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5-21 14:30:50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9선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한다
[오마주 | hommage]
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영화는 영화를 오마주하기도 하지만
명화에서 영감을 받거나 오마주 하기도 한답니다.
오마주한 장면은 다시 명장면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속 장면들
명화를 오마주한 영화 같이 만나보아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 코끼리
어바웃 슈미트 | 마라의 죽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넓은 지평선
더 셀 | 새벽
인히어런트 바이스 | 최후의 만찬
인셉션 |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 | 어린 옥수수
문라이즈 킹덤 | to prince Edward island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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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기와 따뜻함, 그리고 상실의 그림자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으면, 사람은 포기보다는 다시 도전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각자의 목표가 있다. 그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실패를 맛보면 그것을 만회하려 하거나 해결 방법을 찾는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어떤 이는 포기하지만, 또 다른 이는 다시 일어선다. 계속 시도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에서 최대의 결과를 끌어내는 사람, 끝내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속 주인공 탄지로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본래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혈귀에게 가족을 잃고, 마지막 남은 여동생 네즈코마저 혈귀가 되어버리면서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후 탄지로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생긴다. 혈귀의 우두머리 키부츠지 무잔을 쓰러뜨리고, 여동생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는 것. 아무 능력도 없던 소년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갈아 넣어 점점 강해져 가는 과정은 이 시리즈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자 감동이다.
[첫 번째 감정] 탄지로의 끈기
탄지로의 가장 큰 힘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한계에 몰려도 다시 일어난다.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다잡고, 남은 힘조차 짜내어 자신에게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되뇌인다. 그리고 또 한 번 일어선다. 이 과정에서 탄지로는 자신만의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다시 시도한다. 단순히 재능이나 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버티고, 끝내 나아간다. 이번 영화에서도 탄지로는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다. 그에게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던 관객들도, 이번엔 혹시라고 생각하며 그가 쓸 다음 방법을 궁금해하게 된다.
그의 성장은 기초부터 쌓아 올린 결과이기에 관객은 그가는 행동에 대해 신뢰할 수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고통과 인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지로가 새로운 기술을 깨닫고 싸움의 흐름을 뒤집을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환호하게 된다. 그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닌, 그가 쌓아온 시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탄지로의 눈빛이 변하고, 새로운 기술을 쓰는 그 순간, 관객은 느낀다. 이제 탄지로의 그 끈기가 결과를 보는 순간이라고.
끈기는 탄지로를 단순한 소년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응원받을 수 있는 영웅으로 만든다. 그가 이 이야기 속에서 해온 자신과의 싸움은, 자연스럽게 관객이 자신의 삶속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끝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탄지로는 그런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는 캐릭터다. 그런 탄지로의 모습을 따라 관객도 다시 도전한다. 영화는 그렇게 탄지로의 끈기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두 번째 감정] 탄지로의 따뜻함
탄지로는 자기 객관화가 뛰어나며, 스스로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늘 따뜻한 마음이 있다.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직전 극장판 <무한열차편>에서 잠든 일반 승객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고, <환락의 거리 편>에서도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깊은 슬픔과 분노를 드러냈다. 어쩌면 그의 싸움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런 마음은 점점 더 탄지로가 움직이는 동력이 되어간다.
이번 영화에서도 탄지로는 주 기유를 돕는다. 기유는 과거 탄지로와 네즈코를 처음 구해준 인물이기에, 탄지로에게 더욱 각별한 존재다. 그는 기유 곁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자처하며 끝내 싸움에서 힘을 보탠다. 강력한 적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그는 혼자가 아닌 함께 싸운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기유는 처음엔 탄지로를 보호하며 싸움을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싸움이 길어지면서 서로 상화보완하고 도와주는 상황으로 변한다. 따뜻함은 그 모든 상황을 감싸고 있다. 마치 탄지로의 따뜻함이 기유와 탄지로 주변을 감싸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탄지로의 따뜻함은 결국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준다. 남을 위해 나서는 순간, 그는 이전보다 더 큰 도전에 직면하지만 동시에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그 마음은 단순한 성격적 특성이 아니라,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래서 탄지로는 이미 모두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영화의 말미, 그 따뜻함은 적인 혈귀 아카자에게도 뻗어나간다. 극악한 악당처럼 보이던 아카자도 탄지로와의 싸움에서 읿어버렸던 자신의 감정을 발견한다.
[세 번째 감정] 아카자의 상실감
아카자는 <무한열차편>에서 주 렌고쿠를 죽인 장본인으로, 많은 관객에게 미움받는 인물이다. 이번 영화에서 다시 등장해 탄지로와 기유와의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귀멸의 칼날> 시리즈가 늘 그렇듯, 악역 혈귀에게도 과거 사연이 부여된다. 플래시백을 통해 아카자의 과거가 드러나는데, 그는 불우한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으려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깊은 상실감을 안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강력한 혈귀라는 악당들에게 숨겨진 서사를 보여주며 그들이 어떤 감정 때문에 혈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천천히 보여준다.
