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4-22 13:39:43
4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쿵푸팬더4> 100만 돌파!
<쿵푸팬더4> 100만 돌파!
하지만 전주에 비해 주말 관객수가 감소했는데요.
차주 <범죄도시4>의 개봉으로 박스오피스 순위는 큰 변동이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쿵푸팬더4>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1주 차 보다 관객 수가 크게 감소하며 간신히 정상을 지켜낸 것으로 보입니다. 2위는 1,178만 명을 달성한 <파묘>가 차지하였고, <남은 인생 10년>이 범상치 않은 흥행세를 보이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4>가 개봉하는 오는 24일부터 박스오피스가 크게 변동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A24 작품 중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한 <시빌 워>가 2주 차에도 1위를 지켜냈습니다. 납치된 ‘발레리나 뱀파이어 소녀’의 저택 탈출 호러를 그린 <애비게일>이 2위,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가 누적 수익 1억 7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3위로 내려왔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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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히어로에게도 행복과 일상을 묻다.
이 글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목이 너무 길어서 아래의 글들에서는 모두 닥스 2로 줄여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Phase4로 향하는 마블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새로운 히어로를 앞세운 영화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익숙한 히어로들의 빈자리는 새삼 크게만 느껴졌다. 모든 영화가 다음 편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마블 시리즈의 최대 불만은 적시타를 맞은 공처럼 튀어 올라 마블 관계자들이 하늘만 쳐다보게 하기 충분한 것만 같았다. 게임이 끝난 것 마냥 허망한 눈으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살얼음판 같던 마블의 명성은 스파이더맨의 거미줄로 겨우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리셋해놓은 판이었지만. 이 판의 우세한 승자가 마블이 될 것이라는 것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마블의 구원투수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과 동시에, 코로나로 인해 거리 두기까지 끝난(?) 시점에 침체된 영화계의 부흥이라는 기대까지도 어깨에 얹은 채 5월의 징검다리 휴일에 개봉했다.
그가 부리는 마법이 이번에도 모든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했을지는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포 영화의 형식을 접목한 접근법도 꽤나 신선하고, 멀티 버스라는 장점을 십분 살려 볼거리도 가득하다.
마블 유니버스에서 닥스의 어깨에 놓인 책임감.;다시 생각해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명배우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역은 마치 캐스팅부터 마블의 운명을 짊어진 것만 같다. Phase3까지는 아이언맨 등의 걸출한 영웅들에 가려져 할당된 분량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능력이 출중한 캐릭터임을 드러냈을 때 이 점을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큰 무리가 없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했다.
제작진은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모든 촬영 일정 등을 그에게 맞추는 등의 공을 들인 덕에 그를 캐스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태 배우가 쌓아온 커리어 덕에 솔로 영화 한 편만으로도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진 히어로로 각인될 수 있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새로운 마블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야 함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런 히어로에게도 마블의 현재 상황은 꽤나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멀티 유니버스라는 특성상 1인 다역을 소화해야 하는 것도 경험과 부담을 동시에 가진 작업이었을 테고.
그러나 영화 속 베니를 보고 있자면.
제작진의 직감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는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각각의 도플갱어들을 완벽히 다른 인물들로 재연해 내고. 피터 파커에 이은 아메리카의 훈육(?)도 완벽하게 해 낸다. 자신이 애써 피했던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고 일상생활의 불안함을 즐기는 연기까지 보고 나면. 다시 한번 그가 얼마나 위대한 배우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어마어마한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배우의 모습은 언제 봐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왜 하필 공포인가;남은 자들에 집중하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제작 단계에서부터. 마블은 이번 작품이 공포영화가 될 것이라 말해왔다. 대형 프랜차이즈 히어로 영화에 공포라는 장르가 언뜻 매치가 되지 않을 듯 보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블이 취하는(혹은 바뀐) 자세와 공포가 그 어떤 때보다도 잘 맞아떨어진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마블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은 누가 뭐라 해도 타노스의 블립이었다."5년전 그 일"이라는 단어로 불리며 제대로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인물들이 늘 존재했고.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장면들을 매 영화마다 넣어 희생자들에 대한 생각으로 고개를 떨구는 히어로들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이 "의식"은 마블의 침체기와 맞물리면서 팬들에게 떠난 영웅들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해서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러나 마블은 이제. 혹은 "드디어".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남은 자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부재로 가끔 긴 한숨을 몰래 쉬어야 하고. 다시는 누구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과 지키겠다는 마음이 뒤엉켜 늘 불안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내 몸 하나 있을 자리를 겨우 유지해야만 했다.
