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2-27 20:12:07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영화 <클레오의 세계> 리뷰
PROGRAM NOTE.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여섯 살 클레오가 사랑하는 보모 글로리아를 떠나보내며 겪는 이별과 상실의 과정을 그린 작품.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글로리아와 마지막 여름 휴가를 보내며 인생의 한 단계로서 이별의 의미를 받아들이려는 클레오의 이야기가 뭉클하고 따스하게 그려진다.
(2023년 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POINT.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쁘띠 마망>… 셀린 시아마를 좋아하세요? 셀린 시아마 감독의 모든 장편영화를 제작한 바로 그 제작사의 신작! 속속들이 아름다운 작품을 또 한 편 만나보세요
✔️ 안경을 쓰면서 바로 클레오로 변신했다는 놀라운 신인 배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 클레오가 웃을 때마다 행복해졌어요
✔️ 겨울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줄 따뜻한 작품. 생의 처음에 있던 것들을 헤아려보게 만드는 영화라서, 2024년 새해 첫 영화로도 좋을 것 같아요
✔️ 2023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개막작, 2024 선댄스영화제 스포트라이트 부문 초청! 자꾸 시선이 가는 영화
✔️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받을 만 하지
✔️ 믿고 보는 조합, ‘그린나래미디어’ & ‘하이스트레인저’!
✔️ 2024년 1월 3일 개봉
#최초의 세계
이 영화의 원제는 ‘아마 글로리아(Ama Gloria)’, 그저 정직하게 ‘보모 글로리아’이다. 안경점에서 시력 검사를 하는 클레오의 모습과 함께 보이는 글로리아를 통해, 우리는 금방 꽤나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그는 클레오의 어머니가 아니다. 둘째, 그는 클레오와 다른 뿌리를 갖고 태어났다. 셋째, 그럼에도 시력 검사 결과조차 도와주고 싶어할 만큼 그는 클레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보모. 사어(死語)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쩐지 빅토리아 시대 고전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의 단어다. 실제로 요즘은 ‘베이비시터’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쓰기도 하고. 하지만 보모라는 말에는 더 끈적하고 진득한 느낌이 배어 있다. 한자로 ‘모母’ 자를 쓰고 있어 그런지, 옛날에 더 많이 쓰던 단어라서 그런 건지. <클레오의 세계> 속 글로리아 또한 베이비시터보다는 보모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다. 그건 단순히 클레오의 아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오래 함께해왔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둘은 서로에게 온전히 기대는 존재다. 아이 얼굴의 밀가루를 털어주고, 놀이터에서 생긴 상처를 후 불어주는 사람. 걷고, 씻고 하는 모든 순간을 놀이와 웃음으로 채워주는 사람. 오래 전 읽은 소설 <봉순이 언니>의 문장이 떠올랐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놓아 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클레오에게 글로리아는 최초의 세계다. 그렇기에 클레오는 글로리아를 작은 몸과 마음 다해 힘껏 사랑한다. 갑작스럽게 전화로 전해져 온, 글로리아 어머니의 부고 소식 앞에, 슬퍼하는 글로리아 옆에 조용히 앉아 통통한 뺨과 곱슬머리를 기대며 앉는다. 그렇게 클레오는 온 존재로, 글로리아의 슬픔에 고요히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작은 아이는, 조용히 흐르는 슬픔을 감쌀 줄도 알 만큼, 그만큼 자신의 최초의 세계를 사랑했다. 자신을 키우는 존재의 콧노래, 그가 숨죽여 이불로 작은 몸을 덮어주는 순간의 기억,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의 어느 정도를 차지할까. 평소 크게 기억하지 않고 사는 어떤 기억들이 사실은 나를 지탱하게 하고 있음이, 영화에서 부드러운 색채로 그려진 애니메이션을 타고 관객에게로 흘러온다.
#세계는 깨어지고 확장된다
그러나 힘껏 자신을 다 기댄 클레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별은 온다.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이제 글로리아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러야 하고, 어머니에게 ‘황혼 육아’로 맡겨두었던 자신의 진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으므로. 그렇게 글로리아로 가득하던 클레오의 세계는 최초의 균열을 맞이한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안다. 그래서 그 균열의 순간은, 어둠 속에서 훌쩍훌쩍 우는 클레오의 모습. 떼쓰지도 조르지도 못하고 창틀만 꼭 붙잡은 클레오의 눈물 속에서 일방적 순간이 된다. 그러나 진짜 클레오가 균열을 감지하는 건, 오히려 방학을 맞아 글로리아의 고향 섬에 놀러 가서 작은 방에 몸을 뉘이는 순간이다. 가족들과 찍은 글로리아의 사진을 보며, 클레오는 처음으로 감지한다. 내 모든 것인 사람에게,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 아님을 처음 깨닫는 순간.
