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비됴2024-12-03 10:32:21
각본 ‘있는’ 드라마, 1승하는 법을 아르켜줄게~
영화 <1승> 리뷰
오합지졸 팀을 이끌고 단 1승을 위해 노력하는 언더독 이야기. 배구라는 스포츠를 선택해 영화로 옮긴 <1승>은 새로움보단 익숙한 스포츠 소재 영화의 서사를 밟는다. 성공보단 실패가 더 많았던 이들이 모여, 서로 부딪히고, 싸우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다 마침내 한계를 넘어 승리를 거둔다는 이야기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배구 풀세트 접전보다는 세트스코어 3:0으로 마무리 짓는 셧아웃 승리처럼 보인다. 마치 깔끔하게 스포츠 전작들이 닦아 놓은 루트대로 가겠다는 의지처럼, 영화는 후반부 보장된 감동의 스파이크를 날린다.
이런 전형적인 서사에 변주를 가하는 건 인물들이다. 특히 선수가 아닌 감독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펼치는 건 새롭다. <슈퍼스타 감사용> <국가대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유명한 국내 스포츠 영화는 모두 선수들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승>은 김우진의 성장을 중심축으로 가져간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실패를 팀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아 과거 자신의 장점을 남들이 알아봐 주지 않았던 것을 반복하지 않고, 선수들의 강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장점화 시킨다. 이런 노력은 경기력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 자체로 성장 서사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 좋은 말로 하면 전형적이지 않고, 나쁜 말로 하면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마케팅을 하는 구단주 또한 감독과 팀을 자기 방식대로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이렇듯 선수들에 포커싱을 맞추지 않은 영화는 기존 스포츠 영화에서 자주 사용했던 카타르시스, 자칫 신파로 비칠 수 있는 눈물 젖은 감동은 과감하게 컷한다. 마치 <1승>이 추구하는 성장 서사는 이런 게 아니라는 것처럼 신파로 매몰되려는 순간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장단이 있는데, 신파로 인한 감정의 질척거림은 덜한 대신, 가슴을 울리는 여운의 시간은 짧다. 쉴 새 없이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세트를 가져가야 이기는 배구 특성을 오롯이 옮긴 듯한 영화는 단점을 장점화 시키며 1승을 향한 담금질을 계속한다. 이게 우리 영화의 성격이라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기대했던 코미디 부분은 절묘한 티키타카가 이뤄져 웃음을 전하기 보다는 주전 공격수인 송강호, 박정민에게 의존하는 패턴을 고수한다. 역시 에이스라 말할 수 있는 송강호의 능청스러움, 여기에 틀을 마구마구 깨버리는 박정민의 돌파 능력은 웃음을 전하기는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패턴이 읽혀 새로움은 덜하다. 여기에 감독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임에도 선수들의 고른 서사 소개가 나오지 않는 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럼에도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1승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부분이다. 극중 강정원은 영화 <록키>를 예로 들며, 모두들 록키가 챔피언 아폴로를 이기고 챔피언이 되는 줄 아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승리가 목적이 아닌 성장 서사를 더 좋아한다고, 우리는 그 단 1승을 하는 서사를 만들거라고 덧붙인다.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들 하지만 신연식 감독은 강정원을 통해 ‘각본 있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한다. 영화는 강정원의 각본대로 감독과 선수들이 각자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고 성장해 1승을 향해 뛴다. 한 번도 인생이란 게임에서 승리를 해보지 못한 실패자들이 의기투합해 승리를 거머쥐는 모습은 담담하게 그렸음에도 울림은 크다. 록키의 승리처럼 이들의 1승을 자축하듯 <록키>의 OST ‘고잉 더 디스턴스(Going the Distance)’가 흐르는데, 이 장면은 그 자체로 빛을 낸다.
스포츠 영화, 특히 배구 영화라는 지점에서 팬이든 팬이 아니던 간에 얼마나 리얼하게 배구 경기 장면을 구현했는지 궁금해질터. CG의 도움을 받았지만 생각보다 배구 경기의 특성과 재미를 잘 살린다. 전 배구선수인 한유미, 시은미는 물론, 이민지, 차수민, 신윤주, 장수임 등 배우들의 놀라운 실력도 리얼리티를 살린다. 특히 다양한 카메라 기술로 구현한 랠리 장면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장식한다. 여기에 몸보다 말로 승부하는 조정석은 물론, 상대 팀 감독으로 나오는 신진식, 김세진, 해설자로 등장하는 이숙자,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김연경은 보는 재미를 더한다. 배구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말 선물이다.
“나만의 1승을 위해 투쟁하는 영화다” <1승>의 기자간담회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딱 한 번 승리의 쾌감을 얻기까지 힘겨움을 겪었거나 그 과정을 겪고 있다면, 이 영화는 올해를 버틴 이들에게 큰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저마다 각본 없는 인생 경기를 찍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작은 힘을 얻길 바란다. 누구나 1승은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인생이란 코트로 달려가자!
사진 제공: ㈜아티스트유나이티드
평점: 3.0 / 5.0
한줄평: 역시 스포츠영화는 눈물이 필요한건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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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지가 옥천 허브에 간선 하차 되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미키17]과 원작인 소설 [미키7]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론부터 말하겠다.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안타깝게도 목적지인 내게 오지 않고 엉뚱하게 옥천 허브에 가 있다는 것도. 말해야겠다.
영화 타이틀이 나오기 전 까지의 시퀀스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원작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로 컨셉을 잡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마자.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감독 특유의 코미디적인 요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장면들은 꽤 희귀한데다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원작에서 이름을 개자식으로 바꾸어도 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베르토(참고 1)를 티모(스티븐 연)로 바꾸어 연출한 것에서는 조금 의아했지만. 아마도 같은 “처지”출신의 친구들이 직업적인 차이에 의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좋은 변주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뭐 그러려니 했다. 마샬 부부를 아예 대놓고 용산 부부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풍자하면서 그 모습 또한 극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쓰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이것들이 해놓은 짓거리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니)에서도 아마 말하려는 것이 명확하니, 그 두 사람이 ”그런 꼬라지“로 존재하는구나. 를 느낄수도 있었다.
