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9-02 17:03:38
8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한국은 에이리언, 북미는 데드풀 | 주말 박스오피스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했습니다.
비록 흥행세는 다소 꺾였지만, 누적 관객수는 163만 명에 도달했습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일으켰던 콘서트 실황 다큐
<임영웅 | 아임 히어로 더 스타디움>이 <사랑의 하츄핑>을 밀어내며 3위에 올랐고
<파일럿>이 누적관객수 450만 명을 돌파하며 2위에 머물렀습니다.
한편 국내에서 190만 여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던 <데드풀과 울버린>이 북미에서 1위를 유지했고 누적 수익 12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에이리언: 로물루스>가 2위, <잇 엔드 위드 어스>가 3위를 차지하며 전주와 동일한 순위를 유지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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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자성의 50가지 그림자
이 글은 영화 [헌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바람 잘 날 없는 한 달이었다.
앞다투어 개봉하는 대작들의 풍년으로. 그리고 그 영화들을 속 시끄럽게 하는 잡음과 이슈들 로도 말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세 영화에 이어. 마지막 기대작인 영화 [헌트]도 자신의 경로를 확인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뎠다.
이미 배우로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입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도. 자신의 한계선을 저만치 밀어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담은 작품으로, 이정재는 배우이자 신인 감독의 이름으로 꾸벅 인사를 건넨다.
어쩌면 이중고가 될지도 모르는 이 무거움을 기어코 어깨 위에 얹고 걷는 영화 뒤로. 이 영화의 운명을 결정할 주사위가 던져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영화 [공작]에 이은 또 다른 호평을 이끌어 낼 첩보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이 영화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함께 걸으며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성의 50가지 그림자;거울에 갇힌 자신을 꺼내려는 시도
사진출처:다음 영화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은 만나는 첫 순간부터 서로를 향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분명 같은 기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협력은커녕 뒤꽁무니를 캐느라 눈이 벌게진 모습이 긴장감으로 승화되어 영화를 지배한다.
누군가를 의심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특성도 있었겠지만. 더 크게 보면 두 사람 모두 품 속에 자신의 이념이라는 거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신념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드러냈다가는 스스로의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기에, 가진 거울 위에 일부러 먼지를 소복이 쌓은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아야만 했다.
김정도(정우성)에게는 이 거울의 정체가 매우 명확하다. 자신이 군인이던 시절 보고 겪은 참상이 그것이 되어 꼿꼿하게 마음에 뿌리내린 채 흔들릴 겨를이 없었다. 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단호하게 쳐내며 거울의 존재를 지키려 애쓴다.
그러나 박평호(이정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방주경(전혜진)은 자신이 뒤집어쓴 먼지 같은 삶을 그 어떤 왜곡 없이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 어떤 생각도 없이 상부의 명령에 오롯이 자신을 던지고. 자신의 일에 심지어 신이 나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불만은커녕 이 일이 즐겁다는 것처럼.
다른 거울이자 박평호의 크립토나이트(약점)인 유정은 자꾸 평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현재의 그 부조리를 과연 참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파문을 던져댄다. 생각해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지금 대답을 하고 바로 행동에 옮기라며 채근한다.
두 개의 거울 사이에 낀 박평호는 자신의 모습이 무한대로 반사되어 분열하는 것을 보며 하나의 자신만이 남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쩌면 혼란에 빠져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려고 하는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무한대의 박평호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마저 느꼈을 그는 결국 방주경의 목을 조르는 것으로 이 혼돈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오월동주에서 동상이몽으로;결국은 숨길 수 없었던 본질에 대하여.
사진 출처:다음 영화
박평호와 김정도가 공동의 목표를 종착지로 하는 배에 승선하려고 채비하는 과정은 참으로 험난했다. 숨통 같은 거울을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 각자 가장 아끼는 장수 하나씩을 제 손으로 바다에 밀어 넣어야만 했다.
눈물 뿌릴 새도 없이 매정하게 등을 돌려 돌아오다 눈을 들었을 때. 그제야 서로는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오랜 세월 들여다본 다른 사내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 낯설고. 또 어딘가는 조금 닮아 있고. 이념과 함께 한 세월만큼이나 고집스러운 입매를 가진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속을 보일 수 없어 고독했을 것이며, 아주 가끔은 자신의 이념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도 몇 번은 던졌을 것 같은 얼굴.
그 연민을 닮은 것만 같은 마음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혹은 상대방을 향한 감정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본능에 가까운 불안감이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결국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희생으로 배의 방향키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보려 애썼지만. 본질적으로 달랐던 그들의 이념은 결국 사람마저도 양립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체제 앞에선 한없이 약한 두 사람의 모습은 그들이 지닌 거울의 본질에 상관없이 똑같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오월동주라도 되길 바랐지만. 결국은 동상이몽이 되어버린 배 안의 소란도 알지 못한다는 듯. 시대의 파도는 배를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게 할 뿐이었다. 조용히.