그 순간, 머릿속에서 딱 클레오만했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날이었고, 1학년이니까 보호자의 동행이 허락되었으며, 우리 엄마는 나뿐 아니라 동네 이웃집 아이와 동행하고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간호사로 근무하고 계셨던 아주머니는 미안한 얼굴로 아이를 챙겨달라고 연신 부탁했고, 그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엄마가 나 없이 다른 친구와 둘이서만 다정하게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같은 프레임의 사진에 찍히는 걸 보는데,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조합을 목격했다는 생경한 기분이었으나 뭐라고 설명하지 못한 감정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의 내 마음이 이해된 것이다.
굳이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사라지는 슬픈 장면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성장은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조각나는 아픔을 거친다. 그러나 깨지고 다친 세계는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틈으로 더욱 확장된다. 글로리아에게 자신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클레오의 여정은 쉽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글로리아는 물론 글로리아의 가족들과도 연결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차츰 배우고, 중심이 아닌 채로도 건강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영원히 애정의 중심에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글로리아뿐이었던 “클레오의 세계”는 이렇게 또 조금 확장되었다. (이 영화 제목 번안은 정말 멋지다.)
#그 후로도 우리는 자라겠지만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클레오의 세계”가 확장되는 아릿한 성장의 시간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클레오를 둘러싼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장담을 서술하기에 벅차 허덕이는 영화가 아니라, 모든 인물의 성장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담은 넉넉한 작품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 대신 자신이 낳지 않은 누군가의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며 사는 여성의 삶, 섬에 줄곧 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묘한 텃세를 받으며 그 거리감 안에서 다시 생활을 꾸려 가는 글로리아의 삶.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 조금은 떨떠름한 분노의 대상인 엄마를, 동생도 아닌 클레오와 공유해야 하는 세자르의 삶. 어쩌면 상실과 성장을 계속하는 건 클레오만이 아니다.
방학은 끝나고, 여정은 반드시 어딘가에서 막을 내린다. 이별은 필연적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애정 어린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그 애정의 바깥으로 가지를 뻗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유년시절을 꼬박 메운 글로리아의 애정 바깥으로, 클레오는 나아가야만 한다.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의 꼬리처럼 힘차게. 때로는 힘껏 존재를 던지듯 다이빙하고, 또 때로는 다른 이의 손에 의지하여 뭍으로 올라오면서. 그러면서.
왜 이렇게 그 장면들마다 눈물이 났을까. 개인적인 기억의 편린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인도에서 “돌보던” 아이들을 두고 비행기에 오르면, 불 꺼진 밤 비행기에서 조용히 줄줄 울던 날들이 떠올라서. 따로 떨어져 행복해져야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걸 잊지 않아야 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집이라고 부르는 곳을 두 군데 이상 가져버린 사람들은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떨어질 수 없다는 걸 배워 버려서. 그래서.
딱 클레오만한 나이였을 때의 나, 글로리아 같은 상황이었을 때의 나… 이 영화는 내 안의,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을 톡톡 끌어올렸다. 이 영화는 이렇게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 우리 기억과 감정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에게나 처음으로 인지하는 ‘온 세상’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그 사람의 애정 바깥으로 찢겨 나와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이 영화에서 자신의 조각을 엿보게 될 것이다. 꼭 글로리아나 클레오와 같은 경험이 없더라도.
이 영화의 다정한 시선 속에서, 84분 동안 나는 또 무언가를 찢고 조금 자랐다. 이토록 부드러운 색채와 사랑스러운 감각 속에서 자랄 수 있다면, 상실도 두렵지 않다. 고래 꼬리처럼 이 영화를 품고, 또 열심히 발장구를 쳐본다. 생을 향해서.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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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해진 벌크업
2019년 개봉한 영화 <샤잠!>은 북미 1억 4천만 달러를 포함해 전 세계 3억 6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작품이다.
"마블"을 비롯해 자사의 "DCEU"를 생각하면, 흥행이 조촐하다만 반응이 나쁘지 않았기에 곧장 속편 제작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개봉 일자가 미뤄졌고 겨우 잡은 일정은 <아바타: 물의 길>과 겹쳐 한 번 더 피하게 되었다.
근데, 이번에는 달라진 "DCEU"의 기조로 흥행을 한다 해도 3편 제작도 불투명하다. - <블랙 아담>의 흥행 실패로 전면적인 "리부트"를 선언했다!전작으로부터 여전히, "샤잠"으로 활동하는 "빌리"와 친구들의 앞에 "아틀라스의 딸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빌리"와 친구들에게 "샤잠"으로 변할 수 있는 슈퍼 파워를 빼앗으며, 도시와 가족들을 위험을 빠트리게 하는데...1. 점잖아진 성장
속편에 위치한 영화 <샤잠!: 신들의 분노>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시리즈"에 속한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의 마지막부터 "빌리 뱃슨"을 비롯하여 "샤잠"이 늘어나 "팀"이 되었고, 이번 속편의 빌런으로 등장하는 "아틀라스의 딸들" 역시, 또 하나의 집단이다.
