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4-22 13:39:43
4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쿵푸팬더4> 100만 돌파!
<쿵푸팬더4> 100만 돌파!
하지만 전주에 비해 주말 관객수가 감소했는데요.
차주 <범죄도시4>의 개봉으로 박스오피스 순위는 큰 변동이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쿵푸팬더4>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1주 차 보다 관객 수가 크게 감소하며 간신히 정상을 지켜낸 것으로 보입니다. 2위는 1,178만 명을 달성한 <파묘>가 차지하였고, <남은 인생 10년>이 범상치 않은 흥행세를 보이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4>가 개봉하는 오는 24일부터 박스오피스가 크게 변동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A24 작품 중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한 <시빌 워>가 2주 차에도 1위를 지켜냈습니다. 납치된 ‘발레리나 뱀파이어 소녀’의 저택 탈출 호러를 그린 <애비게일>이 2위,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누적 수익 1억 7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3위로 내려왔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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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헤어질 결심(2021)> 리뷰
이름은 언제나 존재 다음에 온다. 마찬가지로 관계에 있어 마음이란 최초에 발생하는 무엇이고, 행위는 눈 먼 채 마음을 따라가며, 이성은 한참 후 자신의 행동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명명한다(설령 그것이 그릇된 이름이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 영화, 제목이 이상하다. ‘헤어질 결심’이라니. 어떠한 감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저 갈라서면 될 일인데, 물리적으로 멀어진 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이 영화는 헤어지는 행위에조차 ‘결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감정과 행동이 진행되는 순서를 역행하겠다는 선언 이면에 가득한 건 망설임이다. 그러하니 영화 속 주인공의 이별이 쉬울 리가 없다.
<헤어질 결심>을 바라보는 데에는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쟝센에 집중할 수도 있을 테고, 그의 전작에서부터 이번 작품에서까지 이어지는 인물들의 모호하고도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터다. 또한 21세기 한국 사회만이 담아낼 수 있는 현상을 파고들 수도 있을 것이며 히치콕의 영화를 끌어오는 방법도, 탕웨이와 박해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집중해 보는 방법 또한 있겠다. 하지만 난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의 관계에 집중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영화로 찾아온 박찬욱 감독이 꺼내든 ‘멜로’라는 장르를 아끼고 싶진 않으니까.
서래와 해준
<헤어질 결심>은 담당 형사와 피의자로 만난 남녀에게서 출발한다. 특별하지 않은 설정이지만, 이 이야기는두 사람이 품은 믿음으로 인해 레이어가 여럿 추가되며 현실만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 누가 뭐라 해도 꺾이지 않는 신념을 지닌 사람의 품위. 서래와 해준에겐 환경이 그들을 공격하더라도 척추를 꼿꼿이 세우고 세상의 모진 풍파를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서래는 어느 여름 해골 같은 몰골로 불법 입국한 중국인으로, 한국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삶에 풍파가 더해지는 데에 크게 일조한 사람은 서래의 한국인 남편 기도수다. 이 남자는 서래를 학대하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그의 몸에 이니셜(KDS)을 새겨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의 처지가 곤란하기 그지없어 그를 떠날 수 없는 신세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래는 간병 업체에서 ‘에이스’로 통하고, 자신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동물들까지 살뜰히 보살피며, 무엇보다도 언제나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서래가 보여주는 특유의 기품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독립군 참전자인 송서래의 외조부가 일러주었다는 가문의 땅, 호미산으로부터.
해준 역시 서래와 비슷하다. 고지식할만큼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는 그는 어떤 피의자를 만날 때에도 무죄추정원칙을 고수한다. 미결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사건에 관련된 사소한 숫자마저 머릿속에 오래오래 보관하는 이 남자는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정중한 형사로, 서래의 말마따나 ‘현대인’ 치고 품위가 넘친다. 이러한 평가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유효한데, 후배 수완(고경표)은 다른 형사들과 다르게 끝까지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해준을 존경해 부산으로 전근을 왔을 정도이다. 그가 불의 앞에서 늘 달려나갈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원칙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다.
