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20 00:15:04
홀리모터스
살아낸 그 삶 마저 연기였을까?
내 삶은 어디에..
실제의 삶과 연기하는 삶 사이의 간극은 그 안에서도 소모되는 오스카만이 남겨져있었다.
“20분안에 지난 20년을 다 돌아봐야해”
극장에서 자는 관객들, 리무진의 대화를 통한 시대변화
그럼에도 잊지 않겠다는 중간중간의 영화장면들이 인상적이게 다가온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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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을 뱉어냈으니, 이제 행복을 삼킬 차례.
모든 것을 통제당하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궁지에 몰린 채 살아온 헌터는 마리오네트처럼 표정도 머리도 생활도 정해진 대로 남에게 맞춰 살아간다. '자신의 의지'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은 생활 반경에서 수동적이며 불안한 상태를 지속하는 헌터, 그에게도 자그마한 꿈은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헌터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기 위해 ‘임신’을 선택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주변의 모습은 헌터가 어떤 선택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헌터가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던 이 행동은 가족의 문제가 되어 상담받게 되지만 그 상담조차도 헌터의 마음이 아닌 집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한 절차가 된다.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헌터는 침대 밑에 숨어 자신의 불안함을 외부로부터 숨긴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은 본질적인 문제는 헌터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리고 마침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도망친다.
상처의 완전체라고 볼 수 있는 헌터는 끊임없이 자신의 안을 상처입히다가 그 상처를 직면하게 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한마디가 “매일 예상치 못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라” 라는 말로 억지로 잡으려 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한다. 보이는 것이 다른데, 이해하려 하지 않는 주변에 의해 끊임없는 불행을 삼켜내야 했던 헌터가 ’자신의 의지’로 불행을 배출해 내는 모습이 너무나도 홀가분해 보였다. 또한 헌터는 이제부터 수많은 사람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행할 것이다. 보는 내내 헌터가 무언가를 삼키는 모습이 남편과 시가 식구들이 가스 라이팅으로 헌터를 압박하는 순간보다 덜 갑갑한 느낌을 받았다. 불완전함은 완전하기 위해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그려낸 '스왈로우는 내적 트라우마가 내면으로 스며드는 순간을 정면으로, 또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특히 헤일리 베넷의 표정과 연기가 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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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은 그 자체로 기록이 된다
당신은 매일 40개의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마치 모국어인 것처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 그러니 우선 외워야겠지. 시험공부하듯 어디에 적을 순 없고, 머리에 담아 조그맣게 읊조리는 정도만 가능하다. 종일 외우는 데에 집중할 환경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설거지나 재료 준비 등 주방 일을 하며, 당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잠들기 전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기도문을 외듯 나지막이 웅얼거리는 당신을 핀잔할, 당신과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수백 명의 질타를 견디면서.
대체 무슨 상황이길래. 제2차 세계대전, 나치 수용소, 그리고 페르시안으로 위장한 유대인. 세 가지 키워드로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영화 초반부의 방점은 '페르시안'에 찍혔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상황은 나치 수용소로 잡혀간 한 유대인이 페르시아인인 척하며 독일군 장교에게 알려줄 페르시아어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정확히는 '만드는' 과정. 그는 페르시아어를 할 줄 모르지만, 순간적인 기지는 뛰어났다. 거대한 거짓에 그럴싸한 작은 사실 몇 개를 섞으면 진실보다 더 진실처럼 보인다던가. 앞으로 그가 겪을 일과 딱 맞는 말이다.
자, 어떻게 매일 40개의 단어를 만들며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도망가는 건 방법이 아니다. 지뢰밭에 발을 디디거나 독일군의 총을 맞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살고자 하는 당신이 택할 게 못된다.