그러면서 "집단 vs 집단"으로 늘어난 캐릭터들로 커진 규모는 교통정리가 소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신들의 분노>는 특별하진 않지만, 벌크업을 이루는 데에 성공한다.이번 속편에 등장하는 메인 빌런 "아틀라스의 딸들"부터 설명이 필요하나 명료한 동기와 "헬렌 미렌"과 "루시 리우"로 맡은 배우들의 매력만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 "샤잠"은 설정에서 다양한 위인들의 재능을 하나씩 분배되어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분산된 캐릭터성으로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걱정도 해보지만 이야기는 "빌리"의 성장담으로 "슈퍼 히어로의 고민과 성장"이라는 장르의 특성으로 이어진다.결국, 이번 속편 <신들의 분노>는 너무나도 평범해진 영화가 되었다.
전작 역시, 크게 도드라진 영화는 아니었지만 "유치함"으로 관객들의 호불호를 만들어 편을 가르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속편은 더 극으로 가는 게 아니라 중도를 지향하며, 전작보다 더 대중적인 영화가 되었다. - 이런 부분은 전작보다 더 나아졌다는 인상을 남긴다!2. 그래서, 뭘까?
하지만, 그렇기에 마땅히 특별한 점을 찾기가 어렵기도 하다.
그나마, 찾아본다면 중간에 불타버리는 "슈트"로 <블랙 아담>이 연상된다.
이외에도 <분노의 질주>와 같은 영화들을 말하는 "메타 발언", "애나벨 인형", 다리가 무너지는 장면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등이 떠오르나 <샤잠!: 신들의 분노>를 봐야 하는 차별화까지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메인 빌런 "헤스페라"의 심리 변화와 갑작스러운 "저스티스 리그"의 캐릭터의 등장은 이야기의 개연성까지 따져볼 부분도 있으니 무난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tmi. 1 - 극 중. "캡틴 마블"이라고 불리는 장면이 있는데, "샤잠"으로 불리기 전에 해당 캐릭터의 이름이 "캡틴 마블"이었다.
· tmi. 1. 1 - 다만, 인수 과정에서 상표 등록을 "마블"에서 하면서 부득이하게 개명했다!
· tmi. 2 - 쿠키 영상은 2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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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트맨이 새로운 페이즈의 시작을 여는 것은 좋았지만
이거 실화냐
이거 실화인가? 분명히 미래가 아득해 보였다. 번듯한 아르바이트도 못 구하던 스콧 랭. 전과자라는 이유로 배스킨라빈스에서도 짤린 그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라는 법은 없다. 팔콘의 픽을 받아 어벤저스에 합류했던 스콧. 독일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팀을 먹고 블랙 위도우와 싸우던 기억부터, 최악의 빌런 타노스와의 대결까지 두 눈 뜨고 믿을 수 없을 기억들이 그에게 생생하다. 차가웠던 세상. 이제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날 알아본다는 생각에 즐겁다. 습관처럼 갔던 커피숍은 아직도 음료 값을 받지 않는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바뀐 세상을 음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운 스콧. 사람들의 대우도 행복했지만 사실 그가 내일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다. 어벤저스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것 같은 사람들이 지금 그의 곁에 있다. 예쁘고 능력 있는 아내 호프. 하워드 스타크만큼 똑똑한 장인어른 행크 핌. 그리고 그의 아내 재닛은 혼자였던 스콧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딸 캐시와의 관계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예쁜 딸 캐시. 딸이랑 관계는 문제가 없다. 대신 딸에게 문제는 살짝 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고 했던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슈퍼히어로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것이 부지기수다. 그날도 감옥에 들어간 딸을 빼오던 길이었다. 집에 도착한 앤트맨 가족. 아빠에게 캐시가 발명한 것에 대해 말한다. 바로 양자영역에 신호를 주고받는 도구였다. 겉으로 들으면 기발한 것 같지만 왠지 장모 재닛의 얼굴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잠깐만. 양자영역에 신호를 보내는 일이라고? 당장 꺼! 이해 못 할 말을 하는 재닛. 분명히 신호를 껐다. 양자영역과 신호를 주고받는 이 기계에서 갑자기 반짝이며 빛이 났다. 이 기계는 모든 걸 집어삼켜 앤트맨 가족을 양자영역의 세계로 빨아들였다. 이 다른 세계에서 스콧 가족의 모험이 시작된다.
앤트맨이어야 하는 이유
많은 분들이 <어벤저스 : 엔드게임>을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 전편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히어로 군단은 타노스에게 졌다. 빌런의 목적 따라 지구 인구가 반이 사라진다. 이 망가진 인피니티 사가를 다시 시작했던 건 앤트맨이었다. 앤트맨의 특성을 활용해서 인류를 다시 찾은 어벤저스. 인피니티 사가를 다시 시작했다는 막중한 임무를 안았던 그가 이번 영화에서 페이즈 5를 다시 연다는 과제를 안았다.
