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7-26 18:05:12
멀티버스라는 늪에서 악전고투하다
<데드풀과 울버린>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바네사를 되살리고 일상을 되찾은 '데드풀/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데드풀은 이제 어벤져스에 가입해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바네사'(모레나 바카린)와도 이별한 후 '피터'(롭 딜레이니)의 도움을 받아 중고차 딜러 일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온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과 함께 엑스맨 유니버스가 소멸될 상황이 되자, TVA에서 데드풀을 MCU의 일원으로 캐스팅한 것. 데드풀은 '마블의 예수'가 될 것이라 들뜨지만, 흥분도 잠시.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를 곧장 파괴하려는 '패러독스'(매튜 맥퍼딘)의 음모를 눈치채고, 자기 우주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모든 면에서 상극이고, 자기 우주를 구하는 데 실패한 또 다른 '울버린'과 함께.
MCU의 예수는 되지 못하다
2024 슈퍼볼에서 처음 공개된 <데드풀과 울버린>의 티저 예고편. 2분 남짓한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개 24시간 만에 3억 6,5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기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3억 5,550만 조회수를 뛰어넘었다. 특히 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바로 마블의 예수님이야"라는 데드풀의 대사는 MCU와 멀티버스 사가에 신선한 피가 수혈될 거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데드풀과 울버린>은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 못했다. 데드풀과 멀티버스 사가의 만남 자체는 인상적이다. 데드풀만의 특색과 입담을 살려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사가를 작품 내에서 풀어냈다. 엑스맨 버전 <노 웨이 홈>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엑스맨>,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블레이드>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과거 마블 캐릭터들에게 명예로운 엔딩을 안겨 주었다.
다만 MCU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멀티버스 캐릭터에게 내준 공간만큼 데드풀과 울버린의 자리가 줄었다. 그 결과 데드풀도, 울버린도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휴 잭맨이 복귀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을 정도다. 프로모션 과정 내내 강조한 데드풀과 울버린의 버디 무비라는 개성도 덩달아 옅어진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의 구세주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폭스의 <노 웨이 홈>
데드풀의 가장 큰 개성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작품 내외를 오가며 히어로 영화의 금기를 전부 다 깨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면서도 따로 노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MCU는 이를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의 가교로 삼았다. 데드풀의 입담과 액션을 활용해 작품 외적인 이유로 퇴장했던 캐릭터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주고, 세계관 자체는 멀티버스 속에 남겨두며 미래를 기약한다.
당장 기본적인 스토리부터가 현실의 은유다. 데드풀이 자기 우주를 파괴하려는 TVA에 맞서는 것은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종료된 엑스맨 유니버스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우주에서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울버린의 모습도 마치 엑스맨 유나버스의 종료를 막지 못한 현실의 울버린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과거 마블 영화 캐릭터를 지배하려는 카산드라 노바와 싸우는 것 또한 MCU에 병합돼야 할 엑스맨 유니버스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다시 못 볼 캐릭터로 가득하다. 촬영은 완료했으나 공개되지 못한 채닝 테이텀의 갬빗과 <로건> 속 로라를 비롯해 파이로, 토드, 아자젤, 저거너트 같은 조연이 재등장한다. 이에 더해 크리스 에반스의 휴먼 토치, 제니퍼 가너의 엘렉트라,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 등 과거의 영웅도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즉, <데드풀과 울버린>은 20세기 폭스 버전의 <노 웨이 홈>이다.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예전 마블 영화의 추억을 지키려는 메타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MCU 멀티버스 사가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일단 엑스맨 유니버스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판타스틱 포>, <블레이드>, <데어데블>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조차 알 수 없다. 또 <로키> 시즌 1을 보지 않으면 TVA, 보이드, 알리오스와 신성한 시간대 같은 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갬빗의 경우에는 디즈니-폭스 인수 사가와 관련된 뒷이야기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되지 못한 울버린
그러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완성도는 <노 웨이 홈>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 하나를 놓친 까닭이다. <노 웨이 홈>의 힘은 과거의 두 스파이더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의 원천이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가 그린 고블린을 치료하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가 추락하는 MJ를 구해내는 모습은 팬들의 상상과 염원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도 비슷한 방식으로 울버린을 활용하려 한다.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로건을 기존의 엑스맨 유니버스로 불러와서 그가 다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울버린이 지난 20여 년간 엑스맨 시리즈에서 활약한 울버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전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이번 울버린은 관객과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교류할 길이 없다.
