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2-02 19:04:03
모아나 2 |뻔한 레시피, 쉬운 재료, 평범한 플레이팅
<모아나 2>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섬에 사는 부족들을 찾기 위해 꾸준히 항해에 나서던 '모아나'(아울리이 크러발리오). 그녀는 전설적인 항해자이자 길잡이를 뜻하는 '타우타이' 칭호를 받은 직후 고대의 조상이 등장하는 환영을 본다.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지우고자 하는 폭풍의 신 '날로'(토피카 페푸리이)가 숨긴 섬, '모투페투'를 찾아내어 바닷길을 열지 못하면 모아나의 부족이 고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지를 받은 것.
이에 모아나는 발명가 '로토'(로즈 마타페오), 농부 '켈레'(데이비드 페인), 이야기꾼 '모니'(후알랄라이 청)와 함께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모아나 일행은 날로가 보낸 괴물들을 만나 위기에 처하고, 그녀는 타우타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 앞에 오랜 파트너이자 반신반인 영웅 '마우이'(드웨인 존슨)가 나타나고, 그의 격려에 힘입어 모아나는 다시 한번 모투페투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6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모아나>. <모아나>의 매력은 신선함이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폴리네시아 신화는 이전까지의 디즈니 작품에서 보지 못한 볼거리였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생산 업무에 직접 관여하는 여자 주인공의 등장도 파격적이었다. <겨울왕국>의 엘사, 안나 자매만 해도 전통적인 공주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으니까.
반면에 8년 만에 돌아온 속편 <모아나 2>는 기대보다 걱정이 컸다. 개봉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디즈니의 2024년 1분기 실적 보고회에서 TV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중이던 속편이 돌연히 극장용으로 전환되었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 전편의 OST를 맡았고, 현재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곡가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뉴스도 불안감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모아나 2>는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말았다. 전편을 답습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얼개와 스토리, 고막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OST는 본래 TV용 작품이었던 초안의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흥미로운 특이점은 있지만, 그조차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징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결국 <모아나 2>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스트레인지 월드>와 <위시>로 이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부진을 끊어내지 못했다.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담은 환상
개봉 전에 <모아나 2>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을 하나만 꼽자면 카누를 타고 망망대해를 시원하게 가르는 모아나와 독수리로 변신해 그 위를 날아가는 마우이의 투샷일 것이다. 그런데 <모아나 2>는 이 장면에 예상치 못한, 하지만 디즈니라서 자연스러운 함의를 불어넣었다. 폭풍의 신 날로의 방해를 뚫고 모투페투 섬을 찾아서 자유로운 바닷길을 열어야 하는 모아나의 항해가 '항행의 자유 작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전한 후 지금까지도 미 해군은 서방 진영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다. 국가 간 무역을 활성화해 시장 경제를 키우며 자국 중심 질서를 정립한 것. 근래 중국처럼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나타나면 군사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를 고려하면 <모아나 2>는 놀라울 만큼 현실적인 작품이다. 모아나는 미 해군, 마우이와 동료들은 미국의 동맹국, 날로 신은 중국처럼 항행의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에 정확히 대응되기 때문.
물론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 해석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바닷길의 중요성은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며, 바다를 통한 소통과 교류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핵심 원동력이었으니까. 명나라가 정화의 원정 이후 돌연 바닷길을 포기한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의 국력을 추월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따라서 바닷길을 끊어서 인간 세계를 암흑 속에 빠트리려는 날로의 존재는 인류 문명 공통의 공포이자 두려움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모아나 2>는 어디까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디즈니는 대공황 이후부터 미국 사회가 추구하고 유지할 가치와 윤리를 충족시키는 환상 속에서 재미와 쾌감을 추구한 스튜디오였으니까. 자연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렇기에 <모아나 2>가 보여주는 모험과 항해를 미국 중심적 시각에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신화로 가린 이데올로기
다만 미국 패권에 대한 은유는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모아나 2>가 전편의 미덕을 본받아 인간 영웅이라는 신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대다수 신화는 초자연적 존재를 조력자나 대적자로, 인간 영웅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공통의 작법을 공유한다. 대체로 신적 존재는 아무리 강해도 여러 제약이 있다. 그렇기에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만이 신과 인간 세계 양쪽을 넘나들면서 모험을 펼치고, 운명을 성취한다.
<모아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다'와 같은 강대한 존재도 세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모아나를 영웅으로 낙점하고, 그녀가 좌절하거나 포기하려 할 때마다 간접적으로 도울 뿐이었다. 남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이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영웅, 마우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우도록 난파된 모아나의 배를 그의 섬으로 이끌어주는 식이었다. 모험을 계속할지 말 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아나의 몫이었다.
<모아나 2>도 마찬가지다. 전편이 반신반인이 아닌 인간의 모험이라는 콘셉트를 제시했다면, 속편은 이를 구체화한다. 날로와 전투를 펼치는 클리아맥스가 대표적이다.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가운데, 모아나는 자신과 마우이의 역할을 바꾼다. 날로가 능력이 더 뛰어난 반신이 아니라 오직 인간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 이는 뻔할 수 있었던 후반부를 변주시키며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아는 맛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안타깝게도 <모아나 2>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우선 전반적인 스토리라인은 전편을 답습했다. 고향 모투누이 섬에 위기가 닥치는 환영을 본 모아나. 선조들이 발견하지 못한 전설 속의 섬을 찾아내지 못하면 부족 사람들이 모투누이에서 고립된 채 고사할 것이라는 예지를 받자 그녀는 다시 한번 항해에 나선다. 이는 모투누이에 찾아온 재앙을 풀기 위해 항해를 떠난 전편과 다를 게 없다.