무잔이 그를 혈귀로 만들면서 아카자의 기억과 감정은 지워진다. 아카자를 강력하게 감싸던 상실감은 사라지고,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만 남는다. 영화 후반부 아카자가 다시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순간, 아카자는 혈귀로서의 욕망과 인간으로서의 슬픔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때 드러나는 진짜 아카자의 얼굴은 오히려 가슴 아프다. 그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상실감에 무너진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 상실감은 아카자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파괴하기도 한다. 결국 그가 강력한 혈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상실에서 비롯된 집착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으며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모는 관객을 복잡한 감정에 빠뜨린다. 미움과 연민이 교차하는 순간, <귀멸의 칼날>이 전하려는 진짜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뛰어난 화면 작화와 좋은 캐릭터가 만드는 <귀멸의 칼날> 세계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단순한 액션 애니메이션을 넘어, 끈기/따뜻함/상실감이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다룬다. 애니메이션 그래픽 회사인 언포테이블 특유의 정교한 작화는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직원들이 자신의 몸을 갈아만든듯한 엄청나게 아름다운 무한성의 이미지와 공간을 활용한 액션 연출은 압도적이다. 특히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공간과 호흡감 있는 전투 연출은 극장에서 경험해야 할 장면들이다.
영화의 음향 역시 큰 장점이다. 숨을 고르는 소리, 칼이 부딪히는 울림,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잔향은 관객을 그 싸움 한가운데에 놓는다. 다만 중간중간 길게 이어지는 회상신은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이는 <귀멸의 칼날> 시리즈 전반의 정서적 특성이자, 인물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앞으로 개봉할 후속편에서도 이 방식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캐릭터들의 감정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작화와 액션은 그 몰입을 더욱 강화한다. 앞으로 이어질 종장 3부작의 두 번째 영화는 2027년, 세 번째 영화는 2029년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다시 한 번 다양한 캐릭터들의 감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 속 무잔의 존재는 이 시리즈에서 ‘절대악’의 얼굴을 한다. 그는 단순히 강력한 적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공포와 욕망 그 자체다. 무잔에게는 인간적 감정이 지워져 있으며, 그가 움직이는 동력은 오직 자기 생존과 권력에 대한 집착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집착은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무잔은 관객에게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가 증폭된 존재로 다가온다.
이 절대악의 서사는 시리즈 전체를 긴장감 있게 만든다. 무잔은 탄지로의 끈기, 그의 따뜻함, 아카자의 상실감과 대조를 이루며 ‘인간다움의 부재’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무잔과의 대결은 단순히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성의 존속을 위한 싸움처럼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무잔이 짧게나마 드러내는 존재감은 앞으로 이어질 종장의 방향성을 예고한다. 무잔은 결국 ‘감정이 없는 자’로 그려지지만, 바로 그 공허함이 가장 큰 위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으로 이어질 무잔과의 마지막 대결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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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곱씹어야 할 대상은 전두환이 아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군사반란이 발생했다.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이 자기 휘하 사조직 하나회를 이용해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를 체포하고, 정국을 장악하려 한 것. 하지만 반란은 전두광의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대통령은 협조하지 않고, 정 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반란 계획이 들통난 것. 이에 전두광은 절친 '노태건'(박태준)을 통해 최전선 전방 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반란군은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한다. 비록 육군 본부는 패닉에 빠지고, 국방부 장관도 행방불명이 되었지만 최후의 보루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 그는 서울 근방 전 부대에 반란 진압 명령을 내리고, 육군특수전사령관 '공수혁'(정만식),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등과 진압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걸고 전두광과 전면전을 펼치기 위해.
<서울의 봄>, 박제가 아닌 거울이 되다
한국 영화 속 전두환은 공공의 적이다. <26년>, <1987>, <택시운전사>, <헌트> 등에서 그는 직간접적으로 타도의 대상, 응징해야 할 목표물로 등장했다. 영화라는 집단적 환상에서 사회 정의를 바로 잡는, 일종의 영화적 징벌인 셈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나치와 히틀러가 고통받는 것처럼.
다만 이 '환상'을 삐딱하게 볼 수도 있다.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35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는 민주화 신화를 박제할 뿐이라고 느낄 수 있다. 단순히 민주화 운동 에피소드를 담거나, 전두환을 처단하는 내용이면 더 그렇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끝났기 때문.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부정하면 안 되는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즉, 당연한 일에 영화적 심판이 필요한 당위성도 약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서울의 봄>의 위치는 퍽 흥미롭다. 물론 여전히 관성적인 대목이 있다. 총 쏘듯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전두환 정권의 비정상성을 비판한다. 자연히 민주화 항쟁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결정적인 순간 다르다.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아픔에 주목한다. 전두환을 막으려고 몸을 던진 이들과 그들의 실패에 초점을 맞춘다. 달리 말해 <서울의 봄>은 과거의 박제가 아니라 거울에 가깝다.
실화를 전격적으로 공략하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 사실 어렵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된 사죄를 못 받은 만큼, 전두환에 대한 앙심은 불처럼 뜨거울 테니. 이에 <서울의 봄>은 일단 관객의 혼을 빼놓은 후, 서서히 관점을 바꾸기로 결정한다. 그래서인지 초중반부는 마치 전격전을 보는 듯하다. 좋은 의미로 정신이 없다.
