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5-07 00:31:36
[JEONJU IFF 데일리] 사분면 위의 점으로서
영화 <브라질 대선의 기록> 리뷰
DIRECTOR. 산드라 코구트
CAST. 아드닐슨 페레이라, 에스텔라 마리아 드 올리비에라, 넬리 벨렘, 후테 사르디냐
SYNOPSIS. 2023년 1월 8일 의회·대법원 점거 사건과 대선을 앞둔 브라질의 격변의 몇 달을 담은 이 영화는 그 과정에 관련된 인물들을 통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두 개의 평행 세계를 탐구한다.

국제무대에서 신흥 세력으로 평가받았던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 현장이 있다. 결과는 49.1%와 50.9%. 낙선된 후보는 현직 당선된 몸이었지만 "부정 선거가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선거 전부터 끈덕지게 폈다. 당선된 후보는 국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반대파들에게서 "저 도둑놈 구속해라!" 소리를 들었다. 그가 되면 "우리 나라 베네수엘라 된다"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복지만 바라고 그를 뽑는다며 "포퓰리즘"이라고 욕을 먹었다. 그 후보의 지지자들은 "도둑놈" 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 뒤에 "내 마음을 훔쳤다!"라는 멘트를 붙였고, 상대 후보가 당선되면 "독재 국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선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낙선 후보의 지지자들은 "부정 투표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주요 국가 기관을 습격하며 난동을 벌였다.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지만 우리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우리 나라 베네수엘라 된다" 같은 대사까지 겹쳤을 때는 실소가 조금 나왔지만.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왜 밑도 끝도 없이 우리와 지리적으로도 조건적으로도 비슷한 게 없는 베네수엘라를 들먹이나 했는데 저기서 배웠던 것일까 의문을 잠시 품었지만... 아무튼 정말 우리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브라질 대선의 기록>이다. 영어 원제는 "지금 이 순간 이 나라의 하늘에는(At this moment, in this nation's sky)"이다. 이 두 제목은 둘 다 탁월한데, 대선 캠페인에서 시작해서 실제 선거가 완료되는 시점까지를 담고, 선거 불과 몇 달 후 낙선한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법원과 국회를 습격하는 장면까지를 보여준다. 당선된 룰라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 보우소나루의 당선을 위해 기도하던 지지자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1인칭 의견이 펼쳐지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영화 속 보우소나루 지지자 페레이라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 서로 너무 달라서, 같은 나라에 있다는 걸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역시나 익숙한 이야기다.

브라질 정치의 지형도를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위험해 보이는 순간들이 여러 번 포착된다. 반대파가 "폭죽을 쏘는 척 총을 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다"고 긴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 손을 맞잡고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를 굳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더니 정작 결과가 나오니 "군부가 쿠데타라도 벌여야 나라가 산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육군 본부 앞을 찾아가 조국의 운명이 당신들에게 달렸다며 쿠데타를 벌이라고 농성 비슷한 것을 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었으며, 우리 나라부터 남미까지 군부 쿠데타로 흘린 피가 얼마나 많은가 생각할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알고 보니 군인 출신인 보우소나루가 군부의 쿠데타를 옹호한 이력이 있었다.
이들이 지지한 후보 보우소나루는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고, 현직 대통령이 1회 연임할 수 있는 브라질 선거법 특성상 상당히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 다만 상대 후보가 전설적인 사람, 바로 그 룰라였다. 지식채널e 같은 곳에서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하는가"라는 명대사와 함께 성공적인 정책들로 놀라운 지지를 얻었던 그의 이야기를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퇴직하는 그 순간까지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고, 후임자와 관련해 여러 사법 스캔들에 얽매이긴 했으나 그 또한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나면서, '사법 쿠데타'의 피해였다는 평가가 더 앞서는 상황이다.

