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21 14:30:50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9선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한다
[오마주 | 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영화는 영화를 오마주하기도 하지만
명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하기도 한답니다.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같이 만나보아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코끼리
어바웃 슈미트 | 마라의 죽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넓은 지평선
더 셀 | 새벽
인히어런트 바이스 | 최후의 만찬
인셉션 |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어린 옥수수
문라이즈 킹덤 | to prince Edward island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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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데드풀과 울버린>이 개봉 후 첫 주말을 맞아 70만 명을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1위에 오른 <데드풀과 울버린>의 누적 관객 수는 100만을 넘기고, <슈퍼배드 4>가 2위에 오르며 누적관객 수 58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탈주>는 꾸준한 인기를 보이며 누적관객 수 228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탈주>는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은 물론 2024 전체 박스오피스 5위에 안착했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북미에서도 1위를 기록했고 첫 주말 수익 2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R등급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을 세웠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전체 영화 흥행 기록으로 8위에 오르며 침체된 ‘마블’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에 밀려 2위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흥행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슈퍼배드 4>는 3위를 기록했고 누적수익 2억 9천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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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월 재개봉 영화 모음 zip.
5월에도 여전한 재개봉 소식 들려드려요.
6월 재개봉 소식도 미리 함께 전달해 드리니 놓치지 마세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 개봉 40주년을 맞아 오리지널 리마스터링으로 돌아온 <아마데우스>,
스튜디오 지브리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까지 스크린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스튜디오 지브리’ 기획전이 개최되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시작으로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섬 라퓨타> 등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재개봉 영화 목록 및 일정은 변경,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극장별로 개봉영화가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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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 카즈아키의 '지옥의 화원'
본 글은 씨네랩을 통한 시사회 관람 후 리뷰를 요청받아 쓴 글입니다.
포스터만 보고 눈을 돌리는 영화들이 있다. <외계+인>도 포스터만 보고 보지 않으려고 했다. 워낙 제작비가 높은 한국 영화여서 어쩔 수 없이 봤지만 여하간 이런 유의 포스터들은 영화를 보지 않는다. 2시간이라는 시간은 한정적이고 난 2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낮아졌다. 아니, 변했다. 어쩔 수 없는 변화이지만 제작이 되는 영화들은 그 자체로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 영화들 중에서도 가리기는 한다. <지옥의 화원>의 경우 시사회 관람 요청이 왔을 때 무시하려고 했지만 영화제에서 선택받은 사실과 몇몇 평들이 나쁘지 않아서 보기로 결정했다.
난 여자들의 액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킬빌>이나 <원티드>같은 영화들도 있기는 하지만 여자들의 액션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 특히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 액션은 더더욱 믿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들의 액션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대사 또한 믿어지지 않는다. 대표적으로는 한국 영화 <차이나타운>이 그러하다. 더 나아가서 아무런 통찰도 없이 젠더 체인지만 하는 영화들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젠더만 바꾸었을 뿐인데 신선하다거나 좋다고 하는 평은 믿지 않는다. 젠더만 바꿔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렇게 서론을 적었을 때 <지옥의 화원>은 뭔가 다른 요소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옥의 화원>은 젠더 체인지는 실패했고, 영화적인 완성도는 나름 선방한 쪽이다. 이 영화의 기발한 점은 여직원들의 세계다. 시치미 뚝 떼고 진행하는 여직원들의 세계는 우리가 질리도록 많이 본 고등학생들의 일진 세계다. 고등학생들의 일진 영화는 영화 자체가 그들의 세계라면 <지옥의 화원>은 여직원들의 세계는 영화 속에서 분리된 세계다. 그러니까 영화 속 안에 여직원들의 세계와 그 밖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직원들의 세계에는 남성들이 존재할 수 없다. 혹은 들러리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 엔딩에 불만을 가진 관객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 설정은 감독의 한계다. 