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14 09:50:00
[JIFF 데일리] 상영작 100편의 포스터를 한눈에
2024 100 Films 100 Posters 전시 행사 취재
2024 100 Films 100 Posters 전시2015년 시작된 ‘100 Films 100 Posters’는 매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100편에 대해 100명의 그래픽디자이너가 고유의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대규모 기획전시로 국내외 영화계뿐아니라 한국 시각디자인분야에서도많은 관심을 모으는 전시로 인정받고있습니다.
이 행사에서만들어지는 영화 포스터들은,영화 포스터의 관습과 상업적압력이배제된, 영화의핵심을 그래픽 디자이너가 자유롭게해석한 것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볼수있는유일무이한창작물이라는 특성을 가집니다.
행사는 팔복예술공장에서는매해 진행했던방식대로 제25회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100편을 선정, 100명의 그래픽디자이너가각자만의 포스터를만들어 전시하는 ‘제10회100 Films 100 Posters’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올해 전주남부시장에서새롭게조성된문화공판장 작당에서 10년동안 제작된1,000장의 포스터를 전시·판매하는 대대적인 아카이브전시 이벤트가 진행되며, 완판본문화관(한옥마을),인후도서관, 영화의거리 등 관광거점도시 전주시만의특징적인 공간에서도 특색있는 전시겸이벤트로도만나볼수있습니다.
또한, 역대 ‘100 Films 100 Posters’에참여했던디자이너들을초청, 행사의 의미와기록을되짚는 디자이너토크와간담회및그래픽 디자인에 관심있는 일반인이나전공생,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한 원데이 포스터만들기워크숍등 다채로운 이벤트도 진행한다고 합니다.
디자이너, 전공생이라면 한번쯤 들려보면 좋을만한 공간이었습니다. 많은 인원이 들어와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넓찍한 공간과 체험존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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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 11편
넷플릭스, 왓챠로 볼만한 봄 영화 추천11편
지난 주말에 벚꽃이 피고 개나리와 진달래를 구경할 겸 산책에 나섰어요. 오랜만에 꽃구경이라 그런지 그간 추워서 움츠려들었던 몸도 기지개를 펴보았지요.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걷다보니 벚꽃영화는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네이버에 봄 영화 검색하면 우선순위로 나열되는 전형적인 영화들 말고 봄이 되면 떠오르는 봄 영화 11선을 꼽아봤어요.
#나의 소녀시대 (我的少女時代·2015)
“비록 넌 작고, 바보같고 게다가 다른사람을 좋아하기까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너를 정말 좋아해” 소위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가 좋다는 류의 고백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플립 (Flipped·2010)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광택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번 무지개 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예쁜 동화 같은 이 영화로 힐링하세요!
#4월 이야기 (四月物語·1998)
“성적이 안 좋은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기적'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어차피 '기적'이라고 부를거라면, 난 그걸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벚꽃이 휘날릴 때 풋풋한 첫사랑의 설렘이 제격이겠죠!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2001)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누구에게나 봄날이 있지만, 그 계절이 언젠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족구왕 (The King of Jokgu·2013)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시대가 꿈을 사치라고 일갈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청춘의 특권이죠.
#22 점프 스트리트 (22 Jump Street·2014)
"SCHMIDT XXXXED THE CAPTAIN'S DAUGHTER!!!!!!" 대학교 신입생으로 위장취학한 두 형사가 마약 단속을 벌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2011)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우디 앨런이 동경하는 1920년대의 낭만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2012)
“잘했어, 좀비팔“ 봄방학을 맞은 다섯 친구들이 놀러간 숲 속의 오두막에서 뜻밖에 호러 종합 선물세트를 받고 환호(?)한다.
#머니볼 (Moneyball·2011)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스토브리그가 끝나는 봄이면 새로운 시즌이 개막한다.
#빅피쉬(Big Fishl·2003)
“때론 초라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거짓이 더 낫을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랑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라면” 팀 버튼은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고서야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한 이 영화에는 행복과 희망이 가득 차 있다.
