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02 19:04:03
모아나 2 |뻔한 레시피, 쉬운 재료, 평범한 플레이팅
<모아나 2>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섬에 사는 부족들을 찾기 위해 꾸준히 항해에 나서던 '모아나'(아울리이 크러발리오). 그녀는 전설적인 항해자이자 길잡이를 뜻하는 '타우타이' 칭호를 받은 직후 고대의 조상이 등장하는 환영을 본다.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지우고자 하는 폭풍의 신 '날로'(토피카 페푸리이)가 숨긴 섬, '모투페투'를 찾아내어 바닷길을 열지 못하면 모아나의 부족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지를 받은 것.
이에 모아나는 발명가 '로토'(로즈 마타페오), 농부 '켈레'(데이비드 페인), 이야기꾼 '모니'(후알랄라이 청)와 함께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모아나 일행은 날로가 보낸 괴물들을 만나 위기에 처하고, 그녀는 타우타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 앞에 오랜 파트너이자 반신반인 영웅 '마우이'(드웨인 존슨)가 나타나고, 그의 격려에 힘입어 모아나는 다시 한번 모투페투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6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아나>. <모아나>의 매력은 신선함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폴리네시아 신화는 이전까지의 디즈니 작품에서 보지 못한 볼거리였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생산 업무에 직접 관여하는 여자 주인공의 등장도 파격적이었다. <겨울왕국>의 엘사, 안나 자매만 해도 전통적인 공주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니까.
반면에 8년 만에 돌아온 속편 <모아나 2>는 기대보다 걱정이 컸다. 개봉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디즈니의 2024년 1분기 실적 보고회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던 속편이 돌연히 극장용으로 전환되었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 전편의 OST를 맡았고, 현재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곡가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뉴스도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모아나 2>는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전편을 답습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얼개와 스토리, 고막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OST는 본래 TV용 작품이었던 초안의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흥미로운 특이점은 있지만, 그조차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징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모아나 2>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스트레인지 월드>와 <위시>로 이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진을 끊어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담은 환상
개봉 전에 <모아나 2>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을 하나만 꼽자면 카누를 타고 망망대해를 시원하게 가르는 모아나와 독수리로 변신해 그 위를 날아가는 마우이의 투샷일 것이다. 그런데 <모아나 2>는 이 장면에 예상치 못한, 하지만 디즈니라서 자연스러운 함의를 불어넣었다. 폭풍의 신 날로의 방해를 뚫고 모투페투 섬을 찾아서 자유로운 바닷길을 열어야 하는 모아나의 항해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전한 후 지금까지도 미 해군은 서방 진영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다. 국가 간 무역을 활성화해 시장 경제를 키우며 자국 중심 질서를 정립한 것. 근래 중국처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군사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모아나 2>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작품이다. 모아나는 미 해군, 마우이와 동료들은 미국의 동맹국, 날로 신은 중국처럼 항행의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에 정확히 대응되기 때문.
물론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 해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닷길의 중요성은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며, 바다를 통한 소통과 교류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핵심 원동력이었으니까. 명나라가 정화의 원정 이후 돌연 바닷길을 포기한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의 국력을 추월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바닷길을 끊어서 인간 세계를 암흑 속에 빠트리려는 날로의 존재는 인류 문명 공통의 공포이자 두려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모아나 2>는 어디까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는 대공황 이후부터 미국 사회가 추구하고 유지할 가치와 윤리를 충족시키는 환상 속에서 재미와 쾌감을 추구한 스튜디오였으니까. 자연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렇기에 <모아나 2>가 보여주는 모험과 항해를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신화로 가린 이데올로기
다만 미국 패권에 대한 은유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모아나 2>가 전편의 미덕을 본받아 인간 영웅이라는 신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대다수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를 조력자나 대적자로, 인간 영웅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공통의 작법을 공유한다. 대체로 신적 존재는 아무리 강해도 여러 제약이 있다. 그렇기에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만이 신과 인간 세계 양쪽을 넘나들면서 모험을 펼치고, 운명을 성취한다.
<모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와 같은 강대한 존재도 세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모아나를 영웅으로 낙점하고, 그녀가 좌절하거나 포기하려 할 때마다 간접적으로 도울 뿐이었다.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영웅, 마우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우도록 난파된 모아나의 배를 그의 섬으로 이끌어주는 식이었다. 모험을 계속할지 말 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아나의 몫이었다.
<모아나 2>도 마찬가지다. 전편이 반신반인이 아닌 인간의 모험이라는 콘셉트를 제시했다면, 속편은 이를 구체화한다. 날로와 전투를 펼치는 클리아맥스가 대표적이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가운데, 모아나는 자신과 마우이의 역할을 바꾼다. 날로가 능력이 더 뛰어난 반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 이는 뻔할 수 있었던 후반부를 변주시키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는 맛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안타깝게도 <모아나 2>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우선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은 전편을 답습했다. 고향 모투누이 섬에 위기가 닥치는 환영을 본 모아나. 선조들이 발견하지 못한 전설 속의 섬을 찾아내지 못하면 부족 사람들이 모투누이에서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라는 예지를 받자 그녀는 다시 한번 항해에 나선다. 이는 모투누이에 찾아온 재앙을 풀기 위해 항해를 떠난 전편과 다를 게 없다.
발단 이후의 전개도 전편과 거의 동일하다. 서로 떨어져 있던 모아나와 마우이는 항해 도중에 합류해서 다시금 한 팀을 이룬다. 최종 빌런을 마주하기 전에 한 차례 실패를 겪는 것도, 좌절한 일방을 다른 일방이 위로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유사하다. 단지 전편에서는 모아나가 마우이를, 속편에서는 마우이가 모아나를 일으켜 주는 게 다를 뿐이다.
