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0-17 10:29:49
10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파묘>, <핸섬가이즈> 시체스국제영화제 수상 쾌거!
영화 '파묘'와 '핸섬가이즈'가 제57회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각각 심사위원 특별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1968년에 시작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Sitges -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 of Catalonia)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에 위치한 시체스에서 매년 개최되는 영화제입니다.
영화제는 주로 판타지, 호러,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선보이며, 벨기에의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 포르투갈의 판타스포르토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로 불리고 있습니다.
영화 '파묘'는 2024년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오컬트 장르의 역사를 새로 쓴 작품으로, 시체스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글로벌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독특한 오컬트 코미디 영화 '핸섬가이즈'는 관객상을 받으며 집행위원장인 앙헬 살라 코르비(Angel SALA CORBÍ)에게 “기발하고 유쾌한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 원작에 악령 설정을 더한 다양한 장르의 조화와 결합이 뛰어나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번 수상을 통해 두 한국 영화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 영화의 저력을 입증하며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화 지원 예산 복구 촉구 기자회견 개최
지난 16일 영화인들이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제 지원 예산 복구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영화제가 창작자와 관객을 잇는 중요한 플랫폼임을 강조하며, 2024년 지원 영화제가 40개에서 10개로 축소된 것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특히 50주년을 맞았지만, 내년도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존폐 위기에 처한 서울독립영화제의 예산 복원을 위한 서명 운동 결과도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연명을 시작한 9월26일부터 10월15일까지 175개 단체, 개인 7564명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니아 연대기> 감독 맡은 그레타 거윅, 넷플릭스와 갈등 빚어
영화 <나니아 연대기> 연출을 앞두고 있는 그레타 거윅 감독과 제작사인 넷플릭스가
극장 개봉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레타 거윅은 해당 시리즈가 넷플릭스 스트리밍에만 제한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극장 개봉을 넷플릭스 측에 요청했지만, 넷플릭스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해당 프로젝트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작 <메갈로폴리스> 틱톡에서 화제
프란시스 코폴라의 1천800억 원 대작 <메갈로폴리스 Megalopolis>가 흥행 참패를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 틱톡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 속 아담 드라이버의 대사 “Go back to the club”이 특히 인기를 끌며 열렬한 팬층을 형성했습니다.
비평가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틱톡 사용자들은 이 영화를 반복 시청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곧 Z세대의 새로운 컬트 무비로 자리 잡게 되는 것 아닐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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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우드의 모든 것이 싫었던 어떤 요리사의 일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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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2명에게
담배 좀 피우지 마. 남자 타일러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자에게 잔소리 한마디 한다. "왜?" "우리 진짜 쩌는 셰프한테 가는 거라고. 담배 피면 후각이 둔해져." 에휴. 여자 마고는 '그래도 1,250 달러를 내줬는데..' 하는 마음으로 담배를 끈다. 타일러와 마고는 초대장을 받았다. 이 초대장을 받으면 전 세계 최고의 셰프가 대접하는 한 끼 식사를 먹을 수 있다. 가격은 무려 1,250달러. 신형 맥북 가격이다. 가격이 가격인지라 같이 가는 일행 수도 적다. 단 12명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섬으로 초대받은 12명의 사람들. 12명의 인원은 배를 타고 외진 섬으로 향한다. 약간의 탑승수속 절차를 거치는 사람들. 마고도 예외는 없다. 셰프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 이상한 걸 느낀다. 어? 원래 오기로 한 사람이 안 왔는데? 타일러에게 문의하는 직원. 타일러는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다"라며 직원에게 해명한다. 같이 섬으로 가는 일행은 다방면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셀럽, 요리평론가, 방송사 직원 등등. 기 센 사람들 아니랄까 봐, 너도 나도 뻐드럭거리며 배 안에서 섬으로 이동했다.
