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징2022-12-26 18:16:04
넷플릭스 뮤지컬 영화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스포일러 해석 포함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NETFLIX, 22.12.25 공개)
감독: 데니스 켈리
출연: 알리사 위어, 엠마 톰슨 등
무려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고 해서 한 달 전부터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던 작품입니다.
1997년 개봉한 영화 '마틸다'와 내용 같고요, 거기에 뮤지컬을 추가했다고 생각하심 될 듯해요
근데 기대를 너무 많이 했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지루하고 유치한 느낌이 많이 났답니다 ㅠㅠ
전체 관람가다 보니 아이들도 보기 쉽도록 단순하게 연출했겠지만,
아무래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거라며 과대 홍보를 하여 기대치를 지나치게 높여 놨던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일반 영화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은 이야기 진행이랄까요?
사실 '마틸다'에서도 이야기가 너무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한 1인입니다만... 학대당하는 아이, 그러나 어딘가 천재성이 있는 아이, 입학하게 된 학교의 교장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그 와중에 초능력을 부릴 수 있단 걸 알아챈다, 게다가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생님이 거둬 주기까지... 소재가 하나인 게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뒤엉켜 하나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이야기잖아요.
'마틸다'에서는 어땠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에서는 마틸다가 머릿속에 상상한 소설이 한 편 등장하는데요. 그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 허니 선생님이에요
임신한 채로 곡예를 부리던 엄마는 자신을 낳고 돌아가시고, 이모 손에 맡겨진 허니 선생님은 학대를 당하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의 아빠는 대응하려다가 아마도, 이모 손에 죽게 된 거 같고요. 그 이모가 바로 트런치불 교장!
자신에게 이런 끔찍한 과거가 있기에 마틸다를 거둬 주기로 한 건데요... 마틸다와 겹쳐지는 허니 선생님의 어린 시절 연출이 굉장히 슬프고 감동적이긴 했지만 사실 영화의 엔딩 치고 그닥 완벽해 보이진 않아요. 마틸다는 행복해졌지만, 시청자가 개운하진 않은...?
하지만 또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전 사실 이 모든 게 마틸다의 상상 같기도 합니다. 학대를 당하던 마틸다는 이미 죽었을지도요.
자신을 방임하는 부모에게 염색약, 본드 등으로 복수하는 것도 작고 힘 없는 마틸다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르고요. 트런치불 교장이 있는 그 학교는 어쩌면 고아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마틸다와 달리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정작 트런치불 교장의 학대에 소리치는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아니, 그냥 그들의 부모는 등장하지 않아요
오로지 허니 선생님만이 교장의 학대를 막아 줄 뿐 이 모든 게 상상이라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초능력' 때문이겠죠. 그 초능력만 있었다면 마틸다는 부모의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지긋지긋한 트런치불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요.
엔딩쯤에서 아빠가 마틸다에게 '딸'이라고 하는데요 평생을 '아들'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야 딸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마틸다가 듣고 싶던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많이많이 기대한 것보다... 훠얼씬 실망했다는 게 저의 총평이랍니다 ㅠㅠ 노래를 듣는 맛은 있었지만 귀에 착 감기는 넘버는 없었고, 뮤지컬 '마틸다'로도 공연 중이기 때문에 그걸 한번 보고 싶다는 욕심은 생겼네요~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의사: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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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등 (2015)
영화 <4등>의 중심 인물은 모두가 피해자다. 이미 첫 아시안 게임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다가오는 아시안 게임의 유망주로 떠오르는 젊은 수영 천재 ‘광수’,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으나 매번 4등만 하는 ‘준호’, 기자이자 준호의 아버지인 ‘영훈’, 악착같은 준호의 어머니인 ‘정애’. 간략한 소개로만 보아선 이들이 무슨 피해자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영화속 이들을 지긋이 바라보면 그들이 어딘지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며, 그 선택의 원인을 좀처럼 찾을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속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중력을 행세하는 힘의 주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게 보이지 않는 이 희미한 중력장의 실체는 영화속 인물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
1-1. 광수
가장 먼저, 광수의 경우는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태릉으로 출발하는 날 그의 오래된 고향의 폐건물에 들러서 광수는 불법 도박을 하고 있는 고향 선배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폐건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광수의 뒤에 떨어진 말. “내일 가도 되잖아, 너 천재잖아”라는 그 말이 광수를 다시 도박판으로 불러들인다. 서울로 떠나려던 광수는 뒤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시고 뒤돌아서더니, 다음 컷에는 어느덧 광수가 도박판에서 도박을 하고 있는 컷으로 이어진다. 광수는 이 지점에서 어촌 마을의 도박에 빠진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진 셈이다.
광수는 몇날며칠을 도박에 빠져 태릉선수촌에 늦게 들어가게 되고, 뒤늦게 들어간 광수를 본 선수촌 코치는 대걸레 자루로 광수에게 체벌을 가한다. 대걸레 자루로 백 대. 그 체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광수의 몸은 분명 곤죽이 되고 말 것이다. 광수는 저항하고, 저항은 코치의 심기를 건드린다. 곧 체벌은 감정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광수는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선수촌을 떠난다.
1-2. 어머니 정애
정애는 아들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준호는 매번 4등만 하고, 정애는 준호의 성적이 아쉽기만 하다. 정애는 준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악역이 되고자 한다. 준호에게 일부러 밉살스럽게 ‘4등’이라고 부르는 모습, 준호에게 대놓고 “엄마가 싫지? 그러면 수영할 때 엄마가 뒤에서 쫓아온다고 생각하고 해 봐”라는 식의 말들을 하며 준호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정애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첫째로 아들이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애가 열정을 부을만한 것이란 이제 아들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교육열로 유명한 한국사회 수많은 어머니의 초상을 담은 것이 영화 <4등> 속에서 그려진 정애의 모습이다. 특히나, 그 자식에게 거는 간절함의 깊이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가 낮을수록 짙어진다. 출산과 육아후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의 삶만을 좇는 정애에게는 사회적 지위가 없다. 그녀가 사회속에서 온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아이들의 교육밖에 없다. 이는 한국사회의 구조, ‘여성’에게 부과되는 독박육아와 강력한 사회적 단절의 탓이다. 이런 구조 탓에 어머니 정애는 자기 자신에게서 더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을 다그친다. (자신처럼)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으면,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3. 아버지 영훈
아버지는 수영 천재이자 유망주인 광수를 만나고 이 유망주를 일찍이 알아보고 친해진다. 영훈은 광수의 성적을 묻고 광수가 높은 기록을 세웠다는 대답을 듣고는 광수에게 기대를 걸며 명함을 건네준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는 광수에게 호의적이다. 기자인 그가 수영 유망주와 친해지고자하는 목적은 어느정도 알 법하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인간관계는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알 법하다.
