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롬2021-04-11 15:54:00
최초로 도전한 아름다움
<대니쉬 걸> ⭐⭐⭐
1926년에 벌어진 한 화가의 인생은 삼각형 도형을 동그란 원형 틀에 끼워 넣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을 깎아내리면서까지 동그란 원을 만들어내지만, 끝내 그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에이나르 베게너의 실화 기반 영화다. 덴마크와 파리, 독일의 풍경과 20세기 유럽 예술가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니쉬 걸> 스틸컷
상징
<대니쉬 걸>에서 등장하는 바엘레 호수는 에이나르의 자아다. 에이나르(에디 레드메인)가 한스(마티아스 쇼에나에츠)와 함께 깊은 우정을 쌓은 곳이자, 어렸을 때부터 에이나르가 성장한 장소이다. 이에 자신이 살던 고향의 추억으로 에이나르는 자신이 그린 작품이 대부분 나무 5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바일레 호수 작품을 많이 그려낸다. 하지만, 아내 게르다 베게너(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부탁으로 처음 만진 여성 옷으로 깨어난 '릴리'의 자아로 에이나르의 머릿속 바일레 호수는 희미해져 가고, 그는 점점 바일레 호수 작품을 그리지 않는다. 에이나르 자아가 릴리의 자아로 변화되는 과정이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상징물이다. 그리고 에이나르가 성전환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한스와 게르다가 함께 바일레 호수에 간 장면은 영화가 시작하며 처음에 등장한 바일레 호수 장면이 생각나게 하며 수미상관 구조를 지닌다. 결국, 이 영화는 에이나르를 위한 영화라는 사실을 정의한다.
연기
에이나르를 연기한 배우 에디 레드메인의 눈빛 연기는 에이나르 자아와 릴리의 자아를 모두 표현한 눈빛 연기다. <대니쉬 걸>에서 에디 레드메인의 눈빛 연기는 바일레 호수와 같이 평온하면서 여자가 되고픈 열망과 섞여 강렬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에이나르가 행동하는 여성스러워 보이는 손짓과 표현들은 그가 얼마나 여자가 되고픈지 간절함이 느껴온다. 러닝타임이 지나며 점점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는 에이나르 그 자체를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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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역사를 착취한다, 바로 이렇게
- 7★/10★
영화의 마지막, 한 남자가 긴장감 넘치는 목소리로 무대 아래 청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1920년대에 있었던 아메리카 선주민과 그들의 재산을 노린 백인들의 범죄(〈플라워 킬링 문〉의 줄거리) 이야기다. 화자는 이 거대하고 체계적인 범죄의 색출이 FBI의 창립자 J. 에드거 후버 덕에 가능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FBI와 이 조직이 상징하는 국가의 권위를 은근히 드높이는 용비어천가란 소리다. 무대 위에는 화자 말고도 이야기의 주요 대목마다 적절한 소리를 넣는 특수 효과 전문가들과 오케스트라가 있다. 그렇다. 이 무대는 영화를 닮았다. 그리고 이 무대와 영화의 닮음은 〈플라워 킬링 문〉의 서사와 결합해 하나의 메시지를 이룬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영화가 필연적으로 이를 스펙터클로 전시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즉 영화는 역사를 착취하기를 피할 수 없다는 자기 성찰적 메시지 말이다. 기막힐 정도로 시니컬한 통찰이다.
이제 영화의 시작으로 가 보자. 아메리카 선주민 오세이지족의 땅에서 기름이 난다. 마을의 부보안관이자 유력 인사인 킹(로버트 드 니로)의 말을 빌리자면, 오세이지족은 ‘똑똑하게’ 처신했다. 땅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대신 이윤의 지분을 얻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어 안정적인 부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돈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인다. 오세이지족이 머무는 곳도 마찬가지다.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참전 후 돈을 벌기 위해 먼 친척인 킹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어니스트의 말투와 행동, 생김새에서 드러나듯 그는 가난하고 양질의 교육을 받지 못한, 때로는 거칠지만 종종 얼뜨기 같은 하층 계급 남성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킹은 어니스트에게 솔깃한 제안을 건넨다. 네가 제법 번지르르한 외모를 가졌으니 부유한 오세이지족 여성을 대상으로 운전기사 일을 하며 그중 한 사람을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것. 오세이지족 가족의 일원이 되면 상속을 통해 정당한 재산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 윌프리드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게 윌프리드는 몰리에게 접근하고, 둘은 결혼한다.
