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로진2024-09-05 11:01:54
리얼리티 가족 다큐멘터리
9/11 개봉영화 <장손>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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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성 발언.
나는 여자다. 그리고 김씨다. 조부는 종가집 장손이었다. 무려 4대 독자! 그리고 대망의, 내 본적은 경상북도다. 나는 순혈이다. 지독한 가부장제의 순수혈통. 종친회에서 고칠 데를 손 봤다는 올칼라 족보를 만들었고, 여전히 나는 남동생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가족 소개 같은 숙제를 하면 아버지가 그리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무슨 김씨 무슨 파 무슨 왕의 몇대손이며 우리 할아버지는 몇대 독자고 어쩌고 저쩌고. 어릴 때는 그게 자랑인 줄 알았더랬다. 그리고 좀 커서는 족보를 샀겠거니 생각했다.
커서 보니 쓸 만한 유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나와 내 동생과 아버지와 할아버지 등등과 비슷한 모습일진대 무슨 놈의 대를 그렇게 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도대체 이 족보주의에서, 순수 혈통을 이어가서 얻는 게 무엇인가. 그 유전자를 굳이 길이길이 남겨야 하는가.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물론, 뭐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어서 아무도 병원에 안 오고, 내 이름이 뒤에 아들 낳는 이름으로 지어질 뻔하고, 족보에도 올려주지 않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무슨 왕정 제도를 미시체계에서 이룩한다는 게 좀 우스우니까. 장남을 왕세자에 책봉하고, 훗날 왕위를 물려주는 것마냥 일개 가정에서 신수왕권설 같은 걸 주장하는 게 이상하니까.
자, 개인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은 까닭은 영화 <장손>이 픽션이기 때문이다. 픽션인데,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 픽션.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장손에 관한 이야기'다. 너무도 핍진하여 두 시간 동안 경상북도 김씨 가족의 차남의 장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그 이야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건
족보와 장손밖에 없다. 장손을 제외한 나머지는 흩어져야 산다. 영화는 가정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층위의 갈등을 두 시간 동안 보여주는데, 그 갈등이 비단 가정 내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프랙탈은 일부를 확대해 보면 전체와 동일한 모양이 반복되는 구조를 말한다. 그러니까 '선산 김씨'네 가정은 대한민국의 프랙탈이다. 영화는 가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나 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서사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선산 김씨'네가 유난스럽지도, 특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몇 개의 갈등이 중첩되면서 켜켜이 쌓인다. 그 갈등이 새삼스럽지도 않다. 제법 클리셰적인 갈등이다.
자기네 조상 제사를 지내는데 김씨 아닌 사람들만 모여 앉아 전을 부치고, 김씨들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화투 치고 맥주를 마신다거나, 장손이 올 때까지는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거나.
6.25 전쟁 때 빨갱이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고장난 라디오처럼 말하는 노인과 노인의 얘기가 궁금하지 않은 손자, 사업으로 부자가 된 자식과 사는 게 녹록지 않은 자식. 애초에 돈 되는 공장은 아들 주고, 낡은 집은 딸을 준 유산 분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와 세대갈등과 남녀갈등이 총체적으로 한 가정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두부 공장'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두부가 바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음식 아닌가.
두부를 잘 뭉치려면 쌩노가다를 해야 한다. 원래는 가정 내에서 만들었다(아는 척하는 이유는 내 외조모가 두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산 김씨네 두부공장 역시 처음에는 가정 내에서 조모인 오말녀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말녀는 며느리가 공장에서 찍어내는 두부가 못마땅하다.
두부 공장 씬에서 장남인 태근이 일하는 모습은 스케치로도 거의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일하는 사람은 손녀사위다. 그런데 사장은 당연히 태근이다.
간단히 설명된다. 이 가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여자와 여자와 여자와 여자들이다. 다시 프랙탈. 유사 이래로 놀고 먹은 여자는 소수다. 장손이라 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어쩌고저쩌고 한 것만 같지만, 사실상 장손 혼자서 가정을 부양하고, 조상들을 제사지내주지 않는다.
조모는 장손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조부는 규범과 같은 상징체계에만 관심이 있다면 실질적으로 현실화하는 사람은 조모다. 장손이 올 때만 에어컨을 켜 주고, 장손의 어릴 적 이야기를 신화처럼 반복하고,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감시하는 여자. 장손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여자. 장손이라는 고귀한 존재를 만들어 희생을 합리화하는 여자. 어쩌면 장손은 고된 여자들이 만든 신화다.
