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08 13:24:26
완성도 높은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SYNOPSIS.
독일 장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가족이 사는 그들만의 꿈의 왕국 아우슈비츠.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가 정성스럽게 가꾼 꽃이 만발한 정원에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집. 과연 악마는 다른 세상을 사는가?
POINT.
✔️ 일단 이 영화를 보세요. 시놉시스만 아시는 상태로 그냥 다짜고짜 보시기를 권합니다.
음향이 중요하니 돌비(메가박스), 사운드X(CGV) 등 음향을 강조한 상영관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 이외의 다른 모든 이야기는, 영화를 다 보신 후에 찾아보셔요. 이 글 같은 리뷰는 물론, 평론가 해설 또한 영화를 보신 후에! 찾아보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꼭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읽어주세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든다. 길지 않은 한 마디지만, 손을 떨면서 하는 말에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 배우가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D0v0WRqqVso
"...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 shaped all about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se their jewishness and the Ha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applause)
...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applause)
Alexandra Bystroń-Kołdziejczyk, the girl who glows in the film as she did in life chose to, I dedicate this to her memory and her resistance. Thank you.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박수)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학살의 희생자든...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박수)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 클로지치크, 영화에서 만큼이나 실제도 빛났던 소녀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이 발언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아니, 이 영화는 나의 마음에 닿아서 완성되는 영화일 것이다.

소리는 당신을 상상하게 한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오감, 아니 육감 중 가장 큰 부분을 시각에 의지한다. 철저하게 계산되어 고증된 공간과 의상, 내면에 깊은 두레박을 수도 없이 드리워 완성하는 배우의 연기, 그 장면 그 순간을 위한 깊은 노력 대부분이 시각에 의존한다. 영화 음악은 많은 경우 그 '시각'이 주는 감정을 보조하기 위해, 그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다르다. 이 영화는 청각으로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시각이 보조한다. 붉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꽃잎의 모양은 그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청각이 전달하는 불길한 느낌, 구역질 나는 느낌을 보조한다. 이건 대체 뭐지. 관객은 충격에 빠진다.

소리가 잔인한 이유는 당신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아무리 충격적인 양상을 들이대도 당신의 상상보다 잔인할 수는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카피는 사실 불가능한 카피이다. 언제나 각자의 상상이 각자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당신이 상상하는 가장 최악의 아우슈비츠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성립시킨다. 간혹 들리는 비명 소리, 구타가 아닐까 싶은 소리, 총...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 동시에 우리의 식민지적 경험이 주는 그 총소리에 대한 의문, (일본군은 당시 총알이 아깝다며 한국과 중국에서 총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거나 총검으로 찌르거나... 그 행위는 그들에게 유희처럼 여겨졌고, 사체의 일부분을 손에 든 채 히죽히죽 웃는 사진도 여러 장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수용소에서 총 소리가 이렇게 자주 들리나?’ 하는 의문이 들면서,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전역과 731부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괴로움과, 서방에서 아우슈비츠가 갖는 의미 대비 그 괴로움이 서술된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나의 직접/간접 경험이 주는 가장 끔찍한 지옥도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보는 내내 궁금했던, 마치 기계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가 밝혀질 때에,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역사는 언제나 눈을 치켜뜨고 있다. 비록 소리가 상상하게 한 최악의 지옥도가 우리 마음에 펼쳐지지만, 그들은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16p)"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단순히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일원들이 그저 일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20p)"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무너뜨려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21p)"고,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42p)" 우리 모두는 아이히만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뼈 아픈 부분이, 이 영화에서도 지적된다. 과연 나는 영화 속 헤스 부부를 보며 단순히 그들을 절대악으로 지정하고 마음 편하게 영화관을 벗어날 수 있는가? 없다. 아이히만은 내 안에 있고, 헤스 부부 또한 그렇다. 17살 때부터 꿈꿔 온 이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헤트비히의 말은... 과연 이 사회에서 자기의 안위를 위해 '각자도생'해야 함을 배운 우리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수십 채나 되는 집을 소유하며 도시를 공허하게 만드는 사람들, '영끌'하는 자기만을 과하게 연민하며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은 사람들, 소비로 존재를 대신하려는 사람들...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 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113p)"던 아이히만과 우리는 의외로 별로 다르지 않다. 이 영화 속, 아우슈비츠 코앞에서, 연기와 비명 소리와 (아마도 존재했을) 사람'이었던' 것들이 타는 냄새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꽃을 심고 집안을 가꾸는 헤스 부부... 내 집 마련의 꿈을 중요시하지만 사회의 모든 모순은 무시하는 우리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 영화가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건조차도, 단순히 그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최대 희생자였던 유대인들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나. 그들 안에는 아이히만이 없는가?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따르면 힘러가, 즉 나치가 사용한 책략은 우리의 "동물적인 동정심"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174p)" 된 것이었다. 과연 작금의 유대인들은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자기 연민과 비뚤어진 자기애로 인류애를 대체하고, 타인의 상황에는 ‘누칼협’ 같은 소리나 들이대고 있는 우리는 또 얼마나 다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님을, 그러므로 나와 무관하고 그냥 스크린 안에서만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나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프로듀서 앞에서, 실제로 이후 그의 발언이 공식 입장과 무관하다고 선을 그은 프로듀서 앞에서, 다시 말해 커리어가 끊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손을 떨면서 1분 남짓의 짧은 말을 이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같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까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히만만의 문제가 아님을 지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영화를 보고 그냥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군...' 하고 단순하게 돌아설 수 없도록 나와 당신을 막는 힘 또한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어쩌면 그냥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갈망이 우리를 비인간적인 자리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느니 배 부른 돼지가 되겠다는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 영화는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밍크코트에 이어, 이미 죽었거나 그 근처에 이르렀을 여자의 립스틱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입술에 바르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도, 알고 지내던 유대인 여자가 끌려갔어도 그 커튼을 갖지 못한 것이나 아쉬워하는 대화에서도.