물론 기시감을 옅게 만들려는 시도는 있다. 돼지 '푸아'와 닭 '헤이헤이'에 더해 모아나의 여동생 '시메아', 동료 선원 모니와 로토 등에게 적잖은 분량을 부여하고, OST에서도 로토에게 래퍼 역할을 맡기는 식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모아나와 마우이의 분량이 줄면서 도리어 그들의 캐릭터성이 평면적으로 변한다. 일례로 전설적인 길잡이의 칭호까지 받은 모아나의 내적 갈등은 스케치 수준으로 스쳐 지나간다.
귀가 허전해
마지막으로는 음악의 쾌감도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 더 이상의 검증이 불필요한 린 마누엘 미란다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그는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로 결심을 굳힐 때 부르는 노래인 'How Far I'll Go'를 작사, 작곡하면서 <모아나>의 흥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바 있었다. 엘사가 부른 'Let It Go'가 <겨울왕국>을 상징하듯이, 'How Far I'll Go' <모아나>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으니까.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불참한 <모아나 2>는 'How Far I'll Go'와 같이 뇌리에 각인될 만한 OST를 들려주지 못했다.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Beyond'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만, 이전 곡과 같은 임팩트를 주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노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편에서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까지 겪은 역경만큼 극적인 전개를 속편이 고안해내지 못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귀가 허전한 아쉬움을 비주얼로 만회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맥스 전투 시퀀스는 확실히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모아나의 카누가 거대한 파도를 빗겨 타는 순간을 4d로 본다면 마치 서핑을 하는 듯한 쾌감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음악의 아쉬움을 온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클라이맥스 외의 장면에서는 특별히 놀랄 만한 장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모아나 2>는 쿠키 영상에서 예고하는 3편을 위한 징검다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싶다. 그와 동시에 과연 <모아나 2>가 징검다리 역할을 온전히 해냈는지는 끝나는 순간까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 애니메이션보다는 약 1년 반 뒤에 개봉할 <모아나> 실사 영화가 더 궁금해지니까.
Acceptable 무난함
디즈니가 디즈니한 무색무취한 속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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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하고 바르게 산화하는 혁명가의 찬란한 해방이라는 착각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취한 한 여성이 클럽 의자에 쓰러질 듯 앉아 있다. 제대로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상황에 한 남성이 그에게 다가간다. 택시를 부를 휴대전화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여성에게 착한 사람이라 자부한 그는 집에 가는 길에 그를 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여성은 차에 탔고, 남성은 자연스레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저항할 힘도 없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여성을 침대에 눕혀 놓고 일을 벌이려는 순간, 조금 전까지 정신을 잃었던 여성은 그를 똑똑히 밑에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잖아?”
카산드라 토마스(캐리 멀리건)는 대학 시절 절친 니나 피셔의 성폭행 사실을 확인하고 진상 파악과 가해자 처벌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끝내 사건은 흐지부지 묻히고 만다. 그의 이름처럼 ‘카산드라’는 현명한 여성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아 이후 닥친 불행을 막을 수 없는 카산드라 증후군에 빠진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명백한 진실을 간직한 채 니나와 캐시는 자퇴를 했고, 니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의대에 입학할 만큼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두 사람의 삶은 폐허가 되었고, 캐시는 니나의 안타까운 삶을 대신 갚아 줄 비밀스러운 일을 꾸민다. 그는 동네 카페에서 일하며 밤이면 취한 척 연극을 하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성들이 원치 않는 성관계를 시도할 때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들을 놀라게 한다. 이는 니나의 강간 피해를 곁에서 지켜본 친구로서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분노가 폭발한 계기는 가해자인 알렉산더 먼로(크리스 로웰)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나서다. 피해자는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가해자는 유능한 사회의 일원으로 정상적인 삶을 꾸리기까지 한다는 전언에 캐시는 7년 전 자신들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을 찾아가 복수를 결심한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7년 전 절친의 성폭행 사건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주인공 캐시의 복수극이다.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90년대 팝송의 재해석과 힙한 연출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영화에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고, 이는 영화가 위태롭게 유지한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캐시의 복수의 방법론에 드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반추하다 결말에 이르렀을 때 관객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되며, 굳이 내보이지 않아야 할 영화의 교묘한 속임수를 발견한다.
정기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클럽에서 늦은 밤 만취 상태를 연기하는 캐시는 언제나 다음 날 아침 가족과의 식사에 참여한다. 불특정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연기에 필연적인 위험을 느낄 법도 한 캐시는 그에 개의치 않고 늘 같은 방법을 활용한다. 물론 영화 중반을 지나면 절친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분노를 동력 삼아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채우고 싶은 그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캐시의 협박에 나가떨어지는 남성들에 비해 캐시의 ‘복수’는 상대적으로 온건하다. 유부남이나 명망 있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영화 속 ‘사냥감’은 하나같이 유약하고 머뭇거리며 한심하며, 지질하고도 ‘무해하다’. 접근한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을 착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속인 것을 알아차린 후에는 그에게 분노의 욕설 정도를 날리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 이름도 나이도 모른 채 그저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남성의 아둔함을 강조하지만,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많은 남자를 겁박한 그가 물리적 협박과 위해나 남성 커뮤니티의 가십거리 혹은 ‘복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게 오직 그 이유일 수는 없어 보인다. 아무리 캐시의 서늘한 아우라에 기가 눌린 남성들만 만났다 하더라도 수많은 남성과의 위험한 만남을 이어간다는 설정은 그에게 보호막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 이상 우연을 넘어선 작위적 연출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영화 전체에서 피해자의 복수를 이끄는 사회적 여성성의 전형이라면 관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 입만 산 남성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복수 활극으로 영화가 전개되는가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캐시의 복수는 당한 대로 갚아주는, 폭력의 피로 흥건한 과거 마초적인 복수극의 패턴과 다르다. 직접적 혹은 간접적 가해자에게 죄책감과 두려움을 심어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방식은 전형성을 탈피한다. 필요 이상의 자극적인 장면을 삽입하여 불쾌감을 주는 비슷한 영화들에 비해 이 여성 복수극은 자극적인 앙갚음의 과정이 아닌 대사를 통해 끔찍한 상상을 불러일으켜 가해자를 고통받게 한다. 가해자의 변명은 한결같다. 촉망받는 한 청년의 삶을 지켜줘야 했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뻔한 거짓말에 입증할 증거는 부족했고, 술을 먹고 같이 놀러 간 피해자의 탓이 컸다는 말의 향연은 이들의 한심한 작태를 정면으로 비춘다. 대상화된 굴레를 퍼뜨려 입을 막고 주홍글씨를 남겼던 가해자에게 행하는 복수가 아쉬울 수 있겠으나 여성의 시각에서 이룩한 이 성과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쪽보다는 훨씬 이성적이며 윤리적인 방법으로도 보인다.
