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8-30 19:33:3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영화 <한국이 싫어서>
SYNOPSIS.
“행복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계나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좇아 떠나기로 했다.
POINT.
✔ 통찰력 있는 작가 장강명의 동명 소설 원작이자,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한여름의 판타지아>,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등 결이 뚜렷한 감성을 가진 장건재 감독 작품
✔ 믿고 보는 배우 고아성을 비롯해, 하나하나 빛나는 배우들이 현실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영화
✔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취업 준비를 차곡차곡 거쳐 직장인이 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각자의 마음을 돌아보기 좋은 작품, 누군가와 같이 보고 나와서 함께 대화하면서 더욱 풍성해질 영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남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정말이지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
출퇴근 시간 9호선에 오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9호선을 타면 좀더 빨라도 다른 노선을 이용하던 시절을 지나, 이사 갈 동네를 고를 때 9호선 라인을 피해 이사를 했음에도, 어쩌다 출퇴근 시간에 9호선을 이용해야 하는 날은 마음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내가 사방이 탁 트이고 초록빛인 시골에서 자라서 더 그런 건가? 남들은 정말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살아지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누구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힘들기야 하지만, 그걸 그냥 일시적인 몸의 힘듦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영혼 어딘가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나뉜다는 걸. 그리고 이런 기준선이 9호선 말고도 너무 많다. 계나가 코트 안에 꼬박꼬박 받쳐 입는 경량 패딩이 한국에서 잘 팔리는 이유이자 원작에서 "농담이 아니라 매일 동상의 위기를 겪었다"고 언급되는 이 극단적 날씨, 과장님이 마음대로 골라버린 동태찌개가 자연스럽게 4인분 주문되어도 따라야만 하는 것, 매뉴얼에 따라 업체를 선정할 것이냐 작년 업체를 무조건 고르라는 상사의 말을 들어야만 하나 싶은 순간...
이 모든 기준선에서 우리는 나뉜다. 누군가에게는 그럭저럭 눈 딱 감고 넘길 만한 것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것이 된다. 후자의 사람들은 한번쯤 눈을 돌린다. 트랙에서 벗어난 삶을 그려본다. 결국 수많은 기준선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제때 입시를 치르고 제때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제때 결혼을 하는 삶, 거기서 어긋나면 나이에 따라 결이 다른 말을 듣게 되는 삶, 그 정해진 트랙 밖의 삶을 상상하고 실현에 옮긴 적이 있는지 아닌지.
<한국이 싫어서>는 얼핏 한국에서의 삶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계나(고아성 분)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겪는 실낱 같은 기준선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그는 떠난다. 뉴질랜드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사실 계나가 한국을 떠나게 만든 이유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계나와 같은 선택은 한국에서 크게 지지받지 못한다. 계나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만하면 책임감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분) 또한, 한국에서 정해진 트랙을 차곡차곡 쌓아 왔고 앞으로도 쌓아갈 시간의 안정감을 이야기하며 계나를 말리려 한다. 계나는 자신을 무슨 외국 병 걸린 취급하냐며, 자신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명과 같은 사람의 시각에서 계나의 선택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계나가 내린 선택의 시간을, 몇 개 장면만으로도 손쉽게 관객에게 다가오게 만든다. 하필 추운 날씨, 겨울이라 해도 뜨기 전부터 달려야만 하는 출근길 장면 하나만 보아도. 길지 않은 사무실 장면,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의 몇몇 장면만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물 위의 오리인지 백조인지처럼 발을 버둥거려야 하는 삶은 누군가에게는 뿌듯한 노력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맞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원작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계나의 선택은 더욱 더 드세고 유난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을 기억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실제로 그 시절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친구들은 참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낙원을 꿈 꾸며 도망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튼 지금 있는 곳을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일단 벗어나 보겠다고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도망이다. 배가 불러서 도망치는 사람은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그게 뭐요. 새로운 시작점은 있을 수 있다. 영화는 그 지점을 콕 짚지 않음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누구도 쉽게만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영화의 빼어난 점 중 하나는 인물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계나뿐 아니라 다소 수상쩍고 가까이 해도 될지 의심스러운 몰골로 등장하는 재인(주종혁 분), 뉴질랜드 정착 지원으로 먹고 사는 태은(김지영 분)과 상우(박성일 분) 부부, 계나와 가치관의 차이가 분명한 지명이나 엄마(오민애 분), 성실하게 사는 계나와 다소 대비되는 삶으로 영화에 들어오는 미나(김뜻돌 분) 등... 어느 인물을 보아도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이 얹혀 있다. 위치의 차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만으로 남을 빌런 취급하기 너무 쉬운 시대의 현실에서, 이런 시선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계나에게 원하는 행복과 계나가 생각한 행복은 다르고, 지명이 계나와 그리고 싶었던 삶과 계나가 추구하는 삶은 분명 다르지만, 엄마나 지명의 방식을 영화는 비난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성실한 직장인 계나와 집에서 노는 미나 느낌으로 보여지지 않게, 미나와 계나가 함께하는 시간이나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이 미나를 알아가게 한다. 혹시나 유려한 말 솜씨로 계나를 등쳐먹을까봐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 태은과 상우 부부는 그냥 계나와 좋은 파트너였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가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교차 편집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펼쳐 보여준다.
하긴 그렇다. 누구도 쉽게 사는 사람은 없고, 각자 몫의 고민이 있지. 산다는 건 나와 다른, 그렇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닌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알아가고 어우러지고 그렇게 만나고 또 헤어지는 것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없이 자연스러워 마음에 들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고아성이 연기하는 계나의 모습은 점차로 변해간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내려 묶고 적당한 오피스룩에 코트 차림으로 추워 보였던 한국에서와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화장이나 태닝, 입은 옷으로 계나의 적응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계나의 삶은 점차로 달라져 가고, 교차 편집 속에서도 계나의 시간을 가늠해볼 수 있어, 마치 계나의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마저 든다.
