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22 11:56:09
글래디에이터 2 | 로마의 꿈에 짓눌린 검투사
<글래디에이터Ⅱ>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가 이끄는 로마군의 침공으로 인해 아내 '아리샷'(유발 고넨)을 잃고, 노예 검투사로 팔려간 '루시우스'(폴 메스칼). 아카시우스를 향한 분노를 원동력 삼아 검투장에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며 명성을 쌓은 그는 자기 실력을 알아본 노예 검투사 상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와 계약을 맺는다. 마크리누스는 루시우스의 복수를 돕고, 루시우스는 황제가 되려는 마크리누스의 칼이 되어 주기로.
한편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의 폭압과 잔인한 정복욕에 환멸을 느낀 아카시우스는 자기 휘하의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계획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이자 아내인 '루실라'(코니 닐슨)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영웅이었던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유지, ‘로마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
하지만 루시우스의 복수, 마크리누스의 음모, 아카시우스와 루실라의 반란은 이내 새 전환점에 접어든다. 콜로세움에 입성한 루시우스가 사실 막시무스와 루실라 사이의 아들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기 때문.
리들리 스콧만 몰랐던 매력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남우주연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 제58회 골든글로브상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과 영국 아카데미상 작품상.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가 수상한 상들이다. 화려한 수상 내역에 비해 <글래디에이터>의 이야기는 사실 특별하지 않다. '한 나라의 영웅이 정치적으로 몰락해 노예 취급을 받다가 멋지게 재기한다.' 한국 사극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클리셰다.
그렇지만 <글래디에이터>는 캐릭터, 주제, 비주얼이라는 삼박자를 딱 맞추면서 클리셰를 깨버렸다. 검투사로 몰락하고도 황제에 대적하는,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영웅 막시무스의 매력은 독보적이었다. 로마 공화정을 현대 민주주의에 빗대어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는 복수극을 자유를 향한 사투로 치환한 스토리텔링, 고대 로마의 분위기를 재현한 볼거리는 뻔한 전개마저 잊게 할 감동을 불어넣었다.
안타깝게도, 정작 리들리 스콧 감독은 <글래디에이터>의 매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듯 보인다. 20년이 지나서 제작된 속편, <글래디에이터 2>는 전작의 일부만 계승하는 데서 그쳤기 때문. <글래디에이터 2>는 '로마의 꿈'으로 대변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메시지에만 집착했다. 막시무스처럼 극을 주도할 캐릭터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전편의 감동을 재현해내지 못했다. 전편 못지않은 볼거리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꿈'에 충실한 속편
사실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래디에이터 2>의 서사는 예측가능했다. 전편과의 연결고리이자, 리들리 스콧 표 시대극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당장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와 콤모두스가 갈등을 빚은 계기에는 '로마의 꿈'이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공화정으로 복원하려 했고,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이는 콤모두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뒤 황제로 즉위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글래디에이터 2>의 의도도 마찬가지다. 콤모두스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의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쌍둥이 황제는 로마 시민의 자유나 공화정을 보호하거나 추구하는 대신 검투 경기와 정복 전쟁에만 열중했기 때문. 이러한 배경에서 <글래디에이터 2>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지막 혈통이자 막시무스와 루실라의 아들인 루시우스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며 '로마의 꿈'을 이루는 검투사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는 지극히 리들리 스콧다운 시대극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극은 항상 자기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역사를 펼쳐 보이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 <글래디에이터> 뿐만 아니라, <킹덤 오브 헤븐>, <로빈 후드>,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리들리 스콧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며 일관되게 통상적인 이미지를 파괴해 왔다. 역사 왜곡 논란에서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극이 꾸준히 사랑받은 이유였다.
정작 꿈을 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글래디에이터 2>는 전편의 감동을 살리지도, 리들리 스콧의 장점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전편과 달리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는 나머지 이야기가 메시지에 짓눌렸기 때문. 1편의 감동이 단지 메시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정도로 <글래디에이터 2>에서는 악역인 마크리누스를 빼면 특징이나 동기가 명확한 캐릭터를 보기 어렵고, 막시무스처럼 극을 주도하는 인물도 없다.
주인공 루시우스를 보자. 그에게는 출생의 비밀을 비롯해 주인공으로서 필요한 모든 조건이 주어져 있다. 문제는 그에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 일례로 그가 아내의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는 전형적이다. 로마군과의 전투 중 아내가 사망했다는 것 외에 그와 아내의 관계가 얼마나 깊거나 소중했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막시무스가 가족의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극명하다.
