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08 13:24:26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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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9일 토요일의 팜 스프링스, 여름이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니 귀신같이 아침의 하늘색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래졌고, 저녁의 풀벌레 소리가 ASMR로 자동 재생된다. 24절기의 정확함에 이번 환절기도 소름이 돋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팜 스프링스는 사막 지역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름 기간은 너무 덥다. 대신에 11월부터 5월까지의 날씨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하와이안 셔츠와 찢어진 청반바지, 그리고 시원한 물놀이가 잘 어울리는 11월 9일 토요일에 탈라와 에이브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행해진다. 포스터의 단서들을 보며 영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다.
영화 <팜 스프링스> 한국어 포스터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95%의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리고 2020년 공개된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대상으로 하는 제78회 골든글로브의 작품상과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쉽지만 수상에는 실패하였고, 둘 다 <보랏 속편>에 영광이 돌아갔다. 이 외에도 제37회 선댄스 영화제의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 대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이는 <미나리>가 수상하게 되었다.
'타임 루프 썸머 로코'라는 친절한 설명처럼 포스터 속의 두 주인공은 11월 9일 토요일에 갇혀버린다. 신랑 하객인 나일스가 먼저 끝도 없이 반복되는 11월 9일 토요일을 지겹도록 겪는다. 나일스가 걱정되었던 신부의 언니 세라는 그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다가 함께 시간의 웅덩이에 빠져버린다.
'내일을 원하는 여자' 세라는 양자역학을 마스터하며 11월 10일 일요일로 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늘만 사는 남자' 나일스는 반복된 날들 속에서 안전한 일탈을 하며 작은 변화를 만끽한다. 세라는 날짜가 제대로 넘어가는 세상에서 나일스 없이 지루할 것을 두려워하고, 나일스는 세라가 없는 11월 9일 토요일 속에서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또한 왼쪽에 있는 표지판에 그려진 염소는 세라의 꿈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고, 오른쪽에 있는 경비행기는 안전한 일탈의 최고점을 선사해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수영장은 이들이 겪어온 11월 9일 토요일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가 개봉 날짜 옆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앉아있다.
'여름이었다'라고 해도 캠핑하는 밤에는 겉옷이 필수이다.
'wake up'
영화밖에 살고 있는 우리도 휴대폰 알람의 성화에 번쩍 눈을 뜬다. 지금처럼 특히 일상이 제약된 환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혀 반복된 일과를 해내다 보니 매일매일 달력의 숫자는 넘어가도 마치 유사 타임 루프에 빠져버린 것 같은 착각을 느낄 때가 많다. 어제와 오늘이 너무 똑같아 지루함을 떨쳐내 버리려는 몸부림으로 끊임없이 놀거리를 탐색하고 실행하지만, 이내 의미 없다는 허무로 마무리해 본 적도 많다. 나일스와 세라가 11월 9일 월요일을 가장 진심으로 대한 날은 마지막이라는 각성이 있을 때이다. 그 각성은 놀만큼 충분히 놀아봐야 비로소 찾아오는 얄궂은 손님이다. 머물다가 금세 또 떠나면 다시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영화 <팜 스프링스>는 OTT 서비스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적절한 재미와 일상에 대한 명상이 훌륭하게 배합되었다는 칭찬을 이렇게 간단한 말로 표현해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마침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만 서비스되고 있는 훌루(Hulu) 오리지널 영화이기도 하다.
2021년 8월, 영화 <팜 스프링스>를 보았다. 여름이었다.
* 해당 리뷰는 씨네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원본 글 및 더 많은 글은 브런치 삐뚜로빼뚜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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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친구의 정석, 음식 일드의 맛!
맛있는 음식 X 맛있는 드라마 = 음식 맛이 두 배
’밥친구‘의 정석!
일드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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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의 아들 / Son Of Saul
/ 줄거리 /
시체처리반 일명 '존더코만도'인 사울은 주검이 된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뤄주기 위해 시체를 빼돌리고, 랍비를 찾아나선다.