그리고 이 한계는 부수적인 문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나오코의 액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고정관념의 한계일 수도 있으나 <아저씨>의 원빈은 믿어진다. <킬빌>의 우마 서먼도 믿어진다. 그러나 나오코의 액션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나가노 메이의 가녀린 신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애니메이션 <드래곤볼>의 손오공은 믿지 않는가. 여기에는 고정관념이 작동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여하간 믿어지지 않는다. 그건 몹씬에서 보이는 엑스트라마저도 허공에 발길질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여배우들의 움직임이 허술한 탓일 수도 있다. 이 불신을 잠재우는 것은 자기 반영적 요소와 편집, 그리고 캐릭터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놀랐던 것은 영화의 관심이 액션보다는 나오코의 일반인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액션이 이루어질 때면 항상 컷투로 화면이 바뀐다. 그런 뒤에 싸움의 결과가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싸움이 편집되고 우리는 싸움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 나오코의 내레이션이 더해진다. 란이 등장할 때와 나오코가 납치될 때, 그리고 납치되었을 때 그녀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의 중심 뼈대에 붙어있다. 주인공과 조연. 이 영화의 캐릭터와 중심 뼈대는 주인공과 조연에 있다. 클리셰를 깔아놓고 클리셰를 비트는 방식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자기 반영적 요소를 내비친다. 이 패러디에는 컨벤션과 클리셰가 골고루 섞이면서 나오코의 비밀이 드러난다. 이 순간 우리는 그동안 많이 봐왔던 컨벤션이지만 다시 한번 웅장함을 느끼게 된다. 그와 동시에 논리적으로 이 설정이 납득되지 않아서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전에 컨벤션이 아닌 클리세로 지겨운 대사들을 남발(란이 혼자서 나오코를 구하러 가면서 하는 말)하고 동시에 그 클리세를 패러디로 전환(란의 음료수를 언급)하며 이 영화의 톤이 오글거림과 자조섞인 웃음에 있다는 것을 통과한다. 이 통과와 나오코의 웅장함은 조연과 주인공의 대비처럼 그려진다. 웅장함의 논리적인 설정은 역시 시미치 뚝 떼고 지나간다. DNA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영화 자체가 그런 논리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냐고 이야기하듯.
이 영화의 장점은 중심 뼈대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면서 그와 같은 DNA를 가진 설정들이 예쁘게 붙어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조연의 관계는 결국 여직원의 세계와 일반 여직원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일반 여직원의 세계에서 동료들과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하고 싶은 나오코. 여직원의 세계에서 지상 최강의 여직원이 되고 싶은 란. 둘은 서로 크로스 된다. 이 설정 자체가 영화 초반의 교차편집으로 일반 여직원의 세계와 여직원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도 역시 중심 뼈대로 모인다. 우리는 주인공 나오코가 일반 여직원의 세계에서 여직원의 세계로 넘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기대를 하게 된다. 마치 <크로우즈 제로>나 만화 <짱>같은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숨겨진 힘이 드러날 때의 웅장함을 말이다. 이건 컨벤션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 컨벤션을 이용하고 끝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컨벤션 자체가 주는 쾌감과 캐릭터가 주는 쾌감이 공존한다. 주인공은 끝내 일반 여직원의 세계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일반 여직원의 세계에서는 완패한다.
이 패배가 이 영화가 달려온 지점이다.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것들을 다 던져줬다. 물론 그것이 훌륭하다거나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나오코의 첫 액션신이나 클라이맥스는 전부 이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의 최대치를 선사한다. 물론 믿기지 않는다는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다. 얇디얇은 손목으로 땅바닥도 부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여하간 이런 쾌감은 오랜만에 느껴본다. 이 쾌감의 최대 장점은, 이런 쾌감의 종류는 이제 올드하다는 느낌을 동반한다는 것인데, 올드함 없이 병맛과 버무린 쾌감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지점은 나오코의 패배다. 영화 속 주인공이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아쉬움을 내뱉거나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고 긍정하는 쪽으로 영화가 달려나간다. 하지만 <지옥의 화원>은 그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패배의 쓴맛을 그린다. 이 패배는 주인공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쾌감과 동시에 웃음을 선사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쓸쓸한 넘버 투 히어로 란의 행복을 빌게 만드는 엔딩이다. 그래서 난 이 엔딩을 긍정한다. 여기에 OL 물에 고춧가루를 뿌렸다거나 헤테로를 뿌렸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애초부터 이 OL 물의 주인공은 평범한 여직원을 꿈꿔왔던 것이니 말이다.
이런 장르의 영화는 비평이 아무 소용이 없는 종류이다. 이 병맛스러움을 긍정한다면 이 영화를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그런 싸구려 영화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 같은 사람도 이 영화의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팝콘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당신이 씨네필이어도.