그가 로마에서 검투사들을 이끌어 반란을 주도하는 장면에서도 전율이나 감동은 느끼기 어렵다. 그가 검투사들의 지도자가 된 과정, 검투사들이 그에게 동조하는 이유를 안 보여줬기 때문. 전투나 검투장에서 루시우스가 막시무스처럼 존경받을 만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와 검투사들이 유대감을 갖는 명확한 계기도 없다. 의사 '라비'(알렉산더 카림) 외에 루시우스가 다른 검투사와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장면이 없으므로.
즉, 루시우스에게서는 어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단지 공화정과 민주주의라는 '로마의 꿈'을 보호하기 위해 설정된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가 대의를 추구하는 명분 역시 단지 태어날 때부터 고귀했던 그의 혈통에서 비롯되는 듯 보인다. 그 결과 루시우스의 모든 선택과 행적에서는 감동을 느낄 수 없다. 그가 두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도, 사적인 복수 대신 대신 대의를 선택해도, 카리스마나 비장미가 전해지지 않는다.
꿈꾸지 않은 악역만 빛나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꿈'이라는 대의를 지지하든 안 하든 개개인의 동기나 매력을 알 수 있는 캐릭터가 거의 없다. 아카시우스 장군이 대표적이다. 그는 어찌 보면 전편의 막시무스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황제에게 대항했다가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검투사가 되었기 때문. 그와 동시에 차별점도 명확하다. 루시우스의 개인적인 원수이자,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라는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런데 <글래디에이터 2>는 이러한 특이점을 살리지 못했다. 아카시우스라는 캐릭터가 파편적으로 제시된 나머지 그의 행적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 그가 황제에게 환멸을 느끼고, 공화정을 복원하기 위해 반란을 꾀하며, 모든 권력과 지위를 버릴 정도로 아내 루실라에게 충성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결국 핵심 인물 중 하나인데도 아카시우스는 등장할 때마다 영화 전개를 뚝뚝 끊는다는 인상을 남긴다.
마크리누스가 유일한 예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노예였던 그는 힘으로써 '로마의 꿈'을 짓밟고 로마의 권력자가 되어 복수하려 한다. 막시무스나 루시우스에게 검투장이 '로마의 꿈'이는 이상향을 실현하는 성소라면, 그에게 검투장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현실을 확인하는 장소인 셈이다. 이처럼 동기와 서사가 확실하다 보니 마크리누스의 음모가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영화에는 비로소 활력이 돈다.
고질병마저 재발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메시지를 위해 도구적으로 소비되어 버린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글래디에이터 2>는 서로 다른 두 영화를 합친 작품이나 다름없기 때문. 영화는 크게 둘로 나뉜다. 검투사로 전락한 루시우스가 아카시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성공해 나가는 이야기가 전반부다. 한편 아카시우스의 죽음을 목격한 루시우스가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나기로 결심하면서 마크리누스와 대적하는 내용이 후반부다.
사실 두 이야기는 각각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하다. 그러나 <글래디에이터 2>는 애초에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본래 의도대로 결말을 낼 수 없기 때문. 혈통을 제외하면 루시우스는 로마의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로마의 구원자로 만들려면 로마의 장군이었던 막시무스와는 달리 부가적인 접점이 필요했다. 전편보다 다룰 사건도 많아지고, 이야기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캐릭터의 감정선을 세심히 조명할 여유가 없으니 템포는 빨라지고, 로마 공화정의 부활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개연성도 일부 희생되어야만 했다. 리들리 스콧의 고질병이 재발한 셈이다. <킹덤 오브 헤븐>을 비롯해 그의 영화는 극장판과 감독판의 완성도 차이가 크기로 유명하다. 분량상 편집된 장면이 삽입된 감독판의 개연성과 완성도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글래더에이터 2>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공허하게 화려하다
결과적으로는 화려한 볼거리마저 빛이 바랜다. 물론 <글래디에이터> 시리즈에 바라는 장면은 확실히 등장한다. 원숭이나 코뿔소를 탄 검투사와 사투를 벌이는 검투장 시퀀스의 박진감은 전편 못지않다. 해전이라는 콘셉트도 신선하다. 해안 도시를 포위한 채 벌이는 해상전, 콜로세움 안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재현하는 검투 시퀀스는 육상 전투가 주를 이뤘던 전편의 액션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글래디에이터 2>의 액션은 공허하다. 상술한 문제가 액션 시퀀스에도 반영된 나머지 서사의 방점을 찍는 역할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액션이 갑자기 시작돼서 급하게 마무리된다. 흐름이 빠르다 보니까 한 시퀀스 내에서도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각 인물의 감정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루시우스와 아카시우스의 검투 장면만 봐도 루시우스가 아카시우스에게 설득당하는 과정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이에 더해 각 인물의 동기나 당위성이 부족하니 볼거리가 일차원적으로 화려하다. 황제 친위대와 아카시우스의 군대가 로마 가도에서 전투태세를 갖추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루시우스가 공화정의 부활을 알리는 연설을 할 때 양 군대가 그에게 열렬히 호응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하지만 애초에 루시우스라는 캐릭터에게 그 정도의 설득력이 없다 보니 그의 연설은 공허하고, 김 빠지는 결말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흔히 '에픽'이라고 부르는 시대극이 많이 제작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래디에이터 2>는 가뭄 끝 단비와 같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전편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만큼 24년 만의 속편은 전편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글래디에이터 2>는 전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부실한 속편이었다.