군을 투입해서라도 룰라를 구속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라는 그 지지자들의 요구는 의아한 구석이 있다. 비슷한 생각을 우리 나라 네이버 댓글들을 볼 때마다 했다. 구속은 헌법이 규정한 권리의 제한이므로, 헌법 37조 2항에 따라 법률 요건에 의해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 경우에도 본질적인 부분은 제한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 70조는 구속의 사유를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 인멸 혹은 도주의 우려가 있을 때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기분 상해죄로 "구속하라!"를 외친다. 하도 구속 당한 사람이 많아서 별일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묻고 싶었다. 구속하라고, 군을 투입해서라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라고, 외치는 그 소리들이 무엇을 제한하라는 뜻인지를 생각해 보았나요. 그 제한이 과연 본인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자리에, 당신들이 원하는 가치들은 과연 당연히 지켜질 거라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도 안타까움이 인다. 그들 또한 혼란스럽다. 그들은 진심으로 부정 투표를 우려하고 있고, 이 문제가 '블랙박스'를 공개하면 해소될 일인데 왜 공개하지 않아서 의심을 사냐고 묻는다. 전자 투표기 안에 '블랙박스' 같은 건 없다는 말 앞에, "대체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누구누구 당선되면 우리 나라 망한다'고 걱정하며 태극기 뒤집어쓰고 집회에 나가시는 어르신들 또한, 진심으로 나라를 우려하고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것들이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두 집단 간의 대화가 너무 요원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같은 상황을 두고 해석이나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랐다면, 그래서 성장 중시vs분배 중시, 자유 중시vs복지 중시 등 교과서적으로 요약이 가능했다면, 이제는 그냥 상황을 팩트로 인식하는 내용 자체가 달라져 버리니 합리적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 상대방의 말이 날조로 보이니까. 실제로 양쪽에서 하는 문장만 놓고 보면 비슷해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졌나.
굳이 올해 전주에서 본 영화들을 하나하나 나열하지 않더라도, 전세계 정치 지형도를 봐도 이미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라가 많아 보인다. 왜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갈라치기로 손쉽게 표를 거두려던 정치인들과 이들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언론의 탓을 하고 싶은 동시에, 지극히 합리적이었던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짓는 마음, 벽을 세우는 마음이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닌지. 해결책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경청은 불가능해 보이긴 한다.

이 영화는 일련의 과정을 시간이라는 가로 축으로, 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세로 축으로 담아 좋은 사분면이 되어 준다. 도저히 남 일처럼 보이지만은 않는 브라질의 사분면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마음들에 더 공감이 가는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 하늘 아래" 나는 어떤 사분면 위에 어떤 점으로 위치하고 있는가. 다른 지점의 점으로 이어지려면 우리에게선 어떤 선이 뻗어 나가야 하는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4 13:0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423)
2025.05.06 14:00 CGV전주고사 1관 (상영코드 621)
2025.05.08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상영코드 809)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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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낮에 경험하는 보험사기 스릴러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많아서 희열을 느끼며 봤던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뻔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 한 방을 날리는 작품이었고, 환한 낮에 경험하는 스릴러다 보니 스릴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나에게 제격이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시놉시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간단한 부탁에서 시작된 간단하지 않은 사건. 멋진 커리어우먼, 매력적인 아내, 아름다운 엄마,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한 여자 ‘에밀리’가 어느 날 사라진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는데요. 모든 것이 내 것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진 에밀 리가 돌아온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플루언서를 보여주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속 스테파니는 브이로그 컨텐츠를 만드는 인플루언서로 나온다.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작품을 보면 필자가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는 인플루언서인 스테파니가 자신의 친구인 에밀리의 실종 사건을 파헤치는데 자신의 브이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SNS가 이렇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못했고, 물론 부산경찰SNS가 사람들을 찾는데 많이 활용된다고는 익히 들었지만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브이로그로 찾고 경찰 관계자가 아닌 개인이 수사를 하는 모습에, SNS가 참 여러 가지고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귀신은 없는데 소름돋은 1인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소름이 돋았던 것은 에밀리의 옷장을 다 치우고 스테파니의 옷들로 다 채워넣었는데 그 다음날 다시 애밀리의 옷들이 옷장 속에 다 채워져 있어서 진짜 주스 먹다가 뿜을 뻔했다. 극중 스테파니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에밀리의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깜짝깜짝 놀랐고, 갑자기 에밀 리가 쌍둥이라고 해서 작가... 천재인가? 하는 생각과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계략 속에서 결국 스테파니가 에밀리를 경찰에 넘기는 장면들을 보며 진이 빠질 정도였다. 반전이 적재적소에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고 텐션감이 높아 다른 생각할 틈 없이 영화에 빠져서 볼 수 있었다.