한편 마을에서는 오세이지족 선주민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중이다. 그러나 수사 기관은 그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오세이지족은 이들 사건이 자기 재산을 노린 백인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돈만 가졌을 뿐 수사권 등 공적 권력을 행사할 권한은 없다.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킹과 윌프리드의 주도로 몰리의 가족도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어머니, 언니, 동생……. 몰리는 윌프리드를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고, 윌프리드 역시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지만 킹의 범죄 제안을 완전히 거스르지는 못한다.
“집안의 주도권을 되찾아!” 킹과 몰리 사이의 긴장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대사다. 이 대사는 백인 남성인 윌프리드가 오세이지족 선주민 여성 몰리를 정신적, 신체적으로 장악해가는 과정이 가부장적 권력을 재확립하는 일의 일환임을 보여준다. 부권 확립은 백인의 권력을 재강화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가난한 백인과 부유한 선주민이라는 ‘뒤집어진’ 구도를 ‘바로잡는’ 일 말이다. 킹과 윌프리드가 몰리 가족을 대상으로 벌이는 범죄는 백인 남성의 국가인 미국의 권위가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범죄를 응징하는 주체 역시 백인/국가 권력이라는 점이다. 몰리는 마을 안에서는 선주민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워싱턴으로 향해 대통령에게 수사를 촉구한다. 이후 후버가 창설한 FBI의 전신인 조직의 요원들이 파견되어 킹과 윌프리드를 수사하고 ‘정의’를 구현한다. 이 과정에서 몰리는 윌프리드가 몰래 투약한 안정제에 취해 내내 시체와 같은 상태에 머문다. 즉 사건의 당사자인 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배제당한 채 수동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인 남성이 주체(수사 기관)와 타자(범죄자) 역할을 독점하고, 착취당한 선주민은 역사의 무대에서 내쫓긴다.
요컨대 〈플라워 킬링 문〉은 불법적 폭력과 합법적 권리(상속)를 결합해 미국이 어떻게 소수자를 착취하며 부와 권위를 확립해왔는지를 고발해온 마틴 스코세이지의 문제의식이 다시 한번 돋보이는 작품이다. 스코세이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앞서 언급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무대 위에서 오세이지족의 비극을 그럴듯하게 가공해 들려주는 남자는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이야기마저 스펙터클로 소모될 수밖에 없음을 보인다. 무대 앞에는 부유한 백인 남녀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무대 위 화자를 보고 있다. FBI가 킹과 윌프리드를 처단하는 이야기는 백인/남성 국가의 설립 과정의 에피소드로 소비될 때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듯이. 이 장면은 역사적 비극을 소비 가능한 이야기의 형태로 유통하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자조와 냉소, 무기력감의 토로다. 영화란 무엇인지에 관한 시끌벅적한 논쟁의 중심에 선 마틴 스코세이지는 역사적 비극과 이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마주한 출구 없는 폐쇄적 회로를 그려내 미국, 그리고 영화를 고발한다. 그가 영화 거장이라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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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새처럼 왔다 가는
SYNOPSIS
재능 있는 조각가인 리지는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며 예술가로서의 삶과 가족, 친구 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리지는 사는 집의 주인이자 예술가 라이벌이기도 한 조와 사소한 사건들로 갈등을 겪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오빠 숀의 상태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전시 개막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리지는 과연 무사히 전시회를 열 수 있을까? 〈웬디와 루시〉(2008),〈퍼스트 카우〉(2019) 등 미국 사회의 현재적 삶을 내밀한 시선으로 다뤄 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신작. 2022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화제작을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PROGRAM NOTE
〈쇼잉 업〉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삼지만 굴곡진 서사나 드라마틱한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를 앞둔 리지는 사소한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예술가 동료이자 리지가 사는 집의 주인이기도 한 조는 보일러 고장 문제를 나 몰라라 하고, 흩어져 사는 가족은 저마다 리지에게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업에 집중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짜증과 불안이 쌓여가지만, 주변에 그걸 알아채 주는 이는 없다. 켈리 라이카트의 주인공들이 줄곧 그랬듯 리지도 꽤나 고독한 인물이다. 오리건과 몬태나의 풍광 속을 확신 없이 지나던 이들처럼 리지 또한 삶의 어느 시기를 천천히 지나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 이들에게는 곁을 내주고 돌봐야 할 동물이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여성감독 중 하나인 라이카트는 〈퍼스트 카우〉로 19세기 미국의 풍경을 바라본 뒤, 오리건의 작은 도시 포틀랜드를 배경으로 지역 예술가들의 활동과 끊임없이 무언가 만드는 삶의 모습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쇼잉 업〉에서 두드러지는 건 찰흙, 직물, 실 같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재료를 계속해서 만지는 손짓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예술이란 그처럼 매일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단하고 유명한 대가가 아니라, 매일 끈기 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은 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와 공명한다. 〈쇼잉 업〉을 통해 매일 무언가 만지고, 걷고, 돌보고, 일하는 움직임들로 지켜지는 소박하고도 경이로운 일상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란다. [손시내 프로그래머]
