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03 08:36:48
[JIFF 데일리] 낙인 찍힌 삶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다큐 두 편
〈거리의 소년 사니〉,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거리의 소년 사니〉
국제경쟁/다큐멘터리
〈거리의 소년 사니〉는 노동계급 남성성이 어떤 길을 걷는지에 관한 놀랍도록 흥미롭고 흡인력 강한 다큐멘터리다. 두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소년을 12년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8살 소년 사니는 거침이 없다. 그와 친구들은 “언젠가 경찰에 체포될 거예요”라는 말을 일상적 농담으로 주고받는다. 머저리, 밑바닥 인생, 부랑자, 쓸모없는 거리의 아이들……. 사니와 그 친구들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지만 이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한결같다.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성장하리라는 것. 영화는 이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 허구적 빈약함을 폭로한다.
사니는 늘 ‘강함’을 열망한다. 영화에는 그가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니의 일상을 보면 그에게 ‘강함’은 ‘거칢’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위험천만한 주행을 일삼고, 도무지 ‘장난’으로 보기 힘든 장난을 일삼으며, 학교 교육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사니와 친구들. 그러나 청소년이 된 사니 무리가 털어놓듯 그들을 강해 보이게 해주는 ‘나쁜 짓’의 의미는 ‘어린아이의 환상’, ‘어른이 되기 싫다’는 불안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거칠고 투박한 남성성을 과잉 수행하는 데서밖에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강함’을 갈망한다. 이들의 ‘강함’은 실은 사회적 존재로 존중받을 수 없다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행한 것은, 사니가 자신이 뽐내는 거친 남성성의 허약한 이면을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현실의 무게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장난을 종종 벌이던 사니 무리는 기숙사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 사건은 사망 사고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 ‘비행 청소년’은 이렇게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사니는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지만 재판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닥쳐버린 비극적 운명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판이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 이 모든 게 사니 개인만의 책임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방식으로 노동계급 출신 남자아이들이 마주하는 남성성의 비극적 구조를 조망케 해주는 영화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게스트 시네필/다큐멘터리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게스트 시네필: 아르벨로스 필름 데이비드 메리엇’ 섹션 상영작이다. 이 세션은 저명한 영화 복원, 아카이브 활동가가 직접 선정한 영화를 선보이는 섹션으로, 이번에는 캐나다의 영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캐나다 인터내셔널 픽쳐스의 데이비드 메리엇이 영화를 선정했다. 메리엇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전통이 강한 캐나다에서도 최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고 소개했다.
‘캐나다 매춘의 성지’로 꼽히는 밴쿠버의 데이비 스트리트 성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촘촘하고 긴급하게 정치화하는 이 영화의 제작기가 흥미롭다. 애초에 두 감독은 제작사에게서 ‘도덕적 창녀’, 즉 생계 등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성노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다루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거부하고 독립영화로 제작해 성노동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과 노동을 담아냈다. 영화에는 성 구매자들의 얼굴과 흥정 등 어떻게 촬영했을지 궁금한 장면이 많은데, 성노동자들이 몰래 마이크를 달고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는 당시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를 비추며, 경쾌하고 발랄하게 시작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에는 성노동자들의 삶에 관해 영화가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겼다. 호객과 흥정 장면, 가족 인터뷰, 일하며 겪은 폭력, 그들 사이의 갈등, 일상적인 불인과 미래의 압박, 마약 문제 등등. 영화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멋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독 인상 깊다. 서로 다른 성노동자들은 왜 자신이 이 일을 시작했는지 말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누군가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순전히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즉 영화는 ‘동정할 만한’,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사연을 맨 앞으로 내놓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자발적 선택’에 구조적 맥락이 있다는 점도 깊이 있게 다룬다. 성매매/성노동에 대한 기존 통념을 계속 비껴가면서도 그들이 일터와 삶에서 만들어내는 생기와 활력을 자연스레 담아낸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살펴보자. 데이비 스트리트에는 크로스드레스, 트랜스젠더, 시스젠더 여성, 게이 등등이 구역을 나누어 일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폭력적으로 구는 성구매자가 있으면 함께 나서 동료를 보호해주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연대하며 서로를 지켰다. “있으면 안 될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죠.” 도덕 분류 체계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낙인을 비틀며 자신들의 현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재의미화한 말이다. 사회에 ‘불온하다’ 낙인찍힌 존재들의 모든 연대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다.
