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07-26 18:05:12
멀티버스라는 늪에서 악전고투하다
<데드풀과 울버린>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간여행을 통해 바네사를 되살리고 일상을 되찾은 '데드풀/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데드풀은 이제 어벤져스에 가입해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하고, 그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바네사'(모레나 바카린)와도 이별한 후 '피터'(롭 딜레이니)의 도움을 받아 중고차 딜러 일을 하며 지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온다. '울버린'(휴 잭맨)의 죽음과 함께 엑스맨 유니버스가 소멸될 상황이 되자, TVA에서 데드풀을 MCU의 일원으로 캐스팅한 것. 데드풀은 '마블의 예수'가 될 것이라 들뜨지만, 흥분도 잠시.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를 곧장 파괴하려는 '패러독스'(매튜 맥퍼딘)의 음모를 눈치채고, 자기 우주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모든 면에서 상극이고, 자기 우주를 구하는 데 실패한 또 다른 '울버린'과 함께.
MCU의 예수는 되지 못하다
2024 슈퍼볼에서 처음 공개된 <데드풀과 울버린>의 티저 예고편. 2분 남짓한 영상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공개 24시간 만에 3억 6,5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기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의 3억 5,550만 조회수를 뛰어넘었다. 특히 한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바로 마블의 예수님이야"라는 데드풀의 대사는 MCU와 멀티버스 사가에 신선한 피가 수혈될 거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일까? <데드풀과 울버린>은 안타깝게도 기대에 미치 못했다. 데드풀과 멀티버스 사가의 만남 자체는 인상적이다. 데드풀만의 특색과 입담을 살려 디즈니의 20세기 폭스 인수 사가를 작품 내에서 풀어냈다. 엑스맨 버전 <노 웨이 홈>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엑스맨>, <판타스틱 포>, <데어데블>, <블레이드> 등 200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과거 마블 캐릭터들에게 명예로운 엔딩을 안겨 주었다.
다만 MCU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점은 여전하다. 멀티버스 캐릭터에게 내준 공간만큼 데드풀과 울버린의 자리가 줄었다. 그 결과 데드풀도, 울버린도 각자의 서사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휴 잭맨이 복귀했다는 것 외에 의의가 없을 정도다. 프로모션 과정 내내 강조한 데드풀과 울버린의 버디 무비라는 개성도 덩달아 옅어진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의 구세주냐는 질문에도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폭스의 <노 웨이 홈>
데드풀의 가장 큰 개성은 자유로움이었다. 그는 작품 내외를 오가며 히어로 영화의 금기를 전부 다 깨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엑스맨 유니버스에 속하면서도 따로 노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MCU는 이를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의 가교로 삼았다. 데드풀의 입담과 액션을 활용해 작품 외적인 이유로 퇴장했던 캐릭터에게는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주고, 세계관 자체는 멀티버스 속에 남겨두며 미래를 기약한다.
당장 기본적인 스토리부터가 현실의 은유다. 데드풀이 자기 우주를 파괴하려는 TVA에 맞서는 것은 디즈니의 폭스 인수로 인해 종료된 엑스맨 유니버스의 상황을 보여준다. 자기 우주에서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울버린의 모습도 마치 엑스맨 유나버스의 종료를 막지 못한 현실의 울버린을 보는 듯하다. 그들이 과거 마블 영화 캐릭터를 지배하려는 카산드라 노바와 싸우는 것 또한 MCU에 병합돼야 할 엑스맨 유니버스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 덕분에 영화는 다시 못 볼 캐릭터로 가득하다. 촬영은 완료했으나 공개되지 못한 채닝 테이텀의 갬빗과 <로건> 속 로라를 비롯해 파이로, 토드, 아자젤, 저거너트 같은 조연이 재등장한다. 이에 더해 크리스 에반스의 휴먼 토치, 제니퍼 가너의 엘렉트라, 웨슬리 스나입스의 블레이드 등 과거의 영웅도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즉, <데드풀과 울버린>은 20세기 폭스 버전의 <노 웨이 홈>이다.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예전 마블 영화의 추억을 지키려는 메타적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다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는 MCU 멀티버스 사가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다. 일단 엑스맨 유니버스를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고, <판타스틱 포>, <블레이드>, <데어데블> 시리즈를 보지 않았다면 등장인물조차 알 수 없다. 또 <로키> 시즌 1을 보지 않으면 TVA, 보이드, 알리오스와 신성한 시간대 같은 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갬빗의 경우에는 디즈니-폭스 인수 사가와 관련된 뒷이야기까지 꿰고 있어야 한다.
스파이더맨이 되지 못한 울버린
그러나 <데드풀과 울버린>의 완성도는 <노 웨이 홈>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 하나를 놓친 까닭이다. <노 웨이 홈>의 힘은 과거의 두 스파이더맨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모습이 시간을 뛰어넘는 감동의 원천이었다. 토비 맥과이어의 피터가 그린 고블린을 치료하고,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가 추락하는 MJ를 구해내는 모습은 팬들의 상상과 염원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데드풀과 울버린>도 비슷한 방식으로 울버린을 활용하려 한다. 엑스맨을 구하지 못한 멀티버스의 로건을 기존의 엑스맨 유니버스로 불러와서 그가 다시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울버린이 지난 20여 년간 엑스맨 시리즈에서 활약한 울버린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전 스파이더맨과는 달리 이번 울버린은 관객과 감정적으로 공감하고 교류할 길이 없다.