*영화 <쇼잉 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는 동안 ‘한동안 내가 피곤했군…’ 깨달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이 살풋 감기는 걸 참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성격상 푹 잠들지는 못하고 아주 잠깐 졸다 깨다 반복하면서, 그래도 흐름을 놓치지는 않을 만큼만 눈을 감았다 뜨면서 보게 되는 영화들. 공교롭게도 그런 영화들이 내게는 다 참 좋은 영화들이었다. <애프터썬>의 주인공들이 침대에서 숨을 쉬는 박자에 맞춰 같이 눈을 잠깐 감기도 하고,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퍼스트 카우>도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걷고 움직이는 동안 그 소리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둘 다 내 마음 속 명예의 전당에 붙어 있는 영화들이다.
<쇼잉 업>도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벽면 가득,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여성 상들이 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흙을 주물러 이 여성들의 모습을 현실로 데려오느라 바쁜 예술가, 리지가 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료가 떨어졌다고 역정을 내는 고양이 리키(연기를 진짜 잘하는 천재 고양이이다)의 사료 그릇도 채워 주어야 하고, 제각각의 삶을 살고 있는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하게는 못해도 기본 할 도리는 또 해 주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집에 온수는 안 나오는데, 집 주인이자 동료인 조는 온수를 고쳐줄 마음이 없으니, 온수로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또 헤매야 한다. 결국 전시회를 코앞에 두고 부랴부랴 연차를 낸다.
(으레 그렇듯) 모처럼 작정한 하루는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고양이 리키의 습격을 받은 새를, 죽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집 밖에 내보낸 새를 친구 조가 구조할 줄이야. 전시를 두 개나 앞두고 있는 조의 부탁에 따라, 엉겁결에 떠맡은 비둘기 한 마리를 돌보는 것이 그 날 가장 주요한 일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둘기를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작업실을 두고 2층에 올라가서 고양이를 가둬 둔 채로 작업을 한다.
결국 작업의 속도나 방향은 삶에 생겨나는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니까, 어떤 상황이든 아랑곳 않고 작업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이 코앞이어도 고양이와 비둘기에 둘러싸인 하루를 보낼 수도, 그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사무실 동료가 낄낄거리며 말했듯이, 비둘기를 병원에 데려가고 비둘기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마음이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세상에 가시적이지 않았던 느낌과 마음과 감정과 에너지를 가시적인 형상으로 이 세계에 끌어오는 일이다. 다른 데 가서 죽었으면 생각할 수는 있어도, 끝내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선 끝에 그 형상이 걸려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은 마음이고, 손은 손이다. 바삐 작업하는 리지의 손, 그리고 리지가 일하는 학교 곳곳의 학생들이 작업에 몰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손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진다. 그리거나 오리거나 붙이거나 칠하거나 짜거나 뜨는 그 모든 일에 단 한 순간도 재능이 있어본 적 없는 나지만, 그럼에도 자차분히 손을 놀려 보고 싶어진다. 고되지만 행복한 일일 것이다.
책상 위의 작업물과 나, 둘만이 존재하는 시간의 느낌을 안다. 고되고 행복한. 외롭지는 않지만 고독한. 기쁘지만 덜컥 겁이 나는. 동시에 그 모든 것이 마음 같지 않은 답답함도 안다. 그래도 리지는 직업인이 될 만큼 익숙하고 실력이 좋은 예술가니까, 가마에서 잘못 타버린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있어서는 더없이 초연하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해서 하나하나 동동거리기만 한다. 그런데, 이거 죄다 행복한 고민이다. 인생은 절대, 작업물과 나 둘만 존재하는 시간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인이자 예술가로 어엿하게 인정받는 리지에게도 신경 쓸 게 많은 남루한 일상이 있다. 파티에 빠져 온수기를 모른 체하는 친구에게 화가 나는 날들. 가뜩이나 가족이며 전시회의 치즈까지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비둘기의 건강까지 신경이 쓰이고. 예술가의 삶이라 해서 예술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답답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삶은 으레 그렇다.