그러니 사실 여자들이 뭉치지 않고 흩어지는 순간, 장손? 그게 뭔데.
가족의 미래
영화의 초반부에 제사 준비를 하면서 오말녀는 딸에게 '상조보험'에 가입하라고 재촉한다. 보살이 집안에 초상날 것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 하나 죽긴 죽겠구나' 하고 예상하게 된다.
누가 죽을까. 가족의 미래를 점쳐보자.
1. 김승필(장손의 조부)의 사망: 매우 자연스럽다. 나이도 많고, 대장암 수술을 해서 건강도 좋지 못하다. 제사를 꼭 자정에 맞추어 지내야 한다는 매우 고지식한 사람이다. 입만 열면 빨갱이 타령. 김승필이 사망한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주도권이 김태근에게 넘어갈 것.
2. 김태근(장손의 부)의 사망: 장손의 모가 농담으로 하는 말. 하도 미워서 잘 때 한 대 때렸다. 죽지도 않고 왜 깼냐. 뭐, 슬프지만 장손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두부 공장과 관련된 이슈가 발생할 것. 공장은 서울에서 연기하는 장손에게 갈 것이냐, 공장에서 일하는 손녀사위에게 갈 것이냐.
3. 김성진(장손)의 사망: 큰일난다. 이 가족 망한다.
4. 오말녀(장손의 조모)의 사망: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실질적 가장. 오말녀는 현재 매우 건강하고 꼬장꼬장한 노인이다. 한글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하다. 오말녀가 죽는다면 장손 판타지로 이어온 가정은 붕괴된다. 오말녀만큼 장손을 우쭈쭈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
5. 그 외 여자들의 사망: 서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서 큰 사건이라 함은 누군가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장례식은 별 탈 없이 잔잔하게 살던 가족에게 던져진 돌멩이가 아니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는 겉잡을 수 없는 와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장례식을 계기로 드러났을 뿐.
<장손>은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독립영화상과 오로라미디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감독이나 출연진, 줄거리, 어떤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갔다. 두 시간 동안 경북에 본적을 둔 여성을 미치게 만드는 솜씨에 무슨 상을 받아도 받았겠거니 예상만 했다.
이 영화에 다양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탁월한 이미지를 꼽고 싶다. 오래된 한옥에 사는 노인들의 출입을 쉽게 하려고 문간에 걸어둔 동앗줄 같은 디테일. 동그란 손잡이가 달린 줄조차도 굉장히 의미심장해 보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압권인데, 장손 성진이 택시를 타고 떠나고, 성진을 배웅한 노인은 눈 쌓인 비탈길을 아주 오래 걷는다. 롱테이크로 잡아낸 그 장면은 마치 서편제 같다. 뭐 대단한 걸 하고 돌아서는 장면 같다는 뜻이다.
택시를 탄 성진의 얼굴에 아침해가 날카롭게 비친다. 성진은 눈을 찡그린다. 빛을 보는 대신 눈을 가려 버린다. 그런 디테일에서, 이 가부장제라는 망령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장손 성진의 손에서는 결코 낡은 시대가 종언되고 새로운 체제가 구축되지 않을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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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그땐 그랬지' 정도의 픽션,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고통, 또 누군가에게는 피해망상,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관습'.
<장손>은 픽션이 아니다. 리얼 다큐멘터리다. 추석 직전에 개봉하는 만큼, 가족과 함께 보면... 과연 괜찮을까?
장손(House of the Seasons, 2024)
감독: 오정민
출연: 강승호, 손숙, 우상전 외
러닝타임: 121분
개봉: 2024. 09. 11.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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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 우화!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다. 10명 중 6명은 아파트에 살 정도로 타 국가에 비해 거주자 수가 많다. (필자도 아파트에 산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아파트에 몰리는 건 주택, 빌라 보다 더 나은 편의성 때문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그 놈의 돈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곧 돈이자 권력인 셈. 이로 따라 차별과 계급, 집단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상황 속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피부에 와닿는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을 그린다.