/ 영화의 특징 /
이 영화는 1.37:1 비율의 화면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은 사울의 뒷모습을 쫓는다.
이러한 화면의 비율은 나치수용소의 폐쇄적인 느낌을 극대화시켰으며
사울의 뒤를 쫓는 카메라워킹은 우리가 사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며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시체들을 계속 '토막'이라고 칭하며 인간존엄성이라는 것이 없는
나치수용소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준다.
/ 간단한 고찰 /
1. 사울은 왜 그토록 아들의 장례를 치루어주기 위해 노력했는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나무토막다루듯이 처리하던 사울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을 위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루어 줌으로써 평소 갖고 있던 죄책감을 덜고,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루어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들을 위한 기도와 장례지만 그 사이에 평소에 자신이 처리해 왔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무고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 있지 않을까 싶다.
2. 그 아이는 진짜 사울의 아들일까?
영화를 보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들의 장례를 치루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지지만, 이게 과연 부성애일까?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영화 중간중간에 사람들은 사울에게 '너는 아들이 없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에 사울은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회파하거나, '아니, 지금 내 와이프의 아들은 아니고 중얼중얼' 하며 횡설수설한다.
또한, 수용소의 특성상 그리고 사울의 처지를 미루어 보았을 때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라 하여도, 아들이 다시 죽임을 당할 때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장례를 치루어주기 위해 자신뿐만아니라 동료들 마저 희생시켰을까?
위에서 말했다시피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리고 '아들의 장례'라는 것이 사울에게 있어서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삶의 목표의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3. 마지막장면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은 이유?
위에서 말했다시피, 아들이 사울의 진짜 아들이 아니었다면
사울이 장례를 치루어 주고자 한 아이는 사울의 죄책감과 목표의식등이 투영된
대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꼭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도 투영가능하지 않을까.
따라서 내 생각에 그 아이는 강에서 감정투영의 대상이었던 아이를 잃고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사울에게 보여진 새로운 감정투영의 대상이었고,
사울의 의미 모를 환한 미소는
' 너라도 탈출할 수 있어서 (혹은 살아서) 다행이야'
하는 의미를 담고 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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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샷건 웨딩(2022) 리뷰>
영화 <샷건 웨딩(2022)>는 <피치 퍼펙트(2012)>로 유명한 제이슨 무어 감독의 신작으로, 결혼 직전의 달시(제니퍼 로페즈) & 톰(조쉬 더하멜) 커플에게 갑작스레 닥친 재난을 코믹한 액션과 결부시킨 영화이다. 사실 제목에서부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샷건 웨딩이라니! 미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가 거친 서부 개척시대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할 터다. 현대에 와선 속도위반 등으로 인해 급히 치러야만 하는 결혼식 정도로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초의 의미든 현대의 의미든 단어가 갖는 기본적인 방향성은 동일하다. 당사자의 의지가 우선시된 다기보단 외부의 압력 혹은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결혼식이라는 것. 이런 점에서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많은 상상과 기대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외부 갈등은 무엇일까, 왜 생겼을까, 그리고 둘은 그 갈등을 어떻게 넘어서서 행복한 결합을 이루어 낼 것인가?