그러나 푸드덕거리는 힘찬 날갯짓으로 그 모든 답답한 대화를 탁 끊는 비둘기처럼, 그런 새처럼 나에게 왔다 가는 것들이 있다. 예술가의 삶이든, 예술가가 아닌 나의 삶이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반복 위로, 사뿐 날아올라 반짝 빛나는 것. 내겐 영화가 그렇다. 어두운 영화관에 나를 틀어박아 두고 잠시 빛나는 생각들로 나를 채우고 나오면, 복잡했던 마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답답하던 감정의 맥락이 끊겨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나서도 또 걸어가는 리지와 조의 뒷모습을 본다. 작업은 계속되고 인생도 계속된다. 오고 가는 것들과 답답한 것들 사이, 인생은 그렇게 계속된다. 그 모든 것들 안에서, 우리는 계속 끈질길 것이다. 앞으로도 쭉.
2023.08.24 17:30-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관
2023.08.27 20:00-21:4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2023.08.29. 13:30-15:18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M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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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월호? 아직도 세월호!
- 8★/10★
조금은 이상하고 뒤늦은 슬픔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서울 어딘가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날 눈물 흘리기 전까지 나는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의심하기 바빴다. 세월호를 슬퍼하는 모든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때였지만 내 안에는 뿌리 깊은 패배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죽음을 슬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박근혜와 20대를 보낸 내게는 그들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권위 국가가 상수였고 그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늘 변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편안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세월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섣불리 슬퍼했다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추모집회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접속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게 슬픔을 견뎌왔을 뿐이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는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슬픔을 고립시키려는 모든 것과 단절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애도하며 공통감각으로서의 슬픔을 되찾았다. 세월호는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통해 개별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사라진 생명을 잊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변화를 요청할 수 있음을, 누군가를 잊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거나 낙후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바람의 세월〉이 보여주듯, 이 깨달음은 지난 10년간 번번이 제도권 정치와 진실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딸 문지성 양을 세월호 참사로 잃은 뒤 카메라를 든 문종택 공동 감독은 지난 10년의 세월, 3,654일 동안 세월호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은 5,000여 개, 분량은 50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 긴 시간은 대체로 참사 유가족과 그들의 슬픔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번번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는 과정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유족과 시민의 염원을 이뤄줄 듯하던 문재인 정권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 포괄적 진실 규명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 참사 후 유가족이 처음 환하게 웃은 건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그마저도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유가족은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결국 배반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법과 정치의 문제와 접속시킬지에 관해 많은 물음을 남긴다. 법조인, 정치인이 기존 법 체제 안에서 유족과 시민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노력(특검, 특조위 등)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적인 슬픔에 담긴 커다란 물음과 가능성이 법 기득권과 정파적 당리당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 정의는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세월호 관련 법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영화에 절망과 분노의 순간만 담기지는 않았다. 종종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슬픔을 느낀 건 배상‧보상을 통한 정부의 가족 분열 획책, 유가족을 향한 모욕을 담은 장면만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 등교를 응원하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국회에서 유가족 앞을 막고 선 젊은 경찰이 흐느끼며 울먹이는 장면에서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추모 공간을 꿋꿋이 지키며 싸움을 이어가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이 5.18 민주화 운동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너졌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추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는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견뎌내야만 했던 야만적 시간을 영화가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시간을 유족의 시선으로 말하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뉴스로 사건을 접한다. 즉 누군가 한 번 매개해 가공한 상태로만 어떤 사건을 접한다. 기자가 유가족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유가족처럼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인 채 글 쓰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의견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입혀주기 일쑤인 기계적 중립이 더해진다면, 나아가 기계적 중립마저도 외면하고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한 〈바람의 세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중립을 가장한 차가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절절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은 만큼, 정제되고 정돈하여 매개하지 않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족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보다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며 감정의 공적 기능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람의 세월〉에는 ‘아직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아직도!’라고 답할 힘이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앞에 과거의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슬픔에 기반한 공적이고 정의로운 연결감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 영화에서 큰 위로와 연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가 되레 위로받고 나왔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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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2주차 신작 개봉 영화
2022년 4월 2주 개봉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Fantastic Beasts: The Secrets of Dumbledore , 2022
덤블도어의 충격적 비밀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는 머글과의 전쟁을 선포한 그린델왈드와 덤블도어 군대의 대결 속 가장 거대하고 위험한, 세상을 구할 마법 전쟁을 그리는데요
‘신비한 동물사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이어 J.K. 롤링이 각본을 썼습니다.
