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1-26 00:48:40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영화 <위키드>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
- 진실을 짓누르는 거짓을 깨는 엘파바
-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와 망토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위키드 (Wicked, 2024)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개봉일 : 2024.11.20.
관람등급 : 전체 관람가
장르 : 판타지,뮤지컬
러닝타임 : 160분
감독 : 존 추
출연 : 신시아 에리보, 아리아나 그란데, 조나단 베일리, 에단 슬레이터, 양자경, 제프 골드브럼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소설 [위키드]는 고전 명작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악당 서쪽 마녀의 어린 시절을 담은 이야기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영화, 뮤지컬, 연극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리메이크 되었다. 그리고 2024년. 몸집을 제대로 부풀린 실사 뮤지컬 영화 <위키드>가 세상에 나왔다.
6,000만 관객을 동원한 흥행 뮤지컬 원작, 1억 4,500만 달러의 제작비, <스텝 업>, <나우 유 씨미> 등의 영화로 환상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존 추 감독의 신작, 아리아나 그란데, 양자경, 신시아 에리보 등 호화로운 오리지널 캐스트와 박혜나, 정선아, 고은성, 정승원 등 탄탄한 국내 더빙 캐스트까지.
말 그대로 소문난 잔칫집이었던 영화 <위키드>는 맛있는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뮤지컬 팬과 영화 팬 모두의 배를 든든히 불려주는 작품이었다. 물론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모든 순간, 모든 조건들이 만족스러웠다고 하긴 어렵지만 최대한 다양한 관객들의 기대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한가득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사악함을 상징하는 초록색. 그 초록색의 피부를 타고난 엘파바와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외모를 가진 핑크 공주 글린다. 양극에 위치한 두 사람은 얼떨결에 룸메이트가 된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를 밥맛이라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다투지만, 그런 시간이 늘어갈수록 남들은 보지 못하는 상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꿈꿔온 마법사 오즈의 도시, 에메랄드 시티로 가는 기차에 함께 몸을 싣는다. 그리고 환상적인 그 도시에서 새로운 운명을 맞이한다.
사악한 마녀의 이미지가 허물어진 자리.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
자신이 사악하다고 외치는 사람도 물론 위험하지만 자신의 선함을 필요 이상으로 어필하는 사람 또한 완전히 믿을만한 이는 아니다. <위키드>는 나도 모르게 믿기 쉬운 완연한 선과 악의 경계에 숨겨져 있던 것들을 꺼내 보인다.
영화는 서쪽 마녀가 한 소녀(오즈)가 끼얹은 물에 녹았다는 뉴스와 함께 시작된다. 오즈민들은 “우리가 믿는 선이 악을 이겨냈다”라며 사악한 마녀의 죽음을 기뻐한다. 오즈의 조수인 착한 마녀 글린다는 오즈민들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에 동참하면서도 사악한 이의 고독을 생각하는 가사를 흥얼거린다.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의식과 노래가 끝나고 오즈민들은 글린다에게 묻는다. “사악함은 왜 생겨나는 걸까요?", “서쪽 마녀와 정말 친구였어요?". 글린다는 “좀 아는 사이였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과 함께 엘파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쪽 마녀의 그림이 땅으로 떨어지고 그를 따라 만든 거대한 인형이 불태워지는 등, 많은 오즈민들이 믿고 있던 ‘사악한 마녀’라는 이미지가 모두 소멸된 후 그 이미지 뒤에 가려져있던 엘파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진실을 짓누르는 거짓을 깨는 엘파바
입학식 날 엘파바가 광장을 어지럽히는 장면의 의미
엘파바는 피부 때문에 이상한 오해들을 받으면서도 착하고 단단한 심성을 가진 어른으로 자란다. 동생 네사의 대학교 입학 날, 수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받게 된 엘파바는 자신의 피부를 두고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그들 사이에서 "그래. 원래부터 난 초록색이었어.”라고 말한다. 엘파바는 ‘초록색 피부’라는 이미지에 주눅 들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을 믿으며 학교 생활을 이어간다. 하지만 엘파바는 여전히 학생들 사이에서 조롱과 폭탄 취급을 받고 그와 방을 나눠쓰는 글린다는 순교자로 취급받으며 더 큰 인기를 얻는다.
엘파바, 글린다, 피예르와 몇 인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보이고 들리는 것을 모두 그대로 믿고 그것을 기준 삼아 상대방을 정의한다.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 네사의 불편한 몸, 보크의 작은 몸집, 글린다의 아름다운 외모 같은 일차원적인 이미지부터 시작해 사실 무능력하지만 전능하게 포장된 오즈의 모험기, 엘파바가 사악한 마녀고 그의 초록 피부가 사악함의 증거라는 오즈의 말, 학교 광장에 있던 오즈의 석판과 얼굴 동상, 위압감을 주는 오즈의 가면까지. 에메랄드 시티는 이런 수많은 이미지와 가면들로 가득 차 있다. 통치자인 오즈는 이러한 가면 뒤에 숨어 몰래 악한 일을 행하지만 오즈민들은 진실엔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외면을 평가하고 따돌리기 바쁘다.