결국 닿지 못한 신세계;이자성 수난시대
사진 출처:다음 영화
이정재 배우가 출연한 스파이 영화에서는 유달리 최종 목적지에 대해 묻는 장면들이 많다고 느낀다.
신세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자성이 골드문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 일이 끝나면.이라는 가정문은 희망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버티게 했고. 자신의 배역은 아니었지만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인남(황정민)의 최종 목적지 역시 딸과 함께 살 수 있는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가정문이 주던 희망은 결국 희망 고문이 되어 자신을 포박했고,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가려면 자신의 희생이 있어야 딸이 밟고 지나가는 길목을 훤히 터줄 수가 있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다.
숨진 유정(고윤정)의 아버지(이성민)가 몇 년 전에 물었을 때도. 김정도가 일이 끝나면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을 했을 때도. 박평호는 자신이 절대 그곳에 닿지 못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으리라.
“그곳”에 닿지 못하는 것이 스파이의 숙명이고, 모든 작전이 쉬쉬 했지만 목적지는 이념의 승리일 뿐 그런 곳은 없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자신은 이미 이념에 잠식 당해 개인을 잃어버려 그 질문을 들었을 때마다 허를 찔린 기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목적 하나만 믿고 살아왔고. 한 곳에 뿌리내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그에게 허락된 종착역은 변절자라는 오명뿐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자성도 인남도, 그리고 박형호 마저도. 원하던 종착역에 내리지 못했다.
마치면서
영화를 보며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최근처럼 강하게 든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의 웅얼거림은 첩보 영화의 복잡성을 조금 더 배가 시키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한 많은 카메오들이 나오는 것은 좋았으나 중요한 장면에서 필요 이상의 “아는 얼굴”들은 영화에 쏟아야 하는 몰입을 약간 흩어지게 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일본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총격전 장면에서. 박평호가 자신이 몰던 차의 엑셀을 발로 비벼 밟는 장면을 보며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미 개봉 전부터 많은 매체에서 이야기했기에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겹의 말을 그 위에 얹자면.
무엇이. 그리고 어디까지가 감독이라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하는지는 나 같은 문외한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영화를 위해 초보 감독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를 그 한 장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낯설기도 한 환경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많은 감정을 닮은 간절한 발짓처럼 보였을 정도니까. 이 초보 감독의 곁에서 메인 배우이자 친구의 역할도 진심으로 해 냈을 정우성 배우와의 호흡도 두 말할 것 없다. 이토록 처절하게 미워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딱하게 생각하는 스파이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애써서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고. 눈치챌 정도의 엉성함도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미 성공적인 첩보 영화의 한 예인 [공작]과는 대척점에 들어있는 또 다른 스파이 영화의 예로 남게 될 듯하다. 물론 좋은 쪽에 속하는 예시로.
열정을 실력으로 바꾸는 사람들의 행보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대단하다.
차용하고 있는 거울의 모티브는 불식 경설화와 이규보의 경설에서 따왔음.
[불식경 설화]는 한 번도 거울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남편이 사 온 거울을 본 아내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고. 화난 아내에게서 거울을 받아 든 남편은 외간 남자가 비치는 것에 놀라 화를 냈다는 이야기임.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이념의 거울을 처음 본 두 남자가 서로의 이념에 화를 낼 수밖에 없음을 빗대 차용함.
이규보의 [경설]은 거울에 먼지가 쌓여 흐릿해진다 해도 무언가를 비춘다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 어차피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거울이 있을 테니 그 본질이 결국 두 사람을 오월동주가 아닌 동상이몽의 파멸로 이끌게 했음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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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시간을 돌아 도착한 어디에도 없던 여행
난 <아사코>를 좋아한다. 뭐랄까, 난 이 이야기가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같은 순간이 조금씩만 다르게 벌어진다고 해서 사람이 더 나은 선택지만 고른다는 보장이 없다. 굉장히 멀리서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길만 걷는다. <아사코>는 이것이 삶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더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두 인물의 미래를 어마장장하게 긍정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비틀었다는 것이, 바라는 대로는 이뤄진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삶은 기회를 준다는 걸 표현한 것이다. 작품 자체가 워낙 탁월하니 막연하진 않더라도 현실적인 희망을 얻고 싶은 분들은 이 영화를 추천한다.