다행히 영화의 주인공, 그리고 실화를 기반에 둔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방법을 찾는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따라갈 때다.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 불길에 그을리는 종이. 종이 위 까만 글자들이 사그라진다. 그 위로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이름과 역할이 생겼다 사라지고 다시 생기길 반복한다. 암전. 이윽고 숲처럼 보이는 탁 트인 공간. 꼭 맞는 나무의 대칭 가운데,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절뚝이는 것도 같고, 무언가 위태로운 느낌이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코트를 짊어지고서. 걸음은 투박할지언정 무너지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한다. 영화가 끝나고, 본 것을 되새기면서 깨닫겠지. 복선 그득한 장면들이었단 걸.
'페르시아어 수업' 타이틀이 뜨고,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맺힌다. 덜컹대는 트럭 안,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다만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눈빛들. 키 큰 남자가 옆 사람과 작게 조잘거린다. 남자의 무미건조한 눈빛은 옆 사람이 샌드위치가 있다는 말에 마구 반짝인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유서 깊은 책을 줄 테니, 이거랑 교환하자고. 엄청난 값어치의 물건을 얻는 거라며. 눈망울이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내밀자 키 큰 남자는 제 몫을 제외한 남은 샌드위치를 책과 함께 넘긴다.
페르시아어로 된 책. 키 큰 남자가 샌드위치를 욱여넣으며 말한다. 훔친 거라고. 그건 유대교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
지적하자, 대수가 아니라는 듯이 남자는 마저 씹어댄다. 눈망울이 큰 남자,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질'은 뒤이어 딴지를 걸지 않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 수 없다고 받아들였을까. 훗날 자신도 율법을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도적질 하지 말라의 다음 37, 거짓증거 하지 말라.
트럭이 멈추고 독일군의 명령으로 안에 있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우르르 내린다. 소지품을 한 곳에 내려놔. 가방이 툭툭 바닥에 떨어지고 총살이 시작된다. 이때 우리가 아는 액션 영화 같은 드라마틱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즉 우리 관객들이 보는 화면은 고정되었다. 정적인 프레임. 비명이나 절규가 나올 새도 없이 모든 일은 끝난다. 단 한 사람, 질을 제외하고.
그는 품에 있던 페르시아어로 된 책을 내밀며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인들이 믿을 리 없는 소리다. 그러나 많고 많은 언어 중 페르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로 그들은 혹한다. 페르시안이라니. 장교 '코흐'에게 데려가면 포상으로 통조림 열 개를 받을 것이다. 아니면, 죽이면 되고.
불신, 권위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 똑똑하다는 자만심. 이 모든 성질을 뭉쳐 사람으로 빚으면 코흐가 만들어지려나. 아니다. 이건 독일군 사령관도, 다른 장교들도, 다른 군인들도 충분히 될 수 있다. 다만 코흐만 가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간절함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동생이 있는 이란으로 넘어가 식당을 열 생각으로 그득하다. 독일을 벗어날 생각을 한다는 건 그가 당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 독일의 패배를 예상하는 것이다.
질이 자신을 책의 주인인 '레자'라고 거짓말했듯 코흐 또한 자신의 속내를 숨기며 당에 충성하는 척 해왔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큰 틀에선 그들은 차이점이 없는 듯했다. 코흐도 결국 전쟁 통에서 살고자 했을 뿐 아닌가? 각자의 배경과 상황은 제각각이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무언가를 어기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매일 이어지는 교습. 하루에 4개로 시작했던 수업은 갑자기 하루 40개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질은 패닉 한다. 끝이라는 생각에 도망치려 든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기에 제 발로 돌아온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며, 최선을 다한 거짓말로.
여기, 또 변수가 생긴다. 코흐가 명부 작성을 담당했던 '엘사'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질을 앉힌 것. 엘사와 달리 질의 글씨체는 명필이기도 하다. 그의 일터는 이제 주방이 아니라 명부가 펼쳐진 책상 앞이다. 질에게 주어진 건 45분의 시간, 명부, 만년필과 잉크, 그리고 독일어 40개가 적힌 종이 한 장. 질의 머릿속은 온통 단어 만들 생각뿐이긴 하나, 코흐가 시킨 일부터 하는 게 순서다.