그 순간의 온도가 늘 따뜻하지만은 않다. 부당한 일에 맞서 주는 친구도 생기고 함께 달려간 바다에서 모래에 꼼질꼼질 발가락을 묻는 순간은 분명 따끈따끈하다. 뉴질랜드에 막 도착한 계나가 야자나무를 바라볼 때, 낯선 나무를 낯선 바람이 스치는 낯선 소리가 날 때는 조금 스산하다. 원하지 않는 일들이 찾아오거나 가족과 영상 통화가 갑자기 끊긴 후 뺨에 흐르는 눈물은 분명 차가운 쪽일 것이다. 더 차갑고 안타까운 눈물 또한 이 영화에는 등장한다.
그러나 계나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지금 선 곳의 지축이 뒤흔들려도 또 나아갈 곳을 찾아갈 수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흔들려도 자신의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고 또 일어날 힘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끝나고 나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였다. 보고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물었다. 계나가 처한 상황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러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도 꽤나 트랙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데, 이제 이렇게 짚어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는 걸. 모든 선택이 그렇듯 득과 실이 있지만, 지금 삶에서 주어지는 선택들이 좋아서 트랙 속의 안온한 행복이 크게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나와 꽤나 닮은 인생들 같았다. 우리는 이제 트랙에서 이렇게나 멀어졌는데, 계나는 지금쯤 어디쯤에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더 이상 춥지 않은 곳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들이키는 기쁨만큼은 분명히 계나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토록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영화는,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한국이 싫어서>를 본 후에 옆 사람과 꼭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을 되짚어보기 대국민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각자의 행복을 조금씩 더 찾아가길, 너무 춥지 않길 바라게 된다. 따뜻한 영화였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온갖 장르가 섞였지만, 맛있어요
- 당신에게도 풋풋한 첫사랑 같은 영화가 있나요? 제게는 구파도 감독의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그러합니다. 어느 계절에 떠올려도 첫사랑의 온기가 온전히 느껴지고, 생각만으로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데요. 그 영화의 감독과 배우가 다시 뭉쳤습니다. 판타지 로맨스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입니다.※ 2월 7일(월)에 진행된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2022년 2월 9일 국내 개봉했습니다.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Till We Meet Again<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샤오룬'의 이야기로 막을 엽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저승의 풍경과 죽음 이후의 절차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신과 함께>를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가 그리는 저승의 풍경은 <신과 함께>와는 사뭇 다릅니다. <신과 함께>의 저승이 한 인간의 죄악을 평가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7개의 지옥이었다면,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의 저승은 무시무시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죠.영화 초반부, 죽음과 함께 저승세계에 입문한 '샤오룬'을 인도하는 방식에서부터 이 영화만의 색다른 저승 세계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죄질을 평가하는 것은 무서운 창을 들고 서 있는 신이 아니라 스캐너가 달린 컴퓨터입니다. 스캐너로 이마와 혀의 바코드로 찍으면 한 인간이 지나온 전생과 이번 생의 공덕이 단번에 저승 컴퓨터로 전송되죠. 환생의 절차를 알려주는 것도 저승사자 따위가 아닙니다. 키치한 분위기의 비디오테이프 영상을 재생해줄 뿐이죠. 이 장면은 잘 만든 B급 영화로 유명한 <남자사용설명서>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과감하고 색다릅니다. 저승에서 일하며 이번 생의 부족한 공덕을 채우면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스토리와 저승의 대왕인 염라가 며칠은 안 씻은 듯한 꼬질꼬질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 또한 의외였습니다. 저승에서 활개를 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혹여 저들이 저승의 신에게 끌려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들은 조금의 꾸지람조차 듣지 않았습니다. 여태껏 봐왔던 저승은 그만큼 무섭고 음침한 분위기였지만, 이 영화 속 저승은 전혀 그렇지 않았죠.구파도 감독은 무지개별로 떠난 자신의 반려견 '아루'를 생각하며 이 작품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저승이 조금은 명랑하고 활기차게 그려진 것도, 어떤 식으로든 환생이 가능하게끔 설치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크게 세 갈래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샤오룬'과 '핑키'의 월노 생활, 두 번째는 이승에 남겨진 '샤오룬'의 여자친구 '샤오미'의 인연 찾기, 세 번째는 500년 전 자신을 죽인 동료들을 벌하고자 악귀가 된 '귀무성'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설명 등을 일절 보지 않고 영화를 감상한 저는 보는 내내 흠칫흠칫 놀라곤 했습니다. 세 가지의 이야기가 뒤섞여 진행되다 보니 영화의 장르가 쉴 틈 없이 바뀌곤 했거든요. 판타지 로맨스 같다가도 호러 같고, 스릴러 같다가도 코미디 같았습니다.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을 방문하신다면, 난데없이 들이닥치는 온갖 장르의 폭격에 당황하실 수도 있습니다.'샤오룬'과 '핑키'의 월노 생활은 웃음이 픽픽 새어 나오는 로맨스 코미디입니다. 이승의 인연을 붉은 실로 엮어주는 월하노인의 임무를 맡은 '샤오룬'과 '핑키'는 사사건건 티격태격하면서도 조금씩 진정한 파트너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에서 '샤오룬'을 향한 '핑키'의 사랑도 스멀스멀 싹트죠. '샤오미'의 인연 찾기는 절절한 로맨스입니다.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겠다며 사랑을 맹세했던 '샤오룬'이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샤오미'의 새 인연을 찾아주는 과정은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을 선사하죠. 악귀가 된 '귀무성'의 이야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호러 스릴러입니다. 이미 환생을 거듭해 전생의 기억이 없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는 12세 관람가입니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다들 잡탕밥 드셔보셔서 아시겠지만, 잡탕밥은 그 오묘함이 맛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여러 가지 장르가 뒤섞여 버렸어도 맛은 있었답니다.⊙ ⊙ ⊙영화를 보다 보면 절로 생과 사를 골몰하게 됩니다. '샤오룬'이 동네 어르신들과 농구를 하다가 별안간 벼락에 맞아 죽었듯이, 어쩌면 저도 이렇게 글을 쓰다가 별안간 건물이 무너져서 죽을 수도 있지요. 요즘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을 보면 정말 그런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극 중에서도 월노로 활동하는 죽은 자 중에 노인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 요절한 청년들이었죠. 이렇듯 죽음은 우리 곁에 매우 가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의 무작위성은 죽음을 두렵게 만듭니다.