#만춘(晩春 Late Spring·1949)
오즈 야스지로는 ‘늙어가는 아버지를 애처로워하는 딸, 자식의 결혼을 걱정하는 부모’라는 소박한 가족이야기로 가장 극적인 변화를 포착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성숙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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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가 최악인가, 사람이 최악인가
*영화의 결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으면 글 분량을 채울 수가 없겠더군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제목에서 최악이 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언뜻 들어서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과연 그럴까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영화 안에서 두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는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최악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율리에와 사랑에 빠진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리 분)과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롬 분)는 각자의 매력을 지닌 이들이긴 하지만 완벽한 연애 상대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도 연애할 수 있을 것 같은 율리에는 왜 악셀과 에이빈드를 만나 자기 자신에게 못할 짓을 하게 되는가. 악셀과 에이빈드를 만나며 활기차 보이는 율리에지만 정작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는 혼자 있는 시간이다. <라우더 댄 밤즈>를 통해 한 가족을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 파헤치고, <델마>에서는 사랑에 빠진 초능력자 레즈비언 여성의 성장기를 보여준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두 이야기를 합친 것 같은 이야기를 펼쳐보인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기 전 이미 악셀과 연인 사이였고,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되는 오랜 커플의 전형처럼 보인다.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는 오랜 커플이 그렇듯 권태기가 찾아오고, 서로에 대한 의리가 있어 대놓고 바람을 피우지는 못한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에이빈드는 악셀보다도 잘 통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옷이 쌓인 침대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급기야 서로 화장실에서 배설하는 모습까지 공유하지만 선을 넘는 신체 접촉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변명하듯이 헤어질 무렵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바람은 아니라고 도장찍듯 대화를 나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율리에는 에이빈드의 이름을 묻지 않고 헤어지지만 역시나 많은 영화에서처럼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율리에는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만큼 악셀에게 더 이상 설렘을 느끼지 못하면서 왜 헤어지지는 못하는 것일까. 이 장면은 율리에가 악셀에게 최악의 연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악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기 자신에게 못할 짓을 하는 율리에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만나기 전 악셀의 가족을 만났을 때 악셀과 나누는 대화는 도통 두 사람이 연인인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대화를 나누는 주제마다 부딪히고, 특히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는 율리에와 악셀은 가족을 이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율리에가 철저하게 약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자고 싶지 않다며 떼를 쓰는 아이를 혼내고 보채는 건 결국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여성이기에 율리에에게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세세한 과정에서 실익을 따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악셀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율리에의 입장에 공감해주지 못한다. 심지어 임신과 출산의 주체가 여성인 율리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할 때 율리에는 악셀과의 관계에서는 가족을 이룬다는 전제 하에 선택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치만을 점유한다. 영화 중반부 만화 작가로 일하는 악셀이 과거에 그렸던 여성 비하적인 내용이 문제가 되면 악셀이 율리에(를 포함한 여성)에게 최악의 사랑이 될 것을 관객은 짐작하게 된다.
이런 악셀에게 지쳐갈 때 만난 이가 아이 생각이 없다는 에이빈드였다. 임신 출산의 주체로서 여성을 인정하고 선택권을 온전히 넘겨주는 정도는 못 되지만 최소한 에이빈드와는 가족을 이루는 문제에 있어 다툴 필요가 없다. 악셀과 함께 사는 집에서 일어나 부엌 불을 켠 순간 세상이 멈추고 에이빈드를 찾아 밝은 표정으로 거리를 달려나가는 율리에의 모습은 악셀과의 세상은 더 이상 역동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모두가 멈춘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있는 에이빈드는 멈춘 세상에서 유일하게 매력적인 남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에이빈드와 키스 후 돌아와 부엌 불을 껐을 때 비로소 악셀은 움직인다. 부엌불은 악셀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메타포로서 작용하는데, 밝은 빛 아래에서 결점까지 보이는 악셀을 더 이상 율리에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런 악셀과 살기 위해서는 불을 끄고 어느 정도 흐린 시선으로 악셀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에이빈드라는 선택지가 생긴 율리에는 어둠 속에서 악셀과의 세상을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서 악셀과 이별을 통보하는 율리에는 다른 사람이 생겼느냐는 악셀의 질문에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리에가 악셀에게 최악의 인연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에이빈드를 만나 안정된 것처럼 율리에는 보이지만 파티에서 마약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에이빈드가 율리에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님에도 에이빈드의 전 여자친구인 수니바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며 자신과 비교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에이빈드와의 관계가 안정되어 갈 때쯤 율리에는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맞닥뜨린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 그리고 악셀이 암으로 죽어간다는 것. 아이 생각이 없던 여성이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취하는 행동은 자신에게 최악인가, 연인에게 최악인가? 임신 자체가 모체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때 어떤 선택을 하든 율리에는 자신에게 최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 생각이 없었음에도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을 두고 출산을 고민하는 동시에 악셀을 찾아간 율리에는 에이빈드가 아닌 악셀에게 먼저 임신 사실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리에가 에이빈드에게 최악의 연인인가? 임신한 여성의 선택의 결과는 본인이 오롯이 그 책임을 감당할 뿐 주변인의 그 누구도 당사자만큼의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
모호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율리에의 선택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연애하는 내내 자신에게 최악의 선택만을 하던 율리에는 커리어를 이어가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한다. 율리에를 인정하지 않고 여성을 공개적으로 비하하던 악셀은 아마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고, 에이빈드는 율리에를 떠나 새로운 인연을 맞이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에이빈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율리에는 사랑을 떠나고서야 자기 자신에게 최악인 사람으로부터 벗어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자신에게 최악일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을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을 영화는 밝은 톤으로 보여준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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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에서 찾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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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을 뒤적이다가 영화 관련한 피드에서 영화 <미스트>의 결말이 최악의 반전이라며 평 남긴 것을 보고 궁금해서 보기 시작한 영화 <미스트>. 그런데 정말 결말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봐야할 작품이었다. 영화 자체를 못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최악이라는 결말이 칭찬인 그런 영화였다.
