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8-30 19:33:34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영화 <한국이 싫어서>
SYNOPSIS.
“행복을 찾아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왜 한국을 떠나느냐고?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계나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좇아 떠나기로 했다.
POINT.
✔ 통찰력 있는 작가 장강명의 동명 소설 원작이자,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 <한여름의 판타지아>,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등 결이 뚜렷한 감성을 가진 장건재 감독 작품
✔ 믿고 보는 배우 고아성을 비롯해, 하나하나 빛나는 배우들이 현실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는 영화
✔ 한국 사회에서 입시와 취업 준비를 차곡차곡 거쳐 직장인이 된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각자의 마음을 돌아보기 좋은 작품, 누군가와 같이 보고 나와서 함께 대화하면서 더욱 풍성해질 영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남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 정말이지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
출퇴근 시간 9호선에 오를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9호선을 타면 좀더 빨라도 다른 노선을 이용하던 시절을 지나, 이사 갈 동네를 고를 때 9호선 라인을 피해 이사를 했음에도, 어쩌다 출퇴근 시간에 9호선을 이용해야 하는 날은 마음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내가 사방이 탁 트이고 초록빛인 시골에서 자라서 더 그런 건가? 남들은 정말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살아지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누구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힘들기야 하지만, 그걸 그냥 일시적인 몸의 힘듦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과, 영혼 어딘가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나뉜다는 걸. 그리고 이런 기준선이 9호선 말고도 너무 많다. 계나가 코트 안에 꼬박꼬박 받쳐 입는 경량 패딩이 한국에서 잘 팔리는 이유이자 원작에서 "농담이 아니라 매일 동상의 위기를 겪었다"고 언급되는 이 극단적 날씨, 과장님이 마음대로 골라버린 동태찌개가 자연스럽게 4인분 주문되어도 따라야만 하는 것, 매뉴얼에 따라 업체를 선정할 것이냐 작년 업체를 무조건 고르라는 상사의 말을 들어야만 하나 싶은 순간...
이 모든 기준선에서 우리는 나뉜다. 누군가에게는 그럭저럭 눈 딱 감고 넘길 만한 것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것이 된다. 후자의 사람들은 한번쯤 눈을 돌린다. 트랙에서 벗어난 삶을 그려본다. 결국 수많은 기준선들은 하나로 귀결된다. 제때 입시를 치르고 제때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 제때 결혼을 하는 삶, 거기서 어긋나면 나이에 따라 결이 다른 말을 듣게 되는 삶, 그 정해진 트랙 밖의 삶을 상상하고 실현에 옮긴 적이 있는지 아닌지.
<한국이 싫어서>는 얼핏 한국에서의 삶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계나(고아성 분)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겪는 실낱 같은 기준선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그는 떠난다. 뉴질랜드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사실 계나가 한국을 떠나게 만든 이유들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계나와 같은 선택은 한국에서 크게 지지받지 못한다. 계나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만하면 책임감도 있고 괜찮은 사람인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김우겸 분) 또한, 한국에서 정해진 트랙을 차곡차곡 쌓아 왔고 앞으로도 쌓아갈 시간의 안정감을 이야기하며 계나를 말리려 한다. 계나는 자신을 무슨 외국 병 걸린 취급하냐며, 자신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명과 같은 사람의 시각에서 계나의 선택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계나가 내린 선택의 시간을, 몇 개 장면만으로도 손쉽게 관객에게 다가오게 만든다. 하필 추운 날씨, 겨울이라 해도 뜨기 전부터 달려야만 하는 출근길 장면 하나만 보아도. 길지 않은 사무실 장면, 부모님과 나누는 대화의 몇몇 장면만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물 위의 오리인지 백조인지처럼 발을 버둥거려야 하는 삶은 누군가에게는 뿌듯한 노력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맞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원작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계나의 선택은 더욱 더 드세고 유난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을 기억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을, 실제로 그 시절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친구들은 참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낙원을 꿈 꾸며 도망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튼 지금 있는 곳을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일단 벗어나 보겠다고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도망이다. 배가 불러서 도망치는 사람은 없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지만, 그게 뭐요. 새로운 시작점은 있을 수 있다. 영화는 그 지점을 콕 짚지 않음으로써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누구도 쉽게만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영화의 빼어난 점 중 하나는 인물들을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계나뿐 아니라 다소 수상쩍고 가까이 해도 될지 의심스러운 몰골로 등장하는 재인(주종혁 분), 뉴질랜드 정착 지원으로 먹고 사는 태은(김지영 분)과 상우(박성일 분) 부부, 계나와 가치관의 차이가 분명한 지명이나 엄마(오민애 분), 성실하게 사는 계나와 다소 대비되는 삶으로 영화에 들어오는 미나(김뜻돌 분) 등... 어느 인물을 보아도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이 얹혀 있다. 위치의 차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만으로 남을 빌런 취급하기 너무 쉬운 시대의 현실에서, 이런 시선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엄마가 계나에게 원하는 행복과 계나가 생각한 행복은 다르고, 지명이 계나와 그리고 싶었던 삶과 계나가 추구하는 삶은 분명 다르지만, 엄마나 지명의 방식을 영화는 비난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성실한 직장인 계나와 집에서 노는 미나 느낌으로 보여지지 않게, 미나와 계나가 함께하는 시간이나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이 미나를 알아가게 한다. 혹시나 유려한 말 솜씨로 계나를 등쳐먹을까봐 불안한 눈으로 지켜본 태은과 상우 부부는 그냥 계나와 좋은 파트너였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 계나가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각자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교차 편집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펼쳐 보여준다.