Poor 형편없음
전편에 기대는 대신 완전히 새 판을 짰다면 달랐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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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연과 상상(2021)> 리뷰
-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감상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가량이지만 세 개의 옴니버스가 엮인 영화이기에 각 단편은 30-40분쯤 된다. 이것은 각본이 의도적으로 특정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의 인물이 ‘우연’ 속에서 ‘상상’하는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대 지평을 배반하는 각본을 통해 관객 역시 영화를 감상하는 도중 여러 상상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우연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기에, 제목 자체가 적지 않은 확장성을 지닌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우연과 상상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 경험일 테니.앞서 언급했듯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기묘한 애정 전선을 통해 우연이 낳은 상상을, ‘문은 열어둔 채로’는 앙심을 품은 개인의 상상과 우연이 맞물리며 맞이하게 되는 어떤 파국을, ‘다시 한번’에서는 우연과 상상이 동시 결합하여 빚어낸 가슴 아린 재회를 그린다. 모든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장면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분명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이나 빠른 화면 전환조차 없어 단조로워지기 쉬운 세 개의 단편에 감독은 121분 동안 ‘우연’과 ‘상상’을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솜씨가 정말이지 굉장하다.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과 웃음과 탄식을 공유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않았나, 생각했을 만큼.※ 이하 스포일러 주의세 에피소드각 에피소드의 플롯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츠구미(현리)는 업무를 통해 친해진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최근 만난 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직도 2년 전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떠올릴 만큼 순정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을 말하는 츠구미의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한 탓에 그와 카즈아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즈음, 영화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카즈아키의 전 여자 친구가 바로 메이코라는 사실이다.두 번째 이야기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세 사람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취업이 예정되었던 사사키(카이 쇼마)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재학 중 취업자에 대한 특례 인정을 해주지 않아 유급생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그러진 것에 대해 세가와를 원망하고,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자 불륜을 저지르는 파트너이자 늦깎이 대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교수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문이 열린 세가와 연구실에서 그의 신작 소설(심사위원조차 노골적인 행위 묘사라며 지적했던 페이지)을 낭독한다.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엔 그 누구도 나오와 세가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나오의 녹음 파일이 타인의 손에 떨어짐에 따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의 이야기다. 동창회에 어울릴만한 타입이 아님에도 그는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향을 찾는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나츠코는 기차역 앞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한다. 아야의 집에 초대된 후에야 나츠코는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유키)이 아닌 걸 알고, 아야 역시 도쿄로 갔던 다른 동창과 나츠코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둘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우연/상상을 포용하는 인간의 선택우연이란 무엇인가?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라고 말했다는데,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선, 완전한 필연이란 조작된 가상의 세계 – 시나리오 따위 – 에서만 허락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 결국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하여 우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무엇이지 않을까.만일 우연을 관계에 기초한 불확실성, 그러니까 타인과 자신이 유관하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한 사건들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메이코는 우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코는 자꾸만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메이코에게 있어 ‘모르겠다’는 고백은 자신이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데 메이코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갔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옮겨간다. 카즈아키는 분명 헤어진 후에도 메이코를 잊지 못했지만, 최근 관심이 생긴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메이코를 따라가지 말라는 부하직원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산재한 우연이 인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은 기실 우리가 인지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메이코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홀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는 것은 완공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며 나뭇가지로 막혀 트이지 못한 하늘이다. 메이코는 예기치 않게 진실을 발견하였을지라도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을 확언하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메이코이기에 그가 사랑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순간이 자신만을 위해 적절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니, 상실 역시 마땅한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이렇게 우연 자체의 속성을 파고든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우연이라 적당히 부르는 사건이, 사실은 스스로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오와 세가와의 이혼/지위 박탈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사키의 비대한 자아(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접점/시발점으로 하여 파생되었을지라도, 뜯어보면 인물 각자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사키는 자신이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으며, 나오는 가족이 있음에도 내연관계를 저버리지 않았고, 세가와는 나오에게 녹음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그리고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조차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세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나오는 사사키를 껄끄럽게 대하던 태도를 철회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후 세가와와의 관계를 회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사사키는 거부한다. 