2022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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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상뿐인 이념이 인간의 얼굴을 할 때
사회학자 김동춘은 근대 국가를 사회 계약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국경을 설정했고, 동시에 진행된 이념 전쟁은 국가의 발전 방향성을 결정했다. 한국은 미소 간의 이념 전쟁에 휘말린 대표적인 국가다. 1945년 세계 대전은 마침표를 찍었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한반도의 분단은 시작되었다. 나아가 발생한 1950년 발생한 한국 전쟁은 분단 상황을 공고화시키기에 이른다. 이같은 분단의 역사는 이제 80년,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군사 분계선’을 사이에 놓은 채 대치 중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관계에 있어 화합과 갈등이라는 모순적인 기능을 수행해 온 판문점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북한군 초소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남북 관계에 위기를 초래하고, 이 사건에 중립국 감독 위원회가 개입하여 수사에 착수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피의자인 남한군 수혁과 유일하게 생존한 북한군 피해자 경필. 온전히 다른 주장을 펼치는 두 사람의 진술서를 기반으로 과거는 회상된다. 중립국 감독 위원회에서 파견된 소피는 그 빈틈을 파고드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녀에 의해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파편을 비추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시간으로 관객들을 데려다 놓는다. 갑자기 등장하는 외국인 관광객 무리. 군사분계선의 남한 측에서 외국인 모자가 바람에 의해 날아가고, 북측으로 날아간 모자는 덩그러니 비춰진다. 카메라가 틸트업하면 보여지는 것은 경필의 모습이고, 모자를 주워 건네는 그의 모습은 부감으로 포착된다. 판문점이라는 공간에서 남북한의 경계란 흐릿하기 그지없다.
곧바로 보여지는 장면은 남한 군사들이 훈련 중 실수로 북한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습이다. 당황한 이들은 바로 퇴각하나, 잠시 무리와 떨어져 있던 수혁은 낙오된다. 엎친 데 덮친 격 지뢰를 밟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북한군 경필과 진우는 우연히 그를 발견하고, 그의 생명을 구해준다. 고마운 마음에 편지와 녹음테이프를 교환하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북한군 초소에 방문하기에 이르는 수혁. 세 사람은 점차 가까워지며, 수혁은 후임인 성식을 북한군 초소에 초대하기까지 한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가는 이들. 이들은 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것일까.
정해진 비극의 수순을 밟다
영화 속에서 총은 중요한 요소로 쓰인다. 수혁이 처음으로 북한군 초소를 찾은 날,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세 사람의 모습은 마치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순간처럼 연출된다. 세 사람의 중앙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 카메라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낳는다. 서로를 도발하다 먼저 총을 드는 수혁. 세 사람의 장난은 금세 중단되나, 이는 미래의 불행을 알리는 씨앗이다. 시간이 흐르며 이들에게 총은 장난감으로 기능한다. 성식 또한 이들의 친구가 되며 네 사람은 총알로 공기 놀이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들은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 성식은 경필과 진우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들을 월북시키려고 근무를 서는 ‘적공조’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수혁에게 표한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이들이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그의 손은 북한군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데 쓰인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며 우정은 견고해진다. 하지만 유사 전쟁 상황에 놓인 남북 청년들의 우정이 영원할 리 만무하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모인 네 사람의 모습은 또다시 러시안룰렛이 펼쳐지듯 연출된다. 수혁은 묻는다. “정말로 전쟁 나면 우리도 서로 쏴야 돼?”