영화의 또 다른 감동적인 순간은 캐나다 최초의 성노동자 집회 장면이다. 성노동 비범죄화와 미성년자 성매매 금지, 처우 개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요구하며 당당히 행진하는 성노동자이자 활동가들에게서 ‘절망적으로 낙관’하는 태도가 갖는 힘을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큐레이션한 메리엇에 따르면,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큰 화제를 모았으나 정작 성노동자들은 86년 엑스포를 계기로 다른 곳으로 쫓기듯 이주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이 절망 속에서도 낙관으로 벼려낸 정치적 저항에 접속한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에 나오는 온갖 ‘도착자’, ‘변태’에 끝까지 마음을 열지 못하겠거든 영화에 출연한 성노동자 어머니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 좋겠다. 그녀는 한때는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트랜스 여성이자 크로스드레서로 성노동하는 미셸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늘 상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규범적 존재론에서 벗어난 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거나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관점이든 포괄적 휴머니즘의 관점이든, 성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학을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을 좇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생기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노동' '퀴어' 등의 말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적 비타협주의자의 심장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두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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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뇨 아빠가 인간이었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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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타공인 '지브리 스튜디오' 혹은 '미야자키 하야오' 덕후다. 일본 방송에 지브리 매니아로 두 번이나 방송에 나간 적도 있다.
영상을 보면서 환경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클지도 모른다.
<벼랑 위의 포뇨>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후에 4년 만에 들고 온 신작이었다. 은퇴한다고 했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나온 것도 기대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캐릭터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줄까 매우 기대가 되었다.
포뇨를 본 뒤, 어른을 위한 동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팬과 평론가들에게는 실망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귀여운 포뇨와 소스케 때문이 아니라 포뇨의 아빠 때문이었다.
<벼랑 위의 포뇨>는 호기심이 어마어마한 물고기 소녀 포뇨가 육지의 소년 소스케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마 인어공주를 재해석하여, 혹은 모티브로 하여 만든 이야기일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다른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과거로의 회귀', '자연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그 깔려있는 스토리는 포뇨의 아빠가 끌어가고 있다. 포뇨의 아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연히 '후지모토'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불러줘야겠다.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리뷰라고 하지만 상상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 같다. 후지모토는 인간이었다. 아니, 아직까지 바닷속에서 편하게 숨을 쉬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애를 잃고 바다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인간인 소스케를
좋아하는 딸 포뇨가 육지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그는 딸바보, 극성 아빠라며 수많은 욕을 먹었지만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이는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포뇨의 등장은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들은 바다에 쓰레기를 마구 버렸고 그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배는 그물을 이용해 바다의 바닥을 긁어낸다. 쓰레기만 치우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다 보니 바다의 생물들은 쓰레기 때문에 피해를 받고, 쓰레기를 치우는 과정에서도 또 피해를 받는다.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후지모토가 육지로 올라갔을 때 깨끗한 물을 주위에 뿌리는 행동이나(물론 제초제로 오해받았지만) 소스케와 차를 타고 가는 포뇨를 따라가면서 바닷속의 쓰레기에 계속 맞는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도 있다. 후지모토가 더러워진 모래와 뻘에 질색팔색 하는 것은 덤이다.
후지모토가 말하길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는 언제부터 인간이길 포기했고, 언제 바다의 여신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정말 사랑에 빠진 것일까? 이는 그는 말한 것으로 조금은 추론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물과 공기는 더럽고 인간은 어리석은 생물이다. 인간은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갈 뿐이다."