영화 <미스트> 시놉시스
당신이 알던 세상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 어느 날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친 뒤, 기이한 안개가 몰려온다. 데이빗은 태풍으로 쓰러진 집을 수리하기 위해 읍내 그의 어린 아들 빌리와 옆집 변호사 노튼과 함께 다운타운의 마트로 향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도중 동네 노인이 피를 흘리면서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 뛰쳐 들어왔다. 마트 밖은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체 불명의 안개로 뒤덮혔고, 정체불명 거대한 괴생물체의 공격을 받는다. 마트 안에는 주민들과 데이빗, 그의 아들 빌리가 고립되었고,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모두 죽는다는 미친 예언자가 그곳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다. 몇 시간 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괴물들의 등장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들 앞에 펼쳐진 것들은 인류의 재앙일까?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미스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괴물이 어떻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웬만한 SF영화를 보다보면 그 괴생명체 혹은 문제의 원인이 어떻게 발생했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명확한 설명이 되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뭐지? 하는 감정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영화 <미스트> 속에서는 이 안개의 원인과 괴생명체에 대한 출현의 이유는 군인을 통해서 짧게 설명된다. 하지만 그 해결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던 점은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굉장히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SF적 요소를 활용하고는 있지만 주제 자체가 SF의 미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과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다룬 내용이다보니 SF적 요소에 대한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몰입에 전혀 방해가 되는 않았다. 여기서 깨달은 점은 주제를 확실히 전달하고 그 메인 테마를 밀도감있게 풀어내는 것이 관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예측가능한 종교에 매달리는 사람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써는 영화 중반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맹신과 예언에 몰두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상당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설득의 과정이 굉장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미친 여성의 헛소리에 불과했던 말들이 그저 사이비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의도치 않 하나 둘씩 맞아 떨어지면서 가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 여자의 말대로 벌어지는 현재 속에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혼란하거나 개인이 너무나도 힘들 때 도대체 왜 종교에 귀의를 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는데 영화 <미스트>에서 조금 그 의문이 해결됐던 것 같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변주가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당장의 현실 속에서 종교와 같은 교리는 나름의 예측가능성을 선산한다. 교리에 따르면, 성경에 따르면 현재우리는 어느 위치에 있고 다음은 이럴 것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측가능성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위기 상황에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을 굉장히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저를 이렇게 설득할 수 있을 정도면 말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대하여
영화 <미스트>를 최악의 결말과 반전이라고 평하는 이유는 막판 5분에 다 담겨있다. 종교에 다 홀려버린 사람들과는 분리를 선언하며 데이빗은 아들과 일부 사람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안개와 괴물을 피해 달려간다. 하지만 안개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ㅚ물을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계속 앞으로 향해 달려나가던 차는 결국 연료가 모자라 멈추고 만다. 뒤에서는 괴물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괴물에 잡아 먹히거나 현재 가지고 있는 총으로 자살을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괴물에 잡아 먹히거나 현재 가지고 있는 총을 자살을 하는 방법박에 없다. 하지만 차에 탄 인원은 5명, 탄환은 4개. 데이빗은 결국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은 괴물에 잡아먹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괴물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는 순간 데이빗의 눈에 목격된 것은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와 상황을 정리하러 온 군부대였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지만 극심한 공포와 미래는 이제 없다는 낙심은 죽음만이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허탈하고 허망한 반전을 보면서 인간은 정말 한 치 앞을 보지못한다는 사실과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는 미래를 낙담하며 안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굉장히 잘 풀어낸 비극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스트>는 보는 내내 종교와 인간 본성에 대해 굉장히 철학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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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하러 온 파멸
