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5-05-31 23:08:46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신성한 나무의 씨앗(2024)
(스포일러 주의)
딸이 아버지에게 총을 들이미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느낌밖에 안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한편으론 이런 결말을 원했던 것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가족 구성원들 중 누군가 한 명은 죽겠다는 불길한 느낌이 영화 내내 들었다. 그런 결말로 가는 건 아니겠지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대로 간다. 그때 통쾌함과 함께 묘한 슬픔도 느꼈다.
영화 인트로에는 어떤 나무 이야기가 소개된다. 땅에 큰 나무가 있는데, 새가 물어온 씨앗에서 새 나무가 자란다. 그 새 나무는 큰 나무를 집어삼킨다. 결국 원래 나무는 죽고 새 나무만 남는다는 이야기다. 이걸 들을 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원래부터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람에 의해 죽을 것이고, 이것이 영화의 포인트가 될 것이란 걸 느꼈다.
영화는 수사판사 이만과 그의 두 딸(사나, 레즈반)과의 갈등을 그린다. 갈등이 생긴 이유. 바로 히잡 반대 시위 때문이었다. 이만은 반대 시위를 제압하는 위치에 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다. 한편 딸들이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위의 진실을 알지 않길 바란다. 이 둘은 이미 인스타그램으로 이 모든 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시작부터 나타난 갈등의 조짐이 격화되는 포인트가 있다. 이만이 총을 잃어버렸을 때. 이 총은 신변이 위험해질 때 사용하라고 지급을 받은 것이었다. 그걸 잃어버리면서 이만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 두려움은 결국 가족까지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는 두 딸을 자기 아내 나즈메와 함께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그 정도로 가정이 무너져버린다.
이만은 자신이 취했던 모든 행동을 가족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만의 두려움은 그를 가족마저도 자기를 믿지 못한다는 망상에 빠진 괴물로 바꿔버리고 만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옹호하는 종교적인 규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는 그 규율이 가족을 산산조각 낸 궁극적인 원인이라 말한다.
결국 영화 속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전제로 귀결된다.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잘못된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아무리 히잡을 차는 게 신의 뜻이더라도 그것에 대한 숙고 없이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가족의 평화를 지키는 길도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이만의 총은 가족을 겨누게 될 테니.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는 특별한 연출은 없다. 다만 재밌는 영화가 가져야 할 기본을 충실하게 지킨 영화다. 적절한 시작점, 점증되는 긴장감, 그리고 묘하게 슬픈 결말까지. 이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용기 있는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이런 상황이 겹치니 나한테도 이 영화가 특별한 영화로 남은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
- 전부 애거사 짓이야 | 작품성도 세계관도 챙긴 스핀오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다에게 모든 마력을 빼앗긴 후, 기억마저 삭제되어 웨스트뷰에 남겨진 '애거사 하크니스'(캐서린 한). 스스로를 형사라고 착각하며 참견쟁이 이웃으로 살아가던 애거사 앞에 난데없이 소년 마법사 '틴'(조 로크)이 나타난다. 애거사를 감싸고 있던 봉인을 해제한 틴은 애거사에게 '마녀의 길'로 데려가 달라 애원하고, 원치 않던 애거사도 잃어버린 마력을 되찾기 위해 함께 '마녀의 길'을 걸을 다른 마녀들을 찾아 나선다.
애거사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릴리아'(패티 루폰)와 '제니퍼'(사쉬어 자마타), '앨리스'(알리 안)와 '샤론'(데브라 조 럽)까지 마녀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애거사와 틴. 하지만 '마녀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목숨을 건 장애물을 마주치며 위기에 빠진다. 심지어 애거사와 악연인 죽음의 여신 '데스'(오브리 플라자)가 나타나고, 미지의 마법사였던 '틴'이 완다의 아들 '빌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거사의 집회는 자중지란에 휩싸인다.
마침내 주인공이 돋보이는 멀티버스 사가
개국공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멀티버스 사가의 최종 빌런인 '닥터 둠'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메가폰을 잡았던 루소 형제를 <어벤져스: 둠즈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의 감독으로 복귀시킨 MCU.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지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간 멀티버스 사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 MCU에서 은퇴했던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멀티버스 사가의 영화 11편과 드라마 10개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새 캐릭터를 소개하느라 바쁜 나머지 본래 주인공이 잘 안 보인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 광기의 멀티버스>만 보더라도 새로운 캐릭터인 아메리카 차베즈가 주동인물이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에 그쳤다. 그 결과 멀티버스 사가에서는 인피니티 사가 속 아이언맨과 같이 관객들의 이입을 도와줄 길잡이를 찾을 수 없었다.