원작자도, 그리고 봉준호 감독도. 영화로 만든다면 무조건 들어가게 할 것이라 말했다는 바이러스 실험 장면도 좋았다(참고2). 원작에서처럼 나샤의 존재로 인해 그 애틋함도 잘 살린데다 익스펜더블의 삶을 살고 있는 미키들의 실상을 정말 우울하고도 잔인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
어떻게 보면 아주 기본적인 틀은 원작과 엄청 크게 다르지는 않다(?)단지 그 대비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감독이 설정에서 조금 더 매만졌다 정도로 느끼게 하거나. 그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으니까. 물론 앞부분에서.
안타깝게도 내가 느낀 영화의 문제점들은 이 원작부분을 제외한 곳에서 시작된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점은 감독이 원작에 끌린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이 영화, 그리고 원작에는 감독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미키 17]은 설국열차처럼 자원이 한정된 공간에서설국 열차와 기생충에 등장하는 지도층(부유층)의 우월의식 때문에 아무 계획이 없는 송강호 가족 같은(?) 미키들이 뛰고 구르다가 괴물인줄 알았던 옥자 덕에 목숨을 구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따끈한 양갱이 나올 것 같은 용광로(?)까지 나온다!!)
그렇다.
감독이 해왔던 전작들의 거의 모든 세계관이 다 담겨 있는데 웅장하다고 느껴지기는 커녕 산만하고 이리저리 부딪치는 바람에, 안그래도 식량 배급이 여유롭지 않은 미키17의 살이 더 빠질 것만 같이 혼란스럽고 진빠지게 만든다. 원작에서 느꼈을 문제의식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감독이 해답으로 내어 놓은 영화 중반부의 변주는 그 어떤 감흥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게다가 초반부에 진지 노선을 타겠다고 꿋꿋하게 선언을 해 버린 탓에. 미키의 얼빠진 표정은 이제 웃음을 짓게 만들지도 못한다.
중반부가 만들어 낸 설정으로 메시지를 주는 것에 급급하려다보니, 정작 강조되었어야 할 “나는 누구인가”는 먼 발치에서 미키 18과 나샤를 쳐다보는 미키 17마냥 발만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른채 덩그러니 놓여져 있게 된다. 후반부가 되어서야 잊고 나온 가스렌지 불 처럼 아맞다! 모드가 되어 미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본질이 많이 흐려져 있다.
원작에서의 미키는 돈도, 쥐뿔도.게다가 가오도 없는 밑바닥 인생이지만.영화에서 묘사한 테세우스의 배에서 부서지면서도 계속 살아남은 벽돌 한 조각 같은, 자신의 정신(영혼)을 지키기 위해서 잘난 친구 베르토보다도 더 확실하게 목적을 쟁취하려 애썼다.
그러나 미키 17은 그 마지막 남은 영광마저도 여자친구 나샤로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층에 위탁해버리는 양상을 보인다. 베짱좋게 마샬과 반물질 버블로 딜을 치던 그의 모습도 볼 수 없고, 싹퉁바가지 베르토의 눈탱이에 주먹을 꽂는 모습도 볼 수 없다. 미키는 여전히 조금은 쭈글쭈글하고, 비실비실한 채로 이제 자신을 옥죄던 것이 없어졌다고 웃지만. 그 행복은 그가 온전히 만들어내지 못한 탓에 언제든 변질될 수 있는 불안감을 안은 것 처럼 보인다.
분명 내게 오기로 약속된 메시지이건만. 안타깝게도 모든 것이 얽혀 언제 내게 올 지 도통 알 수 없다는 옥천 허브에 갖혀버린 것 처럼. 영화의 진짜 메시지는 다른 것들에 둘러쌓여 찾아내기 힘들어진 채 여전히 나를 기다리게만 하고 있는 기분이다.
참고 1. 원작에서 베르토는 모든 것에 만능이면서 신체적으로도 우월한 존재로 나온다. 미키가 그에게 느끼는 열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베르토는 미키들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샹놈임.
참고 2. 영화화 된다는 말이 돌자마자 출판된 개정판에는 원작자와 감독의 대담이 함께 실려있는데, 두 사람 모두 바이러스 실험 관련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14장(기억이 맞다면)을 넣을것이라 했다고 한다. 나도 그랬어. 왜냐면 어떤 바이러스인지 나도 알고 싶었거든(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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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블도어의 비밀>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가 초래한 난국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매즈 미켈슨)'가 과거 범죄를 사면 받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가자 '알버스 덤블도어(주드 로)'는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에게 마법부 오러이자 형인 '테세우스(칼럼 터너)', 순혈 마법사 가문의 후손인 '유서 프(윌리엄 네이디람)', 마법학교의 교사인 '힉스(제시카 윌리엄스)', 머글 '제이콥 코왈스키(댄 포글러)' 등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그린델왈드를 저지할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마법 세계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머글과의 전쟁에 나서려는 그린델왈드와 '퀴니(앨리슨 수돌)'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에 맞서 치열한 혈투를 펼친다. 한편, 전쟁 못지않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덤블도어는 가문의 비밀이 담긴 '크레덴스/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에즈라 밀러)'를 조우하면서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2016년 <신비한 동물사전>, 2018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비밀>에 이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시리즈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혹평을 받으며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을 거둔 만큼,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프리퀄이자 5부작으로 기획된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존속 혹은 종결을 결정지을 수 있는 분기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공개된 영화는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듯 보인다. 우선 번잡하다. 너무나도 많은 내용을 한 데 다룬다. 부제에 충실한 덤블도어 가문의 출생의 비밀과 오해, 헤어진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과거사와 정치적 수싸움, 그린델왈드를 막기 위한 뉴트와 친구들의 미션, 그리고 남은 시리즈를 위한 포석 깔기 및 전편들에서 던져진 복선 회수까지.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20여분의 러닝타임이 부족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공허하다.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었지만, 남는 것은 없다. 뉴트의 모험과 신비한 동물들의 활약상이 간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선과 악의 구도로 집결한 마법사들의 대결은 스케일에 걸맞은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한다. 전편처럼 또 한 번 길고 긴 예고편을 본 듯한 인상도 남는다. 어째서일까? 그 중심에는 내용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형식을 고집한 각본이 있다.
