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1-04-08 19:51:09
살인마로서 살다가 인간으로서 죽다
언더 더 스킨 리뷰
경고: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무미건조함으로 가득찬 살인마의 일생
<언더 더 스킨>은 인간의 몸에 기생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외계인을 그린다. 외계인은 로라라는 이름으로 흰 바탕 앞에 누워 있는 여자의 옷을 뺏어서 입고, 어딘가에서 받은 거대한 트럭을 타고,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을 유혹해 집으로 들여보낸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집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게 끝나면 로라는 사냥감이 될 새로운 남자를 찾아 떠난다. 이러한 유혹과 사냥이 영화 초반부 ~ 중반부에 계속 반복된다.
로라는 살인에 매우 유능한 외계인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남자들을 유혹해 사냥감으로 삼는다. 그러나 캐릭터의 특성을 드러내야 할 이러한 과정은 오히려 반복되는 노동처럼 느껴진다.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연출 탓이다. 특히 로라가 살인을 저지르는 모습은 이러한 연출의 끝을 보여준다. 로라가 어두운 곳에 홀로 서 있다, 로라를 발견한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남자는 중간에 어두운 늪으로 빨려 들어가버린다. 이게 끝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도 로라처럼 무미건조한 톤을 통해 그려지는 캐릭터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안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꼭 동전을 던진다. 동전이 나오는 면에 따라서 살인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우위를 숨기기 위한 변명일 뿐이다. 한편 안톤은 살인을 할 때도 총이 아니라 공기 봄베를 쓰는 등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캐릭터의 매력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그러나 로라한테는 그럴만한 장면이 없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이처럼 <언더 더 스킨>이 로라한테 철저하게 거리를 두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로라에게 얼굴이 흉측한 남자가 찾아온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그동안 로라가 만나왔던 남자들과 달리 외모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걸 꺼려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정을 들은 로라는 그 때부터 연민이라고 하는 감정을 그 남자에게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유혹했던 남자들 중 처음으로 그를 산 채로 집 바깥으로 꺼내준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로라는 살인을 멈춘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우기 시작한다. 자신의 장기를 버린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침내 샤낭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다행히 이후 로라가 첫 번째로 만난 남자는 남자는 로라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단 걸 알고 그 남자와 헤어지고 만다. 두 번째 남자는 숲의 관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숲에 찾아온 외계인을 강간하려 했다. 그리고 로라에게 불을 붙여 그녀를 불타죽게 만든다.
그래도 마침내 인간으로서 죽다
로라는 죽기 직전, 마침내 외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온몸이 검은 비늘로 덮인 흉측한 모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이 모습이 로라가 인간의 피부 속에서 살인을 저지를 때보다 훨씬 인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로라에게 공감할 수 있는 모습들이 그녀가 살인을 멈출 때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연출도 로라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로라가 케이크를 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언더 더 스킨>은 이렇게 감정을 쌓아나가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로라가 붉은 불에 타죽어갈 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라가 살인마 시절이었을 때 주로 검은색과 푸른색으로 둘러싼 화면이 등장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이렇게 영화의 초반부 ~ 중반부의 무미건조함은 이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기 위한 밑밥으로 밝혀진다. 이는 로라가 끝내 인간으로서 죽는 모습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Relative contents
-
- 4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
4월의 반절이 벌써 지나갔네요.오늘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하니 유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또, 일교차가 매우 크다고 하니 감기도 조심하길 바라겠습니다!씨네픽과 함께 하는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과 한 주 동안 진행했던 씨네픽 예측 이벤트인'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의 개봉 주 주말의 관객 수'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럼 시작해 볼까요?...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1.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NEW)▶ '신비한 동물' 시리즈 중 세 번째 시리즈인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호그와트'의 교장 선생님인 '덤블도어'의 젊은 시절을 다뤄 해리포터 팬들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주말 동안 (4월 15일~17일) 관객 수 33만 7371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7만 6218명을 돌파하였습니다.이번 주에도 많은 영화가 개봉 예정에 있지만,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이 1위를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줄거리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에 마법사들이 개입하게 되면서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의 힘이 급속도로 커진다. 덤블도어는 뉴트 스캐맨더에게 위대한 마법사 가문 후손, 마법학교의 유능한 교사, 머글 등으로 이루어진 팀에게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머글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린델왈드와 추종자들, 그의 위험한 신비한 동물들에 맞서 세상을 구할 거대한 전쟁에 나선다. 한편 전쟁의 위기가 최고조로 달한 상황 속에서 덤블도어는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서서히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데…2. <수퍼 소닉2> (▼1)▶호평을 받았던 <수퍼 소닉2>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의 개봉으로 1위에서 2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주말 관객 수는 4월 8일 ~10일과 비교했을 때 약 40%가 하락했습니다.
주말 동안 (4월 15일~17일) 관객 수 6만 7207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20만 9596명을 돌파하였습니다.3. <모비우스> (▼1)▶<모비우스>는 개봉 후 한 주마다 한 단계씩 하락하여, 이번 주말에는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관객 수는 저번 주말보다 71%가 하락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4월 15일~17일) 관객 수 1만 8116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46만 2225명을 돌파하였습니다.▶ 씨네픽의 이번 주 95회 예측 이벤트는 4월 2주 차 박스오피스(순위) 예측입니다. 한 주동안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는데요.
씨네픽 참가자분들이 예측해주신 4월 2주 차 박스오피스 순위의 결과는 어땠는지 다 같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먼저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제공하는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의 실제 관람객 연령과 성별에 따른 관람 추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아주 근소한 차이로 비율을 더 차지하고 있고, 20대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주동안 씨네픽 이벤트의 참가자분들 중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주말 관객 스코어에 가장 근접한 예측치를 보인 건 건
20대 초반 남성(350,666명)과 30대 후반 남성(315,278명)이었습니다.
또한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주말 관객 수 스코어 예측의 정답자 비율은 (오차범위 +-10,000) 전체 참가자의 18%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주말 스코어 예측 이벤트에 참여한 20/30대 비율은 아래 표와 같습니다.
4. <스텔라> (-)
▶ 박스오피스 중 유일한 한국 영화이자, 유일하게 저번 주말과 순위가 동일한
영화 <스텔라>가 4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4월 15일~17일) 관객 수 3만 9275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5만 8783명을 돌파하였습니다.
5. <앰뷸런스> (▼2)
▶ 배우들의 몰입감 높이는 연기력과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에 호평을 받은
영화 <앰뷸런스>가 5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주말 동안 (4월 15일~17일) 관객 수 1만 1462명을 동원했으며, 총 누적 관객 수는 10만 8246명을 돌파하였습니다.
북미 주말 박스 오피스
▶ <Fantastic Beasts: The Secrets of Dumbledore>,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그리고 <Father Stu>가 주말 박스오피스에 새롭게 등극했습니다.
