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21 14:30:50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9선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한다
[오마주 | 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영화는 영화를 오마주하기도 하지만
명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하기도 한답니다.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같이 만나보아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코끼리
어바웃 슈미트 | 마라의 죽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넓은 지평선
더 셀 | 새벽
인히어런트 바이스 | 최후의 만찬
인셉션 |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어린 옥수수
문라이즈 킹덤 | to prince Edward island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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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심(利己心)
사람들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이기심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관용을 베풀며 그럭저럭 선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믿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이다.’ 라는 말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본능, 이기심이 주제인 <라쇼몽>은 갖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를 보여준다.
먼저 이야기 전달 방식을 살펴보면, 액자식 구성으로 액자 밖의 이야기는 라쇼몽에서 자신들(나무꾼과 스님)이 관아에서 겪은 이야기를 나그네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액자 안의 이야기는 하나의 살인 사건에 대해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는 구성을 취한다. 그리고 영화는 역순행으로 진행되며, 액자 밖의 이야기는 현재 시간, 액자 안의 이야기는 과거를 말한다.
현재 시간에서 등장인물은 나무꾼, 스님, 나그네이다. 처음 나무꾼과 스님은 라쇼몽 계단에서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린 나그네는 그 둘이 말하는 “관아에서 겪은 일이 제일 무섭다.” 소리를 듣고 그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다. 여기서 나무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이야기는 과거로 가게 된다.
액자 안의 이야기는 관아에서 시작된다. 처음 나무꾼은 시체를 발견한 최초 목격자로서 관아로 불려와 말하기를, 나무를 하러 산에 가는 길에 여자 모자와 사무라이 모자, 새끼줄을 보았다고 언급한다. 화면이 전환되고 스님이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스님은 오후에 말을 타는 여자와 말을 이끄는 남편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 뒤 도적 다조마루가 붙잡혀 온다. 다조마루는 죽은 남편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상함을 느낀 형사는 다조마루를 체포해 관아로 데리고 온 것이다.
말에서 달리다 떨어진 다조마루를 붙잡았다고 말하자 다조마루는 크게 웃으며 천하의 다조마루가 말에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계곡물을 잘못 먹어 복통이 나서 쓰러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조마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흘 전 오후 지나가던 부부의 모습을 보는데 다조마루는 부인에게 첫 눈에 반하고 만다. 그는 여인을 뺏기 위해 남편을 속여 딴 곳으로 보낸 뒤, 여인을 꼬셔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 여자의 모자가 풀에 걸려 떨어지게 된다. 남편이 있는 곳까지 도착 했지만 남편이 보이지 않았고, 여인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뒤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다조마루는 여자를 차지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조마루는 남편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여인이 ‘둘 중 살아남은 사람을 따라가겠다.’라고 말하자 남편과 도적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싸우게 된다.
결국 다조마루가 승리하자 여인은 도망가고 자신 또한 달아난 것이라 말한다. 다음 증인으로 여인이 등장한다. 여인의 진술과 다조마루의 진술은 일치하지 않았다. 여인은 대 도적 다조마루 앞에서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그저 남편이 보는 앞에서 겁탈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며 슬피 운다. 다조마루가 여인을 떠나고 난 뒤 아내는 남편에게 서러움을 토로하지만 남편은 자신을 매정한 눈으로 쳐다 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낀 여자는 정신을 잃고, 다시 깨어나 보니 남편이 단도에 찔려 죽어있었다고 말한다. 남편의 시체에서 도망치면서 강물에 몸을 던지면서 자살을 기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였다고 슬피 울며 관아에 고한다.
다음 증인은 빙의 된 남편이 진술을 시작한다. 남편은 아내가 겁탈을 당하고 아내는 다조마루와 도망가려는 순간 다조마루에게 남편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정이 떨어져 여인을 밀어내고, 남편에게 ‘저 여인을 내가 죽일까 아니면 당신이 죽이겠냐’고 물어왔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도적을 용서했지만 여인은 이미 도망갔고 다조마루는 남편을 풀어준 뒤 사라진다. 한순간에 아내를 잃게된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져 자살을 했다고 진술한다.
마지막 목격자의 진술은 다조마루는 무릎을 꿇으면서 여인에게 같이 살자고 빌었지만 여인은 아무말 없이 남편의 새끼줄을 끊는다. 그 의미를 깨달은 다조마루는 남편과 싸우려고 하는데 남편이 저런 정조없는 여자는 필요없다며 쓰레기만도 못하다고 비난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도 여인을 버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여인은 광기에 휩싸여 남자면 남자답게 칼로 싸워서 여자를 쟁취해야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남자들을 조롱한다.