섬에 도착한 일행. 섬에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여직원의 설명이 이어진다. "셰프는 여기서 요리를 직접 수확합니다. 또 우리 요리사들은 한 곳에서 함께 숙식하죠. 셰프의 숙소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설명을 이어가는 여직원 엘사. 숙성 기간 계산을 잘못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음식 재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한다. 뭐지? 느낌이 싸하다. 뭔가 찝찝한 마고. 그런데 일행인 타일러는 어딘가 행복해하는 듯하다. 식당 안으로 들어온 타일러와 마고. 문 앞에 덩치 좋은 남자들이 버티고 있다. 입구가 막힌 건가? 불안한 느낌이 그대로 이어지는 것 같다. 첫 번째 코스는 그럭저럭 맛있었다. 아니, 사실 첫 번째 요리부터 어딘가 기괴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점점 뒤틀리고 있는 코스 요리들. 화려한 음식들 아래 숨어있던 코스의 어두운 내면이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요리의 특성을 활용하다
영화의 강점으로 뽑을 수 있는 부분은 요리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당연히 음식일 것이다. 이 요리들은 실제 음식들을 갖고 온 구석이 몇 군데 보인다. 그런데 어느 코스를 지나고 나서는 감독이 이런 음식들을 창작했다. 여기서 요리의 분위기로 영화의 정서를 이끄는 과정이 신선했다. 이는 두 번째 요리가 특히 그렇다. 이 두 번째 요리에 대한 발상 자체는 익숙하다. 뭔가 예전 전래동화에서 볼 수 있는 느낌? 그러나 극에서 제시되는 ‘이 요리가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히 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창의성이었다. 이 두 번째 코스요리 이후 극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음식으로 치환하는 형태가 반복되는데, 살짝만 어긋나면 작위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화의 소재였다고 생각한다. 완성된 요리의 형태를 제시했기 때문에 극에서 지적하고 싶은 한 집단의 위선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만약 예를 들어서 상위층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너희들은 라면이나 끓여먹여라’라고 한다면 감정적으로 들끓을지 몰라도 확실히 몰입에 아쉬운 지점이 생길 것이다. 유치해지는 것이다. 셰프 슬로윅의 장점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르적인 특성이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요리는 우리가 아는 ‘요리’의 이미지를 1차원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코스요리’라는 키워드가 우리가 먹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표현되는 장면이 몇몇 있다. 영화에서 연출로 방점을 쾅 찍는 부분이기도 하다. 윗 문단에서 적었던 두 번째 코스요리처럼 이런 방식의 아이디어 자체는 왠지 익숙하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영화에서 전개하는 방식은 확실히 신선하다. 세 번째 코스요리였나? 이 요리가 제시되고 난 다음 영화의 이야기가 갑자기 전복된다. 영화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를 쌓다가 폭발하는 이야기.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의 전복을 요리로 치환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머릿속에 잘 박힌다. 글쓴이는 이에 대한 감독의 설명이 비평가 캐릭터와 방송업계 종사자 캐릭터를 삽입했기 때문에라고 생각한다. 이는 여러분이 직접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거 이렇게 될 것 같은데?'를 뒤집는 이야기 전개가 이 요리를 통한 비유에서 나왔다고 느낀다.
왜 영화를 볼까
왜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까? 왜 <박하사탕>에 꽂혔을까? 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꽂혔을까? 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글쓴이가 갖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재밌으니까. 또 일상이 지칠 때 어떤 영화에 기댈 수 있다는 건 축복 같은 일이다. 내가 싫을 때 <매그놀리아>를 보는 것. 나만 안 되는 인간관계에 <벌새>를 보는 것. 나만 안 되는 짝사랑에 속상할 때면 <리코리쉬 피자>를 본다. 그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다행이다. 이런 글쓴이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첫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과연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허영을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영화는 이런 글쓴이에게, 또 우리에게 맛있는 코스요리를 제시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란 영화가 있다. 항간에 알려진 바로는 이 영화 진짜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도 어렵다. 극후반부까지 이야기를 점점 쌓다가 엔딩부에서 모든 내막이 밝혀진다. 여기까지 가는 것이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굉장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글쓴이는 이 영화에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영화를 봤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사진을 올린다. 이때의 나에게 묻는다. 이걸 굳이 올리는 이유는 뭘까? 질문의 답은 인정하기 싫은 사실로 옮겨간다. 정말 내가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걸까? 이런 고상한 취향 가졌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 <더 메뉴>는 음식이라는 소재에 집중한다. 음식이 뭐야? 의식주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인간의 필수요소다. 음식 안 먹으면 인생 못 산다. 그러면 무언가를 먹는 것이 그 자체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가끔 같은 티켓 가격 내고 다른 사람 위에 있고 싶어 할 때가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나 음식이나 공통점을 가진다. 그냥 그 자체로의 목적을 가질 수 있는데, 이에 힘입어 나 자신을 표현할 소재가 되는 것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이 이런 흐름을 타서 발전하지 않았나. 더 높은 권위를 찾고. 혹은 그 권위에 다가가려 하고. 이 <더 메뉴>는 권위를 만드는 방식, 그 이면을 드러내 여러분에게 ‘더 주체적으로 다가가라’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블랙코미디적인 특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신선하게 했기 때문
창작자에 대한 은유
영화는 그렇게 관객들과 평론가들을 조롱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창작자들에게 냉기를 뽐내기도 하고 있다. 일단 영화를 보다 보면 극 안에서 반복되는 어떤 사건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주인공인 슬로윅은 셰프다. 이 요리사는 어떤 계기를 통해 마음을 먹고 돌아가기 위해 이 일을 벌인다. 여기서 이 ‘어떤 일’이 아무리 납득이 간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이 옳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다. 글쓴이는 이렇게 방법이 극단적이라는 장르적 특징이 창작자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너무 멀리 왔다'식의 한탄인 것이다.