주말 동안(15일~17일) <Fantastic Beasts: The Secrets of Dumbledore> 북미 기준 주말 매출액 $43,000,000 (한화 약 528억)의 매출액을 달성했으며, 누적 매출액은 동일합니다.<북미 박스오피스 TOP 5> (2022년 4월 15일 ~ 2022년 4월 17일)1.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4300만 달러 (누적 4300만 달러)2. <수퍼 소닉2> 3000만 달러 (누적 1억 1961만 달러)3. <로스트 시티> 650만 달러 (누적 7857만 달러)4.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618만 달러 (누적 1769만 달러)5. <Father Stu> 570만 달러 (누적 802만 달러)...씨네픽의 4월 셋째 주 박스오피스 분석 콘텐츠는 여기까지입니다.이번 주도 건강한 한 주가 되기를 바라며씨네픽은 다음 주 월요일, 이 시간에 또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뵙겠습니다.감사합니다!-!씨네랩 에디터 Hizy
-
- 출입 금지된 곳이라서 낙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에는 기쿠지로가 정확히 마츠리 날 밤에 죽었고 그 후 소년 마사오는 천사들 귀신들 도깨비들(을 방불케할 정도로 이상하리만큼 친절한 어른들)과 한껏 즐거운 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패싸움 후 이상한 꿈을 많이 꾸는 마사오의 도깨비 꿈, 최고로 많이 다치고 해진 기쿠지로의 모습, 그리고 천사의 종을 열심히 울려댄 오후 덕에 더 굳게 믿었다.
영화를 다시 보니 기쿠지로는 굳이 그 마츠리가 아니라 어디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찻길 위에서 히치하이크하려다 뺑소니 차에 치었을 때든, 호텔 수영장에 빠졌을 때든, 싸움난 길거리(들)에서든, 훔친 택시에서 운전 미숙으로 연기가 났을 때든, 심지어 경륜으로 한탕하고 아가씨들 있는 술집에서 진탕 퍼마신 여행 첫날밤이든.
<탑건 : 매버릭>의 오프닝에서 마하 10을 넘긴 매버릭이 바로 그 사고에서 이미 죽었고, 나머지 2시간은 그의 아름다운 인생을 기리는 주마등이라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간편하고 모호한 표현을 끌어오지 않고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단호히 가정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처럼. <기쿠지로의 여름>도 초반부 새벽 풀밭에 세워진 택시와 거기서 사람이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장면이 너무 피안 같아서, 혹시 이전에나 이후에 기쿠지로가 이미 죽은 건 아닐지 계속 의심했다.
그러니까 이건 언제 어디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기쿠지로가 “너도 나와 같구나”를 말하더니 소년을 어떻게든 엄마에게로 또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애쓰는 얘기. 자기는 엄마를, 유년기를, 제대로 된 인생을 되찾는 데에 실패했지만 소년에겐 조금 이른 화해를 선물해주려고 하는 얘기. 그렇게 기쿠지로는 어른이 된다, 마사오를 아이로 만들어주기 위해.
그래서 이 영화가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일 거란 걸 새삼 느꼈다.
또 예전엔 마사오를 놀아주는 후반부가 다소 지루할 만큼 길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왜 마사오를 놀아주려 하는지는 알았지만 왜 자기들이 더 신난 것마냥 그렇게 필사적으로 분장까지 해가며 온몸으로 놀아주는지는 몰랐고, 그래서 더 그들이 명계에서 온 상상친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알 것 같다. 오프닝부터 여름 방학을 맞이한 마사오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아이는 축구교실을 친구들 집을 길거리를 찾아다니지만 모두 돌봐줄 가족이 있고 저만 혼자다. 엄마가 정말 돈을 벌러 갔다면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방학 중 하루도 못 빼고 가게에서 일할 것까진 없었을 텐데. 어쩌면 엄마가 새살림을 들었단 것까지 마사오는 어른스레 다 직감하고 있었을 테고…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된 엄마를 처음으로 보면서 애가 (불쌍하게도) 별로 안 놀라보였으니까.
놀아주는 어른들이 생겼기에 ‘무슨 애가 저렇게 울상이냐’던 마사오는 히힛 히힛 밝게도 잘 웃는 애가 된다. 애어른 아니고 진짜 애. 마사오가 달려갈 때마다 하늘에서 지켜봐준 누군가도 더이상 걱정되지 않을 만큼 해맑은 애.
왜 마사오가 얼마나 외로운지 예전에는 제대로 몰랐을까? 어떤 시기는 완전히 지나오고 나서야 그게 남들 눈에 어때 보이는지 알 수 있어서겠지.
그보다도 정말 미치겠는 건 기타노 타케시의 표정들.
피를 닦아주는 마사오에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처음 말하는 표정
요양원에 모셔둔 괴팍한 어머니를 창 너머로 바라보던 표정
소년 마사오를 그러니까 소년 기쿠지로를 보내주던 마지막 표정
(그러니까, 우두커니 선 기타노 타케시의 얼굴이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도 하나비에서도 소나티네에서도 왜 이렇게 사람을 울리는가. 더이상 마사오의 엄마가 아닌, 더이상 스기모토가 아닌 요시무라 사토코를 멀거니 바라볼 때에도. 사고 때문인 건 알지만 기타노 타케시의 파르르 규칙적으로 떨리는 왼쪽 눈마저도 마사오 대신 울기 위한 것 같다.)
현실의 타케시란 폭력적이고 자주 막말하고 틀린 구석도 있는 노인네란 거 알지만. 어떤 사람의 얼굴은 타인의 슬픔을 너무 깊이 너무 깊이 깊이 깊이 이해하고 있어서, 그걸 대신 짊어져주고 있어서 도무지 미워할 도리가 없다는 거..
바로 이런 얼굴
그리고 또 하나의 마음에 걸리는 얼굴 - 마사오가 올려다본 밤하늘 별자리에 비친, 옛사람 혹은 도깨비 정도로 분장한 기타노 타케시의 표정. 딱 세 컷 지나간 그 얼굴이 이전에도 이상하게 계속 오래 남았었는데, 전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이제는 좀 알겠다. 곱게 화장하고 자신만만하게 눈을 치뜨는 그 얼굴이 너무 자부심에 가득찬 희극인의 것이라 그랬나보다.
봐주는 사람 없어도 계속 뭘 새로 배우고 연습하고 선보이던 기쿠지로. 수영과 탭댄스와 저글링, 맹인 흉내와 직접 고안한 그 모든 놀이까지.