하긴 그렇다. 누구도 쉽게 사는 사람은 없고, 각자 몫의 고민이 있지. 산다는 건 나와 다른, 그렇다고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닌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알아가고 어우러지고 그렇게 만나고 또 헤어지는 것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영화가 인물들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없이 자연스러워 마음에 들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고아성이 연기하는 계나의 모습은 점차로 변해간다. 긴 머리를 정갈하게 내려 묶고 적당한 오피스룩에 코트 차림으로 추워 보였던 한국에서와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화장이나 태닝, 입은 옷으로 계나의 적응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계나의 삶은 점차로 달라져 가고, 교차 편집 속에서도 계나의 시간을 가늠해볼 수 있어, 마치 계나의 여정을 함께하는 기분마저 든다.
그 순간의 온도가 늘 따뜻하지만은 않다. 부당한 일에 맞서 주는 친구도 생기고 함께 달려간 바다에서 모래에 꼼질꼼질 발가락을 묻는 순간은 분명 따끈따끈하다. 뉴질랜드에 막 도착한 계나가 야자나무를 바라볼 때, 낯선 나무를 낯선 바람이 스치는 낯선 소리가 날 때는 조금 스산하다. 원하지 않는 일들이 찾아오거나 가족과 영상 통화가 갑자기 끊긴 후 뺨에 흐르는 눈물은 분명 차가운 쪽일 것이다. 더 차갑고 안타까운 눈물 또한 이 영화에는 등장한다.
그러나 계나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지금 선 곳의 지축이 뒤흔들려도 또 나아갈 곳을 찾아갈 수 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흔들려도 자신의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고 또 일어날 힘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끝나고 나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였다. 보고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물었다. 계나가 처한 상황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러면서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도 꽤나 트랙을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데, 이제 이렇게 짚어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는 걸. 모든 선택이 그렇듯 득과 실이 있지만, 지금 삶에서 주어지는 선택들이 좋아서 트랙 속의 안온한 행복이 크게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계나와 꽤나 닮은 인생들 같았다. 우리는 이제 트랙에서 이렇게나 멀어졌는데, 계나는 지금쯤 어디쯤에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더 이상 춥지 않은 곳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 들이키는 기쁨만큼은 분명히 계나 곁에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토록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영화는,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한국이 싫어서>를 본 후에 옆 사람과 꼭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행복을 느끼는 지점들을 되짚어보기 대국민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각자의 행복을 조금씩 더 찾아가길, 너무 춥지 않길 바라게 된다. 따뜻한 영화였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자유롭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
- [SICFF 데일리]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시기와 질투
[SICFF 데일리] 훔쳐서라도 가지고 싶었던 시기와 질투
영화 <서울쥐와 시골쥐> 리뷰감독] 정세희
시놉시스] 만년 부반장 신세인 세윤은 반장이 될 기회를 노리지만, 전학생 채영에게 빼앗기고 만다. 속상해 하는 세윤에게 채영은 초대장을 건넨다. 채영의 집을 다녀온 세윤은 채영을 곤란에 빠뜨리기로 한다.
#스포일러 주의#잠시 떠날 수 있었던 어린시절로의 회상
영화 <서울쥐와 시골쥐>의 주인공은 부반장 세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채영이에게 포커스가 더 맞춰졌던 이야기였다. 채영이는 아빠 사업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왔고,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 갑자기 인기가 채영이에게 몰리고, 아이들의 추천으로 채영이는 반장 후보에까지 오르면서 반장으로 당선된다.
