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7-01 07:37:25
카메라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할 수 있는가
영화 〈다섯 번째 방〉
자기만의 방.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도 돌볼 필요 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가족과 함께 사는 여성들이 여간해서는 갖기 어려운 공간. 〈다섯 번째 방〉은 카메라를 든 딸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성이 집, 공간, 가족과 맺는 관계를 위태로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가족 고백과 함께 드러내 보인다.
딸(감독)은 조부모 때부터 50년간 산 2층 주택에서 자랐다. 엄마가 할머니의 양보로 집에서 가장 넓은 안방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빠가 사업이 망한 후 일용직으로 근근이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엄마가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서 안방으로 옮긴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얻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마는 집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사노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서 가사노동은 분담되지 않고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여겨진다. 프리랜서 상담가, 강사로 일하는 엄마는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 때문에 업무를 준비할 때조차 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늘 ‘얹혀사는 사람’,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 느꼈다. 집의 주인이자 (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할머니 명의로 된 집이 언젠가는 부부의 집이 되리라는 믿음이 엄마를 버티게 한다. 엄마에게 집의 상속은 단순히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 됨과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 나아가 오랜 시간 시부모를 모시고 가족을 부양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무너진다. 감독의 고모이자 엄마의 시누이 중 한 명이 할머니에게 집의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재 사는 집에서는 평생 ‘나’로서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엄마의 불안이 증폭된다.*
자기만의 방을 향한 엄마의 여정이 본격화된다. 모든 가족이 쉬이 오가던 안방 대신 2층으로 올라가 작업실을 꾸리는 것. 그러나 층의 분리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아빠는 이전처럼 수시로 엄마의 작업실에 드나들고 엄마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할머니가 가꾸는 2층 텃밭 한편에 허브를 심는 것조차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엄마에게서 결혼 후 쭉 살아온 집이라는 공간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엄마는 어느 순간 판단을 내린다. 이 집에서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다고.
1층 구석의 첫 번째 방, 경제력을 획득한 이후의 두 번째 방(안방), 작업실로 꾸민 세 번째 방(2층 방)에 이어 빌라로 이사해 네 번째 방을 마련하는 엄마.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짐에 여러 살림살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엄마가 단순히 상담실만 꾸리기 위해 빌라로 온 것 같지는 않다. 때때로 폭력적으로 구는 아빠를 달래고 중재하는 일에 지친 엄마는 직업 활동뿐 아니라 가족을 돌보고 중재하는 데 소모된 자기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네 번째 방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자기만의 방으로서 다섯 번째 방이 제시되지 않는 이유는 다섯 번째 방은 앞으로 엄마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방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서사는 오래됐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화두일 공간과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허나 더 흥미로웠던 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맡은 역할이었다. 영화의 빌런은 명백하다. 물질적, 감정적으로 엄마에게만 기대면서도 때때로 폭력적으로 굴고 엄마의 직업적, 인격적 경계를 수시로 침범하는 아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딸인 감독이 담아낸다. 집의 상속 지분을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모에게도 물려준다고 선언하는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엄마, 장인어른의 장례식장에서 만취해 다른 가족과 다툼을 벌이는 아빠를 다그치는 엄마, 가족회의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빠에게 그의 폭력적인 모습을 성토하는 순간 등등에 감독과 카메라는 함께 존재한다. 그가 카메라를 든 감독인 동시에 가족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는 수동적, 객관적 관찰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딸과 카메라는 하나가 되어 기록하는 동시에 개입한다. 딸/카메라는 엄마를 응원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는 어렵다. 영화에는 거칠게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하는 일에 대한 딸/카메라의 고민이 묻은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건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말다툼하는 아빠의 모습을 찍은 촬영본을 아빠에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빠는 그 장면을 보며 멋쩍게 웃으며 ‘네 영화에서 난 항상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딸/카메라가 아빠에게 객관적 성찰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딸/카메라에 영향받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다음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 매 단계에 딸/카메라가 함께한다는 데서 가족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엄마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을 거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딸/카메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아빠에게 성찰을 촉구하며,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촉진한다. ‘관찰하기만 하는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가 행위자 역할을 한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카메라의 역할과 능력에 관한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줄 영화다.