실제 헤트비히 헤스의 말에서 따왔다는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과격한 대사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좀 더 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인간'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이 영화는 소름 끼치게 보여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의외로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걸 보여주는 존재는 한 소녀다. 감독에게 매우 의미 깊었던 듯한, 영화 속에도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의미심장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감독의 아카데미 소감에도 등장하는, 알렉산드라라는 인물이 있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 콜로지치크. 그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들이 일하는 곳을 밤에 몰래 찾아가 과일을 하나씩 박아 놓고 사라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밤에 뛰어다니는 그곳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굳이 어설픈 직역을 하자면 "이득 지역"인데, "Interessengebiet"라는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긴 영어 단어이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인근을 부르던 단어로, 실제로 그들이 아우슈비츠 행정을 위해서라며 이득을 취하던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1941년 나치는 폴란드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이들을 몰아낸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동원하여 농사를 짓고 그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교류를 막았음은 물론이다. 말발굽 아래 너무 쉽게 짓밟히던 과일을, 가방에 소중하게 담아 하나하나 배치해 두는 소녀의 존재는, 처음에는 '뭐지?' 싶게 낯선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이내 그 존재 자체로 어둠 속의 빛임을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열심히 가꾸는 헤스 부부의 집에는 한 번도 직통으로 내리쬔 적 없는 햇살이, 소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집안으로는 부드럽고 강하게 들어온다.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2016년 9월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았던 집에서 촬영했다는 장면에서, 소녀가 피아노로 연주한 곡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자가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제목도 <햇살>. 심지어 옷과 자전거 또한 실제로 알렉산드라가 사용했던 물건이라니 그 의미가 한층 두텁게 느껴진다.
실제 알렉산드라는 1940년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면서 아버지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는 비극을 겪었고, 친구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내부와 접점을 가지고 음식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1년부터는 무장투쟁연맹의 일원으로 연락망을 담당하고, 1943년에는 나치에 의해 노역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우슈비츠에 음식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헤스 작전'으로 소개된, 헝가리의 유대인을 '소거'하는 작전을 앞두고, 전출되었던 자리에서 다시 아우슈비츠에 돌아갈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통화하는 부부의 전화로 끝을 맺다시피 한다. 원하는 모든 바가 다 이루어졌지만 내려오면서 어쩐지 구토의 심경을 느끼는 루돌프의 모습이 영화의 사실상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은 매우 역겹다.
구토하지 못하면서도 구토 비슷한 것을 느끼는 그 모습이, 마치 가해자가 되어야만 했던 자신을 연민하는 액션처럼 느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178p)"이었다는 아이히만의 사고와 동일하게 느껴져서. 가스실을 만들고, "효율적인" 시체 처리법을 고안한 것이 "업적"이었던 그들의 사고방식. 자신의 알량한 삶을 위해 타인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그 방식과 체계와 행정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무뎌지고 마비되었던 두뇌들. 구토하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구토로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호소하던, '비인간화'의 결과물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소개된, 매우 예외적인, 그래서 독특한 이야기 하나를 나눈다. 이 영화의 ‘헤스 작전' 회의 장면에서도 언급되듯 나치에 진작 동의했던 헝가리 정부와 달리, 끝까지 나치의 유대인 소탕에 반대한 나라가 있었다.
덴마크 국왕은 자신이 자진해서 유대인의 별을 달겠다고 했으며, (왕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굳이) 대신들은 혹시라도 왕이 반유대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진 사퇴하겠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안전하게 운송'되었으며,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은 덴마크 부유층이 댔다. 결국 덴마크 출신의 유대인들 중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였고, 이들은 대부분 순순히 문을 열어줄 만큼... 노쇠하였거나 가난에 치이느라 현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다시 말해 사회적 최약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덴마크 사람들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그 결과 이들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지위를 누렸다고 한다.
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던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와 '악의 평범성'을 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아이히만이 가리키는 지점을 묻고, 그 지점과 싸울 의지가 있는지 묻는 것과도 같다. 이미 시체마저 썩어버린 과거의 나치에게 섀도복싱을 하는 대신, 진짜 내가 싸워야 할 상대에 맞설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우리 시대의 나치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질문에 무거운 마음을 답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 답이 있는 곳이, 완성도 높은 이 영화가 완성되는 지점일 것이기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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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지 않는 저택에서
저택안에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를 비평하는 데에 있어 <홍등>은 중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장이머우 감독의 주제 의식과 스타일을 압축해놓은 대표작이다. <홍등>은 시각적인 화려함에 눈을 사로잡힌다. 진어른댁 저택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만 사건이 발생한다. 저택 밖 상황은 다루지 않는다. 한정된 장소는 주인공 '송련'(공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송련'은 집안 사정과 계모의 강요에 의해 대학을 중퇴하고 진어른댁 네 번 째 첩으로 들어가게 된다. 벗어날 수 없는 저택 안에서 전과는 다른 생활에 초반에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점차 저택 안의 세상이 자신이 보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그곳에는 매일 밤 홍등이 켜진다. 홍등이 자신이 머무는 처소에 켜지기 위해서는 진 어른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홍등이 켜지면 집안에서 대우가 달라진다. 그 달콤함을 맞본 송련은 진 어른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아양을 떨며 네 명의 부인은 서로 경계하며 살아간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수평과 수직으로 이동하며 남성이 중심된 가부장 사회를 보여 준다. 부인들끼리는 서로 왕래를 할 수 없고, 오로지 진 어른의 선택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서서히 주인공의 인격을 망가트린다.