난 강박이 있는 편이라 사소한 것도 잘 기억하는 성격이다. 이런 나도 이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을 다 기억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사람 이름 외워야지' 싶어 암기하는 경우도 몇 있긴 하겠지만 그건 내가 방금까지 하다 온 자격증 공부에나 해당하는 일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외워지는 경우가 대다수겠지? 한국인이라 그런가? 다른 나라의 감독 작품을 볼 일이 없으니 내 입장에서도 일본 감독들의 이름을 친근하지 못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오며 가며 일본의 제작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퀄리티가 있는 작품을 못 뽑는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나라의 작품 만드는 질 자체도 요즘 영 시원찮은 부분이 있는 셈이다. 자, 이렇게 맞이한 2021년에서, 올해 한 명의 일본 감독이 세 편의 각본을 썼다. 올봄에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가 첫 번째고, 이 글에서 다룰 <드라이브 마이 카>가 두 번째이며 이제 개봉을 앞둔 <우연과 상상>이 세 번째다. <스파이의 아내>는 역사와 개인 사이의 딜레마를 아오이 유우의 연기력을 200% 뽐내는 디렉팅으로 마무리했다면 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간 내면이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보게끔 도와준다. 이번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무려 봉준호 감독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난 이 일주일 남짓 남은 올해 개봉작 중 최고로 뽑고 있고 이는 나뿐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위대하고 젊은 아티스트가 우리를 데리고 세 시간짜리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한번 같이 출발해보자.
1. 어떤 영화인가요?
이해에 관한 영화다. 과연 나는 나를 이해하고 있을까? 아마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25살의 크리스마스를 맞은 지금 난 그제야 내가 외롭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 자신을 먼저 이해해야 타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평생을 살면서도 자신을 알기 어렵다. 이렇게 되니 타인까지 안다고 하면 붙는 조건이 많아지기 때문에 점점 성공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쉽게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쉽게 바라고. 쉽게 기대하고. 쉽게 실망하고. 쉽게 판단하고. 쉽게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근데 우리는 복잡한 겹겹이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슨 행동의 동기가 하나가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존경심. 사랑. 분노. 애증. 이런 감정의 뒤죽박죽 속에서 어떤 게 인간에게 가까운 지를 탐구한다. 언제는 A처럼 행동했다 다음번에는 B를 취하는 인간의 마음 중 어떤 것에 가까운 지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의 답을 알게 된다. A와 B 둘 다 그 사람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정말 중요한 건 A 거나 B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을 품고 있는 마음 그 자체지. 그리고, 그 행동의 원인에 집착하다간 그 사람을 놓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이 작품은 이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별. 어렵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이별한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또 평범해지는 게 두렵다. 난 그 사람이 특별해서 그분도 나를 특별하게 여겨줬으면 좋겠는 맘이다. 나는 평범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시해지면 끝인 <꿈의 제인> 속 대사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공포가 너무너무 싫은 것이다. 이 마음을 곧이곧대로 다 전하는 건 좀 느닷없을 것 같아서 이걸 카톡으로 말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근데 이런 마음을 품고 살게 되면, 이 잔여물 덕에 사람이 더 아프게 되는 것 같다. 회한이나 궁금증, 풀지 못한 슬픔이 남아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처 떠나보내지 못했던 마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또 이 상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지점에 대해서 질문하는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아마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솔직함이라고도 답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 솔루션에 동의했다. 우리가 슬픈 터널 안에 있다면, 더 정면으로 부딪히자. 어차피 이 인생이란 길에 낙원이란 없다. 끝없는 긴긴밤과 낮의 연속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에게 한마디라도 더 하는 삶을 보내자. 이게 하마구치 류스케가 말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감독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키워드를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며 관객을 설득하니 관객이 두 번째 승객이 된 것처럼 마음의 진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2. 사전에 알고 가야 할 지식이 있나요?
바로 안톤 체호프가 1889년 집필한 <바냐 아저씨>라는 희곡이다. 사실 나는 이 것에 대한 정보를 단 1도 모르고 가긴 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근데 확실히 이 정보를 알고 나서 봤다면 작품의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
<바냐 아저씨>는 희곡이다. 주인공 바냐 아저씨가 나오고 그의 매형이 있다. 바냐 아저씨는 문화예술계와 학계에 입문하고 싶어 하는 그냥 소시민 1이다. 근데 막상 본인이 창작을 하라고 한다면 겁이 나서 두려운 바냐 아저씨. 그렇게 위대한 작품을 쓸 거라고 믿었던 바냐 아저씨는 매형에게 뒤통수를 맞게 된다. 매형은 그냥 돈과 여자를 좋아하는 속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삶의 동기부여까지 잃은 그. 희망을 잃어 자살을 시도하지만 결국 그 마저도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바냐가 거의 딸처럼 키웠던 쏘냐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때 위로받으며 했던 대사는 이 것이다.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다.