광수가 태릉을 박차고 전화를 건 것은 ‘영훈’의 번호였다. 광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대걸레 자루로 100대를 맞으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이 있어서 늦게 간 겁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1 주일 늦었습니다. 그리고 광수의 절박한 전화를 받은 영훈의 대답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지”였다. 그리고 이런 영훈은 후에 자신의 아들 준호가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에게 체벌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광수를 찾아가 그에게 아이에게 체벌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를 통해서 영훈은 분명하게 체벌에는 반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체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훈은 광수의 전화를 외면하는데, 이 행동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란 영화를 통해서 다 알 수 없기에 추론만 가능할 뿐이지만,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 이유를 제시해보자면, 영훈이 광수를 두둔한다고 하여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자신의 업으로 한 집안을 이끌어가야 할 영훈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비주류의 물결에 몸을 떠맡기라는 선택은 어렵다. 영훈에게는 일단 제 식구들을 먹여살려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전적으로 영훈에게만 짊어져 있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영훈은 다소간에 뻔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그 기형적인 한국 사회의 구조탓이라고 하겠다. 여성에게는 독박육아가, 남성에게는 생계유지의 의무가. 한쪽 성별에게 주어지는 전적인 의무들이 그 의무를 짊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고, 망쳐놓는다.
1-4. 준호
“형. 1 등하면 무슨 기분이에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4등 준호는 1등을 해낸 초등 수영부 선수에게 자신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묻는다. 이런 준호는 광수의 과거처럼 보이는 인물이다.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아서 시작했고, 엄마는 성적이 나오지 않는 준호탓에 애가 타서 새로운 코치 광수에게 준호의 지도를 맡긴다. 그리고 광수는 준호에게서 재능을 발견한다. 광수는 재능있는 준호를 키우고자 체벌로 엄하게 가르치며, 어린 준호는 당연히 맞는 게 싫다. 하지만, 준호는 가정으로 돌아와 어느순간 자신의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체벌을 그대로 재현하며 동생의 울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치 광수처럼.
역설적으로도 준호는 새로운 코치인 광수에게 ‘엄하게’ 교육을 받으면서, 성적은 점차 좋아진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대로 준호는 점차 코치의 체벌이 두려워 수영에서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즐거움을 점차 잃게되고, 급기야 광수의 체벌 탓에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에게 고백하고, 수영장을 떠난다.
2. 기성 사회의 구조와 구조속의 피해자들.
이 네 명의 중심인물을 정리하다보면, 영화가 그려낸 그들의 삶은 도덕적 딜레마에 의한 긴장의 장력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광수는 태릉으로 떠아냐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박장에 남고, 모욕적이고 감정적인 체벌이 싫어 태릉을 떠났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며, 정애는 자신이 악역을 맡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행을 중단하지 않고, 영훈은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준호는 마찬가지로 체벌이 싫었으면서 체벌을 대물림하고 권위적으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이 도덕적 딜레마들은 모두 어떤 원인에서 부터 발생하고 있는데, 이 인물들의 사례를 통해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그 원인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화속의 모든 문제는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어촌마을의 기성세대인 ‘형님’들이 만들어 놓은 도박판에 어쩔수 없이 빠져드는 광수, 그리고 잘못은 체벌을 통해 몸속에 교훈을 새겨야 한다는 기성의 교육 방식, 양심적인 비주류에 휘말리면 생계를 보장할 수 없는 사회속에서 생계를 위해 뻔뻔해져야 했던 영훈, 이 사회속에서 이젠 자신이 무엇도 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식들은 무엇이라도 근사한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애.
영화 <4 등>속 인물들을 통해서 “어떤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 이론에 따라 잘못된 기성의 구조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쩔수 없이 잘못된 구조를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개별적인 의미와 신념을 잃고, 사회 주류의 신념과 구조를 따르는 이들의 삶이 멀리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사회적 지위와 계급이 낮을 수록 구조의 요구와 강요에 더욱 순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이 기성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들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아픔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시대적 상처이며, 일반적인 역사적 기류에 의한 것이지 특정한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기성의 세대를 비판하는 것이아닌 기성의 사회 구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보며 무엇을 고쳐나가야 할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3.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들
영화 <4 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현재까지 앓고 있는 상처를 재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몇몇 사람들에게는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와 영화속 불합리한 상황들을 동일시 여겨볼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4 등>속 인물들은 구조에 의해서 요구된 악역을 어느정도 떠맡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상처를 지닌 자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역설적인 비인간성을 영화속에서 목격하며, 이 영화가 마냥 통렬한 사회비판의 영화로만 다가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아마도 비판만을 담은 영화였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테지만, 영화 <4등은> 사회구조의 문제성에 대한 비판만을 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한 줄기의 희망을 예술적으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 때문에 <4 등>은 조금 높게 평가하고 싶은 영화다.