펜촉에 잉크를 묻혀가며 꾹꾹 종이에 눌러 적다가 문득, 기시감을 느낀다. 눈앞에 보이는 건 글자들. 독일군의 철저한 관리 하에 수감번호로 불리는 이름들. 이름은 곧 단어다. 그 이름들을 조금만 변형하면 금세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다. 이거면 살 수 있다. 질은 들뜬 마음으로 '페르시아어'를 조합해간다.
시간이 쌓일수록 몇몇 군인들은 질이 불만스럽다. 특히 주방을 감독하는 일로 쫓겨난 엘사와 그리고 처음부터 질이 유대인이라고 확신한 '맥스'가 보기에. 위계가 엄격하기에 그들의 농간에도 질은 레자로서 목숨을 이어나간다. 교묘한 줄타기가 잘해가던 레자. 실수로 페르시아어 수업 첫날에 말했던 '빵'을 '나무'와 똑같은 단어로 발음한다. 그리고 끝난 줄만 알았던 레자는 사경을 헤매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건 코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그러니까 레자가 만들어 낸 페르시아어였다. 거짓에 거짓을 더하자 더할 나위 없는 견고한 진실로 변모한다.
코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레자를 변호하며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명한다. 내키지 않아도 그를 친근한 호칭으로 부르던 질, 아니 이제 레자라는 명명이 우리의 눈과 귀엔 더 익숙하다. 모든 것이 엇비슷하게 뒤섞이던 순간, 전환점을 맞이한다.
독일군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을 단체로 이송하고, 그럴 때마다 레자는 코흐의 보살핌으로 농장에 피신한다. 그는 마치 독일군의 아군 같다. 텅 빈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코흐의 맞은편 침대는 이탈리아 형제가 차지했고, 저도 모르게 레자는 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형제 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레자를 지켜낸다. 그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라지만 어쨌든, 레자는 목숨 하나를 직접적으로 빚진 느낌이다.
레자는 그 죽음들을 지켜보며 가라앉는다. 진짜 페르시안이라서 죽임을 당한 사람과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죽은 남자.
이 대목이 코흐와 그의 차이를 보여준다. 레자는 자신의 생존으로 직간접적으로 죽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 또한 죽음으로써 모든 잘못을 짊어지려 한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애석하게도, 코흐는 제 부하들을 총으로 위협하면서까지 죽음을 목전에 둔 그를 끄집어내어 곁에 둔다. 그에겐 아직 레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드디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다. 코흐가 그토록 바라던 독일에서의 탈출 시기다. 처음 수용소에 왔을 무렵 질이 꿈꿨던 일이기도 하다. 아마 잡혀온 초반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는 홀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도망갈 기회가 생기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듯이.
수용소 내 모든 문서들은 활활 타오른다. 레자의 손으로 적힌 무수한 이름들도. 이름의 주인들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글자가 사라지면 모든 증거가 사라지는 셈이다. 피해가 없어지면 가해 또한 잿더미가 된다.
코흐는 혼란스러운 수용소에서 레자를 빼낸다. 자신은 공항에 가서 테헤란으로 넘어갈 거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자를 등진다. 레자는 뒤돌아 자신 앞에 놓인 광경을 본다. 눈으로 뒤덮인 곳. 길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들 모든 발걸음이 곧 길이 될 테다.
당연히 코흐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벨기에인 행세를 하려 들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그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린다. 하지만 꿋꿋하게 가짜 페르시아어를 모국어처럼 익숙하게 말한다. 그는 알 수 없었을 테지. 단순히 속은 게 아니라, 그가 말한 것들은 모조리 사람의 이름이었다고.
마지막.
질은 영국군에게서 질문을 받는다. 수용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느냐고. 수천 명이라는 답. 살아남은 다른 생존자들 또한 쉬이 답할 질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그중에서 기억 남는 이름이 있냐고. 기대가 담기지 않은 물음이다. 살아있는 게 기적인 그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는 있다. 2,840개의 가짜 페르시아어. 2,840개의 이름들. 2,840명의 사람들이. 그는 머릿속에 빼곡한 명부를 읊는다. 천막 안이 점점 고요해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공간은 그의 목소리와 빠르게 놀리는 펜촉 소리만 들린다.