나오의 손을 빌려 세가와를 응징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사사키는 자기 우월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답보하는 셈이다. 이에 나오는 자발적으로 유혹을 선택한다. 그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긴장은 그리하여 연장되고, 우연이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동일한 패턴으로 영원 회귀할 수 있음이 암시된다.마지막 에피소드는 '당신은 분명히 내 기억 속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이 부른 상상의 부산물이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전히 정립한 중년은 흔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나츠코의 옛 연인/아야의 친구라 상상하며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나츠코는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고, 아야는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이끌어낸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를 메웠다기보다는 공허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은 두 사람은 묘한 연대를 이룩하고, 이는 역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아야가 동경했던 20여 년 전 동창의 이름을 나츠코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아야가 기억해낸 이름이 노조미(소망)이라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통해 후회를 털어내거나 잊었던 꿈을 되찾음으로써 성장할 수도 있는 셈이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덤블도어가 건넨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영화를 본 후, 우리네 일상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이보다 더 엉뚱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화든 현실이든 기대를 배반당하는 지점은 한결같이 우스꽝스럽다. 역시 삶은 원경에서는 비극처럼 보일지언정 가까이에선 희극인 모양이며, <우연과 상상>은 그런 점에 있어 더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영화일 것이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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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여성 예술가는 어디로 갔을까?
‘힐마 아프 클린트’. 이 예술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서양미술사와 친하지 않은 이들은 물론, 이 분야에 박식한 사람들도 이 예술가의 존재를 알리 없다.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마라”라는 유언으로 100여 년간 미술계에서 사라졌다가 이제야 세상에 나온 화가이기 때문. 실제 존재했던 예술가임에도 왜 우리는 그녀의 존재를 이제야 알았을까?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은 그 이유를 소개하는 작품이다.
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여성 예술가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20년 동안 내 작품을 공개하지 마라!” 이후 100년 동안 그녀의 작품은 봉인되었다. 이후 1,500여 점의 그림과 2만 6천 페이지의 작업 노트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활동한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이름의 독일 예술가의 이야기다. 칸딘스키, 몬드리안보다 앞서 추상회화를 선보인 이 여성 예술가의 등장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미술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은 알려지지 않았던 한 여성 예술가의 작품과 삶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귀족 가문 출생 엘리트로서, 꾸준히 그림을 그린 힐마는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예술가다. 그녀의 추상회화 시작점은 19세기 말 과학이 발전한 시대상에 있다. 과거 기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원자, 우주 등 과학의 발달로 인해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진 상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창조한다.
단순히 북유럽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 자연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것들을 그려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나선형, 원형의 선과 면이 특징인데, 생명체의 본질을 우주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려는 부분이 돋보인다. 더불어 신지학 운동 등의 영적 연구까지 예술로 승화하려는 힐마의 노력도 나온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다큐는 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예술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 그녀가 살아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고, 이제야 그녀의 이름과 작품이 알려지게 되었는지 소개한다. 19세기 말. 힐마 또한 그 시대를 산 여성들처럼 양지가 아닌 음지의 삶을 살아간다. 능력이 있고, 누구보다 자신만의 특색을 담은 작품을 그렸지만, 사회는 그녀의 진출을 반기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갤러리에 전시해야 하고, 예술적 동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야 하는 등 제반 여건이 갖춰져야 했는데, 힐마에겐 그런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고흐 등 사후에 인정받은 예술가들도 있지만, 힐마의 경우에는 ‘가난’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차이가 있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감독은 힐마가 남긴 작업 노트와 그녀의 작품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던 조카의 증언을 토대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한 예술가의 고뇌와 좌절을 소개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술 및 미술 산업 관계자들을 통해 과거 재능있는 여성 예술가들이 많았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아스라이 사라진 이유, 그리고 힐마 아프 클린트의 출현으로 서양미술사는 다시 작성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다큐 <힐마 아프 클린트 - 미래를 위한 그림> 스틸 / 마노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런 점에서 ‘미래를 위한 그림’이란 부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그녀의 그림이 시대를 앞선 추상회화라는 점에서의 ‘미래’라는 의미는 물론, 과거와 달리 앞으로 더 많은 여성 작가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길 바라는 ‘미래’라는 의미도 느껴진다. 힐마 아프 클린트 뿐만 아닐 것이다. 과거 사회의 장벽에 부딪히면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견고하게 가져갔던 여성 예술가들은 지금도 누군가 그 봉인을 풀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쪼록 이 작품이 그 봉인의 첫 열쇠가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말: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은 영화에서도 사용되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 중 춤추는 주민들의 동심원은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에서 착안되었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퍼스널 쇼퍼>에서도 작가의 그림이 등장한다. 이 다큐를 보고, 힐마 아프 클린트 작품에 매료되었다면 두 영화를 만나보길 바란다. 더불어 과거 인정받지 못한 여성 예술가의 고뇌를 담았다는 점에서 다큐 <밤쉘>도 함께 보는 걸 권한다.