이 불안함과 공포는 히어로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수많은 희생 위에 쌓아올린, 아직은 위태로운 평화를 위해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진 인물들이 영화에서 충돌하지만. 모든 히어로 영화에서 그렇듯 반드시 한 쪽은 패하게 되어 있고, 그들의 염원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들에서 공포를 느끼기 충분한 장면들이 만들어진다.
생소하다고 생각한 공포는 요소는 영화에서 크게 겉돌지 않는다. 가끔 이게 진짜 마블 영화가 맞을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도 만들어 낸다. 공포를 순수한 무서움이라는 좁은 의미보다 두려움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영화는 정말 성공적인 시도를 해낸 셈이고. 마블이라는 이름 하에 조금은 격하되었던 영화의 "격"도 함께 올라갔음을 느낄 수 있다.
히어로에게도 행복은 존재한다.;행복은 환상이 아닌 현실에 존재한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케이크는 한 조각만 먹을 때 제일 맛있는 거예요.
스쿼트를 몇백 개(?) 하고, 울기 직전의 상태로 주저앉아있는 내게 트레이너 선생님이 해준 말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인바디를 측정할 때마다 그 말이 조금씩 마음에 와닿았다. 고난이 없으면 케이크가 달게 느껴질 리가 없고. 그 감정을 느껴보지 못하면 고난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해주신 것이었다.
완다는 케이크 한 판을 한 번에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착각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우주에 있는 것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늘 케이크보다는 쓰디쓴 맛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완다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꾼 셈이다.
영화는 완다의 행복을 향한 불가능한 여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히어로들에게도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예전의 마블 영화들은 정체성과 하늘을 찌를 듯한 의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Phase 4에 다다른 마블은 이제 히어로에게도 능력에 대한 질문보다는 일상에서의 삶과 행복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던진다.
불안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딛어야 하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행복하냐고 묻는 것을 보니. 이제 진정으로 마블이 새로운 세대를 열 준비가 되었나 보다.
마치면서
마블 관계자들은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이라 부르는 것을 내쉴 수 있을 것 같다.
보는 내내 케빈 파이기와 샘 레이미 감독을 향한 찬사를 멈출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영화였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야 뭐 당연하고.) 애써 되찾은 마블의 명성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이기적으로 바라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영화의 최애 장면]
단연코 자비에 교수가 완다의 의식을 구해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샘 레이미 감독을 썼던 이유에 대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음. 그 장면 때문에 영화를 두 번 세 번은 다시 보고 싶을 정도.
[이 글의 TMI]
1. 오이 오빠 소처럼 일해줘서 고마워요.
2. 오이 오빠 제발 내 시간과 돈과 사랑을 받아.
3. 우리나라 사람들 마블에 진짜 진심임. 개봉날 조조영화가 매진이라니.
#마블영화 #닥터스트레인지대혼돈의멀티버스 #베네딕트컴버배치 #샘레이미 #엘리자베스올슨 #베네딕트웡 #레이첼맥아담스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최신영화 #네이버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Munalo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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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비루함
지금이야 드라마들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갔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가족들과 모여 보던 드라마들은 내용이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능력 있지만 어딘가 결함이 있는 남자와, 불우하지만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가 만나 갈등을 사랑으로 극복하며 끝맺는 이야기들. 모두 보고 나면 역시 재밌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딘가 흔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사랑들은 모두 물리학적 사랑이었다. 물리학 실험처럼 완벽히 통제된 상황에서만 변수 없이 작동하는 그런 완전무결한 사랑. 그런 사랑은 현실의 사랑과 무척이나 닮아있지만, 결정적인 지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현실적인 사랑에서는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갈등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갈등도 있고,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지저분하고 추한 모습도 언제나 동반하고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다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드라마에는 그런 사랑의 비루함이 빠져있곤 했다.