발단 이후의 전개도 전편과 거의 동일하다. 서로 떨어져 있던 모아나와 마우이는 항해 도중에 합류해서 다시금 한 팀을 이룬다. 최종 빌런을 마주하기 전에 한 차례 실패를 겪는 것도, 좌절한 일방을 다른 일방이 위로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유사하다. 단지 전편에서는 모아나가 마우이를, 속편에서는 마우이가 모아나를 일으켜 주는 게 다를 뿐이다.
물론 기시감을 옅게 만들려는 시도는 있다. 돼지 '푸아'와 닭 '헤이헤이'에 더해 모아나의 여동생 '시메아', 동료 선원 모니와 로토 등에게 적잖은 분량을 부여하고, OST에서도 로토에게 래퍼 역할을 맡기는 식이다. 하지만 이 선택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모아나와 마우이의 분량이 줄면서 도리어 그들의 캐릭터성이 평면적으로 변한다. 일례로 전설적인 길잡이의 칭호까지 받은 모아나의 내적 갈등은 스케치 수준으로 스쳐 지나간다.
귀가 허전해
마지막으로는 음악의 쾌감도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 더 이상의 검증이 불필요한 린 마누엘 미란다의 공백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그는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로 결심을 굳힐 때 부르는 노래인 'How Far I'll Go'를 작사, 작곡하면서 <모아나>의 흥행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바 있었다. 엘사가 부른 'Let It Go'가 <겨울왕국>을 상징하듯이, 'How Far I'll Go' <모아나>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으니까.
린 마누엘 미란다가 제작에 불참한 <모아나 2>는 'How Far I'll Go'와 같이 뇌리에 각인될 만한 OST를 들려주지 못했다.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Beyond'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지만, 이전 곡과 같은 임팩트를 주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물론 노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편에서 모아나가 항해에 나서기까지 겪은 역경만큼 극적인 전개를 속편이 고안해내지 못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귀가 허전한 아쉬움을 비주얼로 만회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맥스 전투 시퀀스는 확실히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모아나의 카누가 거대한 파도를 빗겨 타는 순간을 4d로 본다면 마치 서핑을 하는 듯한 쾌감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음악의 아쉬움을 온전히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클라이맥스 외의 장면에서는 특별히 놀랄 만한 장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모아나 2>는 쿠키 영상에서 예고하는 3편을 위한 징검다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듯 싶다. 그와 동시에 과연 <모아나 2>가 징검다리 역할을 온전히 해냈는지는 끝나는 순간까지도 의문이다. 세 번째 애니메이션보다는 약 1년 반 뒤에 개봉할 <모아나> 실사 영화가 더 궁금해지니까.
Acceptable 무난함
디즈니가 디즈니한 무색무취한 속편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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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른 안드레센의 삶의 이면,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다
배우, 비에른 안드레센.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주연 배우로 유명한 배우이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 밖에 안드는 외모로, 그는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런 그의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통해 그에게 붙은 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그러나 그의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런 그를 응시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영화의 제목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은 당시 베니스에서의 죽음 영화에서의 유명세로 붙은 별명이다.
다만 이 다큐를 통해 비에른 안드레센 배우에게 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 이라는 별명은 정말 평생을 따라다는 별명이자 낙인이었다는 생각이 들게한다.
어린 나이에 얻은 인기다 보니 당연히 좋은 의도만으로 접근하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이 잡혔지만, 정말 어린 나이에 아동학대급으로 방송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비에른 안드레센의 가정사도 가슴 아프게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에른 안드레센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다큐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지금의 안드레센 배우가 바닷가에서 번갈아서 보여지는 후반부 장면은 정말 인상깊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비에른 안드레센 배우에 관심이 있다면 강력히 추천하는 영화.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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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보라
-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들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진정으로 선하다고 믿어". 이 말들은 우리에게 '모종의 영감'을 주는데, 그건 그 말들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린다는 뜻이다. 이 말들은 살해된 소녀들의 시체가 수북하게 쌓이는 걸 용납하는 우리 문명의 타락에 대해 용서받은 기분이 되게 해준다. 그리고 만약 그 말들이 살해된 소녀에게서 나왔다면, 글쎄, 그렇다면 그 말들은 틀림없이 진실일 테니 우리는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게 틀림없다. 살해된 유대인이 내려주는 그런 은총과 사면이라는 선물이야말로(정확히 기독교 사상의 핵심에 자리 잡은 선물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안네의 은신처에서, 그가 쓴 글에서, 그가 남긴 '유산'에서 너무도 간절히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죄 없는 죽은 소녀가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었다고 믿는 것이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훨씬 만족스러운 일이다. 안네가 '내면이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에 관해 쓴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기 전이었다. 그 문장을 쓰고 3주 뒤, 그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어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유대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여주는 사실이 여기 있다. 그 사람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사실은 안네 프랑크의 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해 말할 가치가 있다. 그의 일기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가 집단 학살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것이 그의 일기가 집단 학살에 관해 쓴 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만약 그런 작품이었다면 그 일기는 전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쓴 글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 가운데 어떤 것도 안네의 일기가 얻은 명성 같은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런 무언가에 가까이 갔던 기록들은 오직 은폐라는 똑같은 규칙, 자신을 박해한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예의 바른 피해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규칙을 준수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었다.이디시어판은 <나이트>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자들에 대한 그리고 제목이 암시하듯 무관심으로(혹은 적극적인 혐오로) 그런 살해를 가능하게 했던 세상 전체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위젤은 후에 프랑스인이자 가톨릭 신자이며 노벨 상 수상자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도움을 받아 '나이트 La Nuit’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프랑스어판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젊은 생존자의 분노를 신학적 고뇌로 전환한 작품이었다. 어쨌든 자신이 속한 사회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떤 독자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신을 비난하는 것이 낫다. 이런 접근법은 위젤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에 이 책이 미국이 베푸는 호의의 전형인 오프라 북클럽 선정작이 되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접근법도 일본의 십 대 소녀들이 안네의 일기를 읽었듯 이 책을 읽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려면 위젠은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은폐해야 했을 것이다.<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주의: 참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현시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영화라기엔 너무 참여-미디어 아트의 영역으로 나아가 버린 것도 같다. 대부분의 글로벌 관객들에겐 영화보다도 먼저 사회적 책무를 인지하고 유의하는 행동주의 예술가의 수상 소감 영상이 전해져왔다.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오스카에서 유대계 정체성(Jewishness)과 홀로코스트를 또다른 전쟁/학살을 위해 오용하지 말 것을 촉구한 후, 곧장 전세계 시오니스트의 돌을 맞는다. 그 자신 역시 유대계이면서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정면으로 반대한 그가 손을 덜덜 떨며 준비해온 ‘선언’을 수행할 때 우리는 일종의 경외를 느낀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가 선 곳에 가장 먼저 균열을 내며 우리 인간의 자격을 되묻는 모습. 그렇듯 순교를 불사한 지성인의 결기는 어떤 이에게나 강렬한 전율로 다가오니까.