구조속에서 잃어가는 것은 개별체의 순수한 특성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의 지문과 홍채가 다르듯이 인간이 가진 개별성은 인간 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이 모인 사회의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때때로 ‘구조’는 구성원들에게 특별한 지위와 책무를 떠맡기거나 강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순수한 특성, 개별성과 주체성을 잃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강요와 구조가 정의한 개체성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순수한 개체성을 추구할 때 아름답게 빛난다. 영화 <4등>에선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는데, 사회적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는 체벌이 두려워 수영장을 떠난 준호가 다시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늦은 새벽에 수영장을 찾아와 홀로 어둡과 차가운 물속에서 빛을 따라 헤엄치는 장면에서 그렇다.
이 씬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어둑한 새벽, 어둑한 물속에서 감감히 출렁이는 빛의 주변을 헤엄치는, 절대적인 어둠속 희미한 빛의 주위로 떠도는 여리고 어린 피사체의 모습이 씬에 아름답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본래 밝기만 해서는 그 밝음의 정도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인지라, 어둠속에서의 그 희미한 빛을 향해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그 어떤 희망적인 언어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언어로 읽힌다. 비록 그 빛이 준호를 수영장에서 꺼내올리는 빛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카메라에 담긴 영상은 그 결과로만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4 등>은 이렇게 구조속에서 피해받는 이들의 고통과 초상들을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회구조 내의 개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개별적인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이 지닌 순수함의 미학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희미하지만, 희미하기 때문에 강렬한 희망의 메세지를 유려하게 그려내어, 작금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비판의 메세지와 함께 영화의 미학적인 추구 또한 충실히 따르고 있는 꽤나 괜찮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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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 가져야만 꿈을 이룬 것일까?
교수님께서 좋은 작품이라고 평하면서 추천해준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와 결이 맞지 않아서 보는 내내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언젠가 다시 보면 그 의미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의문덩어리인 작품인 듯 싶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시놉시스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는 남성 4인조 밴드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불경기로 인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출장 밴드를 전전한다. 팀의 리더 성우는 고교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고향, 수안보의 와이키키 호텔에 일자리를 얻어 팀원들과 귀향한다. 수안보로 가던 중 섹스폰 주자 현구는 밤무대 밴드 생활에 희망을 버리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다. 수안보에 도착한 성우는 고교시절 밴드를 하며 꿈을 나눴던 친구들과 재회한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순수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생활에 찌든 생활인으로 변해있다.
약국을 하고 있는 민수는 돈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고, 시청 건축과에 근무하는 수철은 환경운동가가 되어있는 인기와 시위가 있을 때마다 마찰을 겪으며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다. 성우에게 음악의 지표였던 음악학원 원장은 알콜 중독에 빠져 출장밴드를 하는 폐인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성우의 첫사랑이었던 인희는 남편과 사별하고 트럭 야채 장사를 하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다. 성우는 어린 시절의 꿈과 사랑을 되새기며 이들의 변화에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여자를 좋아하는 올갠주자 정석은 여전히 여자들을 꼬시며 문제를 일으킨다. 강직한 드러머 강수는 목욕탕의 때밀이 아가씨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정석만큼의 재주가 없어 데이트 한번 변변히 못하는데. 정석이 때밀이 아가씨에게 접근한 사실을 알게 된 강수는 정석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껴 큰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대마초에 손을 대게 된다. 결국 강수는 밴드를 떠나고 밴드가 해체 위기에 놓이자 성우는 급하게 음악학원 원장을 팀에 합류시킨다. 그러나 여자 문제로 계속 골치를 앓는 정석과 알콜 중독이 심각한 원장과 팀을 이끌어가는 것은 성우에게 버겁기만 하다.
부산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현구나 마을버스 운전기사를 하게 된 강수 역시 밴드 생활을 접고 살아가는 것이 간단치만은 않다. 고단한 현실에서 어린 시절의 꿈 맞닥뜨린 성우에게 이제 선택이 남아있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빛바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없었던 긴장감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크게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이유는 긴장감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 작품을 영화관이 아닌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집이라는 환경 속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그간 봐왔던 작품들은 조금 집중이 흐트러지다가도 긴장 포인트를 잡아서 순간적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어떠한 긴장감도 불어넣지 못하는 단조로운 카메라 무빙과 정말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들. 뭔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그 무언가가 전혀 내재되어 있지 않아서 보는 내내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밴드영화에서 왜 사로잡는 음악이 없을까?
변해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큰 주제로, 그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소재로 밴드를 이용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재로 밴드를 선택했다면 적어도 밴드 씬만큼은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적어도 한 컷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치기엔 내 귀를 사로잡는 연주가 단 한 개도 없었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밴드 씬들은 그저 직장인 아침이 돼서 출근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하듯이 노래와 의상만 바뀌고, 시작하는 장면도 끝나는 장면도 똑같다. 카메라 구도도 달라지는 것이 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사람들이 나이트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밴드가 굳이 소재로 쓰였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속세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왜 밴드가 사용되어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해결되지 않았다.
과연 꿈을 버린 것일까?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엔딩이었다. 영화의 엔딩은 여수로 내려간 성우와 성우의 첫사랑 인희가 보컬로 들어오면서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며 끝이 난다. 너무나도 힘든 현실이지만 어떤 환경 속에서도 어렸을 적 꿈꿔왔던 ‘밴드’라는 굼을 꾸고 이를 지키려고 애쓰는 자를 두둔한다.
그런데 과연 어렸을 적 꿈궈왔던 것을 꼭 직업으로 선택해야만 그 꿈을 이룬다고 볼 수 있을까?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그 꿈을 버린 것으로 그 사고를 제한하는 프레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환경이 있고 어렸을 적 꿈을 모두가 이루며 살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꿈을 버.렸.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타까웠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제와 나의 가치관이 꽤 맞지 않아서, 그리고 영화의 진행방식이 나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보는 내내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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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가 상실된 시대, 여전히 부재중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노인들이 청년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피에 젖은 남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슷한 노인 혐오 범죄가 급증하고, 고령화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플랜 75' 정책이 시행된다. 75세 이상의 노인들은 백만 원으로 일주일을 지내다가 안락사하도록 권유받는다. 영화 내에서의 사회는 노인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참 이상하게도 영화에 나오는 어떤 노인도 청년 세대를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젊어서 나라에 헌신했던 그들은 여전히 성실히 근무지에서 일을 하고, 집 근처의 쓰레기를 주우며, 낡은 집에서 홀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연금을 수령해서 호화롭게 사는 노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노인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청년층이 문제일까? 하지만 영화 속 등장하는 청년 중에 그 누구도 주변의 노인에게 증오의 감정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멍하니 앉아있는 노인에게 라멘을 건네거나, 외롭고 쓸쓸한 노인을 일부러 찾아가 함께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럼에도 언론은 지속적으로 노인 혐오 범죄를 보도한다. 정작 현실에는 몇 없는 사례를, 보여주고 싶은 문제만 확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 말은 '플랜 75'라는 정책이 결국 그 누구에게도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노인도, 청년도, 이 정책에 수혜를 받는 자는 아무도 없다.