불친절한 전개는 문제를 더 키운다. 멀티버스의 울버린이 좌절한 이유나 정황은 실감하기 어렵다.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대사로만 제시되기 때문. 그가 엑스맨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고, 로라가 멀티버스의 로건에게 그의 본성과 영웅성을 일깨우는 대화도 임팩트가 부족하다. <노 웨이 홈>에서 과거의 스파이더맨이 MCU의 스파이더맨에게 조언을 건네는 장면과 비교하면 차이가 명백하다.
이 괴리감은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암시된다. 데드풀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로건>에서 묻힌 울버린의 무덤을 파헤친다. 그러고는 울버린의 아다만티움 뼈를 이용해서 자신을 뒤쫓아온 TVA 요원들을 때려잡는다. 물론 분위기나 연출 자체는 데드풀답게 유쾌하고, 데드풀도 관객에게 사과를 건넨다. 하지만 <로건>의 결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즐기기 어렵고, 이번 울버린과의 거리감이 더 멀어지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울버린과 함께 무너지는 데드풀
이에 더해 <데드풀> 영화인데도 데드풀의 서사를 살려내지 못했다. <데드풀> 시리즈의 매력은 평범한 주제나 메시지를 데드풀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1편은 로맨스 영화를, 2편은 가족 영화를 B급 유머로 범벅해 흥미롭게 풀어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드풀과 울버린>은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 2편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데드풀. 그는 MCU의 어벤져스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어벤져스로부터 거절당한 후 크게 좌절했고,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헤맸다. TVA에서는 마침내 MCU의 예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그 꿈도 포기한다. 친구들과 그들의 일상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새롭게 만난 친구인 울버린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영화는 울버린과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 결과 데드풀의 서사는 직접적인 묘사 대신 상황 설명 대사로 자주 대체된다. 일례로 데드풀의 우주가 위험하다는 상황 설명도 패러독스의 대사로만 언급되니 실감하기 어렵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의 끝에는 데드풀다운 유머만 남는다. 시작과 끝을 장식한 내레이션 없이는 데드풀만의 서사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드풀도, 울버린도 없는 버디 무비
전반적인 만듦새도 덩달아 미흡해진다. 두 주연 개개인의 서사가 부족하니 버디 무비인데도 둘의 호흡은 매끄럽지 않다. 예를 들어 울버린은 갈수록 데드풀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다. 새로운 울버린에게 마음을 주기 어려운 가운데 시리즈 내내 데드풀을 봐온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시퀀스와 시퀀스의 연결도 부자연스럽다. 꼭 보여줘야 할 멀티버스 이벤트를 먼저 설계한 뒤, 데드풀과 울버린의 행적을 짜 맞춘 듯 보인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뒤바뀐 듯 보이기도 한다. 중반부 보이드에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작중 가장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러 돌연변이와 히어로들이 뒤엉켜서 각자의 능력을 뽐내는 이 장면은 마치 <엑스맨: 최후의 전쟁> 속 알카트라즈 시퀀스를 보는 듯하다. 과거 시리즈와 캐릭터들에 대한 헌사가 가득하기에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에 반해 데드풀과 울버린이 데드풀 군단을 마주하는 시퀀스는 임팩트가 부족하다. 물론 <올드보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를 연상시키는 액션 자체의 쾌감은 나름 인상적이고, MCU의 멀티버스 설정을 비꼬는 대사는 유쾌하다. 하지만 데드풀과 울버린의 서사가 부족하다 보니 단순한 팬서비스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시퀀스를 들어내더라도 스토리 전개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악역의 존재감이 확실했다면 상술한 문제는 다소 가려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는 능력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그녀는 '보이드'로 떨어진 모든 캐릭터를 지배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시간선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역의 클리셰를 비튼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개인사마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가 울버린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마음을 바꾸는 전개 또한 다소 급작스럽다.
MCU의 고질병이 또 도지다
결국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등이 줄곧 노출한 문제점의 연장선이다. 이번에도 세계관 정리에는 성공했다. 꼬여버린 엑스맨 유니버스에게 깔끔한 엔딩을 선사하고, 이전 마블 영화와 MCU의 관계를 정리했다. 추후 MCU가 선보일 <엑스맨>과 <판타스틱 4>, <블레이드>, <데어데블> 등을 위한 길은 닦은 셈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매력은 잃어버렸다. 더 나아가서는 데드풀이나 울버린이 MCU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 가능성도 제시하지 못했다. 즉, 지반을 정리하고 기초 공사까지는 완료했지만, 정작 그 부지 위에 무슨 건물을 올릴지 조감도조차 못 보여줬다. 그러니 MCU의 구세주라고 부르기에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남긴 아쉬움이 너무나도 크다.
Acceptable 무난함
데드풀과 울버린도 빠져나오지 못한 멀티버스의 늪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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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하기만 하면 그게 사랑인가요
스포가 있습니다.*
어릴 때 두리안이라는 가수가 부른 <i'm still loving you>라는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 ost였고 어렵지 않은 노래여서 초등학생들도 많이 따라 부르곤 했다.
그 노래가 영화 <첨밀밀>에 수록된 노래의 번안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첨밀밀, 달 첨(甛)자에 꿀이라는 뜻을 가진 밀(蜜)이 두 개나 붙은, 그야말로 달고 달고 달다는 뜻을 가진 이 영화는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다.