이는 영화에서 슬로윅과 나머지 셰프들 간의 위치 묘사를 통해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슬로윅이 전체 코스요리의 스토리텔링을 이끌고 있다는 건 감독이 하는 일과 비슷하다. 엘사가 맡은 일은 조연출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슬로윅 아래에서 인물들의 구체적인 동선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슬로윅의 부주방장이 나온다. 이 부주방장은 영화에서 배우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영화는 직업이라는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를 계속해서 드러낸다. 또 이 영화는 요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가? 셰프들이 요리를 한다. 그런데 그 요리를 하는 이유가 직업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 중에서 예술가가 뭔가를 창작하는 이유가 뭔가 숭고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몇 있다. 뭐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물고 물리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묘사하기 위해라고 생각하면 그의 천재성에 대해 어림짐작 하곤 한다. <마스터> 같은 발상과 이야기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웅장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 내면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모순적인 특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를 묘사한다. 창작자들이 엄청난 걸 만들어서 일반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방식과 의도가 보이는 것에 잡아먹혀 매 번 옳게 전달된다고 맹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더 메뉴>는 창작자들의 그런 이중성을 꼬집어 풍자한다. 옳은 것만 좇는답시고 허영심에 빠져 본질을 잃어버린 예술가들을 불태운 것이다.
재미있는 영화
뭐 이렇게 요리와 영화의 비유를 바탕으로 창작자들에 대한 조롱과 반성을 담은 이 <더 메뉴>.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그냥 이중적인 메타포를 잘 때려박아서가 아니다. 그냥 영화가 재밌는 영화다. 호러/스릴러/미스터리의 장르 특성을 잘 잡은 느낌? 예고에도 나오는 슬로윅의 박수, “예스. 셰프!’하는 비명소리. 칼을 이용한다는 직업적 특성까지 요소요소 하나마다 이야기에 새긴 냉기는 스릴러로서 영화를 봐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 위해 랄프 파인즈가 내면을 알 수 없는 인물의 눈빛, 표정연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냥 손님들이 와서 요리만 먹다 가면 장르 전복에 이질감이 느껴질 것이다. 이에 굴곡을 부여하는 좋은 퍼포먼스였다. 뿐만아니라 안야 테일러 조이의 연기도 전형적이지 않은 주인공 연기를 잘 보여줬다. 이 인물은 다른 사람들과 색다른 특징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특징을 구현하기 위해서 굳이 안야 테일러 조이라는 슈퍼스타가 필요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배우가 고유하게 품고 있는 매력을 꼬집어내어 관객에게 설명한다. 유달리 이 영화에서 헤어와 코디가 잘 어울리게 나온다. 또 영화의 주요 조연 중에서 뇌리에 박힌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요리와 영화의 상관관계를 내세우며 창작자와 관객을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정말 재미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코멘트해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요리를 먹다가 귀뚜라미가 나온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귀뚜라미 나왔어’라고 항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단순히 예술이라는 이유로 모든 창작자의 의도를 좋게 판단하는 건 너무 저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이 지점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면 더 품이 넓은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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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의 기다림> "이야기, 그 사람의 기나긴 우주의 일부를 함께 한다는 것."
*해당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해 작성했습니다.
지난 12월 27일, 조지 밀러 감독이 7년 만에 낸 신작 <3000년의 기다림>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했다. 개인적으로 유사한 장르의 영화들이 지니고 있었던 틀을 깨어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을 했다. 스포일러 없는 후기, 함께 자세히 알아보자!