"나도 한때는 인간이었고, 인간을 그만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
아마도 그는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바다의 여신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으로 인해 죽을 위기였으나 바다의 여신이 구해줬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포뇨의 현재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는 그는 떨린다며 혼잣말을 했다. 그 떨림은 과연 설렘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 의문 역시 그가 바다의 여신을 만났을 때 그녀의 손길이 그에게 닿았을 때 확신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모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두려움 혹은 경이로움에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생명의 물을 먹으러 바다 생물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바다의 결계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걱정한다. 후지모토는 인간이 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인간이 너무 우점해 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자연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이 바다에서 생명을 빼앗아 간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지구를 캄브리아기로 되돌리기 위해 생명의 물을 모아놓는 우물의 방의 번호는 1907이다. 1907년은 환경운동의 역사에 한 축인 '레이첼 카슨'이 태어난 해이다. 방 안에 있는 병에 쓰인 숫자인 1957년에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민간 환경운동 단체인 '시빅 트러스트'가 만들어졌고, 세계기상기구가 주관하여 체계적으로 오존량을 관측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병의 숫자인 1871년은 찰스 다윈은 식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친구인 조셉 달톤 후커에게 진화론의 가설을 편지에 써서 보낸 해이면서 '인간의 유래'라는 책을 출판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후지모토가 언제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후지모토는 환경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이 있던 해의 생명의 물을 소중히 모아 놓았을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도 아버지이기는 한 것인지 자녀인 포뇨의 성장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바다의 여신을 만난다. 포뇨가 소스케의 피와 오랜 시간 모아놓은 생명의 물을 먹어서 파워업되었다고도 알린다. 5살의 사리 분별 못 하는 않는 어린아이에게 무서운 무기를 맡긴 것 같은 말 그대로 긴급상황이다.
하지만 바다의 여신은 딸과 인간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마법의 힘이 가득 차 있고, 데본기의 바다로 돌아간 것 같다며 그 상황을 즐기고 좋아한다. 만약에 후지모토가 바다의 여신을 사랑해서 오로지 그 이유로 생명의 물을 모으고 있었다면 여신의 이 한 마디는 뿌듯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뇨를 걱정한다. 인간이 싫다면서도 '브륀힐트'라는 딸의 이름을 놔두고 소스케가 지어준 이름인 '포뇨'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을 알 만도 하다. 후지모토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한다. 실제로 인류애를 잃은 것이라면 그는 세계의 멸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딸 덕분에 그 멸망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 다만 사람으로 인해 훼손된 자연이 그 옛날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고 있었다.
딸이 사랑을 얻는 것에 실패해서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도 후지모토다. 엄마인 바다의 여신은 '원래 물거품이었는데 뭐'라면서 아주 쿨하게 실패해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남은 자식이 많더라도 오래된 마법에 자식의 생사를 결정하도록 하는 건 너무 매정한 엄마다.
소스케와 포뇨를 약속의 장소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은 속아서 갔다고 했지만 후지모토는 그냥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회유책을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다리가 나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이동하는데 더 편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데 머리 좀 길고, 스모키 화장을 했고, 화려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했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한 후지모토는 가엽기까지 하다. 그리고 요놈 딸내미 아무리 남자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아빠한테 물이나 뱉고 있으니 약간의 무력은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지구에 가까이 온 달 때문에 지구의 중력은 달라졌고, 쓰나미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 포뇨 자체가 쓰나미라는 해석이 많다.
결국 소스케의 사랑이 포뇨를 지켰다. 그리고 지구와 세계를 지키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인간의 소스케의 배를 찾아주고, 인간이 소스케에게 악수를 청한다. 지상의 공기와 땅을 더러워하던 그인데 정말 큰 변화이다. 인간이길 포기하기까지 꽤 많은 노력을 들였다는 그이기 때문에 사실 안타깝기도 하다. 그는 쓰나미 즉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위대함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을 것이고 과거로의 회귀가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회복을 위해 '급진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 후지모토는 한발 물러섰다. 딸의 행복을 위한 아빠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으나 남편을 부르는 리사의 오른쪽에 보이는 산에 꽂힌 송전탑을 보면서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냥 해피엔딩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캄브리아기로 바꾸려고 했었는데, 그보다 이후 시대인 데본기로 바뀌어도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안 후지모토는 다른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건대 후지모토는 환경운동가였던지, 생물학자였던지, 역사학자였을 것이다. '별의 중력장 붕괴 제2단계' 같은 걸 얘기하는 걸 보면 과학자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가 인류애를 잃고 지구와 바다를 과거로 회귀시키고 싶게 된 사건은 결국 알지 못한다. 사실 지금의 행보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바다의 여신이 심심할까 봐 혹은 자신의 마력을 높이기 위해 후지모토에게 일거리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보니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바다의 여신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인간들 중에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후지모토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으면 가족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만큼 의외로 외로운 싸움이기 때문이다.