<신동사>와 <해리 포터>의 결정적 차이점, 사랑
사실 <덤블도어의 비밀>의 전반적인 구조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을 상징하는 덤블도어가 한쪽에 있고, 악을 상징하는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와 볼드모트가 반대쪽에 위치한 가운데, 덤블도어의 대리인으로서 뉴트 스캐맨더와 해리 포터가 있다. 즉, 직접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는 뉴트/해리 대 그린델왈드/볼드모트이고, 덤블도어는 뉴트와 해리를 지도하는 감독인 것이다. 문제는 덤블도어-뉴트-그린델왈드가 만드는 이야기와 덤블도어-해리-볼드모트의 관계가 빚는 이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와 후자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상이하다는 점을 <덤블도어의 비밀>은 간과하고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 <해리 포터>를 살펴보자. <해리 포터> 시리즈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실제로 <해리 포터>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사랑은 가장 중요한 마법으로 묘사된다. 해리가 몇 번이고 볼드모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과 선생님, 동료,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의 힘이 컸다. 반면에 볼드모트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연인도, 친구도, 동료, 가족도 없었다. 심지어 영혼을 잘라내는 어둠의 마법인 호크룩스를 연달아 만들며 자신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정도로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해리 포터>가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기는 모습만 보여주면 됐고, 비교적 단순한 선악 구도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그런데 그린델왈드는 볼드모트와 다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이미 전편에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악인으로 묘사되었고, 1편에서도 자신을 도와주던 크레덴스가 눈앞에서 파괴되자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또 이번 영화에서 그와 덤블도어가 연인관계였던 것도 명시적으로 밝혀진다. 그러니 단순히 사랑의 유무로 선악을 나누는 과거의 방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당장 덤블도어와 뉴트는 머글과 마법사, 신비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그 자체로서 사랑한다. 하지만 그린델왈드는 머글보다는 마법사를, 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와 동물만 아낀다. 그러니 영화는 둘 중 어떤 사랑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의 고찰을 보여주어야 한다. 머글과 전쟁을 펼치려는 계획이 원래 덤블도어의 것이었다고 일갈하는 그린델왈드의 대사만 보더라도, 이 갈등과 대립이 쉽게 매듭지어질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거를 답습하는 데 그친 각본
하지만 <덤블도어의 비밀>의 시나리오는 익숙한 길을 고집한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린델왈드에게 악의 이미지를 거듭 덧씌움으로써 손쉽게 선악의 대결 구도를 만들려고 한다. 그린델왈드의 행보가 재고의 여지없는 악인인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뮌헨 폭동 이후 감옥에 갔던 히틀러는 출소 이후 본래 롤모델이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달리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지난 두 편에서 각종 테러를 저질렀지만, 사면을 받는 데 성공하고, 끝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마법 세계의 권력을 회득하려고 시도하는 그린델왈드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광기가 번뜩이던 조니 뎁의 그린델왈드와 달리, 매즈 미켈슨의 그린델왈드로부터는 속내와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영화는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크레덴스, 즉 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의 서사를 최소한의 수준만 남겨둔다. 덤블도어 가문의 사생아인 그는 가문의 오점이 될 수도 있고, 알버스 본인에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버스 덤블도어는 아우렐리우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또 일찍이 가족을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반면에 그린델왈드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아우렐리우스를 아끼며, 그가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며 가차 없이 엄벌한다. 즉, '덤블도어의 비밀'은 그 자체로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가치관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소재였지만, 과거를 답습한 시나리오에 의해 끝내 빛이 바래고 만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영화와 캐릭터
더 나아가 <덤블도어의 비밀>이 해리의 자리에 뉴트를 투입하고도 왜 뉴트여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 역시 과거를 답습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에게는 볼드모트와 싸워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또 호크룩스나 죽음의 성물 같은 다양한 마법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더욱 끈끈하게 묶인 바 있다. 해리포터와 덤블도어의 사이도 단순한 학생과 교수 관계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뉴트와 그린델왈드, 뉴트와 덤블도어의 관계는 3편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에 뉴트가 주인공으로 나서야 할 운명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뉴트가 자주 모습을 보일수록 오히려 영화가 중점으로 다루어야 할 덤블도어 가문과 크레덴스의 이야기, 그리고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관계가 설 자리는 줄어든다. 그렇다고 뉴트와 친구들의 비중을 줄이자니 그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제목이 나오기 전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가 처한 이 난국을 함축하고 있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짧은 만남은 그들이 갈등의 중심축이고, 크레덴스와 뉴트는 그 정치적 갈등에서 활용될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된 지도자를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신비한 동물, '기린'만이 필연적 관계가 없는 이들을 느슨하게 엮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그 결과 영화의 구성은 시작부터 중심을 잃고 정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캐릭터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핵심적인 주연 캐릭터들조차 애매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연들도 자신만의 매력이나 개성을 보여주기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들의 행보를 간신히 펼쳐놓고 정리하기에 급급하다. 히로인이어야 할 '티나(캐서린 워터스톤)'는 카메오나 다름없고, 퀴니나 테세우스 등은 그동안 쌓아온 매력을 상실하며, 유서프의 오락가락한 줄타기는 좀처럼 개연성을 느끼기 어렵다. 새롭게 합류한 '애버포스 덤블도어(리처드 코일)'는 활약할 만한 기회도 마땅히 않으며, 그나마 머글인 제이콥 코왈스키만이 고유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활기를 불어넣으려 고군분투한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최소한의 묘미
물론 <덤블도어의 비밀>에는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기존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큰 폭의 변화를 준 액션 연출이 대표적이다. 그간 마법사 간의 결투에서는 지팡이에서 뻗어나가는 주문끼리의 충돌 혹은 주변 사물이나 환경을 이용하는 마법을 주로 묘사해 왔다. 이번 영화는 다르다. 덤블도어와 크레덴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결투 장면처럼 액션의 형식이 육체적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지팡이와 마법의 힘을 활용하는 형태로 달라지면서 더욱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
액션을 단순한 물리적인 충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관계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장으로 활용하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서브플롯으로 인해 스토리 전개에 과부하가 걸린 듯 느껴지는 가운데, 주요 인물들의 심경 변화를 시각적으로 전달해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영화의 템포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 상의 특이점은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장점인 인물 간의 심리묘사를 잘 보여주며, 감독에 앞서 불완전한 각본이 이번 작품이 노출한 여러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방증한다.