사랑과 미련과 그 밖의 모든 것들
멜로 영화이니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먼저 해 보자. 두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졌을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헤어질 결심>은 서래와 해준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 대해, 감독과 배우와 관객의 해석이 모두 다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해준의 말마따나 서로가 같은 부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서서히 물들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사소한 단서조차 놓치지 않는 형사 해준이 ‘중국인이라 한국어가 서툰’ 서래의 의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더욱 애써 유심히 살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꾸만 시선을 주어야만 했던 정황 속에서 자연스레 자라난 것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한 걸음 뒤의 시선과 녹음을 통해 상대방에게 몇 박자씩 늦게 도착하곤 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없다. 늘 그렇지만,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분명한 것은 없으니.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사랑에 빠진 자신만 남는다는 그 단일한 결과만 제외한다면.
그런데 신기한 건, 둘 사이에서 주도권이 서래에게 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계층의 최약자인 서래 말이다. 서래는 당장의 생존이 절실한 사람이었고, 덕택에 그는 사랑을 온전히 감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이는 서래보다 해준이 먼저 사랑을 자각한 계기가 됐다. 사랑 앞에서는 형사와 피의자라는 권력 관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기실, 형사인 해준은 본질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후 뒤쫓아 가는 쪽이지, 먼저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겐 대단히 비겁한 측면도 있다. 아내 정안(이정현)에게 기도수 사건을 다르게 바꿔 전달하는 것처럼. 사실은 일찌감치 끝난 관계에 무의미한 인공호흡기만 달 뿐 해준은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해파리처럼 모든 일을 밀어낼 줄 모른다. 그는 모든 것을 떠맡는다. 공평하게 모든 것을 신경쓰고자 한다는 건, 사실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걸 모른다는 듯.
해준이 이런 남자라는 사실은 서래에게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서래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정한 남자에게 묻는다. 자신은 왜 당신 같이 품위있는 남자를 만날 수 없을지에 대해. 답은 자명하다. 그에겐 양지바른 한국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미산은 그의 핏줄이 가진 땅이라는데 서래는 어떤 소유권도 주장할 수 없다. 정당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서래는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외국인이자, 저 자신의 고국에 돌아가면 무기징역수가 되는 젊은 여성이다. 전문직에 해당하는 간호사 자격증을 가졌음에도 하루하루 독거노인을 돌보는 불안정한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제 뜻을 명확히 전달할 길이 없다. 서래는 상황을 깨뜨리고자, 운명을 거스르고자 노력하나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남편에겐 가축취급을 당하는 트로피 와이프로, 거듭하여.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 앞에서 변화한다.
회피하던 해준은 행동한다. 서래가 부탁하지 않아도 요리하고, 중국어를 몰래 공부하고, 우산을 씌워주며, 무엇보다도 서래를 고스란히 눈에 담는다.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감옥생활을 각오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홍산오 사건처럼, 해준은 서래 앞에서 몇 번이고 자신의 원칙을 깨뜨린다. 해준 자신이 죽음보다도 더 치욕적으로 여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전했느냐고 따지는 해준의 말은 공허하다. 사건 수사를 위한 결정적 증거를 깊은 바다에 버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명백한 고백이었으니까.
반면 해준을 만나기 위해 이포에 간 서래는 그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다. 부산에서처럼 사건의 주동자가 되지 않고 한 발짝 뒤에서 해준을 바라본다. 언젠가 그에게 닿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스마트 워치에 자신의 말을 녹음한다. 그런데 서래는 먼 발치에서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원칙을 잃어 더 이상 올곧게 달려나갈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서래는 해준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녹음할 수 없는 환경에서 중국어로 말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한다. 모든 사건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깊은 물 아래에 묻음으로써 사건을 무마한다. 서래는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우스꽝스러운 단면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입증할 수 없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는 것을 안다. 서래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했다. 한국은 서래에게 외조부의 땅을 돌려주지 않았으며, 중국에서의 서래를 기억하지 못했고, 기도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 않았나. 그렇기에 그는 거침없이 해변에 스스로를 가두는, 무자비한 선택을 한다.
서래의 선택으로 인해 해준이라는 인간에겐 그저 긴긴 미련만이 남는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 남자는 앞으로 영원히 서래를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 서래와 헤어진 후 셈했던 402일. 그가 없어 편히 잠들지 못했던 402일은 이제 수도없이 많아질 것이다.