중국, 영국, 뉴욕, 독일, 오스트리아 알프스, 부탄 등을 배경으로 그린델왈드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덤블도어 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본격적인 그린델왈드와의 대결을 마법들과 함께 펼쳐집니다.
또한 호그와트 마법학교, 호그스미스 마을이나 마법 주문 등 ‘해리포터’ 시리즈 팬들이라면 반가울 장면이 곳곳에 등장해 재미를 더 해줄것입니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과거에 얽힌 충격적인 비밀이 마침내 밝혀지는
첫번째 추천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입니다.예고편 보기
클릭------------------------------------------------------------------------------------------------------------------------------------------------
말임씨를 부탁해 Take Care of My Mom , 2021
한국영화 실력파들이 함께한 휴먼 가족 드라마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효자 코스프레하는 아들과 가족 코스프레하는 요양보호사 사이에 낀 85세 정말임 여사의 선택을 그린 휴먼 가족 드라마입니다.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여성 배우 김영옥의 65년 연기 인생 첫 주연작으로 영화에서 정말임 역을 맡아
연기 내공으로 현실 속에 엄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 ‘말임씨를 부탁해’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국 전통의 전통적인 부모자식 관계에서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사실적인 정서를 전하는데요
효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며 다소 어긋나버리고 마는 아들,
그리고 그런 아들을 감싸는 어머니의 모습은 결코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실 K-엄마를 비롯해 K-아들, K-모자, K-가족에 이르기까지 공감 100%의 캐릭터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두번째 추천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입니다.예고편 보기
클릭------------------------------------------------------------------------------------------------------------------------------------------------
복지식당 Awoke , 2021
사회곳곳 제도의 모순 덩어리를 파헤친다
영화 "복지식당"은 사회곳곳 제도의 모순으로 생(生)의 사(死)각지대에 놓여 인권과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장애인 감독의 자기체험과 비장애인 감독의 객관적 시선이 어우러져 빚어낸 진정성과 꾸밈없이 현실을 반영해 만들어낸 리얼리티 휴먼 드라마로
비장애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의 진짜 삶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하며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문제적 질문을 던지는데요
몸의 장애가 삶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후천적 장애인 ‘재기’의 모습을 통해 장애인 제도의 실태와 현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장애인 그리고 비장애인 감독의 공동연출이 빚은 투박한 진심의 하모니!
세번째 추천영화 "말임씨를 부탁해" 입니다.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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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길 잘했어 The Slug , 2020
최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는 최진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손에 땀 마를 날 없는 ‘다한증’ 때문에 외로움과 부끄러움이 전부가 되어버린 ‘춘희’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랑스러운 성장담을 그린 영화입니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을 시작으로, 서울독립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광주여성영화제, 대구여성영화제, 전북여성인권영화제, 서울구로국제영화제 등
국내 주요 영화제에 초청받았으며,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판타지아영화제 초청 및 오사카아시안영화제에서는 재능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한강에게' 강진아부터 '지슬' 홍상표, '족구왕' 황미영까지!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 총출동해 기대를 더 하고 있습니다.
전주 출신 감독이자, 전주를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최진영 감독의 첫 장편!
네번째 추천영화 "태어날길 잘했어" 입니다.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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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 The Pilot. A Battle for Survival , 2021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을 리얼하게
영화 "파일럿: 배틀 포 서바이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외딴 숲에 불시착하며 생존을 위해 처절한 사투를 시작한 파일럿 니콜라이의 생존기를 그립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를 상대로 펼쳐진 전투의 현장을 리얼하게 재현하며
파일럿의 실화 바탕 생존 사투극을 그려냈는데요
적진을 뚫고 전쟁터로 향하는 파일럿인 주인공의 모습은 강인한 면모와 리더십이 느껴지는 한편,
매서운 추위와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담아내 실제 치열한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현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할 것입니다.