또한 <해리 포터> 영화들이 그러했듯이, 최소한의 장르적 쾌감을 잡아내기도 한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성장 영화였고,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는 로맨틱 코미디였듯이, <덤블도어의 비밀>은 첩보물의 형식을 빌려오고 있다. 팀을 구성하고 그 팀으로서 실행에 옮기는 두 차례의 작전이 주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마법사 버전의 <미션 임파서블> 같기도 하다. 다만 그 디테일이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첫 임무에서 실패한 후 재정비된 팀이 두 번째 임무를 성공한다는 클리셰는 물론,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대사나 뉴트의 가방을 활용한 속임수 등은 그리 낯선 디테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본편에서 간략하게 등장했던 과거사들을 보다 풍성하게 채우고, 해리 포터 팬들을 마법 세계에 다시 한번 초대하는 팬 서비스를 하는데 그치는 듯 보인다. 호그와트와 마법사들의 마을인 호그스미드와 애버포스의 술집인 '호그스해드'가 주된 배경 중 하나인 가운데, 호그와트 대연회장과 필요의 방, 퀴디치, 맥고나걸 교수의 젊은 시절 모습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열성적인 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시리즈의 여러 설정이 어긋나는 아쉬움을 달랠 만한, 그리고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만 이러한 과거 답습의 대가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시리즈를 이어갈 동력을 확인시켜주거나, 독립된 작품으로서 인정받을 만한 부분은 갖추지 못했다. 특히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비해 정돈된 감은 있지만 소설에 적합한 내용을 한 시나리오에 과하게 집약시킨 듯한 단점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결국 두 번째 타석에 이어 세 번째 타석에서도 삼진 아웃당한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다음 타석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걱정을 먼저 키우며 애매하고 답답하게 시리즈를 일단락한다.
P(Poor, 형편없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자명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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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 않는 사냥꾼과 사냥감
처음 헌트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보았을 때, 1980년대를 다룬 시대극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감상 전에 스포일러나 해석을 전혀 보지 않고 이 영화를 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봤다. 칸 영화제에 초청되고 거의 모든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데뷔작이라는 점 때문에 꽤 기대를 한 상태로 영화를 봤음에도 그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 자체가 흥미롭기는 하나 지금까지 없던 독창적인 얘기라고 볼 수는 없을 텐데, 연출을 통해 더욱 긴장감 있고 새로운 느낌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배경을 전혀 모르고 봐도 센스 있게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스포일러)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배경으로 쓰기 가장 좋은 시대이기도 하면서, 아직까지도 다루기 조심스러울 수 있는 시대인 것 같다. 영화 헌트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이웅평 귀순 사건'등 실제 80년대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의 재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 속 민주주의의 암흑기이면서 경제적으로는 세계 경제의 긍정적 흐름과 3저 호황에 기반한 여유가 있었던 시기이다.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절정해 달해 수많은 아픔을 낳았기 때문에 영화 제작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 있지만, 눈치 보지 않고 까내릴 수 있는 절대 악 한 명이 있다는 점에서 편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는 타란티노의 오락 영화에서 악역을 나치로 설정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해당 시기를 다룬 한국 영화들은 '1987'. '변호인', '화려한 휴가', '26년', '박하사탕'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이 사건 자체의 참혹함을 강조해 감정적 동요를 이끌어냈으며 그 정도가 과해 오히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헌트는 1980년대를 배경 정도의 비중으로 설정해 놓고 이에 기반해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을 첩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대극들과는 다른 훌륭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이유들 때문에 이 영화는 큰 감정 소모 없이 볼 수 있는 오락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중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남산에서 왔다'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나 '우리는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는 독재를 끝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학살한 살인자를 인정하고, 조국을 등지고 살라니... 매우 모욕적이군요.'와 같은 대사들은 뻔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며, 영화 속 등장인물의 개성을 완성시키는 좋은 대사들이었다고 느껴진다. 역시 영화 속 불의에 대한 저항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놀랐던 점은 당시 남산에서 행해지던 고문들에 대한 묘사가 꽤나 직접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선생'으로 짧게 등장하는 고문기술자의 모습은 보너스.. 너무 적나라해 흥행에 실패했던 '남영동 1985' 정도는 아니지만 통닭구이와 같은 고문들이 여과 없이 등장해 이 영화가 1980년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개인적으로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아무 타격 없이 볼 수 있지만, 고문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 나와도 쉽게 쳐다볼 수가 없다.
시대극이 아닌 첩보 액션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훌륭한 점이 많다. 시대의 특징을 잘 녹여낸 등장인물들의 설정은 이 영화 속 공기를 항상 긴장감 있게 유지시켜주며, 안기부라는 조직과 공간은 이 영화를 가장 한국적인 첩보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이 영화는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국내 담당과 해외 담당 두 차장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첫 장면부터 두 차장의 갈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헌트'라는 제목처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으려 하는 사냥개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척을 하다가 어느 한 장면을 기점으로 사냥의 대상을 바꿈으로써 신선함을 주고 있다. 영화 속 반전이 드러나며 마치 영화의 장르가 바뀌는 듯한 신기한 느낌을 받았으며 지난 장면들 속의 복선이 떠올라 더욱 신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안기부의 두 차장이 알고 보니 모두 대통령의 적이라는 설정은 배우들의 연기와 등장인물의 배경 때문인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에서 설명했듯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들을 캐릭터 확립에 자연스럽게 활용해서 시나리오의 설득력을 높인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했다. 한없이 가볍게 표현했을 때 '똥줄 타는 연기 갑'인 이정재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안기부 차장이면서 북측 간첩이라는 긴장 상태를 러닝타임 내내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항상 스트레스와 경계심이 강해 보이면서도 치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신 것 같다. 정우성 배우의 연기 역시 놀라웠는데, 작중 김정도는 국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인 군인이지만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는 것에 대한 PTSD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 CIA 요원이 김정도에게 베드로 사냥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짓는 표정이나 동지를 자기 손으로 고문해야 할 때 보이는 표정은 이 영화 속 최고의 연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이정재 배우의 감독 데뷔작이라 그런지 정말 많은 스타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알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물론 장점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전이 드러나는 그 시점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았는데, 그 이후 결말까지의 전개는 초반부에 비해 좀 힘이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말을 예측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모두가 기대했던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추가적인 갈등이나 위기가 하나 더 발생했으면 결말까지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또 이 영화가 투톱 영화이기 때문인지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너무 기능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위에서 말했던 결말 부분이나 반전의 순간에 조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부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 두 가지를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영화이다.
