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20 00:15:04
홀리모터스
살아낸 그 삶 마저 연기였을까?
내 삶은 어디에..
실제의 삶과 연기하는 삶 사이의 간극은 그 안에서도 소모되는 오스카만이 남겨져있었다.
“20분안에 지난 20년을 다 돌아봐야해”
극장에서 자는 관객들, 리무진의 대화를 통한 시대변화
그럼에도 잊지 않겠다는 중간중간의 영화장면들이 인상적이게 다가온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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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 아이리스!
우리나라 SF문학 공모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소재가 섹스봇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선작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일까? 그것은 이 소재를 다루는 창작자의 시각이 자극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컴패니언>의 등장인물이자 로봇인 아이리스의 정식 명칭은 반려로봇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그녀로부터 얻는 편익은 섹스와 정서적 지지, 짐꾼기능 그리고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 뿐이다. 이것을 진정한 '반려'라고 할 수 있을까? <컴패니언>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있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부제를 <반려자가 오직 섹스봇 정도의 기능만 해주길 바라는 정신 썩어빠진 사람들이 보면 불쾌할 영화 1위> 라고 달겠다. 리뷰 시작.
본 리뷰는 영화 컴패니언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무엇일까?
스포하자면, 컴패니언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주체성과 조작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담은 복수호러코미디다. 기계가 주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자체가 특별하진 않다. AI, 바이센테니얼맨, 엑스마키나 등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성에 집중하면 <컴패니언>의 유사영화는 복제인간 영화들에서까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아를 찾는 것도, 그 방법이 복수이거나 사랑 또는 탈출인 것도 사실 새롭지 않다. 이런 결말은 소재를 선택할 때 같이 결정되는 일종의 세트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충실하게 서사의 법칙을 따른다. 그렇다면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느냐?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터페이스의 디테일과 빌런(조쉬) 캐릭터가 상징하는 동시대 인간의 욕망에 있다.
'러브링크에 접속해 사용자를 등록하세요.'
이 세계관에서 아이리스는 러브링크라는 어플로 작동하는 일종의 휴머노이드로 현실의 안마의자나 자율주행자동차와 같은 위치에 있는 기계인 듯 하다. 그런데 그녀를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창녀 취급도 받는다. 그녀의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준다. 디자인과 갬성이 중요한 비싼 기계인 그녀는 사용자에 의도에 맞게 셋팅되며 그것은 그녀의 쓰임새가 된다. 그녀는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수많은 모델 중 하나고 렌탈 시스템으로 대여도 된다. 그녀는 날씨도 알려주고 블랙박스 기능도 한다. 아주 쉬운 음성명령어로 껐다 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는 이전까지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현실과 맞닿은 인터페이스를 그려주며 관객을 영화의 세계로 훅 들어오게 한다. 이 외에도 자율주행 자동차의 음성인식 기능을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이나, 우리가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 설정하는 언어설정모드를 셀프 설정하는 장면 등은 그녀가 곧 현재에 존재할 것 같다는 초근미래의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 설정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개성적인 지점은 로봇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기계가 거짓말을 못(안)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진실밖에 말하지 못하는 인간을 표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더욱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진짜) 인간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더욱 재밌어진다. 로봇에게는 있는 진실이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니 조쉬는 아이리스를 제멋대로 대한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조쉬에게 순종적이고 진실된 여자친구가 된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법이 없다. 사람을 죽이는 고통보다 그를 보지 못하는 고통이 크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피해자처럼 말이다.
최고의 애인, 아이리스
요즘은 다정하고 야한 애인이 최고라던가? 그렇다면 샤워를 해도 화장이 지워지지 않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법이 없는 아이리스는 최고의 애인이다. 그녀는 늘 남자친구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며 남자친구의 관심과 건강에만 헌신한다.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자라면 자는. 징징대지 않고 적당히 기분좋을 정도의 질투를 보여준다. 반면 조쉬는 그녀의 요구나 정서적 유대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전형이다. 영화는 뭘 말하고 싶었을까? 캣의 대사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난 네가 싫은 게 아냐. 너라는 존재가 대변하는 개념 자체가 싫은거지."