지하철에서 깜빡 졸다, 뒤에 앉은 사람이 내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내려야 할 역에 제대로 내린 소군.
소군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왔다.
중국 본토에는 소정이라는 약혼자가 있고, 돈을 벌어서 소정과 결혼을 하려고 한다.
본토 사람인 탓에 광둥어도, 영어도 하지 못하는 소군은 겨우 고모네 집 쪽방에 머문다.
우리나라 고시원보다도 좁은 방이지만 공용공간이 있으니 아주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소군은 자전거를 정말 잘탄다. 자전거를 타고 닭을 배달하고 자전거를 타고 홍콩 이곳저곳을 다닌다.
중국에는 없는 맥도날드도 간다. 그러나 광둥어를 못하는 소군은 계산대 앞에서 우물쭈물할 수밖에.
알바생 이요는 소군의 주문을 받아주면서 홍콩에 살려면 광둥어와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귀띔한다.
솔깃한 소군은 이요를 따라 영어학원에 등록한다. 물론 이요가 수수료를 떼먹는다. 이요는 영어학원에서도 알바를 하니까.
본토 사람이면 테레사 탱(등려군)에 환장한다는 생각을 한 이요는 소군과 함께 테레사 탱 카세트 테이프를 파는데, 대실패다.
대실패여도 그 둘은 여전히 테레사 탱을 좋아한다.
이요와 소군의 공통점은 돈을 벌기 위해 홍콩에 왔다는 것과 테레사 탱을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영화에서 테레사 텡의 <월량대표아적심>이 나올 때마다 괜히 보는 사람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홍콩인들에게 욕을 가르치는 서양인 선생은 소군의 집에 사는 젊은 여자와 연애하고, 소군은 소정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이요는 돈을 벌 생각밖에 없지만 타향살이의 외로움 때문인지 금방 소군과 가까워진다.
소군의 집에 놀러가서 같이 국수도 먹는다.
소군은 이요가 남긴 국수를 마저 먹는데, 의외로 그런 사람이 있다. 나도 그렇다.
내가 남긴 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걸 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이요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집에 가려고 옷을 입는데 단추가 잘 잠기지 않는다. 그걸 도와주는 소군.
단추를 끼우려면 가까이 가야 하고, 가까이 가다 보니 뭐, 쌔빠지게 잠가놓은 단추를 다시 다 푼다.
소군은 참 눈치도 없다.
약혼녀에게 줄 팔찌를 이요에게 골라 달라고 하면서, 이요에게도 똑같은 팔찌를 선물한다.
세상 어떤 바보가 약혼녀와 애인(까지는 아니지만)에게 같은 팔찌를 선물하겠나.
그런데도 소군은 왜 이요가 상처받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눈치다.
돈밖에 모르는 이요는 주식도 꼴아박고(남 얘기 같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마사지숍에서 일하게 된다.
소군은 이요를 돕고 싶지만 이요는 순진한 바보 소군이 부담스럽다.
한날, 마사지숍에 온 손님이 무서운 게 없어 보인다고 하자, 이요는 쥐 빼고는 무섭지 않다고 한다.
그 손님은 다음번에 친구를 데려 왔다고 하며, 험악한 문신 사이에 작게 새겨진 미키마우스를 보여준다.
이요와 함께 하게 된 파오다. 암흑가 보스. 돈도 많다.
이요와 소군은 헤어지고 3년만에 지인의 결혼식에서 재회한다.
소군은 소정과 결혼했고, 이요도 파오와 함께다.
아주 좁은 복도에서 튀김인지 뭔지를 먹는 이요와 이요를 바라보는 소군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르더니, 기어이 그 둘은 예전에 함께 보내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새로운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소군은 소정에게 진실을 말했지만 이요는 파오에게 말하지 못한다.
파오가 대만으로 도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요는 돌아오지 않고, 소군은 부두에서 하염없이 이요를 기다린다.
세월이 흘러 소군은 미국으로 건너가 식당 주방에서 일하고, 때마침 이요와 파오도 미국에서 도피생활 중이다.
이요는 소군이 만든 닭요리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소군이 만든 줄도 모른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어도 한 번도 못 만난다.
이요와 파오의 미국 생활은 얼마 가지 못한다. 흑인 아이들에게 공격받은 파오가 총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죽은 파오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간 이요는 등 쪽으로 몸을 돌려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등에 새겨진 미키마우스를 본다.
피식 웃는 이요의 웃음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더 슬프다.
파오의 죽음으로 미국에서 강제추방될 상황에 놓인 이요는 경찰차 안에서 우연히 소군을 본다.
예의 그 멋진 자전거 타는 모습은 미국에서도 그대로다.
경찰들은 이요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줄 알고 차별적 언행을 이어간다.
이요는 경찰차에서 탈출하여 소군을 쫓아가지만 실패하고, 그 이후 이요는 본토로 돌아가고자 여행가이드로 일한다.
그리고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우연히 TV에서 테레사 탱이 죽었다는 뉴스를 본다.
그리고 옆에 누군가 다가온다.
소군이다.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소군의 뒷자리에 앉아있었던 사람을 비춘다.
그는 이요였다.
*이 영화를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우화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나는 그냥 로맨스 영화로 알고 싶다.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버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만약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다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고, 아닌 사람은 어떻게든 헤어지게 된다는데,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멀어진 인연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한용운, <님의 침묵>)지만, 다시 만날 가능성은 너무도 희박하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자꾸만 의심하게 된다.