이 점에서 앤트맨이 이 페이즈 5의 시발점이 된다는 기획은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로 마블은 몇 가지 새로운 시작을 보여줬다. 타노스의 뒤를 이을 전우주적 빌런 ‘캉’이 등장한 것이 가장 첫 번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정복자 캉은 드라마 <로키>에서 선을 보인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선보인 정복자 캉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캉은 멀티버스를 관리하며 여러 시간선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 영화가 어떤 설정을 만들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 왜 양자역학으로 인물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에 대한 설명도 된다. 이 부분을 유심히 봐야 극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극에서 나오지만) 이 영화에서 나오는 캉은 수많은 캉 ‘들’중 하나다.
또 영화에서 보여주는 개념은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이다. 물론 저번 페이즈 4에서 영화의 배경을 우주로 끌고 간 부분이 있긴 하다. 바로 <이터널스>와 <토르 : 러브 앤 썬더>다. 그러나 히어로들이 직면한 문제가 전적으로 ‘시간 선을 관리하고 있는 캉과의 대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가? 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영화는 비교적 소소하게 물건을 컸다 줄였다 하는 특성으로 소소한 코미디를 보여줬던 시리즈의 주인공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앞으로 정복자 캉이 등장해 판을 흔들려고 할 계획인데 앤트맨이 아직까지도 소박하게 살고 있으면 괴리감이 들 것이다. 이렇게 큰 스케일을 구현하듯, 마치 ‘스타워즈’ 시리즈처럼 구체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 대해서 글쓴이는 합격점을 주고 싶다. 양자역학이라는 디테일을 잘 구현했나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세계로 넓혔고 이 영화 자체의 시각적인 비주얼은 낡았다는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을 새롭게 리디자인한 감독과 시각팀의 창의성이 돋보였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리고 이제 차기 mcu에서 다른 주인공이 될 것 같은 ‘영 어벤저스’ 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이 인물의 등장이 양날의 검처럼 작동하기는 하지만 극에서 생동감이 생기는 설정이 되기도 한다. 페이즈 4 ‘영 어벤저스’의 등장에 있어 가장 존재감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랬구나
영화에서 시각적인 비주얼 다음으로 꼽았던 것은 이야기의 큰 줄기다. 영화 전체적으로 ‘이래서 그랬구나’ 싶었던 부분이 몇 있었다. 우선 정복자 캉의 캐릭터성이다. MCU의 다른 작품 <로키>에서 나왔던 특성이 본작에서도 이어진다. 이는 글쓴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관객분들은 응? 싶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글쓴이가 이 특성을 이해할 수 있던 이유는 <로키>를 보고 캉의 원작 특성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의 마블 영화들과 차별된다고 생각한다. 의문점이 되는 핵심인물의 퇴장(<토르 : 러브 앤 썬더>), 히어로의 존재감이 미미함(<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등 기존 작품들과는 나름 잘 만든 구석이 돋보인다. 그에 대한 근거는 영화 내적으로 재닛의 행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 어떤 캉이 양자역학의 세계에 갇혔고 왜 거기에 있는가 / 앤트맨과의 대립 / 캐시의 활약 / 캉의 서사로 새롭게 시작되는 mcu라는 점이다. 이 점에서 페이즈 4의 영화와 일부 드라마들이 떡밥을 펼치기 위해서만 기능한 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게 본인 혼자만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관점에 따라서는 ‘왜 이렇게 결과가 나지’라고 이해하기 충분하다. 또 양자역학이라는 세상의 디테일은 살짝 부족하긴 하다.
또 영화의 다른 강점은 앤트맨과 와스프다. 사실 영화에서 어떤 장면이 있기 전에는 인물 연출이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을 때 앤트맨과 개미를 오버랩시키는 연출이 있다. 이 연출이 나오기 이전에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장면이 나왔는지,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는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연출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멀티버스 사가의 시작처럼 들리는 부분이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 장면이 들어가는 과정, 방식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늘 하던 패턴
그렇게 재미있게 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단점은 있다. 그것은 페이즈 4에서 공통적으로 전개됐던 몇 가지가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이 영화가 시리즈의 전작들과는 다른 점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인피니티 사가의 ‘ㅇ’만 언급된다는 점은 시리즈가 고를 수 있는 좋은 선택지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이 공식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단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화의 줄거리가 페이즈 4에서 갖고 온 것들이다. 예고편에서 나온 바와 같이 영화는 캐시가 만든 어떤 상황을 인물들이 겪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전개는 우리가 이전에 본 형태다. 바로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나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 등에서 있던 이야기 전개이기 때문이다. <미즈 마블>도 그랬고 <호크아이>는 케이트가 벌인 일이 아예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큰 관련이 있다. <이터널스>도 주인공 사이에서 비교적 어려 보이은 어떤 인물이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이렇게 지난 2년 동안 전개됐던 계속 똑같은 공식이 페이즈 5에서도 볼 수 있다는 점은 이야기 전개가 예상된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이는 이 영화의 장르에도 이어지는 단점이다. 좀 이질감이 드는 장르 연출이다. ‘인커젼’ ‘멀티버스’ ‘핌 입자’ 같은 매니악한 소재들이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데 영화가 가족영화인 것은 과연 mcu의 방향성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앤트맨이라는 시리즈의 특성이 이 작품에 얼마나 스며들었는가?와도 관련이 있다. 시리즈를 운영하는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이야기 전개지만 앤트맨 시리즈를 기대하시는 분들은 크게 실망할 만한 요소가 많다.