미치 씨는 함께 일하던 친구가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자 집에 찾아가 본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식탁에 엎드린 싸늘한 시체. 노인에게 죽음은 현재의 공포다. 미치 씨는 마찬가지로 독거노인인 자신 역시 언제 고독사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집은 철거 대상이고, 아무리 뛰어다녀도 일자리는 구할 수 없고, 2년 치 집세를 낼만큼의 경제적 자유도 없다. 미치 씨는 죽음이 자기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너무도 비참한 방식으로 알게 된다.
플랜 75 정책에 의해 일자리를 제공받은 청년들은 노인들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 물론 나도 늙으면 언젠가 이런 식으로 죽음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도 존재한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그보다 더한 공포는 노인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수 없다는 지독한 현실에 대한 공포이다.
미치 씨의 전화 상담사였던 요코는 고객과의 마지막 전화를 끊고 규정까지 어겨가며 개인 휴대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어본다. 아무리 신호가 가도 받지 않는 전화. 뻔히 휴대폰 기종과 맞지 않는 케이스를 끼우고 있는 것이 너무도 거슬린다. 더 이상 요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미치 씨를 직접 만났던 요코는 알고 있다. 그녀가 마지못해 플랜 75를 신청했으며, 아직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러나 휴대폰에 맞지 않는 케이스처럼,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정책에 자신을 끼워 맞출 뿐이다.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방치해야 하는 자신, 그리고 더 많은 젊은이들과 눈을 마주친다. 그녀의 눈동자는 묻고 있다.
노인을 죽이고, 죽여야만 한다고 주장한 일본 정부의 정책은 노인 혐오 범죄와 무엇이 다른가?
노인 혐오 범죄에 대한 해결책이 되었는가?
한편, 외국인 노동자인 마리아는 필리핀에서 심장 치료를 받는 딸을 살리기 위해 죽은 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죽은 자들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마리아는 비싼 시계를 건네받는다. 손사래를 치지만 같이 작업하는 사람은 한사코 시계를 마리아에게 쥐여준다.
"죽으면 이것들은 다 쓸모없어. 쓸모 있으려면 누군가가 써야만 해."
어차피 그들은 기억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 물건을 내가 쓴다는 사실조차 모를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노인들과 함께 불태우느니, 산 사람이 유용하게 쓰는 것이 낫다.
미치 씨와 함게 호텔에서 일하던 친구는 우리 모두 플랜 75를 신청해서 편하게 여생을 보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정작 호텔에서 해고된 이후에 걸려온 미치 씨의 전화를 귀찮아한다. 당연했다. 그녀에겐 돌아갈 가족이 있었으니까. 이제 내겐 돌봐야 할 손녀가 있고, 용돈을 주는 딸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에게 미치 씨는 그저 타인일 뿐이다.
마리아는 능숙하게 일본어를 하며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등, 완전히 일본 사회에 귀속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교류하고 도움을 받는 것은 함께 고국을 떠난 외국인 노동자들뿐이다. 우리는 마리아를 자연스럽게 타인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노인을 살처분해서 얻은 여유로 누군가를 돌본들,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노인을 쫓아내고 얻은 방에서 덜 늙은 노인을 재우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을까?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이 정말 당연한 일일까?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타인이고 남일뿐이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자신은 곧 죽을 것이니 이 시계를 가져가라고 하면, 당신은 받을 것인가?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시계와 자신의 것을 기꺼이 바꿔 들었던 것은, 둘 사이가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책임지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존중하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그 후에야 책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리아는 결국 유품 속에서 돈뭉치까지 발견하게 된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었지만, 누군가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절실한 건 돈이나 무조건적인 책임이 아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건 돈을 함께 쓰고 싶은 누군가이자, 의미 있는 시간이다.
영화에는 미치 씨 말고도 한 명의 노인이 더 등장한다. 바로 히로무의 삼촌이다.
인생 마지막 만찬이 될 평범한 식사를 차멀미에 게워낸 노인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너무도 초라하다. 그는 미치 씨와는 달리 어떠한 저항도 없이 죽음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눈을 감는다. 그가 수십 장의 헌혈증을 미련 없이 버리듯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조카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기억해 줄, 이제는 세상에 남게 될 유일한 사람을 만났기에.
미치 씨가 모든 걸 내려놨다고 생각한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거부한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일 것이다. 정기적으로 노래방에 갈 정도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내면 물기를 꼭 닦아내는 습관이 있으며, 볼링장에서 처음 만났던 두 번째 남편과의 추억을 회상해 줄. 그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두려웠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자그마한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해 줄 누군가를 찾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진정 사회가 개인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안락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잊히지 않고 기억해 줄 가족과 같은 존재. 그런 존재들을 지켜주어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울타리.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지금의 사회는, 국가는, 부재중이다.
히로무는 20년 만에 만난 삼촌에게 플랜 75의 신청서를 받아든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에 그의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로무는 안락사 당한 노인들의 시체가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다 한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고작해야 삼촌과 함께 밥을 차려 먹고, 살아온 삶에 대한 대화도 나누며 찜찜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전부. 이미 숨이 멎은 삼촌의 시체를 직접 화장하기 위해 모시는 것이 최선.