브랜든 프레이저의 뛰어난 연기로 주목받고 있는 영화 <더 웨일>의 서사는 지극히 단순하다. 동성 연인의 죽음 후 자제력을 잃고 272kg의 거구가 된 찰리(브랜든 프레이저 분)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딸 엘리(세이디 싱크 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영화의 공간 변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주된 서사는 찰리의 집 내부에서 진행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고, 그렇기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상당 부분을 기대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연인 브랜든 프레이저 이외에도 딸 엘리를 연기한 세이디 싱크,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토마스를 연기한 타이 심킨스와 찰리의 거의 유일한 친구 리즈 역을 맡은 홍 차우마저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다. 소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배우들의 연기가 스크린을 넘쳐 흐를 듯이 관객을 위협하는데 덕분에 관객은 모든 등장인물에 이입할 여지를 획득한다.
올해 남우주연상 후보들 모두 하나같이 쟁쟁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개인적으로 아직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람하지 못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애프터썬>의 폴 메스칼에 한 표를 던진다). <미이라> 시리즈 이후 개인적인 사건들로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해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지지를 얻어낸 측면이 우선 크다. 거기다 남우주연상 한 부문에만 후보를 냈을 만큼 강하지만 작은 영화 <애프터썬>과는 달리(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인 감독 샬롯 웰스는 바로 이 신인이라는 점 때문에 시상식의 피해자가 되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감독의 이름을 얻고 상대적으로 홍보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적인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브랜든 프레이저는 도저히 이입할 수 없을 만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관객의 공감과 응원을 이끌어 내는 난제를 해결해 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 낸다.
찰리라는 인물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찰리는 스스로 파멸을 가져온 인물이지 타인의 연민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다. 동성 연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가족을 버리고 떠난 데다 연인의 죽음을 핑계로 폭식을 일삼아 스스로를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친구 리즈조차 찰리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비밀마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데, 이런 찰리는 기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아도 관객의 입장에서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찰리가 돈을 줄테니 가끔 방문해달라는 부탁에 응하는 차가운 엘리도 사정을 알고 보면 외려 찰리보다도 딱한 인물이다. 엘리가 찰리를 역겹다고 하는 건 단순히 찰리의 외모 때문이 아니며 이는 관객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엘리의 대사로 직접 언급된다. 보다 호리호리했던 찰리의 모습이 간간이 드러나는 바닷가 플래시백 장면에서조차 엘리와 찰리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엘리와는 달리 찰리는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데, 이는 찰리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엘리의 삶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찰리는 엘리의 삶의 일부가 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경제적인 부양을 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엘리에겐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찰리의 자기 파괴적인 면모는 영화 초반보다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찰리가 거구가 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초반에는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샌드위치를 먹다가 질식할 뻔한 찰리의 모습에 얼마간 관객이 연민의 시선을 보낼 만한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리즈의 걱정과 계속되는 경고에도 피자를 두 판씩 주문해 먹어치우고 병원을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관객은 찰리에게서 서서히 정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끝까지 찰리가 스스로 일어나 엘리에게 다가가길 응원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섬세한 연기에 기댄 결과물이다. 때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상처받은 아이인지 사이코패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엘리를 향한 지속적인 애정을 드러내며, 경계할 법도 한 의문의 방문객 토마스에게도 친절하지만 리즈의 말은 결코 듣지 않는 모순적인 인물 찰리는 브랜든 프레이저를 통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학생들의 에세이를 서둘러 채점해야겠다던 찰리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수업을 하다 말고 노트북을 던져 버리기도 한다. 이런 세심한 감정선을 포착해 낸 브랜든 프레이저는 특수 분장을 뚫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침마저 연기해낸다.