홍등을 켠다는 건
<홍등>은 컷을 나누기보다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영화를 설명한다. 격렬한 카메라 무빙은 없고 미끄러지듯 상하좌우 수직으로만 움직인다. 이는 저택의 폐쇄성 견고함을 보여 준다. 사물과 인간을 일직선 위에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인간은 저택의 벽과 기둥에 포위되어 보인다. 마치 우리 안에 가둬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저택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암시한다. 이 영화에서 네 명의 부인에게 홍등을 하사하는 인물인 진 어른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을 파악하기 위해선 얼굴, 즉 눈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의도적으로 진 어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진 어른은 단지 가부장 사회의 이념으로 대상화되고 그 자리에 놓인 남성이라면 어떤 인물이든 진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질서와 권력, 위엄을 대변하는 상징인 진 어른은 사실 <홍등>에서 중요 인물은 아니다. 그가 있든 없든 하인들은 정해진 일을 한다. 네 명의 부인은 홍등을 달기 위해 모략과 질투를 할 것이다. 즉 진 어른은 가부장 사회의 남성 모두 지칭한다. 폐쇄적인 사회는 대학에 갈 정도로 똑똑하고 순수했던 송련을 망가트린다. 지시된 것, 정해진 것만 욕망하는 기계로 변하며 주어진 것 이외의 가능성을 창출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송련'의 하녀 '연아'가 홍등을 훔쳐 제방에 달고 그 등이 새빨간 빛으로 방을 물들이는 장면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그러진 욕망의 무서움을 보여 준다. 오로지 붉은색의 욕망으로 물들어진 공간에서 남성에게 모든 주도권과 목표 의식을 넘긴 '연아'는 무섭기도 하지만 안쓰럽고 측은함이 느껴진다.
봄이 오지 않는 저택
영화 속 계절의 변화를 주목해보면, 여름은 송련이 시집을 가서 진 어른 가문의 관습을 경험하는 계절이다. 홍등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맛보고 다른 부인들을 탐색하는 시기이다. 가을은 '송련'이 진어른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시기이자 말도 안 되는 관습에 저항하는 시기이자 다른 부인과 관계가 깊어지며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계절이다. 겨울은 '송련'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맛을 알게 되고 집착하는 시기이다. 자신에 의해 '연아'가 죽고 셋째 부인의 외도가 발설돼 셋째 부인 또한 죽음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가 정신을 놓는 계절이다. 다시 여름이 찾아오고 5번째 부인이 시집을 온다.
<홍등>에는 봄은 오지 않는다. 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관습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의 가부장 사회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홍등은 매일 밤 켜질 것이다. 저택 안에서 사람이 죽어나고 송련은 광인이 되었다. 그러나 저택에는 다섯째 부인이 시집을 온다. 미쳐있는 송련의 모습을 보며 다섯 번 째 부인은 누구냐고 묻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관습 속에서 사람들은 죽어날 것이고 미쳐갈 것이다. 저택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서성이는 송련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한 저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사람이 미쳐도,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왕래가 없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진취적인 인물이 서서히 홍등으로 표현된 권력에 취해 변해가는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특히 중국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었기에 더 의미가 깊다. 누구나 그 곳에선 송련, 진어른, 세 명의 부인, 연아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이데올로기는 무섭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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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진짜 피스메이커를 찾아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코르테 말테제'에 반미 세력 쿠데타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정부는 그들이 감옥에 감금된 정체불명의 외계인, '프로젝트 스타피쉬'를 악용할 것을 걱정한다. 이에 '아만다 월러(비올라 데이비스)'는 벨 레브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슈퍼 빌런들을 코르테 말테제에 침투시켜 스타피쉬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한다. 그 결과 '릭 플래그(조엘 킨나만)'와 '할리 퀸(마고 로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1팀이 작전 개시와 동시에 끔찍한 실패를 겪는 사이, '블러드스포트(이드리스 엘바)', '피스메이커(존 시나)', '킹 샤크(실베스터 스탤론)', '랫캐쳐2(다니엘라 멜시오르)', '폴카도트맨(데이빗 다스트말치안)'로 구성된 진짜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안전하게 섬에 침투한다. 그러나 작전이 진행될수록 팀플레이가 체질이 아닌 악당들은 갈등을 빚기 시작하고, 그들 앞에는 프로젝트 스타피쉬 일명 '스타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1970~80년대 <슈퍼맨>과 <배트맨>의 성공과 이후 침체기였던 슈퍼히어로 영화는 2000년대 이후 변화한 시대상,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가 불러온 부작용을 빠르게 작품 속에 녹여내면서 다시 영화계의 주류로 돌아올 수 있었다. 9.11 테러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실패로 인해 민주주의, 평화 유지, 도덕성이라는 명분과 정체성이 흔들린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를 작품에 투영한 것이다. <다크 나이트> 속 배트맨의 활약이 더욱 강력한 악당인 조커를 끌어들이는 역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전개는 중동에서 악(테러리스트)을 없애기 위해 파견된 미군으로 인해 또 다른 악(알카에다, ISIS 등)을 불러일으킨 현실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현재 가장 큰 슈퍼히어로 시리즈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역시 기저에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계를 지닌다.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납치된 채로 슈트를 만들어 테러 집단으로부터 탈출한 후에, 자기를 납치했던 아프가니스탄 테러 집단을 보복한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9.11 습격에 대한 보복이라는 현실을 재현한 셈이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에서 하이드라에게 잠식된 쉴드는 국가적 위협을 먼저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던 미국의 현실(애국자법 등)을 암시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이름을 알린 제임스 건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흥행과 별개로 악평에 시달렸던 전편과 선을 그은 후 리런치(Relaunch)한 DC의 새로운 슈퍼 히어로(빌런) 영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미국의 패권주의적 악습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다만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는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9.11 테러는 물론 그 이전부터 수십 년 간 자행된 미국의 대외적 악습을 한 데 모아 비판한다는 점이 첫 번째 포인트고, 그 악습을 철저히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이며 과장된 조롱으로 상기시킨다는 점이 두 번째다.