※스포일러 주의
<샷건 웨딩>의 초반부는 비교적 타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다르지 않다. 결혼식을 앞둔 커플이 있고, 둘을 둘러싼 말 많고 문제 많은 가족이 있다. 사실, 커플 사이의 갈등조차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서로를 끔찍하게 여기는 듯 하지만 식전 파티에서 손을 놓지 말아 달라는 달시의 부탁조차 곧바로 지켜지지 않을 만큼. 어디 그뿐인가? 이혼 후 애인과의 애정을 과시하며 등장하는 부유한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치치 마린)는 자신이 제시한 럭셔리한 호텔 결혼식을 물린 딸과 예비 사위를 탐탁지 않아 하고, 달시의 어머니 레나타(소냐 브라가)는 달시에게 로버트의 애인 해리엇(다르시 카덴)이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것도, 다소 점잖지 않아 보이는 톰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이 다가오는 것조차 끔찍하다며 토로한다. 심지어 캐롤은 집안의 전통이라며 다 녹슨 칼을 결혼 선물로 주고, 달시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구식 웨딩드레스를 입게 권하는 데다가, 톰의 아버지 래리(스티브 콜터)는 끊임없이 비디오만 찍다 축사를 하는 동안엔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까지 한다. 이렇듯 <샷건 웨딩>의 등장인물은 결혼식을 앞둔 커플과 그 두 사람을 둘러싼 가족 관계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도식이고, 이 갈등을 푸는 것에 100분 이상을 할애해도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액션 요소를 한 스푼 추가함으로써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필리핀의 어느 섬에서 열리기로 한 결혼식은 사실 예비 신부 달시가 원했던 스몰 웨딩과는 전혀 다른 류의 것이고, 부족한 재력과 장래의 불투명성으로 달시의 부모님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다는 초조함을 지닌 예비 신랑 톰 사이엔 바쁘다는 이유로 회피하기만 한 불안이 자리한다. 이 갈등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점차 고조된다. 게다가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가 초대한, 달시의 전 약혼자이자 사업 후계자와 다름없이 예뻐한다는 숀이 도착하는 바람에 달시와 톰 사이의 분위기는 한없이 냉랭해졌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 본국과 한참 떨어진 태평양의 섬까지 와준 하객들을 생각한다면 갑작스레 모든 걸 멈출 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으려 했다는 달시와 ‘당신을 위해서’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하고자 했던 톰 사이의 말다툼은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달시는 끝내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다.
그러나 이때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위기가 당도한다. 바로 해적이 섬을 포위한 것. 결혼식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하객은 모두 인질이 되었고, 로버트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기 직전이다. 말다툼을 하고자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던 달시와 톰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희망이 된다. 결혼식을 물리니 마니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다시 뭉친다. 피는 물론 벌어진 상처만 봐도 졸도할 듯한 달시가 수류탄을 들게 되고, 높은 탑에 오르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톰이 낙하산에서 하강하게 되는 데엔 상대방을 지키고 둘을 아끼는 하객을 구하겠다는 선의와 사랑이 존재한다. 결혼 직전 터졌던 갈등을 전우애로 다시금 봉합한 두 사람이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건 당연지사다.
<샷건 웨딩>을 코믹 액션버스터로 소개했지만 영화에 몇 번이고 등장하는 결혼식의 의미 변화를 떠올린다면 이 영화는 액션 장르로 포장했을 뿐,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처음 등장한 결혼식은 ‘오로지 행복만으로 칠해내고 싶었던 환상적인 결혼식’이나, ‘단 하나뿐인 반려자와 나누는 흠 없는 일생’이란 미숙한 판타지의 상징이며 철저히 부서진다. 이후 영화는 이혼하지 않고 큰 갈등 없이 산 것처럼 보였던 톰의 가정조차 실은 울퉁불퉁한 현실을 얼렁뚱땅 봉합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인생이란 대단히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를 빠르고 행복하게만 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달시와 톰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된 결혼식조차 소중한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배우며, 정신없는 인생을 몇 번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서로를 구하고자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상대와 함께 꾸려나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리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영화 말미의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서약의 의미를 되새기고, 진정한 결합을 완성한다.
결혼이 연애 과정에 쌓아 올린 낭만의 최종점이 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최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샷건 웨딩>을 고전적 로맨틱 코미디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의 완성도 아니다. 감독이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것은 삶의 복잡다단함이다. 단 하나의 일반적인 결말을 원할 뿐이더라도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 엄청난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경쾌한 경고라 여겨도 좋다. 혹은 뒤죽박죽, 알쏭달쏭한 인생 속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반자 한 명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결혼(혹은 삶)일지 모르겠다는 으쓱임 하나 정도이지 않을까.