불친절한 전개는 문제를 더 키운다. 멀티버스의 울버린이 좌절한 이유나 정황은 실감하기 어렵다.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대사로만 제시되기 때문. 그가 엑스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고, 로라가 멀티버스의 로건에게 그의 본성과 영웅성을 일깨우는 대화도 임팩트가 부족하다. <노 웨이 홈>에서 과거의 스파이더맨이 MCU의 스파이더맨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백하다.
이 괴리감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데드풀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로건>에서 묻힌 울버린의 무덤을 파헤친다. 그러고는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뼈를 이용해서 자신을 뒤쫓아온 TVA 요원들을 때려잡는다. 물론 분위기나 연출 자체는 데드풀답게 유쾌하고, 데드풀도 관객에게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기기 어렵고, 이번 울버린과의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울버린과 함께 무너지는 데드풀
이에 더해 <데드풀> 영화인데도 데드풀의 서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데드풀> 시리즈의 매력은 평범한 주제나 메시지를 데드풀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1편은 로맨스 영화를, 2편은 가족 영화를 B급 유머로 범벅해 흥미롭게 풀어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데드풀. 그는 MCU의 어벤져스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한 후 크게 좌절했고,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맸다. TVA에서는 마침내 MCU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그 꿈도 포기한다. 친구들과 그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인 울버린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는 울버린과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 결과 데드풀의 서사는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상황 설명 대사로 자주 대체된다. 일례로 데드풀의 우주가 위험하다는 상황 설명도 패러독스의 대사로만 언급되니 실감하기 어렵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의 끝에는 데드풀다운 유머만 남는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 내레이션 없이는 데드풀만의 서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드풀도, 울버린도 없는 버디 무비
전반적인 만듦새도 덩달아 미흡해진다. 두 주연 개개인의 서사가 부족하니 버디 무비인데도 둘의 호흡은 매끄럽지 않다. 예를 들어 울버린은 갈수록 데드풀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다. 새로운 울버린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가운데 시리즈 내내 데드풀을 봐온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꼭 보여줘야 할 멀티버스 이벤트를 먼저 설계한 뒤, 데드풀과 울버린의 행적을 짜 맞춘 듯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뒤바뀐 듯 보이기도 한다. 중반부 보이드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작중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러 돌연변이와 히어로들이 뒤엉켜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마치 <엑스맨: 최후의 전쟁> 속 알카트라즈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과거 시리즈와 캐릭터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기에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에 반해 데드풀과 울버린이 데드풀 군단을 마주하는 시퀀스는 임팩트가 부족하다. 물론 <올드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를 연상시키는 액션 자체의 쾌감은 나름 인상적이고, MCU의 멀티버스 설정을 비꼬는 대사는 유쾌하다. 하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단순한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퀀스를 들어내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악역의 존재감이 확실했다면 상술한 문제는 다소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는 능력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그녀는 '보이드'로 떨어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시간선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역의 클리셰를 비튼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개인사마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가 울버린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바꾸는 전개 또한 다소 급작스럽다.
MCU의 고질병이 또 도지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이 줄곧 노출한 문제점의 연장선이다. 이번에도 세계관 정리에는 성공했다. 꼬여버린 엑스맨 유니버스에게 깔끔한 엔딩을 선사하고, 이전 마블 영화와 MCU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후 MCU가 선보일 <엑스맨>과 <판타스틱 4>, <블레이드>, <데어데블> 등을 위한 길은 닦은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는 데드풀이나 울버린이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지반을 정리하고 기초 공사까지는 완료했지만, 정작 그 부지 위에 무슨 건물을 올릴지 조감도조차 못 보여줬다. 그러니 MCU의 구세주라고 부르기에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남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크다.
Acceptable 무난함
데드풀과 울버린도 빠져나오지 못한 멀티버스의 늪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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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찰나를 영원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지?