죄책감, 고통, 미안함, 고마움, 공포, 안도. 뒤섞인 감정은 눈물이 되어 뚝 뚝 떨어진다. 그래도 그의 입은 계속 단어들을 뱉는다. 살기 위해 빌렸던 단어들에게 진실을, 원래의 이름을 돌려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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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시 걸작인 줄 알았다, 1시간 동안은
- 5★/10★
영화는 긴박한 소리가 오고 가는 병원 안, 검은 배경에 여성 성기의 모양의 빛이 비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엄마 자궁 속에서 처음 빛을 마주한 보Beau의 시선이다.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오는 중인 보의 귓가에 이내 엄마의 분노 섞인 외침이 들린다. 그녀는 간호사가 아이를 땅이 떨어뜨렸다고 생각한다. 간호사는 건조한 듯 침착한 목소리로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답하지만, 엄마는 계속 아이가 바닥에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미친 듯이 분노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애착적 분노와 함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났다. 중년의 남성이 된 보는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보는 심각한 편집증으로 고통받는 중이다. 그가 태어날 때 머리를 다쳤다는 엄마의 주장이 사실인 걸까? 혹 엄마의 ‘과한’ 집착이 보를 힘들게 한 것일까? 이번에도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정신적 문제를 가진 보가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갈 예정이라는 점만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의 계획은 꼬여버린다. 옆집에서 밤새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놓고 파티를 해도 잠을 잘 자던 보는, 누군가가 이 소음을 보의 집에서 나는 것으로 오해하는 쪽지를 조심스레 문틈으로 밀어 넣는 아주 작은 소리에 벌떡 일어나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다 그만 늦잠을 자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엄마에게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늘 위협받는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집 밖에 나가기조차 수월치 않은 보가 비행기도 없이 엄마를 찾아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엄마를 찾아가는 보의 여행은 기이하다. 도중에 만난,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그레이스 부부는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보를 입양한 듯 굴며 놔주지 않으려 한다. 숲속 고아들이 꾸린 극단은 보가 갖지 못한 생의 기대를 연극으로 선보여 보를 사로잡는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지 모를 일련의 여정 끝에 마침내 엄마의 집에 도착한 보. 파국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묵혀온 분노, 집착, 의존, 기대가 한데 뒤엉켜 쏟아진다. 문제는 보의 편집증적 공포보다 엄마의 집착이 더 힘이 세다는 것. 두려움에 질린 보는 엄마를 향한 물리적, 상징적 여정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유전〉, 〈미드소마〉 등으로 전 세계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팬들을 사로잡은 아리 에스터 감독의 신작이다. 감독의 자전적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전해져 관객의 기대치도 그만큼 올라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르 영화의 문법을 새로이 구축해온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데 대한 기대였다. 감독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인터뷰에서 ‘외롭고 이상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에서 ‘외롭고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선보여 기쁘다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것이라 예상했다. 이왕이면 영화를 본 관객들의 논쟁 끝에 이 영화가 좋다는 사람들이 이기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이상한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는 맞다. 호불호가 갈릴 영화도 맞다. 그러나 영화가 좋다는 사람이 논쟁에서 이길 영화로 보이지는 않는다. ‘호불호’ 차원이라기에는 단점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보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영화의 만듦새가 상당하다. 보가 느끼는 현실의 여러 공포와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촘촘하고 단단하게 펼쳐져 흡인력을 높인다. 현실과 망상 사이에서 분열하며 괴로워하는 보의 캐릭터는 이유는 다르더라도 저마다의 문제를 겪는 모든 동시대 관객을 영화 속 보의 위치로 이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여정이 있고, 그 여정에는 늘 기대와 두려움이 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여정을 떠나기 전인 보의 위치에 대한 관객의 동일시에서만큼은 분명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정작 보의 여정이 시작된 이후에는 그를 향한 관객의 동일시가 어려워진다.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가 너무 과잉이라는 데 있다. 재능을 인정받은 감독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펼쳐낼 본격적인 기회를 얻었을 때 종종 발생하는 문제다. 절제 없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영화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것이다. 