<3000년의 기다림>은 틸다 스윈튼, 이드리스 엘바 등의 배우들이 출연하며 관객들의 기대를 샀다. 총 러닝타임은 108분이며 국내 정식 개봉은 1월 4일이다. 제 75회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해외 유력 매체의 언론과 세계 평단의 찬사가 쏟아진 작품이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 통다한 서사학자 알리테아(배우 틸다 스윈튼)가 골동품 가게에서 산 공병으로부터 우연히 소원을 이뤄주는 정령 지니(이드리스 엘바)를 깨워낸다.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3번, 마음 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서 알리테아와 지니의 사이는 깊어진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어떤 장르인가 생각해봤다. 역사물도 아니고, 철학물도 아니고, 판타지도 아닌 그 셋을 아우르는 영화다. <3000년의 기다림> 역시 그러길 바란다.” - 조지 밀러 감독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영화의 폭주하는 쾌감과 스릴로 러닝타임을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제2의 매드맥스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사뭇 느낌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조지 밀러 감독은 <3000년의 기다림>에서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걸쳐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긴, 3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났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과 기억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현해내고 있다. 시각적으로 강렬하지만 부드러웠으며 청각적으로 웅장한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최고의 오감만족을 선사해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스크린이 선사하는 경험에 자신을 맡기면 영화로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러므로 <3000년의 기다림>은 꼭 극장에서 봐야 한다.”라고 전했다.
1.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과 소원을 비는 사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묘하게 <미녀와 야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알라딘>, <팬텀스레드> 영화가 생각났다.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소위 말해, ‘지니’겠다)과 소원을 비는 사람 간의 아련하고도 슬픈 관계는 사실 어느 영화에서나 성립했다. 그러나 <3000년의 기다림>은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도 강렬한 서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호평을 하고 싶다. 지니가 왜 그 병에 3천 년 동안 갇혀 있었는지, 왜 알리테아가 그에게 평생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인물인지 풍부한 서사로 관객들을 설득시켰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니의 3천 년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과정은 말로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로 화려했다. 그 화려함 안에는 정령의 아픔, 사랑 그리고 고통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한편, 알리테아는 이성적인 캐릭터로 본인 인생에 충분히 만족하며 사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므로 처음 지니를 마주하며 소원을 빌어야 할 때, 그 절실함을 느끼지 못 한다. 하지만 지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층 그의 삶에 더욱 가까워질수록 정확히 형언하지 못할 사랑을 느끼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원을 빌게 된다. 그렇다, 이 과정에서 기존 영화에서 비쳐졌던 소원을 비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관계가 타도된 것이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고 서글프게.
2. “우린 고독을 함께 해요”
알리테아가 지니에게 던진 한 마디, 어쩌면 그들의 3000년의 기다림을 요약해주는 한 마디였다. 이 영화를 보면, 단순히 판타지‧멜로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로맨스가 아니라 외로운 두 인물이 함께, 새로운 고독함을 맞닥트린 영화라고 생각했다. 알리테아에게 닿기 위해 지니가 버텼던 3천 년은 분명 행복한 꿈이었을 것이다. 한편, 지니에겐 3천 년의 기다림이었겠지만 알리테아 또한 얼마나 그 무던한 시간을 홀로 버텨왔을까? 평소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런 그녀에게 감정의 요동을 선물해준 지니였다. ‘내가 미친 건가? 무엇이 진짜일까? 나란 존재는 무엇일까?’라며 끝없는 고뇌 안에 갇혀있었던 알리테아. 정령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존재의 이유를 선물해줬다고 느꼈다.
지니가 살아온 삼천 년도 도착지 없는 여행이었겠지만, 알리테아가 겪은 무수한 고독함 또한 그랬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함 2명이 만나면 묘한 사랑으로 번져지는, 정말 물감이 묻은 하나의 붓이 천천히 물병 안에서 퍼졌던 영화였다.
지니, 알리테아; 각 캐릭터가 지닌 공허함을 잘 표현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다. 특히나 오랜만에 틸다 스윈튼을 큰 스크린으로 보니, 어딘가 모르게 갈 곳 잃어버린 그녀의 눈동자는 더더욱 아름다웠다.