이 대사는 영화 전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그렇게 나름의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도 후원했던 바냐 아저씨. 어떤 벽에 부딪혀 모든 걸 포기하고자 했다. 이때에 자기 자신을 내려놔 쏘냐에게 위로를 받았으니 희곡의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단연 소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출자 가후쿠는 이 연극의 캐스팅을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한다. 한국인부터 시작해서 일본인, 그리고 필리핀 사람까지 아시아에서 모인 사람들이 연극부의 일원이 된다. 심지어는 수어로 대화하는 사람도 합류하게 된다.- 심지어 이 수어로 대화하는 역의 배우는 한국인이다!- 이렇게 소통을 키워드로 하는 연극을 만들며 딱딱한 시나리오 테스트에서 벗어나 배우와 배우가 자연인으로 만나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 영화 전부의 내용이다. 이에 대해 알게 되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연극 신이, 또 다키츠키와 가 후쿠가 술집에서 벌이는 대화가 이해가 쉬울 것이다.
3. 3시간의 러닝타임! 보는 게 어렵진 않나요?
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봤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첫 번째 봤을 때는 졸지 않았다. 깔끔하게 영화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이버에서 이런저런 후기를 보니 내가 놓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 후반부의 엔딩 바로 직전 시퀀스에서 주는 감동과 내가 놓친 부분을 다시 보기 위해 오늘(25일)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졸았다. 아침 9시의 조조영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영화는 사실 느릿느릿한 편이 맞다. 천천히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간다. 근데 그 감정선이 대놓고 분출하는 쪽은 아니다. 주인공 가후쿠는 내면을 드러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갖고 있는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후반부에 보여준다. 그래서 마블 영화라던가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와 같이 로맨스 코미디물에 익숙한 관객들은 지루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나는 확신할 수 있다. 첫 번째 관람 때 영화관을 나오며 느꼈던 기분이나, 두 번째 관람 때 초반부를 졸았음에도 영화에게 가졌던 감정은 그 어떤 작품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러닝타임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대사량이 많다는 게 영화 초보자분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자체의 플롯, <바냐 아저씨>라는 희곡, 또 가후쿠의 아내가 만든 스토리라인이 있다. 이 뿐인가? 차에서 대화하고, 술집에서 대화하고, 눈 밭에서 대화하고, 대화량이 쏟아지기 때문에 집중 잘 못하면 내용에 못 따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 이 작품 상영관이 정말 적다는 말이 있다. 걸려 있을 때 보시길! 그리고 풍광이 아름다운 신이 몇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4.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은 어떤가요?
일단 난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 살고 (자칭) 씨네필로 살다 보면 한국인 배우들에 익숙해진다. '너 <낫아웃>의 정재광 배우 아냐?'같이 모를 법한 분들의 이름을 아냐고 물으면 당연히 모르겠지만 난 나름 잘 아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구교환, 이주영 배우 둘 다 <DP>나 <이태원 클라스> 이전에도 알았는걸? 암튼,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배우들을 잘 안다는 이점이 무색하다.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국제적으로 호평받는 감독에 '박유림'이라는 아예 처음 들어보는 배우가 캐스팅됐다! 그리고 심지어 사랑스러운 연기 지망생 역을 꽤나 잘 소화했다! 그뿐일까? 이 사람은 수어로, 눈빛으로 대화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무리가 없다! 중간에 밖에서 어떤 인물과 대화하는 신 보면 '연기하는 연기'가 생동감이 있다. 이렇게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연출력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배우들의 연기력을 뽐내는 디렉팅을 통해 잔잔해 마음이 함께 이동하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미사키-가후쿠 두 배우의 연기 합도 괜찮지만 나머지 조연들도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몰입이 깨질 일은 없을 듯. 난 미사키 역을 맡은 배우가 기억에 남는다. 뚱한 표정으로 깊은 슬픔을 가진 사람은 연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해내는 것 보면 신기하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하지?
5.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습니다! 각본이 가진 강점을 뽑아보자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뭐냐면,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서다. 난 많이 외로운 사람이다. 말이 많은데 그 대화의 욕구
(?)를 해소할 창구가 없어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다. 책 쓰면 그 나름대로 좋겠지? 아무튼 나는 이런 욕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목적과는 다른 행동을 한다. 내가 느낀 걸 그대로 오롯이 쓰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의식해서 쓰는 것이다. 그럼 보통 읽는 사람들이 알더라고. 집중이 안된다는 걸. 나는 각본을 써본 적이 없어 각본가들의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근데 각본가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딜레마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로 돌아가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사람이 천천히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형상화했다. 그니까 '나는 이 영화로 사람의 마음을 묘사할 거야'라고 마음을 먹었겠지? 글을 쓰기 전에? 나 같으면 '이리저리 해서 저렇게 마음이 변하더라고'라고 써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던 과정을 각자가 생각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구린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각본을 쓴 감독은 주인공의 잔잔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 일상을 자세하게 풀어줌으로써 인물들의 성향 내면에 있는 한 부분을 보여준다. 정공법이 아닌 비스듬히 스치는 방식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함께 따라가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각본의 힘으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상처와 치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말한다. '이러저러해서 그렇게 됐어'라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보법이 어떤지를 제시해 알아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난 이걸 따라가다 보니 그런 걸 느꼈다. 후회와 미련으로 나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것,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중요한 건 나의 마음 다른 부분을 쳐다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는 걸. 영화를 보는 분들에게 100% 확신한다. 아마 많이 다를 것이다. 기존의 문법과는. 극복이라는 키워드를 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치유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것도 맞다. 그런데,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어떻게? 각본의 힘으로. 여러모로 고민한 티가 난 각본이 관객에게 그 힘을 보여준다.