그 말을 들은 다조마루와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하는데,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허우적대대며 속된 말로 개싸움을 보여 준다. 나름대로 치열한 싸움 끝에 남편을 찔러 죽인 다조마루는 여인에게 다가가지만 여인은 도망친다. 힘이 풀린 다조마루는 여인을 잡지도 못하고 겨우 자신의 몸만 추스리고 도망친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진실이다. 아내는 지조를 버리고 남편을 죽이려고 한 이기심을 숨기고 싶어했고, 도적 다조마루는 기세등등한 도적인척 굴었지만 여인에게 굴복하고 싸움도 약한 잔챙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잃고 싸움에도 진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한다.
<라쇼몽>은 앞서 말했듯이 역순행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진술로 빠르게 전환되는 이야기는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취함으로써 사람이 자신이 이기적인 본성을 숨기려는 메카니즘을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된다.
다조마루는 자신이 최고의 도적이라는 권위를 지키고 싶어 했다. 여인은 가련하고 연약한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남편은 요망한 아내에게 당하지만 남자 대 남자로서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여인을 용서하는을 무사로 보이기를 원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못나게 비춰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무꾼이나, 스님처럼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며, 이기적인 사람들도 교화가능하다고 말하는 인물들조차 결국은 이기적인 사람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나그네 또한 힘든 상황 속 아기의 보자기를 훔쳐가는 행동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잘 드러낸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갓난아기를 발견한 나무꾼은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는 무언가 결심한듯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이기적인 세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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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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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작업
부모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작업
*개봉 전에 배급사 알토미디어㈜ 측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이 교차되며 전개된다. 릴리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현재는 컬러로, 그녀의 기억과 편지를 통해 영화 속에서 재현된 과거는 흑백으로 표현된다. 이 영화의 흑백 씬들을 보다 보면 그것이 극 연출인지 실제 역사 기록물인지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당시 스웨덴 수용소에 있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아카이브 영상으로,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 곳곳에 삽입한 것들이다. 역사적 사실의 기록물과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씬들, 그 근원이 되는 릴리의 기억과 편지의 내용들이 영화 안에서 섞인다.
영화 말미에 가서 이 영화를 부모에게 바친다는 문구를 보면서도 충분히 추측 가능하지만 영화의 감독 피테르 가르도스는 미클로시와 릴리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의 아들이다. 이 영화는 감독 부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감독은 영화화 이전에도 이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 <새벽의 열기>를 집필했었는데 이 소설 또한 영화의 원작 격이라 볼 수 있다.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릴리에게 편지를 건네받는 남자는 감독 자신이며 감독은 자신이 자신 부모가 서로에게 보내던 편지를,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느낀 모든 것을 관객에게 최대한 온전히 전달하려 노력했다.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는 서사 사이사이의 부족한 공백에는 편지 내용과 어머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감독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여느 영화 속 인물들은 실의에 빠지거나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은 생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미클로시는 그런 전형적 성격의 인물들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자마자 남은 삶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 믿고 행동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게 요양원에 있는 117명의 여자에게 117통의 편지를 보내 무턱대고 자신과 사랑하고 결혼할 사람을 찾는 그의 행동은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끝내 성사되고, 그는 릴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키워 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직접 요양원으로 찾아간다. 주치의는 그의 건강상태를 걱정하며 그를 만류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2,500km의 먼 여정을 떠난다. 오직 릴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건 두 사람의 아픈 신장과 폐뿐만이 아니다. 릴리의 친구 유디트는 릴리에게 집착하며 릴리가 모르게 미클로시가 보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가 선물한 겨울 외투 옷감을 가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등의 행동을 한다. 릴리는 확증을 찾지는 못하지만 심증만 갖고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감독의 상상력은 여기에 가미되기도 했다. 유디트에 대한 묘사는 감독 어머니의 당시 친구 유디트가 그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반 의심 반 확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것에 살을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 사랑에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종교였다. 두 사람은 유대교인이지만, 릴리는 유대교가 아닌 개신교 신자로 거짓 등록된 상태였고, 이 점은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는다.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미클로시는 결국 그녀를 따라 개신교도로 개종해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종교보다도 사랑을 택한 것이다. 이들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이들 소식이 스웨덴 랍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랍비는 은밀하게 두 사람을 설득해 유대교식 결혼을 치르도록 돕는다. 많은 난관이 닥쳤으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이들의 사랑을 막지 못했고,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된다.