<완다비전>의 스핀오프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겉보기에는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완다에게 마력을 봉인당한 마녀 애거사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완다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빌리', 죽음의 여신인 '데스' 같은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하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다행히도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를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본편의 메시지를 영리하게 확장하면서 스핀오프 역할에 충실한 결과 주인공이 가려지지 않았으니까.
보이는 것과 봐야 하는 것
<전부 애거사 짓이야>에서는 시나리오가 가장 눈에 띈다. 본편인 <완다비전>의 작법을 똑 닮았기 때문. 특히 반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완다비전>보다 진일보한 듯 보인다. <완다비전>은 겉과 속이 다른 드라마였다. 겉으로는 완다와 비전의 일상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그들이 이웃들과 시간을 보내고, 두 쌍둥이 형제를 낳으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미국 시트콤 형식을 빌려 보여줬다.
하지만 <완다비전>의 진짜 이야기는 달랐다. 마녀와 로봇 부부의 시트콤은 완다가 마법 장벽 '헥스' 안에서 꾸며낸 환상에 불과했다. 마지막 가족이었던 비전을 잃은 슬픔과 절망을 외면하려는 그녀의 피난처였다. <완다비전>은 이 겉과 속의 괴리를 완다의 환상 속에 침투한 마녀 애거사의 음모를 비롯한 여러 복선을 통해 암시했다. 그렇기에 이 모든 복선을 회수하며 진상을 보여주는 반전의 충격도 그 어떤 MCU 작품보다 강렬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와 실제로 진행시키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자는 애거사가 주인공이다. 완다에 의해 모든 마력을 봉인당했던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후 자신만 아는 '마녀의 길'을 통과해 힘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완다의 아들 중 하나인 빌리가 사실 생존했고, 그가 애거사의 봉인을 풀어 이용했다는 것. 쌍둥이 형 토미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마녀의 길'의 끝에서 토미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빌리는 놀라운 진실을 깨닫는다. '마녀의 길'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고, 단지 본인이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처럼 빌리의 시점에서 모든 복선이 맞아떨어지는 전개는 <완다비전>의 반전을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처럼도 보인다. <완다비전>에 비해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명확한 복선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마법
본편 <완다비전>처럼 가족애와 마법의 비틀린 관계를 강조하기에 반전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애거사와 아들 니콜라스가 있다. 애거사는 니콜라스를 출산한 직후에 그들 앞에 나타난 데스를 만나고, 데스에게 사정해서 간신히 아들과의 시간을 추가로 얻어낸다. 이후 애거사와 니콜라스는 마녀들을 유인해 그들의 힘을 빼앗는 삶을 살았고, 니콜라스는 그들의 일상에 멜로디를 붙여서 '마녀의 길'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의 길' 노래를 완성한 그날 새벽에 데스가 니콜라스를 데려가자, 애거사는 이별의 아픔이 담긴 아들의 마지막 선물을 악용하기 결심한다. 마녀의 길 끝에서 힘을 얻으려면 마녀의 집회를 모아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뒤, 집회에 모인 마녀들의 마력을 강탈하면서 더 강한 마녀로 거듭난 것. 멀티버스를 엉망으로 만든 완다만큼이나 삐뚤어진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처한 셈이다.
사랑이 남긴 아픔을 잘못된 마법으로써 극복하는 이야기는 빌리의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완다가 헥스를 닫을 때 유대인 고등학생인 윌리엄의 몸에 깃들어서 홀로 생존한 빌리. 가족을 포기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형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현실 조작 능력을 활용해 토미를 되살려 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마녀들을 희생한 만큼, 빌리의 여정도 사랑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아픔을 극복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빌리와 아들을 겹쳐 본 애거사는 자신을 희생해 그를 구한다. 완다를 원망하던 빌리는 아들을 만나기가 두려워 죽어서도 유령이 된 애거사를 보면서 모성애의 힘을 배운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마녀와 부모를 잃은 마법사는 둘만의 집회를 만들고 토미를 찾아 나선다. 이는 <완다비전>에서 끝내 혼자가 된 완다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양성이라는 잔을 반만 채우다
이처럼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본편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착실한 스핀오프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완성도가 만점에 가깝지만, 만점이라고 할 수 없다. 인종, 문화, 성적 지향성 등과 같은 다양성 관련 코드를 다소 편의적으로, 또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MCU에서는 백인 남성이 아닌 히어로나 조력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여성 히어로의 수도 늘었고, 중국이나 파키스탄 등 여러 문화적 배경을 활용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나 장애인 히어로도 하나둘씩 조명받고 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애거사의 집회' 구성원만 보더라도 백인, 흑인, 동양인 마녀가 모두 포함됐다. 애거사와 데스, 빌리와 그의 애인처럼 동성애자 커플도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다양성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번 드라마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신호는 보내고 있지만, 그 신호를 작품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상적인 지점이 없지는 않다. 일례로 애거사와 데스를 레즈비언 커플로 설정한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하고, 애거사와 아들의 서사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역할과 기능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빌리와 그의 애인을 등장시킨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빌리의 동성애 성향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빌리가 애거사를 이용해 토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전개에 빌리의 애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빌리의 이야기와 애거사의 서사는 완성도의 깊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 속의 다양성이 절반 가량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계관도 챙기는 일석이조
그렇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여전히 멀티버스 사가에서 오랜만에 접한 성공작이다. 본편에서 등장했던 주인공의 과거사와 후일담, 새로운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한 묶음으로 유려하게 풀어냈으니 그 자격은 충분하다. 이에 더해 MCU의 미래를 기대케 하는 여러 암시도 효과적으로 보여줬기에 이번 성공은 더 뜻깊다.