나는 믿지 않는다. 첫인상이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첫눈에 볼 수 있는 건 오직 상대의 외형뿐이고, 셜록 홈즈가 아닌 나로서는 상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누군가 내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한다면 약간 불신의 대상이 된다. 내 어디를 보고 반했다는 거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반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애초에 첫눈에 반한다는 감각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겠다. 첫눈에 '잘생겼다' 혹은 '웃는 얼굴이 밝다' 같이 긍정적인 인상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게 어떻게 사랑까지 번질 수 있는지. 내게 사랑이라는 관념은 첫눈에 반한다는 관념과 평행선에 놓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 <캐롤>을 보고서는 평행선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약간이라도 각도가 틀어져 있다면 얼핏 평행선 같아 보여도 언젠가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첫눈에 반하는 모든 사랑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사랑은 이해할 수 있구나. 씨앗 하나가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을 사랑이라 한다면, 세상에는 잭과 콩나무처럼 하루아침에 하늘까지 자라나는 나무도 있는 것이다. 속도가 아주 빨라 일반적인 성장과 달라 보이지만, 그것도 분명 자라나는 과정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그렇게 내가 몰랐던 사랑의 일면을 각인시킨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이들도 가끔 첫눈에 반하는 이유는, 이런 사랑 때문일 것이다.
시선, 꿰뚫고 들어와 붙드는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에게 유독 시선이 마주치고, 시선 끝에서 상대가 사라지면 어쩐지 다시 더듬더듬 눈 끝으로 찾아보게 되고. 그렇게 캐롤와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마주친다. 1950년대의 부요함이 가득 놓인 아름다운 매대를 사이에 두고, 시선은 곧 대화로 자라난다. 영어 듣기 평가 수준으로 평이해질 수 있었을 점원과 손님의 대화인데, 시선에서 자라난 대화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이 녹아든다. 숨죽이고 보게 만든다.
<캐롤>은 두 배우 사이의 시선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시선은 단순히 서로를 바라보며 은근한 시그널을 보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캐롤>에서 오가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거 깊숙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근무하지만 앞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데, 사람을 찍는 건 기분이 이상하다며 새나 나무, 창문을 주로 찍는다. 원작 소설의 테레즈가 지망한 연극 무대 만드는 일에 비교하면, 사진은 시선으로 시작해 시선으로 끝나는 작업이다. 게다가 테레즈가 사람을 찍지 않으려는 이유 또한 의미심장하다. "사생활을 침해 invasion of privacy"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시선은 단순히 누군가의 겉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침공하여 끝내 꿰뚫고 만다는 인상을 남긴다. 식기로 치면 버터나이프보다는 외려 포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캐롤의 집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잠깐 차가 멈춰 섰을 때 테레즈가 카메라를 꺼내어 캐롤을 바라보다 사진을 찍는 장면도 있지만, 앵글이 담아내는 시선 또한 관객이 두 사람 마음에 동화되게 만든다. 눈으로 만져보는 느낌이 들 만큼 가까이에 느껴지는 캐롤의 코트 촉감, 라디오 버튼의 느낌, 햇볕이 얼굴에 닿는 느낌, 차창에 묻은 먼지까지도. 그 차에 함께 탄 듯 사랑의 시선에 동참하고 나면, 어느새 사랑은 시선을 먹고 자라고 시선은 다시 사랑을 머금게 된다. 남루한 일상에 빛이 더해진다.
순간, 온 삶으로 기다려온
사랑이 찾아온 순간 테레즈는 변한다. 이전까지는 마치 삶의 사건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듯이, 대부분의 결정을 유보하며 지내왔다. 남자친구 리처드에게도, 리처드가 함께 하자고 종용하는 유럽 여행에도 은근슬쩍 대답을 미루면서. 그러나 마침내 사랑이라는 사건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 테레즈는 마치 폭주 기관차 같다. 작게는 장갑을 보내고, 교외에 있는 캐롤 집에 찾아가는 것부터, 인물 사진을 찍고,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캐롤의 편지를 받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까지. 전에 없이 당당한 태도로 애비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행위처럼, 테레즈의 사랑의 행위에는 망설임이 없다. 햇살처럼 사라지는 시선을, 순간을 영구히 잡아두는 것. 찰나의 결정이 영구한 무언가를 만들고 붙든다는 점에서, 사진은 두 사람의 사랑과 닮은 행위다. 사진 한 장에도 이야기가 가득 배어 있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처럼. 사진이 담긴 풍경을 온전히 응시하게 만드는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처럼. 토드 헤인즈 감독이 20세기 뉴욕을 닮은 사진들을 잔뜩 참고하여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겨본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도 계속 캐롤을 붙드는 남편 하지, 그리고 딸 린디에 대한 양육권 등 복잡한 역학 관계에 놓여 있는 캐롤로서는 테레즈처럼 마구 달려갈 수는 없다. 테레즈는 일생에 처음 맞이하는 사랑의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울기도 하고 작아지는 기분도 느끼면서 있는 대로 흔들리는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이미 사랑의 경험을 과거에 두고 온, 사랑에 온전히 젖어 들어도 보고 거기서 물러나 보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진은 찍는 사람 못지않게 찍히는 사람의 역할 또한 중요한 예술 작업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의 두 사람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단순히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두고 온 사랑은 테레즈가 아니기에,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바로 지금 피어나는 순간에 거한다.