응징은 세련되고 복수는 쿨한 캐시의 방법론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 내내 그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는 무해한 남성들을 응징하며 때로는 아파하고 혼란을 느끼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친구의 죽음 이후 자신을 가둔 죄책감과 슬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성장일기로 끝나는가 싶던 영화는 후반부에서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 버린다. 그리고 앞서 영화적 설정으로 넘어갈 수 있던 모든 것들은 한 방에 무너진다. 강간의 장본인인 알 먼로의 총각파티에 스트리퍼로 찾아간 캐시는 그에게 마지막 복수를 감행한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캐시는 니나를 죽였던 바로 그에게 똑같이 죽임을 당한다. 그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일상을 포기하며 캐시가 얻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캐시의 죽음으로 이 복수의 끝은 혼돈으로 가득 찼다. 클럽에서의 남자 사냥에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행했던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과정에서도 불안하지만 꽤 깔끔하게 해결하던 주인공은 이 계산된 복수의 방법론을 불쾌하고 황망하게 마무리한다. 3분이 넘는 롱테이크 신으로 강간 가해자로부터 죽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관객에게 들이미는 이 잔인한 마무리는 그간 영화가 지켜 온 톤과 매너를 붕괴하고 과거 남성들이 자행한 폭력을 대물림한다.
캐시는 자기 죽음을 예상한 듯 속죄한 변호사에게 모든 증거를 남겼고, 알 먼로의 결혼식 날 마지막 복수가 이뤄진다. 그 과정을 목격한 방관자인 라이언에게 예약 문자로 ‘쿨하게’ 알리는 엔딩은 기괴하고 잔혹하다. 완벽히 통쾌한 복수는 없다는 사실은 10여 년 전 이금자의 처절한 속죄를 지켜보며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프라미싱 영 우먼〉이 죽음으로 모든 복수가 완성되는 결말을 의도했다면, 이제 관객은 캐시가 영화 전반에서 자초한 과거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았는가가 아닌, ‘왜’ 살아남았는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감독은 영화의 절정, 그러니까 깔끔하고 힙한 복수의 자기만족적인 완성을 위해 아껴놓고 캐시를 살려놓은 것이다. 영화는 피해자의 입장과 여성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차치한 채, 피해자의 복수를 위해 제 몸을 바치는 소꿉친구라는 진부한 설정을 두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며 파스텔 톤 색상과 펑키한 분위기의 영화적 오락성을 강조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우정을 위해 열렬히 복수하고 산화하는 삶을 애초에 블랙코미디로 상상했다면 피상적인 인식의 발로이자 얕은 위로에 불과하다. 이는 여성 혐오를 대처하는 캐시의 대사만큼이나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캐시라는 캐릭터는 하나의 인물로 기능한다기보다는 감독이 원했던 극의 주제의식을 의인화한 전형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여성의 비극과 복수를 연출하는 에머랄드 펜넬 감독의 스타일은 그가 참여했던 전작 드라마처럼 펑키하고 화려하다. 그 안에서 캐시의 장렬한 희생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나에서 캐시로, 다시 점장 게일에게 전달되는 목걸이는 죽음으로 대물림하는 고통의 악순환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잊지 않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캐시의 이름은 다르게 들린다. 여성의 이야기가 부정되고 사회로부터 침묵당하는 모습이 트로이 전쟁을 예측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못한 카산드라의 비극과 겹쳐 보였던 잠깐의 순간은 사라진다. 대신 윤리적이고 세련된 여성영화라는 외면에 이용당한 희생양인 캐시라는 인물이 '기꺼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트로이 목마로 전용되는 장면만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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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미카엘 하네케 - 피아니스트
개인의 뒤틀린 내면과 욕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욕망과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 에리카는 경쟁률이 높은 음악대학의 교수로, 그의 실력과 명망은 자타가 인정한다. 겉으로 보이는 에리카는 음대 교수로 번듯하지만, 그의 내면은 황폐하고 메말랐으며, 뒤틀려 있다.
에리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할퀴고, 헐뜯으며, 비난하면서도 한 침대에서 잠을 잔다. 이 대목은 매우 상징적인데, 에리카와 그의 엄마는 애증으로 엮인 관계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에리카는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이유도, 경제적 여유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은, 엄마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엄마와 쉽게 분리되지 못하는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마와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것 역시, 에리카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분리불안을 겪고 있는 증거이며, 다른 의미로 엄마가 자신을 지켜주는 '남성'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리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제자의 옷에 유리병을 깨서 집어 넣어 그 제자가 심각한 부상을 입게 만들고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싸이코패스다. 그런 그에게 친구가 있을 수 없다.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엄마이며, 그의 취미는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에리카의 현재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그녀가 왜 그렇게 비틀린 욕망을 갖게 되었는가 알 수는 없다. 현재 엄마와의 관계를 미루어보면, 에리카의 엄마 역시 '정상'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내 상상이다.
에리카의 엄마가 젊었을 때, 에리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카의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간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존심이 강해서 남편을 찾지 않았고, 에리카를 혼자 키운다. 하지만 남편이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에 자존감은 무너지고, 생활을 위해 굴욕적 상황을 감수하면서 근근이 살아왔다. 그 사이 에리카에게 피아니스트의 재능이 보이자, 엄마는 에리카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에리카의 엄마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보상심리, 남편에 대한 복수심 등이 뒤섞인 감정으로 에리카를 닥달하고, 에리카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 어린 에리카에게 엄마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변변한 연애조차 해 본 적 없는, 그래서 남자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사랑의 감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여성이다. 그가 보는 것은 포르노 속의 남성이고, 관념 속의 남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한 청년, 클레메가 나타난다. 공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피아노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청년, 집안도 훌륭하고, 큰 키에 잘 생긴 외모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청년이었다.