스릴러 보험사기
그렇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결론적으로는 보험사기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험사기를 소재로 코미디나 범죄물은 만들어도 이렇게 스릴러물로 만들어진 경우는 별로 없어서 색달랐다. 그리고 영화 장면들이 대부분 대낮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환한 빛 속에서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금 색다른 스릴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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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 전설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
2023년 대서사의 막을 내린 <존윅> 시리즈는 이번 2025년 스핀오프로 다시 한 번 극장가를 찾아오게 되었다. 영화 <발레리나> 는 <존윅3: 파라벨룸> 과 <존윅4> 그 사이의 시간선에 위치하며 존윅과 같은 '루스카 로마' 출신의 킬러 '이브' 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스핀 오프가 유난히 매력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존윅 시리즈가 낯설지라도 정교하게 쌓여진 세계관을 맛보여줌으로써 본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주인공 '이브'에게 집중하며 백스토리 없이 영화를 오롯이 관람할 수 있다. 동시에 시리즈의 팬덤은 2년 사이 다시금 찾아온 본편의 향수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매력을 영화 곳곳에서 느끼며 그 전설의 귀환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존윅 시리즈의 첫 시작은 이미 오래전 은퇴한 전설적인 킬러의 역린을 건드리며 시작된다. 그가 복수를 다짐하기까지 영화는 구태여 사이드 스토리에 힘을 쏟지 않고 오로지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액션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잔인하게 죽임 당하는 연인도 각성을 위한 시간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로지 세련된 컨셉을 대사가 아닌 장면으로만 표현하며 그가 이 세계관 속 어떠한 존재감을 갖는지 그저 묵묵히 강조할 뿐이다. 존윅은 이미 아내와 사별한지 오래, 그저 조용히 삶을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지만 아내가 남긴 유산 즉 그의 존재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건이 파괴되며 그는 다시금 현업에 복귀한다. 차와 강아지가 그 두 요소이다. 사실 복수를 다짐하는 은퇴 킬러는 할리우드 액션물에서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존윅의 경우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세심하게 내제된 세계관 설정 속에 그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단순 보는 것이 아닌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윅 세계관은 그 누구도 소리 내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룰이 존재한다. 공공연하게 킬러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원로회라는 절대 권력 아래 그들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매너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규율의 장소가 불가피하고 이는 각 나라에 퍼져있는 콘티넨탈 호텔로 대변된다. 존윅은 이미 오래전 큰 대가를 치루고 은퇴한 킬러로 모두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심지어 경찰관 까지도. 특히 <존윅> 에서 그가 집을 습격한 킬러들을 처리한 뒤 소음으로 출동한 경찰관과 대화를 나누는 시퀀스에서부터 해당 영화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경찰관은 가볍게 그와 대화를 나누며 한 가지 질문을 건낸다. 평소 같으면 숨기기 급급해야 할 시퀀스겠지만 경찰관은 존윅에게 '다시 복귀하셨나요?' 라고 묻는다. 다시 말해 도입부부터 우리 도처에 킬러가 살고 있으며 해당 영화가 조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사회임을 강조한다. 이때 일반인들은 철저히 배제 당한다. 관객이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은 거의 킬러나 다름이 없다. 이는 이후 시리즈에서 재차 강조되며 관객들을 은근하게 킬러들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발레리나> 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존윅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4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그가 다시 발들인 운명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이야기이기에 영화에서 재차 강조되는 'Consequences' 즉 대가를 치루는 시간으로 보여진다. 그가 순간 내린 선택에 의한 결과를 말 그대로 '치루는' 역경의 내용이지만 이미 모두가 전설로 취급하는 이의 고행이기에 많은 팬들을 끌어들인 바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가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발레리나> 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관객은 그 베테랑의 과거를 알지 못하기에 이번에는 한 아마추어가 베테랑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아마추어는 존윅과는 어떻게 차이점을 가져가게 될까 역시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되어준다.