필자 역시 초등학생 시절 이러한 경험이 똑같이 있어서 채영이에게 더욱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도로 내려가게 되면서 2학기 시작에 맞춰 전학을 갔고, 그날 잘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반장선거에 나가 반장이 되었다. 8살 때의 아이들은 리더십보다는 서울에서 왔다는 것이 신기해서 인기투표처럼 당선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때의 기억이 개인적으로는 좋게 남아있어서 채영이가 반장이 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련하게 초등학생 시절의 모습을 자연스레 반추하며 즐거울 수 있었다.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세윤이는 사실 채영이를 좋아했다. 서울에서 온 채영이를 동경했고, 다시 부반장이 되었을 때 실망했지만 채영이가 자기에게 초대장을 주고 집으로 초대를 해주자 그녀와 친해질 것에 신나하던 아이었다. 하지만 그런 세윤이에게 엄마는 속도 없다며 뭐가 좋다고 그 집에 놀러가냐며 핀잔을 준다. 다음날 채영이네 집으로 놀러간 세윤이는 실수로 옷에 주스를 흘리게 되고, 채영이 엄마는 그런 세윤이에게 새 옷으로 갈아입혀 준다. 그렇게 재밌게 채영이 방에서 놀던 세윤이는 언성이 높아지는 채영이 부모님의 소리를 들으며 놀라서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런 세윤이에게 채영이 부모님은 의견을 얘기하면서 언성이 높아졌을 뿐 싸운 것은 아니라며 이렇게 의견이 다를 때는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풀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세윤. 집에서는 여전히 부모님이 싸우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향해 세윤이는 채영이네 집에서 들은대로 의견을 나누고 서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자며 붙잡지만 세윤의 부모님들은 이를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결국 선풍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몸싸움까지 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전환된 화면 속 교실에서의 세윤이는 채영이를 곤란에 빠뜨리기로 결심한다. 채영의 집에서처럼 자신의 집이 바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자신은 집에서 부모님이 항상 싸우는데 채영이의 부모님은 그렇지 않아서 질투심이 일렁인 것일까? 채영이를 향해 뒷담화를 시작하고, 이 일은 결국 선생님의 귀에 까지 들어가서 채영이와 세윤이는 교무실로 불려간다.
이 상황이 두려웠던 세윤이는 자기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면서 채영이에게 변명을 하고, 채영이가 가지고 있던 무용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그토록 원했던 채영이의 삶을 훔쳐서 달려가지만 결국 아파트 단지 앞에서 넘어지면서 채영이가 빌려준 옷에 있던 진주 목걸이가 다 끊어지며 영화는 마무리되면서 세윤이는 채영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초등학생 시절 느낄 수 있는 시기와 질투의 모습을 영화 <서울쥐와 시골쥐>에서는 채영이와 세윤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서울쥐와 시골쥐>는 개인적으로는 어린날의 향수와 함께 그 시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고스란히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3. 9. 17. 15:00 롯데시네마 은평 5관
2023. 9. 19. 12:00 롯데시네마 은평 7관
-
- 우리~~하게 아픈 어느 3대 대가족의 초상
우리~~~하게 아프다. 경북이 고향은 아니지만, <장손>을 보면 이 사투리가 절로 나온다. 약 2시간으로 압축된 대가족의 이야기를 보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 특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긋지긋한 애증 관계를 유지하다가 끝내 등을 돌리는 김씨 집안 가족의 모습은 그 자체로 쑤시고 아리는 듯한 고통을 전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이 보편적인 가족은 마주하기 싫지만, 그래서 더 보게 된다. 이게 바로 우리 가족의 모습이라고 여기면서.
경북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는 김씨 집안 식구들은 분주하다. 오늘이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여느 가족처럼 남자는 놀고, 여자는 일한다. 한여름 제사라 에어컨도 틀법한데, 집 안의 안주인인 할머니 말녀(손숙)는 장손 성진(강승호)이 와야 틀 기세다. 서울에서 무명 배우로 활동하는 성진은 뒤늦게 고향 집을 찾는다. 오랜만에 내려온 터라 반가울법한데, 성진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아니나 다를까 제사 이후, 아버지 태근(오만석)이 할아버지와 자신의 대를 이어 두부 공장을 물려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반기를 든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성진은 할아버지 승필(우상전)과 말녀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간다. 계절이 바뀐 가을 어느 날, 성진은 급히 고향으로 내려간다. 건강했던 말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두부처럼 살아온 가족
<장손>은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것 없는 3대 대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 안은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세대, 젠더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소리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어느 집안이나 문제는 다 있듯 김씨 집안도 마찬가지다.“아이고 우리 장손 왔나!”라는 말녀의 말 한마디에서 알 수 있듯 장남을 최고로 여기는 이 집안은 여성들만 노동한다. 1990년대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올법한 남녀 차별이 이곳에서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그뿐인가. 한국전쟁 때 가까스로 살아남아 두부 공장을 운영하며 장손의 책임을 다한 할아버지 승필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 다리를 절고 낙향한 아들 태근을 못 마땅해 한다. 태근 또한 자신을 빨갱이 운동에 가담했다고 미워하며, 두부 공장 운영에 일일이 간섭하는 아버지가 밉다. 성진은 술만 마시면 가슴 속 응어리진 울분을 토해내며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태근을 아주 아주 싫어한다.