엘파바는 다수와 다르게 어떤 가면과 외면이 아닌 진실과 내면을 보는 사람이다. 입학식 날, 네사를 마음대로 데려가려는 기숙사 사감을 말리려던 엘파바가 마법을 쓰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는 장면. 의자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러 구조물들을 부수는데, 그중엔 오즈의 모습이 새겨진 석판도 있다. 석판이 부서지자 원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동물들이 새겨진 석판이 드러난다. 엘파바는 진짜 석판을 짓누르고 있던 오즈의 석판을, 진실을 짓누르고 있던 오즈의 거짓말을 부수고 그에 대항한다.
또한 엘파바는 네사의 불편한 신체라는 외면에 집중하고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것 대신, 네사가 혼자서도 잘할 거라는 그의 내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내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네사의 외면만 보는 어른들은 엘파바에게 무조건 네사를 도와주라 말하거나 허락 없이 네사의 휠체어에 손을 얹는다.)
서로를 채워준 엘파바와 글린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와 망토의 의미. 엔딩 결말 해석
하지만 이런 엘파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내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내면이다. 주변인들은 엘파바를 ‘남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다. 엘파바도 상처를 받고 흔들리기도 한다. 특히 엄마의 죽음에 얽힌 상처와 죄책감은 그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마음에 짙게 남아있었는데 이 상처를 보듬고 엘파바에게 용기를 준 건 바로 글린다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처음엔 상징색인 연두색과 분홍색처럼 서로를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보색인 두 색은 (색상환에서) 거리 상으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가장 평행한 관계이기도 하다. 거리를 좁히기만 하면 그 어떤 색보다 맞닿기 쉬운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로에게 한 걸음 나아간 두 사람은 엘파바를 무시하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마주 선 채 춤을 춘다. 이후 엘파바와 글린다는 각별한 친구가 되어 서로의 꿈을 이루도록 도움을 주는 사이가 된다.
엘파바는 에메랄드 시티행 기차가 떠날 때 글린다에게 손을 내밀어 글린다가 에메랄드 시티를 여행하고 오즈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글린다는 엘파바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가 새로운 세상에 나갈 용기를 준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준 모자는 엘파바가 ‘첫 파티’라는 새로운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엘파바가 창문 너머로 떠나기 전에 둘러준 망토는 통치자에게 대항하는 험한 길을 선택한 그에게 전하는 용기와 온기를 선물한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진한 우정을 등에 업고 착한 마녀와 나쁜 마녀, 명성을 가진 위대한 마법사와 동물들을 돕는 마법사라는 각자의 길로 날아오른다.
숨겨져 있던 두 마녀의 이야기는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쳐준다. 기세 좋게 시작된 이 환상의 나라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Part1의 성적표는 얼마큼의 상승 곡선을 그릴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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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다섯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한국 영화의 부활! 개봉 4일차에 100만명을 넘긴 <밀수> 이후에도 높은 예매율을 자랑하며 여름 극장가의 활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이후 600만에 다가서는 <엘리멘탈>이 2위. 점점 저조한 관람객수를 보이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가 3위로 밀려났습니다.
[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밀수>가 2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앞두고 있습니다. 주말 이후 실시간 예매율도 19%로 정상을 지키고 있어 빠르면 이번 주 내 200만 돌파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멘탈>은 뒤이어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을 제치고 부동의 2위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6월 14일 개봉한 엘리멘탈은 500만을 넘어 역대 픽사, 디즈니 영화 1위, 올해 외해 흥행 1위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1. <밀수>
<밀수>는 올여름 첫 한국 영화 주자로서 출항에 성공했습니다. 4일째 100만 관객을 돌파한데 이어 개봉주 박스오피스도 압도적 1위를 기록 누적 관객수 172만명을 달성했습니다. 그간 본 적 없는 해녀들의 수중 액션, 류승완 감독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연출과 김혜수, 염정아, 조인성, 박정민, 고민시 등 배우들의 연기에 호평을 받고있다고 합니다.
2. <엘리멘탈>
<엘리멘탈>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기록했던 554만여 명을 꺾고 올해 가장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외국 영화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피터 손 감독이 한국을 떠나 뉴욕에서 이민자로 살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 많은 한국인들의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낸것으로 보입니다.
3. <미션 임파서블: 데드레코닝 PART ONE>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전체 7편 가운데 5위 수준으로 개봉 전 쏟아졌던 호평과 높았던 예매율이 무색해질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한국뿐만 아니라 가장 큰 시장인 북미에서도 2주차에 바로 1위 자리를 빼앗기면서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둘 다 흥행 순항을 하면서 60%가 넘는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잇따라 한국영화에서도 여름대작들이 줄줄이 나올 예정이라 반등의 기회는 없을것으로 예상합니다.