그 청년 클레메가 에리카의 연주를 듣고 그녀의 수업을 수강 신청한다. 에리카는 반대하지만, 다른 교수들의 찬성으로 클레메는 에리카의 수업에 참가해 피아노 교육을 받고, 에리카에게 애정의 감정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젊고 잘 생긴 클레메의 구애를 거부하던 에리카도 어느 순간 클레메를 받아들인다.
나이는 많아도 연애 경험이 없는 여성과 젊고 잘 생긴 청년의 연애는 처음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편지는 온통 변태성욕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클레메는 화장실에서 처음 만나 섹스를 할 때부터,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만, 에리카는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권력을 가졌고, 그녀의 재능에 대해 존경과 애정을 동시에 갖고 있던 클레메는 에리카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에리카의 욕망에 순순히 따르는 듯 하던 클레메였지만, 정도가 지나친 변태성욕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클레메는 에리카의 요구를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에리카의 태도를 확인한 클레메는 에리카를 비웃고, 천박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클레메 역시 에리카가 드러내는 변태성욕에 호기심을 갖지만, 자신의 존재, 사회적 위치, 집안의 명예 등을 생각해 일정 수준에서 에리카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청산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집착하고, 자신의 연주회가 있던 날, 관객으로 들어오는 클레메가 아는 척도 하지 않자, 칼로 가슴을 찌르고 공연장 밖으로 나간다.
욕망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욕망이 자아를 잡아먹기 시작하면, 개인의 자아와 본능은 분열하기 시작한다. 에리카의 내면은 제어할 수 없는 욕망으로 가득 찼고, 그것은 현실의 삶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음대 교수로서의 정체성보다 변태적 섹스에 집착하는 중년의 여성, 생리가 끝났지만, 면도칼로 자신의 음부를 베어 피를 흘리며 '유사 생리'를 해야만 하는 비참한 집착, 포르노 가게에서 혼자 포르노를 보며 성욕을 해소해야 하는 고독한 상황 속에서 에리카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존재한다.
에리카가 여성이라는 점이 성적 욕망의 억압과 뒤틀린 발현에서 특별한 이유가 될까.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의 압력이 남성과 비교해서 훨씬 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 에리카는 이미 '엄마'의 존재로 인해 어려서부터 미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엄마의 욕망을 투사하고, 엄마의 욕망을 대리 구현하는 존재로서 딸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삶을 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에리카가 칼로 자해하고 공연장 밖으로 사라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 존재로 나가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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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 인연 / デジモンアドベンチャー LAST EVOLUTION 絆, 2020
보수와 진보가 오랜 시간 동안 으르렁거리듯이 필자와 같은 90년대생들에게 "디지몬"과 "포켓몬"의 대립은 여전히 회자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연, 디지몬은 아는지?'를 되묻게 할 만큼 그들의 입지는 많이도 달라졌는데요.
그런 점에서 2015년에 들려온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의 6부작 소식은 기대를 많이 했지만 아시다시피,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트라이>가 성공했다면 나오지 않았어도 될 작품이었으니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기대보단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럼에도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을 보게 된 이유에는 '어드벤처'라는 4글자를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과연,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트라이> 6부작의 아쉬움을 달랠만한 작품이었는지? - 영화의 감삼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는 디지털 월드로부터 세상을 구한 "신태일"과 친구들은 종종 디지털 월드의 균열로 침범하는 디지몬들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 졸업반인 "태일"과 "매튜"는 디지몬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에 슬슬 결정할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선택받은 아이들이 쓰러지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이번 일에 "에오스몬"이라는 디지몬이 연관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타이치"와 "야마토"는 오메가몬을 내보내지만, 도중에 진화가 풀리고 마는데...
막상,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쉽네.
1. 트라이의 문제점들이 개선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이전 <트라이>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비교 대상이 <트라이> 6부작이기에 한없이 좋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볼 수도 있으니 피아식별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트라이> 6부작이 아니더라도 잘 만든 극장판입니다.
먼저, <트라이> 6부작과 비교하자면 각 캐릭터들의 분량이 눈에 띕니다.
많은 캐릭터들 중에서 누가 있을까?
기존 <트라이> 6부작에서 아쉬운 점은 <파워 디지몬>에서 나왔던 인물들의 활용이었습니다. 극 중 이들이 갇혀있는 듯한 캡슐을 보여주나 이에 대한 해명은 존재하지 않은 채 끝나고 마는데요.
이외에도 <어드벤처>시리즈의 주인공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보여주나 이마저도 각기 1장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이어진다는 시리즈임에도 똑같은 도돌이표를 반복하며 앞서 언급한 <파워 디지몬>의 캐릭터들에 대한 떡밥도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1편뿐이니 무엇을 남기는 거 없이 시원시원하게 전개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파워 디지몬> 캐릭터들도 이번에는 나와주니 팬들에 대한 서비스도 챙기는 모습이고요.
2. 오직, 시리즈만 선보일 수 있는 퍼포먼스
팬들에 대한 서비스에 대한 말처럼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는 <트라이> 6부작뿐만 아니라 기존 극장판들에 대한 오마주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의 구조는 <우리들의 워 게임!2000>을 연상케합니다.
디지털 월드에 등장한 "에오스몬"을 "오메가몬"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은 "디아블로몬"에서 바뀌었을 뿐 크게 다르지도 않고 백업 멤버들도 "리키"와 "한솔이"로 똑같으니까요.
여기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 캐릭터들이 "태일"과 "매튜"이니 이를 보는 관객들에게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는 낯선 작품은 더 이상 아닐 겁니다.
어드벤처 팬들은 지금 모이세요!