<우리도 사랑일까> 같은 영화를 보면 안타깝다. 주인공 마고에게는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남편이 있는데(요리까지 잘한다) 우연히 옆집으로 이사 온 남자 대니얼에게 흔들린다. 영화를 보는 누구라도, 그 여자의 흔들리는 감정이 위험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마고는 대니얼을 택한다. '루 같은 남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후회한다 너.' 혼자서 중얼거리게 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는 내가 언젠가 느꼈던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흥미와, 설레는 감정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어떤가. 권태로운 일상에서 무심하게 살아가는 마이클 스톤이 수줍은 여자 ‘리사’에게 홀딱 반하고 같이 밤을 보내는데, 아침이 돼서 밥을 먹을 때가 되어서는 그녀의 쩝쩝대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구제할 수 없는 그의 한심함에 비참해질 정도가 되는데, 한 편으로는 나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흠뻑 빠졌다가 단점을 발견해나가는 사람일 때가 많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단란하고 평범한 부부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낭만적인 약속으로 시작해서 파멸로 끝이 난다. 둘은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이민 가자는 목표를 세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랭크는 승진을 제의받고, 에이프릴은 임신을 한다.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에서 시시때때로 나타나 발을 거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앞에서 안전한 현실을 택할 것인가, 불안한 이상을 택할 것인가. 안타깝지만 대체로 우리는 안전한 현실을 택하는 사람들이고, 영화 속 두 인물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하필이면'이라는 단어를 만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면서 망가지는 꿈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사랑에 관한 비극일 때, 결국 두 사람 모두가 서로에게 실망하게 되었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안타까워진다.
이처럼 나는 사랑의 비루함을 다루는 영화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막 찌질하고, 하찮고, 사소하고, 한심하고, 추잡하고, 이기적이고, 골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보면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회로 떠서 접시에 올려놓은 것 같은 싱싱함이 느껴진다. 내가 겪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감정이, 레고 블록을 틈새 없이 끼우듯 맞추어지는 것 같다. 세련되고 깔끔하게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도 사랑의 비루함을 껴안고 우당탕탕 살아갈 것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서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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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남 (2022)
* <수리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수리남 (2022)
연출: 윤종빈
출연: 하정우, 황정민, 박해수, 조우진, 유연석, 장첸
장르: 범죄, 액션, 느와르
공개 회차: 6부작
공개일: 2022.09.09
속여야만 살 수 있는 목숨 건 게임
자신의 부모처럼 아이에게 가난을 되물림해 주고 싶지 않았던 '강인구(하정우)'는 친구 '응수(현봉식)'과 함께 큰 돈을 벌어보고자 수리남으로 향한다. 하지만 홍어 사업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절친을 잃는다. 꼼짝없이 누명을 쓰고 범죄자가 되려던 찰나 국정원 미주지부 팀장 '최창호(박해수)'가 면회를 찾아오고, 수리남에서 자신을 도와주려 했던 목사 '전요환(황정민)'의 정체가 마약왕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강인구'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자 사업 실패, 친구의 죽음까지 불러온 '전요환'에게 큰 앙심을 품는다. 그는 마약왕을 잡기 위한 국정원의 작전에 합류하기로 결정하고, 목숨을 건 연기를 시작한다.