하지만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가 던지는 '만약'이라는 가정 덕분에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만약 죽음이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면? 내가 이미 열 번이 넘는 환생을 거쳐 몇백 년간 존재해왔다면? 사랑, 선의, 그리움 등의 감정이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즐거운 가정과 함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좀 더 알차게 이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인생 1회차 인간을 위해 앞으로 죽음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는 영화가 더 많이 더 자주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반려동물을 키우시는 분들이라면 마지막 쿠키 영상을 보고 눈물을 훔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독의 반려견 '아루'를 생각하며 만든 영화인 만큼,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아루'에게 전하는 소중한 메시지를 쿠키 영상에 담았거든요. 쿠키 영상을 끝까지 시청하시고,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소중한 마음들을 온전히 느끼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Summary
샤오미(송운화)만 사랑해 온 직진남 샤오룬(가진동), 하지만 청혼하려던 순간 갑작스런 사고로 저승에 간다. 환생하고 싶으면 붉은 실로 커플 매칭을 하는 월하노인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데, 하필 사사건건 부딪히던 핑키(왕정)와 파트너가 된다. 드디어 이승으로 내려온 ‘월하노인’ 샤오룬과 핑키.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 우리가 인연을 맺어줘야 할 인간이 샤오룬이 평생 사랑했던 단 한 사람, 샤오미란다! (출처: 씨네21)Cast감독: 구파도출연: 가진동, 송운화, 왕정
-
- 죽음 직전 북극에 남겨진 과학자의 회한
죽음 직전 북극에 남겨진 과학자의 회한
-<미드나이트 스카이>(2020)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젊은 시절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간다. 취업을 하고, 커리어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 가족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 가족을 바라본다.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을 함께하고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커리어보다는 가족의 일을 먼저 보살피는 등 앞만 보고 달려가던 젊은 시절보다는 여러 가지를 더 보기 시작한다. 그건 대부분의 삶의 한 부분이고 마땅히 서로를 챙겨야 할 의무가 있기도 하다. 그런 시기는 향후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일을 발전시켜 나가는데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꺼이 가족을 돌보고 또다시 일터로 돌아온다. 그렇게 일과 가족은 삶에서 중요한 선을 그리며 나란히 나아간다.
사람들 중 일부는 좀 더 세상의 무언가를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도 중요하겠지만 그 일 자체를 즐기며 그곳에서 받는 성취감이 그들을 일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들은 일에 집중하며 오랜 기간 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가족의 일을 거의 돌보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가족과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고 좋은 감정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최소화하고 무언가 이루어내기 위해 애쓴다. 그러한 노력은 그들에게 대단한 업적으로 돌아오지만 그 업적 뒤에는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질 때 그들이 느끼는 회한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지구의 재앙 속 북극에 혼자 남는 과학자 오거스틴의 이야기
영화 <미드나이트 스카이>는 북극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권위 있는 과학자 오거스틴(조지 클루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으로 지구에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북극은 그 영향을 가장 늦게 받지만 결국 그곳에서 조차 결국에는 살 수 없게 된다. 모두가 지하 등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암 말기 환자인 오거스틴은 북극 기지에 남아 조용히 삶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려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이전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이 있는지 우주 탐사를 떠났던 여러 우주 비행선 중 마지막으로 남은 탐사선의 지구 귀환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영화가 공들여 전달하는 것은 바로 고독이다. 혼자 남겨진 오거스틴이 아무 소음도 나지 않는 곳에서 밥을 먹고, 암세포의 확대를 억제하는 시술을 받는다. 또한 북극의 청명하고 깨끗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오거스틴의 모습에서도 외로움과 고독을 볼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르게 보면 그것은 병든 노인이 되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오거스틴의 회한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우주 비행선 에테르호의 존재는 그의 삶에 작은 목표를 만들어준다. 그 적막이 흐르던 북극 기지에 여러 가지 알람의 소음과 분주해진 오거스틴의 모습이 화면으로 비춰진다. 삶의 끝에 서서 사람들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던 그는 누군가와 교신하기 위해 무척 애쓴다. 그런데 그 교신의 목적은 에테르호를 지구에서 다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거스틴의 젊은 시절은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소비했다고 볼 수 있다. 몇 번의 짧은 플래쉬백으로 볼 수 있는 젊은 오거스틴은 그의 연구에 있어서는 총명하고 미래가 밝은 사람이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그를 떠나는 연인과 그의 아이일지 모르는 자동차 속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고 뒤돌아설 뿐이다. 그는 삶에서 굉장한 연구적 업적을 발견해 냈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평생 고독 속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 자신이 선택한 길이긴 하지만 그건 고독이라는 문안에 자기 자신을 가둔 것이다. 그래서인지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현재 속 오거스틴의 얼굴에 기쁨은 말랐고, 눈에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에테르호를 지구에서 멀리 밀어내려 애쓰는 오거스틴의 시도
에테르호의 선장인 설리(펠리시티 존스)는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구와 교신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그는 또 다른 비행사 아데웰레(데이빗 오에로워)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 주변 인물들과 큰 문제없는 보통의 인물로 그려지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간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건 일종의 본능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더 애착을 하게 되는 이유이자 삶을 이어나가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오거스틴과 설리 외에 북극기지에 몰래 숨어 지내던 아이인 아이리스(키얼린 스프링올)도 등장한다. 말을 못 하는 그는 부모 몰래 북극 기지에 남아 오거스틴과 함께 생활해 나간다. 둘은 특별히 대화를 이어나가지는 못하지만 아이리스는 늘 오거스틴의 곁을 따라다닌다. 오거스틴은 과거의 딸을 돌봐주지 못했던 책임을 대신하는 것처럼 아이리스를 끝까지 지켜내려 애쓴다. 아이리스는 어쩌면 오거스틴의 죄책감을 풀어주는 존재이자 그를 끝까지 삶을 이어가게 만들어 결국 외부에 있는 비행선 에테르호를 구하게 하는 존재다.