우선 빌리의 본격적인 데뷔는 캐시 랭, 케이트 비숍, 미즈 마블 등이 모일 <영 어벤져스>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데스'의 등장도 인상적이다.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 그녀는 <어벤져스> 쿠키 영상에서는 대사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토르: 러브 앤 썬더> 등에서는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런 그녀가 전면에 나서면서 <이터널스>처럼 더 초월적인 존재가 엮이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의 발판도 마련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MCU 작품이나 세계관 외적으로도 기대할 만한 변화도 흥미롭다. 사실 MCU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시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모든 실사 드라마에 '마블 텔레비전'이라는 별도 레이블을 사용할 예정이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수년간 만족감이 낮아진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긴 셈이다. 확실한 것은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그 초석을 단단히 다졌다는 사실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보다 흥미롭고 애절한 마녀의 길
-
- 지나치게 정직했던 뮤지컬의 영화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의 품을 떠나 일제와의 전투에 나선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맛본 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한가지 맹세를 한다.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며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이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의한 것.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은 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 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를 만나 이토를 죽일 거사를 획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이토에게 접근한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로부터 이토가 하얼빈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6일,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 선다.
<영웅>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본래 2019년에 촬영 후 2020년 3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었고, 3년 만인 2022년 12월에 마침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언제나 같은 시험에 빠진다. 영화의 작법과 다른 예술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하면 욕심이 너무 과해지고, 영화로 재해석된 결과물로 인해 원작의 매력을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원작을 의식하면 그저 아류작에 불과해진다. 원작의 가치는 느껴질지 몰라도 굳이 영화로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다. JK 필름에서 제작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후자에 부합하는 영화다. 가지고 있는 장단점 모두 원작 뮤지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로 극을 옮기는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영웅>은 클리셰를 남발하고 수많은 웃음과 눈물 포인트를 삽입하는 JK 필름의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시아주의자 안중근을 조명하는 입체성
<영웅>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안중근의 의거가 목표한 바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전달하는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그가 의병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군사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이 작전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예상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게 눈에 띈다. 흔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투사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의외로 더 큰 목적을 지닌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히 조선의 독립을 바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협력을 희망하는 아시아주의자였다. 그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일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마치 지금의 유럽 연합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 덕분에 '아시아주의'라는 이상을 둘러싼 두 인물의 사상적 대립은 더욱 부각된다. 이토가 부르는 넘버 '출정식'과 안중근이 노래하는 '동양평화'의 대조가 단적인 예시다. 이토는 하얼빈 시찰이 "극동의 평화와 문명을 여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면서 "평생을 바쳐왔던 꿈 아시아는 낙후되었다. 아시아는 위태롭다. 막강한 일본을 만들어 아시아를 통일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 대동아공영!"이라고 노래한다. (비록 '대동아공영'이라는 표어 자체는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무력으로 통합하여 서구 열강에 대적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자 이토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안중근은 "서로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 서로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 그게 바로 동양 평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혜"라고 읊조린다. 현실에서 아시아주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한중일 모두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즉, 안중근의 시각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해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죽어야만 했다. 조선의 독립은 물론,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기에 처단 대상이었다. 이처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은 덕분에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강력한 당위성과 설득력이 생긴다. 평범한 반일 영화나 평면적인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이나 일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 제국주의자가 싫다는 안중근의 말은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결정적인 실수
하지만 <영웅>의 장점은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뮤지컬의 배경을 확장, 확대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구조와 구성이 <영웅>의 매력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사 직전,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선이 고조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마진주 등 작전에 참여할 인물들은 차례대로 거리에 등장한 후 각자의 심경을 노래한다. 마치 어벤져스처럼 원을 그리며 노래하는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한인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 함께 거리를 행진하면서 거사의 성공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뮤지컬 관객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담아낼 뿐이고, 도시의 거리 역시 뮤지컬 무대 배경이 넓어진 것에 불과하다.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오프인 시퀀스인 "단지동맹" 장면이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영웅" 시퀀스에서도 배경인 설원과 자작나무 숲은 그저 인상적인 배경에 불과하고, 무대장치의 확장일 따름이다. 클라이맥스인 "장부가" 시퀀스도 뮤지컬을 재현하고 카메라에 옮겨 담는 데에만 주력한 영화의 지향점을 재확인시켜준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교수대에 올라선 안중근을 그저 정면에서 담아내며, 사형집행을 지켜 보는 이들은 뮤지컬 객석 관객들처럼 느껴진다. 영화 관객들도 뮤지컬 관객의 연장선상에 위치할 따름이다.