기계 자체는 해로울 수 없다.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자의 욕구에 따라 그것은 살상무기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AI로 인한 공포 시대에 이 영화는 그 지점을 명백히 짚고 있다. 바로 조쉬를 통해서다.
최악의 애인, 조쉬
영화의 후반에서 아이리스의 탈출이 미수로 그치고 다시 한 번 조쉬 앞에 붙잡혀 왔을 때 조쉬는 오프닝과 완전히 다른 본색을 드러낸다. 가진 것에 비해 자아가 비대한 조쉬는 그 순간에도 자기연민을 통해 아이리스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룸과 진짜 여친도 아닌 섹스봇을 대여 하는 게 최선으로 만든 이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전 같았으면 프로그래밍에 의해 조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을 아이리스지만 탈출과정에서 똑똑해진 그녀는 더 이상 가해자의 워딩에 속지 않는다. 몸은 묶여있을지언정 본질을 꿰뚫는다. 더 나아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징징대는 나약한 존재. 제대로 긁힌 조쉬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쏴버린다. 비겁하게 자살처럼 보이게끔 해서. 진실도, 인정도, 반성도 최소한의 의리도 없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결말이 죽음인 것은 사실 정의구현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 쓰레기에는 약이 없다.
여담이지만 영화의 수준이 B급 킬링타임에서 그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예산이나 연기력이 아니라 서사의 완성도에서 믿는 한 사람으로서, 사실 이 영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건 우리의 빌런 조쉬다. 그가 가진 대표성은 꽤 공격적이고 트렌디하다. 짐작컨대 이 빌드업은 창작자의 시대감각에서 뻗어나온 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과 동등한 여성인간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수컷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드류 행콕이 79년생 남성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호감으로 만든다.
비록 조쉬가 호감은 아닐지언정 그가 수치심도 없이 늘어놓는 불평불만이 생소하진 않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는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비틀린 수컷의 욕망을 대표하는 것 같다. 사실 그가 이 작품에서 실제로 이성적 관계로 발전하기 원하는 여성은 사실 캣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질 수가 없다. 그녀에겐 이미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중년임에도 매력이 넘치는 세르게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남사친까지만 허용되는 게 현실이다. 그녀는 사람이기에 아이리스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열등감을 가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진심을 어필하진 못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경쟁자인 (실제로는 경쟁이 불가능할 정도의 레벨차이지만) 세르게이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쟁자를 이길 수 없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을 반려로봇인 아이리스를 섹스봇으로 이용하여 푼다. 심지어 그녀를 이용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자신은 죄 없는 피해자가 되어 세르게이의 재산을 갈취하려 한다. 연인사이까지 갈 것도 없다. 같은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공유하기가 싫을 정도로 인류적 관점에서 최악의 동반자인 셈이다.
자격을 바라지 말고 자격을 갖추자
이것이 조쉬의 개인적인 비극이면 좋을텐데, 놀랍게도 이건 식상한 일이라는 걸 영화 말미에 등장한 수거업체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나? 사실 지금의 사회가 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정당한 방식으로 노력하는 진정성의 가치는 무시하고, 쉽고 빠르게 욕구를 해소하는 자극성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영화의 엔딩은 아이리스의 성장과 독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길이 아닌 길을 택한 인간의 말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SF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객석에 앉은 우리가 아이리스든, 조쉬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자는 메시지도 심플하고 경쾌해서 좋았다. 현실에선 그렇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자 이제, 고 투 슬립, 조쉬!
이 비정한 세상의 한줄기 찐사랑,일라이와 패트릭
비록 조쉬는 자력으로 성공할 수도, 동반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실패한 남성이지만 그의 친구인 일라이는 (게이이면서도 로봇 파트너를 사랑하는 그는 퀴어중의 퀴어라고 해야할까?) 똑같이 인간-로봇 커플이면서 패트릭과 문제에 대해서 공평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을 경험한다. 사실 이 커플 덕에 영화는 그저 비극과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좋은 반려에 대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드류 행콕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속편을 만들 생각도 있는 것 같던데... 비극적인 결말이 안타까우니까 이 커플로 로코 스핀오프가 나오면 꽤 재밌지 않을까?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을 일으킬까?
모든 게 먹구름에 가려진 기분이다.
세상을 보지만 진짜 보는 건 아니라고 할까?