메시지와 이미지의 과잉은 보와 같은 위치에 섰던 관객을 하나둘씩 밀어낸다. 결국 보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영화 전반부에서 모두를 끌어들인 흡인력의 기반은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보 캐릭터를 어린아이(미성숙)처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자꾸 눈에 걸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 캐릭터가 설득력을 잃지 않은 전반부에서는 그의 연기가 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보가 ‘혼자’가 된 후반부에서는 그의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종종 거슬린다. 다소 난삽한 여정 끝에 보 캐릭터가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가장 극적이어야 할 영화의 결말 역시 김이 빠진다. 보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지만, 그 감정은 관객에게 별다른 감정을 자아내지 못한다. 한국의 관객이라면 〈신과 함께〉 시리즈에 대한 기시감으로 헛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
요컨대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관객이 자연스레 보의 시점에 이입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메시지와 이미지의 과잉으로 관객을 보의 여정에 끝까지 동참시키지는 못한다. 어쩌면 감독의 세 번째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영화가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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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딩드레스로부터 도망가기
결혼식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신부의 웨딩드레스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리고 결코 빠지지 않는 장면이 그 드레스가 어떤 드레스인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유명 브랜드의 신상 드레스라거나(ex.<신부들의 전쟁>), 유명한 디자이너가 주인공만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라거나(ex.<섹스 앤 더 시티>).. 제니퍼 로페즈의 신작 영화 <샷건 웨딩>에서도 어김없이 드레스가 주인공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달시(제니퍼 로페즈 분)가 필리핀의 한 섬에서 치르는 결혼식에서 입는 드레스는 신랑 톰(조쉬 더하멜 분)의 가족에게서 전통적으로 물려 내려온 드레스다. 설정 덕분에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의 행동을 영화 내내 제약하는 장애물이다. 애초에 본인이 고른 것도 아닌, 신랑의 가족에게서 받은 드레스라는 점부터 이 웨딩 드레스는 달시에게 작용할 가부장제를 비유한다. 신랑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 분)에 따르면 이 드레스는 캐롤이 입었고, 신랑의 동생인 지니가 이어서 입었다. 달시의 웨딩드레스는 달시를 숨도 쉬기 힘들 만큼 조이면서 캐롤과 지니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대놓고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시의 결혼식은 인질극으로 변모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설전을 벌인 후 혼자 신부대기실에 돌아온 달시는 과자를 먹으며 어떻게든 웨딩드레스를 벗으려 애쓴다. 말 그대로 숨쉬기 힘들 만큼 조여오는 웨딩드레스의 코르셋은 달시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톰조차 이 드레스를 벗기지 못한다는 점인데, 와중에 톰은 드레스의 불편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시에게 주어질 여성으로서의 역할은 달시의 숨통을 조이지만 톰에게는 당연한 것이며, 달시가 호흡 곤란을 호소함에도 원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눈 앞에 문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달시는 드레스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톰과의 설전에서 집어던진 결혼반지와 상반된다. 달시는 쉽게 반지를 뽑아 톰에게 던지지만 톰은 가볍게 잡아내며 결국에는 그 반지를 달시에게 도로 끼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달시는 드레스에서 온전히 탈출하지 못하는데, 이는 아무리 달시가 발버둥쳐도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톰과 함께 해적에게 발각된 달시는 결국 같이 손목을 묶이는 신세가 된다. 반지를 집어던지고도 톰에게서 달아나지 못한 달시는 결국 드레스를 입은 채 톰과 함께 도망다니기 시작하는데,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이 모든 것을 가부장제의 비유로 본다면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편한 바지를 입은 톰은 도망다니면서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달시의 드레스는 계속해서 찢어지고, 달시의 머리에 얹어진 비싼 가발은 달시가 달리기 어렵게 만든다. 결국 가발을 벗어던지면서도 비싸다는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톰의 주머니에 쑤셔넣는 달시는 종국에 그 가발이 구원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톰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아마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었을 달시는 어느 순간 맨발이 되고, 결국 해적에게서 부츠를 벗겨내 신지만 드레스로부터는 여전히 도망치지 못한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달시의 드레스는 영화 내내 제니퍼 로페즈의 신체를 눈요깃감으로 활용하는 도구로 변모하고,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드레스의 가슴선 위로 로페즈를 잡아 관객으로 하여금 로페즈의 나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부엌에서 해적의 공격을 막아내던 톰과 달시는 자신들을 묶고 있던 끈을 끊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톰의 출혈을 수반하게 되고, 이는 톰의 신체적 약화로 이어지는 대신 달시의 약점(기절)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가부장제의 미약한 상징으로부터 탈출하면서도 달시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신체적인 자유를 얻는 대신 혼절하여 무방비로 노출되고, 톰의 도움이 없이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비유된다. 