2022 한국 넷플릭스의 한 줄기 빛
<수리남>은 실제로 해당 국가에서 마약 조직 '칼리 카르텔'과 손을 잡고 마약왕으로 군림했던 마약사범 '조봉행'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장르 특성상 넷플릭스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르코스> 시리즈를 연상시키며 늘 사회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해 온 '윤종빈' 감독의 색깔이 뚜렷하다. 본래 영화로 제작되려 했으나 6부작 시리즈로 완성된 <수리남>은 실화에 기반한 사건들을 안정적으로 가져가며 아낌 없이 총탄을 날리는 큰 규모의 액션, 해외 로케이션이 이뤄낸 이국적이고 개성적인 미술 연출, 탄탄한 각본을 토대로 결말까지 흡입력을 놓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과 <지금 우리 학교는> 이후 올해 많은 한국 넷플릭스 작품들이 공개되었지만, 대부분 허우대만 그럴 듯 했을 뿐 혹평이 자자했다. 해외에서의 성공은 커녕 국내 시청자들마저 등을 돌렸으나 <수리남>만큼은 흥행과 비평의 연속된 실패 속에서 건진 준수한 완성도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탄탄한 개연성과 캐릭터의 충분한 빌드업
<수리남>의 가장 큰 장점은 개연성이다. 주연 캐릭터들은 모두 목적과 가치관이 뚜렷하고, 감독은 이에 대한 서사를 1화부터 충분히 쌓으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인물의 행동에 대한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한다. 우선 폼 나게 살아보기 위해 수리남으로 향한 '인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이는 민간인에 불과했던 '인구'가 국정원도 마다하는 위험한 작전에 계속 뛰어들고, 돌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같은 가치를 신봉하는 '요환'과 같은 편인 것처럼 구는데 요긴한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요환'은 수리남에서 코카인 거래를 독점하고 큰 돈을 손에 쥐기 위해 종교를 악용하는 인물이다. 왜 하필 종교일까. 이는 '요환'의 과거 서사 장면들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다. 그가 왜 50만 인구의 수리남으로 향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수십 명의 신도들을 마약 사업에 이용하게 된 것인지 서사에 필요한 내용은 단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충분한 설명을 통해 친절한 전개를 펼친다는 것이 마냥 장점으로만 볼 수 있는 속성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러한 범죄 액션 스릴러물에서는 안정적인 전개 방식이 작품에 중요한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수리남> 역시 두 주인공의 과거사를 중심으로 설명이 다소 과할 정도로 많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작품의 흥미까지 저하시킬 정도는 아니다. 두 캐릭터에 대한 충분한 빌드업은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며 극중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여러 인물들의 양면적 속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서스펜스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특히 누가 누구의 편인지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스토리로 몰입을 끌어올리며 마치 '마피아게임'을 보는 듯한 흥미진진한 전개를 펼치기까지 한다. 아마 영화로 제작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캐릭터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6부작 시리즈물로 기획됨으로써 자연스레 인물들의 서사에 살을 붙이고, 대사를 통해 풀어도 될 장면들을 좀 더 흥미롭게 생생한 연출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독사 같은 조우진, 아쉬운 유연석
실화 바탕의 각본은 개연성과 함께 짜임새 있는 스토리로 결말까지 흐트러짐이 없다. 다만, 배우들이 치는 대사나 캐릭터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전형적이다. '구상만'으로 위장해 '김프로 어떻게 식사는 잡쉈나?'를 외치는 '최창호(박해수)'의 대사들은 캐릭터의 대담한 성격과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우며 주인공 '강인구'를 연기한 '하정우'는 딱 예상 가능했던 연기를 보여준다. '하정우'의 복귀작이라고 홍보가 되기에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연기로서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주연 캐릭터들 중 유일하게 순둥이를 자처한 '유연석'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 혼자만 연기가 붕 떠 있다. 배역 특성상 영어를 많이 섞어 쓰고 능글거리는 성격이지만 극중 보여진 장면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럽고 어색했다.