한편 미디어 아트로서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도 흥미로운데, 우선 이 영화가 전시하는 풍광은 오프닝부터 경박하리만큼 경쾌하고 그늘 없다. 르누아르의 사랑 넘치는 가족 연작을 떠올리게 할 만큼 밝은 햇볕 속, 떼죽음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며 안전한 부귀를 누리는 가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는 ‘건전한 수용소 미관 조성’을 위해 라일락 관목을 꺾지 말라고 엄숙하게 공지 방송을 하고, 아이들은 곧 도살될 유대인들처럼 아버지 루돌프의 눈을 가리고 그를 정원으로 데려가 깜짝 생일 파티를 선물한다. 어머니 헤트비히가 정성껏 돌보는 아름다운 정원과 윤기 나는 검은 개와 건강한 5남매까지, 완벽한 소품을 둔 듯 잘 가꿔진 이 삶이 평범할수록 도리어 벽 너머의 - 어쩌면 이미 삶이 아닐 - 삶(들)에 대한 암시가 숨을 죄여온다.
헤트비히를 포함한 장병 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머리 하나는 대단한’ 유대계 희생자들을 비웃고, 그들로부터 갈취한 밍크 코트와 보석들을 두르고 힘을 과시하지만 이 과시는 절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다. 다른 부인의 거대한 코트를 두고 다른 여자들과 “여제 같다”며 부러워하고 비꼬았던 헤트비히는 강아지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은 문 안에서 제게 떨어진 코트를 몰래 입어보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값비싸고 보드라운 코트는 헤트비히가 평소에 입던 평범한 원피스에 비해 너무나 어울리지 않고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또 헤트비히는 코트 주머니 안에서 나온 립스틱 -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는 살아 있었던 누군가의 소유임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끔찍한 소품 -을 발라봤다가 이내 쓱쓱 문질러 지워버린다.
이 은근함, 이 비밀스러움은 회스 부부를 포함한 독일인 전범 가족들이 그 시점 도달한 삶이 절대 처음부터 그들 소유가 아니었단 사실을 제시한다. 그들이 부유했었고 똑똑했던 유대인들을 멸시하거나, 장모가 과거의 유대인 고용주를 떠올리고 “그 여자도 지금 저기 있으려나?” 상상하며 어딘지 고소해하는 듯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이전에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갖고 있었던 이들에 대한 질시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상위 계층을 ‘몰아냄’으로써 계급 이동에 성공한 하위 계층의 승리감, 도취감 내지는 자족과 뿌듯함이 이들의 얼굴에 부드럽게 퍼져있는 것이다.
“그이는 저보고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래요”라며 수줍은 듯 의기양양한 듯 말하는 헤트비히, ‘불합리한’ 전출에 항의하다가 결국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게 삶이란다”라고 애마에게 말하는 루돌프. 우습고 불쾌한 기분이 정점을 찍는 것은 부부가 강가에 서서 발령 소식에 대해 논의하는 씬에서다.
난 죽어도 여기 안 떠나.우리가 열일곱 살 때부터 꿈꿔온 삶이잖아.총통도 그렇게 연설하셨잖아.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으라고.즉 헤트비히와 루돌프는 “그동안 꿈꿔왔던 삶”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들여왔으며 그 삶을 ‘부당하게’ 뺏기지 않기 위해 더한 노력도 불사할 거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노력이란 건 물론 유대인들을 고문하고 죽이고 탈취하고 강간하는 일에 일조하거나 “태우고, 식히고, 비우고, 채우고”의 반복을 직접 설계하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돌프의 ‘일’은 사람을 분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일정하게 먼 거리에 고정된 다중 시점의 카메라를 통해서만 그려지고 있는데, 헤트비히가 일궈온 꽃밭과 온실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손만 까딱하면 네 명의 하녀들이 벌벌 떨며 궂은 일을 대신해주고 전시 중에도 케이크와 비싼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벽 뒤에서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게 죽든 나머지 가족들이 알게 뭐란 말인가.