후지모토를 포함한 이 온 세상 환경운동가들, 힘내시고 평화가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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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저튼>, 성(sex)에 무지한 우리들
성(sex)에 대한 의혹, 두려움, 거부감 이런 것은, 많은 작품 속에서 <나 자신 조차 내가 진정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모습>,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는'진짜’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등으로 나타나곤 한다.
결국 ‘성(sex)’에 대한 의혹이나 거부감, 두려움 등은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나는 나의 소망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의 선택은 내가 제대로 나의 소망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등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성에 대한 의혹이나 두려움, 거부감 등을 가진 인물들은 작품속에서 종종 상대방과 계약관계를 맺거나, 가짜 연극 무대를 펼쳐 주변 사람들을 눈속임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 조차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들은 쉽게 '계약 결혼, 계약 연애', '~하는 척'하는 거짓 연극을 쉽게 시작한다.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던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성에 무지한 처녀'의 원형적 캐릭터를 간직한 여주인공 '다프네', 전형적 난봉꾼이자 잡놈의 캐릭터를 간직한 남주인공 '사이먼', 이 두 사람 간의 '계약연애'는 성에 무지하고 성에 대한 두려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두 사람이, '성'을 매개로 진짜 자기 자신의 소망을 깨닫고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먼과 다프네
<브리저튼>은 '성에 대한 의구심과 두려움의 극복, 성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곧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문제, 나의 진짜 소망을 왜곡없이 들여다보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이먼과 다프네의 관계가 '가짜'에서 시작하여 '진짜'가 되기까지, 이 작품은 ‘성(sex)'이 갖는 두 가지 측면, 즉 <착취와 억압의 매개가 되기도 하는 속성>과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되는 속성> 모두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이먼
사이먼은 ‘성(sex)'이 갖는 부정적 측면, 왜곡된 틀에 갇혀 있던 인물이다. 성을 착취와 억압의 도구로만 여긴다. 그것이 갖고 있는 생명근원적 힘, 사랑의 힘은 보지 못했다. 이 또한 성에 대한 두려움과 의구심, 의혹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누구보다 성(sex)을 잘 안다고 자부했을 잡놈같은 인물이었으나, 사실 그 누구보다 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성에 무지한 존재였다.
다프네
다프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에 대한 그녀의 무지, 두려움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똑부러지고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진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그녀의 성에 대한 무지는 '가짜'를 '진짜'로 믿게 만든다.
성(sex)을 통해 성의 긍정적 속성을 새롭게 깨달아 나가는 두 사람
성에 대한 왜곡, 성에 대한 무지는, 사이먼과 다프네가 진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성에 대한 왜곡과 무지는 바로 이 성(sex)을 통해서만이 극복할 수 있었다.
유독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이 화제가 된 <브리저튼>. 이는 두 사람 관계가 가짜에서 진짜가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다. '성'에 대한 왜곡과 무지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시간. 가짜에서 진짜가 될 수 있었던 시간.
나 자신이 진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의 선택이 나의 소망에 따른 것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종종 그 소망은 ‘가짜‘, ‘거짓‘, ‘~하는 척'이기도 하다.
여러 작품 속 '계약 연애', '계약 결혼' 같은 설정이 종종 나온다. <브리저튼>도 그렇다. 계약연예로 시작한다. ~하는 척, 가짜로 시작한 관계이다. 이 '계약 관계(연기하기)'의 설정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실제 모습과 많이 닿아 있다. 진짜 나의 모습은 감추고, 진짜 나의 소망은 억누르고, 진짜 나의 모습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짜 소망이나 가짜 모습을 내세워서 관계를 맺는 것!
그러한 관계는 십중팔구 ‘지속'에 실패하게 된다. 결국 수많은 작품들은 말한다.
“내 안의 감추어진 소망이 드러나고, 나 스스로 그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짜 인생은 시작될 수 없다고!"