오래전 컬트 집단에 의해 어머니와 언니, 아버지 마저 잃은 소녀 '이브'는 뉴욕 콘티넨탈 호텔의 매니저 '윈스턴'에 의해 거둬져 '루스카 로마'에 입성한다. <존윅3: 파라벨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 존윅 역시 '루스카 로마' 출신으로 이들은 모두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에 의해 교육 받고 킬러로 거듭난다. <발레리나>는 이 '루스카 로마'를 한 번 더 조명하며 이들이 단순 킬러가 아닌 보호 대상을 지키는 사업을 운영하는 일명 '키키모라' 집단인 설정을 부여하고 소녀 '이브'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지는 보여준다. 이때 다시 한 번 존윅과의 차이가 드러난다. 존윅은 시작부터 모든 것을 잃은 자로 등장한다. 시리즈가 거듭 될 수록 그의 재산은 점차 줄어들고 그에게는 보금자리 하나 조차 남지 않게 되며 콘티넨탈의 규칙을 어긴 뒤로 그에게 몸을 의탁할 만한 공간은 영원히 부재하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끝은 존윅이 비로소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이 아닌 자신이 결정한 선택들의 대가를 치루며 끝내 영원한 안식에 도달하는 이야기이지 결코 무언가를 다시 얻어내는 이야기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발레리나>가 '키키모라'라는 설정을 초반부부터 보인만큼 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운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니 운명에 빠져든 한 베테랑과 운명을 거부하는 한 아마추어의 만남이 이 스핀오프를 더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액션 장르의 한 획을 그은 시리즈인만큼 이번 <발레리나>에서 '이브'가 보여주는 액션 역시 매우 뛰어난데 이때 역시 존윅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명사수인 존윅이 속도전으로 몰아치는 적들을 처리할 때 아직까지는 지켜내기만 하여 몰아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이브가 다수의 적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바로 그 포인트이다. 물론 존윅 못지 않게 다양한 방법으로 적들을 상대하지만 아직 섬세하게 가공되진 않았으나 오히려 아마추어의 과감함으로 수류탄, 화염 방사기 등을 이용해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이브'의 액션 스타일이 존윅과는 또 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보이는 복수의 집념은 <존윅>과 <존윅: 리로드>에서 보여준 그의 무시무시함과 닮아있기도 하다. 복수라는 소재가 늘 반복되는 클리셰일 수도 있으나 결국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만큼 서사의 당위성과 연출의 에너지를 부여해주기에 관객은 이브가 126분 동안 모는 폭주기관차에 올라타게 된 셈인 것이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존윅 세계관을 가장 관통하는 말이자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주제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존윅은 네 편에 걸친 영화 내내 대가를 치룬다. 그로부터 도망치기도 맞서기도 하지만 한 가지 그는 결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온 몸으로 운명을 들이받아내는 사내임을 영화는 보인다. 이번 <발레리나> 속 이브는 어떠할까. 그녀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운명을 강요 받으나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다. 베테랑이 지낸 책임의 무게, 그 세월을 보아온 만큼 이 아마추어는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그 무게를 질까. 어쩌면 그녀는 가뿐하게 그 책임을 밟아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전설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그 전설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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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 리차드>가 흑인을 위한 정치일까?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하여, 꿈을 현실로 만들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기분이 드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거부감이 먼저 든다. 세상이 계획한 대로, 노력한 대로, 꿈꾸는 대로 굴러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부유한 백인과 가난한 흑인은 같은 계획을 품고, 같은 노력을 기울여, 같은 꿈을 항해 나아가도 다른 결과를 마주할 확률이 크다. 아무리 치열해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사회‧문화‧경제적 부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오력’을 향한 조롱,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킹 리차드〉는 다른 길을 간다. 현실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대신 더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하며, 꿈꾼다. 주인공은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다. 리차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테니스 선수로 키울 것을 ‘계획’했다. 그것만이 딸들이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자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리차드는 이웃 주민에게 아동학대 신고를 받을 만큼 열정적으로 두 자매를 훈련시킨다. 딸들이 혹독한 경쟁 시스템에서 소모되다 버려질 것을 우려하여 유명 코치와 스폰서, 에이전트의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꿈꾸던 것을 이뤄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리차드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