돌고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인연은 너무 고통스럽다.
너무 고통스러운데 멈출 수가 없는 게 사랑이다.
모르겠다. 그냥 사랑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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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더랜드 | 골대 앞까지 잘 가놓고 헛발질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죽거나 식물인간이 된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 원더랜드의 수석 플래너 ‘해리’(정유미)와 신입 ‘현수’(최우식)는 고객을 만나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서비스를 관리하며 바쁜 일상을 보낸다. 어린 시절부터 인공지능 부모님과 지낸 해리는 원더랜드의 시스템 문제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고, 현수는 새로운 의뢰인으로부터 가족의 비밀을 발견한다.
#2
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진 남자친구 ‘태주’(박보검)를 원더랜드에서 우주인으로 복원한 ‘정인’(수지). 인공지능 태주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누리던 어느 날, 현실의 태주가 기적처럼 깨어난다. 하지만 정인은 마냥 기쁘지 않다. 그녀는 낯설기만 한 진짜 태주와 자기를 너무나도 잘 아는 가짜 태주 사이에서 헤매며 혼란에 빠져든다.
#3
어린 딸에게 죽음을 숨기기 위해 원더랜드 서비스를 의뢰한 ‘바이리’(탕웨이). 그녀는 어릴 적 장래희망이었던 고고학자로 복원되어 사막 발굴 현장에 투입된다. 생전에 딸에게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게 한이었던 그녀는 매일같이 딸과 영상통화를 한다. 하지만 바이리가 노력할수록 가상과 현실의 괴리는 커져만 가고, 그녀는 예상치 못한 오류를 일으켜 서비스를 종료시키기까지 한다.
SF에 도전한 반쪽짜리 용기
냉정히 말해 한국 영화와 SF의 궁합은 최악이다.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수박 겉핥기'가 그 이유다. SF 소재는 겉치장에 불과하다. 그 소재가 초래할 인간적, 사회적 딜레마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작년 여름 큰 실패를 맛본 <더 문>만 봐도 그렇다. 조난당한 우주비행사의 내면을 살피거나 필사적인 우주 생존기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를 값비싸고 화려한 신파로 소비해 버렸다. <외계+인> 시리즈에서도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만의 매력은 찾을 수 없었다. <전우치>를 조금 더 화려하게 포장하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
김태용 감독의 신작 <원더랜드>는 다르다. 문제를 피하지 않는다. '원더랜드' 서비스가 초래할 딜레마에 용기 있게 맞부딪혀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특히 소재가 지닌 감정의 낙폭을 최대치로 끄집어낸 덕분에 <원더랜드>는 한국 SF 영화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설정도, 대사도, 전개도.
다만 한계도 명확하다. <원더랜드>의 용기는 반쪽짜리다. 문제점을 보여주는 방식에 비해 해결법을 상대적으로 덜 고민한 듯하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초래한 문제는 스케일에 비해 다소 얼렁뚱땅 마무리된다. 그 대가는 크다.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성도, 한 작품으로서의 완결성도 모두 잃은 채 익숙한 맛만 남아 버린다.
그러데이션 같은 감성 SF
"죽었거나 사실상 죽은 사람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한다." 이 문장만 봐도 원더랜드 서비스가 초래할 딜레마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현실과 가상,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을 어떻게 유지할지가 관건이다.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이용자가 가상 세계와 현실 간의 경계선을 잊거나 넘기 시작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 SF적인 상상력을 한 숟가락 더할 수도 있다. '극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고 현실로 넘어오려 한다면?'
<원더랜드>는 이 경계선을 개발자, 이용자,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다각도로 살핀다. 이때 김태용 감독 특유의 그러데이션 같은 접근법이 눈길을 끈다. 영화는 의미심장한 대사나 사건 대신 주인공의 일상 에피소드를 펼쳐 보인다. 주인공의 그리움이 재회의 기쁨으로, 아픔과 원망으로, 마침내 가상과 현실의 부조화 및 갈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세심히 그려낸다. 관객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들의 감정선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비주얼 프로덕션에서도 같은 접근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원더랜드>는 현재나 다름없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았다. 미래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은 정인이 사는 아파트의 형태나 지하철 내부 모습 정도가 전부다. 그 덕분에 CG가 순간순간 어색하더라도 원더랜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배어들 수 있다.
꿈 때문에 더 아픈 현실
<원더랜드>의 그러데이션은 꿈의 모티브를 반복하는 연출 덕분에 더 아름답게 빛난다. 같은 구도와 상황을 되풀이하되 구체적인 맥락을 바꿔서 감정선의 변화를 디테일하게 보여주기 때문. 예를 들어 영화는 정인이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잠에서 깨는 모습을 같은 구도로 잡는다. 그런데 일어날 때 정인의 모습은 매번 다르다. 처음에는 인공지능 태주의 전화를 받고 기뻐하지만, 그를 직접 만지거나 느낄 수 없어서 점점 슬퍼한다.