<더 웨일>에서 구원은 파멸을 통해 다가온다. 모순적이지만 응원하게 되는 주인공 찰리를 제외하면 특히 엘리와 토마스가 이에 해당된다. 돈은 둘째치고 낙제를 면하기 위해 찰리에게 에세이 대필을 부탁한 엘리는 결국 찰리의 농간 아닌 농간으로 낙제를 당한다. 하지만 찰리가 엘리에게 건넨 그 낙제 에세이는 결국 엘리의 구원으로 이어지며, 엘리의 구원은 찰리의 구원으로도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엘리는 그 파멸 속으로 아버지를 함께 이끌고 들어가려 하지만 결국엔 그 파멸이 본인과 찰리, 그리고 토마스라는 외부인마저 구해낸다. 의도치 않게 엘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힌 토마스 또한 스스로 막장까지 내달렸던 캐릭터다. 하지만 엘리의 농간 덕에 구원의 길이 열리고 토마스는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는 점에서 <더 웨일>은 파멸이 구원을 이끄는 모순적인 서사 구조를 띤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구원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시도들은 거의 대부분(어쩌면 전부) 실패한다. 엘리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토마스는 이것을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로 여기고 찰리를 구원하려 든다. 하지만 찰리가 토마스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찰리가 구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리즈가 찰리의 유일한 친구인 이유는 찰리를 구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말실수를 하게 된 토마스는 자신의 시혜적인 태도에 있는 문제점을 끝까지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찰리는 무엇보다도 솔직함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토마스와 엘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토마스는 찰리가 밀어붙일 때까지 찰리의 외양이 역겹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는 처음부터 찰리에게 역겹다는 말을 쏟아내며 발화하는 것과 동시에 sns를 통해 찰리에게 상처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가 찰리를 상처줄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대단히 솔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제발 솔직한 글을 써달라 호소하는 찰리에게 솔직함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기에, 이를 갖추고 있는 엘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찰리에게 상처줄 수 없다.
구원을 원하지 않았던, 구원받기보다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지옥에 처박히길 원했던 찰리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와중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저 사랑하는 딸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것뿐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 찰리도 엘리도 스스로가 아닌 서로를 구원하려 했고, 이는 단순히 부녀지간을 뛰어넘는 인간 간의 신뢰와 애정에 기반한다. <더 웨일>이 단순하면서 복잡한 이유는 이렇듯 파멸과 구원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이 찰리의 한 걸음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한 걸음이 단순히 찰리의 무게뿐 아니라 인생을 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엘리는 찰리가 다가오길 바라면서도 결코 먼저 다가가지 않을 것이기에, 찰리를 구원하는 건 결국 찰리 자신이며 이것이야말로 관객을 전율시키는 메세지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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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영화후기
영화<미나리>는 1980년대 한국 이민자 가족이 아칸소 주의 시골에서 농장을 가꾸는 이야기다.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이들이 한국의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미나리에 비유한 작명이라 한다. 제이콥(스티븐 연)와 그의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70년대 초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와서 병아리감별사로 거의 10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재산으로 아칸소 주의 농지 5에이커를 구입한다. 10살이 된 의젓한 딸 앤(노엘 케이트 조)과 심장병이 있는 7살짜리 아들 데이빗(앨런 S. 김)도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도착한다.
제이콥은 미국에서 희귀한 한국산 채소를 길러 대박을 노리지만, 수원지와 떨어져있어 전 땅주인조차 포기한 황폐한 땅임을 모른다. 모니카는 낯선 아칸소로의 이주가 썩 내켜하지 않지만, (남편을 믿고) 농작물이 경작될 동안 병아리 농장에서 생계를 책임진다. 그녀가 일하러 간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고국에서 친정어머니 순자(윤여정)을 모시게 된다.
1.헐리우드가 <미나리>를 주목하는 이유는?
영화 <미나리>는 거시적인 이민이야기와 미시적인 개인사를 교묘히 배치해 놨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인공 시점을 둘로 쪼개 놓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제이콥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는 데이빗의 시점으로 나눠놨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어서 진부한 가족드라마로 낭비되지 않도록 막고 있다.
또,이 자전적인 영화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 한국인의 정(精)과 가족애를 내세웠음에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기존 한국영화들이 감정적으로 관객을 동요시키려 애쓰지만, <미나리>는 굉장히 냉철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끝나지만 다 보고나면 우리는 이 가족에 대해 안심한다. 가족이 안고 있는 갈등이 '미나리'라는 희망으로 봉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마법이다. 최대한 스포일러를 배재하고 영화에서 이해가 안 될 부분들만 논의해보겠다.