당장 시작부터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미국 현대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코르테 말테제에 잠입하는 임무를 맡은 1팀은 거대한 성조기 앞에 모인 채 멋진 워킹을 보여준다. 그러나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지닌 쿠데타 군 앞에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믿기 힘든 실패를 경험한다. 이러한 오프닝 시퀀스는 엄연한 주권국가에 몰래 병력을 투입하고, 미국의 의도대로 쿠데타 정권을 조종하려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했던 '피그만 침공'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4월 17일,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정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쿠바 해변에 상륙한 미국의 2506 여단은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남은 병력은 모두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 작전은 쿠바 미사일 사태를 촉발시킨 계기였고,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주권침해행위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피그만 침공의 그림자가 가득한 오프닝 시퀀스는 거대 외계 생물 스타로의 존재와 연관된 다양한 플롯을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와 결부시킬 수 있는 장을 열어준다. 작중 나사의 우주비행사들이 스타로를 발견하고, 그를 감금하고 실험을 진행한 것은 냉전 시기에 체제 경쟁의 일환으로 비키니 섬에서 여러 부작용을 남긴 핵실험을 통해 소련뿐만 아니라 전 지구를 위협할 무기들을 개발했던 과거를 비꼬는 장치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괴물과 미국 정부 간의 연관성을 지우는 게 목적인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임무는 그간 관타나모 수용소처럼 미국 정부가 대내외적으로 자행한 비윤리적 폭거와 이를 숨기려고 했던 시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캐릭터들 역시 미국의 패권주의와 대외적 구태를 비판하는 데 가세한다. 그 중심에는 피스메이커와 블러드스포트의 대립이 있다. 두 인물은 인생사와 능력이 모두 동일하지만 정반대의 가치관을 지닌다. 블러드스포트는 개인적인 이유로 임무에 참가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방관할 수 없다는 소시민적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피스메이커는 평화를 부르짖지만 정작 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든 상관없다고 믿는 급진적 애국주의자다. 작중 피스메이커가 폭주할 때 본인 스스로 자유의 상징이라고 여긴 헬멧이 찌그러져있다는 점은 그의 신념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이러한 둘의 차이는 진지한 성품을 지녔고 SF 스러운 무기를 선보이는 블러드스포트와 달리 피스메이커가 우스꽝스러운 외형과 행동을 보여주며 구식 무기들을 사용하는 외적인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이때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블러드스포트를 중심으로 새로 모습을 보인 등장인물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마련해 피스메이커의 신념을 비판하고, 그와 같은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앞으로의 비전도 제시한다. 아동학대를 당했던 폴카도트맨, 쥐가 유일한 친구인 랫캐쳐2, 마음속 외로움이 가득한 킹 샤크는 블러드스포트처럼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고 치유하고 싶다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동기로 움직인다. 영화는 이처럼 전혀 관계없는 개인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진 난장판을 해결하는 와중에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점진적으로 친구, 가족, 하나의 팀으로 거듭나는 무용담을 부각한다. 즉, 아무리 사소하고 인간적인 삶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개인들이더라도 그들의 연대는 광기 어린 국가 권력의 폭주를 막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자들이 하나의 팀과 가족으로 거듭나면서 우주를 구해내는 감독의 전작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맞닿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중 가장 결정적이고 영웅스러운 역할은 가장 약하고 무용해 보이는 능력을 지닌 소녀에게 주어진다.
교도소 상황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들은 코르테 말테제 섬에 처음 팀이 파견될 때만 해도 팀원들의 생존과 탈주 가능성, 사망 순서를 두고 도박판을 벌일 정도로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민간인을 도우려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면서 이내 양심과 인간성을 되찾고 물심양면으로 슈퍼 빌런들을 지원한다. 이러한 변화는 꼭 권력을 지닌 군과 정보기관,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적 힘이 과거와는 다른 미국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바람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코르테 말테제 섬에 여전히 미국 정부가 심어놓은 분란의 씨앗이 남아있고, 미국 정부의 구시대 패권주의적 접근법도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쿠키 영상도 이처럼 진짜 피스메이커를 밝혀내는 메시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힘을 실어준다.
흥미로운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의식과 달리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방식은 철저히 유머러스하고, 과장되어 있고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숲에서 만난 현지 무장 세력의 캠프를 마치 게임하듯이 습격하고, 사살한 인원의 숫자를 세며 경쟁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죽인 이들은 현지 반 쿠데타 세력, 즉 우군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쿠데타 정권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으니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얼렁뚱땅 넘겨버린다. 그 외의 장면에서도 영화는 유독 살인과 죽음을 희화화하고 과장한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할리퀸이 군인들을 창으로 찌르고 베자 피 대신 화려한 꽃잎들이 튀어나온다. 해변에 도착한 팀원들은 마지막 유언에서 제일 중요한 말을 못 한다거나, 전투에 쓸모없는 능력을 선보인다던가, 심지어 수영을 못해서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익사하는 식으로 황당무계하게 퇴장한다.