어지러이 얽힌 산과 바다
자, 이젠 시놉시스에서 눈을 돌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상징을 이야기 해 보자. 영화에선 자연물인 산과 바다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을지로에서 태어났으면서 바다가 좋다고 하는 해준, 산을 가슴에 품고 바다를 건너온, 저가 돌보는 노인들에게 산해경을 읽어주는 서래. 두 사람에게 부여된 속성은 정안의 원전과 맞지 않는 힘이다.
서래와 해준 두 사람은 모두 산보다 바다를 선택하고, 공자의 말(智者樂水 仁者樂山)을 인용하며 스스로를 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자의 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논어는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러하므로 더더욱, 나는 해준이 산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다에 이끌리는 산이었고, 붕괴될지언정 침몰하지 않는 남자다.
다만 이러한 두 사람의 속성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서래가 읽는 산해경 신화 속 이정표가 무의미하듯, 산과 바다의 경계는 영화 속에서 자주 흐려진다. 마치 산과 바다의 뿌리가 같기라도 한 것 마냥. 뚜렷한 상징으로 환원되는 장면은 차라리 해준의 집에서 서래가 샛노란 옷을 입고 있었던 씬과, 호미산에서 서래가 산에서 광원 자체가 된다는 점이지 않을까. 서래에게 해준의 존재가 잠시나마 구원이었듯, 해준의 삶에 있어 서래는 단 한 순간일지라도 분명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서래가 바다에 잠긴다. 모래산이 무너지고, 바다의 깊은 구멍을 메운다. 서래의 소망은 충족되었다. 그는 해준의 미결 사건이 된다. 해준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 없는 바다, 안개만이 자욱한 해변을 영원히 걸어야 한다. 헤매는 자는 목소리를 높여 운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붕괴 이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서래가 바랐던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살아줘요, 당신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 언제나 나이길 바라요.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만 집중하여 후기를 적었지만, <헤어질 결심>엔 현대 한국인이기에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이 영화가 오로지 2022년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성'이라는 시간적 속성이 어쩔 수 없이 희미해지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영화를 개봉한 해에, 이 나라에서 감상할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이토록 끊임없이 지각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하는 사랑을 매끄럽게 스크린에 담아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획득하기 전 상실되는 사랑이란 파란색도, 초록색도 아닌 푸른색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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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겨진 명작] 그때의 악마들은 여전히 지금도 존재한다.
캐서린 비글로우, 디트로이트 소요사태로 우리를 안내하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은 여성감독이지만 그 누구 보다 긴장감 있는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허트로커(2008) 를 보면 그가 긴 호흡으로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을 잘 끌고 가는지 보인다. 후속작인 제로 다크 서티(2013)에서도 그런 능력을 잘 보여주며 긴 호흡의 영화를 사실감있게 묘사한다. 특히나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때 벌어진 군사 작전이나 상황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 같은 연출에 재능이 있는 감독이다. 그만큼 사실감 넘치는 상황 묘사로 영화를 체험시킨다.