리차드와 비너스, 세레나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복합적이다. 인종 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분명 흑인의 꿈을 증폭시켰다. 세 부녀가 ‘백인 스포츠’인 테니스에 낸 균열은 그들을 보고 테니스 선수를 꿈꾸기 시작한 흑인들로 인해 더 커질 수 있다. 그럼으로써 흑인이라는 이유로 과잉진압을 당하거나 총에 맞지 않는, 마약과 폭력에 빠지는 않는 삶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흑인에게 다른 미래가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 부녀의 기적적인 성공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강한 의지와 용기,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건 소수에게만 허락된 ‘기적’이다. ‘하면 된다’의 주술은 모두에게 빛나는 미래를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수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이 소수의 존재가 기적을 꿈꾸며 계획‧노력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할 사람들의 공허한 기다림을 양산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이다.
지금껏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대체로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첫 번째는 〈킹 리차드〉처럼 흑인 개인의 성취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두 번째는 집단으로서의 흑인의 문제와 그들을 위한 정의에 주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흑인이 차별을 받는다는 건 영화가 그리는 공통적인 현실이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영화가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이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성공한 흑인도 언제나 피부색으로 환원되어 독해될 가능성이 있고, 흑인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는 운동도 뛰어난 개인의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흑인 영화의 범주적 구분이 아닌 해석이다. 영화가 흑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사회적 수용의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영화 스타일에 한정되지 않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윌리엄스 가족의 노력과 이 이야기를 재생산하여 전파하는 일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계획, 노력, 꿈은 소중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성취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것이 ‘덜’ 계획하고 노력하며 꿈꾼 자들을 향한 비난의 근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또 다른 계획‧노력‧꿈에 대한 폄하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결국 〈킹 리차드〉가 할리우드의 문법과 방식으로 풀어낸 세 부녀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는 우리 사회의 몫이다. 왜 이들이 재능과 꿈을 가졌음에도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해야만 했는지에 주목하여 계획‧노력‧꿈을 평등하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할지, ‘결국 하면 된다’는 부조리한 명제의 반복에 그칠지는 영화를 소비하는 사회의 역량에 달렸다. 이는 영화 제목의 ‘King’을 리차드의 헌신에 대한 존중을 담은 표현으로 이해할지, 성공하지 ‘못한’ 절대다수를 발아래 두는 왕의 의미로 해석할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인종적 정의의 방법론에 관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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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우리가 잊어버린 진짜 소통의 방식에 대해
Director
Iván FUND
Cast
Mara BESTELLI, Marcelo SUBIOTTO, Anika BOOTZ, Betania CAPPATO
시놉시스
아르헨티나 시골의 어느 먼지 나는 길, 반려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소녀의 능력을 팔아 기회주의적인 보호자들이 생계를 이어 나간다. 이게 마법이든 사기든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이 서비스는 진짜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보물이라는 것.