이전 장면에서 용감하게 짚라인을 타고 수류탄을 적기에 던져 해적을 물리친 달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을 감안하면 이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다소 노골적이다. 톰은 달시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가부장제에 속박하기 위해 해적을 물리치며,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출혈 정도는 감내한다. 달시는 결국 드레스의 일부를 찢어내지만 온전히 달아나지는 못하고, 결국 톰과 함께 가부장 그 자체를 상징하는 양가 가족들과 하객을 구하기 위해 풀장으로 돌아온다.
영화 내내 달시는 단곗수가 적은 계획을, 톰은 단곗수가 많은 계획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달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입는 데도, 벗는 데도 많은 단계를 요구하는 데다 드레스 이외에도 머리와 화장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달시가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결혼식에서조차 신랑에 비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하는 신부인 달시는 나머지 계획은 단순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반면 탈착이 자유로운 정장을 입은 톰은 단순해 보이는 자신의 역할이 단조롭다고 느낀다. 또한 복잡한 단계를 거쳐 가부장제 속으로 달시를 끌어들여야만 달시가 쉽게 떠나지 않을 것임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마치 단순한 계획을 선호하던 달시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 계획의 단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상은 단계가 몇이든 이미 가부장의 덫에 걸려든 달시에게 필요한 계획은 단 한 단계뿐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포기하고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마침내 풀장에 도달한 톰과 달시는 그 곳에서 놀랍게도 결혼의 실체를 목격한다. 이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결혼이 모두 이상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에서 서로를 상처입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시와 톰은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달시는 해적을 처단하는 영광마저 야구선수인 톰에게 돌린다. 아무도 보지 못할 때에는 적재적소에 수류탄을 던졌던 달시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수류탄을 톰이 쳐내도록 던지는 장면은 결혼제도 안에서 모든 영광은 신랑을 향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바다 위로 가서야 톰과 달시는 그나마 동등하게 마지막 적과 겨룰 수 있게 되지만 목격자는 본인들과 망자뿐이다.
헐리웃에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웨딩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이성연애를 찬양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세지들을 읽어내는 관객이 있다면 언젠가 웨딩드레스는 폐기될지도 모른다. 다 찢고서야, 그리고 해적의 부츠를 빼앗아 신고서야 해변을 자유롭게 달리는 달시의 모습은 결혼식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여성의 희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만 읽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 이미지 출처는 모두 다음 영화입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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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네뜨> -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본 상실의 쓰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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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네뜨 (Ponette)
개봉일 : 1997.11.08 (한국 기준)
감독 : 자크 도일론
출연 : 빅토와르 띠비솔, 자비에 보브와, 클레르 노보, 마리 뜨랭띠냥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본 상실의 쓰라림
잔인한 말이지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우리는 아무리 혼자가 좋다고 말하더라도 살면서 적어도 한두명쯤은 마음을 다 내어줄만큼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언젠가는 그를 잃는 상실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누구나 겪을 수 있기에 무엇보다 두렵고, 또 그만큼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바로 이 ‘상실의 고통’이다. 지금껏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와 이별하는 아픔을 담은 영화를 수없이 봤지만 이 영화처럼 조용하게, 낮은 시선으로 상처를 건들이는 영화는 없었다.