이번에 비글로우 감독은 디트로이트 소요 사태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1967년 7월에 벌어진 이 흑인 폭동은 시내의 주점을 경찰이 단속하는 과정을 다른 흑인들이 목격하며 시작된다. 작은 항의로 시작된 이 사태는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며 과격해지고 불을 내거나 물건을 훔치는 등 혼란이 심화된다. 미국 정부는 결국 공수부대를 파견하고 그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고 결국 36명이 사망하고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초반에 이 사태의 시발점을 차근차근 보여주고 어떤 상황 속에 주요 등장인물들이 처해있는지 보여준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건조하게 설명되는 도입부는 실제 그 당시의 사진과 뉴스 영상 자료가 더해져 사실감을 더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건의 도입을 설명하고 미시적인 관점으로 전개되는 영화
거시적인 관점에서 디트로이트 소요사태의 도입부를 다루던 영화는 알제 호텔에 우연치않게 모이게 된 등장인물들에게 벌어진 사건을 보여주며 미시적인 관점으로 영화의 관점을 변화 시킨다. 영화 초반부에서 마치 역사 공부를 하던 느낌으로 진행되다 그 현장 속으로 관객들을 끌고 들어간다. 모텔에 모인 등장인물도 다양하다. 흑인 일반 남자, 흑인 전역 군인, 여자 백인, 백인 경찰, 군인, 주 경찰, 흑인 경비원 등이다. 흑인 남자들과 여자 백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공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공권력에 무기를 소지 하는 것 까지 포함하면 흑인 경비원도 작은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된다. 흑인 경비원 맬빈(존 보예가)은 일반 흑인들과 백인 사이에서 피해를 최소화 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영화 내내 중간 위치에서 사건을 관찰하며 인물 주변을 맴돈다. 래리 리드(알지 스미스)와 프레드 템플(제이콥 라티모어)는 흑인 가수를 꿈구는 친구들인데 우연히 모텔에 왔다가 사건에 개입된다. 백인인 줄리(한나 머레이), 캐런(케이틀린 디버)도 모텔에 여행왔다 이 상황에 개입되고, 흑인 전역 군인 그린(안소니 마키)도 개입된다. 백인 경찰인 필립(윌 폴터)와 그 동료 2명은 이 영화에서 명백한 악마로 등장하여 주요 인물들을 괴롭힌다. 이런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하나의 장소에 고립시켜 숨막히는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장난으로 시작된 모텔에서의 상황은 극단적인 인종차별 주의자들인 백인 경찰들에 의해 공포 분위기로 바뀌게 된다. 백인 우월 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는 백인 경찰 필립은 도망치는 무방비의 흑인을 죽이고 정당방위로 위장하고, 모텔에서도 칼(제이슨 밋첼)을 죽이고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인물을 하나하나 심문하며 총을 쏜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여기에 실제로 총을 쏜 사람은 없다. 단지 칼이 소리나는 장난감 총으로 창문 밖을 향해 쐈을 뿐이다. 이런 장난을 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소리로 인해 군인과 주 경찰, 디트로이트 경찰이 모두 모텔로 오지만, 디트로이트 경찰이 주도권을 잡고 그 상황을 이끈다. 실제로 경력이 2년, 4년 등 경험이 많지 않은 디트로이트 경찰이 주도권을 잡고 흑인들과 여성들을 벽에 일렬로 세우고 취조를 시작한다. 주변부에서 그 상황을 보던 군인들과 주 경찰은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회피해 버린다. 복잡한 일에 개입하여 골치아픈 것 보다는 모르는 척 외면하는 방식을 택한 그들 중 일부는 내부의 인물을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폭압적인 상황을 외면한다.
다른 입장 속에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모습
흑인 경비원 맬빈의 존재는 그 당시 흑인과 백인의 간극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디트로이트는 공업단지가 많아 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이다. 실제로 맬빈도 낮에는 공장에서 일한다. 맬빈은 소요사태 이후 경비원으로 근무하면서 출동한 군인들에 최대한 맞추려 애쓴다. 공격당하는 흑인을 도와주며 그는 ‘오늘은 살아야지, 오늘은 넘기자’ 라고 이야기 한다. 꼭 소요사태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잘 넘겨야하는 블루칼라들에게는 백인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조용하게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맬빈은 최대한 모텔의 사태를 진정시키고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지만,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그가 어쩌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버린다. 그의 관찰자 혹은 중재자로서의 무기력함은 영화 후반부의 재판까지 이어져 끝까지 이어진다.
현재도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대하는 관찰자로서의 우리
우리는 여전히 인종차별을 주변에서 접한다. 특히나 미국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여전히 많은 나라 중 하나다. 유럽에서도 특정 인종에 대한 추방이다 입국 금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아시아 권에서도 동남아나 이슬람 쪽의 인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많다. 여러가지 인종차별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우리는 분노 하게 된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또는 중간적 입장에서 인종차별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영화 속 맬빈과 같이 차분하게 그 일을 관찰하면서 벌어지는 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간접적으로 노력하지만 변화는 요원하다.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67년에 있었던 악마들은 존재하고 있고, 때로는 과격하게 행동한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그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진행 중
인종차별 뿐만 아니다. 영화 디트로이트에서 피해 받는 사람들은 흑인과 여성이다. 최근 흑인과 여성인권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이들을 무시하는 시선들이 많고, 사회적 임금과 대우들은 차별적이다. 또한 공권력에 의한 폭압도 문제가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 경찰 들은 경찰이라는 이유로,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흑인과 여성을 멸시하고 공격한다. 결국 영화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 다른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다. 물론 그때보다 과격함은 많이 줄어들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과 잘못된 공권력에 대한 싸움은 다른 형태로 계속되어야 한다.