어쩌면 이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보는 뼛속까지 예능인(‘게닌’ 비트 타케시)의 자기충족적 실험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친숙하고 가장 순진하며 가장 날카로운 관객인 어린아이를 데려다놓고 한 극 무대에서의 실험. 그리고 밤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난 그 표정으로 유추해보건대 다케시와 눈에 익은 극단 출신 후배 배우들은 성공한 무대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마사오라는 아이 자체도 기타노가 자기 유년기에 보내는 연민의 상징물이나, 성숙으로의 관문보단 ‘곧 내(창작자)가 될 너(관객)’와의 합일을 위해 심어둔 것 아닌가? 싶지만. 그러니까 이 극이 그려내는 좋은 어른이니 성장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에 계속 집중하기보다도, 끝에는 ‘감독으로서의 나’를 우위에 두는 메타영화로 무게중심이 기울어질 법도 한데 끝까지 그래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결국 예술품이 다룬 무언가 중 어떤 게 가장 귀중한가를 따질 때, 그 무엇보다 시간에 구애받는 영화라는 매체는 어느 씬에 얼마 정도의 시간을 할애했는가로 일차적 판단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사오의 감정 묘사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 - 걸 넘어 오로지 그 감정을 매만져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마냥 애쓰는 - <기쿠지로의 여름>은 정말이지 모범적으로 다정한 성장 동화다.
물론 기쿠지로는 여자를 사고 팔고 사람을 갈취하고 패고 죽이는 일을 여전히 우습게 아는 전직 야쿠자일 테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선 기쿠지로가 저지르는 모든 폭력, 절도, 강탈, 사사로운 시비까지도 아이인 마사오를 저 멀리에 두고 진행된다. 기쿠지로는 언제나 마사오에게 “꼬마야 저기 가있어”라고 하는 대신 “꼬마야 여기서 기다려”라고 말하고 자기가 (카메라 프레임 바깥의) 폭력의 자리로 돌아가서 일을 해치우고 온다. 그것이 어른의 태도니까.
물론 마사오도 종종/영영 세상의 잔혹함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살면서 한 번도 안 겪어보는 게 무조건 나을 끔찍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 네가 그 일을 겪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하듯 든든한 보호자처럼 개입한다. 여행 초입 보호자 기쿠지로가 잠깐 취한 사이, 소아성애자 대머리 중년을 만나면서 중학생 형들보다 훨씬 위험한 폭력에 노출된다. 그때 영화는 현실은 이런 거야,라는 듯이 뻐기며 폭력의 정밀 묘사에 공들이지 않는다. 또한 폭력적 응징의 과정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보인다. 굳이 너의 상처를 훈장 삼을 일도 없고, 세상의 가장 어두운 쓰레기장이 얼마나 끔찍한지 입 아프게 말 얹을 것도 없단 듯한 태도.
사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대부분 무자비하게 생략/압축된 슬랩스틱 코미디의 결과물로서 소비될 뿐이다. 다케시는 아이에게 좋은 웃음을 선물하고 싶었던 어른-코미디언의 태도로서 그정도가 딱 적절하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러니 다시.. 예전에는 기쿠지로가 죽었다고, 단지 마사오를 안전히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유령처럼 남아있었던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기쿠지로를 마사오에게 딸려보낸 그 이웃집 친절한 여자는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나 괜히 걱정도 됐는데.
다시 생각해봤더니 혹시 기쿠지로가 죽었더라도 부인은 그냥 잘 살아갔을 것 같다. 그 사람도 기쿠지로가 어디서 어떻게 죽든 어쩔 수 없단 것쯤 알고 살았을 것이다. 세 번째 결혼이기도 했고… 남자들의 사라짐에 그냥 그렇구나 할 것 같은 어른.
그리고 그보다 먼저 기쿠지로는 안 죽은 것 같다. 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고 미련도 없어보여서 마치 귀신같고 이상한 움직임이 줄곧 나왔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기쿠지로다, 빠가야로 라고 해줬으니까.
건강하라고, ‘다음에 또’ 엄마 찾으러 가자고 말해줬으니까,
그리고 멀어지는 기쿠지로가 아니라 힘차게 달려가며 멀어지는 마사오가 막의 마무리를 장식했으니까.
귀신이고 도깨비고 천사고 꿈이고 뭐고 .. 그냥 안 죽었을 것 같다 그냥.
마사오에게 다 큰 마사오가, 기쿠지로에게 어린 기쿠지로가 함께 노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게 영화의 목적지였으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리고 삶은 결국, 출입금지인 풀밭에 연못에 밭에 해변에 마구 헤집고 들어가더라도 함께 있는 순간의 재미를 찾아내는 게 전부다.
-
-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독일] 사랑은 세상도 바꾼다.
작년 이맘때쯤, <퍼펙트 데이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나는 빔 벤더스의 다른 영화들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OTT로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많다는 점은 제약인 동시에, 그만큼 희귀한 경험이 되라는 생각은 뇌리에 박혀 이따금 나를 시네마테크로 향하게 했다. 커트 코베인이 가장 좋아했던 <파리, 텍사스>를 보고선 커트의 불꽃 같았던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대표작인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느꼈던 여운은 쉽게 잊어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빔 벤더스의 국적을 알지 못했다. 일본, 미국, 그리고 독일. 그의 영화 속의 다양한 나라들은 언제나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일상, 어떨 때는 회한, 그리고 어떨 때는 사랑. 그의 방대한 세계관 속에서 나라라는 경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다만 독일이라는 나라의 특수성과 그의 영화적 스타일을 비교해 본다면 그가 독일인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베를린 천사의 시>
인간을 돌보는 천사들이 베를린을 활보한다. 그들의 임무는 항상 사람들의 곁에서 기운을 불어주고 따뜻함을 전해주는 것. 기본적으로 인간은 천사를 볼 수 없고, 천사는 인간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천사 다니엘은 여느 날처럼 동료와 함께 임무를 수행 중이다.
과거의 상흔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속은 여전히 문드러진 베를린.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가난과 좌절,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혐오로 둘러싸인 그곳은 치유가 필요한 공간이자, 빔 벤더스가 국민으로서 포착해야만 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마치 천사의 모습처럼. 영상을 통해 독일인들을 지켜보고 위로해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인간의 상처가 그러하듯 언제나 똑같은 천사의 임무. 위태로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긍정의 말들을 속삭인다. 물론 인간은 천사를 볼 수 없음에도 용기를 얻을 수 있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천사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배고픔, 그리고 수명. 모든 것이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굉장히 슬픈 설정이다. 인간의 나약한 면을 극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나약함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라니. 눈앞에서 나가떨어지는 나약한 존재들을 끝까지 지켜볼 뿐이라니. 유일하게 아픔을 느끼는 방법은 임무를 저버리고 인간이 되는 것이다. 체스를 두던 사람이 체스 말이 되는 짓, 사랑은 그 어리석은 짓을 가능케 했다.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사랑을 찾아 인간으로 변한다. 영원할 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영원함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아픔도 기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즐겁기만 하다. 무엇보다 그 미친 짓을 가능케 한 사랑이 있으니.