6. 어떤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가요?
생각이 많은 사람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 이들에게 더도 없는 시네마 여행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올해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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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브스턴스에서 가장 현실적인 공포는 엘리자베스가 데이트를 앞두고 계속 거울 앞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이다.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때는 꽤나 만족스러웠지만, 전광판 속 젊고 아름다운 수를 보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결점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다시 립스틱을 바르고, 목주름을 감추고, 화장을 덧칠하지만 수정할 부분은 끝도 없이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거울이라는 자기혐오의 늪에서 얼굴을 뭉개버린다. 여성의 외모와 나이로 가치를 부여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도,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없다. 엘리자베스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서브스턴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They are going to love you.’, 즉 사랑받을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과 외모에 가치를 부여해 사랑을 주고, 다시 회수하는 방식으로 길들인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현실의 강화된 버전으로 이러한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작동하는 곳이다. 특히나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는 피트니스 쇼는 ‘자기 관리’라는 미명 하에 여성들이 더욱더 스스로에게 가혹해질 것을 요구한다. 이 쇼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제작자를 비롯해 모든 결정권자들은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운동복을 입은 출연자들은 남성들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동시에 여성들에게 자신을 아껴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완벽한 몸‘이라는 환상을 판매하는데, 이때 여성들이 자신을 아껴주는 방법은 몸을 옥죄는 운동복을 입고 신체 부위를 성애화하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이 환상의 대리인은 쇼의 출연자들이며, 환상의 판매자는 여성의 몸과 외모에 가치를 부여하는 남성적 시선이다.
완벽한 외모와 몸을 자원으로 사랑받아 온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시스템의 보상에 길들여져 왔다. 아름다워질수록 자신을 향한 환호는 커졌을 것이다. “여자는 50 넘으면 끝”이라고 말하며 더 젊고 아름다운 인물을 찾는 제작자에 의해 엘리자베스는 가치가 떨어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더 젊고, 더 나은 자신을 향한 엘리자베스의 무자비한 욕망의 근원은 가부장제의 보상체계 안에서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은 마녀로, 패배자로 그려져 왔다. 아름다운 수에게 자기 자리를 뺏긴 후 엘리자베스는 코트로 몸을 감싸고 도망치듯 거리를 걷고, 젊은 남성에게 수모를 당하고, 혼자 있을 때조차도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 피폐해진 엘리자베스가 잠깐 생기를 찾을 때는 동창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승인해 줄 때뿐이다. 반면 사랑받는 여성은 권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권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누가 승인하는 것인지를 영화는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이 세계를 공고히 유지시키는 것은 제작자 하비와 남성 권력자들이며, 아름다움의 탄생에 찬사를 보내고 동조하는 언론과 대중의 시선 또한 공범으로 지목된다. 시스템 안에서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한 엘리자베스와 수는 계속해서 탄생하며, 엘리자베스와 수로부터 변형되고 분절된 버전인 괴물, 즉 ‘몬스트로 엘리자수’ 또한 계속해서 탄생할 것이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던 보부아르의 말을 생각한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자신이 원해서 태어났나요? ‘더 젊고, 더 나은 나’에 대한 환상은 여성에게 유독하다. 마지막에 그 유독성 가득한 피를 무대에 난사할 때 해방감 섞인 쾌감을 느꼈던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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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돌아 보아도 괜찮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과 손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다. 소리를 매우 예민하게 들려주고 무언가를 몰래, 물끄러미, 혹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녀와 그녀의 꿈을 보여 준다. <클레오의 세계>는 아이인 클레오가 느끼는 촉각과 시각, 청각적인 자극을 아주 민감하게 잡아내고, 세상을 떠난 엄마 대신 자신을 돌본 베이비시터 글로리아와 만들어낸 애착 관계를 영화를 통해 마음껏 전달한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과 같이 영화는 클레오의 세계, 그리고 클레오가 성장하면서 일어나는 확장에 대해 말한다.그러나 <클레오의 세계>는 아름답고 눈부신 성장, 낭만적인 여름 휴가로만 들어차 있지 않다. 감독은 아이의 세계를 혼란이나 상실의 감정, 그리고 힘겨운 배움을 통해 확장한다. 어쩌면 성장을 다루기에 조금 어색해 보일 정도로 완성된 연기를 지닌 배우를 통해, 클레오는 어떤 때에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모래사장을 달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서럽게 울거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여름 방학을 맞아 방문한 동네에서 죽음과 탄생, 관계의 형성과 부재를 모두 보여 준다.클레오는 애착 관계를 베이비시터인 글로리아와 형성했다. 그리하여 살을 맞대고 자란 존재와 분리되는 일을 당장 겪어야 한다. 