히로무와 요코는 제재를 받고 있다. 3촌 이내 가족의 사무는 담당해선 안 되며, 전화 상담사가 고객을 실제로 만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감정적 동요의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노인들이 죽지 않길 바라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과정에 대한 접근은 없이 결과를 해결하기 위해 급급한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영화는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청년들은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다. 노인들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의지를 가진 사람이 없다. 이러한 의지의 상실은 사람들에게 무기력증을 선사한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의지가 없는 것은, 선택인 것일까?
우리에게서 상실된 의지는, 정말 우리가 원해서 상실한 것일까? 아니라면 어떠한 부재로 인해 '상실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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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드 헤인즈의 <메이 디셈버>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6년 여교사가 당시 만 13세 남학생과 성관계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 여교사는 2급 아동 강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더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3개월 후 조기 석방되었다. 하지만 다시 남학생을 만나 관계를 가진 것이 적발되었고 최종적으로 7년 징역을 살았다. 더욱 충격(?) 적인 것은 여교사는 남학생과의 사이에서 딸 2명을 낳았다. 복역 중 첫째 딸을 낳고 가석방되었고, 두 번째 복역 중 둘째 딸을 낳았다. 출소 후 여교사와 남학생은 결혼하며 다시 한번 유명해졌다. 2017년 그들은 이혼을 했고, 2020년 여교사는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남학생과 두 딸이 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드 헤인즈의 신작 <메이 디셈버>는 위에 언급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다. 아무래도 토드 헤인즈는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해외의 경우 아동 성범죄는 아주 심각한 범죄로 취급된다. 특히나 최근의 국내 경향으로는 이 영화가 개봉조차 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개봉을 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라는 명성과 스타 배우들의 출연이지 않을까.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아동 성범죄라는 소재는 무시할 수 없는 소재인 건 분명하다.
우선 토드 헤인즈라는 감독은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긴 감독은 아니라는 걸 밝혀야겠다. 기억도 잘 나진 않지만 <파 프롬 헤븐>, <캐롤>로 이어진 멜로드라마 감독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그 사이사이엔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있지만 난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영화의 연장으로 <메이 디셈버>를 읽었다. 즉, 멜로드라마로 이 영화를 접근한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더 이상의 멜로 드라마가 가능한가.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어원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더글라스 서크로 상징되는 그 멜로드라마가 2024년에 가능하냐는 문제다. 멜로드라마는 아주 단순한 구성을 취한다. 남녀가 사랑하지만 어떠한 장애물이 그 사랑을 막는다. 더글라스 서크의 걸작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는 계급과 나이가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다. 아주 오래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문이 사랑을 가로막았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랑을 가로막을 게 없어서 죽을 병에 걸린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물론 간혹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같은 장애라는 요소나 혹은 <건축학개론>에서는 이 장르적 요소를 훌륭하게 지역 정치학으로 엮는 경우도 있다. 토드 헤인즈는 <메이 디셈버>에서 그들의 사랑을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으로 진행시키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둘의 나이차는 무려 23살이니까. 하지만 토드 헤인즈는 멜로드라마 장르 공식으로 이 영화를 풀어가진 않는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실제 사건의 여교사 그레이시라기보단 그들에게 접근한 엘리자베스다. 그레이시와 조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그 영화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게 바로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실제 인물 그레이시를 관찰하기 위해 접근한다. 극중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연기할 인물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인물을 고른다는 말을 한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더 흥미롭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거만하다. 즉,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는 당연히 뒤따르는 문제가 생긴다. 엘리자베스와 관객을 동일선상에 놓고 영화를 진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 관객들이 엘리자베스를 계속 쫓아가며 그녀가 얻는 사실과 힌트들로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게 할 것인가. 흔히 플롯을 구성할 때 아주 많이 쓰이는 방법이지만 토드 헤인즈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법적으로 그레이시는 아동 성범죄자다.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그레이시는 스물세 살 연하 남자를 서른여섯에 만났다. 그리고 섹스를 했다. 당신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이건 첨예한 문제다. 미성년자가 아니어도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심지어 할리우드 감독들과 배우들의 연인들을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 더군다나 미성년자다. 그것도 만 13세.
아마 단순히 나이차를 두고 그 연인들을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 내면을 깊게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질문에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건 사기꾼이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는 인간일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타인을 이해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토드 헤인즈는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기 위해 그레이시와 주변 인물들을 만나는 동선을 따라가는 방향과 관객들이 그레이시와 조를 따라가는 하나의 방향으로 총 두 개의 방향성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성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엘리자베스 쪽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가 등장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똥과 함께 등장한다. 혹은 엘리자베스는 똥을 들고 등장한다. 여하간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쪽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시를 연기하려고 하는 점은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태도는 어떻게 보면 오만하다. 자신이 흥미로운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전 남편과 변호사 등을 만나면서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본다. 중요한 장면으로 그레이시가 조와 처음으로 섹스한 곳에 가서 자위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메리의 학교에 가서 연기에 대한 강의를 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는데 그 강의에서 엘리자베스는 연기와 실제가 뒤섞이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기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기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엘리자베스는 배우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장면을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엘리자베스 본인을 당시 그레이시의 상황에 놓는 것에 불과하다. 즉, 그레이시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다. 인간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영화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엘리자베스란 인간은 자신의 배역을 위해 남의 남자랑 섹스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건 엘리자베스란 인간에 대한 일부의 이해다.