따라서 <영웅>이 원작 뮤지컬 무대를 영상화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로서의 특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넘버의 연속으로 구성된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노래마다 응축된 감정이 터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지점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따라서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의 한계를 영화적 내러티브 구조나 다른 방식의 장치들을 더해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웅>의 한계점은 명확하다. 어색한 화면분할이나 조악한 추격전, 하얼빈역 전경이나 설원처럼 과장된 CG의 활용 등으로는 이야기 사이 사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즉, 뮤지컬의 영화화에 실패한 <영웅>은 '뮤지컬' 영화일지언정 뮤지컬 '영화'는 아니다.
장점마저 퇴색시킨 수많은 의문점
결국 <영웅>은 곳곳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무너진다. 노래 전후로 시퀀스와 시퀀스, 장면과 장면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안중근과 설희, 동지들의 넘버는 그들의 기개를 보여줄 뿐, 이야기 전개를 위한 디테일을 담지 못한다. 실제로 하얼빈역과 채가구역으로 나누어 작전을 준비하는 것 외에 거사를 위한 계획이나 이토의 눈앞에서 정보를 캐내는 설희의 활약 등은 자세히 묘사된다고 보기 어렵다. 일례로 설희가 민비의 죽음 때문에 이토를 향한 원한을 키웠다면, 원한 자체는 노래에 담더라도 이토에게 접근하고 그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더 정교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이토가 당시 일본인들도 비판할 정도로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다는 점만 언급했어도 설희의 스토리가 더 입체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신 영화는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 채 빈자리를 윤제균 감독 특유의 유머로 채운다.
이에 더해 자기 손으로 자기 장점을 퇴색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안중근이 조선의 독립보다 더 원대한 이상을 좇게 된 이유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가 크게 다치는 장면 이후로 영화의 배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환된다. 이 시점부터 안중근은 거리 연설에서 아시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이토를 죽이기 위한 작전에 몰두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안중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안중근이 어떻게 동양평화론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변화의 연속성을 부각할 수 있는 시퀀스를 중간에 하나 추가하는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이 부족한 결과인 셈이다.
스토리의 한쪽 기둥을 맡고 있는 설희를 다루는 방식도 아쉽다. <영웅>은 안중근과 동지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설희가 각기 한 축을 이루는 영화다. 특히 설희의 경우 단독 넘버를 두 개나 가져갈 정도로 주역인 안중근과 이토와 맞먹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캐릭터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희의 비중은 조금 조절되더라도 전개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설희의 비중을 줄이고 안중근의 비중을 좀 더 늘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깊이 묘사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빈약한 스토리를 음악과 배우의 열연으로 덮는 것보다는 영화적으로 더 적절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은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은 무대 뮤지컬 같다는 인상을 좀처럼 깨지 못한다.
부족한 디테일이 낳은 신파
이처럼 허술한 만듦새는 끝내 감정의 과잉과 신파로 이어진다. 그래도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신파가 적절히 활용된 듯 보인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항소와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그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아들의 고통을 애절한 선율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또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내와의 갈등과 사별은 모든 독립 운동가의 숭고함을 오히려 감정적으로 부각해 준다.
반면에 안중근을 제외한 다른 인물은 대부분 신파를 위해 희생되고 만다. 당장 진주의 오빠인 '마두식(조우진)'의 운명이나 진주와 동하의 로맨스에서는 관객을 울음바다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듯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디테일이 부족하다 보니 그 허술함을 신파로 대신한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그러면서 정작 신파적 연출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또 다른 조력자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웃음을 위해 단편적으로 활용되고 소비될 뿐 진중하게 조명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이 안일하게 작전을 철회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는 개그성 장면이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달리 법정에 선 우덕순과 조도선의 모습이 어색할 정도다.