수많은 작품 속에 '계약 연예', '계약 결혼' 또는 '~하는 척 하는 가짜 연극판' 같은 설정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단번에, 자신의 진짜 소망을 알아차리거나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에! 자신 조차도 자신을 속이기가 쉽기에! 나 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다프네와 사이먼은,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하는 척'하는 '가짜 연극 무대'를 거치면서, “진짜”를 발견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부터 “진정한 관계의 지속”도 가능해진다! 더 이상 연극이 아닌! 진짜 자기 인생 속 진짜 관계가!
우리 모두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연기’하는 과정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단계일지도!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나의 진짜 소망을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는 <가짜 판>, <연극무대>가 필요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문학 행위 자체가 (문학을 감상하고 체험하고 생산하는 그 모든 행위가) 우리에게 일종의 안전한 <시뮬레이션> 판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남기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이야기를 교류하는 모든 행위가! 한결 안전하게 감추어진 나의 진짜 욕망, ‘진짜 나’의 모습을 탐색할 수 있는 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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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웨이 스페셜(2020)> 리뷰
인간은 유사 이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 삶에 유통기한이 뚜렷이 새겨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절망, 그럼에도 남겨질 이들을 떠올리며 점차 무력해지는 몸뚱이를 끝끝내 움직여야만 하는 운명에 대한 비참함과 서글픔.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드는 숭고함 따위를 어찌 감히 일반화할 수 있겠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노웨이 스페셜>은 죽음을 목전에 앞둔 서른네 살 창문 청소부 존(제임스 노튼)과 그의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의 일상을 그렸다. 언뜻 보면 의젓한 네 살 아들과 자상한 아버지의 단란한 나날 같지만, 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 부자父子의 삶을 자꾸만 촉박하게 만든다. 특히 창문을 닦는 일조차 점차 버거워지는 존은 아들 마이클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나날에서 얼룩을 지우는 막중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그는 영국의 입양법에 기반한 공공기관을 통해 적당하고 새로운 가정을 소개해주려 애쓰지만 그 일은 존의 예상보다도 힘들기만 하다.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배경이 북아일랜드이며 위에서 말했듯 아버지 존의 직업이 창문 청소부라는 점에서 <노웨어 스페셜>은 소외된 자들을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존이 공공기관을 통해 입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은 갈등들을 겪는 장면이 함께 있어서, 나는 영화를 감상하던 도중 켄 로치를 몇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영화는 켄 로치의 것보다는 죽음을 앞둔 젊은 아버지의 심리라는 사적인 영역에 보다 집중한다.
입양 희망자에 대한 면담, 적절성 평가, 사무적인 태도 등이 비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존에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쇼나(에일린 오히긴스)가 있다. 마이클을 입양하고자 하는 이들은 여럿이며 나름대로 (자신들이 믿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 정부가 개입해 입양 희망자들을 분류하는 것이 아주 그른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일부 들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존이 마이클의 예비 가족을 만날 때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존의 내면 변화이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입양이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담는다. 또한 존은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아들의 가족을 대신 선택해 줄 만큼, 마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존의 모습은 그가 진실로 마이클을 사랑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그는 끔찍하리만큼 진실된 사랑을 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가슴 아픈 성취를 획득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존은 자신에게 닥친 허무를 수용한다. 아이에게 자신을 그저 창문닦이로 소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굳이 뿌리를 알려야 하느냐고 손사래를 쳤던 영화 초반과 달리 존은 미래의 마이클이 열어볼 수 있도록 기억 상자를 마련한다. <노웨어 스페셜>은 전반적으로 톤이 일정하며, 등장인물들이 과할 정도로 오열하는 장면은 없다. 손때가 묻은 물건을 넣고, 우연히 찾은 생모의 사진을 넣는 장면조차 더욱 드라마틱하게 진행할 수 있었음에도 별달리 극적인 효과가 개입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듯하다. 그저 애달픔만으로 속이 이렇게까지 상할 수 있구나, 싶은 느낌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신문 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존의 직업이 창작에 기반한 것이라면, 나는 영화 제작진이 굉장히 영리했다고 말하고 싶다. 창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존은 한 걸음 밖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유리는 그가 보지 못한 세상의 이면을 비춰줌으로써 , 존이 처한 상황과 자연스러운 접점을 형성한다. 또한 아버지 존의 이름은 너무도 평범한 것으로, 그의 슬픔이 사실 원치 않는 상황에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는 모든 이들의 상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남기는 아들 마이클은 미카엘 천사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떠나는 이들에게 당신이 세상에 남기는 희망은 곧 빛이 되지 않겠냐며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작중 네 살 마이클의 캐릭터다. 특별히 조숙하다는 설정을 넣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상보다 많은 것을 알며 종종 어른보다 현명한 태도를 보인다. 표현은 미숙할지 몰라도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마냥 어리게 볼 수밖에 없고, 걱정스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의 시선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나,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를 지금보다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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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경한 액션 속에 담긴 인생의 진리
이 영화 하도 난리라서 꼭 보고 싶었었다. 뭐 얼마나 대단하기에 개봉한 지 얼마 안 돼서 재개봉까지 하게 된 걸까.