무모해 보였던 미클로시의 선택이 점점 맞아 들어가며 그가 자신의 연인 릴리를 찾아 사랑을 하고 결국 결혼까지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 가슴 뜨거운 순수한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듯하다. 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고, 수용소와 요양원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임에도 두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고 서로만을 바라보며 그 난관들을 헤쳐나간다. 영화는 두 사람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로써 재현해내며 그들의 발자취를 차례로 되짚어본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키워가는 모습은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일 테다.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랑이자 낭만이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의 말도 안 되는 모든 것들이 감독 부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은 다시금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에서 편지라는 두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체는 얼마 전 개봉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의 물성(物性)과 감성(感性)을 가득 담아 내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그려낸다.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들의 편지를, 부모의 기억을 감독이 필자가 되어 관객에게 긴 편지 한 통에 써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내용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되짚어보고 기억하려는 태도와 함께.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두 사람의 러브레터를 담아낸 영화이면서 또한 자식인 감독이 자기 부모에게 보내는 열렬한 러브레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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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 밖의 세상에 나온 수학 천재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1742년, 독일의 수학자 골드바흐(Goldbach)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수학적 추측입니다.
골드바흐는 알았을까요? 자신의 추측이 2세기가 훌쩍 넘도록 증명되지 않고, 먼 미래에도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미해결 문제로 남는 것을요. 그리고 이 추측을 소재로 하는 성장 로맨스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을요. 해결되지 않은 수학적 추측을 둘러싼 성장과 로맨스를 그린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마거리트의 정리>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2024년 6월 27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마거리트의 정리
Marguerite’s Theorem
Summary
명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세계 난제 ‘골드바흐의 추측’에 관한 연구를 증명하는 세미나에서 오류를 범하고 만다. 그날 이후 충격에 빠져 학교를 그만둔 ‘마거리트’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안나 노비옹
출연: 엘라 룸프, 장 피에르 다루생, 줄리앙 프리종
'마거리트'는 연구교수를 꿈꾸며 대학에서 수학을 탐구하는 여성 수학자입니다. 그의 수학적 사명은 바로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것. 수학 천재 '마거리트'와 기자의 대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골드바흐의 '정리'를 연구하고 있지 않냐'는 기자의 말에 '골드바흐의 '추측''이라고 정정하는 '마거리트'의 모습이 나오는데요. 이처럼 수학자에게 증명을 거치지 않은 문제는 완벽하게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마거리트'는 3년째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갖고 연구해 온 증명을 발표하는 세미나 자리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신과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루카'에 의해서 말이죠. '마거리트'는 그간의 연구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허탈함, 다른 주제,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보라는 스승에 대한 배신감, '루카'를 향한 질투심에 휩싸이며 제2의 집과 다름없었던 학교를 제 발로 뛰쳐나갑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이렇게 시련을 맞닥뜨리고 수학 밖의 세상에 발을 내디딘 '마거리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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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너드 걸의 매력
공부만 잘하고 세상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드 보이의 이야기는 많지만, 너드 걸의 이야기는 흔치 않습니다. <마거리트의 정리>는 그 희귀한 포지션을 딱 낚아채는 영화입니다. 수학이 삶의 전부였던 '마거리트'는 수학 밖의 세상에 뛰어들면서 너드 걸의 고군분투를 보여줍니다.
너드 캐릭터의 매력은 엉뚱하면서도 어리숙한 면에 있지만, 이 너드 걸의 매력은 조금 다릅니다. 수학만 보고 살아온 너드지만, 세상을 알아가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이 없죠. 추론을 시도하며 사실을 증명하고, 문제가 있으면 즉시 해결하며, 언제나 새로운 길을 탐구하는 게 익숙한 수학자의 습성이 발휘된 걸까요? '마거리트'는 수학을 대할 때처럼 거침없이 세상을 알아갑니다. 쭈뼛거리는 것 없이 옷 가게에서 일해보고, 클럽에도 가보고, 남자도 하나 골라잡아보고, 흥미로워 보이는 마작판에도 뛰어들어 보죠.