<서울의 봄>은 우직하다. 별다른 설명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선다. 전두광과 노태건, 그들에 맞서는 이태신과 정상호의 존재감만 보여준 후 바로 쿠데타 현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진행 과정도 명쾌하다. 복잡한 작전 설명은 없다. 주요 군부대 한 두 개와 지휘관의 현황만 콕 집어 보여주고, 간단한 그래픽으로 상황을 다시 인지시킨다. 컷 전환도 망설임이 없다. 필요한 장면을 보여주면 곧장 다음 씬으로 넘어간다.
이는 실화가 스포일러라는 근본적인 약점을 역이용한 각본, 연출, 그리고 편집이라 할 수 있다. 12.12 군사반란은 결과보다 과정이 낯선 사건이다. 학교에서 현대사를 배울 때 이 쿠데타의 결과와 영향은 외워도, 구체적인 과정은 시험에 잘 나오지 않으니까.
<서울의 밤>은 이를 이용해 스포일러로 향하는 과정을 전부 물음표로 바꾼다. 그 덕분에 작전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막을 수 있을 듯 없을 듯하는 일련의 과정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이 작전이 어떻게 성공한 거지?'라는 의문이 강력한 서스펜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의 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국군과 반란군의 역사적인 밤을 생중계한다.
무리수까지 역이용하다
사실 전격전은 여러 무리수를 낳는다. 일단 캐릭터가 하나같이 평면적으로 묘사되고, 그저 장기짝으로 이용된다. 전두광의 경우 앞뒤 가리지 않고 권력만 좇는 악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태신은 대쪽같이 원리 원칙만 쫓는 인물이다. 그들은 두 진영의 충돌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똑같이 패배하는 역사를 다뤘고, 두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남한산성>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또 전두광, 노태돈, 이태신, 김준엽, 공수혁 다섯 캐릭터를 빼면 반군이든 국군이든 수동적이다. 도망치기 바빠서 직무를 유기한 국방부 장관, 전두광의 영도 없이는 아무런 대책도 못 내놓는 반군 장성, 상황 파악도 못하고 선제 조치를 못 취하는 국군 장성, 국군 통수권자로서 군을 통솔할 생각조차 안 하는 대통령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그러니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억지로 고구마를 입에 쑤셔 넣는 느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의 봄>은 쌓아 올린 긴장감과 분위기를 한 순간도 무너뜨리지 않는다. 답답하고,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지지만 작위적이라거나 과하다는 인상은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조연 캐릭터의 무능은 실화를 묘사했다는 변호가 가능하다. 국방부 장관 '오국상'(김의성) 등의 행적은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의 행적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 오히려 이 대목은 블랙 코미디로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기능도 맡는다.
곱씹을 대상은 전두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의도적인 빌드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두광이 악마처럼 보일수록 이채신의 선과 정의의 화신이 되고, 장성들의 무능함은 탄식을 자아낸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상황에서 탄식은 헛웃음으로, 이내 분노로 변한다. 이채신과 전두광이 경복궁 앞에서 대치할 때 국방부 장관이 재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의 봄>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비로소 풀어놓는다. 단순히 전두환을 비난하는 대신, 왜 마침내 찾아온 봄을 잡지 못했는지 되묻는다. 개인의 권력욕과 일탈을 막을 시스템이 있었는데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규칙을 깬 사람에게는 이미 돌을 던졌으니, 실패한 원인을 되짚어보자고 말한다.
<서울의 봄>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나름대로 그 답을 내놓는다. 답은 시민이다. 특히 자기 책무를 저버린 시민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군인이 권력을 탐내 반란을 일으켰지만, 군인 역할을 맡은 시민 개개인의 힘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한 시대를 상징하는 군인의 이미지 안에서 절망과 희망이 크게 충돌할수록 영화의 울림은 커진다.
이채신이 행주대교에서 반란군의 서울 진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가 총까지 겨눈 부관의 만류도 무시하고 소규모 병력과 무기를 모아 결사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정만식, 정해인, 이준혁 같은 카메오를 활용해 반군에 맞서다가 쓰러진 군인에게 짧게라도 강렬한 임팩트를 준 이유이기도 하다.
제목이 '서울의 봄'이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보면 영화 말미에 군가 '전선을 간다'가 삽입된 이유도 유추할 수 있다. 노래 속 "상처 입은 노송"과 "이끼 낀 바위"라는 가사는 죽어간 전우를 추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라는 후렴은 과거 장병들이 사투를 벌인 후 죽은 자리에서 그들을 잊지 말자는 노래로 들리기도 한다.
<서울의 봄>은 12.12 군사반란을 군가 속 전장에 비유한다. 설령 군사 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이채신의 패배를 되풀이자지 말자고 노래하는 셈이다. 또 열의를 고취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누군가 어떤 방식으로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침해하려 들면, 시민 개개인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저항하자고.