이 가족영화로서의 강박은 영화의 형식과도 이어져 있다. 이 영화는 어떤 장면이 후반부에 반복된다. 이 반복이 굳이 필요했을까? 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이는 마지막 시퀀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여서 뭘 하는 장면에서도 느껴졌다. 가족영화로서의 강박이 뭔가 유치하게 들리는 것이다. 두 커플인 행크와 재닛, 스콧과 호프의 관계는 로맨틱해서 기억에 남는데 가족영화로서의 요소는 이야기의 억제가 되는 점은 안타까웠다.
이 단점은 재닛의 연출과도 이어진다. 가족 간의 유대감이 끈끈하게 묘사되는 이 영화. 특히 행크, 호프와의 관계는 어느 모녀와 부부보다 더 끈끈하다. 그러나 영화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영화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인 재닛의 잃어버린 30년이다. 이 30년을 두고 인물들이 벌이는 대화는 좀 거리감이 있게 느껴진다. 이 영화가 성립되기 위해서 작위적으로 설정된 것이다. 어벤저스급 지능을 가진 두 사람이 이렇게 답답하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것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또 글쓴이는 이해했지만 어떤 관점에서 정복자 캉이 품는 작중 행적이 이해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인물은 단점보다 강점이 더 많다. 담당 배우 조너던 메이저스의 명연기는 어마어마하다. 액션 신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나 소리 지를 때, 또 얼굴 표정 바뀌는 연기나 인물의 내면 묘사 등 감독이 신경 쓴 부분이 몇몇 보인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인 단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하나 있다. 누구는 이해되고 누구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확실히 아쉽다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복자 캉이 품는 첫 번째 이야기다. 앞으로의 mcu에서 풀 과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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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지성에 돌 던지기
추락의 해부보다도 해부되는 것들의 추락. 이 법정 가족 스릴러 드라마 안의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 싸우지만 역설적으로 극 밖의 관객은 ‘무엇이’ ‘왜’ 진실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씬이 긴장감과 흡인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극 중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 기여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집중하길 선택했던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 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늘 남들을 먼저 챙겨야 해서‘ 힘들었다고,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모두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사뮈엘은 심지어 시각장애인 다니엘에게 없어선 안 될 안내견 스눕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플래시백에 다니엘의 음성을 빌어 입혀진 사뮈엘의 서사를 접한 관객은 희한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와 독박 가에 시달리던 부인들이 분노에 차 내지를 법한 진술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직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 쉬는 시간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가정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해 억울함을 마냥 삼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정에서 실질적 경제활동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위층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아래층에서 팬과 놀아났다든가 ‘남편의 고통을 무시했다’든가 기를 세워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검사 측 증인들의 성차별적 진술을 연이어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곱씹게 된다.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는 끝내 되지 못했어도 제1세계 지식인인 사뮈엘이 과연 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몰랐을까.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사뮈엘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경력단절의 부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몇 백 년간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당시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이기적이고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고 말하는 사뮈엘의 규명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조에에게 ”아,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인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재현한다. (이 오롯이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해 기울어진 자세를 지켜보는 스눕이 물고 있는 공은 어느 층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시 그때 누가 그의 그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입맛대로 끌어가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선천적으로 어울리는 타입, <타르>의 리디아 타르를 떠올리게 하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자, 어차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에 두 사람이 올랐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저술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취약함을 이미 드러내버린 사람과, “내 걱정 마. 난 어떻게든 써.”라고 얄밉게도 틀린 말 없는 선고를 내려버린 사람. 산드라가 말한 것 중 가장 날카로웠던 진실, 그래서 사뮈엘이 가장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은 아마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두고 날 원망하는 거야. 혼자 덫을 놓은 거야”보다도 “(가사노동의 배분에) 완벽한 균형은 없다고 봐. 순진하고 딱한 발상이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이란 무대가 이갈리아처럼 충분히 전복되기엔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싸움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명백하다. 이때 패자에게 중요한 건 ‘왜’ 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다. 