다행히도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북한군에게 네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며, 이들의 관계는 위기에 처한다. 살기 위해 총을 드는 이들.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나누던 이들은 결국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이들의 유한한 우정은 이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그날, 판문점에는 비가 내렸다
영화의 말미, 사건의 진상에 도달해 가는 소피는 ‘인민군 장교의 딸’이라는 의혹을 받는다. 이념의 순수성을 의심당한 그녀는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직위를 잃고 만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수혁과 면담의 시간을 가지는 그녀. 두 사람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다. 이미 그녀의 소문을 들은 수혁에게 소피는 묻는다. “내가 인민군 장교의 딸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어떻던가요?” 수혁은 답한다.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수혁은 최소한 소피에게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어차피 진실을 숨기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녀는 네 사람의 우정을 파악한 지 오래다. 그렇게 소피는 마지막으로 진실을 들려달라는 부탁을 한다. 수혁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 즉 경필을 지켜주겠다는 것이 그녀의 조건이다. 그렇게 수혁의 입을 통해 네 사람의 깊은 우정과 비극은 전해진다. 소피는 경필에게도 마찬가지로 접근한 듯하다. 진실을 말하면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약속하에 두 사람이 전하는 각기 다른 진실을 듣는다. 일치하는 듯, 불일치하는 두 사람의 주장. 수혁은 진우를 쏜 것이 성식이라 주장했으나, 경필은 진우를 쏜 것이 수혁이라 말한다. 초소에서의 첫 만남에서 벌어진 러시안룰렛 속 수혁이 진우에게 가장 먼저 총구를 들이밀었던 복선은 이렇게 회수된다. 소피는 이를 전하며 누가 먼저 쏜 것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혁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회피해왔을 진실을 마주한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군번줄과 함께 달고 다니던 경필이 해체해준 지뢰의 잔해 위로 붉게 흐르는 피. 북한을 적대시해야만 하는 남한의 군인으로서의 정체성, 인간 대 인간으로서 북한의 군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만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양립하지 못한 채 비극을 낳는다.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넌 자는 안다. 수혁에게 더 이상 경필과 진우는 적이 아니다. 그렇게 ‘친구’가 된 이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결국 수혁을 죽인다.
총격 사건이 벌어진 날엔 판문점에는 비가 내렸다. 수혁이 죽음을 선택한 날에도 판문점에는 비가 내렸다. 고작 군사분계선상에서 동서 800m, 남북 400m로 구성된 정방형의 작은 공간. 이곳에서는 남과 북이 공존하며 대립한다. 이 멀고도 가까운 두 나라에서는 동시에 거센 장대비가 쏟아졌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이념 전쟁을 넘어서
결국 <공동경비구역 JSA>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이념 전쟁 속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개인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분단의 반세기 그 오욕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이 작품 속에 특별한 이념이 어디에 존재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어떤 이념이란 허상이며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아(我)와 비아(非我), 즉 대립항에 불과한 것이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이념이다. 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빨갱이’라든지 ‘괴뢰군’이라든지 하는 호명들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념 전쟁은 ‘남북’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념 전쟁은 ‘남한’ 사회 내부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한국은 1980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이들을 ‘빨갱이’로 매도한 역사를 지나왔다. 그러나 2020년대가 된 지금도 별다를 것 없다. 노동과 소수자 의제를 논하는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즉, 냉전 체제에 놓인 이 사회에서 아직도 ‘빨갱이’는 사어가 되지 못했고,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봉 25주년이 된 이 작품이 현시대에 가지는 시사점은 단순히 통일에 대한 염원만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자국 내에서도 이념 전쟁이 팽배하는 시대에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제는 허상뿐인 이념을 넘어, 이념 너머의 얼굴을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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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어로부터 '보편'으로
여성들의 관계‧감정‧경험을 포착해 섬세하게 재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은 퀴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 인물 중에는 여성인 동시에 퀴어인 자들이 많다. 감독은 이들이 마주한 고난과 그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강인함을 놀라운 관찰력으로 포착해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성 너머를 상상하게끔 한다. 슬픔이 깃든 퀴어 존재가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를 그녀의 영화를 통해 따라가 보자.