이외에도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는 또 하나의 작품을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건 <운명적 만남1999>입니다.
극 중 초반 디지몬이 현실 세계로 나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디지몬이 그때의 디지몬이고, "태일"이 부르는 호루라기까지 올드팬들이라면 잠시 추억에 잠길만한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오마주"에 그쳤다면 추억 회상으로 끝났을 겁니다.
특히, 외부 영화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니 이 극장판만의 새로움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아쉬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결합했으며, 무엇보다 "시리즈"만이 할 수 있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저, 짜깁기만 한 영화는 아닙니다.
이를 본다면,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는 그저 예전 극장판을 짜깁기해 좋아할법한 영화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토이 스토리 32010>에서 "우디"와 "버즈"가 "앤디"를 보내는 '안녕... 파트너'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이 말인즉슨,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은 시청자들과 함께 성장해온 작품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요.
결국, 이번 극장판의 제목인 "라스트"가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이죠.
많이 컸네?
이번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에서 다뤄야 할 설정은 "어른이 된다면 디지몬과의 파트너십은 해제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번 악역으로 나오는 "메노아"도 이와 관련된 동기를 가진 캐릭터로 주인공 캐릭터들과 반대 입장이니 "디아블로몬"보다 더 인상적인 악당인데요.
그런 점에서 "메노아"가 만들어낸 "네버랜드"는 아이들만 올 수 있는 <피터팬>의 "네버랜드"를 연상케합니다. (여기에 "메이코(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도 있더라...)
특히, 유리로 만들어진 이곳은 깨질 것만 같은 인상도 있지만 투영된다는 이미지도 존재합니다.
이로써 "메노아"의 반전도 있겠지만, 깨지고 싶지 않은 관계임을 투영시킨 공간도 상당히 잘 어울렸습니다.
4. 진화와 성장에 대해서...
이쯤 하면, 굉장히 재밌는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에게도 아쉬운 점은 존재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태일"과 "매튜"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나가기에 다른 캐릭터들의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여기에 디지몬들의 진화도 오리지널 에피소드들에서는 나름 최고치를 찍었지만, 엔젤몬과 니드몬, 원뿔몬 등 성숙기에 그치고 맙니다.
그렇기에 액션에 대해서 아쉬움도 생기는데요.
무엇보다 "오메가몬"이 아닌 새로운 진화체의 등장은 호불호가 생길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저는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 "에오스몬"의 파워 인플레도 초반과 후반부에는 달라지니 94분으로는 이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인연>에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아구몬"이 일어난 "태일"을 향해 고개를 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아구몬"은 "태일아, 많이 컸네?"라는 대사를 하고는 "태일"은 "나는 컸고, 너는 그대로네"라는 대사로 대답을 이어나갑니다.
이는 "태일"뿐만 아니라 이를 보는 저를 비롯한 시청자들을 꿰뚫는 대사처럼 들리는데요.
분명히, 디지몬은 숱한 진화를 겪는데도 도와주는 파트너인 인간들은 도리어 성장을 무서워하니 영화는 이런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디지몬"을 비롯하여 많은 만화들을 놓지 못했고, 이를 놓는다고 해서 성장할지는 모르지만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하는 대사와 장면임은 분명했습니다.
나오는 데 있어 <트라이>때문에 고생한 극장판이지만, 결과는 디지몬 최고의 극장판이라고 손색없을 만큼 잘 나와주어서 이렇게 헤어질 수 있어서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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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사분면 위의 점으로서
DIRECTOR. 산드라 코구트
CAST. 아드닐슨 페레이라, 에스텔라 마리아 드 올리비에라, 넬리 벨렘, 후테 사르디냐
SYNOPSIS. 2023년 1월 8일 의회·대법원 점거 사건과 대선을 앞둔 브라질의 격변의 몇 달을 담은 이 영화는 그 과정에 관련된 인물들을 통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 세계를 탐구한다.
국제무대에서 신흥 세력으로 평가받았던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 현장이 있다. 결과는 49.1%와 50.9%. 낙선된 후보는 현직 당선된 몸이었지만 "부정 선거가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선거 전부터 끈덕지게 폈다. 당선된 후보는 국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반대파들에게서 "저 도둑놈 구속해라!" 소리를 들었다. 그가 되면 "우리 나라 베네수엘라 된다"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복지만 바라고 그를 뽑는다며 "포퓰리즘"이라고 욕을 먹었다. 그 후보의 지지자들은 "도둑놈" 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 뒤에 "내 마음을 훔쳤다!"라는 멘트를 붙였고, 상대 후보가 당선되면 "독재 국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선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낙선 후보의 지지자들은 "부정 투표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주요 국가 기관을 습격하며 난동을 벌였다.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지만 우리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우리 나라 베네수엘라 된다" 같은 대사까지 겹쳤을 때는 실소가 조금 나왔지만.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왜 밑도 끝도 없이 우리와 지리적으로도 조건적으로도 비슷한 게 없는 베네수엘라를 들먹이나 했는데 저기서 배웠던 것일까 의문을 잠시 품었지만... 아무튼 정말 우리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브라질 대선의 기록>이다. 영어 원제는 "지금 이 순간 이 나라의 하늘에는(At this moment, in this nation's sky)"이다. 이 두 제목은 둘 다 탁월한데, 대선 캠페인에서 시작해서 실제 선거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를 담고, 선거 불과 몇 달 후 낙선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법원과 국회를 습격하는 장면까지를 보여준다. 당선된 룰라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 보우소나루의 당선을 위해 기도하던 지지자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1인칭 의견이 펼쳐지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영화 속 보우소나루 지지자 페레이라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서로 너무 달라서, 같은 나라에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역시나 익숙한 이야기다.