가족 중 유일한 기독교 신자인 첫째 딸 혜숙(차미경)은 기도와 믿음으로 교통사고 후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보살피고, 성진은 그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 막내딸 옥자(정재은)는 사업가 남편 동우(서현철)를 따라 승필이 그토록 싫어하는 공산국가인 베트남으로 이민을 간다. 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성진의 누나 미화(김시은)는 남편과 두부 공장을 물려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
김씨 집안 사람들은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혈연지간으로 뭉친 가족이지만, 알고 보면 실상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는 관계다. 마치 자신의 의지 없이 억지로 뭉쳐져 네모반듯하게 나온 두부처럼 말이다. 김씨 집안의 가업이 두부 공장이라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사라져가는 가족주의
두부 같은 가족을 어떻게든 뭉치게 한 이는 바로 말녀. 영화는 그녀의 죽음 이후 바스라져 버리는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결국 이들이 와해되는 건 돈 때문이다. 전조는 장례식장에서 각자 친구 지인이 전한 조의금을 나누는 장면부터지만, 문제의 촉발 지점은 혜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헤경은 과거 말순에게 맡겨 놓은 돈을 장손인 태근에게 찾아보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이로 인해 촉발된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더 큰 사고가 발생하며 이들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혜경이 요구하는 건 돈이지만, 실상 원하는 건 그동안 이 집안을 위해 노력했다는 가족의 인정이다. 가부장적 가족주의에서 철저히 배제된 딸(혹은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정을 바라는 혜경의 모습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혜경의 남편이 두부 공장을 이어받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져야 하고 이를 돌봐야 하는 혜경의 상황은 한국 사회에서 딸이 짊어져야 하는 차별의 무게를 비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3대 장손의 이야기를 대변하듯 여름, 가을, 겨울이란 세 계절을 담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가족주의는 해체가 되고, 관객은 이를 지켜본다. 그나마 화기애애했던 여름을 지나 냉기 서린 가족의 이면이 드러나는 겨울에 당도하면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진다.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상엿소리처럼, 한 가족으로서 이들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은 계절이 변하듯 이 과정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연출한다.
<장손>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계절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자연이다. 이 풍광을 유려한 미장센으로 담아낸 화면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반대로 무섭게 다가온다. 인간으로서 자연의 섭리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가족주의 해체 또한 막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함박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어가는 승필의 마지막 모습은 사라져가는 가족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축제>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떠오르다!
<장손>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 엄지척을 날린 평단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는 영화가 가부장적 3대 가족을 통해 우리나라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는 부분이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격동기를 겪은 근현대사, 압축성장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 우리 사회는 발전과 번영을 이룩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대 간의 갈등을 낳았고, 서로 간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았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3명의 장손은 서로 간의 오해만 쌓아놓고 산다. 저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있지만, 이를 툭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니 이야기하지 못한다. 장남으로서 해야 할 책임과 책무에 짓눌려 살아왔기 때문이다.
장손으로서 이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공포감에 점차 가족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단해진 벽은 허물 수 없게 되어버린다. 후반부 승필은 성진에게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왔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혜경이 그토록 찾는 돈의 행방을 알려주는데, 그 때야 성진과 관객은 이 할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늦었지만 비로소이해의 물꼬를 트는 장면은 과거 임권택 감독의 <축제>, 그리고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 두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서로 담을 쌓고 지냈던 세대가 ‘죽음’이란 계기를 통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은 닮아 있다. 그리고 각각 동화책(<축제>)과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그 촉매제 역할을 한다.
<장손>은 이제 사라져가는 윗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크다.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한 시대를 책임졌던 세대가 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이 현상은 누군가에게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한 일일 수 있지만, 감독은 마지막 승필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왠지 모를 욱신거리는 고통의 슬픔을 안긴다. 사라진 후에야 그 세대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승필이 전한 검은 지를 확인하는 성진은 그제서야 장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애쓴 할아버지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모른척했던 장손의 역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장손은 가족 중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닌 가족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자라는 것을 말이다.극 중에서 보이지 않는 계절인 봄은 출산을 한 미화의 아이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이름은 ‘봄’이다. 전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는 그 기점. 어떤 봄을 맞이할 것인가는 검은 봉지를 받은 성진, 그리고 또 다른 성진이들의 선택에 달렸다.
사진 제공: 인디스토리
평점: 4.0 / 5.0
한줄평: 우리하게 아픈 어느 3대 대가족의 초상!
-
- 야망과 탐욕의 대서사시
데 어 윌비 블러드(2007)_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 다니엘 데이 루이스 , 폴다노 주연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는 무일푼의 광부이다.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석유발굴은 마침내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석유 유전 발굴에 성공한다. 그리고 일확천금의 행운도 누리게 된다.
영화는 그를 착한 부자 또는 존경받는 부자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유전발굴이라면 뭐든지 할수 있을 것 같은 극악무도한 인물로 묘사된다. 실제로 그는 점점 광기로 폭력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가령, 성공의 결과로 얻어지는 부와는 별개로 '성공'자체에 목적을 둔다. 그래서 야망과 꿈은 탐욕과 욕망으로 사람의 목숨도 끄떡하지 않는 폭력적인 인물이 되어간다.
어린 아들을 곁에 두어 가족친화적인 이미지 보여주는 한편, 겉치레일 뿐이고 그의 따르는 곁의 사람들 또한 믿지는 않는다. 그저 사업상 이용할 뿐이다.
그리고 자존심은 엄청나다. 자신을 간섭하거나 무시하는 것 같으면, 가차없이 욕설을 내뱉고 협박한다. 오죽하면 그가 성공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유전계약을 목전에 두고도 '아들'의 안위를 간섭하는 파트너에게 가차없이 욕을 뱉고, 거래를 파토낼까!