그런 다음 엘리자베스는 카메라와 정면으로 대응한다. 이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아주 인상적인 연기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딘가 부족한 연기라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딘가 부족한 연기를 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아니라 토드 헤인즈의 연출이다. 영화가 이끌고 온 서사와 카메라의 위치가 지금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절대적으로 관객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연기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본인이 찾던 결론에 도달한다. 그레이시가 어렸을 때 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비뚤어진 성관념이 생겼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핵심적인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사건이 인간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프로이트에게 배웠다. 최근 들어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하거나 프로이트는 사장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책을 보거나 의견을 들으면 결국 다시 프로이트 이론 안에서 그 주장을 펼치는 모습을 본다. 프로이트의 일부 이론이 틀리거나 부정당할 수는 있지만 결국 다시 프로이트라는 점은 아직까지 분명하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토드 헤인즈가 함정을 파두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성추행의 결과로 그레이시가 조와 섹스를 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훗날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일은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비웃는다.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영화를 찍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연기하는 그레이시는 마치 삼류 연기자가 연기하는 에로 영화 같은 느낌이 풍긴다. 심지어 사실관계조차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촬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손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다는 걸 밝혀냈으며 인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부분을 밝혀낸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업적은 엄청난 것이지만. 하지만 분명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무엇의 항목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그레이시와 조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그레이시와 조는 나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냉장고를 열고 소시지가 없다는 사실에 그레이시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심각한 음악은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느껴진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은 조가 자려고 누워있는 그레이시 옆에 누웠을 때 그레이시가 냄새난다고 씻고 오라고 이야기한다. 극장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지만 단순히 웃기는 장면은 아니다. 이 전 장면이 조가 TV를 통해 세수를 하는 여자가 나오는 광고를 보았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그 장면과 이 장면은 같이 연결해야 한다. 조는 왜 깨끗하게 세수하는 여자를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일까. 그리고 그레이시가 씻으라고 말할 때 왜 상반신에 물만 살짝 묻히고는 마는 걸까.
조의 그런 심리에 대해 알 턱이 없지만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조와 그레이시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더럽다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조는 자신이 더럽지 않다는 걸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더럽지 않기 때문에 씻을 필요가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이는 추론이다.
내가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한 가지는 영화가 시작하고 난 다음 그레이시와 조가 마주치는 장면이다. 부엌에서 둘이 마주쳤을 때 쇼트의 배열이 약간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확신했던 것은 그레이시와 조의 대화를 샷 리액션 샷으로 이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조와 그의 아들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그레이시는 정면에 가까운 위치에 카메라가 위치하지만 조를 보여줄 때는 아들의 정면 가까운 곳에 카메라가 위치한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그레이시와 조가 이야기를 해도 둘의 시선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영화가 그 시선을 일치시키는 장면은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전 남편을 만났을 때나 변호사를 만났을 때 완전히 일치시킨다. 또한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에서 시선은 일치한다. 시선을 일치시키는 문제는 보편적인 영화에서는 아주 익숙한 문법이지만 이러한 문법 자체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감독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는 아들과 대화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의 주변 인물들과 대화를 한다. 하지만 그레이시와 조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둘의 시선이 일치하는 부분은 영화 후반부에서 조가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리지 않았냐고 물을 때다. 조가 대화를 시도하자 카메라는 둘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이내 그레이시는 대화를 거부하면서 장면은 끝난다.
그레이시는 딸 메리의 졸업식에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데 영향을 주고, 자신에게 케이크를 주문하지 않게 된 이웃이 생기자 오열한다. 이따금 이유 없이 울기도 한다. 우리는 그레이시와 조 사이에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 문제가 명확하게 어떤 건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레이시는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앞부분 소시지가 없을 때의 음악과 딸 메리의 의상을 고르는 장면을 보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레이시의 문제가 명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몇 부분으로 그녀를 추론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버지와 굉장히 서먹하다. 아버지를 만나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보면 그 또한 추론할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우린 알 수가 없다.
관객들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와 조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실제로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의 전 남편 대화를 살펴보면 전 남편이 당시 어떤 감정이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건 그의 입을 통해 증언되기 때문이다. 변호사 또한 마찬가지다. 변호사는 그레이시를 보고 범죄자라고 일갈하며 그레이시는 당시 별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그렇다. 그레이시는 조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별다를 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 상태를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그레이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 그레이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거나 그레이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상식이 잘못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즉 36살의 여교사가 13살의 남학생을 사랑하고 그래서 섹스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고, 복역 후 그와 결혼을 했으며 이후로도 같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나탈리 포트만의 독백 연기도 아니고 마지막 장면의 엘리자베스의 오만함도 아니다. 조가 지붕에서 아들과 함께 대마를 피우는 장면이 왜 잊히지 않을까. 그건 아마도 만 13살의 아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감정이 타인에 의해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가 되면서, 자신의 사랑이 범죄 행위가 되며 정상적인 성장을 밟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아버지가 되어서야 자신의 10대를 다시 새롭게 경험하는 그 순간이 인상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장면은 조와 엘리자베스의 섹스다. 이 장면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영화 속에서 그레이시는 어떤 변화도 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화하는 건 조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나타나고 나서 조는 심경의 변화를 느낀다. 아니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렸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조는 처음으로 그레이시에게 자신이 너무 어렸던 거 아니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부인하는 그레이시의 행동과는 다르게 조는 그 손가락질에 대해 그레이시와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조는 10대 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중이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한다. 엘리자베스는 명백하게 자신의 역할을 위한 섹스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레이시의 입장에서 조를 품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영화는 마치 성기 삽입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연출했다.