대지진이다. 거짓말처럼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거짓말처럼 유일하게 황궁 아파트만 멀쩡하다. 아파트 주민은 기적과도 같은 현실에 기뻐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재난에 살아남은 이들이 이 아파트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자신의 보금자리와 식량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외부인들을 쫓아낸다. 이때 본의 아니게 피 흘리며 선봉장 역할을 한 영탁(이병헌)은 대표로 추대된다. 평범한 공무원인 민성(박서준)은 아파트 주민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영탁과 함께 일하고, 그의 아내 명화(박보영)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불안감을 내비친다. 안정적이면서 폐쇄적인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가는 도중, 과거 이 아파트에서 살았던 혜원(박지후)이 들어온다. 그리고 영탁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쌓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의 재난은 설정에 불과하다.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건 폐허가 된 상황 이후, 살아남은 이들의 행동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사회를 견고하게 가져가기 위해 똘똘 뭉친다. 폭력을 쓰면서까지 어떻든 자기 마을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첫 행동이 바로 외부인을 몰아내는 것이다. 가족과 마을을 위한 일로서 이해되지만, 한편으론 그 행동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재난 이전 옆에 있던 고급 아파트 드림팰리스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왔다. 아파트도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니까. 그러다 황궁 아파트만 남게 된 상황에서 부녀회장 금애(김선영)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 드림팰리스에 살았던 이들을 몰아낸다. 차별은 차별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걸 잊어버린 채 이들은 폐해가 된 곳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한다.
문제는 주민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이전 사회의 폐단을 반복하는 것에 있다. 극 중 금애는 다 평등해졌고, 리셋된 거라고 말하지만, 아파트 내에서 참여도와 공헌도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고, 그에 따른 생필품과 식료품이 차등 지급된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게 나름 이성적인 판단이고, 다수결을 통한 주민들의 선택은 옳아 보이지만, 결국 이 결정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을 낳는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으로 범죄 행동을 일삼는 주민들은 그 자체로 집단 이기주의 늪에 빠지고,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간다.
이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도 반복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은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결은 다르지만, 주민들의 행태를 보면 단지 내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는 명목하에, 택배, 배달원을 향해 갑질을 하고,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로 노인요양원 건립을 반대하는 이른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끌해 집 한 채를 소유하는 게 평생 과제로 삼은 이들의 행동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씁쓸함을 남긴다.
아파트 공화국인 현실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관객에게 질문한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공동체를 지키는 영탁이처럼 행동할 것인지, 그 대척점에 서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명화처럼 행동할 것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선택하지 못하고 기류에 휩쓸려 공동체를 지키는 행동이 옳다고 믿는 민성이처럼 행동할 것인지 말이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영화는 주민과 외부인으로 나눠버리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향한다면 황궁 아파트의 비극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것이라고 전한다. 명화의 마지막 모습과 그 대사는 이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계속해서 관객에게 딜레마를 안기는 건 김숭늉 작가의 웹툰 원작을 각색해 재난 장르에 한국 사회의 현실을 녹여낸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에 기인한다. 간간이 클리셰가 느껴지는 장면들이 있지만, 아파트 층을 올리듯 켜켜이 쌓은 밀도 높은 이야기는 그 자체로 흡입력이 강하다. 여기에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 극한에 몰린 다양한 인간군상 연기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선과 악을 넘나들며, 한국 사회 속 괴물이 되어버린 한 평범한 사람의 페이소스를 확실히 전한다.
극 중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들을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공간은 사람들의 욕심으로 디스토피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자도 아니고 딸랑 집 한 채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이타심보단 이기심이 더 앞설 수 있다. 우리 또한 평범한 사람들. 과연 나라면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4.0 /5.0
한줄평: 아파트 공화국의 지옥 같은 현실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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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턴트맨 | 진심 하나로 무장한 로맨스 코미디 액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할리우드 최고 액션 스타 '톰 라이더'(애런 테일러존슨)의 스턴트맨 '콜트'(라이언 고슬링). 그는 숱한 영화에서 경력을 쌓으며 승승장구하며, 촬영감독으로 일하는 '조디'(에밀리 블런트)와의 사랑도 키워나간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갑작스레 끝난다. 스턴트 촬영 중 자기 실수로 허리를 크게 다쳐 버린 것. 자존심에 금이 간 콜트는 그 길로 커리어도, 조디와의 연애도 포기한 채 잠적해 버린다.