*고모의 생각과 입장도 궁금하다. 엄마가 집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는 데에는 남편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세 딸 중 한 명이 부모에게 집에 대한 권리 중 일부(25%)를 요구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이기만 할까 싶었다. 가부장적 가족관계, 상속 관계에서의 을들의 부딪힘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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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원초적 본능>, 무릎 사이론 알 수 없는 것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드디어, 갑자기 본 영화. 이런 스릴러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봤을텐데. 해석의 재미가 쏠쏠하다. 여타 매혹적인 장면과 눈빛이 가득한 영화다. 제목은 원초적 본능이라 본능의 '끝까지 간다' 버전 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줄 타기를 잘하고 있다. 형사 닉 커랜과 작가 캐서린 트라멜. 그들의 한 마디가 떠나질 않는다. 살인은 담배와 달라. 그만둘 수 있으니까, 라는 그녀의 말과 그의 말. 난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잡아넣을 거야. 캐서린은 자신만만했다. 그는 자신이 알려주지 않는 걸 절대 알 수 없을 거라면서. 영화가 끝나면 질문을 각자에게 하고 싶다. 닉에게 묻고 싶다. 정말 캐서린이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있는지, 그녀를 정말 잡아 넣을 자신이 있는지. 그리고 캐서린, 살인이 정말 담배와 다른가요? 그만둘 수 있는 건가요?
누가 취조 당하는 걸까? 이 장면으로만 기억되서는 안 될 영화
캐서린 트라멜을 '섹시한 악녀'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녀가 다리 한번 꼬았을 뿐인데 경찰들이 정신을 못차린다. 누군들 안그랬겠나. 아무것도 숨길 것 없다며 침착하게 사람을 당황시키는 말까지. 그렇다. 그녀를 '섹시한 악녀'라 한다면 있을 건 다 있는 말이다. 그녀는 섹시하고, 매력적이고, 악하고, 여자다. 하지만 뉘앙스가 좀 다르다. 그녀는 원한다면 언제든 섹시하기 보단 우아할 수 있고, 악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라면 그녀는 똑똑한 살인자라고 말하겠다. 섹시함 역시 그녀의 지능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에이미 던/캐서린 트라멜
영화를 보면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가 떠오르는데 좀 다르다. 에이미와의 공통점은 꽤 많다. 사람들의 심리 파악에 능하고,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라는 점. 어쩌면 에이미가 캐서린을 많이 닮은 후배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마치 세상을 자신이 쓰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만 차이는 명확하다. 에이미는 살인을 즐기진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 역시 죽음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자신은 '어메이징 에이미'처럼 늘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원했다. 우아하지 않더라도, 피해자로 보이더라도, 결국엔 해피엔딩. 몇 명이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상관 없다. 남편은 알고도 자신을 떠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캐서린은 살인을 즐긴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해도 들키지 않을까? 가 궁금하다. 담배만큼 즐기지만 필요에 따라 절제하고 있다. 그녀의 모든 책에선 사람이 죽는다. 대체론 여자가 남자를 죽이고, 그 이야기를 위해서 그녀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사람을 유혹하고 죽여야 하기 때문인지, 자신이 지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관능적인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그걸 위해 돈도 시간도 공들이고 있다. 그녀에겐 즐거움이 중요하다. 사람과 죽음, 욕망 같은 것들. 사람이 이리 저리 게임판에 끌려다니는 게 재밌으니까, 그로 인해 충족할 수 있는 많은 욕망은 감칠맛이 난다. 에이미가 똑똑한 연기자라면, 캐서린은 똑똑한 살인자다.