4.<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
올해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까지 극장가 애니메이션 열기가 뜨겁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슬램덩크>의 흥행에 이어 <명탐정코난: 흑철의 어영>이 바통을 이어받아 관객의 뜨거운 성원을 받으며 쌍끌이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5.<바비>
한국에서 큰 프로모션과 감독과 배우의 방한이 있었음에도 저조한 성적을 면치 못한 <바비>는 누적관객수 43만명을 기록했으며 다음주면 순위권에서 벗어날 예정으로 보입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7월 다섯째주 박스오피스는 <바비>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바비>는 한국에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반해 북미에서 흥행 관련 기록을 갈아치우며 승승장구 중입니다. <오펜하이머>가 글로벌 흥행수익 4억 38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해외 박스오피스에서 동기간 대비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 등 놀란 감독의 전작을 뛰어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역사를 담은 전기 영화이며 국내에서는 8월 15일 개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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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월호? 아직도 세월호!
8★/10★
조금은 이상하고 뒤늦은 슬픔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서울 어딘가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날 눈물 흘리기 전까지 나는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의심하기 바빴다. 세월호를 슬퍼하는 모든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때였지만 내 안에는 뿌리 깊은 패배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죽음을 슬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박근혜와 20대를 보낸 내게는 그들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권위 국가가 상수였고 그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늘 변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편안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세월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섣불리 슬퍼했다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추모집회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접속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게 슬픔을 견뎌왔을 뿐이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는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슬픔을 고립시키려는 모든 것과 단절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애도하며 공통감각으로서의 슬픔을 되찾았다. 세월호는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통해 개별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사라진 생명을 잊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변화를 요청할 수 있음을, 누군가를 잊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거나 낙후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바람의 세월〉이 보여주듯, 이 깨달음은 지난 10년간 번번이 제도권 정치와 진실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딸 문지성 양을 세월호 참사로 잃은 뒤 카메라를 든 문종택 공동 감독은 지난 10년의 세월, 3,654일 동안 세월호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은 5,000여 개, 분량은 50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 긴 시간은 대체로 참사 유가족과 그들의 슬픔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번번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는 과정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유족과 시민의 염원을 이뤄줄 듯하던 문재인 정권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 포괄적 진실 규명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 참사 후 유가족이 처음 환하게 웃은 건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그마저도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유가족은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결국 배반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법과 정치의 문제와 접속시킬지에 관해 많은 물음을 남긴다. 법조인, 정치인이 기존 법 체제 안에서 유족과 시민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노력(특검, 특조위 등)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적인 슬픔에 담긴 커다란 물음과 가능성이 법 기득권과 정파적 당리당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 정의는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세월호 관련 법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영화에 절망과 분노의 순간만 담기지는 않았다. 종종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슬픔을 느낀 건 배상‧보상을 통한 정부의 가족 분열 획책, 유가족을 향한 모욕을 담은 장면만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 등교를 응원하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국회에서 유가족 앞을 막고 선 젊은 경찰이 흐느끼며 울먹이는 장면에서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추모 공간을 꿋꿋이 지키며 싸움을 이어가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이 5.18 민주화 운동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너졌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추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는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견뎌내야만 했던 야만적 시간을 영화가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시간을 유족의 시선으로 말하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뉴스로 사건을 접한다. 즉 누군가 한 번 매개해 가공한 상태로만 어떤 사건을 접한다. 기자가 유가족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유가족처럼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인 채 글 쓰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의견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입혀주기 일쑤인 기계적 중립이 더해진다면, 나아가 기계적 중립마저도 외면하고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한 〈바람의 세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중립을 가장한 차가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절절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은 만큼, 정제되고 정돈하여 매개하지 않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족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보다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며 감정의 공적 기능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람의 세월〉에는 ‘아직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아직도!’라고 답할 힘이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앞에 과거의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슬픔에 기반한 공적이고 정의로운 연결감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 영화에서 큰 위로와 연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가 되레 위로받고 나왔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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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구야 공주 이야기
가구야 공주 이야기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지브리 작품을 보다가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발견했다. 언듯 보기에 '이웃의 야마다군'과 비슷한 그림이어서 꽤 오래 전 만든 작품일까, 했지만, 몇 년 전에 만든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문화와 생활을 잘 드러내고 있어서, 외국사람이 볼 때, 일본에 관한 역사와 전통, 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래동화, '타케토리 오키나 모노가타리(竹取翁物語解)'다. '대나무를 파는 노인 이야기'인데, 전래동화와 이 작품의 줄거리는 거의 같다. 다만,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는 '가구야공주'의 탄생과 성장, 생활을 전래동화보다 핍진하게 그리고 있어 관객이 '가구야공주'에게 감정적으로 동화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작품의 서사는 매우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전래동화가 나타난 시기가 9세기에서 10세기 무렵이라고 하니, 그때는 일본에도 불교가 한창 번지고 있을 때였다. 660년에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는 상대적으로 후진 문화였던 일본 사회에 놀라운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고, 문화선진국이던 백제에서 왕인이 직접 불교를 전파하니, 일본의 토호, 영주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불교에 호감을 갖고 받아들였다.
