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5-03 08:36:48
[JIFF 데일리] 낙인 찍힌 삶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다큐 두 편
〈거리의 소년 사니〉,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거리의 소년 사니〉
국제경쟁/다큐멘터리

〈거리의 소년 사니〉는 노동계급 남성성이 어떤 길을 걷는지에 관한 놀랍도록 흥미롭고 흡인력 강한 다큐멘터리다. 두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소년을 12년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8살 소년 사니는 거침이 없다. 그와 친구들은 “언젠가 경찰에 체포될 거예요”라는 말을 일상적 농담으로 주고받는다. 머저리, 밑바닥 인생, 부랑자, 쓸모없는 거리의 아이들……. 사니와 그 친구들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지만 이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한결같다.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성장하리라는 것. 영화는 이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 허구적 빈약함을 폭로한다.
사니는 늘 ‘강함’을 열망한다. 영화에는 그가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니의 일상을 보면 그에게 ‘강함’은 ‘거칢’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위험천만한 주행을 일삼고, 도무지 ‘장난’으로 보기 힘든 장난을 일삼으며, 학교 교육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사니와 친구들. 그러나 청소년이 된 사니 무리가 털어놓듯 그들을 강해 보이게 해주는 ‘나쁜 짓’의 의미는 ‘어린아이의 환상’, ‘어른이 되기 싫다’는 불안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거칠고 투박한 남성성을 과잉 수행하는 데서밖에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강함’을 갈망한다. 이들의 ‘강함’은 실은 사회적 존재로 존중받을 수 없다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행한 것은, 사니가 자신이 뽐내는 거친 남성성의 허약한 이면을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현실의 무게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장난을 종종 벌이던 사니 무리는 기숙사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 사건은 사망 사고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 ‘비행 청소년’은 이렇게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사니는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지만 재판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닥쳐버린 비극적 운명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판이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 이 모든 게 사니 개인만의 책임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방식으로 노동계급 출신 남자아이들이 마주하는 남성성의 비극적 구조를 조망케 해주는 영화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게스트 시네필/다큐멘터리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게스트 시네필: 아르벨로스 필름 데이비드 메리엇’ 섹션 상영작이다. 이 세션은 저명한 영화 복원, 아카이브 활동가가 직접 선정한 영화를 선보이는 섹션으로, 이번에는 캐나다의 영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캐나다 인터내셔널 픽쳐스의 데이비드 메리엇이 영화를 선정했다. 메리엇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전통이 강한 캐나다에서도 최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고 소개했다.
‘캐나다 매춘의 성지’로 꼽히는 밴쿠버의 데이비 스트리트 성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촘촘하고 긴급하게 정치화하는 이 영화의 제작기가 흥미롭다. 애초에 두 감독은 제작사에게서 ‘도덕적 창녀’, 즉 생계 등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성노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다루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거부하고 독립영화로 제작해 성노동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과 노동을 담아냈다. 영화에는 성 구매자들의 얼굴과 흥정 등 어떻게 촬영했을지 궁금한 장면이 많은데, 성노동자들이 몰래 마이크를 달고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는 당시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를 비추며, 경쾌하고 발랄하게 시작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에는 성노동자들의 삶에 관해 영화가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겼다. 호객과 흥정 장면, 가족 인터뷰, 일하며 겪은 폭력, 그들 사이의 갈등, 일상적인 불인과 미래의 압박, 마약 문제 등등. 영화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멋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독 인상 깊다. 서로 다른 성노동자들은 왜 자신이 이 일을 시작했는지 말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누군가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순전히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즉 영화는 ‘동정할 만한’,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사연을 맨 앞으로 내놓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자발적 선택’에 구조적 맥락이 있다는 점도 깊이 있게 다룬다. 성매매/성노동에 대한 기존 통념을 계속 비껴가면서도 그들이 일터와 삶에서 만들어내는 생기와 활력을 자연스레 담아낸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살펴보자. 데이비 스트리트에는 크로스드레스, 트랜스젠더, 시스젠더 여성, 게이 등등이 구역을 나누어 일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폭력적으로 구는 성구매자가 있으면 함께 나서 동료를 보호해주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연대하며 서로를 지켰다. “있으면 안 될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죠.” 도덕 분류 체계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낙인을 비틀며 자신들의 현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재의미화한 말이다. 사회에 ‘불온하다’ 낙인찍힌 존재들의 모든 연대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다.