마지막으로 결말을 보았을 때 나는 '손에 피를 묻힌 자는 이루거나 되돌아갈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도와 박평호는 결국 자신의 대의나 목적을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타인을 이용했던 인물들이다. 결말에서 두 명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결국 평화라는 것은 특정인 몇 명이 아니라 평범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과, 독재자 한 명이 죽거나 엘리트들끼리 협상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독이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적 수단과 과정을 통해 이룩한 평화만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더 길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박평호는 유정에게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물함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약간 앞당겼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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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끔한 액션의 교본, 마무리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타이머
📽️ 언젠틀 오퍼레이션 (2025)
감독: 가이 리치
출연: 헨리 카빌, 앨런 리치슨, 알렉스 페티퍼 외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 중 서부 개척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극을 말한다. 그런데 미국도 아닌 영국, 그것도 땅 위가 아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서부극의 향기가 난다면 어떨까. 서부극이 하나의 장르로 떠오른 것은 서부개척시대라는 배경 때문도 있겠지만, 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시원한 액션과 야성미, 의리와 배신이 절묘하게 섞여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틀 오퍼레이션>에서 서부극의 향기를 느꼈던 것 역시 그러한 요소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1940년대, 세계 2차 대전. 나치를 앞세운 독일은 유럽 전반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의 함락 역시 머지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미국군을 자국군에 합류시켜야 했던 영국은 하나의 비책을 낸다. 비밀 특수 부대를 보내 독일의 비밀 병기인 U 보트를 무력화시킬 것! 이 모든 일은 실제 사건에 기반하고 있다.비밀 특수 부대는 '거스 마치'를 필두로 만들어진다. 통제 불능의 미친개, 지옥에서 돌아온 근육질 군인, 냉철한 폭발물 전문가, 암살이 주특기인 미인계 특수 요원.... 뭐 하나 불필요한 캐릭터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낸다. 제목에 붙은 '언젠틀(Ungentle)'의 의미처럼 그들은 다소 무자비하지만, 시원하고 깔끔하게 표현된 액션 덕분에 크게 잔인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액션에 통쾌함을 느낄 뿐이다.실제 사건에 기반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가"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춰 보아야 한다. 작전 중에 발생한 돌발 상황이나 통제 불가한 변수들을 돌파해 나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팀워크를 확인할 수 있고, 우리는 그런 원팀을 눈으로 지켜보며 우리 역시 그들에게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제리 브룩하이머의 원팀 전략은 이미 <캐리비안의 해적>과 <탑건>을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관객은 점차 그들에게 동화되다가, 어느 순간 그들과 하나됨을 경험한다. 화면 안과 밖을 유대감으로 단단히 연결해 관객을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연출로 오감을 즐겁게 하면 관객은 만족하며 극장을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제리 브룩하이머의 전략에 <알라딘>, <셜록 홈즈>를 만든 가이 리치 감독의 깔끔한 연출이 붙어 탄생한 영화가 바로 <언젠틀 오퍼레이션>이다.세계 최초의 블랙 미션, 역사를 뒤집은 녀석들이 보고싶다면 바로 이곳이다.*해당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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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이 캔 스피크>
* 이 영화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한 감상을 원하시는 분은 처음 두 단락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영화를 감상하신 후에 다시 보러 와주시기 바랍니다.
간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아주 잘 차린 가정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너무 맵거나 짜지도 않고, 적당히 감칠맛이 도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맛있고 자꾸만 생각나는. 그리고 건강하고 배부른 한 끼 식사.
성급한 일반화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영화를 보고나서 이토록 개운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서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한국민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극적이지도, 신파적이지도 않게 완급을 잘 조절했다. 사건의 진행은 나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인물들 간의 관계도 촘촘한 편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숨어 있는 위트들은 어떤 사람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래서 편하다.
아래에서는 영화 전반에 관한 간단한(혹은 두서없는) 감상을 다룰 것이다.
1. 인간적인 원칙주의자들의 만남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의 양 끝단에 서 있다. 나옥분(나문희 분)은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구청 직원들과 시장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극성스러운 민원인이며, 유민재(이제훈 분)는 그런 옥분을 상대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류부터 제출하시라'는 말을 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상대에게 당당하게 그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원칙주의적인 직원이다.
이런 원칙주의자들은 사실 적이 많다. 사람들은 원칙에 벗어나길 좋아하니까. 옥분에게는 시장과 구청 사람들이 그렇고, 민재에게는 그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렇다. 그들이 겪는 갈등은 원칙을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피해 가려는 자의 대립에서 피어나게 된다. 카메라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먼저 조명한다.
언뜻 보기에 옥분과 민재, 이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도 보인다. 옥분은 할 일 없어 허구한 날 구청을 찾아와 민원이나 넣는 극성스러운 할매고, 민재는 토익 950점에, 업무처리까지 탁월해 구청장에게까지 인정받는 능력있는 인재다. 그런 민재는 정도도 모르고 구청 직원들을 성가시게 하는 옥분이 못마땅하다. 더군다나 뜬금없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억척스럽게 달라 붙으니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주의자들은 오히려 합이 잘 맞기 마련이다. 사실 상 두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칙주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옥분의 원칙주의는 그녀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감에 기인한다. 무척 깐깐하고 무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설령 그것이 오지랖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그녀는 그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불의와 불합리함들이 사람을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를 그녀는 이미 겪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마냥 밉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녀의 사정에 있다. 그녀의 결핍, 그러니까 가정의 부재와 아픈 과거로 인한 상처는 도리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민재의 원칙주의는 다소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인다. 옥분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일부러 어려운 단어들을 숙제로 내주고 외워오라고 하거나, 건물 재건축(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과 관련된 일로 구청장에게 편법을 제안하는 것은 얄밉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타고난 본성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동생을 홀로 부양해야 하는 그의 사정과도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부모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는 좀 더 단단해지고, 좀 더 능청스럽게 그의 삶을 살아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옥분의 등장은 그를 난감하게 한다.