들어가며 :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메시지>는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독특한 영화였다. 소재적으로 애니멀커뮤니케이터, 대안가족 등의 개념이 등장하지만 절대 영화의 본 목적인 '소통과 여백'이 존재해야 할 자리를 설명이나 억지 사건으로 채우지 않기에 더욱 순수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잊어버린 진짜 소통의 방식에 대해
아니카가 동물의 비공간에 채널링하여 그들의 영혼과 대화하는 방식은 고요하다. 침묵 속에서 감정을 교류하고, 그것은 아니카의 시적인 언어로 변환된다. 그녀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나며, 그들의 경험과 교류를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을 배워나간다. 그 과정에서 의뢰인이 원하는 내용과 자신이 믿는 것 사이에서 부드럽게 중개를 해주는 건 미리엄의 몫이다. 운전을 하고 수금을 하는 로헤르는 이들을 목적지까지 잇는 사람이니 아니카에게 두 어른의 존재는 세상과 아니카를 이어주는 동반자적 관계가 된다.
흑백의 화면은 다채로운 자연의 풍경이나 서사적 장치보다 이야기가 가진 본질에 집중하게 만든다. 때문에 불친절도, 학대도 아니지만 어쩐지 무친절해 보이고 때로는 아니카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던 미리엄와 로헤르의 태도는 혹시나 모를 극적사건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묘한 긴장감을 주기도 하다. 그러나 일이 없을 때 밴에 모여 아니카의 흔들리는 유치를 뽑아주기도 하고, 이빨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아니카의 베개 밑에 짤막한 진실의 메시지와 함께 돈을 넣어주는 장면, 서툴게 조작키를 움직이며 인형뽑기를 하거나 아니카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정신병원으로 향하는 여정에 동참해주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이것이 그저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짜 소통에 대한 이야기임을 확신시켜 준다. 이들은 식구였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가족보다 더 관계의 본질에 가까운 사이.
<메시지>는 단순한 생계 수단을 위해 뭉친 세 명의 방랑자 존재 연합을 넘어, 어린 아이인 아니카가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아가는 성장의 과정을 돕는 어른의 여정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쯤 아니카가 미리엄에게 다가와 새의 영혼을 통해 미리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미리엄이 따뜻하게 아니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런 연대만 있다면 마음이 아픈 동물도, 사람도 없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희망을 품어보게 된다.
Schedule in JIFF
2025.05.02. (금) 21:00 CGV 전주고사 3관
2025.05.03. (토) 20:00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2025.05.06. (화) 20:30 CGV 전주고사 4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4월30일 ~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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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생일인 배우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10월 20일, 바로 오늘! 오늘이 바로 생일인 배우 분들이 여럿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오늘 생일인 배우가 나온 드라마 혹은 영화를 추천드리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오늘 생일인 배우가 나온
드라마 혹은 영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이지현 배우, <안녕, 드라큘라>
ⓒ JTBC
synopsis
이대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마음이 한없이 약해질 때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문제들이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내고
나를 물어뜯고 흔들어 대는 밤.
이처럼 각자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문제를 드라큘라에 한 번 비유해봅시다.
긴긴밤, 우리가 이 강력한 드라큘라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ine pick!
퀴어 드라마로 성 정체성으로 인해 부모와 갈등하는 내용을 주로 다루는 JTBC 단편 드라마이다.
허성태 배우 <오징어 게임>
ⓒ IMDb
synopsis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
cine pick!
백상예술대상,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에미상 등 국내외 유명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오징어 게임>.
허성태 배우 역시 <오징어 게임>을 통해 아시아 아티스트 어워즈, 에이판 스타 어워즈에서 수상했다.
허성태 배우 <범죄도시>
ⓒ 네이버 영화
synopsis
주먹으로 도시의 평화를 유지해온 형사 마석도와 반장 전일만이 이끄는 강력반은
신흥 범죄조직의 악랄한 보스 장첸과 그의 조직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화끈한 소탕 작전을 세운다.
cine pick!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에서 <범죄도시>로 영화부문 남자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허성태 배우.
"내 누군지 아니?"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현봉식 배우 < D.P>
ⓒ 현봉식 배우 인스타그램
synopsis
탈영병들을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D.P.) 준호와 호열이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을 쫓으며
미처 알지 못했던 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
cine pick!