<샷건 웨딩>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뻔하고 가벼운 영화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속속 등장하는 소품의 활용과 다채로운 사투만큼은 일품이다. 전투뿐만 아니라 달시와 톰의 티키타카나, 범상치 않았던 하객의 대응 역시 웃음을 적지 않게 자아낸다. 참을 수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한 일상에 지쳤더라면, 당신의 100분을 마법처럼 채워줄 <샷건 웨딩>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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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속 감춰진 ‘WOW’ 한 인생 스토리
정말 ‘WoW’한 인생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제목 그대로 평범하지 않은 질환을 가진 한 청년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 속 비범한 인생 스토리를 그린다. 가족도 몰랐던 이 청년의 삶은 저마다 고통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큰 의미와 여운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평생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게임을 즐기다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년의 이름은 두 개다. 실제 삶은 마츠, 그리고 온라인 게임 내에서는 이벨린으로 불린다. 마츠는 태어나면서 뒤셴이란 근육 질환을 가진 채 태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성장이 더디고 자주 넘어지는 건 물론, 휠체어에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이 있었으니 바로 ‘WoW’였다. 가족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있었던 그는 안타깝게도 25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모는 아들의 부고를 그가 생전 운영하던 블로그에 올리기로 하고, 아버지 로버트는 글 하단에 메일 주소를 남긴다. 이후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로버트의 메일함에는 마츠를 향한 고마움과 명복을 비는 소식이 도착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은 아들의 또 다른 인생을 알게 된다.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이목을 집중시킨다. 첫째는 손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 둘째는 현실 세계가 아닌 온라인, 그것도 게임 내에서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감독은 마츠이자 이벨린의 믿기 힘든 삶을 오롯이 영상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두 고정관념에 쌓여 있는지를 확인시킨다. 그리고 주인공의 온·오프라인 삶 속 비범함을 일깨운다.
일단 마츠의 삶은 암울하다. 점점 죽어가는 근육처럼 마츠의 인생도 점점 행복을 잃어간다. 하지만 ‘WoW’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뒤바뀐다.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말처럼 그는 온라인에서는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역할로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아바타>의 제이크(샘 워싱턴)가 아바타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자유롭게 걷고 또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그가 온라인상에서 탐정 이벨린으로 살아가면서 페이커처럼 영웅적 성과를 올리는 것에 주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께 게임을 하는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했다. 게임을 통해 빚어진 부모와의 갈등을 봉합해 주고, 자폐증 아들과 소원해진 엄마의 고민을 듣고 이를 도움도 준다. 마치 대화하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말했던 이벨린의 고마움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 듣는다. 그만큼 마츠는 이벨린이었을 때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친구를 사귀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긍정적 요소만 나오는 건 아니다. 마츠 또한 인간이기에, 자신과 달리 평범하게 사는 온라인 친구들에게 시기와 질투, 자격지심을 얻는다. 이로 인해 이간질을 서슴없이 하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불편한 행동을 일삼는다.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실제 삶의 고통이 온라인으로 번진 것. 이때 게임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받은 도움만큼 그에게 손을 내민다. 물론,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는 등의 과정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이들은 다시 이전의 관계를 회복한다. 마치 현실 속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런 마츠의 숨겨진 인생을 좀 더 흥미롭게 따라가기 위한 형식도 눈에 띈다. 감독은 실제 가족의 인터뷰와 홈비디오 영상을 통해 가족이 생각하는 마츠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고 게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영상 구현과 마츠의 블로그 글, 온라인 친구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벨린의 삶을 보여준다. 영화는 실제 그의 삶을 보여준 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삽입 후 게임에 접속해 몰랐던 이벨린의 생각을 엿보고, 감정을 느끼게 한다. 형식 자체로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나눠 표현한 건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며 좀 더 마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마츠의 숨겨진 인생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거시적인 성과의 기폭제가 된 건 아니다. 그냥 한 청년의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삶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제목에 낚였다고 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을 듯하다.