주인공 데이빗의 눈에 비친 부모님, 이민 1세대는 전형적인 20세기 한국인이다. 가족을 위해 농장을 이루려는 아버지와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남편을 믿고 묵묵히 서포트하는 어머니가 그렇다. 반면에 이민 2세대는 미국 사회에서 미국인처럼 생활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아칸소의 ‘신앙공동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폴(윌 패튼)은 중남부에 걸친 복음주의 개신교가 강한 '바이블 벨트(Bible Belt)'을 의인화했다. 그가 십자기를 지고 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신앙심 깊은 모니카가 한인교회가 없는 아칸소에서 개신교들과 교류하는 방식으로 미국 사회에 동화되는 장치로 활용했다. 이 점만 봐도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예리 배우가 밝힌 비하인드에 의하면, 모니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10년간 병아리 감별사로 제법 큰 돈을 벌었지만, 남편은 그 돈을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그 와중에 남편 제이콥은 자신의 꿈이라며 농장을 계약하고 아칸소로 이사왔다. 그녀는 남편의 뜻을 존중하지만, 가슴 한편으로 조국을 그리워하고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모니카는 이민자의 설움을 같이 공유하던 캘리포니아 한인교회를 그리워하지만, 아이들은 지역교회를 배먹지 않고 다니며 백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렇게 아이들은 미국 청교도 문화에 동화되었다.
반대로 한국에서 온 순자는 낯선 존재다. 그녀는 딸이 아이들에게 데려가면 안된다고 한 위험한 숲으로 손자손녀를 데려가면서 뱀을 쫓아내려는 데이빗에게 위험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좋으니 내버려두라 타이른다. 이것은 가정 내부의 문제를 서로 대화하고 같이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즉, ‘농장’을 두고 제이콥과 모니카의 의견 차이에 대한 할머니의 조언이다.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2.외할머니 순자는 왜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미나리의 의미는?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이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미국에서 본적이 없는 한국적인 할머니 상이라서 신선해서이다. 순자는 요리에 서툴지만, 어머니와는 다른 할머니의 애틋함을 보여준다. 또,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한국에서 바리바리 음식보따리를 풀어놓는다거나 딸과 사위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그런 태도는 미국인에게는 굉장한 문화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하겠지만 말이다.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 건데...‘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하든. 김치에 넣어 먹고 찌개에 넣어 먹고 국에도...아플 때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순자(윤여정)의 대사
할머니 순자(윤여정)의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면 미나리의 의미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손자 데이빗(앨런 킴)에게 ‘너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스트롱한 보이야!‘라고 칭찬하거나 "아무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여러 곳에 쓸 수 있다"라고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미나리’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질긴 생명력과 할머니와 손자의 정(情)을 실로 우아하게 의인화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과 이민자로써의 정착을 상징하는 소재가 순자가 심은 ‘미나리’다. 앞서말한 거시적·미시적 관점이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것이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티즘과 프론티어 정신을 한국인의 민족성과 결부짓는다. 이것이 할리우드가 <미나리>를 주목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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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미니센스> SF의 탈을 쓴 익숙한 듯 다른 로맨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해수면이 상승해 도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긴 근미래. 퇴역 군인인 '닉(휴 잭맨)'은 동료 '와츠(탠디 뉴튼)'와 함께 사람들의 추억을 다시 체험하게 해주는 기계를 운영하며 지낸다. 특히 기계와 기억들의 안내자인 닉은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세계인 과거 속을 항해하며 고객들이 잃어버린 기억에 다가가게 도와준다. 그러던 어느 날, 잃어버린 열쇠를 찾으려는 '메이(레베카 퍼거슨)'가 닉의 앞에 나타나고 그들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첫 만남처럼 갑작스레 사라진다. 메이를 잊지 못하고 그녀와 관련된 단서를 찾던 닉은 그녀의 실종에 잔혹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흔적을 발견하고, 가려진 진실을 찾기 위해 기억 속으로 뛰어든다.