영화 속 오거스틴이 말없이 북극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뒷모습을 비추는 장면이 있다. 에테르호와 교신이 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느꼈던 평생의 고독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다 에테르호와 교신하기 위해 북극 내 다른 전파 기지로 이동하기로 마음먹는다. 오거스틴의 삶은 평생 누군가를 밀어내는 삶이었는데, 그가 죽기 직전에 해결해야 하는 임무도 다른 사람을 외부로 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마지막 밀어냄은 타인과의 연결이 선행되고 희생이 이어지는 것으로 과거의 밀어냄과는 조금 다르다. 그 마지막 임무 이후 오거스틴은 비록 고독하게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겠지만 그가 가진 회한을 어느 정도는 덜어낼 수 있는 임무였다. 그건 에테르호의 선장 설리와 오거스틴의 마지막 교신을 대하는 오거스틴의 반응으로 세세하게 전달된다.
잔잔하고 감성적이지만 잘 맞물리지 않는 오거스틴과 설리의 이야기
사실 영화는 마지막에 큰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은 오거스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에테르호가 단번에 연결되어 감정을 고조로 이끌게 되는데, 영화의 이 세 이야기가 사실 적절하게 잘 맞물려 돌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테르호의 이야기와 오거스틴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따로 흘러가고 교신이 된 이후에도 오거스틴의 고독과 에테르호의 위기가 잘 융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후반부의 반전 이후 클라이맥스에서도 감정적인 반응이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연구자가 가진 회한과 평생의 고독감,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감정은 조지 클루니의 얼굴과 몸을 통해 잘 전달된다. 에테르호의 장면들이 녹아들지 않아 조금 아쉽지만 오거스틴이 혼자 북극에 남아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하나의 우주선 그리고 그 안의 생명들을 지켜내는 모습은 영화의 결말까지 지켜보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영화는 가만히 설리가 비행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오래도록 지켜보게 한다. 마치 오거스틴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처럼 따뜻함이 느껴진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Rabbitgumi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인생극장과 같은 영화 <더 랍스터>
1. ’더 랍스터’의 첫 번째 세계인 호텔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곳이다. 극단적인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세계이기도 하다. 주인공 데이비드는 이혼을 하고 호텔에 들어온다. 데이비드는 커플이 되지 못할 시 스스로 랍스터가 되길 원한다. 100년 가까이 살고, 무한한 번식을 하고, 귀족처럼 푸른 피를 가졌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어찌됐든 데이비드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성에게 구애를 하거나, 커플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공통점’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문득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추는 것 보다 더 어렵다’라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작정한 듯 찔러도 피 한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냉정한 여성에게 ‘비정한 여자의 말투와 짧은 머리가 마음에 든다’고 구애를 하기 시작한다.
물론 자기도 냉정한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감정을 감추는 일이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어서 여성과 커플은 성사 되지만 형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모습 그녀 앞에서 그는 끝까지 연기하지 못하고 포기한다. 이 세계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없는 감정 또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사회의 시스템에 100% 순응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그러기에는 마음이 너무 약한 사람이었거나,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까 싶다.
2. 데이비드는 호텔을 뛰쳐나와 숲 속으로 오게 된다. 이 곳은 자유로운 삶은 보장받는 대신, 사랑을 금지하는 곳이다. 호텔의 세계와는 다른 극단적인 이분법의 세계이다. 여기서 데이비드는 아이러니 하게도 근시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사랑을 금지하는 숲 속의 리더에게 사랑이 발각되고 근시의 여성은 시력을 잃게 된다. 공통점이 사라진 데이비드는 다른 공통점을 찾게 된다. 결국 숲 속으로부터 도망쳐 도시로 오게 되고, 그 또한 자신의 시력을 잃게하여 사랑의 매개체의 ‘공통점’을 유지하려 한다.
3. 커플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사랑은 보이지 않고 그저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공통점을 찾고 커플이 되려한다. 현실 안에서 사랑하기에 앞서 조건을 궁금해한다. 나와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하겠고, 수준이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도 현실의 우리도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을 ‘진짜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4. 호텔도 숲 속도 모두 정해 놓은 시스템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중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의심하지 않고 아무런 반감없이 시스템에 맞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인 것 같다. 행복을 그리고 사랑을 정해진 시스템에 맞춰 살면 편할 수도 있겠지만 정해진 시스템과 정해놓은 사회적인 강요에서 조금씩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씨네랩 에디터 Hezis
-
- 잠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한 아이들
줄거리
일곱 살 소녀 다리아(다샤)는 여느 또래처럼 엘사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잘 타는 활동적인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5개월째, 침대에 누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증상은 다리아 가족의 망명 신청이 거부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감상 포인트
1.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
2. 어른들의 갈등으로 인해 언제나 피해 입는 것은 아이들이다.
3. 체념 증후군에 빠진 아이들은 희망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깨어날 수 있다.
감상평
체념 증후군은 정신적 외상을 입고 극도의 우울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아이들, 특히 난민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질병이다. 2003년부터 사례가 보고되었으니 비교적 역사가 짧은 질병이라 할 수 있겠다. 나타나는 증상은 똑같다. 점점 말수가 줄어들면서 누워만 있다가 먹는 양이 줄어든다. 그리곤 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자게 되는 것이다.
당시엔 이런 소문들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속이는 거다, 아픈 척하는 것이다'
(중략)
모든 테스트에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외부의 조작은 전혀 없었던 거죠.
정말로 아주 심각하게 아픈 아이들의 얘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순수함의 결정체로 보는 동시에 가장 악한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상처받고 아픈 아이들에게서 어른들은 꾀병일 것이라는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정말로 아팠다. 극도로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자 완전한 잠의 세계로 빠져든 것뿐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느끼는 스트레스에 영향을 받는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즉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죽음의 공포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체념 증후군으로 잠들었다.
[체념 증후군의 기록]은 40분가량의 다큐멘터리다. 처음에는 흔한 우울 증세를 겪는 아이들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도 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아니다. 아이들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 아픔을 잊고 있으니까. 현실의 아픔과 고통이 끝나면 아이들은 깨어날 것이다.
아이들을 진찰할 때 부모님들께 말하죠.
아이의 상태 때문에 고통받는 건 부모님들이라고요.