마츠는 이벨린으로 살면서 평범한 현실 속 자신을 온라인 상에서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든 온라인이든 그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영화는 오롯이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모습을 비범하다고 표현한 건 앞서 말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해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장애인으로서 이런 삶을 살 수 있구나, 너드 커뮤니케이션으로써 활용되는 게임에서 이런 일들일 벌어지는구나 하는 놀라운 그러나 편협한 생각들. 이 생각들로 마츠의 삶이 비범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지만 비범함이 평범함으로 바뀌는 그 순간, 비로소 이 작품이 가진 비범함을 알 수 있을 듯하다.사진 제공: 넷플릭스
평점: 3.0 / 5.0
한줄평: 온라인에서도 인생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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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위해 억지로 찍어낸 비극의 -The end-
디 엔드 (The End)
삶을 위해 억지로 찍어낸 비극의 -The end-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SF, 뮤지컬
러닝타임 : 148분
감독 : 조슈아 오펜하이머
출연 : 틸다 스윈튼, 조지 맥케이, 모지스 잉그럼, 마이클 섀넌, 브로나 갤러거
개인적인 평점 : 3 / 5
쿠키 영상 : 없음
<디 엔드>는 <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으로 국내에서도 긍정적인 평을 받았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신작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SF, 아포칼립스, 뮤지컬 장르가 섞인 영화지만 앞서 그가 보여줬던 깊은 통찰력과 고뇌는 그대로 담겨있는 작품이다.
알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난 듯한 지구. 한 부유한 가족은 소금 광산을 아름답고 편리하게 꾸민 후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간다. 엄마, 아빠, 아들, 그리고 엄마의 친구와 집사, 의사. 이들은 나름의 체계와 각자의 역할을 지키며 균형 잡힌 세상을 만든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소녀가 광산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바깥세상에서 살다 온 소녀는 가족들이 애써 외면해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건드리기 시작하고 굳건했던 그들의 세상이 조금씩 흔들린다.
<디 엔드>는 살기 위해 망각을 선택한 어른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모든 게 바다 밑으로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은 이 가족은 행복하고 완전한 가족의 삶을 노래한다. 시들지 않는 꽃, 아름다운 그림, 번영할 우리 가족.
무너진 바깥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듯한 이 광산은 외부인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 구조로 되어있고 먹거리를 구할 생태계도 잘 조성되어 있으며 주요 동력이 될 불은 앞으로 100년은 더 타오를 것이다. 이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아들이 만들고 있는 미니어처와 그가 쓰고 있는 (검열된) 아빠의 자서전 내용처럼 완벽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편하고 묘하게 인위적인 느낌이 있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화에 관심을 갖는 아들과 그렇지 않은 가족들아들은 바깥세상에 대한 기억이 없다. 세상은 아들이 아주 어릴 때 붕괴됐고 그는 사진과 그림으로만 바깥세상을 경험하며 자란다. 그런 아들에게 외부인, 그것도 비슷한 또래의 이성을 만나는 건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큰 자극이다. 안절부절하던 아들은 소녀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시계를 선물한다. 시간 관리에 좋다는 말을 곁들이면서.
아들은 등장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시간과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갖는 인물이다.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함만 가득한 광산에서 자라온 아들은 사진으로만 봤던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궁금해한다.
바깥세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시간의 흐름과 세상의 변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에겐 그저 나의 순간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 앞으로 생존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들을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바깥세상에서 보낸 시간을 망각하고 최후의 방주 같은 광산 속에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어쩌다 들어오게 된 소녀 또한 아들의 시계 선물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광산에서의 삶을 이어가길 소망한다.