한국 군대의 어두운 면을 가감 없이 현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좋은 평을 받은 <D.P.>.
디렉터스컷 어워즈, 백상예술대상, 청룡시리즈어워즈 등 유수의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하윤경 배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 호두앤유ent
synopsis
재적인 두뇌와 자폐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박은빈 분)의 대형 로펌 생존기
cine pick!
많은 이들에게 하윤경 배우의 입덕 드라마로 꼽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하윤경 배우의 섬세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드라마이다.
하윤경 배우 <경아의 딸>
ⓒ 네이버 영화
synopsis
홀로 살아가는 경아에게 힘이 되어주는 유일한 존재인
딸 연수는 독립한 뒤로 얼굴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남자친구가 유출한 동영상 하나에 연수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버리고
이 사건은 잔잔했던 모녀의 삶에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키는데…
cine pick!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 받으며 연출력을 인정 받은 <경아의 딸>.
하윤경 배우의 강점인 감정의 섬세한 연기 표현을 엿볼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연기로
극에 몰입감을 선사한다.
서신애 배우 <여왕의 교실>
ⓒ MBC
synopsis
이 ‘레전드급 마녀’에 맞선 ‘명랑반장’ 심하나와 6학년 3반 친구들의 고군분투 도전기.
단순한 학교 이야기를 넘어선 예측불허 에피소드들 속에서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행복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른들에게 되묻는 2013년, 우리들의 이야기.
cine pick!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여왕의 교실>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특히 삽입곡인 초록비와 드라마 속 대사들이 주는 감동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드라마이다.
서신애 배우 <지붕 뚫고 하이킥>
ⓒ 옛드: MBC 레전드 드라마
synopsis
서울로 상경한 두 자매가 성북동 순재네 집 식모로 입주하게 되면서 이 집 식구들과 벌이는 유쾌한 에피소드를 담은 시트콤이다.
cine pick!
서신애 배우가 아역상을 수상했던 작품 <지붕 뚫고 하이킥>.
수많은 명대사와 명장면을 탄생 시켰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조회수가 오르는 작품이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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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근도 양심도 꽉꽉 찼네
이 글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미천한 창작자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진출처:매일경제 TV
버젓이 방송에 나와 전세사기를 고백하는 것이 덤덤해진 시대가 와버렸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모은 돈으로 계약을 했을 집이었기에. 피해자에게 주어질 보상금 정도로 그들의 다친 마음에 밴드 하나 못 붙여줄 것은 뻔하디 뻔하다. 잡혀야 할 사람들은 잡히지 않고. 피해자들은 이 모든 사태에 괴로워하며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생긴다. 그뿐인가. 인생으로는 모자라 영혼까지 끌어다 은행에 저당을 잡히고 들어왔을 집인데, 반드시 박혀 있어야만 했을 철근조차도 제대로 박혀있지 않단다. 어째서 피해자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내 이야기는 아니고 뉴스에서 나오는 남의 이야기이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한숨을 몰래 내쉬어 보기도 한다.
영화는 정확히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한국 사람이라면 폭발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온갖 미묘한 생각들과 서러움을 영리하게 이용하기까지 한다. 덕분에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아파트의 역사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동산의 가격이 폭주하는 것을 보여주는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관객들은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영화의 상황 속으로 순순히 빨려 들어간다.
덕분에 영화가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이 모든 아파트를 날려버리고, 덩그러니 황궁 아파트만을 중심에 남겼을 때도. 관객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황궁아파트 속으로 들어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뒤 이므로.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가 영리하다 못해 섬뜩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두 번째 지점은 바로 입주민회의다.
남은 주민들이 느끼고 있는 마음. 어떻게 보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을 뿐, 위기 상황이라면 그런 생각을 가진다 해서 욕할 수 없는 마음속 이야기들을 입주민 회의라는 형식으로 빌어 귀로 전달한다. 모든 아파트가 무너지고 달랑 자신들의 집만 남은 상황이지만. 이 무심하면서도 일상에 착 달라붙어 있는 상황 덕에. 여태껏 드림팰리스 주민들에게 받아왔던 차별들에서 오는 서러움을 얘기하는 장면들 조차 낯설지 않다.