그러나 발레파킹을 하며 지내던 콜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영화 제작자이자 톰의 친구인 '게일'(해나 워딩엄)이 그를 촬영 현장에 복귀시킨 것. 그것도 조디의 데뷔작 촬영장에. 콜트는 조디와의 아련한 재회를 기대하며 촬영장으로 향하지만, 게일은 그에게 예상 못한 미션을 내준다. 바로 종적이 묘연해진 주연 배우 톰을 찾아달라는 것. 그렇게 콜트는 다시 한번 온몸을 내던진다. 사랑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예상과 실상의 괴리감
외국 영화가 개봉할 때 제목 번역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초월 번역을 하면 작품의 접근성이나 호감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번역이 영화 내용과 거리가 멀거나 본래 제목에서 멀리 벗어나면 관객의 관람 후 만족도가 낮아질 수 있다. 장르나 내용을 잘못 예상한 나머지 실망감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분노의 질주>는 전자다. <The Fast and the Furious>라는 영어 제목 못지않게 카 레이싱 액션 영화라는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전해준다. 반면에 후자의 대표 사례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꼽을 수 있다. <월터 미티의 비밀 생활(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이라는 본래 의미와 동떨어졌기 때문. 자칫 판타지 영화로 오해할 가능성도 덩달아 커진다.
<데드풀 2>와 <분노의 질주: 홉스&쇼> 메가폰을 잡았던 데이비드 리치의 신작 <스턴트맨> 또한 후자다. <스턴트맨>의 영어 제목은 <The Fall Guy>, 직역하면 곧 '추락한 남자'다. 내용도 제목에 충실하다. 스턴트맨 콜트가 인생의 추락을 극복하는 드라마다. 자연히 한국어 제목만으로는 이 이야기를 함축할 수 없다. 이 괴리감 때문일까? <스턴트맨>은 어딘가 허전한 액션 영화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추락한 남자'의 이야기
시작은 화려하다. 예고편처럼 여러 액션 영화 속 콜트의 스턴트 장면을 짜깁기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내 새 경로를 잡는다. 빌딩에서 등 뒤로 추락하는 스턴트 촬영 중 허리를 크게 다친 콜트. 그는 업계 최고의 스턴트맨이었다는 자존심을 꺾지 못한 나머지 자기 경력을 포기했다. 조디와의 연애 역시 덩달아 끝났다. 그렇게 그는 한 번에 두 번 추락해 버렸다.
자연히 영화는 두 개의 드라마에 치중한다. 우선 콜트가 사랑의 불씨를 되살리려 노력하는 과정을 쫓는다. 이 대목이 의외로 흥미진진하다. 특히 콜트와 조디가 촬영 중인 영화 주인공 커플의 관계에 몰입해 서로의 감정을 진솔하되 돌려 말하는 화법이 감동적이면서도 웃음 포인트다. 화면 분할 장면처럼. 로맨스 연기에 특화된 라이언 고슬링, 장르 무관하게 연기력을 자랑하는 에밀리 블런트의 호흡 덕분에 사랑 이야기는 더 빛난다.
이에 더해 콜트가 주연 배우의 실종과 얽힌 음모를 파헤치며 자기 경력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대목은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에 존재론적으로 접근해 스턴트맨을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릴 수 있다는 편견과 선입견을 비판한다. 스턴트맨에게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없다는 대사처럼. 영화 내에서 얼굴이 비치면 안 되는, 존재하지 않아야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의 비애를 잘 끄집어낸다.
서로서로 발목 잡는 플롯
그런데 두 이야기가 잘 융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범죄와 로맨스 사이를 오가는 사이 서스펜스가 끊기기 때문. 콜트가 요트를 타고 펼치는 액션 시퀀스만 봐도 한계가 명확하다. 이 장면은 콜트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탈출하는 절박한 순간이어야 한다. 그런데 콜트가 조디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 전해야 하니 위기가 절정에 이르기 전에 김이 새 버린다.
그뿐만 아니다. 곳곳에 삽입된 개그 장면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데드풀 2>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지만, 어설프게 균형을 잡으려다가 실패한 듯싶다. 일례로 톰 라이더 실종 사건의 진짜 흑막이 밝혀지는 순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대목을 더 무섭고, 날카롭고, 긴장감 넘치게 연출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그 순간마다 과한 유머가 찬물을 뿌리다 보니 이야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없다.