하지만 조의 입장은 약간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섹스를 했다. 이 또한 추론일 뿐이지만 천천히 다시 한번 살펴보자. 엘리자베스는 지금 서른여섯의 그레이시를 연기하는 입장이다. 즉 당시의 그레이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 13세 이후의 삶을 다시 겪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의 편지를 꺼내보고 딸의 졸업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는 당시의 그레이시와의 섹스를 다시 해본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물론 추론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의 인서트로 계속 등장하는 나비와 애벌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비가 나온다. 그리고 중간에 등장하는 인서트에서는 애벌레가 등장한다. 생각해 보면 순서가 뒤집혀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므로 이미 나비가 된 조가 다시 애벌레부터 시작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의 변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밖은 부드러운 빛이 내리쬐고 안은 어두컴컴하다. 바깥은 녹음이 드리워진 공간이다. 이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처럼 느껴진다. 인상주의가 등장했을 때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리다 만 그림이거나 혹은 그림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작자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비판이 쏟아졌었다. 미술사 고전기에 원근법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모방이라는 아주 중대한 부분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세상의 비밀을 파헤친 것만 같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어 인상주의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의 인상들을 그리면서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나는 이 점이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하는 태도가 결국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도 있었을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멜로드라마의 감독 답게 토드 헤인즈는 그레이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탁월하게 연출했다. 특히 그레이시가 엘리자베스에게 화장해 주는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장면은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시 모두 옆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빛을 정확하게 볼 수는 없다. 이는 분명 엘리자베스의 독백 장면과 대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낀다. 반면 그레이시는 엘리자베스에게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느낌은 약하다. 즉 이 장면은 분명한 디렉팅이 들어간 것 같다. 이 순간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에게 입을 맞출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 충동의 감정에 솔직했다면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시를 이해할 수 있는 뭔가를 얻지 않았을까. 물론 난 엘리자베스를 모르지만 말이다.
2024년 03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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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SF 소설로 돌아오는 드니 빌뇌브
최근,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SF 영화 <듄>을 통해 국내 역주행의 신화를 쓴 '드니 빌뇌브' 감독이 또 다른 SF 작품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습니다.
<듄>이 코로나19의 여파 속에서도 전 세계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였기에, 워너 브라더스사는 <듄 2>를 2023년 10월 20일에 개봉할 예정이라 밝힘과 동시에 '드니 빌뇌브' 감독이 후속편도 연출하게 될 것이라 전했는데요. 개봉까지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만큼,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전 인터뷰를 통해 2022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듄>이 SF 대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이미 캐스팅 및 기타 다른 부분의 구상을 끝내놓은 상태이기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가능성을 내비쳤는데요.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다시 좋은 소식을 알리며, 전 세계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아서 C. 클라크'가 1973년 발표한 장편 SF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가 될 예정인데요. 앞서, 원작에 대한 판권을 '알콘 엔터테인먼트'가 따내며 영화화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알콘 엔터테인먼트'는 <블레이드 러너>의 판권을 가진 제작사로 '드니 빌뇌브' 감독과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통해 호흡을 맞춘 이력이 있는 제작사인 만큼,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원제: Rendezvous With Rama)는 1973년 처음 출판된 소설로, 2130년대를 배경으로, 태양계에 진입하는 초대형 외계 우주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라마'라고 이름 붙여진 우주선의 내부를 조사하는 인간 탐험가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세밀하고 장엄하며 경이롭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요. 출간 당시, 휴고상, 네뷸러상, 캠벨상, 로커스상을 비롯해, 주피터상, 영국과학소설협회상 등 SF 분야의 상을 휩쓴 최고의 고전이기도 합니다.
'아서 C. 클라크' 작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한 SF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 작가로도 유명한데요. '드니 빌뇌브' 감독이 꾸준히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꼽아온 만큼, 아서 클라크의 도 다른 걸작의 연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부분입니다.
현재, 요 네스뵈의 소설 <아들>을 원작으로 한 HBO 시리즈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새 영화를 기다리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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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 톱니바퀴에 깃든 낭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뛰어난 금고털이 실력을 지니고도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루트비히 디터(마치아스 슈바이크회퍼)'.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그의 실력을 증명해보라는 의문의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 속 주소를 찾아간 디터는 우연히 금고털이 대회에 참여하고,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다. 이에 몰래 디터를 관찰하던 '그웬(내털리 이매뉴얼)'은 그에게 접근해 전설로만 전해지던 네 개의 금고를 터는 범죄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고, 기계적인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디터는 새로운 모험을 약속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디터는 그웬을 비롯한 팀원 '브래드(스튜어트 마틴), '코리나(루비 O. 페)', '롤프(거스 칸)'와 함께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틈을 타 전설이 될 은행털이에 나선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첫 넷플릭스 작품인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공개 후 호불호가 강하게 갈렸던 작품이었다. 좀비 영화나 블록버스터에게서 기대하는 서스펜스나 액션의 비중은 적었던 반면,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감독 본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고백록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성애에 주목했다.
또한 그 논의를 확장시켜 사회적 차원에서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적 시각도 보여줬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법한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제우스'라는 신의 이름을 빌린 좀비에게 넘기거나 기껏 훔쳐낸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잭 스나이더 감독의 아이디어에 동의한다면 <아미 오브 더 데드>는 나름대로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을 갖추지 못한 채 실패한 낯선 작품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상은 <아미 오브 더 데드>의 프리퀄이자 잭 스나이더가 각본과 제작을 맡은 신작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작에서 열쇠공이자 금고털이범으로 등장했던 루트비히 디터의 이야기를 다룬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금고, 신화, 그리고 낭만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통해 <아미 오브 더 데드>의 콘셉트를 충실히 따라간다. 우선 영화의 중심 소재이자 루트비히 일생의 목표인 금고는 루트비히의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금고의 역할이듯이 은행원인 디터 역시 철저히 금고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특히 규칙적인 톱니바퀴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금고처럼 그의 삶도 철저히 기계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디터는 금고의 잠금장치를 여는 일을 가장 좋아하며, 그의 꿈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네 개의 금고를 자신의 손으로 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를 담은 유튜브의 조회수는 0이고, 유튜브 밖의 세상에서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커피와 빵을 먹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마치 <모던 타임스>에서 컨베이어 벨트 속을 돌아다니던 찰리 채플린이 그러했듯이, 디터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하나의 부품이 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원으로서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도 자신의 업무나 삶에서 아무러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디터의 모습을 보면 작중 금고가 돈의 무가치성, 무의미함을 보여주며 현대 사회에 대해 통렬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줬던 전작의 의미를 온전히 이어가는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창구에 앉아 있는 그가 창구 앞에서 빨리 돈을 달라며 극도로 흥분한 할머니 고객과 뉴스 속보에서 피와 살을 탐하는 좀비의 모습을 겹쳐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금고는 그 존재 자체로 이 작품이 전작처럼 신화적인 구성과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 힌트는 금고의 이름에 있다. 작중 등장하는 네 개의 금고는 각각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속 네 막의 제목인 라인골트(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üre), 지크프리트(Siegfried), 괴터데머룽(Götterdämmerung)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이 금고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특히 각 금고를 해체하기 전후로 오페라 내용이나 모티브와 유사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라인골트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훔친 알베리히를 디터가 자신과 일치시킨다거나, 발퀴리에서는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연상시키는 디터와 그웬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는 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형식에서도 신화적인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설적인 네 개의 금고를 만든 장인 한스 바그너의 이야기를 '옛날 옛적에 뮌헨이라 불리는 아주 먼 곳에(once upon a time, in a farsaway land called Munich)'로 시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문구는 현대의 신화라 불리는 <스타워즈>의 상징과도 같은 오프닝 타이틀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에(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를 연상시킨다.