닉과 캐서린, 베스를 둘러싸고 다양한 7건의 사고 혹은 사건이 나타난다. 배가 고장나 돌아가셨다는 캐서린의 부모님. 자동차로 추격하다 추락사한 캐서린의 연인 록시. 살인의 경우 흉기는 얼음송곳과 총이다. 얼음송곳으로 찔려죽은 세 사람. 캐서린과 베스의 지도교수. 캐서린과 만나던 은퇴한 로커. 닉의 동료 형사 거스. 총을 맞고 죽은 두 사람. 베스의 전남편. 닉과 날을 세우던 죽은 형사 닐슨.
코난을 10년 넘게 봐서 인지 사라지지 않는 찜찜함
일단 경찰에서 수사하던 형사 닐슨 및 거스 살인 사건(아마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까지도)의 용의자는 베스로 결론내려졌다. 범인이 베스라는 결말은 충격적이긴 하다. 닐의 심리치료사였고 다른 형사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하게 너무 완벽하게 다 맞아들어간다는거다. 범죄현장에서 멀지 않은 계단에 고이 모셔진 금발의 가발, 경찰들만 입는 우의와 얼음 송곳. 캐서린을 누명씌우려 했던 그녀의 의도가 이렇게 간단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니. 그녀의 집에서 발견된 총과 서랍에 놓인 캐서린에 대한 사진, 살인을 다룬 캐서린의 책. 어째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증거를 보란듯이 집에 걸어뒀을까. 이건 하나 하나 흩어져있던 증거를 모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의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증거는 베스가 범인이라는 걸 증빙하는 서류같다.
너무 완벽할수록 찜찜하다. 베스가 닐슨과 자신의 전남편은 총으로 죽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스는? 거스는 베스가 죽였는지, 캐서린이 죽였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닉은 캐서린이 이미 탈고해서 인쇄까지 한 미출간 신간 <Shooter>의 결말을 봤다. 책에선 주인공인 형사가 엘리베이터에서 살해된 동료를 찾으러 간다고까지 대본처럼 쓰여 있었고 이는 거스의 죽음과 일치했다. 물론 책에서 쓰여진대로 이미 그는 송곳으로 난도질 당한 후였지만.
베스(엘리자베스) 가너/캐서린 트라멜
베스와 캐서린 모두 거짓말을 했다. 베스는 전남편의 죽음도, 전남편과의 결혼도 닉에게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당시에 '여자친구'가 있었다는데 모를 일이다. 거스가 죽는 사건현장에서 만나자는 메세지가 있어서 왔다고 했다. 굳이 그녀는 총을 들고 자신을 의심하는 닉 앞에서 주섬주섬 열쇠고리를 꺼내다 총을 맞았다. 총을 가진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데. 캐서린은? 그녀는 책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제 사건이 일어난 '후'에 썼다고 말했다. 배가 고장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책을 썼다고. 하지만 은퇴한 로커 살인사건이나, 형사가 죽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먼저 완성되었고 그 이후에 살인이 벌어졌다. 작가인 내가 이 그대로 하기엔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이 걸 그대로 따라하는 멍청한 짓을 '누가' 한단 말인가?
베스가 생각보다 캐서린과 관련이 많다는 결론에 이른다. 미끼처럼 맞춰진 퍼즐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캐서린이 사랑에 빠져서 닉에게 한번도 안 하던 고백을 하며 자신을 따라하던 '리사 후버맨'을 말한 것도 이상하다. 베스는 이미 비슷한 얘기를 한참 전에 했고, 캐서린이 이렇게 말했을 거라며 나중엔 그대로 맞추기까지 한다. 캐서린에게 베스는 록시와는 다른 존재다. 록시와 캐서린이 성적으로 탐닉하고 관음하는 사이라면, 둘 사이는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이일 수도 있다. 책을 탈고한 그 짧은 시간에 베스가 캐서린의 책을 입수해서 있는 그대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캐서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베스가 캐서린에게 이용당해 꼭두각시처럼 범죄장소로 오게 되었다 해도, 어차피 캐서린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리는 없다. 사건 당일 그녀가 <shooter>라는 책을 다 썼으니 닉은 더 이상 필요헚다며 매몰차게 이별을 고한 건 왜일까. 거스가 살해되기까지 무대를 세팅했든, 직접 행동에 옮겼든 그의 시선을 벗어나 뭔가를 했을 시간은 충분하다. 자의든 타의든 베스는 캐서린의 책대로 사람이 죽는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된다.