이채신의 퇴장 장면에서도 그 함의를 읽을 수 있다. 이채신이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갈 때, 러닝타임 내내 칼같이 전환되던 화면이 그 순간만큼은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며 그의 퇴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12.12 군사 반란'이 아니라 '서울의 봄'이 더 적절해 보인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만 원망할 게 아니라, 봄이 떠나간 이유를 곱씹어야 봄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마지막 스타일만 좋았다면
다만 <서울의 봄>은 용의 눈동자까지 그려 넣지는 못했다. 2시간 넘게 쌓아 올린 감흥을 마지막 순간 날려버린다. 영화는 하나회 기념사진을 보여주고, 하나회 일원이 각각 역임한 직책을 알려주며 막을 내린다.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내린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마무리는 다소 교조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감독의 말을 일방향적으로 전달하는, 시대를 역행하는 프로포간다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제작자나 감독이 관객을 믿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담긴 처연함과 답답함을 곱씹어 볼 여유만 챙겨 줬어도 <서울의 봄>은 더 오래, 은은하게 뇌리에 남았을 테니까. <서울의 봄>은 그럴 자격이 충분한 영화고, 2023년은 관객이 역사 속 선악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대이므로.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눈 내리는 겨울날, 봄이 떠나간 이유를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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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이스 워커
스페이스 워커
러시아 우주과학 영화. 1963년, 쏘련은 미국과 냉전 체제를 유지하면서 우주 개발 경쟁에 돌입했다. 우주과학에서는 러시아가 앞서고 있는 상황. 미국은 1965년 5월까지 유인우주선을 발사할 계획을 이미 발표했다. 러시아는 이미 유리 가가린이 1961년 4월 12일, 지구인으로는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으며 지구 궤도를 도는데도 성공했다. 유리 가가린은 1968년 일곱 번째 우주비행에 나섰다가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미국이 우주 경쟁에 뛰어든 직접적 사건은 쏘련의 스푸트니크호 때문이다. 쏘련은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곧바로 11월 3일에 스푸트니크 2호를 쏘아올리면서 그 안에 개를 태웠다. 미국은 1958년 1월 30일, 겨우 5kg짜리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지만 며칠 뒤인 2월 3일, 쏘련은 과학 탐사위성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올리는데, 이 위성의 무게는 1.3톤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국은 초조하고 심하게 열 받은 상태였고, 쏘련은 충분히 앞서가고 있었지만, 미국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으려는 시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바로 '유인우주선'이었다.
이 시기의 쏘련과 미국은 냉전 상태로 군비 경쟁과 우주 경쟁에 동시에 뛰어들어 서로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미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미국의 정치,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을 공산주의자로 좌표를 찍어 내쫓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불명예 퇴진을 강요했다. 한국에서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존재했던 '블랙리스트'가 미국에서는 이미 이 시기에 존재했다.
1962년에는 쏘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설치되고 있는 걸 미국 정보기관에서 탐지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발칵 뒤집혔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공포를 미국인들이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런 사태를 쏘련과의 군비, 체제 경쟁으로 끌어들여 미국 - 자본주의 -의 우월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우주 경쟁에서 러시아는 초반에 확실한 승기를 잡고 있었다.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는 미국이 먼저 발표했는데, 이미 쏘련의 유리 가가린이 우주 비행에 성공한 만큼, 이번에는 우주인이 지구 궤도를 돌면서 우주 유영을 하는 단계로 나가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쏘련은 앞서 가고 있었지만, 미국이 바짝 뒤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 우주 유영 프로젝트에서도 앞서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개발 팀에서는 정상적으로 우주선을 만든다면 1967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쏘련 당국은 1965년 3월까지 앞당기라고 주문한다. 개발 팀장은 쏘련 정부의 입장과 실제 개발을 담당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정을 조절해야 하는 압박을 느낀다.
최초의 우주 유영 비행사는 두 명이 선정되었고, 베랄예프 중령과 레오노프 소령이 그들이다. 쏘련 최고의 공군조종사이자 우주인인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우주 유영 우주선 보스호드 1호는 시험 발사에 성공했고, 이제 2호를 쏘아 올리기 직전이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시험 발사는 성공했지만, 우주인을 태워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개발 팀장은 1965년 3월의 일정에 맞출 수 없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두 우주인은 불완전한 우주선이라도 타겠다고 팀장에게 말하고, 두 사람의 의지를 확인한 팀장은 보스호드 2호에 두 사람을 태우고 발사한다. 1965년 3월 18일 오전 10시, 미국보다 한 발 앞선 시도였다.
이 우주선 발사는 세계 최초의 시도였기에, 생방송으로 쏘련 연방에 방송되었다. 보스호드 2호는 지구 궤도에 도달해 마침네 레오노프 소령이 기체에서 나와 최초의 우주 유영을 한다. 이 장면 역시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으며, 레오노프는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브레즈네프와 직접 통화한다.
우주 유영은 성공했으나 다시 우주선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레오노프는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우주복은 뻣뻣하고, 팽창해서 팔이 잘 구부러지지 않았고, 에어록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주복의 팔다리의 관절이 접히지 않아 몹시 고생한다. 여기에 에어록 문이 닫히지 않아 수동으로 어렵게 닫아야 했고, 레오노프는 에어록에서 산소가 소진되어 기절하걸 벨라예프가 살린다.
