른 품성을 보고 느끼게끔 한다. 나날이 유명해지는 딸들에게 그들이 갖는 영향력을 일깨우고, 엔딩 크레디트 속 내레이션에서도 언급하듯 사회로 그들의 능력과 성공을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두 딸을 끝없는 경쟁에서 떼어 놓으려고 한다. 주니어 대회에 참가해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는 에이전트와 코치의 의견을 무시하는 한이 있어도, 언론과의 접촉을 통제하면서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평범한 학생이자 청소년으로서 필요한 모든 경험을 보장해주려 한다. 이처럼 능력주의적 성공관으로 인해 오만해진 승자와 굴욕을 느낀 패자 간의 긴장관계를 풀기 위해 사회적 연대와 유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센델의 주장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특히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그로 인해 피폐해지는 청소년들을 현실이나 미디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보면, 그 위험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아버지의 진심은 더욱 감동적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아버지 리차드의 모습은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해준다. 사실 세 부녀의 성공을 온전히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구호가 모두에게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을 움켜쥐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이고, 다수는 공허한 빈손에 그쳐야만 한다.
그러나 깔끔하고 세련됐지만 무난한 할리우드의 문법과 방식으로 풀어낸 세 부녀의 이야기는 결코 ‘하면 된다’는 명제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리차드와 윌리엄스 자매가 걷지 않은 길, 정반대의 길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영화 전반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킹 리차드>는 기적을 보여주지만 기적의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여주고, 그 기적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할지를 되짚어 보게 만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상술하였듯이 신화의 주인공이 아닌 조력자인 리차드의 관점에서 성공 신화를 바라본 신선한 접근법이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인 완성도가 준수하나 평범한 영화에서 윌 스미스의 연기가 유달리 인상적인 것도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리차드 윌리엄스의 현현이 되어버린 그는 흑인으로서, 코치로서, 아버지로서 리차드가 느꼈을 모든 것을 미소 하나에, 웃음 한 번에, 눈물 한 방울에 고스란히 담아서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시상식에서의 논란으로 인해 의미와 가치가 퇴색된 감이 있기는 하나 윌 스미스에게 돌아간 남우주연상 오스카 트로피 자체는 정당해 보이는 이유다.
A(Acceptable, 무난함)
능력주의의 명과 암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부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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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꼼히 판 묫자리, 깔끔하지 않은 뒷정리
<파묘>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쓰자면 <파묘>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동시에 아쉬운 부분도 분명히 있는 영화였다. 왜 아쉬웠을까? 설명하기 이전에 이 이야기의 줄거리부터. 박지용(김재철)이 화림(김고은)에게 의뢰할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집안에 관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림의 동료 봉길(이도현), 아는 아저씨였던 영근(유해진)과 상덕(최민식)이 출동한다. 영화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삼고 있는데, 이 도중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또 알지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줄거리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당연히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상덕과 화림이고, 영근과 봉길이 상덕과 화림을 지원하는 사이드킥쯤 된다. 왜 <파묘>는 이렇게 줄거리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장재현 감독이 친일파라는 소재를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들은 영화를 이끌어가며 여러 사건들을 마주한다. 그중 가장 대표격인 사건은 박지용의 집안이 친일행각에 가담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 하에 박지용의 끔찍한 죽음을 비롯해 상덕의 보국사 방문이나 봉길의 부상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첩장'이다.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세로로 관을 묻고 그 위에 가로로 덧댄 형태를 핵심 모티브로 활용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우선 글쓴이에게 이 파묘라는 것을 통해 첩장이라는 모티브를 제시하는 것 자체는 신선했다. 일단 '파묘'라는 단어, 여러분은 들어본 적 있는가? 들어본 적은 있어도 이걸 직접 하는 것은 보기 힘들다. 글쓴이는 평범한 벌초정도는 해봤어도(요즘은 그마저도 안 한다지만) 묘를 판다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단어 뜻은 유추할 수 있는 정도다.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기괴함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 파묘라는 행위는 오컬트라는 장르와 매우 친해지기 쉽다. 사람이 죽어있는 묘를 들춘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과 가까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곧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유령, 귀신같은 초자연적인 일들에 노출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 중 하나인 직업영화로서의 박력도 이 '파묘'라는 설정 덕에 힘을 얻는다. 묘는 본질적으로 조상님이 들어가 계신 곳이다. 그리고 무당은 이 들어가 계신 조상님 내지는 하늘의 신과 대화하는 직업군이다. 주인공 화림이 이야기에 개입하는 이유가 자연스레 성립하는 것이다. 이는 상덕의 직업인 풍수지리사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풍수지리사는 '좋은 땅을 찾는' 직업이다. 그러려면 땅에 서려있는 기운을 분석해야 하는데 이는 상덕과 화림의 협업이 필연적이라는 근거가 된다.