현실의 태주가 코마에서 깨어난 후에는 정인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두려움마저 깃든다. 처음에는 태주가 깨어난 현실이 꿈이고, 인공지능 태주가 현실일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뇌인지 기능에 아직 문제가 남은 태주가 계속해서 사고를 치자 정인은 인공지능 태주에게 더욱 의지하면서 위화감을 느낀다. 그녀는 원더랜드라는 꿈과 현실이 뒤바뀌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그 꿈 때문에 현실을 더 날카롭게 직시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꿈 때문에 현실이 더 날카로운 이 낙차는 바이리가 공유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성준'(공유)은 바이리에게 속삭인다. 그들의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꿈에 불과하다고. 처음에는 이 대사가 농담처럼 지나가지만, 다시 등장할 때마다 무게감이 달라진다. 바이리의 자아가 점점 커지고 그녀가 진짜 엄마처럼 말할수록, 딸은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고 떼를 쓰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가슴은 찢어지기 때문.
이처럼 <원더랜드>는 꿈과 현실을 거듭 역전시키면서 인공지능이 초래할 존재론적인 문제를 짧은 순간에 감성적으로 인지시킨다. 그러다 보니 한 번 마음의 문을 열면 <원더랜드>의 이야기에는 깊숙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클라이맥스 전까지는 이용자와 인공지능, 모두의 입장에 공감하면서 함께 아파할 수 있으니까.
나이브한 헛발질
하지만 정작 클라이맥스는 실망스럽다. 이미 무너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어떻게 다시 바로 세울지 그 방법에 관한 아이디어가 부재했던 모양새다. 축구 경기라면 골키퍼로부터 후방 빌드업은 잘했지만, 정작 상대팀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세부전술이나 약속된 플레이가 없는 셈이다.
모성애가 강해진 바이리가 현실로 나가려고 하자 원더랜드 서비스는 붕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해리와 현수는 바이리를 통제하거나 삭제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데이터는 한 번 삭제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 바이리의 선의를 믿고, 그녀의 자유도를 올려주면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영화의 완결도를 저해한다. 일단 개연성이 약해진다. 개발자의 선택에 대한 설명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삭제의 부작용을 언급하기는 하나, 그에 대한 복선이나 암시는 앞선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두 개발자는 무능력한 데다가 불필요한 캐릭터처럼 보인다. 바이리의 서사도 모성애를 앞세운 익숙한 신파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긴장감이 역효과만 남는다.
'신체만 없을 뿐, 자아를 지닌 인공지능을 인간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흐지부지된다. 인공지능의 선의와 이용자의 성찰적 태도에 기대면 된다는 나이브한 결론만 남기 때문이다. SF 세계관을 활용하는 상상력과 용기가 끼어들 공간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원더랜드>에는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그녀> 같은 작품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부분이 없는 듯하다. 배경이 한국화 됐을 뿐이다.
차라리 시리즈였다면?
물음표가 남는 결말은 감정에 취해 지나친 단점도 다시 보이게 만든다. <원더랜드>는 중반까지 큰 사건 없이 일상을 잔잔히 비춘다. 중반부를 넘어서야 비로소 갈등선이 명확해진다. 달리 말해 주인공의 일상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순간, 퍽 지루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문제는 몰입을 깨는 지점이 감정 이입을 돕는 장치만큼이나 산재해 있다는 것. 특히 전체적인 구조와 형식이 아쉽다. 정인, 바이리, 그리고 해리와 현수의 이야기는 따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중심이 되는 포인트도 다르다. 정인의 이야기가 씁쓸한 로맨스라면 바이리는 눈물겨운 가족 드라마다. 반면에 해리와 현수의 플롯은 코미디에 가깝다.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니 분위기가 엇갈리고 흐름도, 템포도 끊길 수밖에 없다.
차라리 챕터를 끊어서 옴니버스 영화나 OTT 시리즈로 만들면 어땠을까 싶다. 서로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3개의 챕터로 나눈 뒤, 마지막 챕터에서 후반부 클리이맥스를 다루는 식으로. 그러면 원더랜드가 사람과 사회에 끼치는 다양한 영향력을 더 밀도 있게 다룰 수 있었을 테니. 서로 다른 감정선을 더 깊이 맛보고 나면 클라이맥스의 폭발력도 더 커졌을 것이고.
캐릭터 대신 배우만 보인다
또 애매한 비중을 지닌 채 사라진 몇몇 캐릭터마저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공유가 연기한 성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원더랜드 서비스 안에서 관리자 겸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인공지능이다. 역할은 <오징어게임> 양복남과 비슷하지만, 단순 특별출연은 아니다. 바이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 조력자에 가깝다.
하지만 중요도에 비해 성준 캐릭터는 미완성 같아 보인다. 바이리와 처음 만날 때나, 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성준에게는 조금 더 의미심장한 역할이 있는 듯하다. 원더랜드에서 인공지능끼리 새로운 인생을 즐길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다른 캐릭터의 서사를 풀어내기에도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성준의 이야기는 잘려 나간 느낌이 강하다.
결국 <원더랜드>에서는 헛헛한 감정과 눈물, 그리고 섬세하고 현실적인 연기력을 뽐낸 수지 같은 배우만 남고 만다. 이야기의 깊이도, 메시지도, 장르적인 쾌감도 마지막 순간에는 증발되어 원더랜드로 떠나고 만다. SF다운 소재와 섬세한 접근법이 빛난 만큼 <원더랜드>의 마무리는 더욱 허망하다.