우주선은 지상 관제소와 통신을 유지하지만 일시적 사각지대가 있고, 이곳을 지날 때는 통신이 끊겨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보스호드 2호는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궤도를 그려야 하는데, 연료 문제로 22시간 동안 지구를 12바퀴 돌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서서히 돌면서 대기권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우주인은 산소중독의 위험에 놓인다. 에어록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산소가 새나와 우주인들이 산소중독을 일으킨 것이다. 지상관제소에서는 원인을 발견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주인이 직접 수리를 해야만 했다. 이미 두 사람은 산소 중독이 시작되고 있었다. 게다가 우주선이 사각지대로 접어들고 있어서 지상관제소에서도 통제할 수도, 상황을 알 수도 없는 위험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레오노프는 새고 있는 산소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번에는 자동착륙 유도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우주선을 수동으로 조정해 지구 궤도에 진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우주선을 수동으로 조정한 것도 이번이 최초였으며,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벨라예프는 우주선의 각도를 지구에 맞추고 엔진을 가동한다. 하지만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하강 각도가 7도 정도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처음 계획했던 착륙지점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내리게 된다.
이때 지상관제소에서는 자동착륙 유도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우주인이 수동으로 우주선을 조작하다 쏘련 땅이 아닌, 미국이나, 중국 땅에 떨어지면 쏘련의 우주 정보가 새나가게 되니 우주선을 추락시키고 두 우주인을 사망하는 것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개발팀장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우주선이 수동으로 지구를 향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대기권을 지나며 우주선 몸체가 차츰 분리되고, 공기마찰로 연소되는데, 우주선은 이런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고 무사히 땅에 착륙한다. 이미 내려올 때 각도 차이로 착륙지점과는 매우 먼 곳에서 내리게 되는데, 이들이 떨어진 곳은 허허벌판, 깊고 깊은 숲속이었다. 영하 35도에 폭풍이 몰아치는 극한 상황에 놓인 두 우주인은 우주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지만 지구에서 다시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두 우주인은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하지만, 너무 넓고,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 두 우주인을 살린 사람은 아마추어 무선사였고, 이 사람의 전화를 받은 지상관제소에서 위치를 확인하니 사할린 숲속으로 밝혀진다. 그 사이에 쏘련 당국은 두 우주인이 지구로 귀환하다 사망했다는 뉴스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주선이 착륙해서 무려 9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생존과 귀환은 쏘련 연방 최고의 뉴스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영웅이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실제 주인공인 레오노프가 자문을 했으니 사실성이 높은 거라 생각한다.
러시아 우주과학 영화는 미국 헐리우드에 비해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지지만, 내용은 훌륭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기 어려운 긴박한 순간들로 이어진다. 때로 쏘련의 체제를 홍보하는 듯한 내용도 잠깐 등장하지만,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우주탐사를 하는 쏘련 과학자들과 우주인의 노력이 돋보이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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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적인 여성의 삶은 반복되는가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후)인 엘리자베트의 삶은 오스트리아의 관광 상품이자 미디어에 끊임없이 소환되는 소재다. 당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극한의 미와 함께 비극적인 삶의 궤적은 많은 예술가들을 설레게 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tv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귀족 혹은 왕족의 삶 자체가 서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데다 호화롭고 화려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채 불행하게 살아간다는 서사는 실화 기반일 경우 그 비극이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끊임없이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대의 인물인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삶은 영화 <다이애나>, <스펜서>를 통해 이미 두 차례나 영화화되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영화 산업가들의 영감으로써 활동할 예정일 테다. 그런데 <코르사주>를 통해 영화화된 엘리자베트의 삶은 마치 <다이애나>와 <스펜서>를 섞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엘리자베트의 삶 자체가 다이애나의 삶과 평행이론을 이루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창작자들의 게으름이 기저에 놓인 탓일까.
20세기의 인물인 다이애나와 달리 엘리자베트는 19세기의 인물이기에 영화에 오스트리아 궁정을 화려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영상 매체에서 영상미를 뽐낼 수 있는 시대는 창작자의 구미를 자극한다. 이에 더불어 극단의 체중 관리로 인해 큰 키에 깡마른 몸매를 유지한데다 임신기간 이외에는 항상 코르셋을 착용한 탓에 암살당했을 때조차 칼에 찔린 줄도 몰랐다는 엘리자베트의 일화는 영화 미술팀을 설레게 하는 소재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클리셰적이게도 영화 제작자들은 이런 화려하고 아름다운 삶 뒤에 숨겨진, 자유를 빼앗긴 채 정신질환에 시달린 소녀감성의 소유자 황후를 소환하고 싶어한다. 근친에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자라면 더 좋다. <스펜서>의 다이애나는 헛것을 끊임없이 보고 <다이애나>의 다이애나는 진실한 사랑을 꿈꾸며 다른 남자의 품을 찾았다.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 모두 실존 인물이고, <스펜서>가 상당 부분 각색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감안할 때 영화화 방식이 아닌 삶이 반복되는 것이라는 변명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는 분명히 별개의 인물이다. 두 인물의 일대기를 비교해 볼 때 다이애나비와 엘리자베트는 결코 평행이론에 등치시킬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부모로서는 실격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엘리자베트와는 달리 다이애나는 자신의 아이들이 유모와 더 친해지는 것을 싫어해 유모를 해고한 적이 있을 정도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남편에게 정부를 들여주고(영화에 이 장면이 등장한다) 호화로운 여행을 다녔던 엘리자베트와는 달리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자선 활동을 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19세기의 인물인 만큼 20세기의 인물인 다이애나보다는 폐쇄적인 삶을 강요당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를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폐쇄적인 황실에서의 삶과 비극적인 죽음, 세간의 관심(특히 외모에 치우쳐진)을 제외하면 사실상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트와 다이애나를 다루는 미디어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며, 방식을 떠나 미디어가 집중해온 삶의 시기마저 비슷하다.