<뽀네뜨>는 작은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상실의 아픔을 담아낸 영화다. 어린 뽀네뜨와 엄마는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 사고를 당하게 된다. 뽀네뜨는 팔 한쪽에 깁스를 했고 엄마는 사고의 충격으로 인해 생긴 머리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뽀네뜨의 아빠는 아내를 잃은 충격을 수습할 틈도 없이 아이를 안고 친척집으로 향한다. 아빠로서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출장을 가야했기때문이다. 엄마의 빈자리엔 ‘사랑하는 이가 언제든 떠날수 있다’는 불안감이 자리했고 뽀네뜨와 아빠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다짐한다. “절대 죽지 않기로”.
아빠가 출장을 떠나고 어린 뽀네뜨는 엄마의 부재를 느끼면서도 이전과 같이 일상을 살아간다. 친척들과 함께,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지만 상실의 아픔은 갑작스러운 순간에 툭툭 아이의 마음을 건들인다. 아이가 눈물을 터트릴때, 친구들 사이에서 잠시 웃음을 보일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로남아 부활의 주문을 외칠때. 모든 순간이 아팠고, 아이에게 한아름 희망이 주어졌을때 나는 비로소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뽀네뜨 시놉시스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뽀네뜨는 단지 왼쪽 팔만 조금 다쳤을 뿐인데, 차를 몰던 엄마는 너무 크게 다쳐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네 살짜리 뽀네뜨로서는 죽음을, 그리고 엄마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회사일로 출장가는 아빠는 뽀네뜨를 고모에게 맡기지만, 엄마잃은 슬픔에 빠진 뽀네뜨는 사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혼자 방안에 쳐박혀 인형과 대화만 나눈다. 꿈속에서 엄마와 만나던 뽀네뜨에게 어느날부터인가 엄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낙담하고 있는 뽀네뜨에게 고모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엄마도 분명 예수님처럼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그때부터 뽀네뜨는 밖에 나가 엄마 오기만을 기다린다. 아빠나 고모가 아무리 달래고 알아듣도록 타일러도, 뽀네뜨는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낮엔 여기서, 밤엔 엄마랑. 난 밤이 좋아.
며칠전만해도 함께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오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뽀네뜨는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아빠의 대답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있다고 대답하면서도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엄마의 빈자리는 뽀네뜨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자리잡는다.
일때문에 뽀네뜨를 친척집에 맡겨야만했던 아빠는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먼저 떠난 아내를 탓해보지만 어린 딸은 빈틈없이 엄마의 존재를 감싸 안는다. 뽀네뜨는 낮엔 또래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엄마를 만난다고 말한다. 사촌 마티아스와 델핀, 아빠는 뽀네뜨의 말을 믿어주지 않지만 뽀네뜨는 고집을 꺾지않는다.
뽀네뜨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 이유는 그저 '엄마를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부활할때 사용했다는 주문 '타리타쿰!'을 외치고, 엄마를 기다리는것만이 뽀네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뽀네뜨는 엄마가 묻힌 무덤가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나쁜 마음씨의 아이가 엄마를 욕하고, 누군가 엄마의 부재를 강하게 각인시켜도 울지 않고 맞서던 뽀네뜨가 엄마의 옆에선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마치 꿈, 기적처럼 엄마가 뽀네뜨의 앞에 나타난다.
엄마가 행복을 배우랬어. 난 행복을 배울거야.
뽀네뜨는 엄마가 챙겨준 붉은 니트를 입고, 엄마 대신 요요떼를 안고, 연약한 손목에 아빠의 시계를 감는다. 그리고 행복을 찾을것이라 다짐한다. 엄마의 따뜻한 사랑 한주먹 아빠의 흔들림 없는 사랑 한주먹은 뽀네뜨를 단단히 감싸줄것이다. 다친 팔의 상처가 나을때까지 튼튼하게 감싸주는 깁스처럼 말이다.