작품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는 조선족 '변기태'로 분한 '조우진'이다. 작중 가장 큰 반전을 선보인 캐릭터기도 한데, 독사 같은 날카로운 모습과 현실에 찌든 인간적인 모습을 넘나드는 1인 2역 같은 연기를 소름돋을 정도로 잘해낸다. 특히 목숨을 걸고 수십 명의 중국인 갱과 혈투를 벌이는 장면에서의 잔혹한 카리스마는 아주 강렬했다. 식상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던 '황정민'도 위선과 광기가 공존하는 빌런으로서의 위압감이 상당했으며 극악무도한 갱스터로 등장한 '장첸'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재미만큼은 확실한 '수리남' 월드
아는 맛이다. 하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이다. '윤종빈' 감독은 본인이 특화된 장르로 돌아왔고, 배우들은 제몫을 해낸다. 장르를 '수리남'이라는 이색적인 공간으로 옮겼을 뿐 소재나 줄거리는 비슷한 류의 다른 한국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새롭지는 않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결말 역시 처음부터 쉽게 예상이 가능하고, 감독 역시 이 같은 사실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범죄 액션물이 가져다줄 수 있는 '재미'라는 본질적 요소에 집중하며 신파적인 이야기나 인물들의 불필요한 감정선을 첨가하지 않고, 결말까지 흡입력 있는 전개로 깔끔한 마무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내용 측면에서의 긴장감은 부족할지라도, 인물들 간의 교묘한 심리전으로 흥미를 충분히 이끌어낸다. 정해진 결말을 두고 쉼없이 달리는 속력과 서로를 난타하는 인물들의 피 튀기는 혈전, 샛길로 빠지지 않게 탄탄한 설정을 갖춘 캐릭터성을 토대로 속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밀림과도 같은 '수리남'의 세계관을 완성시켰다.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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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여름이 지나가면>
초등학교 6학년 ‘기준(이재준 扮)’은 농어촌 전형으로 입시를 치르려는 엄마의 계획에 따라, 엄마와 단둘이 연고도 없는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다. 전학 수속을 위해 학교를 찾은 첫날, 복도에 두었던 기준의 운동화가 사라진다. 선생님은 지나가던 학생들에게 ‘영준(최우록 扮)’에 대해 물으며 영준을 의심하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
영준은 두 살 많은 형인 ‘영문(최현진 扮)’과 단둘이 살고 있다. 영문과 영준 형제는 마을 어른들에게 관심과 연민의 대상인 동시에 무관심하게 방치되는 존재이다. 형제는 치킨집 아르바이트와 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준은 이 형제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고, 점점 영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기준의 시선
영화는 주인공 기준의 시선을 통해 진행된다. 형제와 어울리며 변화하는 기준의 모습과 내면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 기준은 영문에게 ‘물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제는 기폭제일 뿐, 기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기준은 원래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아이였다. 대도시 속 정상가족의 삶에서 벗어나며 기준은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나쁘거나 부도덕한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어른들의 시선
이 영화에서 또 중요하게 다루는 시선은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시선이다. 어른들은 기준과 형제를 분리하여 생각한다. 어른들에게 기준은 형제와 다른 존재이다. 형제는 나쁜 아이들이고, 기준은 착한 아이이다. 기준이 한 나쁜 짓은 나쁜 아이들인 형제에게 물들어서, 형제가 억지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짓처럼 보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자신을 부정당한 기준은 억울하게 소리친다. ‘내가 한 거’라고.
카메라의 시선
기준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엄마는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기준의 신발을 훔친 범인을 CCTV를 통해 확인한다. CCTV는 어떠한 여과 과정 없이 기준의 신발을 가져간 세 명의 아이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기준의 엄마가 그 화면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영준의 파란 상의가 전부이다. 객관적인 화면은 주관적 확신의 선택적 근거가 되어 버린다.
영화의 시선
그렇게 마을을 떠난 기준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는 보여 주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물건은 운동화와 게임기이다. 두 가지 물건은 모두 기준을 떠난다. 운동화는 도둑맞았고, 게임기는 망가졌다. 이 두 가지는 영문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기준에게 돌아온다. 영문은 같은 모델의 운동화와 게임기를 도둑질해서 기준에게 준다. 두 물건은 같은 것인 동시에 다른 것이다.
기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형제를 만나기 전과 후의 기준은 같은 사람인 동시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기준을 떠났다가 돌아온 두 물건처럼, 기준도 결국 원래 살던 서울로 돌아가며 영화가 끝난다.
우리는 두 가지 물건에 빗대어진 기준의 미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인지, 내내 기준을 따라가던 영화는 마지막에 형제를 향해서 눈을 돌린다. 마을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기준 모자가 아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형제를 보여 준다. 형제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여름이 지나가면 형제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이 여름을 거쳐간 형제의 다음을 상상하게 만들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시선을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시선은, 10대 소년들의 치열한 삶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감독의 눈이었다. 마지막까지도 형제의 오토바이를 바라보는 꾸준한 눈길이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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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과 공존하는 사랑
SYNOPSIS.