이야기의 주제에 대한 관점에서, 파묘라는 것은 그 의미 자체만으로 친일파라는 소재를 소환하기에 적합하다. 왜? 파묘는 무덤의 근원을 파헤치는 일이다. 친일파는 근원이 어디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 사람들이다. 누가 보면 원래 일본인인 것처럼 조선과 대한제국을 팔아넘긴 자들을 친일파라고 하지 않나? 일제강점기 때 했던 창씨개명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더 쉽게 다가온다. <파묘>에서 보여줬던 첩장의 모티브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친일파는 진짜 근원지를 숨기고 다른 인간인 척하는, '그냥 미국 부자'나 '세로로 묻힌 관'같은 존재인 것이다. 또한 현재 2024년 일제강점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파묘가 필요하다. 이들이 언제부터 득세했는지 그 근원지를 좇는 것이다. 윗문단과 이 문단을 종합하자. 이 영화는 파묘와 첩장이라는 모티브를 메시지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동력의 양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잘 가져왔다. 이 똑똑한 선택을 강조라도 하듯 <파묘>는 영화의 핵심 사건에 이 모티브를 끌고 온다. 이 영화에서 진짜 흑막이라고 볼 수 있는 세로로 묻힌 관을 빠르게 규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원인을 진작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회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했던 그 근원지를 명확하게 찾을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첩장'처럼 곳곳에 둘러싸여 있는 장벽들이 많은 것이 그 이유다.
영화는 파묘라는 소재를 여기에서 활용하고 끝내지 않고 한 차원 더 깊게 들어간다. 파묘를 하는 이유. 알 수 없는 것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그 이면에 깔린 것은? '무엇인지 알지 모른다'라는 일종의 무기력함이다. 사실 이 무기력함과 무지라는 감정은 오컬트의 클래식과도 같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온갖 방해꾼이 몰려들어와 공포감이 조성되는 걸 활용하는 영화가 많았다. 비단 <악마의 씨> 같은 영화가 그랬으니까. 아, <악마의 씨> 개봉한 지 50년도 더 넘었다. 현대의 장재현 감독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더 나아가 이 '알지 못한다'라는 또 하나의 모티브를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가령 박지용 일가의 묘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우리 조상들은 쇠말뚝을 뽑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온 것으로 영화 안에서 묘사된다. 하지만 그 절을 오랫동안 지켜온 스님도 사진 속 안의 인물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제대로 몰랐다. 박지용의 조상이 들어간 관에 대한 부분도 이 무지에 관한 부분을 녹여낸 장면이다. 관을 화장하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아래에 묻힌 또 다른 관이 있던 것은 이 영화가 인간의 무지와 무기력함을 드러내는 다른 근거다. 봉길이 부상을 입은 후에 의사가 내린 진료도 이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결국 의사들이 아닌 화림과 친구 무당들이 봉길이 의식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에서 무지와 무기력함을 활용한 서스펜스를 보여준다. 박지용이 혼자 방 안에 있는데, 전화가 온다. 발신자는 상덕이다. 그런데 때마침 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상덕이다. 공포에 질린 지용. 지용은 당연히 전화를 건 사람이 상덕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지용만 속이지 않는다. 상덕이 호텔 건물로 올라가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관객을 속이기 위해 전화부터 건다. 전화가 진짜 상덕일 거라고 속임수를 둔 것이다. "창문 열어!"라는 소리를 듣고 난 다음의 관객은 '전화가 가짜구나'라는 걸 깨닫고 이내 이 영화의 박력에 압도당하게 된다. 이 장면은 그냥 단적으로 '뭐가 근원인지(진짜 상덕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서스펜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이 모티브를 다룰 것이에요!'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의미는 '그 대상의 원인과 실체를 규명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모티브는 <파묘>의 카메라나 조명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상덕은 유달리 혼자 움직인다. 그리고 카메라는 성실하게 이를 활용한다. 묘 근처에 혼자 있는 상덕의 모습을 황량하게 보여주면 주인공이 겪는 무기력함을 깊게 체감할 수 있다. 그리고 밤을 활용한 장면도 일부 있다. 