영리하지만 임팩트 없는 액션
액션도 균열을 감추지는 못한다. <스턴트맨>의 액션은 주 재료가 아니라 양념이니까. 물론 아기자기한 맛은 살아있다. 차를 전복시키거나, 실전에 스턴트 기술을 접목하거나, 공포탄 총이나 고무 도끼 같은 소품을 활용해 변칙적인 재미를 주는 식의 액션 연출은 분명 영리하다.
이는 의외의 관음증적 재미로도 이어진다. 다큐멘터리나 메이킹 영상만큼 자세하지는 않지만, 블록버스터 영화 속 액션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놓치지 않기 때문. 데이비드 리치 본인이 스턴트맨 출신이라는 장점을 영리하게 잘 살렸다. 그는 <파이트 클럽>, <오션스 일레븐>, <트로이>,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등에서 브래드 피트의 스턴트를 맡은 바 있다.
하지만 <스턴트맨>의 액션은,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섹시 베이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일단 <스턴트맨>은 할리우드의 성장을 밑받침한 수많은 스턴트맨을 위한 헌정작이기에 액션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자연히 극 중 액션은 여러 액션 영화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장면으로 가득하다. <매드맥스>나 <스타워즈>, <분노의 질주>가 대표적이다. 안 좋게 말하자면 클리셰 범벅인 셈이다.
스턴트맨이라는 소재 역시 한계가 명확하다. 스턴트맨이 현실에서 자기 기술을 써먹는다는 콘셉트에 충실하다 보니 과장된 액션을 막무가내로 보여줄 수가 없다. CG로 무장한 고자극 액션에 익숙해진 현재 관객의 눈높이에서는 다소 '순한 맛'이다. 자연히 감독의 전작이 보여준 수준의 아드레날린을 느끼기는 힘들다.
가슴 뭉클한 헌사
그런데도 <스턴트맨>의 끝은 뭉클하다. 톰 크루즈, 제이슨 모모아 같은 배우와 <제이슨 본>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의 오마주로 꾸며진 헌사가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
이에 더해 라이언 고슬링과 에밀리 블런트가 스턴트 액션을 직접 소화하는 메이킹 영상을 담은 엔딩 크레디트 덕분에 영화의 진심은 놀랍도록 잘 전달된다. 혼합된 장르 사이에서 방황하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액션 영화 팬이라면 마지막 순간 <스턴트맨>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로맨스, 스릴러, 코미디, 액션, 스타, 진심까지 있는데 허전한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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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중국 자본은 대리석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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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대리석 오디세이(A Marble Travelogue)
Netherlands, Hongkong, France, Greece/2021/99min/션 왕 감독 작품
그리스와 중국. 별다른 접점이 생각나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사실 두 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서로 가까운 관계다. 카메라로 ‘대리석’만 좇아도 둘이 얼마나 가까운지 금세 드러난다. 영화 〈대리석 오디세이〉를 따라가 보자.
나무로 뒤덮인 그리스의 한 초록색 산. 그곳에 거대한 쥐가 파먹은 듯한 패인 자국이 있다. 대리석 채굴의 흔적이다. 그리스는 엄청나게 많은 대리석을 중국으로 수출한다. 중국의 경제 수준이 향상되면서 ‘고급’ 취향, 즉 대리석 선호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수출된 커다란 대리석은 공장식 작업장에서 조각되어 중국의 부호, 테마파크, 심지어 유럽과 미국에까지 팔린다. 대부분 유명한 그리스 조각상을 모방한 것들이지만 ‘짝퉁’이라고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중국의 대리석 조각상 수요는 그리스인 조각 장인을 중국으로 이주하게 할 만큼 엄청나다. 대형 작업장에서 중국인 직원들의 작업을 꼼꼼히 살피며 지시하는 그리스인 조각가가 말한다. “이건 오직 중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에요(Only China can do)!”