<영웅>의 기술적 성취는 본작의 장단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웅>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시도된 바 없는 촬영 방식이 도입된 영화로 알려졌다. 촬영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녹음 방식을 채택해 70% 이상의 분량을 현장 녹음 버전으로 담아냈다. 이 대목은 뮤지컬을 단순히 촬영했을 뿐인 영화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가상의 현실감을 살리되, 더 커지고 정제된 형태로 다시 태어난 뮤지컬 영화 <영웅>의 필연적인 장점이자 한계가 고스란히 노래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P(Poor, 형편없음)
뮤지컬 '영화' 대신 '뮤지컬' 영화를 선택한 안일함의 대가.
-
-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선택은 하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인생을 살며 다양한 선택을 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것을 버리거나 두고 온다. 때때로 미련이라는 게 남아 스스로 제쳐놨던 것들을 떠올리고, ‘만약’이라는 마법을 통해 상상으로 그 삶을 소환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소재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과 그 안에 자리 잡은 인물과 관계를 마주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중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민자들을 마음을 대변한다.
나영이자 노라(그레타 리)는 12살에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한국에서의 삶, 그 안에서 꽃피울 미래, 그리고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 해성(유태오)을 놔두고. 12년 후, 노라는 연극 극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중 우연히 페이스북을 통해 해성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화상채팅으로 재회한 이들은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각자 처한 상황과 꿈이 달랐기에 이들은 잠시 연락을 멈춘다. 이후 노라는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남자 아서(존 마가로)와 가까워지고, 해성은 상하이 어학연수 중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서와 결혼을 한 노라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온 해성을 만난다.| 선택하지 않은 삶을 마주하다!
12살 때 그녀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지 않았더라면, 꿈을 잠시 멈추고 해성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갔더라면, 해성에게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노라가 선택한 삶보다 선택하지 않은 삶에 더 집중한다. 감독은 ‘만약’을 대동한 가능성의 문을 여는데, 이 의도는 첫 장면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어느 바에 앉은 한 커플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라와 해성, 그리고 아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노라와 해성을 남매로 보거나, 이들이 부부고 아서가 현지 가이드라고 말하는 등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마치 노라가 가지 않은 길을 대신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그 모습은 달라지는데, 영화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동양 사상을 가져와 느슨하지만 운명적인 관계를 만든다. 인연은 꼭 다시 만난다는 말처럼 24년 만에 만난 첫사랑 노라와 해성은 그 자체로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다. 미국으로 와 극작가의 꿈을 키우고 결혼을 선택한 노라에게 지금은 잊힌 ‘나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12살 시절의 순수한 감정을 지닌 해성은 그 자체로 순수했던 자신의 감정이자 과거를 향한 향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기에 더 궁금하고 가까이하고 싶을 터. 감독은 자연스럽게 이 감정을 사랑의 동력으로 치환해 둘의 감정을 점진적으로 고조시키고, 선택에 따른 관계에 대한 생각을 깊게 가져간다.| 인연이 불러온 이별, 성숙한 성장
통속적인 멜로를 거부하듯 극 중 인연이란 카테고리는 노라와 해성은 물론 아서까지 확장한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그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아서는 해성과의 만남 또한 몇백, 몇천 겁(劫, 헤아릴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의 선한 인연이 쌓였기에 이뤄졌다는 생각을 하고, 노라와 해성의 해후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인연’이라는 개념은 기존 멜로 장르와의 차별화 포인트인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관계를 이해시키는 신비로운 힘으로 작용한다.
노라와 해성의 관계는 닿을 듯 말 듯한 이들의 거리만큼이나 절제와 담백, 여백의 미가 담겨 있다. 서로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한 발은 자신의 세계에 걸쳐놓는 것처럼,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다. 감정을 표출하기보다는 절제하고, 많은 말을 뱉기보다는 침묵이란 여백을 택한다. 그래서 더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밀려오는데, 특히 마지막 이별 장면은 극에 달한다. 그동안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질 듯 하면서도 이어지지 않는 장면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현재의 삶을 위해 아름다운 과거의 시간을 부여잡지 않고 떠나보내는 그 순간의 감정은 나라와 인종을 넘어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경험했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한 걸음 더 성숙한 성장을 꾀한 세 사람의 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중 정체성을 갖는 이민자의 고민
<패스트 라이브즈>는 심심하면서도 담백한 멜로 드라마이지만, 그 안엔 매번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이민자의 삶이 녹아져 있다. 연출과 각본을 맡은 셀린 송은 <넘버 3>의 송능한 감독 친딸로,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실제 이민자의 삶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이 작품에 녹여낸 감독은 노라로 하여금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미나리> 시리즈 <파친코> <성난 사람들> 등 다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품이 나온 상황에서, 셀린 송은 이 작품들보다 이민자 개인의 깊은 내면적 고민을 다룬다.