하지만 이처럼 부자연스럽고, 윤리적 금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판타지 덕분에 영화의 문제의식은 오히려 강조된다. 지나치게 만화적이라서 비현실적인 묘사가 기반을 두는 현실이 역으로 명료해지는 것이다. 일례로 피스메이커와 나머지 팀원 간의 충돌과 갈등, 그로부터 비롯되는 죽음은 다른 장면들과 달리 대조적으로 매우 진중하게 묘사되며, 따라서 그들의 대립이 갖는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또한 자신들의 과오인 불필요한 살육을 간단히 외면하는 팀원들의 태도는 미군이 개입되었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만 보더라도 미 공군이 군사적 목표뿐 아니라 대도시와 민간인 거주지역에도 융단폭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해당 사건들이 유야무야 된 역사가 발견된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슈퍼 히어로 작품에 비해 유달리 잔인하고 폭력적인 연출은 히어로 장르 안에서 이 영화를 (완성도와는 별개로)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제임스 건이 제작하는 스핀오프 드라마 <피스메이커>에 대한 기대도 키우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모든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의도된 연출이다 하더라도 수위가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잔인해서 꽤 불편할 수 있다. 액션이 밀집되어 눈을 떼기 어려운 전후반부에 비해 캐릭터들의 과거사가 소개되는 중반부는 전개상 반드시 필요하지만 리듬이 순간적으로 늘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미국식 성인 유머가 남발되는 등 미국적 정서가 강조되는 것도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어렵게 한다. 빌런 소개나 충격적인 장면의 연출 시 유달리 아이들을 강조되는 것만 해도 그 임팩트나 뉘앙스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미국에서는 국내보다 미성년자에 대한 범죄 처벌이 더 엄격하고 사회적으로 더 금기시되는 정서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영화다. 우선 할리 퀸을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들을 폭넓게 활용하고 빌런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각인시키면서 전편의 실패를 씻어낸 공은 DC 팬들을 열광시킬 수밖에 없다. 특히 선배 슈퍼 히어로 영화들의 행적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비현실적인 판타지로서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차별화된 방식으로 풀어내며 독보적인 매력을 뽐낸다는 점에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전반적으로 실망을 안겨주었던 DC 히어로 영화들을 다시금 기대할 한줄기 희망이 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미친놈들의 난동이 비추고 조롱하는 더 미치고 더럽게 꼬여버린 미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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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가 생동감을 살리지만.. 밋밋한 이야기
일상을 살면서 ‘국가’의 힘을 느끼기는 어렵다. 학교를 가고, 회사에 가고, 주변의 장소에 가도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주변의 사람들과 환경이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조직이나 환경들은 국가의 노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는 개인의 능력을 이용해 그런 환경을 만들어 나가고 더 많은 개인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환경을 같이 누린다. 하지만 그런 상호작용을 우리는 평상시에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 국가는 우리의 일상에 늘 있지만 직접적으로 바로 느끼기는 어렵다.
어떤 순간에는 국가의 절대적인 힘이 필요할 수 있다. 특히나 국민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국내외에서 누군가가 다치거나 납치당하는 경우, 기본적으로 공권력이 그 일을 해결하는데 투입된다. 국내에는 경찰이 그 역할을 하지만 해외에서는 한국의 경찰이 개입하기 어렵다. 대신 현지에 있는 대사관과 외교부가 국민이 필요한 일을 대신해준다. 큰 사건사고들이 많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해외에 있는 국민들은 의지할 수 있는 국가의 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국민을 구하려는 국가의 절실한 노력을 담아낸 영화 <교섭>
영화 <교섭>은 국민을 보호하려는 국가의 절실한 노력이 담겨있는 영화다. 과거 샘물교회 피랍 사건을 기본 줄기로 삼고 구체적인 내용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영화는 외교관 재호(황정민)와 국정원 요원 대식(현빈)이 피랍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 속 두 사람은 국가의 힘을 대신하여 교섭을 진행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처음에 다른 접근 방식으로 피랍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지만 그 차이는 조금씩 줄어든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테러 조직에게 납치된 사람들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탈레반은 인질 석방의 조건으로 감옥의 탈레반 몇 명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하고 현지 주둔 중인 한국군이 철수하는 것을 원한다. 한국의 외교부는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렵고 아프가니스탄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다. 온전히 한국이라는 국가의 능력으로만 진행해야 하는 교섭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 돌파구를 만들어가는 건, 현지에 파견된 외교관들이다.
영화 속 재호는 꽤 유능한 외교관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처음 사건 관련 뉴스를 접하고 나서 그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바로 동료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고 자신도 가장 시급한 일을 해 나아간다. 무엇보다 그는 영화 끝까지 인질이 석방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외교부 안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교섭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당연하게도 다른 대안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다.
외교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외교부 수장과 몇몇 인원들은 군사적인 해결책을 고려하고 실제로 시행하려 한다. 영화가 던지는 흥미로운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군사적인 해결책을 생각한 외교관과 끝까지 교섭을 해야 한다는 외교관 재호의 의견 중 누가 더 옳은 의견일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때는 무엇이든 선택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이라고 말하기 무척 어렵다. 영화에서는 재호의 선택 과정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에 힘을 실어준다. 결과적으로 그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충분히 다른 우울한 결말로 이어질 수 있는 선택이었다.