“초콜릿 같은 거 있으면 꼭 챙겨줘”라며 남편에게 당부하는 씬을 통해 공범임을 입증한 헤트비히의 몸과 움직임은 ‘어쩔 수 없이’ 루돌프의 그것에 비해 비인간성의 일상화에 더 깊게 일조한다. 루돌프는 수용소장이고 헤트비히는 그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사람을 죽이고 처리하는 효율적 프로세스를 직접 설계하는 자고 헤트비히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 그럼으로써 당시에 침묵하거나 적극 가담한 일반적인 독일인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돌프가 참석한 나치 장교들의 회의보다도 헤트비히의 신경질적 짜증이 극 전반에 긴장감 도는 중력을 더한다. 그는 결코 상냥하거나 일관된 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제 기분이 상하면 “너 하나쯤 재로 만드는 거야 일도 아니”라며 하녀를 위협하는 여주인이다. 무의식적인 듯해서 더 공포스러운 무시. 힘을 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고 뒤따르는 책임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갑자기 쥐어진 타인의 생사여탈권. 성실한 군인이고 좋은 아버지였던 루돌프가 창녀를 사는 위선이나, 헤트비히가 남편보다 집을 선택하는 자기중심성은 그래서 놀랍지도 기이하지도 않다.
상실 없는 상실과 공포 없는 공포, 무게감 없는 무게를 전달하는 작품을 ‘보며’ 관객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는지를 계속 의식하게 된다. 벽 뒤에서 무언가 가동되는 소리. 간헐적인 총소리와 희미한 통곡과 비명 소리. 게르만 아기의 울음과 유대인 아기의 울음은 기묘하게 뒤섞이고 개들은 담장 안팎에서 하울링을 주고받는다. 헤트비히의 어머니처럼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이 모든 불길한 소리를 못 견뎌 말없이 떠나버릴 정도지만, 내부인들은 백색소음 정도로 치부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우리 눈에 푹푹 박혀오는 풀꽃의 선명한 빛깔, 새빨갛고 예쁜 수영복과 희디흰 게르만족 피부의 조화, 맑은 강물 앞 단란한 가족이 노니는 풍경이란 얼마나 아름답게 다가왔을 것인가.
눈과 귀의 기이한 간격을 최대한으로 유지하며, 눈을 극적으로 속이고, 클로즈업 없는 원경으로 눈이 해석하는 정보값을 어긋나게 하길 의도하던 영화는 돌연 마지막 5분간 오류 없이 명확한 장면을 송출하니, 바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관을 열심히 쓸고 닦는 현대의 풍경이다. 80년의 간극을 뛰어넘게 해줄 통로는 암전 속 빛이 새어 들어오는 좁은 바늘구멍이다. 이는 원시적인 카메라를 즉각 은유한다.
루돌프 회스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돌연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찍는 카메라를 직시하고, 블랙박스가 ‘보여준’ 미래를 감지한다. 이 응시는 영적이고 마술적이다. 루돌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역시 루돌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그날 밤 자기 공적을 치하하는 파티에서마저 ‘이 사람들을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전화 너머 헤트비히에게 즐거이 말한다. 즉 그는 ”당신은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필사의 합리화로도 보호받지 못할 괴물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구타로 앙갚음당하고 결국 교수형을 당할 자신의 운명을, 악인 하나를 징벌하는 것으론 복구되지 않을 수십만의 생명을, 시원하게 토해내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죄악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짊어진다.
드문 고요 속 루돌프는 계단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아우슈비츠의 집에서 온 방 불을 끄고 문을 잠그며 침실로 올라갈 때와 같은 속도로.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의 우릴 반성하고 직면하기 위해 이루어집니다.'그때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보라'.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걸 보여줍니다.조나단 글레이저
그때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과, 지금 여기에서 내 눈앞이 아닌 곳에서 담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다고 말할 사람들.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다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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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2021)
* 이 리뷰는 영화 <미나리>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6개 부문 노미네이션, <미나리>
지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나리>는 오늘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에서도 외국어영화상과 아역배우상 총 2관왕을 차지하며 오스카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공개날 여우조연상,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하여 6개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며 오스카 수상이 허황된 꿈이 아니었음을 보란듯이 증명해주었다. 연초부터 각종 비평가상과 영화제 수상을 휩쓸고 있는 화제작 <미나리>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한인 가정
1980년대, 미국 아칸소 농장의 트레일러로 이사를 온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부부의 자녀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빗(앨런 킴)' 가족은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낡은 트레일러 집 대신 농사 지을 땅을 산 제이콥은 가장으로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있지만, 안정적인 주거생활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 탓에 모니카는 앞으로의 현실이 막막하기만 하다. 하루는 집이 토네이도의 위협을 받아 모니카가 큰 불안을 느끼게 되고, 제이콥과 크게 부부싸움을 벌인 끝에 손자들을 돌봐주고 모니카에게 안정을 가져다줄 외할머니 '순자(윤여정)'을 아칸소로 모셔오기로 결정한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의 삶이 더 익숙한 데이빗은 할머니와 잦은 갈등을 빗게 되고, 이웃 '폴'과 단둘이 농사를 짓는 제이콥의 수확도 녹록지 않다. 데이빗과 순자의 관계가 좋아질 무렵, 순자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고 모니카가 견뎌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다. 제이콥은 끝내 수확에 성공하지만, 제이콥의 농사, 데이빗의 심장병, 아이들의 양육, 어머니의 부양에 완전히 지쳐버린 모니카는 현실의 한계를 느끼고 제이콥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가족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게 되는데...