엄숙한 천사의 세계와 역동의 인간 사회를 대조하듯. 이 영화에서 천사의 시점은 흑백, 인간의 시점은 컬러로 표현된다. 덕분에 더욱 극적인 기분을 느끼고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창작자는 보고 느낀 점을 쓰는 사람이다. 마치 천사가 인간 세상에 대한 정보를 노트에 기록하듯, 창작자도 본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세상과 거리가 더욱 벌어질 수도 있다. 창작과 시선에만 몰두한다면, 정작 타인의 고통과 환희에 공감할 수 없다면. 창작자는 우월감이라는 큰 착각의 늪에 빠진 채 세상을 배회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다.
빔 벤더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통해 열변한다. 창작자 본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함을. 그리고 그 껍질을 깨는 힘은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랑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베를린 천사의 시>를 포함한 그의 영화들에서 어떤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 영화의 오랜 기조인 표현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듯. 빔 벤더스의 영화에서 격양된 인물들은 지양되고 모든 사건은 담담하되, 여운은 그 어떤 표현보다도 강렬하다.
"영원히 살면서 천사로 순수하게 산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하지만 가끔 싫증을 느끼지. 영원한 시간 속에 떠다니느니 나의 중요함을 느끼고 싶어. 내 무게를 느끼고 현재를 느끼고 싶어. 부는 바람을 느끼며 ‘지금’이란 말을 하고 싶어. 지금... 지금..." -다니엘
-
- 스타워즈 영화 랭킹 Star Wars Film Ranked
조지 루카스가 구상한 [스타워즈 9부작] 혹은 [스카이워커 사가]은 한마디로 '다스 베이더의 비극'라는 거대한 서사시다. 그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파토스(Pathos,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을 자아내기 때문에 전설의 위치에 올랐다.
마블과 DC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르물이 그렇듯이 [스타워즈] 역시 개연성을 지닌 영화는 아니다. 지난 42년간 [스타워즈]는 MCU처럼 독창적인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무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이전에 팬들에 의해 대중문화 최초로 ‘확장세계관(EU)’를 정립했다. 그런데 [시퀄 3부작]은 [스타워즈] 특유의 ‘설정 놀음’을 간과했다. 특히 캐슬린 케네디 루카스필름 대표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그랬다.
◆평가 기준
1순위 시리즈로써 의의
2순위 공유 세계관 기여도
3순위 단일 작품으로써 완성도
#11 : 에피소드 9: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Episode IX: The Rise Of Skywalker, 2019)
디즈니는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결’을 홍보했지만, 9편의 실제 임무는 ‘브랜드 관리’다. J.J. 에이브람스의 최우선 과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팬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던져놓은 7편의 떡밥을 회수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따지고 보면 라이언 존슨이 8편에서 7편의 떡밥을 싹 무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제작을 맡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팬 서비스’를 핑계 삼아 8편의 아이디어를 깡그리 쓰레기통에 버린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편을 부정하는 [시퀄 3부작]은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팬들의 반응만 살피며 돌려 막기 하다 보니까 캐릭터, 설정, 세계관, 스토리 전부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거기다 캐슬린 케네디가 꺼내 든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 자신이 2014년 4월 25일에 폐기한 레전드에서 가져왔다. 캐슬린 케네디의 '빈곤한 상상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능키)' 되고, 레이는 '메리 수(천하무적)' 화 되어 시리즈 전통을 더더욱 망가뜨린다. 이게 다 라제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부 다 수습하려고 노력하면서, 9편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시퀄 3부작 내내 기존 시리즈에 대한 지나친 오마주를 하면서 전통 파괴를 일삼는 모순을 매번 일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통 [시퀄 3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 편 모두 제각각 따라 놀며 [시퀄 3부작]의 정체성과 주제를 전부 잃어버렸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한 상상력과 방향성의 부재다. 이것이 디즈니가 '새로운 스타워즈'를 내세우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을 의존하는 [시퀄 3부작]의 한계다. 고로 창의적인 비전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진이 [스타워즈] 시리즈 자체를 오독하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실로 안타깝다.
#10 : 에피소드 8 : 라스트 제다이 (EPISODE VIII - THE LAST JEDI, 2017)
당연하게도 시리즈물은 단 한 편의 완성도로 평가할 수 없다. 라이언 존슨은 우리가 익히 알던 스타워즈의 영웅 서사를 해체시킨다. 영화 전체에 걸쳐 낡은 스타워즈를 새롭게 갈아엎지만, 5편 [제국의 역습]처럼 하는 일마다 죄다 실패하는 통에 다 보고 나면 허무하다. 왜 [제국의 역습]을 레퍼런스한 [라스트 제다이]는 감흥이 적을까? 비극은 공포와 연민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제국의 역습]은 '부살(父殺·Patricide)' 모티브를 차용해 루크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지만, [라스트 제다이]의 성장 자체가 없는 레이에게 어떻게 연민과 공포를 가지겠는가?
라이언 존슨이 전통에만 기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미래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건 좋다. 해체하기에 앞서서 우선 시리즈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했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과거와는 선을 긋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덧붙여서 차라리 [라스트 제다이]를 첫 번째 영화로 내세워 [시퀄 3부작]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되었다면, 훨씬 순조로웠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8편은 J.J. 에이브람스를 포함한 스타워즈 팬들에게는 40년 동안 쌓아왔던 공유 세계관에 대한 '반달리즘'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 존슨은 제다이와 시스로 구분 짓지 말자고 계속 설득하지만, 정작 '저항군 VS 퍼스트 오더' 선악구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또, 영화 내내 탈영웅 서사를 부르짖지만, 결국 시련과 고초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완전무결한 레이의 영웅 서사를 보면 자기모순처럼 읽힌다. 거기다 서스펜스에 약한 라이언 존슨의 약점이 겹치면서 저항군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지만,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 긴박감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면 그는 미스터리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전부 라이언 존슨이 별다른 설득 없이 시리즈의 요소들을 본인 입맛대로 취사선택하고 변용한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자크 데리다는 흔히 '선과 악' 같은 이항대립 체계를 종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 가르침대로 라이언 존슨 역시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사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의 경계, 울타리를 이야기할 뿐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을 해체하되 이항대립 그 자체가 종결될 수는 없다고 봤다. 왜냐하면 성경을 포함한 서구인의 사고체계 전부를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언 존슨도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점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에는 괜찮은 완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그 즉시 기록 말살 형에 처해진다. 이제 루카스 필름 내부에서조차 ‘흑역사’로 공인된 셈이다. 그러나 조만간 재평가 받을지도 모른다. 현재 라이언 존슨이 집필하는 구 공화국 시점의 신규 3부작(10,11,12편)이 2022년 12월, 2024년 12월, 2026년 12월 개봉 예정으로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케빈 파이기가 제작하는 스타워즈 작품 역시 2022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어 동일한 프로젝트로 예상된다.
#9 :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 (EPISODE VII - THE FORCE AWAKENS, 2015)
첨 볼 때는 클래식 느낌이 나서 반가웠다. 다시 보니 [깨어난 포스]는 [에피소드 4·5]을 리뉴얼했을 뿐 아니라 개봉 당시 과대평가보다 실제 완성도가 떨어지고, 의미 없는 서사가 많았다.