영화의 또 다른 감동적인 순간은 캐나다 최초의 성노동자 집회 장면이다. 성노동 비범죄화와 미성년자 성매매 금지, 처우 개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요구하며 당당히 행진하는 성노동자이자 활동가들에게서 ‘절망적으로 낙관’하는 태도가 갖는 힘을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큐레이션한 메리엇에 따르면,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큰 화제를 모았으나 정작 성노동자들은 86년 엑스포를 계기로 다른 곳으로 쫓기듯 이주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이 절망 속에서도 낙관으로 벼려낸 정치적 저항에 접속한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에 나오는 온갖 ‘도착자’, ‘변태’에 끝까지 마음을 열지 못하겠거든 영화에 출연한 성노동자 어머니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 좋겠다. 그녀는 한때는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트랜스 여성이자 크로스드레서로 성노동하는 미셸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늘 상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규범적 존재론에서 벗어난 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거나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관점이든 포괄적 휴머니즘의 관점이든, 성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학을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을 좇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생기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노동' '퀴어' 등의 말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보수적 비타협주의자의 심장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두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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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프는 왜 푸드트럭을 하게 됐는가. 영화 <아메리칸 셰프>
- 아메리칸 셰프 (Chef, 2014)
장르 : 코미디, 미국 │ 감독 : 존 파브로
출연 : 존 파브로(칼 캐스퍼), 엠제이 안소니(퍼시), 소피아 베르가라(이네즈) 외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4분"주방 뒤 셰프의 삶에 대하여"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방송을 좋아한다.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영상에서 요리만큼 다채로운 소재가 있을까. 재료를 썰고, 볶고, 데코레이팅 해서 완벽한 결과물을 플레이팅 하는 것까지 그 과정 하나하나가 볼거리이며 예술인 요리.
<아메리칸 셰프>는 그런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이면서도, 주방 뒤에서 펼쳐지는 셰프의 현실적인 삶을 조명하는 이야기다. 손님의 상에 요리가 도착하기까지 주방 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셰프의 얼마나 많은 손길과 고민이 담겼을까. 더 나아가 그 요리에 담긴 셰프 본인의 철학은 얼만큼이며, 레스토랑 운영자의 자본주의적 개입은 또 얼만큼일까. 궁금했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리뷰에 민감한 것은 요리도 마찬가지"
‘칼 캐스퍼’는 LA의 유명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레스토랑 경영자가 있다. 얼마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요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보다 얼마나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고 돈을 벌 것인가를 계산하는 경영자. 우리가 맛보는 요리들은 대개, 그 두 가치의 타협점일 것이다.하루는 요리 비평 블로거로 유명한 ‘램지 미첼’이 ‘칼’의 레스토랑에 찾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자부심이 대단한 칼은 그를 만족시키고자 만전을 기하지만, 블로거의 리뷰는 참담하다. ‘칼의 요리는 더 이상 참신함이 없으며 심지어 디저트는 먹기도 힘든 수준’이라는 등 혹평 일색인 것.
열이 제대로 받은 ‘칼’은 블로거에게 다시 찾아올 것을 요구하고 신메뉴 개발에 힘쓰지만, 이를 돈으로 밖에 보지 않은 레스토랑 경영자는 이런 칼을 제재하고 나선다. 결국 재방문한 블로거 ‘램지’에게 다시 똑같은 메뉴를 선보이게 되는 칼. ‘램지’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비아냥거리고 이 일로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칼’은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만다. 그리고 찾아온 후폭풍은 실업 그리고 재기 불능.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반응이 중요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입장이다 보니 칼의 마음을 이해해지 않을 수 없었다. 창작자에게 인플루언서의 리뷰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특히나 13만 팔로워를 거느린 유명 블로거가 내 작품에 혹평을 한다면 예민함을 넘어서 분통이 터질 수밖에. 하지만 칼이 정말로 억울했던 건, 고용주의 요구를 따르느라 자신의 요리를 제대로 선보일 수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모든 걸 잃어도 재능은 일으킬 수 있다"
블로거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더 이상 칼을 셰프로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망연자실하던 것도 잠시, 칼은 낡은 트럭을 개조해 푸드트럭을 하기로 결심한다. 메뉴는 언젠가 어린 아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던 쿠바식 샌드위치. 땡전 한 푼 남아있지 않는 그였으나, 재능은 사라지지 않는 법. 그를 돕겠다는 직원 한 명과 아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전역을 돌며 샌드위치를 팔기로 한다. 믿을 것은 오로지 칼의 요리 실력뿐.