평점: 3.0 / 5.0
한줄평: ‘그 많은 여성 예술가는 어디로 갔을까?’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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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아버지를 향한 집요한 물음
6★/10★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김창열 화백은 1971년부터 50여 년간 물방울만 그렸다. 한두 번이면 “구도”지만, 50년이면 “계획”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로 하여금 단 하나의 대상만 그리게 만들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창열 화백이 물방울이라는 대상에 도달한 과정을 담았다. 화자는 아들이다. 아들은 늘 과묵한 아버지의 내면이 궁금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추억, 일화뿐 아니라 그의 그림과 사회 활동을 고루 재료 삼아 그 중심에 가 닿고자 한다.
영화에 담긴 김창열 화백은 늘 느리게 움직이며 대부분 침묵한 상태다. ‘추상적이면서도 내밀하다’는 이유로 노자의 《도덕경》을 늘 가까이하고 깨달음을 향한 집요함을 보인 달마대사의 다소 섬뜩한 일화를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신비롭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는 김창열 화백이 관(官)이 기획한 행사, 즉 명예와 관련된 일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보인다. 한 인터뷰에서 브리지트 부이오 감독과 영화를 공동 연출한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버지를 안전한 공간에 모셔두고 성역화하는 대신, 설령 불경스럽더라도 아버지의 침묵을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했다는 소리다.
그리하여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도달한다. 북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던 김창열 화백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쓴 후 고향을 떠나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갔으나 팝아트와 소비문화가 만연한 거대 도시는 그에게 지독한 피곤함만 남겼다. 또 한 번의 이동. 그가 새로이 정착한 파리에서 김창열 화백은 마침내 물방울을 만났다.
김창열 화백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꽃, 여자의 나체, 풍경”을 그렸을 시대에 태어났으나 바로 눈앞에서 누군가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그는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소명’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살아남았다는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하기 위해 물방울에 천착한 것이다. 즉 그에게 물방울은 치유와 화해, 초탈을 위한 수단이자 과정 그리고 목적이었다. 김창열 화백이 작업한 수많은 물방울 그림에는 그가 오랜 시간 물방울을 그리며 품은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다. 하나하나의 물방울에 이름과 설명을 덧붙이는 아들의 내레이션은 아들이 끝내 아버지의 침묵을 해석했음을, 마침내 아버지를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남다른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5년여의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든 김오안 감독에게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품는 태도를 배운다. 한 사람은, 그가 품은 세계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좇을 만큼 거대하기도, 물방울 하나에 응축될 만큼 단순하기도 하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는 조화롭게 공존하는 두 모순이 담겼다.
*김창열 화백은 20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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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그녀들의 힘찬 발걸음
어떠한 문제를 일으켜도 주변의 사람들만 바뀔 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관습을 바꾼 사건이 있었다. 30년 간 드러나지 않았던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범죄 사실을 2017년 뉴욕 타임스가 보도하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미투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발화점이 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현실을 '변화'의 흐름으로 만들어낸 그녀들의 목소리가 뜨겁게 담겨있는 영화 '그녀가 말했다'를 소개한다.