사랑, 도구로 전락할 수 없는
<캐롤>은 그 아름다운 사랑만을 고스란히 담는 데에 집중한다. 반공과 군비 경쟁으로 무장한 1950년대 미국의 보수성 안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사랑이 아닌, 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대급으로 풍요로웠던 시대의 일면을 거니는 사랑이 있다. 지나갔기에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는 도시 구석구석, 아름다웠던 20세기의 정물들 사이에서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빛난다. 가족과 보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명절에,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난 두 사람의 사랑에 오롯이 집중한다.
사랑의 시선은 이처럼 오롯이 상대를 향해야 한다.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현실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면서도 테레즈의 계획과 감정이 아닌 자기의 그것들에 테레즈를 편입시키려는 리처드 혹은 캐롤의 의지를 달래려는 게 아니라 꺾으려 드는 하지를 볼 때 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플로리다로 같이 떠나자는 하지의 말, 유럽 여행을 생각해 보았냐는 리처드의 말과 달리, 테레즈를 향한 캐롤의 질문은 조심스러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심란한 와중에도 쇼윈도의 캐논 카메라를 보고 테레즈를 떠올리는 캐롤의 선물 박스에는 필름까지 한가득 들어 있다. (카메라 주면서 필름 잔뜩 같이 주는 그게 사랑 아니면 뭐냐고요) 캐롤을 피사체로 담으면서 한층 넓어진 테레즈의 사진 세계는, 카메라를 만나 한 번 더 넓어진다. 필름으로 세상을 담고, 용액 처리를 하면서 흑백 사진을 뽑아내고... 찬찬히 바라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과정이다. 두 사람의 언어는 그렇게 찬찬히, 섬세하게 뻗어 간다.
시선 끝에 자기 자신이 있다면, 아무리 함께 있어도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결국 자기애로 귀결될 뿐이다. 상대를 자기애의 부차적인 요소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이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현실에서 그런 서글픈 광경은 너무 많이 일어난다.
사랑이 싹트고, 사랑이 자라고, 서로의 사랑과 삶을 관통해 들어가는 것까지. 시선의 방향대로 사랑이 무르익는다. 그렇게 시선으로 자라난 사랑은 전신을 가득 메우고 발끝까지 가득 차올라, 종내에는 발걸음으로 완성된다. 나무처럼 거대하게 자라난 사랑이 마침내 약동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처럼, 궁극적으로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누군가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무 말 없이 <캐롤>을 함께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흑백 카메라로 서로를 담아 보여주면 족하겠다. 서로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따라가 본다면 다른 말은 필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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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치 있는 코미디 <드림>이 재미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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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기 범죄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축구 선수 '홍대'(박서준).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화를 참지 못해 대형 사고를 내고, 경기 출전 금지 징계를 맡는다. 이에 홍대는 홈리스 풋볼 월드컵 감독을 맡아 이미지를 개선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선수 선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현실에 찌든 다큐멘터리 PD '소민'(아이유)은 없는 듯 있는 각본을 들이대며 실력이 아닌 사연 순으로 선수를 뽑자고 협박 아닌 권유를 한다. 골문 안으로 공을 보내는 법도 모르고, 체력은 엉망이며, 반칙만 잘하는 선수들도 도움은 안 된다. 그렇지만 홍대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게도, 소민에게도, 선수들에게도 월드컵 출전이라는 꿈은 소중하니까.