미국에서 빨래방을 운영하는 중국인 이민자 에블린 왕은 오늘 국세청에 가서 세금 문제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가득 안고 국세청에 간 순긴 에블린은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의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신의 남편과 똑같이 생겼지만 자신의 남편은 아닌 남자에게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갑자기 그녀는 세상을 구해야 하는 슈퍼 히어로 예비자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그녀의 삶에 더 복잡한 타이틀이 붙어 그녀의 인생은 점점 블랙홀로 흘러가고 있는데..........
1. 쌩뚱맞은 액션의 코믹함
이 영화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어떤 요소에 감명 받았던 걸까. 이 영화의 강점은 뻔하지 않은 동양 액션에 있다. 주인공을 미국의 사회적 약자인 아시아인으로 설정해 동양적인 마샬 아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멀티 버스라는 개념이 들어가 맛있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려면 예상 가능하지 않은 이상한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동양적이지만 생경한 액션들로 가득하다. 안 그래도 미국인들에게나 마샬 아츠는 흥미로운 무술인데 거기에 코믹함까지 더했으니 미국에서 왜 인기가 많은지는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동양 무술이 아닌 코믹 요소가 더 먹혔다고 생각한다. 영화관 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웃었던 이유는 에블린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때 온갖 이상한 동작에서 비롯된 코믹함 때문이었다고 본다. 코미디는 언제나 먹히는 장르니까.
2.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세탁소 주인인 우리의 에블린은 그 어떤 다른 차원의 에블린보다도 루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모든 삶의 선택에서 회피하는 선택을 하였으며 그에 대한 결과로 그녀는 현재 위기를 맞고 있다.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그녀들은 그녀가 했던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던 에블린이고 그 결과 에블린은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따라오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는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후회 말이다.
그런 후회들이 모여 한때 그녀는 잠시 돌이 된다. 태초에 공간, 태어나기 전 태어나기 전 혹은 죽은 후에 돌아갈 자연의 상태로. 하지만 이 자연 상태로 돌아갔을 때 에블린과 빌런 조부 투바키의 행보가 다르다. 누구나 살면서 감정적 부침을 겪지만 그 부침을 딛고 삶의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 반면 슬럼프를 이겨내지 못하고 우울함에 극치로 자신을 몰아가는 사람도 있다. 전자가 에블린 이고 후자가 조부 투바키 이다.
자신의 남편의 얼굴을 한 다른 세계 사람 알파 웨이 먼드는 그녀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밑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보는 선구안을 가진 이였던 것이다.
같은 상황에 있다고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우주 속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인생을 막 사는 사람도 있고 인생을 소중히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에블린은 우주 전체에서 가장 불행한 에블린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축복받은 에블린이었을지도 모른다.우주 속에서 가장 찌질한 남편을 뒀지만 어쩌면 친절이 가장 큰 무기라는 점을 알고 있는 가장 통달한 남자를 가진 여자였으니까.