2016년 어느 날,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꼿꼿하게 살아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폭로가 시작됐다. 하지만 잇따른 폭로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침묵보다 더 무서운 무관심에 휩싸여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시간은 흐르고 바뀌지 않은 현실에 절망할 새도 없이 할리우드의 거물의 성범죄 사실을 취재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며 숱한 증언과 부족한 증거로 인해 난항을 겪게 되는데, 과연 두 기자의 취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를 거치려면 그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세와 영향력에 짓눌린 배우들은 그를 거절할 수 없었고 그를 거절한 배우들은 보복당하는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벌어지는 비난도, 피해도 모두 피해자 몫이었기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크게 목소리를 냈던 이들도 침묵보다 무서운 무관심을 경험했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 또한 '침묵'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침묵하는 약자 앞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강자는 '합의'라는 이름으로 그 상황을 마무리 짓고 또 다른 약자에게 손을 뻗친다.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길 바라며 묵인했던 피해 사실은 30년 간 감춰왔던 할리우드의 민낯이었으며 현실이었다. 그 현실 앞에 선 이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 이야기를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끊임없이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이렇게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도 끊임없이 범죄행위를 지속했던 이는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고 그 행위를 이어왔다. 전혀 공평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하는 합의는 오직 자신을 위한 행위를 지속했던 이에게 큰 힘을 보탰다. 그 고통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던 이들이 폭력의 순응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눈을 뜨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꺼이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그 용기에 힘입어 그 목소리가 합쳐지는 순간,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 그 뒤에는 이들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던 두 기자가 있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올바르고 정직한 저널리즘에 의해 더욱 도드라진다.
보통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들은 감정에 치우쳐 객관적인 힘을 일어가곤 하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자극적인 사실에 집중하기보다 객관적인 상황 전달에 무게를 두고 몰입감을 높인다. 말로써 전달되는 부분을 녹취록을 통해 보여주거나 실제 피해자를 등장시켜 더욱 현실감을 더한다. 영화를 '폭로'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사실 전달'에 집중을 하며 이들의 진심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한 피해 사실에 집중하면서도 자극적인 장면을 최소화하는 영화의 표현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불특정 다수의 비난에도 방향을 틀지 않고 꿋꿋하고 묵직한 그들의 발걸음이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전 세계 언어로 그녀가 말했다 라는 문장이 그려졌다 지워지는 장면을 끊임없이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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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K 화질] 유튜브 게임 실황?
1편에서 2편까지 오는 데에 3번의 입학과 졸업, 1번의 입대와 전역까지 12년 혹은 13년의 기간은 짧지 않았다!
잊을 만도 하겠지만, <아바타>는 늘 우리의 겹에 함께 했었다. - 그도 그럴 것이 흥행 기록이 역대 1위이다...
그리고, 근래 개봉한 <디지털 리스마터링>의 "쿠키"에 2편 <물의 길>의 영상을 숨겨두며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는데 어땠을까?지난 속편에서 지구인들과의 전쟁에서 "판도라 행성"을 지켜낸 "나비"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낸다.
하지만, "판도라 행성"에 지구인들이 다시 찾아온다!
이번에는 자원이 아닌 "판도라 행성"을 자체를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로 생각하기에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다시 한번 그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는데...1. 끝까지 손이 안 가는 밑반찬
앞서 거창하게 말했지만, 영화 <아바타>는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 없을 만큼 단출한 플롯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관객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자리 잡힌 이유에는 시각효과를 비롯한 기술력에 있다.
이를 증명해낼 장면들은 많고 많지만 "할렐루야 산"과 "이크란 활공 장면"들이 그러하다. - 무엇보다 '미지의 장소 혹은 존재'로 공포를 조성하기보단 호기심을 자극해 "어드벤처"의 두근거리게 해주었으니 말이다!그리고, 부제에서도 보듯이 이번 <물의 길>은 "물"이라는 소재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장소와 생명체들을 진화된 "시각효과"로 보여주나 영, 느낌이 살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는 다양한 원인들이 지적되겠지만, 이야기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 가장 커 보인다. - 앞서 전작부터 가벼운 이야기가 지적되었던 것처럼 이번 <물의 길>은 이를 개선하려 다양한 캐릭터들을 출연시켜, 구도를 짜놓는다.
극 중. 전작에서부터 이어진 "제이크 - 쿼리치 대령"의 대결부터 "아빠와 아들", 그리고 "키리"의 비밀까지 아이고, 많기도 해라!하지만, 결과부터 말했듯이 이 모든 이야기들의 구도가 완벽하게 성립되지 않는다.
"제이크 - 쿼리치 대령"의 관계는 전작에서 성립되었으니 이를 제외하더라도, "아빠와 아들"을 비롯한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에 따라 구성되는 이야기의 설명이 완벽하게 성립되지 않는다. - 극 중. "나비"가 되려는 "스파이더"와 "나비"가 되어비린 "쿼리치 대령"이 대표적인데, 서사와 일부 행동에 따른 개연성이 아쉽다!