녹취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사뮈엘은 최대한 지저분하게 부인을 옭아매기를 선택한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 극에서 주연이 된 부인은 또 한 번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역량과 그릇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사 뱅상에 의해 저지당하기는 하나,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초장부터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어려운 논쟁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더라도 그 논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류의 복잡성을 추구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비범한 작가인 그의 재능은 남편이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과 뒤틀린 감정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두 개인 사이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논리정연한 호소는 검사를 비롯한 청중의 적의를 잠시라도 멈춰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주 일부’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적이고 강인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부부간 원망은 덜하고 동등한 수준에서의 지적 교류는 더 활발했던 시절, 사뮈엘의 허락 하에 그의 개요를 가져다 소설로 발전시킨 산드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뮈엘이 제기한 표절 시비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을 거부하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위협적이고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알레고리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므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열악하고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산드라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설을 밀어붙여야 하는 처지로 몰아붙여진다. 산드라에게 아직 미묘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변호사 뱅상은 그를 믿는다고 공언한 유일한 어른이지만 애석하게도 ‘판단하는 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정작 산드라의 믿음을 획득하지 못한다. 뱅상은 법정에서 단 한 번 사실을 넘어선 추정을 ‘실수로’ 흘리는데 이때 그는 자기 피고인의 욕망(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또는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한다)보다도 인간 뱅상으로서의 욕망(산드라를 보호한다)에 잠깐 휩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를 지키기 위해 사뮈엘을 비난하고 찢어발긴 후, 사뮈엘이었던 것을 다시 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조립해 사뮈엘의 형상을 띈 것으로 창조한 직후. 지금까지의 변호 중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적이었던 반론을 펼친 그가 마주한 것은 산드라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거부 제스처다. 말했듯 산드라는 악의나 계략에 맞서는 것보다 진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드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둘의 얼굴이 한 숏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산드라라는 독특한 인물의 불가피한 고립을,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산장 부엌에서 이뤄진 뱅상-산드라 간의 첫 진술 장면, 바로 직전까지 아주 가까이 앉은 둘을 한 번에 잡는 바스트 숏이 수 차례 등장했는데도 산드라가 진술하고 뱅상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각 인물의 음성이 전개될 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출 뿐이다. 함께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카메라의 빠르고 단호한 시점 전환 때문에 관객은 거의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단절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법정에서 증인석에 선 채로 검사와 변호사 측 증인들의 말을 번갈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을 트래킹 패닝 숏으로 잡은 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칭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산드라를 두고 다니엘은 흔들리나 이어지고 뱅상은 확고하나 불통한다. 뱅상은 설원에서 취한 채 함께 담배를 피우고 텐션 가득한 농담을 할 때도 산드라를 마주 보고 있으나 카메라는 다정히 이어지는 시선 대신 각자의 후면 혹은 측을 보여줄 뿐이다. 아들의 축객령으로 우는 산드라를 뱅상이 태워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는 씬에서도 그는 거의 음성으로만 등장하고 화면은 산드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법정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다 끝나고 승리감에 도취해 단둘이 남겨지자 또 한 번 숨 막히는 텐션이 오르지만, 뱅상은 반쯤만 기대 오는 산드라를 딱 그 반만큼만 안아줄 수 있으며 관객 역시 그이들을 ’창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사람은 또다시 등만 보이는 채로. 우리에게 온전한 관람이 허락되는 교감은 뱅상과 산드라의 포옹이 아니라 귀가한 산드라와 다니엘의 한밤 침실에서의 보다 완전한 포옹이다.
산드라의 이해자는 변호인단이나 조에 같은 팬들이 아니라 극 중 유일한 미성년인 다니엘이다.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간 지점을 택한 부모 사이에서 가엾은 소년 역시 ‘남은 한쪽이라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니엘은 사고 이후 고도 근시를 가진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지와 단차와 오해를 필연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다. 극 중 산드라의 진술보다 다니엘의 진술이 먼저 의심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법정에 선 산드라가 문득 다니엘의 시점에서 관찰되듯 그려지는 구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을 집요히 좇는 그는 엄마의 진술을 듣고 가장 효과적이고 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낸다.
완성형 작가 그리고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처음 써낸,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 그들의 ‘생각해냄’이 recall인지 invent인지 우리는 영원히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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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오의 순수함을 살려준 동반자인 보모 글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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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클레오는 보모인 글로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글로리아가 보모 역할을 그만두고 자신이 살던 섬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클레오의 곁에는 자신의 아버지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클레오가 방학을 하고 글로리아가 있는 섬으로 여행을 가게 되자 그곳에 있는 글로리아의 가족을 만난다. 클레오가 가져온 짐 보따리에는 글로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위한 선물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글로리아를 만날 수밖에 없는 클레오에게는 무슨 일들이 펼쳐질까?
클레오가 태어났을 때부터 유일한 부모 역할을 해준 건 글로리아였다. 글로리아는 클레오를 자신의 진짜 자식처럼 사랑해 줬는데 클레오도 글로리아를 믿고 의지했으며 곁에 없으면 불안해했다. 결국에는 글로리아가 자신의 조국으로 떠나자 클레오는 엄청나게 불안에 떤다. 그런 클레오를 본 클레오의 아버지는 글로리아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곳에서는 클레오가 감당하지 못할 것들이 넘쳐났다.
그건 바로 글로리아의 딸인 난다와 아들인 세르자 때문이었는데 난다는 뱃속에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세르자는 자신의 진짜 가족이 아닌 클레오를 외면한다.