물론 불교가 일본에 들어간 초기에는 일본 황실과 귀족 세력이 반대하고 거부했지만, 이미 일본 민중 사이에서는 불교가 상당한 호감을 갖는 종교였고, 이때 일본의 서쪽 지방을 중심으로 고려 때 일본으로 건너간 고려인들과 이후 백제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불교는 안정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구야공주 이야기'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전래동화라는 건 작품 내용에서도 나타나는데, 가구야공주가 대나무에서 태어나기 전, 전생에서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때, 가구야 공주를 맞이하려 달에서 오는 사람을 보면, 선녀와 보살과 함께 부처님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윤회'를 상징하며, 삶과 죽음이 결코 다르지 않고, 인간은 윤회를 거듭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대나무를 잘라 도구로 만들어 파는 노인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노인이 대나무를 자르고 있을 때, 대나무 하나에서 빛이 밝게 비추는 걸 발견하고, 그 나무를 베어보니 대나무 안에서 아주 작은 아이가 나왔다. 이런 탄생 설화는 고대 영웅에게 흔히 있는 장면이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 처녀 임신으로 태어난 예수 등이 그런 설화의 주인공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는 금새 쑥쑥 자라서 동네 사람들이 '대나무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노인은 대나무숲에서 다시 빛나는 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황금과 비단을 발견한다. 노인은 대나무에서 태어난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아이라는 걸 깨닫고, 공주처럼 고귀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수도-천황이 있는 도시-로 나가 저택을 마련하고 아이를 도시로 데려와 공주처럼 키운다. 그때까지 아이는 산골에서 동네 아이들과 마음껏 뛰놀며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는데, 도시로 오면서 친구를 모두 잃는다.
노인은 예사롭지 않은 아이를 고귀한 공주처럼 키워 귀족이나 황제에게 시집 보내는 것을 꿈꾸고, '가구야 공주' 또는 '공주(히메)'라고 부르며 극진하게 모신다. 가구야 공주가 성년이 되는 해, 사흘에 걸친 성대한 잔치를 하고, 그 소문을 듣고 양반, 귀족의 자제들이 몰려와 가구야 공주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는 그들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고, 산골에서 살았던 그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데,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며, 스스로 불행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자, 가구야 공주가 전생에 살았던 곳이 '달'이었고, 그곳에서 다시 자기를 데리려 온다는 걸 알게 된다.
가구야 공주는 이승을 떠나기 전, 자기가 어려서 살았던 산골을 두 번 찾아간다. 첫번은 산골 마을이 황폐하게 변해 있었고, 함께 어울려 살던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 모두 사라졌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아 물건을 만들 수 없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떠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8년의 세월이 지나 두번째 찾아간 산골에서 떠났던 마을 주민이 돌아오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도시에서 만났던 사랑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결혼해 아이가 있었다.
가구야 공주는 고귀한 신분이어서 구중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지만, 그가 어려서 자란 곳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자연과 함께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시간 역시 산골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자연 속에서 뛰놀던 시기였다. 도시에서 고대광실에 살며, 호의호식하는 삶은 생기가 없는, 몸은 살아 있어도 더 이상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박제된 삶이라는 걸 가구야 공주는 깨닫고 절망한다.
어느 시기나 가난한 민중은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산골마을에 살던 주민들은 대나무로 물건을 만들지 못하자 먹고 살기 위해 흩어진다. 그렇게 도시로 나와서 도둑질을 하다 잡혀 맞기도 하고, 빌어 먹기도 하면서 삶을 유지하는데, 결국 삶의 터전인 산골마을로 돌아오면서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구야 공주는 삶을 옥죄는 도시에서의 삶-정형화되고, 격식에 얽매이며, 통제된 삶-에 질식할 것 같았고, 더 이상 이승에서의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간절히 이승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원인은, 자신이 귀족 또는 황제에게 팔려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귀족이나 황제가 자신을 선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말한 조건에 따라 혼인을 해야 하며, 황제의 후궁으로 선택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비참한 삶이 싫었던 것이다.
가구야 공주는 고대광실에 살면서도 예전 산골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궁궐같은 저택의 한쪽에 작은 시골집을 짓고, 밭과 정원을 만들어 산골에서 살던 환경과 비슷하게 생활한다. 그가 이승을 떠나기 전, 고통스러운 기억보다 더 간절했던 것은 산골에서 살았던 행복했던 추억이었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땅(지구)으로 내려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도, 지구에 살던 사람이 간절하게 부르던 노래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 살며 꾸밈없이 소박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서, 가구야 공주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이미 결정된 귀환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가구야 공주는 본디 달에 사는 보살(신선)이었으나, 이승의 삶을 동경해 선계(달)에서 쫓겨나 대나무 속에서 아이로 태어난다. 아이 없이 사는 늙은 부부에게 맡겨져 지극정성으로 돌봄을 받으며 자라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꾸밈없고, 거칠 것 없이 살아간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신'이 본래는 무소무위, 어디에도 걸리는 것 없는 자연 그 자체라는 걸 말한다. 그러다 인간이 만든 '문명'에 갇히면서 '자연'은 힘을 잃고, 생기를 잃게 된다. 인간의 문명은 도식적, 형식적, 인위적, 이기적, 파괴적 속성을 가졌기에, 자연은 인간의 문명이 두렵고 무섭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신)을 쫓아내고, 거부하며, 외면한다. 자연(신)은 더 이상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자연으로 살고자 하지만, 그마져도 인간이 파괴한다. 결국 자연(신)은 피폐, 황폐하게 변하고, 인간이 살지 않는 먼 곳-달-으로 떠난다. 이 작품은 사람의 관점이 아닌, 가구야 공주 -자연(신)- 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인간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연(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여성이고, 전생에 살던 곳이 '달'이라는 건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시기, 민중의 의식을 반영한다. '여성'은 우주만물을 만든 신이자, 자신-일본 민중-을 만들고 돌보는 어머니 자연의 존재를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즉, 자연은 여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이 바뀌고, 씨 뿌리고, 수확하는 일련의 생산이 땅을 통해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 '생산'을 하는 것은 곧 어머니, 여성이라는 의식과 맞닿게 되기 때문이다.