아이는 아프지 않아요.
백설 공주처럼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에요
주변의 모든 것이 너무 끔찍해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거죠.
아이는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깨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활기차게 살 수 있어요.
체념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은 꿈을 꿀까? 꿈을 꾼다면 그 안에서는 행복할까? 혹여라도 그 아이들이 꿈속에서마저 고통받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제발 그 꿈에서라도 행복하길 비는 것만이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판의 미로]가 생각났다.
다큐멘터리는 체념 증후군을 겪는 세 아이의 가정을 보여준다. 각자 다른 이유로 쫓기듯 스웨덴에 도착했지만, 아이들이 잠들어 버렸다는 공통적인 결과를 얻었다.
난민 문제에 대해서 쉽사리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단순한 해결책이라면 갑자기 강력한 마법사가 나타나 세계 평화를 이뤄준다는 허무맹랑한 방법 밖에는 없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인류가 완전히 멸종해버리고 지구가 폭발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적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고통 때문에 자신을 잠재워버린다는 병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어쩌면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만 막느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마음을 침투하는 것은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왜 문제는 어른들이 일으키는데 고통은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스란히 그 아픔을 물려주고도 뻔뻔하게 '미래는 너희가 책임지렴'하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받기 싫은 고통은 남도 받기 싫다. 그리고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라고 해서 더 강하지 않다. 아이는 오히려 약하다. 더 약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
줄거리에 소개했던 다리아의 가족은 다행히 스웨덴에 무사히 정착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리아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예전처럼 활발하게 지낸다고 한다. 이렇듯 아이들은 가족에게서 희망의 기운을 느끼면 언제고 다시 일어날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다.
반면, 11개월째 체념 증후군을 앓고 있는 '레일라'의 가족은 여전히 망명 신청 중이고, 언제든 추방당할 수 있다. 암울한 현실에 이젠 레일라의 언니마저도 체념 증후군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는 다리아의 모습에 안심이 되는 한편, 레일라와 그 언니가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아픔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아픔을 물려주지 않을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
- 절벽 끝에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몇 년 전, 친구와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을 했다. 샌프란에서 출발해 LA를 찍고 샌디에이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LA로 올라오는, 나름의 모험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번을 왕복할 정도의 거리를 달리면서 온갖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했고, 미국이란 땅이 낯선 나를 위해 유학 중인 친구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해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흔한 미국 사람이 홈리스가 되는 시나리오'가 기억에 남는다. 친구에 따르면 미국 서민들의 경우 차를 한번 수리하는 비용과 인건비가 원체 비싸기 때문에 차 유리창이 깨져도 신문지로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도심 외곽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어느 날 차가 완전히 고장 나기라도 하면, 수중에 단돈 몇 천 달러가 없어서 수리비를 변통하지 못한다.(렌트와 보험비를 포함한 기본 생활비가 비싸기 때문에 수중에 현금이 많이 없다고 한다. 저축이란 개념도 약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차를 타고 직장에 가지 못 하여 직장에 잘린다. 직장에서 잘리면 렌트와 보험을 내지 못하고, 그러다 어처구니없게도 홈리스로 전락한다.
샌프란 도심 거리에 보이는 홈리스들은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었는데 실은 파트타임 일을 몇 개씩 뛴다고 한다. 이들은 차가 없기 때문에 다운타운을 떠나지 못하고 슬럼을 형성한다. 미국인에게는 마치 신발과도 같은 자동차가 없다는 것은 일자리의 선택 범위를 확연히 좁히면서, 삶의 방식까지도 제한한다. <노매드랜드>를 보았다면,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과 위와 같은 홈리스들이 질적으로 어떤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펀이 자처한 유목민 생활은 도심의 홈리스의 삶보다도 더 척박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의도치 않게 동정 어린 눈길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마주친 옛 학생 앞에서 펀은 자신이 홈리스(homeless)가 아니라 엄연한 하우스리스(houseless)라고 선포한다. 홈은 곧 하우스라는 공식에 들어맞지 않을 뿐, 그녀는 홈리스와 다르게 기동력과 안식처를 동시에 쟁취했다고 청중을 설득하고자 한다. 후반부에 카센터에서 구제불능이 된 고물 밴을 집이자 안식처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진심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주장에 진정으로 동조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펀은 마치 60년대 히피 라이프를 시대착오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 유아적이라는 인상마저 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간의 오해를 뒤로하고 그녀의 여정은 계속된다.
현대인의 끝나지 않는 노동이 궁극적으로 다다르고자 하는 욕망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고들 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중산층에게는 소박하게는 집 한 채 마련, 궁극적으론 경제적 자유가 최종 목표라고도 한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이 촉발한 금융위기부터 지금의 Covid-19까지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그 10년 간 경제적으로 낙오한 이탈자들 뿐 아니라 이제 막 노동시장에 진입한 밀레니얼 세대에게도 이 '소박했던' 바람은 신기루 같은 꿈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 앞에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 떠도는 주체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실제로 실천하고 사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있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마치 구석기시대로 회귀한 듯한 생활 풍경을 묘사한다. 이들은 수렵과 채집을 하듯 아마존 물류센터, 캠핑장, 고속도로 식당에서 단기 일자리를 구하며 동굴에 몸을 누이듯 밴 안에 몸을 누인다. 특히 영화는 실제 노매드인 린다 메이, 스웽키, 데이브와의 우정을 통해 이들의 다공성(porous)이면서도 쉽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노매드 식의 연대에 주목한다. 구석기인들처럼 이들은 서로 평등하고 계급을 의식하지 않으며 식량과 불을 나눈다.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은 서로 교환하거나 나누고, 노동의 품앗이를 한다. 불을 지피는 모습, 공룡, 화석, 먼 별빛 등 태곳적을 상징하는 고고학적인 소재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방법론에 대하여
본 영화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 저, <노매드랜드 : 21세기에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주인공 펀과 데이브를 제외한 일군의 조연 역으로 실제 노매드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연기하도록 하였다. 어딘가 익숙한 이 작법은 다름 아닌 TV 다큐멘터리의 DNA를 가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법과 닮아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침 최근에 그의 20년간의 영화 자서전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이 감독의 작업 방식과, 영화에 대한 생각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국적이고 동양적 가치관을 읽어내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서 그는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무관한 정서의 작품을 찍고자 하였으며 마치 재즈에 비유할 수 있는 TV의 즉흥적인 성격을 가진 비연극적인 작품을 찍고자 한 것이 바로 <원더풀 라이프>이다. 그는 <원더풀 라이프>의 방법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다시 말해 다큐멘터리나 픽션이라는 식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해석하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배우든 일반인이든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허문 장르 안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직접 연기하는 인물들의 자기표현 욕구가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그것이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놀라운 화학작용을 발견한다. 이로써 인터뷰는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표현의 생성 과정이 된다.