물론 당시에는 이러한 구멍들이 차기작을 위한 떡밥으로 간주하고 넘어갔었는데, 라이언 존슨의 8편 [라스트 제다이]이 떡밥 자체를 무시하고, 세계관 자체를 붕괴시키는 바람에 에이브람스가 직접 연출한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망가진 세계관을 수습하고, 설정 구멍을 막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문득 왜 에이브람스가 ‘떡밥의 제왕’이 되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쌍제이 특유의 떡밥 투척’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다, 맥거핀(떡밥)을 많이 설정해서 재빨리 흥미를 유발하고, 연속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돌려 막기일 뿐이다. 7편과 9편에서 쌍제이의 단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새로운 맥거핀이 파생될 때마다 또 다른 플롯 포인트가 생긴다는 점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긴 하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전진된 게 없다. 게다가 쌍제이가 캐릭터들조차 도구적으로 정보와 아이템을 주는 용도로 쓴다. 아마 데이지 리들리조차도 레이가 어떤 역할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3편 내내 자꾸 설정이 바뀌니까 말이다. 핀과 포 다메론도 마찬가지다.
디즈니가 안정된 돈벌이를 위해 ‘추억 팔이‘에 안주한 결과, 시리즈로의 신규 관객 유입에 실패한다. 진부한 [시퀄 3부작]으로 스타워즈를 처음 접한 세대들에게 "개연성도 부족하고 재미없는" 시리즈로 받아질 수밖에 없다. '영혼 없는' 팬 무비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시퀄과 프리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깨어난 포스]에서 레이가 모아 온 고물을 수거하는 배급소 주인 '운카 풀럿'은 뚱뚱한 구두쇠 정도로 단편적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부품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와토'는 어떤가? 이방인 '콰이곤 진'을 경계하지만 장사치답게 흥정을 건다. 자신의 노예인 아나킨의 포드 레이싱 재능을 인정해서 포드를 제공해준 적이 있으며, 경주 도박을 하기도 한다. 또, 자바 더 헛을 두려워하고, 세불바가 아나킨에게 해코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루카스는 '단역'이라고 해도 그 전후 배경와 상호작용을 미리 설정해둔다.
그렇기에 루카스의 형편없는 연출력에도 불구에도 [스타워즈]가 확장세계관의 선구자로 매김 할 수 있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조지 루카스 세계관과 캐릭터를 설정할때 입체적 사고로 그린다. 거대한 세계관을 창조하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언뜻 별 관계가 없는 대상과 우리는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표시되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와 관습이 있지 않은가? 제임스 카메론도 조지 루카스처럼 인류학적·미학적 맥락을 철저히 따진다. 그는 [아바타]를 제작할 때 나비족 언어와 종교, 규범, 문화, 지리까지 미리 설정한 다음에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6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은하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신 은하 공화국이 어떤 과정으로 붕괴되었는지 7편 [깨어난 포스]가 전혀 설명하지 않아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즉, 정체불명의 퍼스트 오더가 왜 위협적인지를 관객 입장에서 와닿지 않기에 [시퀄 3부작] 내내 ‘긴장감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부실한 세계관 구현이 2020년 현재 [시퀄 3부작] 관련 작품보다 이전 [프리퀄 3부작] 혹은 [클래식 3부작]에 기반한 미디어 믹스 및 파생상품이 더 많은 이유다.
#8 :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SOLO: A STAR WARS STORY, 2018)
크리스 밀러 & 필 로드의 급작스러운 해고로 말미암아 캐슬린 케네디가 싹 다 갈아엎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간판을 떼고 보면 괜찮은 하이스트 무비다. 다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론 하워드가 산으로 갈 뻔한 작품을 겨우겨우 수습한 티가 난다. 예를 들면, 항공권이 없는 한은 제국군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지지만, 정작 제국군 입대 담당관은 그에게 성을 붙여준다. 이렇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베테랑 론 하워드가 촉박한 제작 기한 내에서 균열을 최소화했다.
해리슨 포드를 닮지 않은 엘든 이렌리치는 차분하게 연기를 잘했고, 까칠한 드로이드 L3-37과 도널드 글로버의 랜도 칼리시안은 씬 스틸러다. 그럭저럭 즐길만하지만,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어서 그런지 속 시원한 기원담을 들려주지 않는다. 꽁꽁 싸맨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다 보니 자꾸만 여타의 SF 영화들이 연상될 뿐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지 못한다. 문제작 [라스트 제다이]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프랜차이즈 최초로 적자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이 사단의 원흉인 캐슬린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한 솔로의 속편 계획과 [오비완 케노비], [보바 펫]의 앤솔로지 시리즈를 취소한다.
그러나 [더 만달로리안]에 앞서 시리즈 최초로 '암시장의 밀수와 범죄'를 조명한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자바 더 핫이 이끄는 핫 카르텔, 코렐리아 행성에서 제국 전함이 건조되는 장면, 우주 공항의 묘사, 코악시움 광산의 묘사, 츄바카와 우키 종족의 묘사 등 [시퀄 3부작]이 등한시했던 세계관 구현에 노력했다.
#7 :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 (EPISODE I - THE PHANTOM MENACE, 1999)
[프리퀄 3부작]의 밑바탕을 깔기 위한 거대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포드 레이스 장면과 다스 몰과의 검투신만 보거나 [보이지 않는 위험]을 통째로 건너뛰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위험]의 세계관 확장이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섰다. 살다 살다 [프리퀄 3부작]을 응원하는 날이 오다니
무역협상, 분리주의 연합 등 진지한 정치적 담론, 자자 빙크스의 고통스러운 CG 슬랩스틱, 부재한 주인공, 처참한 대사, 느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3부작과는 확연히 차별화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바로 로마 공화정이 제국화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해 자신과 주변인이 파멸로 치닫는 셰익스피어리언 비극을 시리즈에 훌륭하게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또, [클래식 3부작] 과는 이질적이었던 디자인이 클래식의 변영에 지나지 않는 진부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는 과감한 도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끝으로 미디클로리언을 통해 '기(氣)'에서 착안한 포스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 개념으로 노예 신분인 아나킨을 '선택받은 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8편 이전부터 누구나 포스를 가질 수 있다는 '포스 에브리웨어' 설정은 이미 존재했었다.