그러면 닉은 바보같은 형사, 그녀와 사랑에 빠져 눈이 멀어버린 멍청이로 남아있을까. 그도 곧, 혹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베스만 죽은 것으로 모든 게 끝났을까? 캐서린에 대한 의심은 이렇게 사랑의 힘으로 영영 이겨낼 수 있을까? 닉과 캐서린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외모도 있지만 자신과 같은 류의 사람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욕망과 본능에 충실한, 살인자. 코카인과 담배를 즐기고 끊을 수 없고 거짓말 탐지기를 가볍게 통과할 수 있고, 들키지 않고 수사망을 빠져나와본 사람이다.
캐서린이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고 잊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닉 역시 무서운 사람이다. 5년동안 4건이나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인 경험이 있으니 괜히 별명이 'shooter'가 아니다. 코카인이 사람을 망쳤을 수도 있지만, 코카인을 한다고 사람을 다 죽이는 건 아니다. 사람을 죽게 한 건 그의 욕구였다. 모두가 신나서 베스가 범인이라고 할 때, 닉은 얼빠진 듯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뜻하지 않게 베스를 죽여서 범인을 죽인 의로운 형사가 된 순간에도 그는 그리 기뻐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진짜 친구인 거스를 잃은 슬픔에 잠겨서일 수도 있지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하고. 그는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등 뒤로 반짝거리는 얼음 송곳을 몰랐을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면서 그녀를 잡아넣을 방법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아주 위험한 방법이지만 그게 그가 범인을 잡는 방법이니까.
주도권을 얻은 것 같다고 생각했겠지
캐서린은 닉에게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은 다 죽는다고 흐느꼈다. 처음엔 부모님, 그리고 지도교수, 소중하진 않지만 은퇴한 로커, 또다른 연인 록시. 그래서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를 사랑하면 그 역시 죽을 거라는 말처럼. 혹시나 그녀가 안타까운 운명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형사로서의 안테나는 꺼진 셈이다. 사건에서만큼은 우연이란 없다. 적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 있어선. 아,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깨물어주는 대신 죽여버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니까. 언제든 그녀는 그를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쓰면 그를 버릴 수도 있다. 언제든 그의 목에 송곳을 박아 넣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닐 뿐. 소중한 것들은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낫다. 어차피 사람은 죽으니까. 그녀에게 기억되고, 책으로 기억되면 영원히 남을 수 있다.
'당신은 내가 알려주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알 수 없을거야'
영화가 소름돋는 건 트레이드 마크인 무릎 사이에서는 알 수 없다. 캐서린이 무릎 사이를 들썩이며 그녀의 매력적인 몸을 보여주어서가 아니다. 그녀가 늘 상위를 차지한 채 남자를 묶고 언제든 얼음송곳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섹스신 때문도 아니다. 죽은 이들의 목덜미에 사정 없이 박힌 송곳 때문에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서도 아니다. 결말처럼 그녀가 그의 등 뒤로 얼음송곳을 들었다 놨다해서도 아니다. 소름돋는 건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 주변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데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 들키지 않아서 그녀로 인해 계속 죽게 될 사람들이 생겨난다. 사람은 어차피 죽으니까, 그녀는 글로 범인인 걸 숨기니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신을 거두고 죽어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니까. 아무리 절제한다 해도 그녀가 살인을 그만둘 것 같아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건 얼음송곳이 아니다. 살아숨쉬는 그녀, 그녀의 살인이라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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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회주의에 맞서는 러우예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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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상하이의 쑤저우강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고독한 사람,자식과 부모,일을 하는 사람,다리에 몸을 던지는 사람 등등... 그중에 비디오 촬영기사는 사람들에게 촬영 의뢰를 받고 일을 한다. 그런데 해피바라는 유흥주점에 있는 사장에게 의뢰가 들어오고 비디오 촬영기사에 눈에 들어온 건 인조 어항에서 춤을 추는 인어쇼를 본 것이다. 인어의 정체는 바로 메리메리라는 여자였고 둘은 커플이 된다.