3.총평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참 클리셰가 많다. 결론적으로 가족애를 그렸고 그녀가 영웅이 되는데에 가장 큰 원동력은 그녀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소재는 솔직히 뻔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한 후회에 매몰돼 자신의 가족의 현재를 돌보지 못한 에블린의 깨달음이 더 감명깊었다.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감각을 되찾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현재 감각을 되찾아야 미래에 대한 빛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장점으로 잊자. 에블린이 슈퍼히어로가 되어서가 아닌 다음 챕터를 살아갈 힘을 가진 주체성을 가져서 좋았다. 현재 우울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나를 괴롭히는 세상 속 수많은 빌런들에게 'Be kind'로 무장하는 것이 나의 존엄을 지키는 것, 이것이 내가 배워야할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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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모든 단점을 최민식의 연기력으로 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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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베트맨>을 보러 영화관에 갔을 때 대문짝하게 포스터가 붙어있었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어떤 내용인지 굉장히 궁금했고, 최민식 배우의 작품이어서 기대를 하며 본 작품이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시놉시스
“정답보다 중요한 건 답을 찾는 과정이야”
학문의 자유를 갈망하며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 그는 자신의 신분과 사연을 숨긴 채 상위 1%의 영재들이 모인 자사고의 경비원으로 살아간다.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학생들의 기피 대상 1호인 이학성은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수학을 가르쳐 달라 조르는 수학을 포기한 고등학생 한지우를 만난다. 정답만을 찾는 세상에서 방황하던 한지우에게 올바른 풀이 과정을 찾아나가는 법을 가르치며 이학성 역시 뜻하지 않은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국 영화의 진정한 클리셰를 모아봤어요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한 줄로 평하자면 한국 영화의 클리셰를 한 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수학이라는 소재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독창적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용의 전재라든지,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그 과정이라든지, 현실에서는 있 수 없는 굉장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관객이라면 다음 장면은 이러한 내용이겠지? 이런 대사 한 번은 쳐줘야 되지 않겠어?하는 3초 스포가 자동적으로 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클리셰 속에서도 수학이라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청각적 요소들을 활용한다거나 칠판의 맞은 편에서 열정적으로 풀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조금은 색다른 카메라 구도를 보여줘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최민식의 연기력은 대단했다
이러한 클리셰 덩어리들이 영화 곳곳에 포진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최민식의 연기력 때문이다. 수학을 정말로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고? 공식을 하나 설명하고 해설하는데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고? 아름답다고 안 해주니까 세상 무너지는 듯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을 통해서 이 캐릭터가 어떠한 감정인지 너무나도 잘 드러나서 경이로웠다. 만약 표정백과사전이 있다면 거기에 등재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에도 변하는 최민식의 연기를 보면서 저렇게까지 인간의 감정은 다채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행복, 슬픔, 감격, 씁쓸함이 동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점을 정말 잘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그리고 증폭되는 감정연기를 보면서도 단 한순간도 과장됐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을 보면 왜 최민식 배우를 대한민국의 대표배우라고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말이다. 방향이 중요하지 정답이 중요하지 않다. 모두에게 옳은 정답은 없다. 하지만 치열한 입시 세계 취업 세계에서 이 말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내 정답이 아닌 남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답을 내밀어야 사회에서는 '나'를 봐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향해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다시 한 번 방향과 방법이 중요하다, 문제의 답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외친다.
사실 그저 그런 영화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사회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렇게 답만 찾아내는 입시 공부를 하는 줄 아느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인데 구조적인 체제를 비판하지 않고 그저 이상적인 소리만 해대면 어떡하냐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민식 배우가 주는 강력한 울림은 그런 생각마저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래서 왜 작품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굉장히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배우의 연기력 만으로도 그 이상적인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반성을 하게 만드는 그 강력한 울림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보는 내내 최민식 배우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영화에서 배우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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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함으로써 탄생하는 예술과 투쟁