고기와 햄 치즈를 잔뜩 넣은 빵을 버터를 바른 플란차에 구워내는 일명 ‘쿠바노 샌드위치’는 칼의 요리 솜씨, 그리고 어린 아들의 SNS 마케팅 실력으로 금세 유명세를 얻는다.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했다. 풍부한 자본 아래에 고용되어 있을 때는 하지 못하던 ‘정말 만들고 싶은 것’을, 오히려 낡아 빠진 길거리 트럭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헤드 셰프로 일 할 때는 일에 치여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하던 칼이었지만, 어린 아들은 아빠와 함께할 수 있어 낡은 트럭에서 지내는 것조차 너무도 행복해한다.
"창작의 순수한 기쁨"
셰프로서 정점에 있던 한 남자가, 바닥으로 추락했다가 다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자리를 되찾는, 그리고 아들과의 우정을 쌓아나가는 훈훈한 영화로 마무리되나 싶었을 무렵. 칼을 역경으로 몰아넣었던 그 악평 블로거 ‘램지’가 트럭으로 찾아온다. 또 무슨 혹평을 늘어놓으려나 싶어 내쫓으려 했으나, 그가 하는 말은 의외의 것이다. 나는 원래 당신의 팬이었으며, 당신이 그 레스토랑에서 하기 싫은 요리를 만들 때보다 지금 이 트럭에서 만드는 샌드위치가 훨씬 더 맛있다고. 내 블로거를 팔아서 번 돈으로 땅을 샀는데, 거기서 당신이 원하는 메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맘껏 만들며 운영할 생각이 있겠느냐고.
창작자의 삶은 의외로 단순한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 그 이상의 재료는 사실 필요치 않은 것이다. 자본이 붙으면 자본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글 쓰는 자는 출판사가 원하는 것을 쓰게 되고, 셰프는 고용주가 원하는 것을 요리하게 된다. 물론 자본이나 대중의 기호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터다. 사랑을 받아야만 작품에 의미가 깃드는 것이니까. 영화 <아메리칸 셰프>는 그 사이에서 창작의 기쁨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누구를 위한 창작을 할 것인가. 이 주제가 너무 심오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화는 가볍고 재밌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쿠바식 샌드위치가 미친 듯이 먹고 싶다는 거다. 이처럼 창작의 기쁨은 그리 무거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구미를 당기게 한다면, 그것이 곧 창작의 기쁨이다.
우두미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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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존'이 다른 '직쏘' 보다 더 마음에 들어
생명 연장의 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직쏘’ 존 크레이머(토빈 벨)이다. 1편에서의 살인극이 있고 시간이 좀 지났다. 존에게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몸 상태다. 사실 존은 며칠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흔들리는 존. 병세를 치료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좌절은 곧 분노로 바뀐다. 항암 치료를 받던 도중 환자들의 물건을 훔치는 간호사를 목격한 존. 이 간호사를 납치해 살인 게임에 초대할까 싶었지만 간호사가 물건을 다시 돌려놓자 ‘하지 말아야지’ 싶었다. 이런 존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든다. 바로 존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페데르손 프로젝트’? 홀린 듯 프로젝트로 향하는 존. 실제로 암을 치유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돈을 보내는 존. 입금은 곧 초대장을 부른다. 항암치료에 나선 존. 하지만 이 치료는 뭔가 이상하다. 이내 존의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중 첫 번째는 불필요한 것들은 최소화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플롯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쏘우’ 시리즈는 오랫동안 혹평을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내적인 것을 신경 쓰는 게 아닌 잔혹한 살인 쇼에 집중해 왔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팬이 아닌 관객들은 영화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래도 잔혹한 모습을 즐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쏘우 X>는 시리즈가 가진 전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는 다 쳐냈다. 대신 직쏘를 중심으로 인물들이 행동하게끔 서사를 간편하게 재구성했다. 이 덕분에 명분 없는 살인 게임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직쏘의 상대역은 시리즈가 변화구를 던질 수 있는 토대를 맞이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억지로 직쏘의 인간관계를 서서히 넓히는 것에서 시리즈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쏘우’ 시리즈의 전통을 잃은 것은 아니다. 본작에서도 역시 눈 똑바로 뜨고 보기엔 어려운 장면들이 몇 있다. 이런 고어 묘사를 보기 어려워하는 분들은 눈 꽉 감고 극장에 가시길 바란다. 이렇게 <쏘우 X>는 전작들의 핵심은 바꿨지만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남겼다.