하지만 메리메리에게는 사연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고 비디오 촬영기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기거나 전화를 하는 건데...
러우예 감독은 중국 정부의 감시와 블랙리스트 추가에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게 만드는 중국 영화들은 수면에 올라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은 수면 아래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의 감시에도 러우예 감독은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중국의 사회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게 중국에 맞지 않는 서방 세계의 자유로움과 다양성이 묻히는 게 20세기 말과 21세기 이후를 살아가는 중국 영화감독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비디오 촬영기사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과 핸드헬드 캠코더로 자신의 연인 메리메리뿐만 아니라 마다라는 인물과 메리메리와 닮은 무단이라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무슨 의미를 주는 걸까라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감독이 1980년대 당시 쑤저우강의 혼탁함을 비유하며 중국 인민들의 혼란스러운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메리메리가 없는 것에 대해 가지는 환상과 그걸 채워주는 욕구 그 이후에 나타나는 불만 같은 관점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은 허구와 현실이 반이 섞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비디오 촬영기사가 사실은 마다 역할도 했고 메리메리도 무단 역할을 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다.
이 영화가 끝나고 정성일 평론가님이 해석하신 다양한 관점들을 후기로 적어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의 영화감독들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씨네필이 되는 걸 주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국 공안의 감시도 너무 강해서이기도 하고 씨네필이 될 수 없게 만드는 환경도 한몫했다고 한다.
중국에 가보면 해적판 DVD방이 많다고 한다. 결국에는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들은 음지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영화 <쑤저우강>은 이러한 사회주의에 대한 중국의 방식을 영화로 표현하고 있다.
중국 기류의 혼탁함을 영화화하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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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탄광 속 다이아몬드
왓챠 이용자로서 계속 추천 영화로 소개되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사실 그전부터 이 영화의 정체는 알고 있었지만, 봐야겠다는 동기가 없었는데 이번에 시도하게 되었다. 발레 음악으로 등장하는 클래식으로 귀를 즐겁게 만든다. 한편, 빌리(제이미 벨)가 꿈을 이루기 위한 시련과 도전들을 그린 영화지만 빌리 아버지 제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의 시점이 더 눈길이 가는 영화였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빌리 엘리어트> 스틸컷
뮤지컬
영화가 가진 큰 틀이 '발레'라서 빌리(제이미 벨)가 발레를 하는 장면마다 발레 음악이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빌리가 발레 할 때뿐만 아니라 빌리 인생에 음악이 녹아드는 듯 음악 사용을 확장했다. 즉, 빌리(제이미 벨)가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발레 음악이 따라간다. 덕분에 빌리가 하는 동작마다 각각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내게 한다. 체육관에서 안무를 배울 때 등장하는 발레 음악과 체육관에서 아버지 앞에 발레를 출 때 나오는 음악은 빌리가 발레를 배우면서 느끼는 재미와 열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 씬으로 전환할 때 나오는 가벼운 분위기의 팝송은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한편, 빌리가 추는 탭댄스 후반부 장면과 아버지와 형이 다시 광산으로 들어가는 장면 등은 아무런 음악을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처럼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뮤지컬의 특성을 많이 가진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장면 전환에 사용되는 음악, 등장인물들의 독백과 그들의 뚜렷한 개성은 영화의 재미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2005년 실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다.