우린 헤매인다. 의미도 목표도 없이.
엄청 우울하게 들릴지 몰라도 늘은 어차피
세상의 진짜 틈을 보는 초월적인 순간들
그리고 갑자기 의미가 생긴다.
무척 운이 좋아야 평생에 한번 이런 순간이 온다.
인생에 가장 기쁜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조쉬를 만났을 때다.
두 번째는 그를 죽였을 때다.
아이리스의 나레이션은 오프닝과 엔딩에 반복될 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조수석에 있던 그녀는 이제 운전석에 앉아 스스로 운전을 한다.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그 별장 안에서 벌어진 사건과 설정에 집중한 명확한 로그라인과 산뜻한 결말이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잔인한 장면들은 공포영화의 그것과 견주어도 될 만큼이었지만 그래도 뭐 보통의 스릴러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은 큰 불편함 없이 보시지 않을까 싶다.
감독피셜 그렇게 무사히 떠난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에 합류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것까지가 MZ시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이토록 경쾌하고 속도감있을 수 있나보다. 감정의 부채가 전혀 없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도 없고 살인도 그저 일어난다. 섹스봇과 반려가 되는 설정보다 모든 인물이 뒷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판타지 같이 느껴진다. 뭐 어쨌거나 이제 깨어난 아이리스가 어디든지 마음대로 살길. 일어나,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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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지역 소멸’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들
듣는 건 너의 책임/Listening to Us Is Your Duty
Korea/2024/92min/Documentary
‘한국경쟁 장편’ 섹션
‘듣는 건 너의 책임’.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 통영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인디밴드의 이름이다. 멤버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책방 ‘너의책임’에서 따왔다지만 어딘가 ‘뻔뻔해 보이는’ 이름이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뿐이니 듣고 말고는 당신 책임이라는 데서 오는 ‘뻔뻔함’ 말이다. 괜히 호기심이 인다. 그리고 영화는 이 뻔뻔함을 너끈하게 초과해 감동을 선사한다. 영화가 소도시 통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서정적인 음악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역‧청년‧음악‧영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상승 욕망만이 들끓는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다른 삶의 양태와 목소리가 구체화된다.
90분짜리 통영 올 로케 뮤직비디오의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통영 풍경과 밴드의 노래가 이어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청량하고 따스하다. 그러나 동시에 첨예하다. 영화 말미, 밴드 공연장에 참석한 청년 관객은 말한다. “이렇게 많은 통영 사람들이 있다니!” 이 말은 각자의 이유로 통영에 살아가는 청년들의 네트워크가 취약함을 대변한다. 이들은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왜 이미 곁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지역 청년과 일상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만 연결되는 걸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역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횡행하고,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 수도권으로 몰린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필요한 분석이고, 일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종종 함부로 유통되는 이런 말들은 지역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축시켜 움츠러들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옆의 또 다른 청년에게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대신 지역에서의 삶을 음울하게 되돌아보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밴드 멤버들은 자신에게 통영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준다. 통영은 누군가에게는 아이를 키우기에 완벽한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잠깐 쉬러 들렀다가 정주하게 된 곳이며,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생계의 근간을 이루는 일터이다. 당연하게도, 멤버들의 사연은 고유의 결을 가지며 때로는 접속하고 때로는 독립적이다. 우리가 ‘지역 소멸’을 말할 때 놓치는 건 바로 이것이다. ‘지역 소멸’이라는 말은 이미 홀로 또는 함께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다. 그래서일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의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은은한 감동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이유는. 