먼저 〈톰보이〉(2011)다. 주인공은 10살 ‘소년’인 미카엘이다. 짧은 머리에 날렵한 체구를 가진 미카엘이 새로 이사 온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축구, 수영, 힘 싸움 등을 능숙하게 해내자 친구들의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정작 놀이에 나가기 전의 미카엘은 걱정 투성이다.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은 상의 탈의로 팀을 나눈다. 미카엘을 불안케 하는 건 자신이 윗옷을 벗은 팀과 그렇지 않은 팀 중 어디에 속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미카엘은 로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생물학적 여성’이다. 그래서 상의를 벗었을 때 자신의 가슴이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라 보일까 걱정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수영복 앞섬이 문제다. 원피스 수영복을 잘라 남자 수영복처럼 만든 미카엘은 수영복 앞섬이 불룩 튀어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찰흙을 길게 만들어 페니스의 대용물로 수영복 속에 넣는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괜히 놀이 도중 침을 뱉는 것도 찰흙으로 만든 페니스와 더불어 미카엘이 ‘부족한’ 남성성을 메꾸는 방식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이 뛰어난 놀이 실력을 가진 미카엘을 위축되게 만든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흥미로운 건 미카엘이 찰흙 페니스를 보관해 두는 장소다. 미카엘은 찰흙 페니스를 자신의 빠진 이와 함께 보관한다. 빠진 이는 ‘자연’이고 찰흙 페니스는 ‘인공’이지만, 몸에서 떼어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미카엘에게는 빠진 이와 별 차이가 없는 찰흙 페니스가 누군가에게는 ‘결핍’의 기호로 읽힌다. 미카엘의 ‘진짜 이름’이 로레임이 드러난 후, 친구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미카엘의 성별을 확인한다. 미카엘을 ‘남자’로 알고 좋아했던 리사가 직접 미카엘의 성기를 만져 보게 함으로써 말이다. 미카엘의 페니스 ‘없음’은 그저 놀러 나가기를 망설이게 하는 일상적 불편함이었으나 성별 이분법이 군림하려 드는 상황 속에서는 수치심의 근거가 된다. ‘있고 없음’의 차원이 아닌 신체의 다름으로 독해되어야 할 미카엘의 음부가 결정적 낙인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잘못 짝지어진 인과관계다. 엄마의 강압으로 파란 원피스를 입고 친구 집에 찾아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사실’을 말하는 미카엘을 수치심에 휩싸이게 하는 건 그/녀의 성기 모양이 아닌 그 모양에 대한 세상의 폭력적인 독해다. 미카엘은 눈물 흘리며 파란 원피스를 숲에 버린다. 찰흙 페니스와 마찬가지로 파란 원피스 역시 쉽게 몸에서 떼어 낼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아무것도 아닌 찰흙 페니스와 파란 원피스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리사가 미카엘이 미카엘인 동시에 로레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 미카엘/로레가 감당해야 할 슬픔은 너무 커다란 것이었다.
미디어는 늘 아이를 과잉보호의 대상으로 표상하지만, 성별이 모호하게 읽히는 아이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아이는 어긋난 결핍감으로, 부모는 편견 가득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톰보이〉는 성별 이분법이 존재에게 얼마나 큰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다음은 성적 지향과 이성애규범성의 문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굉장히 세련되고 치밀한 방식으로 성적 지향과 평등의 문제를 사유한다. 관계의 평등을 위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시선이다.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의뢰받는다. 결혼에 대한 거부감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포즈 취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에게는 산책 친구로 거짓 소개된다. 마리안느는 자신에게 주어진 6일 동안 엘로이즈를 면밀히 관찰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사소한 동작까지도 관찰의 대상이다. 일상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사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된 것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엘로이즈의 성격과 몸짓, 표정을 자신의 몸에서 재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과 다른 존재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사랑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전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왜 이 집에 왔는지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인다. 그런데 엘로이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게 나에요?”라고 되묻는다. 생명력, 존재감이 없다고 냉정히 평가한다. 마리안느는 발끈하여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규칙‧관습‧이념을 철저히 따라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러다 보면 엘로이즈가 제기한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자부심은 회복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스스로 망치고 엘로이즈의 어머니에게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5일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첫 번째 6일이 익숙하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그려 내는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5일은 마리안느만이 그릴 수 있는 엘로이즈를 그리는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외양, 습관뿐만 아니라 감정을 읽는 법까지 배운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지는 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 또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후다. 엘로이즈는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시선의 객체가 아니었다.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녀를 관찰했다. 화가와 대상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는 허물어지고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신중히 탐구하는 상호적 시선이 생성된 것이다. 둘의 사랑이 만개하는 건 바로 이 평등한 시선 위에서다. 이성애자들이 젠더 권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사랑에 실패하고, 그러면서도 규범적 사랑 바깥에 있는 성소수자의 사랑을 경멸하는 동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모든 위계적 시선을 거부하고 서로를 동등하게 만드는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을 창조해 냈다.