헌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빌리의 꿈을 위해 아버지 제키 엘리어트(게리 루이스)의 헌신이 희생당한다. 에버링텀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제키는 빌리의 발레를 위해 처음으로 런던으로 가고, 탄광 파업을 하며 탄광에 가는 이들을 배신자, 짐승 취급을 했던 자신이 빌리를 위해 그 길을 선택하려 하고, 죽은 아내의 유품을 팔아 빌리의 발레 학교 학비를 마련한다. 제키의 헌신은 그동안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자신과 같은 생을 빌리에게 반복하고 싶지 않으려 하는 강한 각오를 보여준다. 끝내 빌리가 발레 학교에 합격했지만, 노동조합의 굴복으로 탄광 파업은 실패가 된 상황에서 제키는 웃는다. 그 웃음은 아쉬움이 남아 있는 웃음이 아니고 자식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거라는 안도와 다행의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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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잼바르는 백창기와 폴리스 다크 아미 장이수의 쉴 틈 없이 웃기는
유쾌 상쾌 통쾌 영화 <범죄도시4>. 3주 연속 1위는 물론 시리즈
최초 4000만 달성 까지 이뤄냈다고 합니다.범죄도시 시리즈가 한국영화 시리즈 최초 누적 관객수 40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범죄도시4>는 둘째 주 주말 누적관객수 970만 명을 넘어서며 조만간 천만 관객을 돌파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가 주말 관객수 32만 명을 기록하며 2위, <쿵푸팬더4>가 누적관객수 175만 명을 기록하며 3위에 올랐습니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가 개봉 첫 주 전 세계에서 1억 29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CG와 영상미에 대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어 준수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한편 1위를 지키고 있던<스턴트 맨>이 2위로 내려오고, <챌린저스>가 지난와 같이 3위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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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작은 부조화와 모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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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이터널스>(2021)는 의외로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영화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노매드랜드>(2020) 한 편만 본 나의 편협하고 얕은 식견으로 넘겨짚는 것일 수 있겠으나, 이 영화에서 나는 자오 특유의 스타일이 묻어났다는 생각에 앞서, 영화의 크고 작은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감독의 작가 의식과 제작 환경 간의 괴리뿐만 아니라, 인물과 관객들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자연광을 최대로 활용하고 로케이션을 섬세하게 기획한 뒤 인물들을 공간에 동화되게 만드는 오묘한 질감의 서정성. 사실 <노매드랜드>에서는 이런 요소들을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지만, <이터널스>에선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자오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런 서정미를 느끼기 정말 힘들다. 인류사 초기 문명의 태동기에 이터널스 멤버들이 한 명씩 우주선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익스트림 롱 숏을 떠올려 보면 더욱 명확하게 생각이 정리된다. 장면을 잇는 리듬도 살짝 성급하게 느껴져서 관객과 인물들이 모두 자연 풍광에 스며들 기회를 쉽게 주지 않는 영화인 것 같다. 차라리 최근에 봤던 <듄>(2021)의 아득한 사막이 진득하게 뿜어내는 텁텁한 물성, 그리고 그 속에서 황량한 표정을 제대로 각인시켰던 티모시 샬라메의 얼굴을 감싸는 모래폭풍이 문득 그리워진다.
사실 <이터널스>에선 인물들이 공간에 녹아들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건 영화의 존재적 의의와 결부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영역이긴 하다. 바로 서사의 문제다. <이터널스>는 제한된 분량으로 페이즈의 확장 및 세계관의 가교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매우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 잡은 MCU 영화다. 자오의 작가적 역량이나 의식과는 별개로 마블에서 <이터널스>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충족 기준치가 존재한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로 본격화시킨 페이즈 4에서 이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욕심 그득한 선택을 내린다.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되 마블 세계관에 종속된 영화처럼 느껴지게 온갖 장치를 삽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영화가 핵심으로 고려하는 드라마의 깊이는 매우 얕다. 표면만을 건드리며 듬성듬성 훑는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사실 파편화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들이나 매우 헐거운 다성적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이라도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영화들이 얼마든지 있다.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은 도통 맥락이라고는 찾기 힘든 낯선 인물들의 사연을 과감히 교차하고 나열하고 있지만,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드라마의 측면에서 영화의 화술을 이해하는 관객은 매우 많다. 그런 점에서 <이터널스>는 관객들이 캐릭터와 함께 호흡을 맞출 여지를 남기지 않는 듯 보인다.