대리석은 무엇 하나 버려지지 않고 알뜰히 활용된다. 대리석상을 조각하는 과정에서 생긴 하얀 가루는 별도로 모아 다른 물질을 첨가한 후 조그만 주형틀로 들어간다. 우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마주하는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되는 조그마한 액세서리를 생산하는 공장에 있는 주형틀 말이다. 영화에는 프랑스 파리, 미국 하와이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중국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곳으로 수출될 하얗고 조그만 대리석 액세서리를 색칠하며 꿈을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액세서리 공장에는 어린이 노동자도 많다. 매우 조그만 장식품에 색을 칠하는 세밀한 작업이기에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나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노동은 기쁨보다는 소외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으로 파리와 하와이에 갈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제적 관광지의 모습을 담은 악세사리 채색 노동을 하는 아이들은 아마 자신들이 색칠하는 풍경으로만 파리와 하와이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공장 한편에 있는 채색하는 기계가 머지않아 아이들의 노동을 대체할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그리스는 중국 일대일로의 핵심국 중 하나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된 그리스는 중국의 막대한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점차 강화하는 중이다. 그리스 길가 곳곳에서는 중국어를 손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투자를 부추기는 말이다. 그리스와 중국은 자본을 매개로 매우 긴밀하게 엮여 있다. 영화에는 ‘문화 사절단’을 자처하며 다양한 비즈니스에 참여하는 그리스인 쌍둥이 자매의 모습도 나오는데,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 역시 그리스인의 생존이 중국 자본에 달려 있음을 보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 Marble Travelogue’다. 직역하자면 ‘대리석 여행-로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오디세이’가 들어간 한국어 제목이 더 적합해 보인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여행기(《오디세이》)가 중국 자본을 매개한 대리석의 여정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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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일본이 같은 재료로 다르게 끓여낸 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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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영화가 오픈했다. 제목만 보고 감이 왔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한 차례 개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내용이 같을 텐데, 한국판만 보면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둘 다 봤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 모두 소재와 플롯 진행만 비슷하고 세부적인 것들은 판이하게 다르게 세팅되어 있는 극본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같은데, 두 영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자.
1. 등장인물의 배치가 같지만 역할이 다른
이 시나리오에는 공통적으로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걸 줍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떨어뜨리는 사람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애틋한 관계의 사람들이 더러 등장한다.
일본판에서는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것은 남자이고, 그걸 주운 범인은 떨어뜨린 당사자의 폰을 해킹하며 그의 여자친구를 노린다. 성적인 도착증이 있는 남자의 성범죄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관계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마코토와 그의 여자친구 아사미의 굳건한 사랑이다. 아무리 해킹을 통해 범인이 이들을 교란시켜도 결국 이들을 구해내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판으로 오면, 마코토와 아사미 vs 범인의 구도가 달라진다. 애초에 범인이 한 여성이 떨어뜨린 핸드폰을 줍는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여성인 나미와 범인의 1:1 대결이 눈에 띈다. 일본판에서는 여성 혼자 범인을 상대하는 것은 힘이 드니 그를 지키는 남자가 필요한 것 같았다면 한국판에서는 그저 피해자와 범인의 한판 승부 같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였을까 개인적으로는 남녀에 대한 구분 없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직접 대결이 돋보이는 만큼 한국판이 한층 더 빠르고 시원한 전개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판에서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적인 도착이 생긴 범인을 그렸다면, 한국판에서의 범인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를 사회 안전망으로 이끌어줄 참된 어른이 없었음을 암시하긴 하지만 특별히 성적인 도착증이 보이진 않는다.
2. 범인은 추적해 내는 과정
일본판에서는 범인이 누구일지 추적하는 과정이 메인 플롯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가서야 범인이 누군지 등장하는 전통적인 추리 전개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범인이 밝혀지며 놀라움을 자아내게 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 가지 무리수가 보이기도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해 내는 것이 영화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중간에 범인일 법한 인물들을 낚시하기도 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입 경찰인 마나부이다. 그가 범인과 똑같이 여성의 긴 머리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범인일까'하는 의심을 심어주는데, 그 모습이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오히려 범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 엄마에게 학대를 당해 사랑받지 못한 유년에 대한 보상 심리로서 여성의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가졌다는 범인과의 공통점으로 범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경찰이 있다는 설정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사미가 범인을 인식하는 것은 납치되고 나서이기 때문에 아사미와 마코토는 경찰이 출동하기 전까지 그저 범인에게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국판에서는 처음부터 범인을 보여주고 시작한다. 그래서 범인이 어떻게 나미를 농락하는지 보여준다. 범인을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범인의 교활함과 잔인성이 부각된다. 한국판에서는 일본판과 다르게 몰카도 등장하는데, 범인은 철저히 사이버 범죄가 인간의 삶에 해할 수 있는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는 나미의 생활 전선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극단에 몰리자, 나미는 범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범인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일본판과는 달리 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고 발버둥 치는 부분이 매력적인 서사 포인트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나미를 각성시키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점에서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로 한 일본판과는 다르게 한국판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이 두드러진다.