휴 잭맨, 레베카 퍼거슨 주연의 <레미니센스>는 <인셉션>과의 비교를 피하기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생이자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의 각본가였던 조너선 놀란이 제작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유사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두 영화의 소재가 같다. 누군가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고, 그 기억을 정보화해서 이용할 수 있는 기술과 기계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기억과 꿈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안내자 혹은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규칙, 현실 대신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모습, 남자 주인공이 연인과의 과거를 잊지 못하고 현실과 추억의 경계에서 망설이는 전개도 서로 닮았다. <인셉션>이 현실과 꿈, 그리고 꿈속의 꿈을 자유로이 오가며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것처럼 <레미니센스>에서도 추억과 현실을 넘나드는 편집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유사한 소재와 세계관, 설정 및 주인공을 풀어내는 두 영화의 방식만큼은 상극이다. 거칠게 표현해서 <인셉션>이 철저히 이성적인 영화라면, <레미니센스>는 철저히 감정적이다. 전자가 감독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탐구하면서 퀴즈를 풀거나 정교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을 선사하는 데 비해, 후자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 유려하게 도시 위를 떠다니면서 그들에게 공감하기를 유도하는 작품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인셉션>에 비해 <레미니센스>는 SF스러운 세계관과 여러 설정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영화로서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처럼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닉과 메이의 로맨스는 분명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특히 그들의 대화에서 언급되듯이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과 이들의 관계가 꼭 닮아 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 리라의 달인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 하데스로부터 그녀를 이승으로 데려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를 데려가던 중 그는 결코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지키지 못했고, 그 즉시 에우리디케는 도로 저승으로 끌려가 버렸다. 이에 좌절한 그는 평생 그녀와의 사랑만 노래하다가 죽는다. 닉과 메이가 노래를 매개로 사랑을 싹 틔운다는 점, 메이의 실종 이후 닉이 추억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본인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그녀를 찾기 위해 추억 속에서 살려고 하는 닉의 모습 등에서 그들은 신화 속 연인의 환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레미니센스>는 오래된 로맨스를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에우리디케의 시점으로 신화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목적이자 대상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에우리디케인 메이는 다르다. 실종된 후에도 그녀는 여러 방법으로 닉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닉에게 자신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남김으로써 그가 저승으로 간 오르페우스처럼 과거의 추억을 되짚어 보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에우리디케는 사랑을 받는 대신 사랑을 주고,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뒤돌아 서도록 명령하는 주체인 메이로 거듭난다.
그 결과 에우리디케의 시점에서 보면 오르페우스가 하데스와의 약속을 어기고 뒤돌아서 연인을 바라보는 순간은 실패의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저승과 이승의 경계로 인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황마저 뛰어넘게 하는 에우리디케의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이에 응답하는 오르페우스의 사랑이 마주하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닉과 메이의 로맨스도 마찬가지다. 실종된 메이를 잊지 못한 닉이 현실이 아닌 추억 속에서 사는 모습은 일견 배드 엔딩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에우리디케가 그러했듯 현실과 추억을 뛰어넘어 사랑을 고백한 메이에게 닉이 응답하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재해석은 두 연인의 대화에서도 암시된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메이에게 닉은 그런 이야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메이는 행복한 이야기를 중간에서 끝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영화는 오르페우스의 죽음이라는 원래 엔딩 대신 그가 에우리디케를, 곧 닉이 메이를 뒤돌아보는 중간 지점을 종착점으로 삼으면서 그녀의 부탁을 실천에 옮긴다. 이러한 의미의 전환이 커플의 대화에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닉과 메이가 마치 저승에서 이승으로 올라가듯이 계단을 올라 빌딩 테라스에서 도시의 저녁노을 풍경을 즐기는 모습을 두 번 보여준다. 그때마다 미묘하게 같은 듯 다른 연출은 각각 이야기의 의미가 변하기 전의 아픔과 그 후의 기쁨을 암시하며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다만 로맨스가 유독 눈에 띄는 <레미니센스>의 특징은 두 가지 문제점을 유발한다. 우선 로맨스의 강렬한 인상과는 별개로, 닉과 메이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영화는 플롯의 모티브인 오르페우스 신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앞서 언급한 몇몇 대사와 장면, 전반적인 스토리의 진행을 통해 암시하는 데 그친다. 그렇기에 신화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 비극으로 알려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갑자기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캐치해내기가 쉽지는 않다. 같은 신화를 소재로 삼았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신화의 내용과 영화 속 연인의 사랑이 갖는 의미의 관련성을 나름 명시적으로 알려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경우 작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로맨스는 그저 우연과 운명으로 점철된 평범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여겨질 수 있다.
