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2021-07-19 00:27:43
판의 미로(2006), 퍼스널 쇼퍼(2017)
떠나간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진 사람들을 위하여.
떠나간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 <판의 미로>
<판의 미로>를 관람하면서 계속해서 던진 의문은 왜 이 영화는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 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영화가 끝날 때쯤 알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인민내각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마침내 스페인 내전을 승리로 끝낸 후인 1944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전은 끝났지만, 스페인 곳곳에선 여전히 인민내각을 지지하는 게릴라(partizan)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바로 이 사건, 인민내각을 지지하는 소수 게릴라 군과 그들을 무력으로 숙청하는 정부군의 갈등이 중심이 된다.
이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왜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판의 미로>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동화속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한 현실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오필리아와 게릴라 군이다. 주인공 오필리아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화속의 이야기를 좇는 인물이며, 영화의 또다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민 내각을 지지하고 자유와 주권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저항군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투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이상이다. 이들은 순수한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순수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참히 짓밟힌다. 영화 <판의 미로>의 플롯은 순수한 동화속의 세계와 비정한 현실의 세계를 오가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넓힌다. 이런 극명한 대조로 이상의 세계는 더없이 아름답고도 처연한 세계가 되고, 현실의 세계는 더없이 잔혹하고도 차가운 세계가 된다.
<판의 미로>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동화속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잔혹한 현실이다.
어머니의 곁으로
시각적인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우선 판의 초상과 지하세계로 향하는 미로의 문은 염소의 뿔이 달린 전형적인 중세 유럽의 악마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형상이 동시에 자궁의 모양을 닮아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영화속에서도 자궁에 대한 비유가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건 내 개인적인 판단이 아님) 자궁은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장소다. 하지만, <판의 미로>에서 그곳은 생명이 다시 돌아가는 장소로 그려진다.
또한, 이 통로를 통해 고통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안식처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오필리아라는 점과, 메르세데스가 판의 이야기에 대꾸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비달이 판을 볼 수 없었던 것(그렇기에 그들은 미로를 지나가지 못할것이다 :¡NO PASARÁN!)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와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게릴라 저항군들은 판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점은, 오필리아가 미로를 통해 낙원에 닿을 수 있었듯이, 그들 또한 낙원에 닿을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인셈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태어나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앞서 말한 자궁의 모양을 닮은 이 상징적인 장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궁의 모양을 닮은 판의 미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판은 그 자신이 “산이고 숲이자 대지”라고 말했는데, 그런 판이 상징하는 것은 ‘생명’이다. 즉, 자궁의 모양을 닮은 판의 미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곁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한 번도 본적없는 이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산이고 숲이자 대지인 그들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하나의 부모를 공유하는 자식들이 모두 가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결국 이 지구라는 부모에게부터 태어난 존재로서, 같은 피를 나눈 가족들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인다는 일의 무의미함과 논리적인 모순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화 <판의 미로>는 부정한 과거사에 대한 폭로와 반성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필리아가 세계의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과 그 여정을 통해서 순수한 이상을 품고 어딘가에서 스러져갔을 수많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때문에, <판의 미로>는 잔혹한 세계에 바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동화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 <퍼스널 쇼퍼>
<퍼스널 쇼퍼>는 영매 모린이 자신의 쌍둥이 오빠 루이스의 죽음 이후 루이스의 영혼과 교감하기 위해 파리에 머무는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판의 미로>가 떠나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영화라면, <퍼스널 쇼퍼>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와 개봉시기, 그리고 파리라는 장소를 두고 또 한번 파리 테러(2016)사건과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봤다. 이 영화는 진지하게 좇아가면 보이는 것이 많은 영화다. 가령 영화가 끝나갈 때쯤 보이는 루이스의 희미한 실루엣도 놓치기 쉬운 결정적인 장면인데, 섬세한 시선으로 끈질기게 보면 많은 것들이 보이고 많은 이야기가 해결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그때문에 재밌게 봤다. (사별을 다룬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일지도 모르겠다만)
<퍼스널 쇼퍼>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우선 <퍼스널 쇼퍼>를 지배하는 시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데, 영화에선 클린트에 대한 비평으로 “한 세기전에 그려진 작품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 한편, 루이스는 “사람을 꿰뚫어보고”, “죽음을 예감”하는 인물이며, 심령주의란 “현실 너머의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즉, 이 영화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3차원 너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이 영화의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이 시간성이 중요한 것은 영화의 해석과 관련된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 루이스의 집에서 모린이 마주한 제 3자의 영혼과 관련이 깊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만 쓰고, 다음 이야기를 해보자.
이 영화의 시간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금기와 열망의 사이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 수 있다. 영화속에서는 사회적 금기와 자발적 금기가 나타나는테, 영화속에서 이 금기들은 모두 깨진다. 어떤 경우에는 굳이 깨야하는 금기인가 싶지만, 어떤 경우에는 깨야만 하는 금기가 맞구나 싶기도 하다. 가령, 우리의 가장 오래된 금기는 성서에 기록된 남의 물건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린은 키라의 퍼스널 쇼퍼로서 그녀의 물건을 대신 구매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당연히 그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키라의 물건은 온전히 키라의 것이다. 하지만, 모린은 키라의 옷을 입어보고 신발을 신는다.
금기를 깬 것이다. 이런 금기들은 굳이 깨야하는 금기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한데, 모린이 키라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고 싶은 그녀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화속에서 다소 흐릿하게 보여지는 열망이다. 그리고, 이후 보여지는 자발적인 금기들의 경우는 보다 그 열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모린의 자위 장면은 쌍둥이 오빠가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육체적인 행복을 누리면 안된다는 모린의 자발적인 금기와 남겨진 사람의 금기를 깨는 장면이며, 루이스의 여자친구가 루이스가 떠난후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다며 고백하는 장면도 그녀가 스스로 설정한 자발적인 금기를 깨는 장면이다.
모린이 키라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되고 싶은 그녀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사회는 금기를 만드는 것으로 사회적인 혼란을 막고자 했다. 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금기들 역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한 금기에 해당된다. 금기를 깨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선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는 것으로 다소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한 예로 성경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은 금기를 어겼다는 이유로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금기를 깨는 행위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퍼스널 쇼퍼>에서 금기를 깨는 행위는 중요하다. <퍼스널 쇼퍼>에서 금기를 깨는 행위는 사회적 혼란과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애도와 추모라는 분위기와 자발적 죄의식의 질서에서 벗어나 다시 원래의 행복해질 권리를 찾기 위한 삶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상실감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 특히, 그 상실감으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식에 갇혀 행복해질 권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으며, 그들도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언제까지고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라(“죽은자가 산자를 보살핀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기도 하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다. 따뜻한 메세지 못지 않게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도 있는 괜찮은 작품으로 전체적인 만듦새가 좋은 영화라고 하겠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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