여덟 살 난 딸, 투병 중인 아버지와 파리의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산드라는 어느 날 오랜 친구 클레망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일과 가족, 사랑 사이에서 삶은 계속되고 때로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하지만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게 찾아온다.
영화가 시작되면, 당신은 곧바로 사랑에 빠질 것이다. 레아 세이두로 시작되는 이름들, 함께 나오는 음악, 레아 세이두가 걷는 거리가 담긴 색감… 이 모든 것이 더없이 ‘영화’롭다. 산드라(레아 세이두)가 마침내 도달해 두드리는 초록 문의 느낌조차.
그러나 잠긴 문을 열어주는 일조차 쉽지 않은 아버지와, 차분하게 아버지가 문을 열어줄 수 있도록 대화를 이어가는 산드라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없이 영화로워 보였던 장면의 바로 뒷면에 현실이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중점을 두고 편집을 거친 결과물이다. 로맨스 영화는 두 사람의 로맨스 서사에, 성장 서사는 한 사람의 내면 성장 서사에 집중하여 인물의 일면들을 담아낸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로맨스 서사를 쌓거나 성장을 이루는 사건들은 절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잡다한 일상과 갑작스러운 일들을 처리하면서 해나가야 한다. 수많은 감정과 사건들이 360도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니까. 복선과 맥거핀으로 곱게 준비해 둔 자리가 아닌, 어느 날 갑자기.
이 영화는 그 일면을 포착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산드라와 클레망의 사랑은 아무 전조도 상징도 없이, 작은 대화 하나로 시작된다. 갑작스럽게 만나지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고, 마가 뜨지 않는 대화가 즉각적으로 가능한 사이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K-유교걸 정서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관계의 자장에 놓여 있다. 그 사실을 둘도 잘 알고 있어서, “나 이거 불장난 아니야”라고 진지함을 피력한다. 너무 쉽게 불장난으로 보일 위치라서.
우연한 재회와 가벼운 대화들 위에 번진, 불장난 아닌 사랑이 날로 자라나고 있다고 해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사랑의 면만을 담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산드라에게는 돌보아야 할 딸도 있고, 무엇보다 큰 병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네 마네 하는 대화를 해야 하고, 철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뇌리에서 길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든다. 우연히 만난 아버지의 제자가 안부를 묻는, 더없이 가벼운 대화 한가운데서 울컥 눈물이 터지기도 하고. 아버지의 짐을 챙기다 저항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클레망과의 사랑은 그 사이사이, 샌드위치 사이의 잼처럼 펼쳐진다. 빵 위에 쓱 발리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클레망과 산드라 사이의 대화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슬픔이 깔린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 붙일 수 있는 편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열정적인 키스 직후에도 딸 아이의 펜싱 수업에 가야 하고, 아버지의 짐을 정리해야 하고… 산드라의 일상은 그렇게, 시작되는 사랑과 사라져 가는 사랑, 다가와준 사랑과 다가가 돌보아야 하는 사랑 사이에서 굴러간다. 타오르는 육욕과 대조적으로 쇠해 가는 아버지의 육체 사이. 사랑을 그리워하는 밤과 아이를 재우는 밤 사이.
파리 한가운데서 레아 세이두의 얼굴을 하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감정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역할과 위치를 저글링하듯이 돌리고 돌리면서 일상을 채워가는 것은 우리 모두 마찬가지니까.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학생이나 직장인 같이 자기 일상을 채우는 일에 관하여, 등등… 더러 누군가의 부모 혹은 조부모 같은 역할이 더해지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영화 속 산드라의 아버지가 큰 병에 걸리신 것처럼, 기존의 역할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한다. 삶은 언제나 다각도의 감정과 사건 사이 놓여 있다. 진공 상태의 삶이란 없다.
거기서 우리는 부단히 노력을 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서 완벽하게 안정적인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소중히 여길수록 그 상실은 아프다. 아버지의 노트에 쓰인, “이 병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나를 벌한다”는 문장처럼. 가장 소중했기에 가장 아픈 상실이, 필연적으로 삶을 찾아온다.