특수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관객 모두가 하는 경험을<클레오의 세계>는 스크린에 재현한다. '분리'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하지 안흔다. 바로 부모를 비롯한 가족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것, 그들이 나와는 다른 개인이고 가족은 어떤 형태의 집합 중 하나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클레오가 글로리아의 삶, 즉 그녀의 집을, 추억을, 아이들과 이웃과 앞으로의 그녀의 계획을 천천히 살펴보고 또 죽음과 새 생명의 탄생을 목격하는 것은 곧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클레오는 울고 웃기도 하고, 달리고 수영하기도 하지만 단순한 묘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쌓아올리거나 잘못된 행동에는 사과함으로써 관계를 지키는 경험을 한다. 또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울음을 그치는 방법을 익힌다. 그리고 감정이 부풀어 올라 어쩔 줄 모르겠는 순간이 오자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일을 저지르고 성공해냄으로써 스스로 해결해내고야 만다.상실이나 부재로부터 성장의 발걸음을 내딛는 이야기는 아주 드문 이야기가 아니다. 언어를 붙여 설명하든 그렇게 하지 않든, 피부를 맞대고 식탁에 둘러앉아 평생을 보내 온 사람과 정신적으로 분리되는 경험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올해 개봉한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이나 셀린 시아마 감독의 <쁘띠 마망> 또한 그러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 신경숙 작가의 그 유명한 소설 '엄마를 부탁해'조차 부재, 상실, 성찰로부터 뻗어나가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클레오의 세계>가 가지는 특별함은 그 감각과 감정을 통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클레오가 꾸는 꿈 같기도 하고 기억 같기도 한 이미지를 회화로 만들어낸 스톱모션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도 잘 기억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의 감각을 되살려낸다. 그리고 영화의 언어로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관객은 말로 듣기보다는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향수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클레오의 세계>만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 이별의 순간에 관객은 클레오가 또다시 뒤돌아 볼지라도 결국을 스스로 헤엄쳐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알게 된다.*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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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예술
마이 뉴욕 다이어리
줄거리
1995년 뉴욕, 대학생인 조안나는 우연히 여행 온 뉴욕에 머물며 작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당장 수입이 없어 작가 에이전시에 비서로 취업하게 된 조안나.
출근 첫날부터 ‘호밀밭의 파수꾼’ 작가인 샐린저의 팬레터에 정해진 양식으로 답장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나'의 예술
숨은 의미 찾기
조안나의 곁에는 전남친 칼과 현남친 돈이 있다. 이들은 조안나의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다. 어느 사람의 곁에 있는지,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에 따라 조안나가 나아가는 방향이 시시각각 틀어지기 때문이다.
현남친 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허세에 찌든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돈은 독립서점을 운영하며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다. 그는 오랫동안 새로운 책을 출판하지 않는 샐린저를 두고 '진짜 작가가 아니다'라고 비난하거나, 유명 잡지사를 비꼰다거나 하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게다가 벌이가 시원찮으면서도 굳이 한 달에 500달러짜리 아파트를, 그 아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조안나 이름으로 계약하거나, 조안나가 쓴 글을 보며 비웃는 등 여자친구에게는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이 제 글을 착실하게 쓸진 모르겠으나, 이런 모습들에서 그가 오랫동안 등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조안나는 그런 돈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아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안나는 뉴욕에 우연히 여행 왔다가 이곳에 반해서 정착했다. 자신의 글로 성공하겠다는 일련의 목표를 세웠지만 오래 머물수록 그 목표와는 멀어진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면 작가와 가까워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글 쓰는 시간만 줄었다.
"넌 글도 안 쓰고 있잖아."
"나도 안 쓰는 건 아니야."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결혼 때문에 뉴욕을 떠나겠다는 친구에게 '넌 진지하게 작가가 될 마음이 없었구나'라며 은근히 비난하는 말을 한다. 그 말에 발끈 한 친구는 '돈은 글을 쓰고라도 있지'라면서 손 놓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안나에게 팩트 폭력을 때려버린다. 그러자 조안나는 변명한다. 자신도 팬 레터에 답장하기 위한 편지들을 쓰고 있다면서.
그녀는 엉뚱한 곳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팬 레터에 답장하는 것이 자신이 이 뉴욕에 정착한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이는 돈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작가 지망생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것처럼 일종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직시하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 같기 때문이다.
조안나는 변명은 점점 더 늘어난다. 글을 쓰고 있냐는 샐린저에게 그녀는 일이 바쁘다고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다 알고 있다. 자신이 변명할 뿐임을, 이미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와서 느꼈던 열정과 열의는 다 꺼져버렸음을.