예상 가능한 플롯, 큰 재미는 없다
개인적으로 <미나리>라는 작품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 실적이 워낙 좋기도 했고, 극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감상한 결과 생각만큼 인상이 진한 영화는 아니었다. 1980년대 미국의 한인 이민자 가정에서 발생하는 가족 간의 갈등, 낯선 곳에서 새 출발을 한다는 불안 등을 표현한 여타 비슷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작품들과 뚜렷한 차별점이 없었다. 드라이하게 가슴을 울린 좋은 영화임은 인정하지만, 이렇게까지 극찬을 받을만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미나리>에게 이어진 극찬들은 주로 해외 시상식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한인 이민자 가정을 바라보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관점 차이에 따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움의 미학, 클리셰 탈피
<미나리>는 한국인 배우들이 출연하고, 한국어로 대사를 치지만 엄연히 미국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굉장히 한국적이지만, 그 스토리의 구조와 촬영 기법, 연출 방식은 상당히 미국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는 굉장히 기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내용을 갖고도 영화가 진부하지 않게 보일 수 있던 이유는 작품이 추구하는 방향이 절제와 비움이었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한국 가족영화 특유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데, 이 부분이 바로 영화가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미나리>가 한국감독이 연출한 국내 영화였더라면, 뇌졸증에 걸린 '순자'의 죽음과 같은 신파적인 소재로 가족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성장을 이끌어내는 플롯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이삭 감독'이 만든 <미나리>는 할머니 캐릭터를 억지 눈물 짜내기 포지션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감동을 강제하지 않는데도, 드라이한 여운을 이끌어내고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물 간의 갈등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나리>의 극중 배경인 1980년대는 동양인에 대한 백인들의 원색적인 차별이 만연했던 시기다. 따라서 극에 제이콥의 가족을 괴롭히거나 인종차별적 행동을 가감없이 펼쳐줄 인물이 등장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미나리>는 그러한 진부한 설정을 따르지 않는다. 교회에서 만난 백인들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적응을 못하는 모니카에게 친절을 베풀고, 데이빗이 새로 사귄 백인 친구 역시 처음에 호기심 때문에 차별적인 언행을 했을 뿐 후에 친구로 함께 잘 지낸다. 즉, 제이콥의 가족을 제외한 인물 중 악인이라 칭할 법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서 쓸데없는 갈등 비중을 모두 배제하고, 오로지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 속 이방인들이 겪는 내적 갈등에만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굉장히 사소한 설정 차이일 수 있지만, 이러한 미세한 부분에서 극의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윤여정의 순자, 그녀에게 열광하는 이유
<미나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존재는 감독도, 영화도, 젊은 배우들도 아닌 배우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주인공들의 어머니이자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하며 미국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K-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캐릭터가 해외에서는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사실 한국 드라마를 수백 편 봐 오고, 윤여정 배우가 등장한 수십 편의 작품들을 봐 온 시청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순자' 캐릭터에 왜 이렇게 이목이 쏠리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미나리>가 제작된 미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분명 우리가 보는 시선과 달리 보게 될 지점들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순자'는 전형적인 할머니상에서 탈피한 인물이다. 데이빗이 불평하는 것처럼 손자들에게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고,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책을 읽어주고,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일반적인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순자는 요리도 못하고, 손자들과 함께 화투를 즐기고, 교회에서 십일조를 훔치는 등 일명 날라리 할머니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자가 나쁜 할머니일까? 순자는 자신의 성격과 방식대로 힘든 처지에 있는 모니카의 가족을 위로하고, 자신과 끊임없이 갈등을 벌이는 손자 데이빗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이러한 뻔하지 않은 할머니의 캐릭터가 '윤여정'이라는 개성적인 연기파 배우와 만나게 되면서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순자'라는 인물을 그려낼 수 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수의 해외 영화제 여우조연상을 휩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극의 중심이 되어주는 할머니
극의 중후반부까지 활약을 하다가 뇌졸증을 앓게 된다는 설정으로 비중이 작아지긴 하지만, 순자라는 인물은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다. 죽음으로서 가족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신파적 장치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차별화가 되기는 했지만, 순자의 역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순자는 우선적으로 모니카와 제이콥의 관계를 원만하게 중재해주는 인물이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쳤을 때, 부부싸움의 언성이 최고조에 달하며 관계가 험악해졌지만 순자가 등장하면서 부부관계는 차츰 완화된다. 순자는 모니카 부부뿐 아니라 손주인 앤과 데이빗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창고에 화재를 일으키고 망연자실한 채 허허벌판으로 걸어가던 순자를 잡기 위해 아픈 심장을 뒤로 하고 용기를 내어 뛰는 데이빗은 극 초반의 말 안 듣는 철부지 손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아픈 심장 때문에 일찍 죽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데이빗에게 따스한 품을 빌려주며 희망을 불어넣어준 할머니로 인해 그가 조금은 변화하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순자의 영향력은 극의 결말부까지도 발휘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탓에 쓰레기를 태우다 화재를 일으킨 사건은 제이콥의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작물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대형사고였다. 하지만, 결별을 이야기할 정도로 파국의 단계에 들어섰던 제이콥과 모니카는 오히려 이 대형사고를 계기로 다시 뭉친다. 농사로 꿈을 이루겠다는 제이콥의 막연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모니카의 마음은 더욱 커지고 이는 곧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계기로 작용한다. 즉, 가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믿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준 셈이다.
한예리의 돋보이는 존재감
순자가 극 안에서 내용의 중심을 잡아준 캐릭터였다면, 모니카 역을 맡은 배우 '한예리'는 극중 미국인에도, 한국인에도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섞여들지 못한 인물을 연기하며 극의 경계선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준다. 즉, <미나리>는 엄연한 미국영화이지만, 한예리가 등장함으로써 이 작품이 완전히 미국영화로 보이지 않게끔 만들어준다. 미국인 감독이 만든 미국영화이지만, 한국인 배우가 등장하고, 한국인 가정의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미국의 가족영화가 되는 것을 한예리가 끊임없이 경계해주는 셈이다.
적당한 만족감, 어쩔 수 없는 아쉬움
<미나리>는 그 어떠한 갈등이나 주된 사건전개보다 미국이라는 낯선 공간이 가져다주는 큰 불안과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방인들의 내적 갈등이 가장 큰 중심 소재다. 이러한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모니카다. 극 후반부 제이콥에게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한계와 울분을 표출하는 한예리의 연기는 모니카라는 인물이 견뎠을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를 충분히 드러낸다. 많은 이들이 윤여정이나 아역배우에 연기에 좀 더 포커스를 두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예리의 존재감이 가장 빛났다고 느낀다.