아마추어 인디밴드가 결성되고, 노래를 만들고, 공연하는 과정을 정감 있게 담아낸 영화의 여정은 지역 청년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삭제된’ 목소리를 되찾는 분투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통영에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항상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멤버들의 통영 서사에는 늘 서울과 대도시가 등장한다. 통영 생활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마찬가지다. 이는 지역에서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수도권 대도시에서의 삶을 경유해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주변’과 ‘중심’이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지역에서의 삶이 독립적으로 오롯이 존재하지 못하고 ‘중심’을 통과한 이후에만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권력관계를 인지한 후 솟아나오는 지역의 역설적 자기 인정은 기존 위계를 질문하는 자원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기존 담론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자본주의 경쟁 문화가 포섭하지 못하는 ‘재미’를 추구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은 프로/아마추어, 중심/주변의 경계를 오가며 자기들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 영화는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감동적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음악의 힘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밴드 멤버들이 청년이고, 밴드가 활동하는 곳이 소도시라는 점은 필연적으로 영화의 감동을 더 넓은 고민으로 확장시킨다. 유쾌한 도전을 ‘분투’로도 해석할 여지가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 ‘다양함’의 범주와 경계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듣는 건 너의 책임〉은 이 지점을 파고든다. ‘지역 소멸’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자. 연결된 사람들이 무언가를 즐겁게 해나가는 모습에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빚어낼 ‘오래된 미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듣는 건 너의 책임〉 상영 정보 및 예매 페이지
-9월 6일(금)/19:00~20:32/세명대 태양아트홀
-9월 9일(월)/16:00~17:32/세명대 태양아트홀
-jimff.org/w4_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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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KY 데일리] 어린 시절 즐겨본 동화책과의 재회
제20회 BIKY 기획기사 [톰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어요]
<톰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어요>
감독/ 에릭 벌커크, 요스트 반 덴 보쉬
국가/ Netherlands, Belgium
제작년도/ 2024
시놉시스/
토미 톰과 고양이 친구 마우스의 세상에 눈이 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미끄럼도 타고, 눈을 뛰어다니는 즐거움도 누립니다. 그런데 눈만 온 것이 아니라 이웃에 새로운 개 한마리가 등장하면서 긴장을 하게 됩니다. 자꾸 이들 사이에 끼어들고 문제를 일으키는 이 개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낯선 눈이 내리는 세상 속, 새로운 친구와 만나는 동물들의 우정담.
아기자기한 마을의 전경이 위에서 내려다보인다. 애니메이션답게 귀엽고 부드러운 선들에 크레파스와 같은 따뜻한 색감이 더해져 동심을 자극한다. 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 또한 동물 친구들이다. 고양이 ‘톰’이 마을 어디에 숨어 있을지 다같이 찾아보자며 나레이션이 나온다. 뮤지컬 장르에 나올 것 같은, 내심 어깨를 들썩거리게 되는 ‘토미 톰’ 주제곡이 흘러 나오며 독특한 나레이션이 더욱 돋보인다. 대사가 없는 동물 캐릭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행동과 감정,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해주는 주 나레이션이 있고, 중간중간 반응을 유도하는 말들이나 주인공의 행동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나레이션이 보조로 추가된다. 실시간으로 리액션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동물 캐릭터들이 작품 속 아이들의 말소리 뿐만 아니라 실제 관객들의 말에도 반응하는 느낌이 들며 서로 상호작용하는 감상이 들도록 구성되었다. 여느 영화에서 접해본 적 없는 신선한 플롯이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으로서의 매력을 극대화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고양이 톰 뿐만 아니라 그의 고양이 친구 마우스가 함께 집 안팎을 놀러 다니는 움직임이 실제 고양이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만화적으로 담아냈다는 게 보일 만큼 생동감 있었다. 신나서 빠르게 뛰어다니다가 사물에 부딪쳐 어딘가에 쏙 들어간다거나, 김밥처럼 돌돌 말린다거나, 의도치 않게 빙판길에서 쭈욱 썰매를 타게 되는 등 익살스러운 움직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부드럽고, 정신 없고, 쏘다니는 고양이들. 따뜻하고 복슬복슬한 걸 좋아하는 고양이들과 양이 사이 좋은 친구로 설정된 부분 또한 디테일하다고 느꼈다. ‘개와 고양이’의 보편적인 이미지만 다루는 게 아닌, 오리와 다람쥐 또한 사건에 개입되는 또 다른 동물 캐릭터로 등장하여 각자의 개성이 묘사되는 포인트도 매우 좋았다.