영화는 그의 성공을 보여주지만, 한편 다니엘 플레이뷰의 인간으로서의 몰락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그는 가족도 없고, 믿을만한 사람 하나 없는 외톨이이다.
심지어, 자신이 유일한 가족이라 믿고있는 아니 믿고있던 아들도 그의 곁을 떠난다. 어느 날 이복동생이라고 나타난 인물도 가짜이다.
급기야, 영화의 후반부에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는, 욕하고 저주하고 아들을 부정한다(진짜 아들도 아니지만) 그렇게 그는 목숨처럼 여기는 자존심을 사수하려 발버둥친다.
그는 아들을 내쫓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아들과 식사를 하면서 신나하는 장면을 인서트 샷으로 택한다.
혹시나 가족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모순, 그 어렵고 난해한 감정에 폴 토마스 앤더슨은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보여준다.
+)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연출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력.
그리고 폴 다노의 존재감을 보는 것만으로 영화는 아주! 볼만하다는 점!
씨네랩 에디터 Hezis
-
-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공포 영화가 아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경고: 스포일러 주의!
시골 소녀 엘리(토마신 맥킨지)가 런던의 어떤 패션 대학에 입학한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그녀의 꿈 속에는 샌디(안야 테일러조이)라는 여자 가수가 나타난다. 샌디가 살았던 1960년대 런던은 엘리가 항상 꿈꾸는 장소이기도 하다. 엘리는 샌디를 엿보며 샌디처럼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샌디는 성공하지 못한다. 샌디 주위의 남자들은 샌디를 이용했다. 그리고 살해했다. 그 꿈 이후 엘리의 현실 속에는 샌디의 유령이 나타나 엘리를 괴롭힌다.
나는 이 정보를 듣고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했다.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는 모습에 대한 기대, 그 갈등을 마무리하는 방법에 대한 불안. 결론부터 말하자.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모호해지는 모습은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꿈 속 장면에 나타났던 런던 풍경도 붉은 색깔을 사용해 화려하고 고풍스럽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갈등을 마무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초반 ~ 중반에는 갈등을 잘 키우는 듯하더니 후반에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공포 영화에 기대했던 것을 깨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공포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포 자체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공포 때문에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만 잘 보여줘도 충분히 재밌는 영화가 나온다. 나한테는 <서스페리아>나 <킬링 디어>가 그랬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공포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공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해 초반 ~ 중반에 쌓아올린 공포감을 무너뜨려버린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통해 공포 영화 특유의 오싹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빨간색, 피, 혼령으로 가득 찬 연출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인상에 남은 것은 엘리의 성장이었다. 도시 생활 속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 엘리가 좋아할법한 신나는 옛날 음악을 타고 전달된다. 영화를 공포 영화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공포 영화의 연출을 빌린 성장 영화라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에드가 라이트'가 연출한 '공포 영화'라는 키워드 때문일까. 이 영화에 느꼈던 모든 의문이 해결된 뒤 나한테는 아쉬움밖에 남지 않았다. 보통 공포 영화가 끝날 때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드는데 말이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가 공포에 대해 설명을 자제했다면 어땠을까. <유전>처럼 여운이 짙은 명작 호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에드가 라이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
-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하여
영화 <로스트 도터> 포스터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R, 2021)
장르 : 미국·영국·이스라엘·그리스, 드라마 │ 감독 : 매기 질렌할
출연 : 올리비아 콜맨(레다), 다코타 존슨(니나), 제시 버클리(젊은 레다) 외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22분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
모성을 잃은 여자, 레다.
왜 하필 임신을 준비하고 있는 기간에 이 영화를 보게 됐는지 모를 일이다. 갖기 전에 잘 생각해보라는 신의 경고였을까. 이 영화는 아이를 키우는 환희와 즐거움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희생’의 무게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말이다.