시리즈를 시작하려는 것을 생각하면, "멧카이나 부족"의 "토노와리 - 로날"과같은 새로운 얼굴들의 활약상은 미미한 게 걱정스럽다.2. 유튜브로 보는 게임 실황?
물론, 이는 주인공 "제이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전작에 이어서 주인공에 위치하나, 이번 속편에 들어오면서 "다운그레이드"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작에서 '앞뒤 없이 싸우자!'라는 인상과 달리, 이번 편에서 부족을 떠나 가족들과 이동하는 모습이 도망가는 것으로 보여 반대되는 설명은 아쉬웠다. - "토루크 막토"는 왜 했냐?결국, 미성립되는 이야기들은 장점으로 언급되는 "호기심"을 가짓수 늘리기로 변하게 만든다.
기존에 등장하는 "이크란"뿐만 아니라 이번 부제 <물의 길>에 맞춰 나오는 크리처들이 많지만, 전작에서의 "토루크 막토"를 찾아내긴 어렵다.
결국, 모든 것이 축소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물의 길>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축소된 규모를 보여준다. - 전작에선 폭격기에 군대들이 동원되었지만, 이번에는 포경선 1척뿐이다.이야기가 걱정스러운 점은 충분히, 예상했던 문제이다.
결국, 이번 <아바타: 물의 길>의 관건은 '얼마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지?'인데 전작이라는 높디높은 기준을 떠나 장면 자체들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빨리 감은 듯한 모습에 한 번, 그로 인해 바탕이 분리되는 (aka. 누끼?) 모션, 결국 플레이스테이션 혹은 엑스박스로 출시된 게임의 컷신을 좋은 화질로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본 영화의 시각 효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tmi. 1 - 쿠키 영상은 없다!
· tmi. 2 - 아시다시피, 5편까지의 제작이 결정되었지만 이번 2편이 실패하면 3편에서 마무리된다고 발표했습니다. -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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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 글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감독, 팀 밀란츠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을 전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요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수녀원을 중심으로 한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보호, 참회, 갱생을 빌미로 젊은 여성들을 감금하고 노동착취를 일삼았던 역사(막달레나 세탁소)와 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이미 접한 관객이라면, 첫 장면에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담겼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마을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 고집스럽게 화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정신적 영향력을 관객에게까지 과시하는 수녀원을 과연 누가 못 본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는 어두침침한 마을을, 관객들이 단순히 '풍경'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무실 전화벨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 석탄 배달을 가는 빌처럼 말이다. 그의 트럭을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일상을, 암울한 사회 배경보다 먼저 마음에 담길 원한다. 잔혹한 역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상황보다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더 주요하게 여겨서고, 본래 역사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상관없이 인물로 설명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조금의 덧붙임 없이 충실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이유와도 연결된다. 영화의 주제 의식과 소설의 지향점은 같다. 오직 인물만이 이 비극적 역사를 풀어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오직 빌 펄롱만이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밝힐 수 있다는 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을 통해 쓰인 작품이다. 우린 빌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가 사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가치, 따뜻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빌이 트럭에 석탄을 담는다. 석탄 배달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삶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이다. 새벽에 출근해 석탄을 배달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화장실에서 온몸에 묻은 석탄 가루를 씻어낸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인 귀여운 딸들의 수다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잠에 든다. 자주 잠을 설치지만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석탄을 배달한다. 소소한 만큼 무료하기도 하지만 가족의 평안이란 확실한 대가가 충족되는 하루, 모두에게 이상적인 삶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참이었다. 그가 부모에 의해 수녀원에 강제로 입소하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석탄 창고 안에서 소녀의 울부짖음에도 숨죽였던 그때, 빌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불안이 실은 시한폭탄이었고, 소녀가 수녀원에 갇힌 순간 폭탄 작동 버튼도 함께 눌렸음을 말이다. 사실 빌은 남들처럼 소소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불편했다. 정확히는 모두가 가끔은 불행하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때, 본인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에게 평안의 다른 말은 불안이었고 이는 따뜻함과 혼란함이 공존했던, 그리하여 너무나도 혹독했던 유년기에서부터 축적된 결과였다.