영화 속 가수 지망생인 래리는 결국 가수를 하지 못한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백인들이 같이 즐기는게 싫었고, 무엇보다 공연 등의 외부 할동에 백인 경찰들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서 주로 교회 찬송가를 부르는 일을 하며 지냈다. 그는 그 사건이 진행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체험한 생존자다. 그가 보고 느낀 사회에서 그가 꾸던 가수라는 꿈은 무의미해진다. 사회는 공평하지 않고 그건 일반 사회에서도, 재판에서도 똑같다. 그런 불공평함은 여전히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잘못을 한 사람이 법을 피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적은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그 범죄자가 하던 차별은 계속된다. 래리는 그것을 피해 교회로 숨어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주변의 악마를 인지하게 하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긴장감으로 몰아세우면서 그때의 끔찍함을 체험하게 한다. 디트로이트의 소요사태가 이렇게 까지 커질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그간 쌓였던 흑인들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미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작은 인종차별의 모습들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폭발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배우들은 아주 심각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며, 절망적인 그 상황에 반응하는 개인의 모습들을 너무나 잘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절망감과 분노가 우리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마들을 사라지게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여전히 그들은 우리 주변에 있고,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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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월호? 아직도 세월호!
8★/10★
조금은 이상하고 뒤늦은 슬픔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서울 어딘가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날 눈물 흘리기 전까지 나는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의심하기 바빴다. 세월호를 슬퍼하는 모든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때였지만 내 안에는 뿌리 깊은 패배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죽음을 슬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박근혜와 20대를 보낸 내게는 그들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권위 국가가 상수였고 그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늘 변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편안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세월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섣불리 슬퍼했다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추모집회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접속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게 슬픔을 견뎌왔을 뿐이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는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슬픔을 고립시키려는 모든 것과 단절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애도하며 공통감각으로서의 슬픔을 되찾았다. 세월호는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통해 개별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사라진 생명을 잊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변화를 요청할 수 있음을, 누군가를 잊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거나 낙후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바람의 세월〉이 보여주듯, 이 깨달음은 지난 10년간 번번이 제도권 정치와 진실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딸 문지성 양을 세월호 참사로 잃은 뒤 카메라를 든 문종택 공동 감독은 지난 10년의 세월, 3,654일 동안 세월호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은 5,000여 개, 분량은 50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 긴 시간은 대체로 참사 유가족과 그들의 슬픔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번번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는 과정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유족과 시민의 염원을 이뤄줄 듯하던 문재인 정권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 포괄적 진실 규명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 참사 후 유가족이 처음 환하게 웃은 건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그마저도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유가족은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결국 배반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법과 정치의 문제와 접속시킬지에 관해 많은 물음을 남긴다. 법조인, 정치인이 기존 법 체제 안에서 유족과 시민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노력(특검, 특조위 등)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적인 슬픔에 담긴 커다란 물음과 가능성이 법 기득권과 정파적 당리당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 정의는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세월호 관련 법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영화에 절망과 분노의 순간만 담기지는 않았다. 종종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슬픔을 느낀 건 배상‧보상을 통한 정부의 가족 분열 획책, 유가족을 향한 모욕을 담은 장면만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 등교를 응원하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국회에서 유가족 앞을 막고 선 젊은 경찰이 흐느끼며 울먹이는 장면에서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추모 공간을 꿋꿋이 지키며 싸움을 이어가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이 5.18 민주화 운동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너졌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추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는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견뎌내야만 했던 야만적 시간을 영화가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시간을 유족의 시선으로 말하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뉴스로 사건을 접한다. 즉 누군가 한 번 매개해 가공한 상태로만 어떤 사건을 접한다. 기자가 유가족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유가족처럼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인 채 글 쓰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의견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입혀주기 일쑤인 기계적 중립이 더해진다면, 나아가 기계적 중립마저도 외면하고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한 〈바람의 세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중립을 가장한 차가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절절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은 만큼, 정제되고 정돈하여 매개하지 않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족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보다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며 감정의 공적 기능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람의 세월〉에는 ‘아직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아직도!’라고 답할 힘이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앞에 과거의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슬픔에 기반한 공적이고 정의로운 연결감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 영화에서 큰 위로와 연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가 되레 위로받고 나왔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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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소년심판] 초간단 3분 리뷰
줄거리
연화지방법원 소년부에 새로운 우배석 판사로 부임하게 된 심은석.