공간 활용
이 영화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공간이다. 대표적으로 2부에서의 공간 구성이 흥미롭다. 원래 호러라는 장르 자체가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이행한 것이 <쏘우> 1편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이끌고, 그 사이에 누워있는 인물 셋의 모습이 영화를 상징하는 구도 중 하나다. <쏘우 X> 본 작은 이를 성실하게 구현한다. 어떤 점에서? 바로 인물의 리액션에 집중한 것이 큰 효과가 있었다. 서로의 상황을 각자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활용해서 장르적인 쾌감을 높였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온갖 지형지물들을 활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게 시리즈가 10편씩이나 나왔기 때문에 이제 살인 트랩이 진부해질 때도 됐다. 영화는 이것을 의식한 듯 인물의 밀도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는 올해 9월 개봉했던 <잠>과는 대조되는 측면이 있다. <잠>은 집이라는 공간 특성을 활용했다. 윗집과 아랫집의 대비, 이 방과 저 방에 살고 있는 캐릭터들을 영화 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쏘우 X>는 이런 ‘여러 군데 공간 활용하기’라는 방식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딱 한 곳만 메인 무대로 삼았다. 발상의 전환으로 다른 호러 영화와의 차이점을 둔 것이다.
호불호가 갈릴 듯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은 요소는 주인공 직쏘의 설정이다. 원래 직쏘는 궤변을 늘어놓는 캐릭터였다. 왜? 직쏘는 시리즈 내내 ‘너희들은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람들을 처형한다. 문제는 이 세계관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람도 직쏘에게 살인 게임을 시킨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직쏘가 이상한 논리로 민간인을 죽였던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7편에서 이에 대해 비판하는 여론이 대다수였다. 영화가 ‘게임과 별 상관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기본 룰을 어긴 것이다. 이 이유로 직쏘라는 인물의 감정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단점은 치명적이다. ‘쏘우’ 시리즈가 무엇인가. 바로 직쏘가 벌이는 살인 게임이 핵심인 시리즈 아니었나? 관객이 직쏘에게 감정이입을 못하게 되면 영화 자체에 흥미가 떨어진다. 지금 스크린 앞에서 보이는 신체절단 대환장 살인파티가 아무 의미 없다면 이 끔찍한 광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단의 혹평이 당연한 것이다.
이 영화는 시리즈물의 공식화를 피하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직쏘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 것이다. 시놉시스에서도 읽을 수 있는 부분인데, 직쏘가 무려 사기를 당했다. 영화는 이에 따라 직쏘 입장에서 여러 감정선을 추가했다. 이 감정선에 쉽게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살인 게임에 당위성이 생긴다. 영화가 친절하게 이야기에 몰입까지 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빛을 발한다. 원래 이 ‘쏘우’ 시리즈 공통점 중 하나는 강박적인 반전이었다. ‘알고 보니 누가 누구 제자였대!’식의 플롯 전복하기가 ‘쏘우’ 시리즈에서 전통처럼 이어진 것이다. 본작 <쏘우 X>에서는 다행히 ‘누가 누구 제자였대’ 식의 전개가 나오지 않는다. 전작들에 비해 전적으로 현실적인 전개가 이어지는데, 인물에게 깊은 감정선을 넣은 선택이 이야기에 개성을 부여한 좋은 선택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 승부수 때문에 주인공 직쏘의 캐릭터에 대해 아쉽다고 느낄 관객 분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쏘우 X>은 시리즈물이다. 전작의 전통을 승계하지 않으면 사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 차기작을 기다린 보람이 없다. 직쏘가 정의의 사도인 척을 하는 거지 실제로 그런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거리감을 느낄 관객도 있을 법하다. 어떤 관객들은 이를 단점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것 말고 이야기 내적인 것 집중한 탓에 우리가 아는 ‘쏘우’ 시리즈의 쾌감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이질감도 느껴진다. 이 부분은 직쏘의 조수 캐릭터에게 특히 더 강하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두 인물을 이렇게 설정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두 인물에게 이런 면모가 없었더라면 진부한 살인 게임을 또 보는 꼴이기 때문이다.