소녀를 처음 본 이후 영화는 석탄 배달 같은 반복적인 장면은 빠르게 넘기고, 빌이 혼자인 순간엔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 어딘가 외롭고 공허해 보이는 그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클로즈업 샷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을 더 집중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대체 어떤 사건이 빌의 내면에 불안을 심었으며, 목에 걸린 음울은 왜 계속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지 궁금하게 한다. 그의 불안을 역추적하는 일에 모든 힘을 소진하는 것인데, 이는 빌이 아내는 물론 동료, 이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빌의 어머니는 갱생의 대상, 미혼모였다. 부잣집 가정부인 그녀 또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꼼짝없이 수녀원에 갇힐 처지였다. 그러나 집주인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빌을 낳고 길렀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부인의 아들이 삼촌으로 곁에 있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들의 보살핌은 계속됐다. 수녀원 창고 안에서 볼록한 배를 감싸고 두려움에 떠는 소녀를 보며, 빌이 어머니를 떠올린 건 당연했다.
빌은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는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계속 과거의 나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걸로도 모자라 현실로 불러와 성인이 된 본인과 마주하게 한다. 소녀는 어머니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윌슨 부인과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빌은 그들의 따뜻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때 부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빌은 없었을 테니까. 더구나 작고 허름해도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은 아내의 말처럼 운이 좋아 얻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윌슨 부인이 어린 빌에게 준 사랑은 많은 돈과 우연이 결합해 발생한 운 좋은 얘깃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이 윌슨 부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웠음을, 어린 빌과 부인의 추억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꺼내 증명한다. 그녀의 사랑은 그를 진정 따뜻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나를 아끼듯 타인을 생각하고, 나를 위로하듯 남을 돌보고, 나를 사랑하듯 그를 돕는 삶. 아내와 다른 이들이 바라는 수녀원의 차가운 입김이 닿지 않는 삶과는 확실히 정반대였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소녀를 돕지 않는 본인을 향한 혐오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사이, 빌은 결국 가장으로 살아온 시간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침묵이 곧 순리임을 돈과 권력으로 강요하는 수녀원장의 입김에 고갤 숙인다. 지금껏 지켜온 모두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단골 가게 사장의 말에도 이를 악물며 참는다. 소녀가 생각나 부끄러움이 밀려오자,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자괴감이 휘몰아치자, 이를 잘라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간다. 늘 그래왔듯 하루 더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사는 이곳은 누군가를 가여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돕는 게 불가능하고, 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수녀원에 끌려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무관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힘들어할 시간도 없다고 여기는 사는 사람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빌을 무조건 추앙하지도 않는다. 그저 끝까지 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된 침묵만 감도는 이발소 안, 빌은 거울에 비친 어린 자신과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삼촌을 발견하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반복과 집중을 단번에 없애고 이야기 끝자락을 수놓는 빌을 조용히 따라간다. 빌이 외면했던 사람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윌슨 부인, 삼촌이었으며 자기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받은 사랑이 무참히 소멸하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빌에겐 그 희망이 전부였고, 여전히 삶의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의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선택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홀로 된다고 말하는 결연한 용기와는 다르다. 빌은 자기를 버릴 수 없었기에 용기를 냈다. 다만 그의 용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 그가 베풀고자 하는 사랑 안엔 가족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모두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 결과 수녀원 창고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빌의 모습은 알코올 중독자인 친구 아들에게 잔돈을 줬던 그날처럼, 평범한 하루로부터 퇴근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비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울컥하게 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전한다, 삭막한 곳에도 희망은 피어나고, 희망이 핀 곳엔 사실 희망이 이미 뿌리내려져 있었단 사실을.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빌이 소녀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빌이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막달레나 세탁소’는 여전히 수녀원장이 준 크리스마스카드 안에 감춰져 있었겠지. 그의 손에 접착제처럼 붙어있던 석탄 가루가 말끔히 씻겨 사라지는 일도 끝내 없었을 테고, 가족이 있는 시끌벅적한 부엌으로 들어가는 빌과 소녀의 모습 같은, 이처럼 사소한 것도 영영 못 봤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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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봉명주공> 메인 예고편
"우리가 한때 뿌리내렸던 마을"
남겨지고 옮겨지는 삶의 흔적을 담은 [#봉명주공] 메인 예고편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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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지혜를 빼앗는 도깨비> 티저 예고편
"점마 데려와!" 성공한 인간들은 모두 긴장하는 게 좋을 겁니다! 삼깨비가 성공한 인간을 잡아와 지혜를 빼앗기로 마음 먹었거든요. - 왓챠 오리지널 예능 지혜 강탈 토크쇼 〈지혜를 빼앗는 도깨비〉 5월 3일(화) 왓챠 첫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