화면 구도도 고의적으로 이 고립감과 답답함을 강조하기 위해 촬영된 부분도 어느 정도 있고, 채도 대비나 사무라이 귀신의 형상을 처음 찍는 방식을 봐도 관객이 대상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그러니까 이것이 뭐가 원인인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없게 설정했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 역시 이와 통하는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파묘>의 카메라는 굳이 담지 않아도 될 것도 담았다. 초반부 영근이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만 보면 후에 관을 열 사람이 영근일 것 같지만 영근은 그 시간에 국밥 먹고 있었다. 이 관을 여는 연출도 외부에서 누군가가 문을 여는 듯한 연출이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원인을 쉽게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이렇게 '파헤침'과 '원인을 알 수 없음'이라는 모티브를 반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글쓴이는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플롯을 각본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영화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또 '파헤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지만 '파묘'하는 행위는 두 번으로 나뉜다. 허리를 끊은 플롯을 구사하는 것이다. 초반부. 박지용의 집안에서 일아난 일을 알지 못해서 묘를 파헤친다. 그 결과 박지용의 집안이 친일파 집안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후반부. 세로로 된 관을 뽑아 결국 오니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초반부와 후반부가 나뉜다는 것은 그 지점을 나눈다는 분기점이 있단 의미이다. 초반부와 후반부를 가로지르는 구분선은 박지용의 죽음과 조부상을 화장하는 일이다. 박지용은 죽으면서 상덕에게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는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은 당연히 그 구분선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또 다른 부분에서 이 영화가 플롯을 친일파로 치환하고 있다. 사실 이 치환과 비유를 굳이 설명해도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야기의 도착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쉽다. 이 신체와 유령으로 치환시킨 일제의 만행은 결국 '한반도의 흐름을 끊은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플롯의 결과만 따져봐도 이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간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상처를 내는 캐릭터는 모두가 알고 있듯 사무라이 귀신과 친일파들이다. 이 요소들이 어떤 인물에겐 치명상을 입혔다. 그 인물은 봉길과 상덕이다. 곧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다.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는 과거 조선과 대한제국을 이끌던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이야(그리고 더 독려받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과거에는 그런 영향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거짓말이다. 이 둘은 사실 이야기의 흐름상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굳이 허리를 다치거나 생명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부상을 입는다. 왜?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로 암시한 조선/대한민국 사회의 허리를 친일파가 끊어버린 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임과 동시에 상업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한반도를 인간의 생로병사로 치환한 부분이 더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 글쓴이는 두 가지를 들고 싶다. 결혼과 아이, 그리고 죽음과 노인이다. 결혼이라는 사건만 빼면 나머지 두 캐릭터가 이야기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광심(김선영)이 굳이 임신할 필요 없고 첫째로 공격당하는 대상이 아이가 아니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생사를 오가는 인물이 할아버지 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굳이 이 둘에게 이런 속성을 부여한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 고의적으로 이 한반도를 둘러싼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에 영향을 주는 친일파들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사실 탄생과 죽음이 우리 인간사의 전부라는 점은 당연지사다). 