'달'은 동양에서 신비로운 믿음의 대상이었다. 중동과 서양이 '태양'을 유일신으로 믿었던 것처럼, 동양에서는 '태양'보다는 '달'을 숭배했는데, 그 믿음의 근거에는 '농업'이 자리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것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절기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양력'이 아닌 '음력'이라는 걸 이미 이 시대 이전부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달'이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달'과 관련한 많은 설화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따라서, 가구야 공주가 여성으로 이승에 내려와 자연과 함께 어울리다 도시-인간의 문명-에 살지 못하고 다시 원래 살던 곳 - 달 -로 돌아가는 것은 당시 민중의 삶과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설화가 된다. 여기에 불교적 장치 -윤회-가 개입하면서, 가구야 공주는 언제든 다시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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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성탈출 4 | 아직은 오지 않은 '새로운 시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 성년식을 기다리던 '노아'(오웬 티그)와 독수리 부족은 갑작스레 '프록시무스 시저'(케빈 듀랜드) 군대의 습격을 받는다. 노아는 혈투 끝에 간신히 살아남지만, 아버지는 죽고 모든 부족은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으로 끌려간다. 이에 노아는 부족을 구출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이루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여행길에서 고생하던 노아는 우연히 두 친구를 만난다.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는 노아에게 전설적인 유인원 지도자 '시저'의 가르침을 알려준다. 또 자신처럼 프록시무스 시저에게 쫓기던 인간 소녀 '메이'(프레이아 앨런)는 노아에게 유인원과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준다. 이러한 도움을 토대로 노아는 시저의 가르침을 기만하는 프록시무스를 무찌르고 유인원과 인간 모두를 구할 전투에 나선다.
4편의 저주에 걸리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2024년 봄 극장가는 4편으로 가득하다. <쿵푸팬더 4>가 긴 공백을 깨고 돌아왔고, <범죄도시4>는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다만 성과는 기대 이하다. <쿵푸팬더 4>는 지난 시리즈의 매력과 캐릭터에만 기댈 뿐이었다. <범죄도시4> 역시 여전한 흥행 파워를 과시했지만, 장기 시리즈의 피로감은 가중됐다.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이하 <혹성탈출4>)는 올봄의 세 번째 '4편'이다. 2011년에 리부트 된 시리즈의 4편이고,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이후 7년 만의 속편이다. 그런데 제목이 퍽 흥미롭다. 지난 삼부작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속편인데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4'라는 넘버링을 활용하지 않았다. 이로부터는 시리즈의 새 출발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난 주인공인 '시저'(앤디 서키스)를 등장시키지 않듯이.
하지만 <혹성탈출4>도 '4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시리즈의 메시지와 주제의식을 적절히 계승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비주얼을 제외한 대부분이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하다. 그 결과 4편까지 이어진 시리즈에 신선한 피를 수혈할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선뜻 끄덕이기는 어렵다.
시리즈의 정수를 계승하다
<혹성탈출>의 핵심은 유인원과 인류의 대립이다. 하지만 거대한 스케일의 전쟁만 화두가 되지는 않았다. 시저에게는 인간 친구가 여럿 있었다. 자기를 키워준 윌. 아내를 치료해 준 말콤. 인간을 향한 복수심과 증오심을 꺾어 준 소녀 노바. 의견이 다른 유인원 및 인간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시저가 인류와의 공존을 추구한 이유였다. 이처럼 사적 감정을 공적 책무로 승화하는 시저의 여정은 <혹성탈출>의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전편으로부터 300여 년 후를 다루는 <혹성탈출4>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종족 간의 전쟁 사이에서 싹을 틔우는 두 유인원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다. 인류를 무시하는 유인원 노아와 유인원에게 사냥당하던 인간 메이는 우연히 같이 여행을 떠난다. 노아는 프록시무스 시저에게 붙잡혀 간 자기 부족을 구출하기 위해. 메이는 인류의 미래를 건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물론 둘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 종족의 존속이라는 목표가 언제나 최우선이기 때문. 하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조금씩 덜어내면서 둘은 우정 비슷한 관계까지 나아간다. 친구는 아니지만, 차마 서로를 죽이지는 못하는 관계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미래의 화근을 잘라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혹성탈출4>는 재개될 유인원과 인류의 전쟁을 미묘한 애증의 감정선 속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한다.