아이들과 친근하게 지내려 애쓰는 좌배석 차태주에게 그녀는 차갑게 웃어보인다.
"난 소년범을 혐오해."
소년범을 혐오하는 소년부 판사 이야기.감상 포인트
1. 몰입도 방해 걱정 없는 짱짱한 배우진.
2. 잔혹한 실화들을 바탕으로 던지는 질문들.
3. 소년법원에 대한 관찰.감상평
공개 전부터 꾸준히 관심 받아온 작품이라 그만큼 빨리 보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재빨리 리뷰를 올리는 것은 실패. 빠르게 보고 사람들이 많이 검색할 때 후다닥 글을 올릴 깜냥이 내게는 없는가 보다.
"소년 심판이 왜 속도전입니까?"
그나마 극중에서 심은석이 나근희에게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던 것처럼, '내 리뷰는 속도전이 아니다'라는 알량한 위로를 내 자신에게 던져본다. 작품을 제대로 보고, 충분히 생각해서, 촘촘히 적어내는 게 나만의 스타일이리라.
작품의 성격은 아주 진중한 편에 속한다. 말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세지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숨은 의미'라고 하기엔 좀 웃겼다. 딱히 해석이 필요한 작품도 아니고 하니, 그냥 간단한 리뷰로만 정리하는 게 맞지 싶었다.
넷플릭스 치고는 괜찮은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사건들을 구성했다'는 리뷰를 읽고 마음이 얹짢았다. 그 리뷰어의 말마따나, 사건으로 상처 입은 피해자들의 마음이 다시 한 번 찢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범죄를 다루는 많은 작품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 되기에 이를 두고 마냥 비판할 수는 없는 현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불편했다. 피해자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서 돈을 벌게 해준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극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소년법'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형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타인의 인권을 파괴한 자의 인권을 보장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보장해준대도 피해자의 인권부터 제대로 보호해주는 것이 우선이지만, 이미 피해를 당한 시점부터 박탈당한 인권을 무슨 수로 되돌려 놓는단 말인가. 어디에서 구매해서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타인의 인권을 파괴한 자의 인권은 굳이 보호해줄 필요가 없다.인간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이유도, 소년법이 강화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같다. 인간은 동등한 생명체로서 서로가 사회적 약속과 금기를 깨트리지 않도록 지켜야 할 선을 그어두었다. 그 선을 넘는 인간은 약속을 어긴 대가로 책임을 다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법을 정하고 지켜야 하는 이유라 생각한다. 그런데 드라마 속 강원중의 말처럼, '처벌'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교화'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법소년이 져야 하는 책임보다,그들을 돌봐야 할 어른들의 책임이 부재된현실에 대한 질문이 먼저 아닐까?물론 악조건에서 자란 모든 아이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떠한 합리화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드라마에 나온 촉법소년들은 대체로 부모의 무관심, 혹은 과잉 보호 때문에 삐뚤어졌다. 아이가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게 보호하고 감싸주어야 할 어른들이 없는 아이들에게, 그 모든 죄를 묻기엔 어른의 책임이 너무나 막중하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은 아이지만,그 아이들이 죄를 짓도록 만든 것은어른이 아닌가.그렇기에 매 순간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처벌을 내리는 심은석의 막중한 책임이 보는 사람의 가슴마저 짓눌렀다. 이미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 다른 어른들과 달리, 자신만은 이 아이가 가는 방향을 틀어 바로잡겠다는 그녀의 신념이 느껴졌다.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동시에 어른들에게 질문하는 드라마였다.별점
★★★☆(3.5 / 5.0)직설적이고 촌스럽지만, 때로 작품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부러 촌스러워질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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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여왕으로써의 무거운 책임감을 다큐멘터리로 풀어내다!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논란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대중매체에 공개되는 영국 여왕 가문의 모습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다가가기 어렵고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성격이 까칠하다. 하지만 영국 여왕인 만큼 무거운 책임감은 항상 따라왔다. 영국의 여러 고위 관료들이나 중요 인물에게 훈장을 서사하고(이 훈장들은 몇 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녀가 쓴 왕관 역시도 그만큼 많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 연방 국가들의 수장으로써 순방을 다녀오면서 많은 업적도 이뤄냈다.