<드림>, 익숙하지만 어색하다
<스물>과 <극한직업>으로 흥행 감독 반열에 오른 이병헌 감독. 그의 무기는 신선함이었다.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공식을 파괴하는 도전 정신 덕분에 그의 이야기는 설령 뻔해도 새로웠다. 쉴 새 없이 쏘아붙이는 웃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2010년 홈리스 월드컵을 모티브로 삼은 <드림>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효하다. 빠른 템포로 주고받는 홍대와 소민의 티키타카는 살아 있다. 조연 한 명 한 명으로부터 코미디를 뽑아내는 실력도 여전하다. 홍대와 '범수'(정승길), 범수의 애인 사이에서 발생한 삼각관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반부는 부자연스럽다. 쏟아지는 대사는 재치가 있지만 재미가 없다. 마치 자기 스타일을 과시하려는 집착 또는 강박 같다. 후반부는 정반대다. 웃음 대신 신파가 중심이다. 전반전은 웃음, 후반전은 감동이라는 한국 영화 공식을 차용했다.
사실 신파는 문제가 아니다. 스포츠와 성장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잘 살려낼 수만 있다면 적절한 선택이다. 하지만 정작 감동과 눈물은 공허하다. 그러다 보니 앞선 코미디와 잘 조화되지 않는다. 의아한 대목이다. 이병헌 감독은 단순히 잘 웃기기만 하는 감독이나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연민과 공감에 바탕을 둔 웃음
그의 필모그래피를 추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주인공을 향한 연민이다. 주인공을 연민하는 관객은 자기 현실을 그에게 은연중 투영한다. 그러다 보면 코미디는 일회성 웃음이 아니다. 현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웃으면서 털어버리자고 격려하는 치유의 장이다. 영화관 밖 현실은 힘들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아픔도 별일 아니라며 웃을 수 있다는 것. 이병헌 표 코미디의 진가다.
<스물>은 이십 대 남성의 고민을 자연스럽게 풀어냈다. 기껏 간 학교에서 뭘 할지 모르는 대학생,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재수생,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꿈을 찾아 방황하는 백수까지. '헬조선'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던 당시 사회적으로 정해진 트랙대로 사는 데 지친 청년들의 솔직한 심정을 담았다. 주인공들의 바보 같은 연애사와 한심한 행동에 관객들이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다. 병맛 넘치는 섹드립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극한직업>도 마찬가지다. 작중 가장 웃긴 대목을 하나만 꼽으라면 치킨집 장면을 고를 수 있다. 위장만 하려던 형사들이 정신 차려보니 실제로 치킨집을 운영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 이 또한 남 일이 아니기 때문에 웃겼다. 문과를 나오든 이과를 나오든 종착역은 치킨집이라는 자조적인 유머가 퍼져 있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즉, <극한직업>은 그저 형사물에 코미디만 버무린 게 아니었다. 승진은 막히고 생활고를 겪는 직장인의 비애를 치킨집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였다. 그래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연민과 현실이 사라진 <드림>
그런데 <드림>에서는 연민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전작과 달리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인데, 정작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 홈리스 월드컵에 나간 선수들을 보자. 그들은 투혼을 보여줬고, 인기 팀에 뽑히면서 좋은 성과를 냈다. 흘린 땀과 피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문제는 그 후다. 그들의 변화를 보여줄 때 영화는 편의적이다. 모든 문제가 손쉽게 해결된다. 집이 없어 딸과 함께 밥도 못 먹던 아버지는 호주 유학을 떠나는 딸과 행복한 미래를 기약하며 이별한다. 계란빵 하나도 사치인 남자친구는 애인과 계란빵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게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없다.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소민이라는 캐릭터가 붕 뜨는 이유도 같다. 첫 등장은 좋다. 그녀는 예상을 빗겨 나가는 염세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무장해 이병헌 표 티키타카의 재미를 잘 살려낸다. 하지만 카메라는 정작 그녀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 PD의 일상은 대사로만 나온다. 이번 다큐멘터리가 마지막 기회인 이유도 잘 보이지 않는다. 가족사나 선수로서의 굴곡이 모두 묘사된 홍대와는 다르다. 스포츠 영화로 장르가 바뀐 후반부에서 소민은 카메라를 든 관찰자일 뿐이다.
그러니 화려한 조명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무장한 결말은 어색하다. 홍대는 관중이 가득한 그라운드에 축구 선수로 복귀한다. 멋진 플레이를 연달아 보여주는 홍대는 이날 경기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주인공이다. 관중석에는 홈리스 선수들과 가족이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그 옆에는 소민이 연예인처럼 세팅한 채 앉아 있다.