브라질 정치의 지형도를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위험해 보이는 순간들이 여러 번 포착된다. 반대파가 "폭죽을 쏘는 척 총을 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고 긴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 손을 맞잡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를 굳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더니 정작 결과가 나오니 "군부가 쿠데타라도 벌여야 나라가 산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육군 본부 앞을 찾아가 조국의 운명이 당신들에게 달렸다며 쿠데타를 벌이라고 농성 비슷한 것을 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으며, 우리 나라부터 남미까지 군부 쿠데타로 흘린 피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할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알고 보니 군인 출신인 보우소나루가 군부의 쿠데타를 옹호한 이력이 있었다.
이들이 지지한 후보 보우소나루는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고, 현직 대통령이 1회 연임할 수 있는 브라질 선거법 특성상 상당히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 다만 상대 후보가 전설적인 사람, 바로 그 룰라였다. 지식채널e 같은 곳에서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하는가"라는 명대사와 함께 성공적인 정책들로 놀라운 지지를 얻었던 그의 이야기를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고, 후임자와 관련해 여러 사법 스캔들에 얽매이긴 했으나 그 또한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면서, '사법 쿠데타'의 피해였다는 평가가 더 앞서는 상황이다.
군을 투입해서라도 룰라를 구속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라는 그 지지자들의 요구는 의아한 구석이 있다. 비슷한 생각을 우리 나라 네이버 댓글들을 볼 때마다 했다. 구속은 헌법이 규정한 권리의 제한이므로, 헌법 37조 2항에 따라 법률 요건에 의해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 경우에도 본질적인 부분은 제한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 70조는 구속의 사유를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 인멸 혹은 도주의 우려가 있을 때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기분 상해죄로 "구속하라!"를 외친다. 하도 구속 당한 사람이 많아서 별일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묻고 싶었다. 구속하라고, 군을 투입해서라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라고, 외치는 그 소리들이 무엇을 제한하라는 뜻인지를 생각해 보았나요. 그 제한이 과연 본인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자리에, 당신들이 원하는 가치들은 과연 당연히 지켜질 거라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도 안타까움이 인다. 그들 또한 혼란스럽다. 그들은 진심으로 부정 투표를 우려하고 있고, 이 문제가 '블랙박스'를 공개하면 해소될 일인데 왜 공개하지 않아서 의심을 사냐고 묻는다. 전자 투표기 안에 '블랙박스' 같은 건 없다는 말 앞에, "대체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누구누구 당선되면 우리 나라 망한다'고 걱정하며 태극기 뒤집어쓰고 집회에 나가시는 어르신들 또한, 진심으로 나라를 우려하고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이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두 집단 간의 대화가 너무 요원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같은 상황을 두고 해석이나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랐다면, 그래서 성장 중시vs분배 중시, 자유 중시vs복지 중시 등 교과서적으로 요약이 가능했다면, 이제는 그냥 상황을 팩트로 인식하는 내용 자체가 달라져 버리니 합리적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상대방의 말이 날조로 보이니까. 실제로 양쪽에서 하는 문장만 놓고 보면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졌나.
굳이 올해 전주에서 본 영화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지 않더라도, 전세계 정치 지형도를 봐도 이미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라가 많아 보인다. 왜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갈라치기로 손쉽게 표를 거두려던 정치인들과 이들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언론의 탓을 하고 싶은 동시에,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짓는 마음, 벽을 세우는 마음이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해결책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경청은 불가능해 보이긴 한다.
이 영화는 일련의 과정을 시간이라는 가로 축으로, 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세로 축으로 담아 좋은 사분면이 되어 준다. 도저히 남 일처럼 보이지만은 않는 브라질의 사분면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마음들에 더 공감이 가는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사분면 위에 어떤 점으로 위치하고 있는가. 다른 지점의 점으로 이어지려면 우리에게선 어떤 선이 뻗어 나가야 하는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4 13:0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423)
2025.05.06 14:00 CGV전주고사 1관 (상영코드 621)
2025.05.08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상영코드 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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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꼿꼿한 송혜교, 날아오른 임지연
* <더 글로리 파트1>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더 글로리 파트1 (2022)
감독: 안길호
극본: 김은숙
출연: 송혜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정성일, 박성훈, 차주영, 김히어라, 김건우 등
방영횟수: 8부작
장르: 범죄, 드라마
공개일: 2022.12.30
재벌 2세 후계자와 불우한 여고생의 사랑, 신부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소녀와 신적인 존재의 운명 같은 사랑, 갑자기 영혼이 뒤바뀐 스턴트맨과 기업 오너의 티격태격 로맨스, 목숨을 뛰어넘은 의사와 군인의 비현실적인 러브 스토리.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는 줄곧 이런 이야기들이었다. 언제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써 왔고, 클리셰 범벅인 구조를 말의 맛을 살린 대사로 매력적으로 구현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작품의 개연성이나 완성도와는 별개로 거의 모든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한 것을 보면,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히 보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정만화 같은 오그라드는 대사나 고루한 캐릭터 설정, 판타지 못지않은 비현실적인 전개 때문에 눈살을 찌푸린 적이 적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김은숙’ 작가의 작품을 빼놓지 않고 보는 이유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극을 보게 만드는 확실한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역시 대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스스로의 역량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고,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며 도전에 성공한 것은 물론, 작품성 면에서도 호평을 받는 성장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미스터 션샤인>은 ‘김은숙’ 작가가 틀에 박힌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만 쓸 수 있다는 편견을 깨부쉈지만 가장 최근작인 <더 킹: 영원의 군주>는 스타 작가 반열에 오른 후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았던 그에게 처음으로 뼈 아픈 작품이 되었다. <도깨비>와 <상속자들>로 이미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린 적 있던 톱스타 ‘이민호’와 ‘김고은’을 기용했음에도 화제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특히 극본에 대한 혹평이 자자했다.
한 번의 쓰디쓴 패착은 ‘김은숙’ 작가를 각성시켰다. 주특기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버리고 처음으로 장르물을 택한 그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독한 복수심을 품은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교훈과 인물들 간의 절절한 로맨스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게 해주었던 <미스터 션샤인>으로 한 번의 반전을 일으켰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스스로의 필력을 쇄신하는데 도전을 한 셈이었다. <태양의 후예>로 쌍방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던 ‘송혜교’를 다시 한 번 캐스팅 했고, ‘이도현’, ‘염혜란’, ‘임지연’, ‘박성훈’ 등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연기력을 인정 받은 배우들과 막강한 한 팀을 꾸렸다.
