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45년 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독일 탈영병 ‘하인리히(로베르트 마저)’는 '폰 스탄펠드 중령'(알렉산더 셰어)이 이끄는 나치 친위대(SS)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엘자(마리 하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난 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엘자의 동생이 SS에 붙잡히고 만다. 이에 하인리히는 엘자와 함께 SS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그들은 유대인이 숨긴 금괴를 찾아 헤매는 SS와 지독한 혈전에 휘말린다.
뼈아픈 반성을 비틀어 담다
일본과 과거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소환되는 나라가 있다. 독일이다. 특히 1970년에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사건은 늘 모범예시로 거론된다. 이처럼 일본도 독일처럼 반성하고 사죄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독일 내에서는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우호 발언도 법적으로 금지됐다. 나치 휘장이나 하켄크로이츠를 공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사례도 한계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독일은 전쟁 범죄를 사죄했을 뿐, 식민 지배를 사죄한 적은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례로 약 7만 5천 명이 죽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배상도 하지 않았다. 지원금을 줬을 뿐이다.
피터 쏘워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러드 앤 골드>는 이 간극을 담아낸다. 일단 독일인의 죄책감을 잘 보여준다. 얼마나 2차 대전 당시의 만행을 잊고 싶어 하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뼈를 때리는 지점도 있다. 과연 참회와 반성이 순수한 이유로 이루어졌는지 곱씹어 보게 한다. 그 간극을 풀어내는 방식은 이 액션 코미디 영화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그림자가 눈과 귀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탈영병이 되고픈 독일인
<블러드 앤 골드>는 시작과 동시에 하고픈 말을 쏟아낸다. 폴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땅까지 밟아본 독일 군인 하인리히는 탈영했다. 아내와 아들은 죽었고, 하나 남은 딸을 만나기 위해서 부대를 떠났다. 폰 스탄펠드 중령은 이 탈영병을 뒤쫓는다. 그를 붙잡아 반역죄 혐의로 교수형에 처한다.
이때 하인리히의 대사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원한 적이 없다." "억지로 군복을 입혔고 그저 싸웠을 뿐이다." "6년이나 무의미하게 싸웠다." 그는 자유를 쫓는다. 민족을 위해 개인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나치즘에 반기를 든다.
탈영병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나치와 히틀러를 뽑았다. 나치는 자국민을 수탈하고 강제로 동원하고, 폭압을 일삼았다. 그들은 나치 때문에 그들은 가족과 재산, 그리고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당시에 독일 사람들은 나치에 저항하지 못했다.
하인리히는 다르다. 그는 탈영을 선택했다. 독일 사람들 대다수가 가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그의 대사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다. 영화는 탈영병 입을 빌려 수치스러운 역사를 꺼내 들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치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독일이라는 공동체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영화로써 극복하는 셈이다. 근래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이 많은 표를 받는 상황을 고려하면 시의적절한 메시지 같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
솔직함이라는 미덕도 하인리히의 대사에 힘을 실어준다. 카메라가 나치 치하 독일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았기 때문이다. 폰 스탄펠드 중령이 금을 찾아 도착한 독일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은 작은 독일 같다. 마을 사람들은 나치와 전쟁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이기적인 욕망에 굴복하고, 또 누군가는 소시민적 태도로 일관한다. 영화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독일인 모두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폰 스탄펠드 중령은 악한 독일인을 대표한다. 특히 자기모순과 잘못된 신념에 휩싸인 광기를 잘 그려냈다. 그는 엘자를 보면서 이미 죽은 약혼녀를 떠올린다.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에. 엘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는 약혼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유대인이라서 결혼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를 직접 죽였다. 그가 기괴하게 간직한 반지를 엘자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잘못된 신념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리차드 시장'(슈테판 그로스만)과 '소냐'(외르디스 트리베)처럼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사람도 있다. 시장은 나치 정권에 동조해 유대인들을 내쫓는다. 소냐는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인 황금을 몰래 빼돌려 한몫 챙긴다. 이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 밑에서 선악의 경계가 흐려진 사람들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체제에 순응하고 인종학살 같은 범죄에 참가하거나 무감각했던 독일인의 잘못을 과감히 풍자한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에 같은 마을에서 선한 이들은 실제 역사와 다른 일을 이뤄내기도 한다. 성당과 사제가 대표적이다. 2020년에 독일 주교회의는 과거 독일 가톨릭교회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당시 교회 자산과 성당은 군사병원으로 활용됐고, 수녀들은 간호사로 파견됐으며, 사제들은 전선에서 독일군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하지만 영화 속 사제는 다르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치에 맞선다. 유대인의 금을 탈취하려는 소냐의 음모를 미연에 차단하는가 하면, 금을 찾아낸 나치 친위대에게 역습을 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블러드 앤 골드>는 역사의 가정법을 통해 역사적 과오를 지워내고, 역사를 영화로써 치유하려 노력한다.