그렇게 나 홀로 연구하는 수학의 세계에서 살던 '마거리트'는 비로소 수학 밖 '함께'의 세상을 배웁니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질투심을 느꼈던 '루카'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고, 수학보다 더 신경 쓰이는 사랑까지 경험하죠.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 다시 한번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할 길을 찾아 나섭니다. 모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을 경험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수학을 어려워하지만, 어찌 보면 '사실 - 추론 - 증명'으로 구성된 수학은 복잡다단한 21세기의 세상보다는 훨씬 더 간결해 보입니다. 21세기는 말이 되지 않는 설문조사도 답만 나오면 통계의 근거로 쓰고, 집세로 건네준 돈을 룸메이트가 홀라당 써버리기도 하는 비논리적인 세상이니까요. 이처럼 혼잡한 세상에 파묻혀 사는 우리들이기에, 처음으로 간결한 수학 속 세상에서 복잡한 수학 밖 세상에 나온 '마거리트'의 성장을 더욱더 응원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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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을 견디는 자세
영화에서는 사제지간도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극 중 '마거리트'는 증명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도 오랜 시간 같은 주제를 연구해 온 지도교수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더 분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대학을 떠난 후, 다시 골드바흐의 추측에 도전하는 것도 지도교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치죠. 결국 '마거리트'는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데 한 발짝 다가가는 성과를 냅니다.
교수는 오류가 발견되자마자 세미나 자리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를 미성숙한 학자라며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패한 '마거리트'의 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증명을 세상에 선보이는, 다소 쩨쩨한 짓을 하죠. 그러나 학교를 박차고 나선 '마거리트'가 자신이 평생을 도전해 왔던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는 오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청출어람, 스승보다 나은 제자를 뜻하는 말이죠. 어쩌면 교수는 학자로서 '마거리트'에게 약간의 질투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증명을 향해 자신보다 먼저 나아가는 제자를 보면서요. 하지만 종국에는 '마거리트'가 정리한 증명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학자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학의 진보이며, 그 진보를 이끌어 낸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 저도 모르게 뿌듯했기 때문이겠지요. 교수는 진정한 스승의 표정을 내비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쟤가 내 제자야'를 시전합니다.
성장 로맨스 영화에서 사제지간에 자꾸만 눈길이 간 것은 마음속에서 던진 '나였다면?'의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과연 청출어람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교수의 심경 변화를 유추해 보며, 언젠가 나에게도 제자가 생긴다면 스승에게 청출어람보다 더한 성공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섣부른 다짐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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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에 굴하지 않고 수학적 증명이라는 목표를 이뤄가는 '마거리트'의 성장과 귀여운 로맨스가 담긴 영화 <마거리트의 정리>. 지금까지 '메디컬 로맨스 코미디' 같은 장르는 들어봤지만, '매스매틱 로맨스 코미디'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재치 있는 연출과 대사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육성으로 터지는 웃음을 참아가며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수학을 소재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마거리트의 정리>를 감상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One-Liner
수학 밖의 세상을 당차게 헤쳐 나가는 너드 걸의 매스매틱(Mathematic) 로맨스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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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갈린 심장의 박동, 하트비트 (Les amours imaginaires, 2010)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말하는 자비에 돌란. 이번에는 짝사랑인지 모를 어중간한 경계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세 인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친한 친구인 프랑시스와 마리가 우연히 알게 된 니콜라를 좋아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특유의 감각적인 영상미를 더해 표현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과 새로운 친구로의 관심이었지만, 뒤이어 사랑이라는 단계로 나아가며 두 인물의 암묵적인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평소엔 자주 집을 들르며 가볍게 차를 마시거나, 서로의 옷을 추천해주며 소소한 것까지 챙기는 사이에서 어느새 조금씩 관계의 균열이 생긴다. 나중엔 니콜라에게 주려고 산 선물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둘이 갈 만한 식당에 미리 들어와 우연한 만남임을 가장하는 듯 관심을 받기 위해 사소한 것들로 유치한 편법을 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쌍방이 아닌, 너무 일방적인 사랑이지만 이에 대응하는 니콜라의 태도 또한 두루뭉술하다. 이 모든 행동들을 다 그저 우정으로 치부해버리는 듯, 이 상황에 연연하지 않고 둘과의 만남을 즐길 뿐이다.