여기에 덧붙여 <파묘>의 유령이 박지용 일가를 전부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글쓴이 입장에서 영화가 흑막을 악마화하기 쉽기 때문에 넣은 대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대상들이 가한 상처를 더 이상 과거와 현재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까지 향할 것'이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가 치밀하게 친일파와 그들의 악행들을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글쓴이는 상덕의 대사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자손들이 밟을 땅 아니냐!"라는 대사는 자연스러웠다. '원인을 알 수 없어 벌어진 문제'에 대해 근원을 찾아 없애겠다는 대사가 흐름을 깬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영화에 유령의 실체가 등장한 것도 나름 근거가 있다고 본다.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에 응당하게 해결하기 위해선 직접적으로 그 대상이 눈에 들어오는 게 합리적이다. 또 그 귀신이 엄청난 크기의 귀신인 것도 나름 그 역사의식에 대한 코멘트 같기도 했다. 그 당시의 일본 군국주의는 아시아에 그 정도의 공포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끔찍한 상처를 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연출들은 당연히 상업적으로도 기승전결이 명확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고른 선택지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내적 논리에도 걸맞은 흐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업영화로서 일반적으로 공감하기 쉽다. 보이지 않은 것이 사라졌다는 찜찜한 결론보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다는 엔딩이 이해하기 쉽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니까. 다만 이런 연출들을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무조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연결들이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장점을 위에 길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불호평을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에서 온다. 영화가 스스로의 발목을 여우가 뱀의 허리를 끊듯 끊어버린 것이다. 이 영화의 크게 나눈 1부와 2부는 두 이야기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이 등장하는 것과 등장하지 않는 것. 전자는 장재현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오컬트 외길인생으로 돌파하고, 후자는 크리쳐가 등장하는 크리쳐물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동기도 명확하다. 1부에서 인물들은 5억이라는 쉽지 않은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거나 / 불가해한 악을 규명하기 위해 힘쓴다. 하지만 2부에선 그 동기를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갑자기 상덕이 직업윤리에 투철한 인물이 되거나 그냥 직장상사, 하사 관계인 줄 알았던 화림과 봉길의 과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1부와 2부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방식도 명확하게 꽂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비가 된다. 1부는 할아버지 관을 태울 것인가 / 혹은 아닌가로 갈등한다. 2부는 정보량이 갑자기 느닷없이 많아지는 바람에 글쓴이는 자세한 것들을 나무위키를 읽고 이해했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의 흐름에도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가령 주인공 4인방이 보국사로 가는 과정과 '곰'이라는 동물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런 꼴을 굳이 하고 벌초를 하러 갈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그 관문에서 검문하던 인물들은 너무 쉽게 이들을 통행시켜 주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그 인물들이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 산에 곰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보국사의 스님에게는 연락했을까. 산에서 사무라이 귀신의 한바탕이 열릴 때 곰은 과연 무얼 했는가. 상덕이 크게 부상당한 것치고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는 것 아닌가. 공권력이 아예 기능하지 않는 세계관인가. 이야기의 중심을 아주 꽉 쥐고 있다가 후반부에 최소한만 유지하고 풀어지는 플롯 때문에 이런 디테일한 요소들이 이물질처럼 다가온다.