인위적이다. 현실적인 맥락이 보이지 않는다. 고민 하나를 해결하자마자 곧장 주인공에게 입대라는 고비를 던져주던 전작과는 다르다. 마치 꿈같은 성공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신파를 사용해도 감동은 크지 않다. 연민이 없는 웃음도 입가를 순식간에 떠난다.
재치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이유
영화도 어색함을 아는 눈치다. 감추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우선 리듬이 부자연스럽다. 아무리 찰진 티키타카가 장점이라지만 너무 빠르다. 물론 빠른 템포가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기는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모든 캐릭터를 다 챙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례로 홍대는 사고를 치고, 다큐멘터리 출연을 결정하고, 소민을 만나고, 팀원들을 설득한다. 이 장면들은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인물의 감정선은 생략되거나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홍대, 범수, '인선'(이현우) 정도만 예외다.
스포츠 영화로 바뀐 후반부에서도 무리수를 둔다. 홈리스 월드컵 경기를 묘사할 때 영화는 경기 자체의 연출보다는 해설자의 멘트에 더 집중한다. 실제로 경기 내용은 코미디에 가깝게 묘사된다. 반면에 해설자는 이 경기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감동적인지를 하나하나 직접 알려준다. 스포츠 영화라면 경기 자체가 감정을 끌어올리고 해설은 그 순간을 짚어주는 조력자여야 하지만, 역할이 바뀌어 있다. 장항준 감독의 <리바운드>가 경기 내용을 충실히 묘사해 선수들의 감정 변화를 보여준 것과는 상반된다.
이는 현실적인 맥락과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을 타개하려는 고육지책이나 다름없다. 전반부에서는 현란한 말솜씨로, 후반부에서는 눈물로 문제를 가리는 셈이다. 작중 웃음과 울음 모두 다소 가볍고 공허한 이유다. 그러다 보니 <드림>은 아쉬움이 크다. 이병헌 감독의 재치는 여전하나, 전작과 같은 재미는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Poor 형편없음
연민이 사라지고 현실을 놓치자 재미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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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케네스 로너건과 배우 캐이시 애플렉의 완벽한 조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2016
해소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
행복했던 기억들은 어려운 현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상실로 인한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상실, 아픔을 회상과 연기력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제목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맨체스터와는 다른 지역으로 바다 근처에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바다가 주는 공간적 느낌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고통을 겪은 리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 채 언제 그랬냐는 듯한 평온이 더욱 밉게 느껴진다. 단순히 형(가족)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어려운데, 주인공인 리에게는 형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아픈 기억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패트릭을 통해 상실을 처음 겪는 모습과 깊은 비애에 빠져 현실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무덤덤한 상태에서 현실을 받아드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은 리가 그 당시 사건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어려웠는지, 얼마나 슬펐을지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연출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쓴 로너건 감독은 전작에서도 죽음, 상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특히나 부모의 사로고 인한 부재부터 영화의 막을 올리는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낚시 장면 등을 통하여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얼마나 감독과 닮아있는지를 아는 데에 도움을 준다.
Flash Back, 일반적인 영화 기법으로 과거를 회상하거나 관객에게 보여줘야 할 때 쓰는 쓰는 기법으로 많은 영화들이 회상 장면이나 과거를 보여줄 때 이용한다. 본 영화에서는 리의 과거를 플래시 백으로 보여주지만 지금까지의 여느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보여준다. 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진 형식이자, 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고통으로 보여주기에 너무나 적합하다.
보통의 플래시 백은 영화의 절정 부분, 영화의 중반부 이후 혹은 후반부에 위치하여 이야기를 극대화시킨 뒤 정점을 찍지만 본 영화는 초반부부터 보여 주며 관객이 리의 아픔을 함께 체감할 수 있도록 한다. 일반적인 형식으로 보면 영화의 흐름의 키가 되는 플래시 백을 앞부분에 위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분석하면 비효율적, 비경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초반에 보여줌으로써 관객도 리와 함께 고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감독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절정을 보여주는 것보다 인물 감정을 따라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플래시 백의 길이 또한 굉장히 중요하게 이용한다. 리에게 짧게 짧게 떠오르는 기억들도 있지만, 가장 긴 기억인 리의 집이 불에 타고 딸들을 잃는 장면은 한 덩어리마냥 연결될 수 밖에 없는, 단편적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리의 회상은 주로 리가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일 때 찾아온다. 리의 과거의 상실이 핵심내용인만큼 그 고통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인 것이다.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지만 플래시 백을 가장 있어야하는 순간에, 가장 적합하게 이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리의 고통을 체감하게 한다. 여름, 월척을 낚은 어린 패트릭과 장난을 치며 형과 셋이서 보트에 올랐던 영화의 첫 씬에서, 고통스러운 겨울을 지내고 형을 장례를 치룬 뒤, 성장한 패트릭과 보트에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의 대조를 통해 행복했던 과거를 재생할 수는 없지만 다시 살아내어 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는 보는 내내 마음이 아리지만, 지속되는 쏟아낼 수 없는 우울함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영화이다. 인물의 감정을 고조시켜 절정을 이루지않고 그 아픔을 계속 끌고 가는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자 감독의 의도이다. 해소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아닌 공감으로 통하여 위로를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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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몸으로 저항하라
코카콜라 병에 갇힌 도마뱀은 결코 병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사회는, 당신의 삶은, 존속해야하는 이유가 있는가?