여전한 것들
시리즈에서 승부수를 둔 영화다 하더라도 분명히 단점은 있다. 우선 후반부 전개다. 사실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이 후반부를 위해 종속됐다고 해도 봐도 무방하다. 대표적으로 직쏘가 초반부에 만나는 사람들은 후반부를 대놓고 암시한다. 직쏘의 관점에서 이 인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더 설득시켰다면, 감정선이 깊었더라면 후반부의 전개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또 이 인물의 서사를 아주 조금만 더 줘도 큰 문제가 없었다. 서사가 부족하니까 이 사람의 존재가 이야기 내내 에 전제조건처럼 깔리는 것이 체감이 잘 된다. ‘이렇게 쉽게?’ 싶은 것이다. 또 후반부로 넘어가서 이 인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간단하다. 소위 말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측면이 어느 정도는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앞에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듯싶다. 애매하게 ‘예상 못한 반전’을 추구하는 것보다 빌런의 악함을 강조해서 두 인물의 대결구도를 강조했어도 재밌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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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아'들의 조우, 사랑, 일탈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리뷰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으니 관람하지 않으신 분은 읽으실 때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스터]
[감독]
니콜레트 크레비츠
[출연]
소피 로이스, 우도 키어, 밀란 헤름스
[시놉시스]
한동안 연기 활동을 하지 않은 배우 아나,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고아 아드리안. 서로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거리를 거닐며 담배를 나눠 피우는 사이로 발전한다. <와일드 Wild>(2016)로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는 시도를 했던 니콜레트 크레비츠 감독의 신작이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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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때로 일탈을 꿈꾼다. 삶이 메마를 때,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그 옛날 세차게 흐르던 강이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아에이오우: 사랑의 빠른 철자법>의 주인공 '아나' 역시 그러한 일탈을 꿈꾼다. 남편과 사별한 그에게 삶의 낙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직장에서는 '나이에 비해서는 매력적이나 그럼에도 한물 간 퇴물'로 취급 받고 사회는 그를 도움이 필요한 노부인으로 바라본다. 그의 젊음은 시들었고 그는 더더욱 위축되어 간다.
아나의 꿈은 한 어린 소매치기, '아드리안'과의 조우에서부터 실제가 되었다. 어수룩하게 가방을 훔쳐 달아나던 아드리안을 처음 보았을 때, 아나는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싱그러움을 느낀다. 그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운명은 지독하게도 그 두 사람을 이어주었고, 두 사람은 어느 복지국 재활 프로그램에서 재회했다.
'아'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떠한 동질감을 느낀다. 과잉행동장애로 말을 더듬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는 아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다. 부모 자식뻘의 나이 차가 나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드리안은 온몸으로 아나를 원하노라 표현한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가고, 남의 물건을 훔쳐서라도 그를 위한 선물을 마련한다. 그리고 아나는 소외된 소년인 아드리안에게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서, 같은 눈높이에서 조언한다. 그는 말한다. 잘 안되면 어떠냐고, 네가 잘하는 다른 걸 해보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고여만 있던 서로의 삶을 흐르게 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는 막을 수 없는 소리, 항상 뻗어나가는 소리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르던 것을 깨달을 때, 감탄할 때, 오르가슴을 느낄 때... ... 그 모든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소리가 바로 '아'라는 것이다. 아나와 아드리안, '아'로 이름이 시작하는 두 사람은 어쩌면 서로에게 이러한 '처음' 혹은 '깨달음'을 선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방식일지언정, 서로에게는 각별하다. 그들은 그토록 꿈꾸던 일탈이라는 과업을 완수했으므로.
사회적 관습에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나이든 여자와 도벽이 있는 소년의 결합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숱하게 위법을 저지르고, 그로 말미암아 형사에게 쫒기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맞이하면서.