그런 상황에서도 조안나가 돈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건, 지금이 안락해서이다.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피나는 노력을 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때의 피나는 노력은 단순히 등단이라기보단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예술을 제 안에 정착시키는 과정이다. 사실 조안나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조차 모른다. 그저 대학 공모전에 한 번 당선되었다는 것 외에 그녀에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도 없다. 도무지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조차 모르기에, 차라리 변명하고 외면하는 지금 이 상황이 더 안심되는 것이다.
전남친 칼의 편지를 읽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이와 같다.
잠깐 나오긴 하지만 칼은 플루트 연주자다. 자신만의 길을 확실하게 정해두고, 그 방향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조안나는 한때 그의 곁에 머물며 그에게 의존했다. 칼이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일종의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들 글이나 읽으면서 분석하는 게 아니라, 진짜 내 글을 쓰는 거야."
뉴욕에 머물기 전, 조안나는 제법 안정적인 길을 확보했으나 뉴욕에서 돈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뀐다. 막상 불안정해도 자유로운 돈의 모습을 보니 그쪽에 속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돈에게 속한 이상, 이미 바뀌어버린 자신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명확한 방향을 정해 나아간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칼에게 제대로 된 이별 통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중간 어디쯤 꽉 끼어버린다.
조안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드디어 샐린저의 책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다잡게 된다.
그녀는 칼과 돈에게 의존하던 마음을 바로 세운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하고자 했던 예술이 무엇이었는지 갈피를 잡게 된다. 그녀는 여태껏 왔던 팬 레터를 읽으며 수없이 많은 질문을 고민하고 그에 대해 한 글자, 한 글자 친절한 답장을 시로 써낸다.
타인과 소통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것.
위로와 격려를 또 다른 편지로 써서 세상에 부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진정 바라던 예술의 형태였던 것이다.
다 써낸 원고를 잡지사에 갖다주고 나서야 조안나는 샐린저의 주머니에 팬 레터를 넣게 된다. 이제 팬 레터가 제 주인을 찾아가야 하는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샐린저에게 들어간 편지는 또 어떤 예술이 되어 나타날까. 그것을 기대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내' 이야기?
감상평
한동안 멍했다. 상징을 뜯어내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저 가만히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보고 나오니 어떤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영화 자체가 컷편집이 너무 많은 탓에 뜨문뜨문 기억나는 탓도 있지만, 아마 너무 내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내용이라서 팩트 폭력 맞고 2000원 추가된 듯.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내가 멈춰있음을 인지하기도 힘들 만큼. 그럴 때면 어김없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글이 좋으면서 싫었다. 애증을 품은 채 내 글을 읽으며, 나는 대체 왜 이러고 사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요즘은 일부러 리뷰나 에세이를 따박따박 날짜 맞추거나 분량 맞춰서 쓰지 않는다. 정말 쓰고 싶을 때만 한다. 이 영화도 내가 보고서 리뷰 쓰고 싶다고 생각해서 봤다. 애초에 리뷰와 에세이 모두 내가 좋아서 시작한 거긴 하지만, 최근 들어 의무적으로 느끼는 것 같길래. 우선순위로 의무를 가져야 하는 건 소설인데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인생에 정해둔 우선순위가 밀려나지 않게 항상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울림을 주는 영화였다. 젊은 날을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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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통째로 연기한 여자, 연기를 삶처럼 사는 여자
전에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부녀인 선생이 13살의 제자와 바람을 피웠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슥 읽고 지나칠 때는 쉽게 평가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 가볍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메이 디셈버>는 그러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를 오래도록 깊게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과정의 호흡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이렇게 디테일하고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는 조금 힘들긴 하다. 눈여겨둘 부분이 굉장히 많아져서.
제목이기도 한 <메이 디셈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제목의 주인공인 그레이시와 조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는 배우, 엘리자베스를 기꺼이 집에 초대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엘리자베스가 처음 그들에게서 본 모습은 가족과 이웃이 모여 뒷마당에서 즐겁게 어울리는 장면이다. 바비큐를 굽고, 핫도그를 만들어 먹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아마 이것이 부부가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일 거라 생각한다.
"우린 행복해요!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요!"