다이애나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이혼, 그리고 수많은 염문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며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가 <다이애나>다. 혹평 세례로 마무리되었던 이 영화는 불행했던 다이애나비의 삶에서 한 줌의 위안을 주었던 비밀 연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코르사주>의 엘리자베트가 사촌과 승마 친구 등과 바람을 피우는 장면에 등치된다. 감독의 상상력이 많이 덧붙여지긴 했지만 영국 황실의 비합리성(
추운 겨울에도 그놈의 전통을 들먹이며 애들도 있는데 난방도 안해준다든지..)을 폭로하며 다이애나비의 불행했을 황실에서의 삶을 묘사한 영화가 <스펜서>다. <다이애나>와는 달리 호평받았고 주연으로 열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특히 찬사를 받았지만 호화로운 삶 뒤에 숨겨진 다이애나비의 불행한 삶을 묘사하는 데 정신질환을 이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 이는 평생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며 정신병동의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의 모습과 겹친다. 20세의 나이로 결혼해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 아이들만을 바라보며 혼인 생활을 유지했고, 결코 놓아줄 것 같지 않았던 영국 황실을 떠난 후에도 자선 활동을 이어갔던 다이애나비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정신질환을 앓을 만큼 다이애나비가 나약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불행한 다이애나비의 삶을 그리기 위해 다이애나가 낡은 스펜서 저택에서 헛것을 본다는 쉬운 설정을 선택했다.왕족 혹은 귀족 출신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여성들의 삶을 그려내는 데 있어 영화들이 지겨울 만큼 비슷한 전략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조차 여성의 신분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불행 포르노를 취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거부하고(자식들 입장에서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겠으나) 경호원 하나 없이 시녀들만을 거느린 채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다는 엘리자베트나 스펜서 가문의 부와 엄청난 이혼 위자료를 갖고도 자선 행적을 보인 다이애나비의 삶은 다채롭게 그려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드라마를 위시한 온갖 미디어는 이들의 불행에만 포커스를 맞춘다. 하지만 왕족과 귀족이 아니라도 사람의 삶은 행복과 불행의 집합체다. 그 중에서 무엇을 골라 집중할 것인지는 온전히 창작자의 역량이며, 여성 인물들이 유독 불행에 포커스가 맞춰진다면 그 진의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화려한 왕실을 떠나 다양한 세상을 구경한 엘리자베트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려 했던 다이애나비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소환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여성 작가들의 전기를 그릴 때 유독 로맨스나 어머니로서의 삶에 포커스가 맞춰져온 것처럼(<비커밍 제인>, <메리 셸리>, <아스트리드>) 여성 귀족들의 삶은 화려함과 불행이라는 단어에 방점이 꽂힌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실은 매우 검소한 왕비였으며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른 인물을 놓고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면 창작자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의심해야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중들은 역사 교육을 의심해야 한다. 엘리자베트도 다이애나비도 결국은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으며, 그 인간의 삶은 깊고 넓은 행복과 불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머리칼을 자르고 자유롭게 춤을 추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을 대체 역사로 선택한다고 해서, 결혼 전 성인 스펜서를 자의로 선택하는 다이애나비의 모습을 상상한다고 해서 창작자의 나태가 가려질 수는 없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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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조던 필 제작 공포 영화 <HIM>, 9월 극장 개봉, 티저 공개
❸ <아노라> 유리 보리소프, A24 신작 <Dennis> 주연 확정
❹ 크리스 에반스, <어벤져스: 둠스데이> 불참 관련 심정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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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사미, 그래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에드가 라이트의 공통적인 흐지부지 결말, <소호>에서는 더 심화되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집필한 각본은 공통적으로 지적받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초중반부까지는 각본의 짜임새와 흐름이 치밀하고 섬세한 데 반해, 영화의 피날레이자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앞서 쌓아올린 빌드업이 무색할 만큼 성의 없고 무책임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추세는 그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적어도 코르네토 3부작에 있어서는 해당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해당 트릴로지가 모두 코미디 장르이기도 하고, 스토리 자체부터가 정신 나가 있는 만큼 갑작스러운 마무리를 맞이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감독의 각본과 관련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베이비 드라이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해당 영화의 결말부의 부실함에 관해 지적하였으며, 개인적인 선호와는 별개로 그 지적한 이유가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코미디 느낌을 덜어내고 진중한 분위기를 가지게 한 작품임에도 뜬금없이 결말부를 마무리지었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뒤를 이어, 코미디와는 거리가 많이 먼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최신작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이하 <소호>) 역시 각본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잭이 샌디에게 남긴 키스마크가 엘루이즈에게도 남아있는 등 1960년대와 현대 사이에 서로 간섭이 가능한 듯한 암시가 맥거핀에 불과한 점은 애교에 불과합니다. 