#솔직한 감정선과 미장센
관객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혼란스러움을 겪는 프랑시스와 마리의 입장에 더 공감하고, 좋지 않은 끝에 도달할 것을 알지만 적극적으로 애정을 주는 이 둘에게 왠지 모를 연민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이 겪는 슬픔과 공허함이라는 경험이 우리에게 더 익숙해서가 아닐까. 영화와 같은 매체들에서 사랑은 꽤나 이상적으로 그려지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가장 보편적이고 개인적인 감정 속에서, 어쩌면 가장 내밀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속성이 바로 사랑을 함으로써 수반하는 아픔일 것이다. 짝사랑은 항상 아프고 외로우며, 그렇기에 세 인물이 함께하는 장면들은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지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런 모습들을 미묘한 표정 변화와 강한 원색의 빛으로 돌란은 우리가 그 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의도한다. 다른 누구와 밤을 보내거나 함께 있을 때, 프랑시스와 마리는 그제야 자신의 솔직한 좌절감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린다. 이때 파랗고 빨간빛들로 그들을 비추어 날것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화보를 연상시키는 몇몇 연출들로 돌란만의 미장센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구성의 변화와 결말, 원제의 의미
초반부와 중후반부에 독특한 구성이 있는데, 크게 두 챕터로 나뉜 독백 파트가 존재한다.
처음엔 사랑의 환상에 빠지게 되는 순간, 다음엔 그 환상이 걷어지고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을 영화밖에 존재하는, 여러 인물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시점을 기준으로 세 인물들의 사랑의 방향은 서서히 달라진다. 영화 자체의 스토리 라인에는 반영되지 않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볼 수 있어서 좋은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이고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고리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대상이 변하는 것이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재밌게 표현한다.
<하트비트>의 원제 Les amours imaginaires, 다시 말해 ‘상상 속의 사랑’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보통 잘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씌워놓은 환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속에 갇힌 사랑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박히는 아픈 가시일 뿐인 것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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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에서 튀어나온 무색무취함의 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헤어진 형 새뮤얼 드레이크가 남겨준 추억과 반지를 간직한 채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네이선 드레이크(톰 홀랜드)'. 어느 날, 그는 늘 그렇듯이 손재주를 발휘해 손님의 귀중품을 훔치던 사이 ‘설리’(마크 월버그)로부터 인생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잠적한 형의 소재를 찾고, 동시에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마젤란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자는 것.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네이선은 설리와 함께 마젤란과 그의 선원들이 남긴 기록을 살피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힌트들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대한 보물을 노리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고, '몬카다(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위협과 추격 속에서 네이선과 설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에 발을 내딛는다.
<언차티드>는 너티 독이 개발한 플레이스테이션용 액션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MCU의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마크 월버그가 각각 네이선 드레이크와 빅터 설리번 역을 맡았고, <좀비랜드> 시리즈와 <베놈> 1편을 연출한 루벤 플레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많은 게임 원작 영화처럼 <언차티드>는 기대보다 우려가 큰 작품이었다. 물론 화려한 배우와 감독의 면면과 본편만 4개고 외전도 2개나 출시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원작의 존재는 기대를 키우는 요소였다. 그러나 게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중 성공적이라고 할만한 선례가 많지 않은 것, 신선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액션 어드벤처 장르인 점은 그 기대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예상대로 <언차티드>의 결과물은 본편에서 잔뜩 예고하는 속편이 왜 필요한 지조차 설득시키지 못하는 무색무취함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우선 <언차티드>는 유명 게임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다는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영화는 원작 게임 시리즈의 스토리 라인이 시작되기 이전을 그려내는 일종의 프리퀄 같은 위치에 있다. 실제로 오프닝과 동시에 등장하는 비행기 화물 클라이밍 씬, 게임 음악을 변형한 메인 테마곡, 네이선의 형인 샘이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등의 부분적인 유사점을 제외하면 철저히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는 네이선과 샘의 관계, 샘과 설리의 관계, 네이선의 반지와 같은 주요 소품 등에 대한 설정을 원작과 다르게 묘사한다. 문제는 과한 각색과 오리지널 설정의 삽입이 팬들의 비토를 이끌어내는 주된 원인이 되고, 이는 게임 원작 영화가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라는 사실이다. 자연히 <언차티드>는 굳이 게임의 이름을 달고 나올 정도의 영화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언차티드>가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이점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안전한 길만 답습하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는 마젤란의 세계일주에 보물 찾기라는 상상력을 더하고 있는데, 이 상상력은 예측 가능한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마젤란이 여행 중 필리핀 막탄 섬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는 점만 알아도 보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마젤란의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는 의미의 제목인 '언차티드(uncharted)'는 물론, 보물을 쫓는 주인공들의 겪는 고생과 역경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같은 문제는 영화의 쿠키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쿠키 영상은 나치의 숨겨진 보물을 언급하며 속편을 암시하는데, 나치가 찾거나 감춘 보물은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레드 노티스> 같은 작품에서도 곧장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한 소재다.