#6 :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EPISODE II - ATTACK OF THE CLONES, 2002)
[클론의 습격]은 조지 루카스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와 형편없는 연출,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발성 문제가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로맨스 영화'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100% 디지털 촬영으로 완성된 첫 블록버스터이며, 이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 산업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다와 두쿠 백작의 라이트세이버 결투, 제다이 기사단와 분리주의 연합의 드로이드 간 전투 등으로 액션을 강화했으며, 의회를 장악한 팰버틴 의장이 무역 연합에 대항하고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은하 공화국을 방어할 목적으로 비상 권한을 부여받는다거나 보바 펫과 클론 트루퍼를 결부 짓는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루카스의 탁월한 기획력에 비해([시스의 복수]을 위해 아껴둔) 드라마의 부재를 막을 캐릭터 묘사에 실패하면서 시리즈 사상 가장 지루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조지 루카스가 프리퀄을 만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인 '클론 전쟁'의 개전만을 알린다는 점이다. 추후 전쟁의 진행 상황은 [클론 전쟁(2003/2008)]로 대체됐다. 있으나 마나 한 ‘제다이의 결혼 금지 규율’ 따위보다 '클론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뒀다면, [에피소드 1·2]가 이리 허무하게 낭비되지 않았을 터,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2편의 숨은 장점은 비극의 단초인 ‘하마르티아(Hamartia)’를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지만,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결함으로, 아나킨은 금혼 계율을 어기고 파드메와 결혼하고, 제다이답지 않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아나킨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자동차의 결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2편의 빌드업이 있었기에 3편에서 극적으로 반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EPISODE VI - RETURN OF THE JEDI, 1983)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처럼,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일은 어렵다. [제다이의 귀환]은 전편 [제국의 역습]이 근사하게 던져놓았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지금까지 끌어온 시리즈의 결말을 내야 하는 힘겨운 미션이 남아있었다. 그럼 [스타워즈]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동일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어떻게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다이의 귀환]라는 제목은 아나킨이 메피스토펠레스(팰 버틴)을 원자로에 던져버리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걸 의미한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들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부자간의 화해가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스 비극과 [스타워즈]의 차이점이 발견한다. 그리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론에 의존하지만, 팰버틴에게 끌려다니던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타락한 영웅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포스의 균형'이다.
더욱이 6편은 분명히 4편 [새로운 희망]의 아이디어를 재탕하고, 인물 간의 갈등구조가 할리우드 영화답게 안전하다.
그것이야말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게 [배트맨 비긴즈]을 참고하라는 교훈으로 받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제다이의 귀환]는 클래식 3부작이 남긴 수많은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무용담을 장중하고 우아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루크와 레아를 중심으로 레전드 확장 세계관(EU)이 진행되고, 팬들로 하여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당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뒤에 팬들의 소원은 마침내 이뤄진다.
#4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
드디어 디즈니 스타워즈가 재탕을 멈추고, [스타워즈]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저항군 특공대들의 희생을 다룬다. 원래 [스타워즈] 자체가 제2차 대전 전쟁 영화들에게서 착안한 작품이었다. 은하제국 군복은 나치 독일과 매우 유사하며, 저항군은 연합 군을 연상시키지 않은가? [로그 원]은 한발 더 나아가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다시 말해 스타워즈 특유의 유치한 가족영화의 틀을 버리고, 본래 스타워즈 세계관에 지니고 있던 2차 대전 특공대를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과 연결성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가렛 에드워즈의 장단점이 다 발휘됐다. 무미건조한 캐릭터 구축과 초반부의 산만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스펙터클하게 규모를 살리는 연출이나 사실성을 강조한 서사구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요즘 미드 [만달로디안]가 호평을 받는 이유는 [로그 원]과 동일하다. 기존 스타워즈 설정을 존중하면서도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참신한 시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성공 비결이다.
#3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EPISODE III - REVENGE OF THE SITH, 2005)
조지 루카스의 여전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선다. 아나킨은 한 개인이 막을 수 없는 불행이 연달아 닥치며 타락하게 되고, 공화국 역시 멸망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게 한다. [프리퀄 3부작]을 통해 ‘제다이 vs 시스’로 세계관이 확장하게 되면서 클래식 3부작의 ‘부자간의 골육상잔'은 수 천 년간 이어진 제다이와 시스의 대립 중 하나로 재정립한다.
시스 로드인 황제가 제다이 기사단의 '선택받은 자'를 회유하며 시스의 복수를 완성한다. 스타워즈 팬들은 아니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는 결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창시자가 새롭게 공개한 사실들에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승과 제자의 처절한 혈투는 물론이고, 요다가 황제 암살에 실패하면서 은거한다거나 오더 66에 의한 제다이 기사단이 몰락하고, C3P3와 R2D2가 기억을 잃는 과정, 오비완이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요다에게 전수해준다거나 파드메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들쑥날쑥한 [프리퀄 3부작]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면서도 [클래식 3부작]에서 빠진 빈틈을 세심하게 메웠다.
또, 시리즈 최초의 배드 엔딩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세이버가 누군가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서사와 액션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유일한 스타워즈 작품이며, 밝고 유쾌한 [클래식 3부작]과는 180도 다른 어둡고 진지한 [프리퀄 3부작]을 성공적으로 완결 지었다.
만약 ‘현자 다스 플레이거스의 비극’이 없었다면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의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될 만큼 확장 세계관과 캐릭터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2 :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EPISODE IV - A NEW HOPE, 1977)
대중문화를 영원히 바꾼 영화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정의 내리고, '콘텐츠 산업'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꿔, 부가상품을 대중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산업 역시 [스타워즈]를 기점으로 현실의 영역에서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내에서 [스타워즈]가 유치하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원래 조지 루카스가 어릴 적 즐겨본 코믹스 [플래시 고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동양의 '기(氣)' 개념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포스 등의 철학적 우화, 전쟁영화, 갱스터, 호러, 뮤지컬, 서부극의 요소를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이자 밝고 경쾌한 어드벤처 SF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복합장르 전략은 이후 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스타워즈]는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칼로 총알(빔)을 막거나 우주가 배경인데 18세기 라인 배틀을 펼치는 광경이 의아할 것이다. 이는 시대와 문화권에 구애받지 않는 원형 신화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편부터 '다스 베이더'를 그리스 비극처럼 그리면서 시리즈로써 환골탈태한다. 이때부터 할리우드 극작술에 '원형 신화'가 도입된다.
#1 :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EPISODE V - THE EMPIRE STRIKES BACK, 1980)
루소 형제의 말마따나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이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한 용기는 [제국의 역습]에서 배웠다. 당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도대체 뭘 본 거지?" 싶었다고 한다. 악에게 패배한 주인공, 어긋난 로맨스, 새드 엔딩은 상업영화의 오래된 금기들이었다.
전편 [새로운 희망]이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결성을 갖춘 반면에 [제국의 역습]은 어떻게 이야기를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선례로 여전히 남아있다. 스타워즈 9부작의 밑그림은 여기서 출발했다. 한편 팬들은 [새로운 희망]과 [제국의 역습] 사이의 설정 구멍을 메우며 [확장 세계관 (EU)]를 만들고 놀았다. 바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기원’인 것이다, 이것이 ‘스타워즈’를 신화로 만들었다.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輝·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영혼아이 TER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베킷> 로맨스, 액션, 정치 스릴러의 무색무취한 만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 애인 '에이프릴(알리시아 비칸데르)'과 함께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관광객 '베킷(존 데이비드 워싱턴)'. 그는 숙소로 이동하던 중 졸음운전으로 인해 차가 전복되어 추락하는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애인과는 달리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비탄에 잠긴 채 사건 경위에 대한 조사를 받고, 그리스 경찰에게 차가 추락한 주택 안에서 한 남자아이를 봤다고 진술한다. 그러자 친절하던 그리스 경찰들은 사건 현장을 찾은 그를 향해 느닷없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고, 베킷은 공격을 피해 도망친다. 아테네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베킷은 나라를 가로지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그는 그리스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의 거미줄에 빠져든다.