또한 로맨스의 비중이 지나치게 비대한 나머지 다른 장르적 요소들이 모두 잡아먹히기도 한다. 각각의 완성도가 낮아지는 것은 물론, 장르 간의 연결성도 약해지는 것이다. <레미니센스>는 크게 세 가지 플롯으로 진행된다. 닉과 메이의 로맨스, 메이의 실종과 관련된 스릴러, 마지막으로 기후변화 속에서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심화되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묘사한 SF가 그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분량을 배분받지 못한 나머지 사라진 메이가 품고 있는 미스터리는 순간적으로 관객들을 집중시킬지언정 입체적인 전개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이내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환경 문제와 사회경제적 이슈를 연계시킨 메시지 역시 극의 배경에만 머무른다.
특히 <레미니센스>가 SF 영화로서 나름 참신한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로맨스에 쏠려 버린 장르의 조합은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빈부격차가 대두되는 미래를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이라는 환경 문제 안에서 다루어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간 <엘리시움>, <인타임>, <승리호> 등 많은 SF 영화가 디스토피아 세계 속 빈부격차를 그려낸 바 있지만,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침수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빈자와 남은 땅을 딛고 사는 부자들이 대비되는 그림이 흔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또한 빈부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인 물이 영화 곳곳에서 다양한 상징으로 사용되며 서로 다른 장르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SF적 시도를 살려내지 못한 결과물은 더욱 안타깝다. 해수면 상승이 빈자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문제이기에 영화에서 특정 인물이 죽거나 죽음에 가까워지는 자리에는 항상 물이 존재는 등 물이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 예시다. 그러나 로맨스라는 홍수에 쓸려 내려간 <레미니센스>는 SF 영화로서의 개성과 연출적 특징을 어필할 기회를 끝끝내 잡지 못한 채 한 편의 로맨스 영화로 마무리된다.
P(Poor 형편없는)
로맨스로 시작해서 로맨스만 뇌리에 남는 SF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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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독립운동가]:영화 암살, 밀정, 박열로 풀어보다.
#박열#한국사#여성독립운동
3월달 역사컨텐츠 2편을 만들어 봤습니다. 1편에 이어지는 내용이니 1편을 시청하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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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 오브 더 데드」 넷플릭스 제작비 1,000억원의 좀비영화ㅣ새벽의 저주 결말포함 영화리뷰ㅣ저스티스 리그 잭 스나이더컷ㅣ넷플릭스 오리지널ㅣ건데ㅣ
? "아미 오브 더 데드(2021, 넷플릭스Netflix)" 예고편 분석
"새벽의 저주(2004)" 영화리뷰 결말포함-영화 정보
장르: 액션, 공포, 범죄
감독: 잭 스나이더
각본: 잭 스나이더, 조비 해롤드, 셰이 해튼
제작: 웨슬리 콜러, 데보라 스나이더, 잭 스나이더
출연: 데이브 바티스타, 엘라 퍼넬 외
촬영: 잭 스나이더
음악: 정키 XL
촬영 기간: 2019년 7월 15일 ~ 2019년 10월 20일
제작사: 미국 국기 스톤 쿼리
배급사: 넷플릭스
공개일: 넷플릭스 2021년 5월 21일
화면비: 1.85:1
상영 시간: 2시간 11분
제작비: 9,000만 달러
독점 스트리밍: 넷플릭스 N아이콘 (넷플릭스)- 잭 스나이더의 첫 장편 영화 촬영 감독 데뷔작
- 새벽의 저주 정보
감독: 잭 스나이더
각본: 제임스 건, 조지 로메로
출연: 사라 폴리, 빙 레임스, 케빈 지거스 등
장르: 공포, 스릴러, 액션- 조지 A. 로메로의 1978년작 동명 좀비 영화 리메이크작
- 시체들의 새벽
#아미오브더데드 #새벽의저주 #넷플릭스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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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파이더헤드> 공식 예고편
뛰어난 과학자(크리스 헴스워스)가 운영하는 최첨단 교도소. 이곳에서는 재소자들을 상대로 감정을 조절하는 신약 임상 실험이 이루어지는데. 실험에 자원한 두 재소자(마일스 텔러 & 저니 스몰렛)가 각자의 과거와 싸우며 연대를 맺는다. 조지프 코신스키(《탑건: 매버릭》 《트론: 새로운 시작》) 연출. 《뉴요커》에 실린 조지 손더스의 단편 《Escape From Spiderhead》에 바탕을 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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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15초 예고편
절대적 수세 위기의 조선을 구해낸 위대한 성웅 '이순신'의 전략과 패기! [한산: 용의 출현] 7월 27일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