영화 전반부와 중반부에서, 엘루이즈가 샌디와 형성한 정서적인 공감을 토대로 그녀에게 벌어진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스릴러의 성격이 강한 심리극 영화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차근차근 빌드업해 나가는 전반부와 중반부의 심리극이 무색하게 엘루이즈는 그저 허상의 악령으로부터 도망만 치는, 공포 영화에서 무력한 여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클리셰의 모습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최악인 점은 <소호>의 장르는 공포 영화임에도, 이 영화가 공포와는 거리가 많이 멀다는 데에 있습니다.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악령들은 공포감을 갖기 어려운 외양을 가지고 있음은 둘째치고, 그들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어떠한 일련의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저 성의 없이 좀비처럼 팔을 휘적이고만 있을 뿐이니 공포감은 전혀 없고 오히려 코미디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또한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본인의 작품에 사회적 이슈를 대부분 담고 있습니다. 이 사회적 이슈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후반부에 등장하기 마련이기에, 감독의 영화들이 흐지부지한 결말부를 가지고 있는 원인 중에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호> 역시 여성에 대한 성적인 착취와, 그에 수반된 착취의 대상인 여성들이 느낄 공포를 이슈로 다루고 있습니다. 해당 이슈를 다루는 건 문제가 되지 않으나, <소호>는 그 이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파악이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적 착취의 대상이었던 샌디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는지, 아니면 성적 착취의 구매자였던 남성들을 향해 지적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아니면 엘루이즈의 입장에서 과거의 이슈에 대해 어떤 느낀 바를 표출하도록 하고 있는지 등 난잡하고 중심이 잡혀 있지 않는 각본으로 그 이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감을 잡기 어렵게 만듭니다.
용두사미, 에드가 라이트 각본의 공통된 문제점
가벼웠던 코르네토 트릴로지와 달리, 진중했기 때문에 그 문제점이 더 부각되어 보인
새로운 연출과 기존의 연출, 써야 할 때와 자제해야 할 때를 구분했으면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코르네토 3부작으로 대표되는, 코미디 장르에 두각을 보이는 감독이었습니다. 특히 지루하게 느껴질 법한 상황을 가지고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고, 더불어 개그로 승화시켜버리기까지 하는 능력이 출중합니다. 일례로 <세상이 끝장나는 날>에서 게리 무리가 술집에서 맥주를 주문할 때 하이 앵글에서 디스펜서를 작동시키는 손을 클로즈업한 컷과 맥주잔 바닥에서 로우 앵글로 디스펜서에서 떨어지는 맥주를 비추는 컷을 빠르게 교차하여 보여줌으로써 맥주를 맥주잔에 담는 씬일 뿐임에도 이를 흥미 있게 연출하고, 마지막에는 디스펜서로부터 약하게 흘러나오는 물을 물컵에 담는 쇼트로 변칙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클로즈업을 활용한 짧고 과장된 컷들을 연속적으로 활용하여 속도감 있는 연출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서는 이러한 편집이 가미된 씬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연출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 덕분에, 영화의 스토리가 암울한지 와는 별개로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은 톤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감독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소호>의 경우 과거의 작품들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작인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음악의 박자에 맞춘 빠른 컷 전환을 활용하였지만 전체적인 톤은 앞선 영화들에 비해 많이 무거워진 상태였습니다. <소호>는 빠른 컷 전환 역시 초중반부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중심인물을 기준으로 천천히 회전하면서 전방위에서 비추는 롱테이크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무도회장에서 샌디, 엘루이즈, 잭 세 인물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회전하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롱테이크로 영화에 담아낸 씬으로 대표됩니다. 1960년대의 아름다움과 이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표현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진중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마지막에 이르러 감독 특유의 빠른 컷 편집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퀀스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 시퀀스에서 빠른 컷 편집이 만들어낸 연출의 미학과는 별개로,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후반부에 이르러 설득력 부족한 각본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시너지를 일으켜 헛웃음을 짓게 만듭니다.