특히 이 다큐멘터리에서 돋보이는 건 대한민국의 글로벌 대기업인 삼성전자의 회장인 이건희와 만나고 여러 반도체 시설들을 순방했는데 영국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이게 바로 삼성전자의 저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의 자식들이 스캔들에 휘말리고 사건의 주목 인물이 되면서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의 고단함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 왕실 가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평생 먹고 노는 사람들이라며 부정적인 대답도 내놓았는데 버킹엄 궁전도 화재로 대부분을 잃었고 영국 국민들에게 밉상이 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아들도 공군에 보내고 자신도 전장에서 영국 군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는데 엘리자베스 2세의 공이 컸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영국 왕실 가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국인들에게 신뢰가 잃어가고 부조리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영국의 코미디언들은 영국 왕실 상황을 패러디하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고 파시즘이나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운동에 의해 비판의 대상도 되었다. 여기서 고난은 끝이 나지 않는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도 어떤 국민들에게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저 영국 왕실 가문으로써 대중매체에 공개되어 파파라치들에게 타깃이 되었던 불쌍한 이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고급스러운 호화 궁전에 살면서 모든 걸 누린 사람들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챕터식으로 나뉘면서 관객들에게 영국 왕실의 숨은 이야기들을 과감하게 풀어낸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나왔지만 영화 곳곳에 나오는 영국 여왕을 찬양하는 팝 음악과 더불어 영국 여왕에게 몰려든 영국인들을 벌집에 모여든 꿀벌들로 묘사하고 영국 여왕의 포스와 영국 국민들에게 말하는 메세지 하나하나가 크게 다가왔다.
엘리자베스 2세의 다사다난한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풀어내고 풍자하기도 하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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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관의 존재 이유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오늘도 비행기를 정비하는 한 조종사가 있다. 무인기의 등장으로 유인 조종사의 존재가 무의미해진 상황에서도 우리의 '매버릭'은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타이틀을 놓지 않는다.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는 이 남자는 구사일생으로 탑건에 복귀한다. 하지만 탑건의 조종사가 아닌 조종사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배치되는데, 과연 조종사의 피가 흐르는 이 남자는 후배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이 당면한 작전은 한 사람 이상은 죽어나가야 하는, 이른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매버릭은 이런 하드코어 훈련 작전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구스의 아들, 루스터까지 참여시켜야 한다. 매버릭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는 루스터와의 관계,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그의 임무 사이에서 그는 갈등한다.
1. 멋있는 어른의 모습
최근 유튜브 콘텐츠이든 드라마 콘텐츠이든 각광받는 테마가 있다. 바로 "멋있는 어른의 모습"이다. 유튜브의 "밀라논나'도 그렇고, 드라마 컨텐츠 속에서 인기를 얻는 캐릭터들도 모두 대중들이 보고 싶어하는 멋있고 쿨한 어른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도 매버릭은 멋있는 어른이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게 한다. 처음에 매버릭은 후배들의 원망을 산다. 불가능의 영역인 고도를 계속 침범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는 군인들의 비행 서적의 내용과도 반하는 내용이고, 이런 제멋대로의 가르침은 매버릭의 상관들을 화나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해고 당할 상황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의 필요성을 자신의 비행 능력으로 입증한다. 불가능의 영역도 그라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비행 능력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 이후로 후배들은 그의 말이라면 뭐든 신뢰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세상에는 세대 갈등이라는 개념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기성 세대들이 납득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리는 것에 화를 낸다. 반면, 기성세대들은 젊은 사람들이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는 것에 화를 낸다. 물론, 매버릭과 같이, 불가능이 가능하다고 몸소 증명해내는 상사들은 없다. 그것은 단연코 판타지이다.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에게 왜 이런 매버릭 같이 몸소 귀감이 되어 주질 않는지 따지는 것은 결국 그들의 판타지가 빚어낸 욕심이 원인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어른들이 그처럼 멋있는 증명을 해내지는 못하시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문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민들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을 것이란 과도한 기대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기성세대도 자신의 과거의 찬란함에 매료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수준의 패기를 요구하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그것 또한, 기성 세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기대치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말해, 각 세대들은 자신들이 당면해 본적 없는 감정들을 이해해볼 생각 조차 하지 않고, 각자 만의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기를 다른 세대들에게 요구하면서 의미없는 불만들을 쌓아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영화관의 존재 이유
이 영화는 굉장히 돈을 많이 들인 전투기 액션 영화이다. 내용은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선택한 사람들은 내용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전투기 조종 액션의 박진감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기에.