한국이자 캐나다인, 그리고 미국인인 노라의 경우, 현재의 삶은 미국인이다. 한국, 캐나다의 삶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놓고 온 인생(또는 전생)이다. 노라가 해성을 만나 겪는 일련의 내면적 갈등은 자신이 미국인의 삶을 살기로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서양 문화권에서 아웃사이더로 사는 한국인, 더 나아가 동양인들의 정체성 고민과 아픔이 녹아 있다.
“네가 기억하는 나영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 근데 그 어린애는 존재했어. 네 앞에 앉아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셀린 송 감독은 해성에게 말하는 노라의 이 대사에 그 복잡한 심경을 내비친다. 그리고 슬프고도 힘겹게 해성과의 성숙한 이별로 마음속 존재했던 나영이와 작별을 고한다. 어느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자신은 캐나다인이라고 밝힌 것처럼, 노라 또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현생의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문어체 대사와 언어의 문제에 봉착하며, 섬세한 연기와 감정선이 종종 일탈하지만, 그럼에도 인연으로 묶인 이들의 관계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가슴에 묻고 각자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주인공들.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 이들은 재회할 것이다. 이번 생은 선한 인연 중 하나였으니까.
사진제공: CJ ENM
평점: 3.5 / 5.0
한줄평: 이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우리는 인연일까?’
-
-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켄 로치 감독이 1936년생이니까 2023년 기준 87세이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아마도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영화 <지미스 홀, 2014년>을 보여주면서 은퇴 선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뭔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을 가지고 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간다. 이후 영국 북동부 지역의 낙후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까지 3부작으로 구성된 연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 '그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 포스터
복지 수당 받기 더럽게 힘드네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다니엘의 부인은 오랫동안 앓았다. 평생 목수로 일했지만, 남은 것은 늙고 쇠약해진 몸뚱이와 간병으로 기울어진 가정뿐이다. 다니엘은 정부에 복지 대상자로 신청해 수당을 받으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빙글빙글 여기저기 돌다가 자기네들이 설정해 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나마 신청할 수 있는 복지 사업은 서류를 컴퓨터로 제출해야만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진짜 심각한 지병이 있어서 일하기도 어려운데, 자꾸 근로 능력이 있는데 복지 수당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노인 대상 복지 체계만 이런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혼자 양육해야 하는 케이티도 마찬가지다. 소통되지 않는 원칙과 각종 서류들, 증빙이 되는 번호들, 성실하지 못해 복지 대상자가 되었다는 따가운 시선들 등 모든 장애물을 넘고 넘어가야 겨우 복지 수당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포스터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라네요 : <미안해요 리키, 2019>
제인네 가족은 아빠, 엄마, 오빠, 제인. 이렇게 네 식구가 같이 살고 있다. 아빠는 택배 일을 하시고,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계시다. 두 분이 맞벌이를 하시기 때문에 제인은 학교가 끝나면 혼자 빈 집에 들어와서 엄마가 요리해 놓은 음식을 먹고, 숙제를 한다. 오빠 셉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은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택배 일이나 요양보호사 일은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직종을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고 한다. 회사의 보호를 받아야 할 때에는 자영업자로 내몰리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 유연성을 발휘하려 할 때에는 노동자로 당겨진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 사이에 묶인 제인의 아빠와 엄마는 더 많은 근로를 요구받고, 혹사를 당한다. 혹사당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포스터
똑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저는 난민이에요 : <나의 올드 오크, 2023>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2016년 난민법을 제정하였다. 2024년부터는 한국의 이주민 비율이 공식적으로 5%를 넘기 때문에 '다문화 국가'에 진입한다. 사실 미등록 이주민들이 빠진 수치이기 때문에 이미 5%는 진작에 넘었다. 난민법에는 재정착 희망난민제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정부가 직접 난민 캠프로 가 그 곳에서 한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태국의 난민 캠프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미얀마 출신의 가족들이 이 제도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만약 재정착 희망난민제로 한국에 들어온 난민 가족들을 버스에 태워 인구 유출이 심각한 문제인 지역에 정착하도록 보낸다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 더럼 지역으로 버스가 들어온다. 이 버스에는 시리아 난민 캠프에 살던 가족들이 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야라는 동네 사람들의 혐오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올드 오크 사장님 TJ는 마음이 불편하다. TJ는 야라의 카메라는 수리하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해 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나누며 둘은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된 TJ와 야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는 영화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있지만, <나의 올드 오크>는 공간명이 제목이 되었다. 물론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름을 넣는 것으로 지어졌다. 앞선 두 영화가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나의 올드 오크는 인물들이 만나서 대화하는 장소가 강조된다. '올드 오크'라는 펍은 원래 40년 동안 단골로 다녔던 사람들이 '우리의 공간'이라고 여기는 곳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 '우리가 아닌 자'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쉽고, 서운하고, 화가 난다. 그래서 쉬이 내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돈은 없는데, 돈 들어갈 곳은 많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일은 부지기수며, 인생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사람 인(人) 글자가 바로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뉴캐슬어폰타인 - 선더랜드 - 더럼 순으로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의 배경이 이동한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 들리지 않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다, 영화 <코다>
지인의 적극적인 추천을 본 영화 <코다>. 라라랜드 감독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반 우려반이었다. 솔직히 영화 <라라랜드>는 그렇게까지 나에게 엄청난 인상을 준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코다>는 내 기준으로 영화 <라라랜드>보다 훨씬 잘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 <코다> 시놉시스음악의 마법에 빠질 시간!