위기를 풀어나가는 그 상황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고민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하고 무언가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 돌아가는 상황의 급박함과 순간적으로 변화되는 상황은 결정을 망설이게 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 모든 순간에서 가장 나쁜 건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속 재호는 대식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빠르게 해 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결과는 영화적으로 활용되어 작은 반전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건 그 두 사람을 비롯한 외교부가, 국가가 그 위험한 줄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는 2004년 실제로 있었던 샘물교회 피랍사건의 교섭과정을 모티브 삼아 중간의 작은 사건들을 채우면서 변주해 간다. 피랍된 인원들이 풀려나는 과정은 다소 축소되었지만 실제 사건의 분위기나 과정을 그래도 사실적으로 담으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외교관들의 노력과 긴장감을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외교부와 외교관들의 대화를 담는다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외교관들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탈레반들은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무척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에 황정민과 현빈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가 살리지 못하는 밋밋한 이야기
전반적으로 이야기자체가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수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극적이거나 신파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강한 맛은 덜하다. 그렇다고 이주 묵직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만큼 강력한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심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 약간의 유머가 포함되어 있지만 전반적인 극의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임순례 감독은 이 영화를 보다 사실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실제 아프가니스탄과 그와 비슷한 곳에서 촬영을 진행했고 현지 배우들을 캐스팅해 사실적인 장면을 이끌어냈다. 또한 영화의 음향과 음악 같은 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무난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이야기 안에서 활약하는 외교관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넓게 보면 국가를 대표하는 그들이 위기에 처한 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구하려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 보기에는 좋은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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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슬픈 영화 추천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남은 인생 10년
(23.05.24 개봉)
감독: 후지이 미치히토
출연: 고마츠 나나, 사카구치 켄타로 등
'남은 인생 10년' 보러 다녀왔어요!
영화관 가서 볼 정도의 퀄리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5월 개봉에도 눈 감고 있었는데
역시나 영화관 가서 볼 정도는 아니구요 ㅠㅠ
본편보다 예고편을 잘 만든 케이스더라고요......
<너의 이름은> OST 부른 RADWIMPS가 노래를 불렀길래 와 이건 백퍼 오열 각이다 싶었는데
그 노래는 엔딩 크레딧에만 나와서 ㅠㅠ 짜게 식음
레드윔프스를 가수로 썼으면 당연히 본편에 부르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센스가없어 센스가~~
다음은 '남은 인생 10년'의 줄거리입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난치병으로 로10년의 삶을 선고받은 '마츠리'는
삶의 의지를 잃은 '카즈토'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루하루 애틋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하지만 쌓이는 추억만큼 줄어드는 시간 앞에
결국 마츠리는 카즈토를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영화 <남은 인생 10년> 줄거리
줄거리는 여느 일본 영화에서 봤을 법한 흔하디 흔한 불치병 여주의 이야기예요 ㅋㅋ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면 남주가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우울감에 빠진 상태란 건데
그래서 더욱 서로의 감정을 치유하는 좋은 관계가 되었고
로맨스로 빠지는 개연성이 완벽해졌어요
다만 아쉬웠던 점은 과정을 너무 질질 끌었단 거
여러 계절이 지날 동안 마츠리와 카즈토는 사귀지 않아요
그들의 친구들이 사귈 동안 썸만 길게 탈 뿐 결국 사귀자고 고백하는 카즈토를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츠리가 거절하죠
그런 과정이 두세 번은 반복되는 거 같아요......
사실 '남은 인생 10년'이라는 제목도 그렇고
예고편에서도 마츠리와 카즈토가 행복해 보이는 장면을 그렇게 많이 뿌려 놨다면
행복한 연애, 하지만 곧 헤어져야만 하는… 을 메인 소재로 잡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체감상 썸 8년 연애 1년 반 후회 반 년임
엔딩은 당연히 행복하게 사귀던 둘이 마츠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이별하게 되고
오열하는 카즈토와 오열하는 관객,, 이 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자신의 미래를 버티지 못한 마츠리가 죽기 전 미리 카즈토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각자 알아서 잘 살다가 마츠리가 쓴 소설을 보며 다시 그녀를 찾아가는 카즈토
그러나 그녀는... 죽음으로 끝나요
엔딩으로 갈수록 실망이 너무 커졌어요
관객이 울 만한 텀을 꼭 넣어 줘야 하는데
울려고 하면 관계 파탄 또 울려고 하면 다음 스토리
이런 식으로 여러 개의 사건을 겹쳐 버리니까
언제 울어야 하는지... 애매해지더라고요
볼 거라곤 고마츠 나나와 사카구치 켄타로 얼굴뿐인...
아 그리고 카즈토 덥수룩한 머리에서 짧게 자르게 된 것도
잘생긴 얼굴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막 슬로우 모션 걸고~ 이럴 줄 알았는데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짧은 머리로 생활하고 있는 거로 넘어가서 좀... 실망이었어요......
남주 진짜 잘생긴 거 모르겠었는데 머리 자른 담에 아 잘생긴 얼굴이었구나 싶었단 말이에요 ;;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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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함이라는 감정과 허무함을 딛고 일어나는 인간에 대한 영화 《나를 찾아줘》
이영애의 복귀작이었던 영화 《나를 찾아줘》. 기대를 하면 항상 실망이 따라오곤 했었는데 이 작품만큼은 예외였던 그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 스릴러라는 장르 속에서도 인간 본질에 대한 탐색적인 주제를 잘 담아낸 작품이었다.
영화 《나를 찾아줘》 시놉시스
6년 전 실종된 아들을 봤다는 연락을 받은 정연. 숱하게 반복되던 거짓 제보와 달리 생김새부터 흉터까지 똑같은 아이를 봤다는 낯선 이의 이야기에 정연은 지체 없이 홀로 낯선 곳으로 향한다.
하지만 자신의 등장을 경계하는 듯한 경찰 홍경장과 비슷한 아이를 본 적도 없다는 마을 사람들.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 정연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찾기 시작한다.