인력비행기로 바다를 건너다 추락해 사망한 재일조선인 청년을 동경하는 소년은 현실에서는 곤경에 처한 여동생조차 돕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는 나약한 인물이다. 무기력한 아버지와 거짓말을 일삼는 할머니 사이에 놓인 현실 속에 소년은 끝없이 공회전한다. 주체적으로 일어서기 위한 아주 작은 시도조차 그에게는 버겁기만 하다.
소년은 자신의 여동생을 겁탈한 선배에게 단 한마디도 저항하지 못하고 여전히 순종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선배의 집에 찾아갔을 때, 선배와 함께 있는 여자가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장면이 전환되어, 누군가가 등장해 소년이 산 포장마차가 자신의 것이라며 아버지를 도둑으로 몰아간다. 아버지는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굴복한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년은 분노를 표출한다. 경찰에게 끌려가며 소년은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한다. 분노할 것을, 분노를 느끼고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야기가 끝난 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든 등장 인물들 사이에 서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배우로서 관객을 향해 이야기한다. 28일 간의 촬영 현장은 끝났고, 영화도 끝났다.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그 세상은 더 이상 없다. 영화가 끝나고 검은 화면이 흘러나오면 영화 속 세상도 끝이 난다.
꽤나 난해하거나 과격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우리가 모두 사회의 룰에 놀아나고 있다고, 그러니 더 이상 속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저항하고 분노하며 맞서싸우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유아적일 수 있는 메세지지만 훌륭한 연출을 통한 강렬한 에너지를 무기로 하여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라. 영화관에서 나서서 거리로 나가라. 도마뱀은 병을 깨고 나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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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아닌 일제강점기를 다루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한창 논문을 쓰던 무렵 예능프로그램인 <선을 넘는 녀석들>을 보다가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일제강점기 만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패러디한 것만 보고 영화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작품의 시대상이 일제강점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한 번 봐야지 하며 영화를 시작했다.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시놉시스
딱 한 놈만 살아남는다!
1930년대,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만주의 축소판 제국 열차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린다.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 잡초 같은 생명력의 독고다이 열차털이범 윤태구.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 태구가 열차를 털다 발견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추격전을 펼친다.
정체 불명의 지도 한 장을 둘러 싼 엇갈리는 추측 속에 일본군, 마적단까지 이들의 레이스에 가담하게 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대 혼전 속.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이라니
한국영화에서 서부극은 살펴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카우보이들이 말타고 돌아다닐 황야도 없을뿐더러 그 영화의 분위기가 한국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은 영화 속에서 많은 것을 허용해줄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라는 생각이 이번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보면서 느껴졌다.
너무나도 뼈아픈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서부극의 배경조차 되지 않는 한국에서 시선을 만주로 조금만 돌려서 그곳에서 서로를 죽이는 총잡이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은 그 영화 자체보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일제 강점기라는 시기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궁금증이 생기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국내 미디어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소재인 재즈 음악이라던지 중세풍 귀족 사회의 모습이라던지 심지어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과 같은 서부극의 배경처럼 과도기적이었던 그 시기에서만 유일하게 발견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연구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 타령을 여기서도 해볼까?