처음에 이 영화를 보기로 했던 것은 '예상 외로'인기가 많다기에 선택했었다. 탑건 1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과연 탑건 2가 이전의 미국 군인에 대한 멋있는 이미지와 톰 크루즈에 멋있는 비주얼 때문에 인기가 많았던 탑건 1의 영광을 과연 21세기에 굳이 왜 구현하려고 하는 것일까 싶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마블 액션 등등 박진감 넘치는 소재는 차고 넘치고, 요새는 프리가이 처럼 게임을 소재로 하는 영화도 많아져 전투기 조종 액션만으로는 눈길을 끌 수 없을 텐데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영화 머리를 잘 썼다. 전투기 조종하는 장면들이 마치 전투기 조종 게임에 관객들을 참여시켜 동일시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박진감을 몸소 느끼게 했다. 그 실감나는 박진감이 이 영화의 성공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조종은 매버릭이 하지만 우리 모두 그의 전투기에 타고 있는 듯한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전투기 액션을 하고 있는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도 참여시킴으로써 공감 지수를 올린 것, 머리 좋은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들이 결국 영화관의 존재 이유를 부각시킨다. 최근 '영화관의 위기'다 뭐다 하는데, 영화관은 세계관이 거대한 '듄'이나 '마블 유니버스' 영화 뿐만 아니라 스피디한 액션 영화가 사라지지 않는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소규모 독립 영화 그리고 상업 영화이지만 이 정도의 거대한 제작비가 필요하진 않은 영화들이 이런 영화들 때문에 영화관에서는 기를 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이미 그런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결국 거대 제작사의 영화만이 영화관에서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지배구조가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작은 영화들은 그만큼 대비를 해야 할텐데, 새로운 수익 구조에 대한 논의는 필요해보인다. 아니, 이미 업계 분들은 실감하고 계실 테지만 말이다.
3. 총평
이 영화는 살짝 주춤하는 마블의 빈자리를 잘 채워준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탑건 1을 보셨던 분들이 어떤 점에서 미국 군인의 멋있는 모습에 경도되셨는지를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빠른 전개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에 고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마블이 개봉할 때마다 반응이 이전보다는 미적지근하기에 사람들이 액션 장르에 많이 질렸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영화의 흥행으로 이제는 마블에 대한 충성도 때문에 본다기 보다는 이제까지 봐온 가락이 있으니, 책임감으로 꾸역꾸역 보는 사람들이 많았던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액션 장르에 대한 수요는 꾸준했으나, 그냥 마블 유니버스에 더이상 새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 뿐이라는 추론을 하게 한 영화였다. 이 의견에 피드백 해주실 분 있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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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네트> 파이널 예고편
예술가들의 도시 LA,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는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린다.
함께 인생을 노래하는 두 사람에게 무대는 계속되지만, 그곳엔 빛과 어둠이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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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지스탕스> 메인 예고편
배우를 꿈꾸고 있는 순진무구한 청년, '마르셀 마르소'는 독일 나치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구하는 레지스탕스 저항 단체에 우연히 동참하게 된다. 본인밖에 모르던 청년, 마르셀은 점차 레지스탕스의 주요 인물이 되고 죄여오는 독일 나치의 감시에 저항하면서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구하는데.. 생사의 기로에 놓인 아이들의 운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