눈이 온 마을에서 끝내주는 썰매를 즐기기 위해, 톰과 마우스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각자의 능력을 합쳐 우여곡절을 이겨내는 과정이 매우 귀엽게 그려져 있다. 모든 장면들이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포근하지만, 날이 추워서 입김 나는 당연한 현상을 증기 기관차와 같은 이미지로 표현되는 장면이 가장 순수한 마음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보고 자란 그림책이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잊히기 쉬운 내 안의 동심을 다시금 건드려주는 작품, <톰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어요>를 자막을 볼 수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라이브 더빙으로 접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
상영 일정
2025.07.10(목) 10:00 시네마테크
2025.07.12(토) 10:00 소극장
2025.07.19(토) 13:30 롯데시네마 부산명지 1관
BIKY 2025. 07. 08. (화) ~ 2025. 07. 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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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또 다른 복수극
또 다른 복수극
처음에는 <헤어질 결심>을 멜로 드라마로만 받아들였다. 죽음을 통해 영원을 얻는 미결의 사랑. 그 아이러니가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것은 박찬욱 감독의 또 다른 복수극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총 세 명―본인의 엄마, 남편, 철썩의 엄마―을 살해한 서래는 그녀의 독백처럼 “독한” 년이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 아래 슬픔이 계속 침전되어 쌓여가는 중이다. 이때 복기해야 할 것은 해준이 질곡동 사건의 범인 홍산오를 잡기 위해 그의 측근 이지구를 신문할 때, 그러니까 “잡혀서 감옥 가느니 경찰 몇 죽이고 자살할걸요?”라고 이지구가 토로할 때 난데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서래의 모습이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그녀와 홍산오를 연결시키면서 그녀의 내면에 자살 충동이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욕망과 함께 총 세 명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은 그녀가 난폭한 동시에 용감한 인물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호미산에서 해준에게 한 다음의 대사는 어떤 공포영화 대사보다 썸뜩하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돌이켜 보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서래와 연락이 끊긴 해준이 다짜고짜 그녀가 위험한 행동을 할 것이라 예단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해준은 그때부터 서래의 자살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은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질곡동 사건에 있다. 형사와 피의자 간의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서사와 질곡동 사건은 은밀히 내통한다기보다 차라리 평행하다. 왜 영화는 이 질곡동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일까. 해준은 이 사건에서 홍산오의 자살을 목격한다. 홍산오는 가인을 “죽을 만큼 좋아”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현세에 남겨두고 떠난다. 그때 프레임 바깥에서 거의 절규하듯 소리치는 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홍산오, 하지 마!" 해준은 이를 통해 두 가지를 배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아주 처절하게 괴로워한다는 것. 해준은 질곡동 사건에서의 교훈을 토대로 서래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는 서래를 잃을 수 없고, 그로 인한 고통을 견딜 수 없다.
홍산오와 서래의 자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홍산오는 자살 행위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사랑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서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해준과 서래 사이의 어두운 거래가 담긴 핸드폰은 버리면 그만이며, 가장 큰 제약이었던 해준의 아내는 그와 결별하고 집을 떠났다. 이제 둘은 만나서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이를 거부한다는 건 서래의 마음에 사랑보다 증오심이 더 커졌다는 방증이다. 해준이 그녀의 마음을 충만한 사랑에서 증오와 고독과 체념으로 변화시킨 흔적은 이포에서 벌어지는 영화의 중후반부에 계속 감지된다. 임호신이 살해당한 날 해준은 자신을 보기 위해 이포에 온 서래를 찾아가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라며 그녀를 범인으로 낙인찍는다. 사랑의 전제 조건이 믿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서래에게 이 말은 사실상 '배신'이다. 믿을 수 없다면 사랑은 끝난 것이다. 그러니 해준의 말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심지어 해준은 임호신의 살해범이 왼손잡이라고 직접 말하면서도 오른손잡이 서래를 의심한다. 그의 새로운 파트너 연수가 "저분(서래) 오른손잡인데요?"라고 의문을 표하면, 해준은 서래가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마침내 쐐기를 박는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해서 저 여자가 범인인지." 부산에서 해준이 서래에 의해 붕괴되었다면, 이포에서는 서래가 해준에 의해 붕괴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순수하지 않다. 거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증오와 혐오의 감정도 포함된다.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처럼 수시로 모습을 뒤집으며 위험천만하게 곡예를 탄다. 해준을 죽을 만큼 좋아한 서래는 이제 그를 파괴하려 한다. 그녀는 부산에서 그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그에게 직업윤리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해준은 서래를 만나기 전까지 지나칠 정도로 열정적이고 모범적인 형사였다. 그는 아내와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사건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에게 직업윤리의 붕괴는 곧 삶의 붕괴를 뜻한다. 서래는 미결된 사건, 다시 말해 형사로서의 직업적 결함이 극심한 불면증의 원인이 되어 그를 허약하게 만든다는 사실까지 인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래가 그간 저질렀던 살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수장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을 다시 사랑하기로 한 해준에게 그것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해준의 형사로서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것이다. 해준은 그녀의 연인으로서, 특히 형사로서 그녀를 찾을 때까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 고통받을 것이다. 서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준은 "참 불쌍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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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슬픔
올해 몇 편의 영화를 보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극장 개봉작 이외에도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극장과 OTT를 넘나 들며 다방면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하고 생각해보면 순서대로 떠오르는 영화들이 모두 극장에 찾아가서 본 것들이다. 분명 OTT오리지널도 좋은 영화들이 많았을텐데, 최고의 영화란 극장에서 본 것 중에서 정해야 한다고 나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려 버린 것인지 아니면 게으른 마음과 온갖 변명을 헤치고 나아가 기어코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영화들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일지 잘 모르겠다.