세계대전 당시 리얼한 현장을 담아낸
다섯번째 추천영화 "파이럿: 배틀 포 서바이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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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난해함에 가려진 현대적 고전의 진면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J.R.R. 톨킨이 현대어로 정리한 영국의 두운시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비록 아서 왕 전설에 속하지만 원작 자체가 아서와 엑스칼리버,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사랑, 성배 찾기와 같은 굵직한 에피소드에 비해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린 나이트>는 난해하다. 일반적인 판타지 작품에서 기대할 법한 화려한 액션은 없다. 대사도 많이 등장하지 않으며, 간간히 나오는 대사들마저 함축적이거나 중의적인 경우가 많다.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목 베기 게임, 여인의 유혹, 획득물 교환 게임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미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일반적인 화법을 따르지 않는 <그린 나이트>는 혼란스럽다.
하지만 마치 조개껍데기를 벗겨낼 때 숨어 있는 진주를 발견할 수 있듯이, 인상적인 영상미를 통해 혼란스러움과 불친절함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로 받아들일 때 <그린 나이트>의 감상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느낌은 진정한 기사로 거듭나는 가웨인의 여정에 관객들이 스스로를 대입시키는 효과적인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아서 왕(숀 해리스)'의 조카라는 이유로 원탁에 앉을 수 있었던 '가웨인(데브 파텔)'은 원탁의 다른 기사들처럼 위대하고 아름다운 무용담을 가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그 앞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나타난 '녹색 기사(랄프 이네슨)'는 자신의 목을 내리치고, 그 대가로 1년 뒤 녹색 예배당으로 가서 녹색 기사에게 똑같이 목을 내리치는 도끼날을 맞는 게임을 제안한다. 가웨인은 이 '목 베기 게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진정한 기사로 거듭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녹색 기사의 도끼로 그의 목을 내리치고 정확히 1년이 지난 후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여정에 나선다.
모험 중에 가웨인은 도적, 여인, '성주(조엘 에저튼)', 여우 등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기사도의 여러 덕목을 착실히 배워나간다. 이때 영화는 그가 관대함, 신의, 순결, 예의범절, 그리고 연민 등을 배우는 것보다 그 덕목 앞에서 자신의 끓어오르는 욕망과 삶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한 채 갈등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원탁의 기사이자 영웅인 가웨인 이전에 자아를 사로잡은 혼란 때문에 괴로워하며 도망치려 하는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에셀'과 '귀부인' 역을 동시에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가웨인의 연인인 에셀은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그로 하여금 가책을 느끼게 하고, 그를 유혹하는 귀부인은 그가 기사가 되기에 인간적 약점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한 명은 과연 그가 기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다른 한 명은 그가 기사가 될 만한 재목인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그렇게 그녀들과의 만남과 이별은 가웨인이 녹색 기사와 재회하기 위한 여정을 지속할 것인지, 즉 기사로 거듭날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기점이 된다. 이에 가웨인은 연인과의 사랑을 유지할 것인지, 그리고 유혹에 넘어갈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고귀하고 진실한 인간이자 기사로 성장한다.
이처럼 기사도를 배우고 기사로 성장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린 나이트>는 마치 기독교적 윤리로 가득한 작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도 게르만 족이 잉글랜드 섬을 침략하자 브리톤 족이 이에 맞서 싸웠던 아서 왕 전설의 역사적 배경이 가웨인의 여정에 투영된 기독교적 흔적 영화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당장 영화의 첫 대사부터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어요"이고, 이 대사는 가웨인의 방탕함과 대조를 이루면서 영화가 가웨인의 속죄와 회개, 그리고 참회를 다루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서 왕의 왕관은 성화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성인들 뒤를 비추는 후광을 본뜨고 있으며, 이는 캐멀롯 왕궁의 상징인 원탁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녹색 기사가 기독교의 상징인 캐멀롯 왕궁에 난데없이 나타나 게임을 제안하는 모습은 이교도 대 기독교도의 대결 구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녹색 예배당에서 가웨인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십자가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뉘우치는 그의 모습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와 사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명백히 들리고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의 모험을 평면적이고 교훈적인 성장담으로 결론짓지 않는다. 영화는 상징이나 이미지에서 두드러지는 기독교적 배경에 비하면 자연과 이교도, 마법과 켈트족의 신화에 힘을 주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그들의 존재감을 노출한다. 가웨인이 녹색 기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결 짓지 않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가웨인의 어머니인 '모건 르 페이(사리타 초우드리)'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지만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 가웨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도적떼와 붉은여우부터 거인과 눈을 가리고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노파에 이르기까지 가웨인을 유혹하거나, 낙담시키거나, 알 수 없는 조언을 건네는 이들의 정체도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린 나이트>는 신의 말씀에 충실하고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아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기준을 찾는 입체적인 작품으로 거듭난다. 가웨인이 마주한 인물들이 그를 유혹하거나 방랑으로 이끈다 해도 영화는 그들의 존재가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 하에서 가웨인이 스스로 억압하던 정열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진정한 자아를 찾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목 베기 게임, 여인의 유혹, 획득물 교환 게임을 통해 자신의 두려움과 갈망, 그리고 기사도의 덕목 중 갖춘 것과 갖추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 또한 부족함을 채우고 진실해지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할지도 깨닫는다. 