아버지의 병증도 해결 방법이 없지만, 병이 없어도 인간은 무언가를 쉬이 상실하는 존재이다. 산드라와 딸 린은 이미 남편/아빠라는 가족 구성원을 (어떤 형태로든) 상실한 경험이 있고, 지금 아버지/할아버지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으며, 클레망과의 관계 귀추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시간에 따라 하나씩 많은 것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것은 서른 즈음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병에 갇혀가는 아버지를 보며, 그 아버지의 어디를 붙잡아야 할지. 끝나가는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잃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이 늘어갈 때 그걸 어떻게 붙잡으려 애써야 하는지. 이 슬픔에서 파괴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방법은 별로 없다. 아버지를 위해 좋은 요양병원을 찾고, 좋아하시던 음악을 틀어 보거나 딸아이의 그림을 병실에 붙여 두는 각양각색의 노력을 하지만, 솟구치는 슬픔을 아주 사라지게 할 방법은 없다. 클레망과 서로 꼭 끌어안고, 아무리 사랑한다 말해도, 그 슬픔을 없애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위해 가끔 기꺼이 바보가 되어 줄 수 있다. 아이들을 방에 몰아넣고 최선을 다해 산타와 루돌프로 열연하는 어른들의 귀여운 모습처럼, 솟구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산드라에게 몸을 한 번 맞대어 끌어안는 것처럼. 삶에 상실은 끝없이 일어나지만, 그 거대한 슬픔을 버티고 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런 귀엽고 사소한 순간들이다. 거대한 구멍을 단숨에 메울 수는 절대 없는, 그러나 얼기설기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순간들이 “어느 멋진 아침”을 선사한다.
높은 언덕에서 보면 에펠탑은 보여도 우리 집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듯이, 삶이라는 거대한 것을 조망하면 얼핏 거대한 슬픔에 비해 이런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곳은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가 아니라 집이다. 상실이 숱하게 일어나고, 슬픔의 얼굴도 영영 가시지 않을 것이다. 서울 어디서 보아도 보이는 거대한 건물처럼. 그러나 슬픔과 사랑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삶의 축복이 아닐까. 랜드마크가 있는 도시에 내 몸 뉘일 곳 또한 있다는 것이.
그러고 나니 영화가 끝나면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LOVE WILL REMAIN이라는 가사가 잔잔하게 위로가 된다. 잃어버리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세계 속에서, 슬픔과 공존하는 사랑. 결국 그게 우리에게 영영 남을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9월 6일 개봉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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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자본으로써 얻어지는 인간의 자유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드레날린 라이드 - <인피니티 풀>
감독: 브랜든 크로넨버그
출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미아 고스, 클레오파트라 콜먼 등
시놉시스: 제임스와 엠은 외딴섬 라톨카의 최고급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낸다. 자신의 팬이라는 개비와 그 배우자와 함께 밤을 즐기기 위해 외출하던 날, 제임스는 자동차 사고로 그 지역의 농부를 죽이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은 라톨카는 폭력과 쾌락, 공포로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첫 장편작 <항생제>부터 <포제서>, 그리고 신작 <인피니티 풀>까지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영화 세계는 점차 확장되고 있다. 특히나 이번 <인피니티 풀>의 경우 <포제서>의 연장선 혹은 심화의 과정에 있는 영화로 보인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건 '정체성'이라는 테마다. 전작이 타인 의식의 침투에 따른 두 의식의 뒤엉킴을 보여주며 인간 정체성에 대해 묻는 영화였다면, <인피니티 풀>은 한 인간이 뇌까지 모든 부분이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만나면서 겪는 수난을 보여주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영화로 느껴진다. 커진 영화의 규모만큼이나 작품 간 3년의 공백 동안 이뤄진 기술의 진보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감독 스스로가 두 영화의 연관성을 인정하며 이번 영화를 <포제서>의 미적 진보라 칭하기도 했다.