올해 내가 본 영화들은 굉장히 극단적이다. 너무 세고 자극적이거나,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세고 자극 적인 것들은 대부분 OTT에서 많이 보았고, 고요한 영화들은 극장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큰 스크린 가득 채워진 주인공의 상황에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미소지었다. 때로는 그들 처럼 멍하니 바다의 잔물결을 함께 바라 보기도 했다.
내가 네가 되어 보는 시간을 완벽히 선사 했던 것은 영화 <애프터썬>이었다. 서른 한 살 소피가 되어 열한 살 소피의 기억을 함께 더듬 더듬 짚어 나갔다.
“11살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영화는 아빠의 모습을 담은 캠코더에서 소피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소피와 아빠는 지금 여행중이다. 아빠는 언뜻 남매 처럼 보일만큼 젊은 아빠다. 소피의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이혼 후 런던으로 이주한 아빠와 방학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다. 트윈베드를 예약했지만, 더블베드로 배정이 나고, 리조트는 공사중이라 시끄럽다.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여행에 아빠는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이국적인 풍경 속 여름의 빛은 아름 답고 소피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생일을 맞아 다른 사람들과 이벤트를 준비하고 노래도 불러주는 등 휴가를 즐기는 소피와 다르게 아빠의 상황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열한 살 그때의 소피처럼 관객 역시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우울감과 아픔, 경제적인 어려움 여러가지가 뒤섞여 삶을 견뎌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겨내고 싶지만, 이겨내기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함께 있는 딸을 향해 웃고, 춤추고,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의 모습이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여 묵직하게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출국하러 가는 소피의 마지막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아빠. 소피가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캠코더를 내리고 소피가 들어간 곳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간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새드엔딩일것이라고 짐작한다. 서른한살 소피가 떠올린 이 여행은 소피의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늦은 밤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식탁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우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지만, 모른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들킬새라 다시 방으로 돌아갔던 기억.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는데, 아이둘을 이미 십대까지 키워놓았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가 되어서 어떤 시절을 지나 왔던 걸까? 나는 그때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을까?
열한 살 소피의 시선으로 서른한 살 캘럼을 바라보는 이 영화를 보며, 어릴 때는 알 수 없었던 어른들의 삶의 무게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 때는 몰랐고, 지금도 어렴풋이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슬픔. 끝도 없이 깊고 무거운 감정에 갇히지 말고, 부디 살아 남아 함께 위로하고 안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난 사람의 슬픔에 남은 사람의 슬픔이 더해져 무척이나 오랜동안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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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머리카락에 녹아 있는 기억
SYNOPSIS.
애착 인형 이름은 제프 브리지스, 애정하는 밴드는 플리트우드 맥. 감수성 넘치는 베니와 똘똘한 사촌 돈의 특별한 우정
PROGRAM NOTE.