클레오는 자신의 곁을 항상 함께해 줄 글로리아가 진짜 가족이라고 여겼고 평생을 지켜줄 줄 알았다. 너무 기대한 나머지 글로리아도 챙길 가족이 있다는 걸 알았고 어린아이의 순수함 때문인지 그 이유를 몰랐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림 삽화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데 때묻지 않는 순수한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또한 이 영화는 보모 역할로 인해 자신의 진짜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 글로리아의 시선도 다루며 선진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보모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에서 클레오를 떠나보내고 우는 글로리아를 보면서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느껴지지만 클레오의 어린 동심을 채워주는 유일한 동반자이자 진정한 부모 노릇을 한 글로리아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만약 클레오에게 글로리아가 없었다면 어떻게 자랐을지 필자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클레오와 글로리아는 영원히 떨어져 있어도 같은 가족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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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계속하는 시원함으로
SYNOPSIS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인 정의진(79세)은 동편제 수궁가의 전수자를 찾고 있다. 서편제의 인기에 밀린 동편제 ‘수궁가’를 지키는 길은 2020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길뿐이라고 믿는 정의진은 문화재 선정을 위해 4시간이 넘는 완창 공연을 준비한다. 정의진은 많은 제자 중에서도 마땅한 전수자를 찾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소리를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PROGRAM NOTE
판소리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소리가 익어 삶을 응축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다. 〈수궁〉에서 소리를 하고, 배우고, 또 이어가려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간의 예술, 판소리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악보도 없이 500여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음표도 없어 전수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는 판소리는 무엇보다 시간을 붙잡고 또 흘려보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은 여성 소리꾼들에게서 소리를 앗아간 원인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수궁〉은 4대 국창 가문의 마지막 전수자 정의진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소리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차분히 풀어 놓는다. ‘수궁가’를 전수하고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그의 모습에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를 알고 있는 자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고, ‘수궁가’를 배우는 이들에게선 앞으로의 고됨을 짐작하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소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들의 분투를 먹먹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문도 목청도 소리를 할 수밖에 없이 태어났지만, 마음가는 만큼 소리를 쫓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이 비단 과거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송아름]
이 영화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시작한다. 사라져가는 판소리를 전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수궁가라니 어쩐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노래를, 별주부전 애니메이션에 ‘범 내려온다’를 얹어 보여주어 사실 우리와 멀지 않은 노래임을 깨닫게 한다. 별주부전의 판소리가 수궁가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 담긴 인물, 정의진 선생님은 양암제 수궁가의 전승을 고민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쪽 찐 머리 아래 경량 패딩과 트레이닝복 바지. 어느새 판소리의 세계에도 이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89년생 제자에 01년생 제자까지, 계속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진 선생님은 이 오랜 세월 내내 판소리계에 있던 사람은 아니다. 결혼과 육아로 '경력 단절'이 되어 있던 시간. 뭐, 이유와 양상은 조금씩 달라도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정의진이라는 이름의 역사를 훑는다. 국악을 무서워했다는데, 무서워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그 무게를 무의식 중에라도 가늠했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 결혼했고 육아를 하며 소리와 멀어졌지만, 그는 끝내 소리를 마주한다.
일순 무서워도 괜찮다. 때로는 숨기고 싶어도 괜찮다. 우리가 평생을 들여 마주해야만 하는 것들은, 언젠가 헷갈리지 않고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정의진 선생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삶에서도, 아직 살 날이 창창한 제자들의 삶에서도 어른어른 비춰지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훑는 정의진 선생님의 인생사도 기구하고 독특하지만,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런 일이 있었어.” 라고만 말하고 마시는 순간이었다. 가끔 너무 거대해 말하기 어려운 것들, 아마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일 만큼 수없이 많았을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후회가 없다. 다만 견뎌야 할 것이 많을 뿐이다.
나 같으면 그렇게 뒷걸음질치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단호한 모습에서, 정의진 선생님의 그 마음이 묻어난다. 물론 그 선생님의 마음 못지 않게 제자들의 마음도 굳건하다. 정의진 선생님 못지 않게 그 제자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다. 차라리 돈 벌 걸 그랬나 했다가도 쭉 가보기로 했다 말하는 다슬 씨, 소리는 타고 나야 한다는 말에 좌절했지만 스마트폰을 켜고 소리를 연습하는 01년생 은영 씨, 무대에 서는 일에 이미 익숙한 은서 씨, 그리고 배우는 사람인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으로 20년 넘게 소리를 해온 지선 씨. 연습 장소로 쓰려고 노래방을 만들고, 가진 걸 다 내어서라도 전수자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는 지선 씨의 이야기가 특히나 흥미로웠다.
소리를 전수할 사람을 고민하는 정의진 선생님 앞에서 제자들은 흔한 상상도처럼 서로를 시샘하거나 모함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길을 계속 간다. 간절히 바라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길을 계속. 선생님이 힘겹게 계속해 가듯, 제자들 또한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세심히 비춤으로써, 이 영화는 정의진 선생님과 제자들을 딱딱한 수직선에 도열하는 대신 각자의 둥근 세계를 품은 예술가들의 풍성한 세계로 알알이 그려낸다.