자신들이 받았던 차별들을 오롯이 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서도. 입주민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을 바퀴벌레라고까지 부르며 소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라오지 않는다. 영화는 너무도 정확히 한국 사회가 집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까발리고 있고. 또한 쓸데없이 정의로운 인물을 대놓고 앞장 세워 교훈질을 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경험들도 함께 끌어올려 저 말도 맞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렇게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바퀴벌레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본인들은 그것이 자정작용이라 믿었고 자신들은 이제 이곳에서 행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난리 법석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뚝 서 있는 황궁 아파트만큼. 자신들도 그렇게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아파트와 자신의 존망(Johnna 망함 아님)을 동일시한다.
사진출처:다음
아파트 주민들의 은은한 광기에 팔에 돋은 소름이 겨우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간과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게 한다. 바로 모든 닫힌 시스템은 부패한다는 것.
이대로만 가면 남들이 죽건 말건 영원히 안전할 것만 같던 황궁 아파트는 고인 물이 되기를 자처하더니 그 속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씩. 천천히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아파트 단지를 커다란 고름주머니로 만드는 것도, 그러면서도 가장 지키려 애쓰는 사람도. 바로 영탁(이병헌)이다. 그는 황궁 주민의 DNA가 전혀 없으며, 극우뇌를 가진 사람도 아닌 일명 "바퀴벌레"에 불과했지만. 주민들의 집을 향한 열망에 올라타, 실컷 가짜이면서도 진짜인 행세를 한다. 그것도 꽤나 훌륭하고 성공적으로.
어리바리했던 영탁이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로 변화하기까지 겪는 아주 극단적인 감정의 변화를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정말 점진적으로. 하지만 이질감 하나 없이 절묘하게 이뤄낸다. 그 어떤 주민의 욕망보다도 강렬하면서 그 어떤 바퀴벌레보다도 맹렬하게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애쓰는 모든 모습을 보면서. 이 배우의 연기 스펙트럼은 끝이 없겠구나. 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디스토피아적이지만 너무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들었던 영화 전체에 비해, 마지막 부분은 누가 보아도 희망이라는 게 있기는 하다.라고 말해준다는 점은 통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뻔하게 헬기를 타고 온 구조대에 의한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나, 눈물파티를 하려는 시도조차 없다는 점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모든 껍데기들은 황궁아파트와 함께 조용히 마지막을 맞이한다.
황궁 아파트는 망했지만(?) 영화 자체는 마치 황궁 아파트와 같았다. 건축물로 치자면 아낌없이 들어갔어야 할 철근들이 제자리에 굳건하게 박혀있고. 모든 것이 설계도대로 맞아떨어져서 자아내는 탄성도 영화 중간중간 가감 없이 흘러나올 만큼 훌륭했다. 모조리 쓰러진다 해도, 저 멀리서도 보일 만큼 듬직하게 제자리를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소한 이 영화만큼은, 철근도 양심도 꽉꽉 차 있는 셈이다.
[이 글의 TMI]
1.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아마도 시간이 된다면 한국영화 빅 4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 같다.
2. 다음 주부터 휴가 아아아악!!!!
3. 휴가비 받은 걸로 일단 책부터 사봅니다.
#콘크리트유토피아 #엄태화 #최신영화 #영화리뷰 #브런치작가 #이병헌 #박보영 #박서준 #김선영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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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록이 열풍을 일으키던 1986년 여름
10대 소년 마이클과 친구들은 크리스천 메탈 밴드 3:16을 결성한다.
이들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밴드는 금세 유명세를 얻게 되고, 유명 밴드 매니저 출신의 스킵이 지방 순회공연을 제안한다.
교회와 캠프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며 점점 더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친구들. 하지만, 새로운 멤버 영입 문제로 다툼이 발생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