‘김은숙’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한 피카레스크 장르물 <더 글로리>는 그의 장단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인물들 간에 주고받는 티키타카와 언어유희를 활용한 대사, 그리고 극 자체의 재미는 국내에서 ‘김은숙’ 작가를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음에도 작가 특유의 장점은 그대로 묻어난다. <더 글로리>가 작품성 면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넷플릭스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 온갖 커뮤니티에서 드라마에 대한 언급이 수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술술 읽히는, 김은숙의 재밌는 각본은 이번에도 통했다는 방증이다. 본격적인 사건들의 실마리가 풀리기 직전인 8화를 기준으로 드라마를 두 파트로 나눈 것도 영리한 판단이었다. 8화까지 정주행을 빠르게 마친 시청자들은 3월까지 목이 빠져라 다음 파트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완성도 면에서 비판을 받는 부분은 복수극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너무나 순진하다는 것이다. <더 글로리>는 복수 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팽팽한 긴장감을 끌고 가야 하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동은(송혜교)’의 계획이 술술 풀리기만 하고, ‘연진(임지연)’과 그의 친구들은 맥 없이 당하기만 해서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평면적인 캐릭터 또한 지적되고 있는데, 피해자인 ‘동은’과 가해자인 ‘연진’ 무리가 분명한 선악 구도를 형성하면서 가해자들에게 일말의 동정의 여지나, 개별적인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고 재력과 사회적 명성을 갖췄음에도 ‘동은’의 복수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만을 나열했다는 것이다. 악인들의 무능함이 부각되다 보니 ‘동은’의 계획이 상대적으로 쉽게 실행되는 것처럼 보이고, 복수의 전면에 나서는 일이 많지 않아 쾌감 또한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와 같은 비판점이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깊게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피해자인 ‘동은’이 17년간 품고 살았던 복수의 칼날을 가감 없이 펼쳐 나가는 전개만으로도 카타르시스는 충분하다. 애초에 가해자들의 무능함을 떠나 20대와 30대를 바쳐 치밀한 계획을 세운 ‘동은’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로지 복수 하나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달려온 ‘동은’이 가해자들을 말려 죽이고자 마련한 수는 한둘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동은’의 복수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착착 이뤄지는 것은 개연성을 해치지 않는 전개일 것이다. 무엇보다 ‘연진’과 ‘재준’은 피해자인 ‘동은’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인간말종들이다. 이들은 십 수 년 전, 동급생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면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17년만에 재회한 ‘동은’은 그들에게 여전히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동은’이 복수심을 갖고 제멋대로 날뛴다 한들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기에 함께 힘을 합쳐 ‘동은’에게 맞서기는커녕 그룹 내에서의 분열만 일으킨 것이다. 8화의 엔딩 장면에서 ‘연진’이 ‘동은’이 살아온 흔적과 복수심의 크기를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가해자들이 전력을 다해 ‘동은’과 싸우는 것은 아마 2부의 핵심적인 스토리가 될 것이다. 따라서 1부만을 두고 관습적인 설정을 지적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더 글로리>가 복수극으로서의 쾌감은 물론 목표를 갖고 전력질주하는 주인공의 행동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력에 있다. 특히 주특기인 멜로 드라마 속 예쁜 캐릭터를 벗어나 남은 것은 독기 뿐인 학교폭력 피해자 ‘동은’으로 분한 ‘송혜교’는 연기 변신에 대한 꿈을 제대로 성취했다. 생명력을 완전히 잃은 듯한 눈빛, 복수심과 설움이 서려 있는 메마른 표정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하다. 특히 냉정을 잃지 않겠다는 차가움 속에서도 슬픔이 엿보이는 표정들은 ‘동은’이 오랜 세월 얼마나 고된 시간을 견뎌 왔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케 한다.
‘송혜교’가 묵직하게 극의 무게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악역을 맡은 배우들에게는 제대로 놀 수 있는 판이 깔아졌다. 데뷔 10년만에 첫 악역에 도전한 ‘임지연’은 극중 가장 눈부신 연기 성장을 보여준다. 그동안 왜 단 한 번도 악역을 맡지 않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악에 받힌 캐릭터를 자신만의 색깔로 완벽하게 해석하여 대중에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마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희대의 악인을 맡았음에도 ‘임지연’에 대한 호평이 연신 이어지는 것은 배우의 연기력이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귓가에 톡톡 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감정 변화에 따라 자유자재로 뒤바뀌는 표정,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에서의 위압감은 작중 최고의 연기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과거 그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며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서야 나도 그에 대해 오랫동안 갖고 있던 편견을 깰 수 있게 되었다.
복수극은 장르 특성상 강렬함을 선보이는 악역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이 조명 받기 쉬운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악역을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력은 대체로 뛰어나다. 특히 적은 분량이지만 ‘연진’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신예은’은 잔인한 학교폭력의 주동자가 되어 얼굴을 갈아 끼웠다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소름 돋는 연기를 선보여 극 초반부에 큰 임팩트를 남겼다. ‘임지연’이 첫 악역으로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남긴 것처럼 ‘신예은’도 처음으로 선역을 벗어나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릇된 신앙심과 폭력 사이에서 모순을 일삼는 마약 중독자 ‘이사라’로 분한 ‘김히어라’는 걸쭉한 욕설과 약쟁이 특유의 초점 없는 눈빛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재력을 갖춘 가해자들과 달리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자존심을 굽히고 근근이 살아가는 ‘최혜정’을 연기한 ‘차주영’은 주요 빌런들 중 가장 입체적인 연기를 선보여 배우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주말극 도련님 캐릭터를 완전히 떨쳐낸 ‘박성훈’, 외모적으로 가장 큰 폭의 변신을 시도한 ‘김건우’까지 하나같이 악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를 연기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매력적인 해석이 더해져 시청자들로 하여금 단순히 욕 하면서 보는 것을 넘어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매료되게끔 만든다.