<미나리>는 한 이민자 가정의 삶이라는 굉장히 사소해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지만, 영화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면 분명 잘 만든 영화다. 비슷한 플롯의 작품들을 답습하지도 않았고, 한국영화와 미국영화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오묘한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담아냈으며 배우들의 연기 또한 훌륭하다. 하지만, 현재 <미나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극찬들에 진정으로 부합되는지는 영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영화 감상을 마쳤을 때, '정말 잘 만든 영화다'라는 생각보다 '이렇게까지 극찬 받을 영화인가?'라는 생각이 앞섰다는 것은, <미나리>가 준수한 작품 이상의 무언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부한 노선을 탈피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신선함을 더하지는 못했다. 인물들의 행동이나 성격, 이민자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모든 게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이하다는 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미나리>에게 걸었던 기대가 드라이한 만족 정도였을까. 호평일색인 평가들이 왠지 조금은 과하게 느껴진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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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겐 아니야, 굿모닝 에브리원
희망이라는 씨앗이 절망의 땅에 심어질때.
그렇지 않은듯 하다가 희망이 스며들어 변화의 땅을 일궈낸다.
'데이브레이크'는 저와 같아요
가능성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하죠
아무도 안된다고 끊임없이 절망으로 뒤덮일때도,
끊임없이 가능성을 믿어주며 자신을 희망의 길로 올려놓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 있던 마이크가 전혀 다른 행동을 했을때도 마이크와 칼린 사이에서 등이 터졌을때도 변함없이 웃고 또 올라오죠.
마이크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렵고 비참한 일이였을텐데 베키를 위해 요리를 하며 "계란이 뽀송뽀송하죠" 모습은 웃음을 짓게 했습니다.
베키 풀러의 그 웃는 모습과 활발한 모습들은 힘든 이 시기에 위로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보다 베키풀러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더 좋았던 영화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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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롭게 몰아치는 진실에 묶인 두 개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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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네임 (MY NAME, 2021)
개봉일 : 2021.10.15. (넷플릭스 공개)
감독 : 김진민
출연 : 한소희, 박희순, 안보현, 김상호, 이혁주, 장률
날카롭게 몰아치는 진실에 묶인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신분, 그리고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두 개의 이야기와 하나의 진실. <마이 네임>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려 조직과 경찰에 숨어들어간 주인공 윤지우의 복수극이다. 시즌 1, 총 8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편당 러닝타임은 50분 후반대. 연속 감상의 피로를 감수한다면 주말 하루 정도 투자로 충분히 볼 수 있는 러닝타임이다.
<마이 네임>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누아르 장르에 흔치않은 여성 주인공의 등장과 <인간수업>으로 긴밀한 감정선 연출을 보여준 김진민 감독의 차기작이란 타이틀, <알고 있지만>, <부부의 세계>로 주목받은 한소희 배우의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앞서 공개된 한국의 넷플릭스 콘텐츠 <오징어 게임>의 흥행, 부국제를 통한 선공개 등 여러 이슈들을 끌어모으며 “과연 이번 콘텐츠는 얼마나 흥행할까?” 하는 궁금증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사실 많이 기대했기에 이 시리즈가 내 기대치를 100% 충족해 줬다곤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분명 뒤가 궁금했고, 보고 싶긴 했지만, 조금 피곤했다. 컨디션 상 하루에 몰아보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해 금, 토, 일요일까지 나눠서 감상했음에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만큼 잔인한 장면들이 꽤 있어서 그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는 느낌이었다. 피 그만.. 칼 그만.. 멈춰..!를 외치고 싶었는데 멈추면 진행이 안되는 이야기였던 게 아쉬웠다. 하지만 액션 스쿨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다던 배우님들의 말이 진심으로 훅- 다가올 만큼 엄청난 양과 부담스럽지 않게 적절한 거리를 지키는 액션 신들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이긴 했다. 조-금 잔인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컨디션의 문제일수도 모르니 다음에 보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아쉬움으론 이야기의 주인공 지우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큰 역할을 할 거라 예상했던 인물은 정말 힌트만 주고 내려앉았고, 변화를 야기한 인물은 끝장으로 향하는 계기로 정리되고, 수상하다 싶었던 인물은 잠잠히 있다가 한순간에 폭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우와 주변 인물들의 감정이 쌓일 틈은 있었으나 각자의 깊은 곳을 볼 틈 없이 빠르게 몰아친 전개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장점이 됨과 동시에 아쉬운 점이 되기도 했다. 이 시리즈 자체가 지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이 조금 무력하거나 평이하게 그려진듯해 아쉬웠다.
여성 주연의 누아르라는 새로운 시도와 복수극이라는 익숙한 소재, 그리고 외부의 영향을 덜 받는 넷플릭스라는 매체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보여줄 거 다 보여주는 액션을 한곳에 섞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제격이었지만 바로 재주행할만하진 않았다. 피곤하다.. 특히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시청을 고려해 보시길.
<마이 네임>은 제목처럼 내 이름, 즉 자아와 이 이름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경찰에게 쫓기고 있던 아버지가 자신의 눈앞에서 정체 모를 인물에게 살해당한 최악의 생일날, 지우의 인생은 달라진다. 이름도, 인생의 목표도, 달려갈 길도. 모두 달라진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아 내 손으로 죽이는 것. 지우는 아버지의 손에 쥐어져있던 부러진 열쇠를 그러쥐고 진실을 파헤쳐 줄 진짜 열쇠를 찾기 위해 새로운 인생에 뛰어든다. 어차피 홀로 남은 후로는 항상 막다른 길에 서있는 느낌이었으니.