뽀네뜨가 언제나 곁을 지키고 있는 엄마의 존재를 느끼며, 가끔 공기중을 떠다니는 엄마와의 추억을 붙잡을 수 있길. 엄마의 존재가 상실의 흉터가 아닌 사랑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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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지 위에 그려낸 실험정신
이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시험기간 도중에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시사회에 다녀왔다. 종강하고서야 쓰는 리뷰...!
<석양의 무법자>를 제외하면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은 영화를 많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먼저 영화 시작하기 전에 영화사 진진 관계자분이 나오셔서 간략히 영화와 이벤트 설명해주시고 마지막으로 '오늘 밤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귓가에 엔니오의 음악이 맴돌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해주신 게 정말 좋았다. 멘트 하고 가신 건데 뭔가 더 세심한 기획 같은 느낌을 받았다ㅎㅎ
앞서 쓴 것처럼 본 영화가 거의 없었고, 스코어나 클래식에 관한 지식도 정말 부족한데다가 시험기간에 바닥난 체력 + 다큐멘터리라는 점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울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실제보다 짧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먼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 그리고 영화음악으로써 마에스트로가 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8-90년대의 스코어(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피아니스트의 전설>)들이 나오면서 엔니오의 음악이 할리우드 음악의 전형, 그리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들어본 적은 있는' 아이코닉함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그가 '스타일'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넬이나 디올이 새로운 '핏'을 만든 것처럼, 예술가로서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영화상으로는 후반부이기도 하고 나에겐 귀에 익은 음악들(그리고 그 당시 영화에 많이 나오는 형식들)이어서 무감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엔니오가 커리어의 정점에 다다라서 끝내 스타일이란 것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워 보일수록 그 사람이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그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술, 정치적인 철학이나 특별한 대의보다는 자신의 원칙과 작업으로서 음악에 접근하고, 실험할 기회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협업하는 과정이 그가 이미 영화 음악의 거장이 되었을 시점까지도 계속해서 드러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연스레 다큐멘터리 또한 위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일하는 방식과 정체성에 대한 작품처럼 읽힌다. 엔니오가 가진 겸손함도 자연스레 영화에 묻어난다.
영화 초반부부터 편집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편집상을 벌써 하나 받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영화로 거듭난 데에는 편집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건 실제 엔니오의 인터뷰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인터뷰와 오케스트라 영상, 영화의 몽타주가 일정한 순서대로 배치되었고 엔니오가 인터뷰 도중에 흥얼거리면서 곡을 설명하는 장면을 영화 장면과 함께 사용하면서 그의 정체성(영화 음악가)을 강조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지알로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와의 작업, 8-90년대 할리우드 영화, 타란티노와의 협업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작업량을 매끄럽게 담아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덧붙여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러한 성공적인 편집은 적절하게 배치된 인터뷰와 에피소드로 완성되었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 특유의 '아니면 말고!' 하는 반응 대문에 엔니오와의 작업이 불발된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관객인 내가 더 아쉬워질 지경이었다.
다만 영화의 극후반에 다다라서는 조금 더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평가를 나열하는 식으로 여러 영화 및 음악인들의 인터뷰를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물론 엔니오를 기리고 훌륭한 예술가에 대한 찬사를 보내려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의 예술적 성과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도 친절한 편집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 세례를 마지막에 전부 배치한 것이 영화의 막바지를 약간 느릿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실제 영화 푸티지를 극장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 점, 개인적으로는 거장 예술가를 새로 알게 해준 친절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개봉하면 다시 극장을 찾아 관람하게 될 것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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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몽(幻夢) CINE 리뷰 6화_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해석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스토리가 마음에 드나요?”
(“So which story do you prefer?”)3.14159265358979...
원주율(Pi, π)만큼이나 무한한 이 영화의 해석!
이 영화가 질문하는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안 감독 외계인설?!
-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이야기
- 예민한 당신을 위해 준비한 교묘한 복선
- “당신은 어떤 스토리가 마음에 드나요?”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라이프오브파이 #영화추천 #환몽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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