대학교수 ‘레다’는 혼자 휴가를 즐기러 그리스 해변에 왔다. 그녀는 모래사장에 책을 펴고 앉아 누구의 간섭도 없이 홀가분한 시간을 즐기려 하지만, 그곳에 놀러 온 또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대가족 단위의 시끄러운 어떤 가족들이다. 그 가족의 무리에는 한 젊은 여자가 있다. 서너 살쯤 된 딸을 키우는 듯한 그 여자의 이름은 ‘니나’. 어린 딸과 동행하는 젊은 니나에게, 레다는 자꾸만 시선을 빼앗긴다.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하여
레나에게도 니나와 같이 젊은 시절이 있었다. 이른 나이에 낳은 두 명의 딸도 있었다. 그러나 레다의 회상에서 그려지는 그녀의 젊은 시절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두 명의 딸아이는 징징거리며 레다를 보채고, 레다는 그런 아이들이 지겹다. 유망한 대학원생이었으며 꿈이 있었던 레다에게 아이들은 축복보다는 힘겨운 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다 레다는 대학교수를 사랑하게 됐고, 그 길로 3년간 아이들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말이 통하는 지적이고 섹시한 대학교수, 아이로부터의 해방감. 그런 것들이 지친 레다를 유혹했고 환상을 갖게 만든 것이다. 물론 레다는 결국 아이들이 그리워져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일에 대한 죄책감까지 씻어지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 일을 벌인 지 십수 년이 지난 레다는, 뭔가에 씐 듯 해변에서 니나의 어린 딸이 가지고 놀던 인형을 훔쳐서 숙소로 가지고 온다.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
행복을 잃은 여자, 니나
휴가를 즐기는 동안 레다는 니나와 부딪힐 일이 많았다. 니나가 잠시 어린 딸을 잃어버렸을 때 레다가 찾아다 준 날도 있었고, 딸 때문에 힘들고 불행하다는 니나의 하소연을 듣는 날도 있었다. 그녀와 만나면 만날수록 영락없이 레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 보인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숙소로 훔쳐온 인형에 대고 자신의 젊은 시절과 두 딸들을 투영시켰다.
그러던 중 레다는 니나가 남편을 두고 숙소 종업원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레다가 편해진 니나는 불륜남과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숙소를 빌려달라는 부탁까지 청해오는데. 레다는 그러기로 약속은 하지만 석연치 않고, 그걸 모르는 니나는 기쁜 마음으로 숙소의 키를 받으러 온다.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
지나가는 바람이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 지겨운 일상을 벗으려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려는, 자신과 너무도 닮은 니나를 꾸역꾸역 남처럼 대하려 했으나… 레다는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겪고 있는 그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아이를 키우는 내내 그런 기분이 들 수도 있다고, 그 산물이 바로 나라고.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출산과 육아는 여자의 삶의 판도를 많이 바꾸어놓는 듯싶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이를 케어하기 위한 품이 들기에, 아이가 얼마나 예쁘냐 와는 상관없이 지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는 모든 엄마들의 소망이 ‘육퇴(육아 퇴근)’일 수가 없잖은가.
영화 <로스트 도터> 스틸컷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짓눌리는 것들
물론 젊은 시절 레나의 일탈과 방황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가보지 못한 자유의 길을 꿈꾸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가정을 저버리지는 않으니까. 다만 모성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너무나 큰 인내와 희생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것에는 깊이 공감하고 싶다. 레나에게도 니나에게도 그리고 모든 엄마들에게도 모두 비슷한 위기와 고비가 있었으리라 이해하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 레나는 자신이 니나 딸의 인형을 훔쳤음을 고백한다. 다 큰 어른이 돼서 왜 아이의 인형을 훔치고 모른척했는지 니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관객인 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아이를 버리고 3년간이나 외도를 했다가 돌아온 여자의 그 죄책감의 깊이를. 부디, 영원히 그 감정을 모르길 바라며 살 뿐이다.
* 해당 포스팅은, 씨네랩(CineLab)으로부터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언론 배급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인스타그램 @woodumi
-
- <닥터 스트레인지2> 대혼돈이 아니라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그는 멀티버스를 암시하는 듯한 꿈의 내용을 걱정하면서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크리스틴 팔머(레이첼 맥아담스)'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끝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은 크리스틴과의 관계를 곱씹던 중, 괴생명체가 급습하자 '웡(베네딕트 웡)'과 함께 전투를 벌인 그는 전투 도중 꿈에 등장했던 소녀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멀티버스가 실재하며 멀티버스를 넘나들 수 있는 아메리카의 능력을 뺏는 존재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닥터 스트레인지는 과거의 전우이자 마법에 통달한 또 다른 히어로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스칼렛 위치로 각성한 완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유로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완다로부터 아메리카를 지키기 위해 멀티버스를 넘나드는 싸움에 나선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2016년에 나온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으로, 멀티버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이후 개봉하는 첫 MCU 영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닥터 스트레인지 2>를 기대하는 시선과 분위기는 특히 '멀티버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개봉 전 수많은 팬들은 <노 웨이 홈>이 그랬듯이 이번 작품도 특급 '카메오'를 선보일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멀티버스에 방점이 찍힌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스칼렛 위치의 추적을 피해 아메리칸 차베즈를 보호한다'는 핵심 플롯에 충실하다. 즉 이 작품 속 멀티버스는 그저 공간적 배경이고, 카메오는 말 그대로 카메오에 불과하며 단지 멀티버스를 오가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 대신 <닥터 스트레인지 2>는 부제인 멀티버스에 붙은 대혼돈, 정확히 말하면 '광기(madness)'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닥터 스트레인지가 광기를 마주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한 두 가지 광기
그렇다면 영화 속 그 광기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나 스칼렛 위치다. 자신이 만든 환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었던 쌍둥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을 누렸던 완다 막시모프. 그녀는 자신의 환상이 파괴되고 연인이었던 비전에 이어 그 아이들마저 잃는다. 이후 어둠의 마법서인 다크 홀드에 의해 타락한 그녀는 쌍둥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는 광기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우주의 쌍둥이들을 데려와 자신의 가정을 완성하는 꿈을 꾸고, 이를 위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능력을 지닌 아메리카 차베즈를 사로잡아 그녀의 힘을 빼앗으려 든다. 이는 세계와 우주의 수호자인 닥터 스트레인지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자 위협이며, 따라서 스칼렛 위치는 누가 보더라도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주해야 할 위협적인 광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가 직면한 광기는 외부에만 있지 않다. 그의 내부에도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꿈이다. 흔히 꿈은 잠재의식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깨어 있는 동안 자아나 의식이 미처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 경험이나 불안감, 심지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무의식이 형상화한 것이 꿈이다. 영화는 이러한 꿈의 특성을 멀티버스와 결부시킨다. 