6년 전 사라진 아이, 그리고 낯선 사람들. 모두가 숨기고 있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영화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가장 처음으로 띠용~~했던 장면은 정연의 남동생이 정연을 이용하는 장면이었다. 윤수를 찾으러 다니다가 교통사고 당해 죽은 남편을 보내고 폐인이 된 정연에게 걸려온 전화를 대신 받은 남동생은 윤수가 살아있다는 제보전화가 왔음을 정연에게 알리지 않는다.
설마,, 에이,, 알려주겠지 했는데 돈이 필요했던 정연의 남동생은 정연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정연에게 공중전화에서 윤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며 돈을 요구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혈연관계라고 해도 돈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먼저구나 싶었다.
무너져가는 누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 절박함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갈취하는 모습을 통해서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도 저러는데 완벽힌 남인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인간관계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던 장면이었다.
허무함에 대해 다루다
영화 《나를 찾아줘》를 다 보고 느꼈던 감정은 ‘허무하다, 허탈하다’였다. 윤수를 찾으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찾다가 윤수가 죽고, 알고보니 정말 윤수가 아니었던,, 정말 허무했다. 평소 같았으면 ‘와,, 이 영화는 도대체 뭘까?, 주인공은 내내 뻘짓을 한걸까?’하고 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뭐,,’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써 노력해도 막상 그 결과를 보고 나면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했나 현타가 오고, 허무함과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또 좌절하기 보다는 또 다른 목표점을 찾아내서 노력하고 성취해가는 것이 인생이다.
영화 《나를 찾아줘》에서는 그 모습을 ‘실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잘 풀어내고 있었다. 인생에서 허무함과 허탈감을 느끼는 정도를 실종된 아이를 과정에서 느끼는 부모의 심정과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나를 찾아줘》는 ‘실종’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허무함이라는 감정을 잘 풀어내면서 감정의 경험을 확장시켜준 것 같다.
인간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 캐릭터들
영화 《나를 찾아줘》를 높이 평가하는 이쥬 중 하나는 필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과 영화의 시각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어른들을 선악의 모습 두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윤수를 잃어버린 정연 마저도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사람에게 독극물을 쓰기도 하고, 윤수의 위치를 몰래 알려준 경찰 역시 집단 속에서는 똑같이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아이들은 몰라도 사회화가 된 어른들은 이런 선악의 구조를 모두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시선에 맞춰 상황에 따라 선의 모습을 드러낼지, 악의 모습을 드러낼지 사람들은 결정한다. 집단 속에 있을 때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취득하기 위해 선과 악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 영화 《나를 찾아줘》의 캐릭터들이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이 됐다.
굉장히 부정적이고 암울한 감정에 대해 섬세하게 풀어낸 영화 《나를 찾아줘》. 인간의 선악에 대해 그리고 허무함이라는 감정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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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미래일까 현재일까, 상상일까 현실일까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가 새로운 작품과 함께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설레었던가. 회갈색 빛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에 찝찝함을 더하고 현실에 대한 의문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품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재치를 던져줌으로써 자칫하면 질척 질척 무겁기만 할 수도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유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가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무언가와 눈을 맞춘다.
그런 봉준호 감독이 로버트 패틴슨과 만났다. <트와일라잇>으로 한국 대중에게 익숙할 로버트 패틴슨은 사실 그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으로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구상하며 주인공 역으로 바로 로버트 패틴슨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미키 17>을 통해 자신의 연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영화를 본 박찬욱 감독은 ‘아카데미 위원회는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 두 개를 주어라!’라는 평까지 남겼으니 말이다.
오랜만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돌아다는 소식에 설레며 개봉일만을 기다려왔다. 그렇게 개봉일 아침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 마주한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미래와 사회에 대한 고찰을 하게끔 만들고 있었다.
<미키 17> 한국판 포스터와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 (C) Warner Bros Korea
영화 <미키 17>은 2050년,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한 공상과학 영화다. 지구에서 사채 빚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당하는 미키(로버트 패틴슨 역)가 새로운 행성의 개척 프로젝트에 지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무 기술도 능력도 없던 미키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지원할 수 있던 유일한 직군은 ‘익스펜더블 expendable.’ ‘소모용’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직군에 지원하기 전 미키는 지원서의 세부사항을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직군의 주요 업무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복제당하고 또 죽음을 겪는 실험체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는 어느 날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귀환한다. 그런데 힘겹게 몸을 누인 자신의 침대에는 또 다른 미키가 있었다. 둘의 미키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에서,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키 17>은 그린다.
이번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첫 우주 공상과학 영화, 우주 SF 영화다.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미키 17>에서는 지구가 미래 직면하게 될 모습과 과도하게 발전하는 기술이 마주할 이슈 등을 그린다. 복제 인간 미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바로 그 이슈 중 하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독창성은 원작소설 《미키 7》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원작소설에 그만의 각색을 더해 <미키 17>을 완성해 냈다. 원작이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면, 봉 감독은 각색을 통해 인간냄새나는 SF 영화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각색 포인트는 바로 원작에서보다 주인공 미키를 10번이나 더 죽였다는 점이
“미키는 불쌍하고 찌질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캐릭터입니다.”- 봉준호 감독 -그럼 영화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 간략하게 하고, 이제는 영화 속 세계를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들 포인트들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부디 여기서부터 등장할 내용을 읽기 전 영화를 만나고 왔기를 바라며 말이다.