지우는 마음 둘 곳, 믿을 곳 하나 없는 조직에서 복수라는 목표만 보고 달리고, 경찰에 잠입해서도 진실을 찾기 위해 달린다. 그 사이 지우의 눈빛은 전보다 날카롭고 건조하게 변한다. 그리고 조금씩 지쳐간다. 복수를 다짐한 순간부터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는 말, 복수라는 칼을 품는 건 나 자신도 함께 찌르는 일이라는 말. 지우를 보고 있으면 명확히 이해가 된다.
범인과 나를 향해 겨눠져 있는 ‘복수’라는 양날의 검을 쥐고 숨 가쁘게 달리는 지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 중 과연 누가 진실을, 선을 말하고 있을지. 그 비밀이 서서히 풀려가며 지우는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떤 이름을 선택하고 어디를 향해 칼을 휘둘러야 할지 고민한다. 그 답을 알아내고, 인생의 길과 결말을 선택하는 건 혼자 남겨진 지우의 몫이다.
마이 네임 시놉시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조직에 들어간 ‘지우’가 새로운 이름으로 경찰에 잠입한 후 마주하는 냉혹한 진실과 복수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이름, 새로운 길, 새로운 인생
아버지 윤동훈이 마약범으로 수배되고 지우는 홀로 남는다. 매일같이 쫓아오는 형사들, 학교에 퍼져버린 소문과 뒤따라오는 괴롭힘.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아버지. 기댈 곳도, 이야기할 곳도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던 지우는 최악의 생일날을 맞이한다.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집에 오지 마.” 그간의 설움과 원망을 담은 말이 아버지인 동훈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었고, 동훈은 죽기 직전까지 지우를 지키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근다.
상황이 이 이상으로 나빠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이게 정말 막다른 길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우에게 닥칠 불운은 더 남아있었다. 조형사와 경찰들에게 시달릴 때가 바다를 앞에 둔 막다른 길이었다면 동훈이 죽고 난 후엔 낭떠러지 위에 선 모양새가 된다.
무조건 죽여버리겠다는 각오로 체육관에서 버틴 지우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긴다. 오혜진. 지우는 두 개의 이름, 두 개의 신분, 두 개의 휴대폰과 두 개의 이동 수단을 이용하며 두 개의 삶을 산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건이 있던 날의 무진처럼 온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헬멧을 쓰고 다니는 동천파 막내 윤지우와 자가용을 끌고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경찰 오혜진. 지우는 무진을 믿고 혜진은 기호를 믿어야 한다. 윤지우일때의 지우는 무진을 철저히 믿었고,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총을 증거로 보고 기호를 의심한다. 그 총이 송진수, 윤지우의 아버지 윤동훈의 총이라는 것과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전까지는.
모든 걸 알고도 속인 무진
극의 초반만 하더라도 무진은 마치 나쁜 놈이지만 친구에 대한 의리는 있는, 지우의 대부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복수를 하겠다면 하게 도와주겠다고, 조직이 지켜주겠다고, 아버지에게 배우지 못한 술을 한 잔 따라주며 지우를 꾀어낸다.
조직의 칼로 사용하면서 지우를 믿겠다는 그의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이었는지, 극의 후반부에 가서야 눈치챘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한 분노를 그의 딸에게 풀었다는 나름의 변명거리를 갖고 있지만, 조 형사가 말한 것처럼 무진은 악마의 모습에 가깝다.
지우는 진실을 알고 나서 모든 걸 모르는 척, 죄가 없는 척하며 자신을 키워온 무진을 죽이기로 다짐한다. 언젠가 죽일 거라 생각했던 그 범인이니까.
진짜 범인을 찾고 있었던 기호
기호는 마수대 막내였던 동훈(준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언더커버로 조직에 잠입하도록 지시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난 후, 지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향하지만 지우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마수대에서 지우를 만나게 된다.
지우의 입장에서 기호는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경찰의 총, 사건 후에 집 문을 두드린 그 얼굴. 사건을 빠르게 정리했다는 팀장. 모든 의심이 기호를 향하고 있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기호는 동훈을 잊지 못했고, 동훈이 죽은 후, 마수대에 들어온 필도를 보며 동훈을 떠올린다. 무진을 잡고 싶었던 이유도 동훈 때문이었고, 그렇기에 기호 또한 무진과 연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지우를 의심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심하며 사실상 무진의 계획에 휘말려버린 입장이 되어버린다. 지우는 기호를 통해 진실을 듣게 되고 기호는 지우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드디어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게 된다.
진짜 이름은 윤지우일까 오혜진일까
지우는 마수대에 들어가며 조금씩 갈등하고, 변화한다.
3,4화 마수대가 무진을 체포하는 대대적인 작전을 수행할 때까지만 해도 지우는 무진을 위해 행동하고 작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총구를 무진에게 겨냥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경찰을 흔들어보겠다며 유일한 증거였던 총을 그 자리에 던지기까지 한다. 완전한 동천파 막내로서의 행동이다.
하지만 5화에 들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빌런 강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강재 사건을 거치며 마수대 팀원들과 정을 나누면서 지우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상처를 알아주고 처음으로 집의 블라인드를, 자신의 마음에 쳐진 벽을 거둬준 선배 필도와 지우가 무진에게 호의의 뜻으로 건넸던 카모마일티를 지우에게 선물한 후배 건평. 그리고 무사귀환을 축하해 주는 따뜻한 말들. 조직 안에서 괴물의 모습으로 살 땐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이 몰아친다.