물론 이에 관한 변호 혹은 항변의 시도가 예상된다. '이터널스'는 그냥 인간들이 아닌 초월적, 신화적 존재들이며, 칠 천 년 넘게 지구에서 버텨 온 그들의 사연을 우리 입장에서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오히려 중요 맥락에서만 짚어보는 방식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변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터널스>는 10명이나 되는 이터널스 멤버들 각자의 사연을 하나씩 챙겨주려고 하면서도 이들과 숙명적인 관계로 얽혀 있는 데비안츠와 셀레스티얼까지 건드려야 하는 엄청난 규모의 대서사를 두 시간 반 만에 단숨에 전개한다. 교차되는 시간대에 있어서도 하루 전이나 일주일 후 등이 아니라, 몇 세기는 기본이고 현대에서 바빌론 문명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과감한 작법을 선보인다. 인류사의 중요 맥락을 건드리는 시간대 교차라는 겉핥기 화법으로 대서사 전개 시의 맹점들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흐름에 종속된 주요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다루는 방식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힘들뿐더러 영화의 화법과는 어울리지 않는 접근이다.
<이터널스>에서 태고의 질감을 불러오고자 신화적 존재들을 대자연의 풍광과 버무려서 담아내려는 시도는 애초에 클로이 자오의 영화가 주안점으로 두던 것들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이터널스>는 자오(및 제작진과 파이기)의 판단 미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오의 연출력이 발휘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시공간의 맥락과 연동시키면서 관객에게 스며들게 하는 순간들이다. <노매드랜드>에서 펀과 밥이 햇빛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속내를 공유하던 순간이 내게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터널스>에서도 역시 그런 지점들이 발견되는가? 아, 의문 포인트가 잘못됐다. 애초에 <이터널스>는 그럴 수가 없는 영화다. 기본적으로 관객과 인물들 사이에서 공유될 수 있는 시공간의 괴리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과 늘 함께 해온 초월적이고 신비한 존재들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얼마나 많을까.
그런 미지의 존재들이 갑작스레 인간들처럼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하려고 한다. 연인이 섹스를 할 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장면은 사실 많이 오글거리는 데다가 배우들의 합도 잘 안 맞아 보였다. 여기서도 역시 영화의 항변이 소환될 수 있을까? 이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터널스 각각의 사연을 보면서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이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리라 짐작해야만 하는 걸까? 그러기엔 영화가 이 각각의 멤버들을 너무나 '인간적'으로 묘사하려고 한다는 점은 분명 모순이다. 이터널스 멤버들을 찬찬히 살피면, 겹치는 면모가 하나도 없다. 현대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듯 인종과 성별, 성적 지향성, 신체 특성 등에 따라 열 명의 캐릭터들이 마치 그 자체로 모종의 인류 집단을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터널스 멤버들은 절대자 같은 능력을 지녔음에도 인간적이어야만 한다. 캐릭터들의 다양성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쟁점이 되기 이전에, 이미 영화 내적으로 서사와 결부된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지 않은가. 이들은 연약한 수호자들이며, 고뇌와 혼란에 사로잡혀 선택해야 하는 불완전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딜레마의 문제가 바로 <이터널스>의 서사를 전개하는 동력이 된다.