영화에서의 꿈은 멀티버스 속 자신을 볼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자신을 만나는 것은 결국 본인 내면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멀티버스를 돌아다니며 다른 여러 닥터 스트레인지를 만나는 여행은 닥터 스트레인지 본인이 애써 누르고 억압하고 있던 무의식에 속한 본인 모습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멀티버스 여정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세계에서 그가 잊으려던 크리스틴과의 추억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그에게 내재되어 있던 광기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 결과물이 멀티버스의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대의를 위해 희생을 정당화하고, 옳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하며, 사랑하는 이를 차지하려고 세계를 파괴하는 스트레인지를 마주한다. 당장 크리스틴의 결혼식에 참석한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과 대사를 보면 다른 우주 속 본인이 될 가능성이 은연중에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 모험은 완다의 광기를 마주하는 여정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의 광기를 대면하고 그 광기가 자신을 잠식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 여정이다. 그러다 보니 작중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완다가 더 능동적으로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녀의 광기는 이미 드러나 있는 상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것은 아직 탐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모습만 다를 뿐 결국 공통적으로 광기를 품고 있는 두 주역의 초반부 대화에 유달리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 역시 사뭇 의미심장하다.
거울로서의 멀티버스
이에 더해 멀티버스는 두 광기가 해소되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멀티버스는 단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나'를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는 행위는 거울에 반사된 '나'의 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거울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거울을 보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외관이나 정체성을 재고하고 반성할 기회를 잡는 일이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상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언제나 좌우가 바뀌어 있으며, 거울의 표면에 따라서 형태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거울 안에서 자신의 모습과 유사하나, 동일하지는 않은 또 다른 주체를 만난다. 이때 '나'에게 그 주체는 하나의 대상이고, 그 주체의 입장에서도 '나'는 하나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 속 자신을 통해 타인을 만나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는 덴마크의 설치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이 거울을 두고 평행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는 멀티버스가 바로 그 거울이다. 다른 세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본인이 내재한 광기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그들이 먼저 간 길을 따르면서도 또 다르게 걷는다. 전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닥터 스트레인지는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희생을 감수하거나 금지된 규칙을 깨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1편에서 그는 금지된 타임 스톤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에서는 더 큰 계획을 위해 타노스에게 타임 스톤을 내주며 많은 이들의 희생을 감수했다.
하지만 멀티버스라는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의 스트레인지가 대의를 위한 희생을 택하거나 어둠의 마법에 기댔는데도 실패하는 모습을 제삼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목격한 스트레인지는 이전과 다르다. 독선적인 성격을 잠재우고 다른 이들을 믿으며, 좋은 결과는 물론 옳은 과정도 같이 추구한다.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의 독단이라는 광기가 낳았던 죄책감과 그로 인한 행복의 부재로부터 탈피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기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소서러 슈프림인 웡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은 유머스러운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러나지 않은 광기를 통제하며 한 단계 성숙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광기의 멀티버스인 이유
같은 맥락에서 보면 멀티버스를 건너오는 완다의 공포스러운 추격전에도 다른 의미가 있다.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외에 꿈에서 멀티버스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도 멀티버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이자 동시에 거울이다. 즉, 그녀의 여정은 단지 아메리카 차베즈를 쫓는 것이 아니라, 스칼렛 위치라는 정체성 밑에 가려진 나머지 더 이상 현실의 자기 모습이 아닌 완다의 의식을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리는 여정인 것이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완다가 처한 상황을 대조하면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카마르 타지에 진입하려던 완다는 닥터 스트레인지에 의해 미러 디멘션에 갇힌다. 그는 완다를 수많은 거울로 가득한 방에 가두어 놓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스칼렛 위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들려 하나 이는 효과를 보지 못한다. 반면 후반부에 스칼렛 위치는 멀티버스의 완다를 마주 본다. 멀티버스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깨닫고 타락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깨닫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다른 우주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이는 완다가 사용하는 다크 홀드의 대척점에 있는 '비샨티의 책'이 맥거핀으로 활용되는 이유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 품고 있는 광기를 어떻게 직시하고, 수용하고, 통제할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빙의하는 흑마법 '드림 워킹'을 시전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를 게 없지만, 그보다는 마법의 목적과 결과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차이점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부제를 '광기의 멀티버스'가 아니라 '대혼돈의 멀티버스'로 번역한 선택은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한 의도와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부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날의 검인 광기의 멀티버스
이처럼 광기로 가득 찬 내면을 여행하는 통로이자,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드는 거울인 멀티버스. 다만 멀티버스의 활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우선 완다의 광기를 강조시킨 결과 자칫 올드할 수 있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호러 영화적 요소가 MCU에 잘 녹아든 것은 장점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일행을 쫓는 터널 장면이나 프로페서 X와의 전투에서 다수의 점프 스케어를 동원해 완다의 집착이나 광기를 살려내는 것이 대표적이다. 스칼렛 위치의 압도적인 힘을 잘 묘사한 이 장면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파멸되는 공포감인 코스믹 호러를 부각하는데, 이 대목이 MCU의 클리셰를 비틀면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간 MCU의 빌런들은 제모 남작이나 미스테리오, 알렉산더 피어스와 같은 반전형 빌런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광기로 가득한 완다는 초반부터 빌런으로 등장해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해 버린다.