3. 궁극적인 두 영화의 공통점
두 영화 모두 현대 사회에서의 SNS로 다져진 사랑, 신뢰, 우정 등은 알량한 말에 불과하고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유야 어떻든 두 영화 속 범인들은 극단의 외로움에 지쳐 복수 심리로 자신처럼 나미도 철저한 외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의도가 보이고 그 절망의 순간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느끼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SNS의 얄팍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진정성 있는 1:1 만남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SNS 속 관계도 인정받을 만한 관계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갈수록 위험해져 가는 사회의 안전망이 되어줄 정도인지 반문하게 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스마트폰의 분실이 생각한 것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내 정보는 언제든 털릴 수 있는 세상이니까. 그가 마음만 먹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4. 총평
둘 중에 하나를 봐야 한다면 한국판만 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한국판이 가진 서스펜스가 더 밀도 있고 일본판 특유의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려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전개와 결말이 완전히 다른 영화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한국판을 추천한다. 아, 그리고 임시완 배우의 연기는 너무 잘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 맑은 눈이 살인자 연기에까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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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 지대에서 던지는 질문
<플랜 75>의 이야기는 한 가지 위험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 대상이 확실한 죽음. 그리고 특이하게도 제목의 의미를 곧바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바로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죽음을 선택한 권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지원금이 있고, 원하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 죽음이 허용된 근미래의 사회를 배경으로 <플랜 75>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플랜 75’는 언뜻 보면 꽤나 설득력 있고 괜찮은 정책처럼 보인다. 원치 않는 인생을 중단할 권리, 존엄사를 향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사람들은 계속 있어 오지 않았나.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고통 없이 숨을 거둘 수 있고, 원하면 중단할 수 있고, 또 미리 고심할 시간도 충분할 것 같다. 노령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극화된 세상에서, 흑과 백 사이 회색 지대에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불현듯 떠오르는 이 생각을 한쪽 극단으로 만든다. 각자 대변성을 지닌 훌륭한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세심히 설계되었고, 그들이 가진 세상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맞닿게 하면서 질문들을 가운데로, 또 가운데로 밀고 나간다.
<플랜 75>는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서 이 제도를 소개한다. 그럼에도 제도 안에 있는 다양한 배경과 연령의 인물을 배치하면서 세계관을 소개하는 데에 그친 미완의 작품이 아닌 ‘이야기’로서의 힘을 획득한다. ‘플랜 75’가 ‘괜찮은 정책’처럼 보인다는 점이 위험한 이유는 죽음을 복지서비스처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 정책 뒤에 있을 긍정적인 효과만을 바라보는 동안, 변화하는 인식은 고려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냈고 그래서 통제와 관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은, 정책이 곧 개인의 인식과 관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한 결과이다. 홍보 문구를 걷어낸 ‘플랜 75’의 실상은 죽음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고 또 죽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이미 75세 이상이 되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존엄사가 지향하는, 삶과 죽음,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품위있게 삶을 마감하길 원할 만큼의 고통에 대한 고심 끝에 이루어지는 복지라는 점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이 그린 근미래의 일본에서, ‘플랜 75’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죽어도 된다’는 생각은 결국 노인에 대한 혐오를 허용하는 현상까지 나아간다. ‘괜찮은 정책’의 반대 급부는 바로 여기이다.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영화 내내 제도를 소개하고 있지만 결코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는 점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 살고 노동하는 모습을 모두 보여주면서 영화는 자신의 역할만을 완수하고, 생각은 관객 스스로가 하도록 한다. 그러자면 이 제도 내에 있는 인물들이 각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보인다. ‘플랜 75’는 직접 여기에 참여해 죽음을 선택하려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인물, 노인들과 직접 소통하는 인물, ‘플랜 75’가 시행되는 시설의 노동자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꽤 괜찮아 보이는 복지 정책조차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음을 제시한다.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배제되는 것처럼, 일자리 창출이라는 멋진 현상은 ‘사람을 죽여주는 직업’이라는 실상을 가린다. 청년들은 결국 노인들과 상담하면서 죽음을 장려하는 사람이 되고, 시설에서 사체를 관리하고 유품을 처리하는 일은 또 다시 저임금 노동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맡겨진다. 이런 방식으로 <플랜 75>는 회색 지대에 안착한다.