결국 두 사람의 원칙주의는 그 성질이 다소 달라보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두 사람은 인간적이다. 이러한 원칙주의와 인간미는 두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게 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서 닮은 점을 찾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두 주인공들의 만남을 애정 어린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돕는다.
2. 나는 말하고 싶다!
민재와 옥분의 기나긴 실랑이는 민재가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끝이 난다. 민재는 온갖 재치있는 교수법을 동원해 그녀를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열정적인 학생인 옥분은 그를 통해 아주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훌륭한 한 사람의 영어 화자로 거듭난다.
이러한 모습은 언뜻 많은 영화에서 그려온 멘토와 멘티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재능은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못한 제자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의 꿈을 이룬다는 플롯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말하자면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좀 더 특별한 것은, 단순히 영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이 옥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영어는 말하자면 수단이다. 그녀에게는 많은 동기가 있다. 영어를 할 수 있어야 먼 타지에서 떨어져 사는 그녀의 남동생과 소통할 수 있고, 세계에 그녀와 그녀의 벗들이 겪었던 억울한 사연을 알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 절실했고, 더 열정적이다. 민재가 한 일은, 그런 그녀를 살짝 보조(Nudge)해준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재는 아주 좋은 교사다. 그는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파악해 가르쳐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노래를 통해 가사를 외우는 것은 꽤 구시대적인 교수학습법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효과적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옥분이 먼저 찾았던 학원 강사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러나 강사의 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반에는 너무 많은 학생이 있었고, 따라서 학생 개인에게 관심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바람직한 방법은 학원에서 그녀를 위한 특별반을 마련해주는 것일 텐데, 학원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므로 그다지 끌리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어 과외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사실 전문 과외 선생도 아닌 민재를 영어 과외 선생으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좀 넌센스이기는 하지만 영화적인 장치로 이해해 보자.
사족 같이 덧붙이자면, 사실 그녀는 이미 상당한 영어 실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영어학원에서 민재와 원어민 화자가 대화하는 것을 얼추 이해할만큼 능력이 좋다. 영어를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각종 민원을 꼼꼼하게 지적해 제출할 정도로 법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이다. 그녀는 단순히 노력만 열심히 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영민하고 또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녀의 잘못을 잘 시인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안다. 이는 좋은 학습자의 자세이며, 그녀가 끊임 없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을 시사해준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녀가 만약 그녀의 아픈 과거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그녀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충분히 멋있기 때문에, 너무 아파하지만은 않을 수 있었다.
3. 사건이 아닌, 인간 나옥분
이 영화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녀를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건'의 대상이 아닌, 그러한 아픈 과거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내도 아니다.
물론 이는 그녀의 아픈 관거에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은 오히려 그녀를 누군가의 보조자가 아닌, 그녀의 삶의 당당한 주체로서 바라보게끔 한다. 그녀는 매일 같이 구청을 찾아 또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영웅이자, 정심과 진주댁에게는 소중한 벗이, 그리고 민재와 그의 동생에게는 의지를 하면서도 또 의지가 되는 사랑스러운 이웃이자,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준다. 비록 그녀는 일제에 의해 그녀의 삶의 일부를 강제로 빼앗긴 적이 있었지만, 그래서 남들은 다하는 시집도 가지 못하고 속을 앓으며, 죄인처럼 스스로를 숨기면서 살아가야 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의 의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해 나가며 살아간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조심스럽게 쫒아간다. 관객은 우선 한 사람의 인간인 나옥분을 조명하고, 그녀의 삶을 하나씩 나열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강압적이지 않게, 개연성있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픔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을 무대의 전면으로 내보내면서 소위 '위안 부 피해자'의 문제가 단순히 우리와 동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내밀한 이웃에게 벌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겪는 아픔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3. 우리에게는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웃들이 있다.
옥분이 스스로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신문을 통해 알렸을 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녀를 쉬쉬하고 그녀의 아픈 과거를 덮으려고만 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그 시대의 옛날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좀 뻣뻣하고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애정어린 방식으로 그녀의 아픔에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그녀를 돕고자 애쓴다. 그녀를 끌어 안는 진주댁과 민재의 모습, 그리고 몰래 문틈에 돈봉투와 편지를 끼워 넣고선 먼 발치에서 허리 굽혀 이사하는 족발집 처녀, 그리고 증언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많은 선물을 챙겨주는 다른 시장 주민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이웃들의 모습은 그녀가 위안부 증언대에 서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금 나타난다. 민재를 중심으로 하여 구청 직원들과 주민들로부터 시작된 탄원서는 국민적인 관심을 이끌어 그녀가 그녀의 말을 할 수 있게끔 돕는다. 이러한 전개는 영화 '마션'에서 보았던 것과 또 조금 다른, 한국적인 인간미가 우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쾌감을 안겨준다.
인생은 때론 고달프고, 때론 원망스러울 정도로 야박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를 돕고자 하는 인간애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것을 조명한다. 다소 식상한 전개임에도 이것이 싫지 않은 이유다.
4. 사이다 썰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해피엔딩
결국 옥분은 친구인 정심의 소원을 위해,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미국으로 가 위안부 피해자 사건이 실존함을 세계에 알린다. 그녀의 증언은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이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무조건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조목조목, 그녀의 억울함을 논리적으로 토로한다. 그녀가 한 사람의 증언자로 나섬으로써, 그녀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원칙주의적 면모의 사연을 이해하게 되고, 그녀는 그녀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으로서 거듭난다. 그리고 그녀의 아픔으로만 남았던 사건은 세상에 공식적인 범죄로서 공표된다.
건물 상가를 철거하려던 건물주와 시장 주민들(사실 주민'들'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나서서 해결하고자 했던 인물은 여태 옥분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만이 유일한 민원인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영화 표면상에 나타난 것은 그렇다.)의 갈등은 민재의 중재를 통해 잠정적으로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시원스러운 '사이다 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선조들이 벌인 만행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것으로 머문다. 또, 건물 철거 건도 사실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영화는 건물주가 그의 고집을 철회하겠다 하는 장면 같은 것은 집어 넣지 않았다. 다만 유예될 뿐이다.