<노매드랜드> 역시 픽션과 다큐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를 두고 '픽션에 다큐멘터리식 터치가 들어갔다'거나, '페이크 다큐'라고 단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그의 영화에 다큐식 터치가 가미되었다는 평가에 억울하다고 반응한다. 그는 자신의 영화들을 다큐식 촬영을 단순 차용하여 만든 영화가 아니라고 여긴다). 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은 자오의 섬세한 연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카메라는 광활한 대자연과 그 안에서 늙고 풍화되어 가는 인물들을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극적이거나 작위적인 연출을 지양하는 대신, 대상이 스스로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을 애정과 시간을 들여 지켜보고자 한다. 특히 현실 고발의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여 한 생태계를 파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감독은 노매드의 삶에 미묘하고도 아주 깊숙이 그러나 그들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침투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카메라의 존재와 배우의 존재는, 노매드들이 스스로의 삶을 인식하는 태도에도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노매드인 출연진들도 이제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자기 삶에 대한 표현 욕구를 드러낸다. 그때 우리는 이들만이 가진 긍지, 강인함, 존재론적 고독을 발견한다.
펀 역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또한 본인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 스스로가 배우라는 사실조차 잊고 5개월의 긴 여정 동안 순전히 펀이라는 인물로 살아간다. 맥도먼드는 실제로 아마존에 이력서를 내고 취업도 하고, 밥 웰스가 설립한 RTR(Rubber Tramp Rendezvous)에 머무는 노매드들과 교류를 하며 함께 생활한다. 그동안 누구도 그녀를 유명 여배우라고 의심해본 적 없을 만큼, 맥도먼드는 생활 연기에 녹아들어 완벽하게 한 캐릭터를 체화할 수 있었다. 이 성실하기 그지없는 배우는 나중에 펀이라는 인물의 핵심 코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인터뷰한다(링크). RTR에 처음 입성했을 때 펀은 처음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그들의 사연과 이야기를 조용히 듣는 역할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밥 웰스와 일대일로 대면할 때 자신의 이야기(실은 픽션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두 사람의 독대 장면은 후반부에 한번 더 반복되는데, 맥도먼드 배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순수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밥 웰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 장면이 끝나고 배우라는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고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가 타인의 삶을 대하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는 완전히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감독이나 제작자의 생각을 투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감독은 배우 양쪽에게 정보의 불균형을 주고 돌발적인 지시를 내린다든가 하는 '조작'과 테크닉을 통해 즉흥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밥 웰스가 그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상실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은, 펀이라는 같은 처지의 청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토로이자 고백이었다. 이 장면은 밥 웰스를 외부인으로서 관찰하면서 얻어내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배우였고 그녀의 남편도 멀쩡히 살아있다 한들, 그가 드러낸 진실된 감정은 결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영화은 이런 진귀한 장면을 포착, 발굴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맥도먼드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해버리고 용서를 구한다. 그 순간 아주 밀도 있게 형성된 특별한 관계는 다음 국면을 맞이한다. 이 영화는 배우와 카메라를 통해 실존하는 인물들의 삶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다가가려고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태도를 취한다.
애도를 마치고 나면
이제 비로소 펀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2008년 경기침체로 미국 엠파이어의 석고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마을은 폐허가 되고 만다. 사랑하는 남편 '보'마저 병으로 떠나보내자, 펀은 집을 청산하고 밴 한대를 몰고서 노매드의 생활을 시작한다(영어로는 hit the road라고 표현하는데 모든걸 박차고 길 위로 떠나는 이미지가 상기된다). 이 유랑길은 1) 생존을 위한, 2) 도피를 위한, 그리고 3) 애도를 위한 유랑이다. 먼저 1) 생존이란, 삶의 터전을 잃은 이가 때때로 자신에게 떨어지는 파트타임 일자리를 수렵/채집하는 과정이다. 초반에 비치는 아마존 물류 시스템의 부감은 왠지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저 18세기의 낭만적인 방랑객이 아니라 21세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방을 떠날 수 없는 취약계층 노동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다음으로 2) 도피는, 상실로부터의 도피이다. 펀은 늘 새로운 시도나 친구들의 초대를 거절하는 습성이 있다. 펀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모든 옛 기억들을 자신의 밴에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다닌다. 그리고 데이브가 이를 훼손했을 때 노여워하고 심지어 다시 접착제로 붙이기도 한다.
이런 회피형 인물이, 의도치 않게 다른 노매드들과 스치고 대자연의 존재를 마주하며 하나둘씩 상처를 씻어내려가게 된다. 그녀는 한시적인 일을 하면서 유독 오물을 치우거나 얼룩을 닦는 일을 많이 한다. 샤워를 하는 뒷모습에서 검은 물이 씻겨내리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즉, 펀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고 정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애도의 과업을 완수해가게 되는데,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를 노년의 성장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서사는,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떠났다가 깨닫고 돌아오는 서사인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 아니라 떠남을 위한 떠남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첫번째에는 도망치고 잊기 위해, 두번째에는 기억하고 되찾기 위한 떠남이다. 예컨대 펀에게는 몇번 정착할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주변에는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안전망이 있다. 데이브와 언니 부부의 존재가 그러한데, 이들은 펀이 도피와 애도의 순례를 끝마쳤을 때 노매드의 삶을 버리고 정착하게 될 것인지를 다시한번 자문하도록 하는 역할이다. 로드무비의 여정이 반지처럼 한 번의 원을 그렸을 때, 그녀를 추동하는 힘은 생존을 위한 갈구도, 과거로부터의 도피도, 상실한 자의 애도도 아닌 태생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심, 강인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며, 망자의 시선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워진다.