후회를 겪어본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의 차이성장이란, 생존이란 이렇게 슬픈 것인가어른들은 시간을 잊고 살아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나온 시간 속 사람들과 자신을 잊고 살아간다. 엄마는 함께할 수 있었음에도 끝내 데려오지 않은 엄마와 언니 (아들이 본 사진 속 할머니와 이모), 아빠는 석유 회사를 운영하며 저질렀던 사회적 폭력과 세상을 망하게 만든 어떠한 사건 (신문 기사 속 사건들), 친구는 약쟁이 아들 톰을 버리고 광산으로 들어온 것. 이 세 사람은 지나온 시간에 얽힌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말을 꾸며낸다. 소녀는 처음엔 어른들과 다르게 자신의 가족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슬픔을 반복해 드러내지만 살아남기 위해 결국 슬픔을 망각하는 선택을 한다.
아들은 가족들의 거짓말들을 진짜라 믿으며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던 친구의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이 광산이 누구를 위한 안식처냐며 분노한다. 가족들이 만들어준 안정적이고 후회 없는 삶만을 살아온 아들은 가족들의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의도적인 망각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가족들을 이해하게 만들만한 사건이 생긴다. 그건 바로 아들이 가장 의지했고, 가장 큰 배신감을 느꼈던 친구의 자살이다. 친구는 아들의 분노를 통해 오랫동안 외면한 톰에 대한 죄책감을 다시 마주한다. 그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아들은 친구의 자살에 크게 슬퍼하고, 화를 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후회와 아픔을 망각하는 걸 선택한다.
아들의 나이는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20년 전 외부인이 들어왔을 때 아들이 죽을뻔했다는 엄마 아빠의 말, 아들의 외모를 보면 그는 최소 20살은 넘은 청년일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광산 안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고, 아들을 한번 잃을 뻔했던 가족들이 열심히 그를 케어했기에 그의 인생엔 사랑 같은 부드러운 감정만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겪기 전의 아들은 슬픔과 후회를 모르는 몸만 큰 어린아이였다. 아들은 파자마를 입은 채 잠이 오지 않는다며 친구의 방을 찾아가 응석을 부리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그 나이답지 않게 어른들의 말에 휩쓸리거나 쉽게 당황하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랬던 아들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앞서 다른 가족들이 느꼈던 후회와 슬픔이라는 감정을 학습하며 어른이 된다.
친구가 죽고 남겨진 가족들은 언제 아픔을 겪었냐는 듯 다시 행복하고 완벽한 가족의 모습으로 아이의 생일파티를 즐기고 사진을 찍는다. 이상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후회와 아픔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것들을 잊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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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데드 다루는 법 - 죽음을 거스른 내 사랑, 그대는 구원인가
살아있는 시체로 돌아온 나의 사랑이여! 그대는 축복인가, 재앙인가? 손자이자 아들 '엘리아스'를 잃고 상실감에 괴로워하는 할아버지 '말러'와 엄마 '안나', 아내 '에바'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소식을 듣고 슬픔에 오열하는 남편 '데이빗', 반려자 '엘리자베트'의 장례식을 마치고 텅 빈 집에 돌아온 노부인 '토라'. 원인불명의 정전이 오슬로 전역을 덮친 이후, 죽은 이들이 다시 깨어나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무덤에 묻혔던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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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한 맛이지만 강렬한 "에이리언: 로물루스" / 1편과 2편 사이의 이야기 / 새로운 젊은 캐릭터들 / 강렬한 긴장감과 몰입감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에이리언: 로물루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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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더그라운드> 메인 예고편
모두가 잰걸음으로 땅 위 삶을 향해 지하를 거쳐만 갈 때
'언더그라운드'에는 이 반듯한 공간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시끄럽게만 돌아가는 세상 아래
지하에서의 삶은 어떠한지 그들에게 다가간다
도시를 지탱하는 지하의 노선도, 언더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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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메탈 로드> 공식 예고편
전교에 메탈 좋아하는 학생이 두 명뿐인 학교에서 메탈 밴드를 만들겠다는 두 고등학생. 베이시스트를 수소문해 보지만, 역시나 실패다. 대신 첼로를 연주하는 여자애를 찾긴 했는데. 과연 한 팀으로 거듭나 밴드 경연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