이에 더해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잡아서 항상 꿈꿔오던 모험에 나서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곧 은행원이 아닌 금고털이로 거듭나는 디터의 서사는 신화적 이야기의 전형에 충실하다. 이는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서스펜스나 볼거리 대신 아버지와 딸의 가족사에 더 집중했던 것처럼 돈을 두고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하이스트 장르의 쾌감 대신 다른 것에 주목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바로 기계처럼 살아가던 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찾고, 진짜 살아있는 인생을 누리는 낭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웬의 등장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연으로 시작해서 운명적인 로맨스로 발전하는 디터와 그웬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 역시 낭만으로 가득한 꿈과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둘은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가슴 뛰고 흥분되는 미래를 기대하며, 그런 그들에게 금고 속에 들어있는 거액의 돈은 단지 전설로 여겨지던 금고를 실제로 여는데 성공했다는 증표에 불과하다. 이처럼 돈보다 인생의 목적을 쫓는 연인의 이야기는 돈을 매개로 그웬과 관계를 맺어왔던 브래드의 삶과 대비를 이루면서 더욱 가치 있게 빛난다.
또한 낭만이라는 키워드는 디터의 금고털이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그에게 금고털이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대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시에 기계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쾌감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디터 본인이 금고 잠금장치나 다름없던 인생에서 깨어나듯이, 금고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자본주의의 방패막이었던 금고는 디터가 떠나는 낭만적인 모험의 일부이자 목적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디터는 항상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는데, 이 대목이 마치 그웬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모험과 낭만을 불어넣었듯이 디터도 굳게 닫힌 금고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보다 이상과 꿈을 좇는 낭만으로 가득한 디터의 이야기를 그가 전편에서 처음 등장한 장면과 연결시킨다. 즉, 그의 이야기는 네 개의 금고 중 유일하게 만나지 못했던 마지막 금고인 괴터데머룽을 만나고 그의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금고의 이름이 '신들의 황혼'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로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좀비들이 가득한 도시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도 그 황혼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이나 영웅들처럼 그의 모험에도 낭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루트비히의 디터의 삶은 신화의 정서가 함축적으로 응축된 이야기로 끝난다.
문제는 전작의 콘셉트만큼이나 똑같이 이어받은 단점으로 인해 잭 스나이더가 보여주고자 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매력을 살리는 대신 그 틀만 빌려왔듯이 이번에도 하이스트 영화라는 장르의 틀만 빌릴 결과 장르 영화,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다른 하이스트 영화들의 존재를 직접 언급하며 쿨한 척하는 대사는 그들이 언급한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형화된 캐릭터들의 존재 때문에 그다지 효력이 없다.
또한 범죄 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해당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편집의 경우, 이미 숱하게 사용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가이 리치 감독의 작품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지도 못한다. 인터폴과 그웬 일행 사이의 악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쫓고 쫓긴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추격전에서도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워낙 분량이나 비중이 그웬과 루트비히한테 쏠려 있다 보니 이들의 대립, 긴장, 갈등이 설 자리가 없다.
이에 더해 시리즈라는 관점에서도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속편까지 제작 진행 중인 <아미 오브 더 데드> 세계관은 엄연히 좀비 영화 시리즈물이다. 문제는 그 특징이 이번 작품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좀비의 존재가 뉴스를 통해 등장하고 영화 전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기는 하나, 디터의 악몽과 같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좀비는 그저 배경 설정, 상황 설정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데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전편과 연동되는 대목들이 등장하고 디터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느껴질 장면이나 대사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미 본편의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이들이 프리퀄의 장점이 되거나 필요성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본편의 장단점을 쏙 빼닮았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에 계속 애정을 갖고 남아있을지, 아니면 큰 기대와 미련 없이 시리즈에서 하차할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스케일이 작아진 것만 빼면 본편의 장단점, 메시지와 주제의식까지도 쏙 빼닮은 프리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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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DUNE)' 리뷰 - 영화 세계관 및 스토리 요약정리(*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동명의 원작소설 기반 분석 해석
- 베네 게세리트, 초암공사, 퀴사츠 헤더락 등 정리
- 영화 정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감독: 드니 빌뇌브
각본: 에릭 로스, 존 스페이츠, 드니 빌뇌브
원작: 프랭크 허버트의 듄(1965)
제작: 드니 빌뇌브, 케일 보이터. 메리 페어런트,조 카라치올로 주니어
주연: 티모시 샬라메, 제이슨 모모아 외
촬영: 그레이그 프레이저
음악: 한스 짐머
촬영 기간: 2019년 3월 18일 ~ 2019년 7월 26일
제작사: 레전더리 엔터테인먼트,워너브라더스
수입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개봉일: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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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적인걸 : 흑사병의 비밀> 예고편
흑사병이 창궐한 병주성 남쪽.
병주성 도독부는 그 즉시 병주성에 봉쇄령을 내리고
발길이 묶인 백성들은 성안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데...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명탐정 적인걸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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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히어> 메인 예고편
인생이라는 대단한 모험 그 모든 순간은 여기서✨ [히어] 메인 예고편 공개📸 2025년 2월 메가박스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