대학 교양 수업에서 낸 골딘(Nan Goldin)의 작품을 처음 보았다. 곱슬머리와 80년대 유행 그대로 얇게 다듬은 눈썹, 진주 목걸이, 드롭 귀걸이를 한 여자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의연한 표정, 붉은 립스틱을 깔끔하게 바른 입술과는 달리 그녀의 눈은 격투라도 하고 난 사람처럼 혈관이 터져 붉어졌고, 눈가에 멍이 잔뜩 들었다. 모델임과 동시에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 한 장,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1984)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카메라로 이런 대상을 담는다. 교외에 장만한 집, 푹신한 카펫과 잘 정돈된 잔디, 백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가족상이 아니라 그곳에 속하지 않는 젊은이들, 그들의 문화를 찍고 또 사진을 통해 권력관계를 가시화한다. 제도와 언론, ‘주류’ 미술계가 모른 척 하는 것들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낮은 웅성임을 찢고 전시관 입구에 떡하니 걸린 이름을 규탄하는 외침이 들려 온다. 펜타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오피오이드계 약물로 인한 수많은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름을 박물관에서 내리라며, 시위대는 목소리를 높인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그녀의 이러한 시도에 주목한다. 어느 날 화이트 큐브에 도발적인 작품을 걸어 놓은 용감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견고한 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을 만한 작가로서의 그녀를 보여줌으로써 관객과 연결되는 것이다. 80년대부터 사진 작업으로 경력을 쌓아 온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난데없는 시위 현장을 담은 도입부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과 그 영감의 원천은 주류에 반하는 이런 힘과 멀리 있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는 ‘숨 막히는 교외’ 지역에서 시작된다. 이 백인 중산층 가족은 자아를 키워 나가는 딸을 고아원과 정신병원으로 내몰았다. 언니인 바바라가 그렇게 쫓겨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 낸 골딘은 역시 자라며 집 바깥으로 내몰리고, 위탁 가정과 기관을 전전한다. 그렇게 그녀는 뉴욕의 하위 문화 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갔고, 그곳에서 예술가로 자라났다. 사진이라는 예술 형식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속한 문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그녀는 마치다가오는 시대가 예술가를 알아보듯, 상자 안에 담겨 온 사진을 눈여겨 본 미술관의 관심을 끌어 작가로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바로 ‘행동(act-up)’하는 모습이다. 낸 골딘은 60~80년대 하위예술, 자유롭고 낭만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역사에 머물며 전설적인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거리로 나서는 운동가, 자신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발휘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그녀는 80-90년대의 에이즈 공포의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도와 언론이 그것을 모른 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그녀가 찍은 사진은 단순한 기록, 미학적인 가치에 더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이 되기도 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그녀의 삶과 맞닿아 있는 작품 활동을 서술하지만, 사진을 한 장씩 살피면서 촬영 비화를 듣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도입부의 메트로폴리탄 시위에서 시작해 영화는 그녀가 주력하고 있는 오피오이드 약물과 관련된 활동과 집회 프로젝트를 조명한다. 이전에는 캐주얼하게 즐기던 약물은 점점 용량이 늘고, 실수로 단 한 번 들이킨 펜타닐에 곧바로 중독되어 재활한 경험이 있는 낸 골딘은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죽음을 알리고자 한다.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국립 초상화 박물관 등 여러 장소에서 시위를 하여 점점 심각해지는 이 오피오이드계 약물 중독에 대한 인식과 논의를 확장하려 한다. 과거에는 제국주의를 발판 삼아 아시아 등지의 유믈을 수집하고 이후 제약 산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유지해 온 새클러 가문의 이름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내리는 시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 가서 시위를 벌이는,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경력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시도를 그녀는 어떤 죽음들은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신념을 위하여 감행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이 동시대 예술가의 행보를 지켜보는 동안 어떤 문제에 대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의 가치, 선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라는 제목은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예술을 하기 위한 시발점이 되어 주었다는 그녀의 언니 바바라와 관련된 문구이다. 신기하게도 낸 골딘의 삶과 연결되는 이 말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로서의 그녀, ‘유혈사태’를 지나치지 않는 인물로서의 그녀를 절묘히 가리킨다. 그리고 관객 역시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유혈사태, 즉 오피오이드계 약물(펜타닐) 중독 문제의 이면에는 거대 제약회사와 그들의 로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동시대 관객에게 낸 골딘이라는 예술가를 각인시킴과 동시에 개인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복합적이고도 매력적인 작품으로서 막을 내린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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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트위스터스"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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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점보> 메인 예고편
당신을 뒤흔들 강렬한 사랑의 움직임
“내가 널 느껴. 그게 진짜 사랑이야”수줍음 많은 소녀 ‘잔’은 또래와 어울리지 못한 채
놀이공원 야간 청소부로 일하며 자신만의 세계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잔이 유일하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환한 불빛을 밝히며 돌아가는 거대한 놀이기구.
잔은 ‘점보’라는 이름을 붙여 사랑을 속삭이고, 점보 역시 그런 잔에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점보와의 교감으로 잔은 행복을 찾기 시작하지만
잔의 엄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설상가상 놀이공원에서는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점보를 철거할 계획을 세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