우리나라 영화에 항상 바라는 점은 겨울이라는 영화적 문법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계절감의 영화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무너가 암울한 시기의 작품을 볼 때면 비슷한 계절감에, 비슷한 내용에 소재와 주인공만 약간씩 달라지는 느낌이어서 뭔가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런데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작품은 서부극을 표방하다보니 그간 일제강점점기 작품들 중에서 보지 못한 이 건조함을 보고 굉장히 새로운 시도에 좋게 다가왔다. 다른 역사 작품들에 비해서 그 무게감이 확실히 떨어지고 말도 안되는 컨셉으로 맥락과 개연성이 왜 저러나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새로운 계절감으로 시대적 배경을 표현한 그 첫 시도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OST가 영화의 반은 살린 작품
한국판 서부극을 표방했기에 서부극이 사실 개연성이 없긴 하다. 갑자기 총들고 찾아와서 총격전을 벌이고 잠시 한 눈 팔면 사람들이 다 죽어있고, 저 남자들의 가오는 무엇이며,, 그래서 서부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볼 때부터 나는 이 영화에 개연성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며 다짐을 굳건히 하고 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내내 이 맥락없음은 무엇인가? 너무 영화가 캐릭터 빨인데? 이러면서 되게 지루하다가 갑자기 흘러나오는 OST! OST가 영화를 살렸다. 영화 자체에서는 딱히 긴장감이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OST가 순간적인 몰입도를 굉장히 높여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있었다.
솔직히 내용만 보면 볼게 없었던 영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기가 영화라는 미디어에서 얼마나 다양성을 제공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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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고통을 낳지 않기 위한 아들과 아버지의 선택.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를 무겁고 잔잔하게 잘 풀어낸 <나를 죽여줘>는 원작 연극 <킬 미 나우>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개봉 전부터 전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 10월 19일 개봉한 이 영화는 완전하지 않은 다섯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고 또 섬세하게 잘 풀어내고 있다. 보통의 삶을 바랐던 아들과 그를 마주 보는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어 어떤 결말로 마무리될지 상상할 수도 조차 없다. 섬세한 연출과 묵직한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흡인력 있는 영화 '나를 죽여줘'를 소개하려 한다. 과연 연극을 어떻게 영화에 풀어냈을까.
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 현재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민석은 현재의 사춘기를 겪으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현재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성에 대한 호기심과 독립이라는 두 단어가 현재에게도 자연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낯선 현재의 성장은 갈등으로 이어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멀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현재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일지 생각하던 민석은 여러 갈래의 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하지만 인생은 예기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라 했던가. 어느 날, 민석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죽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 속에 갇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게 더 많아지는 순간이 민석에게도 닥쳐오게 된 것이다.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괴롭고 더욱 몽롱해지며 예민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민석은 현재에게 독립을 권하고 독립을 원하던 현재는 아빠의 곁에 머물기로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동생 하영과 현재를 돕는 활동보조인 기철 그리고 민석의 오랜 연인인 수원까지 모두 모여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게 된다. 짧지만 매우 강렬한 따뜻함이 마지막과 맞닿으며 묵직하게 다가온다. 함께 할 수 없는 날이 가까워지며 자신의 생을 결정할 중요한 선택을 앞두며 큰 혼란에 빠진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던 민석은 현재를 낳음으로써 또 다른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된다. 낳은 순간부터 새장에 갇힌 건 단연 현재뿐만이 아니었다. 민석을 비롯한 사람들이 그 새장에 갇히며 기존의 삶을 밖에 두고 새장 안에 들어와야만 했다. 감출 수 없는 상처와 어떤 결핍은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과 참 닮아있었지만 이 삶을 영유하는 방식이 조금은 달랐다. 그리고 그 선택에 관한 질문에 뚜렷한 대답을 건네 주지는 않지만 한 번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건네준다. 자신의 생을 결정할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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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주 최신개봉영화(특송, 하우스 오브 구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청춘적니,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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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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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최종병기 앨리스> 티저 예고편
'무늬만 핑크빛 핏빛 추격이 시작된다!' 예측불가 하드코어 액션 로맨스의 탄생 왓챠 오리지널 ⟨최종병기 앨리스⟩ 6월 24일 오직 왓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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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도주 중 : 배틀 로얄> 공식 예고편
럽들이 참가하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시리즈 《도주 중: 배틀 로얄》이 왔다. 헌터들의 추격을 피해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쌓여가는 상금. 마지막까지 탈출에 성공한 자에게는 엄청난 금액이 주어지는데. 겁에 질려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상금과 명예를 위해 끝까지 달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