아이디어는 좋았다
앞선 시리즈의 계승만큼 프랜차이즈를 일신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유인원 대 인간의 대립 구도뿐만 아니라 유인원 간의 갈등에도 초점을 맞춘다.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는 인간과 공존할지, 아니면 인간을 제거하고 지구를 차지할지를 두고 다툰다. 이는 2편 <반격의 서막> 속 시저와 코바의 대립을 극대화한 듯 보인다.
이름만 봐도 두 주인공의 대립은 필연적이다. 성경에서 노아는 신의 뜻에 충실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로부터 모든 생명체를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속 노아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와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라는 시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유일한 유인원이다. 그래서 그는 나름의 방주를 만들어 시저의 뜻대로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리더로 거듭난다.
반면에 프록시무스 시저는 시저를 사칭한다. 인간과 유인원을 모두 지배하는 왕국을 만들고, 인간의 기술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유인원은 뭉치면 강하다"라는 가르침을 악용한다.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유인원은 신경 쓰지 않는다. 라틴어로 '가장 가까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록시마(Proxima)'를 이름으로 쓰지만, 정작 시저가 가장 지양할 선택만 지향한다.
이에 더해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립은 종교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여러 세대가 지난 뒤 시저는 숭배의 대상이 됐고,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는 시저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툰다. 마치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여러 교파가 싸웠듯이. 또 무함마드의 후계자 자격을 두고 수니와 시아가 전쟁을 벌였듯이. 이렇게 보면 <혹성탈출4>는 <혹성탈출> 버전 <듄>이 될 수도 있었다.
스토리텔링의 한계
그러나 기존 삼부작과 차별화될 가능성은 미처 꽃 피우지 못했다. 제작진의 스토리텔링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 영화는 두 주인공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줄 다양한 맥락과 복합적인 함의를 외면한다. 일례로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을 묘사할 때는 정복 전쟁, 노예제, '시저'라는 호칭처럼 고대 로마를 연상케 하는 요소를 활용한 반면,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립은 단순히 부족의 생존과 탈출 차원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다 보니 여러 장치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독수리 부족의 통과 의례가 대표적이다. 노아의 부족에게는 독수리 알을 훔쳐 키우는 성년식이 있다. 이때 둥지마다 최소한 알 하나는 남겨둬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는 독수리 부족이 본질적으로 타 생명체와의 공존을 추구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노아와 독수리의 관계를 개인적 차원에만 국한한다. 노아에게 독수리는 부족의 리더로 거듭나고 아버지의 복수를 완수하는 도구일 뿐이다. 결국 미묘한 함의는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
스토리텔링 문제는 메이의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노아 혹은 유인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니 메이는 철저히 인간중심적이고, 노아의 행보를 방해하는 빌런처럼 보인다. 인류와 유인원의 대립은 극대화되지만, 둘 사이에 작게나마 피어난 우정의 싹은 더욱 작아진다. 그 결과 서사는 다소 평면적이고, 지난 삼부작에 비해 인간 캐릭터의 매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뒷심 부족한 볼거리
볼거리 역시 아쉬움이 적지 않다. 물론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웨스 볼 감독이 새로 메가폰을 잡은 만큼 전체적인 스타일의 변화는 인상적이다. 이전 감독인 맷 리브스가 전반적으로 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연출력을 과시한 반면, 이번에는 유인원과 인간의 추격전처럼 역동적인 카메라워크가 눈길을 끈다.
이에 더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제작 경험을 살려 수풀로 뒤덮인 도시와 철골구조, 녹슨 배와 무너진 부두로 만든 프록시무스 시저의 왕국 등의 디스토피아 세계관도 유려하게 펼쳐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라이온 킹> 실사 영화가 사자를 비롯한 동물의 표정을 효과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유인원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고 포착한 CG 기술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스펙터클은 약해진다. 이전 시리즈에 비해 스케일이 소소하다 보니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를 보는 것 같은 실망감이 밀려들 수 있다. 특히 클라이맥스의 구성이 아쉽다. 노아와 프록시무스 시저의 대결은 공격도 반격도 일방적이라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한계가 있다. 노아와 결속된 독수리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암시가 너무 많아서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공은 속편에게
결과적으로 <혹성탈출4>의 결말은 아쉬움이 크다. 독립된 작품이면 모르겠지만, 네 번째 시리즈에서도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을 다시 한번 암시하는 결말은 신선함이 부족하다. 돌고 돌아 시저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 여러 프랜차이즈가 같은 실수를 범했기에 특히 우려스럽다. 시리즈 리부트 후에도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의 갈등 구도를 마지막까지 되풀이 한 <엑스맨>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결국 공은 속편에게 넘어간 듯하다. 속편의 전개에 따라 <혹성탈출4>가 새로운 시대를 위한 한 걸음일지가 결정될 테니. 달리 말해 어떤 의미로든 속편을 기다리는 재미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진짜 무대는 다음으로 미루는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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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억압에 맞서 추는 나만의 춤
당신의 억압에 맞서 추는 나만의 춤