3. 이야기 속에서 피어오르는 갈망
가수 아이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잘 잤으면 하는 건 사랑이라고. 이 말을 본 영화에 비유해보자면,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사랑해’라는 피상적인 말이 없어도, 그 사람이 건너온 무수한 우주를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함으로써, 본인 내면 속, 무의식 안에서 피어올랐던 진정한 ‘갈망’을 깨닫게 해주는 과정을 첨예하고도 부드럽게 그려낸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이다.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연출이 관객에게 선물해주는 ‘타임캡슐’. 실제 지니 역을 맡은 배우 이드리스 엘바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타임캡슐에 담긴 영화같다. 배우와 감독이 함께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갈망에 관한 교훈적인 이야기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관객은 지니의 3천년의 기다림, 그리고 알리테아와 지니가 앞으로 함께 걸어나갈 무수한 시간의 외로움이 담긴 타임캡슐을 고스란히 극장에서 열어볼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이야기 속에서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피어오르는 3천년의 기다림과 그들의 미래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그 사람의 기나긴 우주의 일부를 함께 한다는 것."라고 나의 한 줄을 정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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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소나 영화 후기 - 아이유의 4인 4색의 모습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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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이지은)의 팬으로서 페르소나를 보고 싶었다. 넷플릭스에 페르소나라고 검색하고 찾아봤는데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일단 이 작품은 내가 평소에 알고 있었던 아이유의 이미지와 달라서 많이 낯설었다. 일단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이다. 그렇기에 잔인하기도 하며 선정성이 조금 있기도 하다. 먼저 페르소나의 구성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러브 세트→썩지 않게 아주 오래오래→키스가 죄→밤을 걷다 이렇게 스토리로 구성된다.
1.러브 세트
아이유는 두나와 함께 테니스 시합을 한다.
러브 세트에서 아이유와 두나는 힘겨운 테니스 시합을 한다. 초반 장면부터 아이유는 사과를 씹어먹으면서 두나와 어떤 남자와의 테니스 시합을 관람한다. 하지만 아이유는 두나를 못마땅해한다. 그리고 아이유는 외국인 남사친을 불러 두나와의 테니스 시합을 봐달라고 부탁한다. 아이유와 두나의 테니스 시합이 시작되고 아이유는 선수 같은 두나의 테니스 실력에 지고 만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아이유는 끝내 두나와의 테니스 시합을 멈추지 못하고 다리에 상처가 생긴다. 러브 세트는 외설적이면서도 작품 속에 무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2. 썩지 않게 아주 오래오래
왜 '은'은 '정우'와의 연인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을 요구했을까?
이 작품은 뭔가 섬뜩하기도 한 작품이다. 컬렉터(Collector)라는 또 다른 제목으로 은과 정우와의 연인 관계에서 은이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정우는 알게 된다. 정우의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상자 속의 정우는 은이 다른 남자들을 거리낌 없이 만난다는 사실을 두고 자신의 마음속을 알아보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이다. 하지만 은이 다른 남자들을 많이 만난 것처럼 정우 또한 전 여자친구로부터 은을 만나지 말라는 충고를 받는다. 정우는 은과 함께한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이 작품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남자와 자유로운 관계를 원하는 여자와의 관점을 다룬 것만 같다. 착한 남자는 마음을 내어주지만 나쁜 여자는 이를 이용하고 만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 은을 사랑하고 아꼈던 정우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3.키스가 죄
한나는 해복과 함께 해복의 아빠에게 복수를 준비한다.
이 작품은 내가 바라보는 순수한 아이유의 이미지에서 많이 벗어난 작품이다. 담배를 피우는 한나의 모습과 해복에게 담배를 건네는 모습까지 내가 알던아이유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또한 해복은 산불 경비를 하는 아빠를 두고 있다. 하지만 아빠가 정말 못됐나 보다.해복을 이렇게나 방치하고 키웠으니 말이다. 그런 해복을 위해 한나는해복의 아빠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정말 웃긴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약간 불량스러운 한나의 모습은 기존의 아이유와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친구와 농담도 하고 어느 10대 소녀와 다르지 않다.
4.밤을 걷다
꿈속에서 죽은 지은과의 만남은 K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죽은 사람과의 대화는 흔히 꿈속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꿈속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가들은 무척 많다. 지은이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유는 자신의 영감이 불면증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하였다. 불면증때문에 잠을 못자고 곡 쓰는데 시간을 바친다고 한다. 밤을 걷다에서 나오는 지은이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섬뜩하지만K는 그런 지은이의 장례식에도 울지 않았고 꿈속에서나 울었다. 흔히 그리워하는 사람이 꿈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잊지 못했거나 그 사람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도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들이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꿈속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기 때문일까?
※본인의 주관적인 해석 또는 리뷰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봤습니다.
※2018년에 개봉하였습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입니다.