이렇듯 영화를 이끌어 가던 두 가지 큰 사건은 사실 상 명확하게 끝맺음 지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장실을 갔다가 볼 일을 시원스레 마무리하지 못한 듯한 찝찝함은 남아 있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옥분과 민재라는 인물이 이러한 사건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설령 그것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불의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사실, 이 두 가지 큰 사건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의 자잘한 사건들은 꽤 순조롭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옥분과 구청 직원들, 시장 사람들과의 갈등, 그리고 민재와 민재 동생의 갈등은 사그러들었고, 옥분은 또 다른 증언을 준비하고 있으며, 민재는 준비 중이던 7급 공무원이 된다. 희망적이다.
5. 좋은 배우들, 좋은 연출. 삼시 세끼 먹어도 좋은 영화이제훈과 나문희의 조합, 정말 좋다. 나문희는 우리네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고, 이제훈은 그런 그녀의 훌륭한 보조자이자, 그 개인의 이야기에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리고 개선해나갈 줄 아는 입체적인 인물로 잘 소화해냈다.
연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언급했으므로 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눈물짓게 되는 장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는 불쾌하지 않다.(불쾌한 신파의 한 예로, '7번방의 선물'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관객의 눈물을 쥐어 짠다.) 억울해서 마지못해 짜내는 종류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 그리고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다. 좋은 눈물이다. 필자는 영화관에서 우는 것을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영화라면, 충분히 울 가치가 있다.
이 영화는 여러 사건을 차근차근 놓아서 하나의 큰 사건으로 끌고 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은 지루하지 않다. 뒷 이야기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다. 물론 옥분과 민재의 만남을 위한 장치들(가령 민재의 동생과 영어 학원에서의 만남)나, 옥분을 둘러싼 사건들이 희망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 정도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줄만 하다. 중간 중간에 담긴 위트는 재치있다. 재미있는 영화가 되기 위해서 차별과 혐오를 담아야 한다는 것은 괴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몸소 증명해준다.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다. 만약 건강한 영화의 교과서가 필요하다면, 나는 자신 있게 이 영화를 추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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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노동에 영화라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어서
※영화 〈내일의 기억〉, 〈더 파더〉, 〈노매드랜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라고. 하지만 달리 보자면 또 그만큼 즐거운 외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플랫폼에 적을 둔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알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생각만 쌓아 둔 채 글쓰기를 제쳐두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외로운 노동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뭐라고 한 적 없어도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는 거라면, 분명 나는 그 즐겁고도 외로운 감정이 그리웠던 것이다. 본 영화는 늘어만 가고 쓰고 싶은 글은 산더미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이 코앞으로 다가온지라 마음만 급하다. 이건 그간 봤던 영화들을 짧게 정리한, 말하자면 습작이나 초고와 비슷한 글이다. 아마 여기서 곧 발전할 글들이 생기리라 확신한다.
1. 내일의 기억 Recalled | 2021 | 서유민 | 99분
기시감, 흔히 ‘데자뷔 Déjà Vu’ 로 불리는 이 현상은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을 마치 이전에 봤다고 느끼는 착각을 말한다. 처음 온 장소가 과거에 와 본 것처럼 익숙하고 방금 한 행동이 예전의 기억과 어렴풋이 일치하는 순간은 누구의 일상이든 찾아온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든 큰 사고를 당해 이제야 의식을 찾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누구든 그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수진이 단란한 가정에서 겪는 기이한 데자뷔로부터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관객을 집중시키는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과 조각난 기억을 함께 맞춰가는 추리의 맛이랄까. 이미 여러 영화에서 써먹은 소재와 구상에도 이 정도 재미를 뽑아내는 감독의 역량은 눈길을 끈다.
그런데도 플롯을 영화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기분을 받는다. 실마리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무의식의 깊이를 구현한 수직적 이미지가 툭툭 끊기는 영화의 편집을 만난다면 관객은 수진과 함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모든 감독은 비장한 각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구현한다. 물론 그게 영화의 만듦새와 함께 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한국적 신파’에 치가 떨린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간의 경험에 크게 덴 나머지 나름의 인장으로 넘길 수 있는 장면도 과민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말의 신파적 요소가 굳이 거슬린다면 〈해운대〉의 신파를 되새겨보며 이 정도면 영화적 기능으로 인정해 줬으면 한다. 만약 누군가가 등장 배우의 논란으로 영화도 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비판을 하고 싶다면 성인 수준의 상식에 미치지 못한 판단으로 드라마 전체를 망가뜨린 인물과, 이를 덮을 만큼 가십과 의혹만으로도 매장의 위기를 받는 인물 중 누가 현재의 가시적 해악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해 보자.
2. 더 파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러 | 97분
〈리어왕〉에서는 권력의 소용돌이에 비극적 선택의 첨병이 된 아버지로, 〈두 교황〉에서는 종교적 상징이자 시대와 평화의 ‘아버지’로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고 토론하며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를 깨닫는 인물이 된다. 심지어 〈토르〉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기원이자 두 슈퍼히어로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더 파더〉만큼 노골적으로 현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이란 어쩌면 심심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탄탄한 각본을 여전히 놀라운 연기로 끌어가는 80대의 배우가 보여주는 진가는 그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조금씩 드러나도록 완급조절을 한다는 사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의 눈에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의 왜곡과 변주는 원작인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지점이다. 내 눈앞의 무엇인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가 알던 세계가 의심받는 상황만큼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없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안타까운 진실에 이해하려 애쓰는 안소니의 모습은 숙연하며 시종일관 놀랍다. 극적인 감정의 파고를 홀로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의 제목이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이유는, 그를 지켜보는 딸 ‘앤’이 바라보는 시선이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의 연기 또한 눈을 뗄 수 없다. 어떤 감정이든 금세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은 미묘한 표정과 눈빛이 대답해주고 있다. 결국 모두의 삶을 위해 내리는 어떤 선택의 장면에 보이는 처연함과 머뭇거림, 슬픔과 확신이 뒤섞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뇌와 우주는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와 패턴을 보여준다고 한다. 달리 ‘소우주’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우주 宇宙라는 단어에는 ‘집’이 두 번이나 들어간다. 영화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인 안소니의 집은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집과 실제 물리적 공간인 집이 교차하고 어긋나며 공포와 혼란을 극대화한다. 뇌라는 우주가 사라지는 동안 나를 지탱하고 보호했던 집 역시 희미해져만 간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막막함이란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안소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불가역적 소멸의 정서와 조응한다.