메라비는 무용단 댄서로 활동하면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집안 사정은 조금 빠듯해 보이지만 메라비 가족은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연습과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병행하던 그의 눈에 이라클리가 들어온다. 이라클리는 동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추문과 함께 무용단을 나간 동료의 자리에 새로 들어온 대타 댄서다. 불현듯 나타난 새로운 동료에 대한 메라비의 호기심은 이내 경쟁심리로 바뀌어 간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알리코 선생이 언급했던 메라비의 부족한 점을 이라클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못처럼 꼿꼿하면서 힘 있는 춤", 유연하고 섬세한 메라비의 춤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다. 본부에서 무용수 1명을 더 뽑기 위한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메라비와 이라클리는 본격적으로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된다. 메라비는 오디션 기회를 따내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연습실에 가 연습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라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새벽마다 함께 춤 연습을 하면서 우정을 키워나간다.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은 마리네 집 뒷마당의 어느 바위 앞에서다. 메라비가 이라클리가 피우던 담배를 뺏으면서 둘은 몸싸움을 하기 시작하고, 곧장 서로의 몸에 대한 탐색으로 넘어간다. 이때 배경에서 들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소음은 호모포비아적인 조지아 문화 안에서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둘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두 사람이 안전하게 있을 공간은 고작 바위 뒤편의 작은 공간이며, 그곳 또한 온전히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이 영화가 훌륭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영화는 조지아라는 국가의 현재를, 그 안의 개인과 집단의 모습을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메라비의 여자친구 마리가 런던과 관련된 경험을 자랑하는 모습에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과 맞물려 유럽의 것들을 선호하는 조지아 젊은 층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버스에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는 메라비에게 퉁명스럽게 불평하다가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는 승객의 모습,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 자는 모습에서는 조지아 특유의 따듯하고 가족적인 문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지아의 따듯한 정(情)을 담아내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는 오히려 조지아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그 속에는 조지아의 집단적이고 보수적인 문화를 안팎의 경계에 선 외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감독의 날선 시선이 존재한다. 실제로 레반 아킨 감독은 조지아인 부모를 둔 스웨덴인으로, 자신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건 '부끄러움'의 감정 때문이라 밝혔다. 감독은 2013년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퀴어 퍼레이드 참가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극우 성향 정교회 단체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접했고,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이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결심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고, 영화는 곳곳에서 그러한 부분을 꼬집는다. 특히나 메라비의 아버지 요셉은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 또한 과거에 댄서였던 요셉은 "조지아 춤에는 미래가 없고, 댄서의 삶은 개 같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메라비가 다른 직업을 찾길 진심으로 권유한다. 그는 메라비의 유연하고 남성적이지 않은 춤 스타일이 조지아에서 인정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레반 아킨 감독은 자신의 게이 정체성을 점차 알아가는 주인공의 서사와 조지아 춤의 전통적 가치관을 결합해 조지아의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사회상을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집단 가치관에 충돌해 좌절하지 않고, 그 상처와 아픔을 딛고 성장해나가는 주인공의 서사를 성공적으로 구축시켰다. 영화에서 이런 메라비의 성장에 대해 확신을 주는 부분은 단연 극후반부의 두 개의 연속되는 롱테이크 숏으로 이루어진 씬이다. 메라비는 자신의 형 다비드의 결혼식장에서 이라클리와 오랜 이별 끝에 재회하고, 그를 다시 볼 수 있음에 안도한다. 메라비가 이라클리를 찾으면서 트래킹 숏이 시작되고, 카메라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잡다가 이라클리가 있는 방으로 찾아가는 그를 따라간다. 메라비의 기대가 무색하게 이라클리는 어머니를 혼자 둘 수는 없어 여자친구와 약혼했다며, 자신은 이제 트빌리시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순간에 연인을 잃은 메라비는 그에게 화를 내고 침대에 앉아 흐느낀다.
여기서 잠시 흐름이 끊긴 뒤, 다시 롱테이크 숏이 시작된다. 카메라는 방문을 열고 나가 터벅터벅 걷는 메라비의 모습을 잡는다. 메라비는 거울을 보며 눈물을 닦고 옷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전의 롱테이크 숏과는 상반되게 메라비의 결연한 표정이 눈에 띈다. 메라비는 곧장 건물을 나가고, 마리는 그런 그를 지켜본다. 그리고 카메라는 결혼식 피로연 현장을 보여주는 것 같더니 창문 밖의 메라비와 마리에게로 넘어간다. 둘이 멀리 있어 둘의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구도지만 마리의 말이 선명히 들린다. "용서해 줘, 내가 이해를 못 했어. 미안해." 그리고 둘은 포옹을 나눈다. 집으로 돌아온 메라비는 벽의 무용 관련 사진들을 다 뜯어버리고, 침대에 눕는다. 얼굴에 상처를 가득 입은 형 다비드가 옆에 누워 호모라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말한다. 메라비가 대답이 없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 괜히 얻어맞은 거야?" 메라비가 답한다. "아마도." 형에게 이라클리와의 관계를 들키는 꿈을 꿨을 정도로 그에게 이 상황은 무서운 순간이었을 테지만, 형은 오히려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늘 나보다 나았어." "넌 조지아를 떠야 해. 여긴 가망이 없어." 그리고 두 사람은 진한 포옹을 나눈다. 그렇게 메라비는 마리, 다비드와 포옹을 나누며 그들의 진정한 이해와 존중을 받는다.