"아이유를 위해서라면 뭐든 좋으리!(빠르게 타자를 치며)"
하니엘의 말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하니엘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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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R카드 속 톱니바퀴
배드 지니어스
줄거리
수학 천재, 린. 그녀는 장학금을 받으며 명문고등학교를 다니는 모범생이다.
그녀의 친구인 그레이스는 예쁘고 금수저이지만, 연극부에 들어갈만한 성적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다.
그저 그레이스가 연극부에 들어갈 수 있는 점수를 받게 해주기 위해 시험시간에 답을 알려준 린.
작은 호의로 시작한 단 한 번의 선택이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 흔들기 시작하는데...
숨은 의미 찾기
"우린 더 큰 세상에서 헤엄치게 될 거야."
린은 뱅크와 시드니에 도착해서 말한다. 이번 계획만 성공한다면 우리도 남부러울 것 없이 꿈을 펼치고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본인들이 시험장에 들어가는 목적에서부터 이미 박탈당한다. 그들만 몰랐을 뿐이다. 린과 뱅크가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들 중 하나라면, 팟과 그레이스는 그들이 만들어낸 돈을 쥐는 권력자이다. 한 마디로, 돈을 건네는 이들의 미래를 위한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린과 뱅크는 그 톱니바퀴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팔자로 낙인찍힌다.
언뜻 보면 돈을 받고 답안지를 공유한 것은 거래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린이 아무리 많은 돈을 받고 컨닝에 가담한대도 갑과 을의 관계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STIK시험에서 1420점을 얻은 사람들'
시험이 끝나고 팟과 그레이스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한다. 그 축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있다. 그들은 그 점수를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얻어냈다. 그저 몇 푼의 돈으로, 린의 두뇌를 구매하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그러나 린은 시험이 무효가 되었고, 뱅크는 시험 자격 정지에 퇴학까지 당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돈, 그러니까 그들과 거래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돈을 쟁취하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1차원적 접근은 아예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꼴이다.
"대학교에 가면 객관식 문제는 없어. 그 때도 내 답안지를 베낄 순 없겠지."
린은 공항에서 같이 대학에 가자는 그레이스의 팔을 뿌리친다. 팟과 그레이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벙찐 표정을 짓지만 그 때 뿐일 것이다. 팟과 그레이스는 답안지를 공유할 '제 2의 린'을 충분히 찾아낼 것이다. 대학교에도 린과 같이 자신의 답지를 판매하는 공급자가 있을 것이다. 왜? 수요자가 있으니까.
"뱅크, 돈이 필요하면 내 몫까지 가져가."
슬픈 일은, 그토록 순수하고 성실했던 뱅크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장본인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애틋하고 먹먹해지는 장면이었다. 돈을 줄테니 컨닝을 시켜달라는 친구의 말에 질색한 것도 모자라 그 사실을 가장 처음 일러바쳤던 뱅크가, 이제는 린에게 같이 또다른 컨닝을 하자고 말하던 장면 말이다. 팟과 그레이스가 대학에 가서 또 다른 뱅크나 린을 찾아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자명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그 쪽은 정답을 얻고, 나는 돈을 얻고. 윈윈이잖아?"
앞서 말했듯 린은 틀렸다. 이 게임에서 결코 윈윈은 나올 수 없다. 권력자들이 손쉽게 구매한 찬란한 미래와 황금빛 인생은, 린과 뱅크 본인들이 판매한 날개이자 꼬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팔아버리면 제아무리 넓은 바다와 하늘에 있다 한들 헤엄칠 수 없고 날아갈 수 없다. 권력자들이 그들을 구매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보다 멀리 헤엄치고 높이 날아가도록 내버려두지 못하는 본능 때문이리라.
"제 잘못을 발판삼아 지도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빌어먹을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린이 그들을 위한 노동에 동의하지 않는 것 뿐이다. 린은 변해버린 뱅크를 보고 그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뱅크가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들같이 돈없고 힘없는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선, 그들이 이길게 뻔한 게임을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린이 거기에서 멈췄다 한들, 세상이 크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수학 천재였던 린은 작은 학교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며 일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모범생이었던 뱅크는 세탁소에 갇혀 빨랫비누 냄새만 맡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팟과 그레이스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그럼에도 린이 용기를 내어 게임을 중단시킨 것은, 누군가는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영화 내에서 린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답답하다고 느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차라리 돈을 먹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지, 그래서 더 잘 되어서 성공하지' 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미 정정당당하게 살면서도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들이 만약 모두 권력자 앞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우린 그들을 볼 수 있었을까? 그들이 만들어낸 기적같은 세상을 살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린이 던진 메세지를 받은 관객만이 알 것이다.