배우들의 명연기로 인해 <더 글로리>는 하나의 성공적인 캐릭터 쇼가 되어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지만, ‘학교폭력’이라는 무거운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만큼 극에 내재된 주제의식에 좀 더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본작에는 학생들이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학교라는 공간의 사각지대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학교폭력을 고발하고자 하는 기획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며 피해자의 이야기를 통해 학교폭력의 잔혹성과 심각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목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중시 여겼던 부분이 ‘나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기조를 ‘동은’이 잃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당해 마땅한 피해자는 아무도 없으며, 가해자와 방관자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1화를 보고 시청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뜨거운 고데기로 ‘동은’의 신체를 지지는 잔인한 학교폭력 장면이 너무 자극적이면서도 보기 괴로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도 있고, 단순히 작품의 재미를 위해 폭력적인 장면을 플래시백으로 여러 차례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을 작품 흥행에 이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출 방식에 문제가 있었을 지는 몰라도 고데기 학폭 사건은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재이며 실제 현장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의 수위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더 글로리> 관련 영상 클립에서 댓글로 ‘김은숙’ 작가에게 학교폭력의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는 댓글을 단 학폭 피해자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더 글로리>의 학교폭력 연출 방식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제 학교폭력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끔찍한 폭력의 현장을 온전히 마주하여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학교폭력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극중 피해자에게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 시스템에 속한 교사, 학생, 학부모들은 학교폭력과 절대적으로 무관할 수 없는 대상인만큼 구조화된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느끼도록 만드는 게 중요할 것이다. 만일 <더 글로리>를 보며 불편함을 느끼는 ‘연진’과 ‘재준’ 같은 사람들이 몇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적어도 작품의 기획의도가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피해자를 기억조차 못하고, 본인이 가해자였던 사실조차 잊은 채 이 드라마를 그저 재밌게 보고 있는 가해자라면 ‘동은’의 표현을 빌려 한 마디 전해주고 싶다. ‘천천히 말라 죽어 보자. 사는 동안은 지옥일 테니까.’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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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키스, 마지막 키스
!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미나토와 요리. 2023년 개봉 직후부터 수많은 ‘괴친자’들을 양성한 영화 <괴물>의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신작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첫 번째 키스>. 이전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재밌게 본 관객이라면, 그가 다시 로맨스 영화로 돌아온다고 했을 때, 큰 설렘을 받았을 것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의 이야기에는 항상 사람을 가슴 뛰게 하는 ‘무언가’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무언가’를 찾아가보고자 한다.
감독) 츠카하라 아유코
주연) 마츠 다카코, 마츠무라 호쿠토
주인공 ‘칸나’는 어느 날 열차 사고로 남편인 ‘카케루’를 잃는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갖고 다시 업무에 들어간다. 운전을 하던 그녀는 어떤 터널을 지나게 되고, 그 끝에서 15년 전의 청년 ‘카케루’를 처음 만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황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만, 어쩌면 과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그 터널로 향한다. 그러곤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남편의 죽음을 막으려 한다.
시간을 건너
시간 여행을 뜻하는 라임 루프(time loof)는 여러 콘텐츠에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매우 익숙한 소재다. 특히 <너의 이름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같이 일본 콘텐츠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친숙함을 주는 동시에 뻔하다는 느낌 또한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작품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첫 번째 키스>는 뻔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과거를 바꾸고자하는 주인공의 서사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키스>의 특이점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첫 번째 키스
과거를 바꾸려는 칸나의 노력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다뤄진다. 그녀의 실패는 반복과 변형을 만들어낸다. 같은 장면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르며 정답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표 달성은 쉽지 않다. 결국 카케루가 칸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경우에 다다른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카케루. 그는 옆에 있는 15년 뒤의 칸나가 본인의 아내가 될 것이며, 이혼까지 하게 된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 내적 갈등을 안게 된 카케루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칸나는 그를 말리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곤 칸나와의 하루간의 데이트 끝에서 첫 번째 키스를 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 시간 여행과 같은 영화적 소재는 소재에 불과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로 귀결되는 메시지, ‘사랑’이다.
옥수수와 양말, 그리고 만두
이 영화의 특징이면서도 사카모토 유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아이템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랑과 같은 정신적 가치는 사람 주변에 묻어난다고 믿는듯하다. 함께 구워먹은 옥수수에는 껍질 채 구워야 더 맛있다는 칸나의 조언이 들어있다. 바꿔 신은 양말에는 같이 살아온 그들의 시간이 들어있다. 미리 주문한 만두에는 배우자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랑의 증거가 들어있다. 결국 일상의 작은 것들에서 우리는 보다 소중한 것들을 발견해낼 수 있다.
마지막 키스
무언가의 부재는 마음을 공허하게 만든다. 사라진 것의 크기만큼 내 몸속에서도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그 공간을 채우는 과정은 쉽지 않다. 특히 시간이 관여한 경우가 그러하다. 우리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함 사이에서 쉽게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만큼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카케루가 죽은 그날, 칸나는 몹시 흔들렸을 것이다. 후회와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여 그녀를 잠식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과거의 카케루를 만난다. 그리고 과거를 바꾸려하지만 실패한다. 그 순간 그녀는 큰 절망감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때 그녀를 잡아준 것은 카케루였다. 미래를 알고도 바꾸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 그리고 15년 뒤 그가 칸나에게 남긴 편지. 그것이 칸나를 쓰러지지 않게 잡아준다. 칸나는 카케루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카케루와의 키스는 그의 첫 번째 키스이자 자신의 마지막 키스였다는 것을, 과거로의 짧은 여행은 첫 인사가 아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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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스타일의 리메이크 / 말할 수 없는 비밀 / 판타지 로맨스 멜로 / 도경수, 원진아 주연 / 행복한 잔상의 수작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말할 수 없는 비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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