인물들의 감정 변화와 그로 인한 부산물에 주목하는 <이터널스>에선 그에 따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정신없이 나열되는 인물들의 사연을 토대로 생성되는 감정선을 단숨에 증폭시킬 매개체들이 적재적소에 유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타율이 신통치 않은 마블식 유머와 멤버 간의 시너지가 잘 느껴지지 않는 어쭙잖은 액션(길가메시와 테나, 킨고와 마카리 등이 합을 맞추는 장면들은 많이 아쉽다)이 있다는 점은 분명 패착이다. 어쩌면 예견된 운명인가. <이터널스>는 코믹스 원작 세계관 기반의 상업영화라는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이터널스>는 그 자체로 어정쩡하고 모호한 영화가 된다. 주제가 모호하다거나 영화 자체가 불가해한 매력을 뿜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방향성이 정해진 각각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맥락이 연동되지 않은 채로 마구 뒤섞인 모호한 상태에 놓인 영화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이터널스>가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다. 과연 클로이 자오만의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작가 의식과 상업성 추구를 오가는 줄타기를 얼마나 유려하게 선보일 것인가 등과 같은 의문들은 이 영화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터널스>는 여러 군데에 손발을 걸쳐놓은 의뭉스러운 인상만을 남긴다. 규모와 디테일의 부조화, 어필하려는 지점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모순점들이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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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할 수 있는 기만, 대체할 수 없는 마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넬리는 친구 레네와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그렇게 가고 싶던 고향은 멀고도 험한 길이었고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거쳐야만 했다. 고통으로 점철된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시대의 참혹함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돌아온 고향은 모든 것이 파괴된 모습이었고 고통스러운 사실이 넬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실에도 유일하게 자신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피투성이였던 넬리는 얼굴 재건을 위해 성형수술을 해야 했고 이전과는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달라진 얼굴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족, 남편 조니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고 ‘피닉스’에서 만난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슬픈 사실에도 쉽게 슬픔을 드러낼 수 없는 넬리에게 조니는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와이프 넬리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고 넬리는 그를 수락한다. 넬리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던 추억은 조니 에게 있어서 바래진 추억일 뿐이었을까. 웃지 못할 연극이 계속되면서 애써 외면해왔던 현재의 모습에 파고들면서 끝을 보이고 있었다.
끝없이 바닥 치는 내면의 마음이 과거의 따뜻한 사랑을 되찾기엔 왜곡된 진실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의술로도 원상태로 돌릴 수 없었던 겉모습과 마음이 남기는 흔적이 곳곳에 자리 잡으면서 고통과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그와 함께하면서 시작된 기만을 비롯한 연극이 비극의 끝을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 자리로 자신을 옮겨 온다. 복수보다 무서운 용서가 마지막을 맴돌며 온몸에 전율이 피어오른다. 당연하게 여겨진 것을 잃어가며 소중한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당연하게 여겨 어쩌면 외면했던 것들의 다른 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하는 역사의 왜곡은 개인의 왜곡으로 이어져 예견된 비극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고개를 돌리고, 모습을 감추고, 눈을 감을 텐가.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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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강호 수상작 브로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것
?Rabbitgumi 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가 개봉했어요.
송강호 배우가 칸 남우주연상을 탄 영화이기도 하죠.
그 외에도 아이유, 강동원, 배두나 등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답게 유사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질문을 던지는 영화에요.
굉장히 따뜻한 시선으로 이런 질문들을 하는 영화죠. 무척 따뜻해요.
영화의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을까요?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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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니얼굴> 메인 예고편
어느 뜨거운 여름,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은혜씨가 양평 문호리리버마켓의 인기 셀러로 거듭난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원래 예쁜데요 뭘~” 예쁜 얼굴도 안예쁘게 그려주는 은혜씨 앞에 4천 명의 사람들이 환하게 웃음 짓는다 -감독: 서동일 -출연: 정은혜, 장차현실 -개봉: 2022년 6월 23일 -제공/제작: 두물머리 픽쳐스 -공동제공/배급: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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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안나라수마나라> 공식 예고편
"미스터리 마술사 그의 마법에 걸렸다"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와 아이로 남고 싶은 마술사 '리을'
올 봄, 이들의 특별한 주문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