한편,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도 <언차티드>는 다른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대목을 찾기 어렵다는 패착을 둔다. 일반적으로 <인디애나 존스>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대표되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들은 다음의 스토리 진행을 공식처럼 따른다. 전설 혹은 역사 속 미스터리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이 실재함을 깨달은 주인공은 팀원과 의기투합하여 그 보물을 추적하지만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끝에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그 역경까지도 극복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반드시 보물이 아니라 해도 그에 못지않은 마지막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이는 결국 어드벤처 영화가 무언가 변화를 주거나 자신만의 매력을 뽐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며, 그나마 화려한 볼거리를 뽐내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차티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일단 잔뜩 힘을 준 듯 보이는 액션은 무미건조하다. 네이선과 설리가 보여주는 육탄전은 그 구성이 아주 재치 있거나 유머러스하지도 않고, 색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두 인물의 특성이나 성격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클라이맥스 장면은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듯 보인다. 헬리콥터가 범선을 인양해 가는 가운데 범선의 구조를 역이용하거나 배에 딸린 대항해시대 당시 무기나 대포를 이용하는 액션은 분명 생동감을 불어넣기 충분한 장면이다. 다만 이조차도 분량이 얼마 없고 짧게 지나치기에 순간적인 서프라이즈로서의 기능은 할지 언정 그 이상의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한다.
이에 더해 <언차티드>는 두 주인공인 네이선과 설리에게 어떠한 매력도 부여하지 못했다. 인디아나 존스, 툼 레이더, 잭 스패로우처럼 계속 보고 싶게 만들고 대체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당장 네이선은 배우인 톰 홀랜드 혹은 그의 대표 캐릭터인 피터 파커로 보일 뿐이고, 설리 역시 그저 마크 월버그라는 배우로만 보인다. 두 캐릭터 모두 그저 기능적으로 소비되다 보니 그들이 주체적으로 사건을 이끌어간다기보다는 사건에 이끌려 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작중 네이선과 설리의 파트너십 형성 과정 묘사가 단적인 예시다. 형의 영향을 받아 과거 탐험가들의 모험과 전설에 심취한 네이선은 모험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고, 보물을 찾는 것보다도 오래전 헤어진 형과의 재회에 더 기뻐하는 낭만파다. 반면에 설리에게는 그 어떤 낭만도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은 오로지 보물을 찾고 부자가 되려는 목표의 수단일 뿐이다. 가족의 죽음이나 죄책감마저도 그 욕망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영화는 이처럼 가치관이 극과 극으로 다른 두 인물이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점차 신뢰를 쌓아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언차티드>라는 제목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물질적 가치보다 더 뜻깊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영화는 이 대목에 설득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두 인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문다. 대신 원래 이 둘은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려는 듯 유사한 대사와 갈등, 반복되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렇게 평면적이고 작위적인 설명과 묘사 때문에 둘이 마지막 순간 서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통해 메시지를 완성 지으려는 노림수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된다. 결국 이들의 파트너십은 아무런 감흥도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게임 원작 영화인 것이나 어드벤처 장르 영화임을 차치하더라도, 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어설픈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언차티드>는 좀처럼 관객들을 긴장시키지 못한다. 보물찾기 힌트가 지하 터널이 아니라 패스트푸드 음식점 혹은 클럽에 숨기는 식으로 클리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나, 완벽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힌트와 조력자의 도움은 네이선의 여정을 너무나도 매끈하게 다듬어 준 나머지 오히려 몰입을 저해한다.
그럴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악역들의 드라마를 지나치게 얕고 빠르게 다루면서 그들을 손쉽게 소비하는 전개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거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데 빌런 간의 갈등이나 배신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최소한의 암시만 주어진 채 배신을 일삼다 보니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영화에서는 허무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지극히 무난한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영화를 보고 나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어떠한 장점도 특색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사실 <언차티드>는 제작 과정 중에 수차례에 걸쳐서 제작진과 감독이 교체되는 난항을 겪은 바 있다. 심지어 주연 배우인 톰 홀랜드마저 GQ 인터뷰에서 "아주 터프하고 자신의 내면을 잘 보이지 않고 심각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내 근육이 제대로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만 신경 쓴 거 같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언차티드>의 무색무취한 결과물이 아주 놀랍지만은 않다.
P(Poor, 형편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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