따라서 가웨인의 각성은 단지 그리스도교라는 기존의 사회적 전통에 충실한 기사로의 성장보다는,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과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마침내 중심을 찾아낸 한 젊은이의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린 나이트>가 고대의 전설을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도 발돋움하는 이유다. "이야기의 뿌리인 자신의 자아를 찾아 나가는 한 청년과 관련된 기사도의 개념은 지금 시대에도 시의적절하다"는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기존의 삶의 방식을 따르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은 젊은 세대가 가웨인에게 이입하여 스스로 기사가 되어가는, 즉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확립하는 과정을 경험할 장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가웨인에게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것에서 사회적인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 곧 완벽하지 않아도 완벽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투영할 뿐 그를 완전무결한 기독교적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때 <그린 나이트>는 이 모든 이야기를 금색, 녹색, 적색, 회색이라는 색 안에 담아낸다. 가웨인이 입은 망토는 아서 왕의 왕관을 닮은 금색을 하고 있고, 이 망토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웨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자연을 뒤덮은 녹색의 이미지로부터 그를 지켜준다. 가웨인 대 녹색 기사, 카멜롯 대 녹색 예배당, 더 나아가 기독교 대 이교도의 대립이 두 색책의 대비에 담겨 있는 것이다. 적색은 숱한 피의 향연을 장식하면서 두 세계를 넘나드는 가웨인의 모험이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함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회색은 거인들을 만나는 대목처럼 매혹적이고 장엄하지만 동시에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모험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히 회색풍의 색감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며 녹색 기사의 도끼날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가웨인의 혼란스럽고 난해한 내면을 외면화하며, 마찬가지 입장인 관객들을 가웨인의 내면으로 자연스레 초대하기도 한다.
따라서 다채로운 영상미의 도움을 받아 난해함과 혼란이라는 껍데기를 열기만 한다면, <그린 나이트>가 품은 기독교적인 성장담, 기독교 세계에 가려졌던 켈트 족의 영웅과 마법을 조명하는 판타지, 더 나아가 가장 현대적인 고전이라는 다양한 진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상이한 세계가 만날 때의 혼란, 충격, 경탄을 장중하게 담아낸 서사시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그린 나이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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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작년에 돌아가신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과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루스의 삶을 보면서, 역사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 역사의 진보를 이뤄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즉, '루스'는 특정한 개인이면서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인물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 '루스'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멋진 드라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초기 공동체 - 모계사회 - 를 제외하고 줄곧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였다. 즉,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은 여성은 착취하고 억압하고 학대했다. 남성이 권력을 갖게 된 시기를 마르크스는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이건 인류가 채집경제를 벗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를 말하며, 농경, 정착, 집단화의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이며, 이는 공동체 시기에 모든 구성원이 채집 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집단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다른 구성원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잉여생산물을 취득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었고, 그는 신과 대화하는 무당이기도 했다. 그 우두머리가 꼭 남성은 아니었다.
잉여생산물의 집적, 농업에서 남성노동력의 우월성, 여성의 생리, 임신, 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 기간, 여성의 생리와 임신, 출산이 갖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신비로움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존재했던 다부모, 다자식 형태에서 일부일처 또는 일부다처제로 나아가는 원인 역시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독차지하고, 여성을 사회적 존재에서 대상화, 소외시키면서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한 사회적 계약이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건 모든 인종, 모든 지역, 모든 사회에서 공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잉여생산물을 독점하려는 남성 집단의 담합과 여성을 소유하려는 남성 집단의 연대가 암묵적 또는 공공연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뿌리내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는 방식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던 초기에 남성(집단)은 물리적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금기(터부)를 만든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집단에서 배재하는 방식으로 시작한 금기는 점차 다양하고 세분화하면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규정해 나간다.
집단(사회)의 규정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재편되고, 여성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며, 모든 기득권, 권력의 독점, 경제적 이익을 남성이 차지하도록 구조를 만들어 가고, 공고히 한다. 이런 지배 규칙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회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사회경제 제도,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에서 주류는 남성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가부장제를 핵심으로 한다.