가장 조용한 세상에서 시작된 여름의 노래!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인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코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코다의 의미를 알다사실 코다의 의미를 몰랐다. Children Of Deaf Audlt.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자녀들을 이르는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코다가 뭘까? 주인공 이름이 코다인가? 아닌데,,, 하며 세상 무지함을 뽐내며 영화를 봤다.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없어서 그들의 삶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삶과 그들을 부모로 둔 비장애인의 삶이 어떠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나는 비장애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비장애인인 루비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루비에게 너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부담을 주는 엄마를 보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고, 어떻게 자식에게 저렇게 부담을 안길까 솔직히 불편했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엄마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조화와 공존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름 생각할 수 있는 거리를 전해주고 있어서 좋았다.
음향연출이 너무 좋았던 순간
사실 청각장애와 음악영화 이 모순적인 조합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의아스러웠다. 음악의 지배적인 감각이 바로 청각이기 때문인다. 물론 음악을 소화하는 이는 비장애인인 루비이긴 햇지만 그 소재를 청각장애인 가족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요소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청각을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감동이 몰려왔다. 바로 루비의 합창 발표회에서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를 연출한 장면이었다.
초반부 노래를 들려주다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온다. 관객 역시 청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상태로 그저 행복하게 공연하는 루비와 그런 루비의 목소리에 감동한 듯 쳐다보는 관객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잠깐이나마 모든 이가 듣지만 나는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마련되면서 음악영화지만 멜로디 하나 없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출을 한 그 짧은 순간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영화 <코다>의 주제는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였다. 사실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와 아빠, 오빠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나름대로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며 잘 살아왔다. 하지만 비장애인인 루비가 태어나면서 세상과 더 활발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며 루비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루비 역시 가족에게 얽메이면서 스스로도 가족없이는 결정을 내려본적이 없는 양쪽 다 서로에게 의존적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루비가 자신이 좋아하던 노래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대학이라는 꿈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간 가족간에서 의존해왔던 자신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글렇게 영화 속에서는 의존적이었던 가족간의 관계에서 ‘의지’를 할 수 있는 관계로 점차 변화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청각장애인인 가족들이 그동안 겉돌다 어떻게 사람들과 화합하기 시작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그려주고 있지는 않다. 다만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수화를 배우게 하고 먼저 다가가는 등의 노력을 했다 정보만 보여줄 뿐이다. 혹자는 그 과정을 너무 아름답게 편집했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장애인인 자신들끼리만 있기보다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함으로써 의존적이지 않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한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영화 <코다>는 음악영화답게 감미로운 노래들과 드라마,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조화, 마지막으로 존재의 자립이라는 주제까지 적절하게 버무린 작품이었다.
-
- 영화가 특별하다는 뻔뻔한 주장
영화 〈헤일, 시저!〉(2016)와 넷플릭스 드라마 〈오, 할리우드!〉(2020)는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까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두 작품 모두 할리우드가 상징하는 이야기와 꿈의 크기를 잔뜩 부풀린다.
〈헤일, 시저!〉의 주인공 에디 매닉스는 영화사 캐피틀 픽쳐스의 대표다. 그는 잠시도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다. 영화 제작이나 회사 관리 외에도 그의 일은 산더미처럼 많다. 그런데 캐피틀 픽쳐스 최고의 기대작 ‘헤일, 시저!’의 주인공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영화계 인사들에게 납치당한다. 주인공이 사라지자 촬영 일정이 꼬이고, 수상한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달라붙기 시작한다. 에디는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중 에디의 능력을 높게 산 항공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온다. 에디는 과연 난장판인 할리우드를 떠나 더 좋은 조건의 항공 업계로 이직할까?