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만큼 사랑 문제에 있어 이성애자의 무능과 레즈비언의 유능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공유하는 평등한 응시의 의미와 가능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 있다. 가사노동을 돕는 하녀 소피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하려 한다. 이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소피를 돕는다. 18세기 프랑스에서 낙태는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의료 조치였다. 마리안느는 괴로워하는 소피를 보고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런 마리안느를 돌려세우며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엘로이즈에게 시선은 사랑하는 존재를 탐색하는 관능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윤리적 도구이기도 하다. 레즈비어니즘과 그리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낙태라는 주제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인해 주목할 만한 고통, 즉 동등하게 다뤄져야 할 정치적 의제로 부상하는 것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눈 둘은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엘로이즈는 예정대로 결혼을 해야 하고, 마리안느는 새로 완성한 초상화를 넘긴 후 눈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이 구축한 세계는 확장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남은 건 둘이 함께한 11일의 기억과 그 아름다운 시간을 기록한 그림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림으로 남겨진 사랑을 ‘보며’ 서로를 추억한다. 그럼으로써 기억을, 서로가 나눈 경험과 관계를 연장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엔딩 장면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가 일깨워 준 감각을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들려주었고, 엘로이즈는 몇 년 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를 들으며 격하게 흐느낀다. 마리안느가 일깨운 엘로이즈의 감각이 여전히 닫히지 않은 것이다. 불평한 젠더 권력에 기댄, 편견에 가득 찬 이성애규범성은 여기서 또 한 번 조롱당한다. 사랑이 개인의 의도가 배제된 정략 이성애 결혼이 아닌 이를 금지당한 레즈비언 연인 사이에서 피어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에서 배제된 레즈비언에 의해 ‘보편’의 경지로 승화된 사랑이라는 테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품은 황홀한 아이러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비추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을 비추는 방식은 다른 영화와 확연히 다르다. 셀린 시아마는 이성애 남성의 시선으로 늘 과잉 성애화되어 온 여성 신체를 퀴어 슬픔과 수치심, 여성의 고통, 쾌락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담는다. 그녀의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멋대로 분절되어 흩뿌려지지 않고 몸의 주인이 느끼고 감각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다. 그리고 이런 재현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 이어진다. 그녀가 담아낸 밀도 높은 여성들의 세계가 다른 관점으로 여성을 촬영한 장면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란 소리다.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가 어깨에 힘만 들어간 채 헛발질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이와 반대로 셀린 시아마는 페미니스트답게 구체적 삶 경험에서 추상적‧보편적 명제로 나아간다. '보편'이란 게 정말 있다면, 이는 관념과 공상이 아닌 구체적 경험과 감정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렇지 못한 보편은 구체적 경험과 감정을 억누르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셀린 시아마 영화 속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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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지켜라, 그리고 고통을 넘어 초인이 되어라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병구(신하균 분)는 어느 날 유제 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을 납치하여 고문하기 시작한다. 병구에 따르면, 강만식은 지구 침입을 획책하고 있는 안드로메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개기월식 전까지 지구를 지키기 위한 병구의 외계인과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병구는 지구를 지키지 못한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황당한 편집증적 망상과 함께 서사를 따라가던 관객의 불신과 감정 이입을 충격적 반전으로 전복하는 기묘한 영화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는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그 너머의 초월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병구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라는 병구의 첫 대사는 자신의 광기에 대한 병구의 자조적 고백이자 관객에게 일러주는 암시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망상에 사로잡힌 병구가 벌이는 황당하고 신체 훼손이 공공연한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간다. 잔인한 방법으로 강만식을 고문하는 병구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만식의 사투는 영화 종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강만식이 (병구가 '믿는' 외계인의 실체) 강릉공장에서 지구의 파괴를 막으려 하나 이를 믿지 않았던 병구는 강만식과의 결투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했지만 여기서 감독은 반전의 카드를 제시한다. 실제로 강만식이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었고 심지어 왕자였던 것. 병구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의 삶은 인간이 가진 공격 유전자를 변형하여 지구를 지키기 위한 왕자의 실험이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실험 표본 1787호' 병구의 실패로 왕자는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폭파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출처 | 다음 영화