소위 말하는 '유교걸(유교 사상에 찌든 여자)'인 필자로서는 이들의 일탈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모든 부도덕함을 기꺼이 무릅쓰고 마침내 서로에게로 가 닿는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기존의 고루하고 메마른 일상에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혹은 우리가 꿈꾸는 어떤 판타지를 스크린 너머에서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의 해석은 관객이 생각하기에 달려있겠지만.
'아에이오우-사랑의 빠른 철자법', 22.08.26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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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잘 자렴, 아가야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Seven winters in tehran
스테피 니더촐|Steffi NIEDERZOLL
Germany|2023|99min|DCP|Color|Documentary|15|Korean Premiere
시놉시스
2007년 이란, 열아홉 살 레이하네 자바리는 자신을 성폭행하려 한 남성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고, 이란 국경을 넘어 여성 인권과 저항의 상징이 된다.
프로그램 노트
2007년, 열아홉 소녀 레이하네 자바리는 전 이란 정보부 직원이었던 사르반디라는 중년 남성을 죽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자바리는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그를 칼로 찌르기는 했지만 그를 죽인 것은 집 안에 있던 다른 남자였다고 진술했으나 이란 당국은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고, 자바리는 2009년 사형을 선고받는다. 자바리의 가족은 사르반디의 유족과 합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여러 곳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자바리는 2014년 10월 25일에 사형당하고 만다. 이 다큐멘터리는 자바리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수감되어 스물여섯에 처형되기까지 7년 동안의 기록이다. 최근 이란에서 일어난 히잡 시위처럼 자바리의 죽음 역시 이란 인권 문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남긴 유언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를 위해 검은 옷을 입지 말고, 내 괴로운 날들은 온 힘을 다해 잊고,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전진수)
여성 인권을 위해 고군분투한 그녀에게 바치는 영화
성폭행 당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 달린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휘둘렀던 레이하네 자바리의 모든 목소리는 묵살되었다. 2007년,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이란 여성 레이하네 자바리는 자신을 빈집으로 유인해 성폭행하려던 남성인 사르반디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2009년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녀의 억울한 상황을 위해 국제사회의 구명운동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서명한 석방 탄원서 등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2014년, 이란 정부는 결국 사형을 집행했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이란의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자바리는 교도소에 갇힌 후에 가혹한 심문을 받으면서도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이러한 그녀의 말과 행동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성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은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같은 여성들을 통해, 그리고 이 문제를 인식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진정한 자유는 교도소 담장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담장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바리가 원했던 세상은 여성들이 강간 당하지 않는 세상, 약한 사람이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는 세상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는 또다른 여성들을 위해, 이란의 여성 인권을 위해, 그리고 이란의 무자비한 사형제 폐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
해당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자바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겪고 헤쳐나가야 했던 당시 이란의 현실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란의 여성 인권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바리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가, 우리 사회가, 전 세계가 해야 하는 일들을 알려준다. 우리는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
아래는 자바리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중 일부이다.
"엄마가 슬퍼하는 게 저한테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엄마 아빠 손에 입을 맞출 기회를 어째서 주지 않은 걸까요.
…
엄마가 나에게 사랑을 쏟아 준 이란이라는 나라는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취조관에 심하게 심문을 받고 울고 있을 때도, 혹독한 말을 들을 때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여성성의 마지막 상징인 머리를 밀릴 때 비로소 보답을 받았습니다. 11일간 독방에 들어갔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엄마, 당신은 제 인생 이상으로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저는 흙에 묻혀 헛되이 사라지고 싶지 않아요. 제 눈과 아직 젊은 심장이 땅으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아요. 내가 처형된 직후 저의 심장과 눈, 뼈, 그리고 이식 가능한 모든 것을 꺼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세요.
(생략)
저를 위해 무덤을 만들지 마세요. 엄마가 울거나 괴로워할테니까요. 상복도 입지 말아주세요. 제가 겪은 일상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열심히 잊어 버려요. 나머지는 바람에 맡겨요."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사랑했고, 또 어머니를 사랑해서 어머니가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딸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자바리는 바람이 자신을 데려가게 해주길 바랐다. 이런 딸의 부탁에 부응하듯 그녀의 어머니는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용감하게 그녀의 딸을 위해 싸워나가고 있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세상으로부터 보호 받지 못한 그녀의 딸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자렴, 아가야."