다만 멀티버스와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가 평면적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는 못한다. 작중 멀티버스가 본질적으로 수단과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만 해도 그녀의 과거사가 잠시 모습을 비추지만, 그녀의 역할은 두 주연의 내면을 살피는 멀티버스를 여는 데 한정된다. 그래서 그녀는 철저히 수동적으로 묘사되며, 본격적인 서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들 역시 같은 이유로 등장할 때의 임팩트에 비해 초라하게 퇴장하기를 반복한다. <노 웨이 홈>과 달리 본 작에서는 카메오가 단순한 일회성 팬 서비스로 낭비되는 듯한 인상이 강한 것이다. 또 멀티버스 속 인물들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은 그간 영웅의 죽음과 희생의 가치를 중시했던 MCU의 접근법과는 괴리가 있다. 달리 말해 '광기의 멀티버스'만으로 호러 영화와 MCU의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호러물 클리셰대로 안일하게 방심한 인물들이 단숨에 죽는 전개가 남발되거나,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가 적지 않은 것은 미흡한 봉합의 또 다른 증거나 다름없다.
한편 멀티버스라는 소재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장점과는 별개로 단독 영화로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있다. 액션이 대표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상징하는 액션이라면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화려하고 기하하적인 공간 왜곡을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연출이 완다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마블은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의 성장을 위해 제각기 묠니르, 슈트, 방패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다만 이후 더 강력한 능력이나 무기를 획득해 히어로 영화다운 액션을 보여준 것과 세 히어로와 달리,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는 그러한 외적인 변화를 찾을 수가 없다. 이는 미러 디멘션을 활용한 연출이 주제와 메시지를 잘 살려낸 것과 무관하게 히어로 영화로서 실망스러운 측면이다.
또한 디즈니+의 독점 드라마인 <완다비전>과의 연계가 매우 강해 진입 장벽이 높아진 점도 지적될 만하다. 영화가 닥터 스트레인지와 완다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을 고려하면, 완다의 성장과 변화를 깊게 다룬 <완다비전>의 내용을 모를 경우 2시간의 러닝타임은 물음표로 가득 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앞으로 모든 마블 영화가 마주할 문제이기에, MCU로서는 적잖은 과제를 떠안은 셈이다. 결국 광기에 물든 두 히어로의 이야기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기대한 바에 따라 장단점과 만족도가 극단으로 갈릴, MCU 페이즈 4의 또 다른 문제작으로 막을 내린다.
A(Acceptable, 무난함)
멀티버스 파티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한 수, 광기
-
- [영화흥신소-아이스라떼극장] 집이 제일 무서워요 '장화홍련'
영화 흥신소 -(아이스)라떼극장 EP.06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공포영화를 보며 무더위를 날려버리자
요양후 집에 내려온 자매에게 이상한 형체가 보이고 새엄마는 자매를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문희X 귀신과 싱크대귀신으로 그 시절 평범한 집을 무서운 공간으로 탈바꿈 시켜준 영화 "장화홍련"
-
- 공기살인 리뷰 -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다룬 용기에 박수를 (약스포, 결말X)
-
“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봄이 되면 나타났다 여름이 되면 사라지는 죽음의 병.
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영화라는 매개의 특성상 결국 극적인 연출과 전개를 끝끝내 놓지 못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
- 영화 <나만 보이니> 메인 예고편
감독 장근과 동료들은 영화 촬영을 위해 버려진 호텔을 찾는다.
분명 여기엔 우리 6명 말고 아무도 없댔는데 저기 저분은 누구?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고 귀신을 봤다는 스태프들이 속출하며
애절한 로맨스 영화는 점점 아찔한 호러 영화가 되어가는데!
우리… 이 영화 무사히 끝낼 수 있을까?
-
- 영화 <노웨어 스페셜> 메인 예고편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은 창문 청소부 ‘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는 것.
세상에 혼자 남을 아이를 위해 ‘존’은 특별한 부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아직 어리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내 아이를 키워줄, 새 부모를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