*본 게시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복사할 수 있는 미키는 '죽어도 또 만들면 그만'인 존재로 취급당한다. (C) Warner Bros Korea
무뎌지는 인간성에 대한 고찰
미키는 실험을 위해 반복해서 복제되는 존재다. 그의 몸은 가장 처음 실험을 위해 스캔해 둔 몸을 복제하여 만들어지고, 그의 기억은 가장 마지막 기억을 데이터로 불러와 새로운 몸에 심으며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복제를 통해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미키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를 두고 무생물체보다 못한 취급을 하기도 하며, 인류사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그를 불필요하게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발전하는 기술 앞에 점차 무뎌지는 인간성을 그린다. 영화 속 미키는 ‘실험 인간’이다. 주인공인 그의 역할과 감정에 이입하여 영화를 보게 되는 관객들은 자연스레 반복되는 실험의 잔혹함과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더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대상이고 그 실험이 ‘카메라 앞’에 비쳐 우리에게 영화라는 ‘가상의 이야기’로 공개되었다는 점만 다를 뿐, 이러한 실험은 과거와 현재에 존재해 왔다. 물론 그 시간과 장소에는 미키의 곁을 지켜준 나샤 같은 따뜻한 인간 또한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말 이처럼 무뎌지는 인간성은 그저 공상과학 영화, 가상의 이야기 속 상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을까.
지난 날의 '나'가 눈 앞에 있다면, 부끄러울까 안타까울까 자랑스러울까 사랑스러울까 (C) Warner Bros Korea
미키, 같은 듯 다른 나와 나
미키는 같은 형태의 몸으로 복제되지만, 그 기억은 데이터로서 백업되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처음과 같은 미키가 복제되는 게 아닌 지난 미키에서의 죽음을 품은 다음 세대의 미키가 태어난다. 그래서일까 모든 미키는 조금씩 달랐다. 미키 A는 소심했고, 미키 B는 멍청했다. 미키 17은 순한 맛이었으며, 미키 18은 매운맛이었다. <미키 17>에서 주로 등장하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더 큰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이 둘은 번갈아 가며 전혀 다른 특성의 대화를 던지는 모습이 마치 천사와 악마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미키는 미키였다. 단지 경험한 죽음과 기억이 조금씩 달라 그 시점의 행동이 조금씩 다르게 드러났을 뿐, 모두가 미키였다. “I hate you. 나는 네가 싫어.” 화가 많고 반골 기질이 강한 미키 18은 모든 걸 좋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려는 유순한 미키 17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신에게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꽤나 잔혹하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듯, 과거의 자신을 두고 미래의 자신이 싫다고 하는 미키의 모습은 그가 지난 시간 받은 상처와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답답함의 표출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결말에 다다라 미키 17이 미키 18처럼 생각하고 던지는 대사가 있다. 거기서 볼 수 있듯, 미키 18은 기존의 미키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미키가 아니었다. 미키 17이 살다 보면 마주했을 미래의 미키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특정 사건을 계기로 책에서 챕터를 넘어가듯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가. 미키는 그렇게 ‘죽음’이라는 다소 강제적인 요소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의 챕터를 넘겨왔다. 물론 그렇게 넘어간 다음 장이 과거보다 나을지, 혹은 많은 걸 포기하거나 놓은 상태로 과거보다 더 못한 미래였을지는 미키만 알 테다. 과거의 자신을 바로 두 눈앞에 두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험 또한 미키만 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감옥 같은 우주선 속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독재자의 모습은 공상과학일까 현실일까 (C) Warner Bros Korea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과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논하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 대해서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요 배경 사회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인류 공동체를 키우려 하는 우주선 속이다. 이러한 사회를 주도하는 이는 지구에서 정치 활동에 실패한 정치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 역)이다. 그가 이끄는 우주선 속 사회에는 그를 쫓아온 열렬한 지지자들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 지구를 떠나고 싶어 도망 온 사람 등이 섞여 있다. 그들은 모두 ‘인류 번영을 위한 신 행성 개척’이라는 마샬로 인해 주어진 사명 아래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이어간다. 음식은 칼로리를 채워 살기 위해 주어지는 연료 따위의 수준이며, 조금만 실수해도 심한 질책을 당하며, 우주선 속 환경은 감옥을 연상시킨다.
우주선의 리더 케네스 마샬은 가히 독재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가지만, 일꾼이자 우주선 속 사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복지와 행동은 철저히 통제된다. 그의 주장과 연설은 허술하고 허황하기 짝이 없으며, 자신의 아내와 비서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샬 역의 마크 러팔로 배우는 자신의 캐릭터를 두고 “봉준호 감독에게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도대체 왜 이런 악역을 나에게 주는 걸까, 내가 뭔가 잘못했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전했다. 또한 마샬을 두고 세계 각국의 인터뷰에서 각 나라의 특정 독재자가 떠오른다는 평이 많았다. 이에 관해 특정 인물이 모티브가 되었냐는 질문에 봉준호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마샬은 과거 독재자들의 모습을 따와서 만든 캐릭터입니다.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현재의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영화 속 우주선은 행성 개척을 위한 탐사선이기도, 일터이기도, 감옥이기도 해. 그치, 미키? (C) Warner Bros Korea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에 관해서는 물론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영화의 서사가 되새기게끔 하는 식민지화의 잔혹함과 독립의 이야기는 한국인 혹은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나라 국민이라면 자연스레 떠올렸을 것이다. 죽음을 피해 반복되는 죽음으로 뛰어든 미키의 모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삶에서의 선택을 되돌아보게끔 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마왕을 떠올리게 하는 OST에 미키를 쫓아오는 보이지 않는 마왕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이도 있었을 것이며, <미키 17>을 보며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 <괴물>, <설국열차> 등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으리라. 물론 SF 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한 요소를 지닌 다른 영화 혹은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점에서 우리는 또 깨닫는다. ‘봉 감독이 돌아왔다.’ 그의 짙은 회갈색 빛 거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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