<바람이 나를 데려가게 해주오>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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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턴트맨이 느낄 모든 감정
겉에서 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또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들의 노력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노력들은 하나의 흐름에 묻히고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그리고 일상을 산다. 물론 적정한 금전적인 대가를 연봉으로 지급받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의 완성이나 성공은 눈에 띄는 몇몇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생각해 보면 정말 다양한 분야에 그런 숨은 노력들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병원에서도, 직장에서도, 예술가의 영역에서도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 제작 현장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그중에서도 스턴트맨은 배우를 대신해 위험한 장면을 촬영하는 일을 한다. 일반 대중들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한다. 그들의 일은 무척이나 위험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알려지기 어렵다. 영화 <스턴트맨>은 그렇게 숨겨져 있던 스턴트맨의 노력과 고민을 담는다.
첫 번째 감정 - 스턴트맨이 주는 긍정적 기운
주인공 콜트(라이언 고슬링)는 업계에서 훌륭한 스턴트맨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유명한 배우들의 스턴트 더블을 맡는데, 그중에서도 특급 스타인 톰(아론 테일러 존슨)의 대역을 주로 맡고 있다. 콜트는 늘 위험한 장면을 마무리하고 나면, 엄지를 척하고 올린다. 어딘가는 다치고 아플 텐데도 일단 큰 사고가 없었다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일단 주변을 안심시킴으로써 영화 촬영 현장의 긴장을 줄인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화 촬영 현장에 대한 존중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서 그가 스턴트 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크게 위험한 액션 장면을 촬영해야 할 때, 그는 일단 모든 장비가 괜찮음을 확인하고, 스턴트 직전 심호흡을 여러 번 한다. 그렇게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은 그는 ‘오케이’를 말하며, 사인한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그가 스턴트를 시작한다. 차가 구르고 폭탄이 터지고, 점프를 뛰는 다양한 스턴트가 끝나고 나면, 주변이 조용해진다. 그때만큼은 모두가 스턴트맨의 안위에 신경 쓰고 있다.
안전요원들이 스턴트맨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면, 스턴트맨은 엄지 척을 한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헬멧을 벗고 살짝 미소를 보인다. 그 이후 촬영 현장엔 박수소리와 환호소리가 가득해진다. 스턴트맨이 촬영 현장에 다시 긍정의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기본적으로 스턴트맨은 긍정적이다. 아마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위험한 스턴트 장면들을 무사히 마치고, 또 주변에도 그런 긍정적인 기운을 전달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스턴트맨의 긍정적인 기운을 관객에게도 전달하고 있다.
두 번째 감정 - 스턴트맨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스턴트맨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촬영현장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태도다 좋지 않아도, 같은 장면을 수십 번 반복해서 찍어도 그들은 크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콜트도 마찬가지다. 몇 번이고 몸에 불이 붙고 몸이 바위에 던져저도 엄지 척을 보이며 계속 그 행위를 반복한다. 이 영화의 설정상 콜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감독 조디(에밀리 블런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스턴트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건 스턴트맨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직업 정신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스턴트맨을 크게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최고의 스타로 등장하는 톰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톰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스턴트 더블인 콜트의 액션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다. 자신이 최고의 스타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아는 듯한 그의 거만한 모습은 스턴트맨에 대한 태도로 이어진다. 그는 그의 스턴트 더블이 자신이 만든 그늘에서 활동하는 노동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인 파티를 할 때 스턴트 더블에게 위험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여러 번 위험한 스턴트를 반복해서 시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스턴트맨에 대한 존중은 없다. 톰은 모든 스턴트맨들의 액션 장면들을 자신이 했다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모든 액션 장면을 본인이 직접 연기했다는 인터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니는 그의 모습은 무척 거만하고 무책임해 보인다. 모든 스턴트맨들은 그의 거만함에 분노한다. 하지도 않은 연기를 자신이 했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누가 좋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이 영화에서 톰은 스턴트맨을 거의 소모품처럼 취급한다. 스턴트맨이 사고를 당하면 바로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버린다. 기존 스턴트맨에게는 어떤 위로도 없다.