그 덕분에 이 여성 예술가들의 대화와 노래는 더없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퓨전’을 하면 소리를 버린다는 선생님과 그 이유를 묻는 제자 사이에 감도는 것은 아옹다옹 감정 싸움이 아니라, 두 예술인의 진지한 고찰과 주관이다. 각자의 길을 쭉 가보는 여성들이, 그 길에서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통감하며 체득한 각자의 예술 세계다.
오랜 하대와 괄시의 역사에서도 계속해갈 방법을 찾고, 아무튼 이어갈 길을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담겨 있어 좋았다. 서로 고마워하는 30년대생부터 50년대생까지의 어르신들 모습도 보기 좋았다. 서로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꼬맹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는 모습이 좋았다. 망가져도, 예쁜 분장 아니어도, 예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여 자기 일을 사랑하는 직업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목 상태부터 결혼이나 출산까지 무수한 각자의 현실 앞에서 고민하며 계속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계속한다'는 것이 단순히 일직선을 그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따금 끊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시작하기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 정의진 선생님의 생애부터가 그렇다. 선생님의 시간은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 여전히 숨기고 있는 현재, 소리가 사라질까 두려운 미래로 깜빡깜빡 불안하게 빛나며 여기까지 왔다. 거기에는 선생님이 처한 사회의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 같은 것들이 작용했다.
여전히 정의진 선생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유명세를 위해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청청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얼핏 보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소리꾼들에 비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하는 시선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깜빡깜빡 점멸과 반짝임을 이어간 선생님의 시간이, 전 생을 다해 보내온 모스 부호처럼 느껴졌다. 순간순간 보면 불안하게 깜빡이는 것 같아도, 이어 보면 의미를 갖는. 정의진 선생님의 소리 생애는 미래에 어떤 의미로 가 닿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할, 더러는 그만두기도 할, 그러나 끝내 소리를 향한 애정을 품을 제자들의 삶에 이미 가 닿았듯,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다.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청바지를 입고 연습실을 대여해서 소리 연습을 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녹음을 하지만, 그 애정은 표표히 살아남아 몸에서 몸으로 전파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각자의 벽 앞에 앉아 각자의 소리, 각자의 고독, 각자의 싸움을 계속하는 작업이다.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계에 손을 뻗는 마음이다. 방에서 시작하여 산에서 폭포 소리를 이겨내고 동굴과 바다로.
그러나 소리가 단지 외로움만 먹고 크는 예술은 아니다. 소리는 어디까지나 공명이니까. 같이 울리는, 감정을 전하는 것이니까. 정의진 선생님이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소리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을 때쯤, 할 수 있다 해준 다른 소리꾼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무대를 함께 멋지게 빛낸 동료들이 있었으니까. 할 사람은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어려웠던 시절, 예술이 예술 되지 못하게 했던 세상의 차가운 시선, 복잡다단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가치를 지키는 사람 못지 않게 그를 알아보고 심사하여 기록하는 사람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가는 절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보고 기록하는 작업이니까.
장소를 가득 메우고 울리는 소리처럼, 저들이 지키는 꿈과 사랑도 앞으로 쭉 가득가득 울려 퍼지길. 원대한 유명세나 큰 무대만이 성취라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저들이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계속되길 바라니까. 그냥 좋아서 한 사람들, 앞으로도 그냥 좋아서 계속 할 수 있길 바라니까.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싶은 것.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풍성한 면면 중에는 우리 소리 자체의 재미와 의의도 있다. 저잣거리에서 왕을 까내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대사 하나하나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게 너무나 우리답고 좋았다. 자진모리와 휘모리, 어쩌면 그보다 더 빠른 세상의 속도에 설설 깎여 나가는 우리의 소리들이 즐겁게 지켜지면 좋겠다. 그리고 좋아서 계속하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을 만큼의 관객, 이들의 가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감상과 해석이 뒤따라 주었으면 좋겠다.
2023.08.27. 16:00-17:3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상영코드 322)
2023.08.29. 19:30-21:0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상영코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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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져가는 MCU 혼자서 끌고 가네
※ '로키' 시즌 1, 2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끝나고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가 퇴장하더라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무너지지 않고 오래갈 줄 알았다. 5년이 지난 현재, 멀티버스(다중우주)라는 새로운 뿌리를 두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던 MCU는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멀티버스 개념을 대중에게 설득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실 MCU가 밀어붙이고 있는 멀티버스를 이해하려면 디즈니+로 스트리밍 중인 '로키' 시리즈를 봐야만 한다. '엔드게임'으로부터 파생된 시리즈이긴 하나, MCU의 멀티버스를 가장 오랫동안 설명하면서 메인 스토리로 삼는 건 '로키' 뿐이다.
총 2개의 시즌으로 나온 '로키'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엔드게임 여파 탓으로 기존 타임라인을 무너뜨리게 된 로키(톰 히들스턴)는 '변종' 취급받으며 TVA(시간관리국)에 붙잡혀 가게 되고, 자신이 알던 세계는 멀티버스의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놀라며 '변종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를 포함해 다양한 형태의 로키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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