관객을 매혹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와 치밀하게 설계되어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모두를 휘두르는 영화들이 있는 반면,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오래도록 사유하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들이 수많은 생각과 질문을 극장 밖까지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바로 그것이 <플랜 75>가 영화로서 가지는 힘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자주, 계속 필요한 서술일 것일지도 모른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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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이라의 붕대를 벗겨낸 브렌든 프레이저
결과적으로 이번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이를 떠나 <더 웨일>은 꼭 보고 싶었다. -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주인공 "찰리"를 맡은 배우가 "브렌든 프레이저"이니까!
아버지 세대에겐 "해리슨 포드"가 있듯이 우리들에게 "브렌든 프레이저"는 그런 존재이다.
물론, <미이라1999-2008>시리즈로 많은 트라우마를 심어준 장본인이나 그의 등장에 반가움이 더 앞서는 건 뭘까?
근데,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닌 것에 당황스러움이 몸을 감싸는데...영화는 대학에서 학생을 대상으로 "에세이"를 가르치는 강사 "찰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화면은 보이는 학생들과 다르게 까맣게 암전 되었는데 이는 그가 272kg의 거구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좋지 않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찰리"는 어릴 적 매몰차게 인연을 끊었던 딸 "엘리"에게 전화를 하는데...1. 소재들을 어떻게, 보여줄까?
영화 <더 웨일>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소재 "에세이"는 우리 말로 "수필"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글의 장르이다.
책을 읽는 데에는 "지식 습득"의 목적도 있지만 해당 캐릭터의 시점으로 상황을 읽어나감으로 입장이 되어보는 "체험" 즉, 간접적인 경험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를 쓴다는 건 나를 보여주는 것이나 극 중. "찰리"의 강의를 살펴보면,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거나 까맣게 암전된 화면은 그가 말하는 "솔직함"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이외에도 "문"이라는 소재도 <더 웨일>에서 자주 보이는 소재이다.
열고 닫으며, 관계의 단절과 연결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장치로 '누가 하는지?'로 하고자 하는 캐릭터의 의지 또한 엿볼 수 있다.
극 중. 자신을 버린 아버지 "찰리"를 증오하나 그의 집으로 들어오는 "엘리"의 모습이나 자꾸만 닫으려는 "찰리"의 대조적인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어찌 보면, <더 웨일>은 어렵게만 보이는 아카데미 영화들의 선입견이 머쓱할 정도로 이야기 전달에 있어 쉬운 작품이다.이렇게, 나열된 의미들만으로도 <더 웨일>은 좋은 작품으로 보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영화이고 설명이 아닌 보이는 매체이다.
결국, 이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데에 감독의 연출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를 맡은 배우들의 열연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찰리"를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의 변신은 외모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액션만 잘하는 배우인 줄 알았는데, 딸 "엘리"를 비롯하여 친구 "리즈"와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청년 "토마스", 그리고 전처 "메리"까지 "에세이"를 읽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보여준다.2. 우리가 "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 편으로 후반부 전개에 있어 아쉬운 부분들도 존재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지만, 딸 "엘리"가 저지른 행동에 있어 "토마스"에게 끼치는 영향이 긍정적으로 끼친 개연성이 아쉽다.
이외에도 전처 "메리"가 밝힌 딸 "엘리"의 비밀 등. 분명히 좀 더 풀어나갈 이야기들이 존재했음에도 도려낸 느낌이 없지 않다.이렇게만 본다면, <더 웨일>은 "브렌든 프레이저"에게 모든 게 집중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작품 외적으로 겪은 이러저러한 사건·사고들이 자연스레 연상되니 안타까우나 그래서 그가 맡은 배역 "찰리"에 더 이입될 수밖에 없을까?
아무튼, 이번 <더 웨일>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미이라의 붕대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최고였다! - 부디, 왕성한 활동을 바라는 개인적인 바램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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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을 때 봐야하는 영화들" : 명품영화 고품격 영화리뷰 시리즈각본: 아론 소킨
감독: 롭 라이너
출연: 톰 크루즈,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케빈 베이컨#결말포함 #영화리뷰 #결말포함영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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