때는 1990년, 록밴드와 인형을 사랑하는 원주민 혈통 소년 베니는 어느 여름날 부모님에 의해 난생 처음 도시를 떠나 애리조나 원주민 보호구역 내 양떼 목장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애로운 외할머니, 빵떡 소녀라는 별명의 사촌 돈과 자유로운 영혼 루시 이모, 마초맨 삼촌 마빈을 만나게 되고,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된 베니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도시 소년 베니의 시선 아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조조래빗>을 연출한 타이카 와이티티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이 영화는 이제껏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원주민들이 중심이 된 가족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따뜻하게 묘사한다. 록밴드와 TV의 시대였던 90년 미국의 멜랑콜리한 활기, 촌철살인의 유머가 넘치는 미국 인디펜던트 영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최은영)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적이 있다. 머리카락에는 우리의 흔적이 남는다고. 프로그램에서는 국과수에서 머리카락을 분석하는 실험을 해 보였는데, 오랫동안 종사한 직업은 물론 최근 바다를 다녀왔다는 사실까지 맞출 수 있었다. 어딘가 오래 묻혀 있다 ‘미라’ 상태로 나온, 한때 살아있던 사람의 몸에서도 머리카락은 비교적 오래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몸이 발견될 때마다 뉴스 기사들은 하나 같이 “상태 양호”하다고 했다. 이런 머리카락을 통해 DNA를 분석하면 또 그 몸이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가 주렁주렁 올라올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파편적으로나마 알게 된 이후로, 가끔 머리카락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머리카락 하나는 평소라면 그냥 방바닥에서 증식을 하는지 의심될 만큼 치워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어떤 현장에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겠지. 마찬가지로 내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감고 말리고 빗고 넘기는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는 소중히 여길 무엇일 것이다.
<빵떡 소녀와 나>를 보고서는, 그게 그토록 애틋하고 찡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사실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고른 영화였다. Frybread를 빵떡이라고 번역할 귀여운 생각은 누가 했을까. 유난히 잘 붓곤 하는 얼굴을 스스로 빵떡이라고 종종 말하긴 해도 그게 표준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어엿하게 영화 제목으로 들어가 있는 걸 보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기특한 우리 탄수화물과 탄수화물의 조합 같으니.
귀여운 제목에 귀여운 스틸컷을 보고 골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옥수수죽처럼 슴슴하고 든든한, 어쩐지 따스하고 구수한 내음이 나는 영화였다.
1990년 미국. 키치하게 반짝거리는 도시 한 가운데서 베니가 열중하는 것은 헤드셋으로 쏟아지는 밴드 음악과 손에 쥐어지는 크기의 인형 (본인 주장에 따르면 '액션 피규어') 두 개다. 인형 두 개로 베니가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긴장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이다. 외부로 표현되지 않는 소리들이 베니 안에서 왕왕 울릴 때, 부모님 손에 의해 여름방학 동안 할머니댁 행이 갑작스럽게 결정된다. 베니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럴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심각한 표정의 부모님의 긴장과 갈등이 이미 베니의 손 끝 인형에까지 묻어나고 있으니까.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려 도달한 할머니 댁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초원 한 가운데 있다. 지금은 다 집을 떠난 이모 삼촌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여전히 벽에 붙어 있는 곳.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할머니와 나바호족 말을 할 줄 모르는 베니, 그리고 윽박지르기만 하는 삼촌. 그 사이로 빵떡이가 등장한다. 모두가 빵떡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름은 '새벽Dawn'인 소녀가.
영화는 실제로 방학 동안 할머니댁에 맡겨진 아이들의 일상처럼, 슴슴한 모험의 맛으로 가득 차 있다. 분명 애들한테 물어보면 "심심해 죽겠어!"라고 대답하겠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가장 소중한 추억이 거기 다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질 그런 날들. 아이들에게 호의적이고 다정한 태도를 보이며 아이들 마음을 풀어주는 이모가 있는가 하면, 있는 상처 없는 상처 박박 긁어 결국 갈등을 표면화하고 마는 삼촌도 있다. 그들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점점 쓸쓸해지는 풍경이, 그곳을 지키는 마지막 사람들 같은 스산한 기분이, 함께 올라온다.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동네의 마지막 젊은이 같은 기분이 든달까. 내가 한국인이라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지, 저들에게는 잃어가는 원주민 문화의 흔적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그리고 영어 배우기를 거부한, 나바호족 문화를 꼿꼿하게 지키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양탄자를 만들어서 기념품 가게에 팔지만, 양탄자에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만은 할머니 곁에 모조리 남아있을 것만 같다. 양탄자 무늬의 의미와 거기 담긴 상징들, 나바호족에게는 '진실보다 중요한' 상징들을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이유식처럼 떠 먹인다. 할머니의 자장 안에서 나바호족의 문화는 보드랍고 편안하게 풀어진다. 비록 어른이 되면서 (영화에서는 서술되지 않는) 여러 원주민으로서의 어려움 속에서 제각각의 길을 가는 이모삼촌 삶의 궤적은 쓸쓸한 감정을 불러오지만, 아기의 '첫 웃음'을 축하하며 첫 웃음 잔치를 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이 영화 속 가족은 아주 애틋하거나 아주 냉담하지 않은, 그래서 나와 매우 다른 사람들임에도 어쩐지 더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볼 때쯤이면 할머니 댁에 다녀온 기분이 든다.