스웽키가 마침내 알래스카에 도착하여 보내온 영상에서 제비들은 알을 깨고 나온 껍질을 물가에 떨구고 어디론가 한없이 떠돈다. 겉으로 보기에 목적이 없는 어지러운 비행일 지라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이들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비상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처럼 스스로의 방랑에서 각자 그 목적을 찾아내는 것이 노매드들이 거쳐야 할 통과 의례이자 숙명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자연의 풍광과 목격한 자의 내면의 풍경을 2.39:1의 웅장한 시네마스코프 안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는데, 과연 테렌스 멀릭 스쿨이라고 자처할만하였다. 또 한편으로 감독은 노매드의 삶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균형을 잡기 위하여, 평범한 가정의 일상 안에서도 생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려 한다. 펀이 데이브의 집에 초대받아서 데이브 손자를 어색하게 안고 있다가 잠든 아기의 손을 쥐어보는 장면은, 거대한 나무와 자라나는 여린 잎을 보듯이 자연을 바라볼 때와 같은 순일한 감정을 자아낸다.
마치며
이 글의 서두는 홈리스가 되는 취약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길 위를 달리고 대자연의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시선은 점차 미국 사회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부터 대자연 그 자체, 자연 앞의 나의 미약한 존재에 대한 감각으로 옮겨갔다. (<노매드랜드>도 이러한 순차를 따르고 있다) 우리가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때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위험해보이는 절벽임에도 어떠한 보호막도 쳐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내 간판에는 <접근하지 마시오, 바다사자 어미가 갓 낳은 새끼들을 떠날 수 있음>이라고 적혀있었다. 인간에게 추락할 수 있다, 위험하다고 경고하기는 커녕, 너의 위험은 내 알 바 아니고 생태 환경을 위해 접근하지 말라는 말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라고 생각되었다. 노매드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이를 닮아있다. 야생에 맨몸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앞으로 닥칠 상황이 얼마나 위험할지를 스스로 가늠하고 판단하면서 더듬거리며 길을 나아간다. 스페어타이어도 없이 서부를 횡단하는 펀에게 선배 스웽키가 조언해주듯이, 이들은 사회적 보호막에 의지하는 대신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외침과 손길을 의지한다.
우리의 자동차 여행은 사실 험난했다. 하루 50불짜리 에어비앤비 숙소는 형편없었고 위험한 다운타운 동네의 안 좋은 집을 예약하여 숙소를 옮긴 적도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자동차로 미 서부를 횡단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절대 못하겠단 생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늘 떠나기를 고대하고 있지만, 그만큼 정주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고 제대로 잘 정착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기도 했던 것 같다. 영화 전반부에 노매드들이 무모하고 고집스럽단 인상마저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 판단을 진정으로 거둘 수 있었다. 제비들이 알을 깨고 날아다니는 데에는 어떤 말과 해석도 필요 없듯이,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풍화하는 삶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그동안 나름 여러 대륙의 대자연들을 찾아다니면서 눈물이 흐를 만큼 위엄있는 그 풍경들이 여행자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강하게 뇌리에 박혀 때때로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지금 내 삶에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노매드랜드>도 그런 영화가 될 것만 같다.
2018년 겨울, 몬테레이 베이의 석양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지수 옮김 pp. 32-45
이미지 출처
https://www.vogue.com/article/oscar-predictions-2021https://tonebenderspodcast.com/159-nomadland-with-sergio-diaz-and-zach-seivers/
https://edition.cnn.com/style/article/nomadland-film-making-of-spc-intl/index.html
https://i.pinimg.com/originals/1c/77/90/1c779035984fbca2c3080c4e93fb8490.jpg
https://www.imdb.com/title/tt9770150/mediaindex/?ref_=tt_mv_sm2021년 4월 26일 감상 / 2021년 4월 28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고령화가족>, 초라하고 찌질해도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
한 가족이어도 그 안의 사람들은 가지각색이다.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어도 천차만별인 게 가족이다.
아웅다웅하다가도 금세 돈독해지는 것이 가족이다. 세련되지도, 쿨하지도 않은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고, 보여주는 것도 가족이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어쩌면 우리 근처에 있을 것만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고령화가족>이다.
'고령화가족'.
항상 무조건적인 사랑과 다정한 말을 건네는 가족은 아니다.
하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어 돌아서면 생각나고, 아파보이면 은근 거슬리고, 괜히 투박하게 표현하게 되는 가족은 맞다.
자살시도를 하려고 하는 순간 인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엄마'.
밥은 잘 먹고 사냐는 엄마의 걱정어린 질문에 당연히 밥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인모의 대답이 이어진다.
나도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다보니 엄마가 자주 전화로 아픈 덴 없냐, 밥은 삼시세끼 잘 챙겨먹고 있냐, 등의 질문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반사적으로 당연히 잘 먹고 다닌다, 몸 건강하다, 라는 대답이 나간다. 걱정 끼쳐드리기 싫은 마음에 이런 대답을 한다.
나 이외에도 아마 많은 아들, 딸들이 이런 경험이 있을 것 같다.
타지에서 지내는 자식들이 무탈하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을 그 누가 모를까.
우리 엄마는 종종 꽃 사진을 보내신다. 가끔은 엄마의 셀카도 함께.
이 장면 속 인모의 엄마처럼 담벼락에 꽃이 너무 예쁘게 폈다고, 엄마처럼 예쁘다고,
벌써 봄이 왔다고, 예쁜 꽃 보고나서 마저 할 일 하라고.
엄마의 시선을 통해 보는 꽃은 더 예쁜 것 같다.
이 장면은 대사 하나하나, 엄마의 말과 인모의 반응 하나하나가 나와 엄마 같아서 놀라면서 봤다.
- 사람은 잘 먹어야 힘을 써.
- 속이 든든하면 없던 힘도 생기고 그러는 법이야.
- 올 거지?
- 너, 닭죽 좋아하잖아.
그리고 조금은 무뚝뚝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인모의 "좋아하긴 하지."라는 대답.