3. 노매드랜드 Nomadland | 2020 | 클로이 자오 | 108분
올해 보았던 영화 중 최고를 꼽자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집과 일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펀’은 밴 하나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유랑한다. 동명의 원작이 사회 현상을 포착하고 기록한 르포라면 영화는 책에 담긴 여러 인물을 펀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입해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헤쳐가는 유목민들,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과 삶, 영화의 근원에 관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클로이 자오 감독은 집을 소거한 삶의 공백에 우리가 놓거나 놓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 대답한다. 제작에 참여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직접 출연한 영화 속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인물의 고독과 치열한 생의 모습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연기한다. 사회 영화를 연상시키는 끊임없는 노동의 이미지는 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해답을 바라는 구도자의 순례는 결국 출발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지금은 다르다. 기억으로 가득 찬 집과 사막을 뒤로한 채 다시 떠나는 밴의 뒷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엔딩이다.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연출과 실제를 넘나드는 영화의 연출은 가상 인물인 펀에게도 유효하다. 사실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영화의 절반까지는 ‘펀’보다는 프란시스 자신처럼 보인다. 유목민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는 펀의 모습은 영화의 인물이 아닌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도 보인다. 그래서 〈노매드랜드〉는 중반까지는 미국의 사회 현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후 펀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서사로 채워진다. 펀과 맥도먼드라는 두 인물이라는 정체성이 동화되고 중첩되는 과정은 영화라는 예술이 왜 인간에게 유효한가를 잘 드러낸다.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며 결국 커다란 서사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곧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흔히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라고 불린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단단한 금속에 몸을 실은 유약한 인간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쉼 없이 움직이며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다. 유목민은 미국이 어떻게 건국하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그 정당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거창한 의미 안에는 피와 눈물로 맺힌 비운의 삶이 녹아있다. 노매드 nomad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 transfer 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이는 곧 밀려난 이들의 피난처 shelter를 전제한다. 필그림과 아메리카 선주민, 개척시대에 희망을 찾아온 이들, 그리고 부동산과 경제위기가 몰아낸 차 안의 노매드들. 상징으로 추앙받는 한가한 말들에는 나라는 존재가 부유하는 미국인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들은 여전히 떠돌아다니며 외면받는 존재이지만 바퀴 자국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궤적을 남긴다. 영화 속 미국이라는 땅에 잠든 오랜 역사가 새겨진 돌과 화석은 그래서 노매드를 닮았다. 단단한 돌에 새겨진 바람구멍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연약한 인간의 발자취,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단하게 남아 있는 미국의 수많은 자동차에 담긴 인간의 삶과 기억을 나타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은 더는 그 자리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빌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한 화석처럼 영원히 살아남아 흔적을 남기고 말 것이다.
4.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Judas and the Black Messiah | 2021 | 샤카 킹 | 126분
흑인 민권 운동사에 빠질 수 없는 1968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서거로 혼란스러웠던 미국에는 극좌파 민권 운동단체 ‘흑표당’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당의 두 창립자 휴이 뉴턴과 바비 실은 각자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압적인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흑인 민권 지도자의 잇따른 부재로 구심점을 잃기를 바랐던 미국 정부와는 달리 위대한 혁명가는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끌었던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대중을 선동하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FBI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규정, 그를 감시하기 위해 비밀 정보원을 투입한다. 차량 절도와 FBI 사칭으로 구속 위기에 놓인 윌리엄 오닐에게 이 은밀한 제안은 거부할 수 없었다. 흑표당에 들어간 오닐은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점차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헴프턴에 동화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오로지 민중을 위한 혁명을 외친 ‘블랙 메시아’와 그를 감시한 ‘유다’의 삶으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미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BLM 운동과 트럼피즘의 후폭풍,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입지가 좁아 든 작금의 시기에 영화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혁명과 변혁, 진보의 길에 둘러친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영화는 ‘유다’의 시선으로 ‘메시아’를 들여다본다.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에 ‘유다’ 윌의 배신이란 너무도 평범한 시민이 사회와 상황 앞에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움직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오닐 역의 ‘라키스 스탠필드’는 고뇌와 갈등 앞에 선 불안한 심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오닐의 피폐한 모습은 인간성과 도덕을 상실한 파시즘의 권력에 신념을 강요받는 무력한 인간을 묘사한다.
공포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생리에 헴프턴은 단호히 부정한다. 직설적이지만 정확히 핵심과 구조를 꿰뚫는 화술을 지닌 그는 권력이라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 연대와 사랑을 내세운다. 뛰어난 선동가이자 정치가인 그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배포로 무지개 연합을 만들어 세력을 규합한다. 맹방기가 걸린 백인 빈민 교회에 당당히 들어가 고통의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설득해 당당히 남부의 깃발 앞 연단에서 백인들을 설득시키는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현대 정치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인물을 연기하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다니엘 칼루야’는 그의 삶을 되새기며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연설 장면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카메라의 시선을 이겨내는 칼루야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이념의 특성상 여성의 권익에 적극적이었던 흑표당과 국가의 대립에 한 축을 담당하는 뛰어난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헴프턴의 연인이자 운동가인 데보라 존슨은 그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적한다. 인간적이면서 강인한 여성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마지막 장면에 잡히는 그의 감정은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헴프턴의 동료 주디 하몬은 영화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진보적인 조직의 면모를 보이며 신념 앞에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소화한 ‘도미니크 손’의 커리어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영웅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배신과 선택은 범죄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면서도 탁월한 정치 영화로서 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특히 소수자를 결합하는 연대의 유산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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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러드 비스트> 예고편
붉은 보름달이 뜨는 특별한 저녁,
새로운 공포 게임 앱 "Werewolves Awaken"의 화려한 런칭 파티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천재적인 젊은 개발자 어거스트는 회사에서 떠밀리다시피 파티에 참석한 상황.
게임을 "야수의 표식"으로 비난하는 로만 신부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어수선해지고,
더구나 잔인하게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면서 파티는 아수라장이 된다.
마침내 살인자는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생존자들과의 처절한 살인게임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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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티저 예고편
[2021년 7월 16일, 티빙 공개]
대가가 담긴 소원을 파는 마녀식당에서 마녀 희라(송지효)와 동업자 진(남지현), 알바 길용(채종협)이 사연 가득한 손님들과 만들어가는 소울 충전 잔혹 판타지