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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yun2024-04-12 12:15:56

분노는, 때론 최고의 상처 치료제

'키딩'을 통해 본 트라우마 극복법

표면적이거나 내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 아이들보단 어른들이 상처가 빨리 아물고 회복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무래도 유년기, 청소년기에 접어든 이들보다 부서지는 상황을 더 많이 겪어왔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을 것이라는 경험적 측면 때문이다. 종종 연장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선경험했기에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지 않은가.

 

일리 있는 말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추측이다. 어른들도, 하늘이 갑자기 무너지거나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어른'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이들 중 상당수 이상은 몸만 컸을 뿐 여전히 유아기적 정체성에 머물러 미성숙하다. 일부 어른들은 자신이 한번 깨지고 부서지면서 큰 상처를 입고 회복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트라우마라고 명명하는 마음을 갉아먹는 족쇄로 자라나 끝까지 고통받기도 한다. 그래서 트라우마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으려고 상처로부터 멀찍이 회피하거나 분리하는 등 동떨어진 삶을 택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과 짐 캐리가 만난 드라마 '키딩'도 상처 입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키딩'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다들 어딘가 결핍, 상처를 가지고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닮아 감정이입이 쉽게 됐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이 남자, 제프 피키릴로(짐 캐리).  

 

 

 

제프 피키릴로는 어린이 TV쇼 프로그램 '피클스 아저씨의 인형극장'서 주인공 피클스 아저씨를 30년간 맡고 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글로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치 종이접기 장인 김영만 아저씨가 오랜 세월 글로벌 스타로 자리매김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는 매해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행사에 참여해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자신을 보고 자란 어른들에게는 동심과 추억을 선물했다.

 

정갈한 5대 5 가르마를 탄 단발머리, 단정한 초록색 넥타이와 흰색 셔츠, 항상 활짝 웃는 미소로 제프 피클스를 기억하고 있으나 이는 본체 제프 피키릴로를 가리고 있는 가림막이라는 걸 '키딩'이 보여주고 있었다. 본캐 제프 피키릴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태. 1년 전 교통사고로 일란성쌍둥이 아들 필을 잃었다. 불의의 사고는 아내 질(주디 그리어)과 이혼 위기로 몰아넣었고, 남은 아들 윌(콜 앨런)과 소통은 점점 어려워졌다. 본캐 제프의 삶은 엉망진창 망가지고 있어 한시라도 상처 치료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프는 상처 입은 자신과 감정들을 분리시키고 억눌러야만 했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부캐 피클스 아저씨로 출근해야만 했기 때문. 또 제프는 오래전부터 아이들을 좋아하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 피클스 아저씨로 영원히 남기를 갈망해왔다. 그 결과 진작에 치료해야 할 자기 상처와 슬픔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피클스 아저씨로부터 격리시킨 부작용이 발생했다. 인형극장을 통해 아이들에게 슬픔과 죽음을 이야기하겠다고 나서면서 30년간 평화로웠던 피클스 세계관이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돌발행동을 하는 제프가 더 이상 정상이 아닌 걸 인지한 아버지 셉(프랭크 란젤라)과 누나 디어드러(캐서린 키너)는 대체물을 찾으러 나섰고, 제프가 부캐에 매달려있는 동안 집에서 그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갔다. 제프 피키릴로와 피클스 아저씨 세계관 둘 다 유지하려고 애쓰는 제프의 노력, 그러나 그의 희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마치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광대의 모순처럼 제프의 애환만 부각될 뿐이었다.

 

시즌 1 후반부가 돼서야 제프는 마침내 인간 제프 피키릴로를 마주할 수 있게 됐다. 필이 죽은 날 운전대를 잡았던 질에 대한 원망과 아내를 용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또 세상을 떠난 필에게 자신이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고 인정했다. 오랫동안 신처럼 부각됐던 제프 피클스에 가려진 솔직함이었고,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한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키딩'에서 재밌는 건, 분노라는 감정을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분노와 평화를 이분법적으로 표현해 대립시켰고, 참았던 분노를 폭발시키면 분노의 화신으로 탄생하는 것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키딩'에선 조금 달랐다. 그가 상처로 인해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을 드러내면서 무작정 삐뚤어진 인간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인간은 계속 바람을 불어넣으면 크게 부풀어지다 터져버리는 고무풍선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시즌 1 마지막에서 제프가 질의 남자친구 피터(저스틴 커크)를 차로 들이받으면서 제프가 분노의 화신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시즌 2에 접어들면서 제프의 극단적인 돌발행동은 단순한 폭발이 아닌 진심으로 피터를 싫어했고 가족을 아끼고 있었다는 걸 '키딩'이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터에게 악의를 숨기지 않고 자기 잘못을 인정했다. 자신이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것도 받아들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삐뚤어진 인간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키딩' 시즌 2 내내 제프는 자기 자신과 과오를 시인함과 동시에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랑하는 아내와의 별거를 인정하고,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그리고 새 출발을 선언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억누르고 괴롭혔던 문제들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과거 질과, 쌍둥이 아들들과 행복했던 순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일까.

 

변화를 받아들이고 보내는 것 또한 그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욕망과 이를 위해 '희생'으로 인식해서였을 것이다. 과오를 순순히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떠난 필은 아름답고 그리운 존재로 남아버렸고, 질을 놓아주는 건 여전히 그를 사랑하나 자신을 떠나려는 아내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질의 새 출발을 하나의 권리로 존중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선한 희생으로 남았다. 그렇게 자기 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원망하는 것'을 집어삼켰고, '나쁜 사람'들을 제거했다. 교통사고가 전부 아내 탓이라고 원망하기엔 너무나도 그를 사랑했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인위적인 평화는 결국 제프 피키릴로를 기괴한 제프 피클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제프 또한 절대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말이다.

 

시즌 2 후반부에 윌이 제프와 질, 그리고 필과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마법에 집착하는데, 시즌 2 마지막에 일어났다. 그런데 되돌리는 게 아닌 시간이 멈췄다. 제프도 윌도, 괴로운 현실에서 회피해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가는 판타지 원하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판타지는 무엇이든 가능하나 아무것도 이뤄주지 않는다는 한계도 알려줬다. 제프는 아이들에게 집에 있는 시계를 한 시간씩 앞당겨 가족들과 보내라고 하나, 아이들 또한 이 속임수를 깨달았다. 상상은 현실로 향해야 한다고 미셸 공드리가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프는 상처를 마주하면서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떠나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면을 스스로 통제하고 마음을 붙잡고 있으면 고요히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통제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것들이 떠나갔다. 원망하고 싶지 않았는데, 감정을 드러냈고 아파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랑은 떠나가지 않고 남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기억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특별한 물건을 깨트려 다시 금으로 붙이는 예술 기법인 긴츠키처럼 치유된 것이다. 비로소 모든 걸 내려놓고, 어른으로 성장해나가며 새 출발선에 섰다.

 

내면의 상처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아파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좋았던 감정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 행복했던 시간들은 어떻게 해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나 추억 등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새로운 행복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당신이 살아있다면.

 

 

 

 

작성자 . J-Hyun

출처 . https://brunch.co.kr/@syrano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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