Acceptable 무난함
깊이 빠져들다가 어이없이 깨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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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올드보이는 한국에서 성인이 되기 전에 볼 수 없는 영화이긴 하지만, 고등학생 때 어쩌다 처음 보고 후유증이 정말 오래갔던 영화이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다 그렇듯이 올드보이를 이번에 다시 봤을 때도 역시 영화가 지루할 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대해 찾아보니 기생충 이전에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한국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였다고 한다. 또한 감독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젊은 시절 지금과는 다른 강한 에너지로 만들 수 있었던 영화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감탄이 생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모두에게 당장 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이다. (이후 스포일러)
출처: 유튜브 영화
이 영화는 2003년에 대한민국에서 개봉했는데, 여러 영화 평론가들은 이 시기를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도 2003년 개봉작으로 알고 있는데, 그 영화 역시 올드보이 못지않게 재밌고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화에 기반해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감각이 많이 들어갔다고 느껴지는 살인의 추억과는 달리, 올드보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는 주제를 품은 독특한 분위기 속에 관객이 들어가게 된다는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2022년 현재의 사회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극찬받을 수 없는 내용일 것 같은데, 이 영화에는 자극적인 주제를 마주한 관객의 불편함을 잊게 만들고 분노보다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최근에 3번이나 감상했던 헤어질 결심 역시 불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는 있지만 해당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편함을 잊게 만드는 스토리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출처: 유튜브 영화
보통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 씨'를 묶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올드보이는 작중 대사처럼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에서 시작되는 복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두 영화와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줄거리를 반전을 제외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주인공 오대수는 정체불명의 사람에 의해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감금되고, 풀려난 뒤 자신을 가둔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한 여정 속에서 미도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결국 자신을 가둔 범인인 이우진과 대면하게 된 오대수는 이 모든 여정이 자신의 복수가 아닌 이우진의 복수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모든 일이 학창 시절 자신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죄의 의미로 자신의 혀를 자르게 된다. 복수를 끝마친 이우진은 마지막 복수의 대상인 자기 자신을 죽이고, 끔찍한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없던 오대수는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지워줄 것을 부탁한 뒤 미도와 포옹하며 영화가 끝나게 된다.
출처: 유튜브 영화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오대수의 복수가 아닌 이우진의 복수에 대한 이야기지만, 최후반까지 관객들이 오대수의 복수에 대해서만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반전의 충격을 배로 만든다는 점이다. 영화를 두 번 이상 보지 않아도 이 영화는 후반부 이우진의 대사를 통해 영화 속 복선들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에 해석에 대한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나는 오대수가 기억을 완전히 잊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극복하고 살아가기로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장면 오대수의 눈물 맺힌 웃음을 보면 사설 감옥 속 액자에 쓰여있던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라는 글귀가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출처: 유튜브 영화
모든 장면과 대사가 기억에 남는 영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인상 깊었던 대사들이 있다. 오대수가 풀려난 뒤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는 남자는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인데, '아무리 짐승보다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대사를 한다. 이 대사를 후반부 오대수가 그대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데,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여러 주제의식 중 하나가 담긴 대사였다고 생각한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오대수가 자신을 사설 감옥에 가둘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독방 안에서 써 내려가는 '악행의 자서전'이다. 15년의 감금 동안 오대수는 자서전에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사람들의 목록과 그들을 향한 자신의 악행을 경중과 상관없이 모두 적어 넣는다. 위에서 언급했던 모래알과 바윗덩어리의 얘기와 함께 생각해봤을 때, 과연 나의 악행의 자서전은 몇 페이지 분량이 나올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히 숙연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대사는 역시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이다. 그 이유는 이 대사가 오대수와 관객들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면서, 등장인물에 대한 혐오나 분노보다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대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이지만 '온 세상 사람에게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닌 이 영화 속 사건을 내가 겪게 된다면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출처: 유튜브 영화
글을 쓰다 보니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져 노트북을 켜게 된다. 이 영화는 유튜브 영화에서 구매했는데 확실히 유튜브 하나로 예전의 좋은 영화들을 구매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편하고 좋은 것 같다. 2003년에 성인이었다면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다들 올드보이 보시길.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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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뻔함 한도초과
줄거리
일과 사랑, 돈과 명예, 모든 것을 갖춘 트리플 A급 경호원 마이클 브라이스.
'따분한 게 최고다'라는 모토처럼 언제나 안전이 우선인 그에게 일어난 경호 대상 총격 사건.
그 이후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오로지 경호원 면허를 되찾기 위해 한심한 약쟁이들의 경호를 맡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전 여친이자 인터폴 대원인 루셀 아멜리아에게 연락을 받고 가보니, 자신의 천적인 다리우스 킨케이드가 버젓이 서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킬러이자, 서로를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철천지원수. 지금부터 킬러의 보디가드가 되어 헤이그까지 무사히 데려가야 한다. 트리플 A경호원 면허 돌려받기 위해서!
감상포인트
킬러와 트리플 A급 보디가드?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오히려 좋아.
액션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화려한 액션.
고구마 따윈 없다, 매 순간이 사이다.