영화 〈헤일, 시저!〉 스틸컷 ⓒ네이버 영화
한편, 〈오, 할리우드!〉는 ‘멕’이라는 가상의 영화가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난한 배우 지망생 잭 카스텔로, 재능 있는 흑인 게이 작가 아치 콜먼, 아치 콜먼의 연인이자 배우 지망생 록 허드슨, 필리핀 혼혈 감독 레이먼드 에인슬리, 흑인 최초로 오스카상을 받는 여배우 커밀 워싱턴 등등.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밑바닥에서 출발하지만 계급, 인종, 성적 지향을 따라다니는 편견을 뒤집고 기념비적인 영화 ‘멕’을 완성한다. 이들의 여정은 엉망진창인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좋은 영화가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헤일, 시저!〉와 〈오, 할리우드!〉에는 할리우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겼다. 아니, 애정 그 이상이다. 이들은 할리우드가 난장판임을 신랄하게 보여주면서도 그 난장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꿈의 가능성을 예찬한다. 영화 산업은 다른 산업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런 걸까? 왜 이들은 폭로하고 비판하는 대신 폭로하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오, 할리우드!〉 스틸컷 ⓒ넷플릭스
이 질문은 예술 전체로도 확대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대다수의 예술가가 생계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을 꿈꾸고 동경할까? 예술이 생산되는 구조적 착취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도 왜 예술을 하겠다는 사람은 넘쳐날까? 왜 그들은 예술을 감상하고 즐기는 데서 그치지 못하는 걸까?
두 작품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난장판에 불과한 할리우드라도 당신을 감동시키는 영화를 만들어 내지 않았느냐고 샐쭉거린다. 대책 없는 뻔뻔함에 어이없을 정도다. 하지만 앞의 질문들은 그 누구도 명확히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예술을 한답시고 끙끙거리는 모두는 이 질문이 답변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만 예술가다. 모든 것이 명쾌한 질문은 꿈과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딘가 두루뭉술한 부분이 있어야 이를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고민, 즉 예술을 하고자 하는 동기가 생긴다.
〈헤일, 시저!〉와 〈오, 할리우드!〉가 문제 투성이인 할리우드를 예찬함에도 밉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도덕을 기준으로 영화의 표현을 규제한 '헤이스 규약'이 기세 등등하던 시대에도, 공산주의자·게이·여성·흑인을 비롯한 수많은 타자가 적나라한 적의를 마주해야만 했던 시대에도 어쨌든 할리우드는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동의할지 말지는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도 있다. 호레이스 맥코이의 소설 《그들은 말을 쏘았다》(2020)는 할리우드가 얼마나 기형적으로 누군가의 꿈을 착취하면서도 아무 보상도 하지 않는지를 엿보게 해 준다. 이는 적당히 낭만적이고 두루뭉술한 설명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기는 질문. 할리우드는, 예술은 여전히 특별한가?
*드라마 전반부가 할리우드 조감도를 흥미롭게 펼쳐놓는 데 반해 후반부는 ‘멕’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유치할 정도로 낭만적으로만 재현한다. 너무 뻔한 전개에 후반부의 몰입도는 확실히 떨어진다. 하지만 제이크 피킹이 연기한 록 허드슨이 실제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배우 록 허드슨을 오마주했다는 점에서 낭만적 유치함이 조금은 용인된다. 록 허드슨은 제임스 딘과 함께 당대 최고의 스타였고, 유명인사 중에서는 최초로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오, 할리우드!〉 의 뻔한 로맨스(그중에서도 게이 커플의 로맨스)는 에이즈로 죽은 록 허드슨에 대한 헌사인 셈이다.
-
-
-
-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 티저 예고편
이순신 장군의 최후의 전투? 12월 20일 큰 스크린으로 생생하게 체험하라! 올겨울 최후의 승리를 함께하라! ?개봉일 확정 기념? #노량죽음의바다 티저 예고편 공개!
-
- 영화 <트랙스> 예고편
위대한 실화
용감한 여정“그냥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에요”
앨리스 스프링스부터 인도양까지
호주 사막 2,740km를 걸어서 횡단하기로 결심한 로빈(미아 와시코브스카).
오직 낙타 네 마리와 자신의 반려견만을 데리고 홀로 사막을 걷기 시작한다.
그녀의 무모한 계획에 이끌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 작가 릭(아담 드라이버)이
중간 거점마다 여정을 기록하기로 한다.
광활하고도 고독한 사막 속,
위험천만한 여정이 시작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