왜 이 이야기의 흐름이 최소한만 유지하고 풀어졌을까. 글쓴이는 인물들 간의 동기를 영화가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부는 오컬트. 2부는 판타지. 영화가 장르를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가령 <헤어질 결심> 같은 경우 기도수를 죽인 인물을 추적하다가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야기로 결론을 내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만 이 <파묘>는 <헤어질 결심>과는 다르게 이야기를 하나의 동력으로 끌고 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동력은 인물 간의 동기부여다. 가령 도입부에 잠깐만이라도 상덕이 무슨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보면서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로 묘사됐다면, 풍수지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인물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더라면, 평소 직업윤리를 잘 지키는 인물이었더라면 상덕의 대사에서 당위성이 생긴다. 또 상덕이 이 영화의 핵심 사건에 매달리는 이유에 조금이라도 근거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화림과 봉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봉길이 다쳤다. 화림은 그걸 알면서도 위험을 감수한다. 글쓴이는 당연히 화림이 저 때 저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이런 류의 관계는 보통 로맨스로 결론 내리는 게 일반적이니까. 그리고 <파묘>는 그 선택지를 고른 것으로 보인다. 봉길이 무당이 된 이유가 화림을 좋아해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봉길이 화림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무라이 귀신을 보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의협심이 강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후 화림의 행보까지 감안해 본다면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이것까지 담으면 이야기가 난잡해진다고 판단했는지 도입부에 이를 생략해 버린다. 아무 암시도 없다 봉길이 화림을 살리는 선택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봐왔던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급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캐릭터 영근 역시 마찬가지다. 영근은 상덕을 굉장히 신뢰한다. 이 '굉장히 신뢰한다'라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난 형님만 믿어요~'식의 대사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저 사람은 상덕을 친 형처럼 모시니까 저렇게 행동해!'라고 유추하기 때문이다. 근데 영화는 그 유추의 근거를 주지 않는다. 단지 상덕의 입에서 "여기까지 따라와 줘서 고맙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다. 그 이외에 이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유해진, 최민식 배우가 술 먹고 노는 장면을 쉽게 그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영화를 봐온 것에 기댔기 때문이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글쓴이는 상업영화로서의 노선과 하고 싶은 주제 사이에서 어느 정도는 갈팡질팡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뿐만아니라 원래 대놓고 등장하지 않는 귀신이 등장한 이유. 도입부에 인물관계를 드러낸 이유. 다 속도감 있고 시원한 전개를 위해 과하게 디테일을 생략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빚어진 빈약한 인물서사 때문에 영근의 대사 "말뚝의 99%는 거짓"이라는 말도 뭔가 숙제처럼 들린다. 차에서 "야 김상덕 좀 일어나 봐!"라는 대사도 유해진 배우가 잘 살린 거지 감정선이 급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둘이 반말까지 하는 사이인가? 이는 영화에서 "우리 비즈니스 관계지만 부탁 하나 하자"는 대사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단점이다. 영화가 인물들의 인간관계성에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않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치명적인 것으로 보이며, 이야기의 몰입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왜 오컬트 맛 만 줘요'라는 비판을 듣기 아주 쉽다.
이 <파묘>는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 이어 세 번째로 만든 오컬트 영화다. 이런 이유로 이 <파묘>를 기대하시는 분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분들에게 오컬트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 오컬트로서의 장르적 특성을 후반부에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응당한 근거들을 갖춘 것 같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는 흐름에 맞게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슨한 밀도를 감당하지는 못했던 <파묘>. 난 재밌어도 이 영화의 불호평에 공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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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도 없이]리뷰:단편영화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영화
#소리도없이#유아인#유재명
악은 변하지 않으며 항상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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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주 최신 개봉영화(인질, 올드, 언더그라운드, 팜스프링스, 남색대문)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8월 3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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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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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스믹 씬> 메인 예고편
인류가 우주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서기 2524년,
연맹의 장군 ‘제임스 포드’는 무리한 작전으로
행성 하나를 파괴하고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된다.
인류를 지배하려는 외계 함대의 공격이 발생하자
‘제임스 포드’ 장군은 정예 부대와 함께
이들을 제압하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외계 함대와 접촉하며 이미 조종된 인류는
연맹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외계 종족의 인간 재배를 피해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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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택배기사> 티저 예고편
"산소 배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산소가 통제되는 세상, 생존을 배달하는 기사가 온다! 세상을 무너뜨릴 유일한 희망 《택배기사》 5월 12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