감상평주말에 가볍게 즐길 수 있고 재미있는 영화가 보고 싶어서 고른 영화.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원래 액션 영화는 여기저기서 뻥뻥 폭발하고, 부딪히고 피 튀기고 그런 게 싫어서 잘 안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액션 신이 엄청 웃긴 장면처럼 연출되어서 그 뻔뻔함이 좋았다고나 할까.그리고 다리우스의 아내인 소니아 역할로 출연한 셀마 헤이엑 배우한테 정말 빠졌다. 사람을 묘하게 끌어들이는 마성의 매력이 있는 배우인 듯. 더불어 사무엘 잭슨 배우는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에서 봤을 때부터 뭔가 독특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영화를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 이 두 사람은 기껏해야 회상 신에서나 몇 번 보고 영화 말미에나 같이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따로 있을 때에도 대화만으로도 케미가 미쳤다. 같이 있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면서 바로 2편도 봤음.주인공인 마이클 역의 라이언 레이놀즈는 뭔가 묘하게 얼-빵-한 느낌을 준다. 사람이 멍청하단 게 아니라, 엄청 찌질한 역할을 잘 소화하는 듯.ㅋㅋ잘 생겼는데 허당일 것 같은 그런 느낌적 느낌. 영화 속에서 마이클은 파워 J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다리우스는 이와 정 반대로 극 P 적인 기질을 보인다. 딱 봐도 상극인 두 사람이 만난 것만으로도 재미있는데,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여정을 떠나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웃김.이 영화는 사실 스포일러랄 것도 없다.
민간인을 학살했던 독재자 '두코비치'의 재판에 증인으로 다리우스가 필요한 상황인데, 인터폴 내부에는 첩자가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면허 경호원인 마이클이 다리우스를 데려가야 한다는 설정. 아니, 세계 최강 킬러와 트리플 A급 경호원인데, 총질 몇 번 빠바방 하다 보면 무사히는 아니어도 어쨌거나 재판장까지 갈 것 같지 않은가? 아니면 죄송합니다.
다리우스는 킬러 주제에 엄청난 사랑꾼이고,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자신의 철칙이다. 철학적이고 진지하게 가려면 밑도 끝도 없을 것이고 웃자고 보는 영화에 죽자고 달려드는 것도 딱히 좋은 짓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리우스의 뒤통수에 새긴 문신과 얽힌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물음을 던진다.
헤이그로 가는 동안 마이클은 오로지 자신의 면허를 되찾는 것에만 집착한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경호를 하듯, 다리우스도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헤이그로 간다는 사실에 마음을 달리 먹는다. 그런 사람 치고는 길거리에서 난장판 피우고 민간인들에게 무지막지한 피해를 주는 것 같지만. 그래서 더더욱이 이런 영화는 깊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뻔뻔한 영화.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주말을 마무리하기에는 딱 좋은 영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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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암으로 평가된 삶
- [성모의 죽음], [메두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세례 요한의 참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카라바조’ 살해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로마 교외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않는다 한편, 교황청은 그런 그의 사면 자격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림자’를 파견해 뒤를 쫓는데…
<카라바조의 그림자> 줄거리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이지만 이 시기에는 출신지로 예술가를 칭하기도 했다. 그의 출생지는 카라바조가 아닌 밀라노이지만 페스트를 피해 카라바조에서 잠시 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돌아와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므로 그의 출생지는 밀라노이나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메리시, 즉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된다. 하지만 이 이름은 너무 길다 보니 그는 어느샌가 '카라바조'라 불린다. 영화에서도 그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기도 하지만 카라바조라 불리는 일이 빈번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인 '미켈란젤로 메리시'로 불리지 않고 '카라바조'로 더 빈번하게 불리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이미 너무나도 유명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어 지명인 '카라바조'로 불리게 됐다는 추측이 존재한다. 물론 이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이 당시 남성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던 흔한 이름이었기에 동시대의 다른 이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카라바조'라 불렸을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의 그림과는 다르게 어두운 배경에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를 이용하여 그림 속 형상에 극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카라바조의 기법은 테네브리즘이라 일컫는 17세기 양식의 기원이 되었다.
어둠으로 존재하는 그림자
영화는 카라바조가 살인죄로 인해 로마를 떠난 뒤를 보여주는데, 교황청에서 그의 사면을 판가름하기 위해 조사를 하며 그의 행적을 좇는다. 우리는 조사관과 함께 그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카라바조의 삶은 방탕하며 폭력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고, 폭력적인 성향으로 인해 여러 번 재판대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카라바조의 그림을 사랑하는 권력에 의해 그의 죄는 여러 번 눈 감아진다.
조사관은 늘 카라바조의 발아래 있는 그림자가 되어 그의 삶을 샅샅이 살핀다. 이런 조사관의 평가는 가차없다. 그를 감싸주던 가문들, 종교인들 역시 타락했다 비난하고 성인들을 종교의 엄숙함과는 맞지 않게 묘사한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 타락을 재촉한다 말한다.
우리를 집중시키는 빛
카라바조의 문란한 삶은 결국 그를 도피의 길로 이끌었고 끝끝내 젊은 나이에 죽게 만들었지만, 그는 이런 거리의 삶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부분으로는 극명한 명암 대비도 있지만 인물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춘부, 노숙자 등을 자신의 모델로 세우며 그의 그림 속 성인들로 묘사한다. 그들에게서 삶의 괴로움과 고통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성인들의 고뇌와 역경을 본 것이다.