오디션 날이 되고, 마리는 메라비를 응원하기 위해 그와 함께한다. 2층에서 응원하는 마리의 모습과 함께 메라비의 독무가 시작된다. 점프 후 착지하다 발을 삐끗하는 메라비는 그대로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서 춤을 춘다. 북을 치는 연주자는 이에 맞춰 연주를 재개한다. 그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춤동작을 보며 본부 측 인사는 조지아 춤을 모욕하고 있다며 화를 내며 나간다. 메라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춤을 춘다. 알리코 선생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춤을 끝까지 지켜본다. 메라비가 인사를 마치고 오디션장을 나가면서 영화의 타이틀 "And Then We Danced(그리고 우리는 춤을 추었다)"가 뜬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은 왜 이 영화의 제목이 "그리고 '나는' 춤을 추었다"가 아닌 "그리고 '우리는' 춤을 추었다"인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리는 씬이며, 또한 조지아의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씬으로 보인다. 그의 춤이 끝날 때까지 북 연주를 계속 진행하는 연주자와 2층에서 춤추는 그를 지켜보는 마리는 그를 응원하는 존재들이다. 그의 춤을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의 춤을 지켜보는 알리코 선생의 모습 또한 정도는 다를지 모르나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메라비는 국가의 억압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과 자유를 향한 춤을 열렬히 춘다. 그런 그의 주변인에게서 보이는 변화의 몸짓은 또 하나의 춤으로 느껴진다. 결국 이 씬에서 춤을 추는 건 메라비만이 아니다. 영화 내외의 관객들을 끝내 인물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방향으로, 그 변화의 시작점으로 이끌고야 마는 이 영화의 태도는 이 영화를 무척 응원하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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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스포일러 주의)
딸이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느낌밖에 안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한편으론 이런 결말을 원했던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가족 구성원들 중 누군가 한 명은 죽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영화 내내 들었다. 그런 결말로 가는 건 아니겠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대로 간다. 그때 통쾌함과 함께 묘한 슬픔도 느꼈다.
영화 인트로에는 어떤 나무 이야기가 소개된다. 땅에 큰 나무가 있는데, 새가 물어온 씨앗에서 새 나무가 자란다. 그 새 나무는 큰 나무를 집어삼킨다. 결국 원래 나무는 죽고 새 나무만 남는다는 이야기다. 이걸 들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원래부터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람에 의해 죽을 것이고, 이것이 영화의 포인트가 될 것이란 걸 느꼈다.
영화는 수사판사 이만과 그의 두 딸(사나, 레즈반)과의 갈등을 그린다. 갈등이 생긴 이유. 바로 히잡 반대 시위 때문이었다. 이만은 반대 시위를 제압하는 위치에 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다. 한편 딸들이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위의 진실을 알지 않길 바란다. 이 둘은 이미 인스타그램으로 이 모든 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시작부터 나타난 갈등의 조짐이 격화되는 포인트가 있다. 이만이 총을 잃어버렸을 때. 이 총은 신변이 위험해질 때 사용하라고 지급을 받은 것이었다. 그걸 잃어버리면서 이만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 두려움은 결국 가족까지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는 두 딸을 자기 아내 나즈메와 함께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그 정도로 가정이 무너져버린다.
이만은 자신이 취했던 모든 행동을 가족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만의 두려움은 그를 가족마저도 자기를 믿지 못한다는 망상에 빠진 괴물로 바꿔버리고 만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옹호하는 종교적인 규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는 그 규율이 가족을 산산조각 낸 궁극적인 원인이라 말한다.
결국 영화 속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전제로 귀결된다.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잘못된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아무리 히잡을 차는 게 신의 뜻이더라도 그것에 대한 숙고 없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가족의 평화를 지키는 길도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이만의 총은 가족을 겨누게 될 테니.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는 특별한 연출은 없다. 다만 재밌는 영화가 가져야 할 기본을 충실하게 지킨 영화다. 적절한 시작점, 점증되는 긴장감, 그리고 묘하게 슬픈 결말까지. 이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용기 있는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이런 상황이 겹치니 나한테도 이 영화가 특별한 영화로 남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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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1편 삭제씬 총정리
#산돌구름 #어벤져스1 #삭제씬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4. 0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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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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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인트로
00:34 마리아 힐 & 오프닝
01:35 외로운 캡틴
03:35 캡틴과 웨이트리스
04:37 경찰 비하인드
05:23 앤트맨 힌트
06:09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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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릴로 & 스티치> 메인 예고편
"'오하나'는 가족이라는 뜻이야!" 친구가 필요한 외로운 소녀 '릴로'와 장꾸력 MAX 복슬복슬 귀염둥이 '스티치'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릴로 & 스티치] 메인 예고편 공개🌴 [릴로 & 스티치] 5월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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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본즈 앤 올> 메인 예고편
"로맨스와 공포의 가장 환상적인 만남" 모든 걸 내어 줄 수 있는 운명적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