'여성과 계급'의 문제는 어느 시대든 가장 급진적이며 본질의 문제였다. 둘 사이에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고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여부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 문제는 늘 계급 문제에 가리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계급 해방은 극소수 착취 계급을 무너뜨리며 착취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여성 해방은 인류 보편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이며 여성 해방은 자연스럽게 계급 구조도 해체할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경제적 착취 구조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형태를 달리하며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 등으로 옮겨갔지만, 여성의 차별, 착취는 계급 발생과 함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제되는 사회는 멸망했으며, 자본주의 체제 역시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화된 사회구조여서 계급 갈등과 함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두 개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도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공산주의 이론에서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을 동시에 주장하며, 이때 인간해방은 양성평등을 기본 전제한다. 또한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해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즉, 공산주의는 계급의 철폐와 함께 인간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체제다. 지금까지 몇 나라에서 실험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류의 미래가 지금과 같은 소수 착취자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폐기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그것이 꼭 '공산주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 같은 착취 구조는 점차 평등을 향해 나가고 있음을 역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할 때마다 가부장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시도를 방해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남성과 여성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어리석은 남성 대중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여성에 의해 침범당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들에게는 남성우월주의가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숨 쉴 권리를 찾으려 하는 당연한 행동을 남성 일반은 자신(남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체제에 안주한 기득권자인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지금의 사회구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단지 '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기득권에 소속되며, 특혜를 누린다. 반면 여성은 똑같은 능력을 가졌거나 더 나은 능력이 있어도 남성보다 적은 보상,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며, 사회 변화의 주체다. 그럼에도 여성은 여성만으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한다. 계급 투쟁이 여성운동보다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 나는 물론 둘 다 근본적이라고 본다 -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은 계급투쟁과 동행하거나 포용해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에서 여성운동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동시적이며 본질적인 과제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백인 부르주아 여성'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에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과 노동계급해방을 동시적 과제로 선정했다. 노동계급은 8시간 노동, 주5일 노동, 생리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기업에서 성차별 철폐, 가사노동의 사회적 보상 등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성차별 금지, 여성노동의 착취 금지, 여성의 사회적 노동의 인정 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이것도 현대 자본주의 초기부터 노동계급이 피흘리며 싸워온 결과였다.
루스 긴즈버그의 삶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에 크게 기여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과 의지가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루스 긴즈버그가 체제-미국 자본주의-내에서 가능한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노력을 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제의 변혁을 통해 인간해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하다 참혹하게 살해 당한 경우다. 사회주의 변혁운동에서도 여성은 비주류였으며, 중요한 결정에서 소외되거나, 더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지도부에서 배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여성운동은 체제에 매수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남성기득권에 투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여성(과 여성운동)은 본질에서 진보적이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남성 기득권에 기생 또는 공생 관계로 만족한다. 이들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인식하며, 남성 권력이 던져준 부스러기 권력에 만족한다.
여기에 극히 일부 여성(운동)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무차별 공격한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남성기득권 구조가 비난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남성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건 19세기 아나키스트의 테러를 떠올린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을 살해하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만, 체제와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남성 일반은 여성(운동)의 동지이자 지지자이자 동지이며,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은 여성이 남성을 공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남성 일반을 견인해야 하며, 각성한 남성과 함께 힘을 모아 사회를 변화시켜야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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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드세요 연상호씨,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감상해주세요!
** 영화에 대한 비난이나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영화 '염력'을 개봉하자마자 관람했습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였기에, 많은 호불호가 갈릴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염력의 장단점과 캐릭터 특징을, 2분 안에 주관적으로 압축하여 빠르게 정리해봤습니다. (이 때문에 영상 편집 퀄은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영상 속에 아기자기하게 많은 재미요소가 들어가있으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왓챠에서 '진상명' 팔로우 하시면 빠른 평 업데이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염력 #연상호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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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빈의 소원> 영원한 로빈 예고편
2014년 8월 11일. 할리우드의 명배우이자 코미디언인 로빈 윌리엄스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연기로 관객을 울고 웃게 하며
꿈과 희망의 아이콘 같았던 배우였기에 전세계 영화 팬들은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진 무성한 소문과 다르게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던 진짜 소원은 무엇이었는지
이제 그의 죽음에 둘러싸인 소문과 진실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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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자크: 시즌4> 파트 1 예고편
누구도 상처 없이 빠져나갈 수 없다. 시즌 4 파트 1, 곧 공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