병구가 보이는 폭력성과 광기의 원인은 과거 그가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 있다. 아버지는 탄광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가족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일삼다 병구의 종이우산이 머리에 박혀 죽는다. 같이 일하던 애인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어머니는 같은 공장(강만식이 운영하는 유제 화학)에서 일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질에 중독되어 5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기약 없는 치료로 연명 중이다. 그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며 납부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매질을 당한다. 병구에게 이어진 폭력은 곧 병구의 폭력으로 전이된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건달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병구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살인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도 그는 교도관의 폭행에 시달린다. 강렬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병구의 기억은 1980년대가 개인에게 가했던 끔찍한 폭력의 트라우마이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의 고통의 본질은 염세주의 철학과 과민증이다. 하나같이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하지만 고통은 '삶에 이탈'함으로써 오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라며 고통에 의연해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처방을 내린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러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에 낑낑대다가 그만 힘에 부치면 삶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다. 니체는 현실적인 고통의 처방도 제시한다.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장래 계획,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자부심과 공감 등. 병구가 먹는 향정신성 약물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해법일 뿐 본질적인 고통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병구는 암울한 세상 속 허무주의로 고통을 극복하려 한다. 흔히 현대사회를 허무주의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이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믿고 있던 절대적 가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믿어온 최고의 가치, 즉 신이 사라진 자리에 바로 허무주의가 들어오게 된다. 허무주의는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니체는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가 니체가 원하는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눈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무능력한 인간상을 표현한다. 이는 약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징후로서 정신력이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고갈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상태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이들은 생존 자체가 이유이자 최고의 목표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이들이 능동적 허무주의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는 목표나 의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는 전복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져 죽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이것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Nothing is true.” 그 어떤 것도 진리는 아니다는 말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진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이다.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것, 진리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절대적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이다. 고통과 폭력 속에서 극한의 좌절과 허무 속에 몸부림치던 병구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외계인으로부터 푸른 별 지구를 지키는 새로운 삶의 목표이다.
아무도 없어, 네가 지구를 지켜야 해.
식물인간인 어머니가 일어나 병구에게 말을 건네는 상상의 장면은 어머니가 대신 전하는 병구의 내면의 소리를 지지하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다짐이다.
모든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병구는 외계인에게 광적으로 연구하고 파헤친다. 대부분의 일상은 집 안에서 지낸다. 깊은 산속에서 양봉을 하고, 마네킹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고 '외계인'을 잡아 고문하며 연구하는 일이 병구의 일상이다. 관객의 눈에는 그야말로 광인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니체의 입장은 다르다. 진리 탐구의 끝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보다 진실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위험을 직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온전히 알고 따라가는 것이 진실성의 요체이다. 그는 실존에 대한 불쾌가 예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 즉 실존 속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극단적으로 된다는 뜻은 내가 가진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듦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며 존재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유하는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지 신이 죽었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병구의 집착은 삶의 실존적 의미와 목표가 있기에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온 절대적 가치가 더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없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선택했지만, 외계인이 있고 없고는 병구에게 중요하지 않다.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결국 '자신의 삶의 예술가가 되어라'라는 말로 대치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충동, 본능,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본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강만식과 병구의 관계는 본래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관계는 갑을 관계를 넘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심화한다. 그를 외계인으로 믿는 이유 중에는 그와의 악연도 포함되어 있다. 병구는 강만식의 공장에서 연인과 어머니를 잃는다. 보상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강만식에 대한 증오는 점점 고통과 외계인, 그리고 강만식을 함께 엮는다. 이렇게 둘의 악연으로 이어진 권력관계는 납치와 감금으로 역전된다.