내가 스쳐지나가듯이 '어떤 음식 먹고 싶다~'라는 말을 해도 엄마는 그걸 또 기억하셨다가 나중에 해주신다.
너가 좋아하는 음식 했다고, 저번에 먹고 싶었다고 했지 않냐고, 먹고서 힘내라고.
나는 또 매우 좋으면서 괜히 '그냥 한 말인데 뭐하러 또 했냐'고 툴툴거린다.
우리네 일상을 잘 표현한 영화같다.
TV를 보고 있는 조카에게 너가 미연이(인모의 여동생) 딸이냐며, 자기 엄마(미연)랑 똑 닮았다고 말을 건네는 삼촌 인모.
퉁명스럽게 "저기요, 아저씨"라고 대답하는 조카에게 "왜요, 아가씨?"라고 받아치는 삼촌 인모의 모습이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어릴 때 낯 가리던 나에게 어떤 삼촌이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장난쳤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는 왠 아저씨가 누가봐도 어린이인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장난치는 게 괜히 싫었었다.
이 영화는 그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영화 장면을 보고, 이와 비슷한 내 기억을 마음껏 떠올릴 수 있다는 점.
영화의 어느 장면을 보면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점.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을 넘어서 옛 추억 회상에 빠질 수 있다는 점.
바쁘게 지내던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 은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점.
투닥투닥 말싸움하는 우리의 '고령화가족'에게 즐겁게 마시자고 한 마디 한 다른 테이블의 손님에게 바로 신경 끄고 처먹던 거나 먹으라는 딸 미연,
쪽팔려서 이 자리에 못 있겠다는 미연의 딸 민경,
미연이와 다른 테이블 손님 사이에 싸움이 나자 어디서 남의 귀한 동생을 괴롭히냐고 말한 뒤 적진(?)에 뛰어드는 두 아들 한모와 인모,
이미 자주 겪은 익숙한 일인듯 조용히 술 마시는 엄마.
진짜 우당탕탕 엉망진창 대환장 파티이다.
그래도 이 모습이 밉지가 않다.
엄마도 웃는다.
무슨 일 생기면 그렇게 형제끼리 팔을 걷어붙이고 서로 도우라고, 단결력 하나만은 최고라고.
사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형제랑 같이 있으면 계속 투닥거려도, 다른 사람들과 의견충돌이 일어날 것 같으면 바로 똘똘 뭉친다.
나는 내 형제에게 뭐라고 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내 형제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용납 못한다.
자주 투닥거리면 뭐 어때, 위급상황에 힘을 모아 서로를 도와주면 되는거지.
내게 큰 울림을 준 대사이다.
한모가 전 부인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미연은 엄마가 바람피워 낳은 자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세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미연이 새로운 남자를 데려와서 결혼하고, 한모는 가족들에게 쪽팔린 일을 겪고,
이 가족이 지긋지긋하다고 느낀 민경이는 가출도 하고, 전직 조폭인 한모가 위기에 처하자 그를 도우려다 인모도 다치고.
이렇게 다사다난하고 왁자지껄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인모의 독백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찌질하면 찌질한 대로, 자기한테 허용된 삶을 살면 그뿐이다.
아무도 기억하진 않겠지만 그것이 개인에게 주어진 삶이고, 역사이다."
'소탈하게' 살아가는 영화 속 '고령화가족'의 모습과 현실 속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낸 대사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우리의 삶은 특별한 일들이 가득하진 않다.
우리의 삶은 대개 소박하거나 소탈하고, 가끔 혹은 자주 찌질하다. 쿨하지 못하다.
이 대사를 읽고 여러번 곱씹어보며 '남들에게 꼭 기억되고 싶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왔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면 뭐 어때,
현실에 충실해서 내 삶, 내 역사를 차근차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가족도 마찬가지다.
꼭 매일매일 화목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우당탕탕 시행착오를 겪으며 차근차근 만들어가면 되는거지.
꼭 행복한 기록과 기억들만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쁨, 아픔, 칭찬, 실수 등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역사이다.
우리는 '가족'을 마주하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끝난 후에 내가 느낀 것은 감동, 씁쓸함, 행복함, 무거움 등의 복잡한 감정이었다.
개인적으로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만 간직하지는 않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과정이 다소 위태롭고, 이를 겪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차근차근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
초라하고 찌질해도 묵묵히 살아가는 것.
조금은 미련하게 들릴지라도, 이게 바로 '가족'인 것 같다.
-
-
- 캡틴 마블이 자신의 후회를 만회할 수 있을까
?Rabbitgumi 입니다!
지난 주 영화 더 마블스가 개봉했습니다.
마블의 새로운 영화인데요.
사실 마블 팬들이라면 기대하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분위기는 이 영화가 개봉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죠.
개봉 후에도 분위기는 좋지 않습니다.
설명없이 쉽게쉽게 전개되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한 소개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더욱 더 불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캡틴 마블의 후회되는 점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그마저도 공감할만한 요소가 없었어요.
박서준은 정말 지못미 입니다!! ㅠ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업데이트하고 있는 영화 에세이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아래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링크를 통해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브런치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
- 영화 <습도 다소 높음> 2차 예고편
<낭만극장 이용수칙>
체온 체크
문진표 작성
마스크 착용 필수…
“그런데 에어컨은 왜 안 틀죠?”
이것이 진짜 재난이다!
극한의 습도가 엄습해온 어느 여름날,
이희준 감독의 신작 <젊은 그대> 시사회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극장에 모여든다.
하지만 이게 웬걸,
긴축경영으로 에어컨 가동을 거부한 극장은 관객들이 뿜어내는 고온의 짜증으로 더욱더 다습해져 가고,
그저 쾌적하고 싶을 뿐인 관객들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습도의 폭격에 돌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일생일대의 위기가 이렇게 온다고?!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습도 대폭발, 웃음 대폭발의 하루가 시작된다!
-
-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오싹한 뉴욕> 티저 예고편
한 여름, 뉴욕이 얼어붙었다! 공포로 얼어버린 세상을 구하라! ? [고스트버스터즈: 오싹한 뉴욕] 4월 극장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