지우의 흔들림을 눈치챈 무진은 태주에게 기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호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지우에게 진실을 말해준다. 그 후, 살해 혐의로 체포된 지우에게 필도가 묻는다. 네 진짜 이름이 뭐냐고. 지우가 대답하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아직 정확하게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정하지 못한 상태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필도와 지우, 두 사람의 여러 감정이 사정없이 뒤섞이는 순간이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았던 인물, 필도
필도는 지우 인생의 전부이자 가장 친한 친구,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다. 지우를 믿어주고, 지우를 위해 희생하고, 겁이 많아 손에 상처가 많다고 말하는 말 습관까지 닮았다. 지우는 필도 덕분에 하루였지만 아버지와 함께 살아보고 싶었던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마약범에 의해 가족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나눌 수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지우를 못마땅해하던 필도가 서서히 지우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필도가 지우의 집 블라인드를 활짝 열었던 날,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까. 더 알고 싶었다.
필도는 자신이 알던 오혜진 경장이 윤지우라는 이름을 가진 동천파 막내라는 걸 알고 배신감에 몸서리치지만, 사건의 내막과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지우의 손을 잡기로 한다. 지우의 가장 큰 갈등 요소이자 힘이었던 그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처럼 지우를 한 번 더 각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결국 지우를 선택하다.
지우가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었던 필도의 죽음은 지우의 오혜진 경사로서의 다짐을 한순간에 무너트린다. 무진이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결말이 아니었을까. 지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복수에 눈이 먼 괴물로 만드는 것 말이다.
지우는 당장 무진에게 갈 생각이었지만 복수라는 칼날을 품고 살지 말라며 지우의 손을 감싸던 필도의 상처 가득한 손을 보며 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경찰로서의 힘, 법을 통해 무진을 잡기로 마음을 바꾼다. 지우는 마지막 날 아침, 지우가 사라진 줄 알고 쫄았다는 필도에게 “쫄지 마, 우리 경찰이다.”라고 말한다. 지우는 그렇게 경찰 오혜진으로서의 정체성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무진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지우의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고 그를 자극한다. 결국 지우는 윤동훈의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아온 윤지우로서의 해결 방법을 선택하고, 복수를 끝낸 후 아버지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는다. 송준수와 송준수의 딸 송지우. 복수가 전부였던 인생을 끝내고 이제야 진짜 내 이름, 송지우를 찾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진짜 이름이 담긴 묘비석과 이제 아무도 두 사람을 해칠 수 없도록 단단히 지켜줄 자물쇠와 송지우의 꽃다발이 지우의 복수가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지우는 세 번째 이름을 얻는다. 세 번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버지가 남겼던 편지 속 “아빠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지우의 삶은 완전한 괴물의 삶이라 말하기에도 평범한 삶이라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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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기자의 시점으로 본 '기자 영화'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치 탐정처럼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며 반전을 맞이한다. 그래서 그는 펜으로 바로잡고 정의 구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만 보면 영화 '댓글부대'는 흔히 사회고발을 하는 기자 영화로 비치고, 원작소설을 집필한 장강명 작가 또한 기자 출신이었기에 더더욱 기자 영화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정진영 작가의 '침묵주의보'를 드라마화한 JTBC '허쉬'와 같은 결을 따라갈까 영화를 관람하기 전 살짝 예상해 봤다.
전직 기자의 시점으로 바라본 '댓글부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기자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결이다. 특정 대기업을 떠올리게 만드는 만전 그룹 비리를 보도했다가 오보로 판명돼 한순간에 '기레기'로 전락한 임상진(손석구)이 절치부심해 비밀리에 운용 중인 만전 내 여론조작팀의 실체를 들춰내 정의 실현으로 이어질 줄 알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그러한 스토리에 관심 없다.
안국진 감독이 '댓글부대'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기자 임상진이 쓰는 '기사'다. 인터넷 문화가 태동한 1990년대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유튜브 등이 주류가 된 현시점까지 보여주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건 소수 미디어 매체가 아닌 불특정 대다수에게 넘어갔다는 걸 전한다. 그러면서 임상진의 피땀눈물로 완성된 기사의 영향력은 점점 잃어가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불분명한 인터넷 글이 막강한 힘을 얻는 오늘날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100% 팩트'라고 말하기 애매함의 연속이다. 임상진에게 만전의 여론 조작을 제보하는 찻탓캇(김동휘)의 주장이나 만전의 비리를 알린 중소기업 대표의 말, 만전이 진짜 여론을 조작했는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아니, 영화는 애초에 이 정보들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정보의 사실 검증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지 여부다. 믿는다면 진짜로 받아들일 것이고, 의심하면 가짜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댓글부대'는 흥미롭다. 그동안 근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할애하는 반면 현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에는 조용했던 다른 한국영화들과 다르게 과감한 선택을 취했기 때문이다. 안국진 감독의 선택은 확실히 참신했고 그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다만 '댓글부대'의 화법과 연출 방식까지 참신하다고 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장황한 내레이션과 대사들이 주류를 이루며 풍자하는 방식은 할리우드 대표 감독 중 하나인 아담 맥케이를 연상케 하나, 마치 말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플래시백이 잦다 보니 작품의 전개 속도도 빠르지 않아 지루함도 느껴진다. 반전이 등장했음에도 감흥이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부대'에 출연한 배우들의 쓰임새도 아쉽다. 주연인 손석구를 비롯해 김성철(찡뻤킹 역), 김동휘, 홍경(팹택)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력과 존재감을 뽐냈던 배우들인데 유독 이 영화 내에선 크게 매력적이지 못하다. 아무래도 '기사'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캐릭터들이 희미해진 게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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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최신개봉영화(경관의 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 피아니스트, 원샷)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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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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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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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기살인> 메인 예고편
"저는 아내와 자식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재난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 진실을 밝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