아마도 <포제서>를 본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환각 시퀀스를 보면서 전작의 의식 교차 시퀀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작이 떠오른다는 것이 독이 되는 면이 없잖아 있겠지만, 이 영화의 경우 그래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찍어 색다른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브랜든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번에도 전작들에서 함께했던 카림 후세인 촬영감독과 작업했는데, 의도적으로 촬영 기술을 포함해 <포제서>에서 사용했던 모든 방식을 완전히 중복되게 사용하지 않았다. 환각 시퀀스는 디옵터와 렌즈 플레어, 다이크로익 필름을 젤 형태로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직접 찍는 카메라의 한계 안에서 이미지를 변형시켜 구현했다. 여기에 더해 환각 장면에 한해 CGI를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카메라 안에서 이루어졌고, 같은 숏을 다른 버전의 이미지 왜곡으로 여러 번 재촬영해 씬 바이 씬으로 이어 붙이는 식으로 편집했다. 오로지 촬영과 편집 만으로 환각 시퀀스의 비현실적 감각을 구현한 것은 엄청난 작업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이 영화는 직접적이고 폭력적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카메라를 비틀어가며 비현실적이고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영화는 제임스가 농부를 차로 치는 장면을 기점으로 라톨카 안의 뒤틀린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법 규율이 엄격하기로 알려진 라톨카에는 사람을 죽일 시 죽은 자의 장남에 의해 사형을 당해야 하는 법이 있다. 하지만 제임스와 같은 관광객에게는 예외가 있다. 거액의 돈을 낸다는 전제 하에 복제 인간을 통해 처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처형당하는 자는 복제된 자신의 처형을 꼭 직접 봐야 한다. 첫 형 집행일에 13살의 죽은 농부 아들이 나타난다. 복제된 제임스의 복부를 수십 차례 찌르는 그를, 수십 차례 찔려 죽음을 맞는 복제된 자신을 보면서 제임스의 얼굴에 번지는 건 미소다. 자신과 똑같은 외형에 감정과 기억까지 같은 존재가 생긴 것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그 존재의 죽음을 보는 제임스는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것만 같다. 처형은 그 기점이 되고, 부자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를 맛본 그는 경험자들 무리에 껴 범죄행위를 반복한다. 수년간 글을 쓰지 못한 사실상 무명작가이지만 아내 엠의 재력으로 부유한 삶을 영위했던 그는 이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고야 만다.
이들이 범행을 반복할수록 분명해지는 건 제임스는 이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개비의 유혹에 넘어간 순간부터 제임스 자신은 범행의 짜릿함을 느끼며 상황을 즐긴다 여기지만, 결국 제임스는 개비를 포함한 이들 무리의 놀잇감에 불과하다. 부자에게 호의적인 라톨카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본주의의 먹이사슬은 더욱 잔혹하게 작용한다. 자신의 위치를 늦게나마 깨달은 제임스는 개비 무리에게서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개비 무리는 제임스가 도망칠 때마다 그를 붙잡으러 나타나 우롱한다.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고리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는 걸 깨달은 제임스에게 남는 것은 결국 무력감뿐이다.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던 인물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며 좌절하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는 걸 보고 있자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환경에서 일종의 실험을 자처하는 영화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상황에서 최대의 자유를 즐기며 광대를 자처했던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으며 부서지고야 만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오히려 담담하다. 어차피 누군가의 개가 될 것이라면, 최상위에 서지 못한다면 보다 위에 있는 개가 되는 게 나을 테니까. 작가로서도, 자본주의의 세상 안 뭣도 없는 개인으로서도 제임스는 그렇게 라톨카 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둘 수밖에 없다.
세 편의 장편을 아울러볼 때,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영화 세계는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테마에서 점차 커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감독으로서 그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탐구하며 필요하다면 그 환경을 가감 없이 보이려는 적나라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번 영화의 경우 인물을 내세워 그가 느끼는 비현실적 감각 자체를 관객이 체험하게 만드는 데 영화의 주목적을 둔 듯하다. 이런 방식이 무척 과하게 느껴져 호불호가 갈릴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영화를 봤을 때 일관된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는 그의 영화 세계는 그가 아버지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갈 감독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만든다. <인피니티 풀>은 어떤 의미로든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그려낼 그만의 세계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엔 충분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상영일정
6/30 24:00-05:46 부천시청 어울마당
7/2 19:30-21:29 한국만화박물관
7/9 19:30-21:29 부천시청 어울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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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은 할 수 없는 DC의 한방
#조커 #스포일러_없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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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를 소개합니다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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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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