피 묻은 금은 어디로 가는가
<블러드 앤 골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반추할 기회를 마련한다. 그 중심에는 금이 있다. 결말에서 유대인의 금은 미군 손에 들어간다. 미군은 몰래 금을 빼돌린 소냐의 차를 폭파하고 그녀가 흘린 금괴를 가져간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은 역사를 반영한 유머 같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탄압했다. 이에 많은 유대인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발전과 진보를 도왔다. 아인슈타인처럼.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작중 금은 유대인의 유산이다. 독일인은 그 금을 탐내다가 자멸했다. 소냐는 자기도 모르게 미군에게 금을 가져다 바쳤다. 그러면 미국은 금의 온당한 주인인가? 아니다. 미군이 금괴를 가로채는 대신, 유대인에게 제대로 돌려주는 것이 합당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피 묻은 금이 진짜 피해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한 사죄와 배상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작중 금의 행방은 독일의 사죄와 배상에 숨은 국제 역학 관계를 암시한다. 독일은 힘 있는 유대계와 이웃 서방 국가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사과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러시아)처럼 독일 재통일을 위하여 자세를 낮춰야 하는 대상에게만. 또 폴란드처럼 청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주변국에게만. 나미비아 같은 다른 피해자는 잊혔다.
독일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가 과거 식민지 국가에게 배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강대국들은 아직 피 묻은 금을 돌려주지 않고 챙기기 바쁘다. 국제 사회는 여전히 미국과 유럽 열강이 짜 놓은 판 안에서 돌아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의 잘못을 반성하는 독일의 참회는 순수한 의도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군이 최종 승자인 <블러드 앤 골드>의 결말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타란티노 향기가 난다
<블러드 앤 골드>의 메시지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보는 듯한 길티 플레져 덕분에 강렬해진다. 타란티노 영화는 폭력적이고, 피를 많이 쏟기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잔인하지는 않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희화화하는 데 능하기 때문이다. 잔인한 와중에도 관객들이 웃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특히 벌 받아야 할 대상을 정확히 지정하면서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최소화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는 히틀러와 나치,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악덕 노예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찰스 맨슨 일당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은 두말할 여지없는 악인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 그들이 잔인한 대우를 받을수록 쾌감도 커진다. <블러드 앤 골드>도 마찬가지다. 엘자의 농장에서 성당 종탑에 이르기까지 나치와 기회주의자들이 처절하게 죽을수록 카타르시스는 극대화된다.
예상을 벗어나는 장르의 변주 덕분에 피 튀기는 액션은 더 짜릿하다. 엘자의 농장을 배경으로 한 초반부는 서부극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평범한 전쟁 영화 같다. 폰 스탄펠드 중령이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은 좀비 영화 같기도 하고, 전반적으로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은 인상을 준다.
장르가 계속해서 변주되다 보니 분명한 선악구도도 뻔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덕분에 긴장을 놓을 수 없기도 하다. 거칠 것 없는 액션과 코미디의 향연 덕분에 무거운 역사적 배경과 주제를 떼 놓고 봐도 매력이 넘친다. 종합하면 <블러드 앤 골드>는 철저히 독일의 시각에서 작은 규모로 그려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같아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일관된 재미와 교훈으로 무장한 채 시작부터 끝까지 내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