13일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베킷>은 평범한 미국인 베켓이 갑작스럽게 그리스 경찰에게 쫓기는 추격전을 크게 세 개의 플롯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다이아키>와 <안토니아>로 이름을 알린 페르디난도 시토 필로마리노 감독은 우선 베킷과 에이프릴의 로맨스로 문을 열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처럼 갑작스럽게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과 액션으로 노선을 선회한다. 이후 베킷이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대한 단서를 맞춰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두 개의 플롯을 포괄하는 그리스 경제위기와 관련된 국내외적 정치 스릴러의 면모를 선보이고,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를 연상시키며 마무리된다.
문제는 <베킷>이 선보이는 세 개의 이야기가 전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다는 점이다. 각각의 플롯은 그 자체의 매력이 부재하며, 상호 간의 연결고리도 느슨하다. 즉, <베킷>은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려 했는지 의도는 어렴풋이 보일지언정, 손으로 만져지지는 않는 영화다.
먼저 도입부를 장식하는 베킷의 사랑 이야기를 보자. 상대적으로 보다 주관적 감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배우 간의 호흡은 차치하더라도, 영화는 좀처럼 베킷의 심정에 빠져들어갈 계기나 동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 커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두 남녀가 그리스에 여행을 왔고, 시위로 혼란스러운 아테네를 떠나 비교적 한적한 관광지를 돌아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낸 베킷이 죄책감에 매우 고통스럽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 정도다. 영화는 이들의 현재와 상황을 제시할 뿐,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피 흘리는 와중에도 베킷을 끊임없이 뛰고 구르도록 만드는 동기 중 하나인 죄책감 혹은 상실감은 마치 타인의 부고 기사를 읽는 듯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만약 둘이 어떻게 만났고, 어떤 추억을 공유했으며,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강한 지를 알려줄 장면이 짧게나마 있었다면 이러한 감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위의 내용만 있어도 베킷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영화의 구조상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베킷이 유일한만큼, 주인공에게 공감할 여지를 주지 않는 로맨스는 도입부로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베킷과 그리스 경찰 간의 추격전 역시 기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일단 긴장감이 없다. 사실 한 남자가 갑자기 표적이 되고, 정신없이 쫓기는 와중에 자신을 죄어오는 올가미를 하나둘씩 알아챈다는 전개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클리셰다. 그렇기에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라는 상황만으로는 더 이상 서스펜스를 자아낼 수 없다.
따라서 <베킷>과 같은 영화는 주인공을 다양한 변칙적인 상황 속에 던져 놓아야 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베킷>은 잘못된 선택을 한다. 경찰에 의해 곤경에 처한 베킷이 그리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주하고, 이에 경찰들은 현지인들을 위협해 얻은 정보에 기반해 그를 다시 추격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암석으로 가득한 그리스의 산을 비롯해 좁은 공간 그 자체로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집 내부나 기차 칸 같은 다양한 환경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도 이들을 베켓의 추격전에 유의미한 변수로 작용시키지는 못한다. 단지 그리스어 대사에 해당하는 자막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불안함과 초조함을 가중시키는 재치만이 잠시 빛날 뿐이다.
또한 중간중간 삽입되는 액션 역시 흥미를 돋우는 데 실패한다.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액션 시퀀스는 신선하지 않다. 단적인 예로 주차장 건물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맥스는 시간대만 낮으로 다를 뿐,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처음 등장하는 주차장 장면과 유사하다. 유사한 주제의식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본 얼티메이텀>을 연상시키도 한다. 액션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베킷의 능력 역시 몰입을 방해한다.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거나 건물 3층 높이에서 보어내려도 좀처럼 지치지 않고 고장 나지 않는, 슈퍼 히어로에 필적하는 그의 내구성과 신체적 능력은 영화의 개연성을 과하게 파괴한다. 특히 그리스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액션은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베킷>은 이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유렵연합, 미국이 뒤얽힌 정치 스릴러를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 못했다. 영화는 그리스에서 급진좌파연합(시리자, SYRIZA)이 정권을 잡고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를 시행한 2015년 전후를 배경으로 삼은 듯 보인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세 번째 구제금융의 대가로 유럽연합에서 제안한 긴축재정 시행을 두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급진좌파연합은 그리스의 경제 주권을 침탈한다는 이유로 긴축안을 거부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를 경험한 후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진 미국은 그리스가 유럽 연합 대신 러시아 혹은 중국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나토의 방어체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를 걱정 중이었다.
문제는 영화의 불친절함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의 국내외 정치적 배경을 좀처럼 알아챌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철저히 베킷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그 결과 그리스의 정치 상황도 그저 외국인이자 관광객의 시점에서 묘사될 뿐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스,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가 얽히고설킨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미국 대사관에 걸린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에 모두 함축되어 암시되는 것이 그 예시다. 베킷이 그리스 정치와 관련된 정보를 미국 대사관과 좌익 활동가로부터 각각 입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베킷이 발견한 어린 남자아이의 중요성을 정반대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해석한 정보는 필연적으로 상충될 수밖에 없고, 이는 베킷과 시청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래서 그리스의 현실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경우, 영화의 흐름과 전개를 쫓는 것도 녹록지 않다.
그러다 보니 <베킷>의 주제의식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화는 미국 대사관의 도움에 실낱같은 희망을 거는 베킷과 자국민 보호라는 의무를 저버린 대사관 직원을 대비시키면서 국민의 보호라는 국가의 윤리적 의무와 현실적 이익의 충돌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이 작중 가상의 그리스 우익 정권을 미국 정부가 돕고, 미국 대사관 측에서 교통사고로부터 그리스 정치계를 뒤흔들 단서를 발견한 평범한 미국 시민을 제거하려는 동기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자국의 이익과 반대로 행동하며 미국을 공격하는 캐릭터인 베킷,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의 변화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신뢰를 저버릴 때 초래할 나비효과를 상징한다. 잘못된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으로 인해 국가가 국민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메시지는 분명 의미심장하다. 단지 명료하게 전해지지 않을 뿐이다.