세 번째 감정 - 스턴트맨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영화 <스턴트맨> 에는 로맨스가 포함되어 있다. 콜트와 조디의 얼굴에는 사랑이 있다. 조디는 촬영감독이었고, 현재는 새로운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콜트가 큰 사고로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면서, 조디와 잠시 멀어졌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잊지 못한 상태다. 거의 2년 만에 다시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두 사람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보인다.
조디는 콜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콜트는 촬영장에서 늘 최선을 다했고, 그 모든 위험한 스턴트 촬영을 하고서도 늘 괜찮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촬영감독이었던 조디는 그 모든 장면을 보면서 콜트의 따뜻함과 전문성을 발견했다. 업무적은 전문성도 서로의 마음을 이끌었지만, 무엇보다 모두에게 보이는 존중감과 태도는 조디가 사랑에 빠지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스턴트맨은 모두 전문적이고 긍정적이다. 한 장면, 그것도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의 촬영을 위해 방법을 연구하고 집중한다. 수십 번을 굴러 떨어지는 자동차 안에서 나오면서 엄지 척을 하는 그들을 관객이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영화는 관객도 수많은 스턴트맨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이런 감정은 결국 주인공인 콜트와 조디의 사랑을 응원하는 큰 동력이 된다.
영화 <스턴트맨>은 영화 촬영장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하지만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스턴트맨의 고충과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콜트와 조디의 러브스토리에 악당 노릇을 하는 배우를 등장시켜 다양한 액션 장면들을 보여주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까지 살짝 추가하여 보여주면서 진짜 이들의 얼굴을 드러내 놓는 영화다. 그들이 작업에 임할 때 갖게 되는 감정, 그들을 이용한다고 느낄 때 갖게 되는 감정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을 극에 녹여내면서 결국은 모든 스턴트맨을 응원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연출한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 본인이 스턴트맨 출신이다. 전작은 <존윅> 1편과 <아토믹 블론드> 같은 다양한 액션 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그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겪었을 감정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카체이싱, 근접격투, 총격전 같은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로맨스 장면들과 적절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척 즐겁게 영화를 볼 수 있게 구성했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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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스틴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평소 고어영화나 공포영화는 못 보기 때문에 감상에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갖고 있는 가치, 시사하는 바, 그리고 나의 감상을 중심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주인공 쥐스틴은 부모와 언니에 이어 생텍쥐페리의 수의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집안의 뜻에 따라 대학에 갔다는 것부터 이것이 쥐스틴 스스로의 결정인지 아니면 '다들 그렇게 하니까' 본인도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점이 영화의 핵심 주제에 있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식인을 한다는 행위는 쥐스틴 스스로가 찾아낸 욕망이자 숨겨진 본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이 정상적인 행위는 아닐 뿐더러 앞으로의 쥐스틴의 삶에 있어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할 테지만 그 행위를 할 때 만큼은 누구의 지시나 권유가 아닌 쥐스틴 스스로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행위로 인해 누군가는 피해를 볼 것이고 두려움을 느낄텐데 이 영화에서는 그 대상이 남성이라는 점, 권위주의적이고 말도 안 되는 조직문화에서 쥐스틴과 그의 언니인 알렉시아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차별점이자 어쩌면 무기로도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숨겨진 면을 찾는다는 점에서 영화 '티스'가 생각나기도 했다. 위험을 감지하고 본능을 펼치는 티스의 주인공과 본능에 따른 욕망을 표출하는 쥐스틴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의 마지막에 알렉시아가 물어뜯은, 식인 행위를 한 그 남성을 보고 쥐스틴은 충격에 휩싸인다. 소중한 사람(친구)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인간으로서의 도덕적인 모습 또한 잃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쥐스틴이 가진 모습은 여러 가지이고 이런 점을 통해 입체적인 인물임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충격과 허탈함이라는 감정을 가진채 언니를 씻기고 욕실 바닥에 붉은 피와 물이 섞이고 그것이 흘러가는 걸 보며 대개 여성의 피란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했던 영화들과는 달리 로우에서는 인물 그 자체와 그의 욕망, 본능만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 상당히 눈에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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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스파이 후기 /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대배우인 이유 / 삭발투혼에 전라 누드까지.. / 냉전시대의 비극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더 스파이”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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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D.P.> 메인 예고편
《D.P.》 탈영한 그들을, '무사히' 데려와라! 정해인 X 구교환, 디피 콤비의 숨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D.P.》 8월 27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