자아탐구의 과정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고통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숨겨진 지배계급의 부정한 권력을 쉽게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혹은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여기서 소위 '99%'는 지배받는 자, '1%'는 지배하는 자이며 약자는 항상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순응하고 복종하는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권력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 니체는 다수가 생각하는 권력의 속성을 전복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하냐는 의문에 니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권력은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전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속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의 내면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진정한 힘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의 내적 동기인 욕망, 충동, 생존은 삶에의 의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에의 의지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 맺고 동화한다. 니체는 생명에의 의지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인간 내면의 본질에 담긴 권력은 악하지 않다. 단지 생명의 근본적 속성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는 권력을 향해 있다. 약자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이 강자와 다를 뿐이다. 니체는 도덕 현상을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나누었다. 주인 도덕은 명령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다. 지배하는 자의 발현 방식은 능동적 active 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노예 도덕은 복종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며 상대적으로 반동적 reactive이다.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반란을 꾀하는 것이다. 이때 노예들이 반란을 꿈꾸며 ‘원한’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원한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핍박이 권력에의 의지로 뭉쳐져 창조적인 가치를 창출해 낼 때 실제적인 반응으로서 발현한다, 즉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복수’이다. 병구의 원한 감정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자신을 지배해 온 주인이자 지배자인 자본주의와 이와 수반된 파편화된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병구는 그 원한을 납치와 감금으로 실현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권력, 다시 말하면 생존을 위해 물리적, 정신적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병구는 강만식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많은 '외계인들'을 잡아 왔다. 영화는 그들의 잔혹한 최후를 보여주며 병구가 가진 원한의 실체를 극대화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 정도를 확인한 다음 '권력 감정'으로 드러난다. 권력 감정은 저항을 느끼면서도 결국 이를 관철했을 때의 뿌듯함 내지 희열로 나타난다.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권력은 진정으로 이를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병구는 고문을 통해 권력 감정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구걸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병구가 느낀 권력 감정은 지속적인 외계인 납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지의 정도를 알고, 그 권력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 지금의 감정을 넘어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권력 증대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는 다시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병구가 양봉하며 꿀벌이 모아 놓은 꿀을 채취하듯 결국 누군가의 것은 나의 것으로 넘어와야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생존하는 모든 것들의 정신적, 물리적 운동의 삶이다. 권력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생명의 근본 현상이기도 하다. 권력은 그 속성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생성되며 팽창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그렇다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떤 인물인가. 복종의 구조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는 항상 자유의지를 추구하고 이를 꿈꾸며 산다. 니체가 생각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을 하고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관용하고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고 포용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권력자이다.
이는 지독히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긴 싸움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느닷없이 덮친 우연을 '의미'로 재창조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수반한다.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창조의 고통'이다. 삶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자, 고통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다. 이를 이루는 인간인 초인 Übermensch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고통의 무의미성,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아모르파티 Amor Pati에 이른다. 하지만 병구는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안드로메다 왕자 강만식은 병구의 삶을 두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한 실험을 진행한다. 병구에게 내린 고통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는 니체의 '창조의 고통'과 맥을 같이 한다. 고통을 통해 강만식과 니체는 인간의 생의지를 판단한다. 강만식은 개기월식이 일어나기 직전 병구에게 마지막 실험 과제를 부여한다. 진정으로 생의 의지를 갖고 나의 가치 창조를 믿고 고통마저도 초월한 초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병구는 자신 설정한 삶의 의지와 목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통을 초월하지 못하고 강만식이 외계인임을 부정하며 순이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둔 마우스 버튼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니체의 말을 빌리면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결국, 병구는 고통을 넘어 사랑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순이는 병구의 조력자이자 그를 초인과 짐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순이는 병구의 계획에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순이는 영화에서 계속 외줄을 탄다. 니체는 평범한 인간과 초인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인간들에게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선언한다. 외줄 위 인간은 두렵고 약한 존재이지만 순이는 인간과 초인 사이 그 긴장을 감수하면서 병구에게 계속 외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순이의 죽음으로 병구는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다.
강만식은 병구가 초인이 되어 위태로운 고통의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길 바랐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영화는 지구 멸망이라는 자극적인 결말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 모든 고통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엔딩 크레디트에서 병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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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페이블> 메인 예고편
어떤 상대든 6초 안에 죽인다! 전설의 킬러 ‘페이블’!
살인 불가! 강제 휴업 중!전설의 킬러 ‘페이블’은 자신을 길러준 보스에게서 1년 동안
일반인으로 살 것을 명령 받아 파트너 ‘요코’와 함께 오사카로 떠난다.
이들은 난생 처음 ‘평범한’ 삶에 적응하려고 성실히 노력하지만
주변에서는 좀처럼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러던 중 페이블에게 소소한 일상을 가르쳐 준 직장 동료
‘미사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
페이블은 과연 보스의 ‘아무도 죽이지 말고 평범하게 사는’ 미션을 통과하고
미사키를 구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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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웨인> 공식 예고편
질풍노도의 시기지만 마음은 따뜻한 열여섯 웨인.
방금 사귄 애인델을 오프로드 바이크에 태우고 도난당한 아버지의 유산인 1979년식 슈퍼카를 되찾기 위한 모험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