또한 영화의 색채와 관련하여, 1960년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런던의 거리와 대비되게, 골목길과 하숙집에서의 어두운 그림자와 강렬한 원색의 향연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겉모습의 뒤편에 숨겨 놓은 어두운 과거의 이면을 표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이 둘 사이의 색채의 대비는 강렬합니다. 이는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줌과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듭니다. 감독의 과거 작품들을 살펴보면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 인상 깊은 색채를 가진 요소들이 있을지언정 영상 전체적으로 강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없었고, <소호>에서 처음으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를 처음으로 시도함에도 비단 하나의 색만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색채들을 다채롭게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주는 피로감을 최소화하고,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상미만큼은 호평할 수 있는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분위기에 맞는 연출을 마지막까지 활용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아쉽지만 불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ST 만큼은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함에 있어 시각적 요소뿐만 아니라 청각적 요소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한다는 사실은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때 단순히 OST 자체가 좋은 영화와, OST를 잘 쓰는 영화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OST 자체가 좋은 영화의 경우 OST를 작곡한 음악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해지게 만들지만, OST를 잘 쓰는 영화의 경우 그 OST를 배치한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해지게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OST를 잘 쓰는 영화감독으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으며, 에드가 라이트 감독 역시 OST를 잘 쓰는 감독에 속합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은 올드팝부터 현 시대의 음악까지 널리 알려져 있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대중음악, 혹은 극한의 마이너한 취향의 음악들을 활용하여 여러 재밌는 상황을 영화 속에서 연출해 냅니다. 대표적으로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우연히 작동된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Queen의 'Don't Stop Me Now'의 박자에 맞춰 좀비를 타격하는 씬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감독의 OST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음악을 가지고 노는 듯한 능력은 <베이비 드라이버>에서 극대화되어 영화가 음악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음악이 영화를 끌고 가는 듯한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이때 <소호>는 과거 작품들처럼 배우의 행동이 음악의 박자에 맞춰서 움직이는 장면들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양한 60년대의 올드 팝들을 활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그 본질 속에는 날카로움을 담고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와 외줄을 타는 듯한 아슬아슬한 감정이 담겨 있는 우스꽝스럽고 경쾌한 분위기의 노래인 'Puppet on the String'을 가지고 샌디가 처해 있는 상황을 비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상대를 세상으로 비유한 노래인 'You're My World'이 샌디의 가수에 대한 열망이 짓밟히는 씬들에서 등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함과, 노래의 첫 시작과 중간중간을 장식하는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마치 마음속에 칼을 품고 있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등 여러 명곡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만큼은 <소호>에서도 여전하여, 관객들에게 OST에 관해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단순히 좋은 음악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지 않고, 이들을 모두 최적의 타이밍에 최적의 의도로 사용하는, 대중음악에 관한 지식이 방대한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입니다.
좋은 OST를 만드는 능력이 아닌 OST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
음향을 이해하고 영상 속으로 녹여내는 능력만큼은 명불허전이다
거울을 사이에 두고 샌디와 엘루이즈가 마주 보고 거울처럼 행동하는 연출과 같이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던 연출에 관련해서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 혹은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과 같이 여러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들을 찾는 것도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호평 요소들은 영화의 전반부와 중반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전반부, 중반부에서 쌓아올린 빌드업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반부에서 무너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연유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빌드업한 감정을 고스란히 후반부에서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정말 큽니다. 새로운 시도를 한 점은 좋게 평가하고 싶지만, 감독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잘 하는 분야에 집중하여 돋보이는 작품들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사람들은 이 거리의 불빛을 보며 못 이룬 꿈의 아쉬움을 달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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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17시간 시리즈 37분 요약(*액션위주)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분노의 질주 시리즈 정리 요약ㅣ분노의질주9 리뷰ㅣ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리뷰ㅣ
?「분노의 질주9 더 얼티메이트」 리뷰 보기 전, 필수로 봐야하는
분노의 질주 1~8 시리즈 결말포함 요약 정리 영상(*액션위주)
*외전 "홉스앤쇼"(2019) 제외- "분노의질주9" 정보
감독: 저스틴 린
제작: 저스틴 린, 빈 디젤, 닐 H. 모리츠,제프 커센바움, 조 로스, 클레이튼 타운센드, 사만다 빈센트
각본: 저스틴 린, 다니엘 케이시
원안: 저스틴 린, 다니엘 케이시, 알프레도 보텔로
장르: 액션
출연: 빈 디젤, 미셸 로드리게즈, 조다나 브루스터, 존 시나 등
음악: 브라이언 타일러
제작사: 원 레이스 필름스, 오리지널 필름, 로스/커센바움 필름스
배급사: 미국 유니버설 픽처스, 대한민국 UPI 코리아
개봉일:미국 2021년 6월 25일, 대한민국 2021년 5월 19일
상영 시간: 142분
#분노의질주더얼티메이트 #분노의질주_스토리 #분노의질주_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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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플리트 언노운] 끝장리뷰 | 밥 딜런의 두 가치 | 의문의 지점들
[컴플리트 언노운](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두 개의 정체성
Chapter 2 의문의 지점들
00:00 컴플리트 언노운
02:00 두개의 정체성
05:56 의문의 지점들
08:18 별점 및 한 줄 평
08:38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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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녀가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루시' 그녀는 환상일까? 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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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가디슈> 2차 예고편
내전으로 고립된 낯선 도시, 모가디슈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생존이다!
대한민국이 UN가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기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일어난다.
통신마저 끊긴 그 곳에 고립된 대한민국 대사관의 직원과 가족들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 대사관의 일행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문을 두드리는데…
목표는 하나, 모가디슈에서 탈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