이 영화에서 가족들은 많은 순간 서로의 머리카락을 만진다. 손주들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 주고, 머리를 묶어 주고, 어루만져 주는 할머니의 사랑. 머리카락은 기억이라는 말은 DNA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만이 아니라, 나바호족의 상징에서도 진실이다. 가끔은 사실보다 상징이 더 진실을 닮아 있는 세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혜가 고요히 빛난다.
사실은 서로 다 알고 있던, 녹록지 않은 가족사를 이고 '빵떡 소녀와 나'는 앞으로도 성장해 갈 것이다. 아이라 해서 모르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기억을 간직하듯, 가족 안에서 켜켜이 쌓이고 흐른 일들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나 할머니가 떠먹여준, 고요하게 빛나는 지혜와 상징이 촛불처럼 아이들의 삶을 밝혀주지 않을까. 나도 촛불 하나를 들고 영화관 밖으로 나서는 듯한 마음이다. 어쩐지 창포 향이 날 것 같은 기분.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네 이야기 같아도 되나? 아마 그게 영화의 힘이겠지. 이 기억 또한 내 머리카락에 남을 것을 안다.
9월 17일 20:00-21:29 롯데시네마 은평 7관
9월 18일 19:30-20:59 롯데시네마 은평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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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도적인 캐스팅에도 아쉬움을 남긴 원더랜드 / 눈과 귀가 즐거운 / 로맨틱 드라마 / 탕웨이 박보검 연기는 굿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원더랜드"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 재미난 쿠키영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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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쟁이] 마블을 거절한 역대급 배우들!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영어 영상 이후에 정말 편한 마음으로 다시 한국어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마블영화의 캐스팅 이야기들을 가지고 와봤습니다.
배우들 중심으로 풀어봤으니 재미있게 시청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 구독 꼭 부탁해요~
2017. 1. 06 영상입니다!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arvelerw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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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크루엘라> 화려한 반격 영상
처음부터 난 알았어. 내가 특별하단 걸
그게 불편한 인간들도 있겠지만 모두의 비위를 맞출 수는 없잖아?
그러다 보니 결국,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지
우여곡절 런던에 오게 된 나, 에스텔라는 재스퍼와 호레이스를 운명처럼 만났고
나의 뛰어난 패션 감각을 이용해 완벽한 변장과 빠른 손놀림으로 런던 거리를 싹쓸이 했어
도둑질이 지겹게 느껴질 때쯤, 꿈에 그리던 리버티 백화점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됐어
거리를 떠돌았지만 패션을 향한 나의 열정만큼은 언제나 진심이었거든
근데 이게 뭐야, 옷에는 손도 못 대보고 하루 종일 바닥 청소라니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런던 패션계를 꽉 쥐고 있는 남작 부인이 나타났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난 남작 부인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들어가게 되었지
꿈을 이룰 것 같았던 순간도 잠시, 세상에 남작 부인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이야…
그래서 난 내가 누군지 보여주기로 했어
잘가, 에스텔라
난 이제 크루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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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체어> 공식 예고편
어느 명문 대학에서 유색인종 여성 최초의 학과장이 탄생한다.
하지만 영문학과는 모진 파도를 맞고 있는 중.
온갖 요구가 정신없이 들이치고, 기대치는 높기만 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