컨닝 스릴러
감상평
결론만 놓고 보면 재밌었다. 보다보니 밤이 늦어서 끄고 자야했는데, 도무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눈뜨자마자 다시 틀어서 볼 정도로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액션 하나 없는 주제에 컨닝으로 박진감 넘치는 이 영화를 보고 있자니, 학생 시절의 그 미묘하게 걸쳐있는 듯한 느낌이 확 다가온다. 오로지 학교 점수와 대학만이 전부였던 그 시절. 한 문제로 울고 웃는 나날들,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상실감. 그 긴장된 공기를 알기에, 부정행위라도 해서 얻어내겠다는 그 우스울 정도로 얄팍한 지혜가 마냥 우습지만은 않았다.
학교를 나와서 보니, 학교란 것이 참 기묘하다. 인생에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으면서도, 없으면 손해를 보는 묘한 장소이니. 고작 시험 점수 1점에 매달리는 행위 자체는 우습지만, 그 몸짓이 인생에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그 사실에서부터 이미 학교의 의미는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지. 참 씁쓸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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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의 방아쇠를 당기기까지의 여정
복수극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시원하고 짜릿한 맛이 일반적이겠지만, 영화 '리볼버'는 다소 다른 결을 띤다. "탕!" 복수의 총알을 한 방 발사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다양한 구성을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리볼버'는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갔던 전직 경찰 하수영(전도연)이 출소 후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무뢰한'에서 호흡을 맞췄던 오승욱 감독과 배우 전도연이 약 10년 만에 재회해 눈길을 끈다.
영화 제목만 보면 마치 총기 액션이 난무할 것 같은 복수극을 떠올리게 되고, 실제로 하수영에게 리볼버 권총이 쥐어지면서 '언젠가 저 총으로 누군가를 겨냥해 발사할 것이다'는 예상과 함께 긴장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보기 좋게 다른 노선을 보여준다.
교도소에 가는 조건으로 돈 7억과 서울 아파트를 약속받았지만, 출소 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하수영은 연관된 이들을 차례대로 만나며 정보를 수집한다. 정윤선(임지연), 조 사장(정만식), 앤디(지창욱), 신동호(김준한), 본부장(김종수) 등이 정보를 흘리고 이를 추적해 나가는데, 매우 저속으로 나아간다. 이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로드무비처럼 다가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하수영이 되찾기 위해 나선 7억과 서울 아파트는 본부장 말마따나 하수영이 목숨을 걸기엔 '그렇게 큰돈도 아니지만, 무시할 만큼 작은 돈도 아닌 것'처럼 표현된다. 돈 찾기보다도 하수영, 그리고 그와 얽혀있는 주변 인물들의 감정선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이들은 하수영과 접촉한 이후 미묘하게 관계성이 달라져 균열을 만들어낸다. 각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진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장면 곳곳에 던져주며 아슬아슬한 심리전의 재미를 만든다.
후반부에 모든 캐릭터가 한 장소에 모여 갈등이 본격 발화되면서 재미가 극대화된다. 여기에 조금씩 비튼 대사와 캐릭터성이 의외의 웃음보를 자극하기도 한다. 진득하기만 했던 '리볼버'가 막판에 가면서 다양한 매력을 분출한다.
'리볼버'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무뢰한'에 이어 영리하게 전도연을 활용하는 오승욱 감독의 '전도연 활용법'이다. 2년 전 하수영을 통해 파랑과 레드가 섞인 보라, 청색과 녹색이 모호한 청록 등 도드라지는 컬러로 부각했다면, 출소 후에는 어두운 의상을 입고 마른 수건처럼 생기를 잃은 무표정의 마른 얼굴을 보여준다. 코 앞에서 휘두르는 야구 배트에도 흔들림 없는 초점 잃은 눈빛과 함께 무조건 전진한다. 전도연의 새로운 얼굴이다.
그러면서 투샷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하수영과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을 연상케 하는 정마담의 묘한 워맨스(?), 온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하수영과 임석용(이정재), 진짜 관계가 무엇인지 감이 오질 않는 투자 회사 대표 그레이스(전혜진)와 앤디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연기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면서 아우라를 뿜어낸다. 이들이 있어서 '리볼버'의 흡입력을 더욱 끌어올리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지창욱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간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지질함을 장착하며 새 얼굴로 갈아 끼우는 데 성공했다.