삶의 고통과 시련, 그리고 실제 하는 현실에서의 죽음을 바로 옆에 둔 카라바조는 그것을 그의 그림에 담길 주저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 위험하다 평했지만 당대 많은 귀족들과 심지어 종교인인 추기경까지 그의 그림에 매혹된다. 교회에서 거절당한 그림들은 불태워지기는커녕 나오는 족족히 다른 이들에게 팔려 나갔고, 불경하고 방탕한 그림이라 칭해지면서도 동시에 아름답고 강렬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조사관 역시 위험한 그림이라 평하면서도 그의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한다. 위험한 그림이라는 평가는 신성모독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이 그를 부정하다 여기는 이 조차도 매혹시킬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매혹시키는 그림
<카라바조의 그림자>는 카라바조의 방탕한 삶과 그의 예술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해서 그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지, 카라바조의 작품도 그의 죄로 봐야 할지에 대해 물어보는듯하지만 끝에 가면 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가 사면은 잊고 그가 무질서한 삶 속에서 찾아낸 성인들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들에 매료된다. 관객들은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보며 미술관에서 몇 줄의 문장으로 적혀있는 설명만으로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 그의 삶을 몇 개의 작품과 함께 훑어보다 보면 어느 순간 카라바조의 작품에 빠져들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카라바조의 그림자>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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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나의 31살은 어떨까 - 영화<애프터썬>
아주 아껴두던 영화를 보았다
사실은 너무 미루다가 그만 귀찮아져서, 이제서야 본 게 맞겠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조용히 베개를 휴지삼아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여념이 없었고 영화를 깨나 봤어도, 울어본 적은 정말 손에 꼽기도 하고 나조차도 놀랄정도로 많이 울어버렸기에 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날 슬프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필자는 상실의 아픔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말 사랑하는 이를 잃어본 경험이 있냐하면, 아직은 없다가 맞다. 물론, 정말 마음 쓰고 좋아했던 사람을 계속 보고, 전처럼 따뜻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없게 되버렸던 경험은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사실 사랑도, 상실도 아니었다. 한때는 이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적어도 필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게 아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증명하는 순간들이 눈에 보일 때, 다시 말해서 필자가 사랑하고 애정하는 그를 , 또 그녀를 볼 때 마음 속에 드는 마음과 감정을 밖으로 꺼내서 살펴본다면 이건 그다지 믿기 어려운 말도 아닐거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캘럼은 이번이 소피와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마음을 먹고 온걸까, 아니면 겨우내 여행을 하면서 서버린 결심인 것일까? 장면 곳곳에서 캘럼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소피와 대화를 하며 양치를 하다 거울에 양칫물을 툭하고 뱉는 장면부터, 화장실에서 혼자 깁스를 풀며 소피와 대화하는 씬 등 우울은 그 근원을 찾을 수도 없게끔 나를 잠식시키고 명상과 태극권, 그 어떤 방법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해도 결국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게 더 절망적임을 말이다.
자신을 우울에서 꺼내기 위해서 스스로가 해야하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할까?
어쩌면 영화<애프터썬>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것이 현재로 하여금 얼마나 고통스럽고, 또 그 존재와의 과거 수많은 순간 속에서 후회만을 떠오르게 하는지.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도, 결국 지금의 나는 다 알 수 없고 그저 그리울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영화 아닐까.
필자가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조차도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했던 그 모호한 감정과 생각들을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통해 제3자로서 보기 시작해서, 결국엔 온전히 내 안에서 찾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영화 속 소피와 캘럼의 모습에서 필자는 스스로의 어떤 모습을 본걸까?
사실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하다.
돌고돌아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애프터썬은 참 좋은 영화라는 거다. 지금의 필자에게 애프터썬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그냥 한 번 남겨보고 싶었다.
또 메스칼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지도 말이다. 노멀피플때도 느꼈지만 그의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감정이 좋다. 그렇게 꾸밈없고 서글서글한 사람이 좋다. 겉으로 하는 치장보다 단단한 내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메스칼이 연기하는 유약하지만 불안한 청춘이, 결국 그 모든 감정을 겪는 것이 건강한 젊음이라는 것을,
필자는 그의 연기를 통해, 그의 눈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31살의 소피는 31살에서 멈춰버린 아빠 칼럼을 다시 한 번 꼭 껴안고자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칼럼을 안아주고 싶었고, 또 나의 아빠를 안아주고 싶었다.
이미 지나버린 아빠의 31살은 어땠을까, 아직 오지 않은 나의 31살은 어떨까.
31살이 되면, 그때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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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사랑의 시간차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화
?Rabbitgumi 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개봉했습니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탔던 영화인데요.
탕웨이와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죠.
이번에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좀더 말랑말랑한 영화에요.
여전히 미장센은 아름답고 화면전환도 무척 좋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좋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u-Q...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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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는 아래 링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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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더라인> 메인 예고편
“어디에 있어도 네가 보여”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지망생 ‘안나’ 앞에
평범한 삶을 원하는 그녀 ‘로빈’이 나타난다.
첫 만남부터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그들은
생애 단 한 번, 처음 겪는 사랑을 시작한다.
“날 사랑해줘. 원하든 원치 않든”
창작에 대한 집착과 갈망이 심해진 ‘안나’는 점점 현실 감각을 잃어가고
‘로빈’은 변해가는 ‘안나’의 행동에 괴로워한다.
사랑을 시작할수록 늘어가는 고통에 평온했던 ‘안나’의 일상은 뒤흔들린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마주한 그날, 나에게 가장 위험한 첫사랑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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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티저 예고편
마블의 새로운 강력한 히어로 ‘샹치’의 탄생과 베일에 싸여 있던 전설의 미스터리 거대 조직 ‘텐 링즈’의 실체를 다룬 첫 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