<베킷>의 실패는 영화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연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모습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베킷보다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테넷>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물론 두 작품 모두 전반적으로 건조하고 침착한 톤을 유지하며, 주인공을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 빠트린다는 흐름 상의 유사점이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킷이 <테넷> 속 '주도자'로 보인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베킷이라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극의 완성도가 높지 못했기에 영화의 얼굴인 주연 배우에게 다른 얼굴이 온전히 덧입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킷 혼자 나오면 무색무취하던 영화가 에이프릴과 레나가 등장할 때 잠시 생동감을 되찾는 것만 보더라도 <베킷>이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Poor, 형편없음)
설렘 없는 로맨스, 지루한 추격전, 이해가 되지 않는 정치극이 빚어낸 총체적 난국
-
- 다름을 바라보는 이해의 시선, 그 끝은 ‘사랑’
레즈비언 딸, 그의 동성 연인과 함께 살게 된 50대 중년 여성의 소리 없는 외침이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딸에 대하여>는 성소수자와 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치매 노인 등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들에게 시선이 옮겨지고, 이야기는 확장된다. 혐오와 배제의 세상 속에서 이 중년 여성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엄마(오민애)는 속이 뒤집힌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해 교수는 아니지만 대학 강사로 밥 벌어먹는 줄 알았던 하나밖에 없는 딸 그린(임세미)의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살던 집을 빼야 하니 돈 좀 구할 수 있냐는 이야기였다. 애지중지 키운 딸의 미래를 위해 대출을 알아봤지만 쉽지 않다. 엄마는 하는 수 없이 그린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딸과 동거 중인 동성 연인 레인(하윤경)도 함께 산다는 걸 허락한다는 말이다. 맞다. 딸은 레즈비언이다. 성소수자인 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굴뚝 같은 엄마지만 세상사 뜻대로 되는 게 어디있나. 그녀의 직장인 요양 보호 시설도 마찬가지다. 담당 치매 노인 제희(허진)를 잘 보살피기 위해 노력하지만, 시설 관리자는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레인에게 동료 강사의 부당해고에 분노하며 생계는 뒷전이고 투쟁에 앞장서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에 대하여>는 너무나 가까워서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딸을 새롭게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말을 뱉기보다 삼키는 엄마의 침묵은 생각의 여지를 만들고, 그녀의 시선은 이해라는 물꼬를 틔운다.
제목 그대로 부당한 일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게 미덕이라 여기는 엄마는 자신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딸에게 이렇다 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딸의 가시 박힌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다. 대학교 측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말에 그린은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 생각은 안 해?”라는 말로 딱 잘라 말한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딸의 당당함에 엄마는 한숨과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이런 부딪힘은 오히려 자신과 다른 딸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 레인과 동거를 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이들에게 향한 시선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첫 발걸음이 된다.
엄마의 행동은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철저하게 교육된 바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기인하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혼자서 살아가기엔 힘들고 벅찬 사회의 가장자리에 사는 걸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구나 어떤 대상이든 사랑은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지정한 부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그 제도 밖에 머물러야 하는 딸의 외로운 미래가 그녀의 눈엔 선하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딸과 레인의 관계를 ‘소꿉장난 같은 거’라고 표현한다.
극 중 엄마의 얼굴에 드리워진 피곤함은 딸을 향한 걱정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든든한 노후 보험쯤으로 생각했던 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거라는 공포감도 한몫한다. 이 불안의 시작은 과거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이름을 건 재단까지 설립했지만 가족 없이 늙음과 치매에 주저앉아 요양 병원 신세를 지는 제희다. 엄마는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지나칠 정도로 제희를 돌본다. 어찌 보면 그녀의 노력은 자신이 제희를 대하는 것만큼 사람들도 자신에게 그래 주길 바라는 보상 심리가 담겨있다. 이는 자신 또한 제희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공포를 잊기 위한 자기 합리화처럼 보인다.
조금 특별한 모녀간의 이야기는 뒤늦게 찾아온 엄마의 성장통 이후 혼자가 되는 게 무섭고 벌써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 힘도 능력도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들에게 놓인 현실적 이야기로 확장한다.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삶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불안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역설, 사회 제도 반대편에 놓인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감독은 여기서 더 나아가 가족, 혈연 간에서 벗어나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연대 중요성도 설파한다. (후반부 주요 네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영화는 한 개인의 고민으로 시작해 사회적 고민의 영역까지 생각하게 만들고 관객을 그 건강한 고민에 빠뜨린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이미랑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 덕분이다. 김혜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일인칭 화자(엄마)의 내면 독백으로 구성된 부분을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할 것인가다. 텍스트로 표현된 이 부분을 감독은 엄마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행동, 이를 담아낸 카메라 구도와 조명 등으로 텍스트를 오롯이 영상으로 변환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엄마와 레인이 식탁에서 대화로 포장한 기싸움을 벌이는 장면인데, 미세한 카메라 앵글로서 누가 이 대화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표현한다. 봉테일 저리가라다.
이런 감독의 의도가 빛을 발하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오민애, 허진, 임세미, 하윤경 등 주요 인물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느낌이다. 큰 사건보단 순간의 감정 동요에 따른 미세한 차이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오민애가 있다.
그녀는 1부터 10까지의 정수가 아닌 소수점 차이를 감정으로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 집중하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의 디테일을 잡아가며 엄마가 가진 복잡다단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동안 다수의 작품에서 오민애 배우의 연기를 봐왔던 관객들도 새로움을 느낄 정도. 심지어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에 대항하는 딸 그린의 완고함과 다른 엄마만의 완고함과 뚝심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이 밖에도 강애심, 이창훈, 장선 등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수려하다.
<딸에 대하여>는 대상과 시선에 따라 ‘성소수자에 대하여’, ‘치매 노인에 대하여’, ‘중년 여성에 대하여’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한 개인과 가족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 셈. 부디 이 작품을 통해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이해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그 작은 노력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사랑의 씨앗이 될 거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말: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민애 배우의 마지막 엷은 미소는 내년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잊히지 않을 듯하다. 따뜻하고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찬란
평점: 4.0 / 5.0
한줄평: 다름을 바라보는 이해의 시선, 그 끝은 ‘사랑’
-
-
- 「킹스맨 퍼스트」 100% 실제역사 기록으로 보는 영화리뷰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영화리뷰 with 역사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리뷰 | 킹스맨 요약 리뷰 |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King's Man, 2021) 영화리뷰 - 실제 역사와 비교
+셰익스피어, 영국 군대, 왕의 남자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영화정보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
-
- 넷플릭스 <어웨이크> 공식 예고편
알 수 없는 현상이 전 세계를 덮친다.
모든 전자 기기는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인류는 잠들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세상.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전직 군인 질(지나 로드리게스)에게 이 현상을 치유할 열쇠가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 열쇠일지 모른다.
-
- 영화 <와일드 구스 레이크> 메인 예고편
오토바이 갱단 리더 저우 저농은 실수로 경찰관을 살해한 뒤 현상금이 붙어 경찰과 폭력배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자신을 돕기 위해 왔다는 여성을 만난 뒤 휴양지 '와일드 구스 레이크'에 몸을 숨기고, 쫓기는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