다만, 다른 텐트폴 영화들에 비해 '리볼버'가 관객들의 관심까지 명중하기엔 장르나 분위기가 선택받기엔 쉽지 않다. '크로스' 대신에 여름 대전에 내놓은 배급사의 의도를 알겠지만, 모든 관객들을 사로잡기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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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심은 죽지 않는다
이 영화의 혹평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혹평의 주류는 각자의 동심 속 웡카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던 듯하다. 그 말도 일리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첫 번째 시리즈를 안 봤던 나에게, 팀버튼이 원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원작을 따라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티프만 따왔다고 생각하고 별개의 영화로 인식하고 보니 이 영화는 그저 동심을 잃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1. 팀 버튼의 웡카와는 다르지만 같은 메시지를 가진
웡카의 성격과는 별개로 웡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동심이란 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웡카가 그로테스크하든 해맑든 그 존재만으로도 동심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가진 꿈은 그 어떤 이유로든 짓밟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달까.
나의 동심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나는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안좋았던 기억을 훑고 좋은 기억들을 그 뒤에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왠만하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려다가도 살다보면 하게 되는 선택에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다. 한 때 나도 웡카와 같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존재에 설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현실을 고려하고 난 뒤에 하고싶은 걸 찾는달까. 무턱대고 꿈꾸기만 하는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팀 버튼의 웡카를 보든 이 해맑은 버전의 웡카를 보든 나는 여전히 웡카의 자유로움, 신비로움에 설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심을 꺼내어 좋았던 기억들을 회고하니, 꿈같은 2시간이었다.
2. 현실이 쓰더라도, 초콜릿만 있다면
웡카에 대한 환상은 초콜릿에 대한 진심에서 비롯된다. 힘든 삶을 살아내는 누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웡카는 초콜릿을 권한다. 마치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듯이. 나는 초콜릿 하나를 먹어도 어차피 먹을 거면서 칼로리부터 확인하고 먹을만큼 현실 파악부터 하는 편인데, 가끔은 내 기분을 위해 무모하게 살아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현실만 바라보면 인생이 재미없으니, 삶이란 현실 60, 꿈 30, 실행력 10으로 꾸려나가면 꿈만 좆느라 다치지도 않고, 현실에 질리지도 않을 것 같다. 다만, 꿈만 꾸지 말고 실행하자. 현실이 힘들다 싶으면 단 거 먹고 힘내자. 내가 느낀 영화의 메시지는 이거였다.
총평
최근 본 영화 중 뻔한 전개였는데 이렇게 힘이 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실행력이 조금 부족한데, 그냥 초콜릿을 가득 들고다니며 막막할 때 하나씩 꺼내먹어야겠다. 영화 속에서 초콜릿이 가지는 의미는 곧 꿈과 환상이자 위로를 건네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호텔 잘못골라 세탁소 시궁창에 빠져버린 웡카와 친구들에게도 초콜릿이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소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ost가 잔잔하게 맴돈다. 티모시 샬라메가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지진 않았는데도 노래들이 조용한 임팩트가 있다. 역시 가창력보다 중요한 것은 전달력인 걸까. 전달력과 가창력이 비례하진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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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라떼극장]"소풍왔어 소풍?"시실리2km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1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시실리 2km"를 보며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
친구가 훔친 다이아를 되찾기 위해 도착한 마을 '시실리'
비협조적인 마을 주민, 예상치못한 귀신과 만나며 일은 점점 꼬여만 가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조폭들이 했던 게임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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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잘리카투> 메인 예고편
푸줏간(도축장)에서 도망친 물소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마을 남자들은 폭주하는 물소를 잡기 위해 나서고 이웃 마을 남자들까지 몰려들자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다. 평화롭던 마을은 물소를 제압하려는 남자들로 인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리고,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물소 사냥은 점차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광기로 변해간다.
※ 잘리카투(또는 살리카투) JALLIKATTU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수확축제인 퐁갈에서 진행하는 전통있는 집단 경기다. 황소를 남자들 무리 속에 풀어놓으면 참가자들은 황소의 등에 올라타서 최대한 오래 버티거나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살벌한 장관이 펼쳐진다. 리조 조세 펠리세리 감독의 <잘리카투>는 잘리카투 경기를 묘사하는 영화는 아니다. 확실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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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종이의 집> 시리즈 예고편
강도로 시작된 범죄극, 국경을 초월해 하나의 현상이 되다. 《종이의 집》 전체 에피소드를 시청하세요.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