분명 그들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른 이웃들도 그들에 대해 칭찬 일색이며, 아픔을 건드리지 말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두드린 문은 의외로 쉽게 열린다. 그녀는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들고 가서 전해준다. 아마 부부의 관계를 모욕하는 혐오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택배를, 그레이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버려 버린다. 하지만 그날 밤, 조는 침대에서 홀로 숨죽여 울던 그레이시를 안아준다. 여전히 그들은 괜찮지 않고, 완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불편한 노크로 그들의 일상을 침범한 엘리자베스가 영역을 확장해나가자, 그레이시는 점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단단해 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케이크를 매번 주문해 주던 이웃이 이사를 간다고 주문을 취소해버리자, 어린애처럼 엉엉 울부짖는다. 단순히 사랑 앞에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건지, 그녀가 불안정한 상황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깊게 심취한다. 점차 그레이시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비슷한 화장을 하며 말투, 손짓과 행동까지 비슷해진다.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외모 탓인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닮긴 닮았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시종일관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조는 엘리자베스와 만날 때면 제법 또렷한 눈을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젊었을 적을 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걸까? 속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조는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직장을 보여주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랫동안 자신이 숨겨놓았던 그레이시의 편지를 건네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린 두 사람은 관계를 맺지만, 이내 자기 인생을 '이야기'라고 부르는 엘리자베스에게 질려버린 조는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그레이시와 말싸움을 하게 된다.
"왜 얘기를 못하는 건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맞는다면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유혹했잖아!"
폭발한 조의 외침에 그레이시는 교묘하게 조에게 탓을 돌린다. 그동안 그레이시 앞에서 한 번도 어린애 인적 없었던 조는, 어린애이고 싶은 마지막 발악에 대응해 주지 않는 그레이시에게조차 질리는 듯하다.
그 사이, 편지를 읽고 그레이시와 완전히 동화된 엘리자베스는 홀로 독백 연기를 한다. 그레이시의 편지를 마치 조에게 말하는 것처럼 읽으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선을 넘었다고 해. 하지만 그 선은 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인 듯 아닌듯한 중요한 맹점이다. 그레이시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남들을 가스라이팅 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어린 학생이었을 조에게 '선'을 운운하며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사회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조가 생각해 봐야 했을 문제에 대해 덮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를 엘리자베스에게 주어버린 조는 철장 밖으로 나온 나비가 되었다. 한 번 진실을 바라본 순간부터는 다시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불안정한 사람들은 정말 위험하죠. 나는 아주 단단해요."
하지만 그레이시는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을 믿는 듯하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앞으로 되돌아가 엘리자베스의 대사 하나를 더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헷갈려.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싫어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배역을 맡아요?"
"회색 지대에 있는(도덕적으로 모호한) 게 훨씬 흥미로우니까."
성관계를 맺는 연기를 해봤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엘리자베스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나체로 부딪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리듬이 생기는데, 그 리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편이라고. 연기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게 된다고. 그레이시와 조의 삶은 이러한 리듬에 맡겨진 연기는 아니었을까. 어떤 쪽이 진실인지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더불어 엘리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자신을 뚜렷하게 정의 내리거나 온전히 안정적이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 때문에. 영화 초반에 엘리자베스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지만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는 등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반지는 끼고 다니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엘리자베스는 '연기'라는 매개를 통해 '도덕적으로 모호한' 사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게 되면 모호해진다.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피해자인지. 사회가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정답이 되지만, 그들의 화학작용을 그대로 보았을 때 판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나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도 그레이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치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동 성범죄자라서가 아니다. 조가 피해자라서도 아니다. 그녀가 조를 비롯한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비밀을 지켜야 해."
정말 조를 사랑했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비밀 연애를 할 게 아니라, 조가 성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변치 않는지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주었어야 맞는 것이다. 물론 누구의 강요도 없이 조가 자발적으로 그레이시가 사회와 격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을 전부 기다려주긴 했다. 하지만 자녀가 생겼고, 자녀를 조가 한 지붕 아래서 키웠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교묘한 가스라이팅의 대가인 그레이시보다 더 무서웠던 건 엘리자베스였다. 정확하게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이랄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레이시가 되고 싶어 한다. 그건 연기에 대한 열정이 아니다. 그저, 그 도덕적으로 모호하고 법이라는 잣대로는 판단 내리기 어려운 그 인물 자체가 되고 싶었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저지르지 못할 일들을 하며 즐기는 듯한 모습이 소름 돋기도 했다.
하지만 삶을 통째로 연기한 사람과 연기를 삶처럼 사는 사람, 두 사람 다 무섭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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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 리그 : 축구의 몰락 - 축구 카르텔의 실체와 민낯 l 지금 바로 왓챠에서 감상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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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동안 유럽 대형구단주 12개팀이 유럽축구연맹과 프리미어리그에 대항해 수퍼리그를 결성하려다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기까지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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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임파서블 / 시리즈의 화려한 피날레 / 파이널 레코닝 / 톰형의 씹어먹는 액션 / 톰형이 찢었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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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우먼 인 윈도>
[2021년 5월 14일, 넷플릭스 공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세상은 창문 너머로 바라봐야 안전하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에이미 애덤스). 그녀가 건넛집에 이사 온 러셀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목격한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지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광장 공포증으로 집에서만 지내는 정신과 의사. 그녀는 건넛집에 이사한 가족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창문 너머 잔혹한 범죄를 목격한다. 진실을 찾으려는 그녀의 집착, 그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